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前 NCCK 총무, 現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원장 김영주 목사. ©기독일보DB
부활절입니다.
이 부활 주일을 맞아 부활의 의미가 무엇인가 생각해 보고 다시 생각해 봅니다.
부활이라고 하면 흔히들 생각되는 것이 죽은 자가 과연 부활할 수 있겠느냐? 그것은 어떤 근거로 말하는 것인가? 하는 질문 밖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성경의 기록에도 부활은 나사로와 예수 밖에 없습니다. 또 예수님 이후로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는 2천년이 지나도록 아무도 없는데, 이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이야기로 기독교는 2천년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 부활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최근에 만난 한 지인과의 대화에서 어떤 사람의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분은 과거 우리나라에서 유명했던 한 분의 비서로 일한 적이 있었는데, 모시던 분이 세상을 떠난 지가 여러 해 지났지만 아직도 1년에도 네 차례는 무덤을 찾아 간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무덤 앞에서는 자신은 지금 무슨 사업을 어떻게 하고 있으며, 또 어떻게 지냈고, 심지어는 가족들의 이야기 까지 마치 상사에게 보고하듯이 한다고 합니다. 마치 자신이 모시는 신(神)에게 (기도)하듯이 말입니다.
이 말을 들으며 저는 예수님께 늘 내 삶을 보고하면서, 제가 이렇게 살고 있으며, 또 어떻게 잘못 살았다고 고백하면서, 그러나 힘을 더해 주셔서 제게 늘 주님의 부활을 인식하며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사는가를 생각하며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활절 설교를 준비하면서 듣게 된 이 이야기를 통해 내가 신앙인으로서 정말로 예수 제자 되기 위해 내 삶을 갈고 닦고 고백하고 예수께로 가까이 가고 싶어서 오늘 설교의 제목을 '부활의 삶' 이렇게 먼저 정해놓고 말씀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요한복음의 말씀(요 20:1-18) 을 들여다보면 이렇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라는 여인으로부터 부활사건이 전해집니다. 이렇게 막달라 마리아로 시작한 예수님 부활의 이야기는 마지막에도 막달라 마리아가 또 다시 등장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가서 예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보고 제자들에게 큰일이다. 예수 시신 없어졌다고 알리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전언을 들은 예수의 제자들은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무덤가로 달려갔다고 기록 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좀 더 자세히 보면 베드로가 뛰어가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 앞질러 도착합니다. 그러나 베드로 보다 먼저 도착한 젊은 제자는 베드로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베드로가 먼저 무덤 안에 들어가자 뒤따라 들어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덤에 들어간 제자들은 예수의 시신은 없어지고 세마포가 잘 개켜져 있는 것을 보고 자신들이 모인 곳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이 부활사건에 대해 유대인들은 무서워서 집에 문을 잠그고 숨어 있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는 어떻습니까? 제자들이 돌아가고 난 뒤, 무섭고 시신 없어진 무덤에서 슬피 예수 생각하며 울고 있습니다. 나중에 두 천사가 나타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잘 알듯 요한복음은 요한공동체가 자신들의 신앙을 위해서 새롭게 재편집해서 썼던 복음서입니다. 따라서 요한공동체는 베드로보다도 요한사도를 더 위에 두고 싶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예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가장 먼저 믿은 사람이 사도 요한이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또 요한은 자신이 무덤에 먼저 도착했지만 베드로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베드로를 앞서 들여보내는 배려도 할 줄 아는 겸손한 사람이었음을 비칩니다.
이처럼 어떻게든 요한이 베드로보다 훌륭하다는 점을 내세우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그런 욕심이 있었던 그런 기록이 요한복음서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요한복음서에서도 뒤집을 수 없는 것이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기술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 시신 없어진 것을 가장 먼저 알고 제자들에게 알려줬습니다. 또 제자들은 시신이 없어진 것을 보고, 다들 자기 집으로 돌아갔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끝까지 앉아 슬피 울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만났습니다. 그리고는 숨어있는 제자들에게 살아계신 예수를 보았다는 말도 전하는 장면입니다.
저는 이런 장면을 보면서 부활을 누가 경험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부활을 경험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이런 표현을 할 수 잇을 것입니다. 부활은 정성이다.
오늘날 성경을 보면 사도 베드로와 요한의 사이에는 계층구조(hierarchy structure, 階層構造])라는 것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무덤에 늦게 도착했지만 베드로를 앞장세우는 이런 계층적인 질서가 있어야 복음이 전해진다는 당시 교회의 모습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계층적인 질서가 예수의 죽음과 예수의 부활을 경험하도록 할 수는 없는 겁니다. 오로지 예수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예수와 살았던 삶을 다시금 되새기고, 예수가 지금 여기 계시지 않음을 애통하고 슬퍼하며, 그 예수를 내 마음 속에 기억하고 다시금 되새기면서 그 분의 삶을 따르겠다고 결심하는 사람만이 예수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공감능력을 상실한 교회입니다.
슬퍼하는 사람, 아파하는 사람, 고통 받는 사람의 자리에 한국교회가 찾아가서, 그 사람들의 고통과 아픔과 흘리는 눈물에 동참하지 않고, 교회가 갖고 있는 교리와 틀을 갖고 포섭하려고만 하고, 이것을 복음이라 전하고, 복음을 알아듣기 쉬운 이야기로만 포장을 하다 보니 복음이 상품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공감의 능력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은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할 것 같습니다. 제도를 세우고 복음을 재창조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말하는 오늘 본문 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여러분도 잘 아시는 대로 굉장히 분쟁이 많았던 교회입니다. 이분들이 바울선생의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합니다.
하나는 바울은 도대체 무슨 권위로 사도가 됐는가? 바울이 사도인가? 바울이 과연 베드로 , 야고보 등 예수님의 사도 반열에 들어 있는가? 있다면 무슨 권위로 되어 있는가?
둘째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사도들의 전승에 따른 복음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바울 선생은 고전 15장 1절 이하의 말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전하는 복음은 내가 전달받은 것이고, 여러분이 전달받은 것이 확실하다. 다시 말하면 내가 만들어 낸 복음 아니라 사도들의 전승으로부터 기독교인이 간직했던 교회란 제도와 틀이 만들어지기 전 여인들이 만났던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 복음을 내가 전달 받은 것이고 내가 전달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니 내 복음이 바울의 만든 복음이 아니다. 염려하지 말라. 당신 권위는 뭔가? 부활하신 예수께서 게바(Cephas)에게 나타나고,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난 후 마지막에, 만삭되지 못한 채 낳은 나에게로 나타났고, 내가 부활하신 그 분을 만났다. 그 분이 나를 사도로 세워주셨다. 그러니 그 권위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이것은 확실한 근거 위에 내가 믿고 내가 지킨 것이니 여러분들도 그것을 지켜라. 그 외 다른 복음이 없다. 그리고 흔히들 그러니까 정말로 우리가 살아날 수 있느냐 없느냐, 복음은 회상(回想) 이기도 하지만 회상이 아니다. 부활은 그 분이 살아나심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살아계시고 앞으로도 살아나실 것이다. 그것은 너희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예수가 살아나서 예수가 우리의 모범이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너희들도 예수님 말씀대로 살고 예수님 살아갔던 삶을 산다면 너희도 부활할 것임을 믿어라. 지금은 희미하게 보이는 것 같지만 나중에 분명히 보게 될 것이다"는 이야기입니다.
바울 선생은 이렇게 복음이 예수그리스도의 삶을 근거로 했으며, 그 분은 부활했고, 여러분도 그 부활의 경험을 갖고 살아야 하고 또 여러분들도 부활할 것이라고결론을 내립니다.
제가 여러 사람들과 부활절 예배, 부활절 설교를 놓고 이야기 하다가 사도 베드로의 모습에서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따르던 선생이 처형을 당하자 무서워서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서 부활을 경험도 못하던 모습의 베드로가 후일 사도행전의 기록에서는 공개적으로 여러분이 처형했던 그 예수가 3일 후 부활했다고 말하면서 "우리는 그 분과 만나서, 하나님과 만나서 같이 밥도 먹고 함께 지내기도 했습니다. 우리의 복음은 확실합니다. 죽은 자가 부활하셨습니다." 라고 힘주어 말하는 모습을 봅니다.(행 15장)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께서는 의심 많은 도마에게 말합니다.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더 복 있다."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우리의 눈으로 예수가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사실을 볼 수 없습니다. 물론 경험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서는 "보지 않고 믿는 너희가 복 있다. 너희가 꼭 너희가 손으로 만지고 느껴야겠느냐? 보지 않고 믿는 너희가 복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000년 전 죽었던 나사렛 예수, 그리고 부활했던 예수의 경험을 지금 2천년 후에 우리는 듣고 있지만 이 말씀을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로 보지 않고 예수를 믿는 믿음의 사람인지. 아니 2천 년 전에 나사렛 예수가 소경을 고치고, 다리 저는 자를 고치고, 문둥병자의 몸을 깨끗하게 하시며 그들을 만지고 고쳐주신 예수님을 지금 느끼고 있는지.
또 우리는 가난하고, 어렵고, 힘들고, 병든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주려고 공감하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지를 돌아보면서, 우리가 어렵고 힘든 사람들 그들과 가까이 하면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할 수 있다는 확신도가 가져야 할 때라 생각합니다.
부활은 그래서 거듭남이요, 부활은 정성을 다하는 것이요, 부활은 공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막달라 마리아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부활절 설교를 마치려 합니다.
자신이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을 때 '네게 죄가 없다' 말씀하신 그 고마운 말씀을 잊지 못해서, 그 고마운 말씀을 생각하며 무덤가에서 엉엉 울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예수께서는 가장 먼저 나타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참으로 힘들고 어렵고운 소외당해 고통 받는 이웃들과 함께 했던 그 예수를 다시금 생각하면서, '아!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구나! 나도 그 예수님이 그립다.' 이 마음으로 온 정성 다해 가슴을 찢으며 눈물을 흘린다면,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듯이 우리도 만날 수 있을 것이고, 우리가 부활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자신이 오래 전에 모시던 한 인간의 무덤 앞 에도 1년에 네 번이나 찾아가 자기의 생활을 보고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부활의 아침에 막달라 마리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앞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는 그 정성스런 막달라 마리아를 닮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러한 부활의 삶을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에게 기쁜 부활절이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임하시기를 빕니다.
* 설교는 지난 2018년 4월 1
[출처]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79721#sh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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