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1-20

식민지사 비교 연구 - 한국과 대만 - 문명기

(2) 박찬승 - 어제 토요일 오후에 한국역사연구회에서 연구회 내 '일제지배정책사 연구반'에서 주최하는 첫번째 전문가 초청... | Facebook


박찬승

어제 토요일 오후에 한국역사연구회에서 연구회 내 '일제지배정책사 연구반'에서 주최하는 첫번째 전문가 초청 특강이 열렸다. 어제는 국민대 한국역사학과 문명기 교수님이 오셔서 '식민지사 비교 연구의 회고와 전망 - 한국과 대만의 사례를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2시간 가까운 강의를 해주셨고, 이후에 40분 간의 질의 응답 시간을 가졌다. (관련 논문은 국민대에서 내는 <한국학논총> 63집, 2025에 실려 있다.) 이날 특강에는 연구반원 24명 가운데 21명이 참석하는 높은 출석율을 보여주었다. 
문명기 교수님은 다 아다시피 한국에서 가장 대표적인 대만사 연구자이시다. 최근에는 특히 식민지 시기 대만과 조선을 비교하는 논문을 십여 편 이미 발표하셨다. 어제 강의는 이를 모두 집약해서 강의해 주신 것이라고 생각된다. 대만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큰 공부가 되었고, 또 식민지 조선을 객관화해서 볼 수 있는 계기도 되었다. 복습 삼아 주요 내용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이하 경칭은 생략)
====
강의의 초점은 식민지 시대 조선총독부와 대만총독부의 국가능력을 비교하는 것이었다. 

문교수에 의하면, 1인당 실질 GDP는 대만이 조선의 약 2배였다고 한다. 따라서 식민지시기 조선인은 해외로 4백 내지 5백만 명이 이주 내지는 노동을 하러 나갔지만, 대만인은 거의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또 대만총독부와 조선총독부의 인구 1인당 세입을 비교해보면 대만 쪽이 조선 쪽의 2배 정도 된다고 한다. 당연하지만 세출도 마찬가지다. 대만을 기준으로 하여 조선 쪽의 통치비용을 계산하면, 1925년에 통치 필요비용은 4억280만엔이었는데, 실제 투입된 비용은 1억 7,200만엔으로 필요경비의 43%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만큼 조선총독부의 재정은 빈약했던 것이다. 또 세출의 쓰임새를 보면, 대만의 경우 산업진흥비가 1위(33%), 도로 항만 교통 통신 투자비가 2위(27%), 일반행정이 3위(20%), 치안 방위 등이 4위(13%)인 데 비하여, 조선의 경우에는 도로 항만 교통 통신이 1위(30%), 치안 방위가 2위(26%), 일반행정이 3위(21%),  산업진흥비가 4위(14%)로 차이가 있었다고 한다. 즉 조선의 경우, 치안과 관련된 예산 투자가 많았던 것이다. 

그런데 경찰비 합계를 보면 당연히 조선이 대만보다 2배 정도 많았지만, 인구 1인당 경찰비를 보면 대만 쪽이 조선 쪽의 2배 정도 되었다고 한다. 1936년의 경우, 대만의 인구 1인당 경찰비는 2.98엔인데, 조선의 인구 1인당 경찰비는 0.876엔에 지나지 않았다. 즉 3분의 1도 채 안 되었던 것이다. 대만의 경우 인구 1인당 경찰비 투입이 상당히 많았다. 그 결과 일상생활을 규제하는 범죄즉결(경범죄) 처분의 숫자도 대만 쪽이 조선 쪽보다 훨씬 많았다. 특히 1920년대 후반 이후에는 인구 1천 명 당 대만의 경우 최고 32명까지 범죄즉결처분을 받았지만, 조선의 경우에는 최고 4.5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즉 대만인들은 훨씬 더 강력한 경찰의 규율 하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 대만은 고토 신페이(後藤新平)가 꿈꾸었던 경찰국가를 사실상 실현하고 있었다. 

대만의 경우에는 경찰력 외에도 '보갑제(保甲制)'라는 강력한 주민통제 시스템이 또 있었다. 보갑제란 10호를 1갑, 10갑을 1보로 조직하여 연대책임하에 치안유지와 일반행정 보조를 담당하게 하는 것이었다. 조선의 경우에는 그러한 시스템은 없었다. 대만총독부는 보갑제를 이용하여, 도로 부역을 동원하기도 했고, 전족(纏足)이라는 악습을 근절하기도 했으며, 페스트를 옮기는 쥐를 잡기도 했다고 한다.

문교수에 의하면, 결국 대만의 식민통치모델은 고비용, 고효율 체제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조선의 경우에는 저비용, 저효율 체제였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문교수의 논리를 따르면, 조선총독부는 대만총독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한 국가'라는 말이 된다. 이는 한국의 연구자들이 조선총독부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강한 국가'라고 일반적으로 인식해온 것과 차이가 있다. 최근에 윤해동 교수는 <식민국가와 대칭국가>라는 책을 냈는데, 이 책에서도 조선총독부는 대체로 '강한 국가'로 묘사되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는 한국사 연구자들도 조선총독의 권한, 예를 들어 제령(制令) 제정의 권한도 사실은 본국 정부에 의해 상당한 통제를 받고 있었고, 총독부의 예산 편성도 본국 정부와 의회의 강력한 통제를 받고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1929년 척식국이 만들어진 뒤에는 본국 정부의 통제가 점점 더 강화되어 갔다는 점도 주목하고 있다. 따라서 학계에서 조선총독부를 '강한 국가'로 묘사하는 경향은 점점 약화되어 갈 것 같다. 
한국 학자들이 조선총독부를 '강한 국가'로 표현해온 것은 그 이전의 대한제국보다는 훨씬 강한 국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같은 시기 대만총독부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약한 국가'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에 부딪치게 된다. 우리는 조선총독부를 대만총독부와 비교해야 하는가, 아니면 대한제국 정부와 비교해야 하는가, 그것도 아니면 인도, 베트남등 다른 식민지의 총독부와 비교해야 하는가. 쉽지 않은 문제이다. 비교사에서 비교의 대상을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  이것이 가장 어려운 문제이다.
====
Author
박찬승
저는 지난 번에 지방제도를 연구하면서 일본 본국, 식민지 조선, 식민지 대만의 3자를 비교해 보았지요. 그랬더니 식민지 조선과 대만 제도의 '식민성'이 더 뚜렷이 부각되었지요. 결국 밝히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비교의 대상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1d
Edited
Kyung Hee Rho
박찬승 저는 늘 조선과 일본, 중국, 서양의 문학, 출판, 서적 등을 비교할 때마다 오히려 ‘조선’을 점점 더 알아간다는 생각이 듭니다^^
1d

Author
박찬승
노경희 저도 식민지 조선을 알기 위해 대만, 베트남, 인도, 필리핀등과 비교해 보고 있습니다.
1d
Kyung Hee Rho
결국 비교사 연구는 ‘기준’을 어떻게 설정하는가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 기준에 따라 각자가 처한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주는 것, 맥락을 설명하는 일이 중요한데, 이 걸 하려면 양쪽을 다 아주 잘 알아야 하니까ㅠㅠ 이게 정말 어려운 것 같아요ㅠㅠ 그런데 조선총독부 Vs 대만총독부, 대한제국 Vs 조선총독부 비교, 모두 중요한 문제라 생각합니다!
1d
Kang Heejung
주체와 의지가 문제 아닐까요? 벳남, 인니, 말레이 전부 다른 본국이니.... 본국사에 연동된 정책을 폈겠죠. 일제가 어디를 모델로 했느냐에 따라서도 달라질 거 같습니다. 사안 대 사안으로.

====

http://dx.doi.org/10.25232/ku.2025.63·133​

식민지사 비교연구의 회고와 전망 -식민지 조선과 식민지 대만의 비교연구 사례를 중심으로-*

문명기**

목 차

Ⅰ. 머리말

Ⅱ. 식민지사 비교연구의 대체적인 윤곽

Ⅲ. 식민지 권력의 국가 능력

Ⅳ. ‘반일 한국친일 대만의 역사적 원인

Ⅴ. 맺음말

Ⅰ. 머리말

이 글은 주로 2000년 이후 한국 역사학계에서 수행된 식민지사 비교연구

와 관련한 기왕의 연구를 정리·소개하고, 약간의 비평과 전망을 제시하는 것을 기본적인 목적으로 한다. 기왕에 본고와 유사한 목적을 가지고 발표된 논문이 없지 않지만,1) 이 글은 기존의 논문에 비해 다루는 시기와 범위를

본고는 2024 11 8일 국민대 한국학연구소가 개최한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 소 설립 50주년 기념 학술회의한국사 연구의 회고와 전망>에서 발표한 원고를 수정·보완한 것이다. 토론자인 박우현 교수의 유익한 토론에 감사드린다.

** 국민대학교 한국역사학과 교수

좀 더 확장하고자 한다. 아울러 이 글에서는 단순한 기존 연구의 정리나 소개 차원에 그치지 않고, 식민지사 비교연구와 관련하여 제기될 수 있는 쟁점을 시론적으로나마 다루어 보려고 한다. 이를 위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서술할 것이다. 첫째 주로 21세기에 축적되어온 식민지사 비교연구 의 성과에 대한 개략적인 윤곽을 공동연구와 개별 연구로 나누어 소개하고, 둘째 한국-대만의 식민지사 비교연구 과정에서 제기된 쟁점 중 하나인 식민 지 권력의 국가 능력(state capacity)에 관한 논의를 정리함으로써 향후에 기대되는 활발한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고자 한다. 셋째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에 걸쳐 한국과 대만이 겪은 식민지 경험에도 불구하고 두 사회 가 상반된 대일 인식(한국반일, 대만친일)을 보이게 된 중층적인 역사적 원인을 시론적인 차원에서 탐구해 보고자 한다.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비교사 또는 역사학에서의 비교연구라는 방법론

에 관하여 얼마간 부연할 필요가 있다. 비교사는 (비교사의 전통이 비교적 박약한 한국 역사학계에 비해) 1930 년대부터 본격적인 비교사 관련 저작이 나 학술잡지가 등장한 구미 역사학계에서는 비교사에 관하여모든 마술사 의 지팡이들 중에 가장 효과적인 것이라는 마르크 블로크의 찬사도 있는가 하면, 제도화된 근대 역사학의 틀 안에서 비교사는 오히려 민족-국가 중심주 의 혹은 서구중심주의를 승인하거나 강화할 뿐이라는 의미에서 그저고귀 한 꿈”(피터 노빅)에 그치거나비교의 망령”(베네딕트 앤더슨)이 될 뿐이라 는 혹평도 있다.2) 아닌 게 아니라 두 지역, 국가 또는 문명을 비교하는 데는 일정한 중심성이 수반되기도 한다.

예컨대 인도 출신의 저명한 중국 근현대사 연구자인 프라센지트 두아라

(Prasenjit Duara)는 탈민족주의적 시각에서 중국 근대사를 재해석한 한

1)  문명기, 「한국의 대만사 연구, 1945~2012, 중국근현대사연구57, 2013(文明基, 「起初微小、必會扎根 - 臺灣史硏究在韓國, 1945~2012, 臺灣史硏究 20-2(臺灣 中央硏究院), 2012); 문명기, 「연구 분야의 지속과 확장: 중국근대사 연구(2016~17)와 대만사 연구(2013~17), 『역사학보』239, 2018.

2)  김택현, 「비교사와 방법으로서의 비교착오, 곤경, 그리고 유령들」, 『사림』28, 2007, 3쪽 및 24.

저작에서 기존 연구에서 자주 비교 대상이 되었던 근대 중국과 근대 일본 대신 근대 중국과 근대 인도를 비교하는 시도를 한 바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근대 중국은 근대 일본과 비교될 때에는왜 중국은 일본에 비해 근대성의 획득이 더뎠는가?”라는 질문에 시달리는 처지가 되었고, 반대로 근대 인도 와의 비교에서는왜 중국 사회는 인도 사회에 비해 (근대성에 저항하는) 종교 영역의 역량이 박약했는가?”라거나어째서 근대 중국은 (종교적 영향 력을 직접적인 정치적·사회적 영향력으로 전환시킬 수 있었던) 마하트마 간디와 같은 존재를 가지지 못했는가?”라는 질문에 시달리게 된다. 달리 말해 일본과의 비교를 통해 근대성의 획득이라는 관점에서 후진적이라고 규정된 중국은, 인도와의 비교를 통해 근대성 비판의 각도에서도 후진적인 꼴이 된 셈이다. 이렇게 비교사적 접근은 불가피하게 중심성 또는 선험적 소여(所與)를 내재할 수밖에 없다.[1]) 또 비교 과정에서 어느 한쪽의 우수함과 다른 한쪽의 열등함이 극명하게 대조됨으로써, (그럴 의도는 없었다고 하더 라도) 비교 대상이 우열을 기준으로 서열화될 위험성도 적지 않다.

하지만 비교사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시각도 여전히 사그라지지 않고 있 다. 예컨대 한 원로 동양사학자는 일찍이 비교사의 필요성을 강조한 바 있으 며,[2]) 한 서양사학자 역시 유럽중심주의의 극복과 대안적 역사상의 모색이라 는 문제의식과 연관될 수도 있으며, 또한 현실적으로 가능한한국인이 하는 서양사의 방향으로서 비교가 가지는 의미는 적극적으로 검토될 필요가 있 다고 주장하기도 했다.[3]) 더욱이 지나친 민족주의적 역사 연구나 역사 서술 에 따른 부작용에 대한 경고와 반성이 한국사학계 내부에서도 제기되어 온 실정이라면, 또 다른 지역 또는 국가와의 적극적인 비교를 통해서 한국사만 관찰할 때에는 드러나지 않는 많은 것들을 알려줄 수 있다면, 적극적으로 비교사적 접근을 수행하는 것은 한국사 자체의 진일보한 이해에도 기여하는 바가 없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비교사에 내재하는 위험성을 최소화하고 비교 대상을 적절한 수준으로 한정할 수 있다면,[4]) 비교사라는 방법은 여전 히 역사 연구의 중요한 방법론 중 하나로서 기능할 수 있다고 판단된다. 그런 면에서 동일한 식민 본국(=일본)의 식민지였고 사실상 동일한 통치체제 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통치 효과라는 면에서는 큰 차이를 보였던(후술) 식민 지 대만과 식민지 조선은 비교사적 접근의 적절한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Ⅱ. 식민지사 비교연구의 대체적인 윤곽

식민지사 비교연구가 본격화된 것은 21세기 들어서의 일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해방 이후, 특히 1950년대 이래 한국 학계의 중국사 연구가 (냉전이라는 구조적 요인으로 인해) 주로 대만 학계와의 관련 속에서 수행되 던 시기에는 대만사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는중국사의 일부로서의 대만사에 관심이 우선시되었다. 달리 말해 대만사는 중국사의 일부 또는 중국 지방 사의 맥락에서 이해되고 연구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한국과 대만이 공히 정치적 민주화와 사회적 자유화를 경험하는 1980년대 후반 이후에는 근근히 이어지던 대만 사회와 대만사에 대한 관심이 점차 증대된다.[5]) 한국과 대만 은 비슷한 시기에 일본의 식민통치를 경험했음은 물론이고 해방 이후 권위주 의 체제 아래서 고도의 경제성장을 경험했고, 1980년대 후반에는 정치적 민주화도 동시적으로 달성했다. 이러한 공통의 역사적 경험은 한국 사회의 대만 사회와 역사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이러한 관심은 연구의 양적 급증을 가져왔는데, 여기에는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 로 주창된동아시아적 시각에 입각한 역사 연구를 강조하는 입장,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의 대만사에 대한 관심, 그리고 한국사를 보다 상대화·객관화해서 이해하려는 한국사 영역에 서의 요구 등 여러 요인이 작용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중국 정부의 동북공정 문제와 관련하여 한국사학계·동양사학계와 정부 기관(특히 동북아역사재단) 1990년대 이래 대만 사회가 중국과의 정치적·문화적 차별화를 지향해왔다는 점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중국사의 상대화를 필요로 하는 일부 한국 역사학계의 움직임과 대만 역사 학계의중국사의 상대화조류가 결합하여 (규모는 작지만) 대만사에 대한 관심이 촉발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식민주의 사관의 극복을 위해 민족주의 사관을 강조한 나머지 한국사에 대한 과도한 일국사적·민족주의적 해석이 여러 학문적·현실적 부작용을 낳았다는 반성이 제기되면서 대만사는한국 사의 상대화를 위해서도 중요한 참조대상이 되기에 이른다. 요컨대 중국사 와 한국사 등 개별 國史의 상대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식민지 사를 포함한) 한국 근현대사의 참조대상(reference)으로서의 대만사에 대 한 관심도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흐름을 반영하여 2000년대에 들어 식민지사 비교연구가 본격적으

로 시도되기에 이른다. 이 중 주목할 만한 연구는 강만길 선생의 주도로 진행된 일련의 공동연구인데, 이들 공동연구는 『일본과 서구의 식민통치 비교』(2004)로 일단의 결실을 맺었다.[6]) 명확히 비교사적 관심을 표방하며 출간된 이 책은, 다만 그 세부 내용을 살펴보면 (대만과 조선의 관세정책을 비교한 송규진의 논문 정도를 제외하면) 식민지 경험을 가진 한국, 베트남, 인도, 필리핀 등의 식민지 경험에 대한 개별 사례 연구를 묶어 놓은 것에 불과하고 일정한 비교사적 방법론을 제시하거나 비교사가 시도된 것은 아니 었다. 이로부터 대략 20년 후인 2023년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추진된일제침 탈사 연구총서의 일환으로 출판된 『일제 식민지 조선 지배의 성격서구열 강의 식민 지배와의 비교』는[7]) 인도, 필리핀, 베트남, 아일랜드와 대만·조선 에 대한 서구열강과 일본의 식민지 지배 경험을 비교사적 시각에서 이해할 것을 목표로 한 연구 성과인데, 개별 국가나 지역의 식민지 경험을 해당 지역 역사연구자들이 개별적으로 서술한 점에서 본격적인 비교사 연구라고 보기가 어렵고 그런 면에서 전술한 강만길 등의 공동연구와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개별 식민지 경험을 다룬 각론 외에 이들 식민지 경험을 공통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총론을 덧붙이고 있다는 점에서 일정한 진전이 있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8])

반면 한국·대만·일본의 경제사 연구자들에 의한 공동연구의 결과인 『일본

자본주의와 한국·대만』은 경제학이라는 공통의 학문적 기반을 공유하고 있 었기에 경제사적 방법론을 구사하여 식민 본국과 식민지의 경제 변동의 의미 를 다양한 부문에서 추적했다는 점에서 일정한 비교사적 의의를 갖춘 연구라 고 할 수 있다. 특히 개별 논문에 따라서는 한국-대만 식민지사를 비교사적 으로 이해하는 데 일정하게 공헌한 연구도 없지 않다. 무엇보다도 식민지사 연구자들이 (조선총독부 또는 대만총독부 등으로 연구의 시야를 좁히는 바 람에) 흔히 간과하기 쉬웠던 식민 본국과 식민지 자본주의의 상호작용을 추적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일정한 시사를 줄 수 있는 연구라고 할 수 있다.

이후 한양대학교 공동연구팀이 수행한 한국-대만 식민지사에 관한 공동 연구가 눈에 띈다. 박찬승, 이승일, 이명종, 최혜주 등의 연구가 여기에 해당 되는데,[9]) 지방제도, 사법제도, 호구조사, 역사 교과서 등의 분야로 비교연 구를 확장하고 있다. 연구자들 사이에 공통된 방법론이라든가 연구의 지향 점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 근대사 연구자들이 연구영역 을 한국 근대사로 국한하지 않고 대만사로 확장하고 있다는 점은 일단 긍정 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개별 연구자들에 의한 개인 연구에 관해서는12) 크게 법제사, 경제사, 재정

, 경찰사, 의료위생사 및 교육사 정도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식민지시대 한국 법제사의 심화된 이해를 위한 방편으로 대만 법제사 연구가 활발하게 활용되고 있다. 문준영은 식민지대만의 사법제도 형성과정에 대한 분석을 통해, 사법에 대한 행정의 우위 및 태형제도·범죄즉결제도·민사구류 제도 등 식민지에만 실시되는 각종 율령의 실시로 인해 근대적 사법제도의 근저를 잠식하는 소위대만형 사법제도가 만들어지고, 이것이 관동주나 조선 등에 확산되었다고 보았다.13) 이러한 관찰은 식민지 사법제도의 원형 이 대만에서 만들어져 조선에 이식·응용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14) 반면 이승일은 대만에서는 구관 조사를 바탕으로 한 대만총독부 독자의

비교연구」, 『한국근현대사연구』96, 2021; 이명종, 「식민지 대만과 조선의 기류 자 등록제도 비교연구」, 『한국근현대사연구』102, 2022; 최혜주, 「시데하라(幣原坦)의 식민지 조선·대만에서의 교육 활동」, 『동아시아문화연구』83, 2020; 최혜 주, 「식민지 조선과 대만의 역사교과서 비교 연구 - 『普通學校國史』와 『公學校用日本歷史』를 중심으로」, 『한국독립운동사연구』77, 2022.

12)  연구서의 형태로 비교사적 접근을 수행한 개별 연구로는 박섭, 『식민지의 경제변 동: 한국과 인도』, 문학과지성사, 2001과 윤충로,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 가 형성사응오딘지엠과 이승만 정권 비교』, 선인, 2005가 있다.

13)  문준영, 「제국 일본의 식민지 형사사법제도의 형성 - 1895~1912년 대만과 조선의 법원조직과 형사법규를 중심으로」, 법사학연구 23, 2001; 문준영, 「제 국 일본의 식민지형 사법제도의 형성과 확산 - 대만의 사법제도를 둘러싼 정치·입 법 과정을 중심으로」, 법사학연구 30, 2004.

14)  문준영의대만형 사법제도라는 개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일정하게 수정하여 일본 제국의 대만 통치 전반을대만모델로 포착하고자 한 것이 문명기, 「근대 일본 식민지 통치모델의 전이와 그 의미 - ‘대만모델의 관동주·조선에의 적용 시도와 변용」, 중국근현대사연구 53, 2012이다. 이 논문은대만모델의 요체는 고비용을 수반하면서도 높은 수준의 통치효과를 지향하는고비용 고효 율을 추구하는 것이었고 대만 통치에 한해서는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조선 통치에 관해서는 비용 조달의 곤란으로 인해 고효율의 달성에 성공하지 못했다고 판단하고 있다.

입법 노력이 어느 정도 관철된 반면, 조선에서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우메 겐지로(梅謙次郞) 등의 식민지 독자 입법 노력이 1910년 이후에 내지 법률 의용(依用) 추진으로 인해 좌절되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1908년의 <臺灣民事令>(독자 입법) 1912 <朝鮮民事令>(일본 민법의 의용) 사이의 불과 4년 만에 식민지 입법시스템이 급변한 것은 일본 중앙정부의 식민지 통치방침이 내지연장주의로 변화된 데 따른 결과로 해석했다.15) 말하자면 문준영은대만형 사법제도가 내지 사법제도와 다르다는 점을 강조한 반면, 이승일은 내지 법률 체계가 의용된 결과 식민 본국과 식민지 사이에 큰 차이 가 없었고, 따라서 개별 식민지 권력은 1910년대 이후 식민지 경영을 위한

(법률적 측면에서의) 독자적 정책 수단을 가지기 어려웠다고 보았다.16) 경제사 분야에서 식민지 조선·대만 비교연구는 식민지근대화론의 입장에 서 있는 안병직과 김낙년에 의해 시작되었다. 안병직은 1960년대 이후 고도 경제성장을 지속한 한국과 대만 사이에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고 파악한다. 한 예로 대만에서는 중소기업의 비율이, 한국에서는 대기업의 비율이 높았 던 점을 들었다. 그리고 그 원인으로서 초기축적의 차이를 들면서, 민족공업 분석을 통해 초기축적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분석했다. 결론적으로 안병직은 식민지 이전과 이후에 있어서 대만은 한국보다 경제발전 수준이 한 단계 앞서 있었기 때문에 거래비용이 낮았고, 상품화의 정도도 대만이 조선보다 높았다고 보았다. 또한 土壟間(대만)과 精米業(조선)의 비교를 통해 한국과 대만의 산업 조직상의 차이는 단순한 유형적 차이가 아니라 발전단계의 차이 를 내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17)

김낙년은 초기조건의 차이에 주목한 안병직의 발상을 받아들이되 무역과

15)  이승일, 「일제의 동아시아 舊慣調査와 식민지법 제정 구상 - 臺灣과 朝鮮의 구관입법을 중심으로」, 韓國史硏究 151, 2010, 271-274쪽 및 298-303.

16)  이외에도 이승일, 「식민지 조선과 대만의 창씨개명·개성명 비교 연구」, 『대동문 화연구』76, 2011; 이승일, 「식민지 대만의 사법제도 연구」, 『역사학연구』85, 2022 등의 연구를 통해 이승일은 식민지 법제사 비교연구에 꾸준한 관심을 보이 고 있다.

17)  안병직, 「식민지기 臺灣과 朝鮮의 민족공업에 관한 비교연구」, 경제사학 23,

1997.

공업화, 공장과 가내공업을 중심으로 두 지역의 차이를 분석했다. 그 결과대만이 조선에 비해 農工 연계가 강했으며 1920년대까지 높은 산업 성장을 보였다는 점, ② 하지만 대만의 공업은 1930년대 이후에도 농산물가공업 중심 의 구조를 벗어나지 못한 데 비해 조선은 일본 자본의 유입에 힘입어 공업화가 본격화되었다는 점, 그리고조선에서 가내공업의 비중이 매우 높고 가내공 업이 자가소비의 성격을 띤 것은 상품경제의 발달수준이 낮은 데다 계절적 편중이 심한 농업노동의 특성에도 기인한다는 점 등을 밝혔다.18)

한편 배석만은 조선과 대만의 조선산업의 전개 과정을 비교하였다. 조선 중공업(朝鮮重工業)은 선박 건조 위주의 조선소로 성장하였던 반면에, 타이 완선거(臺灣船渠)는 선박 수리 위주의 조선소로 성장하였는데 일본제국의 전쟁 수행에 동반한 개별 식민지에 대한 요구가 달랐기 때문이라고 파악하고 있다.19) 박우현은 <조선사업공채법> <대만사업공채법>의 차이에 착안하 여, 그러한 차이가 발생한 원인에 대하여 일본 육군 세력이 조선을 교두보로 한 대륙 침략에 조선사업공채를 보다 쉽게 활용하려 한 것에서 비롯되었음을 세밀하게 논증했다. 대만이라는 적절한 비교 대상을 개입시킴으로써 본인의 문제의식을 더욱 선명히 드러내고 있다. 아울러 과거 단순히일제일본 제국주의로 뭉뚱그려 묘사함으로써 역사적 현상의 이해를 오히려 방해하는 측면도 있었던 기존의 학술 관행에서 벗어나, 일본 내부의 정당 세력, 군부 세력, 나아가 (이해관계가 반드시 일치하지만은 않는) 조선총독부의 공채 관련 동향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는 점도 눈에 띈다.20)

18)  김낙년, 「식민지기 臺灣과 朝鮮의 공업화 비교」, 경제사학 29, 2000.

19)  배석만, 「일제시기 조선과 타이완의 조선산업 비교분석」, 『경영사연구』34-1,

2019.

20)  박우현, 1911 <조선사업공채법> 제정과 식민지 교통망 구축의 향방대만과 의 비교를 중심으로」, 『대동문화연구』122, 2023. 경제사에 관해서는 한국사학계 에서는 식민지시대 경제사 연구가 퇴조하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는 반면(김제정, 「이미 익숙해진 새로움에서 나아가기 위한 모색: 2018~2019년 식민지기

(1910~1945) 연구의 현황과 전망」, 『역사학보』247, 2020, 75쪽 및 윤상원, 「식 민지 인식의 새로운 접근을 위한 모색: 2016~2017년 일제 식민지시기

(1910~1945), 『역사학보』239, 2018, 72), 경제사학계에서는 식민지시대 경 제사가 특별히 퇴조하고 있다고 판단하지는 않는 것 같다. 한국사학계의 진단은

재정사 부문에서는 문명기의 일련의 연구가 있다. 문명기는 식민지 대만

과 식민지 조선의 상대적 재정 규모(1인당 세입·세출)에 있어서 큰 차이가 존재했다는 점을 확인한 위에,21) 이러한 상대적 격차가 실제 통치에 어떤 차이를 낳았는가를 보기 위해 경찰기구 및 경찰보조기구에 관한 비교연구 와22) 의료위생사 관련 비교연구를23) 수행했다. 그 결과 일본의 대만 통치와

경제사학계의 연구 성과를 제외하고 판단하고 있다는 점에도 일부 기인하고 있는 듯하다. 역사학의 성과를 흡수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는 경제사학계의 성찰(예컨대 김재호, 내재적 발전론에서경제성장론으로: 근현대 한국경제사 연구의 동향과 전망」, 72)도 있는 만큼, 한국사학계도 경제사학계의 연구 성과 를 흡수하는 데 보다 전향적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정치를 배제한 경제의 역사상은 여전히 미심쩍다.”고 비평하면서도 “‘식민지근대화론계통 연구는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식민지시기 역사상을 새롭게 계발하고 교정하는 데 큰 공헌도 있음을 평가하는 태도가 긴요하지 않을까(염복규, 「식민지 인식의비동시성의 동시성과 극복을 위한 모색: 2014~2015 일제 식민지 시기

(1910~1945), 『역사학보』231, 2016, 56).

21) 문명기, 「대만·조선총독부의 전매정책 비교연구 - 사회경제적 유산과국가능력의 차이」, 史林 52, 2015; 문명기, 「일제하 대만·조선총독부의 세출구조 비교분석」, 한국학논총44, 2015; 문명기, 「일제하 대만·조선 총독부 세입의 추이와 구조조세수입과 조세부담을 중심으로」, 史林 56, 2016; 문명기,

「일제하 대만·조선 총독부 세입의 비교분석일반회계보충금과 공채를 중심으 로」, 한국학논총48, 2017.

22) 문명기, 「대만·조선의식민지근대의 격차경찰부문의 비교를 통하여」, 중국 근현대사연구 59, 2013; 문명기, 「일제하 대만 보갑제도의 재정적 효과, 1903~1938, 중국근현대사연구 75, 2017; 문명기, 「保甲의 동아시아 – 20세 기 전반 대만·만주국·중국의 기층행정조직 재편과 그 의미」, 『중앙사론』47, 2018; 문명기, 「일제하 대만·조선 기층행정 운영의 비교분석행정인력의 수량 적 검토를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150, 2020; 문명기, 「일제하 대만 경찰력의 재검토번지 경찰력과 평지 경찰력의 통합적 이해」, 『동양사학연구』159, 2022.

23) 문명기, 「식민지문명화의 격차와 그 함의의료부문의 비교를 통해 보는 대만과 조선의식민지근대, 한국학연구 46, 2013; 문명기, 「일제하 대만·조 선 공의제도 비교연구제도 운영과 그 효과」, 의사학 23-2, 2014; 문명기, 「일제하 대만·조선 公醫制度에 대한 비교사적 접근제도외적 측면을 중심으로 」, 한국학논총 42, 2014. 의료위생사 분야에서는 신규환, 「海港檢疫과 동아시 아: 1919-20년 臺灣과 朝鮮의 콜레라 防疫」, 『중국사연구』124, 2020이 콜레라 방역을 소재로 하여 의료위생사 비교연구에 관한 문명기의 소론을 뒷받침하고 있다. 신규환은콜레라 방역에 관한 비교사적 연구는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문명기의 식민지 조선과 대만의 공의제도와 위생에 관한 비교 연구가 주목된다. 그의 연구는 콜레라 방역의 성과를 직접적으로 비교한 것은 아니지만, 비교사적 연구를 통해서 식민지 조선의 의료인프라와 의료서비스가 식민지 대만

조선 통치에는통치 효과면에서 큰 격차가 존재했으며, 이 격차는 재정 능력의 격차에 기인한 경찰력의 격차, 그리고 경찰력의 격차가 낳은 기반권 력(infrastructural power)의 격차에서 비롯되었다는 점도 확인했다(기반 권력에 관해서는 후술). 이 연구결과는 식민지 통치의 유사성보다는 차이에 좀 더 주목할 필요가 있음을 상기시킨다. 또 그간 정밀한 검토 없이 당연시되 어온 조선총독부 = ‘강한 국가라는 역사상에 일정한 수정이 필요하다는 점을 시사한다(후술).

교육사 부문에서는 오성철의 연구가 주목된다. 오성철은 식민지 조선과 대만의 초등교육 취학률에 관한 통계적 불균형에도 불구하고 조선과 대만의 초등교육 취학률의 격차를 확인하고 그 원인을 추구하고 있으며, 특히 20세 기 전반기 일본 내지, 대만, 조선의 서당 교육에 관한 비교연구는 사회사적으 로도 훌륭한 연구로서 손색이 없다.24) 또 직접적인 비교연구는 아니더라도 조선과의 비교를 염두에 둔 연구도 있다. 예컨대 박양신은 도고 미노루(東鄕實)나 모치지 로쿠사부로(持地六三郞) 등 식민지 관료 경험자들의 식민정책 론을 분석했다. 이들의 식민정책론의 특징이 비()/() 동화주의라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일본의 식민통치를 도식적으로 동화와 등치시켜 왔던 그간의 경향에 이의를 제기했다.25)

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낙후되었다는 결과를 도출하였다. 그의 연구는 대만과 조선의 콜레라 유행과 피해가 크게 달랐던 것을 설명하는 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라고 지적하고 있다(190).

24) 오성철, 「식민지 조선과 대만의 교육 확대에 관한 시론적 비교」, 『한국초등교육』

16-2, 2006; 오성철, 「근대 이후 서당 교육의 사회적 특질」, 『한국초등교육』 32-1, 2021. 특히 후자는 서당 교육과 보통학교 교육을 대체재적인 성격으로 규정한 기존 연구에 대하여 보완재적인 성격으로 재규정한, 기존 연구에 대한 유력한 반론으로서의 의미도 있다(해당 논문의 26쪽 참조).

25) 박양신, 「도고 미노루(東鄕實)의 식민정책론 - 농업식민론과비동화주의, 역사교육127, 2013; 박양신, 「식민지 관료 경험과 식민정책론 - 모치지 로쿠사 부로(持地六三郞)를 중심으로」, 이화사학연구48, 2014.

Ⅲ. 식민지 권력의 국가 능력26)

대만과 조선 두 식민지 권력의 국가 능력(state capacity)에 관한 연구들

을 본격적으로 회고하기에 앞서 식민지 권력의 국가 능력을 이해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 간단히 언급해두고자 한다. 해방 이후 한국 근대사 (식민지시기 한국사) 연구는 (독립)운동사로 출발했다. 해방 이후 남한에서 의 국민국가의 수립을 지향한 내셔널 히스토리 구축에 있어서 제국 일본에 상실된 국권의 회복을 위한 투쟁을 강조하는 역사 연구가 활발했던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10]) 다만 억압 vs. 저항이라는 구도 속에서 전개된 (독립)운동사 연구의 틀 속에서 식민지 권력은절대악으로 규정되었고 따라서 분석의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상황이 상당 기간 지속된 것도 사실이다. 이후 이러한 연구 경향에 대한 일정한 반성을 거치면서 (

)정책사 연구가 이루어져 갔고, 식민지시기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의 각

26) 본절을 시작하기 전에 용어에 관해 미리 밝혀두는 것이 좋을 듯하다. 본고의 서두에서 밝힌 학술회의에서 필자의 발표에 대한 토론을 담당한 토론자는식민지 권력이라는 개념보다는제국 권력이라는 개념이국가능력을 설명할 때 더 적절한 개념임을 지적한 바 있다. 필자 역시 토론자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식민지에서 행사된 국가권력을 기존 연구에서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조선 총독부로 등치시키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하지만 식민지에서 행사된 국가권력은 조선총독부만이 아니라 제국 일본의 중앙정부와 군부, 의회 등을 포함해야 한다. 식민지 통치의 폭력 장치로서 불가결한 조선군/대만군의 규모나 군수 조달, 비용 조달 등은 거의 전적으로 제국 군부와 중앙정부가 결정하는 사항이고, 독자적 입법권(제령/율령 제정권)을 조선/대만 총독이 가지고 있다고 해도 중앙정부의 의사와 합치하지 않는 법령을 제정하고 실행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으며, 총독부 특별회계 역시 중앙정부(대장성)가 주도하고 제국의회의 견제를 받았고, 식민지 관료 역시 제국 중앙정부가 선발하여 파견하고 있었다는 점 등을 볼 때, 대체로 조선/대만 총독부를 떠올리게 하는 식민지 권력이라는 개념은 제국 일본의 식민지 통치를 이해하는 데 적절한 개념은 아니다. 다만 본고에서는식민지에서 행사된 국가권력이라는 의미, 즉 식민 본국의 중앙정부, 군부, 의회와 식민지의 총독부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식민지 권력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한다.

부문에서 정책사 부문 연구의 축적이 상당한 정도에 이르렀다고 판단된다. 다만 운동사 연구의 암묵적 전제인폭력적 억압기구로서의 조선총독부라 는 역사상은 여전히 강한 영향을 미쳐, 조선총독부를 포함한 식민지 권력을강한 국가(strong state)’로 상정하는 경향은 별로 바뀌지 않았다. 식민지시대의국가론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한 것으로 평가되는 역

사사회학자 박명규는 조선총독부에 대해 식민독재라는 개념을 적용할 것을 제안하면서유형적으로는 권력의 일방적 강압성을 잘 반영하면서도 그것이 군사적 강점에 기초한 제도 권력의 모습을 띠고 있던 식민지 권력기구의 실상을 상대적으로 잘 드러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제령이라는 법치의 형식을 갖추면서도 실제로는 최소한의 인권과 정치적 권리도 보장하지 않은 채 총독의 절대적이고 일방적인 지배권만을 제도화한 식민권력의 실상도 독재라는 개념을 통해 잘 부각시킬 수 있다.”라고 파악하고 있다.[11]) 역시 역사사회학자인 김동노는 조선총독부의 조선 통치를국가의 과도한 발전이라 규정하면서 군대와 경찰력의 과도한 확장을 통한 억압력의 증대를 거쳐탄생된 일제시대의 국가는 개인의 일상생활 전 영역에 걸쳐 개입함으로써 어디에나 존재하고(omnipresent) 모든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전지전능한 (omnipotent) 존재가 되었다. (중략) 개인이 국가에 대해 저항할 가능성은 과도하게 중앙집권화된, 그리고 물리적 강제력에 기반한 통치를 실행하는 일제의 식민체제에 의해 질식되었다.”라고까지 말하고 있다.[12]) 이러한 경향 은 역사사회학 분야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고, 식민지 경찰 연구 등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13]) 가장 최근에 제기된 식민지시대 국가론에 관한 연구는 그간의 논의를 좀 더 정치하게 다듬고 조선총독부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식민국가와 대칭국가로 포착할 것을 제안하고 있는데, 식민지에서 행사된 국가권력을 조선총독부로 등치시키는 경향을 여전히 보여줌과 동시에 식민 국가에 해당하는 조선총독부가강한 국가라는 점에 관해서는 기존의 논의 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인식을 보이고 있다.31)

식민지시대의 국가론과 관련하여 이색적인 주장을 한 바 있는 재미 정치 학자 구해근은 박정희 정부부터 김영삼 정부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국가-사 회 관계는 제로섬 관계(국가가 강하면 사회가 약하고 사회가 강하면 국가가 약한)가 아니라 국가가 강하면서도 사회 역시 그러한 국가에 대항하는 힘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하고, 그 역사적 기원을 식민지시대 조선총독부(=국가)와 조선사회의 관계에서 찾고 있다. 이러한 강한 국가 - 강한 사회32) 조합을 한국 사회가 지속적으로 유지·반복해온 원인에 대해서는 (저자 자신도 인정 하듯이) 구체적인 해답을 내놓지 못했지만, 한국 근현대사에서 전개된 국가사회 관계를 독특한 방식으로 정형화한 점은 평가할 만하다. 다만 이 경우에 도 식민지 권력의 국가 능력을 높이 평가하는 경향은 다른 연구와 다르지 않다.33)

필자 역시 식민지 권력이강한 국가가 아니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

. 하지만 운동사적 관점에서 운동의 대상이 되는 식민지 권력의강한 국가와 운동의 주체가 되는 식민지 사회의강한 저항은 논리적으로 정합적 이지 않다. 국가-사회 관계에 있어서 국가와 사회가 인과론적으로 꼭 제로섬 관계인 것은 아니지만, 식민통치가 가혹하고 압제적일수록 지배받는 민족의

31) 윤해동, 『식민국가와 대칭국가식민지와 한국 근대의 국가』, 소명출판, 2022. 32) ‘강한 사회는 원문에는 ‘contentious society’(쟁의적 사회)라고 표현되어 있다. 구해근이 ‘strong society’라고 하지 않고 굳이 ‘contentious society’라고 표현

한 것도 식민지 조선 사회를강한 사회약한 사회사이의 어디 즈음이라고 판단한 결과인 듯한데, 식민지 조선 사회가 ‘contentious society’라면 식민지 권력을 ‘strong state’라고 규정하기보다는 ‘contentious society’에 상응하는 좀 더 세밀한 판단이 필요하지 않을까. 참고로 박명규, 1910년대 식민통치기구의 형성과 성격」, 42쪽은 ‘contentious society’강한 사회라고 번역하고 있다.

33) Hagen Koo, "Strong State and Contentious Society" in Hagen Koo ed., State and Society in Contemporary Korea, Cornell University Press, 1994.

민족주의는 성장하기 어렵다는 일반적 사례들을 생각하면,[14])강한 국가에 대한강한 저항은 양립하기 쉽지 않다. 강한 국가를 강조할수록 식민지 사회의 주체성이 들어설 여지는 적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강한 저항을 지속적으로 보여준 식민지 사회가강한 사회또는쟁의적 사회라면, 저항 과 쟁의의 대상이 되는 식민지 권력을 그저강한 국가로만 개념화하는 것이 타당한 것인가에 대해 성찰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식민지 권력은 과연강한 국가였는가? 강했다면 얼마나 강했는가? 식민 지 권력이강한 국가라는 주장은 그간 충분히 입증되었는가?” 등등의 질문 을 제기할 수 있다.[15]) 이들 질문은 자연스럽게조선총독부는 무엇을 할 수 있었고 무엇을 할 수 없었는가?’에 대한 실증에 기반한 구체적이고도 면밀한 관찰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이다. 다만강한 국가여부를 측정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유사한 식민지 권력과의 비교가 하나의 유용한 판단 근거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식민지 대만과 식민지 조선의 비교연구가 필요한 것은 바로 이 맥락에서일 것이다.

식민지 권력의 국가 능력에 관해서는 식민지근대화론이나 식민지수탈론, 식민지근대()론 등 거대이론이 식민지 통치의보편성을 강조해온 점도 있고, 실제로 조선과 대만에서 행사된 식민지 권력의 통치체제를 비교해보 면 본질적인 차이를 주장하기 어려울 정도로 유사하기도 했기 때문에, 두 식민지 권력의 국가능력 역시 대동소이하다고 평가해온 경향이 없지 않다.

대만총독부의 통치체제의 골격은 대체로 아래와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식민지에 헌법이 부분적으로만 시행된다는 전제 아래) 헌법이 시행되

지 않는 부분의 법률 사항에 관한 입법을 제국의회가 제정하는 법률을 통하 여 대만 총독의 명령에 위임하는 식민지 위임입법 제도(이법역(異法域)의 창출). 2) 군정과 민정을 총람하고 아울러 행정·사법·입법·군사 등에 관한 광범한 권한을 총독에 부여하여 총독의 전제적 통치를 가능케 함과 동시에 대만 통치의 자율성을 상당 부분 가능하게 한 총독() 체제(종합적 특수행

).[16][17]) 3) 정치적으로는 식민지 주민의 참여를 배제하거나 극도로 제한하여 정치 과정을 최대한 생략하고 경제적으로는 식민 본국의 자본주의 발전에 식민지 경제를 종속시키는 전략(정치적 배제와 경제적 종속). 4) 소위 생물학 적 원리에 입각한 식민지에 대한 광범하고 체계적인 구관 조사와 통계, 그리 고 구관의존중에 바탕을 둔 제반 정치·경제적 조치의 실행(선택적 구관 온존). 5) 식민지주민의자발적 귀의를 유도하기 위한 사회간접자본의 확충 과 제반 문명화 조치,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적극적 재정 노선(적극주 의적 식민지경영).37)

조선에 앞서 식민지가 된 대만을 통치하던 초기에 형성된 이들 기본구조 를 가진 식민지 통치체제를 대만형 통치체제[18][19]) 또는 대만모델이라고[20]) 부 를 수 있을 텐데, 통치체제의 기본구조 면에서는 조선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21]) 하지만 통치 효과의 면에서는 다소 다른 결과를 보인 것 같다. 필자가 통치 효과를 비교하기 위한 우선 관찰 대상으로 삼은 것은 재정 부문이다. 흔히정치와 경제의 접점이라고도 하고재정은 정무의 화폐적 표현이라고도 하지만, 재정 부문은 (굳이 식민지 권력이 아니라 하더 라도) 국가 능력을 측정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지표일 것이다. 대만과 조선 두 지역의 총독부 재정과 지방재정을41) 비교 관찰한 결과, 총독 부 재정과 지방재정을 막론하고 1인당 세입/세출은 식민지 전체 기간을 통해 대만이 조선의 평균 2배였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기본적으 로 대만의 1인당 GDP가 조선의 2배였던 사실에 기인하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42) 식민지 주민 1인당 약 2배의 재정을 지출할 수 있는 식민지 권력은 그렇지 않은 식민지 권력에 비해 훨씬 큰 국가 능력을 보유했을 터인 데, 이는 식민지 주민의 일상생활을 규율하는 폭력장치인 경찰력의 밀도에 큰 차이를 가져왔다. 우선 인구 1인당 경찰비 지출을 보면 비교가 가능한 1910~1937년 평균 1.99:1.02 1인당 세입/세출 및 1인당 GDP와 대단히 유사한 비율을 보이 고 있다.43) 경찰 인력의 배치에 있어서 대만이 조선보다 훨씬 촘촘했다는 점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예컨대 1914년의 경찰 1인당 담당 인구가 대만은 463명으로 조선(1,195)수준이고, 그 격차가 줄어든 1930년대에도 대만 쪽이 여전히 ½ 수준이다. 물론 경찰 인력의 절대 수치에서는 전체 기간에 걸쳐 조선이 대만보다 압도적으로 크지만, 면적에서는 조선이 대만

다는 점(Edward I-te Chen) 등을 제외하면 통치체제의 구조라는 면에서 큰 차이는 없는 것 같다.

41) 문명기, 「일제하 대만 지방재정의 구조와 추이, 1902~1936 – 세입 부문을 중심으로」, 『중국근현대사연구』85, 2020; 문명기, 「일제하 조선 지방세입의 구 조와 추이, 1910~1936 – 대만과의 비교를 겸하여」, 『한국학논총』54, 2020; 문명기, 「일제하 대만 지방세출의 구조와 추이, 1902~1936, 『중국근현대사연 구』87, 2020; 문명기, 「일제하 조선 지방 세출의 구조와 추이, 1910~1936 – 대만과의 비교를 겸하여」, 『중국근현대사연구』91, 2021 .

42) 문명기, 「일제하 대만의 통치체제와 생활수준일제하 조선과의 비교를 겸하여 」, 한국학논총59, 2023.

43) 문명기, 「식민지 조선에 비추어 보는 일제하 타이완 통치의 역사」, 박찬승 외,

『일제 식민지 조선 지배의 성격서구열강의 식민 지배와의 비교』, 동북아역사재 단, 2023.

6, 인구에서는 조선이 대만의 약 4배에서 5배 사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대만의 경찰력 배치가 실제로는 조선보다 훨씬 촘촘했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사실 대만의 경찰력은 동시대 일본제국의 다른 지역과 비교해도 월등한 편이었다.44)

1936년 현재 인구 1인당 경찰 비용을 보면, 대만은 2.098엔으로 조선의 2.4배였다. ㎢당 경찰 비용 역시 대만은 304엔으로 조선의 3.3배였고 일본 내지의 1.5배였다. 비교 기준을 인구로 하든지 면적으로 하든지 간에 대만의 경찰력 배치의 밀도는 (관동주 같은 특수한 지역을 제외하면) 일본제국 안에 서도 두드러졌다.45) 이러한 경찰력의 밀도 차이는 공권력 집행능력에서의 실질적인 차이를 낳았을 개연성이 높고, 실제로도 그러했던 것 같다.46) 특히 대만에서의 경찰력 밀도의 차이는, 식민지 권력의 정책을 구체적으

로 실현하기 위해 필수적인 기층사회의 인적·물적 자원을 동원하는 제도적 장치인 보갑제도(保甲制度)를 만들어내고 이를 효율적으로 집행하는 데 근 본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대만총독부는 1898 8 <보갑조례>(율령 제21), <보갑조례 시행규칙>(부령 제87)을 제정하여 보갑제도를 실시 하기 시작했다. 그 기본적인 목적은 지방의 안녕(=치안 질서)을 유지하는 데 있었다. 보갑 조직은 10호를 1갑으로 하고 책임자인 갑장(甲長)을 두고, 10(=100) 1보로 하고 책임자인 보정(保正)을 두었다. 비유하자면 갑 장은 해방 이후 한국의 반장(班長), 보정은 통장(統長)/이장(里長) 정도에 해당했고, 보갑은 조선에서 1939년부터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하부 조 직으로서 10호 단위로 조직된 애국반(愛國班)과 유사한 것이었다. ()마 다 비적이나 수재·화재를 방비하기 위해 (조선의 자경단과 유사한) 장정단 (壯丁團)을 둘 수 있었으며, 보갑에 소속된 보갑민(保甲民)의 연대책임을 묻는 연좌(連坐) 규정도 두었다. 보정, 갑장, 장정단 단장 등 보갑 간부의 자격은 지역사회의일류(一流) 인물로서 재산과 명망을 갖춘 자로 규정되었고 보수가 없는 무급의 명예직이었다.

44) 문명기, 「대만·조선의식민지근대의 격차경찰 부문의 비교를 통하여」, 81. 45) 문명기, 「일제하 대만·조선총독부의 세출구조 비교분석」, 433.

46) 좀 더 상세한 내용은 문명기, 「식민지 조선에 비추어 보는 일제하 타이완 통치의 역사」의 제4(경찰: 경찰국가(Polizeistaat)의 지향과 실제)을 참조.

보갑의 직무는 호구조사, 출입자 단속, ··화재 및 토비·강도의 경계, 전염병 예방, 아편 폐습의 교정, 도로·교량의 보수와 청소, 병충해 예방, 수역(獸疫, 가축 전염병) 예방 등의 기존 직무는 물론이고[22]) 과세 작물의 조사, 징세 공문의 배포, 품종 개량의 독려 등 세무·식산 행정에까지 이르게 되었다.[23]) 경찰행정 보조라는 기존 직무에 더하여 일반행정까지를 담당하 는 것으로 직무 범위의 대폭 확장이 일어난 것이다. 확장의 결과 거의 모든 행정부문에서보갑의 활동을 기다리는 일이 많아질정도가 되었다.[24]) 이 렇게 되면서보갑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만족스러운 처리가 불가능할 만큼 보갑은 지방 기층행정에서 불가결한 존재로 변모했다.[25][26]) 보갑제도가 식민 지 권력의 손과 발이 되어 식민지 권력의 정책적 의지를 실현한 사례는 도로 정비, 전염병의 예방과 대응(특히 쥐잡기 운동), 이번사업(理蕃事業)에의 식 민지 주민의 대량 동원, 대만의삼대 악습으로 지목된 아편 흡식, 변발, 전족 관행의 철폐 등 셀 수 없이 많다.51)

이렇게 우월한 재정 능력을 바탕으로 한 경찰력과 행정인력의 확충, 식민

지 권력의 정책적 의지를 실현하는 제도 및 기구의 수립과 철저한 운용 등의 제도적 배치의 우월성은, 통치를 받아들이는 측(=식민지 사회)에서 보았을 때 무엇을 의미할까. 한두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도쿄·타이베이·경성의 감 옥을 비교 분석한 이종민의 연구에 따르면, 간수 1인당 재소자 비율(1935) 은 조선이 8.8, 일본이 7.4, 대만이 6.2명이었고, 인구 1만명당 재소자 비율(1932)은 조선이 9.2, 일본이 7.9, 대만이 8.8명이었으며, 雜居房 (형무소나 구치소에서 복수의 수용자를 넣어두는 방) 1평당 인원은 조선 3·129, 일본 1.197, 대만 1.377명으로, 피의자나 수인(囚人)의 관리에 있어서도 조선 쪽이 가장 열악했던 것으로 파악하면서, 그 결과로 “(조선에 서는) ‘위험인물로서의 수감자 집단을 대하는 관리자들의 긴장도와 폭력성 은 높아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한 바 있다.[27])

또 장기간 식민지 조선 의료위생사를 연구해온 박윤재는 천연두 예방 접

종이나 단속 과정에서 공의와 경찰의 직무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아서 본래 공의의 직무로 설정된 다양한 업무를 경찰이 떠맡았기 때문에, 일선의 조선 경찰로서는 강제와 단속에 더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 다.[28]) 필자가 최근 관심을 가지고 자료조사를 수행하고 있는 초등교육기관 의 취학률 관련 통계를 비교하면, 대만총독부는 (아마도 일본 제국 최초의 국세조사인 임시대만호구조사가 시행된) 1905년부터 정밀한 연령별 인구 통계에 기반하여 취학률을 정확히 제시한 반면, 조선총독부는 1937년 시점 에도 연령별 인구 통계의 부재로 인하여 취학률이 아닌추정취학률만을 제시할 수 있을 뿐이었다.[29])

이러한 사례들은 동일한 정책(감옥 정책이나 전염병 정책)을 실행하더라 도 우월한 제도적 장치를 보유하고 이를 합리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기반권 력을 갖춘 식민지 권력은 식민지 사회에 불필요한(?) 폭력이나 강제를 행사 하지 않으면서도 정책적 목표를 보다 합리적이고 정당하게 달성할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30]) 아울러 조선총독부 경찰 업무이나 행형, 위생 조치 등에서 현상적으로 보이는 폭력과 강제가 꼭 국가 능력의 강대함이나 우월성을 보이 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상대적으로 허약한 국가 능력의 징후로 읽어야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Ⅳ. ‘반일 한국친일 대만의 역사적 원인

일본에 의한 식민지 지배라는 동일한 경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해방 이

후 한국 사회는 반일이, 대만 사회는 친일(友日?)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는 상반된 대일 인식을 보이는 이 현상은56) 우리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소재일 뿐만 아니라 적절한 설명을 필요로 하는 현상이기도 하다.57) 한국

강조한다. 단순한 재정 능력만이 아니라 제도적 역량까지를 포괄할 수 있는 기반 권력 개념이 본고의 의도와 더 부합한다고 판단된다. 기반권력 개념에 대한 이해

Michael Mann, “The Autonomous Power of the State: its Origins, Mechanisms and Results”, in Michael Mann, States, War and Capitalism:

Studies in Political Sociology, Basil Blackwell, 1988; Hillel Soifer, “State Infrastructural Power: Approaches to Conceptualization and

Measurement”, Studies in Comparative International Development 43,

2008; 劉昶, 「邁克爾·曼論國家自主性權力」, 『上海行政學院學報』17-1, 2016; 劉志偉·柯志明, 「戰後糧政體制的建立與土地制度轉型過程中的國家·地主與農民」, 『臺灣史硏究』9-1, 2002 등에서 빌려왔다.

56)          대만 사회의 주류적 인식이친일적이라고 보는 데는 다소의 유보도 필요하다. 1980년대 대만 사회의 정치적 민주화가 도래하기 이전에는 국민당 정권의 항일 사관이 대만 사회를 대표하는 대일 인식이었던 점도 고려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대만 역사학계 내부에는대만 통치 긍정론에 대하여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역사학자들도 적지 않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周婉窈, 『臺灣歷史圖說』, 聯經, 1998(2), 114쪽은 대만 최대의친일파辜顯榮의 가문이 현재 대만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 중의 하나라는 점을 짚고 있고, 대만 한인과 대만 원주민에 의한 저항운동 역시 균형감 있게 다루고 있다.

57)          대만 사회는 일본 문화나 일본 사회에 대하여 전반적으로 호의적·긍정적 인식이 주류적 위치를 차지하는 반면, 한국 사회가 일본 문화나 일본 사회에 대하여 대체로 부정적 인식을 표출하고 있음은 부인하기 힘든 사실이다. 예를 들면 2011 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대만 민관(民官)은 총 253억 엔의 의연금을 모금함으로써 나머지 국가들의 의연금 합계를 넘어선 반면, 한국 민관은 대만의 13%에 해당하 는 약 32억엔의 의연금을 모금하고 있다. 한국의 인구나 경제 규모가 대만의 약 두 배인 점을 고려하면, 한국은 실제로는 13%의 절반에 해당하는 의연금을 모금한 셈이다. 대만 최초의 민선(民選 = 直選) 총통(한국의 대통령에 해당)이자

역사학계에서 대만사를 다년간 연구해온 연구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대만사 에 대한 강한 관심이 이 문제에서 비롯되었음을 고백하고 있다.[31]) 하지만 이에 대해 납득할 만한 학문적 해명이 충분히 이루어진 것 같지는 않다. 이제까지 이 문제에 관해 일정한 답안을 내놓은 연구자들의 설명을 좇아가면 서 이 질문에 대한 보다 나은 역사학적 접근이 가능한지를 탐구해보고자 한다. 우선 대만 사회의 친일 현상의 원인에 대한 해답을 성실하게 추구해온 와카바야시 마사히로(若林正丈)의 설명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와카바야시는 일본과 대만 관계에서역사문제가 전경화(前景化)되지 않 고 있는 요인을 세 가지 들고 있다. 첫째는 안보 요인. 1971 (중화인민공화 국의 유엔 가입과 동시에) 유엔에서 축출되어 주요국과의 국교를 상실한 대만의[32]) 안전보장에서 최대의 외부적 근거는 미국 국내법인 <대만관계법> 에 표명된 대만의 안전에 대한 보장이고, 아울러 미일 안보체제의 중국에

대만인(외성인이 아닌 본성인이라는 의미) 최초의 총통으로서 현대 대만 정치에 큰 족적을 남긴 리덩후이(李登輝, 1923~2020)는 총통 퇴임 후인 2007 6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바 있다. 물론 자신의 친형이 학도병으로서 아시아-태평 양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자가 되었기에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고, 리덩후이 는 자신의 친형을 위령하기 위함이라는 명분을 내걸었다. 하지만 야스쿠니 신사 가 동아시아 국제정치에 가지는 함의를 생각하면 리덩후이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이례적이고 돌출적이다. 한국의 전직 대통령이 자신의 친형을 위령한다는 이유로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야스쿠니 신사를 방문하는 일이 현실적으로 가능하겠는가. 이밖에도 식민지 시대에 기원을 두는 여러 과거사 문제, 예컨대 위안부 문제, 징용 문제, 역사 교과서 문제, 조선인·대만인의 야스쿠니 합사 문제 등에서도 한국 사회와 대만 사회의 대응에는 현저한 온도차가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이에 관해서는 若林正丈·家永眞幸 編, 臺灣硏究入門, 東京大學出版會, 2020에 수록된 劉夏如, 「慰安婦問題」(265-280)를 참조.

대한 억지력일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만으로서는 자국 안전보장의 한 축인 대일 관계의 과도한 악화는 피해야 할 선택지일 것이다.

둘째는 대만 민족주의의 성격이다. 대만 정치의 이데올로기적 구도에서 일본 문제는 대만 민족주의와 중국 민족주의 대항의 부차적 대립항이다. 현재의 대만 민족주의에 있어서 중요한타자는 말할 것도 없이 중국이다. 전후(戰後) 역사에서 그 중국은 우선은 권위주의 체제 하의 중화민국이었고, 이어서 최근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이 되었다. 대만 민족주의에서 중화인민공 화국이라는 새로운타자의 등장이, 일본과 관련된역사문제의 첨예화를 정치적·이데올로기적으로 억제한다는 맥락이 대만 정치에는 존재하고 있다.

셋째는 선거, 특히 총통 선거이다. 대만 민족주의와 중국 민족주의의 대립 은, 대만의 중화민국이 사실상의 독립을 계속 유지하는 것을 최소한의 컨센 서스로 삼으면서 두 민족주의는 대만 민주정치라는 틀 속에서 경쟁하며 공존 하고 있다. 총통 선거는 두 민족주의의 대립이 중국 정책을 축으로 표면화하 기 쉽다. 그러나 일반 유권자의 표는 양자 사이에 두텁게 존재하기 때문에 양자 대립의 중간지대로 세력을 확장하지 않으면 당선은 쉽지 않다. 2008년 부터 2016년까지 총통이었던 중국국민당의 마잉주(馬英九)는 이 점을 잘 이해하고 활용했다. 국민당의 교육을 모범적으로 수용한 외성인(外省人)이 고, 과거 발언에서 반일적 일본관의 소지자로 간주되었지만, 2008년 선거에 서는 반일파로 여겨지는 것이 불리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식민지 시대에 건설된 가남대천(嘉南大圳, 대규모 수리시설)의 설계자로서 대만 남부 농촌 에서 존경받던 일본인 기사 핫타 요이치(八田與一)를 칭송하는 퍼포먼스를 하여 자신이 지일파(知日派), 우일파(友日派)임을 보였다.60)

한국 학계에서는 전후(戰後) 대만 사회의 친일 정서를중국국민당 통치 시기의 불균등한 정치 권력 구조 속에서 식민지에 대한 선택적 집단기억의 결과로 해석한 백영서의 견해가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61) 이를 필자 나름대

60) 若林正丈, 「異なる歷史觀が混在する親日臺灣の諸相」, 外交32, 2015 7

.

61) 백영서, 「우리에게 대만이란 무엇인가다시 보는 한국-대만 관계」, 최원식·백 영서 엮음, 대만을 보는 눈한국·대만, 공생의 길을 찾아서, 창비, 2012,

로 부연하자면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대만은 중화민국의 일개 성(= 臺灣省)으로서 조국에 복귀했다(‘光復’). 하지만 대만인이 복귀한 조국, 즉 중화민국의 통치 역량은 대만인의 기대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대만총독부 가 물러나고 들어선 대만성정부(臺灣省政府)는 총독부의 소멸에 따른 통치 의 공백을 대처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일본 제국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던 대만 경제가 갑작스럽게 일본경제권을 이탈하면서 발생한 경제적 혼란(살인 적 인플레이션, 농업 생산의 부진, 생필품의 부족 등) (50년간 일본어를 국어로 사용해온 대만인에게 새로운국어’(=중국어)의 사용을 너무 급히 강제하는 등의) 문화적 혼란에 더하여, 중국국민당 관료의 부패와 관직의 독점, 대만인의 자치 요구 거부 등의 정치적 혼란이 발생했고, 이러한 혼란은 결국 대만인의 대규모 저항과 이에 대한 폭력적 진압(2.28사건)으로 귀결되 었다. 1949년 국공(國共) 내전에서 패배해 대만으로 퇴각한 중국국민당과 함께 대만으로 이주하게 된 약 100~120만 명의 대륙 출신 한인(=外省人)이 이후 대만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지배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면서, 1945년 이전부터 대만에 거주하던 대만인(=本省人, 650만 명)과 외성인 사이에서 발생한 (불균등한 정치·경제적 권력 구조에서 발생하는) 대립과 갈등을 메우기 힘들어졌다.62)

이러한 역사적 경위로 인해 본성인은 외성인 중심의 정치·경제적 권력

구조에 강렬한 적대감과 저항감을 가지게 된다. 아울러 본성인 집단이 1949 년 이후 중국국민당의 대만 통치를또 한 번의 식민지 지배로 인식하게 되면서, 중국국민당 정권의 통치 이데올로기의 한 축을 이루는 항일(抗日) 사관에 대한 저항 담론으로서친일(親日)’ 사관이 축적되어 갔다. 이러한 대만 본성인의친일사관은, 중국국민당 정권의 권위주의적 통치가 힘을 발휘하던 시기, 다시 말해 항일 사관이 공식적 이데올로기로서 권위를 가지 던 시기에는 사회 저변에 복류(伏流)하고 있었지만, 1980년대 후반 민주화

37-40.

62) 이 점에 관해서는 李筱峰, 「戰後初期臺灣社會的文化衝突」, 張炎憲 編, 臺灣史論文精選(), 玉山社, 1996을 참조.

와 폭넓게 보장된 언론 자유를 계기로 전면적으로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오늘날 대만 사회에 확산해 있는 우호적 대일 인식과 식민지 지배 에 대한 긍정적 평가 경향은 불균등한 정치·경제적 권력 구조를 지키려는 외성인과 그 구조를 변경하려고 하는 본성인 사이에서 전개된, 식민지 지배 의 기억을 둘러싼 투쟁의 산물인 셈이다. 더구나 대만인 아이덴티티의 구축 (構築)이 중국국민당 정권을 넘어서 지금은 중국 대륙의 중국공산당 정권에 대한 반발, 즉 탈중국화(脫中國化)로 연결되고 이것과 짝을 이뤄 친일본화 (親日本化)를 더욱 강화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상의 설명은 전후 대만 사회의 관찰에 초점을 맞춘 견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그렇다면 현재 대만 의 주류사회는 실제의 식민지 경험과 무관하게 그저 현실적 필요 또는 해방 이후의 상황에 따라 (식민지 경험이라는) 과거에 대한 기억을 만들어낸 것인 가? 식민지 경험이라는 과거에 대한 기억은 현실의 필요에 따라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것인가? 혹은 대만인들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기억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라면, 어디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질문에 대답하려면 1945년 이후가 아닌, 식민지 시대의 경험 그 자체를 검토 해볼 필요가 있다. 이 점에 관해서는 필자의 이제까지의 관찰 결과를 요약해 보기로 한다.

우선 식민지 시대 전체 기간에 걸쳐 한국에 비해 대만의 1인당 실질 GDP

가 일관되게 약 2배였다는 점은 전술한 바 있다. 즉 대만인의 1인당 소득이 조선인의 약 2배였고, 이는 생활수준 면에서의 적지 않은 차이를 낳았다. 예컨대 최극빈층 변사자(變死者)로서 시체를 수습할 지인이나 일가친척이 없는 사망자를 뜻하는 행려사망자(行旅死亡者)는 대만이 매년 평균 159, 조선이 매년 3,523명이었다. 당시 조선의 인구가 대만의 약 네 배였음을 고려하여 수치를 조정해도 조선의 행려사망자는 매년 대만의 5배 정도 많았

. 20세기 전반기 근대 문명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식품이 설탕이었는데, 설탕에 대한 일본인의 연간 평균 소비량은 14.94(), 대만인은 9.64, 조선인은 1.10근이었다. 일본인의 설탕 소비량을 100으로 보면 대만인은 일본인의 약 65%를 소비한 반면, 조선인은 약 7%만을 소비하고 있었던 셈이다.63)

이러한 생활수준의 차이는 당연히 재정 면에도 반영되어, 대만인 1인당 세입과 세출은 전체 기간에 걸쳐 조선인 1인당 세입과 세출의 약 2배였다. 대만총독부는 조선총독부에 비해 훨씬 풍부한 재정 능력을 바탕으로 철도· 도로·항만 등의 인프라 건설이나 경제개발, 의료위생의 개선 등에 적극적으 로 나설 수 있었고, 실제 성과도 큰 차이를 보였다. 이를 단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전염병 퇴치에서 거둔 성과의 차이이다. 조선총독부나 대만총독 부나 대표적인 전염병인 천연두의 퇴치와 예방을 위해 노력했지만, 조선에 서는 1945년까지 천연두를 퇴치하는 데 실패한 반면, 대만총독부는 우월한 재정 능력과 행정 능력을 바탕으로 천연두 퇴치에 성공했고, 페스트(흑사병) 1916년에 박멸을 선언할 수 있었으며, 대만의 풍토병인 말라리아 퇴치에 도 가시적 성과를 거두었다.64)

이러한 통치 성과 면에서의 구체적이고도 분명한 차이는, 모든 식민지 역사를 동일한 이론이나 개념을 적용하는 데 좀 더 신중해야 한다는 점을 알려줌과 동시에, 식민지시대 조선·대만 두 지역 주민의 식민지 통치에 대한 태도나 인식이 대동소이했을 것이라는 가정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1990년대부터 대만의 역사학계에서 활발히 수행되어온 구술사의 결과물 중에는 대만총독부의 통치에 대해 부분적 부정과 부분적 긍정이 혼재된 인식(예컨대통치 자체는 가혹한 면이 있었지만, 치안 질서 의 확립과 유지에는 확실히 공이 있었다.”라는 식의 회고)이 꽤 많이 보인다 는 점은, 일본의 식민지 통치를 겪은 사회는 자동적으로 반일적 대일 인식을 가질 것이라는 우리의 통념을 다시 성찰해 볼 기회를 제공해준다.

이상을 통해 상반된 대일 인식의 원인을 해방 이후와 식민지시대 두 시기

로 나누어 거칠게나마 살펴보았지만, 한국 사회와 대만 사회의 상반된 대일

63) 문명기, 「식민지 조선에 비추어 보는 일제하 타이완 통치의 역사」, 522-538.

64) 문명기, 「일제하 대만·조선 公醫 제도 비교연구제도 운영과 그 효과」, 의사학

23-2, 2014.

인식의 원인을 역사적으로 탐구할 때 간과할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식민지화 이전 시기 두 지역의 역사적 상황일 것이다.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평균적 인 대만인은 혹 이런 질문을 할지도 모르겠다. 식민지 통치가 종료된 지 이미 80년이 지났음에도 어째서 한국 사회는 여전히 반일적 인식을 유지 또는 강화하고 있는가? 더구나 2023년과 2024년에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 이 일본을 넘어서고 있고,[33]) 정치적 민주화와 사회적 자유화라는 면에서 선진국 수준에 도달했거나 근접해 있으며, 드라마, 영화, 대중가요 등의 대중 문화는 물론이고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에서 보이듯이) 고급문화 부문에 서도 소위 K-Culture가 세계적으로 시민권을 획득해 가고 있는 현재까지도 식민지 지배라는 과거의 트라우마를 털어내지 못하는 (또는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요컨대 탈식민 이후 시기 구() 식민 본국에 대한 구() 식민지 사회의 부정적 인식이 한국 사회처럼 강하게 유지되고 있는 사례가 세계적으 로 보아도 그리 많지 않다고 본다면, 한국 사회의 예외적으로 강고한 대일 인식은 식민지 시대나 탈식민 시대의 상황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좀 더 멀고 깊은 역사적 연원을 가지는 것은 아닐까? 이런 문제의식에서 식민지화 이전 상황도 거칠게나마 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식민지화 이전 한국은 최소 1,000년 이상 독자적으로 국가를 운영해 온

반면, 대만은 청제국(淸帝國)의 한 지방이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조선의 통 치 엘리트인 양반 계층에 있어서 국가권력이 이민족 정권으로 교체된다는 것은 기존의 통치 엘리트(=양반) 집단이 누리던 정치 권력의 상실을 의미했 고, 이는 양반 계층이 새롭게 등장한 식민지 권력(조선총독부)에 강렬한 적대 /저항 의식을 가질 개연성이 컸음을 시사한다.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는 담론 이나 운동을 주도하는 집단이 대체로 ()엘리트 계층이라는 게 식민지사의 일반적 통례임을 감안하면, 한국의 항일 내셔널리즘은 ()양반 계층에 의해 주도되었고, 해방 이후에도 이러한 경향은 거의 본질적 변화 없이 지속되었 을 가능성이 크다.66)

반면 [34]대만의 전통적 엘리트는, 국가권력에 참여하여 정치 권력을 분점한 경험이 거의 없다. 당대(唐代) 이래 중화제국의 관료제는 회피제(回避制)를 실행했다. 예컨대 복건성(福建省) 출신의 관료는 복건성을 제외한 지역에서 만 관료로서 활동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회피제 하에서 대만인이 대만에서 관직을 가지는 것은 제도적으로 불가능했다. 따라서 대만에서 발생한 정치 권력의 전면적 교체(=식민지화)는 한국에서의 그것만큼 엘리트 계층에게 미치는 충격이 크지 않았다. 식민지 시대 대만 항일 운동의 강도가 한국의 그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약했다고 평가되는 배경에는 이러한 차이가 어느 정도 작용한 것은 아닐까.[35]) 조선총독부의 고급 관료인 칙임관(勅任官)과 주임관(奏任官) 중 조선인이 약 20% 내외였던 반면 대만총독부의 고급 관료 중 대만인이 2%에도 미치지 못했던 것은, 이러한 역사적 차이를 반영한 결과였다.[36]) 더구나 국가권력의 전면적 상실에 대한 강한 반발이 화이(華夷) 의 준별을 주요 근거로 하는 소중화 사상에 기반한 주자학적 세계관에 뿌리

를 두고 있는 것이라면, 그리고 이러한 ()양반 계층의 세계관에 뿌리를 둔 대일 인식이 식민지화 이전부터조선 사회의 양반화와 유사한 과정을 거쳐 기층사회에도 확산되고 있었다면,69) 한국 사회의 대일 인식은 (식민지 화 이전 일본에 대한 뚜렷한 인식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보기 어려운) 대만 사회의 그것에 비해 훨씬 더 깊은 역사적 뿌리를 가진 것으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70)

Ⅴ. 맺음말

이상의 논의를 간략히 정리해보면, 한국 근현대사의 참조대상으로서의

대만사, 개별 국사를 상대화하는 소재로서의 대만사가 한국 역사학계의 관 심을 끌게 된 것은 아무리 시점을 일찍 잡아도 1990년대부터였다. 다소 뒤늦

69)          문명기, 1920년대 韓國·臺灣의 自治運動에 대한 비교사적 접근 - 지배층의 존재양태와 '中國' 요인을 중심으로」, 중국근현대사연구 39, 2008.

70)          이렇게 조선시대 조선 엘리트의 세계관과 그 세계관의 기층사회로의 확산을 해방 이후 한국 사회의 대일 인식과 연결하여 점검하는 과제와는 별도로, 식민지 화 직전 10~20년의 조선과 대만의 상황을 비교해보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대만이 식민지화된 1895년을 기점으로 (중국과) 조선에서는 근대적 내셔널리즘 확산에 중대한 역할을 한 신문과 잡지의 등장이라는 현상이 있었다. 반면 대만의 경우에는 1895년에 식민지화됨으로써 근대적 내셔널리즘의 세례를 거의 받지 못한 채 식민지화되었기 때문에, 1895년부터 1902년 사이에 광범하게 전개된 무장 항일운동은 내셔널리즘에 기반했다기보다는 향토의식과 전통적인 비밀결사 조직에 의거한 것이었다고 평가된다. 신문, 잡지의 등장과 아울러 조선 에서는 근대적 내셔널리즘에 기반한 국민 계몽의 차원에서 각종 학교를 설립하는 현상이 광범하게 전개된다. 식민지시대에 항일 민족운동의 일익을 담당한 각급 사립학교의 설립이 1895년부터 1910년 사이에 집중되었고, 1910년 조선총독부 설치 시점에서 기존의 사립학교를 무단으로 일거에 없앨 수 없었던 조선총독부는 잠재적 항일 운동의 거점 역할을 할 수 있었던 (미션스쿨을 포함한) 사립학교에 대하여 점진적인 통제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반면 미션스쿨을 포함한 사립학교 가 거의 전무한 채로 식민지화 과정에 들어선 대만 사회에서는 사립학교에 잠재적 항일 운동의 거점 역할을 기대하기 어려운 구조였다. 대만에서 근대적 항일 운동 이 1920년을 전후하여 동경 유학생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식민지화 직전의 사립학교의 존재 양태에 대한 비교는 두 지역 항일 운동의 차이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작업일 것이다.



은 출발이지만, 의미 있는 연구 성과가 (여전히 부족하지만) 없었다고 볼 수는 없다. 때로는 공동연구, 때로는 개인연구의 형태로 수행된 한국-대만 식민지사 비교연구는 일제시기 한국사회의 식민지 경험을 상대화하고 객관 화하는 데 적합한 연구 분야라는 점이 어느 정도 확인된 셈이다.

그중에서도 논의가 비교적 집중된 것은 식민지 권력의 국가 능력 문제였

던 것 같다. 주로 조선시대와의 통시적 비교를 통해 식민지 권력을강한 국가로 판단해온 그간의 연구 경향은, 동시대 식민지 대만과의 공시적 비교 를 통해 어느 정도 수정될 필요가 제기되고 있다.[37]) 물론 실증적 차원에서 규명되어야 할 문제가 여전히 적지 않지만, 식민지 대만과의 비교연구는 그간 식민지사 연구(예컨대 식민지 국가론)에 개입되는 정서적, 심리적 요인 을 넘어서서 한국 사회의 식민지 경험을 한층 객관화하는 데 일정하게 기여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식민지시대 한국사를 자기 객관화하려고 할 때 그간의 연구는 주로 식민 본국 일본과의 비교에 주력해 왔지만, 이제는 비교 대상을 전환할 필요, 즉 같은 식민지였던 대만과의 비교를 좀 더 적극적 으로 시도할 필요가 있다.[38])

아울러 식민지 대만과의 비교연구가 이제까지는유사한 식민지 경험, 심지어 더 오랜 기간의 식민지 경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후 대만 사회는 어째서 일본에 대해 우호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 답을 추구했다면, 이제는 역으로해방으로부터 두 세대 이상 지난 현재 한국 사회의 반일 정서는 어째서 여전히 (또는 오히려 더 강하게) 유지되고 있는가?”라는, 그동안은 잘 의문시되지 않던 질문에 대한 해답을 추구할 필요성도 제기된다. (대일 인식을 포함한) 역사적으로 형성된 모든 현상은 영원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유동하고 변화할 수 있는 역사적 실체임 을 고려하면, 이 문제 역시 역사적인 접근을 통해 풀어나가야 할 문제일 것이다. 본고에서 제시한 시론은 문자 그대로 시론에 불과하지만, 미약하나 마 의미 있는 시발점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주 제 어


식민지사, 비교사, 식민지 조선, 식민지 대만, 국가능력, 기반권력, 대일 인식


역외이주 패턴과 그 함의」, 『동양사학연구』147, 2019를 참조). 지주제 또는 지주 -소작제의 문제는 조선총독부와 일본 정부의 정책 차원을 넘어서는, 더 심층의 문제(예컨대 농촌에서의 과잉 인구의 규모, 소작 관행, 지주-농민의 역관계, 공업 발전의 수준 등을 포함하는 사회경제적 문제)를 포괄하고 있는데, 만일 해당 저서에서 소개된 기존 연구가 주장하는 대로 조선총독부의 1930년대 소작 관련 정책이나 제도가 상대적으로 선진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소작농의 경제적 상황 에 대한 개선 노력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면, 이는 정책 차원의 문제를 넘어서는, 조선 사회가 가지고 있는 여러 사회경제적 조건이 중층적으로 작용한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 면에서 특별히선진적인소작 관련 정책을 실행한 흔적이 없는 식민지 대만에서 농민 생활 수준의 일정한 향상이 있었던 현상과 대비해본다면, 식민지 조선 농업 경제의 개성이 보다 분명히 드러날 수 있지 않았을까.

[참고문헌]

  • 「온두라스,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수교」, 경향신문2023 3 26
  • IMF “한국 1인당 국민소득, 2024년도 일·대만 넘어설 것, 세계일보 2024
  • 10 24일 강만길 외, 『일본과 서구의 식민통치 비교』, 선인, 2004 고병익, 「일본의 식민 통치」, 고병익, 동아시아사의 전통과 변용, 문학과지성사, 1996 古川宣子, 「日帝時代 初等敎育機關의 就學狀況不就學兒童의 多數存在와 普通學校生의 增加」, 『교육사학연구』2·3, 1990
  • 김낙년, 「식민지기 대만과 조선의 공업화 비교」, 『경제사학』29, 2000 김낙년 편, 한국의 장기통계국민계정 1911-2010, 서울대 출판문화원, 2012 김동노,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지배의 독특성」, 김동노 편, 일제 식민지 시기의 통치체제 형성, 혜안, 2006
  • 김민철, 「식민지 통치와 경찰」, 역사비평 26, 1994 
  • 김재호, 내재적 발전론에서경제성장론으로: 근현대 한국경제사 연구의 동향과 전망」, 『경제사학』46-1(통권 제78), 2022
  • 김제정, 「이미 익숙해진 새로움에서 나아가기 위한 모색: 2018~2019년 식민지기 (1910~1945) 연구의 현황과 전망」, 『역사학보』247, 2020 
  • 김택현, 「비교사와 방법으로서의 비교착오, 곤경, 그리고 유령들」, 『사림』28, 2007 
  • 김택현·이진일 외, 『역사의 비교, 차이의 역사』, 선인, 2008 
  • 김형종·손준식, 「중국 근현대사를 회고하다」, 중국근현대사연구103, 2024 문명기, 1920년대 한국·대만의 자치운동에 대한 비교사적 접근 - 지배층의 존재 양태와 '中國' 요인을 중심으로」, 중국근현대사연구 39, 2008
  • 문명기, 「근대 일본 식민지 통치모델의 전이와 그 의미 - ‘대만모델의 관동주·조선에 의 적용시도와 변용」, 중국근현대사연구 53, 2012
  • 문명기, 「한국의 대만사 연구, 1945~2012, 중국근현대사연구57, 2013 문명기, 「대만·조선의식민지근대의 격차경찰부문의 비교를 통하여」, 중국근현 대사연구 59, 2013
  • 문명기, 「식민지문명화의 격차와 그 함의의료부문의 비교를 통해 보는 대만과 조선의식민지근대, 한국학연구 46, 2013
  • 문명기, 「일제하 대만·조선 공의제도 비교연구제도 운영과 그 효과」, 의사학 23-2, 2014
  • 문명기, 「일제하 대만·조선 公醫制度에 대한 비교사적 접근제도외적 측면을 중심 으로」, 한국학논총 42, 2014
  • 문명기, 「대만·조선총독부의 전매정책 비교연구 - 사회경제적 유산과국가능력의
  • 차이」, 史林 52, 2015
  • 문명기, 「일제하 대만·조선총독부의 세출구조 비교분석」, 한국학논총44, 2015 문명기, 「일제하 대만·조선 총독부 세입의 추이와 구조조세수입과 조세부담을 중심으로」, 史林 56, 2016
  • 문명기, 「일제하 대만·조선 총독부 세입의 비교분석일반회계보충금과 공채를 중심으로」, 한국학논총48, 2017
  • 문명기, 「保甲의 동아시아 – 20세기 전반 대만·만주국·중국의 기층행정조직 재편과 그 의미」, 『중앙사론』47, 2018
  • 문명기, 20세기 전반기 대만인과 조선인의 역외이주와 귀환역외이주 및 귀환 규모의 추산을 중심으로」, 『한국학논총』50, 2018
  • 문명기, 「연구 분야의 지속과 확장: 중국근대사 연구(2016~17)와 대만사 연구
  • (2013~17), 『역사학보』239, 2018
  • 문명기, 「식민지시대 대만인과 조선인의 역외이주 패턴과 그 함의」, 『동양사학연구』
  • 147, 2019
  • 문명기, 「일제하 대만·조선 기층행정 운영의 비교분석행정인력의 수량적 검토를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150, 2020
  • 문명기, 「일제하 대만 지방재정의 구조와 추이, 1902~1936 – 세입 부문을 중심으 로」, 『중국근현대사연구』85, 2020
  • 문명기, 「일제하 조선 지방세입의 구조와 추이, 1910~1936 – 대만과의 비교를 겸하여」『한국학논총』54, 2020 
  • 문명기, 「일제하 대만 지방세출의 구조와 추이, 1902~1936, 『중국근현대사연구』87, 2020 
  • 문명기, 「일제하 조선 지방 세출의 구조와 추이, 1910~1936 – 대만과의 비교를 겸하여」, 『중국근현대사연구』91, 2021
  • 문명기, 「일제하 대만의 통치체제와 생활수준일제하 조선과의 비교를 겸하여」,
  • 한국학논총59, 2023 
  • 문명기, 「식민지 조선에 비추어 보는 일제하 타이완 통치의 역사」, 박찬승 외, 『일제 식민지 조선 지배의 성격서구열강의 식민 지배와의 비교』, 동북아역사재단, 2023
  • 문준영 「제국 일본의 식민지 형사사법제도의 형성 - 1895~1912년 대만과 조선의 법원조직과 형사법규를 중심으로」, 법사학연구 23, 2001
  • 문준영, 「제국 일본의 식민지형 사법제도의 형성과 확산 - 대만의 사법제도를 둘러싼 정치·입법 과정을 중심으로」, 법사학연구 30, 2004
  • 박명규, 1910년대 식민통치기구의 형성과 성격」, 권태억 등, 한국 근대 사회와 문화– 1910년대 식민통치정책과 한국사회의 변화,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5 
  • 박섭, 『식민지의 경제변동: 한국과 인도』, 문학과지성사, 2001 
  • 박양신, 「식민지 관료 경험과 식민정책론: 모치지 로쿠사부로(持地六三郞)를 중심으 로」, 『이화사학연구』48, 2014
  • 박용희, 「문명의 역사적 비교그 연구경향 정리와 가능성 모색을 위하여」, 김택현· 이진일 외, 『역사의 비교, 차이의 역사』, 선인, 2008
  • 박우현, 1911 <조선사업공채법> 제정과 식민지 교통망 구축의 향방대만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대동문화연구』122, 2023
  • 박윤재, 『한국 근대 의학의 기원』, 혜안, 2005
  • 박찬승, 「일제지배 초기 대만과 조선의 지방제도 개편 비교」, 『동아시아문화연구』85, 2021 박찬승, 1920~30년대 식민지 조선·대만에서의 지방제도 개정 비교」, 『동아시아문 화연구』89. 2022
  • 배석만, 「일제시기 조선과 타이완의 조선산업(造船産業) 비교분석」, 『경영사연구』
  • 34-1, 2019
  • 백영서, 「우리에게 대만이란 무엇인가다시 보는 한국-대만 관계」, 최원식·백영서 엮음, 대만을 보는 눈한국·대만, 공생의 길을 찾아서, 창비, 2012 신규환, 「海港檢疫과 동아시아: 1919-20년 臺灣과 朝鮮의 콜레라 防疫」, 『중국사연구』124, 2020
  • 안병직, 「식민지기 조선과 대만의 민족공업에 관한 비교연구」, 『경제사학』23, 1997 염복규, 「식민지 인식의비동시성의 동시성과 극복을 위한 모색: 2014~2015 일제 식민지 시기(1910~1945), 『역사학보』231, 2016
  • 오성철, 「식민지 조선과 대만의 교육 확대에 관한 시론적 비교」, 『한국초등교육』16-2, 2006
  • 오성철, 「근대 이후 서당교육의 사회적 특질」, 『한국초등교육』32-1, 2021 윤상원, 「식민지 인식의 새로운 접근을 위한 모색: 2016~2017년 일제 식민지시기 (1910~1945), 『역사학보』239, 2018
  • 윤충로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 형성사응오딘지엠과 이승만 정권 비교』, 선인, 2005 
  • 윤해동, 『식민국가와 대칭국가식민지와 한국 근대의 국가』, 소명출판, 2022 
  • 이명종, 「식민지 대만과 조선의 기류자 등록제도 비교연구」, 『한국근현대사연구』102, 2022 
  • 이승일, 「일제의 동아시아 구관조사와 식민지 법 제정 구상대만과 조선의 구관입법 을 중심으로」, 『한국사연구』151, 2010
  • 이승일, 「식민지 조선과 대만의 창씨개명·개성명 비교 연구」, 『대동문화연구』76, 2011 
  • 이승일, 「식민지 대만의 사법제도 연구」, 『역사학연구』85, 2022 이종민, 「제국 일본의모범감옥’ - 도쿄·타이베이·경성의 감옥 사례를 중심으로」,
  • 『동방학지』177, 2016 
  • 이형식, 「조선총독의 권한과 지위에 관한 시론」, 사총 72, 2011 
  • 전해종, 『동아시아사의 비교와 교류』, 지식산업사, 2000 
  • 최은진, 『종속과 차별식민지기 조선과 일본의 지주제 비교사』, 역사비평사, 2023 
  • 최혜주, 「시데하라(幣原坦)의 식민지 조선·대만에서의 교육 활동」, 『동아시아문화연구』83, 2020
  • 최혜주, 「식민지 조선과 대만의 역사교과서 비교 연구 - 『普通學校國史』와 『公學校用日本歷史』를 중심으로」, 『한국독립운동사연구』77, 2022
  • 프라센지트 두아라 지음, 문명기·손승회 옮김, 『민족으로부터 역사를 구출하기근대 중국의 새로운 해석』, 삼인, 2004
  • 호리 가즈오(堀和生) , 박섭·장기용 역, 『일본 자본주의와 한국, 대만제국주의하 의 경제변동』, 전통과현대, 2007
  • 홍종욱, 「중일전쟁기(1937-1941) 조선 사회주의자들의 전향과 그 논리」, 한국사론 44, 2000
  • 岡本眞希子 著, 郭婷玉 譯, 『殖民地官僚政治史朝鮮·臺灣總督府與日本帝國』(制度編·), 臺灣大學出版中心, 2019
  • 王學新, 「日治時期臺灣保甲制度的經濟分析」, 國史館 臺灣文獻館, 第五屆臺灣總督府檔案學術硏討會論文集, 2008
  • 劉昶, 「邁克爾·曼論國家自主性權力」, 『上海行政學院學報』17-1, 2016 
  • 劉志偉·柯志明, 「戰後糧政體制的建立與土地制度轉型過程中的國家·地主與農民」,『臺灣史硏究』9-1, 2002 
  • 李筱峰, 「戰後初期臺灣社會的文化衝突」, 張炎憲 編, 臺灣史論文精選(), 玉山社, 1996 
  • 周婉窈, 『臺灣歷史圖說』, 聯經, 1998(2)
  • 陳姃湲 「處於東洋史國史之間: 戰後韓國歷史學界中的臺灣史硏究」, 臺灣史硏究 18-3, 2011
  • 黃昭堂 著, 黃英哲 譯, 臺灣總督府, 前衛, 1994 
  • 臺灣總督府, 民政事務成績提要(1907년판), 1908 臺灣總督府 警務局, 保甲制度及附錄, 1920 
  • 臺灣總督府 民政部 內務局, 『臺灣總督府學事年報』(1908~1936) 小林道彦, 日本の大陸政策, 1895-1914: 桂太郞と後藤新平, 南窓社, 1996 
  • 若林正丈, 「異なる歷史觀が混在する親日臺灣の諸相」, 外交32, 2015 7 若林正丈·家永眞幸 編, 臺灣硏究入門, 東京大學出版會, 2020 朝鮮總督府 學務局, 『學事參考資料』, 1937 
  • 周婉窈, 「二度の國引きと臺灣 - 黑住·木宮兩氏との對話」, Odysseus(東京大學大學院總合文化硏究科地域文化硏究專攻紀要)9, 2005
  • 春山明哲, 近代日本と臺灣 - 霧社事件·植民地統治政策の硏究, 藤原書店, 2008 平井健介, 『日本統治下の臺灣開發·植民地主義·主體性』, 名古屋大學出版會, 2024 平井廣一, 日本植民地財政史硏究, ミネルヴァ書房, 1997
  • Ewout Frankema, Anne Booth, “Fiscal Capacity and the Colonial State: Lessons from a Comparative Perspective,” Fiscal Capacity and the Colonial state in Asia and Africa, c. 1850-1960(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9
  • Edward I-te Chen(陳以德), “Japanese Colonialism in Korea and Formosa: A Comparison of the Systems of Political Control”, Harvard Journal of Asiatic Studies, vol.30, 1970
  • Hagen Koo, "Strong State and Contentious Society" in Hagen Koo ed., State and Society in Contemporary Korea, Cornell University Press, 1994
  • Hillel    Soifer,    “State    Infrastructural    Power:         Approaches   to Conceptualization and Measurement”, Studies in Comparative International Development 43, 2008
  • Michael Mann, “The Autonomous Power of the State: its Origins, Mechanisms and Results”, in Michael Mann, States, War and Capitalism: Studies in Political Sociology, Basil Blackwell, 1988


[국문초록]

본고는 1974년부터 2024년 사이에 수행된 식민지사 비교연구와 관련한 기 왕의 연구를 정리·소개하고, 약간의 비평과 전망을 제시하고자 했다. 한국 근현 대사의 참조대상으로서의 대만사, 개별 국사를 상대화하는 소재로서의 대만사 가 한국 역사학계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아무리 시점을 일찍 잡아도 1990년대 부터였다. 다소 뒤늦은 출발이지만, 의미 있는 연구 성과가 없었다고 볼 수는 없다. 예컨대 재정, 경찰, 의료, 초등교육, 법률 분야의 비교연구는 일정한 성과 를 거두고 있다. 때로는 공동연구, 때로는 개별연구의 형태로 수행된 한국-대 만 식민지사 비교연구는 일제시기 한국사회의 식민지 경험을 상대화하고 객관 화하는 데 적합한 연구 분야라는 점이 어느 정도 확인된 셈이다.

식민지사 비교연구 중에서도 논의가 비교적 집중된 것은 식민지 권력의국가

능력문제였던 것 같다. 주로 조선시대와의 통시적 비교를 통해 식민지 권력을강한 국가로 판단해온 그간의 연구 경향은, 동시대 식민지 대만과의 공시적 비교를 통해 어느 정도 수정될 필요가 제기되고 있다. 물론 실증적 차원에서 규명 되어야 할 문제가 여전히 적지 않지만, 식민지 대만과의 비교연구는 그간 식민지 사 연구(예컨대 식민지 국가론)에 개입되는 정서적, 심리적 요인을 넘어서서 한국 사회의 식민지 경험을 한층 객관화하는 데 일정하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식민지시대 한국사를 자기 객관화하려고 할 때 그간의 연구는 주로 식민 본국 일본과의 비교에 주력해 왔지만, 이제는 비교 대상을 전환할 필요, 즉 같은 식민지였던 대만과의 비교를 좀 더 적극적으로 시도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식민지 대만과의 비교연구가 그간같은 식민지 경험(심지어 더 오랜

기간의 식민지 경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만 사회는 왜 일본에 대해 우호적 인 인식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추구했다면, 이제는 역으 로해방으로부터 80년이 지난 현재 한국 사회의 반일 정서는 어째서 여전히 (또는 오히려 더 강하게) 유지되고 있는가?”라는, 그동안은 잘 의문시되지 않던 질문에 대한 해답을 추구할 필요성도 제기된다. (대일 인식을 포함한) 역사적으 로 형성된 모든 현상은 영원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유동하고 변화할 수 있는 역사적 실체임을 고려하면, 이 문제 역시 역사적인 접근을 통해 풀어나 가야 할 문제일 것이다. 본고의 시론은 문자 그대로 시론에 불과하지만, 미약하 나마 의미 있는 시발점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주 제 어

 식민지사, 비교사, 식민지 조선, 식민지 대만, 국가능력,                기반권력, 대일 인식

Retrospect and Prospects of Comparative Approaches to Colonial History :

 Focusing on Comparative Studies on

Colonial Korea and Colonial Taiwan

Moon, Myungki*1)

[Abstract]

This paper tries to introduce past studies related to comparative approaches on colonial history of Korea and Taiwan which has been carried out since 1970s and suggest some comments and perspectives. It was not until 1990s at the earliest that Taiwan history, as a referene of Korean modern and contemporary history and as a material for relativization of individual national history, attracted Korean historians’ attention. Although this attention has come late relatively, we could find some meaningful research results. For example, comparative studies in the field of finance, police, medicine, elementary education, and jurisdiction is relatively good. As a result, we could confirm that comparative studies of colonial Korea and Taiwan substantially help to relativize and objectify Koreans’ colonial experiences.

Among others, related researches have been concentrated on the

* Professor, Department of Korean History, Kookmin University

topic of state capacity of colonial powers. past tendencies which found Korean colonial powers as a strong state through diachronic studies, came to be needed to be revised somehow through synchronic studies. Although there is a long way to go, but at least comparative studies of colonial Korea and colonial Taiwan can contribute somehow in objectify Korean society’s colonial experiences. And comparative studies of colonial Korea and colonial Taiwan also bring forward the need to change the object of comparative studies from Japan to Taiwan.

Finally, erstwhile researches had tendency to ask such a question as “In spite of colonial experience, Why does Taiwan society show friendly attitudes toward Japan in post-colonial period?”. But at the same time we need to ask a question as “In spite that more than two generations(80 years) have passed since colonial rule ended in 1945, Why does Korean society still hold fast to anti-Japan sentiment. Considering that every historical phenomenon is not an eternal being, but a constantly transformative and fluid being, anti-Japan phenomenon in Korean society have to be explained through historical approach, and comparative approach will be very helpful and friutful.

Key Words  colonial history, comparative history, colonial Korea, colonial Taiwan, state capacity, infrastructural power, attitudes toward Japan

투고일 : 25.01.17  심사 완료일 : 25.02.08  게재확정일 : 25.02.10



[1] ) 프라센지트 두아라 지음, 문명기·손승회 옮김, 『민족으로부터 역사를 구출하기근대 중국의 새로운 해석』, 삼인, 2004, 11-13.

[2] ) 전해종, 『동아시아사의 비교와 교류』, 지식산업사, 2000, 13.

[3] ) 박용희, 「문명의 역사적 비교그 연구경향 정리와 가능성 모색을 위하여」, 김택현·이진일 외, 『역사의 비교, 차이의 역사』, 선인, 2008, 77.

[4] ) 두아라가 지적한 중심성을 자각적으로 의식하면서, 타자를 도구화하거나 비교 주체의 자기 인식을 더욱 정당화하는 소위불균등한(asymmetrical) 비교를 지양하는 등의 노력이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김택현, 「비교된 역사 혹은 식민화된 차이인도, 일본, 한국의 근대 역사학과 비교(), 김택현·이진일 외, 『역사의 비교, 차이의 역사』, 선인, 2008, 46-47).

[5] ) 역사학 분야에 국한해 보면, 1961년부터 1990년까지 12편에 그쳤던 대만() 관련 연구가 1991년부터 2010년 사이에는 142편으로 무려 10배 이상 급증했다 (陳姃湲, 「處於東洋史國史之間: 戰後韓國歷史學界中的臺灣史硏究」, 臺灣史硏究 18-3, 2011, 178).

[6] ) 강만길 외, 『일본과 서구의 식민통치 비교』, 선인, 2004.

[7] ) 박찬승 외, 『일제 식민지 조선 지배의 성격서구열강의 식민 지배와의 비교』, 동북아역사재단, 2023

[8] ) 다만 해당 연구서 필진의 한사람으로서 참여한 필자로서는 개별 국가의 식민지 경험, 자료 상황, 접근 방식 등의 차이가 예상외로(?) 크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식민지사 비교연구의 어려움을 실감하는 계기이기도 했고, 동시 에 식민지사 비교연구의 가능성과 한계를 새삼스럽게 성찰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9] ) 박찬승, 「일제지배 초기 대만과 조선의 지방제도 개편 비교」, 『동아시아문화연 구』85, 2021; 박찬승, 1920~30년대 식민지 조선·대만에서의 지방제도 개정 비교」, 『동아시아문화연구』89. 2022; 이승일, 「식민지 대만의 사법제도 연구」, 『역사학연구』85, 2022; 이명종, 「식민지 대만과 조선의 <호구조사규정> 제도

[10] ) 2년에 한 번씩 한국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를회고와 전망의 형태로 정리해온역사학보의 한국근대사 부문을 다루는 비평 논문들은 여전히 독립운동사를 가장 첫머리에 배치하고 있다(염복규, 「식민지 인식의비동시성의 동시성과 극복을 위한 모색: 2014~2015 일제 식민지 시기(1910~1945), 『역사학보』231, 2016 ).

[11] ) 박명규, 1910년대 식민통치기구의 형성과 성격」, 권태억 등, 한국 근대 사회와 문화2 – 1910년대 식민통치정책과 한국사회의 변화,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5, 48쪽 및 58.

[12] ) 김동노,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지배의 독특성」, 김동노 편, 일제 식민지 시기의 통치체제 형성, 혜안, 2006, 35-45.

[13] ) 김민철, 「식민지 통치와 경찰」, 역사비평 26, 1994는 식민지 경찰기구의 비대 함과 행정경찰 영역의 광범함, 그리고 식민지 사회로의 억압적이고 효율적인 침투의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14] ) 고병익, 「일본의 식민 통치」, 고병익, 동아시아사의 전통과 변용, 문학과지성 사, 1996, 189.

[15] ) 최은진, 『종속과 차별식민지기 조선과 일본의 지주제 비교사』, 역사비평사, 2023, 36쪽은(소작 관계 법령필자)와 관련하여 흔히 범하는 오류는 조선총 독부가 <조선농지령>을 통해 농업·농촌을 통제하려 하는 등 정책적 시도를 했다 고 해서 이것이 곧바로 관철되었다고 과대평가하는 것이다. 앞에서 본 세 가지 관점 모두 사실상 이것을 전제하면서 무소불위의 식민권력을 상정하는 경향이 있었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는 일종의총독부 만능론에 대한 문제 제기로서 일정한 의미가 있다.

[16] ) 平井廣一, 日本植民地財政史硏究, ミネルヴァ書房, 1997, 275.

[17] ) 小林道彦, 日本の大陸政策, 1895-1914: 桂太郞と後藤新平, 南窓社, 1996, 88~95.

[18] ) 春山明哲, 近代日本と臺灣 - 霧社事件·植民地統治政策の硏究, 藤原書店,

[19] , 187.

[20] ) 문명기, 「근대 일본 식민지 통치모델의 전이와 그 의미 - ‘대만모델의 관동주·조 선에의 적용 시도와 변용」, 중국근현대사연구53, 2012, 203.

[21] ) 대만 총독의 권한을 개괄한 黃昭堂 著, 黃英哲 譯, 臺灣總督府, 前衛, 1994, 204~230쪽과 조선 총독의 권한을 개괄한 이형식, 「조선총독의 권한과 지위에 관한 시론」, 사총 72, 2011, 194, 조선 총독과 대만 총독의 정치적 위상의 차이를 지적한 Edward I-te Chen(陳以德), “Japanese Colonialism in Korea and Formosa: A Comparison of the Systems of Political Control”, Harvard Journal of Asiatic Studies, vol.30, 1970, 132~141쪽 등의 연구를 종합해 보면, 조선 총독에게 이왕직 및 조선 귀족에 관한 특별 권한이 부여된 점(이형식), 조선 총독의 궁중 석차가 대만 총독보다 다소 높았던 점(黃昭堂), 역대 조선 총독들이 대만 총독들에 비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면에서 우월했

[22] ) 臺灣總督府 警務局, 保甲制度及附錄, 1920, 41-47.

[23] ) 王學新, 「日治時期臺灣保甲制度的經濟分析」, 國史館 臺灣文獻館, 第五屆臺灣總督府檔案學術硏討會論文集, 2008, 54-64.

[24] ) 臺灣總督府, 民政事務成績提要(1907년판), 1908, 91.

[25] ) 鷲巢敦哉, 臺灣保甲皇民化讀本, 中島利郞·吉原丈司 編, 鷲巢敦哉著作集

, 綠蔭書房, 2000, 103.

[26] ) 각각의 사례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설명은 문명기, 「식민지 조선에 비추어 보는 일제하 타이완 통치의 역사」의 제5(보갑(保甲): 기층행정의 만능열쇠)를 참조.

[27] ) 이종민, 「제국 일본의모범감옥’ - 도쿄·타이베이·경성의 감옥 사례를 중심으 로」, 『동방학지』177, 2016, 303.

[28] ) 박윤재, 『한국 근대 의학의 기원』, 혜안, 2005, 273-274.

[29] ) 대만의 초등교육기관 취학률은 臺灣總督府 民政部 內務局, 『臺灣總督府學事年報』(1908~1936), 조선의 초등교육기관 취학률은 朝鮮總督府 學務局, 『學事參考資料』, 1937, 81-82쪽에 근거했다. 古川宣子, 「日帝時代 初等敎育機關의 就學狀況不就學兒童의 多數存在와 普通學校生의 增加」, 『교육사학연구』2·3 , 1990, 137~139쪽은 나름의 방법을 고안하여 취학률을 제시하고 있기는 하지 만 다소 설득력은 떨어지는 편이다.

[30] ) 역사사회학자 마이클 만에 의해 제기된 기반권력 개념은 (주로 전근대의 전제권 력과 구별하여) “실제로 시민사회에 침투할 수 있는, 그리고 국가 영토 범위 내의 전체 영역에 걸쳐 정치적 결정을 실행할 수 있는 국가의 능력을 가리키며, 기존의 국가 능력 개념보다 상대적으로 제도적 역량(institutional capacity)

[31] ) 김형종·손준식, 「중국 근현대사를 회고하다」, 중국근현대사연구103, 2024, 12쪽에서 손준식은제가 대만사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대만 유학을 하면서 느낀 문화충격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략) 우리보다 더 오랜 기간 식민 지배를 받았는데, 왜 이런(=일본 대중문화에 대한 대만인의 큰 관심, 식민지 시대에 대한 향수마저 보이는 등, 일본 문화에 우호적인) 현상을 보이는지 의문이 들었죠.”라고 말하고 있다. 필자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32] ) 2023 3월 온두라스가 대만과의 국교를 단절하고 중국과 수교함으로써 대만 수교국은 교황청(바티칸)과 벨리즈, 에스와티니, 과테말라, 아이티, 나우루, 파라 과이, 팔라우, 마셜제도, 세인트키츠네비스, 세인트루시아, 세인트빈센트 그레나 딘, 투발루 등 13개국으로 줄었다(「온두라스,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수교」, 경향신문2023 3 26).

[33] ) IMF “한국 1인당 국민소득, 2024년도 일·대만 넘어설 것, 세계일보 2024 10 24.

[34] ) 문명기, 1920년대 韓國·臺灣의 自治運動에 대한 비교사적 접근 - 지배층의 존재양태와 '中國' 요인을 중심으로」, 중국근현대사연구 39, 2008.

[35] ) 일례로 1925년 치안유지법이 대만에 실시된 이래 1940년에 이르는 15년간 치안유지법 위반 건수는 55, 위반 인원은 856(受理 기준)에 불과했다(臺灣總督府 警務局 編, 臺灣警察沿革誌(), 287). 동일한 기준(受理)을 적용하여 조선의 사례를 보면, 1928년 한 해에만 치안유지법 위반 건수 168, 위반 인원은 1,415명이었다(홍종욱, 「중일전쟁기(1937-1941) 조선 사회주의자들의 전향과 그 논리」, 한국사론 44, 2000, 160). 식민지시대 전 기간에 걸쳐 대만 인구가 조선의 약 1/4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공산주의 기타 과격사상의 취체를 목적으로 한 치안유지법의 위반 사례 자체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었다.

[36] ) 조선에 대해서는 김낙년 편, 한국의 장기통계국민계정 1911-2010, 서울대 출판문화원, 2012, 596~599, 대만에 대해서는 岡本眞希子 著, 郭婷玉 譯, 『殖民地官僚政治史朝鮮·臺灣總督府與日本帝國』(制度編·), 臺灣大學出版中心, 2019, 42~46쪽을 참조. 시기에 따라 다소 기복은 있으나 전체적으로 대만 총독부 관료 중 대만인의 비중은 10% 내외, 조선총독부 관료 중 조선인의 비중은 40% 내외였다(문명기, 「식민지 조선에 비추어 보는 일제하 타이완 통치의 역사」, 519-520). 이 점은 한국의친일파 청산문제가 대만의친일파 청산에 비해 훨씬 복잡하고 간단치 않은 문제였음을 시사하기도 한다(周婉窈, 「二度國引臺灣 - 黑住·木宮兩氏との對話」, Odysseus(東京大學大學院總合文化硏究科地域文化硏究專攻紀要)9, 2005, 111~112).

[37] ) 필자가강한 국가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조선을 통치했던 식민지 권력이강한 국가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Ewout

Frankema, Anne Booth, “Fiscal Capacity and the Colonial State: Lessons from a Comparative Perspective,” Fiscal Capacity and the Colonial state

in Asia and Africa, c. 1850-1960(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9)에 따르면, 국가 능력의 주요 지표 중 하나인 조세 징수 능력이라는 면에서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의 서구 열강의 식민통치를 경험한 동남아시아, 아프리카의 식민지나 식민지 인도는 일본 제국의 식민지들에 비하면 현저히 떨어졌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따라서 조세 징수 능력 또는 재정 능력이라는 점에서 조선은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 대륙의 식민지들보다 대만에 훨씬 가까운 유형임 은 분명하다. 다만 식민지 대만이라는 사례를 통하여 조선에 존재한 식민지 권력 의 국가 능력을 구체적인 분석이나 검증 없이 과대평가하는 경향만큼은 수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38] ) 그런 점에서 비교적 최근의 저작인 최은진, 『종속과 차별식민지기 조선과 일본의 지주제 비교사』, 역사비평사, 2023는 연구 자체의 완성도와 높은 실증성 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비교의 대상을 일본보다는 대만으로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 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식민지시대 전체 기간에 걸쳐 조선은 소작 농가의 비율이 증가하는 추세였던 반면 대만은 소작 농가의 비율이 미세하게나마 꾸준히 감소하는 추세에 있었다(이에 관해서는 문명기, 「식민지시대 대만인과 조선인의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