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1-20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흥미로운 사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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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흥미로운 사실들 역사 / 자유로운 상념들

2014. 6. 26.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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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광주학생운동. 김성민|역사공간 |2013.07.15)










2013년 7월에 출간된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저자인 김성민 박사는 현재 국가보훈처에 근무 중이며 이전부터 광주학생운동과 동시대의 서울지역 학생운동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계속 연구를 해왔다.

최근 위의 책을 아주 흥미롭게 읽었는데 교과서나 각종 백과서전류에 기술된 광주학생운동 관련 이야기에서 보지 못한 참신한 이야기들이 당시의 재판기록, 격문 등을 통해 소상히 밝혀지고 있다.



사건의 직접적인 발단으로 일본인 학생 후쿠다가 조선인 여학생 박기옥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을 하였다는 '통설'이 실제 있었던 사실과 다르게 와전되었다는 부분, 사건 발생 직전 광주의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 사이의 일촉즉발의 분위기와 조선인 학생들의 엄청난 위세에 대한 묘사는 특히 인상 깊었다.

또한 학생운동이 전국으로 퍼져나가게 된 동기가 당시 공산주의/사회주의 계열의 운동가들이 광주에서 수많은 학생과 주민들이 일본인에게 '학살'당했다는 내용의 선전선동을 한 것에 크게 기인한다는 부분, 이러한 '조선인 대량 학살' 루머에 점점 살이 더해져서 중국, 연해주, 미국(하와이) 까지 퍼져나가 독립운동계와 중국 국민당 정부의 태도에까지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는 부분에서도 상당한 감흥을 받았다.


책의 내용을 살펴보자.

1922년 2차 교육령의 반포 이후 총독부는 '일시동인'과 '내선공학'을 조선 교육의 기본 원칙으로 천명하였는데, 실제로는 학교 현장에서 과연 '일본어 상용'을 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있어 실질적으로는 '국어(일본어) 상용'의 일본인 학교 계열 (소학교 - 중학교)과 '국어 비상용'의 조선인 학교 계열(보통학교 - 고등보통학교)의 2원적인 체계가 성립되었다.

1920년대의 조선은 근대적 교육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학생 수가 급증하고 있었고 총독부에서도 보통학교에 한해서는 상당한 지원을 하였다. 1929년 당시 보통학교에 재학중인 조선인 학생은 47만명, 소학교에 재학 중인 조선 내 일본인 학생은 6만 5천명이었다. 중등 교육의 경우 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인 조선인 학생은 29000명, 중학교에 재학중인 일본인 학생은 17000명이었으며, 전문학교와 대학 이상의 고등 교육의 경우 조선인 학생은 1564명, 일본인 학생은 1553명이었다.

고보에서 전문학교 이상으로 진학하는 조선인과 중학교에서 역시 전문학교 이상으로 진학하는 일본인의 비율은 아주 큰 차이가 나지는 않았는데, 초등교육에서 중등교육 과정으로 진학하는 비율은 상당히 큰 차이가 났다. 이에는 '의무교육'이 아니었던 당시의 상황에서 수업료, 책값, 학용품비 등을 감당할 수 있는 조선인 가정이 흔하지 않았다는 점과 총독부가 조선인을 위한 학교를 세우고 유지하는 데 정부 재정을 소모하는 것을(특히 중등교육 이상) 그리 내키지 않아하였다는 점 모두가 작용하였다.

당시 교육비의 부담이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1932년 보통학교 학생 1인당 1년 교육비가 최소 15원 80전이 들었다고 하는데 쌀 한 가마니가 17원이었으므로 한 학생을 보통학교에 보내는데 매년 쌀 한 가마니 정도의 교육비가 필요했고, 다산을 하던 당시의 상황에서 대여섯명의 아이를 교육시키는 데는 상당한 비용이 들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부모들의 교육열은 상당하여 보통학교는 지주가 아닌 소작, 자소작농의 자녀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중등학교의 경우는 비용이 훨씬 더 커서 입학금만도 100원(쌀 3석 상당)이 들었고 수학여행비, 교우회비, 운동기구비, 교통비 등의 비용 부담이 있어서 농촌의 경우 적어도 연 소득이 쌀 70석 이상은 되는 부농 급이 아니고서는 한 자녀도 아닌 여러 자녀를 '고등보통학교(고보)'에 진학시킬 수가 없었다.

조선 거주 일본인들은 대부분 유산계층이었으므로 자녀들의 교육 정도에 차이가 나는 것을 모조리 '민족 차별' 때문이라 보기는 어려웠으나 아무튼 조선인들의 일반적인 여론은 총독부에서 조선인 학교보다 일본인 학교에 상대적으로 더 많은 경제적 지원을 해 준다고 여기고 있었고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의 신문 사설을 통해서도 끊임없이 조선의 교육에 대해 총독부가 보다 많은 재원을 투입하도록 독려하고 있었다.

한편 전라남도는 쌀, 면화 등의 경작에 적합한 조선 왕조 이래의 곡창 지대로 일찍부터 일본인 농업 이민자들이 많이 이주한 곳이었다. 광주, 나주, 목포, 영산포 일대에는 일본인 밀집 지역이 있었으며 1928년 당시 전남의 전체 인구는 조선인 200만명, 일본인 35000명 정도였다. 나주, 목포, 영산포 일대가 전라남도의 경제적 거점이었다면 광주는 행정 지배의 거점이면서 교육의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광주는 철도와 도로도 잘 발달되어 있어 전남 각지에서 이곳으로 통학하기에도 유리하였다.

1920년대 후반 광주 지역의 중등 학교로는 조선인 학교로 인문계 학교에 광주공립고등보통학교(광주고보. 해방 후의 광주제일고등학교 즉 광주일고의 전신)와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광주여고보. 전남여고의 전신)가 있었고 실업계 학교에는 광주공립농업학교(광주농고. 해방 후의 광주 농업고등학교로 현재는 광주 자연과학고등학교라는 이름이 되었다)가 있었으며, 그 외에 전남도립사범학교가 있었다. 광주고보는 순전히 조선인 학교였으며 광주농고의 경우엔 소수의 일본인 학생이 조선인 학생과 공학하고 있었다. 전남 일대의 조선인 중등교육기관은 거의 광주에 몰려 있었다.

일본인 학교에는 광주공립중학교(광주중학교. 해방 후의 광주고의 전신)와 광주공립고등여학교(해방 후의 광주여고의 전신)이 있었다. 광주중학교에는 조선인 학생도 5%에서 10% 사이 비율로 함께 다니고 있었으므로 일본인과 조선인의 공학이라 볼 여지도 있었으나 비율이 너무 적으므로 일본인 학교라 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전남의 일본인 중등교육기관 또한 목포상업학교(이곳은 조선인과 일본인 학생이 공학하는 곳이었다) 외에는 광주에 있는 것이 전부였다. 이처럼 조선인과 일본인의 중등교육기관이 한 지역에 밀집되어 공존하고 있는 곳은 서울 외에는 광주, 부산, 대구, 평양, 신의주 정도였다.

이때문에 인근 전남 지역에서 광주로 통학하는 통학생이 광주고보생(조선인)만도 70명, 광주중학생(일본인)은 100명에 달했다. 이들은 같은 열차를 타면서도 대체로 민족 별로 다른 객실을 이용했는데 때에 따라서는 같은 객실에 섞여 탈 때도 있었으며 한창 감수성이 예민하고 자존심이 강한 시기의 학생들이다 보니 이러한 통학 상황에서 별 것 아닌 일에도 발끈하며 앙앙불락하기 일쑤였다. 일본인 중학생들은 비록 모두가 그러한 것은 아니겠으나 민족적 우월감으로 조선인 학생들을 얕잡아보는 경우가 많았으며, 조선인 고보생들 또한 대체로 지주 가문의 일원이거나 적어도 부농 급은 되는 집 자녀들로 다들 동네에서는 힘깨나 쓰는 집 출신들이라 일본인 학생들에게 전혀 밀리지 않고 오히려 더욱 기세가 등등하였다.

1929년 당시 광주고보의 학생 수는 총 5개 학년에 411명이었고 학생 1인당 경상비는 165원이었다. 광주 중학교는 1928년의 경우 총 5개 학년에 421명이고 이 중 일본인 398명, 조선인 23명으로 학생 1인당 경상비는 169원이었다. 광주농고의 경우 1929년 당시 총 234명 중 일본인 학생 24명 외에는 모두 조선인이었다. 경상비는 정부 재정에서 지원되는 것으로 당시 광주고보(조선인학교)와 광주중(주로 일본인학교)에 대한 1인당 지원금액은 비슷한 규모였는데 그 이전 시기에 광주고보 등에서 동맹휴업 등이 빈발하면서 학교시설개선 요구가 많이 반영되었던 부분도 있을 듯 하다.

당시 일본인 학교는 당연하다 볼 수도 있겠으나 조선인 학교인 광주고보의 경우에도 교직원 22명 중 조선인은 3명에 불과하였고, 광주농고와 전남사범의 경우에도 이는 대동소이하였다. 교직원 자격을 갖춘 조선인의 숫자가 적어서 그러한 부분도 있겠으나 국고 지원을 받는 공립 학교의 경우 일본인 교사를 우선적으로 채용하는 경향이 있었음도 분명할 것이다.

한편 이 시기에는 전국의 고등보통학교(일본인 중학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나)에 사회주의/공산주의 계열 서적을 탐독하고 '학습'하는 것이 대유행하고 있었다.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가 창립되어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 조봉암 등이 맹활약을 하고 있었으며 광주청년동맹, 전남청년동맹 등도 창립되었는데 내부에서는 세력판도가 복잡하게 얽혀있었으나 아무튼 1928년 이후로는 장석천이 광주 지역의 사회주의/공산주의 계열의 운동을 대표하는 위치에서 활약하였다. 이러한 사회주의/공산주의 계열의 청년운동은 광주고보에서도 고학년을 중심으로 '성진회'라는 독서 모임이자 학생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주로 마르크스 - 레닌 계열의 서적과 일본인 사회주의자들의 책을 탐독하고 토론하였다. 이러한 사회주의/공산주의 계열의 세력들은 조직적이고 일사불란한 체계를 갖추고 있었으므로 이후 광주학생운동 발생 후에 이를 전국적으로 파급시키는데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편 1923년부터 1928년까지 광주고보는 총 4회의 동맹휴학을 하였고 광주농교는 2회, 광주여고보는 1회의 동맹휴학을 하였는데 광주학생운동 1년 전인 1928년의 동맹휴학에는 광주의 조선인 중등학교 모두가 참여하였다.

광주고보생들의 동맹휴학의 원인은 1923년의 경우엔 일본인 교사의 조선인 학생 구타 사건으로 촉발되었다. 이때 주동 학생 5명이 정학 처분되자 이에 항의하여 재차 동맹휴학을 벌이는 일이 있었으며 같은 해 광주농교에서는 학제가 3년제라서 상급학교 진학에 장애가 있는 것에 대한 불만으로 5년제로의 승격을 요구하는 맹휴가 있었는데 이것이 받아들여져서 이후 광주농교는 5년제 학교로 승격되었다.

1924년의 광주고보 동맹휴학은 그 발단이 흥미롭다. 야구의 명문인 광주일고의 전신 광주고보는 당시에도 야구에 능했던 모양인데, 1924년 6월에 광주고보 야구팀과 재광주 일본 선발 야구팀 간의 경기에서 일본인 의사 안도라는 자가 광주고보 선수에게 '모욕적인 언사(구체적인 상황은 알 수 없으나)'를 하였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관중들이 경기장으로 난입하여 광주고보 선수들과 함께 일본인 의사 안도를 집단 구타하였는데, 그 다음다음날 광주고보 선수 중 4명이 경찰에 불려가서 폭행 건으로 취조를 받게 되었다.

문제는 경찰서에 이들의 신원을 알려 준 이가 광주고보의 일본인 교장 구리노였다는 것인데, 교장이 자기 학생들을 보호하지 않고 경찰에 신고했다는 것에 분개한 광주고보 학생 400여명이 강당에 모여 유치장에 있는 학생들의 석방과 교장의 사과를 요구하였다. 대단한 일은 아니라 학생들은 당일로 보석 방면 되었는데, 구리노 교장이 학생들이 모여 있는 강당으로 가서 전원을 '무기정학'에 처한다고 선언하여 열받은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선언하고 총독부 당국에 진정서를 제출하기로 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커지자 광주고보의 학부형들은 긴급회의를 열어 무기정학 처분의 취소와 구리노 교장의 사퇴를 요구하였으며 이에 불응시에는 도민대회를 개최하여 총독에게 직접 진정하기로 결의하였다.

구리노 교장은 "무기정학 처분은 학교 체면을 보아서 취소할 수 없소. 학교장은 천황폐하의 임명인 즉 그대들이 배척한다고 퇴직할 수 없소. 도민대회를 열고 안 여는 것은 당신들의 마음대로 할 일이오."라고 말하며 학부모들을 묵살하였고, 경찰도 교장에 호응하여 학부모들의 도민대회 소집 취지서를 전부 압수하여 도민대회는 열리지 못하게 되었다. 경찰의 비호에 기가 산 교장은 맹휴의 주동자 10명을 퇴학처분하겠다고 통고하였으나 학생들은 다시 학생대회를 개최하여 맹휴에 들어갔고 결국 주도한 4명의 학생이 퇴학처분되는 데서 마무리되었다.

이 사건은 1929년의 광주학생운동과 상당한 유사성이 있었는데 두 사건 모두 학교 밖에서의 조선인과 일본인 간의 폭행 사건으로부터 발단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1927년에 다시 광주고보에서 맹휴가 일어났다. 이번 맹휴는 평양으로 수학여행을 가서 평양고보를 방문한 광주고보 2, 3학년 학생들이 평양고보의 시설이 광주고보보다 월등한 것에 충격을 받아 학교 시설 개선을 요구하여 일어났던 것인데, 특히 물리, 화학 실습을 위한 교실의 신축 등을 요구하였고 시라이 교장이 학생들의 이 요구를 수용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1928년의 광주고보 맹휴는 당시 5학년생이던 이경채가 사회주의/공산주의 격문을 여기저기 붙인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이경채는 위에서 이야기한 '성진회'와는 별개로 친구들과 공산주의/사회주의 사상을 연구해왔고 특히 일본인 사회주의자인 사카이, 야마자키 등의 책을 열심히 읽었고 이 책을 참고하여 '자본주의 사회 파괴' 등의 내용이 담긴 3종의 격문을 만들어 파출소 게시판, 광주고보 앞 전신주 등 10여 곳에 붙이고 전남 각지의 중등학교, 경찰서 등에 우송하여 체포된 사건이었다.

학교 측은 아직 형이 확정되지 않은 이경채를 체포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권고퇴학시켰고 독서회원들이 주동하는 학생 대표들은 이에 불응하여 여러 가지 요구사항을 내걸고 맹휴에 돌입하였다. 시라이 교장은 이번에는 양보 없이 맹휴 주동 학생 27명을 퇴학시키는 강경한 태도로 나왔다. 이번 맹휴의 뒤에는 '성진회'와 같은 교내 사회주의/공산주의 연구조직의 조직력이 작용하고 있었고 광주고보 맹휴 중앙본부가 학부모들에게 보낸 격문 또한 학교 당국이 보았다면 뒷골을 붙잡고 기절하여 쓰러질 수준의 강경한 내용이었다.

"한일합병 후 18년 이래 우리 민족은 일본제국주의의 철제하에서 극도로 유린당하여 왔습니다. 피등의 가혹한 경제적 착취를 감행하는 데에는 악독한 정치적 압박이 있고 그를 미식하는 데에는 음험한 문화적 만착이 있습니다. 현하의 조선 교육은 피등의 만착정책의 노골적 전형입니다....... 교장 시라이 씨는 조선 총독부 식민지 노예교육 정책의 전형적 이행자로서...."

맹휴 중앙본부는 또한 맹휴에 가담하지 않는 고보생들을 린치로서 '응징'하였는데, 이러한 폭력 행위와 격문에 드러난 반일본 사상 때문에 폭력행위자 외에도 맹휴 지도본부의 5명이 검거되어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번 맹휴에는 광주농교 또한 함께 가담하였다. 1928년의 광주고보 맹휴는 많은 퇴학자를 낳고 종결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학생들은 시라이 교장에게 큰 원한을 품게 되었다.

퇴학생들 중 김몽길, 여도현 등은 다음해인 1929년 3월의 졸업식 날 졸업식장으로 난입하여 자신들에 대한 퇴학 이유를 설명하라고 교장에게 강권하였는데 시라이 교장은 이를 거부하고 교장실로 피신하였다. 이에 김몽길과 여도현은 전교생을 이끌고 교장실로 몰려가 면담을 요구하며 유리창을 파괴하는 등 맹렬히 활동하다가 출동한 경찰에 의해 해산되었다.

이처럼 광주고보 학생들은 잦은 맹휴와 또한 내부의 비밀 사회주의/공산주의 독서조직을 통해 동맹휴업이라면 매우 숙련된 조직을 갖추었고 이 상태로 1929년 11월의 광주학생운동을 맞이하게 된 것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광주 지역의 중등학교로는 전남 각지에서 학생들이 열차를 타고 통학하고 있었다. 일본인 학생들과 조선인 학생들은 대체로 다른 객차를 이용하였고 남녀 또한 다른 객차를 이용하였는데 때로는 일본인과 조선인 학생들이 섞일 때도 있었다. 그럴 때는 소소한 충돌들이 자주 일어났다.

광주학생운동 3개월 전인 1929년 6월에는 '운암역 개고기 사건'이 일어났다.

차창 밖으로 어느 조선인이 개를 통째로 불에다 그을리는 광경을 목격한 통학 열차 내의 광주중학교 일본인 학생 여러 명(이 중에는 송정리 경찰서장의 아들인 곤도가 있었다) "야만이다."라고 말했는데, 마침 해당 열차 안에는 공교롭게도 30여 명의 광주고보 학생도 함께 타고 있다가 이 말을 들었던 것이다. 이에 광주고보 학생들은 '조선인을 모욕하는 말'이라고 하여 곤도를 포함한 일본인 학생들을 집단구타하였다. 이틀 후에는 통학열차 안에서 6명의 광주고보 학생들이 곤도를 조선인 학생들의 객차로 불러내어 모욕적인 언사에 대한 추궁을 하고 사과를 받아내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소소한 조선인/일본인 학생 간의 폭력사건에서 주로 때리는 쪽, 기세가 등등한 쪽은 조선인 학생, 맞는 쪽, 쫄은 쪽은 일본인 학생이었다는 점은 상당히 흥미로운 일이다.


'운암역 개고기 사건'에 앞서서도 통학 열차 안에서는 소소한 충돌들이 자주 일어났다.



1928년 12월에는 광주농업학교 5학년생(조선인)이 광주중학교 4학년생(일본인)에게 "지팡이를 빌려달라"고 요구하여 이를 거절하자 구타한 사건이 있었고, 1929년 5월에는 역시 광주중학교 4학년생이 광주고보 학생에게 구타당하는 일이 있었다.

배경 설명은 이쯤에서 마치고... 드디어 광주학생운동의 개시날이 다가왔다.

1929년 10월 30일 오후 4시 45분에 광주역을 출발한 열차가 우렁찬 증기를 내뿜으며 5시 35분에 나주역에 도착하였다.





조선인/일본인 통학생을 포함한 30여명의 승객이 하차하였는데 이때 개찰구에서 광주중학교의 스에요시, 후쿠다 등 3명의 일본인 학생이 광주여고보의 박기옥, 이광춘, 암성금자(이광춘의 이복동생이라 되어 있는데 어째서 일본식 이름인지는 알 수 없다. 후처가 데려온 일본인 딸인지도...) 등 3인의 여학생을 앞서나가며 박기옥의 어깨를 건드리는 사태가 벌어졌다.

일본인 학생들은 '고의가 아니라 어린아이를 피하기 위해 앞서 나간' 것이라고 추후에 진술하였는데 이의 사실 관계와는 별개로 그 옆에 있던 박기옥의 사촌동생이자 광주고보 2학년생인 박준채가 후쿠다와 말싸움을 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인 학생들이 조선여학생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하였다."는 여기저기에 실려있는 '통설적' 내용은 당시의 양자의 진술에서 전혀 거론되지 않았던 일로 후세의 착오이며 실제로는 일본인 학생들이 조선 여학생들을 앞서나가며 어깨를 부딪힌 것(고의든 아니든)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아무튼 박준채와 후쿠다의 말싸움 과정에서 후쿠다가 "조선인인 주제에"라는 모욕적 발언을 하자 박준채가 격분하여 후쿠다를 구타하여 서로 격투가 벌어졌다. 이때 나주역의 순사 모리타에 의해 격투가 중지되었으나 분이 풀리지 않은 박준채가 후쿠다에게 "내일 학교 쉬지 마라(=학교가 있는 광주에서 한판 붙자는 뜻)"라고 하자 모리타 순사가 박준채의 따귀를 때려 박준채 주위의 광주고보 학생들을 빡돌게 만들었다.

일단 나주역에서 나온 광주고보 학생들은 후쿠다가 포함된 광주중학생(일본인)들을 앞서의 여학생 이광춘의 부친이 경영하는 조면공장 창고 부근으로 끌고가서 구타하였다.

박준채는 나주에서 손꼽히는 부호의 아들이었다. 그의 아버지 박정업은 나주에서 3번째 가는 대지주였으므로 자부심이 보통이 아니었다. 여학생 중 이광춘은 박정업과 함께 나주의 대표적 재력가인 이기성의 딸로 이기성은 조면공장과 정미공장을 가지고 있었다. 박정업과 이기성은 절친한 사이였으니 앞서의 일본인 학생들은 나주의 조선인 중 대표가는 유지의 아들딸들에게 아주 호되게 걸린 것이었다.

박준채는 이날 후쿠다를 조면공장 창고에서 호되게 구타하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이튿날인 10월 31일 통학열차 안에서 다시 후쿠다를 구타하였다.

그는 나주에서 통학하는 광주고보생 3-4명과 함께 광주중학생들이 타고 있는 객차로 일부러 들어가 후쿠다에게 전날의 사단을 재론하며 사과를 요구하였다. 후쿠다가 거부하자 동료 광주고보생들과 함께 다시 후쿠다를 구타하였는데 광주중학생들의 숫자가 박준채 일행보다 훨씬 더 많았으나 기가 질렸는지 멀거니 보고만 있었던 모양이다.

열차 안에서 싸움이 발생하자 차장이 박준채와 후쿠다를 2등 객차로 잡아서 끌고 갔는데 이 2등 객차에는 대부분 일본인들이 타고 있는 칸이어서 박준채를 비난하고 동족인 후쿠다를 두둔하여 박준채를 더욱 열받게 하였다.

그 다음 날인 11월 1일에는 박준채와 후쿠다의 다툼이 기차 통학생 전체로 확대되었다. 광주중학교 학생들은 고보 학생들에게 대항하기 위하여 유도 교사까지 불러와서 광주역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기차 통학생이 아닌 학생들과 유도 교사까지 포함된 광주중학교 일본인 학생 30여명이 "어제는 우리 생도가 고보생에게 당했으니 오늘은 복수한다."고 외치며 조선인 통학생 20여명과 광주역 플랫폼에서 서로 철길을 마주하고 대치하게 되었는데 이 소문이 삽시간에 양교 학생들에게 퍼져 개미떼처럼 광주역으로 몰려들게 되었다. 이때 후쿠다는 박준채에게 복수하기 위해 유도 교사와 함께 박준채를 찾아다녔는데 잽싸게 잘 도망친 것인지 박준채가 유도 교사에게 걸렸다는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는다.

연락을 받고 달려온 양교 교사들과 경찰이 제지하여 학생들은 큰 충돌없이 학교로 돌아갔고, 광주고보생들은 학교에 집결하여 박준채로부터 지난 2일간의 경과보고를 청취하였다. 박준채가 비록 대지주의 아들이고 무서운 것을 몰랐으나 2학년이란 저학년이어서 향후의 사건 전개에서는 더 이상 이름이 등장하지 않게 된다.

한편 광주중학생들은 고보생들의 습격을 두려워하며 시내에서 단도를 호신용으로 구매하여 가지고 다니기 시작하였다.

사건이 여기서 일단락 되는 듯 하였으나 11월 3일에 다시 폭발하였다. 11월 3일은 일제의 '명치절'이자 전남의 누에고치 6만석 생산 돌파 축하식이 거행되어 총독부 당국에게는 매우 경사로운 날이었고 전남 도지사와 총독부 식산국장이 참석하여 이를 경하하고 비행기까지 동원하여 광주 상공에 축하 전단이 살포되었다.

일요일임에도 명치절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학생들은 등교하였는데 이후 해산 과정에서 충돌이 재발하였다. 11시 경 수기옥정 우체국 앞에서 고보생 7-8명이 신사참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중학생 십여명에게 '부딪혔다'며 시비가 붙게 되었는데, 주위의 광주고보생 20여명까지 바로 격투에 동참하여 광주중학교 학생들은 광주역으로 도주하였다. 강황을 보면 고보생들이 의도적으로 시비를 걸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리하여 고보생들과 중학생들은 광주 역전 광장에서 수십 명의 집단 난투를 벌였는데 소식을 들은 고보생 100여명이 금새 몰려와 고보생들은 금새 200여명이 되어 중학생들은 쉽게 제압되었다.


이 과정에서 '광주여고보 학생들이 물과 돌을 나르며 고보생들을 성원'하였다는 일화도 있는 모양이다!!!

아무튼 200여명으로 불어난 고보생들은 대나무와 장작 등으로 무장하여 광주중학교로 통하는 성저리로 쇄도하였다. 적의 본진으로 곧장 짓쳐들어가려 한 것이다. 광주중학생들도 역시 지지 않고 죽도, 장작 등으로 무장하고 백수십명에 달하는 인원을 모아 마주 달려와 고보생들과 '토교'를 사이에 두고 서로 대치하게 되었다. 다시 양교 교사, 경찰, 소방대까지 출동하여 학생들을 해산시켰다.

고보생들은 다시 학교로 돌아가 대책회의를 열어 중학교를 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자리에는 '성진회' 등의 사회주의/공산주의 계열 독서회원들도 참여하였는데, 아무튼 독서회원인 김병기가 솔선하여 농기구실을 열어 곤봉을 꺼내고 다른 학생들도 괭이, 죽도, 곤봉, 야구배트 등으로 무장하였다. 여기에 광주농교 학생들까지 가세하여 인원은 300여명으로 불어났다. 이들은 다시 광주 역전을 지나 성저리를 거쳐 중학을 습격하려 하였으나 경찰과 소방대가 강력히 저지하여 무산되자 방향을 바꾸어 시내 중심가를 시위행진하였다.

중심가인 본정통을 지나 광주우편국을 경유하여 광주도립병원 앞으로 행진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전남사범학교 학생과 광주여고보의 학생들도 일부 시위대에 가담하였다. 경찰과 소방대가 학생들의 무장을 해제하려 하였으나 역부족으로 학생들은 계속 무장한 채 행진을 하였고 광주천을 건너 소시장을 거쳐 다시 수기옥정을 지나 위세를 떨치며 광주고보로 귀교 후에야 해산하였다.

이날 학생들 사이의 격투와 시위운동 과정에서 고보생(조선인) 10명과 중학생(일본인) 16명이 부상을 당했다. 고보생 부상자 중에는 시위 과정에서 당한 경우도 있었을 것이니 고보생(조선인) vs 중학생(일본인)끼리의 대결에서는 고보생의 완승이라 할 만 하였다. 이틑날인 11월 4일에는 농교생과 중학생 사이에 또다시 충돌이 있었다.

한편 이러한 '대사건'에 광주와 전남 일대의 일본인 사회는 커다란 쇼크를 받았다. 일본어 신문들은 광주중학생 측에서 중상자 3명, 경상자 13명, 고보 측에서 경상자 9명이 발생하였다고 보도하였는데 여기까지는 사실일 가능성이 높으나 거기다 '일인 소학교 학생들 70-80명이 고보생들에게 부상당했다'는 허위 기사(?)까지 보도하여 분위기를 부추겼다.

일본인 유지들은 조선 총독과 일본군 사령부에 군대 출동을 요청하고 광주고보를 폐교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는데, 이는 너무 심한 호들갑이었고 경찰은 당초 중학생 7명, 고보생 14명만 체포하였던 입장에서 선회하여 72명의 조선인 학생(주로 고보생)을 검거하여 그 중 62명을 검사국에 송치하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지으려고 하였다. 고보생들과 달리 중학생 7명은 한 명도 검사국에 송치되지 않아 고보생들은 대단한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는 사회주의/공산주의 활동가들이 활약할 차례였다. 이들은 고보생, 농교생들을 잘 조직하여 '구속 학생 탈환', '식민지 노예 교육 제도 철폐' 등의 구호를 외치며 대대적인 시위에 나섰고 12월 17일까지 고보생 247명, 농교생 80명이 시위운동으로 인하여 구속되었다. 이 중 상당수는 이내 석방되었으나 1930년 1월 8일의 개학 당시까지도 광주형무소에는 200여명의 학생들이 20여일 간 수감되어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망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는 점은 흥미로운 부분이다.

광주 전남 지역의 시위에 대해 당국은 민심의 교란을 우려하여 보도 통제를 실시하여 진상이 일반에게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무슨 계엄령을 선포하고 교통을 막았던 것도 아니라 금새 소문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보도 통제로 인하여 오히려 여러 가지 헛소문까지 불붙듯이 퍼졌는데 그 중에는 "광주에서 일본 소방대가 조선인을 학살하였다."는 소문이나 "조선인 여학생 2명이 일본군에게 코를 절단당하고 남학생 12명이 피살되었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12월 5일부터 16일까지 서울에서는 모두 30개의 남녀 전문학교와 고등보통학교, 보통학교, 그 외의 각종 학교 등에서 1만 2천여명의 학생들이 시위 또는 맹휴를 전개하였고 총 1400명의 학생이 검거되었다. 타 지방에서도 역시 시위와 맹휴가 전개되었다.



이렇게 사태가 거대화된 데는 사회주의 계열의 '조선학생전위동맹'과 '조선청년총동맹'에서 배포한 왜곡(?) 격문이 단단히 한 몫을 하였다.


"피압박 민중 제군에게 격함!

... 일본제국주의 야수들이 암암리에 매장 소멸시키려고 했던 재래의 학살방법보다 한층 조직적이며 더욱 계획적인 광주 조선인 대살육 음모사건을 알고 있는가?

피억압 민중 제군! 흉포 무쌍한 일본 제국주의의 의식적 의도인 광주 조선인 대학살음모의 한 단면을 들어보라!

재향군인단을 포함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번견 소방대, 청년단, 전남청년단연합회, 소, 중학교 부형회 등 모든 반동집단을 총동원하여 광주 조선인의 최후 1인까지 모두 학살 초멸시키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가장 무장 학살도당인 소방대는 그들의 야수적 무기! 쇠갈구리와 곡괭이로 조선인 상점 기타를... 도괴, 파쇄하고... 암살대, 폭격대 등을 조직하여 전위분자를 암격하였다... 그들은 소, 중학 아동까지 단도를 휴대시키고 조선인을 만나자마자 마구 찌르게하였던 것이다.

수백의 조선인을 중상 치사시켰다. 분연히 궐기하여 광주 수난동포를 구출하자! 현재 광주는 계엄상태에 빠져들어 조선인 대 일본인의 처참하고 비장한 시가전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는 붉은 피로 싸여있는 차가운 시체는 핏자국이 을씨년스러운 거리에 이중 삼중으로 쌓여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격문을 보고 피가 끓지 않으면 조선인이 아니었을 것이다!!

광주가 교통 통제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러한 격문을 작성한 것은 광주의 현 상황을 몰라서가 아니라 전국의 학생들을 격동시켜 시위와 맹휴에 동참시키기 위한 '전술적' 성격이라 보는 것이 타당할 듯 하다. 실제로는 광주에서 사망자는 한 명도 없었으며 오히려 일본인 학생 측이 부상자와 중상자가 더 많았던 것이다.

아무튼 광주학생운동이 이처럼 전국적으로 퍼져나가게 된 것에는 '격문'을 통한 '광주 조선인 학살설'이 단단히 한 몫을 한 것은 분명하였다.

이러한 '조선인 학살설'은 국외로까지 퍼져나가게 되었다.

1929년 12월 19일자 중국 국민당 기관지 '민국일보'에는

"경비 중인 일병이 학생 및 군중을 향해 총을 쏘아서 현장에서 피살자 40여 명이 발생하였고 부상자는 정확한 숫자를 알 수 없다. 일 당국의 성명에 의하면 학생대가 먼저 일병을 향해 돌을 던지며 싸움을 걸었고 일병은 처음 맨손으로 응전하여 서로 결투가 벌어졌다. 이때에 학생 중에 수 명이 권총을 들고 일병을 향해 난사하였다. 학생기숙사에서 탄약 수 상자를 발견하였으므로 이 때문에 학생을 피살한 것이다."

라고 거의 소설에 가까운 내용이 실렸다. 이는 사실 관계와는 무관한 프로파간다로 보이는데... 아무튼 국민당 측은 광주학생운동에 대해 점점 더 대규모 학살 사건인 것으로 보도하기 시작하였다.

중국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는 각지의 국민당 당무, 언론기관 등으로 다음과 같은 통전을 보냈다.

"이번 한국혁명은 노도같이 팽배하여... 전국 민중이 죽음도 불사하며 일본제국주의와 항쟁하고 있다. 우리 유학생들이 연일 중앙에 전보한 바에 의하면 한국혁명지사와 혁명 민중으로 일본제국주의에 체포 살육된 자가 2만여인이다."

체포 살육자의 수는 '2만 여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1930년 1월 22일 중국청년반제대동맹 요녕 분회(사회주의 계열)의 선언서에는 "광주학생사건 발생 후 다시 1700명의 민중을 살해하고 3만여명을 체포했으므로 한국 대중은 분격하여 반일 대시위운동을 일으켰다."고 하였고,

1930년 2월 12일 상해 '민국일보'에서는 "2개월 간의 학생맹휴 중 체포된 자가 4만 5천명, 살해된 자가 수천 명에 이른다'고 보도하였다.

블라디보스톡의 한글 잡지 '선봉' 지에서는

"일인 교장이 한인 학생 3명을 교실에서 총살하자, 한인 학생들이 농기구로 무장하여 일인 중학생과 대충돌이 일어났다. 그런데 일본 경찰이 실탄을 발사하여 한인 학생 30명을 학살했다."라고 보도하였다.

하와이 호놀롤루 교민단에는 "1만 7천여명이 검거되고 그 중 78명이 사형에 처해졌다."는 내용이 전해졌는데 이로 인한 교민들의 분개는 당시 하와이 교민사회에 대한 지도력이 약화되어 있던 이승만이 다시 정치적 세력을 만회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다. 애초에 조선 내 사회주의 계열에서 '조작'한 '조선인 학살설'이 전국적인 학생운동을 촉발시켰을 뿐 아니라 지구를 돌고 돌아 반공주의자 이승만에게 유리하게 작용을 하였으니 세상 일은 참으로 알 수 없다 할 것이다.

이리하여 광주학생운동은 이웃 중국과 세계 도처의 한인 사회에까지 강렬한 영향을 남기고 일단락 되었다.


후일담....

사건의 발단이 되었던 대지주의 아들, 광주고보 2학년생 박준채는 어떻게 되었는가?






박준채는 3개월 형을 살고 나왔는데 물론 학교에서는 퇴학당하였다. 집이 나주 굴지의 대지주였으므로 어려움없이 서울로 유학가서 양정고보를 졸업하였다. 양정고보 졸업 후에는 일본으로 유학하여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하였고 1939년부터는 조흥은행 목포지점에서 근무하며 순탄한 삶을 살았다. 1960년부터는 조선대 법대에서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이후 조선대 법대 학장, 조선대 대학원장 등을 역임하였고 1982년 대통령 표창, 1988년 국민훈장 석류장,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2001년에 향년 87세로 사망하였다.


박준채는 후쿠다를 구타한 것과 3개월 옥고를 치룬 것으로 인해 '독립운동가'로 기억되기도 하는데, 해당 사건 이후에는 일제시대 동안 특별한 독립운동의 행적은 존재하지 않는다.
태그#광주학생운동#박준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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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광주학생운동은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의 학생시위를 시작으로 1930년 3월까지 전국적으로 전개된 학생운동을 말한다. 흔히 일제시기 3대 민족운동의 하나로 평가된다. 일제 식민통치의 본질과 식민지 노예교육의 현실에 대한 전국적인 공감대를 형성케 한 사건으로 국외로 파급되면서 각지의 민족운동 세력에 의해 새로운 운동력으로 전화되었다.

일제 식민지 시기의 학생들은 엄혹한 식민지 현실과 이를 극복하려는 이상 사이에서 갈등했던 계층이었다. 다른 계층에 비해 그나마 자신의 장래에 대한 선택의 여지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식민지 사회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몸부림쳤다. 저자는 당시의 지성인이었던 학생들이 자신의 출세가 아닌 민족의 독립을 위해 역사 속에 뛰어든 실천의 원동력이 궁금하였다.

이 책은 2007년 저자의 박사학위 논문인 「광주학생운동 연구」를 수정.보완한 것이다. 저자는 광주학생운동을 통해 1920년대 학생들의 역량이 결집되는 과정을 밝히기 위해 광주학생운동 이전 1920년대 학생의 존재양태와 동맹휴학, 사회인식과 운동론 등을 자세하게 서술하였다.

또한 전국적 전개양상을 꼼꼼히 살펴보면서 구체적인 실상에 접근하려 했으며, 해외로의 파급도 중요하게 다뤘다. 그 이유는 광주학생운동이 해외의 민족운동 세력을 추동함으로써 학생운동의 차원을 넘어 민족운동의 거대한 물줄기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목차

머리말 4

0. 광주학생운동, 어떻게 보는가

1. 1920년대 후반 학생운동계의 동향
1_ 동맹휴학의 고조와 투쟁의 강화
학생의 교육환경 | 35
동맹휴학의 전국적 양상 | 50
동맹휴학의 항일투쟁적 성격 강화 | 59
2_ 학생운동 조직의 전국화와 성격 변화
학생운동 조직의 기반 확대 | 72
학생 비밀결사의 확산 | 85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과의 결합 | 101
3_ 학생의 식민지 현실 인식과 학생운동론
학생의 식민지 현실 인식 | 113
학생투쟁의 방향 전환과 학생운동론 | 120


2. 1929년 광주지역 학생시위의 전개 과정
1_ 광주지역 학생운동조직의 성장
광주의 교육여건과 청년·사회운동 | 129
성진회의 결성과 사회과학연구의 활성화 | 143
독서회 중앙부의 결성과 학생운동역량의 성숙 | 167
2_ 광주지역 학생 동맹휴학운동의 고양
1920년대 전반 동맹휴학의 양상 | 175
1928년 ‘이경채 사건’과 동맹휴학운동의 고양 | 178
3_ 1929년 11월 광주지역 학생시위의 전개 과정
한·일학생의 충돌과 11월 3일, 1차 시위운동 | 189
11월 12일, 2차 시위운동과 전국화 계획 | 203
나주·목포지역 학생시위로의 파급 | 216

3. 1929년 12월 서울지역 학생시위와 확산
1_ 서울지역 학생시위의 계획과 추진
조선학생전위동맹 주도의 시위계획 | 225
조선청년총동맹의 지원과 전국 확산 추진 | 234
2_ 서울지역 1차 시위와 성격
서울지역 1차 시위의 전개 | 242
서울지역 시위운동의 성격 | 250
3_ 1929년 12월 학생시위의 확산과 사회단체 동향
학생시위의 확산과 특징 | 259
신간회의 민중대회 개최 계획과 좌절 | 270

4. 1930년 학생시위의 전국화와 해외 확산
1_ 서울지역 남녀 학생연합의 2차 시위운동
1월 초 개학과 학생계의 동향 | 289
서울지역 남녀학생의 2차 연합시위 | 299
2_ 시위운동의 전국 확산과 성격
시위운동의 전국 확산과 지역별 양상 | 317
전국 시위운동의 성격 | 384
3_ 광주학생운동의 해외 확산과 반향
중국지역 한인사회의 호응과 만세시위 | 412
중국 정부와 언론의 광주학생운동 인식과 지원활동 | 448
일본·노령·미주지역의 반향 | 456

5. 광주학생운동, 우리에게 무엇인가

부록 491
참고문헌 553
찾아보기 571

출판사 제공 책소개
1929년 광주학생운동은 한국근현대사의 큰 물줄기를 이끈 동력이었다.

광주학생운동은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의 학생시위를 시작으로 1930년 3월까지 전국적으로 전개된 학생운동을 말한다. 흔히 일제시기 3대 민족운동의 하나로 평가된다. 운동의 규모 면에서 3·1운동 이후 가장 크게 전국으로 확산된 대중운동이었다. 일제 식민통치의 본질과 식민지 노예교육의 현실에 대한 전국적인 공감대를 형성케 한 사건으로 국외로 파급되면서 각지의 민족운동 세력에 의해 새로운 운동력으로 전화되었다.

일제 식민지 시기의 학생들은 엄혹한 식민지 현실과 이를 극복하려는 이상 사이에서 갈등했던 계층이었다. 다른 계층에 비해 그나마 자신의 장래에 대한 선택의 여지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식민지 사회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몸부림쳤다. 저자는 당시의 지성인이었던 학생들이 자신의 출세가 아닌 민족의 독립을 위해 역사 속에 뛰어든 실천의 원동력이 궁금하였다.

이 책은 2007년 저자의 박사학위 논문인 『광주학생운동 연구』를 수정·보완한 것이다. 저자는 광주학생운동을 통해 1920년대 학생들의 역량이 결집되는 과정을 밝히기 위해 광주학생운동 이전 1920년대 학생의 존재양태와 동맹휴학, 사회인식과 운동론 등을 자세하게 서술하였다. 또한 전국적 전개양상을 꼼꼼히 살펴보면서 구체적인 실상에 접근하려 했으며, 해외로의 파급도 중요하게 다뤘다. 그 이유는 광주학생운동이 해외의 민족운동 세력을 추동함으로써 학생운동의 차원을 넘어 민족운동의 거대한 물줄기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3·1운동이나 6·10만세운동은 처음부터 민족독립의 목적을 분명히 한 운동이었다. 반면 광주학생운동은 처음 한·일 학생들의 사소한 충돌에서 시작되었으나, 진행과정에서 민족해방운동, 독립운동으로 발전했다. 운동사적 측면에서 광주학생운동의 의의는 운동이 스스로 성장하여 민족운동의 큰 흐름을 형성했다는 데 있다. 결국 일제 식민지시기 3대 민족운동에서 학생들은 주요한 동력이었다. 해방 이후 학생들은 순수한 열정과 헌신으로 다시 4·19혁명과 민주화운동의 주역이 되었고 앞으로도 학생들은 우리 사회를 정화시키는 소금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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