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1-27

일본 영화 [북의 영년(北の零年, Year One in the No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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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속 영화는 2005년 개봉한 유키사다 이사오 감독의 일본 영화 **북의 영년(北の零年, Year One in the North)**입니다. 요시나가 사유리, 와타나베 켄 등 일본의 국민 배우들이 출연하여 홋카이도 개척기의 처절한 사투를 그려낸 대하 서사극입니다.

이 영화의 역사적 배경, 줄거리, 그리고 평론을 정리해 드립니다.


1. 역사적 배경: 메이지 유신과 아와지 섬의 비극

영화의 배경은 1870년대 초반, 일본 메이지 유신 직후의 혼란기입니다. 당시 도쿠가와 막부 체제가 무너지면서 막부에 충성했던 각 번(藩)들은 존폐 위기에 처합니다.

  • 이나다 소동(庚午事変): 영화의 직접적인 모티프가 된 사건입니다. 아와지 섬의 이나다 가문 가신들이 본가인 도쿠시마 번으로부터 독립하려다 무력 충돌이 발생했고, 메이지 정부는 이들에게 홋카이도의 미개척지인 시즈나이(静内)로의 이주 및 개척 명령을 내립니다.

  • 영년(零年, Year Zero): 제목의 '영년'은 모든 것이 사라진 상태에서 다시 시작하는 '0년'을 의미합니다. 화려한 무사 계급에서 하루아침에 동토의 땅으로 쫓겨난 이들에게 홋카이도는 생존을 위한 제로 포인트였습니다.

2. 줄거리: 동토의 대지 위에 피어난 인내

1871년, 이나다 가문의 가신 코마쓰하라 히데아키(와타나베 켄)와 그의 아내 시노(요시나가 사유리)를 포함한 500여 명의 이주민이 홋카이도 시즈나이에 도착한다.

겨울의 홋카이도는 가혹하다. 맹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사람들은 쓰러져 가고, 히데아키는 개척에 필요한 자재와 식량을 구하기 위해 삿포로로 떠나지만 소식이 끊긴다. 홀로 남겨진 시노는 딸 사에와 함께 남편을 기다리며 척박한 땅을 일군다. 몇 년 후, 서구 문물을 받아들인 모습으로 나타난 히데아키는 정부의 가신이 되어 돌아오고, 변화한 시대 속에서 부부는 신념의 차이로 갈등한다. 시노는 남편이 사라진 뒤에도 묵묵히 땅을 지키며, 미국인 에드윈 던으로부터 목축 기술을 배우는 등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아 나간다.

3. 심층 평론: 자연과 인간, 그리고 여성의 생명력

북의 영년은 단순한 역사물을 넘어, 거대한 자연 앞에 선 인간의 미약함과 이를 극복하는 강인한 생명력을 시각적으로 압도한다.

  • 비장미 넘치는 연출: 유키사다 이사오 감독은 홋카이도의 광활한 설원과 바다를 배경으로 민초들의 고난을 애잔하고도 비장하게 그려냈다. 화려한 액션보다는 노동의 고통과 인내를 묘사하는 데 집중하며 대하 서사극의 묵직함을 유지한다.

  • 여성 중심의 서사: 영화는 가문의 명예를 중시하는 남성 무사들의 몰락과 대조적으로, 땅에 뿌리 내리고 생존을 도모하는 여성 '시노'의 시선을 따라간다. 이는 봉건적 가치관이 붕괴되는 지점에서 여성이 보여주는 유연하고 강인한 적응력을 상징한다.

  • 문명과 야만: 정착민들이 아이누족(홋카이도 원주민)과 교류하며 생존법을 배우는 과정은, '개척'이라는 이름 아래 자행된 근대화의 폭력성과 그 속에서도 피어난 인간애를 동시에 성찰하게 한다.


북의 영년에 출연한 배우들의 다른 작품이나, 비슷한 시대를 다룬 또 다른 영화가 궁금하시다면 말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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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
영화 <북의 영년(北の零年) / Year One in the North>(2005)는 메이지 유신 전후의 격동기, “유배에 가까운 이주”를 강요받은 한 가족의 시간을 따라갑니다. 시노(요시나가 사유리)와 남편 히데아키(와타나베 켄)는 국가 정책에 의해 일본 최북단의 홋카이도 변방으로 보내지고, 낯선 기후와 토양 속에서 정착촌을 일구려 합니다. 그러나 작물은 제대로 자라지 않고, 생존의 기반이 흔들리자 히데아키는 새로운 농법과 기술을 배우겠다며 홋카이도를 떠납니다. 시노와 딸은 “곧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붙잡고 혹독한 겨울과 가난 속에서 기다리지만, 세월은 흘러도 남편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시간이 더 흐른 뒤, 미국인 고문관들이 들어오고(영화는 근대화의 바람을 이렇게 시각화합니다), 시노는 농장을 사실상 혼자 운영하며 생존을 확장합니다. 이 과정에서 아이누 남성 아시리카(토요카와 에츠시)와 협력 관계가 생기고,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점차 사랑의 감정으로까지 나아갑니다.
그런데 정부가 농사에 핵심인 말(馬)을 “처분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공동체는 다시 벼랑 끝에 섭니다. 말을 지키려는 시노와 아시리카의 분투 앞에, 말 처분을 집행할 인물로 나타난 사람이 다름 아닌 히데아키입니다. 그는 이미 다른 여성과 새 삶을 꾸리고 있습니다. 시노는 말과 땅을 되찾기 위해 끝까지 맞서고, 결국 ‘다시 결혼하여 안전한 삶’보다 ‘내가 선택한 황야의 삶’을 택한 채 홀로 남는 결말로 나아갑니다.

<2) 평론(감상·비평)>
이 영화는 한마디로 “개인의 사랑과 상실을, 국가 프로젝트의 거대한 배경 위에 얹은 멜로드라마”입니다. 장점은 분명합니다. 첫째, 시노라는 인물을 단순한 ‘개척자의 아내’가 아니라, 공동체의 생존을 실제로 떠받치고 결정을 내리는 행위자로 그립니다. 남편이 부재한 시간 동안 시노가 체득하는 기술·관계·인내가 영화의 정서적 기둥입니다.
둘째, 홋카이도 설원과 황무지의 풍경을 “아름다움”과 “폭력성(혹독함)”으로 동시에 제시하며, 자연이 단지 배경이 아니라 인간의 선택을 재구성하는 힘으로 기능합니다(장대한 시대극의 미덕).

하지만 약점도 있습니다. 서사의 핵심 갈등이 “개인의 고통”에 집중되면서, 이주 정책이 가진 구조적 폭력(누가 왜 밀려났는가, 국가가 어떤 방식으로 사람을 ‘도구화’했는가)이 충분히 파고들어가지 못합니다. 또 아시리카(아이누)가 중요한 인물임에도, 이야기의 축이 끝내 시노의 내면과 로맨스에 맞춰져 있어 아이누의 역사적 처지와 시각이 ‘깊은 주체’로 확장되기보다는 ‘정착 서사의 촉매’로 머무를 위험이 있습니다. 즉, 영화가 의도했든 아니든 “개척의 낭만화”로 읽힐 여지가 생깁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던지는 질문은 선명합니다. “국가가 만든 삶의 경로에서, 개인은 어디까지 자기 삶을 되찾을 수 있는가?” 시노는 남편에게 버림받은 피해자로만 남지 않고, 국가의 명령(말 처분)에도 굴복하지 않으며, 결국 ‘사람’이 아니라 ‘땅과 삶의 방식’에 대한 선택으로 자신의 시간을 확정합니다. 이 결말은 통속적 승리라기보다, ‘상처를 안고도 주체로 남는 방식’에 가깝습니다.

<3) 역사적 배경(핵심만)>
영화의 무대인 19세기 후반은 메이지 정부가 에조(훗날 홋카이도)를 본격적으로 ‘편입·개발’하던 시기입니다. 홋카이도 개발을 맡은 정부기구 <개척사(Kaitakushi, 홋카이도 개발위원회)>는 1869년에 설치되어 1882년까지 운영되었고, 정착민을 장려하며 서구식 농업·산업 기술을 도입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외국인 고문관(미국인 포함)들이 다수 고용되었고, 호러스 캐프런 같은 인물이 실제로 개발 정책 자문에 참여했습니다.
또한 홋카이도는 원래 아이누가 주로 거주하던 땅이었는데, 근대 국가의 편입·식민화 과정에서 토지 상실과 동화 압력이 크게 진행됐다는 점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맥락입니다.

영화가 그리는 ‘이주민 집단’의 한 모델은, 메이지 초기에 정치적·지역적 갈등 속에서 몰락한 집단이 변방으로 옮겨지는 역사적 사례들과도 연결됩니다(예: 아와지와 관련된 이나다 가문의 북방 이주/유배 서사가 문헌에 언급됩니다).
따라서 <북의 영년>은 한 가족의 멜로드라마이면서 동시에 “근대 일본의 북방 개척=국가 형성 프로젝트”가 개인의 몸과 감정 위에서 어떤 방식으로 작동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English (shorter companion, ~350–450 words)>

<Plot> <Year One in the North> (2005) is set in the turbulent years around the Meiji Restoration, when state policy pushed certain communities to relocate to Japan’s northern frontier, Hokkaido. Shino and her husband Hideaki are sent north and try to build a new life in harsh conditions where crops fail and survival is uncertain. Hideaki leaves Hokkaido to learn new farming methods, promising to return, but Shino and her daughter wait for years without news. :contentReference[oaicite:9]{index=9} Later, as American advisors arrive, Shino is effectively running the farm herself, aided by an Ainu man, Ashirika. Their partnership gradually deepens into love. When the government orders the disposal of the horses crucial to farming, the official assigned to enforce the policy turns out to be Hideaki—now remarried. With Ashirika’s help, Shino fights to recover the horses and ultimately chooses to remain in the land she has come to love, even if that means living alone. :contentReference[oaicite:10]{index=10} <Critical commentary> The film blends epic landscape cinema with melodrama: intimate loss, loyalty, and reinvention are staged against a monumental “nation-building” backdrop. Its strength is Shino’s agency—she is not merely abandoned; she becomes a decision-maker who sustains a community and defines her own future. :contentReference[oaicite:11]{index=11} A limitation is that the story can tilt toward romanticizing frontier settlement. Ashirika is central, yet the narrative remains anchored in Shino’s emotional journey, which can leave Indigenous perspective underdeveloped. <Historical background> In 1869 the Meiji state created the Kaitakushi (Hokkaido Development Commission), which administered and promoted settlement and economic development until 1882, hiring many foreign advisors (including Americans such as Horace Capron) and importing new techniques. :contentReference[oaicite:12]{index=12} Hokkaido’s incorporation and colonization also meant profound disruption for the Ainu, including land dispossession and forced assimilation pressures—an essential context when interpreting the film’s frontier narrative. :contentReference[oaicite:13]{index=13} ::contentReference[oaicite:14]{index=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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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の零年



북의 영년

출처 : 무료 백과 사전 "Wikipedia (Wikipedia)"
북의 영년
YEAR ONE IN THE NORTH
감독행정훈
각본나스 마치코
제작 총 지휘오카다 유스케
사카모토 신이치
출연자요시나가 코유리 토요
카와 에지 야나기
하 토시로 이시하라 사토미
후키코시 
데지마 진 히라 타 츠루타 마유 이시바시 렌지 이시다 유리코 가가 와 테루유키 와타나베 켄






음악오시마 미틸
촬영기타신야스
편집이마이 고
제작회사도에이 도쿄 촬영소
제작회사「북의 영년」제작위원회
배급도에이
공개2005년 1월 15일
상영시간168분
제작국일본의 국기 일본
언어일본어
흥행 소득27억 3000만엔 [ 1 ]
템플릿 보기

북의 영년』(키타노제로넨)은, 2004년 제작, 2005년 공개의 일본 영화 [ 2 ] . 주연은 요시나가 코유리 .

메이지 3년 5월 13일 (1870년 6월 11일)에 일어난 망오 사변 에 얽힌 처분에 의해, 메이지 정부에 의해 도쿠시마 번 · 아와지시마 에서 홋카이도 시즈 우치 로 이주를 명령받은 이나다가와 가신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 3 [ 4 ] .

줄거리

메이지 4년(1871년) [ 5 ] , 고마쓰바라 ​​시노는 이나다가의 가신 일동과 함께 선견대로서 시즈우치에 있는 남편 히데아키에게 향했다. 그 수는 546명 [ 6 ] . 시즈우치의 땅을 개척하면 이나다가의 영지가 된다는 정부의 말을 믿고 일동은 모두 희망으로 가득했다. 어려운 겨울에 시달리는 일동으로 구원의 손을 찾은 것은 아이누 의 모노쿠테와 아시리카였다.

제2편의 배는 기슈해안에서 조난해 83명이 사망(생존자가 있었는지 여부는 언급되지 않음). 첫 겨울을 넘어, 제3편으로서 드디어 이나다가 당주 (전)가 도착하지만, 폐번 치현(메이지 4년 7월 14일 ( 1871년 8월 29일 ))에 의해 이주 명령이 반고가 된 것만을 말해, 그대로 귀국해 버린다. 버려진 일동은, 그래도 영명의 곁 아래 개척에 꿈을 맡기지만, 작물은 좀처럼 뿌리 내리지 않는다.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삿포로 로 향한 히데아키는 소식을 끊어 버려 남겨진 일동에게도 가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캐스트

직원

제작

기획

본작의 제작은 홋카이도 삿포로역 의 역 빌딩 재개발 사업 JR 타워 스텔라 플레이스 내의 시네마 컴플렉스 (이하, 시네콘)· 삿포로 시네마 프론티어 의 2003년 2월 개업과 관련되어 있다 [ 7 [ 8 [ 9 [ 10 [ 11 [ 12 ]

1999년 제10회 유바리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 의 기간중, JR홋카이도 당시의 사장· 사카모토 마이이치 가, 토에이 상무· 오카다 유스케 ( 2002 년 6월 토에이 사장 ) 에 “ 봉봉 작품을 모두 가지런히 하는 영화관을 만들고 싶다 . 그것은 외자계 시네콘 14 ] . 당시 건설 준비중인 삿포로 역 JR 타워에 외자계 시네콘 AMC 극장 [ 12 [ 15 ] , UCI [ 12 ] , 버진 시네마 [ 12 ] 에서 진출의 타진이 사카모토에 있었기 때문에 [ 12 [ 15 ] 사카모토로부터 「일본의 기업 일사에 받아 받는 것은 걱정이다」라고 말해졌기 때문에, 오카다는 「일본에서도 괜찮습니다.내가 실현 가능하도록 노력을 하기 때문에 시간을 주세요」라고 전했다 [ 12 [ 13 [ 14 ] . 당시는 시네콘은 아직 여명기로 [ 14 [ 16 [ 17 [ 18 ] , 마츠타케 , 도호 도 시네콘을 개업해 곧 [ 16 [ 18 ] , 도에이는 아직 시네콘을 개업하고 있지 않았다 [ 18 ] . 1993년 워너 마이칼 시네마 새우 이름(현 이온 시네마 새우 이름 ) 개업 이후 [ 14 , AMC가 남쪽의 거점이라고도 할 후쿠오카현 후쿠오카시 의 캐널 시티 하카타 에 첫 도시형 시네콘· AMC 캐널 시티 13 을 개업 했을 때는 일본의 흥행회사 는 . 삿포로의 경우는 그때까지 역 앞의 시네콘이 아니라, 역 빌딩의 시네콘, 한층 더 눈이 많다고 하는 토지 무늬, 철도 이용자에게 있어서는 비에도 눈에도 젖지 않고 극장에 갈 수 있다고 하는 시네콘으로서는 획기적인 입지로 [ 13 [ 19 ] 오카다 시게루 토에이 회장은 “그런 곳(북쪽 거점)에 AMC에 나오면 일본 영화사는 끝이다”라고 큰 위기감을 안고 [ 15 ] , 토에이 가 마츠타케, 토호에게 이야기를 들고 13 ] , 삼사의 톱 회담이 여러 번 진행되고 [ 12 ] , 처음으로 일본화 3사에 의한 공동 경영의 극장 건설이 협의되었다 [ 12 [ 13 [ 14 [ 19 ] . 그러나 삼사는 각각 삿포로에 직영관을 갖고, 원래 라이벌로서 시노기를 깎아 온 역사가 있어 [ 14 [ 19 ] , 함께 극장을 경영합시다는 제안은 순조롭게 정리되지 않았다 [ 14 ] .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최종적으로는 외자계의 진출은 어쨌든 멈추어야 한다고 3사의 톱이 손을 잡고 [ 15 ][ 19 ] , 일본 영화 사상·흥행사로 처음으로,대형 영화사3사가 공동 경영하는 시네콘으로서 [ 19 ] , 삿포로 시네마 프론티어가 개업했다 [ 12 [ 14 [ 15 [ 19 ] . 삿포로 시네마 프론티어의 개업으로 그동안 약 100만명이었던 삿포로의 영화 인구가 약 2배로 증가했다고 한다 [ 12 ] .요코하마 부르크 13도 이때 동시에 논의된 것이 일단 좌석하고, 삿포로의 성공으로 나중에 부활한 것이다 [ 20 [ 21 ] . 이 절충 단계에서, 열렬한사유리스트인 사카모토 JR 홋카이도 사장이 [ 22 ] , 오카다 유스케에게 “삿포로 시네마 프론티어의 오픈 이벤트에 요시나가 코유리씨에게 와 주실 수 있을까요”라고 부탁했지만 [ 22 ]  대여배우를 이벤트의 게스트로 무언가 끌어당겼다 . "그렇다면 요시나가 씨 주연으로 홋카이도를 무대로 한 영화는 할 수 없습니까. 주요 은행이 무너지는 등 어두운 분위기의 홋카이도를 건강하게하는 것 그것은 홋카이도 재계  의 사명 이기도 합니다 . " 사카모토와 간의유바리시장·나카타 테츠지에서 유바리를 무대로 받을 수 없는가 하는 일도 있어 [ 7 [ 9 ] , 실현한 것이 본작이 된다 [ 22 ] . 유바리가 무대가 된 이유는, 유바리 영화제(유바리 국제 환상 영화제)가 개시되기 이전부터, 오카다 시게루 토에이 사장(당시)과, 홋카이도 담당 중역이었던 쿠사나기 수평 도에이 전무(당시)가 유바리시를 응원해 온역사가있어 [ 12 ] , 19 12 ] , 나카타 시장이특별 출연하고 있는 것도 본작도, 토에이와 유바리시의 긴 교제로부터 태어난 것이었다 [ 12 ] . 타이틀 명명은 오카다 유스케 [ 23 [ 24 ] .

각본

이나다가의 가신에 의한 홋카이도 개척의 이야기는 후나야마 루 의 『등세』에 기술이 있고 [ 9 ] , 오카다 유스케가 1980년대 전반에 영화화하려고 한 적이 있었지만 [ 7 [ 9 ] , 제작비도 높아질 것 같아 그대로 하고 있었다 [ 23 ] . 다른 소재도 찾았지만, 요시나가가 '등세', '이시카리 평야' 등의 후나야마 작품의 팬으로 [ 25 [ 26 ] , 이전부터 홋카이도를 개척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영화화하고 싶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는 오카다는 [ 25 [ 26 [ 27 ] , 이 기획이라면 요시나가를 주연으로 구설 끊어질지도 모르고, 개척 시대의 이야기는 비참한 것이 많지만, 지금의 홋카이도의 재생의 기반이 되는 영화라면 홋카이도의 재계로부터 협력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 우선 사카모토에 타진해 양해를 얻었다 [ 23 ] .

덧붙여 본작은 각본을 담당한 나스 마치코 의 오리지널 작품이지만 [ 25 ] , 상기와 같이 후나야마 루의 홋카이도 개척을 모티브로 한 2작품(『오토세』, 『이시카리 평야』)을 참고로 하고 있으며 , 본편  크레딧에서도 참고문헌으로서 소개되고 있다.

감독 선정 및 캐스팅

1996년의 ' 기리노 자오선 '에서 요시나가가 나스 마치코의 깔끔한 성격과 마음이 맞고 있었기 때문에 [ 4 ] , 오카다가 나스에게 각본 을 부탁하고 2003년 새해 에 각본의 첫 글이 생겨 요시나가에게 읽어 달라고 요시나가  출연 . 요시나가가 「감독은 누구입니까」라고 들었기 때문에, 「누군가 의향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요시나가는 「최근의 영화를 보고, 행정훈 씨는 어떻습니까.젊은과 한 번 해보고 싶다」라고 말했다 [ 9 [ 29 ] .

행정은 아직 『세계의 중심으로, 사랑을 피하다』 촬영전에 [ 29 ] , 요시나가는 행정의 『GO』나 『로큰롤 미싱』에 감탄하고 [ 29 ] , 「신인 여배우가 된 기분으로, 「GO」의 히로인 · 시바사키 코우 씨  된 생각으로 9 하고 싶다  . 거기서 오카다가 행정에 맡겨달라고 부탁하면, 행정은 "내가 요시나가씨를 정말로 찍게 해 줄 수 있습니까. 정말로 지명입니까. 내가 거절할 이유가 없잖아요"라고 승낙했다 [ 9 ] . 행정은 감독 승진 후, 차례차례 화제작을 다루고, 일출의 기세였지만 [ 30 ] , 당시의 일본 영화의 상황에서, 30대 전반의 감독이 제작비 15억엔의 대작을 감독하는 것은 드문 경우였다 [ 31 ] . 행정은 "마침내 몇 년 전까지 이런 대작을 젊을 때 찍을 수 있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 31 ] .

행정은 프롤레타리아의 비애와 같은 러시아 영화의 이미지로 광대한 원야를 여는 여자들의 메이지 시대를 그리려 하고 그러한 영화를 다시 감상한다 [ 32 ] . 광대한 대지를 개척하는 이미지를 부풀렸다 [ 31 ] .

요시나가는 1980년에 다카쿠라 켄 과 공동 출연한 ' 동란 '으로 홋카이도의 매력에 매료되어 '동란'과 마찬가지로 홋카이도에서의 장기에 걸친 촬영에 의욕을 보였다 [ 33 ] . 행정은 오카다로부터 보내진 각본의 초고를 읽은 후,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 에 회의에 가자 오카다와 함께 요시나가가 동석하고 있었던 것에 놀랐다 [ 32 ] . 그녀로부터 『록큰롤 재봉틀』을 본 것으로 자연을 아군으로 할 수 없으면 이 영화는 만들 수 없기 때문에 당신이라면 아군에게 할 수 있다고 말한 것으로 지명을 재차 쾌락했다 [ 32 ] . 요시나가 주연과 행정 감독, 나스 각본이 정해진 만큼의 단계에서, 사카모토가 기쁨의 너무, 삿포로 시네마 프론티어의 그랜드 오픈 전날의 2003년 3월 5일, 이곳에서 사카모토와 요시나가, 나카타 유바리 시장 등 소수의 출석에 의한 기획 발표 회견 을 실시 했다 [ 4 ] 사카모토는 “홋카이도 전체에서 만드는 마음으로 개인 , 법인 을 포함하여 찬동자를 모집하고, 물심 양면에서 협력하고 싶다”고 말했다 [ 34 ] , 나카타 유바리 시장은 "1991년 제2회 유바리 국제영화제 에 게스트로 요시나가 씨를 초대하려고 하면 거절당했어요. 13년이 지나 이번엔 로케라는 형태로 와 주실 수 있게 되어 꿈같다"고 말했다 [ 34 ] . 요시나가는 「후나야마 馨 씨가 쓰여진 『등세』나 『이시카리 평야』 같은 홋카이도의 대지에 확실히 발을 붙여 사는 여성을 언젠가 연기하고 싶었다. 이번에는 복근을 사용 라는 체력 승부. 젊고 재능있는 행정 감독과의 첫 일에 두근두근하고 있습니다 . 25 ] . 또, 행정에서는 「일본사의 수업에서는 배우지 않는 홋카이도의 알려지지 않은 역사가 있다. 그 역사 속에서 위대한 여배우, 요시나가 코유리씨와 함께 지금의 일본인이 잊고 있는 진실을 찾아내고 싶다. 현대인의 마음에 남는 영화를 목표로 하고 싶다」라고 하는 메시지 가 전해졌다 [ 25 이 때의 발표에서는 2003년 가을에 촬영을 시작할 예정이라고 발표했지만 [ 25 [ 34 ] 출연자의 스케줄 조정, 로케셋의 건설 등이 대규모로 준비에 난항해 촬영은 2004년 2월부터 되었다. 사카모토의 호소로, 호리타츠야 홋카이도 지사 를 대표 간사로 하는 요시나가의 111번째의 출연 영화에 따른, 도내 경제계, 행정 , ​​각종 단체 톱에 의한 전대 미문의 111명의 「영화 「북의 영년」을 응원하는 모임」이 결성되었다 [ 10 ] . 이 기획 발표에 대해서 2년 후에 오카다는 “그 때는 차갑게 식혔어. 실은 아직, “북의 영년”의 제작 발표를 정식으로 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고. 제작비의 조달의 목표가 완전에 대해서는 없고, 행정 감독은 각본이 완성 전에 다른 작품의 촬영에 들어가 버렸다. 단지 JR 홋카이도의 사카모토 사장으로부터 『나카타 시장의 건강이 걱정이다 . 35 ] .

정식 제작 발표 회견은 일년 후인 2004년 2월 9일에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 에서 행해졌다 [ 7 [ 12 ] . 오카다는 회견에서 “20년 전부터 이 영화의 구상을 따내고 있었다 . 다만, 스케일의 큰 이야기이기 때문에, 제작비가 다액이고, 로케도 힘들었기 때문에 실현까지 시간이 걸렸다 . 요시나가는 「나에게 있어서, 아마 마지막 큰 작품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 12 ] .

또 와타나베 켄 은 오퍼를 내기 전에 와타나베 쪽으로부터 『라스트 사무라이』 촬영중에 「요시나가씨가 한다면, 무엇이든 참가시켜 줘. 통행인 이라도 좋으니까 내게 해줘」라고 오카다에게 전화가 있었다 [ 9 ] . 와타나베는 아직 큰 명성을 얻기 전이었다 [ 9 ] .

미술

홋카이도의 개척을 극영화에서 주제로 다룬 것은 전례가 없고 [ 31 ] , 시대 고증 도 했지만 사실은 모르는 경우도 많아, 행정은 “이 영화는 입구는 논픽션 이지만 출구는 픽션 . 그 출구는 현대에도 연결되어 있는 부분이 있다는 방향성 으로 작품 을 구축했다 .

스탭, 캐스트의 편성은 2003년 3월 이후 [ 36 ] . 2003년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서는 ​​로케한이 반복되었다 [ 36 ] . 로케의 거점을 나카타 유바리 시장이나 고토 켄지 로부터 유바리를 무대로 받을 수 있을까 하고 요망도 있어 [ 9 ] , 본래의 무대는 히다카 지방 이지만 [ 23 ] , 로케의 거점을 유바리에 두는 것은 문제 없기 때문에, 메인의 오픈 세트는 2003년 11월부터 [ 3 ] , 유바리시 가시마의 2 헥타르 의 광대한 토지에 본 건축으로 저택이나 역 체 , 회소 , 신사 , 불의 망설임 , 개척 이민 오두막 등의 오픈 세트를 건설했다 [ 9 [ 37 [ 38 [ 39 ] . 시가지 가 메이지 4년 , 메이지 5년 , 메이지 10년 과 3단계의 진화를 이룬다는 정교한 세트로 [ 37 [ 39 ] , 당시의 일본 영화가 아니라고 말할 정도의 본격적인 로케셋이었다 [ 9 ] .

요시나가는 농작업 은 첫 체험이었기 때문에, 토에이 도쿄 촬영소 (이하, 도에이 도쿄) 근처의 농가 에서 농작업을 도와 경험을 쌓았다 [ 27 ] . 또 백년 이상 전의 시대를 살았던 여성·시노를 자신 속에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촬영 전인 2003년 11월에 실제로 이나다가 이주단이 상륙한 지점에서, 전의 저택을 만든 지점까지 돌아다녔다 [ 27 ] .

촬영

촬영은 최초 「세계의 중심으로, 사랑을 떠난다」에서의 행정훈 과의 콤비· 시노다 승 이었다 [ 30 ] . 『세계의 중심에서 사랑을 헤매다』의 촬영과 병행하여 본작의 2003년의 로케한 이나 협의에도 건강하게 참가하고 있었다 [ 36 ] . 이민선의 상륙 장면이 촬영된 구시로 시 오토베쓰 마치 나오베츠 해안은 시노다가 로케한에서 찾아낸 특히 추억이 강한 장소였다 [ 36 ] . 2004년 새벽의 메인 스태프 협의 후 [ 37 ] , 컨디션을 나쁘게 하강 하차의 신청이 있어 [ 30 ] , 시노다로부터의 추천으로 키타신야스 로 교체했다 [ 37 ] (시노다는 같은 해 6월에 사망). 북과 행정 감독은, 1995년 의 이와이 슌지 감독 『Love Letter』에서, 조감독 과 치프의 촬영 조수와의 관계로 2개월을 함께 한 사이로 30 ] , 모리타 요시미츠 구에서 도에이로부터  신뢰가 있어 [ 37 ] , 급히 발탁되었다 . 도에이의 대작으로서는 꽤 젊은 스탭이 편성되었다 [ 37 ] .

행정 감독과 배우의 첫 협의에서 행정이 "1 장면, 통과하겠습니다"라고 말했기 때문에, 요시나가는 " 원 장면, 원컷 을 다용하는구나"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 27 ] . 행정의 연출법은, 한 장면, 원컷 을 당기는 샷, 가까운 샷 , 반대 각도로부터, 다른 사람의 업과 대략 5패턴 정도 찍는 방법이었다 [ 26 [ 30 [ 31 [ 40 ] . NG 도 나오기 때문에 하루에 같은 장면을 30회나 50회나 찍을 수 있다. 어디를 사용할지 모르기 때문에 배우는 언제나 연극의 전압을 낮출 수 없었다 [ 40 ] . 또 한 사람이 NG를 내면 모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배우는 집중력의 지속이 어려운 [ 40 ] . 요시나가는 이 연출법을 곧바로 이해할 수 없고, 처음 「무엇이 나빴던 것일까요?」라고 행정에 항의했다 [ 31 ] . 와타나베 켄은 『라스트 사무라이』도 같은 찍는 방법으로, 첫날에 열이 나왔다고 말하고 있었다고 한다 [ 40 ] . 일본 영화는 보통은 사전에 잘라내어 두고, 1장면의 2행째까지의 대사를 들고서 찍으면, 다음은 당기는 것처럼 찍어, 딱딱한  을 나중에 편집해, 하나의 장면에 짜낸다 [ 27 ] . 낮에도 영하5, 6도라는 기후조건이나 [ 26 ] , 주위는 사슴 과  밖에 없는 자연조건 가운데, 배우는 언제 끝나는지 모르는 촬영 연속으로 육체도 정신도 힘든 것이 요구되었다 [ 27 ] . 크랭크인 직후에는 실종된 남편을 찾기 위해 어린아이를 짊어지고 눈보라 속을 걷는 장면을 촬영했다 [ 26 ] . 요시나가는 이 장면을 “중반의 큰 야마장. 관객의 가슴에 다가오는 장면으로 하고 싶었다”고 자리매김하고, 동상각오로 여러 번 테이크를 거듭하는 감독의 끈기에 응했다 [ 26 ] . 또한, 와타나베 켄의 조언으로, 짚 신발 속에 밟아가는 뜨개질 레슬링 신발을 신고 임했다 [ 26 ] . 하지만 과연 아역 은 상당히 구즈였다 [ 27 ] .

이 때문에 통상 작품의 5배 이상의 38만피트(북신강담) [ 30 ] , 40만피트 이상의 필름을 돌려 [ 9 [ 40 ] , 오카다 유스케와 비비었다 [ 9 ] . 요시나가는 「우라시마 타로가 된 기분이었다. 지금까지의 촬영의 5배에서 10배 지쳤다. 필름의 사용은 전후의 일본 영화 최고 기록이 아닌가, 아마 앞으로도 찢어질 것도 없겠지요」[ 40 ] , 키타 노부야스도 「이 숫자는 몇년인가 갱신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등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 30 ] .

유바리는 예년보다 적설량이 많고, 겨울의 로케는 스탭, 캐스트 모두 추위에 시달렸다 [ 27 [ 39 ] . 하지만 감독의 행정은 '가난함과 추위를 견디는 개척자의 분위기가 나오지 않는다'며 맑은 날씨가 엿볼 수 있는 온화한 날씨 때에는 로케를 중지하고 굳이 기후조건이 어려울 때를 골라 로케를 감행했다 [ 26 ] . "자연이 가지는 힘에는 이르지 않는다. 그 공기감을 필름에 굽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내 강하게 기다린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 26 ] . 눈이 지나치게 쌓여 말이 걸을 수 없게 되어, 갑자기 200장의 고 다다미 를 깔아야 할 필요에 육박해, 행정 감독 스스로 솔선해, 유바리 시민과 함께 다다미를 옮긴 적도 있었다 [ 39 ] . 특히 가혹했던 것이 슈파로 호수 를 사용한 마궁전장( 야나기요 토시로 )·카시로( 이시다 유리코 ) 부부의 아들·유노스케( 대고력야 ) 의 장례 장면으로, 주위에는 차폐물이 없는 분출 상태로 경험한 적이 없는 추위 였다고 한다 . 유바리 시민 자원 봉사자 의 ‘밥솥반’이 따뜻한 음식을 준비하는 등 엄한 속에서 심야까지 계속되는 촬영을 극복했다 [ 39 ] .

촬영 기록

2004년 1월 5일, 토에이 도쿄에서 메인 스탭 협의 [ 37 ] . 스탭이 요시나가와 처음으로 일을 하는 자가 많기 때문에, 요시나가로부터 「눈의 홋카이도보다 우선 도쿄에서 크랭크인 하는 것이 좋지 않다」라고 하는 제안이 있어 [ 30 ] , 2004년 2월 17일, 토에이 도쿄의 세트로 크랭크인 [ 7 [ 30 ] . 아와지의 고마쓰바라가에서의 촬영은 1일 [ 37 ] , 2004년 2월 23일부터 유바리에서 홋카이도 로케 스타트 [ 35 ] , 2004년 2월 25일부터 홋카이도 로케가 1개월 [ 30 ] . 유바리시 가시마의 오픈 세트에서의 촬영에는 [ 9 ] , 캐스트, 스탭 맞추어 150명 이상이 참가했다. 로케 전반은 연일의 눈보라로 촬영에 난항. 그 후 도쿄에서의 세트 촬영으로 겨울~봄의 촬영은 종료 [ 30 ] . 홋카이도 세트의 실내는 조명이 어려워, 야외 로케가 메인이 되기 때문에, 토에이 도쿄에서의 실내 세트로 촬영했다 [ 36 ] . 가이민 오두막은 유바리 세트와의 로케매치를 위해 처음부터 2채분의 재료를 부탁해, 1채분을 도에이 도쿄에 건설했다. 창문과 목문 누케  현지 원생림 패널  사용했다 [ 36 ] . 도에이 도쿄에는 이민선 세트 등도 만들어졌다 [ 36 ] . 또 톱 씬의 아와지의 성대에 피어나는 "하나의 벚꽃 나무"아래에서 연기되는 인형 조루리 를 찍고 싶다는 행정의 오더로, 제작부가 일본중의 "하나의 벚꽃나무"를 찾아 걷고, 나가노현 수중의 지수 벚꽃 에 정해져, 지수 벚꽃아래에 노가케오야를 2 , 36 ] . 여기에서 와타나베 켄 참가 [ 36 ] . 2004년 5월 17일, 유바리 가시마 세트로부터 여름에 2개월의 홋카이도 로케를 실시 [ 30 [ 37 ] , 유바리 외, 실제로 이나다가 가 이주한 시즈 우치초 (6월), 홋카이도 대학 농학부 연구 목장의 주거, 마구간 등의 고마쓰바라 ​​목장의 오픈 세트 [ , 신관 초 료료 목장 에 에드윈·단의 목장 등으로 촬영했다 [ 36 ] . 요시나가는 승마 의 경험이 있어, 와세다대학 승마부에 반년 재적한 후에도 말을 타고, 「화의 난」에서도 승마 장면을 연기해, 「영무자」로 사용한 말, 마르카게를 받고 있다 그러나 이 말이 고령에 의해 목장에서 여생을 보내게 되고 나서는 수영에 흥미를 가졌기 때문에, 승마로부터 멀어져 있었기 때문에 막상 연습에 임하면 말이 움직여 주지 않았다 32 ] . 일찍이 요시나가의 팔을 알고 있는 승마를 가르치고 있던 코치는 행정의 지시에 그녀가 대응할 수 없다고 잡아주지 않았다 [ 32 ] . 연습에 의해 감을 되찾아간 화살, 코치가 급사, 그래도 그만둘 수 없고 촬영 실전을 맞이한 요시나가의 승마 모습은 행정에 의하면 등근이 핀과 서 아름답고 본격적이었다 [ 32 ] . 로케한의 가장 큰 목이었던 것이 개간지 였다 [ 36 ] . 원생림을 벌채 시켜 주는 장소는 간단하지 않고, 게다가 같은 장소에서 개간까지 하고 싶다고 하는 행정 감독의 오더에는 난항했지만, 우라카와초의 실제의 벌채 예정 현장이 빌려져 [ 30 [ 41 ] , JRA 가 소유하는 광대한 부지를 빌려  과논을 만들고 촬영 [ 36 [ 41 ] . 실제로 밭을 경작하고 씨앗 에서 잡초 잡기 등으로 작물을 키웠지만, 동물의 보고에서 까마귀 , 사슴, 여우 , 곰과 먹고 거칠어져, 유바리의 비닐하우스 에서 기른 작물을 촬영 직전에 옮겨 촬영했다 [ 36 ] . 3분의 2당 메뚜기 의 무리에 습격당하는 장면은, 무리 안에 히라타 미츠와 요시나가가 서도 메뚜기가 부딪치지 않기 때문에 CG 로 볼 수 있지만, 매우 박력이 있다. 바라보는 한 녹색을 먹고, 겨울 시체의 장면은 2004년 7월 28~30일에 촬영되었지만 [ 36 ] , 그때까지 유바리, 우라카와, 시내의 산을 매일 잔디를 버너 로 계속 구웠다 [ 36 ] . 이런 장면은 본편에는 없다. 메뚜기는 번식하기 때문에 실제로 들에 놓지 않기 때문에 거대한 모기장 속에 밭이나 논을 재현하고, 천천마리의 메뚜기를 쏘아 촬영했다 [ 36 ] . 메뚜기 요리는 스튜디오 안에 거대한 그물을 쳐 촬영 [ 36 ] . 이나다가의 홋카이도 첫걸음이 된 우라포로 마치 아츠코우치(2004년 7월) [ 41 ] , 이민선에서의 상륙 장면은 구시로시 오네 베츠초  오베츠 해안 [ 36 ] . 2004년 8월 1일, 배의 갑판 세트, 8월 4일, 8월 10일, 실경, 소품을 남기고 크랭크 업 [ 9 [ 30 ] . 엑스트라 는 7000명에 달했다 [ 39 [ 3 ] . 연 2000명의 유바리 시민도 출연하고 있다 [ 39 ] .

비고

첫 겨울에 마미야 전장( 야나기요 토시로 )·카시로( 이시다 유리코 ) 부부의 아들·유노스케( 다이코력야 )가 대량의 피를 토해 죽지만, 시대를 생각하면, 결핵이 예상되지만, 아무런 설명도 없고, 의사도 나타나지 않고, 의사가 있는 것인지 의지의 주위.

제작비

15억엔 [ 3 [ 9 ] . 전국의 아사히 방송 그룹이 처음으로 영화에서 공동 출자했다 [ 23 ] .

프로모션

오카다 유스케가 당시 힘을 쏟고 있었다 [ 42 [ 43 ] 디지털 전달에 의한 시사회 를 도쿄 회장에서 전국 13 개소에 전달했다 [ 40 ] .

홋카이도 상영관 중 하나였던 ‘삿포로 극장’이 입주하던 스가이디노스 삿포로 중앙( 2019년 6월 2일 폐관)에서는 당작의 비주얼을 그린 필기 그림 간판이 개봉 전후에 설치되어 있었다 [ 44 ] .

수상 경력

각주

  1. ^ 『키네마 순보 베스트 텐 85회 전사 1924-2011』(키네마 순보사, 2012년) 650페이지
  2. ↑ “ 북의 영년:작품 정보·캐스트·소시지 ”. 영화.com. 2025년 9월 17일 열람.
  3. c DVD 「북의 영년」발매 기념 이벤트를 데파야에서 개최
  4. b 타치바나 쥬키(2017년 7월 23일). “내 십본 요시나가 소유리(20) 북쪽 카나리아들[상] 원숙기 기획에서 참가” . 도쿄 신문 ( 주니치 신문 도쿄 본사 ): p .
  5.  「특보」에서는 실제의 암오사변과 같은 해 1970년 아와지 출발이 되고 있지만 그 후의 「예고편」에서는 1871년 발이 되고 있다(DVD수록 「예고편」보다)
  6. ^ DVD 예고편보다
  7. f “도에이, 요시나가 “북의 영년” 스타트 사운도 돈도 걸어와 오카다 유스케 사장” “영화 시보” 2004년 2월호, 영화 시보사, 39페이지.
  8. b “ 요시나가 코유리 주연 영화 111개째 “북의 영년”을 성공시키는 모임·삿포로에서 개최 ”. 홋카이도 경제 산업 신문 (2004년 10월 12일). 2019년 8월 21일 시점의 오리지널 보다 아카이브.
  9. r “모든 꿈은 0부터-”북의 영년”에서 새로운 도전 영화 부문의 재건축이야말로 회사 경영의 신수 도에이 주식회사 대표이사 사장 오카다 유스케 (듣는 사람) 타케이리 에이지로 마츠자키 테루오 '영화 시보' 2004년 11·12월호, 영화 시보사, 4-16페이지.
  10. c “[영화가 온 거리·『북의 영년』편](5) 도, 경제계의 전면 지원(연재) =홋카이도”. 요미우리 신문 ( 요미우리 신문사 ): p. 33. (2004년 10월 21일)
  11. ↑ “방화 3사 공동 경영 “삿포로 시네마 프론티어” 오픈” “영화 시보” 2003년 3·4월호, 영화 시보사, 18-19페이지. 다케이리 에이지로 “CINEMA EXITING 유바리×삿포로 세계의 명화가 되살아난다 “시네마의 발라드” 완성 북쪽의 마을, 엄한 속에서 뜨겁게 불타는” “영화 시보” 2003년 3·4월호, 영화 시보사, 28-29페이지.
  12. p 고마 쓰자 와 요이치 “제4장 영화인이 찍은, 각각의 “유바리 이야기” 응원해 준 기업인들 ” ISBN 978-4-582-28253-5 .
  13. ↑ e 카와바타 야스오・시다다요・스즈키 모토・이시카와 승 「영화・토픽・저널」『키네마 순보』 2003년 4월 하순호, 키네마 순보사 , 148-149쪽.
  14. h 「특집/시네콘 10년 지금까지와 지금부터 일본화 3사 경영 『삿포로』"일본 제일의 시네콘" 토호, 버진 시네마즈 100억으로 인수」 「AV저널」2003년 4월호, 문화통신사, 22-26페이지.
  15. e 「『철도원』은 일본 영화계를 소생시키거나 오카다 시게루 토에이 회장이 짖는다!」 「경제계」1999년 8월 17일호, 경제계 , 42페이지.
  16. c 「4월 21일, 오다이바로부터 제2차 시네콘 전쟁 돌입에? 시네콘은 영화계에 무엇을 가져왔는가」 「AV저널」2000년 3월호, 문화 통신사, 24-29페이지.
  17. b 다케이리 에이지로 “CINEMA EXITING 시네콘 워즈 전장은 교외에서 도심부로 확대 7월 초순, 39 스크린 같은 날 오픈” “영화 시보” 2000년 8월호, 영화 시보사, 27-30페이지.
  18. ↑ c 이와사키 히데히코 「영화관도 IT혁명이라고 외치는 도에이·오카다 주니어가 시작하는 것」 「경제계」2000년 11월 21일호, 경제계, 42-43페이지.
  19. g “톱 인터뷰 “특집·21세기에의 포석 전국 각지에 마켓이 정비되어 영화 인구의 파이는 확실히 증대한다” 토호(주) 회장 마츠오카 공 (청수) 시나타 유요시 ” “영화 시보” 1999년 7월호, 영화 시보사, 11-1. 「도호 마츠타케 도에이 대형 3사 도시형 시네콘 사업에서 제휴 제1호는 삿포로역 빌딩에 12스크린 헤세이 12년 착공, 15년 봄 개업」 「영화 시보」1999년 7월호, 영화 시보사, 16-18페이지.
  20. ↑ 「화제의 초점 3사/동렉이 미나토미라이에 출점 결정 소테츠도 자본 참가, 격변 필연의 요코하마 흥행가」 「AV저널」2004년 3월호, 문화 통신사, 6-7페이지.
  21. ↑ 「『토호 시네콘 전략 한층 더 가속 도시부, 근교를 중심으로 흥행망을 확충』 타카하시 창지 도호 상무 이사 흥행 부문 담당 인터뷰
  22. e 「유라쿠초 스쿠란부루 동경의 요시나가 소유리를 앞에…
  23. f 竹入栄二郎「東映×吉永小百合『北の零年』始動!!」『映画時報』2004年3月号、映画時報社、4-10頁.
  24. ↑ “ 홋카이도는 영상인을 매료한다 오카다 유스케 도에이 사장 인터뷰 ”. 재계 삿포로 . 재계 삿포로 주식회사 (2012년 11월). 2019년 8월 21일 시점의 오리지널 보다 아카이브. 2019년 8월 23일에 확인함.
  25. g 「【토요일 영화관】「북의 영년」 요시나가 코유리 주연 JR이나 유바리시도 물심 양면에서 협력」산케이 신문 , 2003년 3월 22일 도쿄 조간 25면 특집
  26. i “【영화 “북의 영년” 홋카이도 로케 시동/주연·요시나가 코유리, 111번째로 결의=“불타도 좋다” 남일본 신문 , 2004년 3월 28일 조간
  27. i 「권두 특집 영화 여배우 요시나가 소유리와 『북의 영년』/요시나가 소유리의 결의 촬영 현장에서 본 유일무이의 영화 여배우 문・가나자와 마코토」 「키네마 순보」 2005년 2월 하순호, 키네마 순보사, 31-33
  28.  「<푸른 하늘주의>효고 외출 정보 문화 단신」고베 신문 , 2005년 1월 15일 조간 25면
  29. d “엄한의 촬영, 포부는 뜨겁게 요시나가 코유리 주연의 “북의 영년”[오사카]”. 아사히 신문 오사카 석간 ( 아사히 신문 오사카 본사 ): p. 2. (2004년 1월 26일)
  30. ↑ a 기타 노부야스「촬영 보고 「북의 영년」」 「영화 촬영 」 No.163
  31. g 「권두 특집 영화 여배우 요시나가 코유리와 『북의 영년』/행정훈 감독 인터뷰 『요시나가 씨와 함께 영화를 만든 것은 큰 재산입니다』 문·가나자와 마코토」
  32. ↑ g 오시타 에이지「제5장 원숙의 시대」 「영화 여배우 요시나가 코유리」아사히 신문 출판 , 2015년, 239-251쪽. ISBN 9784022513359 .
  33. 「【공개 기념 특집】 영화 여배우 요시나가 코유리 120개째의 출연 영화 「북쪽의 사쿠라모리」 도에이 영화에서 되돌아보는 무진장한 매력을 담아 문·이시이 카나」 「도에이 키네마 순보 2018년 겨울호 vol.30
  34. d “요시나가 코유리씨 주연 “북의 영년” 삿포로 시네마 프론티어로 제작 발표=홋카이도”. 요미우리 신문 ( 요미우리 신문사 ): p. 36. (2003년 3월 6일)
  35. b 고마쓰자와 요이치「제4장 영화인이 찍은, 각각의 「유바리 이야기」 요시나가 코유리씨와 행정훈 감독」 「유우바리 영화제 이야기 영화를 사랑한 마을, 영화에 사랑받은 마을」평범사, 2008년, 197-198페이지. ISBN 978-4-582-28253-5 .
  36. ↑ r s 부야 쿄코「극영화 『북의 영년』 미술부 개척 일기 『영화 TV 기술』 2005년 2월호, 일본 영화 TV 기술 협회, 16-24쪽.
  37. ↑ j 나카무라 히로키「극영화 『북의 영년』의 조명」 『영화 TV 기술』 2005년 2월호, 일본 영화 TV 기술 협회, 12-15쪽.
  38. 국가 등록 유형 문화재/유바리시 홈페이지 , 영화 “북의 영년”/유바리 |
  39. g 고마쓰자와 요이치 “제4장 영화인이 찍은, 각각의 “유바리 이야기” 요시나가 코유리씨와 유바리 시장 사이에 묶인 “정”” “ 유우 바리 영화제 이야기 영화를 사랑한 마을, 영화에 사랑받은 마을” 2002년 ISBN 978-4-582-28253-5 .
  40. g 「『북의 영년』의 다음은 『일본의 영년』을 하자 〔신춘 대담〕요시나가 코유리 vs.하야사카 아츠시」 『주간 신조』 2005년 12월 30일/2006년 1월 6일호, 신쵸샤 , 48-52페이지.
  41. c 가와나베 히데( 삿포로 은행 ) “모든 꿈은 제로부터 시작된다.~영화 '북의 영년' 엑스트라 시말기~' '지역 뱅킹' 2005년 11월호, 제2지방은행 협회 , 59-63페이지.
  42. ↑ 「디지털 전달로 영화 상영, 토에이가 세계 최초의 실험 영화 「핀치 러너」를 20분 디지털 상영」 「AV저널」2000년 5월호, 문화 통신사, 54페이지. 「화제의 초점 영화계에 디지털 혁명은 일어나는가」가격 파괴에 의한 요금의 인하가 절대 조건 「AV 저널」2000년 12월호, 문화 통신사, 6페이지
  43. ↑ 「도에이 10년에 200 스크린 규모 위성 전달 대응 21세기형 시네콘 개발 신사업회사 「(주)티・조이」8월 설립 외」 「영화 시보」2000년 5월 6호, 영화 시보사, 4-13페이지.
  44. “ 유일무이하게 간판을 만든다면 맛있는 필기 간판의 입역자 “화공씨”를 찾아보자!! ”. 비트 스탭 디자인 (2019년 3월 26일). 2021년 2월 15일 열람.
  45. ↑ “ 제29회 일본 아카데미상 우수 작품 발표! ”. 일본 아카데미상 공식 사이트. 2025년 3월 11일 열람.
  46. ↑ “ 제23회 골든 그로스상 수상 작품 ”. 전국 흥행 생활 위생 동업 조합 연합회. 2025년 6월 16일 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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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午事変

出典: フリー百科事典『ウィキペディア(Wikipedia)』

庚午事変(こうごじへん)は、明治3年(1870年)に当時の徳島藩淡路洲本城下で洲本在住の蜂須賀家臣の武士が、筆頭家老稲田邦植の別邸や学問所などを一方的に襲った事件。稲田騒動(いなだそうどう)とも呼ばれる。

結果的に淡路島の帰属をめぐる重要な事件となり、この事件の影響で淡路島は再び徳島県から離れ、兵庫県に編入された。

経緯

徳島藩筆頭家老稲田家の祖稲田植元は、蜂須賀正勝(小六)と共に織豊政権に仕えていた。蜂須賀家政阿波入府にあたって、植元を蜂須賀家の筆頭家老とし、脇城(後に廃城)を守らせた。蜂須賀至鎮の代に淡路を加増されると、稲田家は洲本城城代に任じられた。稲田家は1万4千石を領し、家臣およそ3000人を擁していた[1]稲田家は徳島藩の家臣としては破格の待遇を受けてきたが、幕藩体制が進むにつれ、蜂須賀家と稲田家の関係は対等関係から主従関係へ変化し差別的な待遇をうけるようになった。このような経緯から、主家である徳島蜂須賀家との様々な確執が生じることとなった[要出典]

幕末期、徳島藩側が佐幕派であったのに対し稲田家側は尊王派であり、稲田家側の倒幕運動が活発化していくにつれ、徳島藩側との対立をさらに深めていくようになった。そして明治維新後、徳島藩の禄制改革により徳島蜂須賀家の家臣は士族とされたが、陪臣[2]の稲田家家臣は卒族とされた(士族は禄(家禄)が与えられるが、陪臣は禄がない。事実上の失業である)。これに納得できない稲田家家臣は自分たちの士族編入を徳島藩に訴えたが、叶わないとみるや、今度は洲本を中心に淡路を徳島藩から独立させ、稲田氏を知藩事とする稲田藩(淡路洲本藩)を立藩することを目指す(そうすれば自分たちは士族になる)ようになり、明治政府にも独立を働きかけていくようになる。稲田家側は幕末時の活躍により、要求はすぐ認められると目論んでいた。

明治3年5月13日(1870年6月11日)、稲田家側のこうした一連の行動に怒った徳島藩側の一部過激派が、脇町の稲田屋敷[3]に向けて進軍し、下浦村まで来たところへ「もし暴挙あらば蜂須賀家を取りつぶす」という新政府の命令が届き、やむなく徳島に戻った。一方、別の一団は洲本城下の稲田家とその家臣らの屋敷を襲撃した。稲田家側は自決2人、即死15人、重傷6人、軽傷14人、焼き払われた屋敷多数の被害を出した[4]

処分

政府は一部の過激派だけの単独暴動なのか、徳島藩庁が裏で過激派を煽動していたりはしなかったかを調査した。少なくとも洲本では意図的に緊急の措置を怠った疑いがある。そのような事実が少しでもあれば、徳島藩知事であった蜂須賀茂韶を容赦なく知藩事職から罷免するつもりであった。

当時の日本は版籍奉還後もかつての藩主が知藩事となっているだけで、旧体制と何ら変わらない状態だった。政府にとって、この問題は中央集権化を推進していく上で是非とも克服してゆかねばならなかった。だが下手な手の付け方をすれば、日本中に反政府の武装蜂起が起こりかねないため、慎重な対応を余儀なくされた。

結局、政府からの処分は、徳島藩側の主謀者小倉富三郎新居水竹ら10人が斬首(後に藩主蜂須賀茂韶の嘆願陳情により切腹[5]になった)。首謀者数名が徳島県徳島市住吉蓮花寺(1丁目)にて切腹した。八丈島への終身流刑は27人、81人が禁固、謹慎など多数に至るに及んだ。なお、八丈島への流人船の中には伊豆大島波浮港に寄港した船があり、4人の徳島藩士(織田角右衛門、今田増之助、平瀬所兵衛、稲垣軍兵衛)がそのまま丁重に遇されたが、間もなくコレラと思われる病気で亡くなり、大島の妙見山墓地の一画に埋葬された[6]

知藩事の茂韶や参事らも謹慎処分を受け、徳島藩自体の取り潰しはなかったものの、洲本を含む津名郡(稲田氏知行地)は翌明治4年(1871年)5月に兵庫県に編入されている[7]

稲田家側に対しては、この事件を口実に北海道静内色丹島の配地を与えるという名目で、兵庫県管轄の士族として移住開拓を命じ、彼らは荒野の広がる北の大地へと旅立っていった。この静内移住開拓については船山馨の小説『お登勢』や、池澤夏樹の小説『静かな大地』、映画『北の零年』でも描かれている。

明治初期に同地で生まれ育った作家・岩野泡鳴によると、稲田事件以来、藩主蜂須賀氏の直参派と稲田氏の城代派とは家来同士睨みあうところとなり、子供同士の交際ですら親たちは好まなかったという[8]。直参派は城代派を一階級下の陪臣者として見下し、城代派は直参派を他国者として侮蔑しており、直参派の子孫である泡鳴も、その浜屋敷の大門を一歩出ると敵国の中にいるような気がして、小学校へ通うのもまるで敵の目を掠めていくようなものであったという[8]

庚午事変は淡路の帰属にも影響を与えたと考えられる。

津名郡の一部が兵庫県になっていたが、11月15日(12月26日) - 淡路島全島を名東県阿波国・淡路国・讃岐国)に編入。

洲本市立淡路文化史料館では、「庚午事変」のコーナーが常設展示され、事件当時のことを綴った稲田家臣の手記などが展示されている。

切腹刑について

小倉富三郎新居水竹らの死は、明治以降において行われた切腹刑の事例である。2年後の1872年(明治5年)11月4日金沢藩執政(藩臣最高職)本多政均の暗殺に対する加賀本多家旧臣の敵討ち(明治の忠臣蔵と言われている)により、石川県刑獄寮の裁判で切腹の判決が下され切腹した旧臣12人(本多弥一、富田総、鏑木勝喜知、吉見亥三郎、矢野策平、西村熊、舟喜鉄外、浅井弘五郎、廣田嘉三郎、湯口藤九郎、芝木喜内、藤江松三郎)[9][10]の切腹刑を最後に、死刑執行方法としての切腹は1873年(明治6年)に廃止された。

処罰を受けた主な人物

庚午事変における処罰を受けた主な人物は以下の通り[11]

切腹終身流刑その他の主な処罰者
新居水竹上田甚五右衛門海部閑六(終身流刑)
小倉富三郎平瀬所兵衛海部六郎(七年流刑)
大村純安穂積問兵衛小野又兵衛(終身禁固)
平瀬伊右衛門織田角右衛門山田貢(終身禁固)
多田禎吾小川金次郎阿部興人(終身禁固)
南堅夫柴秋邨(禁固三年)
三木寿三郎
小川錦司
瀧直太郎
藤岡次郎太夫

脚注

  1. ^ 『徳島県史第5巻』p6。
  2. ^ (蜂須賀家の家臣の家臣)
  3. ^ 脇(現在の美馬市)周辺にある稲田家の配地。蜂須賀家の阿波入府当初、稲田家脇城を治めており、稲田家は淡路島以外ににも知行地があった。
  4. ^ 『徳島県史第5巻』p9。
  5. ^ 「名誉ある自決」とされていた。
  6. ^ 徳島藩士の墓”. 東京都教育委員会. 2024年11月20日閲覧。
  7. ^ 稲田家の北海道開拓費用を兵庫県が出した為と言われる。
  8. a b 矢島幸運、「岩野泡鳴と彼の恩人エマソン」『現代英米研究』 1974年 9巻 p.47-58, doi:10.20802/geneiken.9.0_47, 英米文化学会
  9. ^ 石川県立図書館 (2015年12月1日). “「明治忠臣蔵」「明治最後の仇討ち」と言われた、本多政均(ほんだまさちか)暗殺について載っている簡単な資料はないか。”. レファレンス協同データベース. 国立国会図書館. 2021年4月21日閲覧。
  10. ^ 谷正之「弁護士の誕生とその背景(3) : 明治時代前期の刑事法制と刑事裁判」『松山大学論集』第21巻第1号、松山大学総合研究所、2009年4月、279-361頁、ISSN 09163298NAID 1100075792002021年6月1日閲覧
  11. ^ 徳島県立文学書道館より抜粋。

関連項目

  • 廃藩置県
  • 小室信夫 - 政府より徳島藩大参事として派遣され、庚午事変の収拾に当たった。
  • 徳永真一郎「稲田騒動始末」 - この事件を扱った短編小説。短編集『幕末列藩流血録』に収められている。
  • 船山馨お登勢』 - 1968年-1973年の小説。小説を原作にしたドラマ及び舞台(脚本・ジェームス三木)。
  • 北の零年 - 庚午事変を題材にした映画(2005年公開、主演:吉永小百合)。映画では静内に船で到着するが時代が変わったとすぐに帰ってしまうのは、史実と異なる。

外部リン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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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午 사변

출처 : 무료 백과 사전 "Wikipedia (Wikipedia)"

庚오사변 은 1870  에 당시의 도쿠시마 번 아와지 스모토성 아래 에서 스모토 에 거주하는 벌스카 가신 의 무사 가 필두가 노이나다 쿠니  의 별장이나 학문소 등을 일방적으로 덮친 사건. 이나다 소동 이라고도 불린다.

결과적으로 아와지시마 의 귀속을 둘러싼 중요한 사건이 되었고, 이 사건의 영향으로 아와지시마는 다시 도쿠시마현 에서 떠나 효고현 에 편입되었다.

경위

도쿠시마 번필두 가 노이나다가 의 조이 나다 우에모토 는, 하스카 마사카츠 (코로쿠)와 함께 오리토모 정권 을 섬겼다. 하스카가정 의  와이리후에 있어서, 식원을 벌스카가의 필두가로로 하고, 와키성 (후에 폐성)을 지키게 했다. 벌스가 지진 의 대에 아와지를 가증하자, 이나다가는 스모토성 의 성대 에 임명되었다. 이나다 가문은 1만4천석을 받고 가신 약 3000명을 옹호하고 있었다 [ 1 ] . 이나다가는 도쿠시마 번의 가신으로서는 파격의 대우를 받고 왔지만, 막번 체제가 진행됨에 따라, 하스카가와 이나다가의 관계는 대등 관계로부터 주종 관계로 변화해 차별적인 대우를 받게 되었다. 이러한 경위로부터 주가인 도쿠시마 벌스카가와의 다양한 확집이 생기게 되었다 요출전 ] .

막부 말기, 도쿠시마 번측이 사막 파였던 것에 대해 이나다 가측은  왕파이며, 이나다 가측의 도막 운동 이 활발화해 가면서, 도쿠시마 번측과의 대립을 한층 더 깊게 하게 되었다. 그리고 메이지 유신 후, 도쿠시마 번의 로크제 개혁에 의해 도쿠시마 하스카가의 가신은 사족 으로 되었지만, 배신 [ 2 ] 의 이나다 가가신은 졸족으로 되었다(사족은 로크(가로쿠)가 주어지지만, 배신은 록이 없다.사실상 실업이다. 이에 납득할 수 없는 이나다 가신은 자신들의 사족 편입을 도쿠시마 번에 호소했지만, 이루지 않는다고 보니 이번에는 스모모토를 중심으로 아와지를 도쿠시마 번으로부터 독립시켜 이나다씨를 알 번사 로 하는 이나다번( 아와지스모토번 )을 입번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그러면 자신들은 사족이 된다)게 되고, 메이지 정부에도 독립을 일해나가게 된다. 이나다 가측은 막부 말기의 활약에 의해, 요구는 곧 인정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메이지 3년 5월 13일 (1870년 6월 11일 ), 이나다가 측의 이러한 일련의 행동에 화난 도쿠시마 번측의 일부 과격파가, 와키마치 의 이나다 저택 [ 3 ] 를 향해 진군해 시모우라무라까지 온 곳에 「만약 폭거하면 벌스카가를 잡는다」라는 신정부의 명령이 도착해, 어쩔 수 없이 도쿠시마로 돌아왔다. 한편, 다른 일단은 스모토 성하의 이나다가와 그 가신들의 저택을 습격했다. 이나다가 측은 자결 2명, 즉사 15명, 중상 6명, 경상 14명, 태워진 저택 다수의 피해를 입었다 [ 4 ] .

처분

정부는 일부 과격파만의 단독폭동인지 도쿠시마 번청이 뒤에서 과격파를 선동하고 있거나 하지 않았는지를 조사했다. 적어도 스모토에서는 의도적으로 긴급 조치를 게을리한 혐의가 있다. 그런 사실이 조금이라면 도쿠시마 번지사였던 벌스카 시게야 를 가차없이 지번사직으로부터 파면할 생각이었다.

당시의 일본은 판적봉환 후에도 과거의 번주가 지번사가 되고 있는 것만으로, 구 체제와 아무런 변함없는 상태였다. 정부에 있어서 이 문제는 중앙집권화 를 추진해 나가는 데 꼭 극복해 가야 했다. 하지만 서투른 손을 붙이는 방법을 하면, 일본중에 반정부의 무장봉기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신중한 대응을 강요당했다.

결국, 정부로부터의 처분은, 도쿠시마 번측의 주모자 고쿠라 토미 사부로 · 신이 미즈타케 등 10명이 참수(후에 번주 벌스카 시게야 의 탄원 진정에 의해 절복 [ 5 ] 이 되었다). 수모자 수명이 도쿠시마현 도쿠시마시 스 미요시 의 연꽃사 (1초메)에서 절복했다. 하치조지마 로의 종신유형은 27명, 81명이 금고, 근신 등 다수에 이르렀다. 덧붙여 하치조지마에의 유인선 중에는 이즈 오시마나미 부항 에 기항한 배가 있어, 4명의 도쿠시마 번사(오다가쿠우에몬, 이마타 마스노스케, 히라세소 효에) , 이나가키군 병위)가 그대로 정중하게 대접되었지만, 곧 콜레라 라고 생각되는 병으로 사망하고 , 오시마의 묘미산 묘지의 일화에 매장되었다 ] .

지 번사의 시게나 참사들도 근신처분을 받고, 도쿠시마 번 자체의 무너짐은 없었지만, 스모토를 포함한 츠나군 (이나다씨 지행 지)은 다음 메이지 4년( 1871년 ) 5월에 효고현 에 편입되고 있다 [ 7 ] .

이나다가 측에 대해서는, 이 사건을 구실로 홋카이도 시즈우치 와 색탄도 의 배지를 준다는 명목으로, 효고현 관할의 사족으로서 이주 개척을 명해, 그들은 광야의 펼쳐지는 북쪽의 대지로 여행 서 갔다. 이 시즈우치 이주 개척에 대해서는 후나야마 馨의 소설 『등세』나, 이케자와 나츠키 의 소설 『조용한 대지』, 영화 『북의 영년』에서도 그려져 있다.

메이지 초기에 동지에서 태어나 자란 작가· 이와  아와나루에 의하면, 이나다 사건 이래, 번주 벌스카씨의 직참파와 이나다씨의 성대파와는 가래끼리 노려보는 곳이 되어, 아이끼리의 교제조차 부모들은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 8 ] . 직참파는 성대파를 1계급 아래의 배신자로 내려보고, 성대파는 직참파를 타국자로서 모멸하고 있으며, 직참파의 후손인 아와나루도, 그 하마야시키의 대문을 한 걸음 나오면 적국 속에 있는 것 같아서 초등학교에 다니는 것도 마치 적의 눈 

庚午 사변은 아와지의 귀속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된다.

쓰나군 의 일부가 효고현이 되어 있었지만, 11월 15일 (12월 26일) - 아와지시마 전도를 명동현 ( 아와국 ·아와지국· 사누키국 )에 편입.
  • 메이지 9년( 1876년 ) 8월 21일 - 제2차부현 통합. 명동현 에서 아와지섬 전역이 효고현으로 이관된다.

스모토 ​​시립 아와지 문화 사료관 에서는, 「오오 사변」의 코너가 상설 전시되어, 사건 당시를 철거한 이나다 가신의 수기 등이 전시되고 있다.

절복형에 대해

오구라 토미사부로 · 신이 미즈타케 등의 죽음은 메이지 이후에 행해진 절복형의 사례이다. 2년 후인 1872년(메이지 5년) 11월 4일 에 가나자와 번 집정(번신 최고직) 혼다 마사키  의 암살에 대한 가가 혼다가 구신의 적 토벌(메이지의 충신장이라고 불리고 있다)에 의해, 이시카와현 형옥 기숙사의 재판으로 절복의 판결이 아래 되어 절복 한 구신 12명 [ 9 [ 10 ] 의 절복형을 마지막으로, 사형 집행 방법으로서의 절복은 1873년 (메이지 6년)에 폐지되었다.

처벌받은 주요 인물

암오사변에서 처벌을 받은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 11 ] .

절복종신유형기타 주요 처벌자
신이 미즈케우에다 초고우에몬海部閑六(종신 유형)
고쿠라 토미사부로히라세 쇼베카이베 로쿠로(칠년류형)
오무라 준안호적문병위오노 마타베에(종신금고)
히라세 이에몬오다카쿠 우에몬야마다 공(종신 금고)
타다 료고오가와 긴지로아베 흥인 (종신금고)
미나미 켄오柴秋邨(금고 삼년)
미키스 사부로
오가와 니시키
타키 나오 타로
후지오카 지로 타오

각주

  1.  『도쿠시마현사 제5권』 p6.
  2. ^ (벌스카가의 가신의 가신)
  3.  겨드랑이(현재의 미마시 ) 주변에 있는 이나다가의 배지. 하스가  의 아와이리후 당초, 이나 다가는 와키성 을 다스리고 있어, 이나다가는 아와지시마 이외에 겨드랑이 에도 지행지가 있었다.
  4.  『도쿠시마현사 제5권』 p9.
  5.  「명예 있는 자결」이라고 되어 있었다.
  6. ↑ “ 도쿠시마 번사의 무덤 ”. 도쿄도 교육위원회. 2024년 11월 20일 열람.
  7. ^ 이나다가의 홋카이도 개척 비용을 효고현이 내놓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8. b 야시마 행운, “ 이와노 아와나루와 그의 은인 에머슨 ” “현대 영미 연구” 1974년 9권 p.47-58, doi : 10.20802/ geneiken.9.0_47
  9. 이시카와 현립 도서관 (2015년 12월 1일). “ “메이지 충신장” “메이지 마지막의 원수”라고 말해진, 혼다 마사치카 암살에 대해서 실고 있는 간단한 자료는 없는가. ”. 레퍼런스 협동 데이터베이스 . 국립 국회 도서관. 2021년 4월 21일 열람.
  10. ^ 타니 마사유키 변호사의 탄생 과 그 배경  ( 3 2021년 6월 1일에 확인함 . 
  11. ↑ 도쿠시마 현립 문학 서도관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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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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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생긴 질문입니다. 우선 삿뽀로에 가서 돌아오지 않고, 연락도 하지 않은 히데아키는 보통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런 인물에 대해서는 더 알고 싶은 관심도 생기지 않습니다. 세진에게 더 중요한 질문은 이 영화의 스토리가 메이지 시대 초기에 실제로 (있을 수 ) 있었던 사건이었나? 하는 것입니다. 첫번 째가 강제 이주이고, 두번 째는 말의 강제 몰수입니다. 또 500명의 공동체 같은 것이 있었나요.

<한국어>

결론부터 말하면, <강제 이주(집단 이주 명령)>는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에 가깝고, <말의 강제 몰수(징발)>는 “시대에 가능했던 관행을 극적으로 압축·각색한 장치”로 보는 게 가장 정확합니다.

<1) 강제 이주: 실제로 있었나?>
있었습니다. <북의 영년>의 큰 뼈대는 <1870년(메이지 3년) ‘고고(庚午)사변’(=稲田騒動) 관련 처분>으로, <도쿠시마번(아와/淡路 쪽)과 연관된 ‘이나다(稲田) 가문 및 가신단’이 홋카이도 히다카(静内)로 이주·개척을 명령받은 사건>을 바탕으로 합니다.
즉 “국가가 (사실상) 처벌/통제의 형태로 특정 집단을 변방으로 보내 정착시키는” 유형의 사건이 실제로 있었고, 영화가 그 역사적 프레임을 가져온 것입니다.

<2) ‘500명 공동체’ 같은 규모가 실제로 있었나?>
대체로 그 급이 맞습니다.

  • 일본 측 자료들에는 <546명(혹은 550명 안팎)의 1차 이주>가 언급됩니다.

  • 또 지역 현지 안내/기념비 설명에는 <“500여 명 본대”> 표현도 보입니다.

따라서 영화 속 “수백 명 단위의 집단 이주 공동체”는 허무맹랑한 설정이 아니라, 실제 역사 기록에 걸리는 규모를 서사적으로 재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3) 말(馬)의 ‘강제 몰수/징발’은 실제로 있었나?>
여기서부터는 <영화의 특정 장면이 ‘그대로’ 사실이었는가?>와 <당시 제도가 ‘가능하게’ 했는가?>를 나눠야 합니다.

  • <가능성(제도·관행)>: 메이지기 일본은 전쟁·군사 필요에 따라 <말을 포함한 물자의 ‘징발(徴発)’ 체계>를 발전시켜 갔고, 지방 행정이 그 절차를 다루는 문서들이 남습니다. 특히 <1882년(메이지 15) ‘徴発令’> 제정으로 법적 근거가 정비됩니다.

  • <다만 영화의 시점 문제>: 영화는 (서사상) 1870년대 사건들을 한데 묶는 느낌인데, “말 징발이 1882년 법령 이후에 더 제도화”된 점을 고려하면, 영화 속 ‘명령 한 방에 말이 싹 끌려가는’ 형태는 <후대의 제도화된 징발 이미지를 앞당겨 투사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 <홋카이도·히다카와 말>: 영화 무대(히다카/静内 일대)는 실제로 <목장·마정(馬政)·개척사의 축산 정책>과 연결되는 지역입니다. 개척사는 신관(新冠) 등지에 <牧馬場(목마장)> 같은 시설을 두고 말을 다루었습니다.

정리하면, <“말이 군사·국가 동원에 의해 주민에게서 빠져나갈 수 있었다”는 큰 방향은 역사적으로 충분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 속 ‘그 시기·그 방식·그 지역에서의 일괄 몰수’가 문서로 딱 떨어지는 단일 사건으로 확인되는지는 별개>이고, 이 부분은 영화적 압축/각색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금 단계에서 제가 찾은 공개 자료만으로는 “영화 장면 그대로의 특정 징발 사건”을 1:1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4) 세진님 질문에 대한 한 줄 답>

  • <강제 이주>: “실제 사건 기반”이라고 봐도 됩니다.

  • <500명 공동체>: “실제 기록의 숫자대(약 500~550명)와 맞는다.”

  • <말 강제 몰수>: “그 시대의 국가 동원 논리와 말 정책(및 훗날 제도화된 징발)을 반영한 각색일 가능성이 크다.”

원하시면, 제가 <‘영화 속 말 징발’이 실제로 무엇(어떤 전쟁/어떤 행정명령)을 가리키는지>를 더 좁혀서, “가장 그럴듯한 역사적 대응물 2~3개 시나리오”로 정리해드리겠습니다.


<English>

If we separate <what is historically grounded> from <what is dramatized>, the picture becomes clear.

<1) Forced relocation>
Yes, it has a real historical basis. The film is widely described as a story of the <Inada clan and their retainers>, who were <ordered by the early Meiji government to relocate from Awaji/Tokushima-related politics to Shizunai in Hokkaido> after the <Kōgo Incident (庚午事変)>.

<2) “A 500-person community”>
That scale is plausible and supported by multiple references: sources commonly cite <around 546–550 people> in an early wave, and local accounts also use “<500+>” wording.

<3) Horse confiscation / requisition>
Here, it’s safer to say: <the practice is historically plausible, but the exact film event is likely compressed/dramatized>.

Japan’s formal requisition framework was consolidated later—most notably the <1882 Requisition Ordinance (徴発令)>, which provided clearer legal grounding for military requisitions including horses.
The film’s “one order and the horses are taken” feels like a cinematic condensation that borrows from this broader logic of state mobilization. Separately, the Hokkaido development administration (Kaitakushi) was deeply involved in livestock/horse facilities (e.g., ranch/牧馬場 initiatives), so the region–horse connection is real.

<Bottom line> - <Forced relocation>: substantially based on real events. :contentReference[oaicite:14]{index=14} - <500-person settlement>: historically credible scale. :contentReference[oaicite:15]{index=15} - <Horse seizure>: historically plausible as a state-mobilization motif, but the film’s specific episode is not (from what I can confirm in publicly accessible sources) a clean 1:1 match to a single documented incident. :contentReference[oaicite:16]{index=16} ::contentReference[oaicite:17]{index=17}
그 500명 규모의 공동체는 후에 어떻게 되었나요?

<한국어>

그 “약 500명(546명 1차 상륙)” 집단은, 한 번에 한 덩어리로 그대로 유지된 공동체라기보다 <초기 고난 → 일부 이탈/귀향 → 제도 변화로 계획 축소 → 남은 사람들의 정착·분산 정착> 쪽으로 흘러갔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1) 처음 몇 해: 재난과 동요>
기록과 지역 안내에 따르면 1871년 5월 2일 1차로 546명이 시즈나이(静内) 일대에 도착했고, 곧바로 큰 악재가 겹칩니다. 보관 중이던 가재도구가 화재로 전소했다는 이야기, 2차 이주선 난파로 83명의 사망자가 났다는 이야기 등이 반복해서 언급됩니다.
이 단계에서 “여기서 못 살겠다”는 심리가 강해져, <본州로 돌아가거나 다른 곳으로 떠나는 사람>이 실제로 꽤 있었던 것으로 안내문에 적혀 있습니다.

<2) ‘공동체 계획’ 자체가 꺾이는 계기: 1871년의 제도 변화>
영화가 놓치기 쉬운 대목인데, 메이지 정부는 초기에 ‘각 번(藩)에게 일부 지역을 맡기는 분령 지배’ 같은 방식을 쓰다가, 곧 중앙집권화로 방향을 급히 바꿉니다. 지역 안내 자료는 그 결과로 <“이나다 가신단의 이주 계획이 중절(중단)”되었다>는 취지로 설명합니다.
즉 “국가가 밀어줬던 집단 정착 프로젝트”가 지속적으로 보호·지원되는 구조가 약해지고, 남은 사람들은 더 ‘자기 힘으로’ 버텨야 하는 상황으로 가게 됩니다.

<3) 그럼에도 정착은 진행: ‘남은 사람들’이 시즈나이의 토대가 됨>
한편, 신히다카(新ひだか) 쪽 관광·역사 안내는 조금 다른 포인트를 줍니다. 초기에는 주군(이나다 쿠니우에/邦植)이 함께 정착하지 않아 동요가 컸지만, <주군이 가족과 함께 이주해 온 뒤에는 가신들도 토착 의식을 갖고 본격적으로 정착이 진행됐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스모토(洲本)시의 공식 설명에는, 이들이 “오늘날 명마 산지로 유명한 시즈나이에 큰 기념비가 세워질 만큼” 개척의 역사로 기억된다고 적혀 있습니다.
요약하면, <전원이 남아 하나의 마을을 유지>한 것이 아니라, <상당수는 떠났지만> 남은 사람들과 이후 유입 인구가 합쳐져 “시즈나이 지역 개척의 한 기원”으로 자리 잡았다고 보는 게 가장 사실에 가깝습니다.

<4) 후손은?>
지역 글·안내에서는 <이주민의 후손이 지금도 지역을 지탱한다>는 식의 언급도 보입니다(다만 이런 대목은 공식 통계라기보다 지역 서술에 가까우니, “정착의 흔적과 후손 집단이 남아 있다” 정도로 받아들이는 게 안전합니다).


<English>

That “~500 people (546 in the first landing)” did not remain a single intact commune for long. What happened looks like: <early disasters → many left/returned → policy/administrative shift weakened the original plan → those who stayed gradually rooted themselves, and the settlement story became part of Shizunai’s local foundation>.

Multiple local accounts describe severe early shocks (a major fire destroying stored belongings; a later transport disaster with 83 deaths), followed by significant out-migration back to Honshu or elsewhere.
Crucially, local explanations also note that the broader governance framework changed: domain-based arrangements were removed and Hokkaido came under centralized administration, and in that context the Inada group’s relocation “plan” was effectively curtailed.
Even so, Shinhidaka’s historical guide texts emphasize that once Inada Kunitsugu/Kuniue moved with his family, retainers gained stronger attachment and settlement efforts deepened—so a core stayed and became part of what later communities remember as Shizunai’s pioneering base.

원하시면, 제가 “<누가 얼마나 떠났는지/남았는지>를 수치로 최대한 근접”시키기 위해, (일본어) 향토사 자료나 발표문(PDF/보고서)에서 ‘이탈·정착’ 통계를 더 찾아서 정리해드릴게요.

이 영화는 한국에서 어느 정도 보여젔는가요?

<한국어>

자료로 확인되는 범위에서 보면, <한국에서 “상업 개봉(일반 극장 개봉)”으로 널리 상영된 작품은 아닌 쪽>에 가깝습니다.

<1) KOBIS 기준: 한국 개봉일 정보가 비어 있음>
영화진흥위원회 KOBIS 작품 정보에서 <개봉일자: “해당정보없음”>으로 표시됩니다. 보통 이런 경우는 한국에서 공식 극장개봉(통합전산망에 잡히는 형태)이 없었거나, 아주 제한적으로만 유통돼 흥행 통계에 잡히지 않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2) 대신 ‘영화제 상영’ 흔적은 뚜렷함: 2006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PiFan/BIFAN)>
2006년(제10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관련 기사/보도자료에서 <북의 영년>이 “추천작”으로 소개됩니다.
즉, 한국 관객에게는 <영화제 프로그램(한정 상영)>을 통해 알려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정리>

  • <전국 상업 개봉으로 크게 유통됐다>는 근거는 지금 자료에선 약합니다.

  • <영화제(부천 PiFan/BIFAN)에서 상영·소개됐다>는 근거는 있습니다.

원하시면, “그 영화제가 실제로 몇 회 상영했는지(상영 회차/상영관/날짜)”까지도 더 좁혀서 찾아 정리해드릴게요. (영화제 아카이브/시간표 자료를 추가로 뒤져야 합니다.)


<English>

From what can be verified in Korean sources, <this film does not look like it had a wide commercial theatrical release in Korea>.

<1) KOBIS record shows no Korean release date>
In the Korean Film Council’s KOBIS title record, the <release date field is blank (“no information”)>, which usually suggests there was no standard nationwide theatrical release captured in the official box-office system.

<2) Clear evidence of festival exposure (BIFAN/PiFan 2006)>
Multiple Korean articles/press materials about the <10th Puchon International Fantastic Film Festival (PiFan, now BIFAN)> list <Year One in the North> as a recommended title, indicating it was shown in a festival context rather than mainstream cine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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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진님, 영화 <북의 영매>(북의 영령) 혹은 그와 유사한 메이지 시대 홋카이도 개척기를 다룬 작품을 보고 질문을 주신 것 같네요. 말씀하신 히데아키라는 인물의 무책임함에 실망하신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질문하신 역사적 배경에 대해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영화 속 설정은 메이지 시대 초기 홋카이도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이나다 소동(稲田騒動)>**과 그로 인한 <아와지시마 가신단의 강제 이주> 사건을 강력한 모티브로 하고 있다.



1. 500명의 공동체와 강제 이주

영화 속 500명의 공동체 설정은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다. 1870년, 아와지시마의 이나다 가문과 그 가신들(약 500여 가구, 2,500여 명)은 번내 분쟁인 이나다 소동의 결과로 정부로부터 홋카이도 북단인 시즈나이(静内) 등으로의 이주 명령을 받는다.



성격: 단순한 이주가 아니라 사실상의 유배형에 가까웠다.



현실: 메이지 정부는 이들에게 무사 신분을 박탈하고 농민으로 전업할 것을 강요했으며, 척박한 땅에서 생존 사투를 벌이게 했다.



2. 말의 강제 몰수

영화에서 묘사된 말의 몰수 역시 홋카이도 개척사에서 매우 중요한 비극적 사건을 반영한다.



군마 조달: 메이지 정부는 부국강병을 위해 홋카이도를 거대한 군마 생산지로 만들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개척민들이 애지중지 키우던 말들을 국가가 저렴한 가격에 강제 수매하거나 통제하는 정책이 시행되었다.

자연재해와의 결합: 1879년경 홋카이도에 닥친 기록적인 폭설과 한파로 인해 수만 마리의 말이 떼죽음을 당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영화는 이러한 시대적 고난을 극적으로 구성한 것으로 보인다.

3. 역사적 실재성 평가

영화가 다루는 사건들은 특정 인물의 창작이라기보다, 당시 홋카이도 개척민들이 겪었던 국가 권력에 의한 수탈과 가혹한 자연환경이라는 두 가지 실체를 상징적으로 결합한 것이다.



강제성: 이주와 자산(말)의 관리 모두 개인의 자유의지가 아닌, 국가의 개척 정책에 따라 강제적으로 집행되었다.



비극성: "버려진 이들"로서의 정체성이 영화 속 공동체의 정서적 배경을 이룬다.



혹시 영화 속의 특정 장면이나 이나다 소동 이후 그들이 세운 마을의 행방에 대해 더 궁금한 점이 있으신가요? 세진님을 위해 더 자세한 자료를 찾아봐 드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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