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1-21

광주학생 항일운동 - 1929년 전국에서 벌어진 학생들의 시위운동. 3.1 운동 이후 가장 큰 규모로 벌어진 항일운동 : 네이버 블로그

광주학생 항일운동 - 1929년 전국에서 벌어진 학생들의 시위운동. 3.1 운동 이후 가장 큰 규모로 벌어진 항일운동 : 네이버 블로그


광주학생 항일운동 - 1929년 전국에서 벌어진 학생들의 시위운동. 3.1 운동 이후 가장 큰 규모로 벌어진 항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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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7. 7.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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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 항일운동

일제강점기 학생운동 한국의 독립운동 1920년대


光州學生抗日運動

 


1. 개요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시작되어 이듬해 3월까지 전국에서 벌어진 학생들의 시위운동이다3.1 운동 이후 가장 큰 규모로 벌어진 항일운동이다.

동학농민운동5.18 민주화운동과 함께 광주광역시가 압제자에 굴하지 않는 민중저항의 상징적 장소가 되게 한 사건이다.

 

2. 전개

 

1926 11월 3최규창의 집에서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 왕재일과 장재성은 항일 학생 비밀 결사 성진회를 조직한다같은 학교 재학생 김광용정우채국순엽임주홍안종익최용호김창주 등과 광주농업학교 재학생인 정동수정남균정종석김한필문승수박인생 등이 참여했다.

 

성진회는 왕재일과 장재성 등 주요 인물들이 졸업하고 회원 한 명이 형사와 인척 관계인 것으로 드러나 해산한다.

 

1929 6유학을 마친 장재성은 성진회를 계승한 독서회 중앙본부를 결성한다.

 

같은 달 광주농업학교는 무등산에서광주사범학교는 일제 참배의례에 거부해 문을 닫은 광주수피아여자고등학교 뒷산에서 독서회를 결성하고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도 장재성의 여동생 장매성의 주도로 소녀회를 조직한다.

1929년 10월 30일 광주에서 나주로 가는 호남선 통학열차 안에서 일어난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과 일본인 학교인 광주중학교 학생들의 충돌이 본격적인 항일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일본인 학교인 광주중학 3학년 학생 후꾸다슈조(福田修三스메요시 가쓰오(末吉克己다나까(田中등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3학년인 박기옥과 이광춘 등을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하였고 이를 목격한 박기옥의 사촌동생 박준채가 달려와 항의했는데후쿠다가 "뭐냐 조센징주제에"라는 소리로 적반하장을 했고결국 박준채가 주먹을 날리면서 싸움이 벌어졌다.

 

싸움은 광주고등보통학교와 광주중학 학생들의 패싸움으로 확산되었다그런데 일본 경찰은 일방적으로 일본인 학생을 편들고 조선인 학생들을 구타하였다급히 나선 양측 학교 교사들 중에서도 광주고보 교사들은 일단 싸움을 말리려 했으나 광주중학 교사들은 싸움을 부추기는 지경이었다.


 

1929년 11월 3일 광주사범학교 학생의 시가 행진


당일 하교열차 내에서 박준채가 후쿠다에게 사과를 요구하자 후쿠다가 다짜고짜 박준채의 뺨을 치면서 학생들이 몰려들어 또다시 싸움이 벌어졌는데,

 

승무원이 싸움을 말리자 당시 열차에 승차했던 광주일보의 일본인 기자가 신분을 밝히면서 조선학생들의 일방적 잘못이라며 비난하고열차에 있던 다른 승객들도 조선 학생들을 비난하기 시작했고결국 박준채와 친구들은 속으로 삭이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같은 해 11월 3음력 10월 3일 
개천절성진회 창설 3주년그리고 메이지 유신을 기념하는 명치절이 겹치는 일요일일제는 학생들에게 등교하고 신사를 참배할 것을 요구했다.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명치절 기념식에 기미가요를 부르지 않고 신사참배를 거부했고, 10월 30일 사건을 편향되게 보도한 광주일보 사를 공격했다.

그러던 중 광주신사에 참배를 마치고 돌아가던 광주중학 학생들이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을 칼로 찌르는 사건이 발생한다.

 

수 명의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과 광주중학 학생들이 충장로에서 충돌했고광주중학 학생들은 광주동부소방서 방면으로 도망쳤다그런데수십명의 광주중학 학생들이 학교 유도교사의 인솔하에 야구방망이나 죽창 따위를 들고 광주역으로 가 하교하려는 한국인 학생들을 공격한다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곧바로 달려갔고한국인 학생들과 일본인 학생들의 싸움으로 광주시내는 개판이 된다.

집에 돌아가면 되는 일요일 정오인데도 학교로 돌아온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일본에 대항해 투쟁할 것을 논의한다시내 각 학교 학생들도 투쟁에 동참할 뜻을 밝혔다광주고등보통학교와 광주농업고등학교 학생들은 괭이자루장작개비목검 등으로 무장하고 오후 2시경부터 행진가를 부르며 시내로 진출한다시위대는 '조선독립만세', '식민지 노예교육 철폐', '일제 타도등의 구호를 외치고 애국가와 응원가를 부르며 우선 광주중학으로 향했다그러나 일본 경찰이 소방대재향군인을 동원해 광주중학으로 가는 동문다리를 틀어막자 시위대는 충장로로 방향을 틀었다.


전남도청
에 이르자 광주사범학교 학생 100여명을 비롯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와 수피아여자고등학교 학생들학생이 아닌 광주 시민까지 시위대에 합류한다.

3만여 명에 이른 시위대는 도립병원(전남대병원광장에까지 진출했으나 경찰의 저지로 방향을 돌려 광주천변을 행진하다 해산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학교로 돌아와 비상 연락과 부상자 입원 문제를 의논한 뒤 해산했다한편 광주시내의 일본인들은 시위대와의 충돌을 피해 가게 문을 닫고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항일운동의 물결은 광주 전역으로 퍼져 곳곳에서 가두시위가 일어나게 된다. 11월 12독서회의 주도로 네 학교의 학생들과 수많은 광주 시민들이 대규모로 시위를 벌였다항일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어 이듬해인 1930 3월까지 전국 320여개교에서 5만여명의 학생의 참여해 1462명이 퇴학, 3000여명이 퇴학 혹은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신간회에서는 김병로허헌 등으로 구성된 조사단을 파견하였다신간회의 도움은 이 사건이 전국적으로 알려지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3. 기타

 

장재성은 끝이 좋지 않았다.

여운형 등과 조선건국준비위원회 활동을 했으나 1948년 황해도의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가해 사상범으로 수배되었고6.25 전쟁 발발 직후 북에 협조하는 것을 막으려는 경찰들에게 총살당한다.

직접적인 계기가 된 열차 희롱 사건의 당사자인 박준채는 많은 학교들이 일제의 보복이 두려워서 중퇴 후 몇 주간 전학을 하지 못했으나 양정고등보통학교에 편입와세다대학에 진학한 뒤 졸업하여 조흥은행 목포지점의 은행원으로 시작하여 나주에서 주조장을 운영하다가 1960년부터 1988년 정년퇴직 때까지 조선대학교 법학대학 교수와 여대 학장대학원장 등을 지냈고이후 광주학생독립운동 동지회 이사광복회 회원 등으로 광주학생운동의 정신을 알리는 데 노력해오다가 2001년 3월 7일에 노환으로 사망했다.

 

1990년 광주학생항일시위의 점화자로 공훈이 인정되어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5.18 민주항쟁때도 조선대 시국양심선언에도 관여했다고 한다여러모로 광주의 민중운동에서 꽤나 큰 역할을 한 사람.

열차 희롱 사건의 당사자 중 하나인 이광춘 역시 광주여고보 학생들을 이끌고 시위에 참가하였으며그 공훈이 인정되어 1996년 건국포장을 받았고, 2010년 4월 12일 노환으로 사망하였다비리사학으로 유명한 박철웅도 이 운동에 참가했다가 구류형을 받기도 했다.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187
에서 노구가 이것을 소재로 노인삼에게 거짓말을 하였다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에서는 박준채가 1975년에 사망한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2001년에 사망하였다.

처음 이 운동이 벌어진 날인 
11월 3을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지정하고 있다본래는 '학생의 날'이었다. 2018년 제89주년 학생독립운동 기념식을 기점으로 주관부처를 대한민국 교육부와 국가보훈처에서 공동으로 개최하게 되었다이날 행사에는 국무총리 이낙연 등이 참석하였다.

광주광역시 북구 
누문동(금남로5가역 인근)에 위치한 광주제일고등학교 교정에는 국민 성금으로 건립한 광주학생항일운동 기념탑이 존재하며학교 역사관과 건물을 같이 사용하는 광주학생항일운동 기념관이 존재한다광주제일고등학교 야구부는 훈련 시작 전 기념탑을 향해 묵념을 하며전국대회 출전을 위해 상경 前에 기념탑에 들러 참배를 하는 전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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