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위안부』, 지식인을 말하다》, 《『제국의 위안부』, 법정에서 1460일》: 박유하, 위안부 피해자 모독 계속하기로 작정하다 | 노동자 연대
《『제국의 위안부』, 지식인을 말하다》, 《『제국의 위안부』, 법정에서 1460일》
박유하, 위안부 피해자 모독 계속하기로 작정하다
차승일
252호
2018-07-05 | 주제:
▸ 맑시즘2018 — 18년째 열리는 국내 최대 마르크스주의 포럼,7월 19일(목)~22일(일), 장소: 고려대학교, 주최: 노동자연대운동을 비판하더라도 최소한 운동의 대의에 대한 존중은 필요하다. 박유하는 그 선을 넘었다.ⓒ이미진
“제국의 변호인” 박유하가 새 책 두 종을 동시에 출간했다. 《『제국의 위안부』, 지식인을 말하다》(뿌리와이파리), 《『제국의 위안부』, 법정에서 1460일》(뿌리와이파리)이다. 이로써 박유하는 ‘위안부’ 피해자 모독을 지속할 작정임을 밝혔다.
박유하는 《제국의 위안부》(뿌리와이파리)라는 책을 쓴 세종대 일어일문학 교수다. 위안부 피해자들은 그 책이 자신들을 명예훼손했다고 보고 민사·형사 소송을 제기했다. 지난해 10월 27일 박유하는 형사재판 2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현재 이 사건은 대법원으로 가 있다.
위안부 피해자들이 소송을 제기한 뒤 《제국의 위안부》는 큰 논란거리가 됐다. 진보적 지식인으로 여겨지는 유시민, 장정일, 홍세화, 김규항 등이 소송에서 박유하를 편들었다. 그들은 형사재판 2심에서 박유하가 패소한 뒤에 결성된 ‘《제국의 위안부》 소송 지원 모임’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대신 뉴라이트가 가세했다.
이 논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위안부 문제는 단지 과거사 문제가 아니라 현재에도 중요한 이슈이다. 아래에서 설명하겠지만, 무엇보다 현재의 제국주의와 밀접하게 연관된 이슈이다. 바로 이 때문에 박유하 주장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와 대결하는 것은 좌파가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오독과 곡해”의 여지가 없음
결론부터 말하면, 두 책은 박유하의 아집과 독선으로 점철된 막돼먹은 책이다.
박유하가 쓴 《제국의 위안부》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재일 조선인 학자인 정영환 교수가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 『제국의 위안부』의 반역사성》(푸른역사)을 써서 상세히 비판한 바 있다. 박유하는 정영환 교수의 “비판이 오독과 곡해로 가득한 것”이었다고 일축한다.
그러면서 다른 학자들의 비판과 위안부 피해자들의 반감은, 더 나아가 자신에 대한 국민의 “강한 편견”은 정영환 교수의 “오독과 곡해”를 그냥 받아들인 소치일 뿐이라고 본다. 이런 시각을 바탕으로 박유하는 자신에 대한 소송이 피해자들의 주체적 판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지원단체”의 잘못된 전달에 의해서 제기됐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피해자들의 가처분 신청이 인정돼 《제국의 위안부》에서 삭제된 진술들을 보면, 오독의 여지가 없다. 예컨대 다음과 같다.
“가라유키상[돈을 벌러 외국 위안소로 자발적으로 간 일본 성매매 여성]의 후예, ‘위안부’의 본질은 실은 바로 여기에 있다.”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군의 관계가 기본적으로는 동지적인 관계.”
“‘조선인 위안부’는 피해자였지만 식민지인으로서의 협력자이기도 했다.”
“위안부 제도의 근간이 관리매춘”이라는 박유하
박유하는 자신이 위안부의 고통을 여러 차례 언급했는데 왜 없는 셈 치냐고, “동지적인 관계”나 “협력자”라는 표현은 특수한 문맥 하에서 쓴 것이라고, 자신의 의도는 그저 감춰져 있던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자 한 것일 뿐이라고 항변한다.
그러나 위안부 피해자들의 분노를 일으킨 “동지적 관계”나 “협력자” 표현은 일본군이 위안부 제도를 체계적으로 조직하지 않았다는 박유하 자신의 견해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박유하는 한 일본인 학자의 말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쓴다.
“하야시는 2015년에 “‘위안부’ 연구의 성과”를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간략히 요점만 정리해 둔다.
“1) 일본군 위안소의 계획, 설립, 운영에 일본군과 정부가 조직적으로 관여했다. 2) 일본군은 이른바 위안소를 점령한 대부분의 지역에 설치했다. 3)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군에 의해 조직되고 관리된 명확한 성노예제이고, 성차별, 민족차별, 계급계층차별 등 차별의 복합(적 결과)이자 여성의 인권에 대한 중대한 침해였다. 4) ‘위안부’ 제도는 제도화된 위안소부터, 부대별 개별 위안소, 납치감금 하의 윤간, 개별 강간 등 다양한 전시 성폭력 중 하나다. 5)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당시의 국제법에 위반되는 행위이고 전쟁 범죄이며, 일본 형법 226조 위반에 해당한다. 6) ‘위안부’가 된 여성의 고통은 전쟁 당시뿐 아니라 전후에도 이어졌다.
“대체적으로 찬동하지만, 내가 다소 이견을 갖는 부분은 1)에서의 체계성의 일관성 여부, 3)에서의 군의 주체성 부분(시기와 공간에 따라 달랐다)과 ‘위안부’ 동원 과정 관계, 5)에서의 위법성 여부 부분뿐이다.”
주요 항목에 이견이 있다면서 무엇을 “대체로 찬동”하는지 궁금하지만, 아무튼 박유하는 이번에 출간한 책에서 “조선인 위안부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총체적인 분석을 시도”한
결과로 세운 자신의 견해를 명확히 밝혔다.
“위안소라는 곳이 … 기본적으로 ‘임금’이 지불되는 장소였다는 중심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 “조선인 위안부 제도”의 근간이 관리매춘이라는 사실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저의 문제의식은 식민지로 만든 나라의 국민을 ‘제국 확장’에 가담시킨 행위 자체를 비판하는 ‘제국 일본’ 비판에 있고, 책 제목은 바로 그런 의식을 담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한, 주체적이건 비주체적이건 결과로서의 ‘가담성’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주장의 목적보다 역사적 사실 부합이 먼저
그러나 이미 1992년에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는 일본 정부가 위안부 동원에 관여했음을 입증하는 자료를 일본 방위청 방위연구소 도서관에서 찾아내 공개한 바 있다. 그는 일본군이 “장병에게 현지에서 ‘성적 위안’을 제공한다는 발상으로” 군 위안소를 만들어 운영했고, 참혹한 침략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징집한 군인들의 불만이 상관인 자신들에게 오지 않도록 식민지 여성을 ‘위안’으로 제공하는 제도를 고안했다고 지적했다. 또한 일본군 위안부 제도를 조직적으로 운용한 주체는 바로 일본군임을 증명했다.
그 뒤로도 연구는 진척돼, 일본군 위안부 제도가 일본 국가가 저지른 성노예화 범죄라는 것이 입증됐다. 당시는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았던 시기이므로, 위안부 등의 동원은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민중 수탈의 일환으로 일어난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동지적인 관계”, “위안부는 … 협력자”라는 말은 어떻게 둘러대더라도 애초에 성립될 수가 없는 표현이다.
그러니까 박유하 주장의 가장 큰 문제점은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바로 그 때문에 위안부 피해자들이 박유하의 주장을 모욕으로 느끼는 것이다.
따라서 박유하에 대한 여러 비판은 “오독과 곡해”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박유하가 “오독과 곡해” 운운하는 것은 ‘피해자 꼭두각시’론, ‘국민 멍청이’론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일이다. “세계를 마주하는 가장 겸손한 자세”를
말하기에는 너무도 오만하다.
그런데도 자신의 잘못된 주장에 대한 확신이 어찌나 큰지, 박유하는 잘못된 통계를 인용해 놓고도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의 핵심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틀렸는데도 말이다.
박유하는 위안부 소녀상이 미성년을 모델로 한 것에 줄곧 이의를 제기해 왔다.
그 근거의 하나로 미군이 작성한 ‘일본인 포로 심문 보고 제49호’를 인용해, 버마에서 포로가 된 조선인 위안부 20명의 평균 나이가 25세라고 했다.
그런데 애초에 미군이 계산을 잘못한 것이다. 사실 그 20명이 포로로 잡힌 때 평균 나이는 23.15세이고, 징집 때 평균 나이는 21.15세다. 징집 당시 그들의 다수는 미성년이었다.
이 지적에 대한 박유하의 변명은 기상천외하다. “자료를 인용, 제시하면서 그 자료가 끝낸 계산을 다시 반복하는 작업은 연구자의 의무가 아니다. 따라서 사용한 자료의 계산이 틀렸다고 해서 그것을 나의 ‘오류’로 비판받을 이유는 없다.”
박유하는 자신의 비판자들에게 ““이해력이 부족한 것이거나” “트릭”을 구사한 지적 태만/퇴락 현상”이라고 비난을 하지만,
실제 역사적 진실에 입각해 보면 이 비난은 박유하 본인에게 딱 어울린다.
위안부 문제: 현재의, 제국주의의 문제
위안부 문제는 일차적으로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조선인 억압과 천대의 문제이다.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역사는 동아시아 곳곳에 지금까지도 지워지지 않는 상흔을 남겼다.
물론 이제 한국은 경제 규모가 15위로 더는 일본한테 수탈당하는 나라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위안부 문제가 그저 과거사 문제인 것은 아니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세계적 초강대국으로 군림해 지금까지도 동아시아에 큰 영향력을 끼치는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과 크게 관련된 문제이다.
태평양전쟁이 끝난 뒤 전후 처리 과정에서 미국 제국주의는 일본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패권을 유지하려고 했다. 이를 위해 미국은 일본의 범죄를 덮어 줬다. 그래서 천황제가 유지됐고 전범들의 권력이 유지됐다. 유명한 사실을 다시 지적하자면, 현재 일본 총리 아베가 A급 전범인 기시 노부스케의 손자이다.
현재 일본 지배자들은 미국의 날개 아래에서 군사대국화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데, 과거의 전쟁을 위해 한 일을 공식 사과하는 것은 현재의 프로젝트를 어그러뜨리는 일이다. 바로 이 때문에 법적 책임을 극구 부인하는 것이다.
한국의 역대 통치자들은 경제적·안보적으로 미국·일본과의 긴밀한 연관 속에서 성장했다. 그래서 국내의 식민 잔재 청산은 물론이고 일본의 과거사 왜곡에 제대로 대응하지 않았다. 그럼으로써 일본 지배자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려 애썼다. 일본 지배자들이 법적 책임을 부인하는 근거인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이 바로 그렇게 탄생했다.
과거 민주당 정부들도 마찬가지였다. 2004년 당시 대통령 노무현도 일본 총리 고이즈미를 만나 이렇게 말했다. “내 임기 동안에는 정부 차원에서 [위안부 문제를] 공식적인 의제나 쟁점으로 제안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런데 2011년 헌재는 한국 정부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외교적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설상가상으로 이듬해에 이명박 정부가 미국의 촉구 속에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을 비밀리에 추진한 것이 폭로돼, 거센 비난 여론에 직면했다. 그런 가운데 한·일 간 위안부 외교 회담이 시작됐다.
그러나 미국은 위안부 문제로 한·일 관계 개선이 지체되는 것에 큰 불만을 가졌다. 미국은 중국 견제를 위해 한·미·일 삼각 동맹을 구축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위안부 문제에 적극 관여해 한·일 양측에 협상 타결을 압박했다. 그 압력은 주로는 한국을 향했다.
그래서 미국은 2015년 12월 28일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해결됐다”는 한·일 위안부 합의가 발표되자 크게 환영했다.
이렇게 한·일 위안부 합의가 미국의 관장 하에 나온 약속이라는 점은 위안부 문제가 오늘날의 제국주의 문제와도 깊이 관련돼 있음을 보여 준다. 이 점이 한·미 동맹을 중시하는 문재인 정부가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며 한·일 위안부 합의를 유지시키는 이유이기도 하다. 문재인 정부는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의 체결을 주도한 김종필에게 훈장을 주기로도 했다.
위안부 문제의 이런 역사를 인식하는 것은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푸는 데 중요하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정부의 외교적 노력을 (심지어 미국의 중재를) 기대했으나, 세계 제국주의 체제 안에서 미국·일본과 여러 면에서 얽혀 있는 한국 국가가 이 문제를 해결할 동기를 발견하기는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아래로부터의 반자본주의적·반제국주의적 운동을 지향하는 게 옳다.
바로 이런 맥락 때문에 박유하의 문제는 순수한 학술 논쟁을 넘어서는 문제이다. 박유하가 한국 사회에서 유포하고 싶어 하는 메시지는 우선, 위안부 문제를 도의적 책임 인정으로 봉합하고자 하는 일본 내 ‘리버럴’의 입맛에 맞다.
박유하는 《제국의 위안부》 집필 목적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일본에 국가 책임이 있다고 말해 온 기존 논리가 결코 일본을 설득할 수도 없고 따라서 ‘법적 책임’을 지울 수도 없다고 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 이 책에서는 ‘도의적 책임’의 가능성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리고 박유하의 주장에는, 위안부 운동 주도 세력이 ‘도의적 책임’ 수준에 만족하지 않고 과도한 요구를 하는 바람에 일본 내 ‘합리적’ 주장의 입지가 줄어들고 우익이 강화됐다는 논리가 함축돼 있다.
그러나 1995년 사회당 소속 총리 무라야마 도미이치가 이끈 일본 연립정부가 ‘도의적 책임’은 인정했지만, ‘도의적 책임’은 제국주의 국가들이 과거 식민지 지배 책임을 회피하려고 빈번하게 꺼내는 미사여구다.
“[무라야마] 담화 발표 당시의 기자회견에서 무라야마 수상은 천황에게 전쟁 책임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없다”고 한마디로 부정했다. 또 소위 조선‘병합’ 조약은 “도의적으로 부당했다”고 하면서도, 법적 부당성은 인정하지 않아 일본 정부의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이 선, 즉 ‘상징 천황제’라 불리는 전후 천황제를 지키고 식민지 지배의 ‘법적 책임’을 부정하는 것, 서로 간에 깊이 관련되는 두 개의 요새를 사수하기 위한 방어선을 당시 일본 정부가 그은 것이다.”
일본 리버럴들은 실상 일본 제국주의의 군사대국화·우경화 행보에 타협하고 있는데, 그 흐름을 박유하가 좇고 있는 셈이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일본 우익들에게 득이 되는 것은 물론이다. 따라서 “《제국의 위안부》가 … 제국주의 비판”이라는
박유하의 주장은 설 자리를 잃는다.
박유하 주장의 귀결은 현재의 위안부 운동이 양국 관계 개선을 위해 중단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좌파는 박유하의 주장을 ‘그래도 의미있는 연구 결과’로 보며 두둔할 수 없다. 부정직한 연구와 피해자 모욕이라는 도덕성 결여만이 문제가 아니다. 그가 교묘하게 비틀어 왜곡된 사실들에서 내리는 결론은 결과적으로 제국주의적 한·미·일 동맹 강화 노선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뉴라이트와 동맹 맺기
이 점에서 박유하가 뉴라이트 학자들과 동맹 관계를 맺는 게 부자연스럽게 보이지 않는다. 뉴라이트는 자본주의의 발전을 지고의 목적으로 보며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점령, 독재, 재벌 등이 결과적으로 필요하고 유익한 경로였다고 주장한다.
박유하는 김철 연세대 명예교수를 “오랜 학문적 동지”라고 부른다.
실제로 둘은 2000년대 초부터 각종 모임에 함께해 왔다. 김철 교수 자신은 뉴라이트를 표방하지는 않지만, 이영훈과 함께 뉴라이트의 주장이 잔뜩 담긴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책세상)을 편집했다. 그리고 2017년 12월 7일 결성된 ‘《제국의 위안부》 소송 지원 모임’에 이영훈을 비롯해 안병직, 이대근 등 뉴라이트의 ‘낙성대파’가 이름을 올렸다.
물론 박유하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은 … 진보”라고 밝혔으니,
그를 뉴라이트로 단정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자기 명예 지키겠다고 뉴라이트와도 동맹을 맺는 행위는 자기 중심적 태도에서 비롯하는 기회주의라는 비판을 면하기 힘들다.
또, 박유하의 주장은 일본군 위안소는 “단지 군 부대로 옮겨 온 공창(公娼)”이고 “위안부들은 처지가 열악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 일본군 위안부 성노예 설에 대해 재검토가 이뤄져야 한다”는 뉴라이트 이영훈의 주장과
무척 닮기도 했다.
주장의 얼개, 논지 전개 방식, 근거 자료 면에서 그렇다.
위안부 운동 주도 단체를 비난하는 데서도 유사성이 느껴진다. 뉴라이트는 위안부 운동을 주도하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뒤에 ‘종북 좌파’가 있다며 비난한다. 민주노총, 정의당, 민중당, 노동당 등 진보 단체들이 지지하는 운동을 색깔론을 이용해 폄훼하는 것이다.
박유하는 뉴라이트처럼 색깔론을 적극 펼치지는 않아도, 위안부 운동 주도 세력의 “민족주의”가 일본 국가의 책임 회피보다 더 큰 문제인 듯 주장한다. “이제까지의 20년 동안에는 오로지 소수의 관계자들의 생각이 위안부 문제에 관한 한국의 태도를 결정지었고, 결과적으로 이들의 의견이 한일관계를 좌지우지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당연히 어떤 운동이라도 비판에서 자유로운 성역일 수는 없다. 그러나 운동의 대의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은 필요하다. 바로 이 점에서 박유하는 선을 크게 넘었다. 그리고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유는 피해자들의 과도한 요구와 운동 주도 단체의 민족주의가 아니다. 한·미·일 동맹을 굳건히 해 중국의 부상에 대응하려는 미국 제국주의의 화해 압박, 군사력 육성으로 달려 나가고자 하는 상황에서 옛 문제로 발목을 잡히기 싫어하는 일본 지배자들의 법적 책임 부인, 경제와 안보 문제에서 미국·일본과 얽히고설킨 한국 지배자들의 외면이다.
민족주의 비판한다고 다 진보인 건 아니다
박유하의 분별을 잃은 태도는 억압하는 민족의 민족주의와 억압당하는 민족의 민족주의를 전혀 구별하지 않고 싸잡아 퇴행적인 것으로 보는 관점에서 비롯한다. 박유하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요구와 그것을 지지하는 정서를 그저 “식민지 트라우마 현상”으로 치부한다.
그 과정에서 박유하는 페미니즘도 동원한다.
‘여성혐오 사회’론 등으로 국내에도 유명한 우에노 치즈코가 일본 국가의 책임 문제에서 미온적인 점을 이용해 자기 주장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듯도 하다. 그러면서 지독한 독선을 보인다. 자신을 비판한다면, 아무리 페미니스트이더라도 “가부장제 구도와 민족을 넘어서기보다 복속되어 스스로 2차 가해자가 [됐다]”거나,
“내가 언급한 증언들을 “부분적 진실”로 간주하는 태도는 … 가부장적 생각과 다르지 않을 뿐 아니라, 다양한 전쟁 성폭력의 현장에 대한 인식의 부재마저 드러낸다”는
것이다.
분명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이 갖고 있는 다양한 정체성(젠더, 계급 등) 중에서 ‘민족’ 정체성을가장 중요하게 보며, 민족 앞에서 다른 ‘부문’적 정체성을 내세우는 것을 반대한다. 페미니스트들이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경계하는 까닭이다.(노동자 국제주의를 표방하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들도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지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적 측면만이 아니라, 위안부 문제 등에서 한국인들이 민족주의적 공분을 표출하게 되는 정치적 맥락을 더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
해방 이후에도 친일파들이 수십 년 동안 국가 권력 요직을 차지해 왔다. 지금도 한국 지배계급은 일본과 얽혀 있어, 일본 제국주의를 반대하지 않는다. 따라서 비록 민족주의적 공분으로 표출되나, 오늘날 위안부 문제는 반제국주의 문제이자 계급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좌파는 이 모순된 상황을 이해할 줄 알아야 한다. 한국 민족주의의 근원과 모순을 이해하지 못하는 추상적 사고는 민족주의를 극복하는 데서 도움이 되지 못한다.
게다가 최근 개봉한 영화 〈허스토리〉는 페미니즘적 관점에 서서 위안부 피해자들의 여러 경험(심지어는 성매매 여성이자 나중에는 위안소의 주인이 되는 위안부의 경험)을 다루면서도, 위안부 문제가 일본 국가에 의한 성노예화 범죄라는 중심을 놓치지 않았다. 박유하와 달리 말이다.
그리고 박유하의 민족주의 비판은 편향돼 있다. 박유하의 주된 문제 의식이 어디를 가리키는지는 그가 쓴 책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다. 박유하는 《제국의 위안부》 전에 《누가 일본을 왜곡하는가》(사회평론, 2000), 《반일 민족주의를 넘어서》(사회평론, 2004), 《화해를 위해서》(뿌리와이파리, 2005)를 썼다.
그중 《누가 일본을 왜곡하는가》에 대해 한 일본인 연구자가 전반적으로 우호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이렇게 당부할 정도였다. “한국 지식인이 한국의 반일 담론을 비판할 때는 반드시 일본에 대한 비판도 잊지 말아 주었으면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본 국수주의자들이 자기들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재료로 이용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게 가장 두렵다.”
박유하로서는, 한국인으로서 한국 민족주의를 먼저 비판하기 위함이라고 정당화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여기서도 박유하는 선을 넘는다. 예를 들어, 박유하는 전쟁 범죄자들의 유골을 안치한 야스쿠니 신사를 일본 정치인들이 참배하는 것을 두고는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관용을 발휘한다.
“우리가 국립묘지 가는 것하고 기본적으로 다른 문제가 아니다. 결국은 국가를 위해 목숨 바친 사람들을 어떻게 추모할 것이냐의 문제다. … 이런 추도 형식은 우리도 가지고 있다. 어느 나라든 이런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생각할 때 야스쿠니 문제는 기본적으로는 비판하기 어려운 구조를 가지고 있다.”
더 나아가 박유하는 호기롭게 ‘친일파’가 되겠다고도 했다. “이제 감히 말하고 싶다. 한국에 대해 잘 알고 대체적으로 호의적인 일본인들을 ‘친한파’라 칭하는 의미에서라면, 나는 ‘친일파’라고.”
박유하는 자신이 민족주의자들과는 달리 “[일본 비판이 아니라] 제국주의 비판”을 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저 흰소리일 뿐이다. 그 실천은 아래로부터의 반자본주의적·반제국주의적 운동을 지향하는 것과는 완전히 역행하기 때문이다. 박유하는 위안부 문제 해결이 더딘 책임을 엉뚱하게 위안부 운동에 돌리고, 피해자들을 모욕한다. 여러 사람이 박유하를 “제국의 변호인”으로 부른 까닭이다.
다시 표현의 자유 문제
박유하는 국가 탄압에 저항하는 투사 행세를 한다. 표현의 자유를 추상적으로 사고하는 지식인들도 박유하를 지지했었다. 서두에서 밝혔듯이, 유시민, 장정일, 홍세화, 김규항 등이 그랬다.
그런데 박유하가 표현의 자유를 정말로 중요하게 여기는지는 의심스럽다.
2016년 7월 정영환 교수는 박유하를 비판한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 『제국의 위안부』의 반역사성》의 출판 강연회를 위해 한국에 오려 했으나, 한국 정부가 그의 입국을 불허했다. 한국 정부는 정영환 교수 같은 ‘조선(국)적’인 재일 한국인들의 입국을 자주 불허한다. 이때 박유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영환 씨는 한국과 북한에서 정치적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한국 입국이 불허된 사람이다. … 이들이 한일 화해에 강한 두려움을 내비치는 건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듯이 색깔론 냄새를 풍기는 진술이다. ‘누구를 위한 불화인가’라는 제목의 이 글에서도 박유하는 “국가가 개인의 이동의 자유를 관리하는 일에 나는 비판적이지만”이라는 구절을 넣어 비판을 빠져나가려 하지만, 글 전체의 요지는 국적을 이유로 부당하게 표현할 기회를 박탈당한 사람을 비난하는 것이었다.
박유하가 표현의 자유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와 관계없이, 좌파는 원칙적으로 표현의 자유를 옹호한다. 의견과 주장의 제약 없는 교환이 노동계급과 천대받는 사람들의 저항에 이롭기 때문이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가 어떤 경우에라도 지켜져야 할 자유인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표현의 자유 문제는 계급으로 나뉜 사회에서 제기되고 있고, 따라서 그 자유의 계급적 내용이 중요하다. 박유하처럼 억압받기는커녕 완전히 자유롭게 언론의 자유를 누리는 제국주의 옹호론자가 수십 년간 천대받아 온 피해자들을 모욕하는 것을 ‘표현의 자유니까’ 하고 넘어갈 수는 없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인종차별이나 성차별, 성지향 차별처럼 노동계급을 분열시키는 주장을 할 자유까지 있어야 한다며 옹호하면 안 된다. 노동계급과 차별받는 사람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운동의 정당성을 폄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운동 안에서는 이런 주장을 제재할 수 있다는 생각이 폭넓은 지지를 받는다.
물론 좌파가 그런 차별과 억압의 핵심 기구인 자본주의 국가더러 법률적 제재를 가하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국가의 사상 통제는 노동계급과 차별받는 사람들에게 향하는 경우가 훨씬 흔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위안부 피해자들의 소송 제기에는 특별하게 유념할 것이 있다. 위안부 피해자들은 박유하의 주장에 맞서 자신의 명예를 스스로 방어할 힘이 없다. 비록 광범한 국민적 연민을 받으나, 정부는 피해자들 목소리에 제대로 귀기울이지 않는다.(피해자들에게 힘이 있다면, 지금 문재인 정부가 화해·치유재단을 유지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조직 노동자 운동 같은 강력한 대중 운동 세력의 뒷받침을 받고 있는 것도 아니다. 자신들의 존엄을 무시하는 주장을 한·일 양국에서 지속하는 박유하에 대해, 위안부 피해자들로서는 법에 기대는 것 말고는 다른 도리가 없었으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박유하의 새 책 발간으로 위안부 피해자들의 우려가 옳았음이 입증됐다.
또, 피해자가 자신이 입은 피해에 대한 구제를 위해 법에 호소하는 것은 권리이기도 하다. 추상적으로 표현의 자유를 말하며 박유하를 편드는 것은 진보의 대의를 저버리는 일이다. 일부 진보 지식인들의 박유하 지지 선언 동참이 유감인 까닭이다.
좌파는 박유하 주장의 문제점을 직시하고 비판하며, 위안부 피해자와 운동의 대의를 굳건히 방어해야 한다
참고문헌
김영익 2016, ‘《제국의 위안부》 옹호자를 비판한다: 박유하는 잘못된 사실을 확신하는 제국 옹호자’, 〈노동자 연대〉 192호. https://wspaper.org/article/18167
김영익 2018, ‘위안부 문제는 무엇이고, 왜 이토록 해결되지 않을까?’, 《마르크스21》 25호(2018년 5~6월).
김재중 2005, ‘“야스쿠니 참배는 우리의 국립묘지 참배”’, 《말》 2005년 12월호.
박유하 2015a, 《제국의 위안부(34곳 삭제판): 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 뿌리와이파리.
박유하 2015b, 〈정규재TV〉 인터뷰, 2015년 6월 4일자. https://www.youtube.com/watch?v=hbDW5C5Ug-g
박유하 2016a, ‘‘제국의 위안부’ 박유하 “소녀 위안부, 평균적 모습 아냐”’, 〈뉴스1〉, http://news1.kr/articles/?2716376
박유하 2016b, ‘누구를 위한 불화인가’, 〈박유하 『제국의 위안부』, 법정에서 광장으로〉, https://parkyuha.org/archives/5611
박유하 2018a, 《『제국의 위안부』, 법정에서》, 뿌리와이파리.
박유하 2018b, 《『제국의 위안부』, 지식인을 말한다》, 뿌리와이파리.
사나다 히로꼬 2000, ‘한국의 반일 담론과 일본의 국수주의’, 《창작과 비평》 통권 110호.
서경식 2011, ‘화해라는 이름의 폭력’, 《언어의 감옥에서 ― 어느 재일 조선인의 초상》, 돌베개. http://east-asian-peace.hatenablog.com/entry/2015/03/28/160734
요시미 요시아키 2013, 《일본군 위안부 그 역사의 진실: 일본군 위안부 제도란 무엇인가》, 역사공간.
이영훈 2016, ‘이영훈 교수의 환상의 나라 ― 12강 위안소의 여인들’, 2016년 8월 22~23일. https://www.youtube.com/watch?v=Ng45SOF0kmM, https://www.youtube.com/watch?v=GLvJDHphV5Q, https://www.youtube.com/watch?v=HHX1Q2YteTI
정영환 2016,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 『제국의 위안부』의 반역사성》, 푸른역사.
차승일 2017, ‘박유하의 언론 자유? 좌파가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 〈노동자 연대〉 233호. https://wspaper.org/article/19762
박유하 2018b, p115.↩
박유하 2015a, 32쪽.↩
박유하 2015a, 67쪽.↩
박유하 2015a, 294쪽.↩
박유하 2018b, pp367-368.↩
박유하 2018a, p28.↩
박유하 2018a. p93. 강조는 인용자.↩
박유하 2018a, p95. 강조는 인용자.↩
요시미 요시아키 2013.↩
박유하 2018b, p35.↩
박유하 2016.↩
정영환 2016a, p67.↩
박유하 2018b, p199.↩
박유하 2018b, p367.↩
이 부분은 김영익 2018을 크게 참고했다.↩
박유하 2018a, p89.↩
서경식 2011. 김영익 2016에서 재인용.↩
서경식 2011.↩
박유하 2018b, p273.↩
박유하 2018b, p373.↩
박유하 2015b, https://www.youtube.com/watch?v=hbDW5C5Ug-g〈정규재TV〉는 퇴진 촛불이 한창이던 2017년 1월 25일 박근혜를 인터뷰해 요설을 늘어놓게 한 우익 언론이다.↩
이영훈 2016. 이 인터넷 강의 역시 〈정규재TV〉를 통해 방송됐다.↩
이영훈은 2004년에도 비슷한 발언을 했다가 강력한 반발에 부딪힌 적이 있다. 이영훈은 자신이 “일본군 성노예가 ‘상업적 목적을 지닌 공창의 형태’였다”고 발언했다는 것은 “악의적 해석”이라면서도 사과를 한 바 있다. 위안부 피해자들은 이영훈의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http://legacy.www.hani.co.kr/section-003000000/2004/09/003000000200409051453326.html 그런데 2016년에는 그 주장을 노골적으로 개진한 것이다.↩
박유하 2015a, p8.↩
박유하 2018b, p32.↩
그밖에도 박유하는 여러 장치를 이용한다. 비판 차단용 진술을 군데군데 끼워 넣어 자기 주장의 본질을 은폐하기, 주범인 일본 국가와 종범인 업자들의 죄의 경중을 뒤섞기, 미시사 방법을 사용하기 등이 있다. 차승일 2017을 참고하시오.↩
박유하 2018b, pp260-261.↩
박유하 2018b, pp278-279.↩
사나다 히로꼬 2000, p425. 강조는 인용자.↩
김재중 2005, p86.↩
김재중 2005, p87.↩
이 부분은 차승일 2017의 관련 부분을 조금 수정해 실었다.↩
박유하 2016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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