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민주주의의 휴브리스 9: 관헝(关恒/關恒) 사건과 K-심퍼씨
한국의 진보언론이 중국의 인권 문제를 다루는 방식을 보고 있으면, 종종 묘한 감정이 든다. 분노는 충분한데, 방향이 늘 익숙하다. 정의는 선명한데, 세계는 그보다 훨씬 복잡하다. 그래서 아이러니와 패러독스가 남고, 읽고 나면 허전함이 사라지지 않는다.
[경향신문]이 보도한 ‘허난성 출신’ 관헝(Guan Heng) 기사는 그런 감정을 다시 한 번 자극했다. 신장 수용소를 촬영한 영상을 들고 미국으로 건너간 중국인 활동가, 그리고 그를 기다리는 구금과 추방의 위기. 국내 언론이 중국 인권 문제를 이 정도의 밀도로 다룬 것만 해도 반갑다. 이건 칭찬받아야 한다. 정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늘 그 다음이다. 강타자에게 홈런을 바랬는데 헛스윙이 나온다.
기사는 관헝이 제3국, 그것도 우간다로 추방될 수 있다는 외신을 전하며 강한 정념을 실었다. 독자는 자연스럽게 분노한다. 하지만 그 이후의 전개, 즉, 그 추방 계획이 왜, 어떻게 무산되었는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정념은 충분했고 동정을 자극하지만, 분석과 해설은 없었다.
내가 팔로우업한 바로는 이 추방 시나리오는 실제로 접혔다. 이유는 간단하다. 미국 민주당의 한 하원의원이 꽤 집요하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이름은 라자 크리슈나무르티(Raja Krishnamoorthi). 미·중 전략경쟁 특별위원회의 민주당 간사다. 틱톡 금지, 홍콩 인권, 대중국 기술 통제. 이 사람의 포트폴리오는 인권 감수성이라기보다는 ‘대중국 강경 노선’이다.
이 대목이 흥미롭다. 관헝은 인권 피해자이지만, 동시에 미·중 전략경쟁이라는 거대한 장기판 위의 말이기도 하다. 한국식 진보의 언어로 보면 그는 보호의 대상이다. 그러나 미국 정치의 언어로 보면, 그는 ‘진보 매파(progressive hawk)’가 활용할 수 있는 자산이 된다. 이건 관헝 개인의 선택이나 도덕성에 대한 평가가 아니다. 그가 놓인 자리의 이야기다. 전반적 배치의 문제다.
라자 의원 측은 관헝의 보석을 신청하고 즉각 석방을 요구했다. 논리는 '미국은 이민자에 관대한 나라고 우수한 인재를 유지해서 부강해진다'는 논리다. 누구는 감동하겠지만 누구는 '우수한 인재를 저임금에 부려먹겠다는 이야기'라고 반발할 수도 있다. 후자의 논리는 '한국에서 대학 졸업한 사람이 구멍가게, 세탁소, 식당 하는 데가 미국'이라는 경험담으로 뒷받침되기도 한다.
그런데 알다시피 트럼프의 미국은 이민에 대해 강경하고 행정력이 작동한다. 국토안보부와 ICE는 한국에서 '나 미국 다녀올게'라고 출장 갔던 대기업 직원들을 굴비 엮듯 구금시설에 가둬 버렸다. '관헝의 체류를 허락하면 신장 가서 비디오 찍었다고 거짓말 하면서 밀입국하는 중국인들이 우루루 들어올 거야'라고 판단한 법원의 판사 나으리들은 1월 12일 보석 신청을 일단 기각했다는 뉴스가 있는데 재심리가 열릴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아무튼 국토안보부가 손을 든 것 같지는 않다.
따라서 관헝 사건은 단순한 ‘인권 대 탄압’ 구도가 아니다. 국제정치의 국익, 국내정치의 당략, 사법부의 절차가 엉켜 있는 연립방정식이다. 그런데 기사는 이를 한국 민주화 경험에서 길든 한 문장으로 환원해 버린다. “인권은 절대적으로 보호되어야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이 문장 하나로는, 미국이 왜 망설이고, 왜 갈팡질팡하며, 왜 관헝을 쉽게 풀어주지 않는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이 글은 특정 기자를 겨냥한 훈계가 아니다. 오히려 기자가 이런 주제를 취재하고 지면에 올렸다는 사실 자체는 존중받아야 한다. 문제는 개인의 역량이 아니라, 진보언론이 너무 오래 써온 프레임이다. 이미 준비된 도덕적 결론에 사건을 끼워 맞추는 방식 말이다.
한국의 진보와 미국의 진보는 같은 단어를 쓰지만, 전혀 다른 게임을 하고 있다. 미국의 진보는 대중국 강경 노선의 최전선에 서 있고, 한국의 진보는 여전히 ‘민주주의’의 기억 속에 머물러 있다. 관헝은 그 간극 한가운데에 서 있다. 그런데 기사는 그 간극을 설명하지 않고, 독자에게 분노를 전달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누구에 대한 분노일까?
분노는 쉽다. 이해는 어렵다. 정론지가 해야 할 일은 전자가 아니라 후자다. 중국 인권을 보도하는 용기만큼, 그 인권이 어떤 정치적 장치 속에서 소비되고 있는지까지 보여줄 때, 비로소 이 문제는 ‘우리 편의 도덕’이 아니라 ‘세계의 현실’로 다가올 것이다.
'한국 언론이 찌라시'라는 내 최근 표현은 지나친 것이었고(지나쳤길 바란다~) 각종 제약에서 분투하는 기자들의 노력을 무시하고 폄하하는 것이라서 마음 깊이 사과한다.
단, 1980-90년대에 정점을 이루고 그 뒤로도 장기지속되는 심판의 언어는 조중동이나 한경오나 마찬가지고, 보수나 진보나 마찬가지고, 진보 내에서는 마르크스주의나 페미니즘이나 마찬가지고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라는 인상 때문에 이드(id)가 작동해서 실언이 나왔다. 이걸 내가 속한 세대의 문제로 환원시키기에는 유효기간이 다 지났다.
더 나빠진 것은 어떤 사안에 반짝 관심을 가지고 얼마 지나면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이건 나도 마찬가지인데 '외신'과 외국인 중심의 톡방을 따라다니는 건 똑같다. 그렇지만 러시아인 톡방도 들어가 보고, 중국인 톡방도 들어가 보자. 이런 저런 의견 들어 보고 나의 기존 생각은 줄이고 '있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 하자. 다 같이 반성하자.
내가 오해와 조롱을 감수하면서 K-민주주의, K-마르크스주의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이유다. 투쟁이란 기각하고 거부하는 것, '자유주의'로 투항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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