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7-30
이은선 - <죽음의 방식 '자살'>
(4) 이은선 - <죽음의 방식 '자살'> 아래의 글은 거의 10여년 전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후 온 나라가 깊은 슬픔에...
이은선
Yesterday at 08:15 ·
<죽음의 방식 '자살'>
아래의 글은 거의 10여년 전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후 온 나라가 깊은 슬픔에 빠져 있을 때, 당시 기독교사상 (2009년 7월호)의 특집을 위해 썼던 글( "사람의 아들 노무현 부활하다")인데, 그 일부를 가져왔다. 오늘 노회찬 의원의 죽음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시 그의 죽음의 방식 '자살'에 대해서 말한다. 비록 꼭 같은 모습은 아니지만 노회찬 의원의 죽음이 우리에게 유사한 생각을 불러일으켜서 그때 글의 일부를 가져와 공유한다.
IV. 죽음의 방식 ‘자살’
이 번 노대통령의 서거와 관련해서 가장 많이
논의되는 주제 중 하나가 그의 죽음 방식에 관한 것이다. 한국 사회는 이번 일을 접하기 전에도 이미 여러 형태의 ‘자살’을 경험했으므로 그가 전직 대통령으로서 스스로 몸을 던져서 죽은 일은 형언하기 어려운 충격과 아픔을 주었다. 무엇이, 왜, 어떤 일들이 그로 하여금 그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하였을까?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내 앞에는 그가 지난 4월30일 검찰 출두를 위해서 검은 색 양복을 단정히 차려입고 차에서 막 내려서 걷고 있는 모습의 사진이 놓여있다. 뒤에는 서류가방을 든 문재인 전 비서실장이 따르고, 둘은 모두 입술을 지그시 물고서 약간 먼 곳을 응시하며 걷는다. 이로부터 한 달 여후 발생한 그의 죽음에 대해서 보수언론은 말할 것도 없고 진보그룹의 김지하 시인이나 <녹색평론>의 김종철 교수도 인간의 생물학적인 조건을 들어서 그의 죽음을 ‘자살’로 먼저 규정하고 반생명적인 선택으로 책망했다. 지난 5월29일 금요일 그의 영결식이 있은 후 한국 교회의 많은 목회자들은 그가 ‘자살’ 했으므로 ‘죄인’이고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고 설교했다고 한다.
어느 사람이, 어느 종교가 자기 목숨을 스스로 끊은 사람을 무조건 두둔하고 용납할 것인가? 하지만 이러한 한국 교회들의 일반적인 낙인과는 달리 ‘생명의 소중함’에 대한 확신과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죄다’라는 말을 이미 죽은 이와 유족들에게 한 번 더 정죄의 낙인을 찍는 용도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분명히 권고한 기독교 그룹도 있다.2) 또한 그 권고문은 자살이란 비극적인 결말만을 볼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자살에 이르게 한 과정에 대한 면밀한 성찰이 전제되어야 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에 대한 종교적인 불허의 언어가 오히려 “죽을 사람을 살리는 용도”로 쓰여야 함을 현명하게 지적하였다.3)
그러나 나는 여기서 더 나아가고자 한다. 앞의 김종철 교수는 “민주주의의 생물학적 뿌리”를 말하면서 모든 인간은 생물학적 조기출산으로 인해서 유아적 나르시시즘을 갖게 되고, 그 보상으로 부와 권력과 명성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지시했다. 그것이 가장 잘 채워질 수 있는 사회․문화적 방식이 민주주의이지만, 그 반대가 ‘용산참사’나 ‘전직 대통령의 자살’을 불러왔다는 것이다.4)
하지만 나는 오히려 인간이 그 생물학적 조기출산으로 인해서 자신의 생존과 인간적인 삶을 위해서 전개시킨 ‘정신’의 힘을 지시하고자 한다. 정신의 존재인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스스로 자신의 생물학적 목숨과 생명에게까지도 ‘no'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려고 함이다. 철학적 인간학자 막스 쉘러는 이 능력이야말로 인간의 모든 종교적, 문화적 성취의 근거이고, 이 ‘자기부정’과 ‘자기희생’의 힘이야말로 동물과 다른 인간 고유성의 뿌리가 됨을 밝혔다.5) 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먼저 이러한 인간적 자기부정의 용기로 보고자 한다.
그러나 이렇게 굳이 이러한 서양 생물학자들의 이야기를 빌지 않더라도 보통 ‘자결’이라는 이름으로 알고 있는 이 죽음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맹자는 이미 오래 전에 인간은 누구나 살고자 하는 것보다 더 원하는 것이 없고 죽는 것보다 더 싫어하는 것은 없지만, 그 죽는 것보다 더 싫어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利와 義가 충돌하였을 때 인간으로서의 본분과 이름을 망각하고 利와 짝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그는 인간에게는 그렇게 원하는 生보다도 義와 이름을 더 중히 여길 수 있는 ‘사생취의’(捨生取義, 생을 버리고 의를 취한다)의 힘과 용기가 있음을 밝혀주었다. 혹자는 이번 노 대통령의 죽음을 두고서 그는 지금까지 남들이 예상하지 못하는 결단의 방식으로 정치적 난관들을 헤쳐 왔으므로 이제는 자신의 목숨까지 내걸고 ‘승부수’를 띄운 것이라고 혹독하게 비난했다. 거기에 대한 한 대답은 죽음 앞에서도 그렇게 ‘승부수’를 운운하며 삶을 온통 승부와 경쟁의 일로 보는 일은 매우 비인간적인 태도라고 비판한다.
나는 이 두 의견을 모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왜냐하면 먼저는 노대통령의 죽음을 보고서 그가 왜 그런 승부의 마음이 들지 않았겠는가 자문하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방법이 막혀버렸을 때, 자신의 지금까지의 이름과 정의가 땅에 떨어져서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되어버리려고 할 때 인간은 그렇게 원하는 生조차도 포기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한편 그러한 승부의 마음이 아니었고, 오히려 한없는 절망과 좌절 속에서 더 이상의 추스름과 행위함을 포기하고 無로 돌아가고자 결정한 것이었다고 해도, 나는 그것이 너무나 이해가 되지 않는가라고 묻고 싶다.
이번 노대통령의 죽음을 보고서 많은 사람들이 그 죽음을 우리 역사상의 이순신이나 조광조 등과 비교해 보기도 하지만 나 자신에게는 특히 여러 관점과 부분에서 예수의 삶과 죽음과 오버랩 되었다;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며 기득권과 보수의 세력들이 운집해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 자체가 하나의 자살행위가 아니었나? 그는 그렇게 자신이 죽는 것을 통해서라도 마지막 승부를 띄워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그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외치며 죽어갔을 때 그는 예상 밖에 너무나 일찍 찾아온 실패에 좌절했고, 자신의 죽을 ‘운명’에 전율한 것이 아니었나? 그가 그 죽음의 십자가 위에서 ‘부활’을 상상이나 했을까? 이렇게 ‘사람의 아들’(人子)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자살과 타살, 믿음의 자기 내어줌과 절망, 마지막의 희망과 절망이 모두 중첩되는 것이라면 나는 같은 사람의 아들 노무현의 죽음도 그와 그렇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수도 가장 가까운 사람에 의해서 실패를 경험했다. 그것도 그의 하나님 나라 사업을 금전적으로 뒷받침해주고, 그가 사람의 아들이므로 어쩔 수 없이 필요했던 몸과 생명의 필요물들을 채워주는 사람들에 의해서였다. 나중에 성서기자들이 예수운동의 회계담당자 유다의 행위를 마치 하나님에 의해서 모두 예정되어 있던 통과의례로 그려서 그렇지 여기서도 인간의 많은 실패와 좌절은 바로 그 몸적, 생명적 필요물과 연관되어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 아닌가? 나는 이 일이 예수에게서도 너무나 인간적이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한다. 그는 결코 영웅이 아니었고, 타고난 성자도 아니었으며, 가족들이 있었고, 사랑하는 자녀와 그 자녀들을 삶의 모든 것으로 여기는 아내가 있었으며, 가난했던 형제와 자매, 친척과 이웃들이 있었다.
오늘날의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에 의하면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라는 명칭이야말로 이사야서 등을 열심히 읽던 예수가 자신을 지칭하는 말로 가장 확실하게 썼을 것이라고 한다. 노무현은 잘 알려진 대로 “사람 사는 세상”이 그의 정치적 목표였고, 그가 가장 좋아했던 노래가 ‘사랑으로’, ‘상록수’, ‘아침이슬’ 등이었다. 그는 참으로 인간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의 아들에 의하면 보통 자수성가한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냉혹함과 엄함이 그에게는 없었던 것 같다. 자신이 학벌이 낮으니 아이들에게는 매우 강요했을 것 같지만 아들 건호씨에 의하면 그는 “사자 새끼를 절벽 밑에 떨어뜨린다던가 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고 한다. 그가 고등학교 때 그렇게 하기 싫어하는 공문수학을 그만둘 수 있게 해주었고, 후에도 그가 싫다고 하는 일을 강요한 적이 없으며,6) 대학갈 때 아들에게 그 이름이나 학과에 그렇게 좌우되지 말고 시민으로서 소양을 쌓기 위해서 간다고 생각하고, 나중에 다른 공부를 하고 싶으면 나이 40살까지는 아버지가 책임을 지고 정치를 고만 두고서라도 밀어줄 것이라고 안심시켰다고 한다.7)
그렇게 따뜻했던 노무현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이야기할 때 불우함에서 탈출한 이야기만하지 오히려 그 불우한 사람들을 있도록 한 우리 사회의 구조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것이 불만이라고 했다.8) 그는 일반적으로 자수성가한 ‘졸부들’이나 ‘신흥부자들’과는 달리 개인적으로 승부하려하지 않았고,9) 공동체와 함께 함의 삶을 꿈꾸었으며, 그런 자신의 삶을 “시지프의 신화”의 삶으로도 비유했다. 자신의 지나온 삶은 언제나 성공과 실패가 하나인 삶이었다고 말한다. 패배는 승리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었고, 새로운 도약은 좌절의 잿더미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그것은 “단순한 의지 하나로는 헤쳐 나갈 수 없었던 정치인의 길”이었고, “새로운 도전을 위해서는 그 산의, 또 그 강의 높고 깊음을 탓하기 전에 내가 먼저 변해야”하는 길이었다고 한다. 그는 마지막으로 고백하기를, “성공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어쩌면 나의 숙명이었다”라고 하면서 우리가 오늘 그의 마지막 유서에서 들은 것과 유사한 고백을 이미 2000년대 초에 하고 있었다.10)
그는 자신의 삶을 ‘무모하다’는 식으로 편파적인 평가를 하는 것을 거부했다. 오히려 자신의 길은 ‘택도 없는 일의 시도’가 아니라 그와는 분명히 다른 ‘가능성이 있는 도전’, 또는 ‘쉽지는 않지만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해 오는 길이었다고 강술한다.11) 그래서 그는 온갖 비난과 비방 속에서도 대통령직의 4년여를 지내고 난 시점에서도 “저는 그냥 제가 할 도리를 다한 것입니다”라고 고백한다. 그는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세상을 사랑”하므로,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불의에 대해 분노할 줄 알고 저항”하므로, 그래서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탐구해서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방도를 찾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모으고 설득하고 조직하고 권력과 싸우고 권력을 잡고 그리고 정책을 실행했다고 자신의 대통령직의 일을 설명한다.12) 그렇게 그는 자신이 ‘숙명’으로 느꼈던 ‘세계사랑’(L'Amour Mundi)에서 자신의 모든 정치와 행위의 힘을 얻었던 것이다.13)
이렇게 살았던 노무현의 죽음을 위에서처럼 우리의 어떤 종교적 상상력을 빌어서 굳이 예수의 죽음과 비교하지 않아도 한 수의학자가 우리사회에서 허용된 존엄사와 연관시켜 사고한 성찰이 좋은 지침이 된다. 그에 따르면 이제 우리가 육체적 조건에 따라 존엄사를 인정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다면 정신적 이유에 의한 존엄사도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한다고 제안한다.14) 물론 정신적 존엄사의 여부는 당사자만이 알 수 있지만 이때 중요한 것은 죽은 자가 그동안 추구하고 살아온 삶의 자세와 가치가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야말로 철저히 비주류로서 그렇게 치열하게 대한민국을 ‘사람이 사람 노릇하는 사회’로 만들고자 했고, ‘전략은 타협할 수 있지만 민주주의의 원칙은 타협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어려움을 무릎 쓰고 손해 보면서, 바보 노릇하면서” 힘없는 자들을 위해서 끝까지 살아왔으니 그의 죽음을 존엄사로 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 아니 여기서 더 나아가서 그의 존엄사 이후에 온 나라에 퍼진 추모와 각오는 그도 부활했음을 선언한다. 이러한 모든 과정을 지켜보면서 나는 하나님의 뜨거운 ‘세계사랑’으로 이 땅에 온 예수의 부활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하나님의 아들’, ‘사람의 아들’인 예수와 노무현은 그렇게 부활했고, 우리는 이렇게 21세기 벽두에 이 한국 땅에서 사람의 자식들이 그리스도로 부활하는 모습을 지켜본다.15)
1) 이 글은 원래 『기독교사상』 2009년 7월호 특집 <노무현의 삶과 죽음, 무엇을 말하는가>에 게재되었다(pp.30-51).
2) 바른교회아카데미,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맞이하여 한국교회에 드리는 목회적 권고문> 2009.5.30., p.3(www.goodchurch.re.kr)
3) 같은 글.
4) 김종철, “민주주의의 생물학적 뿌리”, <시사IN>2009.6.13, p.80.
5) 막스 쉘러, 『우주에서의 인간의 위치』
6) 노건호, “지극히 평범한, 그러나 평범하지 않은-아들이 본 노무현, 강민석 외, 앞의 책, p.108.
7) 노무현, 『여보, 나 좀 도와줘』, p.134.
8) 같은 책, p.31,
9) 이은선, “‘졸부’(parvenu)와 ‘의식적인 이방인’(conscious pariah) 사이에서”, 2008.12.17 변선환 아키브 발표문; Hannah Arendt, Rahel Varnhagen-The Life of a Jewish Woman, A Harvest/HBJ Book 1974 참조.
10) 노무현, “내가 선택한 길을 내 뜻대로 걸었다”, 강민석 외, 앞의 책, p.127.
11) 같은 글, p.128.
12) 노무현, “저는 그냥 제가 할 도리를 다한 것입니다.”, p.v.
13) 이은선, “한나 아렌트 사상에서 본 교육에서의 전통과 현대”,『교육철학』제30집, pp.139-159.
14) 우희종, “당당한 대통령을 기다리며”,<한겨레신문> 2009.6월3일.
15) 이은선, “한국 여성그리스도의 도래를 감지하며”, 기독여민회 엮음,『발로 쓴 생명의 역사, 기독여민회 20년』, 대한기독교서회 2006, pp.75-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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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k Jin Hong 글나눔에 감사합니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Man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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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휘 노회찬의원의 죽음에 대한 글을 쓰고싶다...생각하는 중에 교수님의 글을 접합니다. 많은 배움 주셔서 감사합니다Man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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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규일 참
여러가지
많은 수사와 서술이 있군요.
일단
실제는 조사 선상에 올라 조사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확인되지 않은 정황 가운데 스스로 죽음을 택한 유감스런 일이지요.
그를 평소 따르던 이나 그렇지 않은 이나
모두 유구무언이게 만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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