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태설이라는 한 '친일파'의 일제시대 행각
비이성적 반일감정 관련 글들
2013. 11. 8.
https://blog.naver.com/athina/40200453628이 인물은 일제시대에 있었다는 '자력갱생운동(총독부에서 농촌 진흥을 위해 장려한 관제 운동)' 관련한 기사에서 처음 이름을 보았다.
이 1936년 기사를 보면, 함경남도 도회의 도의원인 유태설은 지난 수년 동안 총독부에서 농촌진흥운동과 자력갱생운동을 열렬히 부르짖는데도 해마다 자낙농이 몰락하고 소작농이 증가하는 것에 대해 사사키 내무무장이라는 총독부 관료에게 따져 묻고, 사사키가 이는 부득이한 현상이라 일축하자 성의없는 답변을 한다고 분격하여 설전을 벌였다고 한다.
흡사 대한민국 국회의 국감현장을 연상시키는 모습이다.
이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 궁금하여 검색을 해 보니...
http://ko.wikipedia.org/wiki/%EC%9C%A0%ED%83%9C%EC%84%A4 (유태설)
유태설은 1890년에 태어나 1914년에 경성전수학교를 졸업하여 10여년 간 판사를 역임 후 1926년에 퇴직하여 함흥에서 변호사 개업을 하여 활동하였다. 함흥부회 의원과 함경남도 도회의원을 역임하고 1933년에는 중추원 참의로 발탁되었다. 태평양전쟁 당시에는 조선임전보국단에 가담하였다. 해방 후 반민특위 조사 대상에 올랐으나 도피자로 처리되어 체포되지는 않았고 1968년에 사망하였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704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한일합방 전의 한성법학교가 합방 후 이름이 바뀐 경성전수학교는 1922년에 관립 경성법학전문학교로 승격되고 해방 후 경성제대 법학부와 통합되어 서울대학교 법대의 모태가 된 곳이다. 경성전수학교는 실무 법조인 양성, 경성제대 법학부는 법학 연구를 주 소임으로 하였다고 한다.
일제시대 유태설의 활동을 네이버 라이브러리로 검색해보면 함흥의 유지로 활동하며 지역사회를 위해 상당히 긍정적인 활동을 많이 하였다.
이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 궁금하여 검색을 해 보니...
http://ko.wikipedia.org/wiki/%EC%9C%A0%ED%83%9C%EC%84%A4 (유태설)
유태설은 1890년에 태어나 1914년에 경성전수학교를 졸업하여 10여년 간 판사를 역임 후 1926년에 퇴직하여 함흥에서 변호사 개업을 하여 활동하였다. 함흥부회 의원과 함경남도 도회의원을 역임하고 1933년에는 중추원 참의로 발탁되었다. 태평양전쟁 당시에는 조선임전보국단에 가담하였다. 해방 후 반민특위 조사 대상에 올랐으나 도피자로 처리되어 체포되지는 않았고 1968년에 사망하였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704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한일합방 전의 한성법학교가 합방 후 이름이 바뀐 경성전수학교는 1922년에 관립 경성법학전문학교로 승격되고 해방 후 경성제대 법학부와 통합되어 서울대학교 법대의 모태가 된 곳이다. 경성전수학교는 실무 법조인 양성, 경성제대 법학부는 법학 연구를 주 소임으로 하였다고 한다.
일제시대 유태설의 활동을 네이버 라이브러리로 검색해보면 함흥의 유지로 활동하며 지역사회를 위해 상당히 긍정적인 활동을 많이 하였다.
함경남도 도회에서의 활동으로는 흥남 조선질소비료주식회사(기사에서는 조질회사로 약칭. 일본질소비료주식회사의 자회사)가 부전강, 장진강에서 수력 발전으로 생산되는 전기를 염가로 쓰고 있는 것을 통박하며, 이 조질회사로부터 전기료를 더 받아 그 재원을 활용하여 초등학교 입학률이 2할 5푼도 안 되는 비참한 함경남도의 교육을 위한 재정에 활용해야 할 것이 아니냐며 열변을 토한 일이 있다. 실제로 이 열변은 받아들여져서 당국은 일본 내지의 수력 발전된 전기 사용료를 조사하여 조질회사에게 요금을 증수하여 연간 4만원의 함경남도 재원을 확보하게 되었다는 후속 기사가 있다.
또한 함경남도에도 전문학교를 설치해야 한다고 도회에서 열변을 토하였다는 일본어 기사(원산매일신보)가 존재한다.
함흥여자고등보통학교를 설치하기 위한 운동의 중심인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변호사로서는 수리조합, 농업조합 활동을 하다가 고소당한 농민들을 변호하기도 하였고, 태평양노조, 공산주의 청년동맹을 변호하기도 하였다. 또한 순사를 사살한 국민부원(국민부는 1928년에 만주에서 설립된 독립운동 조직)의 변호를 맡아 감형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함흥수리조합 살해사건에서의 변호에서는 이 사건은 일본인 지주가 조선인을 무시하여 함부로 구타하여 생겨난 일로 피고인들은 사건과 무관하므로 무죄를 주장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중추원참의, 함경남도 도회의원을 역임하였으니 유태설이 일제의 통치에 순응하고 협조하였다는 의미에서 '친일파'가 아니라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유태설은 대한제국의 녹을 먹은 인물이 아니라 한일합방 후 총독부의 교육기관에서 법조인으로서의 교육을 받아 판사가 된 인물이니 대한제국에 대한 배신자 혹은 역적이라 볼 수는 없다. 또한 함경남도 도회의원으로서, 변호사로서 함경남도와 함흥 사람들의 인권과 복리를 위해 본인의 입장에서 열심히 노력한 인물임에는 분명하다.
'친일파'라는 딱지야 그렇다 치더라도 과연 이 사람이 '반민족행위자'라는 무시무시한 이름까지 덮어써야 하는 것일까? 일본 비료회사로부터 전기사용료를 증수하여 교육 재정에 활용하게 한 것이나, 일본인 지주 살해 사건에 연류된 조선인을 극력 변호한 사람인데도...
나는 이 사람이 친일파건 아니건 간에 보편적 견지에서 '나쁜 놈' 혹은 '악질'이라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일제시대에 내가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이 사람보다 더 훌륭한 인생을 살 자신이 없기도 하다.
태그#유태설#친일파유태설#도회의원#부회의원#중추원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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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태설이라는 한 '친일파'의 일제시대 행각|작성자 다만버
===
유태설
유태설 劉泰卨 | |
|---|---|
| 본명 | 유태설 |
| 로마자 표기 | Yu Tae-seol |
| 출생 | 1890년 2월 19일 |
| 사망 | 1968년 12월 1일 |
| 국적 |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
| 경력 |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
| 직업 | 법조인 |
| 활동 기간 | 일제강점기 |
유태설(劉泰卨, 일본식 이름: 邦本泰卨구나모토 다이세쓰, 1890년 2월 19일 ~ 1968년 12월 1일)은 일제강점기의 법조인이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도 지냈다.
생애
함경남도 북청군 출신으로 1914년에 경성전수학교를 졸업했다.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 서기 겸 통역생을 거쳐 1916년에 조선총독부 판사로 임명이 되면서 법조인으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공주지방법원 홍성지청 판사, 함흥지방법원 판사, 함흥지방법원 원산지청 판사, 평양복심법원 판사 등을 지낸 뒤 1926년에 퇴직하였다. 이때 종5위에 서위되어 있었으며, 퇴직한 후에는 함흥부에서 변호사를 개업해 활동했다.
함흥부회 의원과 함경남도 도회의원을 역임하는 등 지역 유지로 활동하던 중, 1933년에는 중추원 참의로 발탁되었다.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조선임전보국단에 가담한 바 있다.[1]
태평양 전쟁 종전 후에 미군정 지역인 서울로 내려와 있었다. 1949년에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반민특위가 반민피의자를 체포했을 때 조사 대상에 올랐다. 그러나 도피자로 처리되어 체포되지 않았고, 반민특위가 활동을 중단하면서 처벌받지 않았다.
사후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 중 중추원 부문에 수록되었고,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중추원과 사법 부문에 포함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같이 보기
참고자료
각주
-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2004년 12월 27일). 《일제협력단체사전 - 국내 중앙편》. 서울: 민족문제연구소. 395쪽쪽. ISBN 89-9533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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