2024-10-28

[이영훈의 역사비평] 김대중의 정체


[이영훈의 역사비평] 김대중의 정체
Nov 24,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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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음악]
사실과 자유의 가치를 추구하는 이승만 TV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아침
저녁으로 추워지기 시작하는 초겨울의 계절입니다 여사이 저는 한국 현대사
정리와 관련해서 김대중 전 대통령에 관한 책을 읽고 있습니다 그가 직접 쓴
그의 자서전은 물론 그가 쓴 글과 그가 행한 연설문을 모은 후광 김대중
대전집 그리고 그의 관에서 여러 사람이 쓴 수많은 전기류 등을 읽고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김대중 전 대통령만큼이 나라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도 없을 겁니다 김대중은 그가
1961년 제 5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일래 또는 야당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1971년부터 그가이 나라의 제
155대 대통령으로 임기를 마친 2003년까지 무려 3 40년간
이나라 정치의 주요 인물로 나아가 핵심 인물로 역할하고 활동을
하였습니다 이성만 대통령의 시대가 1948년부터 1960년까지 12년
간이라 그은 박정희 대통령의 시대가 1961년부터 1979년까지 18년 간이라 꼭
들어맞는 비교는 아닙니다마는 김대중 대통령은 그보다 훨씬 긴 3 40년간
국회원 야당의 대통령 후보로서 제야 또는 망명 민주와 운동가로서 나가
현직 대통령으로서 이나라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제가 요사에 읽고
있는 책들의 내용은 대부분 잘 알려져 온 것이지만 다시 읽으면 과연 그를
했던가 의심스럽기도 하면서 과연 그렇 했구나 하면서 놀라기도 하는 그런
것들도 많이 있습니다 제가 최근에 읽은 책으로서
오늘 시청자 여러분에게 개 해드리고 싶은 것은 2006년에 조갑제
닷컴에서 출간한 조갑지 추적보고 김대중의
정책 한국 현대사의 검은 그림자라는 책입니다 지금 화면에서 보고 있는 그
책인데요 저는이 책을 두 번째 읽습니다 다 읽고선 조갑제 선생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2006년이이면 아직 김대중 대통령이 생존에 있을 때입니다
저는 책을 출한 뒤에 김대중으로부터 어떠한 문제 제기가
없었는지라 조갑제 선생에게 물었습니다 그에 대해 조합제 선생은 어떠한
반응도 없었다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책의 제목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나
있습니다만은 조갑제 선생은 김대중을 한국 현대사의 검은
그림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현대사에 드리웠던 암의 세력 또는
그냥 두은 우 미래가 어둡게 될 불길한 세력으로 해석되는 표현입니다이
같은 극단적인 표현으로 이루어진 비판에 대해 김대중 대통령이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마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책의 내용이 사실 그대로여서 다시 말해서 매우 치밀한 실정 토대를
갖추고 있어서 반박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라고 해석입니다 둘째는 굳이 반박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김대중이 오랜 세월 사 올린 민주화 운동 내지 통일 운동의
지도자로서의 권위는 나가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서 명예는 너무나 굳건하다는
해석입니다 다시 말해서 김대중에 대한 조자의 비판은 김대중의 입장에서는
굳이 반론을 해야 할만큼 그렇게 중요하지 않거나 매우 했다는 겁니다
의인은 그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초월하는 절대적인 수준이라는 겁니다
저는 어이 두 가지 해석이 다 옳지 않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은
이건 대단히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권위와
명예가 불가침의 영역으로 확고하다면 동시에 그만큼 한국 현대사에 드리운
검은 그림자로서 그의 정체 역시 반할 수 사실이 아닌가 그것은 이미 우리
한국인이 좀처럼 헤어나기 힘든 사나운 더체 걸려 있는 현실을 의미하거나
있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제가 김대중의
정체라는 책에서 인상깊게 확인한 사실은 1973년 김대중이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망명 정치가로서 미국과 일본
한국 민주회복 통일 촉진 국민회의 줄여서이
한민통이라는이 반국가 단체를 결성했으며 그 과정에서 일본의 어느
호텔에서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건내준 20만 달러의 자금을 수령했다
사실입니다 이나라의 사법부는 김대중이 일본에서 주도적으로 결성한 한민 통에
대해 그것을 반국가 단체로 판결하였습니다 1980년 광주 사태와 관련하여
김대중은 내란 음모죄 사형을 선고받은 적이 있는데 그때이 나라의 법원은
한민통 반국가 단체로 규정하였습니다 이후 김대중은 무기징역으로 감행되고
석방되었습니다 광주 사태가 그의 내란 업무라는 혐의는 근거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어 무죄 선고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렇지만 김대중이 한민 통일한 방북과
를 결성한 사실에 대한 유죄 판결 만큼은 번복되지 않았습니다 이후
1987년 이가요 김대중의 정치적 권리는 한문 복권에 혜택을
받았습니다만이 부분에 대한 유죄 판단이 취소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민통 지금도 우리 정부에 의해 우리
사법부는 그것을 반국가 단체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김대중이 주도적으로 결성한 한민 통에는 북한의 사주를 받은 북한에
들어가 간첩 일본 교육을 받기도 하는 일본에서 활동하는 운동가들이
참가했으며 그들은 한민 통을 통해 우리 정부를 전복하려 했습니다
김대중은 그러한 반국가 단체를 결성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인데
그럼에도 그는 이후이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선출되었습니다 저는 이번에이 사실을
조합제 선생의 책을 통해서 비로소 확인하게 되었는데요 따지고 보면은 대단한 충격이 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망명 시절에 김대중이 미국이나 일본에서 행한 여러
연설이나 언론과의 인터뷰는 당시 그가 한국의 역사와 현시를 어떻게 이해하고
평가했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1973년 뉴욕 타임즈에 보도된
인터뷰에서 김대중은 한국은 자유도 빵도 없 반해 북한은 비록 자유는
없다고 하나 빵이 보장된다고 했습니다 또는 워싱턴 주립대학에서 행한
강연에서 김대중은 북한을 두고 래래 하는데 무슨 놈의냐 북한은 공산당으로
안정되어 있으나 남아는 민주 체제도 안정되지 못하고 오히려 혼란과 불안
민생고 극심할 뿐이다 김일성이 주체성을 확립한 것은 잘한 일 아니냐
반면 박정희 정권은 말기 현상 처에 있어서 2 3년 내로 붕괴한다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뭐 저는이 같은 사실을 어 이번에 김대중 정치라는 책에서
읽을 수가 있었습니다 1973년 당시이 나라는 1963년 일에 영간
평균 88% 고도 성장을 구가하면서 이미 절대빈곤의 보리 곡에는 탈피한 가운데
중화학공업화 사대강 위역 개벌 산림녹화 새마을 운동을 활발이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전국토가 거대한 공사장으로 변하고 있었고 많은 국민이
그에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유신체제가 국민의 정치적 자유를 일부
제약하고 있기도 했습니다만 헌법이 규정하는 자유 채권들은 출판 사상
학문 그런 것에 근본적인 손상은 없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북한과는
엄연이 다른 체제에 살고 있는 그러한 국민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은이 나라의 자유도 없고 빵도 없는 반면에 북한에는 빵은 있다
그래서 김일성이 주체성을 확립한 것은 잘한 일이다라는 연설을 한 것은 현실의
실태와 너무 동떨어져 있어서 되돌아보면 그 시대 착오가 그야말로
놀라운 수준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실 이해가 그러 했으므로 그가 민족의 수원인 통일을 위해서는
연방제를 만들 며 북한이 종부터 주장해온 남북 평화 공정과 교류
그리고 민족 화회 주장 등은 나의 통일관과 일맥 상통하는 점이 있다라고
주장한 것은 책에서 그렇게 인용되어 있습니다마는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고 어떻게 보면은 자연스럽기 아지 한 일이었다고 이야기할 수가
있겠습니다 조합적 생은 이같은 김대중의 현실인식 북한관 방안은 그가
젊은 시절에 일시 몸담았던이 자역 활동의 경험과 밀주방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자액 활동으로 취득한 역사와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이해는 이후 어행 기간 김대중의 내면으로 정서화
하였다는 것입니다 김대중 자신도 뭐 시인한 바입니다 만는 해방 후 나이
20대 초반에 그는 1946년 2월입니다 공산주의자 백남문 당수로
하는 조선 신민당에 가입하여서 동 신민당 목포지부 조직 부장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자익 세력의 통일 전선인 곧 조선공산당
조선 인민당 조선 신민당 등이 좌익 세력이 이승만과 김구의 우익 세력이
결성한 민주 의원과 대항하기 위해서 결성한 민주주의 민족 전선에
가입합니다 조 성생 책에서는 나오지 않습니다만이 민주주의 민족 전선이
북한에 올라가서 편집 출간한 해방 조선이라는 책이 있습니다이 책은
1988년 남아도 출판되었습니다이 보여 드리는 화면이 그것인데요 그
책을 보면은 1946년 2월 15일 16일 양일간 서울 기독교 청년
회관에서 열린 민주주의 민족 전선의 결성 대회에서 김대중은
319명이 중앙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그 이름을 올렸습니다 여기서
중앙 위원이란 것은 뭐 서울지역을 대표하는 위원이다 그런
뜻이겠다 2개월 앞서 1945년 12월에 전국 청년 단체 총 연명이
결성되었습니다 전국 13도 218개 군에
267개 세포 단체에 회원 72만 3 1300명을 포괄한 당시 성립 회
있는 여운형과 박헌영의 조선 인민공화국을 절대 지지하는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 건설을 위해 일제 잔재와 봉건적 요소를 제거하고 반동
세력의 절찬 숙청을 강령으로 내은 조선공산당 박한정
조선공산당의 사실상 전의 부대라 할 수 있는 그와 같은 청년 단체입니다
김남식이라 사람이 지은 남노당 연구를 라는 책이 있습니다 보여드린 화면이
세권으로 이준 그의 책에 하나인데요 그에 하면은 1945년 12월 13일
서울 천도교 회관에서 열린 동 대회는 서울을 대표하는 중앙위원 각도의
대표위원 그리고 감사위원을 선발하였습니다 감사위원은 아홉명이 있는데요 바로 그 감사위원 가운데
김대중이 포함되었습니다 이어 보데 해방이 되자 대중은이 곧바로
서울로 올라와서 자유 활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그 결과 자유의 전국
조직인 민주주의 민족 전선이나 전국 청년단체 총 여명의 중앙 위원이나
감사위원으로 이름을 올렸던 것입니다 그리고은 곧이어 성립하는 백남문 조선
신민당에 가입하여 먹포 지부 저직 부장으로 활동하였던 것이죠 당시이
민주주의 민족 전선의 중앙 위원들의 면면을 보면은 이강국 등이 나이
40대에 쟁쟁한이 공산주의자들 있니다 그 명부 그 서울에서 선발된 중앙위원
명부의 말단에 김대중이 포함되었으면 당시 그의 활동 무대가
서울이었다 세력 지도로부터 인정을 받았던 것이 아닌가 그렇게 저는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민주주의 민족 전선을 대표하는 이간
국과 같은 진성애 공산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김대중은 진성애
공산주의자로서 그의 사상과 정신을 정립할 수 있는 학문과 수련의 기회를
갖지 못하였습니다 1944년 나이 20세에 목포 상업 고등학교를 졸업한
김대중은 일본인이 경영하는 목포 상선이 해운회사의 취직에 있다가
해방을 맞았을뿐입니다 다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만 그의 어머니는 당시 섬
지방에서이 빈천한 계층의 여인들이 보통 그러했듯이 김대중을 어느 유족한
김 시가의 서자로
양육하였거늘 오로지 자기 중심의 성격으로서 그
스스로 고백했듯이 일찍부터 정치적 출세의 강한 야망을 품었습니다
그러했기 때문에 해방 후 곧바로 서울로 올라와서 자익 세력의 전국
단체에 서울을 대표하는 위원이나 또는 감사위원으로 어 이름을 올렸던 것인데
그것은 당시 자익 세력이
우익보수 있는 좋은 경로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이유에서
1946년 2월 신민당 목포 지구 조직 부장으로서 목포로 내려온
김대중은 한동안 신민당 또는 민전의 활동에 매우 적극적이었습니다 뭐
그렇게 증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1946년 가을에 자익 세력이 감행한
시월 폭동에 참가하지는 않았습니다 시월 폭동은이 조선공산당 산화 단체
할 수 있는 앞서 소개한 전국 청년 단체 총 영매 뭐 줄여서 청입니다
마는이 청이 주도세력으로 어 일으킨 것입니다 목포도 청이 공개해서
경찰서와 우익 인사를 공격했습니다 김대중은 청의 감사위원으로 이름을
올린 그러 처지임에도이 폭에는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폭동 세력이
검거되고 처벌될 때 김대중도 한때 체포되기 했습니다만이 알리바이가 정 되어서
석방되었습니다 연후에 그는 장인인 모시의 적극적인 권유로 우익 세력의
한민당의 가입하여 한민당 목포 지구 상무위원으로 활동을 하였습니다이 역시
그가 아 진성의 공산주의 자자는 아니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김대의
한민당 가입은 1947년 일회 조선 공산당이 지하로 잠적하고 그 세력이
현재의 약화하면서 우익세력의 우 가 두드러지자 그의
민첩하게 적응하는 그의 기회주의적 처신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625 전쟁 초기에 이른바 보도연맹 사건이라 해서 좌익
세력의 인물들이 군경에 의해 대거 처형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김대중도 그의 자해 경력으로 인해 보도 연명의 관계된 인물로 분류되
겁니다 그럼에도 그가 어떻게을 는지는 뭐 그에 관한 그의
친구가 전하는 이야기가 있긴 합니다만 김대중은 그에 대해서 침묵합니다
그대신 김대중은 자신은 한민당 소속의 우익이 있기 때문에 목포를 점령한
북한 인민군에 의해 체포 구금되어 처형될 위기에 처했다가 간신이
모면했다고 해고 했습니다마는 과연 그대로 였는지 그렇 했는지는 그대로
믿기는 힘들다고 저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좌익
출신으로서 맞을 수밖에 없는 위기의 고비 고비를 김대중은 요령 있게
넘겼으며 그리고선 1961년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능력을 발휘했던
것입니다 어쨌든 조갑제 선생이 지적하고 있듯이 그가 해방 후 약 1년간 적극적으로 참여한 좌익 활동은
그의 현실 인식과 역사관을 규정하는 힘으로 이후에도 길
작용하였습니다 그는 진성의 공산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진정한 의미의 자유주의자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유의 이념과 역사를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내면화하는 지적 훈련과 성숙의 과정을 하였습니다 그는 평생에 걸쳐
누구보다도 부지런한 독서로 방대한 양의 지식을 습득하고
시에 따라 좌우를 들면서 그의 지식을 화려하게 펼쳐
보였습니다 그렇지만은 조합제 선생의 표현입니다만 모든 독학자 그러하듯이 그의 지성과
지식은 엉성한 짜임 새로서 전후 맥락에서 수많은 빈틈과 어긋남을
특징으로 하였습니다 1971년 야하당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김대중은 대중 경제와 대중 민주주의를 주장하였습니다 그것은 당시 박정희
정부 가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던 대기업 주도의 수출 지향 공업화에
대한 거센 도전이었습니다 김대중은 대기업이 주도하는 수출 주도 공업화를
부패한 정치 권력과 대기업이 연합하여 대외 종속의 파행적 경제구조를
만들어내는 반 대중적이며 반민주적인 정책으로서 그 파탄이 조만간
불가피하다고 공격했습니다 그 대안으로서 그는 부패한 근력과 기업이
은닉하고 있는 유효 자본을 찾아낸 다음 국내 시장의 기초에서 중소기업이
주도하는 점진적이고 조화로운 대중 경제와 그리고 노동자의 그 경영
창가를 골자로 하는 대중 민주주의를 주장하였습니다이 같은 그의 주장은
1971년 당시까지이 땅에 살아남아 있는이 원
공산주의자 자익 활동가로서 막 이런 바 진 세력이 주장하는 그러한 그
경제 개발론 뭐 이런 바 민족 경제론 사실상 동일한 내용이었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해 김대중의 대중 경제론 대중 민주로 그들에 의해 정리되고
집필되었다 할 수가 있습니다 앞서 소개한 1973년 어 김대중이 해외
망명 시절에 피력한이 한국 정치와 현실에 대한 극히 비관적인 전망은 이러한 지적
전통에서 생성되고 개성 온 것입니다 김대중은 대담하게도 그의 급진적인
계획론 통일 방언으로지 확장하면서 북한의 김일성이 제안한
고려명 제와의 연대를 시도하였습니다 앞서 소개한 대로 김대중은 북한은
비록 자유는 없지만 빵은 있으며 그점에서 김일성의 주체성 확립은 다른
일이 아니냐라고 평가까지 했던 것입니다 1973년 일본 도쿄의 어느 호텔에서
그가 김일성에 보낸 20만 달러를 수령한 것은이 같은 전후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이 사실은 오랫동안 비밀에 붙여져 왔습니다이 조합제 선생의 책에
의하면 북한이이 사실을 폭로하는 것은 1997년 겨울의 일입니다 나아는
벌써 제 155대 대통령 선거의 몰입에 있었고 김대중 후보가 당선될
전망은 매우 유력한 시점이었습니다 북한은 남한의 정보당국이 쉽게
금하도록 평양발 편지를 김대중 측근에게 발송했습니다 두 차례
편지에서 북한 당국은 김일성 주석과 김대중과 오랜 우호관계를 상기하면서
조국 통일을 위한 사업 있으라고 1973년 도쿄에서 20만 달러를
담은 트렁크 를 김대중에게 전달한 사실을 시하였다 남한의 정부당국은 북한이
남한의 대통령 선거에 개입하는 고도의 전수를 펼치고 있다고 그 편지를
해석했습니다 남한의 당국이 그 편지를 빌미로 유력한 대통령 후보인 김대중을
수사할 수는 없는 노래였습니다 그래도 안기부가 일단 그 편지 내용을 공개하자 김대중은
안기부의 북풍 공작이라고 역 를 펼쳤습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그의
겨울의 선거에서 김대중은 제 155대 대통령의 문화이 당선되었습니다 북한이 남한의 대통령
선거에 임해서 오랫동안 묵회 온 비밀을 틀어놓은 것은 김대중에게
당신은 우리의 협조자로서 우리의 고비에 매어 있다하고 협박하기 위한
목적에서였습니다 협박은 그 내용이 사실이어서 위력을 발휘할 수가
있습니다 당시 안기부의 분석가들은 그러한 이유에서 김대중이 김일성의
돈을 받은 것은 사실일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합니다 실은 북한이이 같은
편지를 발송한 것과 별도로 그보다 한 7개월 앞서 1997년 4월에
남한으로 망명해온 김일성의인 황장엽부터 그 같은 사실을 안기부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황장 면 김대중은 김일성이 오랫동안 지원해온
사람으로서 동적 관계였다 그의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 역시 두 사람의
그런 관계를 몇 차례 다 관부에서 밝히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맥락에서 조갑제 선생은 2000년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군사위원장
사이에 이루어진 정상 회담과 두 사람이 발표한 남북
공동선언은 북한이 잡고 있는 김대 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추론하고
있습니다 정상회담의 전제조건으로서 김대중 대통령은 현대 그룹을 통해
5억 달러를 현금은 4억 5천이 현물이 5천만 달러라고 합니다만 5억
달러를 김정일의 해외 비밀 계좌로 송금하였습니다 김대중 대통령과 그의
측근은 그러한 일이 불법임을 잘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안기부는 그 돈이
북한의 기 개발 비용으로 전용될 위험성을 명백하게 지적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대통령은 그러한 무리를 범했습니다 그리고은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과 더불어 북한이 주장하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
통일방안과 김대중 자신이 오래전부터 주장해온 국가 연합제 통일방안은 서로
통한다고 선언하였습니다 1973년 일에 김대중이 개인적으로 주장해온
통일 방안이 이나라 국회의 동의도 받지 않은 가운데이 나라의 공론으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김대중은 대통령에겐 그러한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조합제 성에
하면은이 선언이 있기 몇 년 전에 김대중은 그의 통일 방안에 관해이
월관 조선이라는 자취와 인터뷰를 가졌는데 거기서 통일한국의 이념적
정체는 후세에 맡긴다고 했다고 합니다 앞으로 세계는 무 이념에 좌우 이념을
초월한 그러 시대가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같은 내용의
답변은 제가 기억하기로 2000년 정상회담 이후에 기자 회견에서도
대풀이 되었습니다 바로이 대목에서 독자로서 김대중의 이념적 정체가 안고
있는 모수는 여지없이 폭로되고 말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는 지난
세계사 는 물론 앞으로 닥 7세계 역사에서도 인류 사회의 발전을 이끌
근본 동력으로서 개인의 자유 이념을 알지 못하던 것입니다 그는 서로 다른
이념의 남한과 북한이 낮은 단계 연방을 형성하여 장기간 공존하고
교류할 수 있다는 공상에 가까운 정치 공학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그는 북한의 김시 왕조 체제가 북한 주민에 가하고 있는 전체 주의적
압박과 그로 인한 북한동포의 비참한 인권 실태에 대해서는 하등의 관심을
표하지 않았습니다 조합제 선생의 김대중의 정치라는 책에서 읽게 되는
또 하나의 충격적인 사건은 체포되서 복욕 중인 북한 간첩 신광수 사람을
북한의 요청에 따라 송하 있다는 사실입니다 신수는 김정일의 명령을
직접 받고선 일본에서 어느 일본인 남자를 북한으로 납 한 사람입니다 그
신광수가 간첩 활동을 위해서 우리 국내로 잠입했다가 체포되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그가
일본에서 저지른 납치 범죄가 밝혀졌습니다 신광수 북한의 김정일이
다수의 일본인을 납치한 범죄를 국제 사법 재판소에서 증언할 유일한
살아있는 증인이었던 김대중은 자유 국제 사회가
김정일의 범죄 행각을 입할 기회를
봉쇄하였다 국제 사회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반일의 범죄 행위에
다를 바 없는 것이었습니다 신광수 북송 사건은 당시 대통령으로 있는
김대중이 국제 사회가 공동으로 추구하는 자유와 인권의 가치와는
얼마나 거리가 먼 존재인가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이상이 제가
최근에 읽은 김대중의 정치라는 책의 주요 내용입니다 그 가운데
1945년부터 1년간 김대중의 자익 활동에 대해서는 제가 다른 책을 통해서 약간 보충을 했습니다 이제
마무리를 해야 되겠습니다 조합제 선생은 김대중을 한국 현대사에 드리운
검은 그림자라고 했습니다 남북 공동 선언이 있은지 벌써 23년 있니다
그렇지만 그가 선언한 낮은 단계의 의 연이나 국가 연합이 이루어질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럴 가능성은 전무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이
실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이 나라의 헌법이 그의 걸맞은 형태로 개정되어야 합니다마는 벌써 고도 수준의 자유를
향유한지 70년이 넘는 이나라의 국민이 그와 같은 엉터리 정치 공학에
동조할 리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은 남북 공동
선언을 통해 고려 연방제의 전제 조건으로서 북한이 주장해온
국가보안법의 철폐와 미군 철수를 추구하는이 남한의 정치 세력에게
합법적인 공간을 제공하는 나름의 공로를 세웠습니다 그 같은 김대중의
업적은 노무현 문재인 정부의 대북 통일 정책으로 나아가 대미
외교정책으로 개정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김대중의 남북 공동 선언은
완전히 실패했다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대한민국의 해체를 노리는 북한의
통일정책을 이나라의 정치 체제로 내부화 하는데 일단 성공하였습니다
그점이 조합제 선생이 김대중을 남한 현대사에 우리의 현대사에 드리운 검은
그림자로 평가한 이유로서 타당한 것이 아닐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김대중의 정는 이정 로 충분히 해명되었다 할 수 있을까요
그는 과연 이념을 달리하는 남과 북이 평화롭게 공존하고 교류하면서 동질성을 제고해 갈 수
있었다고 진정으로 믿었던 것일까요 더없이 명민 있던 그가 겉으로 허황한
정치 공학을 진심으로 추구했던 것일까요 저는 김대중의 정체는 아직
충분히 밝혀지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좀 더 생각해 볼 점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점을 약속드리면서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장시간
경청해 주셔서 대단히
[음악]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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