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27

1931년생 작가 박완서의 너무나 솔직한 일제 체험기 (일제 36년의 오해와 이해 9_김용삼 기자)(정동수 목사, 사랑침례교회)(...


1931년생 작가 박완서의 너무나 솔직한 일제 체험기 (일제 36년의 오해와 이해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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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박수]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은
아홉 번째 시간으로
1931년에 태어나셨던 그 작가 박완서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분은 뭐
작가로선하고 유명한 분이기 때문에 이름만 들어도 다 아시는 분들이 이분이
본인이 일제시대 때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서 아주 솔직한
자기의 일종의 그 자서전 비슷한 그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그 많던 싱하는 누가 다 먹었을까라는이 책입니다이
책에 의하면 본인이 1931년에 태어나서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본인의 체험을 아주 솔직하게 써놨습니다
솔직하게 써 놨다는 얘기는 뭐냐면 욕을 많이 얻어 먹었다는 뜻이죠 그래서 이분이이 책을 내고 나서 많은
좀 비난에 시달리기도 했는데 이분이
써놓은이 체험기를 통해서 우리가 일제시대가
어떤 시대였는지를 한번 들여다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작업이 필요한 이유는 지금 일제시대를
경험하셨던 분들이 거의 대부분 돌아가셔서 우리는 간접적인
체험에 의해서 일제시대를 알 수밖에 없는데 그분들이 살았던 그 시대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알려면 그 시대를 살았던 분들의 이야기를 듣는게 가장 중요한 방법입니다
이분은 그 세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그래가지고
7살 때 1938년에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가지고
서울로 이주를 했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굉장히 좀 그이 개와 물을
드셔서 그런지 내 아이만큼은 서울에 있는 학교에다가 꼭 넣어야 되겠다
하고 작심을 하고 딸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옵니다
그 시절에이 교육열이 높았던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이 박원석 어머니가 그
중에 하나인데 딸을 서울 안에서도
서울이 있다면 지금은 서울이 워낙 넓어져서 뭐 사대문 안 4대문 방 이게 아무 의미가 없는데 그 시절만
해도이 사대문 안에 있는 학교에 아이를 보내는게 아주 큰 소원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이 집안이 그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돈이 없어 가지고
사는 곳은 서대문구 현저동 지금으로 치면은 저
서대문형무소 그 근처에 있는 산꼭대기의 월세방을 얻어 가지고 살면서 내 아이는 사대문 안에 있는
학교에 좀 보내야 되겠다 그래가지고 위장 전입을 합니다 그 당시 사촌이
사직동의 집이 있었는데 위장전입을 해요 왜 위장전입을 했느냐 그 당시에
학교는 정해져 있는데 학교를 보내려고 하는 사람들은 많다 보니까
초등학교에 입학을 할 때도 입학 시험을 치렀습니다 그래서
당시 국민학교는 지금은 초등학교인데 그 당시에는 국민학교라고 그랬죠이 의무교육이 아니어서
월사금을 매달 80점을 내야 제약이 가능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한국인들이 내 자식을 좋은 위치에 있는 학교에 넣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래가지고 박원서 씨도 초등학교에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 입학시험을 봤는데 뭐 세 문제 중에서 두 문제를 맞췄고 한 문제는 못 맞췄다 뭐
그런데 합격을 했다 그런 내용이요 그 작품에 아주 자세히 실려 있습니다
그 당시 박원서 씨가 살던 그 집은 서대문구 현저동 아주 산꼭대기
집이었기 때문에 여기는 물찌개로 그러니까 수도가 연결이 안 돼 가지고 물찌개로
물을 배달하는 물장수에게 한지기에 얼마씩 해서 물을 사먹는 동네였습니다
그런데 초등학교 학교 통지서가 이제 위장전입을 한 사직동 친척집으로 와서
그 합격 통찰을 받기 위해서 사직동 친척집에 가봤더니 여기는
물이 그냥 수도가 콸콸 나오고 있더래요 이걸 보고 이제 충격을 받은 거예요이
물이 이렇게 나오는구나 다시 말씀드리면 일제시대 때
서울에는 상수도가 연결이 돼서 많은 사람들이 수돗물에 혜택을 받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 시절에 왜 그렇게
학교를 좋은 데를 보내려고 그렇게 노력을 했느냐 좋은 학교를 나오면 좋은 직장에
취업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시절에 좋은 직장이란 뭐냐
한마디로 얘기하면 총독부 같은 거
직장 그 다음에 그 일본이 통치하는 통치기관
관료로 들어가는 거 뭐 말단이 됐든 뭐가 됐든 그 다음에 조선의 진출한
일본 기업에 진출하는 것이 좋은 직장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이 박원석 그 오빠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그 총독부의 취직을 해요
개성 옆에 개풍에 살 때는 아주 침침한 등장불이 고장이었는데
서울에 와보니까 막 대낮같이 환한 그 전기가 들어와서
그러니까 인류의 문명을 가름하는 그 기준이 두 가지가 있는데 전기가 들어오느냐 안
들어오느냐 두 번째 상수도 하수도가
준비되어 있느냐 안 되어 있느냐를 가지고 문명의 척도를 가늠합니다 그 중에 조금 더 고급 문명을 따진다면 내가
필요할 때 수도꼭지만 틀면은 뜨거운 물이 언제든지 나오느냐 안 나오느냐 하는 것을 문명하게 척도라고
하는데 한국에서 뜨거운 물이 필요할 때마다 수국제를 틀면 콸콸
나오는 시스템이 일반에게 거의 비슷하게 공급된 시기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을 하면서 아파트들이 많이 젖으면서부터였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한다면 무명이라는 건 무엇인가 문명을 우리에게 선사한 것은 누구인가
하는 것을 이런 자를 통해서 엿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박아저씨가 이제 4월 봄에
매동국민학교라는 것에 입학을 했는데 입학을 하고 보니까 학교에서 한글은 가르치지도 않고
한마디도 쓰지도 못하게 해요 다시 말씀드리면 1938년
정도만 돼도 학교에 입학을 하면 전부 일본어로 생각하고 일본어로
이야기하고 일본어로 글씨를 쓰고 그러니까 교육을 받는다는 거는 뭐예요
곧 일본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게 일자 치아에서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학교에 다닌다는 것은 한국인이 일본인하고
동질화 되어가는 과정이니까이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일본인화가
됐습니다 해방이 돼서 갑자기 이제 우리에게 해방이 돼서 우리가 다시 한국인으로 돌아가야 되는
상황이 왔어요 그래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아주 광범위하게
단일 교육이 실시된 이유가 바로 일본인화된이 한국인을 다시 한국인으로 되돌리기
위해서 이런 교육이 시작됐고 그런 반일 교육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라는 사실을 우리가
이해를 하셔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박원서의 동기 중에서 한글을 읽고 쓸
줄 아는 학생은 드물었대요 그래서 한국인들은 교육받은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일본인이 된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오빠는 총독부의 취업을 했고 그리고 총독부의 취업을 하니까 이건 뭐 진짜
가문의 영광이에요 이거를 우리가 어떻게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 시대가 그랬는데 그랬는데 오빠가
그 좋다는 총독부 직장을 6개월 만에 그만두고 일본인이
운영하는 와다라베 철공소라는 곳에 입사를 합니다 그러니까 이제 집안에서 이제 난리가
난 거죠 그 좋은 직장을 왜 그만두고 왜 무슨 대장간에 취업을 하다니 이게
말이라 되느냐 근데 오빠의 이야기는 간단했습니다
총독부보다 일본 기업이 월급을 2배나 많이 주고 나는 사무직이기 때문에
무슨 노동을 하는게 아니다 이런 이야기가 실리는 걸 보면이 무력까지도이
사농공상의 신분 구조가 얼마나 깊이 한국인들의 머릿속에 박혀
있는지를 우리가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산호공사의 신부고요 지금 다 없어졌나요
아니죠 여러분들의 자녀 그 물어보면 뭐 하고 싶다고 그래요 다 고시
공부하잖아요 고시 공부 왜 합니까 공무원 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조선시대로 얘기하면 과거 급제하기 위해서 공부하는 거라 똑같습니다 지금
그 다음에 다관사에 큰 숙부는 친일파의 후원으로 면석이의 취업해서
면에 총무과장 노무과장을 역임했습니다 아주 그 당시에이 면석이
면에이 과장이 된 거는 정말 가문의 영광이죠
또 이제 박원서 씨가 서대문 현저동에이 산꼭대기에 월세방에 살다가 오빠가
이제 취업을 해서 받아오는 월급하고 그 다음에 금융 조업이라는 것에서 융자를 받아 가지고 서울 현저동에
드디어 이제 내 집 마련에 성공을 합니다 이 금융 조합이라는 것이 자료를
찾아보면 1940년에 940억 곳에 금융 조합이 설립되어서 활동을
했는데 일제시대에이 금융 조합 덕분에
은행에 가면 대출도 잘 안 해주고 그러는데 일본 사람들이 금융주업이라는 걸 만들어 가지고
서민들에게 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돈을 대부를 해줘 가지고 이렇게 나눠서 갚도록 해
가지고 서민들이 편리하게 이렇게 집을 살 수도 있고
토지를 취득할 수도 있고 할 때 대출을 쉽게 내줬습니다
그런데 학자들은 서민성 안에 그렇게 큰 도움을 준
금융 조합을 식민지 경영의 천병이다 조선의 지방과 농민을 장악하기 위해서
설치했다라고 그렇게 비난을 하고 있어요 한국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라는 데는 금융 조합을 뭐라고 거기다가 설명을 해 놨냐면
조선총독부가 창안한 가장 효율적인 금융집의 수탈 기관이다 이렇게 써
놨습니다 그런데 서민들은 금융지역에 가서 돈이 필요할 때 돈을
대부 받아 가지고 집도 사고 땅도 사고 하는 혜택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으로 기술을 해놨다 우리가 이걸 어떻게 이해를 해야 될지 이쯤 되면
머리에 지진이 오기 시작을 하죠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이 벌어지면서 이제 군국주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박아놨으니까 아침에 조회를 하느라고 하면은 한국 시민의 맹세를 낭독을 하고
그리고 조선에 아주 유명한 소프라노 가수가 깨어졌다 싱가폴
물러설아 연구가라는 노래를 불러 가지고 유행을 시켰다고 그럽니다 그리고 남양분도를
함락한 것을 자축하기 위해서 밤에 등불행렬을 하지를 않나 뭐 일본이
처음에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가지고 막 전광석화처럼 동남아를
점령을 할 때는 정말 난리가 났었죠 특히 그 남양군도에서는 고부가 많이
났는데이 고무가 많이 나는 것을 일본이 점령했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국민 학생들에게 고무공을 다 하나씩 나눠줬다 그래서 그 공놀이를 하느라고 정말
시험관을도 몰랐다 하는데 여기요 그 박원순 씨 자서전에 써 있는데 저희
어머니가 2000년에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전에이 얘기를 하시는 거예요 그때
고무공을 받아 가지고 얼마나 즐겁게 놀았는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일제가
정말로 그렇게 악랄했는지 하는 걸 다 알고 계신데 그 재혼하신 분들은 이제 다 돌아가신 거죠
하지만 전쟁이 일어나서 전황이 점점 불리해지면서 뭐 혹시 뭐 폭격에 대비해서 반공 연습을
하고 그리고 여성들이 뭐 폭격을 할 때 대피할 때 김치말을
입으면 가다가 넘어지고 이러면 다친다 그래서 몸빼바지를 교복처럼 의무적으로 착용을 하기
시작을 했고 또 어느 날부터는 쌀 운동화 고무신 같은 것이 배급제로
바뀌어 가지고 상품팀이 귀해지기 시작을 했습니다 고무신 같은 것은 뭐 애국반을 통해서
한 발에 한두켤레 나오면 제비를 뽑아서 그러면 나눠 가졌다 뭐 이런 내용들 나오고
특히 재밌는 건 이제 박완서씨의 창씨개명 체험기입니다 박완서 씨를 일본어로 발음을 하면은
보쿠엔쇼 보쿠엔쇼 그래가지고 자기는 학교 가서 그 담임 선생님이
일본 사람이었는데 출석을 부를 때 그 한국 학생들이 전부 이제 창치교형을
해가지고 뭐 한학고 하루에 뭐 이런 일본 이름으로 막 부르다가
박완선은 보쿠엔쇼 이러니까 그게 너무나 창피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집에가 가지고 나도
착지 개명을 하게 해달라 하고 어머니를 막 졸랐다 막 이런 내용들이 나와요
분명한 것은 한반의 창시계명을 안 하는 아이가 서너명 밖에 안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 혹은 선생님 일본 선생님이 창시계명을 하지 않았다고
어떤 압력도 받은 적이 없다라고 본인의
글에 써놨습니다 또 박완서 씨의 고향인 대풍 박적골에도이
박씨 집안이 박완서씨 집안을 제외하고 나머지 사람들 모두 다
창씨개명을 했다 이렇게 써 있습니다 집안 호주인 박완서씨 할아버지가 아
나는 내 눈에 흙이 들어와도 창시계명은 절대로 안 된다라고 선언을 했기 때문에
창세기명을 못 했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박완서씨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이 호주를 오빠가
승결했습니다 근데 오빠도 착시계명을 안 해 그래서이 자기 집 사람들은 창식이형을
못한 거예요 그런데 어머니는 어머니가 바라는
출세라는 것은 바로 일본의 그늘 아래서 그들에게 협조해서 좋은 직장
들어가고 이런 것이이 어머니의 소원인데 그렇게 하려면
야 우리도 창시계명해야 되는 거 아니냐 일본 사람들이
창씨를 가면 강요를 해서 우리가 창식의 명을 한 걸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들여다보면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은 사례가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일본이 폐쇄기 점점 짙어지면서 생활
여건은 점점 더 어려워져 가지고 이제는 이제 지원병 제도라는 걸 운영하다가
마지막에는 징병제도를 운행해서 이제 조선인 사람들을
징병을 해가지고 아 전쟁터에 내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이 지원 병제가 징병제로 바뀌면서 여러 가지 막 변화가 일어나고
지난 시간에 우리가 징병제를 공짜로 한게 아니라 우리가
일본 의회 의석을 27석을 얻는 대가로
징병제를 했다는 얘기를 말씀을 드렸죠 이 무렵에 이제 국민학교 졸업을 앞둔
박완서씨는 그 당시에 아주 엘리트 수제들만 들어간다는 경기고년은
실력이 안 돼서 못 들어가고 숙명 권유의 지원해서 합격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입시를 앞두고 모든 한국 사람들이 합격을 빌기 위해서 단체로
신사참배를 했대요 그리고 국민학교 졸업식이 끝난 후에도 단체로 신사참배를 했고
그러니까 다시 말씀드리면이 문학 때면 한국인들은 다 일본인이 된 거죠 일본인이
또 전황이 이제 점점 어려워지니까 그녀 그러니까 지금은
여고생들마저도 이제 군수품 제조의 동원하기 시작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전에 이제 2시간 수업을 한 다음에이 여학생들 교실이
군수품 공장으로 변해 가지고 군복의 단추를 달고
솔방울을 채집을 해서 솔방울에서 기름을 짜 가지고 뭐 군대 보내고 뭐 이런 일까지 했다고 그래요 그리고
등교할 때는 구금낭을 휴대하고 등교를 했는데 그 구금낭 안에는
구급약과 지하영 삼각건 그리고 이름과 주소 혈액형이 적혀 있었다고
그래요 그래서 식량난이 닥쳐 가지고 뭐 공감무
쌀 대신 콩 뗏목을 막 그 배급을 하고 그러니까 쌀을 구하러 다니기 시작하고 뭐 이런
그 일이 벌어지면서 아 이제 식량이 모자라니까
딸 가진 집안은 한식구라도 입을 덜기 위해서 뭐 14살 15살 먹은 애들을
시집을 보내고 이런 일이 벌어지기 시작을 했다고 합니다
박은선 씨 어머니가 등화관절 할 때면 일본 놈들 정말 폭삭 망하는 꼴을 봤으면 좋겠다 이렇게 얘기를 하면서
한편에서는 내 아들이 일본인 회사에 다니면서 월급을 많이 받고
일본 사람들에게 그렇게 그 칭찬을 받는 것을 또 즐거워했다고
그래요 2학년에 지나갈 무렵에 이제 서울에 있는 그
사람들을 지방으로 소개를 하기 시작을 했답니다 그래서
본인은 이제 개성으로 이전을 하게 됐는데 이전을 하는 학생들은 내가 그 이전한
도시에서 가고 싶은 학교를 지적을 하면 그 학교는 전학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박원서 씨가 개성에 있는
후수던 고녀로 전학을 해서 그의 여름에 일본이 패방을 해 가지고 해방이 됐대요
해방이 되니까 박원서 씨의 큰 숙부가 일본 취해서
면세기를 취업을 했잖아요 그러니까 7일 파지반이 된 거죠 그러니까 그냥 해방이 되니까
친일파지반으로 낙인찍해 가지고 마을 청년들이 몽둥이를 들고이 7일파지반하면서 뭐
와가지고 가지도부를 부수고 막 이랬는데 알고 보니까이 사람들이 다 창시계명한
사람들이라는 거 아니에요 장씨 개명한 사람들이 그
책에 의하면 독후야마 아라이 기무라로 창시계명한 청년들이 창시계명을 하지 않은
박완서씨 집안을 친일파지반이라고 때려 부신 거예요
그 혼란이 벌어진 와중에이 박완서씨의 그 숙부가 남대문시장에서
장사를 했는데 재빨리 일본 사람들이 놓고 간 적상가하고 한 채를 어떻게 했는지
차지를 했다 해방에 혼란에 와중에
챙길 건 다 챙긴 거죠 자 여기서 우리가
창시계명에 관해서 한번 들여다 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국인의 이름은
본관이 있습니다 본관은 뭐냐면은 그 일족이 그
처음 시작된 1족이 발상이 된 땅입니다 예를 들어서 광산김씨 그러면은 전라남도
광산구에서이 김씨가 처음 그 만들어진 곳 발상지를
본관이라고 하고 성은 아버지의이 부개 혈통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일본은 두 개 혈통을 나타내는 성이 없습니다
단지 집안을 나타내는 심한 존재합니다 일본은
1870년까지 사무라에게 그 이하는
심영도 없었어요 그런데 메이지 유신 이후에 1875년에
안 되겠다 전 국민들 다이 씨를 그 사용을 해라 그래 가지고
평민들도 다 이제 씨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c라는 것은 우리는 아버지의이
[음악] 핏줄을 나타내는 것이 성인데 일본에는 그 핏줄을 나타내는게 없고 그냥
가게를 나타내는 이름 그 씨만 있다는 거를 우리가 이해를 해야 됩니다 그래서 일본이
성씨 제도하고 한국의 성취되도록 완전히 다릅니다 그래서 일제 치아에서 한국의 주요 성취는
260개 정도였는데 일본에서 시명은 30만 개가 넘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성은 아버지 혈통의 표식이어서이 자녀가 딸이 그
출가를 하면 출가를 해도 성이 바뀌질 않습니다이 사람은 김씨 집안이기 때문에 그런데 일본의 심영은
일가족이 다 같은 씨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
뭐 우리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남편에게 시집을 가면 남편의 집안에
심영을 그 따라서 이름이 바뀌게 됩니다 시가
그리고 일본은 주로 지형이라든지 지명 위치
직업을 심영으로 많이 사용을 합니다 따라서 뭐 성이 안 바뀌고 동성끼리는
절대로 혼인 안 하고 그리고 성이 다른 집안의 아이는 절대 입양하는 관습이 없는
한국의 제도하고 일본에서도 완전히 다릅니다 자 그러면
우리나라에서는이 [음악] 성취 제도가 언제서부터 사용이
됐느냐 본관과 부계성을 따르는 한국의 성씨 제도는
원래 우리게 아닙니다 전부 중국의 것을
도입을 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뭐 제 이름으로 말씀드리면 김용삼 이렇게
세자로 돼 있는 성과 이름 두자 이렇게 돼 있는 그리고
본관 어디 이건 전부 중국식이라는 것이죠
이중안에 택리지라는 조선학자의 그 체계에 의하면 한반도에 중국식 성씨가
보급된 시기는 고려 초기부터다 처음에는 지배계층만 중국 성씨를
사용했고 조선 초기에는 전 인구의 90%는
성씨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이 성씨가 정착된 건 언제냐
임진왜란 이유에서부터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가 지금
신주단지 모시듯이 집에서 가지고 있는 족보는 거의 95% 이상이 다 일제시대 때
만들어진 것입니다
조선 후기에 그 실학자라고 하는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내가
서울에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족보를 가져와 보아 달라고 했으나 그 중 열에 하나도 진짜가
없다이는 한때 세속에 불과한 것으로 믿을 것이 못된다 왜냐 다 가짜로
날조했기 때문에 대만 국민 정치대학의 김근식 교수가
있는데 이분의 그 연구에 의하면 김씨이씨 박씨 3대성이
한국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이 현상은 정상적인
친족 관계로는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하다 다시 얘기하면 평민이나 천민 등 많은
사람들이 그냥 김씨 박씨 이씨를 참치 했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했다
이게 학자들이 연구결과입니다 우리나라에 왜 이렇게 김씨 박씨 이씨가 많죠
바로 민적법이라는 것에요 비밀이 있습니다
1894년 갑오개혁을 하면서이 갑오개혁의이 계약화들이 아이고 이거
성씨도 없고 이런 사람들에게이 성씨를 사용하도록 해야 되는 거 아니냐 그래서 이제
성씨 사용을 뭐 할까 말까 하고 있는 중에 그래도 양반들이 반대하니까 아니
노비나 천민들이 무슨 성이 필요해 그냥 개똥이 쇳덩이 마당쇠 이렇게 부르면 됐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거죠 그런데 통관부 시절인 1909년에 일본
사람들이 야 이거 노비나 천민 이런 거 다 같은 사람들 아니냐
그러니까이 사람들이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모든 사람들이
인간다운 예후를 받는 이름을 똑같은 이름을 가지도록
민족법이라는 것을 법제화를 했습니다 그 당시는 그 대한제국이 살아 있었기 때문에 일본
사람들이 통관부에서 이걸 만들어서 대한제국에다가 강제로라도 얘기를 해서 이거
법으로 통과시켜 그래가지고 민정법이라는 것이 1909년에 통과가 됐습니다 그래서
시행 과정에서 노비들은 성씨가 없잖아요 그래서이 노비들 이런 사람들에게 너희들도 이제
성을 정해 그런데 성이 있어야 정하죠 그러다 보니까 이제
노비들이 주인의 자기주인의 성과 본관을 대부분 따랐다는 겁니다
또 양반이 자기 집안 노비를 해방시키면서 야 너 앞으로 김씨 해 그래서 김씨가
되는 거예요 그래도 성의 없는이 무성층 대부분이
이제 노비나 천민 이런 사람들이 그 성이 없었는데이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김씨 이씨 박씨로 신고를 했다 그래서 김이박
씨가 더 비대해졌다 이렇게 된 것이죠
자 조선시대 노비로 태어나거나 천민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이름이
참 껄쩍지근했습니다 마당쇠 개똥이
쇠돌이 뭐 이런 식으로 둬야지 뭐 이렇게 이름을 붙였어요
여자 노비의 경우는 대부분 태어난 달을 따라서 뭐 3월이 4월이
뭐 9월이 이렇게 또 뭐 촉새 년 뭐 이런 식으로
남자 로비는 말똥이 개똥이 도야지 세돌 같은 아주 천한 이름을
붙였습니다 근데 일본 사람들이 야 이게 같은 인간이 이게 말이나
되느냐 그래서 1914년에 조선총독부가
노비나 천민에게 부여된 가축이나 가축의 분뇨 물상 태어난 월을 표명하는 등
인간다운 품위를 갖추지 못한 이름은 민족의 등록을 시키지 않는다
그래서 노비 천민에게 양반과 다름없는 품
있는 이름을 부여한 사람은 누구냐
일본 사람들이라는 거예요
이때서부터 모든 사람은 자유롭고 평등한 사적자치의 주체로서의 개인임을
일본 사람들이 법적으로 보장을 해준 겁니다 그 이전까지이
시대에 태어난 이 남자 노비나 천민 여자 노비나 천민
이름이 없었어요 여기 여성분을 많이 앉아 계신데 조선시대에는
여성이 이름이 없었어요 그래서 선교사들이 와서 보니까
성은 있는데 이름은 없고 그래서 이걸 뭘로 불러야 되나 그래서
고민고민하다가 다 서양 이름을 붙여준 것입니다
너 뭐 헬렌을 해라 헬렌 너는 넷이 뭐 이렇게 붙여 가지고 이화여대
총장 이름이 왜 김환란입니까 헬렌을 어떻게 한자로 그
표기하니까 환란이 된 거예요 그래서 김 환란이 된 겁니다 영문 이름은
헬렌 킴이에요 이게 또 여성 독립운동가 하란사라고 있습니다
왜 란사예요 낸시입니다 낸시
낸시를 한자로 표기해서 란사가 된 거예요
양반 쌍놈의 신분 계급제도를 법적으로 철퇴 시켜준 것은
한국인이 아니라 조선총독부였다
조선시대 호적의 여성의 이름은 없습니다
양방 가문의 경우 성 또는 심한으로 존재했습니다 뭐 김씨 부인
박씨 부인 이렇게 했지 이름이 없었어요 간혹 여성 이름이 있는 경우도
있었지만 호적등록은 불가능했습니다 이건 무슨 뜻이냐 조선시대에서 여성을
사회적으로 공인된 인격으로 인정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이 조선 사람의 절반에 해당하는이
여성들에게 민족법을 시행을 해 가지고이 땅의 모든 여성도 남성과 동일하게
성과 이름을 민족의 민족의 기재하도록 의무한 것은 일본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여성을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공인된 인격체로 공인해준 것은 일본 사람이라는 것이죠
진정한 여성 해방은 바로 일본 사람들이 시켜줬다는 사실을 왜이
땅에 사람들은 인정을 안 하는 거죠 인정을 안 하면 어떡할 겁니까 그러면
더 재밌는 일이 있습니다 1911년 11월 1일 날
조선총독부령 제124호에 의해서 조선인은 내지인과
혼동할 수 있는 일본식 성명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법적으로
강제를 했습니다 이거 무슨 얘기냐 자 이제 제가 지난번에 말씀드렸죠이 인간이란 건
원래 기회주의적인 동물이라고 자 이제 한일합방에 대해서 일본 세상이 됐어요
그러니까 일본 세상에서 뭔가 출세를 하려고 보니까 일본 이름을
쓰는게 유리하거든요 그래서 조선 사람 중에 많은 사람들이 일본 이름을 쓰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야 이렇게 되면은 이게 조선 사람인지 일본 사람인지 뭐이
지구상에서 한국인과 가장 그 비슷한 유전인자를 가진 사람이 일본 사람이라고 하니까
그냥 일본 도쿄 한복판에 가서 가만히서 있으면 한국인인지 일본인인지 모릅니다
거기다 일본어를 좀 알면 일본 사람이죠 거기다가 이름 마저 뭐 가나 뭐 또 뭐 이런
식으로 하면 더욱 분갈하게 어려우니까 야 이렇게 되면 어떻게 일본 사람하고 조선 사람하고
분갈하게 어려우니까 1911년 만에도 일본 이름을 짓지 못하도록
강제란 겁니다 그런데 조선인 중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
일본과 사업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아니 나 좀 필요해서 일본 이름을 좀
쓰고 싶은데 왜 일본 이름을 못쓰게 하는 겁니까 하고 항의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을 했어요 특히 이제 일본 기업들이 막 그 진출해서 일본하고 거래관계가 있는
사람들이 뭔가 이름이 필요한데 일본 사람은 뭐
하려면 나도 일본 이름을 쓰고 싶은데 왜 일본은 못쓰게 합니까 하고 계속
이제 이의제기를 하니까 1937년에
신생아에 대해서 좀 태어난 아이덴한테는 일본식 이름을 허용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왜 아이들은 되는데 왜 어른들은 안 됩니까 하고 시비를 거는
한국 사람들이 많이 늘어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1930 몇 년도에이 조선총독부의
정무총감인 오노로쿠 이치로라는 바로요 사람입니다이 사람이 뭐 그런 이제 막
민원이 답지를 하니까 야 조선일이 일본 이름으로 바꾸고
싶다는데 우리가 그것까지 막을 필요가 뭐 있느냐 일본 이름
쓰게 하자 말이야 이게 창씨개명입니다 여러분
착각을 하시면 안 돼요
그러면서 이제이 오키나와 사례를 연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메이지유신 이후인 1872년에 그
1872년 이전까지는 오키나와가 699기라 그래서 독립왕국이었습니다
독립국 그런데 메이지 유신 때 1879년에
육교번이라는 걸 폐지해 가지고 오키라와 현으로 편입을 시키면서 일본
영토가 됐어요 그래서 일본 영토가 되니까 오키나와 사람들이 이제 먹고
살기 위해서 취업을 하기 위해서 일본 본토로 와 가지고 그 당시 오사카 일대 공장들이 많이 있고 상점들이
많이 있으니까 이제 취업을 하러 갔는데이 유구국이라는 건 우리하고
똑같이이 중국에다가 책봉을 받고 조공을 바치는 나라였고
한자를 사용한 나라였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뭐 이상한 놈이 와가지고 취업 좀 하려고 하는데요 보니까 너
왜 그 일본말을 못해 아 이거 일본말 학교에서 안 배웠는데요 너 거의
어디야 오키라고 하는데요 근데 이름도 이게 뭐야 아마 한국식으로 한자가 이렇게 돼 있으니까
그때 이제 일본 사람들이 야 이거 안 되겠다 이거 오키나와가 이미 일본
땅이 됐는데 이것들이 아직도 일본어도 못하고
이름도 이상하고 그러니까 이게 오키나와 사람이라고 차별하게 되지 않느냐 이거 어떡하면
좋으냐 그래서 오키라인을 학교에서 일본어를 가르치기 시작했고이 오키나와 사람들 이상한
이름을 전부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겠습니다요 제도를 조선에다가
그대로 도입을 한 거예요
창씨라는 것은 한국의 성을 일본식 씨로 바꾸는
겁니다 그 다음에 개명이라는 것은 이름을 바꾸는 거예요 그래서
창신의 의무적으로 하라 그랬지만 개명은 별도였습니다 그래서 1939년 11월 10일 날
미남이지로 총독이 본국 정부하고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조사해다가 일본식 시명 제도를 도입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일본 본국 정부에서 야 이거 무슨 이름까지 바꾸게 하냐 그래가지고
전선학 사람들이 전부 일본식으로 이름을 바꾸면이 조선 사람이 일본 사람인지가 아느냐 그래가지고 막
반대하고 또 조선총독부의 경찰도 아니 어느 날 김용삼이라는
인간이 뭐 가네모토 뭐로 이름 바꾸면 우리가 이거 어떻게 관리를 하느냐 그래가지고 막 총독부
경찰이 막 뛰어내고 반대하고 난리가 났어요 일본 정부가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그런데 조선총독부에서는 야 무슨 소리냐 지금 우리가 무슨 한국 신미나 내선일체라고 하면서 조선
사람하고 일본 사람들이 동등한 예우를 한다고 하면서 왜 조선 사람은 일본 사람
이름하고 달라야 돼 불만이 많으니까 안 되겠다 이거 우리
일본 사람하고 똑같이 예후해 주고 이름도 그냥 일본 사람하고 똑같이
만들자 해가지고이 제도를 도입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1940년 2월 11일부터 8월 10일까지 의무적으로
씨를 정해서 제출을 해라 창신은 의외적으로 갖고 계명은
니네 맘대로 해라 이렇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이제 뭐 난리가 났고 일본의 척추성 관리들도 아니 일본 사람들이야
뭐 어쩔 줄 모르지만 조선 사람들은 이거 반대 안 되면 당신이 어떻게 하려고 이런 짓을 해
하면서 막 난리가났습니다 어쨌든이 제도가 시행을 하면서
한국 사람들은 두 가지로 반응을 했어요 아까 말씀드린 대로
필요에 의해서 일본 이름이 필요한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나서서 창시를 했습니다
그런데 아니 내가 지금까지 써온이 성씨를 누구 맘대로 가라고 하는 거야
하고 극렬하게 저항을 한 사람들도 있었어요 그래가지고 어떤 집안에서는 막
자살하기도 하고 난리가 났죠 이렇게 되니까 총독부에서는 아니
우리가 지금 강제하는게 아니야 너희들이 지금까지 그
이름 그 일본식으로 쓰게 달라고 그렇게 계속 뭐 밀어 놓고 그러면서 그거
하라고 했더니 또 막 반발하니까 이제 좀 이상하게 된 거죠 이게
창시를 제출하는 기간이 40년 8월 10일까지였는데 5월까지 참여율이 7.6% 밖에 안 됐어요
그러다 보니까 이제 뭐 총독부가 행정역과 경찰력을 총동을
해야죠 협박 강요해 가지고 신고 마감식까지 79.3%가
참여했다라고 주장합니다이 과정에서 뭐 강제가 있었느냐 없었느냐 얘기를 하는데
강제가 왜 없었겠어요
창씨개명을 자발적으로 한 사람도 있었지만 착시계명을 하기 싫어하는데이
행정이라는 것은 야 이런 제도가 도입이 됐는데 너희들 왜 이런 제도 안 하는 거야 하고 무언의 압력을
넣은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끝까지
길래 신고를 하지 않은 20%가 있어요이 20%는
원래 자기 성이 씨가 돼 가지고 그게 그냥 그
굳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처음에는 자기네들이 창시 그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지 못할
때는 왜 못하게 하느냐 우리도 일본 이름 쓰고 싶다라고 하더니
야 이제 이름 바꿔 그러니까 이제 또 반발하고 나서는 거죠 그러면서
창시계명을 어떻게든지 일본식으로 개명을 하는 무언의 압력으로 받아들인
겁니다
그래서 해방이 되고 나서이 창시계명이 법적으로 폐지된 것은
1946년 10월 23일입니다 그래서
미군정청 법령 제 122호로 조선 성명 복구령에 따라서
창치기계명에 의해서 바뀌었던 이름이 원래 본래 이름으로
돌아온 것은 해방이 되고 나서도 1년 2개월 후에 일이었습니다
자 여기서 여러분 창씨개명의 한국인들이 반대했다고
하는 그 내면의 논리는 무엇일까요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냈던 이성무 원장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이 이제
성취 제도를 연구를 했는데 이분이 남긴 그 논문의 요런 대목이 있습니다
한국 족보 중에 80%는 시조가 중국에서 온 사람이다라고
기록을 해 놨다고 합니다 왜 그러냐면 그 당시는 주자 성리학에
의해서 우리는 중국이 되는 것이 가장 큰 영광이었던 그 시대였잖아요
그러니까 그야말로 4대 모아 사상이이 세계 우주관을
지배하고 있던이 조선에서 소중하 뭐 이런 상황에서 우리 조상이 중국에서
온 사람이야 그러면은 그만큼이 집안의 권위가 높아지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여러분 그 집안에 족보가 있으면 그 족보를 한번 들춰 보십시오 우리 시조는 중국에서
왔다라고 써 있는게 80%라는 거 아닙니까 그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냐
노씨들입니다 노씨 노씨는 강태공의 후손이라고 주장을
해요 그런데 하필이면 노씨 중에 대통령이 두 명이
배출됐어요 노태우 노무현
중국의 노씨 집안에서 난리가 난 겁니다 난리가 야 우리의 후손들이 조선으로 건너가서
대통령을 두 명이나 배출했다 그래서 노태우 대통령이 퇴임한 후에
세계 노시대회에 참가를 해서 선조의 고귀한 뜻을 높이 봤을 것이다라는
휘호를 써 가지고 그 중국 노씨 집성촌에 현판에 걸어 놨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한술 더 떴습니다 자기가 대통령 재임기간 중에 세계 노시대회를 서울로
유치를 해서 참가자들을
청와대로 초청해서 만찬을 부르면서 우리가 남이가
반기문 씨가 UN 사무총장에 올랐을 때
중국에 있는 반시 집성촌에서 난리가났습니다 대잔치가 벌어졌어요
야 우리 반씨들이 세계의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웃을 일이 아니고요 우리의
이름 우리의 족보를 들춰보면 우리는 다 중국인입니다
자 성심한 그런게 아니고요 이름까지도 중국식으로 창시계명을
했습니다 그 증거를 보여드릴게요 고려말에이 조선 출범의 저항을 했던
유학자 정몽주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름이 몽주예요
몽주라는 건 무슨 뜻입니까 꿈속에서라도 주나라를 보겠다 주나라를
합니다 그래서 몽주라고 이름을 지었어요
조선 개국의 1등 공신인 정도전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을 또 풀이하면 도를 전한다는 뜻인데 이 사람이 이야기하는 도라는 건 뭐냐
주자석리학에도 조선을 동주로 만드는
도 그것을 전하기 위해서 정도전이다라고 이름을
졌다고 합니다 우리가 성으로 떠받드는 이순신 장군
이분이 아들을 넷을 두셨어요 그랬는데 중국을 아주 엄청 흠모하셨던 것
같아요 그래 가지고 이름을 지을 때 사망 5제 사망 5절은 뭡니까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요임금 순임금 뭐 이런 사람들입니다 사망 어제 이름을 한 글자씩 빌려다
이름을 줬어요 그래서 첫째 아들이이 희신인데 이것은
복희씨의 그 시자를 따서이 희신으로 졌고요
둘째는 요임금 이름을 빌려서이 요실이라고 적고 셋째는 순임금 이름을 따서
이순신이라고 적고 넷째는 우임금 이름을 따서이
우신이다 이렇게지었습니다 이게 뭐예요 다 중국식
이름이죠
한국인들이 지금껏 우리가 쓰고 있는이 이름은 중화방식의 창시계명을 해서 우리는
중국 문명의 투왕을 했습니다 한국인들은 다
그런데 어느 날 이제 대한제국이 망해가지고 일본이 들어와서 가만히 보니까 아니 이것들이 지금 세상이
바뀌었는데 아직도 중국을 추종하는 이름을 쓰고 있어 야 너희들 이제 중국 세상 끝났어
앞으로 일본 세상으로 좀 돌아와
그래서 이름 바꿔 그게 창식의 명인데 이름을 바꾸라고 한 주체가
한국인들이 그렇게 오매불망 그냥 상국으로 여기던이 중화문명의 중국이
아니라 그냥 계단장이나 끌고 다니고 훈도시나 차고 다니던 저이 왜놈이 우리 이름을
바꾸라고 하니까 다 저항을 하고 일어난 것이죠
일제시대 때 한국인의 80%는 창시계명을 했지만
20%는 끝까지 창시계명을 안 했습니다 끝까지 우리는 중화방식을 고수하겠다는
것이죠 그래서 지금도 미국이나 이런데 가서 그 한자로 된 이름을 이렇게
된 명함을 주면 그 중국 사람이냐 이렇게 물어요
왜냐하면 이름만 가지고는 중국인인지 한국인인지를 구별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조선 사람들은
초기에는 소중하라는 세상 속에서 살다가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섰습니다
청나라 오랑캐들 저것으로 야만인이니까 저 중화문명이 오랑캐
야만인에 갔을 리가 없어이 중화문명의 정수는 소중한 중국을
500불만 그 사랑하는 조선에게 왔어 그래가지고 소중하가 나중에 조선
중화주의가 되어 그래서 중국에서는 이미 다 없어진이 주자 성리학적인 제사제도 그 다음에
족보 제도 이런 걸 한국이 더 잘 유지하고 있죠
거기다가 빼도박도 못하게 한국인들의 족보에
족보를 80%가 다 자기 조상이 중국에서 왔대요 그러니까 중국
지도부가 이걸 보고 야 잘 됐다 야 한국 너희들 지금 뭐 하는 거야
너네들 족보 봐 너희들 지금 중국 사람이잖아 중국의 후회잖아
그런데 어디 감히 싸가지 없이 말이야 한미동맹을 해 빨리 한미동맹에서 깨고 나와 가지고
중화 중국에 투항을 해 이게 한중
동조를 해낸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한국 사람들이 그냥 발끈하고 한 이유가 뭔지 그리고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이 본관과 성으로 되어 있는이 이름이 사실은
이게 우리게 아니라 중국 거라는 사실
삼국시대만 해도 사람들 이름이 뭐 연개소문 뭐 거칠부 뭐 이름이
그랬잖아요 중화방식으로 한국인들은 전부 창시계명을 했는데 일본 사람들이 일본
방식으로 하라고 그러니까 다 들고 일어나서 반대한 거죠
우리가 지금 중국이 저런 식의 그
한국을 정말 모욕하는 얘기를 해도 중국한테는 뭐라고 시비 거는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 일본에서 요만한 뭐 얘기만 나와도 뭐 전 국민이 그냥 길길이
날뛰고 뭐 무슨 불매운동 뭐 가지 말자 사지 말자 왜 그러는 거죠 이거
이름 안에 들어있는 뭐 이름을 어느 식으로 바꾸느냐 하는 그 가치관 안에는 지금
한국인이 중화문명이 일본 문명요 중간에 서서
어디로 가야 되는지에 대한 가름을 하나의 시험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이해를 됩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박완서씨가 본인의 체험에 의하면 나 박완서
일제시대 때 일본 담임 선생님이 있었지만 내가 창시계명 안 해도 나에게 너 왜 상실감이 안 했어 하고
불려가 가지고 때리거나 창시기만 해 하고 협박을 당하는 사실은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 자기네들이 다 원해 놓고
이거 왜 이러는 것이죠이 창시계명에 관해서 알고 보니까 그 배후에는
우리는 이미 중국 방식으로 창식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거 어떻게 할 겁니까 앞으로
장식해명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면 정말 우리 냉정하게 지금 우리의
좌표는 뭐고 우리가서 있는 저희 현실은 뭐고 우리가 지금
이렇게 단발을 하고 양복을 입고 구두를 신고 다니지만 아직도 우리의 인식 속에는 조선시대의
도포차랑 휘날리던 그 시대에 dla가 고소한의 살아있는 건 아닌지
정말 냉정한 자기반성이 필요한 시점이 됐습니다
강의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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