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선 - 아래의 글은 지난 2016년 11월 홍콩에서 열렸던 한반도평화조약에 관한 컨퍼런스에서 성서연구를 위해서...
이은선
13 June ·
아래의 글은 지난 2016년 11월 홍콩에서 열렸던 한반도평화조약에 관한 컨퍼런스에서 성서연구를 위해서 준비한 글이었다. 그 때는 아직 문재인 정부시절도 아니었고, 어제의 그러한 역사적인 북미회담이란 정말 기대하기 어려운 시기였다. 어제 김정은과 김여정 두 남매의 활동을 보면서, 그리고 트럼프 미대통령의 활동을 보면서 그 때 내가 국제 에큐메칼 친구들에게 나누었던 다음의 글이 생각나서 공유한다. 세계 최강의 나라 대통령으로서 트럼프의 역할이 예전 에집트의 파라오의 역할이고, 김일성, 김정일의 자녀로서 부모의 뜻을 어떻게든 이어가려는 두 남매의 분투가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닐까? 물론 다른 요인들도 많지만!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는 두 힘>
이은선(NCCK 화해와통일위원회 위원, 세종대학교 교수)
“요셉의 형제들이 왔다는 소문이 바로의 궁에 전해지자,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기뻐하였다. 바로가 요셉에게 말하였다. ‘그대의 형제들에게 나의 말을 전하시오. 짐승들의 등에 점을 싣고,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서, 그대의 부친과 가족을 내가 있는 곳으로 모시고 오게 하시오. 이집트에서 가장 좋은 땅을 드릴 터이니, 그 기름진 땅에서 나는 것을 누리면서 살 수 있다고 이르시오.”(창세기 45:16-18)
I.
우리가 방금 읽은 창세기 45장의 이야기는 우리가 잘 아는 요셉과 그 형제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들의 아버지 야곱은 형 에서를 속이고 도피 중에 얻은 두 아내 중 특히 라헬을 사랑하여 그 아들 요셉을 편애하였다. 이러한 이복동생 요셉을 시기하던 형제들은 그를 이집트로 오가는 상인에게 팔았고, 그곳에서 요셉은 그러나 이집트 바로왕의 꿈을 현명하게 해몽할 기회를 얻어서 총리가 되었다. 그 꿈에 지시된 대로 온 세상에 가뭄이 덮치자 가나안에 사는 형제들도 이집트로 식량을 구하러 오게 되면서 그 형제들은 다시 만난다. 요셉은 처음에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지 않고 동생 베냐민을 데려오게 했고, 그를 곁에 두고 다른 형제들은 돌려보내려 하자 유다를 비롯한 형제들은 만약 자신들이 아버지 야곱에게 베냐민을 다시 데려가지 못한다면 아버지 야곱은 요셉을 잃고 베냐민까지 잃는 슬픔으로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애원한다. 그러한 아버지에게 닥칠 불행을 자신들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며 애원하는 그들에게 요셉은 마침내 마음을 열고 그들을 맞이한다. 이 이야기 속에는 오늘 우리 세계도 그 구체적인 모습과 내용은 다르지만 유사하게 겪고 있는 온갖 불행과 갈등, 싸움과 비참함이 나온다. 형제 사이의 갈등으로 죽음이 야기되기도 하고, 많은 거짓과 미움, 폭력과 뿌리 뽑힘, 굶주림, 난민 문제 등, 뒤이어지는 종족 간의 분쟁과 종교 갈등도 모두 우리가 겪고 있는 불행과 아픔들이다. 여기 이 가족의 이야기 안에 우리의 평화 없음의 이야기가 원형적으로 들어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가운데서도 이러한 모든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가족의 삶을 마지막의 파국으로 몰고 가지 않은 것이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 본다. 처음에는 요셉을 아주 죽여 버리려 했던 형제들이 그래도 그의 목숨만은 살려주고 상인에게 판 이유, 온갖 어려움과 피눈물 속에서도 요셉이 자신을 지키고, 마침내는 형제들을 다시 만나서 ‘하나님이 자신을 이집트로 먼저 보내신 것은 형들의 목숨과 그 가족을 위해서였다’(창45:7)라는 고백까지 하게 한 근거, 시기와 미움 속에서 아버지가 특별히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팔아넘겼지만 그 동생 베냐민 까지 잃게 될 경우 “아버지에게 닥칠 불행을 제가 차마 볼 수 없습니다”라고 애원하며 매달린 형들의 마음, 그래서 동생 요셉의 용서를 마침내 얻어내고 가족 모두가 다시 모여 살게 된 일 등, 그러한 일들을 가능하게 하고 이들 가족의 총체적인 파국을 막은 동력과 근거가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것을 이들이 그래도 끝까지 지키려고 한 가족에 대한 사랑, 아버지를 속이고 배반했지만 차마 그의 죽음까지는 참을 수 없도록 하는 남아있는 효심, 자신을 죽이려고 하고 팔아넘기기까지 했지만 결국 다시 그 형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부모와 형제와 다시 함께할 수 있기를 간절히 고대하며 참아왔던 인내, 이러한 것들이 이 가족을 온갖 풍파 속에서도 지켜냈고, 한 개인을 성취로 이끌었으며, 그로 인해서 한 나라 안에 안정과 평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마련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목도하는 온갖 종류의 갈등과 폭력, 불의와 전쟁을 넘어서 다시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게 하고 삶을 지속하게 하려면 그 일을 위한 우리의 노력들, 정치와 경제, 종교와 문화, 교육 등의 모든 노력들이 바로 이 인간의 근본적인 힘의 지점과 만나고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형태와 겉모양은 다르지만 한 인간이 태어나서 만나고 그 안에서 성장한 최초의, 그리고 최소한의 인간 공동체, 그 공동체를 지켜내고 살리고, 번창시키고자 하는 인간적 바램은 동서고금, 누구나의 보편적 소망이다. 그것이 그들을 삶과 행위에 머무르게 하는 근본 끈인 것이다. 그래서 이 기본적이고 공통적인 바램을 세계의 정치가 저버린다면 이 세계에서의 평화는 요원할 것이다. 참으로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이러한 마음과 소망을 무시하는 종교와 정치의 모든 평화 이야기는 그러므로 사이비 이야기일 뿐이다.
II.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는 두 번째의 요소와 동력으로서 나는 세상 큰 나라와 권력의 관대함을 들고자 한다. 오늘 우리 세계도 예전 요셉의 이집트 시대만큼이나 큰 나라의 통치가 두드러진다. 특히 한반도 주변에는 우리 시대의 큰 나라들이 밀집해 있고, 이 나라들의 역할이 한반도의 통일과 화해, 평화를 위해서 한 결정적인 요소가 될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참으로 놀라운 성서의 구절을 만난다. 이집트의 바로 왕과 그 신하들이 요셉이 가족을 찾은 것을 함께 크게 기뻐하면서 “이집트에서 가장 좋은 땅을 드릴 터이니, 그 기름진 땅에서 나는 것을 누리면서 살 수 있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당시 세계 최고 국가의 왕이 한 미약하고 힘없는 이방인 가계의 삶을 위해서 자신의 나라에서 가장 좋은 곳을 내준다는 것이다. 이것이 어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이야기인가? 그때나 지금이나 특히 국가 간의 외교에서는 자국의 실리가 우선이고, 그래서 특히 힘없는 나라의 입장에서는 힘 있는 큰 나라들이 아무리 정의와 평화를 내세운다 해도 결국 그것은 자신들의 지배와 권력을 계속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의심하는데, 그들 나라에 들어와서 살게 할뿐 아니라 “가장 좋은 땅”을 주겠다는 성서에의 이 큰 이야기는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가?
그것은 세상에 진정으로 평화를 가져오려면 그렇게 큰 나라와 권력이 그렇지 못한 상대를 위해서 자신이 가진 가장 좋은 것을 내어주는 관용과 호의가 필요하다는 메시지가 아닐까? 지금까지의 관계에서 내가 준 것과 베푼 것, 또는 당한 것이나 상대가 범한 ‘죄과’와 오류를 열거하면서 그에 합당한 것만 내어주겠다는 관례와 법칙이 아니라 그 관례들과 법칙들을 깨고서, 전혀 다른 ‘예외’를 만들겠다는 신적 용기와 관용이 아닐까 생각한다. 20세기의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34)은 이미 1920년대에 제2차 세계대전의 암운이 짙어지는 그 때「폭력비판을 위하여(Critique of Violence), 1920」라는 글에서 이와 유사한 생각을 드러냈다. 거기서 그는 이상의 큰 정치의 행위를 “신적 폭력/힘(divine violence/force)”이라고 명명하였다. 그것은 약자와 상대에게 끊임없이 법의 이름으로 죄과를 따지고, 대가를 요구하면서 그를 계속적인 지배와 종속 아래 두는 “신화적 폭력(mythic force)"과는 다른 것으로 오히려 강자로서 그 법의 지배를 종식시키고, 자신을 대가없이 내어주며, 스스로가 희생을 감수하는, 그래서 진정으로 삶과 소통과 지금 여기서의 하나됨을 가능하게 하는 신적 종말론적 행위라는 것이다. 즉 법 너머의 하느님의 통치를 말하는 것이다.
III.
오늘 우리가 성서 본문에서 읽은 이집트 바로왕의 이야기, 요셉의 가족들이 오면 이집트에서 가장 좋은 곳을 내어주겠다는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신적 권위의 이야기가 아닌가? 그러면서 나는 동시에 묻고 싶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시대, 우리의 수많은 갈등과 분쟁과 전쟁의 현실에서는 누가 있어서, 어느 큰 나라가 그러한 위대한 역할을 해줄 것인가? 또한 오늘 우리가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는 한반도의 평화와 화해를 위한 ‘평화조약(Peace Treaty)’은 과연 그러한 정신에서 준비된 것인가? 위의 발터 벤야민은 오늘 그러한 신적 행위의 출현에 대해서 그렇게 긍정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여성으로서, 모성으로서, 요셉의 이야기에 나오는 것과 같은 약자의 삶을 수없이 살아낸 한반도의 일원으로서 그에 대한 희망과 소망을 저버릴 수 없다. 더군다나 오늘 우리 남한의 상황은 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그 교회도 상상을 초월하는 부정과 부패, 사이비 물신주의 신앙으로 인해서 신적 권위는커녕 법적 권위도 모두 잃어버린 상황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한 한국 사회의 대혼란이 그것이고, 이때까지 그 세력을 비호하고 찬양해왔던 한국 교회의 민낯이 그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제안하려고 한다. 우리 모두를 다시 더 겸손히 이 위대한 성서의 이야기 앞에 세우자고. 그리고 그 이야기를 계속해서 다시 되새기고 또 나누면서 우리의 희망을 잃지 말자고. 그러다보면 어쩌면 우리 가운데, 우리 중의 이야기꾼들 중에서 누군가 스스로가 그 위대한 행위에로 용기 있게 걸어 나갈 자가 나올지 어떻게 알겠는가? 아니 어쩌면 이미 그러한 일이 ㄱ이루어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그러나 혼자 떨어진 고독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우리처럼 서로 함께 함의 모습으로, 가장 후미진 변방 사람들의 얼굴로, 여성과 청년, 중학교 미성년자의 미숙한 모습으로 현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의 기대와 소망을 결코 그만 둘 일이 아니다.
International Ecumenical Conference on a Peace Treaty for the Korean Peninsula
Hong Kong SAR, 15-16 November 2016
<Two Key Forces for bringing peace to the world>
Prof. Dr. Lee Un Sunn(KNCC, Sejong University)
When the news reached Pharaoh’s palace that Joseph’s brothers had come, Pharaoh and all his officials were pleased. Pharaoh said to Joseph, “Tell your brothers, ‘do this: Load your animals and return to the land of Canaan, and bring your father and your families back to me. I will give you the best of the land of Egypt and you can enjoy the fat of the land.” (Genesis 45:16-18)
I.
We have just read the story found in Genesis 45. It is a story of Joseph’s family, and the whole story runs as follows: Joseph’s father Jacob deceived his brother Esau and fled to his uncle’s home, and in the flight married his uncle’s two daughters, Leah and Rachel. He loved Rachel more and favored her son Joseph over the other sons of Leah. In jealousy toward Joseph, his brothers sold him to a merchant carrying on business in and out of Egypt. So he came to Egypt, but during such misery, he earned the chance to interpret the dream of Pharaoh, and became the governor. As designated in the dream, the whole land around was touched by a great famine, and Joseph’s brothers also came to Egypt for food and they met together. At first, Joseph didn’t want to show himself to them and ordered them to bring him his own mother’s son Benjamin to him and for they themselves to go back home to Canaan. But his brothers begged so earnestly to take home their brother Benjamin with them, because they knew their father Jacob could not bear the loss of Benjamin after the loss of Joseph. Hearing their brothers’ serious confession that their father would die in sorrow through this loss and that they could not bear to see that misery, Joseph opened finally his heart to them and received them wholeheartedly. We see that in all these stories, there are the same miseries and conflicts which we are also confronting in our time, there are quarrels among siblings, many lies and hatreds, terror and uprootedness, famine and refugees etc.
However, in this occasion, I want to ask myself, what could be the ultimate cause and force that probably prevented the final collapse of this family’s life? At the beginning, Joseph’s brothers intended to kill him, but they changed their minds and sold him. Joseph also was able to keep his sane mind even in this misfortune, and didn’t abandon his struggle to come out from it. When seen from the viewpoint of his brothers, they expressed their entreaty not to see their father’s suffering and dying in spite of their previous sinful cheating of him. Those actions helped to obtain Joseph’s forgiveness, and the whole family was able to move to Egypt. Then I ask what would be the ultimate cause in those cases which prohibited them from their final inhumane doing and at last brought a humane ending to this story? I think it was their love and concern for their family and their remaining filial piety toward the father. All those things contributed to the hold of their family. And Joseph’s steadfast endurance can be also understood in this regard. In my view, this endeavor and concern for their own family is the basic force in human life which makes all miseries and difficulties endurable. That brings lasting reconciliation and peace, and to individuals achievements as in the case of Joseph. So, I urge, when we want to bring peace to the world by all our doings in politics, religion, economics, education etc, those doings must be connected and rooted in this fundamental humane force and endeavor, and I believe this is the universal ground on which we can build our happiness and peace. In this regard, when our world politics ignores this natural and universal factor in the building of humane happiness, it can’t succeed in their doing. We can judge those vain actions as pseudo-struggling.
II.
As the second key (force) to bring peace to the world, I recognize generosities of politically powerful countries. Even in our contemporary world, the presence of the powerful nations is notable as in the time of Joseph. Especially around the Korean peninsula, most mighty nations have gathered together, and they will play decisive roles for reunification and peace on it. In this situation, what we have heard in the Genesis 45:16-18, sounds very astonishing and marvelous. It is the story of Egypt’s Pharaoh who will give the best land of the country to Joseph’s family. As the king of the most powerful country, he promised to give the best of his holdings to the family of a feeble alien nation. How could we generally imagine such an amazing story? At that time as well as today, international diplomatic affairs are usually determined according to the principle of one’s own nation’s profit. Especially from the position of weak countries, powerful partner’s words of justice and peace can be easily suspected as pretences for the continuity of their control and power. However, this biblical account of Egypt’s Pharaoh is different from our ordinary stories, so we ask, how can we perceive this story?
I think this story tells the message that a mighty and powerful country has to be generous and bounteous to the point that they can give out the best they have, if they want to bring peace to the world. It is a courageous action of a powerful country, giving up the calculation of what its weak partner has done in the past, which conflicts it has brought, or which favors it has already received, etc. It is a great action to break through the barrier of law, and carry out an action making an exception. In the early days of the 20th century when the dark dense clouds of the Second World War were slowly rising, Western thinker Walter Benjamin (1892-1934) already designated such an action as one of “divine force/violence”, differencing it from that of “mythic force”. In his article “Critique of Violence(1920), I read the similar concerns of him for world peace, when he appointed divine force as the apocalyptic “sovereign” power which ends the usual rule of law(“lawmaking or law-preserving”), makes possible self-sacrifice, pricelessly giving oneself, not counting the partner’s sins, and not asking for compensation, etc. From this understanding, we can expect that this divine force liberates our life from a mere repetition of breathing and brings to the world genuine companionship.
III.
I understand Pharaoh’s word as one of divine force, and simultaneously, I would like to ask who then could carry out that grand action of divine force for our contemporary troublesome world and for our Korean peninsula? Is the Peace Treaty for which we are now here gathering prepared in this spirit of divine force? Walter Benjamin was not very optimistic for the new manifesting of that divine force, but as for me, I myself, as a woman, as well as a mother and a limb of the Korean peninsula, can’t easily abandon the hope and the waiting for a new appearing of such divine forces and auras. Korean peninsula has experienced long enough the condition of a feeble country and alienating suffering. In addition to past hardships, today’s situation of the Korean government and church is very miserable. They have lost all their political power, let alone their divine power through their multiple materialistic corruption and injustice. The current explosion of President Park Geun-hye and Choi Soon Sil-gate is the evidence of it, and the vivid disclosure of the Korean church’s long wrongdoing in supporting and applauding them are the result. So, now, I’d like to propose to let us more humbly stand before the grand biblical narrative of Pharaoh, and let us continuously narrate this story and rethink the possible meaning of it. While we are unceasingly doing this action, perhaps, someone or some nations among us could determine to become a divine force by themselves for the bringing of peace to this struggling world. Or it is already appearing, however, this time, not as a separated lonely individual, but as a communion like our present companionship, and not in a masculine mask, but in a feminine or young school girls’ or boys’ figure. So we will not give up our persistent hope and waiting for the manifestation of divine fo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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