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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한국에 헌신한 美 선교사 부인, 남로당 학생들 총탄에…
전봉관 KAIST 디지털인문사회과학부 교수2026. 1. 24.
[전봉관의 해방 거리를 걷다]
1949년 조선민주학생연맹
언더우드 부인 암살 사건
1949년 3월 17일 오후 2시, 언더우드 2세(원한경) 명예총장 부인을 비롯한 연희대학 교수 부인 20여 명은 언더우드 사택(현 언더우드가 기념관)에서 제3회 유엔총회에 한국 대표단 일원으로 참가해 ‘대한민국 정부 승인’이라는 대업을 완수하고 돌아온 모윤숙을 초청해 강연을 들었다. 한참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복면을 쓴 괴한 2명이 정문과 뒷문으로 들이닥쳐 권총으로 언더우드 부인을 저격하고 도주했다. 오른쪽 가슴에 총상을 입은 언더우드 부인은 백낙준 총장 부인의 차로 세브란스병원으로 후송되던 도중 사망했다.
정치적 목적에서 한국인이 미국인을 살해한 사건은 1908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장인환·전명운 의사가 ‘친일 외교관’ 스티븐스를 처단한 지 41년 만에 처음이었다. 그러나 스티븐스는 일본이 한국을 병탄하는 데 앞장섰던 죄과가 있었던 반면, 언더우드 부인은 일생을 한국과 한국 청년을 위해 헌신했을 뿐 그 누구에게도 원한을 살 만한 일을 하지 않았다는 차이가 있었다.
1890년 서울 정동에서 태어난 원한경은 경신학교와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한 ‘신촌 원씨’ 시조 언더우드 1세(원두우)의 외아들이었다. 1906년 한국을 떠나 뉴욕대학에서 공부했고, 1912년 북장로회 선교사로 고향인 한국으로 돌아왔다. 부친이 설립한 경신학교 교사,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봉직했고, 1934년 연희전문학교 제3대 교장에 취임했다. 1919년 3·1운동 당시 수원 제암리에서 벌어진 기독교인 학살 사건을 세계에 알렸다. 1941년 12월 진주만 공습 직후 외국인 수용소에 수감됐다가 이듬해 5월 미국으로 추방됐다. 해방 이후 미군정청 고문 자격으로 고향인 한국으로 돌아왔고, 1947년 명예총장으로 연희대학에 복귀했다.
원한경의 부인 에델 반 와그너 언더우드는 1888년 미국 미시간주에서 태어났다. 불우한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가사 도우미로 일하면서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졸업했다. 1912년 서울외국인학교 단 한 명뿐인 교사로 초빙됐고, 한국 교회에서 만난 원한경과 결혼해 슬하에 4남 1녀를 뒀다. 연희전문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고, ‘절제 소녀관’을 설립해 불우한 소녀들에게 보금자리를 제공했다.
범인은 남로당 학생 조직인 조선민주학생연맹(민주학련) 위원장 김석준을 비롯한 연희대 학생 9명이었다. 연희대 학생들이 한때 연희대 영어 강사로 봉직했고, 설립자의 며느리이자 명예총장의 부인인 ‘미국인 스승’을 백주에 사택까지 찾아가 살해한 패륜을 저지른 것이었다.
민주학련은 겉으로는 ‘민주 학원 건설’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남로당의 지령에 따라 파업 동조, 동맹 휴업, 테러, 삐라 살포 등 학업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정치 투쟁에만 열을 올린 조직이었다. 민주학련 소속 학생들은 언더우드 부인이 살해된 1949년 3월에만 한양공대에 사제 수류탄을 투척했고, 서울대 사범대학 손진태 학장을 자택에서 권총으로 살해하려다 실패했다.
부인의 사망 소식을 접한 원한경은 미국에서 반한 감정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아내를 살해한 것은 공산당이지, 한국인이 아니다”라고 한국인을 변호했다. 이승만 대통령과 이범석 국무총리가 조의를 표하며 ‘교육장(敎育葬)’으로 장례를 치를 것을 제안했지만, 원한경이 고사해 장례는 연희대학 ‘학교장(學校葬)’으로 치러졌다. 언더우드 부인의 시신은 양화진 외국인 묘원 시어머니 묘소 옆에 안장됐다.
경찰은 “범인들이 모윤숙을 살해하려 했지만 총탄이 빗나가는 바람에 언더우드 부인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원한경은 경찰이 한미 관계가 악화되는 것을 우려해 그렇게 발표했을 뿐, 범인들이 처음부터 언더우드 부인을 노렸을 것이라 확신했다. 미군 철수를 석 달 앞두고, 한국에 대한 미국인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남로당이 의도적으로 미국인 선교사 부인을 살해했을 것이라는 합리적 의심이었다. 남로당이 민간인 모윤숙을 표적으로 삼았다면, 굳이 언더우드 사택까지 찾아가 범행을 저지를 이유가 없었다.
범인들은 수사를 받으면서도 잘못을 뉘우치거나 사죄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담당 검사에게 “당신을 우리 손으로 죽이겠소”, “당신 집 주소가 어디요?”라고 협박했다. “어떤 판결을 받을 것으로 예상하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사형이겠죠”라고 빈정거리고는 “그러나 3심까지 끝나려면 3년 6개월 정도 걸릴 것이고, 그때까지는 틀림없이 인민공화국이 수립될 것이니, 결국 죽는 것은 검사 당신이지 우리가 아닐 것이다”라고 호기를 부렸다.
재판 결과 김석준·배경환 등 주범 4명은 사형, 한병희 등 종범 3명은 무기징역, 나머지 2명은 각각 징역 5년과 2년을 선고받았다. 원한경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고인은 한평생 한국 젊은이들을 사랑했으므로 아무리 살인자라고 하더라도 처벌은 하되 사형에 처하는 것은 원치 않는다”고 유족을 대표해 진정서를 보냈다. 이 대통령은 예수의 사랑을 실천한 유족의 고귀한 뜻을 헤아려 형이 확정되면 법과 절차에 따라 감형을 검토해 보겠다고 회답했다.
“형이 확정되기 전 인민공화국이 수립될 것”이라는 살해범들의 확신처럼 2심이 진행되는 동안 6·25전쟁이 발발했고,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6월 28일 이후 살해범 9명은 모두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났다. 서울 수복 이후 명륜동에서 체포된 무기수 한병희를 제외한 8명은 모두 월북했다. 사형수 배경환은 6·25전쟁 휴전 이후 간첩으로 남파됐다가 군경에 체포돼 1963년 14년 만에 사형이 집행됐다.
원한경은 “대학 졸업식에 엄마와 함께 참석하겠다”는 고명딸 그레이스(원은혜)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1950년 1월 미국으로 일시 귀국했다. 한국을 떠나며 기자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이곳 한국에서 태어났고, 나의 어머니와 아내는 이 땅에 묻혔다. 두 아들이 현재 이곳에서 일하고 있다. 연희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간 아들 같은 청년 2000여 명, 그리고 수많은 친구들이 있는 이곳 한국으로 나는 곧 돌아올 것이다.”
6·25전쟁이 발발했음에도 원한경은 약속대로 1950년 10월 ‘미군 정보부대(G-2)’ 민간인 고문 자격으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큰아들 원일한과 막내아들 원득한도 미군 장교로 참전했다. 이듬해 2월, 원한경은 부산에서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전시(戰時)였지만 장례는 사회장으로 엄수됐고, 서울 수복 이후 그의 시신은 양화진에 있는 아내와 어머니 묘소 곁에 안치됐다.
<참고 문헌>
서정민, 언더우드家 이야기, 살림, 2005
오제도, ‘원 박사 부인의 죽음’, 추적자의 증언, 한국안보교육협회, 1981
이병도 외, ‘원 부인 피살 사건’, 해방20년사, 희망출판사, 1965
한지은, ‘언더우드 家의 여성 선교사들’, 한국학논집, 제60집, 2015
홍이표, ‘언더우드 부인 저격사건의 진상과 의미’,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35호,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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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로당원 구속 막은 판검사… 그들이 남로당 세포였다
전봉관 KAIST 디지털인문사회과학부 교수2026. 1. 10.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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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전봉관의 해방 거리를 걷다]
법조계 남로당 세포 축출한
1949년 법조 프락치 사건
1948년 10월, 여순 사건 이후 국군에 침투한 남로당 세포를 축출하는 ‘숙군(肅軍)’이 시작됐다. 이듬해 5월, 국회에 침투한 남로당 세포를 검거하는 ‘국회 프락치 사건’이 일어났다. 같은 해 7월, 국회 프락치 사건 수사 과정에서 서울지방검찰청 차장검사 김영재가 남로당에 가입하고 주요 수사 정보를 남로당에 전달한 혐의로 구속됐다. 김영재는 경성제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고등시험 사법과에 합격해 일제강점기 때부터 검사 생활을 이어갔던 ‘엘리트 검사’였고, 구속 당시 ‘서울지검 이인자’였다.
수사를 주도한 ‘사상 검사’ 오제도와 선우종원에게 김영재는 “선배 검사로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동료 법조인의 권유로 ‘정부 수립 전’인 1946년 2월 남로당에 입당해 세포 회합에 5~6차례 참석했을 뿐이라고 변명했다. 1949년 8월, 김영재 차장검사는 ‘적색 변호사’ 6명과 함께 기소됐다. ‘제1차 법조 프락치 사건’이라 불린 이 사건은 이후 4명의 ‘적색 변호사’가 추가로 기소돼, 피고인이 검사 1명, 변호사 10명으로 늘어났다. 피고인들은 모두 좌익 법조인 단체 ‘조선법학자동맹(법맹)’의 핵심 인물이었다.
‘제1차 법조 프락치 사건’ 공판(재판장 이봉규, 담당검사 선우종원)이 진행 중이던 1949년 12월, 서울지검은 김진홍·김두식 등 현직 판사 4명과 이정남·이사묵 등 현직 검사 2명을 국가보안법(국보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이들 판검사 6명은 좌익 사건 피고인들의 공판 동향을 남로당에 보고하고, 동료 판검사에게 남로당 가입과 활동을 권유했다는 혐의로 기소됐다. 송문현 재판장에게 배당된 이 사건은 ‘제2차 법조 프락치 사건’으로 불렸다.
1949년 11월 24일 시작된 공판에서 피고인들은 모두 남로당 입당과 법맹 가입 사실을 시인했다. 또한 200여 명 법맹 회원이 매주 야회(夜會)를 열었으며, 남로당과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조직원들이 체포·구속됐을 때는 변호사로서 적극적으로 변론했다고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가입했을 당시 남로당은 합법 정당이었고, 정부 수립 이후에도 남로당 전체가 체제 전복 세력이 아니라 일부 과격분자가 폭력을 썼을 뿐이었다고 혐의 사실을 부인했다.
김영재는 남로당과 법맹 가입을 인정했음은 물론 “북로당 가입 권고를 받아 가입 원서를 쓴 사실은 있지만, 입당되었는지는 모른다”고 진술했다. 또한, “적극적으로 좌익 활동을 한 사실은 전혀 없다. 다만, 남로당원의 구속을 인정상 돌봐준 적은 있다” “정부 수립 이후 남로당에 탈당계를 제출하고, 조직책인 변호사에게 탈당 의사를 전달했다” “법맹을 탈퇴하지는 않았으나 야회에 출석하지 않으면 저절로 탈퇴되는 것으로 알았다” 등 궤변을 늘어놓다가 “지금은 잘못을 깊이 깨닫고 있다”고 눈물을 흘렸다.
‘제1차 법조 프락치 사건’ 재판부가 결심(結審) 이후 선고 기일 연기를 거듭하던 사이 ‘제2차 법조 프락치 사건’ 선고가 먼저 나왔다. 1950년 3월 21일 송문현 재판장은 국보법 시행 이후까지 남로당 활동이 입증된 서울지법 김진홍 판사에게만 징역 5년을 선고하고, 나머지 판검사 피고인 5명에게는 무죄를 선고했다.
“피고인들이 남로당에 가입한 부분은 국보법 제정 이전의 행위이기 때문에 죄형법정주의에 의거 국보법을 적용할 수 없다. 군정청 포고령 제2호 위반죄는 정부 수립 이후 일반사면령으로 사면됐기 때문에 역시 적용할 수 없다. 남로당으로부터 금품을 수수한 행위는 피고인들의 주장처럼 변호사 수임료로 받았다고 볼 여지도 있다.”
나흘 후인 25일 이봉규 재판장도 ‘제1차 법조 프락치 사건’ 판결을 내렸다. 법맹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 변호사 4명에게 구형인 징역 8~12년에 훨씬 못 미치는 징역 2~4년이 선고됐고, 3~8년이 구형됐던 변호사 5명에게는 집행유예, 1명에게는 무죄가 선고됐다. 수사 검사에게 ‘검사 프락치’ 명단을 넘겨 수사에 적극 협조한 김영재는 함께 구속된 변호사보다 죄질이 나빴음에도 정상 참작으로 2년 구형을 받았고 징역 2년에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비슷한 혐의로 기소된 군인·국회의원에 비해 터무니없이 가벼운 형량이었다.
수사를 주도한 오제도 검사는 “지식층인 판검사·변호사에게 일반인보다 가벼운 형량을 선고한 것은 언어도단이다. 돈 있고, 백 있는 자에 대해서 양형을 가볍게 한 것”이라며 반발했다. 선우종원 검사는 “피고인들은 국보법 시행 이후에도 남로당이 반국가 단체임을 알면서도 탈당한 사실이 없으며, 검거되기 전 과거 입당한 사실을 고백하고 전향한 사실이 없다”는 이유로 항소했다.
형사소송법 제정(1954) 이전이었던 그 시대에는 일본 형사소송법을 의용(依用)해 1심에서 무죄,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피고인이라도 검사가 항소하면 구속된 채 2심 재판을 받아야 했다. 그 때문에 보석 허가를 받은 판사 1명을 제외한 나머지 피고인들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채 6·25전쟁을 맞았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이후인 6월 29일 형무소에서 풀려난 김영재는 인민군 치하에서 ‘검찰 자치위원회 위원장’으로 활약하다가 국군의 서울 수복 이후 인민군을 따라 월북했다. 나머지 피고인들도 대부분 납북되거나 월북했다.
역사책에서도 잘 거론되지 않는 ‘법조 프락치 사건’은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 ‘후보 검증’ 과정에서 뜬금없이 쟁점으로 떠올랐다. 이회창 후보의 부친 이홍규 검사는 1950년 3월 ‘법조 프락치’로 몰려 구속됐지만 가혹한 고문에도 무죄 주장을 굽히지 않아 결국 별건인 수사 중 피의자를 구타했다는 ‘독직 상해 혐의’로 기소됐다. 보석으로 풀려나 1심 공판이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6·25전쟁이 발발했고, 1·4 후퇴 이후 부산에서 공소 취소 처분을 받고 검사로 복귀해 1965년까지 검사로 봉직했다.
서울대 총장과 국무총리를 지낸 이수성 후보는 6·25전쟁 때 납북된 부친 이충영 변호사가 월북한 것이 아니냐는 경쟁 후보 캠프의 공격을 받았다. 법맹 초대 회장을 역임했지만, 일찌감치 전향한 덕분에 ‘제1차 법조 프락치 사건’ 때 구속됐으나 기소되지 않고 석방된 조평재 변호사의 조카가 서울시장직을 사퇴하고 대선전에 뛰어든 조순 후보였다. 보수 후보들 사이에서 벌어진 검증 공방은 그때까지 생존해 있던 ‘사상 검사’ 선우종원이 “그들 모두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고 보증함으로써 종식됐다.
<참고 문헌>
김두식, 법률가들, 창비, 2018
선우종원, 사상검사, 계명사, 1992
오제도, 추적자의 증언, 희망출판사,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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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부의 농지개혁, 대한민국을 지켜내다
전봉관 KAIST 디지털인문사회과학부 교수2025. 12. 27.
[아무튼, 주말]
[전봉관의 해방 거리를 걷다]
뒤바뀐 성패로 호도된
남북 토지(농지)개혁의 진실
“‘무상몰수·무상분배’ 북한의 토지개혁은 성공했고, ‘유상매수·유상분배’ 남한의 농지개혁은 실패했다.”
1980~1990년대 대학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한 운동권 선배들의 소위 ‘의식화 교육’에서 ‘북한 체제의 우월성’을 설명할 때 빠지지 않았던 논거였다. 실상 ‘역사적 사실’은 이와는 정반대였다. 집단농장에 예속된 북한 농민들은 단 한 평의 농지도 소유하지 못했고, 남한 농민들은 헌법·법률을 위반한 불법 임대차나 직접 농사가 어려운 고령 지주의 농지 등 지극히 제한적인 예외를 제외하면, 모두 자기 땅에서 농사를 짓는 자작농이었다. 그럼에도 운동권 선배들의 강압적인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12년 주입식 교육의 폐해’ 때문이었는지, 이에 대해 신입생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왜 북한은 혁명적 농지개혁에 성공했는데 남한은 동일한 여러 조건을 갖추었으면서도 북한과 같은 농지개혁에 실패했나?”(강정구, ‘남북한 농지개혁 비교연구’, 1990)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논문이 학술지에 실린 것을 보면, 이는 일부 운동권만의 ‘망상’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남북한 토지(농지)개혁의 성패는 적어도 1980~1990년대 남한 지식인들의 뇌리에는 사실과는 정반대로 ‘주입’되었고, 그들 중 일부는 그때 주입된 ‘가짜 정보’를 아직도 바로잡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 반만년 역사 동안 농민의 꿈은 ‘자기 땅’에서 농사를 짓는 것이었다. 1946년 김일성의 임시인민위원회는 ‘무상몰수·무상분배’ 토지개혁을 통해 마치 그 꿈이 실현된 것처럼 ‘거짓 선동’했다. 그러나 북한이 지주에게서 땅을 빼앗은 것은 사실이었으나 농민에게 분배한 것은 ‘매매·저당·상속’이 불가능한 ‘경작권’에 불과했다. 게다가 매년 수확량의 25%를 현물세로 받아 갔다. 비유하자면, ‘서울 자가(自家) 아파트’가 꿈인 서민들에게 ‘영구임대아파트 입주권’을 나눠주고 해마다 소득의 25%씩을 임대료로 징수해 가면서도, 정작 ‘서울 아파트는 서민의 것!’이라는 달콤한 구호로 진실을 호도한 셈이었다.
더욱이 1954~1958년 ‘농업 집단화’로 북한 농민들은 경작권마저 ‘협동조합’에 반강제로 넘겨야 했다. 농민의 ‘자본주의적 소유욕’은 충족시켜 주지 못했을지언정 결과라도 성공적이었느냐면, 간신히 버텨가던 북한 농업은 1994년 ‘고난의 행군’으로 완전히 붕괴해 세계 최빈국 수준으로 전락했다. 이처럼 계획부터 결과까지 북한의 토지개혁에서 ‘성공’이라 평가할 부분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다.
그에 반해 남한에서는 농지개혁 이전 총경작지의 35%에 불과했던 자작지가 이후 92~96% 수준으로 증가했다. 또한 1948년 남한 인구의 70.9%가 농민이었고, 그중 80% 이상이 소작농 또는 자소작농이었지만, 농지개혁 이후에는 원칙적으로 모든 농민이 자작농이 됐다. 분배받은 권리도 ‘매매·저당·상속’이 모두 가능한 ‘순도 100% 소유권’이었다. 그 덕분에 대부분의 농민들이 1960년대 이후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돼 가난에 허덕였을망정, 땅을 팔아 자식들 공부시키는 것도, 도시의 확장 과정에서 자기 소유의 농지가 수용되거나 용도 변경돼 ‘인생 역전’의 기회를 얻는 것도 가능해졌다.
‘유상’이라고 하나 남한 농민의 농지 대금 상환 조건은 ‘무상’이라고 호도한 북한보다 오히려 나았다. 1949년 4월, 국회를 통과한 농지개혁법은 정부가 3정보(9000평) 이상 농지를 소유한 지주에게 연평균 생산량의 150%에 해당하는 지가증권을 주고 매수하고, 농지를 분배받은 농민은 생산량의 125%를 매년 25%씩 5년에 걸쳐 균등 상환하게 했다. ‘경작권’을 분배받은 북한 농민은 현물세 25%를 영구히 부담해야 했지만, 남한 농민은 같은 수준의 상환 대금을 5년만 납부하면 농지의 등기를 넘겨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 농지개혁은 1949년 4월 국회를 통과한 법안대로 추진되지는 않았다. 이승만 정부는 지주로부터 매수하는 가격과 농민에게 분배하는 가격 사이의 ‘차액 25%’를 정부가 부담하면 국가 재정이 어려워진다는 이유에서 그 차액 부분을 수정해 달라고 법안을 국회로 돌려보냈다. 사실상 거부권을 행사한 것이었지만, 같은 해 6월 15일 국회는 재표결 끝에 원안대로 법안을 확정했다. 국회와 정부는 그 후로도 1년 가까이 개정을 협의해 1950년 3월 10일 농민이 생산량의 30%씩 5년에 걸쳐 균등 상환하도록 함으로써 지주 보상과 농민 상환을 150%로 일치시킨 개정 농지개혁법을 공포했다.
남한의 농지개혁 성과를 폄훼하는 세력은 더 나은 개혁 방안을 찾기 위해 1년여 기간 국회와 정부가 협의한 것을 두고, 마치 이승만 대통령이 농지개혁 자체를 반대한 것처럼 거짓 선동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농지개혁을 반대하기는커녕 남한의 산업화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구축하기 위해 공무원들을 독려해 가며 이를 앞장서서 추진했다. 농지개혁은 민국당(한민당의 후신), 남로당이 반분했던 농민의 지지를 일거에 이승만과 대한민국으로 돌려놓은 이승만 정부의 정치적 승부수였다.
이승만 정부는 국회와 농지개혁법 개정을 논의하는 동안에도 농지개혁을 착실히 준비했다. 개정안이 통과된 직후 ‘속도전’으로 밀어붙여 1950년 3월에서 5월 사이 대상 농지 70~80%의 분배를 완료했다. 농지개혁의 혜택을 입은 농가는 전체 농가 240만 호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150만여 호에 달했다.
이렇듯 농민 대다수가 자기 땅을 소유하게 된 상태에서 6·25전쟁이 발발했다. 인민군이 남한 점령지에서 북한에서와 같은 토지개혁을 실시했지만, 전쟁 전 이미 농지를 분배받았던 대다수 농민들은 경작권밖에 주지 않는 ‘북한식 토지개혁’에 시큰둥했다. 더욱이 농지 재분배를 주도한 ‘붉은 완장 찬’ 머슴과 빈농이 양질의 논을 선점하는 등 농간을 부려 농민들로부터 더 큰 반발을 샀다.
6·25전쟁 기간 이승만 정부는 전시(戰時) 세수 확보를 위해 농지 상환금 외에도 ‘임시토지수득세’를 부과해 농민들이 생산한 식량의 절반 이상을 징수했다. 그럼에도 농민들은 “인민공화국 치하보다는 낫다”고 생각하고,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쳐 싸웠다. 남로당의 거짓 선동에 솔깃했던 농민을 확실한 대한민국 지지 세력으로 돌려놓은 농지개혁은 6·25전쟁 이래 대한민국을 지켜낸 견고한 방어벽이었다.
<참고 문헌>
강정구, 남북한 농지개혁 비교연구, 경제와 사회 제7권, 1990
권기돈, 오늘이 온다, 소명출판, 2022
김일영, ‘농지개혁을 둘러싼 신화의 해체’,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책세상,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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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남로당 ‘9월 공세’와 국군 ‘동계 토벌’
전봉관 KAIST 디지털인문사회과학부 교수2025. 12. 13.
[전봉관의 해방 거리를 걷다]
1948년부터 6·25 전후까지
빨치산의 확산과 괴멸
‘빨치산’은 적의 후방에서 주요 시설 파괴, 무기와 물자 탈취, 인명 살상 등을 도모하는 유격대, ‘파르티잔(partizan)’을 우리식으로 발음한 단어다. 중국 국민당에서 ‘공산 게릴라’를 일컬을 때 쓰던 ‘공산 비적(匪賊·무장을 하고 떼를 지어 다니면서 사람들을 해치는 도둑)’의 줄임말 ‘공비(共匪)’와도 같은 말이다. 해방 이전 주로 중국과 소련 땅에서 활약하던 ‘빨치산’은 1948년 초 남로당의 ‘단정(單政)·단선(單選) 반대 투쟁’을 계기로 한국 땅에도 등장했다. ‘빨간(공산당) 치(무리)들’이 지리산·오대산·태백산 등 ‘산’에 똬리를 틀고 암약했기 때문에 이들을 일컫는 ‘빨치산’은 마치 순우리말인 것처럼 오해되기도 했다.
1948년 초 남로당은 ‘단독 정부’(대한민국) 출범을 무력 투쟁으로 막기 위해 일본군·독립군 등 군사 경험이 있는 당원, ‘대구 10월 사건’ 등 각종 폭동에 가담해 군경에 쫓기던 당원 등을 중심으로 지방당에 ‘야산대(野山隊)’를 설치했다. 이들 지방당 빨치산은 흔히 ‘산(山) 사람’, ‘바닥 빨치’라고 불렸다. 야산대가 토대를 닦은 이후, 1948년 10월 여순사건을 일으킨 제14연대 반란군 잔당이 진압군에 쫓겨 지리산으로 입산했고, 뒤이어 국군에 침투한 남로당 세력을 숙청하는 숙군(肅軍)이 본격화되면서 이를 피해 탈영한 남로당 세포들이 지리산을 비롯한 경북과 강원 산악 지역으로 피신해 ‘산 사람’과 합류했다.
1948년 11월부터는 북한에서 훈련시켜 남파한 빨치산도 합세했다. 1949년 6월 ‘남·북로동당’이 합당해 출범한 ‘조선로동당’은 산하에 ‘인민 유격대’ 3개 병단을 편성하고, 강동정치학원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빨치산을 본격적으로 ‘남파’했다. 남·북로동당 합당 이후에도 ‘지방당’, ‘탈영’, ‘남파’ 등 출신과 관계없이 남한에서 활약한 빨치산은 대부분 박헌영계 남로당의 지령을 받았다.
‘인민 유격대’ 제1병단과 제3병단은 ‘남파 빨치산’, 제2병단은 ‘토착 빨치산’을 중심으로 조직됐다. ‘오대산 지구 제1병단’은 강동정치학원 출신 남파 빨치산 360여 명, ‘지리산 지구 제2병단’은 이현상을 총사령관으로 여순사건을 일으킨 제14연대 반란군 잔당, ‘태백산 지구 제3병단’은 제주 4·3사건의 주동자 김달삼을 총사령관으로 강동정치학원 출신 남파 빨치산 300여 명을 주축으로 편성됐다.
강동정치학원은 1947년 9월 남로당 간부 양성을 위해 평양 인근 평남 강동군에 일제강점기 탄광사무소와 합숙소를 개수(改修)해서 설립됐다. 미군정의 탄압으로 남한에서 체계적인 간부 양성이 어려워지자, 남로당은 지역당 초급 간부들을 월북시켜 강동정치학원에서 공산주의 이념 교육과 군사훈련을 3개월 정도 받게 한 후 다시 남파했다. 1948년 8월 해주에서 열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360명 선출을 위한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해주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월북했던 남로당과 좌익 인사 1000여 명 중 대의원으로 선출되지 못한 인사의 상당수가 강동정치학원에 입교했다. 1949년 남한에서 빨치산 투쟁이 격렬해지면서 강동정치학원은 빨치산 양성소로서 그 성격이 변했다.
‘조선로동당’ 출범 직후 남과 북이 별도 조직으로 운영됐던 ‘민주주의민족전선’도 ‘조국통일민주주의민족전선(조국전선)’으로 통합됐다. 조국전선은 ‘평화 통일 선언서’를 채택하고 미군 철수, 이승만 정권 타도, 통일 정부 수립을 요구하며 그 구체적인 실천 방안으로 1949년 9월에 ‘남북한 입법기관 선거’를 실시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조선로동당 외곽 조직인 조국전선의 일방적인 주장을 대한민국 정부가 받아들일 리 없었다. ‘9월 총선거’를 실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남로당이 ‘9월 공세’라 명명한, 빨치산 주도의 무력 투쟁뿐이었다. ‘평화 통일 선언서’가 발표된 직후, 남로당 서울시당은 각 지방당에 다음과 같은 지령을 하달했다.
“결정적 시기가 머지않아 도래한다. 각 지방당은 정권 접수를 준비하라. 모든 당 조직은 군사 조직으로 개편하고 결정적 투쟁을 전개하라. 돈 있는 사람은 돈을 바치고, 집 있는 사람은 집을 바쳐 무기를 준비하라. 통일 정권을 수립하면 은행 금고가 해방될 것이니 당원들은 4개월간 최저생활비를 제외한 전 재산을 7월 말까지 당에 바치라.”
1949년 초까지 국군 토벌대에 수세적으로 저항하던 각 지역 빨치산들은 ‘9월 공세’ 지령이 내려온 7월 이후 일제히 ‘아성(牙城·본거지) 공격’을 감행해 관공서·경찰서·군부대를 정면 공격했다. 그러나 ‘아성 공격’에 나선 빨치산들은 국군 토벌대의 반격을 받아 오히려 회생 불능의 타격을 입었다. 북한에서 10차에 걸쳐 남파한 빨치산도 오대산과 태백산 등 작전 지역에 미처 도달하기도 전에 국군의 공격을 받아 대부분 소탕됐다.
무기와 식량 보급이 끊긴 빨치산은 산간 마을을 습격해 비협조적 주민을 반동분자나 지주로 몰아 살해하거나 총칼로 위협해 식량을 털어갔다. 일부 지역에서는 “멀지 않아 해방이 된다. 인민공화국 치하가 되면 토지개혁을 해야 한다”며 토지 문서를 불살라 버리고, 토지를 소작인에게 분배했다. 그러곤 그 대가로 빨치산에 식량을 바칠 것을 강요했다.
국군은 1949년 10월 30일부터 이듬해 2월 28일까지 지리산·덕유산 등 빨치산 주요 거점을 포위하고 대대적인 ‘동계 토벌’에 나섰다. ‘비민(匪民·공비와 민간인) 분리’ 방식을 도입해 산간 마을 주민들을 소개(疏開)했다. 지리산 지구에서만 수십만 명의 주민이 소개됐다. 국군 토벌대의 대규모 공격으로 1950년 봄 ‘인민 유격대’ 3개 병단은 사실상 괴멸 상태에 빠졌다. 식량을 구하기 위해 민가를 습격하는 등 근근이 명맥만 유지하던 ‘지리산 지구 제2병단’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상하지 못한 패잔병들을 흡수해 ‘인민 유격대 남부군’으로 재편됐다.
적지 않은 국군 병력이 빨치산 토벌을 위해 지리산·오대산·태백산 지역에 발이 묶인 바람에 6·25전쟁 초기 38선은 속수무책으로 뚫렸다. 하지만 전면전에 앞서 후방의 적을 토벌해 둔 덕분에 박헌영이 호언했던 “20만 남로당 지하당원의 전국적 폭동”은 6·25전쟁 기간 단 한 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리산에서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이 체포된 것은 6·25전쟁이 끝난 지 10년 후인 1963년이었다.
<참고 문헌>
김남식, 「1948~50년 남한 내 빨치산 활동의 양상과 성격」, 해방전후사의 인식 4, 한길사, 1989
양영조, ‘6·25전쟁 발발 전후 북한 게릴라의 활동과 성격’, 군사연구 제136호, 2013
이선아, ‘여순사건 이후 빨치산 활동과 그 영향’, 역사연구 제20호, 2011
정병준, 한국전쟁, 돌베개,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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