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1-15

松山 ·일제의 한글 말살은 없었다

Facebook


松山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로 전 이승만학당 이사를 지냈으며 현재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 고문,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으며 ‘후크고지의 영웅’을 공동 번역했다. 松山은 필명이다.

후크고지의 영웅들 6.25 참전 영국 노병들의 수기
케네스 켈드 저/정광제, 김용필 역 | 타임라인 | 2021년 0

 정광제 (松山)
1960년생. 이승만학당 이사 겸 한국근현대사연구회 고문. 학부와 대학원에서 영문학 철학 신학을 공부하였으며, 서강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2013년 시인 등단.




====

松山
 ·
《일제의 한글 말살은 없었다

ㆍ말살이라는 주장은 왜 성립하지 않는가
ㆍ‘말살’의 정의부터 성립하지 않는다
ㆍ문자 말살과 언어 정책을 구분하지 않은 오류
‘한글 말살’이라는 표현과 논의는 역사적 사실 검증의 영역을 벗어나 민족애를 바탕으로 한 분노의 표출에 불과하다. 그러나 역사 서술에서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은 분노가 아니라 정의다. 
특히 ‘말살’이라는 단어는 매우 무서운 용어다. 이 단어를 사용하려면, 그것이 가리키는 행위가 무엇인지부터 분명히 해야 한다. 문자 말살이 성립하려면 최소한 네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해당 문자의 전면적 사용 금지다.
둘째, 인쇄와 출판의 전면적 차단이다. 
셋째, 사적 사용에 대한 처벌이다. 
넷째, 문자 교육의 완전 금지다. 
이 네 가지가 동시에 작동해야 비로소 ‘말살’이라는 단어가 성립한다. 하나라도 빠지면 그것은 말살이 아니라 억압, 차별, 강압적 동화 등으로 기술해야 된다.
이 기준을 놓고 ‘한글 말살’이라는 통념을 대조하면, 가장 치명적인 오류는 문자와 언어를 구분하지 않는 습관이다. 한글은 문자 체계다. 조선어는 언어다. 문자는 표기 수단이고, 언어는 음성과 문법과 어휘의 생활 체계다. 둘은 결코 동일하지 않다. 
조선어의 공적 지위를 약화시키는 정책이 존재했다고 해서 한글이라는 문자가 곧바로 말살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한글 사용이 제한되는 사례가 있었다고 해서 조선어가 생활에서 즉시 제거되는 것도 아니다. 
이 구분을 무시하면, 역사 서술은 “조선어 교육 축소”에서 “한글 말살”로 비약한다. 비약 역시 역사왜곡이다.
교육 정책의 변화와 문자 자체의 존속을 혼동하는 오류도 여기서 발생한다. 일제의 교육 정책은 분명히 일본어를 ‘국어’로 설정하고, 조선어를 하위 언어로 밀어내는 방향으로 설계되었다. 이것은 사실이다.
조선교육령의 개정 과정에서 조선어 과목의 시수가 줄고, 선택과목화되며, 전시체제에 들어서면서 교육 과정에서 배제된 사례가 분명히 확인된다. 그러나 교육에서의 배제는 제도의 변화다. 그것이 곧바로 사회 전체에서 문자가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다. 
교육은 국가가 통제하기 쉬운 영역이지만, 문자 사용은 사회 전체의 거래 비용과 직결된다. 시장, 종교, 친족, 행정 보조 문서, 회계, 계약, 광고, 안내문, 개인 서신 같은 생활 영역에서 문자는 계속 필요해진다. 
이 영역까지 완전히 통제하지 못하면 문자 말살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데 일제는 그러했는가? 절대 아니다.
특히 문자 말살은 엄청난 행정 비용을 요구한다. 사적 영역까지 감시하려면 상시 단속 체계가 필요하고, 위반 시 처벌이 실제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1930년대~1940년대 조선 사회는 그런 감시 체계를 유지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 
당시 조선 사회는 문맹률이 높았고, 문자 사용이 사회 전반에 균질하게 확산된 상태도 아니었다. 문자가 생활 전반을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었기에, 역설적으로 문자 말살은 더욱 어려웠다. 
말살은 ‘이미 깊이 뿌리내린 문자 사회’를 대상으로 해야 효과가 난다. 조선 사회는 아직 그 단계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였다.
전시기 교육 정책을 근거로 ‘말살’을 주장하는 경우도 많다. 1938년 이후 전시 동원 체제 하에서 조선어 교육이 급격히 축소되고, 1943년 조선교육령 개정으로 중등교육 단계에서 조선어 과목이 사실상 배제되었다는 점은 확인된다. 
그러나 여기서도 논리의 비약이 발생한다. 교육 과정에서 배제되었다는 사실과 문자 자체가 사회에서 말살되었다는 주장은 전혀 다른 문장이다. 
말살이라면 교육 배제와 함께 출판 차단, 사적 사용 처벌, 생활 문서 통제가 동시에 작동해야 한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도 한글 텍스트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이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조선어학회의 조선어 사전 편찬이다. 조선어학회는 1940년 조선총독부로부터 『조선어대사전』 출판 허가를 받았다. 이 사실은 전시기에도 한글로 된 대사전 원고가 존재했고, 그것이 공식적인 출판 절차를 밟았다는 점을 보여준다. 문자 말살을 목표로 한 체제라면, 이런 절차 자체가 성립하기 어렵다.
통계 역시 이 점을 뒷받침한다. 1940년 말 기준 조선에서 일본어 보급률은 약 15% 수준에 머물렀다. 농촌 지역은 이보다 낮았다. 이는 공적 영역에서 일본어 사용을 강제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 전체가 단기간에 일본어로 전환되지 못했다는 뜻이다. 
언어 전환조차 이 정도의 속도라면, 문자 말살은 더욱 불가능에 가깝다. 문자는 언어보다 더 많은 물질적 기반을 필요로 한다. 교재, 인쇄, 종이, 서식, 간판, 장부가 함께 움직여야 한다. 이런 기반을 일제가 전면적으로 한글을 제거했다는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 하나 중요한 기준은 법령이다. 문자 말살이라면 반드시 “이 문자의 사용을 금지한다”는 명시적 법적 선언이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공개된 조선총독부 관보, 교육령, 학무국 훈령 어디에서도 한글 사용을 전면 금지하는 단일 법령은 확인되지 않는다. 
공적 영역에서 일본어를 표준으로 설정한 규정은 존재한다. 그러나 표준 설정과 전면 금지는 다르다.
신문과 출판을 둘러싼 통제 역시 같은 구조다. 병합기 초기 조선어 신문이 폐간된 시기가 있었고, 이후 제한적으로 허가되었다가 1940년 전후 다시 폐간된 흐름이 존재한다. 이는 분명히 언론 통제이자 표현의 자유 억압이다. 
그러나 언론 통제는 문자 말살과 동일하지 않다. 언론은 공적 여론의 형성 장치다. 언론을 때리는 것은 통치 전략이다. 문자 말살이라면 언론뿐 아니라 문자 생태계 전체를 끊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검열과 삭제, 허가와 폐간이 반복되었을 뿐, 문자 사용 자체가 사회에서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았다.
따라서  ‘한글 말살’이라는 표현은 개념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이는 억압이 없었다는 말이 아니다. 공적 영역에서 일본어가 강제되었고, 교육 제도를 통해 조선어가 체계적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이 모든 사실을 합쳐도, 문자 말살이 요구하는 네 가지 조건은 충족되지 않는다. 한일 병합기 일제에 의해 한글은 말살되지 않았다. 
※ 13원의 기적 "기프트 보내기"는 글쓰기에 큰 힘이 됩니다 ㅅㅗㅇ
==



==

==
《그러면 ‘한글 말살’이라는 말은 언제 왜 만들어졌는가》
ㆍ왜 이것은 민족주의 사학의 역사 왜곡인가?
“일제가 한글을 말살했다”는 말은 이제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상식처럼 쓰인다. 교과서, 다큐멘터리, 기념관 설명문, 심지어 정치 연설에서도 반복된다. 그러나 이 문장은 일제 시기에 만들어진 말이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일제가 사용한 정책 용어도 아니고, 당대 조선인이 일반적으로 사용한 표현도 아니었다. 이 표현은 해방 이후, 특히 1970~1980년대에 만들어지고 은연 중 세상에 굳어진 말이다.
먼저 일제 시기를 보자.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조선을 통치한 조선총독부의 공식 문서, 즉 관보, 조선교육령, 학무국 훈령, 내무국 지침 어디에도 ‘한글 말살’이라는 표현은 등장하지 않는다.
‘말살’은 병합기 행정 용어가 아니라 해방 후 만들어낸 인조어이기 때문이다. 일제가 실제로 사용한 구분은 일본어는 ‘국어’, 조선어는 ‘조선어’였다. 정책은 일본어를 공적 표준 언어로 만들고, 조선어의 지위를 낮추는 것이었다.
이는 강압적 일국화 정책이었지만, 문자 자체를 조선 사회에서 제거하겠다는 선언과는 다르다.
교육 정책을 보자. 1911년 제1차 조선교육령 이후 조선어는 학교 교육에 포함되어 있었고, 1922년 제2차 조선교육령에서도 조선어 과목은 유지되었다. 변화가 급격해진 것은 전시 체제에 들어선 이후다.
1938년 제3차 조선교육령을 거치며 조선어 과목의 비중은 크게 축소되었고, 1943년 제4차 조선교육령에서는 중등교육 단계에서 조선어 교과가 사실상 배제되었다.
이 시기 조선총독은 미나미 지로(재임 1936~1942)였다. 전쟁 수행을 위해 조선을 전면 동원하는 과정에서 교육의 일본어화가 강하게 추진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흔히 발생하는 오류가 있다. 학교에서 조선어 교육이 줄었다는 사실을 곧바로 한글이 사회에서 말살되었다는 주장으로 바꾸는 것이다.
교육 제도는 공적 영역이다. 문자 말살이라면 교육 배제와 함께 출판, 인쇄의 구조적 차단, 사적 사용에 대한 처벌, 생활 문서의 전면 통제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이런 조건이 충족되었는지 확인하지 않은 채 ‘말살’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은 개념의 지나친 비약이다.
이 지점에서 자주 언급되는 사건이 조선어학회 사건이다. 사실관계는 다음과 같다. 조선어학회는 한글 맞춤법 정리와 함께 『조선어대사전』 편찬을 진행했고, 1940년 3월 조선총독부로부터 출판 허가를 받았다.
이것은 전시기에도 한글 사전 원고가 존재했고, 출판 행정 절차가 작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문자 말살이 목표였다면, 사전 편찬 자체가 허용될 수 없다. 탄압과 말살은 구분되어야 한다.
통계를 보자. 일본어 보급률은 정책의 실효를 가늠하는 중요한 지표다. 1940년 전후 조선 사회에서 일본어를 일상적으로 구사할 수 있었던 인구 비율은 약 15% 내외로 추정된다. 농촌 지역은 이보다 더 낮았다.
이는 일본어 사용을 강제했음에도 사회 전체의 언어 전환은 느리고 제한적이었음을 뜻한다. 언어 전환조차 이 정도였다면, 문자 말살 즉, 사적 문서와 생활 기록까지 끊어내는 정책은 현실적으로 성립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한글 말살’이라는 말은 언제 등장했는가? 답은 해방 이후, 특히 1970~1980년대다.
해방 직후인 1945~1950년대 담론을 보면 주로 사용된 표현은 “일본어 강제”, “조선어 억압”, “민족 문화 탄압”이었다. 이 시기에는 식민지 경험을 직접 겪은 세대가 생존해 있었고, 한글 신문과 책, 편지를 기억했다. “힘들었지만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다”는 인식이 일반적이었다.
표현이 바뀐 것은 기억의 시대가 끝나고, 교육의 시대가 시작되면서다. 1970~80년대, 식민지 경험은 개인의 기억이 아니라 교과서 서술로 스며들었다.
이 과정에서 정책의 단계와 영역, 강도의 차이는 설명하기 어려운 요소가 되었다. 대신 짧고 강렬한 문장이 필요해졌다. 그 결과물이 “한글 말살 정책”이라는 표현이다. 언어 억압이라는 복잡한 현실은 문자 말살이라는 단일 이미지로 표현되었다.
이것이 바로 민족사학적 왜곡의 전형이다. 민족사학은 식민지 지배를 설명할 때 흑백 구도를 선호한다. 강압, 차별, 검열, 동화라는 서로 다른 정책을 하나의 절대악으로 묶는다.
그 과정에서 개념의 정확성은 무시된다. ‘말살’이라는 단어는 이해를 쉽게 만들지만, 사실을 가린다. 어떤 제도가 언제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보이지 않게 만든다.
정확히 말해야 한다.
정확히 말해야 한다. 일본어 강제는 있었다. 조선어 교육은 축소되었다. 전시기에는 강압이 강화되었다. 출판과 언론은 통제되었다. 그러나 한글이라는 문자가 사회에서 제거되지는 않았다. 이것은 미화가 아니다. 사실의 범위를 바로잡는 일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한글 말살”이라는 표현은 역사를 설명하는 문장이라기보다, 해방 이후 만들어진 정치적, 교육적 구호였음이 드러난다.
역사는 강한 말로 쓰는 것이 아니다. 정확한 말로 쓴다.
이것이 역사 왜곡을 바로잡는 첫걸음이다.

===
※ 13원의 기적 기프트 보내기는 글쓰기에 큰 힘이 됩니다 ㅅㅗㅇ
김경진
만 35년 일본은 식민지화에 불충분 해서 한글이 살아 남았지요. 더 이상 연장 됬으면 말살단계에 도달 했겠지요.

==
ㅔ미나이
==

요약: <한글 말살>이라는 통념에 대한 반박

이 글은 일제 강점기 말기의 언어 정책을 <한글 말살>이라고 규정하는 역사적 통념이 논리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말살>이라는 단어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해당 문자의 전면적 사용 금지, 인쇄와 출판의 차단, 사적 사용에 대한 처벌, 문자 교육의 완전 금지라는 네 가지 조건이 동시에 충족되어야 한다고 전제한다.

그러나 당시 상황은 조선어 교육이 축소되기는 했으나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었고, 시장이나 종교 등 사적 영역에서는 여전히 한글이 사용되었으며, 1940년 조선총독부가 조선어학회의 <조선어대사전> 출판을 허가했다는 점 등을 반증으로 든다. 또한 당시 일본어 보급률이 15% 수준에 불과했다는 점을 들어, 일제의 정책은 일본어라는 <국어 상용>을 강제하고 조선어의 공적 지위를 약화시킨 것이지, 조선어 자체를 사회에서 완전히 제거하려는 <말살> 단계는 아니었다고 결론 짓는다.

평론: 개념의 엄밀성을 가장한 본질 흐리기

이 텍스트는 <말살>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물리적 완결성에 과도하게 집착하여, 당시 식민 정책이 지향했던 <방향성>과 <의도>를 간과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첫째, 정책의 <결과>와 <의도>를 혼동하고 있다. 저자는 일제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해 사적 영역에서 한글이 쓰였던 현실(결과)을 들어, 일제에게 말살 의도가 없었다는 근거로 삼는다. 그러나 1938년 제3차 조선교육령에서 조선어를 <수의 과목(선택 과목)>으로 격하시키고, 1941년 국민학교령을 통해 사실상 교과 과정에서 배제해 나간 흐름은 명백히 다음 세대의 모국어 사용을 차단하려는 <언어적 인종 청소>의 단계적 과정이었다. 행정 비용 문제로 사적 대화까지 즉시 금지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이 <용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둘째, 결정적인 역사적 반증을 누락하고 있다. 저자는 1940년 사전 편찬 허가를 강조하며 일제의 유연성을 주장하지만, 불과 2년 뒤인 1942년 일어난 <조선어학회 사건>은 언급하지 않는다. 일제는 결국 사전 편찬을 준비하던 학자들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하고 투옥했으며, 이 과정에서 이윤재, 한징 등이 옥사했다. 이는 일제의 정책이 결국 조선어의 학문적, 조직적 보존을 파괴하는 <말살>로 귀결되었음을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다. 1940년의 허가는 일시적이거나 기만적인 조치였을 뿐, 일제의 최종 목적이 아니었다.

셋째, <공적 영역의 일본어 상용>과 <한글 말살>을 분리하려는 시도는 궤변에 가깝다.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 도구가 아니라 민족 정체성의 핵심이다. 공적 영역에서의 언어 박탈과 교육 배제는 곧 그 언어를 <박제된 사투리>로 전락시켜 서서히 사회적 생명을 끊는, 가장 고도화된 형태의 말살 정책이다. 이를 두고 <억압은 있었으나 말살은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식민 지배의 폭력성을 단어의 정의 논쟁으로 축소하려는 수정주의적 역사관의 전형이다.

결론적으로 이 글은 부분적인 사실(1940년의 상황, 낮은 일본어 보급률)을 들어 전체적인 맥락(민족 말살 통치기의 지향점)을 부정하는, 전형적인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논리를 취하고 있다.

==

==

이 글의 핵심은 “일제가 <한글/조선어>를 ‘말살’했다”는 통념을, <말살>이라는 단어를 아주 강한 ‘완전 제거’로 정의해 놓고(공적 사용 전면 금지·출판 차단·사적 사용 처벌·교육 완전 금지) “그 4가지가 동시에 성립하지 않았으니 말살은 아니다”라고 결론내리는 방식입니다.

코멘트를 단도직입으로 하면,

  1. <정의(定義)를 너무 빡빡하게 잡아 결론을 고정하는 방식>
    역사학에서 “말살/소멸”은 “완전 성공”을 전제하지 않습니다. 목표가 ‘없애기’였고, 제도와 권력으로 ‘없어지게 만들려는 방향’이 지속적으로 작동했다면, 결과가 100% 완성되지 않았어도 “말살(을 지향한) 정책”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이 글은 “완전 금지·완전 처벌·완전 차단”만 말살로 인정하니, 현실 세계의 대부분 동화·억압 정책이 정의상 말살이 될 수 없게 됩니다. 말하자면 <정의로 논쟁을 끝내는> 구조예요.

  2. <‘한글’과 ‘조선어’의 혼용을 지적한 대목은 타당하지만, 글 전체가 그 혼용을 역이용하기도 함>
    대중 담론의 “한글 말살”은 엄밀히는 “조선어(한국어) 억압/동화”를 뭉뚱그린 표현인 경우가 많습니다. 글쓴이가 “문자와 언어를 구분해야 한다”는 지적을 한 건 맞습니다. 다만 그렇게 구분해 놓고는, 이후에는 “문자 체계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으니(혹은 교재 흔적이 있으니) 말살 아님”으로 점프하는데, 실제 쟁점은 대개 <언어 사용의 위계화, 교육·공적 영역에서의 축소, 일본어 상용의 강제, 출판·언론의 통제> 쪽입니다. 즉, ‘문자’만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언어 억압이 약했다’는 결론으로 곧장 이어지진 않습니다.

  3. <“행정비용상 불가능” 논증은 일부는 맞고 일부는 위험>
    전면 감시·전면 처벌은 비용이 커서 현실적으로 불완전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비용이 크다는 건 “강제가 없었다”가 아니라 “강제는 선택적으로, 본보기식으로, 제도(학교·관공서·언론·직장)를 통해” 작동했을 수 있다는 쪽과도 잘 맞습니다. 언어 정책은 ‘길거리 단속’만이 아니라, <학교에서의 교육 시간 축소/배제, 시험·취업·승진에서의 언어 요건, 공문서/의례/공간의 언어 규칙> 같은 구조로도 강력하게 작동합니다.

  4. <빠진 것: ‘강도’의 문제>
    이 글은 “조선어 교과 시수 감소, 선택화, 전시 체제 강화” 같은 변화는 인정하면서도, 그 변화를 ‘말살’ 범주에서 빼버립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에게 핵심은 바로 그 지점입니다.

  • 교육에서 조선어의 지위를 낮추고 일본어를 ‘정상 언어’로 만들기

  • 언론·출판을 통제하고 공적 공간에서 조선어를 밀어내기

  • 불이익과 낙인을 통해 자발적 전환을 유도하기
    이런 것들이 누적되면, “완전 금지”가 아니어도 사회적으로는 ‘사라지도록’ 압박하는 효과가 큽니다.

  1. <그래도 이 글이 던지는 유익한 질문>

  • 우리가 말하는 “말살”이 <정책 목표>인지, <실제 결과>인지

  • “한글(문자)”과 “조선어(언어)”를 구분해 말할 필요

  • 시기별(1910s/1920s/1930s/1940s)로 강도가 달라졌다는 점
    이 질문들은 생산적입니다. 다만 그 질문을 “그래서 말살은 없었다”로 닫아버리면, 식민지 권력관계 속에서의 언어 위계·동화 압력을 제대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제가 권하는 더 정확한 표현>
논쟁을 줄이려면, “한글 말살” 대신 아래처럼 말하는 게 더 정확합니다.

  • <조선어 교육의 축소·배제와 일본어 상용의 제도화>

  • <조선어 언론·출판에 대한 통제 강화>

  • <언어 동화(동질화) 정책의 강화, 특히 1930~40년대 전시체제 하에서의 급격한 강화>

요약하면: 이 글은 “완전 제거만 말살”이라는 기준으로 상대를 재단해 이기는 글에 가깝고, 현실의 언어 억압이 작동하는 방식(부분적·구조적·제도적 강제)을 과소평가합니다. 다만 “문자/언어 구분, 정책 목표/결과 구분”을 요구한 문제제기는 살릴 가치가 있습니다.

==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