松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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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 출신 마르크스 경제학 교수 박현채 3-1
ㆍ반박정희 경제학은 어떻게 김대중의 언어가 되었는가
박현채 前 조선대 경제학과 교수
1934. 11. 3, 전남 화순
1995. 8. 17 사망
한국 좌파의 경제 담론은 오랫동안 거의 변하지 않았다. 성장은 늘 의심의 대상이었고, 대기업은 구조적으로 나쁜 존재로 규정됐으며, 외국과의 거래는 곧 종속으로 해석됐다. 정권이 바뀌고 세대가 바뀌어도 이 언어는 반복됐다. 이쯤 되면 단순한 정치적 반감이라기보다 하나의 사고 체계로 봐야 한다.
이 사고 체계는 어디에서 시작됐을까. 흔히들 군사정권에 대한 반감, 박정희에 대한 정치적 반대에서 비롯됐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반대가 수십 년 동안 반복되려면, 반드시 생각의 틀과 언어가 필요하다. 한국 좌파 경제담론에는 분명한 출발점이 있었다.
그 출발점은 의외로 분명하다. 바로 ‘산’이다.
박현채는 실제로 산에 있었던 사람이다. 그는 소년 시절 총을 들고 빨치산이 되었고, 이후 서울대에 진학해 마르크스 경제학을 공부했다. 중요한 것은 이 이력이 상징적이라는 점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산에서 익힌 사고방식이 이후 그의 경제 해석으로 거의 그대로 옮겨졌다는 사실이다.
빨치산의 세계에서 사고는 단순하다. 적과 동지는 명확히 구분되고, 중간 지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타협은 곧 배신이 되고, 생존을 위해서는 상대를 제거해야 한다. 이 전투적 사고방식은 전쟁 상황에서는 기능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논리를 경제로 가져오는 순간, 문제는 구조적으로 발생한다.
경제는 전선이 아니다. 누군가를 몰아낸다고 해서 시스템이 자동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외국 자본을 배척한다고 생산성이 생기지 않고, 대기업을 적으로 규정한다고 산업 구조가 개선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현채의 경제 해석에는 이 전투적 세계관이 깊게 남아 있었다.
외국 자본은 자연스럽게 ‘외부의 적’이 되었고, 대기업은 내부의 배신자, 이른바 매판 자본으로 규정됐다. 성장은 언제나 의심의 대상이었고, 성과는 구조적 착시로 해석됐다. 계급투쟁의 언어는 ‘민족’이라는 말로 바뀌었지만, 사고의 구조는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이 세계관에서 박정희는 필연적인 적일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의 경제는 성장, 개방, 수출, 대기업 중심이었다. 이는 빨치산적 사고에서 보면 위험하고 불순한 선택으로 보인다. 외국과 손잡고, 대기업을 키우고, 빠른 성장을 추구하는 방식은 전선의 논리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래서 반박정희는 정치적 선택 이전에 사상적 필연이 된다.
이제 이 사고 체계는 학문에 머물지 않았다. 정치가 이를 필요로 하기 시작했다. 박정희의 경제 성과에 맞서 싸우려면, 도덕적으로 우위에 설 수 있는 경제 언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박현채의 마르크스 경제론은 정치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박현채를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한 정치인이 김대중이었다. 김대중은 박정희의 성장 중심 경제에 맞서기 위해 ‘다른 경제’를 말해야 했다. 그리고 그 ‘다른 경제’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인물이 바로 박현채였다. 반박정희 경제학은 이렇게 김대중의 언어가 된다.
이 칼럼은 박현채 개인을 비난하려는 글이 아니다. 다만 하나의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산에서 시작된 전투적 사고방식이 경제 해석으로 옮겨지고, 그것이 다시 정치의 언어가 되었을 때, 우리는 과연 그 결과를 제대로 점검해왔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않는 한, 한국의 경제 논쟁은 앞으로도 같은 자리를 맴돌 수밖에 없다.
ㆍ총을 내려놓고 이론을 들다
ㆍ빨치산 경험은 어떻게 경제관이 되었는가
박현채의 사상을 이해하려면, 그의 책보다 먼저 그의 선택을 봐야 한다. 그는 단순히 마르크스 경제학을 공부한 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먼저 총을 들었고, 나중에 펜을 들었다. 이 순서가 중요하다. 사상은 언제나 삶의 뒤에 따라온다.
어린 소년 박현채가 산으로 들어간 것은 항일 투쟁의 연장이 아니었다. 그가 빨치산이 된 시기는 해방 이후였고, 전쟁 중이었다. 이는 외세에 맞선 투쟁이라기보다 동족 간 내전에 가까운 선택이었다. 이 사실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때 형성된 세계관이 이후 그의 경제 해석 전체를 관통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사고방식이 산에서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박현채는 총을 내려놓은 뒤, 곧바로 펜을 들었다. 서울대에 진학해 마르크스 경제학을 공부했고, 학자가 되었다. 겉으로 보면 삶의 방향이 완전히 바뀐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고의 구조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총 대신 개념을 들었을 뿐, 세상을 보는 방식은 계속 전투의 논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에게 경제는 중립적인 시스템이 아니었다. 경제는 투쟁의 장이었다. 누군가는 이기고, 누군가는 져야 했다. 외국 자본은 자연스럽게 외부의 적이 되었고, 국내 대기업은 내부의 배신자가 되었다. 성장은 단순한 성과가 아니라 의심해야 할 현상이었고, 성공은 언제나 구조적 착시로 해석됐다.
이때 마르크스 경제학은 하나의 도구가 된다. 계급투쟁의 언어는 그대로 유지되되, 표현만 바뀐다. 계급은 민족으로 치환되고, 제국주의는 외세로, 부르주아는 매판 자본으로 번역된다. 전선의 논리는 경제 구조라는 이름을 얻는다. 전투적 세계관이 학문적 언어로 포장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경제관에서는 언제나 적이 필요하다. 경제가 잘 돌아가면 그 자체로 평가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손해를 보고 있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외부와 연결되면 종속을 의심하고, 규모가 커지면 착취를 의심한다. 협력보다는 대립이 먼저 나오고, 성장보다는 분배가 앞선다.
이 사고방식은 설명력보다 방향성을 중시한다. 결과보다 의도가 중요해진다. 정책이 실패해도 “의도는 옳았다”는 말로 정리된다. 왜냐하면 전투에서는 패배할 수 있어도, 우리 편을 잘못 선택했다고 인정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오면 박현채의 경제관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다. 그것은 산에서 형성된 세계 인식이 학문이라는 옷을 입은 결과다. 그래서 그의 경제학은 냉정한 분석보다는 도덕적 판단에 가깝고, 경제학의 숫자보다는 진영을 먼저 묻는다.
이 지점에서 그의 사상은 필연적으로 박정희와 충돌하게 된다. 박정희의 경제는 전투가 아니라 동원과 조직, 개방과 속도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반박정희는 정치적 입장 이전에, 이 세계관에서는 거의 숙명에 가까운 선택이었다.
ㆍ마르크스 경제론의 한국식 번역
ㆍ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은 무엇을 말했는가
박현채의 경제학은 흔히 ‘마르크스 경제학’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그의 이론을 그대로 마르크스주의라고 부르기에는 어딘가 어색한 지점이 있다. 계급투쟁이라는 핵심 개념이 전면에 나서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그 자리에 들어선 단어가 있다. 바로 ‘민족’이다.
박현채는 한국 사회에서 계급이라는 말을 그대로 쓰는 데 한계를 느꼈다. 해방과 전쟁을 거친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와 자본가의 대립은 아직 뚜렷하지 않았고, 오히려 ‘우리’와 ‘외부’라는 감각이 더 강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그는 이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대신 마르크스의 언어를 한국식으로 바꿨다. 계급 대신 민족을 세우고, 계급 간 착취 대신 민족 간 수탈을 이야기했다.
이렇게 해서 등장한 것이 민족경제론이다. 민족경제론은 경제를 하나의 경쟁 시스템이 아니라 민족 단위의 생존 문제로 본다. 한 나라의 경제는 스스로 서야 하며, 외부와 깊이 연결될수록 약해진다고 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효율이나 성장률이 아니라 자립 여부다. 잘 사는 것보다 남에게 휘둘리지 않는 것이 우선이다.
이 관점에서 외세는 언제나 경계의 대상이 된다. 외국 자본은 투자자가 아니라 지배자로 인식되고, 국제 무역은 교환이 아니라 종속의 통로로 해석된다. 국내 대기업은 성장의 주체가 아니라 외세와 결탁한 매판으로 규정된다. 이 공식은 단순하며 강력하다. 누가 ‘우리 편’이고, 누가 ‘의심해야 할 대상’인지 단번에 구분해 주기 때문이다.
이 도식의 장점은 설명이 쉽다는 데 있다. 경제가 어려워지면 외부 탓을 하면 된다. 불평등이 보이면 매판 자본을 지목하면 된다. 실패의 원인을 내부의 선택에서 찾지 않아도 된다.
언제나 책임은 구조 바깥, 혹은 민족 바깥에 있다. 이 공식은 한 번 익히면 버리기 어렵다. 현실이 바뀌어도 해석은 그대로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특징 하나가 드러난다. 민족경제론에서는 성장이 언제나 의심의 대상이 된다는 점이다. 숫자가 좋아져도 곧바로 묻는다. “누가 손해를 보고 있는가.” 수출이 늘어나도 질문은 같다. “외국에 종속되는 것 아닌가.” 대기업이 커지면 그 자체로 경계의 대상이 된다. “외세와 결탁한 것 아닌가.”
이 의심은 단순한 경계심이 아니다. 민족경제론에서는 성장이 본질적으로 위험할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성장은 외부 자본, 외부 시장, 외부 기술과 연결될 수밖에 없고, 그 연결은 곧 종속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안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성장의 결과보다 성장의 경로가 먼저 심문된다.
문제는 이 의심이 한 번 고착되면 쉽게 풀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성장이 실제로 생활을 개선해도, 수출이 고용을 늘려도, 그 성과는 잠정적인 것으로 처리된다. 언제든 대가를 치를 것이라는 전제가 앞서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성장은 항상 미완의 성과가 되고, 성공은 늘 조건부가 된다.
이 경제관에서는 실패가 설명되기 쉽고, 성공은 설명되기 어렵다. 실패는 외세, 구조, 종속이라는 말로 정리할 수 있지만, 성공은 오히려 이론을 위협하는 예외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공 앞에서는 침묵하거나, 다른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겉보기만 성장했을 뿐이다.” “민족의 체력은 약해졌다.” 같은 말이 뒤따른다.
이처럼 민족경제론은 분석의 도구이기 이전에 해석의 틀이다. 경제 현상을 평가하기보다는 도덕적으로 분류하는 역할을 한다. 누구의 편에 설 것인가를 먼저 묻고, 그 다음에 숫자를 본다. 그래서 이 이론은 학문에 머무르기보다 정치와 잘 결합된다.
ㆍ박정희라는 ‘필연적 적’
ㆍ왜 이 경제학은 박정희를 부정할 수밖에 없었나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이 현실과 처음으로 정면 충돌한 지점은 바로 박정희의 경제 정책이었다. 이 충돌은 정책 간의 차이 정도가 아니었다. 세계를 보는 방식 자체의 충돌이었다.
박정희 경제의 핵심은 단순했다. 수출, 개방, 성장. 외국 자본과 기술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고, 대기업을 키워 빠르게 산업 구조를 바꾸는 방식이었다. 결과는 숫자로 확인됐다. 수출은 늘었고, 공장은 늘어났으며, 농촌을 떠난 인구는 도시로 흡수됐다. 가난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방향은 분명히 위를 향하고 있었다.
이 지점에서 박현채의 이론은 곤란한 상황에 놓인다. 민족경제론에 따르면 외국과 깊이 연결될수록 종속은 심해져야 하고, 대기업 중심의 성장은 내부 불균형을 고착시켜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수출은 종속이 아니라 성장의 통로가 되었고, 대기업은 매판이 아니라 산업화의 추진력이 되었다.
이때 선택지는 둘 중 하나였다. 이론을 수정하거나, 현실을 부정하거나. 박현채는 후자를 택했다.
박정희 경제의 성과는 그래서 언제나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수출이 늘어도 “외세에 더 깊이 묶인 것”으로 해석됐고, 공장이 들어서도 “민족경제의 체력을 약화시키는 과정”으로 설명됐다. 숫자는 중요하지 않았다. 숫자가 좋아질수록 오히려 더 큰 경계심이 작동했다.
이런 관점에서 포항제철과 경부고속도로는 성공 사례가 아니라 문제 사례가 된다. 종합제철은 자립의 상징이 아니라 외자 의존의 결정판이었고, 고속도로는 발전의 기반이 아니라 농촌을 파괴하는 인프라로 해석됐다. 잘된 일이기 때문에 문제가 된 셈이다.
이 지점에서 논쟁은 정책을 넘어선다. 박정희 경제가 실제로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는 부차적인 문제가 된다. 중요한 것은 이 성공이 민족경제론의 전제를 무너뜨린다는 사실이다. 만약 박정희 방식이 작동했다면, 외세와의 연결은 곧 종속이라는 공식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대기업은 본질적으로 나쁘다는 주장도 힘을 잃는다.
그래서 박정희는 단순한 정치적 반대 대상이 아니라, 이론 전체를 위협하는 존재가 된다. 이때 반박정희는 선택이 아니라 숙명이 된다. 박정희를 인정하면, 민족경제론은 스스로를 수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하나 떠오른다. 과연 이 반대는 이론에서 출발한 것일까, 아니면 감정에서 출발한 것일까. 총을 들고 싸웠던 세계관에서 출발한 전투적 사고가 먼저였고, 그 사고에 맞지 않는 현실을 적으로 규정한 것은 아니었을까.
박현채에게 박정희는 단지 다른 정책을 펼친 대통령이 아니었다. 그는 잘못된 길로 가고 있으면서도 성공해버린 존재였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실패했다면 설명하기 쉬웠을 것이다. 성공했기 때문에 끝까지 부정해야 했다.
이 지점에서 박현채의 경제학은 분석의 언어에서 도덕의 언어로 이동한다. 박정희 경제는 효율의 문제를 넘어 ‘옳지 않은 선택’이 된다. 성공은 잠정적이고, 대가는 언젠가 치를 것이라고 말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이론이 무너지니까.
이렇게 해서 ‘반박정희 경제학’은 하나의 정치적 언어로 굳어진다. 이것은 박정희 개인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특정한 세계관이 현실과 충돌했을 때 선택한 방어 방식이었다. 박정희를 부정함으로써만 유지될 수 있는 이론, 그것이 바로 이 경제학의 한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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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다음 글에서는 이 반박정희 경제학이 어떻게 정치의 언어로 번역되었는지, 그리고 왜 김대중이 이 이론을 필요로 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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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 출신 마르크스 경제학 교수 박현채 3-2
: 반박정희 경제학은 어떻게 김대중의 언어가 되었는가
ㆍ김대중, 이 이론을 정치로 이용하다
ㆍ마르크스 경제론은 어떻게 대중정치가 되었는가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은 학문으로만 남기에는 너무 정치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현실을 설명하는 이론이기보다, 현실과 싸우기 위한 앙심에 가까웠다. 그리고 이 앙심을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했던 정치인이 있었다. 바로 김대중이다.
김대중이 맞서야 했던 상대는 박정희였다. 박정희의 강점은 눈에 보이는 성과, 빠른 성장, 숫자로 증명되는 변화였다. 이 성과 앞에서 모든 정치적 비판은 쉽게 힘을 잃었다. “독재는 나쁘다”는 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박정희의 경제를 넘어설 수 있는, 혹은 최소한 그 정당성을 흔들 수 있는 경제 논리가 필요했다.
여기서 김대중은 박정희의 경제를 도덕적으로 부정할 수 있는 언어, 성장을 의심하고 개방을 경계하며 대기업 중심 구조를 문제 삼을 수 있는 이론이 필요했다. 그 역할을 해줄 사람이 바로 박현채였다.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은 반박정희를 위한 거의 완성된 무기였다.
이 둘의 관계는 단순한 학자와 정치인의 만남이 아니었다.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했다. 박현채에게 김대중은 자신의 이론을 현실 정치로 옮길 수 있는 통로였고, 김대중에게 박현채는 박정희 경제의 성과를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이론적 방패였다. 이렇게 해서 학문은 정치의 언어로 번역되기 시작한다.
그 결정적 결과물이 바로 『대중경제 100문 100답』이다. 제목만 보면 김대중 개인의 경제 철학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러 박현채와 김대중을 따르는 소위 학자들이 참여해 만든 집단 작업의 산물이었다.
그 중심에는 물론 박현채가 있었다. 이 책에서 민족경제론의 핵심 논리는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질문과 답변의 형식으로 재구성된다.
중요한 변화는 여기서 일어난다. “외국 자본은 위험하다”는 말은 “우리 경제를 지키자”로 바뀌고, “대기업 중심 구조는 문제다”라는 주장은 “서민 경제를 보호하자”는 표현으로 옮겨간다. 이 과정에서 외견상 이론은 부드러워지지만, 방향은 꾸준히 박현채가 의도한 쪽으로 간다.
이렇게 민족경제론은 대중정치의 언어가 된다. 학문적 논쟁의 대상이었던 이론은 선거용 구호와 정책 비전으로 변신한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이론의 정확성이 아니라, 메시지의 전달력이다.
복잡한 경제 구조를 설명하는 대신, 선과 악을 나누는 언어가 앞서고, 누가 우리 편이고, 누가 반대편인지를 분명히 하는 것이 박현채와 김대중에게 정치적으로 훨씬 유리했다.
이 지점에서 하나의 중요한 전환이 일어난다. 박현채의 이론은 더 이상 박현채 개인의 것이 아니게 된다. 김대중이라는 정치인의 언어 속으로 들어가면서, 그것은 집단적 신념이 된다.
이후 이 이론을 비판하는 것은 단순한 학문적 반론이 아니라, 특정 정치 세력 전체를 부정하는 행위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이렇게 해서 민족경제론은 보호받는 사상이 된다. 선거를 통해 김대중이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는 사실은 이론의 검증처럼 오해된다. 정치적 지지는 곧 이론적 정당성으로 바뀌고, 반대자는 현실을 모르는 사람, 혹은 기득권의 대변자로 분류된다.
하지만 이 이론은 실제로 경제를 더 잘 설명했는가? 박정희 이후의 한국 경제 현실은 이 이론의 예측과 얼마나 맞아떨어졌는가? 정치의 언어가 된 순간, 이런 질문은 점점 불편한 것이 되어버렸다.
박현채의 마르크스 경제론은 책 속에 머무르지 않았고, 김대중이라는 정치인을 통해 대중정치의 언어가 되었다. 이 순간부터 이 이론은 학문적 오류를 지적하기 어려운 신적인 존재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정치적 신념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ㆍ갈라섰지만 끊어지지 않았다
ㆍ박현채와 김대중의 결별 이후
박현채와 김대중의 관계는 오래가지 않았다. 처음에는 이론과 정치가 서로를 필요로 하며 단단히 맞물려 돌아갔지만, 1990년대에 접어들며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균열의 이름은 ‘신자유주의’였다.
세계가 변하고 있었다. 냉전은 끝났고, 소련은 붕괴했다. 국제 금융 질서는 재편되었고, 자본의 이동은 훨씬 빨라졌다. 이 변화 속에서 김대중은 정치인으로서 선택을 해야 했다. 이상보다 현실을, 이론보다 집권 가능성을 고려해야 하는 위치에 올라섰기 때문이다.
김대중은 점점 다른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시장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았고, 개방을 무조건 악으로 규정하지도 않았다. ‘뉴DJ플랜’으로 불린 경제 구상에는 경쟁, 효율, 세계화 같은 단어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것은 박현채의 민족경제론과는 분명히 다른 방향이었다.
이 지점에서 두 사람은 갈라선다. 박현채는 김대중의 변화를 ‘후퇴’로 보았다. 민족경제론의 핵심 전제, 즉 외세와의 깊은 결합은 결국 종속으로 이어진다는 믿음을 끝내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대중이 현실 정치의 언어를 선택한 반면, 박현채는 자신의 이론적 세계 안에 남았다.
그러나 이 결별은 생각만큼 깔끔하지 않았다. 개인적 인연은 끊어졌지만, 사상적 흔적은 그대로 남았다. 김대중의 경제관에서 민족경제론의 핵심 정서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성장을 말하면서도 늘 ‘분배’를 함께 붙였고, 개방을 추진하면서도 ‘보호’라는 용어를 동시에 사용했다. 대기업을 활용하면서도 도덕적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이것은 모순이라기보다 흔적이다.
한때 정치 언어를 구성했던 이론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설령 정책은 바뀌어도, 문제를 바라보는 기본 시선은 남는다. 그래서 박현채와 결별한 이후에도 김대중의 경제 담론 속에는 민족경제론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더 중요한 변화는 이후에 일어난다. 박현채 개인은 정치의 전면에서 물러났지만, 그의 이름은 오히려 더 단단해졌다. 김대중과 결별한 사실조차 박현채를 보호하는 논리가 되었다. “권력과 타협하지 않은 학자”, “끝까지 원칙을 지킨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더욱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박현채는 비판하기 어려운 존재가 된다. 그의 이론이 현실과 어긋났다는 지적은 “시대를 앞서간 사상”이라는 말에 막혔다. 예측이 빗나갔다는 비판은 “현실이 아직 따라오지 못했다”는 답변으로 돌아왔다. 틀렸다는 말은 곧 인격 공격으로 해석되었다.
이 과정에서 학문적 검증은 점점 사라졌다. 남는 것은 오르지 박현채에 대한 존경과 기억뿐이었다. 그의 이름은 하나의 상징이 되고, 그 상징을 건드리는 것은 금기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박현채는 살아 있는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이미 평가가 끝난 인물처럼 다뤄졌다.
하지만 학자가 성역이 되는 순간, 사상은 멈추는 법이다. 수정되지 않은 이론은 교리가 되고, 교리는 현실을 설명하지 못해도 살아남는다.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은 그렇게 한국 좌파 경제담론 속에 고정된 좌표로 남는다.
박현채와 김대중은 갈라섰지만, 그 연결 고리는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다. 정치에서 멀어진 이론은 오히려 더 순수한 형태로 남았고, 비판받지 않는 이름이 되었다.
다음 글에서는 이 사상이 왜 21세기에도 반복되는지, 그리고 노무현 이후의 한국 정치에서 어떻게 다시 살아났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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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 출신 마르크스 경제학 교수 박현채 3-3
박현채(朴玄埰, 1934~1995)는 죽었다. 그런데 그의 말투는 남았다. “민족경제”, “종속”, “외자”, “재벌”, “착취” 같은 단어가 아니라, 그 단어들이 작동하는 방식은 남았다.
박현채의 개인사는 그 자체로 한국 현대사의 한 축이다. 전남 화순 출생, 광주서중 재학 중 빨치산 활동 참가, 1955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 진학, 1960년대 재야 경제학 활동, 1989년 조선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1995년 사망.
여기서 중요한 대목이 하나 더 있다. 1971년 『대중 경제론 백문백답』 집필을 주도했고, 그것이 김대중의 “대중 경제론”에 영향을 줬다는 기록이다. 말하자면 박현채의 언어는 일찌감치 “김대중의 경제 언어”로 번역돼 유통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늘 한국 사회에서 경제 논쟁을 들여다보면, 출처 표시는 사라져도 패턴은 남아 있다. 자유무역협정(FTA)이 나오면 반대부터 튀어나온다. 외국 자본이 들어오면 산업이 무너진다, 대기업만 살찌운다, 국부가 빠져나간다. 이런 말들은 시대의 산물이 아니라 오래된 도식이다. 항상 프레임이 먼저였고, 현실은 나중이었다.
대기업을 보는 시선도 비슷하다. 기업이 커질수록 “어떻게 저게 가능했나”가 아니라 “어떤 특혜가 있었나”부터 찾는다. 시장에서 이긴 결과를 성과로 인정하기보다, 도덕 재판으로 끌고 간다.
이 방식이 왜 오래 버티는지, 외환위기 국면이 교과서 같은 사례다. 1997년 12월 24일 원/달러 환율(매매기준율)이 1,965원까지 치솟았다. 1998년 상반기 실업률은 6.4%로 급등했다. 정부 문서에서도 1998년 성장률을 “마이너스 5.8%”로 적혀있고, 실업자 “170만 명”이 기록되어있다.
이 정도의 충격이면, 경제가 현실 앞에서 새로 짜여야 정상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똑같은 도식이 재가동됐다. 외부 탓, 구조 탓, 시장 탓, 대기업 탓이다. 누가 무엇을 잘못 설계했고, 어떤 제도가 어떤 비용을 만들었는지 따지는 일은 뒤로 밀린다.
김대중 정부 시기 재정 운용을 보면, 1998년 위기 대응 국면을 지나 2000년 전후에는 재정지출 증가율이 대략 5~7% 수준으로 낮아졌고, 2002년에는 관리대상수지가 흑자로 전환됐다. 이런 수치는 정권의 성향과 무관하게 정책이 실제로 어떤 선택을 했고 어떤 결과를 냈는지를 보여주는 자료다.
그런데 한국의 경제 논쟁은 대체로 이 순서를 따르지 않는다. 숫자가 나오기 전에 이미 평가가 끝난다. 의도가 선하면 실패도 용인되고, 결과가 불편하면 성과조차 경고로 처리된다. 정책은 계산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태도의 문제로 밀려난다.
FTA 논쟁도 똑같은 길이다. 한미 FTA는 2012년 3월 15일 발효됐다. 발효 전후로 누구는 “선진경제권 편입”을 말했고, 누구는 “국부 유출”을 말했다. 그런데 한국의 논쟁은 자주 ‘무슨 산업이 어떻게 바뀌었는가’보다 ‘누가 친미냐 반미냐’ 같은 정치 정체성 싸움으로 흐른다.
박현채식 도식이 정치적 편리함과 결합하는 지점이다. “하지 말자”는 말은 언제나 안전하다. 왜냐하면 설계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이 사고방식이 더 위험한 이유는, 이제 특정 진영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박현채를 읽지 않아도 대부분 박현채식 어법으로 말한다. 그것이 이 사회의 상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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