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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모(1924~2021)와 선우학원(1918~2015) 두 인물의 삶과 사상에 대한 비교 분석입니다.
<1. 정경모와 선우학원의 삶 비교>
정경모와 선우학원은 모두 해외를 거점으로 한국 현대사의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평생을 바친 망명 지식인이자 실천적 사상가이다. 그러나 두 인물은 활동 거점, 주된 투쟁 방식, 학문적 접근 경로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활동 거점 및 망명 경로: 선우학원은 1938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일찍이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서부를 주 무대로 활동한 재미동포 1세대 지식인이다. 반면 정경모는 해방과 한국전쟁을 고국에서 겪고 정부 관료로 재직하다가, 1970년 박정희 정권의 독재에 저항하여 일본 도쿄로 망명한 재일 망명 지식인이다.
실천 방식: 선우학원은 미국 학계에서 한국학을 개척한 정치학자·사회학자로서 학술 심포지엄 조직, 영문 저술을 통한 국제 여론 환기, <선우평화재단>을 통한 기독교·진보 진영 재정 지원 등 학문적·조직적 연대에 힘썼다. 반면 정경모는 <민족시보>, <통일평론>, <씨알의 힘> 등 비타협적 언론 매체를 직접 발행하며 군사독재의 폭력성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평론가이자, 1989년 문익환 목사와 함께 평양을 전격 방문하여 <4·2 남북 공동성명>을 이끌어낸 전면적 실천가였다.
<2. 일제 식민지 시기의 경험 비교>
두 인물 모두 일제강점기 기독교적 배경과 일본 유학을 거쳤으나, 식민 지배를 체감한 계기와 대응 방식에는 결이 달랐다.
선우학원: 1919년 3·1 운동 당시 아버지가 희생되는 비극을 겪으며 어린 시절부터 반일 민족의식을 뼈저리게 형성하였다. 평양 숭인상업을 거쳐 도쿄 아오야마가쿠인(청산학원) 신학부에서 수학하던 중 조선인 유학생 독립운동에 관여하여 일본 경찰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체포와 징집 위협을 피하기 위해 1938년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정경모: 서울 경기중학교를 거쳐 도쿄 게이오대학교 의학부 예과에 진학하여 과학도로서 근대 학문을 익혔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 제국주의의 학도병 강제 징집과 식민지 조선인의 비참한 차별 구조를 목격하며 내적 저항감을 키웠다. 선우학원이 식민지 체제 초기부터 직접적인 독립운동과 탄압으로 미국 망명을 택했다면, 정경모는 일본 본토에서 제국의 붕괴 과정을 목도하고 해방 후 서울로 귀환하여 격동기를 맞이했다.
<3. 미국에 대한 의견 형성>
두 인물 모두 미국 유학을 경험했고 서구 자유민주주의와 학문을 직접 체화했으나, 미국 패권주의와 대외 정책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인 시각을 확립하였다.
정경모: 미국 에모리대학에서 유학한 뒤 한국전쟁 당시 판문점 휴전회담 유엔군 측 통역장교로 복무했다. 이 과정에서 한반도 분단과 전쟁의 배경에 미국의 냉전 패권 전략이 깊숙이 개입되어 있음을 현장에서 직접 확인하였다. 그는 미국이 한반도 민중의 자주적 통일보다는 자국의 동아시아 군사 전략적 이익을 위해 분단체제를 영속화하고 독재 정권을 비호했다고 보았으며, 진정한 해방을 위해서는 외세 의존적 사고를 탈피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선우학원: 버클리 대학원과 워싱턴 대학 등 미국 대학 강단에서 평생을 보내며 미국 내부의 인종차별과 제국주의적 대외 팽창 정책을 직접 관찰했다. 그는 미국 정부가 북미 간 평화협정 체결을 외면하고 군사적 압박을 지속하는 것이 한반도 긴장 완화를 가로막는 주원인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미국 시민사회와 정계를 향해 미국이 냉전적 사고를 버리고 북한과의 관계 정상화 및 평화조약 체결에 나서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4. 한국과 북한에 대한 의견 및 시각>
두 사상가는 남북한 어느 한쪽의 체제 논리에 매몰되지 않고, 민족의 자주와 평화적 공존을 최우선 가치로 두었다.
대한민국(남한)에 대한 시각:
정경모는 군사독재 정권의 인권 유린과 분단 이데올로기 악용을 가장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는 남한 사회가 군사주의와 맹목적 반공주의에서 벗어나야 민주주의가 완성될 수 있다고 보았으며, 김대중 구명 운동과 민주화 투쟁의 선봉에 섰다.
선우학원 역시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의 독재를 규탄하며 미주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다. 다만 그는 미국 내 동포사회의 힘을 모아 남한 민주화 세력을 재정적·정치적으로 뒷받침하는 데 주력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에 대한 시각:
선우학원은 북한을 적대나 흡수의 대상이 아니라 평화적 대화와 화해를 추진해야 할 동반자로 보았다. 수차례 방북하여 학술·종교 교류를 주도하고, 1990년대 북한의 대기근 시절 인도적 식량 지원 운동을 펼쳤다. 그의 사후 유해는 평양 신미리애국열사릉에 안장될 만큼 북측과도 깊은 신뢰 관계를 유지했다.
정경모는 1989년 방북 당시 김일성 주석과 담판하여 4·2 공동성명을 도출해내는 등 북한 지도부와 직접 대화하며 통일 방안을 모색했다. 그러나 그는 북한의 세습 체제나 교조주의에 무조건 동조한 것이 아니라, 분단 극복을 위한 현실적 상대방으로서 북한을 인정하고 '연방제'와 '연합제'의 절충을 통한 점진적·단계적 평화 통일을 주장했다.
<종합 분석>
선우학원과 정경모는 20세기 한국 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각각 미국과 일본이라는 제국의 중심부에 위치하면서도, 결코 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조국의 분단 극복과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해외 디아스포라 지식인의 전형을 보여준다. 선우학원이 학문과 재정적 연대, 북미 평화협정 촉구를 축으로 하는 제도적·조직적 통일운동을 전개했다면, 정경모는 날카로운 언론 평론과 역사적 방북 결행을 통해 남북 냉전 체제의 균열을 낸 비타협적 저항 지식인의 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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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모(1924–2021)와 선우학원(1918–2015)을 나란히 읽으면, 두 사람은 흔히 <해외의 친북·통일운동가>라는 한 범주에 묶이지만 실제 지적 형성과정은 꽤 다릅니다. 선우학원은 <식민지 청년 → 미국 이민 지식인 → 미국 내부의 비판적 통일운동가>의 길을 걸었고, 정경모는 <식민지 청소년 → 일본·미국 유학생 → 한국전쟁의 미국 군사체제 내부 경험 → 남한 생활 → 일본 망명 통일운동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 차이를 중심으로 보아야 두 사람의 미국관과 북한관도 제대로 이해됩니다.
1. 두 사람의 삶: 비슷한 목적지, 상당히 다른 길
선우학원은 1918년 평양에서 태어났습니다. 따라서 1945년 해방 때 이미 27세였고, 인격과 세계관의 중요한 부분이 식민지기에 형성되었습니다. 일본 유학을 거쳐 1938년 미국으로 건너갔으므로, 약 스무 살까지 식민지 조선에서 살다가 이후 삶의 대부분을 미국에서 보낸 사람입니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학자가 되었으며, 1960년대 초에는 한국에서 연세대와 <Korea Herald> 등에 관여한 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대학 교수로 오랫동안 살았습니다.
반면 정경모는 1924년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징집을 피하려 일본으로 건너가 게이오대 의학부에서 공부했고, 해방 후 귀국했다가 미국 에모리대에서 화학을 공부했습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미국 측 군사기구에서 일하게 되어 도쿄와 판문점에서 통역업무까지 경험했습니다. 이후 한국에서 1956~1970년을 살다가 박정희 체제에 반대하여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사실상 반세기 동안 망명생활을 했습니다.
따라서 아주 간단히 말하면,
| 선우학원 | 정경모 | |
|---|---|---|
| 출생 | 1918 평양 | 1924 서울 |
| 식민지 경험 | 청년기까지 충분히 경험 | 소년·청년기 경험 |
| 일본 | 초기 유학 경험 | 전쟁 말기 유학, 이후 망명지 |
| 미국 | 1938년 이후 삶의 중심 | 유학·한국전쟁 경험의 중요한 무대 |
| 남한 생활 | 비교적 짧음 | 해방 후와 1956~70년 상당 기간 |
| 통일운동의 기반 | 재미동포 사회 | 일본의 재일·한국 민주화 네트워크 |
| 최종 위치 | 미국 | 일본 |
결국 선우학원은 <이민자 지식인>이고 정경모는 훨씬 더 <망명 지식인>에 가깝습니다.
2. 일제 식민지 경험: 두 사람의 공통된 출발점과 차이
이 비교가 가장 중요합니다.
두 사람 모두 식민통치를 단순히 역사책에서 배운 세대가 아닙니다.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 법적·정치적 위계가 존재했던 사회를 자기 생애 속에서 경험한 세대>입니다.
하지만 여섯 살의 나이 차이가 상당히 큽니다.
선우학원
1918년생 선우학원에게 식민지는 거의 <성인이 될 때까지의 전 세계>였습니다. 1938년 미국으로 떠날 때 이미 스무 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민족주의에는 어린 시절의 피해기억만 아니라 청년기의 정치적 자각이 들어 있습니다. 그의 회고록에서 <아리랑>이 반복적으로 중요한 상징이 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식민지 조선인은 자기 나라가 없고, 해외에 나가면 독립된 국민국가의 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경험이 중요했습니다. 제2차대전 중 재미 한인들이 미국 정부를 상대로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설득해야 했다는 그의 회고도 이 맥락입니다. 미국 국무부가 한국의 독립국가 능력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기억은 그의 미국관 형성에 특히 중요합니다.
즉 선우학원의 식민 경험은
<일본에 대한 반감 → 민족자결에 대한 강한 집착 → 어느 강대국에도 한국 운명을 맡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
으로 연결됩니다.
정경모
정경모에게도 식민지는 결정적이지만 조금 다릅니다. 그는 1924년생이므로 식민지 전반부보다는 <전시동원체제가 극단화한 1930년대 말~1945년>을 청소년으로 경험했습니다.
더구나 징집을 피하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했다는 그의 생애에는 묘한 역설이 있습니다. 일본은 식민 지배국이지만 동시에 그가 직접 생활하고 공부하고 인간관계를 맺은 사회였습니다. 훗날 일본 여성과 결혼하고 일본에서 반세기를 살았다는 사실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정경모의 일본관은 단순한 <일본인 혐오>로 가지 않습니다.
그에게 문제는 일본인 개인이라기보다
<일본 제국주의와 국가권력>
입니다.
이 점에서 그의 민족주의에는 상당히 강한 <구조적 역사인식>이 있습니다.
3. 미국관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여기서 두 사람이 가장 흥미롭게 갈라집니다.
선우학원: <미국을 사랑하면서 미국에 실망한 사람>
선우학원에게 미국은 처음부터 적대국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미국은
- 식민지 조선을 탈출할 수 있게 해준 곳
- 공부할 수 있게 해준 곳
- 학자로서 직업을 갖게 해준 곳
- 가족을 이루고 평생 살아간 나라
였습니다. 1938년 미국에 온 뒤 교수로 장기간 활동했다는 그의 경력 자체가 이를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선우학원의 반미 비판을 단순한 <반미주의>라고 하면 중요한 것을 놓칩니다.
그의 질문은 오히려
<미국이 말하는 자유·민주주의·민족자결의 원칙을 왜 한국에서는 적용하지 않았는가?>
였습니다.
미국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미국 민주주의의 이상을 몰라서 비판한 것이 아니라, <그 이상과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 사이의 모순>을 문제 삼은 것입니다.
여기에 냉전이 결정적입니다.
해방 이후 한국이 곧바로 독립적 민족국가가 되지 못하고 미·소 점령과 냉전 속에서 분단되었다는 사실을 선우학원은 한국 현대사의 근본적 비극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그의 <중립화 통일론>도 자연스럽습니다.
한국이
미국 진영에도,
소련·중국 진영에도
완전히 편입되지 않고,
<강대국 경쟁에서 벗어난 자주적 국가>
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4. 정경모의 미국관: 훨씬 더 급진적으로 변한다
정경모에게는 특별한 경험이 하나 더 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국 군사체제 안에 들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미국 유학생이던 그는 전쟁이 터지자 도쿄의 미군 관련 조직에서 근무했고 판문점 휴전회담의 통역업무도 경험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특이한 위치입니다.
그는 미국을
밖에서 비판한 사람이 아니라
<한국전쟁을 수행하는 미국의 체제 안에서 보았던 사람>
입니다.
그런데 훗날 그의 역사해석은 급격히 비판적으로 변합니다.
<시대의 불침번>에 대한 동시대 서평에서도 그의 역사인식을 관통하는 핵심이 <미국과 일본의 한반도 지배전략>이라는 점이 지적되었습니다. 특히 그는 한국전쟁을 단순히 <김일성이 먼저 침략했다>는 수준에서 이해해서는 안 되고 미·소 냉전과 미국의 전략을 함께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두 사람의 미국 비판을 구별하면 이렇습니다.
<선우학원>
미국 민주주의의 이상과 미국 외교정책의 모순을 비판
<정경모>
미국 자체를 한반도 현대사를 규정해온 제국주의적 구조로 보는 경향
정경모 쪽이 훨씬 급진적입니다.
5. 남한에 대한 시각
두 사람 모두 <대한민국 자체를 부정한다>고 정리하면 지나치게 단순합니다.
그들이 가장 강하게 반대한 것은
<대한민국 = 반공국가 = 군사독재 = 미국의 동맹체제>
라는 결합이었습니다.
선우학원은 한국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참여했고, 미국에서 한국의 권위주의 체제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미국 정책을 계속 비판했습니다. 그의 저술 목록에도 한국의 억압적 국가와 교회의 저항, 미국의 아시아정책 등을 다룬 저술이 나타납니다.
정경모에게는 이것이 훨씬 개인적인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실제로 1956~70년 한국에서 살았고 박정희 체제와 충돌한 뒤 일본으로 나가게 됩니다. 이후 김대중 납치사건 구명운동, 김지하 석방운동 등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므로 정경모에게 남한 권위주의는 이론이 아니라 <자신을 고국 밖으로 밀어낸 체제>였습니다.
이것이 두 사람의 중요한 차이입니다.
선우학원은 남한을 주로 <해외에서 바라본 비판적 디아스포라 지식인>이었고,
정경모는 남한 사회 안에서 직접 살아본 뒤 <망명한 정치적 반대자>였습니다.
6. 그렇다면 북한은 어떻게 보았는가
두 사람의 가장 논쟁적인 부분입니다.
공통점부터 말하면 두 사람 모두 북한을
<전체주의 독재국가이므로 제거되어야 할 대상>
으로 보는 냉전적 관점을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북한을 무엇보다
<분단된 민족의 다른 절반>
으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북한과의 대화와 교류 자체를 불온시하는 남한의 국가보안법적 사고방식에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정도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정경모
정경모는 1989년 문익환과 함께 평양을 방문했고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장 허담과 <4·2 공동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이 사건은 이후 남북 민간 통일운동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됩니다.
그의 기본 관점은
<북한이 선이고 남한이 악이다>
라기보다는
<남북 어느 한쪽의 국가 정통성이 민족 전체를 독점할 수 없다>
에 더 가깝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에게 최상위 범주는 <체제>보다 <민족>입니다.
대한민국이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보다
<분단 이전의 조선 민족>
이 논리적으로 먼저 존재합니다.
7. 선우학원은 북한에 한층 더 가까워진다
선우학원 역시 출발점은 <민족주의적 중립·평화통일론>이었습니다.
그런데 말년으로 갈수록 북한과의 관계는 정경모보다 훨씬 가까워집니다. 북한은 그를 통일운동가로 높이 평가했으며 사후 유해가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습니다.
물론 이것만으로
<선우학원은 북한의 모든 정책을 지지했다>
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앞서 살펴본 그의 여러 저술을 함께 읽으면 분명한 비대칭이 있습니다.
남한과 미국의
- 독재
- 군사주의
- 제국주의
- 분단 책임
에 대해서는 상당히 구체적이고 날카롭게 비판하는 반면,
북한의
- 일당체제
- 정치적 억압
- 수령체제
- 인권 문제
에는 같은 정도의 비판적 분석을 적용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선우학원 사상의 중요한 약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정경모에게도 비슷한 문제가 있지만 선우학원에게서 더 두드러집니다.
8. 왜 이런 비대칭이 생겼을까
여기에서 두 사람을 오늘의 기준만으로 판단해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의 세계관은 기본적으로
<식민지 → 해방 → 분단 → 전쟁 → 군사독재>
라는 경험 순서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이들에게 최초의 원죄는 <공산주의>가 아니었습니다.
최초의 원죄는
<식민지배와 민족의 주권 상실>
이었습니다.
그 다음 원죄가
<강대국에 의한 분단>
이었습니다.
따라서 사고의 우선순위가 오늘날의 자유민주주의적 북한 비판과 다릅니다.
오늘날 우리는 북한을 볼 때 먼저
<독재인가 민주주의인가?>
를 묻습니다.
두 사람은 먼저
<왜 민족이 둘로 갈라졌는가?>
를 물었습니다.
이 차이는 엄청나게 중요합니다.
9. 가장 결정적인 차이: 선우학원은 1918년생, 정경모는 1924년생
제가 두 사람을 비교하면서 특히 주목하게 되는 부분입니다.
선우학원은 1918년생이므로 식민지 조선에서 <성인이 된 사람>입니다.
정경모는 1924년생이므로 식민지에서 성장했지만 해방 때 21세였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미국에 대한 비판은 정경모가 더 구조적이고 급진적입니다.
왜일까요?
식민지 경험 자체만으로 미국 비판이 생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경모에게 결정적이었던 것은
<식민지 경험 + 한국전쟁 + 미군 내부 경험 + 이승만·박정희 시대 + 일본 망명>
이 연속해서 쌓였다는 점입니다.
반면 선우학원에게는
<식민지 경험 + 미국 이민자의 삶 + 미국 민주주의 경험 + 재미 독립운동·통일운동>
이 축적되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을 비판하면서도 두 사람이 서 있는 위치가 다릅니다.
10. 두 사람의 사상을 한 문장씩 압축한다면
선우학원:
<한국인은 일본 식민지배에서 벗어났지만 강대국 냉전체제에서 아직 완전히 해방되지 않았다. 남북은 외세 의존을 벗어나 평화적으로 통일해야 한다.>
정경모:
<한국 현대사의 분단과 독재를 이해하려면 남북의 이념대립만 볼 것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에서 미국의 동아시아 지배체제로 이어지는 구조를 보아야 한다.>
둘의 공통된 핵심은 결국
<민족자주>
입니다.
그러나 선우학원에게 그것은 <디아스포라 민족주의와 중립화 통일론>으로 발전했고, 정경모에게는 <제국주의 비판과 남북 민족연합적 통일론>으로 발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1. 제가 보는 두 사람의 가장 큰 장점과 한계
두 사람의 장점은 한국 현대사를 <남한 국가의 시각만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945년을 완전한 해방이라고 보지 않고,
1948년을 역사의 자연스러운 귀결로 보지 않고,
한국전쟁을 단순한 남북 두 정부의 전쟁으로 보지 않았으며,
미국·일본·소련·중국이라는 국제구조 속에서 한국 현대사를 보았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중요한 통찰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장점이 한계로 바뀌기도 했습니다.
<민족과 외세>라는 틀이 너무 강해지면서
<남한과 북한 각각의 내부에서 국가가 자기 국민에게 무엇을 했는가>
라는 문제가 상대적으로 작아집니다.
특히 북한을 분석할 때 그렇습니다.
미국이 북한을 어떻게 압박했는가는 매우 자세히 보면서,
북한 국가가 북한 주민에게 무엇을 했는가는 상대적으로 희미해집니다.
따라서 저는 두 사람을 <친북 지식인>이라고 단순하게 분류하기보다는
<식민지 경험에서 출발하여 냉전적 분단체제 자체를 문제 삼은 민족주의적 해외 지식인>
이라고 부르는 편이 훨씬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민족주의적 렌즈 때문에 <북한 체제 자체에 대한 비판적 거리가 충분하지 않았다>는 평가 역시 함께 해야 합니다.
가장 흥미로운 점은 두 사람이 거의 같은 역사적 결론에 도달했는데도, 그곳에 이르는 길은 반대였다는 것입니다.
<선우학원은 미국에서 70여 년을 살면서 미국 중심의 냉전질서를 비판하게 되었고, 정경모는 미국의 군사체제를 직접 경험하고 한국에서 살다가 일본으로 망명하면서 미국 중심의 한반도 질서를 비판하게 되었습니다.>
이 차이가 두 사람을 함께 읽을 때 가장 중요한 비교점이라고 봅니다.
특히 다음 단계로는 <두 사람과 박한식>을 함께 놓으면 매우 흥미롭습니다. 세 사람 모두 미국에서 또는 미국과 밀접하게 살면서 북한을 이해하려 했지만, <선우학원=민족주의적 통일운동가, 정경모=반제국주의적 역사비평가, 박한식=학문적·문화론적 북한 이해>라는 상당히 다른 세 유형이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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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세 사람을 함께 놓으면 상당히 흥미로운 <세 가지 유형의 해외 통일 지식인>이 나타납니다.
<선우학원(1918–2015) — 정경모(1924–2021) — 박한식(1938/39–2026)>의 차이는 단순히 친북의 정도가 아니라, <무엇을 한국 현대사의 근본문제로 보았느냐>에서 생깁니다. 선우학원에게는 <민족의 독립과 자주>, 정경모에게는 <식민주의·분단·미국 패권의 역사구조>, 박한식에게는 <전쟁을 일으키는 적대관계와 상대방에 대한 몰이해>가 가장 근본적인 문제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1. 먼저 세 사람을 한눈에 보면
| 선우학원 | 정경모 | 박한식 | |
|---|---|---|---|
| 세대 | 1918년생 | 1924년생 | 1938/39년생 |
| 결정적 역사경험 | 일제 식민지 | 식민지 + 한국전쟁 + 군사독재 | 중국 내전 + 한국전쟁 |
| 주 활동지역 | 미국 | 일본 | 미국 |
| 기본 정체성 | 재미 민족주의 지식인 | 망명 역사비평가 | 국제정치학자·평화중재자 |
| 미국을 보는 핵심 | 민주주의 이상과 제국정책의 모순 | 한반도 분단질서를 유지하는 패권국 | 갈등 당사자이면서 협상 가능한 국가 |
| 북한 접근 | 같은 민족, 통일의 상대 | 분단체제의 다른 절반 | 독특한 논리를 가진 정치사회 |
| 주요 방법 | 통일운동·저술 | 역사비평·통일운동 | 연구·방북·중재 |
| 중심어 | 자주·중립화·통일 | 민족·분단·반제국주의 | 평화·인간욕구·상호이해 |
선우학원은 1938년 미국에 건너가 미국에서 학자 생활과 통일운동을 계속했고, 해외동포와 북한 사이의 대화사업도 장기간 조직했다. 박한식은 조지아대에서 약 45년간 국제관계학을 가르쳤고 북한을 50여 차례 방문했으며, 1994년 지미 카터 방북과 2009년 빌 클린턴 방북 과정에서도 중재 역할을 했다. 그는 2026년 1월 20일 87세로 별세했다.
그러나 이 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세 사람의 출발점>입니다.
2. 세대 차이가 의외로 중요하다
선우학원과 정경모는 명백한 <식민지 세대>입니다.
선우학원은 해방 때 27세,
정경모는 21세였습니다.
따라서 두 사람에게
<나라를 빼앗긴 상태>
는 추상적인 역사가 아니라 자신의 청소년·청년 경험이었습니다.
반면 박한식은 다릅니다.
그는 중국에서 한국인 부모에게 태어났고 어린 시절 중국 내전과 이후 한국전쟁을 경험했습니다. 박한식 자신은 어린 시절부터 <왜 사람들이 서로 죽이는가>라는 질문에 사로잡혔으며 이것이 평화연구로 이어졌다고 회고했습니다.
이 차이가 세 사람의 사상을 상당 부분 설명합니다.
선우학원·정경모:
<왜 우리 민족은 외세 때문에 나라를 빼앗기고 분단되었는가?>
박한식:
<왜 사람들이 서로를 적으로 만들어 죽이는가?>
질문의 출발점부터 다릅니다.
그래서 앞의 두 사람은 기본적으로 <민족주의적 문제설정>을 하고, 박한식은 상대적으로 <평화학적 문제설정>을 합니다.
3. 선우학원: <민족해방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선우학원의 세계관에서는 1945년이 완전한 해방이 아닙니다.
일본으로부터는 해방되었지만,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나누었고
남북이 각각 강대국의 진영에 들어갔으며
결국 전쟁까지 벌어졌습니다.
따라서 그에게 한국 현대사의 중심 과제는
<민족자결의 완성>
입니다.
이 때문에 선우학원의 <중립화 통일론>이 중요합니다.
한국은 미국·중국·소련·일본 어느 한 강대국의 전초기지가 아니라 주변국 모두와 관계를 가지면서 독립적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에게 통일은 경제적 편익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1945년에 완성되지 못한 민족해방을 완성하는 것>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북한을 평가할 때에도 민주주의냐 독재냐보다 먼저
<북한도 한국 민족의 절반>
이라는 전제가 작동합니다.
이것이 선우학원의 강점이면서 동시에 약점입니다.
북한을 악마화하지 않는 대신, 북한 내부의 권력구조와 억압을 충분히 비판하지 못하기 쉽습니다.
4. 정경모: <분단을 만든 역사구조를 파헤쳐야 한다>
정경모는 선우학원보다 한 단계 더 <역사구조적>입니다.
그의 관심은
<누가 한국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쪽으로 갑니다.
일본 식민주의,
해방,
미·소 점령,
한국전쟁,
이승만 체제,
박정희 체제,
한미일 냉전체제
를 하나의 긴 역사적 연속선 속에서 읽으려 합니다.
그래서 정경모에게 미국 문제는 선우학원보다 훨씬 더 중심적입니다.
선우학원이
<미국은 자기 민주주의 원칙을 한국에서도 지켜야 한다>
고 묻는다면,
정경모는 보다 근본적으로
<미국의 동아시아 패권 자체가 한국의 분단구조를 어떻게 만들어내고 유지했는가?>
를 묻습니다.
1989년 문익환의 역사적인 평양 방문에도 정경모가 깊이 관여했으며, 그의 통일운동은 이후 더욱 본격화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세 사람 중 <반제국주의적 역사관>이 가장 강한 사람은 정경모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5. 그런데 박한식은 전혀 다른 길로 북한에 접근한다
박한식이 두 사람과 가장 다른 점입니다.
그는 북한에 대해 먼저
<옳은가, 틀린가?>
라고 묻지 않습니다.
오히려
<북한 사람들은 왜 그렇게 행동한다고 생각하는가?>
를 묻습니다.
그의 대표 저서 제목 자체가 이를 보여줍니다.
<North Korea: The Politics of Unconventional Wisdom> <북한: 비관습적 지혜의 정치>입니다. 이 책은 학술적으로도 북한의 주체사상과 정치논리를 내부적 맥락에서 이해하려는 시도로 평가되어 왔습니다.
박한식은 특히 <주체사상>을 단순한 공산주의 선전구호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체가 원래 외세 지배에 대한 저항, 자주성, 존엄, 민족적 자기결정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해석합니다. 실제 자신의 인터뷰에서도 주체사상의 출발을 <반외세적 사상>과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여기서 박한식은 상당히 독특합니다.
워싱턴식 북한관은 흔히
<독재 → 군사주의 → 핵무기 → 위협>
순으로 북한을 봅니다.
박한식은 거꾸로 봅니다.
<역사적 위협의식 → 외세에 대한 불신 → 자주에 대한 집착 → 강한 국가 → 군사주의>
라는 식입니다.
즉 북한의 행위를 <광기>가 아니라 <그 나름의 역사적 논리>를 가진 행동으로 해석하려 합니다.
6. 이것이 박한식의 가장 중요한 공헌이다
박한식은 북한을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보다
<북한을 이해하지 않고 어떻게 북한과 평화를 만들 수 있는가?>
를 물었습니다.
그가 한국 통일 문제에서 강조했던 것도 <차이를 없애는 것>보다 차이를 인정하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구술 인터뷰에서도 남북한의 차이를 통일의 장애물로만 보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선우학원·정경모와 미묘하게 다릅니다.
선우학원과 정경모에게
<우리는 본래 한민족>
이라는 사실이 출발점이라면,
박한식에게는 오히려
<70년 이상 서로 다른 사회가 된 두 집단>
이라는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출발점입니다.
따라서 박한식의 평화론은
<같으니까 합쳐야 한다>
보다는
<달라도 함께 살 수 있어야 한다>
에 가깝습니다.
이 차이는 상당히 중요합니다.
7. 미국에 대한 세 사람의 태도도 여기에서 갈라진다
선우학원
미국 사회에서 대부분의 삶을 보냈습니다.
따라서 미국은 <생활세계>입니다.
하지만 미국 외교정책에는 비판적입니다.
즉,
<미국 민주주의의 가치>와
<미국의 한반도 정책>
을 구별합니다.
정경모
미국을 훨씬 더 구조적으로 봅니다.
미국은 하나의 국가일 뿐 아니라
<동아시아의 군사적·정치적 질서를 만드는 패권>
입니다.
따라서 한국의 자주와 미국 패권 사이에 근본적 긴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한식
박한식에게 미국은 조금 다릅니다.
그 역시 미국 정책을 강하게 비판했지만 미국을 단순한 <제국주의 적대자>로 규정하면 자신이 하려는 일이 불가능해집니다.
그가 하려 한 일 자체가
<워싱턴 ↔ 평양>
사이의 중재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는 북한을 50여 차례 방문했고 미국 정부 관계자 및 카터 전 대통령 등과도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세 사람을 매우 단순화하면,
<선우학원: 미국에 대한 실망>
<정경모: 미국 패권에 대한 비판>
<박한식: 미국과 북한의 적대관계 자체에 대한 비판>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8. 북한에 대한 거리도 세 사람이 다르다
여기서는 조심해서 구별해야 합니다.
선우학원에게 북한은 상당히 강하게
<민족적 연대의 상대>
였습니다.
정경모에게 북한은
<분단체제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한국>
에 가깝습니다.
박한식에게 북한은
<연구하고 이해해야 할 독특한 정치사회>
였습니다.
그래서 북한에 가장 정서적으로 가까운 사람을 굳이 찾는다면 선우학원일 수 있고,
북한의 반미·반제국주의적 역사해석과 가장 많이 겹치는 사람은 정경모이며,
북한의 정치문화를 가장 체계적으로 설명하려 한 사람은 박한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 가지를 <친북> 하나로 묶어버리면 중요한 차이가 모두 사라집니다.
9. 그러나 박한식에게도 중요한 약점이 있다
제가 보기에 세 사람 중 박한식의 접근이 학문적으로 가장 흥미롭지만 동시에 매우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다.
<이해하는 것과 정당화하는 것의 경계>입니다.
예를 들어 북한이 왜
- 지도자를 중심으로 조직되고
- 주체를 강조하며
- 외국을 의심하고
- 핵무기를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
설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설명을 계속하다 보면
<왜 그렇게 되었는가>
가 어느 순간
<그러므로 그렇게 하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로 바뀔 위험이 있습니다.
박한식 연구의 가장 큰 논쟁점도 여기에서 생긴다고 봅니다.
그가 북한의 체제를 외부의 자유민주주의 기준만으로 재단하지 않는 것은 큰 장점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
<북한 주민 개인이 그 체제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
<권력에 반대할 권리가 있는가?>
<국가폭력에 대한 책임은 어떻게 물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 상대적으로 뒤로 밀릴 수 있습니다.
10. 사실 이 약점은 세 사람 모두에게 있다
흥미롭게도 이유는 서로 다릅니다.
선우학원은
<민족>
이라는 렌즈 때문에,
정경모는
<제국주의와 분단구조>
라는 렌즈 때문에,
박한식은
<문화적 이해와 평화>
라는 렌즈 때문에
북한 내부의 권력문제를 상대적으로 작게 볼 위험이 있습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선우학원: <민족을 너무 크게 본다.>
정경모: <국제구조를 너무 크게 본다.>
박한식: <상대방의 논리를 너무 충실하게 이해하려 한다.>
그리고 그 결과 세 사람 모두 어느 정도
<북한 주민 대 북한 국가>
라는 문제를 충분히 중심에 놓지 못합니다.
이것이 제가 세 사람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하게 보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11. 그러나 박한식이 한 단계 발전시킨 것도 있다
그럼에도 제가 세 사람을 시간순으로 놓는다면 하나의 흥미로운 변화가 보입니다.
제1단계 — 선우학원
<민족이 갈라졌다. 통일해야 한다.>
제2단계 — 정경모
<왜 갈라졌는가? 제국주의와 냉전체제를 보아야 한다.>
제3단계 — 박한식
<이미 갈라져 서로 전혀 다른 체제가 되었는데, 상대의 존재방식 자체를 이해하지 않고 어떻게 평화를 만들 것인가?>
박한식의 사고에는 <통일 이전의 평화>가 훨씬 더 중요해집니다.
그가 남긴 평화관도 평화를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서로의 존엄과 차이를 인정하면서 관계를 만들어가는 적극적인 상태로 이해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는 오히려 더 현실적으로 느껴집니다.
12. 특히 지금 다시 읽으면 박한식이 흥미로운 이유
선우학원과 정경모 세대에게는
<통일은 결국 반드시 온다>
는 전제가 상당히 강합니다.
한국인은 하나의 민족이므로 분단은 비정상이고 언젠가는 극복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80년 가까이 지나면서 남북은 너무 다른 사회가 되었습니다.
박한식은 이 문제를 일찍부터 알아차린 편입니다.
그는
<차이를 없애야 통일할 수 있다>
가 아니라
<차이를 인정할 수 있어야 평화가 가능하다>
는 쪽으로 이동합니다.
그래서 세 사람 가운데 <통일보다는 평화공존을 먼저 생각하는 오늘날의 관점>에 가장 가까운 사람은 오히려 박한식입니다.
13. 세 사람을 세 개의 질문으로 압축한다면
저는 이렇게 정리하고 싶습니다.
<선우학원의 질문>
왜 우리 민족은 아직도 스스로 운명을 결정하지 못하는가?
<정경모의 질문>
누가, 어떤 역사적 구조가 우리 민족을 이렇게 갈라놓았는가?
<박한식의 질문>
서로 적이 되어버린 두 사회가 상대방을 이해하지 않고 어떻게 전쟁을 피할 수 있는가?
세 질문은 서로 경쟁관계가 아닙니다.
오히려 모두 필요합니다.
<자주 — 역사적 책임 — 상호이해>
세 가지를 합쳐야 합니다.
14. 제가 세 사람에게서 하나씩 취한다면
선우학원에게서는 <민족의 운명을 강대국에 맡겨서는 안 된다는 자주성>을,
정경모에게서는 <한국 현대사를 남북만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일본·중국·러시아가 얽힌 국제구조로 보는 역사감각>을,
박한식에게서는 <상대방의 행동을 비난하기 전에 그 행동을 만들어낸 세계관과 두려움을 이해하려는 태도>를 취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세 사람 모두에게 한 가지 질문을 추가해야 합니다.
<국가와 민족을 말하기 전에 그 안에서 살아가는 개인 한 사람의 자유와 존엄을 충분히 보았는가?>
이 질문을 넣으면 세 사람의 평화·통일론을 계승하면서도 그들의 북한 인식이 가진 비대칭성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퀘이커 평화주의>와 박한식을 연결해 보면 특히 재미있는 비교가 됩니다. 정경모와 선우학원은 <민족자주를 통해 평화로> 가는 경향이 강한 반면, 박한식은 상당히 <관계의 변화와 적대의 해소를 통해 평화로> 접근합니다. 후자는 퀘이커의 평화관과 만나는 부분이 꽤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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