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오 일가족 살해사건
은하방주
낙서장
・ 14시간 전 URL 복사 이웃추가
<우리 민족의 어떠함>
우리 민족이 어떠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겪어온 바... 우
리는 그러하다. "비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실상"을 말하려 할 뿐이다.
우리 과거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실감나지 않으면 현재의 북조선을 보면 된다: 피둥피둥 살찐
돼지같은 왕족과 그 밑에서 신음하는 피골이 상접한 인민들; 그럼에도 70여년 동안 한번도
들고 일어나지도 못하는 좀비근성.
북조선이 너무 멀게 느껴지는가? 후조선의 좌빨 양아치들을 보라. 그들이 가짜, 거짓의 화신
들임을 보지 못하거나 보고도 거꾸로 말하거나 행하는 도착적 링겐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에겐 참된 것 또는 새로운 것이 없다: 떠들어 대거나 촐싹거리는 거의 모든 것들은 틀렸
거나, 설령 옳더라도 진부하거나 또는 무의미한 것들일 뿐이다.
(송산)
《가즈오 일가족 살해사건》
일제시대 조선에 거주했던 일본인들 가운데에는 가해자도 있었지만, 동시에 조선 사회 속에
서 평범하게 살아가며 인간적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도 존재했다.
가즈오는 경상도 지역에 거주하던 일본인 지주였다. 흔히 상상되는 착취형 지주와 달리, 그
는 소작료를 수확량의 10분의 1만 받았고, 법이 허용하는 최소치조차 넘지 않았다.
생계가 어려운 소작인에게는 식량을 나누어주었고, 마을에 상을 당한 집이 있으면 일본인이
라는 신분을 숨기지도 않은 채 가장 먼저 달려가 함께 울고 함께 일을 도왔다. 그는 통치자가
아니라 이웃으로 살았다.
그의 선행은 일회적 자선이 아니었다. 갈 곳 없는 조선인 고아들을 거두어 들였고, 숫자가 늘
어나 1945년 무렵에는 사실상 사설 고아원 수준이 되었다.
가즈오 부부는 이 아이들에게 일본인과 조선인을 구분하지 않고 부모 역할을 자처했고, 아이
들 역시 그들을 아버지, 어머니라 불렀다. 이 가운데 한 명은 동경제국대학까지 유학을 보낼
정도였다.
그럼에도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선언과 함께 상황은 완전히 뒤집힌다. 국가 권력
이 사라진 공백 속에서, 그가 길러낸 조선인 청년들이 흉기를 들고 그의 집으로 몰려왔다. 그
들은 가즈오를 ‘적’으로 규정했고, 이전의 관계와 은혜는 단숨에 말살되었다.
가즈오는 끝까지 항변하지 않았다. 자신이 일본인임을 부정하지도, 조선의 광복을 부정하지
도 않았다. 오히려 기쁨을 함께 나누자고 말했다. 돌아가라면 돌아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 모든 말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는 집단 폭력으로 살해되었고, 그 폭력은 개인의
분노가 아니라 집단의 선택이었다.
이어 벌어진 일은 더 참혹하다. 그의 아내는 집단 강간을 당한 끝에 사망했고, 시신은 모욕당
했다. 이는 전쟁도, 투쟁도, 저항도 아니다. 명백한 살인과 강간, 약탈이었다. 피해자가 일본
인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범죄였다.
남겨진 어린 딸 히미코는 보호받지 못했다. 며칠을 울다 굶주림 속에서 방치되었고, 결국 다
리 밑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이 과정에서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마을은 침묵했다.
이 사건이 특별한 예외였다고 믿을 근거는 없다. 1945년 8월 중순부터 9월 중순까지 남한
지역은 사실상 무정부 상태였다. 북한에는 소련군이 즉각 진주했지만, 남한에는 미군정이 들
어오기까지 한 달의 공백이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일본인과 그 재산은 보호받지 못했고, 폭력은 통제되지 않았다.
문제는 이 폭력이 한국 사회에서 체계적으로 다뤄진 적이 없다는 점이다. 조선인이 일본인에
게 가한 살해, 강간, 약탈은 연구 대상이 되지 않았고, 기록되지 않았으며, 교육되지 않았다.
대신 조선인의 ‘피해’만이 반복되었다. 피해의 서사는 도덕적 면죄부가 되었고, 가해의 기억
은 집단적으로 삭제되었다.
조선은 일본 통치 아래에서 농업사회에서 자본주의 공업사회로 급속히 이동했다. 이 사실을
인정하자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현실을 부정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 통치가 끝나는 순간, 많은 조선인들은 패전국 일본의 일부로 남는 것을 거부했고, 그 선택
은 정치적 판단이 아니라 생존 전략이었다. 문제는 그 전략이 폭력과 약탈로 이어졌다는 점이
다.
일본인의 재산은 ‘적산’이라는 이름으로 몰수되었고, 남북한 정권은 이를 아무런 도덕적 문제
의식 없이 분배했다. 개인의 범죄가 아니라 국가의 승인으로 정당화된 약탈이었다.
만약 일본이 전쟁에서 패하지 않았다면, 혹은 휴전이라도 했다면 조선 사회, 조선인들의 태도
는 같았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충성은 계속되었을 것이다. 태도는 원칙이 아니라 상황
에 따라 바뀌었다.
이 글의 불편함은 여기에 있다. 한국 사회는 피해자일 때만 도덕을 말하고, 가해자가 되는 순
간 침묵한다. 이 구조를 건드리지 않는 한, 역사는 성찰이 아니라 반복된 자기연민에 머물 수
밖에 없다.
※ 13원의 기적 기프트 보내기는 글쓰기에 큰 힘이 됩니다 ㅅㅗ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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