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1-31

우성 | * 경계인 송두율을 기억하라 | Facebook

최강개혁 최강욱 | * 경계인 송두율을 기억하라 | Facebook



최강개혁 최강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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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계인 송두율을 기억하라!! *
“내 영혼, 갈라진 영토 한쪽에 갇혀있지 않을 것!!” -송두율-


송두율은 누구인가?

한국계 독일 사회학자이자 철학자로, 남북한 사이의 '경계인'을 자처하며 통일 문제와 현대 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아버지 송계범은 일본 도쿄 물리학교를 졸업하고 해방 직전 경성제국대학 물리학부에서 근무하였다. 까닭에, 송두율은 1944년 일본에서 태어났다. 송두율은 출생부터 한일 사이 경계인이다.
1963년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고, 1965년 한일회담 반대 운동을 하면서 시인 김지하와 알게 된다. 독일에서 지도교수 위르겐 하버마스에게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송두율은 공부의 과정 또한 한독 사이 경계인이다.
이후 독일 뮌스터 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내재적 접근법'을 바탕으로 한 북한 연구와 통일 철학을 정립했다.

'내재적 접근법'이란 무엇인가?
‘내재적 접근법’은 북한체제를 외부의 잣대로만 비판하지 말고, 먼저 북한 내부의 논리와 시각으로 이해해야 하고, 이를 근거로 비판적 고찰을 허용하는 학술적 방법론이다. 남한이나 서구의 시각과 가치로 북한체제를 비판하는 일은, 무조건적으로 저들을 지지 찬양하는 것만큼 잘못이다. '반공의 색안경'을 벗고 북한사회의 형성원리와 주체사상 등 그들만의 가치 체계를 분석의 기초로 삼는다.
’내재적 접근‘은 경계인으로 태어나서, 경계인으로 공부한 송두율만이 가능했음이다.
지금까지 통일론은 “평화가 무르익으면 통일이라는 감이 홍시가 되어 뚝하고 떨어진다”는 논리다. 물론 홍시는 남쪽으로 떨어진다는 강한 믿음이 깔려있다. 남한이나 서구의 시각과 가치로 북한체제를 보는데서 생기는 착시현상이다.
단계별 교류협력이니, 평화체제니 하며 보낸 분단 80여 년의 결론은, 물론 평화 자체도 무르익을 짬을 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적대적 두국가론으로 고착되어 간다. 평화타령으로는 한 조각의 평화조차 얻을 수 없음이다. 세계유일의 분단국, 코리아의 분단체제의 특수성 때문이다.
결정적인 잘못은, 천민자본주의인 신자유주의 시각에서 본 북한체제에 대한 분석의 오류 뿐만이 아니라, 북한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무지에 근거한 진단의 오류 때문이다. 진보 보수정권 모두, 백약이 무효한 까닭이다. 잘못된 진단으로 한 처방이 먹히겠는가? 송두율의 ’내재적 접근법‘을 호출하는 까닭이다.
송두율은 스스로를 남과 북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는 '경계인'으로 규정한다. 송두율의 통일론은 ‘경계인’의 시각에서 6.15선언에서 합의한, 남북한의 차이를 인정하고, 교류협력으로 신뢰를 구축해 가는 과정 중심의 평화통일론이다. 특히 독일식 흡수통일이 아닌 ‘낮은 단계의 연방제’에 호의적이다.

2003년, 37년 만에 귀국했으나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와 동일인이라는 혐의(국가보안법 위반)로 체포됐다. 2008년 대법원은 그가 노동당 후보위원으로서 활동했다는 핵심 혐의에 대해 증거 부족으로 무죄를 선고했다. 다만, 일부 방북 행위 등에 대해서만 유죄가 인정되어 최종적으로 징역 2년 6개월, 집행유예 5년이 확정됐다.
이렇게, 분단체제에서는 경계인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분단체제 자체가 이미 폭력 그 자체인 까닭이다. 경계인을 허용하지 않고, 어떻게 대화의 물꼬가 트겠는가? 적 아니면 동지인 세상에서, 경계인은 회색분자인 까닭이다.

그러나 회색분자는 문제로부터 자신을 숨긴다. 반면에 경계인은 자신을 스스로 문제적 상황 속으로 밀어넣는다. 회색인은 회색지대를 설정해서 문제를 희석시키고, 그 뒤에 숨는다. 반면에 경계인은 스스로 경계선이 되어, 갈등의 원인과 문제의 근원을 명확히 드러낸다. 이제 갈등을 제거하고, 문제를 치유할 일만 남는다. 그러나 37년 만에 방문한 그를 조국은, 아니 분단체제는 빨갱이라는 죄목으로 체포한다. 9개월 구속수감 후, 2004년 7월 21일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석방된다.
2026년 현재까지도 ’계몽과 미몽’, ’반중과 친미’, ’적대적 두국가론’, ’전쟁과 평화‘을 주제로, 경향신문 등을 통해 정기적인 칼럼을 기고하며 인문학적·사회적 통찰을 공유하고 있다.

人間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 사이에 있는 존재다. 한 사람으론 아직 인간이 아니란 말이다.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또 다른 누군가가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그와 나 사이에서 서로를 잇는 제3의 존재가 비로서 인간이다. 다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여, 놓치기 쉽다. 인간관계가 쉬이 무너지는 까닭이다. 하여, 무방비로 치고 들어오기에 강력하다. 놓치지 않고, 합심한다면,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태18:19~20)

"하느님은 관계 능력이다"
독일의 신학자 에버하르트 줼레(Eberhard Jüngel)의 말씀이다. 참으로 높은 통찰력이다. 이 말씀은 “하느님은 사랑이다.”보다 설득력 있다. “하느님은 사랑이다.”는 인간을 순종시키려고 하는 가스라이팅에 가깝다. 우리가 할 일은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와 같이, 무한한 그분의 사랑을 무한히 기다릴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하느님은 관계 능력이다"는 관계맺기라는 우리가 할 일이 먼저다. 무한히 기다릴 일이 아니란 말이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 즉 우리 안에-내 안이 아니고-계신 하느님, 우리를 더 우리답게 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우리가 더 합심할수록 높은 신 그분의 무한한 사랑이 임하신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인간-사람이 아니고-이 되야 한다.
인간이 되려면, 일단 우리(울타리) 안으로, 즉 관계 안으로 들어서야 한다.
그 순간, 실낙원, 즉 잃어버린 낙원을 회복하는 일이 된다. 인간과 하느님과 관계가 회복된다. 오직 ‘진인사’했을 뿐인데, ‘대천명’이 도래했음이다. ‘관계 안으로 들어섬’이란, 실존주의 관점에선 ’앙가주망’ 이다.
앙가주망(Engagement)은 프랑스어로 '참여' 또는 '구속'을 뜻한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가 지식인의 현실참여를 강조하기 위해 쓴 말이다. 지식인이나 예술가가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작품의 주제로 표현하거나, 또는 직접 실천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제3자적 관조나 중립적 침묵을 거부한다.
마찬가지로, 민족통일을 위해서, 일단은 단절된 남북 사이를 비집고 들어서야 하는 까닭이다. 관계함에 적극 ‘참여‘해야 하는 까닭이다.
그런데 무엇으로? 어떻게 막힌 장벽에 틈을 내겠는가? 복잡다단한 남북 사이의 실타래를 잘라낼 칼은 없는가?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쾌도난마‘하고, 왕이 된 알렉산더의 예리한 칼날 말이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은 복잡하게 얽혀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나 난관을 의미한다. 고대 프리기아(현재의 튀르키예 지역)에 전해지는 예언으로, 이 매듭을 푸는 자는 왕이 된다는 이야기가 있다. 알렉산더가 그 주인공이다. 알렉산더는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에서 실마리를 찾아내려 하지 않았다. 단칼에 매듭을 잘라냈음이다. 쾌도난마(快刀亂麻)했을 뿐이다. 그리고 왕이 됐다. 코리아의 통일의 지혜와 전략이 이와같아야 함이다.
분단 80여 년이 되도록 남북관계가 허우적거리고 있는 까닭은, 지금까지 주류 통일론인 평화통일론이 바로, 실마리를 찾아내려 애쓰는 단계별 점진적 통일론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쾌도난마(快刀亂麻)는 ‘잘 드는 칼로 뒤엉킨 삼가닥을 자른다’는 뜻으로, 복잡하게 얽힌 문제나 상황을 명쾌하게 처리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경계는 선으로 있다. 경계선은 있는데 만져지지 않는다. 선은 면이 아닌 까닭에 차지할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즉 경계는 없음으로 있다. 마치 쾌고난마의 예리한 칼날이다. 칼날은 있다. 그러나 선으로 있을 뿐 면이 아니다. 칼날이 무뎌지는 순간 칼날은 면이 되고, 공간을 차지한다. 즉 칼날 역시 없음으로 있음이다. 경계선과 칼날의 존재방식이 같다는 말이다.
밀정과 수박은 회색인의 다른 말이다. 관계와 앙가주망은 경계인의 다른 말이다. 특히 경계인 송두율에게서 복잡다단한 남북 사이의 실타래를 잘라낼 번뜩이는 칼날을 봤다면, 통일동지가 분명하리라!! ’송두율의 내재적 비판론‘과 ’경계인 송두율’을 호출하는 까닭이다. 지금바로 민족통일을 위한 지혜와 통찰과 전략을 구하고자 함이다.
털 있는 인간과 털 없는 원숭이 그 사이, 경계에 어디 쯤 인류가 있다. 아직 더 진화될 존재가, 더 가야할 곳이 있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남북 사이, 갈라진 영토 한쪽에 갇혀있지 않고, 그 경계선에 있어야 한다. 아직 우리는 민족통일을 해야하고, 통일코리아가 인류의 공생과 번영을 위해, 더 가야할 곳이 있다는 말이다.
책을 읽는다. 세상을 읽는다. 천문을 읽는다. 시대정신을 읽는다. 그러나 사실은 읽혀진다. 어찌 감히 하늘을 읽는단 말인가!
하여, 나는, 아니 우리는 ‘읽는다와 읽혀진다‘ 그 사이, 경계선 어딘가, 어디 쯤에 있다.
마찬가지로, 민족통일을 위해서, 일단은 남북 사이는 서로를 읽고, 읽은 만큼 읽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부끄럼 없이, 두려움 없이 드러내야 한다. 하여, 읽고 읽히면서 알게 된다. 남과 북, 서로 같음과 다름에 대하여!! 이것이 '내재적 접근법'이 완성되는 순간이다. 장벽에 틈이 벌어지고, 통일문이 열리는 순간이다.
그러기 위해서, 남과 북 사이, 갈라진 영토 한쪽에 갇혀있지 않고, 경계선 어딘가, 어디쯤에 있어야 한다.
읽고 읽히면서, 서로 같음은 더 강한 중심이 된다. 하여,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귈쌔, 꼿 됴코 여름 하나니.” 서로 다름은 더 깊은 심연이 된다. 하여, “새미 기픈 므른 가마래 아니 그츨쌔, 내히 이러 바래라 가나니.”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리므로, 꽃이 좋고 열매가 많이 맺히니.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아니 그치므로, 내가 되어 바다에 가나니.” 용비어천가의 말씀이다. 통일코리아를 일러 하신 말씀이다.
송두율은 ’계몽과 미몽’, ’반중과 친미’, ’적대적 두국가론’, ’전쟁과 평화‘ 사이의 경계선에서 민족통일의 열쇠를 다듬고 있다.
“내 영혼, 갈라진 영토 한쪽에 갇혀있지 않을 것!!”
남과 북, 그 사이에, 경계인 송두율의 말씀이다. 열쇠가 되기 위함이다. 잠을쇠는 복잡할수록 명품이고, 열쇠는 단순할수록 명품이다.
세계의 모든 분단은 세계냉전의 결과물이다. 그래서 냉전이 끝나면서 분단된 모든 나라들이 당연 통일됐다. 그러나 우리의 분단은 더 공고화됐다. 코리아의 분단체제는 복잡계를 닮았기 때문이다. 복잡계(Complex Systems)는 수많은 구성 요소들이 서로 밀접하게 상호작용하며, 그 결과 전체가 개별 부분의 합보다 큰, 예측하기 어려운 패턴을 나타내는 체계를 의미한다. 코리아의 통일문 열쇠는 보다 더 단순해야 하는 까닭이다.
“분단된 독일은 나라가 아니다.”
동방정책을 비롯해서, 독일통일을 설계한 빌리 브란트 수상의 비서실장 에곤 바의 말씀이다. 독일통일은 이 단순한 한마디에서 시작됐다. 이 한마디가 독일통일의 열쇠였음이다. “분단된 코리아는 나라가 아니다.”로 읽힌다. 인간이 되려면, 우리(울타리) 안으로 들어서야 하듯, 나라가 되려면 분단 80여 년을 끝장내야만 한다.
그러나 “분단된 코리아는 나라가 아니다.”는 독일 버전이다. 뿐만 아니라, 시대도 바꿨고, 코리아 분단체제의 특수성까지 고려한, 우리만의 통일열쇠라야 한다.
“내 영혼, 갈라진 영토 한쪽에 갇혀있지 않을 것!!”
이 말씀은 평화의 과정을 통일로 인식하는 <과정통일론>보다 명쾌하다. 평화의 과정이란, 우여곡절로 얼마나 지난(至難)했던가?
“내 영혼, 갈라진 영토 한쪽에 갇혀있지 않을 것!!”
이 말씀은 6.15선언에서 남북이 합의 한 <낮은 단계의 연방제 통일론>보다 단순하다. 연방제에 애매하게 낮은 단계를 설정함으로, 통일로의 동력을 감소시키지 않았던가?
“내 영혼, 갈라진 영토 한쪽에 갇혀있지 않을 것!!”
이 말씀은 남북 사이 복잡계를 비집고 들어가기에 충분히 단순 명쾌하다!! 단순 명쾌한 이 한마디는 <창조적이며 담대한 변증법적 통일론>을 가능케 한다. 코리아의 통일문 열쇠로 충분하다는 말이다. 열려라! 참깨! 열려라! 통일문!!


끊임 없는 비움으로만이 지켜지는 담대하고 예리한 칼날이다. 있음과 없음의 경계에 피는 창조적 불꽃이다. 같음과 다름의 경계에 피는 변증법적 통일꽃이다. 하여, 모든 경계에는 꽃이 피리니!!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 함민복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서
담장을 보았다.
집 안과 밖의 경계인 담장에
화분이 있고
꽃의 전생과 내생 사이에 국화가 피었다.

저 꽃은 왜 흙의 공중섬에 피어 있을까.

해안가 철책에 초병의 귀로 매달린 돌처럼
도둑의 침입을 경보하기 위한 장치인가.
내 것과 내 것 아님의 경계를 나눈 자가
행인들에게 시위하는 완곡한 깃발인가.
집의 안과 밖이 꽃의 향기를 흠향하려
건배하는 순간인가.

눈물이 메말라.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지 못하는 날
꽃철책이 시들고
나와 세계의 모든 경계가 무너지리라.
통일코리아의 영광을 위하여!! 내 영혼은 있음과 없음으로, 같음과 다름으로, 갈라진 영토 한쪽에 절대 갇혀있지 않을 것이다! 다만, 38 경계의 칼날 위에 꽃으로 피었나니! 아니 모든 경계는 원래부터 꽃이었나니! ‘염화시중(拈花示衆)의 미소‘로다!
지금바로 민족통일로 가자!!
통일당준비위원회
우 성




경계인의 사색  송두율 저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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