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7-31
이은선 - 오랫동안 끌어왔던 원고를 마무리하고 영화 <더 포스트>를 보았다. 제목만으로 '워싱턴포스트'지에 관한 것인지...
(11) 이은선 - 오랫동안 끌어왔던 원고를 마무리하고 영화 <더 포스트>를 보았다. 제목만으로 '워싱턴포스트'지에 관한 것인지...
이은선
30 April ·
오랫동안 끌어왔던 원고를 마무리하고 영화 <더 포스트>를 보았다. 제목만으로 '워싱턴포스트'지에 관한 것인지 잘 몰랐다가 그것이 닉슨 대통령 시절 국민과 국회와 모두를 속이면서 베트남전을 끌고온 미국정부의 비밀문서 보도와 관련해서 신문사가 겪은 운명의 시간들에 대한 것인 줄 알게 되었다. 신문사 회장역의 메릴 스트립의 결단과 용기,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언론의 역할에 대한 그녀와 동료들의 신념은 그대로 또 하나의 '믿음'(信)의 일이었다. 거기서 그녀는 신문사 창시자 자신의 아버지가 ''신문이란 역사의 초고''와 같다는 말을 한 것을 상기시켰다. 영화를 보고나서 나도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났고, 그에 힘입어서 앞으로 나의 연구를 '신학'(信學), '믿음의 학'이라고 하려는 변을 처음으로 밝힌 지난 글이 생각났다. 그 글을 4월이 가기 전에
페친들과 나누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원래가 이미 언급한 <세월호와 한국여성신학>의 서문으로 쓴 글이었지만 지난 4월 초 한나 아렌트 학회에서 같이 읽기 위해 조금 더 다듬었다.
<세월호와 한국여성신학-한나 아렌트와의 대화 속에서>
이은선(한국信연구소)
1.
최근 일본의 귀한 한국학 연구가 오구라 기조 교수의『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을 쓴 오구라 교수는 지난 1980-90년대 한국에 유학 와서 8여 년 동안 한국 철학을 공부한 뛰어난 지한파이고, 최근에는 한국의 ‘영성’에 대한 관심까지 폭을 넓혀서 이웃나라 한국에 대한 바른 상을 세우려고 분투하는 소중한 한국학 학자이다. 이 책의 글들은 원래 저자가 1990년대 후반에 일본에서 한류 붐이 막 일어나는 시점에 일본의 한 잡지사 독자들을 위해서 쓴 것인데, 그것들을 모아서 낸 문고판의 후기를 보면 저자는 한 때 한국에 살 때 “한국인이 되자”는 결심까지 하면서 “한국인보다 한국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싶다”라고 소망을 가졌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런 그는 일본에서의 한국 인식이 너무도 왜곡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고, 또한 거기에 더해서 한국인들조차도 자신들의 나라에 대한 인식이 매우 조악하고 허위에 찬 것임을 보고서 자신이 발견한 한국을 ‘놀람’과 ‘찬탄’, 그러나 동시에 ‘비판’적으로 인식하면서 한 마디로 “한국을 우습게 보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려 했다고 밝힌다.
그러한 저자에 따르면 한국의 全 역사와 삶은 일본과는 달리 항상 하나의 “도덕 지향성 국가”였다. 그것은 “하나의 철학”이고, 특히 뼛속까지 유교화한 나라, 그 중에서도 주자 성리학(朱子性理學)의 나라로서 거기서 ‘도덕’과 ‘보편’, ‘명분’과 ‘원리’를 강조하는 ‘리’(理) 주도형의 나라라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항상 도덕과 명분을 강조하고 그것의 선취를 통해서 ‘권력’과 ‘부’까지 함께 얻으려는 한국 사회의 “상승을 향한 열망”은 그것이 한국 사회를 계속 역동적이게 하고, 지치지 않게 하는 젊음과 패기, 뛰어난 천재의 나라로 만들지만, 거기에 바로 한국인들의 깊은 피로(恨)와 외부지향성, 극심한 경쟁 사회의 각축을 야기한다고 지적한다. 한국이 그처럼 리와 도덕지향의 나라인 것을 드러내는 좋은 일례로 한국에서는 운동선수들조차도 도덕성을 갖추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고 하는데, 이번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한국 선수들에 대한 소개와 칭찬에도 여지없이 그들의 좋은 인성과 도덕성이 수없이 언급되는 것을 보면 이러한 지적이 틀리지 않은 것 같다.
2.
지난여름 안동 도산서원 퇴계학회에서도 개인적으로 만나기도 했던 오구라 교수의 이러한 지적과 성찰을 읽고 탁견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나 자신의 지금까지의 삶과 학문도 바로 이러한 측면이 많이 있고, 어쩌면 내가 남들보다 5년여를 먼저 교수직에서 떠나려 하는 것도 그들보다 더 ‘먼저’, 또는 더 ‘많이’ 다시 한 번 ‘도덕성’(理)을 성취하려는 상승 열망이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들어서 부끄러운 마음까지 들었다. 그러나 책의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오구라 교수는 한국인의 이 理 지향성을 단지 지향성 그 자체에서만 평가하지 거기서의 내용이나 방향성에는 상관하지 않는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보였다. 그래서 예를 들어 한국에서의 ‘식민지 근대화론’이나 이완용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인 것을 들어서 그러한 일은 한국에서 민족주의적 ‘리’가 여전히 승하기 때문이고, 언젠가는 그들(친일파)도 “그 나름의 ‘리’가 있었다”는 것을 안다면 “식민지 시대에 대한 시각도 변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즉 오구라 교수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누군가 무엇인가를 지향하고 추구(理)했다는 것 자체이지 거기서의 내용(氣)이나 방향은 아니라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오구라 교수의 관점은 나에게는 오히려 한국 사상(유교)이 끊임없이 극복하고자 했던 ‘리’(理) 또는 ‘기’(氣)일원론에 빠진 것이고, 그런 면에서 오히려 그가 참으로 그 파악을 위해 노력했다는 한국적인 특성, ‘리기불이’(理氣不二) 또는 ‘리기묘합’(理氣妙合)의 특성을 놓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3.
나는 그렇게 된 이유가 오구라 교수가 한국 사상 또는 유교 사상에서의 ‘종교적’이고 ‘여성적’인 특성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는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라고 하면서 그 철학을 특히 ‘유교’ 철학, 주자학적 ‘도덕’(리)지향성으로 보면서, 그러나 거기서의 도덕은 그 “최고 형태”를 “도덕이 권력 및 부와 삼위일체가 된 상태로 여겨지고 있다”라고 적시하고 있다(『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21쪽). 다시 말하면 오구라 교수는 한국 유교를 철저히 하나의 “현세주의적인” ‘도덕 철학’으로 파악하는 것을 말하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한국 유교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그 현세적 도덕성을 넘어서서 그가 말하는 ‘도덕․권력․부’의 삼위일체가 깨어지더라도 그 모순과 고통을 스스로 감내하며 삶을 지속하려는 노력을 계속해 왔다는 것을 간과한 것을 말한다. 나는 한국 유교에서의 이와 같은 특성-어떻게든 삶과 존재에서 ‘리기 불이성’(理氣 不二性)을 지속적으로 담지하며 함께 조화시키려는 노력-을 그 ‘종교성’(religiosity)내지는 ‘영성’( spirituality)으로 이름 하고자 하는데, 이러한 측면은 일본인 오구라 교수뿐 아니라 사실 한국 사상가들도 지금까지 크게 주목하지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영성적 특성을 특히 조선 유교여성들의 지난했던 삶에서 관찰하고, 그것을 오늘 한국적 여성신학의 구성을 위한 좋은 의미로 잘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18-19세기 조선 여성선비 임윤지당(任允摯堂,1721-1793 )과 강정일당(姜靜一堂, 1772-1832)에 대한 연구가 그 한 예이고, 그 연구를 “잃어버린 초월을 찾아서-한국 유교의 종교적 성찰과 여성주의”라는 이름 아래서 수행하였다.
오구라 교수의 한국 사상 이해에서는 ‘상승’이나 ‘지향’, ‘열망’ 등의 성취의 이야기만 있지 ‘자기희생’이나 ‘비움’(謙虛), ‘겸비’(孝)나 ‘인내’ 등의 이야기는 드물다. 그렇게 그의 이해는 ‘철학’과 ‘도덕’, ‘자아’의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인데, 나는 한국적 유교가 하나의 ‘영성’으로서 단순히 어떤 성취의 상승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비우고(捨己從人), 스스로가 ‘고통’을 감내하는 방식을 통한 이룸(求仁成聖)의 차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구라 교수의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라는 명제보다는 이미 우리가 함석헌 선생 등에게서 들었던 ‘한국은 하나의 뜻이다’라는 명제가 한국적 삶의 특성을 훨씬 더 적실하게 표현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4.
2천 년대 와서 나의 이러한 유교적 신학 언어가 다시 서구 여성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H. Arendt, 1906-1975)의 것과 많이 연결될 수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전체주의의 기원』이나 『정치의 약속』, 『인간의 조건』등에서 나타나는 궁극과 현실의 연결, 전통과 현재의 새로운 관계, 전통과 과거에 대해서 참으로 급진적이고 전복적이지만 동시에 아주 견실한 보수성을 지니고 있는 그녀 사고의 불이성(不二性)이 내가 한국 유교영성과 종교성의 핵심으로 파악한 바로 여기․이곳의 적나라한 관계의 현실 속에서 그 궁극성(聖․性․誠)을 실현하려는 노력(聖學之道, to become a sage)이라고 본 관점과 매우 잘 상통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나의 생각이 적실하다는 것을 최근에 다시 한 하이데거 전기 연구에서 발견했는데, 그 전기 연구가(뤼디거 자프란스키)는 아렌트가 나중에 서양철학의 집대성이라고 하는 하이데거(M. Heidegger, 1889-1976)의 사상을 세 가지 관점에서 전복시키는 것을 말한다. 즉 그것은 하이데거가 끊임없이 “죽음으로 달려감”의 ‘사멸성’(死)을 말하는 것에 반해서 아렌트는 거기에 대해 ‘탄생성’(生)으로 응답했으며, 하이데거가 이 세계에서 지향하는 개방성을 “각자의 본래성”이라고 본 것에 반해서 아렌트는 “타자와 함께 하는 행위 능력”(acting in concert)을 말하는 ‘다원성’과 ‘공공성’을 강조했고, 하이데거가 계속 “세인(Man)의 세계에 빠져있음”을 비판하는 것에 대해서 아렌트는 “세계사랑”(amor mundi)을 제시했다고 밝힌다(『하이데거』, 박민수 옮김, 북캠퍼스 2017, 243쪽). 여기서 서술된 하이데거와 아렌트의 관계에서 드러난 대로 나는 하이데거를 서구 철학 또는 기독교적 사고의 종말로 보면서 그에 대한 새로운 대안이 아렌트에게서 보여지고, 그 아렌트적 사고가 다시 한국 전통 여성들의 ‘천지생물生物지심’(천지의 낳고 살리는 마음)의 영성과 잘 연결되는 것을 본다. 인간의 관계와 공적 책임을 강조하는 ‘다원성’과 ‘공공성’에 대한 강조(仁), 그리고 바로 이 낮은 세계에서 하늘의 뜻을 이루려는 ‘극고명이도중용’(極高明而道中庸)과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의 한국 유교적 추구가 아렌트의 ‘세계사랑’과 잘 연결되는 것을 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의 나의 탐색은 그리하여 그 이후 “한국 생물生物여성영성의 신학-종교聖․여성性․정치性의 한몸짜기(2011)”나 “생물권 정치학 시대에서의 정치와 교육-한나 아렌트와 유교와의 관계 속에서(2013)” 등으로 묶여졌고, “다른 유교, 다른 기독교(2016)”의 탐색 등으로 지속되었다.
5.
이번 저서는 이상과 같은 생각에 있던 내가 2014년 4월16일 세월호 참사를 맞아서 어떻게 그 상황을 이해하고 어떤 물음들 속에서 그 시간들을 지나왔는가를 보여주는 글들을 모은 것이다. 그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참사를 겪은 후 이명박 대통령의 시간을 지내고 박근혜 대통령을 맞아서 일어난 참사 속에서 온 국민은 너무나 엄청나고 끔찍한 일이어서 정신을 차리기 힘들어했고, 특히 당시 그 참사 앞에서 한국의 대형교회들이 유족들과 한국 사회에 보여준 행태는 기독교 신앙과 교회, 신학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나 아렌트의 시각들은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녀는 세계 제1,2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의 유럽 제국주의와 나치와 스탈린의 전체주의를 겪었고, 그러한 끔찍한 재앙들이 어떻게 인류 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었는가를 서구 유럽문명에 대한 깊은 성찰과 통찰을 통해서 밝혔기 때문이다. 그러한 통찰들이 21세기 신제국주의 시대, 기업가 출신 이명박 대통령과 철저히 사적 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박근혜 대통령의 시대에 일어난 우리의 일들을 파악하는데 좋은 길잡이가 되었다. 또한 한국 교회와 신학이 그러한 종말적 상황과 비극 앞에서 보여준 비신앙적 행태와 무기력, 무능력은 우리가 신앙을 계속해서 가진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이세상의 삶과 정치와 경제가 교회의 복음과 구원, 신앙 등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등을 묻게 했고, 앞에서 밝힌 대로 한국 유교전통과 대화하면서 얻은 ‘聖․性․誠’의 여성신학과 ‘한국 생물(生物)여성영성’의 신학적 언어로 나는 나름의 대안을 찾고자 고심하였다.
6.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후 한 달 만에 쓴 맨 처음의 글을 시작으로 해서 이번 참사에서 제일 적나라하게 드러난 세월호의 사실적 진실과 정치의 충돌 이야기, 정치와 경제의 무원칙한 합병이 한 나라와 세계에 어떤 비극을 가져오는지, 그렇게 상식과 인간 공동 삶의 기초적 토대가 무너졌을 때 다시 그 회복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거기서 종교와 정치, 교육과 예술, 언론은 무엇인지 등의 물음들이었다. 이런 우리의 질문들은 더욱 근본적으로 신의 존재 증명에 대한 물음과 죽음과 부활, 용서와 약속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그래서 세월호 1주기를 지내고 시간이 가면서 한국 기독교와 교회, 신학이 전통의 화석화된 신 이야기와 부활 이야기 등에 갇혀서 전혀 그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그것을 넘어서 새로운 신 이해와 그리스도 이해, 십자가와 부활 이야기를 찾게 했다. 에티 힐레줌이라는 나치 유대인 수용소에서 죽어간 한 여성의 신앙과 인간적 삶의 모습을 살피면서 세월호 이후의 한국 교회와 유족들의 삶이 어떠할 수 있을까를 물었고, 또 그렇게 어린 자식들을 떠나보내고 적나라하게 맞이한 몸의 마지막을 넘어서 부활과 영생의 문제를 어떻게 다시 볼 수 있을까를 탐색했다. 2주기를 맞아서도 아직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고 오히려 희생자들과 유족들이 조롱받고, 억압받고, 내쳐지는 상황을 보면서 정말 한국 사회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는 비탄의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 가운데서 유족들 자체에서 오히려 희망의 그루터기가 놓여지는 것을 보았고, 당시 바다 속에 들어가서 시신 수색작업을 해왔던 김관홍 잠수사의 죽음을 목도하면서는 그 부활의 물음을 더욱 급진적으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7.
세월호 2주기가 지나면서 떠났던 산티아고 기행과 그 이후에 이어지는 삶의 질문을 인터뷰 형식으로 고백한 글이 있고, 결국 세월호 유족들의 삶도 포함해서 이런 모든 신앙과 정치와 의식의 물음들은 이 세상에서의 신앙을 지키는 ‘소수자’(pariah)의 물음으로 연결되는 것을 보여준다. 이제 우리의 신앙은 두 가지 측면에서 우리의 '상상'(imagination)과 연관되는 것을 말하는데,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즉 너희들의 잘못된 상상을 금하라는 이야기와 그러나 동시에 다시 겉으로 보이지 않지만 너희 상상으로 언어와 내러티브에 그려진 신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그것을 믿고 신뢰하며 살라는 두 차원의 ‘믿음’과 ‘상상’의 이야기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이제 우리 삶의 진정한 문제와 관건은 바로 ‘믿음’과 ‘신뢰’(信)의 문제이고,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의 우리 신학(神學)은 ‘신학’(信學), 즉 ‘믿음의 학’이 되어야 한다는 뜻을 밝히고 싶었다. 즉 오늘 세월호와 같은 것을 겪고 난 사회에서는 어떻게 우리가 서로를 ‘믿을’ 수 있을 것인지, 우리 사이에 신뢰와 믿음이라는 것이 다시 가능한 것인지, 무슨 방식으로 가능하게 할 수 있을지, 우리 공동 삶의 토대가 되는 말과 사실이 왜곡되고 거짓과 폭력과 고립만이 난무한 세상에서 다시 서로를 관계시키는 것이 무엇이 있는지, 이제 하나님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정말 어떤 의미인지, 우리 공동 삶을 위해서 없어서는 안되는 용서하고 약속하는 능력을 개발할 수 있는지, 이러한 ‘믿음’(信)과 관계되는 것들을 물어가고 탐구하는 것이 나는 세월호 이후의 신학, 특히 한국 여성신학이 몰두해야 하는 주제라고 생각했다.
8.
이러한 모든 생각들 속에서 나는 그동안 대학 캠퍼스라는 안정 속에서 살아온 삶을 마감하고 더욱 더 세상과 마주하려고 한다. 보다 자유롭게 집중하면서 위에서 들었던 우리 삶의 문제들에 대한 탐색을 수행하고 싶어서 내린 결론이다 하지만 연일 각종 뉴스 매체들을 통해서 전해지고 있는 소위 우리 사회 지도급 인사들의 숨어있던 비행들이 드러나니 마음이 참으로 우울하다. 어떻게 한 인간의 삶에서 말과 행위, 쓰여진 글과 실제적 삶 사이의 균열이 그 정도로 심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더욱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나 스스로도 이번 글 모음의 제목을 『세월호와 한국 여성신학』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매우 두렵고 떨리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글들에서 쓰인 만큼 그렇게 진정으로 강도만나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고서 그들의 죽어가는 처지를 돌아보며 함께 했나를 돌아보았을 때 한없이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찍이 시몬느 베이유는 불행한 사람은 결코 (이웃에게) ‘집중’할 수가 없다고 했는데, 그래서 우리 옆에 죽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집중어린 배려, 스러져가는 그들 속에서 끝까지 신적 불꽃을 놓치지 않는 눈과 귀를 가진 사람들이 더욱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또 한다. 한국의 전통은 바로 그러한 사람을 진실하고 성실한 ‘귀’와 ‘입’의 사람, 잘 듣고 참되게 말 할 수 있는 ‘성인’(聖人)으로 묘사하는데, 이 성인이야말로 오늘 우리 시대 ‘촛불’과 ‘만인사제’의 시대에 누구나가 지향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견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한국 여성신학자로서 그 ‘성인’(聖人)과 ‘그리스도’의 길을 더욱 탐색하고 이어가고 살아가는 것이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9.
한나 아렌트는 이 세상이 새로워지는 두 가지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녀에 따르면 이 세상의 새로워짐은 이 세상에 ‘늦게 도착한’(belated) 새로운 세대의 새 탄생과 창조에 의해서인데, 그러한 ‘늦게 온 자들에 대한 사랑’과 그 늦게 온 자들에게 기성세대의 대변인으로서 이 세상에 대해서 소개해주고, 안내해주고, 늦게 온 세대가 이 세상에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성세대의 ‘세계에 대한 사랑’(amor mundi)을 말한다. 즉 우리가 사는 세계를 참으로 염려하고 계속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이 세계를 계속 새롭게 하고 책임져나갈 늦게 온 세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기성세대의 세계 사랑이라는 것이다. 오늘 한국 사회는 여러 측면에서 큰 전환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미투운동’이 크게 번지고 있는 것을 목도한다. 그러면서 한국 여성신학은 자신들이 일찍이 시작하고 탄생시켰던 성폭력문제와 성평등의 물음을 어떻게 더 전개시켜나가야 할지의 과제 앞에 다시 섰다. 오늘 교회와 신학이 한없이 업신여김을 당하고 맛 잃고 빛 잃은 소금처럼 길에 던져짐을 당하는 현실에서, 그리고 오늘 매일, 매 순간에 절박하고 긴급하게 만나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이라는 큰 난제 앞에서 한국 여성신학이 어떠한 길을 가야하는지의 물음 앞에 우리가 서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현재 그렇게 되어 있지 못하고, 그것을 체화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자기희생’이나 ‘비움’, ‘겸비’(謙虛)와 ‘용기’, ‘인내’ 등의 이야기가 우리 것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래서 도덕과 철학과 과학의 길옆에서 그들과 함께, 아니면 앞서서 신앙과 믿음과 종교의 길을 가는 것이 한국 여성신학자들의 길이 아닌가 생각한다. 몸의 끝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니고, 우리가 서로 모여 함께 이 모든 것들을 이야기로 나눌 때 그 무게와 짐이 감해진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그것을 아는 믿음 속에서 함께 그 길을 가고 싶다. 그 길은 나에게는 특히 두 가지의 언어군, ‘聖․性․誠’과 ‘神․身․信’의 언어를 서로 관계시키면서 씨름하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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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배 공유해갑니다Man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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