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30

[한홍구-서해성의 직설] 나라가 그 꼴 된 게 다 일제 탓이랴 : 칼럼 : 사설.칼럼 : 뉴스 : 한겨레

[한홍구-서해성의 직설] 나라가 그 꼴 된 게 다 일제 탓이랴 : 칼럼 : 사설.칼럼 : 뉴스 : 한겨레


[한홍구-서해성의 직설] 나라가 그 꼴 된 게 다 일제 탓이랴

등록 :2010-08-19 

이만열 교수는 “이제는 ‘치욕’에만 방점을 찍지 말고 식민지배의 경험을 자산으로 해서 동력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역사학자이자 복음주의 기독교인 이만열과 함께 100년전의 ‘치욕’을 깊이 들여다보다
[한홍구-서해성의 직설]
제14화 국치 100년의 명령

인터넷 조선왕조실록을 아시는가.

간단한 키워드 검색 하나면 뚝딱이다. 방대한 한문투성이 사료들의 번역본을 입맛대로 찾을 수 있다. 학생이든, 기자든, 소설가든, 종친회 관계자든 누구나 쉽게 애용한다. 시디로 500만원까지 하던게 무료가 됐다.

오늘의 초대손님은 바로 그 인터넷 조선왕조실록을 최초로 제안해 만든 장본인이다. 이만열(72) 숙명여대 명예교수. 그는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2003~2006)을 지내는 동안 대중적 역사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20억원의 재원을 마련해 이 프로젝트를 완성시켰다. 역사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이라면, 모두 그에게 몇백만원씩의 수혜를 받은 셈이다.

그는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 외국인의 인권과 의료봉사를 위한 (사)국제민간교류협회 대표 등 책임있는 역사학자로서 왕성한 사회활동을 했지만, 복음주의 교단에 적을 둔 신앙인이자 교회사를 연구한 학자로도 유명하다. 그가 1973년에 발표한 논문 ‘한말 기독교인의 민족의식 형성과정’은 알 만한 이들에겐 초기 기독교사의 고전으로 꼽힌다. 이는 1991년 그와 김진홍 목사가 주축이 된 기독교월간지 <복음과 상황>의 창간으로 이어졌다. 그를 생각할 때마다 ‘역사’와 함께 ‘기독교’가 떠오르는 이유다. 오늘의 큰 주제는 8월29일로 100년을 맞는 ‘경술국치’였지만, 자연스레 ‘기독교 이야기’를 피해갈 수 없었다. 진행·정리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한홍구-서해성의 직설서해성(이하 서) 오늘은 평생 공부만 해온 분을 모셨습니다.

이만열(이하 이) ‘공부만’이라고 하니 부담스럽군요. ‘꽁생원 중 처음’이라고 하면 모를까.(웃음)

한홍구(이하 한) 기독교사의 태두이시니 종교 이야기로 말문을 터보죠.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문제가 한국기독교 분열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이 해방 뒤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 움직임이 교계 안에서 벌어졌지요. 그런데 ‘나와 하느님의 문제이지 교단 문제가 아니다’ ‘옥에 간 사람들보다 우리가 더 괴로웠다’는 식의 변명이 굳어가면서 분열로 이어졌지요. 장로교 내에서 신사참배 거부한 사람들이 고신파라는 소수파로 떨어져 나오게 되고, 이듬해(52년)엔 성경 해석을 놓고 ‘기장’(한신)이 갈라지죠.



뉴라이트 김진홍 목사와의 인연



한 70년대 민주화운동에서 개신교 역할을 빼놓을 수 없는데, 요즘은 교회 내부에서 왜 진보적 목소리가 축소됐을까요.

이 안타깝게도 김대중, 노무현 정권 들어오면서 주요 기독교인들이 권력에 가까이 다가갔죠. 제3자적 거리를 유지했어야 했는데. 절로 예언자적 목소리도 줄어들 수밖에 없었지요. 오늘날에는 ‘열린보수’ 쪽에서 상당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지요.

서 장기려 박사 같은 경우 철저히 보수적이었지만 자기헌신을 전제로 비판하니까 더 힘이 컸다고 여깁니다. 북에서 면회신청이 왔는데도 모든 이산가족이 다 만난 뒤에나 가족들과 만나겠다는 고집이 대표적이었죠. 종교인의 발언에 현실 없는 것도 문제지만, 헌신 없는 종교인의 발언은 ‘말씀사기’에 가까워요. 요즘은 ‘돈의 크기’만큼씩 말씀하고들 있죠.

이 설교란 성경을 현실에서 육화시키는 거거든요. 현실이 없는 말씀은 공허할 수밖에.

한 뉴라이트 일부 목사들 설교 테이프에 ‘5·18은 인민군이 내려와 학살한 것’이라는 게 있어요.

이 나도 대책이 없습니다.(쓴웃음) 어떤 정권이나 세력이 제 마음에 안 들면 과장을 해서 설교를 하지요. 그렇게 해서 형성된 생각을 바꾸려고도 하질 않아. 하느님이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에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기본적인 생각만 하더라도 그토록 무모한 말을 할 수야 없죠.

서 종교적 맹신이 발전하다 보니 올해 6·25 60주년 기념일에 조지 부시를 불렀죠. 누가 봐도 세계사적으로 반평화적인 인물인데.


이 옳습니다. 도대체 정신이 있는지 모르겠어.

한 한동안 뉴라이트 김진홍 목사와 함께 진보적 기독교잡지 <복음과 상황>을 만들어오셨는데 언제부터 생각이 갈렸는지.

이 김 목사는 김대중 정부 때까지는 북한을 많이 도왔어요. 노무현 정부 때 정권의 아마추어리즘으로 사회갈등이 증폭된다고 생각한 듯해요. 곧 한나라당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을 섰지. 이래저래 몇번 만나 만류하는 말도 하고, 메일을 보내 ‘제3자적이고 예언자적인 입장으로 돌아가라’고 충고를 했는데, 그 때문인지 동기는 잘 모르지만 두 주 전에 엠비 정부를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더라고.

서 엠비를 ‘먹통권력’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 남의 소리를 전혀 듣지 않잖아. 지식인들이 그렇게 성명내고 하면 듣는 시늉이라도 해야지.

한 종교적 확신이 지나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데…신자로서 엠비는 어떤지요.

이 맹신주의에 들면 그렇게 되죠. 오히려 엠비는 건설, 토건을 통해 쌓아온 자기 확신이 있지 않나. 그 심성은 종교성하고는 관계없어요.(웃음)

한 한국 침탈 100년을 맞아 일본 총리가 담화를 발표했는데.

이 실망스럽기 짝이 없어. 일본으로서는 ‘100년’이라는 사죄하기 아주 좋은 기회였는데. 지난 5월 한일지식인공동성명에서 강제에 의해 이뤄진 조약은 원천적으로 무효라고 했어요. ‘1948년 한국정부 수립 뒤부터 무효’라고 주장해온 일본의 논리가 설 자리가 없게 된 거죠. 이 해석에 붙여 앞으로의 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살리지 못했어요.



‘친일 행적’ 털고 갈 기회를 놓친 조선일보



서 우리가 ‘한일병탄 무효’ 내지는 ‘사과’ 요구 중심으로만 매달려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식민지 뒤처리 과정에서 만들어진 분단이나 민주적 과제를 온전히 수행해내서 사과 받은 것 이상 힘을 갖추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거죠.

이 이제 일본에게 더 이상 기대하지 않았으면 해요. 앞으로 식민지적 고통과 울분을 민족적 ‘자산’으로 승화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오히려 역지사지해서, 가령 (한국군이 참전한) 베트남 문제를 솔선해서 해결할 수 있지요. 일본에 사과 요구를 하면서 베트남에 대해 무시한다면 이중적인 것이죠. 외국인 근로자 차별도 마찬가지고.

서 동북아시아에는 놀랍게도 네가지 체제가 존재합니다. 입헌군주제 일본, 시장사회주의화한 중국, 남한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북한이라는 독특한 체제. 내용과 형태가 다른 이 네개 체제의 뿌리가 결국 식민지와 맞닿아 있거든요. 일본의 제대로 된 과거청산은 이 상이한 세력에 쓸 만한 공통분모 하나를 만들어내는 일이 될 수 있을 텐데.

이 나프타(북미자유무역협정), 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 이유(유럽연합) 등 지역연맹이 많잖아요. 동북아에서만 그게 안 돼요. 환경문제 해결하려고 해도 3국이 협력해야 하는데. 일본이 먼저 솔직하게 ‘식민지 원천무효’를 해주면 오늘날 중국 패권주의에 대해서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될 텐데 말이죠.

한 친일인명사전 만들 때 초대 위원장을 하셨는데.

이 처음에는 1년 안에 후딱 내겠다고들 하고 있었어요. 내가 일을 맡으면서 앞으로를 생각해서 정확한 증거 위주로 하자고 늦췄어요. 친일할 적에 대개 개인보다는 단체를 통해서 하기 때문에 먼저 단체사전을 만들었는데, 2~3년이 지났더군요. 국사편찬위원장으로 가는 바람에 더는 못했지.

서 친일인명사전은 시민, 민중이 만들어낸 대단한 기록물이죠. 그런데 정작 돈을 냈어야 하는 이들은 친일한 사람들 후손이었어야 하지 않나 싶어요. ‘아버지의 부끄러움을 돈 주고 사마.’ 이게 아직 없지요. 도리어 사전 제작작업을 방해했지.

이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하게 된 계기가 임종국 선생의 친일문학론이잖아요. 그분이 먼저 자기고백부터 했거든. 아버지가 친일파였노라고. 사전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법을 만들면서 본격화 됐어요. 국사편찬위원장 할 때, 한 신문사 사주한테서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왔어요. 공직에 있는 사람으로 사적 만남은 곤란하다고 했더니, 뒤에 그쪽 기자들이 찾아왔길래 이런 이야길 했어요. ‘당신들이 먼저 고백을 하라. 그러면 일이 굉장히 쉽게 풀리고 민족적으로 화해가 될 가능성이 있다.’ 그 신문사는 신간회와 관련해 노력을 많이 한 편이고….

한 아, 조선일보.

이 자꾸 변명을 해대니까 민족운동 한 부분도 친일 쪽으로 무게가 더 가는 거 아니냐고 했더니 그쪽 기자들도 맞다면서… 근데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거야…. 친일을 했던 신문사에서 앞장서 자기 고백을 하고 자기 수치를 드러내면 우리 사회분위기가 달라질 텐데.

한 한국 보수세력부터 친일 문제에 관해 털고 갈 수 있으면 싶습니다. 일본에 붙어 ‘전쟁 나가라, 정신대 나가라’고 한 짓은 같은 민족이 집권했을 때도 안 되는 거잖아요. 당사자들이 있었으면 진작 반성했을 텐데 마름들이 정권을 잡아 못 하는 건지.(웃음)

이 스스로 까발릴 필요는 없겠지만 이런저런 부분에 대해서 잘못한 거 인정한다고 얘기하면 오히려 조상 허물을 벗겨주는 일이죠.

한 지금 뉴라이트들은 일제가 근대문명 초석을 놓았다고 미화하잖습니까.

서 어떤 작가가 위인전적 전기를 써왔는데 아부를 하느라 청년 박정희가 광복군 활동을 한 것처럼 미화했어요. 그걸 본 박통이 화를 버럭 내며 ‘이건 아니다’라고 했다는 기록을 읽은 적이 있어요.

한 지금은 그런 최소한의 염치조차 없어졌죠.



다 일본책임? 그럼 느그는 뭐했나?



서 우리가 국치를 당한 까닭을 말할 때 근대 주체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 위정척사, 개화파, 민중의 한계를 각각 지적한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 나라가 그 모양이 된 걸 몽땅 일본한테 책임을 미뤄버리면 역사를 타율적으로 보게 되죠. 일본이 강해서 영국, 미국, 러시아, 중국과 합작해서 우릴 먹어버렸다고 하면 ‘그럼 느그는 뭐했냐’고 돼버리잖아요. 결국 민권을 제대로 신장시키지 않아서 그런 거죠. 일단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외세에 의존하지 않았어야죠. 갈등이 되더라도 농민군 요구를 할 수 있는 데까지 수용했어야 해요. 또 독립협회가 민권신장을 통해서 국권을 지켜보자고 했잖아요. 동학혁명 문제를 잘 풀고 독립협회운동 일어났을 적에 민권을 강화시켜 1910년까지 14~15년 동안 잘 했더라면 여러모로 달라졌을 거라고 여깁니다.

한 독립협회 회장이 이완용이었잖아요. 나중에 딴 방향으로 돌아서버리는데, 그런 중요한 운동에서 책임 있는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 운동의 이상과 지향과는 다른 길을 걸었단 말이죠.

이 민중과 역사발전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그렇지요. 백성의 힘을 키우지 않아서지요. 결국 도적떼들이 와서 보고 윗대가리들만 조종하면 된다고 판단한 거예요.

서 파리코뮌 72일에 비하면, 동학세력은 집강소를 통해 호남 53개 군을 6개월 동안 다스렸어요. 문자 그대로 단군 이래 최초로 민중이 자기 땅과 자기들을 다스린 거죠. 어쨌든 상당한 자치능력을 보여준 셈인데, 서울의 민권운동과 잘 결합할 수만 있었더라면 하는 상상도 하게 되는군요.

한 독립협회가 동학농민전쟁에 자극도 받았지만 위기감이 더 컸죠.

서 우리 둘(한, 서) 다 황현을 퍽도 좋아하는데 동학농민군을 ‘비도’라고 했어요. 독립신문이나 필립제이슨(서재필)도 마찬가지였죠. 붓만 쓰는 자들은 낫 든 자들이 무서운 법이죠.(웃음)

이 1897년 광무개혁이 이뤄지는데, 민권보다 황제권을 강화시켜요. 1905년 을사‘조약’이나 1910년 강제병합‘조약’을 보면 ‘황실의 안녕’이니 뭐니 하니 말들만 있어요.

한 입헌군주제나 공화제 논의가 나라 망하기 전부터 있기는 했어도 미약했는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은 한 큐에 됐거든요. 고종이 죽으니까!

이 오해 소지가 있지만, 결국 황제가 죽었기 때문에 ‘민국’이 나올 수 있었죠.

서 숱한 역사책에 고종의 책임을 묻는 글을 본 기억이 없어요. 나는 국치 전후해서 고종에게 가장 많은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오늘날도 대통령이 다 내린 (잘못된) 결정을 ‘각하께서 그러셨겠나’ 하는 말을 들을 때가 있어요. 기가 막히죠.


한 이런 말, 해도 되나 모르겠지만… 고종은 명나라 마지막 숭정황제처럼 1910년 나라가 망할 때 돌아가셨어야 하는 게 아니냐. 그때 조선이라는 500년 된 나라가 망하는 걸 실감할 수 없었잖아요. 살아도 살아계신 게 아니었죠.

이 근대라는, 과거 왕들은 할 수 없었던 일을 할 기회였는데, 그걸 살리지 못한 군주가 됐죠. 나라는 망하고, 자신의 명예도 지키지 못한 군주로.


한 김일성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 ‘한 나라의 왕비가 궁중에서 외국테러단의 칼에 맞아 죽고, 왕이라는 것은 남의 나라 공사관에 가서 1년 동안 갇혀 있고, 왕의 아버지는 외국에 납치되어 가 있고, 왕궁을 지키는 것도 남의 나라 군대에 맡겼으니 이 나라는 누가 지켜주고 돌보겠는가’라고 간단히 정리했지요.

서 왕족은 나라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인데, 일제 강점기 동안 뭐라도 했어야 해요. 탈출에 기어코 성공해서 망명을 하든, 하물며 연필 칼로라도 위협하고 ‘자해’라도 해서 분기를 일으켰어야죠. 한국에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없는 중요한 근거 중 하나라 생각합니다. 나랏님도 책임을 안 지는데 백성이야….



한심한 고종…1907년에 끝까지 버텼어야

이 1907년 7월16일 양위 요구 때 고종이 끝까지 버텼어야 한다고 봐요. 헤이그밀사 사건 책임 추궁을 당할 때도 ‘모른다’가 아니라 ‘내가 그랬다’고 당당하게 나갔어야지. 을사조약을 비준하지 않았다고 세계 각처에 보냈잖아요. 조약은 무효다, 그래서 사람을 보냈다고 큰소리치고 끝까지 싸웠어야 했어요. 황제를 죽이기야 했겠어요? 유폐당하거나 하면 민중들이 일어날 기회가 생기기도 할 텐데. 협박하니까 흐지부지… 에이그!

서 난세의 지도자감은 아닌 거죠. 태평성대면 모를까. 근데 통치를 너무 오래 했어.

한 오죽했음 대원군이 아들을 쫓아내려 했겠어.

서 ‘일제강점’이 법적, 인적으로 청산된다 해도 이른바 ‘감각적 청산’은 도장을 찍는다고 해서 이뤄지는 게 아니잖아요. 이는 오리엔탈리즘 등 포스트 식민주의 문제와 깊게 맞물려 있습니다.

이 이제 ‘치욕’을 넘어 식민지배의 경험을 자산으로 해서 동력화해야 합니다. 제국주의 국가 사람들은 도저히 가질 수 없는 것이지요. 도처에 식민지적 상태에서 고난 받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들의 눈물을 씻어주고 고통을 덜어주는 데 적극 나서야 해요.

한 식민지였던 나라에서 비록 분단으로 귀결됐지만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달성했지요. 사실 민주화의 힘으로 산업화를 견인해낸 거죠.

서 앞으로 100년은 적어도 100년 뒤에 자랑할 만한 것이어야 할 텐데, 그러려면 최소한 분단 극복, 제국주의의 간섭에서 완전한 자주를 이뤄내야만 합니다. 그것이 국치 100년의 명백한 명령이라고 믿습니다.












■ 직설잔설

국치 101년



이대로는 100년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국치 99년을 며칠 앞둔 날 한홍구와 서해성은 남산 북쪽 기슭을 얼쩡거리고 있었다. 예장동 2-1. 교통방송 지나 왼쪽으로 꺾으면 나오는 굵은 나무 두 그루가 서 있는 바로 앞쪽 풀밭이 한국통감관저 터다. 거기 목조건물 2층에서 이완용은 데라우치 마사타케에게 문서에 써서 나라와 백성을 바쳤다. 둘은 여러 방송, 신문 기자들에게 그걸 설명하고 있었다. 그곳과 연결된 한 뼘 떨어진 둔덕에서 ‘중정’이 시작되었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서울시는 ‘남산르네상스’ 플랜으로 일대를 새로 조성하고자 하고 있었다. 자칫 통감관저 터도, 분단독재의 집행자 중앙정보부 흔적도 사라질 판이었다.

그 자리에 가장 고통스런 기억 하나를 재조립하고자 했다.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하던 순간을 치욕으로 일으켜 거울로 삼고자 했다. 통감관저는 경복궁 뒤로 옮기기 전까지 당연히 총독관저였다. 일제강점기의 기차역사, 소금창고 한 채도 근대문화유산이라고 보전하는 판에 조선을 통째로 먹어치운 목조건물 두 동을 짓는 일이 그토록 어려우랴 싶었다. 정말 이대로는 국치 100년을 맞고 싶지 않았다.

며칠 전 서울시는 강제병합 100년 공동행동 한·일실행위원회가 이곳에 통감관저 터라는 표지석을 세우고자 한 일을 실질적으로 막았다. 집은커녕 여전히 돌 하나도 세울 수 없는 형편이라니. 대체 식민지 기억은 왜 여전히도 두려운가.

100년 전 스스로 목숨을 버린 황현은 지지리도 향촌 보수였다. ‘나는 사실 죽을 의무가 없다…선비 기르기 오백년인데, 나라가 망하는 날 한 사람 죽는 자 없다면…’ 그 의연한 결기가 우리네 치욕을 오늘에도 가까스로 덜어주고 있기에 절로 머리 숙이지 않을 수 없다.

국치를 기록하는, 이런 일이야말로 내남없이 나서야 마땅하지만, 어쩌면 보수에게 더 빛나는 몫이 아닐까. 서울시의 결정을 황현처럼 나서서 꾸짖을 보수 한 사람 없다니 도리어 딱하기만 하다. 이 땅 보수들의 식량은 분단이라는 동족의 피가 묻은, 저질 식품뿐인가. 그렇다면 그들은 세상과 권력을 갉아먹는 벌레일 뿐이다.

이대로 국치 100년을 보낼 수는 없다. 다시 맞을 101년이 벌써 두려운 까닭이다. 서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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