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22

오규 소라이 - 위키백과 荻生徂徠 Ogyū Sorai

오규 소라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오규 소라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오규 소라이
荻生徂徠
《선철상전(先哲像傳)》에 실려 있는 오규 소라이의 초상화
본명오규 나베마쓰
로마자 표기Ogyū Sorai
출생1666년 3월 21일
사망1728년 2월 28일
성별남성
국적일본
직업유학자, 사상가, 문헌학자
오규 소라이
일본어식 한자 표기荻生 徂徠
가나 표기おぎゅう そらい
국립국어원 표준 표기오규 소라이
로마자Ogyū Sorai

오규 소라이(일본어荻生徂徠1666년 3월 21일 ~ 1728년 2월 28일)는 에도(江戶) 중기의 유학자(儒學者)·사상가·문헌학자이다. 소라이는 그의 (號)이고[1], 본래의 이름은 오규 나베마쓰(荻生雙松), 본성(本姓)은 모노노베(物部)이다. 는 시게노리(일본어茂卿)이며 통칭은 소고에몬(일본어總右衛門)이다.

생애

에도에서 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의 시의(侍醫)였던 오규 가게아키(荻生景明)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에 하야시 가호(林鵞峰)·하야시 호코(林鳳岡)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그러나 열네 살 때인 엔포 7년(1679년)에 쇼군이 되기 직전이었던 쓰나요시의 분노를 산 아버지가 에도에서 쫓겨나 칩거하게 되면서, 어머니의 고향인 가즈사국의 혼나무라(本納村, 지금의 모바라시)로 이주해 살았다. 이곳에서 그는 13년동안 중국과 일본의 서적과 불경을 독학했고, 이 시간이 훗날 그의 학문적 토대가 되었다. 특히 하야시 라잔의 《대학언해》(大學諺解)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은 것이, 소라이 학문의 기초가 되었다. 본인도 가즈사에서 살던 시절을 회고하면서 자신의 학문은 이곳에서의 수학 과정을 기록한 《남총지력》 (南總之力)으로 완성되었다고 말하고 있다.[2]

겐로쿠(元錄) 5년(1692년)에야, 아버지가 사면되면서 에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때 그의 나이 27세였다. 에도로 돌아온 뒤에도 학문에 전념하여, 지증상사(芝增上寺) 옆에 주쿠(塾, 글방)을 열었지만, 초기에는 궁핍함을 면치 못해 끼니조차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근처에 살던 두부 장사꾼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겐로쿠 9년(1696년), 31세의 나이로 5대 쇼군 쓰나요시의 측근이자 막부의 소바요닌이었던 가와고에 번(川越藩)의 번주 야나기사와 요시야스에게 발탁되어 녹미를 지급받으며 그를 섬겼다. 나가사키에서 그는 일반 유학자로서는 있을 수 없었던 가정교사를 부른다. 그는 중국인 교사를 두고 발음 공부를 했다. 소라이는 야나기사와 저택에 불려가 학문을 강연하기도 하고 정치상의 주요 자문에 응하면서 쇼군 쓰나요시의 눈에도 들게 된다. 겐로쿠 14년(1701년)에 일어난 겐로쿠아코 사건(元禄赤穂事件), 이른바 추신구라(忠臣蔵) 사건 때에도 소라이는 여러 성리학자들과 함께 자문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소라이의 나이 44세 때인 호에이 6년(1709년), 쇼군 쓰나요시가 사망하고 요시야스가 실각하면서 야나기사와 저택을 나와서 니혼바시(日本橋) 가야바 정(茅場町)에 옮겨, 그곳에서 호엔주쿠(蘐園塾)라는 사숙(私塾)을 열었으며, 이후 이곳에서 그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학파를 형성하기에 이른다(호엔 학파). 덧붙이면, 호엔주쿠라는 이름은 호엔주쿠가 위치해 있던 가야바초의 지명과도 관련이 있는데, 인근에 작가였던 다카라이 기카쿠(寶井其角)가 살고 있어 "매화꽃 향기 옆에 오규 소에몬이" (梅が香や隣は荻生惣右衛門)"라는 시구가 전해지고 있다.

교호 원년(1716년)경부터 소라이는 자신의 저서인 《논어징》(論語徵)의 집필을 시작했다. 이는 1712년에 발간된 이토 진사이의 《논어고의》에 대한 반박과 기존의 일본 유학계를 지배하던 사상인 주자학, 《주자집주》에 대한 비판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교호 2년(1717년) 소라이는 자신의 학문의 기본 방향과 성과를 《학칙》, 《변도》, 《변명》 등의 작품으로 정리하였으며, 1718년 《논어징》의 초고를 완성하였다.

교호 7년(1722년) 이후는 8대 쇼군 요시무네(吉宗)의 신임을 얻어 그의 자문을 맡아, 기존의 추방형을 자유형(自由刑)으로 대체할 것을 진언하기도 했다. 대담한 성격에 자부심도 강하고 중국어에도 통달했다고 하며, 이후로도 계속해서 호엔주쿠를 통해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교호 13년(1728년)에 향년 63세로 숨을 거두었다. 묘소는 지금의 일본 도쿄도 미나토구의 나가마쓰 사(長松寺)에 있다. 그가 죽고 9년이 지난 1737년에 《논어징》이 발간되었다.

소라이학의 성립과 경세 사상

오규 소라이의 무덤

소라이는 기존의 주자학을 "억측에 근거한 허망한 설일 뿐이다!"라고 강하게 비판하면서, 주자학에 입각한 고전 해석을 거부하고 고대 중국의 고전을 독해하는 방법론으로서의 고문사학(古文辭學)을 확립했다. 당시 일본의 지식계급은 한문을 읽고 쓸 줄 알았고 중국 고전을 완전히 자기 교양으로 삼았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 소라이는 "우리가 읽고 있는 《논어》 《맹자》라는 것은 외국어로 쓰여 있다. 우리는 옛날부터 번역해서 읽고 있을 뿐이다"라고 폭탄선언을 했다. "유붕(有朋)이 자원방래(自遠方來)하니 불역낙호(不亦樂乎)아"라고 읽고서는 《논어》를 읽었다고들 말하지만, 과연 그걸로 《논어》를 충실히 이해하고 있는지 어떤지는 의문이라면서 소라이는 일본어와 중국어는 기본적으로 문법구조가 다른데 그것을 한문식으로 뒤집어 읽어서는 '야마토 냄새(和臭)'를 면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일본어 냄새를 풍기며 읽고 있는데도 마치 중국의 고전을 그대로 읽고 이해한 양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발상이 처음으로 담긴 소라이의 저작이 《역문전제(譯文筌蹄)》이며 그 초편(初編)의 머리글에 이렇게 써 있다.[3]

"이쪽 학자들은 방언(곧 일본어-옮긴이)을 가지고 쓰고 읽으면서 이를 가리켜 화훈(和訓)이라고 한다. 이것을 훈고(訓詁)라고 이해하지만 실은 번역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것이 번역임을 모른다."
"저쪽에는 당연히 저쪽의 언어가 있다. 중화(中華)에는 당연히 중화의 언어가 있다. 언어의 체질이 본디 달라서 어느 것에 의거한들 딱 들어맞질 않는다. 이런데도 화훈으로 에둘러 읽고서 통할 것 같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견강부회일 뿐이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반성하지 않고 책을 읽고 글을 쓸 때 그저 화훈에만 따른다."

예를 들어 한자 정(靜)과 한(閑)의 일본어 훈은 모두 '시즈카(しずか)'다. 중국어로는 다른 한자로 표기되어 있지만 훈이 같아져 버리기 때문에, 화훈으로 훈독할 경우에 일본인은 중국의 시나 문장의 진정한 의미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의 《역문전제》는 '시즈카'로 발음되는 한어를 전부 늘어놓고 이것은 중국에서 이러저러한 의미라고 밝히는 일종의 자전(字典)이다. 하지만 소라이는 문법도 다르고 질적으로도 다른 중국어를 일본어로 바꿔 읽고 있는 것이 번역임을 의식하지 못하는 일본인들이 자신들이 지금 번역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만 한다면, 중국어의 구조를 중국인 이상으로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면서 긍정적인 주장도 한다. 중국인은 별 생각 없이 자기 언어를 사용하니까 자기 언어와 사상의 참모습을 모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역문전제》의 성립 연대는 확실치 않지만, 대략 쇼토쿠 연간 이전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 시대에 이미 '고문사(古文辭)'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소라이는 교호 원년 이후 《논어징》 등을 잇달아 쓰기 전에, 그런 비교언어학이라고나 할 방법론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고문사'는 언어학으로서 시작된 것이고, 경학으로서의 소라이학이 형성되는 것보다 빠르다.[4]

소라이는 야나기사와 요시야스나 8대 쇼군 요시무네에 대한 정치적 조언자였고, 그가 요시무네에게 제출한 정치 개혁론인 《정담》(政談)에는 그의 정치사상이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서양 사상사에서 정치와 종교를 분리해서 해석했던 마키아벨리처럼, 일본 사상사의 흐름 속에서 종교적 도덕에서 정치를 분리해 내려는 획기적인 저작이었다. 이후 본격적인 경세사상(경세론)이 태어났다. 정담은 쇼군에게 바친 책이었고 비밀에 부쳐졌기 때문에 출간된 것은 메이지 유신 이후인 1868년이었다.

소라이는 밖으로 드러난 것이 중요하지 마음 속에서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것은 불교라고 했다. 불교에서는 내면성을 묻지만 유교에서는 인간관계를 문제로 삼는다고 말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소라이학이다. 따라서 정치철학이 되는 것이다. 도덕과 정치를 구별하고, 내면을 묻지 않는 소라이학을 넘어 제자인 다자이 슌다이(太宰春臺, 1680~1747)는 외형으로 나타날 때 비로소 문제를 삼는다고 해서 규범을 철저히 외면화해버림으로써 소라이학을 논쟁거리로 만들었다.[5]

아코 로시 사건에 대한 소라이의 입장

흔히 '추신구라'로 알려져 있는, 겐로쿠 시대에 일어난 아코 로시 사건에서, 아코 로시 47인에 대한 처분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하야시 호코를 비롯해 무로 규소(室鳩巢)·아사미 게이사이(淺見絅齎) 등이 그들을 칭찬하여 목숨만은 구해주자는 주장을 펼친 것에 맞서서, 소라이는 그들을 의사(義士)로서 인정은 하되 목숨을 구해주는 일 없이 전원에게 셋푸쿠(切腹)를 명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소라이 의률서(徂徠擬律書)》라 불리는 문서[6]에 따르면, 소라이는 이 자리에서 "도는 스스로를 깨끗이 하는 길이며, 법은 천하의 규정입니다. 예로서 마음을 다스리고 도로서 일을 다스리는 것인데, 지금 46인의 사무라이(士)들은 그 주군을 위해 원수를 갚았으니 이는 사무라이로서의 수치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깨끗이 하는 도리로서 그 일은 의롭다 할 만 하나, 그 무리들에게만 한정하여 처결한다면 결국은 사사로운 의론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 이유를 논하자면 원래 나가노리(長矩)는 저택 안에서 거리낌없이 행동한 죄를 받은 것인데, 또 다시 기라 씨(吉良氏)가 이를 복수한다며 공의의 허락도 받지 않고 소동을 기획한다 해도 법이라 하여 허용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그 46인의 죄를 결정함에 사무라이의 예로 셋푸쿠를 명한다면 우에스기 가(上衫家)의 원도 헛되지 않을 것이며 그들의 충의를 가벼이 대하지 않는 도리로서 심히 공론이라 할 것입니다. 만약 사사로운 의론으로 공론을 해치게 된다면 이후 천하의 법이 서지 못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코 로시 47인의 충정보다는 이들의 행동이 가져올 정치적 영향에 관심을 두고, 충성이라는 도덕적인 기준보다는 천하의 법도라는 정치적 입장에서 그들의 단죄를 주장한 것이다. 소라이는 천하의 대법을 어겼으니 사죄에 처해야 마땅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사'의 도(道)로서는 훌륭하므로 목을 쳐서는 안 되고 할복의 예(禮)로 처리해야 마땅하다고 했다.

이처럼 소라이는 공(公)과 사(私)의 구별을 아주 분명히 했다. 소라이는 '사'를 나쁘다고 하지 않았으며, '사'의 영역에 속하는 것과 '공'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서로 구별된다고만 했다. 따라서 문학처럼 '사'의 영역에 속하는 데에 권선징악의 잣대를 들이밀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문학은 일종의 사적 작업인지라 천하국가론과는 관계가 없으며, 필생의 업으로서 사명감을 갖고 있는 자신의 학문 역시 사적 작업이라고 했다. 따라서 통치하는 것과 학문을 한다는 것은 영역의 구별이지 가치의 구별은 아니라고 명시했다.[7]

소라이의 두부

일본의 만담이나 강담 같은 전통대중예술에서 상연되는 목록의 하나인 '소라이의 두부'는, 쇼군의 어용학자가 된 소라이와 그가 가난했던 시절의 소라이의 은인이었던 두부 장수가 이 아코 로시 사건을 계기로 재회하는 이야기이다.

널리 알려진 스토리는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소라이가 아직 가난한 학자였던 시절에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서 돈도 없이 두부를 주문해서는 점포 앞에서 먹어 버렸다. 하지만 두부 장수는 그것을 용서해 주었을 뿐 아니라 그 자신도 가난한 처지이면서 소라이에게 많은 지원을 해 주었다. 그 두부 장수는 아코 로시 사건이 있은 다음날 가게가 화재로 불타버리는 바람에 졸지에 길거리에 나앉게 되었는데, 이 처지를 알게 된 소라이는 새 가게를 열 돈과 자리를 두부 장수에게 주었지만, "의사(義士)에게 셋푸쿠를 시킨 소라이가 주는 도움 따위, 에도 사람으로서 받을 수 없다"며 두부 장수는 딱 잘라 거절했다. 이에 소라이는 "두부 장수께선 가난하여 돈도 없이 두부를 먹은 저의 행위를 '출세하거든 갚게나.' 하고 너그럽게 봐주셔서 도둑이 되지 않도록 저를 구해 주셨습니다. 그때 법을 굽히지 않는 한계 안에서 정을 베풀어 주셨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입니다. 저도 학자로서 법을 굽히지 않고 그 로시(浪士)들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정을 베풀었으니, 이는 두부 장수께서 제게 하신 것과 같습니다."라며 법의 도리를 말하고, 게다가 "무사라는 자가 아름답게 피어난 이상 보기 좋게 지게 해주는 것도 정을 베푸는 것이며, 무사의 큰 칼은 적을 위해 존재하지만 작은 칼은 그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라며 무사의 도덕에 대해 설파했다. 두부 장수도 이에 납득하고 소라이의 도움을 기꺼이 받고, 로시들의 셋푸쿠와 소라이로부터 받은 선물을 가리키며 "선생님께서는 해를 위해 자신의 부담을 떼어 주셨다"라고 두부 장수가 외치는 데서 이야기는 끝난다.

저작 목록

  • 『弁道』
  • 『弁名』
  • 『擬自律書』
  • 『太平策』
  • 정담『政談』
    • 임태홍 역, 서해문집. 2020.
  • 『学則』
  • 논어징『論語徴』
    • 임옥균 · 임태홍 역(譯) 《논어징》(전3권), 2010년, 소명출판
  • 『孫子国字解』
  • 『明律国字解』
  • 『荻生徂徠全詩』 荒井健・田口一郎 訳注、平凡社〈東洋文庫〉全4巻、2020年3月-
  • 『荻生徂徠全集』は、みすず書房河出書房新社から出版されたが、各・未完結である[8]

참고 문헌

  • 마루야마 마사오 저, 김석근 역 《일본정치사상사연구》1995년, 통나무
  • 미나모토 료엔 《도쿠가와 시대의 철학 사상》 2000년, 예문서원

각주

  1.  호엔(蘐園)이라는 호도 있다. 일설에는 '徂來'라고 쓰는 것이 정확한 한문 표기라는 설도 있다.
  2.  미나모토 료엔, 『도쿠가와 시대의 철학사상』 예문서원, 2000, 80쪽.
  3.  마루야마 마사오 & 가토 슈이치, 『번역과 일본의 근대』 임성모 역, 이산, 2018, 30~35쪽.
  4.  마루야마 마사오 & 가토 슈이치, 『번역과 일본의 근대』 임성모 역, 이산, 2018, 32~33쪽.
  5.  마루야마 마사오 & 가토 슈이치, 『번역과 일본의 근대』 임성모 역, 이산, 2018, 99~100쪽.
  6.  막부의 자문에 대해 소라이가 진언한 내용들을 모은 문서라 전하는 것이지만 진필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7.  마루야마 마사오 & 가토 슈이치, 『번역과 일본의 근대』 임성모 역, 이산, 2018, 98~99쪽.
  8.  “「峡中紀行」は荻生徂徠全集の何巻に載っているか知りたい。”. 国会図書館. 2012. 2018년 12월 1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8년 12월 1일에 확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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荻生徂徠

出典: フリー百科事典『ウィキペディア(Wikipedia)』
荻生 徂徠
(おぎゅう そらい)
荻生徂徠(『先哲像伝』より)
人物情報
全名荻生双松なべまつ
別名茂卿もけい)、惣右衛門そうえもん(通称)、蘐園けんえん[1]
生誕1666年3月21日[1]
日本武蔵国江戸[1]
死没1728年2月28日(61歳没)[1]
学問
時代江戸時代中期
研究分野儒学文献学
特筆すべき概念古文辞学の確立
影響を受けた人物伊藤仁斎李攀竜王世貞
影響を与えた人物太宰春台服部南郭安藤東野山県周南平野金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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荻生 徂徠(おぎゅう そらい、寛文6年2月16日1666年3月21日) - 享保13年1月19日1728年2月28日))は、江戸時代中期の儒学者思想家文献学者

名は双松なべまつ・実名は「茂卿」で、字としては「もけい」、実名としては「しげのり」と読む[2]。通称は惣右衛門そうえもん[2]徂徠そらいと号し(一説では「徂來」が正しいとする)、また、蘐園けんえんとも号した。「徂徠」の号は『詩経』「徂徠之松」に由来し、「松が茂る」の意味である「茂卿」ともにに関する名であることが指摘される[2]本姓物部氏で、「物徂徠ぶっそらい[1]」「物茂卿」とも号した[2]

父は江戸幕府第5代将軍徳川綱吉侍医だった荻生景明。弟は第8代将軍となる徳川吉宗の侍医を務め、明律の研究で知られた荻生北渓[3]

概要

朱子学伊藤仁斎仁斎学を批判し、古代の言語、制度文物の研究を重視する「古文辞学」を標榜した。古代の言語を全く知らないと朱熹を批判し、多くの場合、仁斎をも批判した。ただし、仁斎の解釈への批判は、それに相当する記述が『論語古義』に見えない場合もある。

生涯

教導立志基』「物徂徠」(小林清親筆)。勉学に励む上総時代の徂徠を描く。

江戸に生まれる。幼くして学問に優れ、林春斎林鳳岡に学んだ。しかし延宝7年(1679年)、当時館林藩主だった徳川綱吉の怒りに触れた父が江戸から放逐され、それによる蟄居に伴い、14歳にして家族で母の故郷である上総国長柄郡本納村(現・千葉県茂原市)に移った[4]。 ここで主要な漢籍や和書、仏典を13年あまり独学し、のちの学問の基礎をつくったとされる。この上総時代を回顧して自分の学問が成ったのは「南総之力」と述べている。元禄5年(1692年)、父の赦免で共に江戸に戻り、ここでも学問に専念した。増上寺の近くにを開いたが、当初は貧しく食事にも不自由していたのを近所の豆腐屋に助けられたといわれている(「#徂徠豆腐」参照)。

元禄9年(1696年)、将軍・綱吉側近で幕府側用人柳沢保明やなぎさわ やすあきら[1]に抜擢され、吉保の領地の川越で15人扶持を支給されて彼に仕えた。のち500取りに加増されて柳沢邸で講学、ならびに政治上の諮問に応えた。将軍・綱吉の面識も得ている。吉保は宝永元年(1705年)に甲府藩主となり、宝永7年(1706年)に徂徠は吉保の命により甲斐国を見聞し、紀行文『風流使者記』『峡中紀行』として記している[2]。宝永6年(1709年)、綱吉の死去と吉保の失脚にあって柳沢邸を出て日本橋茅場町に居を移し、そこで私塾・蘐園塾けんえんじゅくを開いた。やがて徂徠派という一つの学派(蘐園学派)を形成するに至る。なお、塾名の「蘐園」とは塾の所在地・茅場町にちなむ(隣接して宝井其角が住み、「梅が香や隣は荻生惣右衛門」 という俳句がある)。

荻生徂徠墓(東京都港区)

享保7年(1722年)以後は8代将軍・徳川吉宗の信任を得て、その諮問に与った。追放刑の不可を述べ、これに代えて自由刑とすることを述べた。豪胆で自ら恃むところ多く、支那趣味を持っており、中国語にも堪能だったという。多くの門弟を育てて享保13年(1728年)に死去、享年63。墓所東京都港区三田4丁目の長松寺ちょうしょうじにあり[1]昭和24年(1949年)に国の史跡に指定された。

子孫

荻生家は現代まで東京で続いており、伝来していた自筆稿本は1970年代にマイクロフィルム撮影され全集(後述)校訂に利用された[5]。儒学や経世論以外に、漢詩の注釈書『五言絶句百首解』、徂徠が考案したとされる独自ルールの広将棋解説書『広象棋譜面』、琉球王国江戸上り使節の記録『琉球聘使記』などが含まれる[5]

思想

徂徠学の成立

朱子学を「憶測にもとづく虚妄の説にすぎない」と批判、朱子学に立脚した古典解釈を批判し、古代中国の古典を読み解く方法論としての古文辞学(蘐園学派、日本の儒教学派においては古学に分類される)を確立した。中国文化に興味を持ち、文学や音楽を好んだ徂徠は、漢籍を読むときも訓読せず、元の発音のまま読むことによって本来の意味が復元できると考えた。

主著『弁名』『弁道』[6]では、「名」と「物」の関係を考察した。「名」とは道や仁義礼智のような儒教の概念のことであり、それは古代中国の聖人(先王)の時代には儀礼や習俗のことである「物」と一致していた。それは先王が「名」を与えることで「礼楽刑政」という儀礼体系を「道」(道徳ではなく社会制度)として成立させ、社会を創出したからである。しかし、後世になると「物」は忘れられ、「名」だけが残った。その「名」を南宋時代の意味で理解する朱子に対して、徂徠は「六経」を読むことで古代の「物」を考証し、本来の「名」を復元できると主張した。

経世思想

古文辞学によって解明した知識をもとに、中国古代の聖人が制作した「先王の道」(「礼楽刑政」)に従った「制度」を立て、政治を行うことが重要だとした。徂徠は農本主義的な思想を説き、武士や町人が帰農することで、市場経済化に適応できず困窮(「旅宿の徒」)していた武士を救えると考えた。

徂徠は柳沢吉保や第8代将軍徳川吉宗への政治的助言者でもあった。吉宗に提出した政治改革論『政談』には、徂徠の政治思想が具体的に示されている。人口問題の記述や身分にとらわれない人材登用論は特に有名である。これは、日本思想史の流れのなかで政治と宗教道徳の分離を推し進める画期的な著作でもあり、こののち経世思想(経世論)が本格的に生まれてくる。服部南郭をはじめ徂徠の弟子の多くは風流を好む文人として活躍したが、『経済録』を遺した弟子の太宰春台や、孫弟子(宇佐美灊水弟子)の海保青陵は市場経済をそれぞれ消極的、積極的に肯定する経世論を展開した。兵法にも詳しく、『孫子国字解』を残した。卓越した『孫子』の注釈書と言われている。

後世への影響

直接の弟子筋の他にも徂徠学に影響を受けた者は多い。大坂町人が運営した私塾である懐徳堂では朱子学者の中井竹山などが徂徠学を批判した[7]。その中からは富永仲基のような優れた文献学者が輩出されていった。また、本居宣長は古文辞学の方法に大きな影響を受け、それを日本に適用した『古事記』『日本書紀』研究を行った。徂徠学の影響力は幕末まで続き、西洋哲学者の西周は徂徠学を学んでいた。

元禄赤穂事件への見解

元禄赤穂事件における赤穂浪士の処分裁定論議では、林鳳岡をはじめ室鳩巣浅見絅斎などが主君のための仇討を賛美して助命論を展開したのに対し、徂徠は義士を切腹させるべきだと主張した(後述のように異説あり)。

  • 『徂徠擬律書』と呼ばれる文書において、

「義は己を潔くするの道にして法は天下の規矩也。礼を以て心を制し義を以て事を制す、今四十六士、其の主の為に讐を報ずるは、是侍たる者の恥を知る也。己を潔くする道にして其の事は義なりと雖も、其の党に限る事なれば畢竟は私の論也。其の所以のものは、元是長矩殿中を憚らず其の罪に処せられしを、またぞろ吉良氏を以て仇と為し、公儀の免許もなきに騒動を企てる事、法に於いて許さざる所也。今四十六士の罪を決せしめ、侍の礼を以て切腹に処せらるるものならば、上杉家の願も空しからずして、彼等が忠義を軽せざるの道理、尤も公論と云ふべし。若し私論を以て公論を害せば、此れ以後天下の法は立つべからず」

と述べている。これは、幕府の諮問に対して徂徠が上申したとされる細川家に伝わる文書だが、真筆であるかは不明[8]

同じく、浅野家赤穂藩があった兵庫県赤穂市も『徂徠擬律書』は、幕府に残らず細川家にのみ残っていること、徂徠の「四十七士論」(下記)と徂徠の発想・主張に余りに違いがありすぎることから、後世の偽書であるとの考察をしている[9]

  • 一方、『政談』のうち「四十七士論」[10](宝永2年)では、「内匠頭の刃傷は匹夫の勇による『不義』の行為であり、討ち入りは主君の『邪志』を継いだもので義とは言えず」と論じている[11]

徂徠の弟子・太宰春台が、「徂徠以外に『浪士は義士にあらず』という論を唱える者がなく、世間は深く考えずに忠臣と讃えている」と述べている点から徂徠の真筆であると思われる[12]

創作での徂徠

徂徠豆腐

落語講談浪曲の演目で知られる『徂徠豆腐[13]』は、将軍の御用学者となった徂徠と、貧窮時代の徂徠の恩人の豆腐屋が赤穂浪士の討ち入りを契機に再会する話である。江戸前落語では、徂徠は貧しい学者時代に空腹の為に金を持たずに豆腐を注文して食べてしまう。豆腐屋は、それを許してくれたばかりか、貧しい中で徂徠に支援してくれた。その豆腐屋が、浪士討ち入りの翌日の大火で焼けだされたことを知り、金銭と新しい店を豆腐屋に贈る。ところが、義士を切腹に導いた徂徠からの施しは江戸っ子として受けられないと豆腐屋はつっぱねた。それに対して徂徠は、

「豆腐屋殿は貧しくて豆腐を只食いした自分の行為を『出世払い』にして、盗人となることから自分を救ってくれた。法を曲げずに情けをかけてくれたから、今の自分がある。自分も学者として法を曲げずに浪士に最大の情けをかけた、それは豆腐屋殿と同じ。」

と法の道理を説いた。さらに「武士たる者が美しく咲いた以上は、見事に散らせるのも情けのうち。武士の大刀は敵の為に、小刀自らのためにある。」と武士の道徳について語った。これに豆腐屋も納得して贈り物を受け取るという筋。浪士の切腹と徂徠からの贈り物をかけて「先生はあっしのために自腹をきって下さった」と豆腐屋の言葉がオチになる。

三つの坂

「人生には三つの坂がある。上り坂、下り坂、そして『まさか』という坂」という語句は、この徂徠豆腐のセリフである。華麗なる一族で引用され、それで有名になった。

著作

単著

全集

『荻生徂徠全集』は、みすず書房河出書房新社から出版されたが、ともに未完結である[14]

みすず書房版・全集

河出書房新社版・全集

  • 『荻生徂徠全集』 第1巻、今中寛司・奈良本辰也 編、河出書房新社、1973年。 - 収録:弁道、弁名、蘐園随筆、蘐園十筆。
  • 『荻生徂徠全集』 第2巻、今中寛司・奈良本辰也 編、河出書房新社、1978年7月。 - 収録:論語徴、大学解、中庸解、孟子識。
  • 『荻生徂徠全集』 第3巻、島田虔次 編輯、河出書房新社、1975年。 - 収録:読荀子、読韓非子、読呂氏春秋、尚書学、孝経識、経子史要覧、論語弁書、原文・校異・解題。
  • 『荻生徂徠全集』 第5巻、島田虔次 編輯、河出書房新社、1977年1月。 - 収録:訳文筌蹄、訓訳示蒙、絶句解、絶句解拾遺、古文矩・文変、詩文国字牘、南留別志、風流使者記。
  • 『荻生徂徠全集』 第6巻、島田虔次 編輯、河出書房新社、1973年。 - 収録:政談、太平策、徂徠先生答問書、蘐録、蘐録外書。

選集

門人

演じた俳優

脚注

注釈

出典

  1. a b c d e f g 荻生徂徠 とは”. コトバンク. 2018年12月1日閲覧。
  2. a b c d e 髙橋 2011, p. 143.
  3. ^ その弟の影響を受けて、『明律国字解みんりつこくじかい』を著している。
  4. ^ 荻生徂徠勉学の碑”. 茂原市. 2018年12月1日閲覧。
  5. a b 「荻生徂徠の資料、子孫が寄贈 独自の将棋ルールブックなど150点 東大駒場図書館」朝日新聞デジタル(2022年5月9日)同日閲覧
  6. ^ 以下、子安(2008)
  7. ^ 小島(1994)、子安(2000)
  8. ^ 細川綱利は「十七人の勇者共は御屋敷のよき守神」として、を保存し、切腹した義士の遺髪を分けて頂き供養塔などを建て、永遠に保存し名所として残す事を命ずる(『堀内伝右衛門覚書』)など浅野贔屓であった。のち、諸事情により細川家の態度が変わり、当時の遺構は散逸してしまっている。
  9. ^ 赤穂市発行『忠臣蔵』第1巻
  10. ^ 著作全集・選集によっては「四十七士の事を論ず」となっている文献もあり。
  11. ^ 早稲田大学・谷口眞子近世日本の中期における忠義の観念について-山崎闇斎学派を中心に-」第二章第一節・51頁『WASEDA RILAS JOURNAL』No.4(2016年10月、早稲田大学総合人文科学研究センター)
  12. ^ 太宰春台『赤穂四十六士論』(享保17年)
  13. ^ 第130話落語「徂徠豆腐」”. ginjo.fc2web.com. 2020年3月19日閲覧。
  14. ^ 「峡中紀行」は荻生徂徠全集の何巻に載っているか知りたい。”. 国会図書館 (2012年). 2018年12月1日閲覧。

参考文献

  • 尾藤正英 著「荻生徂徠」、相良亨松本三之介源了圓 編『江戸の思想家たち』 下、研究社出版、1979年11月。ISBN 4-327-38410-0
  • 尾藤正英「荻生徂徠の思想――その人間観を中心に」『東方学』第58輯、東方学会、1979年7月。
  • 澤井啓一「人情不変――徂徠学の基底にあるもの」『寺子屋語学・文化研究所論叢』創刊号、寺小屋語学・文化研究所、1982年7月。
  • 髙橋修「荻生徂徠」『柳沢吉保と甲府城 山梨県立博物館企画展』山梨県立博物館、2011年10月。
  • 八木清治 著「荻生徂徠と「江戸」の発見」、武蔵大学公開講座ワーキング・グループ 編『時代を生きた人々』御茶の水書房武蔵大学公開講座〉、2001年10月。ISBN 4-275-01880-X

関連文献

関連項目

外部リン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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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gyū Sorai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Ogyū Sorai
荻生 徂徠
Ogyū Sorai from Japanese book 『先哲像伝』
BornMarch 21, 1666
DiedFebruary 28, 1728 (aged 61)
Edo, Japan
OccupationsHistorian, philologist, philosopher, translator

Ogyū Sorai (荻生 徂徠Japanese pronunciation: [o.ɡʲɯː (|) soꜜ.ɾai, o.ŋʲɯː-],[1][2] March 21, 1666 – February 28, 1728), pen name Butsusorai/Bussorai[3] (物徂徠), was a Japanese historian, philologist, philosopher, and translator. He has been described as the most influential such scholar during the Edo period Japan. His primary area of study was in applying the teachings of Confucianism to government and social order. He responded to contemporary economic and political failings of the Tokugawa shogunate, as well as the culture of mercantilism and the dominance of old institutions that had become weak with extravagance. Sorai rejected the moralism of Neo-Confucianism and instead looked to the ancient works. He argued that allowing emotions to be expressed was important and nurtured Chinese literature in Japan for this reason. Sorai attracted a large following with his teachings and created the Sorai school, which would become an influential force in further Confucian scholarship in Japan.

Biography

Grave of Ogyū Sorai

Sorai was born in Edo the second son of a samurai who served as the personal physician of Tokugawa Tsunayoshi, who was at the time daimyō of Tatebayashi Domain. At an early age, Sorai studied the Zhu Xi version of Neo-Confucianism under Hayashi Gahō and Hayashi Hōkō; however, his father was exiled in 1679 to a rural village what is now Mobara, Chiba after angering Tsunayoshi. In this rustic setting, he continued to study the major Chinese classics, as well as Japanese and Buddhist texts on his own for the next 13 years, which formed the foundations for his later philosophy. In 1692, Sorai's father was pardoned, and the family moved back to Edo. Sorai opened a school near the temple of Zōjō-ji to teach Chinese classics, and in 1696 received a position in the service of Yanagisawa Yoshiyasu, a senior councillor to the now Shōgun Tokugawa Tsunayoshi. Sorai was assigned to serve Yanagisawa in his domain of Kawagoe. Later, he was granted income of 500 koku, and was assigned to Yoshiyasu's Edo residence, where he provide advice on political issues. One of these issues involved the Akō vendetta in which the Forty-seven rōnin avenged their fallen lord by killing Kira Yoshinaka in 1702. Whereas Muro Kyūsō, Hayashi Hōkō and others praised the actions of the rōnin for their loyalty, Sorai took the opposite stance and argued that they should be forced to commit seppuku, for regardless of the "righteousness" of their actions and the weight of public opinion, the fact that they committed a capital offense was undeniable, and the rule of the law must be impartial.

In 1705, Yoshiyasu became daimyō of Kōfu Domain. Sorai remained in Edo, but visited Kai Province in 1706 at the behest of Yoshiyasu, and wrote a travelogue of the journey, In 1709, following the death of Tokigawa Tsunayoshi, Yanagisawa Yoshiyasu fell from favor, and Sorai left his service and relocated to Nihonbashi, where he opened a private school, the Kenenjuku.He gradually turned away from the teachings of Zhu Xi to develop his own philosophy and school.[4]

In 1722, Sorai was asked to return to public office under the 8th Shogun, Tokugawa Yoshimune, but he refused. He continued to teach until his death in 1728. His grave is located at the temple of Chōshō-ji in Mita, Minato, Tokyo (35°38′38.4″N 139°44′16.2″E). The gravestone has the inscription Sorai-mono sensei no haka (徂徠物先生之墓) in front and an inscription on the back stating that the epitaph was by Honda Tadanori and the writing by the noted calligrapher Matsushita Useki. The tomb was designated a National Historic Site in 1949 .[5]

Teachings

Sorai wrote several influential works in which he identified two fundamental weaknesses in the philosophy of Neo-Confucianism. The first was in the bakufu-domain system, which by the eighteenth century was in trouble. As a result, he doubted whether the reliance on finding an individual's ethical good was sufficient. As such he argued that the political crisis of the time required more than perfecting moral character. Moreover, he saw the ancient Chinese sage-kings as concerned not only with morality but also with government itself. His second disagreement with Neo-Confucianism was that he felt putting too much emphasis on morality repressed human nature, which was based on human emotion.

However, these weaknesses he felt stemmed not from a deficiency in Confucianism itself, but rather from a misreading of classic works of the Four Books and the Five Classics by Neo-Confucianists, which he insisted "did not know the old words." Sorai went back to the ancient works for more reliable knowledge, stating "The ultimate form of scholarly knowledge is history." To him, these historical works were the ultimate source, even for an ever-changing present. Sorai thought that study of philosophy began with the study of language. In this he was highly influenced by the Ancient Rhetoric school of the Ming period, which was a neoclassical movement that saw the Qin and Han periods as the model for prose, and the Tang period for poetry. The Sorai school introduced Selections of Tang Poetry, a work thought to have been edited by Li Panlong (李攀竜 1514–70), a founder of the Ancient Rhetoric school, to Japan, where it became very popular. As a result, his school is today sometimes also known as the Ancient Rhetoric (kobunji 古文辞) school. However it differed in that he saw it mostly as a means of accessing the Five Classics. He would also accuse other Confucianists in Japan, such as Hayashi Razan, of relying too heavily on Song sources such as Zhu Xi.[6]

Sorai further differed from the Neo-Confucian viewpoints in other aspects. One was that the Way was not a predetermined principle of the universe, but rather an establishment of men, of the ancient sages who described it in the Confucianist classic works. These works provided for the Way, which was divided by rites (rei ) and music (gaku ). The former gave social order, while the latter was inspiration for the heart. In this it directly allowed for the flow of human emotions, something denied by the moralist philosophy of Song Confucianism. Sorai argued for the opposite, allowing one to be enriched through music and poetry. As a result of his teachings in putting emphasis on literature as a fundamental form of human expression, Chinese writing would begin to thrive in Japan, becoming an accepted artistic pursuit. His school would thus produce several such great writers of Chinese composition at that time.[4]

Sorai was furthermore a supporter of the samurai class. Institutions that were once under great leadership will later decline and more able men will be less likely to come to power. The samurai, he felt, were best able to overcome this through a system of rewards and punishment. He also saw problems with the merchant class at the time, which he accused of conspiring to fix prices. He was not, however, a great supporter of the lower classes. He argued, "What possible value can there be for the common people to overreach their proper station in life and study such books [as the Confucian classics]?"[7]

Some later scholars criticised his work and found his teaching to be impractical. Goi Ranshū believed that Sorai was motivated to surpass Itō Jinsai, another Confucianist who had influenced him a great deal, and that Sorai took his arguments to the level of absurdity for this reason. Had any of his teachings actually been implemented, Goi felt it would have caused extensive damage to moral philosophy.[8] Another later scholar critical of Ogyū's teachings was Nakai Chikuzan, who was also familiar with Goi's opposition to Ogyū Sorai. Goi wrote his opposition to Sorai in his essay Hi-Butsu hen, which was written in the 1730s, but not published until 1766 having been edited by Chikuzan and his brother. Nakai later wrote his own, highly emotional, rebuttal to Ogyū's beliefs in his work Hi-Chō (1785), wherein he rejected the idea that individuals could not better themselves through moral choices. Moreover, he claimed individuals were able to judge whether external ideas and actions were true and just or not. Denial of these morals, he felt, would leave only "rites and rules" to be followed.[9]

Master Sorai's Teachings

Master Sorai's Teachings is a record of his teaching and exchanges with his students. The text was edited by his own students and contained their questions followed by his answers to them. The work was not released until 1724, but is thought to have actually taken place around 1720. In it he reinforces that literature is not so much intended for the purposes of instruction in morality or governance, but rather it simply allows for the flow of human emotions. From this, answers on the former topics may be found, he argued.[4] While Ogyu sought to redefine the sources of Tokugawa legitimacy, his purpose was clearly to strengthen the authority of the Tokugawa shogunate.[10]

Economic contributions

Though Sorai was best known for being a teacher of Confucianism, he was also called on to find answers to some of the issues in the growing economy, the most notable of which was the rising inflation and prices that began after the debasement of coinage in 1695. The Tokugawa shogunate carried out a total of 12 recoinages between 1695 and the start of the Meiji Restoration in 1868 debasing the currency in an attempt to match the rising demand for money as the commercial economy rapidly expanded. There was an attempt to quell the inflation and high prices in 1714, when the government reminted coins in an effort to reduce the amount of gold in circulation. However, this exacerbated the problem as the old coins remained in circulation alongside the newly minted coins. In response to the currency reforms, Sorai noted that the monetary policies enacted failed as they accounted for only one of the causes of high prices and inflation. Sorai realized that there were more than just monetary influences that needed to be taken into account to address the problem. He noted that since the large cities like Edo had become the center of large markets one had to consider the costs of tariffs and transportation from distant provinces as well as the costs of land and housing in the cities into final prices. Additionally, there was a breakdown of the traditional class distinctions: commoners were able to buy goods that were once reserved for the higher classes, which pushed up prices. Finally, he pointed out that as the merchant class grew in power, it began to collude and fix prices above what was normal. It was all of these factors together, in addition to the monetary influences, that caused wealth and power to shift away from the shogun and into the hands of the merchants, which prompted the debasement of coinage, leading to inflation and exorbitant prices.[11]

Works

  • Regulations for Study (Gakusoku, 1715)
  • Distinguishing the Way (Bendō, 1717)
  • Master Sorai's Teachings (Sorai sensei tōmonsho, 1724)

He has also been credited for the invention of ko shogi, a large shogi variant, dated to before 1694.

References

  1.  NHK Broadcasting Culture Research Institute, ed. (24 May 2016). NHK日本語発音アクセント新辞典 (in Japanese). NHK Publishing.
  2.  Kindaichi, Haruhiko; Akinaga, Kazue, eds. (10 March 2025). 新明解日本語アクセント辞典 (in Japanese) (2nd ed.). Sanseidō.
  3.  荻生徂徠コトバンク.
  4.  Shirane, Haruo. (2006). Early Modern Japanese Literature, pp. 367-8.
  5.  "荻生徂徠墓" (in Japanese). Agency for Cultural Affairs.
  6.  Totman, Conrad, (1982). Japan Before Perry, p. 155.
  7.  Totman, pp. 181-183.
  8.  Najita, Tetsuo. (1998). Visions of Virtue in Tokugawa Japan, p. 130.
  9.  Najita, pp. 161-163.
  10.  Tucker, J., ed. (2006) Ogyu Sorai’s Philosophical Masterworks. pp. 12-13, 48-51.
  11.  Morris-Suzuki, (1989). A History of Japanese Economic Thought, pp. 16-20.

Bibl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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