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_세계
#1 1945년 패전 후, 아이 셋과 일본 여성의 만주에서 일본까지의 탈출 수기 :
《흐르는 별은 살아 있다》, 후지와라 데이
Flow ・
2024. 11. 26.
출처 예스24
이 책의 배경은, 제2차세계대전 막바지였던 1945년 8월 9일부터 시작한다. 이 날은 독ㆍ소전이 끝난지 정확히 3개월이 지난 날로, 일본제국의 정예부대는 모두 빠지고 껍데기만 남은 만주의 일본 관동군을 소련이 선전포고를 하며 만주로 진격하던 날이었다.
이 때 만주 신경(지금의 장춘)에 있던 저자는 전쟁이 터지자 남편이 기상대로 긴급호출 되자 혼자서 6세, 3세, 한 달 신생아를 데리고 기상대 가족 단체와 귀환길에 오르게 된다. 만주에서 북한, 부산, 일본까지의 귀환길에서 아이 셋을 데리고 실제로 겪은 고통스런 애환을 기록하고 있다. 그녀가 속했던 만주의 일본 기상대 가족 단체의 귀환 과정과 그 사이에서 보여지는 인간 군상, 다른 단체들과의 마찰, 자신과 어린 아이들이 힘들게 헤쳐나가는 모습이 주를 이루고 있다. 조선인과 조선의 이야기는 간간히 등장하며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모습도 엿볼 수 있다. 특히 북한에서 지낼 때 남편이 시베리아로 떠나게 되는 부분과 소련군 이야기가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어서 기억에 강렬하게 남았다.
시베리아로 끌려간 남자들은 중국의 팔로군에 많이 있었다는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었다.
또한 3.8선을 향해 떠나는 길에서의 이야기들에서는 눈물없이 볼 수 없었다. 일본인이기 전에 한 여자로서, 엄마로서 강인함에 존경심이 들었다. 또한 그들도 그저 정부 정책에 휘둘리는 일개 국민으로서 식민지배의 처참한 후폭풍을 맞고 있는 것이었다. 그 당시 돈 있고 빽 있는 사람들은 제일 먼저 밀항을 하던지 해서 일본으로 먼저 돌아갔다. 그러나 이들은 1946년 1년이 지나서야 일본에 도착하게 된다. 그 과정이 정말 눈물겹다.
패전 후 귀환하는 일본 개인의 수기를 읽는다는 것 자체로 설레었다. 당시를 살아갔던 조선인들 이야기도 기대했고, 패전 국민이 된 그들의 심경은 어떠했을지 호기심이 일었기 때문이다. 그러함에도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는 그들의 귀환의 발단은 그들에게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자리 잡았다. 그래서 이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생각해봤다. 그러나 남편도 없이 어린 아이들과 함께 하는 험난한 그녀의 귀환길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역사적 배경 보다 그저 같은 한 인간으로서, 여자로서 그녀의 고통에 공감하게 된다.
소련군의 만주 침략으로
급히 피난 기차에 오르다
마사히로가 여섯 살, 마사히코가 세 살 그리고 사키코는 이제 태어난 지 한 달도 채 안 되었다. 보따리와 트렁크 안의 물건을 들었다 놨다 하다가, 나는 갑자기 서글픈 마음이 들어 눈물이 핑 돌았다.
............
남편은 짧게 설명했다. 관동군 가족은 곧바로 이동해야만 한다. 정부 가족도 그에 따라 같이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 상부의 명령이다. 신경까지 전쟁이 밀어닥쳤기 때문이다. 기상대의 다른 가족들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곧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다.
p.11 역까지 4킬로미터
그러나 1킬로미터도 걷지 않아 나는 녹초가 되어 버렸다. 사키코를 낳은 지 겨우 한 달밖에 되지 않은 내가 무거운 마사히코를 업고 가는 건 애초에 무리였다. 대동공원 근처에서 잠시 쉬고 있자니, 가슴 속에는 태어나서 지금껏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야릇한 슬픔이 복받쳐 올랐다.
p.13 역까지 4킬로미터
이것이 마지막인가 생각하니, 작별인사 조차 나오지 않았다. 나는 간신히 남편의 귀에 들릴 만큼 목소리를 짜냈다.
"살아 계셔야 해요. 어떻게 해서든 살아야 해요."
남편은 협화복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 말없이 내게 건넸다. 남편이 애용하는 '론진' 시계였다.
"아이들을 부탁하오."
p.17 이별
기차가 잠깐씩 역에 멈추면 사람들은 물통에 물을 구해 왔지만 그것도 힘센 남자들이 먼저 차지할 뿐, 나는 늘 허탕이었다. 그보다 더 힘든 것은 기저귀를 빠는 일이었다. 조금 오래 정차할 기미가 보여 우물에 가서 빨래를 하려고 하면, 줄을 지어 물을 받는 남자들이 인상을 찌푸리며 "에잇, 더러워" 하는 바람에 부득이하게 악취가 풍기는 지저분한 웅덩이에서 기저귀를 빨아야 했다.
p.20 무개화차
8월 14일 정오 무렵이었다. 비행기 한 대가 나타났다. 사람들은 무슨 좋은 소식이라도 있으려나 싶어 바깥으로 몰려나갔다. 비행기에서 뿌린 전단이 공중으로 흩어져 내렸다. 관동군 고급장교가 자기 가족의 행방을 찾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p.25 전쟁은 끝나고
8월 15일은 맑고 화창했다. .... 얼굴이 파랗게 질린 도노 씨가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눈물을 떨구는 도노 씨를 보고 한 여자가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민감해진 우리는 그 여자를 따라 모두들 울고 말았다.
또 다른 불안감이 우리를 짓눌렀다. 그것은 죽음과 맞닥뜨릴지 모른다는 공포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일본은 패했고, 이제 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극도로 긴장한 우리들은 금방이라도 도망칠 준비를 하고 15일 밤을 맞았다.
...........
태극기의 행렬이 물결치고, 학교 밖은 떠들썩했다. 우리는 외출이 금지된 채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우리가 묵은 학교 뒤에는 언덕이 있고, 옥수수밭과 사과밭이 펼쳐져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언덕 위의 민가에서 식량을 구해 오기도 했지만 나는 좀처럼 용기가 나지 않아서 그런 사람들을 부럽게 쳐다볼 뿐이었다.
p.25-26 전쟁은 끝나고
설사는 더욱 심해졌고, 마사히로도 열이 나고 설사하는 횟수가 많아졌다. 마사히로의 변 상태를 확인하려고 변소 안에 조금 오래 머물렀더니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재촉을 하며 아우성을 해대어 나는 뜨뜻한 마사히로를 안고 얼른 나올수 밖에 없었다. 자리로 돌아와 보니 마사히코와 사키코가 울어 대는 소리에 사람들이 눈을 흘기고 있었다.
p.27 전쟁은 끝나고
이렇게 남편이 남하할 준비를 하자, 그때까지 떠나는 데에 반대하던 사람들도 모두 따라나서기로 결정이 되었다. ......
"후지와라 씨, 큰일났습니다. 오늘부터 기차는 평양 이남으로 갈 수가 없답니다."
운명의 날이었다. ...이리하여 38선을 사이에 두고 교통이 차단되었다.
p.33 남하합시다!
그보다 더 우리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매일 철로로 드나드는 화물차와 떼거지로 기차를 타고 남하하는 조선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
이내 외딴 집의 지리적 조건에 의해 새로운 걱정거리가 생겼다. 가진 돈을 숨기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나무뿌리나 돌 아래, 나무 밑, 깡통 속 등 돈을 넣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숨기기 시작했다. 물론 아무도 모르게 숨겨야 했다. 외부보다 내부의 적이 문제여서, 단체 내에서 일어난 도난 사고도 여러 번이었다.
.........
남자들은 매일 노동을 하러 나가게 되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밤늦게 돌아오는 남편의 피로를 씻어 주는 것은 옥수수 한 자루라든가 사과 한 알뿐이었다.
p.35-36 새로운 불안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보안대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단장을 오라고 하더니 갔다. ......
"18세 이상 40세까지의 일본 남자는 모두 기차를 타고 평양으로 가야 해. 이게 우리 전재산이니까 이제 당신이 맡아 둬요."
"평양엘 가다니 왜요?"
"그건 잘 모르겠소. 어쩌면 시베리아로 가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고."
......
나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모두 끝장이 난 것만 같아, 종이에 감춘 얼마간의 지폐를 꽉 쥔 채 멍하니 서 있었다.
p.42 또 한 번의 이별
이곳 사람들은 우리를 '쪽발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우리는 아무도 그 말에 대해서 화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조선 사람들은 우리가 조센징이라고 하면 불같이 화를 냈다. 그래서 그들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여기 사람'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조센징'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
그때 서쪽 창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깨졌다. 모두들 얼굴을 마주 보았다. 쨍그랑 소리는 계속해서 났고, '이얏'하는 아이들 목소리도 들렸다. 내다보니 열네다섯 살쯤 된 소년들 대여섯 명이 유리창을 향해 돌을 던지고 있었다.
p.50 무저항주의
그 후 우리 주변에는 수상한 사람들이 자주 나타났다. 눈매가 매서운 남자가 어슬렁거리는 날도 있었고, 평양에서 남자들 부탁을 받고 왔다며 입에 발린 말로 접근하는 남자들도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가까이 다가오는 조선인들을 경계의 눈으로 보게 되었다. 우리에게 호의를 베푸는 사람들은 우리 주변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그저 길에서 스쳐 지나갈 때 아이들에게 사과나 사탕 가은 것을 주거나 했을 뿐이다. 대부분 노인들이 그랬고, 젊은이들은 우리를 본체 만 체 했다. 어떤 일이 있든 우리는 저항하지 않고 조용히 넘어 가기로 했다. 아니면 일본인을 증오하는 조선인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애들도 그것을 눈치채고, 조선인들을 만나면 겁에 질린 얼굴로 엄마의 치마꼬리를 잡고 숨곤 했다.
p.51 무저항주의
갑자기 등 뒤에서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 것이다. .... 그 남자는 보안대 완장을 차고 있었다. .... 그 사람은 일본 항공대 소속이었다고 했다. 전쟁에서 패했을 때 일본이 얼마나 혼란했는지, 그는 무척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 그 사람의 성은 김씨였다. 그는 매일 밤 눈길을 걸어 우리에게 왔다. 아이들도 김씨가 놀러 오기를 기다렸다. 올 때마다 주머니에서 엿을 넣어 가지고 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목소리가 무척 아름다웠는데, 가끔씩 우리에게 노래를 불러 주기도 했다. 슬픈 유행가를 몇 번이고 계속 불러 줄 때도 있었다.
"아무도 모르는 노래 하나 가르쳐 드릴까요?"
어느 날 밤 그는 우리에게 노래를 하나 가르쳐 주었다.
'남쪽에 있을 때 우리 부대원들이 만든 노래예요. 이 노래를 만든 대원 둘 다 전쟁이 끝나고 곧 죽었지요."
그 때가 생각나서일까, 김씨는 평소보다 더 슬픈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흐르는 듯 슬픈 멜로디는 우리들 가슴을 깊이 흔들었다. 어느 틈엔가 눈물이 솟아났다. 3절로 된 쉬운 노래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사람을 빨아들이는 듯한 매력이 있었다.
내 가슴 속에 피어 있는
그대가 심어 놓은 장미꽃
오늘 밤도 보아 주세요.
홀로 기다리는 이 창가에
별빛만 빛나고 있는데.
내 가슴 속에 울리는
당신이 부르던 그 노래
오늘 밤도 보아 주세요.
둘이서 맹세한 그 언덕
별은 조용히 흐르고 있는데.
내 가슴 속에 살아 있는
그대가 떠나간 북녘 하늘
오늘 밤도 보아 주세요.
울며 보낸 그 하늘에
흐르는 별은 살아 있네.
p.58 흐르는 별은 살아 있다
나는 고향으로 돌아갈 때까지 속으로 늘 이 노래를 부르곤 했다.
마음이 허전할 때 으레 입 밖으로 흘러나온 것도 이 노래였다.
나뿐만 아니라, 노래를 배운 우리 단체 사람들은 누구나 즐겨 불렀다.
........
김씨는 12월말이 되자 갑자기 오지 않았다. 일본인과 친하게 지낸다 하여 보안대에서 잘렸다는 소문도 있었다. 나중에 그와 한번 시장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모습도 많이 변했고 말도 멀찍이서 조심스럽게 걸었다.
....
그는 예전보다 좀 야위어 있었다. ...그는 우리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 준 사람이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는 내 기억 속에 친근한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p.59 흐르는 별은 살아 있다
귀환문학 (출처 : 한일 군사 문화 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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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이 만든 한권의 베스트셀러
[한겨레] 2015-05-14
후지와라 데이 지음 ‘내가 넘은 삼팔선’ : 통신사 기자 셋이 하룻저녁에 번역
만주 일본여인이 귀국하기까지 고생담. “까짓게 뭐라고” 한국전쟁 뒤는 안팔려
38선의 비극을 상징하는 베스트셀러 한 권을 특별히 기억해 둘 만하다.
수도문화사는 1949년 11월 후지와라 데이가 쓴 <흐르는 별은 살아 있다>를 번역해 <내가 넘은 삼팔선>(사진)으로 제목을 고쳐 간행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 6월까지 반년 남짓한 기간에 14판, 총 4만5천부가 팔려나갔다.
이 책은 만주 신경 관상대에서 근무하던 남편이 시베리아로 끌려간 뒤, 여린 주부의 몸으로 홀로 3명의 자녀를 이끌고 북한을 거쳐 월남해 일본에 도착하기까지의 고난을 기록한 수기다. 후지와라의 가족을 포함한 일행 17가구 49명은 북한에서 고통스런 공동생활을 이어간다. 질병과 영양실조로 속속 죽어가고 더러는 미쳐간다. 후지와라는 동족인 일본인들의 이기적인 인간성을 가감없이 드러낸다. 또한 자신의 아들이 장질부사로 혈청값을 구하지 못해 죽기 직전 조선인 의사의 호의로 살아나게 되는 장면을 통해 지배·피지배의 기억을 뛰어넘는 인간애를 그리기도 한다. 이렇게 북한에서 1년여 동안 고난을 겪고 1946년 8월1일부터 10여일간 삼팔선을 넘어 부산을 거쳐 일본에 귀국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끝맺고 있다.
이 책은 합동통신사 기자 3명이 하루 저녁 동안 번역한 것으로 알려졌다. ‘내가 넘은 삼팔선’이라는 제목은 수도문화사 사장 변우경이 고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북한에서 각각 단정이 수립되고 38선이 국경선으로 고착되면서 실향민이 된 많은 월남민들은 일본여인의 식민지 탈출 고난에서 자신들의 38선 월경의 비극을 겹쳐 읽었다. 식민자였던 일본인들의 후일담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준 것도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였다.
그렇지만 곧 한국 사회는 일본 여인의 고생담쯤은 우습게 느껴질 정도로 미증유의 고난을 경험하게 된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수도문화사는 1964년 똑같은 형태로 제15판, 3천부를 찍었지만 전혀 팔리지 않았다고 한다. 38선의 비극은 한국전쟁과 휴전선의 비극에 밀려난 것이다.
정종현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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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흐르는 별은 살아있다」의 저자 「등원데이」여사의 수기
중앙일보
입력 1970.08.20
지면보기
나의 고향은 「나가노껭」(장야현)이다. 이곳에서 나는 여학교까지를 나왔다.
그후부터 지금 「도오꾜」(동경)에 살고 있기까지 약 30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지만 나는 항상 내 고향 「나가노껭」에 대한 뜨거운 향수를 품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고향에 대한 한없는 애착을 느끼게 마련이다. 내 고향의 푸른 하늘과 그 맑은 공기, 그리고 놀진 먼 산의 묏부리등 낙엽송의 신록이 우거져 검푸르게 짙어진 다음 가을바람이 불면 낙엽이지면서 머리에 꽂히기도 하고 옷소매에 스쳐서 떨어지는 그 풍취. 이러한 옛 고향의 풍경을 생각해 보기만 해도 가슴이 따가와 지곤 한다.
이러한 나의 고향생각과 함께 이따금 한국을 생각해 본다. 오랫동안 살았던 것도 아니고 꼭 1년 2개월밖에 안되는 짧은 생활의 추억이 어쩌면 내 잔뼈가 굵었던 고향의 추억과도 같은 애착을 느끼곤 한다. 그것은 왜 그런 것이며 무엇 때문일까?
1945년의 무더운 8월초였다. 소련군이 만주에 물밀 듯 밀고 내려오자 나는 북한으로 피난했다. 이곳에서 일본의 패전을 알았고 여기서부터 피난민, 아니 패전국민으로서의 생활이 시작됐던 것이다.
돌연 38도 선이란 것이 생겼다는 것을 알았고 그 다음부터는 마치 독안에 든 쥐가 됐다. 소련군의 지배하에서 꼼짝할 수 없게되어 버렸다. 평안북도 의천이라고 하는 읍이었다. 이곳에는 나와 같은 운명에 놓인 일본인이 약 2천 5백명, 그것도 대부분이 부녀자와 어린애들뿐이어서 그저 앞으로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 초조해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나에게는 다섯살짜리 장남과 두살짜리 차남, 그리고 생후 한달 밖에 안된 장녀등 3남매가 딸려있었다. 남편은 소련군에게 붙잡혀간 후 행방불명이 됐고. 이러한 정황 속에서 나는 오로지 어떻게 해야만 세 아이를 안고 일본으로 건너갈 수 있을까? 그날은 언제쯤 올 것인가 하는 생각에만 몰두했었다.
잠잘 곳이 없었다. 겨우 「진쟈」(신사)의 사무소 맨바닥이 숙소가 됐다. 어린애나 나나 갈아입을 옷도 없이 입은채로 자고 일어나야 했으며 「륙색」속의 식량도 달랑달랑했다. 이것이 떨어지면 먹을 것은 절망일 것 같았다. 이윽고 식량이 떨어지자 겨울이 닥쳐왔다. 여름옷 속으로 오싹 스며드는 그 추위. 추위 속의 굶주림은 더욱 무서운 것이었다. 끓일 것이 없어 아침식사는 무우를 잘게 썰어서 끓인 국물에다 소금을 쳐서 한공기씩 마셨다.
공기도 없어서 군대용 「항고」(반합)뚜껑에 나눠 먹여야 했다. 말라비틀어진 젖꼭지에서 젖이 안나오자 울고 보채는 딸년에게는 국속에 넣어 삶은 콩을 씹어서 어린새 새끼 입에 넣어주듯 먹여주었다.
『이래가지고선 어떻게 살아서 일본에까지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양철지붕위에서 낙엽이 뚝뚝 떨어지는 겨울소리와 추위에 잠 못 이루는 밤엔 이 생각 뿐이었다.
여기(의천)에서도 까마득하게 먼 38선을 넘어 그곳에서도 또 멀고먼 부산까지의 길을 걷고 걷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호주머니에 돈이 떨어진지 이미 오래됐고 입을 옷도 없으며 식량도 동이 났다. 이래가지고도 살아서 38선을 넘을 수 있단 말인가? 거의 절망적인 번민을 하다가 기나긴 겨울밤을 뜬눈으로 지새우기가 일쑤였다.
드디어 눈보라가 쳐왔다. 양철지붕을 물어뜯는 바람소리에 전신주의 비명. 어제도 그제도 아무것도 먹지 못한 밤은 새벽까지에도 자신이 없었다. 세 어린것이 매달려있는 나로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벽돌 운반 같은 것밖엔 할 수 없었다. 그것도 이미 영양실조에 빠진 신체조건으로서는 왕복10리(4㎞)길을 하루 두 세 번이 고작이었다.
한 번 날라주면 떡 한 개를 얻을 수 있었다. 하루 세 개의 떡을 얻었자 굶주려 보채는 애들에게 나눠주고 나면 기진 맥진해 쓰러질 지경의 내 몫은 없었다.
「시멘트」바닥에 깔아놓은 엷은 「앤페라」위에서 누더기 이불한장 속에 네식구가 한덩어리가 되어 새우잠을 자는 밤, 추위는 등짝 어깨 발할 것 없이 마구 스며들어 어린것들도 잠이 들지 못했다. 그럴땐 세 어린것들의 발을 모아서 내 가슴속에 품어 훈김이 돌게 해주기도 했던 북한의 그 혹한의 밤.
그 동안에 몇 사람의 일본인이 죽어갔다. 그 속에는 동사도 있었고 영양실조로도 죽었고 발진티푸스로도 죽었다. 굶주림과 추위에 견디다못해 자살한 사람도 있었다. 이러한 장례의 행렬에 참가한 나도 『얼마 안있으면 이와 같은 운명이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자꾸만 파고들고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몸서리 쳐지지 않을 수 없었다.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125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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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별은 살아있다"의 저자 등원데이 여사 탐방기
중앙일보
입력 1970.08.19
해방25년―. 숱한 사람들이 되새기는 감회깊은 세월의 흐름이다. 그 가운데 「후지하라(등원)데이」란 한 일본여인은 어머니로서 겪은 전쟁의 고난을 잊지 못한다. 제2차대전의 종결을 만주에서 만나 남편과 헤어진 채 어린 세 자녀를 이끌고 한국반도를 지나 그의 고국인 일본으로 귀환하기까지의 고난을 엮은 수기, 『흐르는 별은 살아있다』(강담사간)는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번역되어 패전국민의 쓰라린 경험에 깊은 동정과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켰었다. 동경 신숙역에서 전차로 한시간 쯤 거리인 무장야시 길상사북정 4정목 15의 15가 이제 50세가 된 그녀의 현주소. 최근 부사서방에서 그 수기의 재판이 나오면서 거처가 밝혀졌다.
「옛날 그토록 고생하던 한국에 다시 한 번 가고 싶어요. 특히 의정부에서 고생하던 오막살이는 지금도 찾아갈 수 있을 것 같고… 시장바닥에서 큰아들「마사히로」(정광)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쌀 한되 값인 10원을 서슴잖고 주던 텁석부리 아저씨, 이빨자국난 감자지만 굶주리는 우리를 보고 먹다말고 던져 준 어떤 아주머니 등 모두 살아있다면 정말 만나고 싶습니다』고했다. 한국은 그가 직접 지내 본 유일의 외국이었다는 것.
주택난으로 골치를 앓는 동경에선 흔치않은 넓은 정원과 널찍한 목조저택에서 지금은 큰 아들과 큰 딸을 출가시키고 차남과 막내딸의 성장을 낙으로 삼는다고 했다.
『한국은 언제쯤 통일이 되나요?』 그렇게 말하는 「후지하라」여사는 무척 안타깝다는 표정. 피난길을 걷다가 지쳐 주저 앉을땐 달구지라도 타봤으면 죽어도 원이 없을 것 같았고 몇 차례나 자살하려다 이를 악물고 지나온 「한국의 땅」을 이제는 여유있게 기차를 타고 여행해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5년전 조총련에서 「홍콩」을 거쳐 북한에 가보지 않겠느냐고 제의해왔을 때 『배로 부산에 가서 다시 기차편으로 신의주까지 간다면 몰라도 딴 길은 가고싶지 않았다』고 깨끗이 거절했다 한다.
그때 고생한 큰아들「마사히로」씨는 올해 설흔, 동경대를 나와 본전기연에 근무 중 작년에 결혼해 첫애를 낳은 것이 두달 전 일이고, 당시 두 살이었던 둘째 아들은 수학과에, 젖먹이던 장녀는 경응대 문학과를 나와 작년에 출가했다면서 지금은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고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녀가 일본에 돌아간 것은 l947년 10월. 헤어졌던 남편은 그보다 두달 후 12월께 만주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하여 귀국, 기상청에 근무하다 지금은 「니이따·지로」(신전차랑)란 「펜·네임」으로 문필생활을 한다.
산악소설가로 15년 전 「나오끼쇼」(직목상)까지 탄 남편 뒷바라지에 바쁘다는 그녀는 지금 NHK에 평론가로 가끔 나가고 조일신문에 인생문답을 담당하며 지내고 있다.
『3년전에 만주 개척단의 얘기를 쓴 소설한편을 출간했어요. 』
그런 「후지하라」여사의 별명은 「계절노동자」.
올해는 8·15를 맞아 NHK주최의 지방순회강연에 연사로 나갔지만. 해마다 이맘때면 제일 바빠져 주로 강연일로 보내기 때문에 둘째딸 「사끼꼬」(소자)양이 붙여준 별명이라 한다.
전쟁희생자로서 주로 전쟁반대강연을 하게되면 패전직후에 고생했던 일이 절로 되살아나고, 그래서인지 청중들에 큰 공감을 줄 수 있는 모양이라고 했다.
누구보다도 한국실정을 잘 안다는 「후지하라」여사는 『북한에 자유의 물결이 일 때까지는 그들이 아무리 초청해도 가지 않겠다』고 정색을 했다.
8·15를 맞으며 지금도 잊지 못하는 일 가운데 손꼽을 일이 있다고 했다. 특히 배고파 구걸했을 때 『우리나라의 일본인에 대한 감정에다 남의 눈도 있어 음식을 줄 수 없고 내다 버릴테니 주워가라』던 의정부 시골가정의 일은 영영 잊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바가지에 음식을 넣어 정성껏 보자기에 싸서 쓰레기통에 갖다버린 것을 숨어서 보고 있다가 가져갔던 골목집이 눈에 선하다』고 했다.
한국에 관한 기사는 한줄도 빼놓지 않고 읽는다는 「후지하라」여사는 언젠가는 한국을 찾아가 그때처럼 굶지 않기 위해 건빵과 주먹밥을 잔뜩 짊어지고 기차로 거슬러 올라가며 고생했던 곳을 일일이 찾아보겠다면서 지금은 행복하다는 그들의 가족사진을 펼쳐보였다.
<편집자주=「등원데이」여사는 오늘의 시점에서 25년 전 한국에서의 피난길을 되새기는 수기를 중앙일보사에 보내왔다. 이 수기는 내일부터 연재한다.>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125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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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흐르는 별은 살아 있다」의 저자「등원데이」여사의 수기
중앙일보
입력 1970.08.21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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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누리가 하얗게 눈에 덮였던 날, 나는 세 어린것들을 데리고 먹을 것을 찾아 나섰다. 살점을 에이는 바람에 눈가루가 회오리쳐 올라가는 눈길을 걸었다. 여름이라면 둑에는 버들명아주(일본 명「아까자」)도 있고 개천가에는 쑥이나 미나리 같은 것도 있겠지만 백설의 광야에는 마른 무 꽁지나 우거지 잎 하나도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눈이 부시는 먼 선원의 위에 까만 점을 찍어놓은 것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영양실조로 희미해진 시력의 환각이 아니었나 하면서 확인하러 가보았다. 그것은 죽은 까마귀였다. 나는 세 아이의 손을 잡고 그 자리서 되돌아섰다.
얼마쯤을 걸었는지 모른다. 얼어붙은 눈길을 미끄러지는 애들을 부둥켜 일으키면서 걸었 다. 마을의 어느 외딴집을 찾아 기어올라갔다.
『4, 5일 동안 아무 것도 못 먹었습니다. 뭐든 먹을 것을 좀 주세요.』
그 집 아주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추워서 떨고 있는 어린애들을 측은한 얼굴로 쳐다보더니만 내가 갖고있던 보자기를 뺏어 안으로 들어갔었다. 누룽지를 한보자기 싸 가지고 나오는 것이었다.
『참 안됐군요. 고생합니다.』
아주머니는 그 한마디로 위로해 주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주머니, 고마워요. 정말 고맙습니다.』
하며 나는 그의 등뒤에다 몇 번이나 절을 했는지 모른다. 눈물이 마구 쏟아지는 것이었다.
그래도 어린 아들들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나는 뒤돌아 서서 얼굴을 닦고 닦으며 언덕의 그 외딴집에서 내려 왔다.
이윽고 봄이 오고 또 여름이 왔다. 몸은 영양실조 제3기에 빠져 있었다. 어깨에서 앞가슴까지 해골처럼 말라붙은 데다가 아랫배만이 볼록했고 발등은 푸릇푸릇한 반점이 나타나며 부어 올랐다. 일본인의 거의 전부가 이런 꼴을 하고서 먹을 것을 얻으려고 거리를 방황했다.
시장 바닥에서 마늘·파의 찌꺼기를 주워 다 삶아먹는 정도의 나날. 날이 갈수록 신체는 쇠퇴 일로 일수밖에는 없었다. 큰딸은 생후 1넌이 됐는데도 앉지도 못하고 기어다니지도 못하고 잔뼈만 앙상했다. 검은 머리털이 회색으로 변했고 그 열이 계속 되었다. 무조건 소금 국을 먹일 때만「우후후…」하고 웃음소리를 낼뿐이었고 움푹 들어간 눈동자는 이상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내애는 온몸이 부스럼 투성이가 되어『엄마 배고파, 배고파』하고 울고 울었다. 나중엔 목이 쉬어서 울지도 못하고 길바닥에 지쳐서 잠들기가 일쑤였다. 그리고 그 야윈 목엔 보리 알 만씩 한 이가 기어다니고 있었다.
『이러고만 있어 가지고선 안되겠다. 이 상태로 있다가는 내일의 생명을 알 수 없겠다. 어쨌든 이곳을 탈출,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한 걸음이라도 좋으니 일본 족으로 가까이 가자.』 이와 같이 결심한 우리들 일본인 몇 가족은 1946년 8월1일, 인천에서 탈출했다.
그러나 까마득한 38선까지 홀몸도 아니고 세 어린애를 데리고 견디어 수 있는 힘이 남아 있을 것 같지 않았고 또 자신도 없었다. 자신이 있다 손치더라도 만약에 소련군에게 잡히기만 하면 그땐 죽음을 당할 것 같았다. 이러나 나는『앞길은 운명에 맡긴다. 어쨌든 한 걸음이라도 38선을 향해 전진하자』고 이를 악물었다. 내일의 운명을 알 수 없는 죽음과 모험의 도보행진에 나섰다.
낮에는 둑 아래 숲의 그늘에 숨어서 잠을 자고 밤에만 별빛을 의지해 남으로 남으로의 행진을 계속해야 했다. 며칠을 걸었는지 알 수도 없었다. 시계가 있을 리 없고 날짜를 헤어볼 힘도 없었다. 20일쯤 되었을까? 그것도 짐작이었다. 이땐 이미 나의 주위에는 같이 떠나왔던 일본인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뒤에 처진 것이 아니면 딴 길을 찾아간 것인가?』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머뭇거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소나기가 무섭게 쏟아지는 칠흑의 밤이었다. 어린것들이 개천에 빠질까봐 손에 손을 잡고 황토 흙 언덕길을 기어오르다가 쭉 미끄러졌을 때다. 둘째 놈이『어머니, 눈이 안보여…』진흙 투성이의 손등으로 눈을 비벼 얼굴전체가 흙으로 덮였으니 앞이 보일 리가 없었다. 그 다음엔 큰놈의 차례였다.
『엄마, 신발 한 짝이 없어졌어….』
등에 매달린 채 아무 소리가 없는 딸은 어찌되었나? 울지도 않고 꼼지락 가리지도 않고 있으니, 잠자고 있는 것인가? 손을 등뒤로 돌려 발을 만져보니 아직 따듯한 체온을 느낄 수가 있었다.
『아직 살아 있다. 힘을 내자 힘을 어떠한 일이 있고 어떻게 해서든지 일본에 살아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나의 어린것들에게 이렇게 외쳤던 것이다.
그러고도 몇 날을 걸었는지 모른다.
어떤 미로에 빠져버린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가 나의 어깨를 흔드는데 놀라 눈을 떠보니 우리들 네 식구는 마을의 길바닥에 나란히 누워 있었음을 알았다. 몇 시간 동안을 이 길바닥에 누워있었던 것인지 전연 분간할 수 없는 의식불명의 상태에서 깨어난 것이다.
『물을 좀 주세요. 물 한 그릇만….』
나는 두 손을 합장, 마을 사람에게 물을 달라고 했다. 물 한 그릇만 얻어 마시면 그 자리에서 죽어도 한이 없을 성싶을 만큼 갈증이 엄습해 왔다. 그 마을 사람은 시원한 물을 한바가지 떠다 주는 것이었다.
『고마워요, 정말 고맙습니다』고 감사하자
『자 이젠 힘을 내십시오. 마을 앞 언덕을 넘으면 미군의 수용소가 있으니까….』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리고 나는 그 마을 사람의 말소리와 그의 모습이 마치 꿈속에 현몽하는 신의 목소리와도 같이 들렸고 나를 구해준 신의 모습과도 같아서 하얀 여름옷 차림의 그를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고마워요. 참으로 고마워요.』
한참동안 이 말을 되 뇌이다가 나는 다시 의식을 잃어버렸다.
<「등원데인」 여사의 필명>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125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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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흐르는 별은 살아있다」의 저자「등원데이」여사의 수기
중앙일보
입력 1970.08.22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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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의식불명에서 깨어난 것은 미군「트럭」에 실릴 때였다.
이렇게 해서 우리들 네 식구는 이내 개성에서 의정부의 수용소로 후송되었다.
산 속을 헤매고 38선을 넘느라 나는 양쪽 신발도 없는 채 후송됐다. 걸을 힘도 잃어버린 나는 딸을 업고 동물처럼 기다시피 해서 개천에 나가 비누도 없는 세탁을 했다.
『엄마! 이것 얻었어요.』
장남이 먼지가 뿌연 신작로를 달려오면서 외마디처럼 외치며 좇아왔다. 손에는 주먹밥 두개를 쥐고 있었다,
『하얀 옷 입은 할머니가 주었는걸….』
장남의 눈은 목적을 달성한 사냥꾼의 눈처럼 빛나고 있었다.『잘했구나. 한 개 씩 나눠 먹으렴.』눈물이 바싹 메마른 길바닥의 먼지 위에 뚝뚝 떨어졌다.
얼마 후에 우리들은 기차 곳간에 타고 대망의 부산까지 후송되었고 여기에서 배편으로 「하까다」(박다)에 상륙했다.
「나가노껭」에 도착한 다음 어린애들은 날로 건강이 회복되어 갔으나 나의 몸은 도리어 쇠약해가기만 했다.
소련군에 끌러간 남편으로부턴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생사를 알아볼 길도 없었다.
『죽어버린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살아남아서 세 아이들을 길러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앉았다가 일어서려고 하면 빈혈이 와 기둥을 붙잡았다가 쓰러지는 일이 빈번했다.
남편은 그해 12월 중순의 추운 어느 날 아무런 예고도 없이 돌아왔다.
『용케 일가족 네 사람이 모두 무사히 돌아와 있었군.』
돌아온 첫마디였다. 병석에 누워있었던 나는 기쁨이라기보다는 놀라울 뿐이었다.
『일가족 전멸이냐? 아니면 아내만이라도 살아서 돌아왔겠느냐? 하며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고열에 신음하는 내 베개 맡에서 남편은 이렇게 기뻐하는 것이었다.
남편은 나를 살리려고 갖은 애를 다 썼다. 그 덕분이었는지 일본에 돌아 온지 꼭 2년째 되는 해의 가을, 나는 집안을 거닐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됐다. 양지쪽의 마루 끝에 차분히 앉아있자니「살아서 돌아와 줬군」하는 실감이 느껴졌다.
그로부터 2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38선을 넘기 전 굶주려 영양실조에 걸린 나를 도우려고 온종일 들판에 나가 버들명아주(일본이름으로「아까쟈」라고 부름)를 따러 다녔고 산에 가서 땔나무를 주워 다 주던 장남은 대학의 이공과를 졸업, 어엿한「엔지니어」로서 자동차 회사에 다니고 있다. 그 장남이 얼마 전 애기 아버지가 됐으니…. 그러나 그는 그 당시의 일을 생생하게 알고 있은 탓인지 때의 이야기만 나오면 금새 어두운 표정으로 밖으로 나가버리곤 한다.
나는 그럴 때마다『마음속에 아직도 얼마만큼 깊은 상처가 남아있기에 저럴까?』하고 가엾은 생각이 들었다.
차남도 벌써 27세가 됐다.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해 지금은 대학의 교관으로 있다. 그는 만주에서부터 일본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일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 그저 38선의 산 속을 헤맬 때 가시덤불에 찔린 상처가 아직도 그의 양쪽 발에 남아있을 뿐이다.
『이쪽 발의 상처는 왜 생겼지요?… 그때 나는 신발도 없었던가요….』
내가 아무리 설명을 해줘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듯『좀더 기술적으로 탈출해 오는 방법이 없었을까?』남의 이야기처럼 중얼거리기도 하고 어쨌든 둘째 애도 퍽 명랑한 청년이 된 것이
다행스러울 뿐이다.
내 등에 업힌 채 숨소리도 들리지 않고 늘 생사의 경계를 오락가락했던 큰딸은 대학을 나와 결혼했다. 물론 38선을 넘어 살아 남았다는 것은 알지 못한다.
『대견스럽게 성장했네.』자기의 날씬한 팔 다리를 보면서 가끔 이런 말을 한다.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 탓인지, 지금도 책 읽는데 여념이 없는 탓인지, 큰딸의 생각과 행동은 현대인답게 절도가 있다.
그들 셋을 키우기 위해 38선 탈출에서 지금까지 나는 전력을 다했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어렸을 적에 같은 또래의 애들보다 훨씬 발육이 늦었을 때 어떻게 하면 이를 따라가게 할 수 있을까. 더욱 귀환의 고통을 이겨나가고 있는 애들에게 어떻게 하면 과거의 경험을 살리면서 인생에 대처할 수 있는 힘을 길러줄까 하고 노력해 왔다.
누구이든 긴 인생에 있어서 한두 번은 반드시 실의(실장)에 잠길 때가 있게 마련이다.
그때 어떻게 하면 그 실의의 나락을 뛰어 넘을 수 있을까. 그 힘을 애들에게 키워주자고 생각했다. 그것은 전혀 암중모색 같은 것이었지만 애들은 중학·고교·대학을 순조롭게 마치었다.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1252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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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 데이 연구의 문제점 ‒ 서지학적 측면에서 ‒
Problems in Fujiwara’s research - From a bibliographic point of view -
발행기관한국일본근대학회 바로가기
간행물일본근대학연구 KCI 등재 바로가기
통권제60집 (2018.05)바로가기
페이지pp.165-182
저자박상현, 미네자키 토모코
언어한국어(KOR)
URLhttps://www.earticle.net/Article/A332384복사
초록
영어
First of all, I carefully examined what Fujiwara’s “Flowing stars are alive” translated in Korean and revealed that there were few mistakes in these prior studies from a bibliographic point of view. Secondly, due to such bibliographic errors, I showed that Fujiwara’s “flowing stars are alive” research could be adversely affected. First, wrong information was repeated due to mistakes of preceding research also in recent research conducted. The second, “I crossed the 38th Parallel” was published in December 1949, and this original appeared in April of that year. There was only a time difference of 8 months between the translated document and the original. Considering the situation immediately after being released from Japan, you can see well that it was translated earlier. The attention to “publication time” like “publication date” is considered to be a crucial factor in studying the publishing culture and reading culture in Korea at that time. However, due to bibliographic mistakes in previous research, the importance of such research themes is not recognized.
한국어
본고에서는 우선 후지와라 데이의 『흐르는 별은 살아 있다(流れる星は生きている)』의 한국어 발췌번역본 『三十八度線』과 최초 완역본 『내가 넘은 三八線』 그리고 일본어 원본을 연구했던 선행연구자들이 서지학적 측면에서 적지 않은 오류를 보였다는 것을 밝혀냈다. 다음으로 이와 같은 서지학적 오류가 후지하라 데이의 『흐르는 별은 살아 있다』 연구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예시했다. 첫째, 선행연구의 오류로 생긴 잘못된 정보가 최근에 발표된 글에도 부정적으로 재생산 되고 있다. 예컨대 이경재는 2015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내가 넘은 三八線』은 1950년에 출간됐다는 틀린 정보를 적고 있다. 둘째, 『내가 넘은 三八線』은 1949년 12월에 출간됐고, 이것의 일본어 원본은 그해 4월에 나왔다. 번역본과 원본 사이에는 8개월 정도의 시간차 밖에 없다. 해방 직후라는 당시의 상황을 고려할 때, 후지와라의 작품이 대단히 빠르게 번역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번역서의 출간시기 곧 ‘출판연월’에 대한 주목은 ‘해방공간의 우리 출판문화 및 독서문화’라는 주제를 연구하는 데 결정적인 단초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선행연구의 서지학적 오류로 이와 같은 연구테마의 중요성이 전혀 인식되지 못하고 있다.
목차
1. 들어가며
2. 발췌번역본에 대한 오류
3. 번역자수에 대한 오류
4. 완역본 출간연월에 대한 오류
5. 원본 출간연월에 대한 오류
6. 마치며
參考文獻
要旨
키워드
후지와라 데이 원본 번역본 역자 흐르는 별은 살아 있다 Hujiwara Tei original translation translator Flowing stars are alive
저자
박상현 [ Park Sanghyun | 경희사이버대학교 일본학과 교수 ] 주저자
미네자키 토모코 [ Minezaki, Tomoko | 홍익대학교 교양외국어학부 조교수 ] 교신저자
참고문헌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1김영희(2015)『한국전쟁과 미디어』커뮤니케이션북스, p.38
2'배반'으로서의 국가 혹은 '난민'으로서의 인민 : 해방기 귀환의 지정학과 귀환자의 정치성
네이버 원문 이동
3포스트콜로니얼의 어떤 복잡한 월경적 연애에 관하여
네이버 원문 이동
4종단한 자, 횡단한 텍스트 : 후지와라 데이의 인양서사, 그 생산과 수용의 정신지(精神誌)
네이버 원문 이동
5양평(1985)『베스트셀러 이야기』우석, p.53
6윤상인, 김근성, 강우원용, 이한정(2008)『일본문학번역 60년 현황과 분석: 1945~2005』소명출판, p.351
7problem of The Remaining Japanese's repatriation in the Liberation of Korean(1945-1948)
네이버 원문 이동
8최준호(2012)「日本人植民者の「引揚体験記:「反復」と「連続」の流れ」『일어일문학』제54집, 대한일어일문학회, p.363
9후지와라 테이 저, 진명인 역(1949)『三十八度線』『민성』제5권 제8호, 고려문화사, pp.64-67
10후지와라 데이 저, 정광현 역(1950)『내가 넘은 三八線』수도문화사, p.246
11경향신문(1949.11.30)
12동아일보(1949.12.19)
13자유신문(1950.4.8)
14서영아(2007)「1945년 한국, 귀국길 오른 한 일본인 가족이야기」,http://news.donga.com/View?gid=8412338&date=20070228(검색일: 2018.2.13)
15정종현(2015)「38선이 만든 한 권의 베스트셀러」,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691346.html(검색일: 2018.2.13)http://iseopi.iptime.org/cgi-bin/calsum.cgi?year=1949(검색일: 2018.2.13)
16藤原てい(1949)『流れる星は生きている』日比谷出版社、p.8
17藤原貞(1949)『塔』羽田書房、pp.89-96
발행기관
발행기관명한국일본근대학회 [The Japanese Modern Association of Korea]
설립연도1999
분야인문학>일본어와문학
소개본 학회는 한국, 일본의 문학 및, 어학, 문화, 사상, 역사 등 여러 분야의 연구자 및 대학원생의 연구성과에 관한 자유로운 발표, 토론을 통해 학문발전과 학술교류를 행하고자하는 목적에서 설립되었다. 따라서 본 회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학술연구발표회 및 연구회와 학술지 발간, 국내외 관련 학계와의 학술교류, 관련정보의 구축 및 제공 등의 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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