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8-16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43 단발령

단발령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43회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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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아,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시간이 [음악] 돌아왔습니다.
지난 시간 그리고 그 전 시간에 우리가 무려 두 시간에 걸쳐서 어,
을미 [음악] 사변에 대해서 어, 살펴봤습니다. 어, 조선 역사의 가장
비극적인 [음악] 사건의 하나로 어, 우리가 알고 있고 한 그 을미 [음악] 사변의 객관적인 사실, 전개
과정을 우리가 한번 살펴봤고요. 오늘은 이제 결국은 그 을미 사변으로
인해서 극도의 자신의 [음악] 그 신변에 어 위협을 느낀 고종이 결국은
이제 러시아 공상안으로 어 피신을 가는 그 아관 파천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아관 파천에 대한 말씀을 드리기 전에 우선
그 중간에 그 유명한 단발령 사건이 일어납니다.이 이 단발령이
을미 사변과 함께 그게 합치면서 4대부두를 비롯한 전국적인 저항이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을미사변하고 단발량이 합쳐서 악관 파천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음악] 단발령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국인의 탄생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2차 갑보장이 어 7월 말에 이제 실패로 돌아갑니다. 결국은 어 박용효가 급진
개혁을 추진해 가는 과정에서 고정하고 민비하고의 거리가 멀어진 거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적극적으로 밀고 있었던 일본 특히 인호의 가오루
공사마저도 어 박영하고 등을지게 되면서 결국은 박영가 어 민비 시
음모에까지 연루가 됐고 그래서 결국은 어 고종이 파면을 시킵니다. 그래서
붙잡혔으면 그때 처형을 당했을에 충분한 그런 사안이었는데 간신히
박영어가 다시 일본 공상원으로 도망을 쳐서 결국 이제 1번으로 다시 망명의
길을 떠납니다. 그 후임으로 그 후임으로 어 이번에는 3차 갑경이
시작이 되는데 그걸 맡 맡은 것이 김홍집입니다. 그러니까 김홍집은 어 1차 바보 개혁
때도 총리 대신을 맡았었고요. 그 내각을 맡았었고 물론 전체적인 거는
대원군 흥선 대원군이 조도를 했었지만 2차가 기역 때는 이제 실질적인
권력을 박영가 네무신으로서 잡고서 추진을 했었던 거고 그게 또 실패로
[음악] 돌아가니까 박영가 결국은 망명을 또 가니까 그 후임으로 이제
김홍집이 다시 총리 대신에 [음악] 임명이 되는게 8월 10일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때쯤 되면은 저지지 지난번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이노웨오루가 여러 가지로 개혁을 시도해 버는 과정에서 결론을 얻은게 뭐냐면 아
고정하고 민비하고 다시 잘 관계를 맺어서 결국은 고정을 통해서 [음악] 계약을 한 수밖에 없겠구나 하면서
사실은 이제 박영하고도 거리가 멀어지기 시작했던 거죠. 그런
상황에서 이제 김홍집이 총리 대신에 임명이 됐지만 이노우의 가우로의
지원을 받지 못합니다. 이노우의 가오로는 어디까지나 이제 고정을 통해서 민비를 통해서 개혁을 하려고
어 시도를 했었던 거고요. 그런 와중에 어쨌든 김홍집이 총리 대신이 된 다음부터는
개혁은 해야 되는데 국정을 어떻게 운영을 해야 되고 뭐를 개혁을
해야 되는지에 대한 어떠한 청사진 같은게 박영에 비해서 그런게 너무나
약했던 김홍줍은 사실 굉장히 지적이고 엉뚱한 어 분야에서만 소위 개혁을
추진을 합니다. 관려들의 부인들, 소실들을 뭐라고 호칭을 할 건지 뭐
이런 거를 정하고 [음악] 담배의 길을 줄이고 남자들의 윗돌이 소매 섭이를
어 나라에서 정해 주고 갓챙의 넓이를 줄이고 뭐 가마를 타야 되는데
가마꾼을 몇 명 이상씩 두면 안 된다. 이런 거를 이제 그 국가에서
규정을 합니다. 그러지 않아도 청일 전쟁이 시작된 1894년
7월 말부터 청일 전쟁과 동시에 갑장이 시작되면서 벌써 1년째 온갖
개혁일합시고 수많은 측령들이 내리고 이렇게 바꿔라 저렇게 바꿔라 하면서
교지들이 내리고 세상을 뒤집어 놓지만 사실은 되는 일은 별로 없었던 상황에서 혼란만 일으키고 있었던
상황에서 개혁에 대한 피로가 감히 극도에 달라기 시작을 합니다.
그러면서 백성들이 결국은이 개혁이라는 거 그 자체에 대해서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을 합니다. 김웅집이 총리 대신에
임명됐을 때에 같은 날 일본도
새 공사를 임명을 합니다. 미우라고는 을미 사변을 일으켰었기 때문에 결국은
소환이 그 책임을지고 소환이 돼 버리는 거고 사실 외교관으로서 전혀 적합치 않은 그런 사람이 와서 그런
큰 일을 저지르고 마니까 이번에는 일본에서 자기네 외교관 중에서 가장
믿을 수 있고 가장 똑똑하다고 가장 합리적이라고 어 여기고 있었던 어
고무라 주따로 새 공사로 임명을 합니다. 이때 이미 고물라주 따로는
여러 나라에서 서방 여러 나라에서 그 공사도 해보고 여러
책임을 맡아왔던 어 사람입니다. 여기서 잠깐 그 고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일본이 갖고 있었던 인적 자원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그거를 간음해 볼 수 있기 때문에 한번고이 고무라 주따로에
대해서 보다 자세히 말씀을 드리면요. 고무라는 1875년에
최초의 메이지 유신 정부 국비 유학생으로
미국에 보내서 미국의 하버드 대학을 [음악] 다닙니다. 그래서 하바드 대학에 누구랑 같이 다니냐면 간네꼬
겐따로라고 기억나신 몰라도 1871년 이와꼬라사절
거기에 17살짜리 청년으로서 미국에 가서 고학을 미국서 하면서 결국은
최초로 하바드 대학교에 입학되는 가네 겐따로가 있습니다. 그때 이제이
고물아줬다라고 가네 겐따로가 하바대학교에서 같은 기숙사 [음악] 방 룸메이트가 돼서 지났다고 합니다.
그 당시 일본의 유학생들이 어느 정도의 그 미국의 그 선진 사회에
적극적으로 어 끼어들고 거기서 배웠고 하는 거를 알 수 있는 [음악] 하나의 재밌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뭐였냐면 바로 그이 사람들이 고무라가 거기서 유학을 하고
있을 때 알렉산더 그램 벨이 전화 발명을 한 그 벨입니다. 그 벨이
전화 실험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고무라조 따로가 학생일 때 같은 그
이자와라는 같은 또 다른 일본 유학생하고 알렉산더 그램 [음악] 베레 집을
방문을 해서 거기서 실험 중인 전하기에서
그걸 통해서 두 사람이 일본말로 양쪽 그 수화기를 들고서 양쪽 끝에 서서
통화를 해 봅니다. 알렉산더 그램벨 본인이 그렇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영어가 아닌 다른 나라 말로 최초의 전화 통화가 일어난 것이 [음악]
바로 1번 말이었었다. 그리고 그때 그 주인공이 이꼬무라 줬다니다.
저는요 간했고 켄따로도 그렇고이 사람도 그렇고 또 야마가 딸이 또 뭐
이런 사람들이 독일에 가서 어 그 보불 전쟁을 다 보고 그걸 배워오고
이런 거를 보면은 그 인적 자원을 기르기 위해서 얼마나 나라가 많은 투자를 했었고 그리고 이런 투자를
해야 된다라는 그 해안을 갖고 정말로 용이 주도하게 곳곳에 젊은 사람들을
심어 놓고 그 사람들로 하여 여금 최첨단 문명 사회를 배우도록
지식을 배우도록 해서 요소 요소에 사용하는 것은 정말로 놀라운 놀라운
현상입니다. 그래서 바로 그런 그 외교 쪽에서는 대표적인 인물이라
주었다로인데이 사람을 완전히 지금 무너지기 시작한 조선 정책을
어떻게서든지 좀 붙잡아 보라고 그래서 고무라 주 따로를 급파를 합니다.
나중에 고무라는 주미대사 주미영사 주영사 그리고 외무 대신도 두 차례에
걸쳐서 여기 말하는 그런 인물입니다.이 이 고무라가
부임을 하자마자 여러 가지 정보가 이제 들어오죠. 그래서 정보가 들어온 것 중에 가장 중요했던게 뭐냐면
이범진이 또 9테탈를 획을 하고 있다라는 얘기
얘기가 들어옵니다. 이범진이 누구냐면은 어 대표적인 친러파로 고정
옆에서 고정 보고 계속해서 러시아 편을 들려고 하는 어 그 그런
사람이었고 형조 판서를 지냈고 [음악] 판의금 부사를 지낸 이경하
그 유명한 이경하의 서자였습니다. [음악] 이범진이 1873년에
생원시 합격을 하고 그리고 어 79년에 1879년에 식년 문과의
병과에 급제합니다. 그래서 사실 고정하고 민비의 총회를 어 받으면서
그 법부 대신 서리에까지도 오르고 그럽니다. 그 이범지는 어떻게서든지 지금 일본의
영향하에서 개혁을 한다고 하는이 김홍집 내각을 무너뜨려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범진이 쿠테타를 기획을 해서 김몽집과 김홍집
내각을 제거하려고 합니다. 그 쿠테타 계획이 정보통을 통해서 이제 고무라한테
전달이 된 거죠.이 이범진은 친러파였기 때문에 을미 사변이
일어나자마자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을 해 있었던 사람입니다.이 사람이 지금
고무라 주다라고 오니까 쿠테타를 이제 계획을 하고 있었던 거죠. 이범진의
계획은 뭐냐면 200명의 군사하고 40명의 검객을 동원해서 궁을 급습을
해 가지고 김홍집하고 김몽집 내각의 대신들을 모두 죽이고
새 내각을 세우는 것. 이게 어 그 계획입니다. 그래서이 계획을 고무라가
먼저 듣고 그것을 김몽집 총리 대신한테 알려 줍니다. 그랬더니 김몽집이 빨리 일본군이
군거를 좀 지켜주고 이범진과 그 음모를 하는 사람들을 잡아들여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부무라는 여기서 자기가 또 섣불리
일본군을 움직여서 어떻게 하면은 특히 다른 열강들의 반응이 두려워서
그렇지 않겠습니까? 지금 을미사변까지 일켜 놓은 상황에서 또 일본 군대가
뭐 군궐에 들어가서 왕과 내각을 지킨다. 이런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도저히 당시 여론상 분위기상 안
된다 싶어서 당장 김홍집이 부탁은 하지만
거절을 하고 그 대신 어떻합니까? 이범진을 불러갖고 경고를 합니다. 하지 마라.
자중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범진는 듣지 않습니다. 그리고 11월 28일
날 새벽에 경복궁을 어 그 공격을 합니다. 춘문을
통해서 공격을 합니다. 그런데 군궐 수비대에서 의해서 저지당하고
그 일당들은 다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합니다. 이범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했다가 아예 인천으로 재물포로 빠져나가서 상하에
가서 피신을 해 버립니다. 이처럼 왜이 말씀을 자세히 드리냐면요.
조선의 정정은 이로 말할 수 없이 불안했습니다.
일본이 와서 그렇게 개혁을 했는데 실패했고 1차 가보 개혁 실패해서
대원군이 물러나고 2차 갑보을 또 했는데 또 박영효도 또 일본하고조차도
마찰를 일으켜서 또 실패해서 일본으로 망명을 가고 간신히 김홍집을 통해서 3차 뭐를 해 보렸는데 내용 없는
개혁을 하고 있는데다가 같은 조선 사람들끼리 다른 이범진 친파에선 이거
이어선 안 된다 해 갖고는 아예 쿠테타를 또 일으키고 그거를 를 일본이 발각을 해 갖고 그걸 알려서
김홍주파트 알렸다가 그리고 또 말리는데도 말을 안 듣고 또 일을 이렇게 정말로 멋잡을 수 없는 몰락의
길로 혼돈의 길로 어 조선 또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정정 불안 가운데서도 사실 실제로
김몽집 내각을 무너뜨리고 갑보장 자체를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게 하는 결정적인 사건은
단발령이었습니다. 은대 기억을 하겠다는데 있어서 복식
특히 조선 사대부들이 가장 애지 중지하고 자기의 신분과 자기의
정체성의 핵심으로 따지고 생각했던 그 상투를 자르라고 하는 그 단발령을
내리는데 그 단발령이야말로 갑혁이라는 갑경이라는 근대식 개혁을
완전히 망쳐 버리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게 됩니다. 어 김몽집이 11월
10일 날 총리 대신에 임명이 돼서 3차 소위 3차 개혁을 시작을 했는데 12월
30일 날 그러니까 자기가 총리 대신 임명된지 아 한 한한 날 반만에 드디어
단발령을 내립니다. 그래서 단발령 내리는 내용이 이렇게 나옵니다. 짐이
머리를 깎아 신하 백성들에게 우선하니 너희들 대중은 짐의 뜻을 잘 새겨
만국과 대등하게서는 대업을 이륙하라. 그러면서 이렇게 짧게 고종의 그
측량을 발표를 하고 그다음에 공고문을 6일준이 6일준 내무대신 서리인
6일준 그러니깐 박용효가 막고 있었던 내무 대신을 물려받은게 이제 서리로
물려받은게 6일준입니다. 그 6일준이 다음과 같은 공고문을 함께 발표를
합니다. 최근의 단발령은 건강과 업무 처리에 유리하다고 판단되며 우리
대군주 폐학께서는 [음악] 행정 개편과 국력 확장의 두 가지 관점에서 그의 신하들의 건위를 받아들여
우리에게 본보기를 보이셨다. 대조손국의 모든 신민들은 폐하의
의도를 경건하게 따라야 한다. 그리고 신민은 복장을 다음과 같이 해야
한다. 1. 국상 중에는 이전과 같이 흰색의 모자와 옷을 입어야 한다.
2.만은 [음악] 쓰지 않는다. 3. 외국 복장의 채용에는 반대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이제 고종이 왜 단발령을 내렸는지 그 뜻을 설명을 하고
백성들한테 따를 것을 또 6일준이 [음악] 종영을 합니다. 오늘 음력
11월 15일은 국광 폐하의 포고문에서 자비롭게 강조하신 말씀은
머리카락을 깎은 짐은 짐의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였다. 그대들 [음악] 백성은 짐의 결정을 인정하겠는가?
그리고 지구상의 다른 나라들과 동동한 국가를 건설하는 위대한 [음악] 사업을 성취하는데 기여워할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은 변역의 시대에 우리가 선원의 정신을 겸손히 정독하였을 때
우리 대조손국 [음악] 백성들 중에서 감사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으며 그들의 최선을 다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음악] 열과성을 다해서 구광폐하의 변역
의지에 순종해야 한다. 무슨 말씀입니까? 3차 가보 개혁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은 감마를 몇 사람이 져야 되는 거고 어 소매
길이는 어떻게 되고 이런 거를 하는데 거기에 그 맥락 속에서 지금 국가를
다른 나라들과 같은 반열에 올 올려야 된다라는 얘기를 하면서 지금 하는
얘기가 또 머리를 어떻게 해야 된다라는 단발령을 내리는 겁니다.
지금 개혁이 할 것이 너무 많고 어 그동안에 해 왔던 개혁이 다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글쎄요. 김홍집 내각이
결국은 이런 정책을 들고 나올 수밖에 없었는가? 그 그 정치적 그 선택이
저는 참 어처니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1896년 1월 10일에
11일에 고종이 아예 장문의 단발령을 외해야 된다는 장문의 교지를 또
내립니다. 지미 조상들의 위협을 받들고 만국이 교통하는 시운을 당하여 천시를
상고하고 인사를 살펴보건데 500년마다 반드시 크게 변쳐하니
너희 백성들은 나의 계교를 들으라. 전장 법도는 천자로부터 나오는 법이다. 아, 짐이 등극한지 33년에
세계가 맹약을 다지는 판국을 맞아 정치를 경장하는 길을 가지 않을 수 없다. 이에 정삭을 고치고 연호를
정했으며 복색을 바꾸고 반발을 하니 너희 백성들은 내가 새것을 좋아한다고
말하지 말라. 넓은 소매와 큰 관은 유래한 [음악] 습관이며 상투를 틀고 망건을 쓰는
것도 일시의 편의로 처음 시행할 때에는 역시 신규였다. 하지만 세인의
취향과 숭상함에 따라 국가의 풍속 제도를 이룬 것이니 일하기에 불편하며
양생에 불리한 것은 고사하고 대와 기차가 왕내하는 오늘에 와서는 쇠곡하여 홀로 지내든 구습을
고수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짐도 선왕의 시제를 변경하기를 어찌 좋아하겠는가만은 [음악]
백성들이 부유하지 못하고 군사가 강하지 않으면 선왕들의 종묘 사직을
지키기 어렵다. 옛 제도의 얽매여 종묘 사직의 위태로움을 돌보지 않는 것은 때에 맞게 좋지 않은 도리가
아니니 어찌 그렇게 할 [음악] 수 있겠는가? 너희 백성들은 또 혹시 선황의 시제를
고치지 않고도 종묘 사직을 지킬 방도가 반드시 있다고 하겠지만 이것은
한 구석의 좁은 소견으로서 천하 대세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지
이번에 정을 고치고 연호를 세운 것은 500년마다 크게 변하는 시운에
대응하여 [음악] 지미 국가를 중흥하는 큰 위협의 터전을 마련하는 것이며 복색을 바꾸고
머리를 깎는 것은 국인의 이목을 일신시켜 옛것을 버리고 짐에 유신하는
정치에 복종시키려는 것이니 이것은 짐이 [음악] 전장 법도로서 시왕의
제도를 세우는 것이다. 짐이 머리를 이미 깎았으니 짐의
신민인 너희 백성들도 어찌 받들어 시행하지 않겠는가? 나라는 임금의 명령을 듣고 [음악]
가정은 가장의 명령을 들으니 너희들 백성들은 충성을 다하고 분발하여 짐의
뜻을 잘 새겨서 서로 알리고 서로 권하여 너희들의 머리카락과 구습을
한꺼번에 끊으며 모든 일에서 오직 실질만을 추구하여 짐에 부국 강병하는
사업을 도울 것이다. 나의 어린 자식들인 너희 백성들이요.
저는 지금이 긴 측령을 고종의 측령을 읽어 드린 이유가 저는 이거 읽으면서
참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어 거기서 보면 부국강병, 경장
그리고 구습을 탑하고 새로운 것을 해야 된다라는 그런 내용은 이제 분명히 어 이것을 밀어붙이고 있었던
어 김홍집 그리고 특히 이런 사람들의 말과 언어와 용어가 이제 반영이 된
것이겠죠. 개화파들에. 그런데 과연 지금이 상황에서이
중차차차대한시기 그것도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 그러니까 어 청일 전쟁을 일으켜서
청나라를 상대로 간신히 전쟁 승리했지만 요동반도를 되돌려 주면서 일본의 세력이 약화가 되고 그리고
대혼란이 일어나고 있었고 을미 사변이 일어나서 국모가 시해되는 상황에서
내각은 바뀌고 그동안의 개혁들은 지지부진해 갖고 백성들은 점점 점점
분노하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 개혁의 이름으로 경장의 이름으로 부국강병의
이름으로 꼭 단발령을 내려 내려야 됐었는가?
참 그 당시 조선의 지도자들의 정치적인 판단력, 세상을 보는 눈
그죠? 정세를 파악하는 능력에 저는 아이 역시이
역시 국가 지도자들의 역량이 얼마나
수준이 낮았는가 그냥 한 번에 보여 주는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뭐 고종이나 이런 사람들이 뭐 민시 척이
그런 판단력이 없었다라는 거는 뭐 누차 우리가 확인했던 바이고 그런데
사실은 소위 온건 개화파라는 기몽집이나 그렇죠. 그리고 옆에서
보좌하고 있던 6일 같은 사람들의 개화파들의 그 판단력조차도 저는 어
이거를 보면은 과연이 사람들이 세상을 읽을 줄 알았는가? 정세를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이었었는가? 그래서 기본적으로
나라를 제대로 이끌어 갈 수 있는 인적 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었구나 하는 거를 저는이 측량을 읽으면서 절감을 했습니다.
고종이 이렇게까지 친영을 내리니까 이제는 그 단발령을 강제로 집행하기
시작을 합니다. 그래서 어 도송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도송
앞에서 다 병사들이 문직기들이 지키고 있다가 들어오는 사람마다 잡아 가지고
단발을 안 한 사람은 그 자리에서 상투를 자르고 단발을 시켜 버리는 이런 일들이 벌어집니다.
여러분 그 톰 크루즈가 만든 그 라스트 사무라이라는 영화에서도 그
영화의 배경이 되는 어 세인 전쟁 사스마 사무라이 반란의 배경의 가장
직접적인 것 중에 하나가 뭐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특히 영화에서 아주
그 중점적으로 다루는 그 사무라이 반란의 원인이 뭐였었냐면
단발령이었습니다. 그래서 거기서도 그 주인공 일본 사무라이 주인공의 아들이
어느 도송에 들어가면서 거기서 이제 그대식 복장을 한 그대 군인들한테 잡혀서 치욕적으로 구력적으로이
상투를 자르게 되는 그런 장면 어 그런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 일이
조선에서 벌어지기 시작한 겁니다. 일본에서는 1860년대에 벌어졌던 일이 지금
1890년대 30년 후에 조선에서 이제 벌어지기 시작하랍니다. 당시 상황을 바로 이때 조선에 와서 사이
훑어보고 그리고 곧바로 책을 쓰는게 이자벨 벨라드 비숍 여사죠. 조선과
그 이웃들이란 책을 그 유명한 책을 써서 저도 여러 번 여기저기서 인용을
했었지만이 [음악] 장면도이 여사가 목격을 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얘기를 [음악] 합니다. 커다란 가위들의 딸깍깎거리는 소리가 사대문 앞에서 군궐에서 공관들에서
들려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는 단발 안 한 사람들, 상토 아직도 틀고 있는 사람들 붙잡아서 강제로 상투를
잘라 버리는 그 가위 소리가 가위질라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도속
내에서 다 들렸었다라는 얘기를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백성들은
강력하게 정하기 시작을 합니다. 예시민은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나라는 상투를 둘러싼 복잡한 문제와 고통과 어려움으로 온통 들끄럽고
관려들까지도 자르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죽느냐 사느냐 햄렛의 그 그 유명한 어 대사를
이용을 해서 비숍 여사가 자르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진짜 조선
사람들이 실존적인 선택이 기로했었다라는 것을 어 표현을 해 줍니다.
그럼 조선 사람들이 왜 이렇게 거부했는가? 여사 본인은 이렇게 분석을 합니다.
그것이 일반인들 사이에 존경받지 못하는 머리를 짧게 깎은 신부
수도사의 복식이었기 때문이었다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서양
사람들 서양 오랑캐들이나 단발을 하고 있는데 지금 그 오랑캐들하고 똑같이
우리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근데 서양 수도사나 뭐 외국 사람들
서양 사람들 문제가 아니죠. 더 심했던 건 뭡니까? 그 당시 조선
백성들이 대부분이 이게 다 일본이 시키는 거다. 그죠? 사실 뭐 가보
경장 자체가 일본이 시작한 거니까. 그러니까 사실은 실제로 김웅집 내각은
일본이 직접적으로 간여도 하지 않는데도이 모든 개혁 일본이 하는
수작이다. 그래서 이거는 일본식 관습에 맞추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조선의 소중화이 문명인들로 하여금 서양오랑 그리고
특히 일본 외놈들의 관습을 따르게끔 지금 하려는 지시다.
이렇게 해석들을 했다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분노가 폭발합니다. 실제로 이때부터
조선에 와서 장사를 하고 투자를 하고 하던 그 많은 일본 상인들이 내륙으로
들어간이 숫자가 급감을 하기 시작을 하고 일본인에 대한 야만적인 [음악]
행동이 공공연이 일어났고 때때로 사진까지 일어났다라고 비험 여사가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그 김준근의 풍속화 단발하는 장면 이런
것들이 이제 그 그 당시 상황을 묘사를 하고 있는데요.
이때에 이제 일본 [음악] 사람들이 특히 화를 당하면서 어 개성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은 다 한양하고
인천으로 소개를 시켜 버리고 군산 목포에 있는 그 일본인들도 다 철수를
시킵니다. 평양이 있는 일본 상인들은 일본 정부가 철수를 하라 그런는데도
아 우리가 철수하면은 청인들이 우리가 어렵게 만들어는 상권을 갖다가 뺏을 거니까 못 가겠다
그런는데도 결국은 일본 정부가 무조건 철소해야 된다. 그러면서 일본
상인들이고 거주민들은 무조건 한양하고 인천으로 모이게끔
그러니까 반일 감정이 폭발을 해 나오기 시작을 합니다. 급기한
천국적으로 상투 폭동이 일어납니다. 그러면서
한양에 올라왔다가 도문을 지내려다가 아니면 한양 도송 시내를 활보하다가
잡혀서 상투를 잘린 사람들은 아예 고향에 다시 가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이런 기록들이 있습니다. 사업 관계로 한양에 올라왔다가 머리를 깎인 지방민,
상인, 기독교 전도사 등등의 사람들은 감히 그들의 목숨을 걸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리고 만일에 관리가 단발을 정부에서
단발 하라 그랬으니까 관리들 당발을 하죠. 단발을 한 관리가 자기의 임지인 지방의 어느 임지에 도착을
하면은 거기에 성란 주민들이 나와서
규탄을 하고 쫓아버립니다.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한 지방에서는
세려 임명된 단발을 한 관리가 한양으로부터 도착했을 때 그는 최악의
상황을 준비한 거대한 군중들을 만났다. 백성들은 지금까지 정상적인 조선인에 의해서만 다스림을 받았으며
양머리 관리의 다스림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소리소리 질렀다.이 관리는
현명하게도 즉시 수도로 되돌아왔다. 그러니까는
이제는 정부의 말을 전혀 [음악] 듣지 않습니다. 한양에서 80km
떨어진 춘천에서는 수령이 법령을 집행하려 하였을 때 주민들이 무리지어
일어나 수령을 죽이고 그가 내린 모든 법령을 폐기했다. 그리고 마을과 지역
주변의 모든 재산을 장악했다. 이런 기록도 있습니다. 심지어는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어떤 아버지는 [음악] 그의 두 아들이 측령에 복종하여 머리를 깎은
그 비탄과 치욕을 못 이겨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상투가 떨어졌을 때
사회의 [음악] 졸립 기반이 위협받았던 것이다. 미션 여사가 또 써놨던 겁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에
조선 사람들한테이 상투가 얼마나 중요했고이 단발령이라는 것이 얼마나 거센 저항에 붙으셨다는 것을 단으로
보여주고 있는 장면들입니다. 그러자
대표적인 보수파, 4대당 춘중의정 척사파 즉 전통적인 4대부의 어 김병
상소를 올립니다. 저는이 상소도 우리가 꼭 한번 읽어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당시에 사대부들이
어떻게 생각을 했었던 거고 그리고 특히 4대부들이 어떤 역사적인 맥락을
속에서이 일을 생각을 하고 있었고 갑경장을 하려는 세력들과 당시에
아직도 줄이라고 하는 할 수 있는이 4대 당의 세계관의 그 간극이 얼마나
컸었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시면서이 글을 같이 읽으셨음을 합니다.
신은 방금 사임을 청하는 장소를 올리고 윤호한다는 비이 내리기를 애하게 기다리고 있는 중에 삼가
듣건데 일전에 반발에 대한 조치 내려졌다니 이것이 무슨 일입니까?
신도 물론 폐하가 즐겨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그렇다면
누가 위력에 의지해서 [음악] 이권으로 권한 것입니까? 요즘 변고가
많아 헤아릴 수 없는데 또 오늘 이런 해계한 조치가 있으리라고는 짐작도 못
하였습니다. 신득건데 춘추의 뜻을 중국에 적용하면 중국 것으로 되고
오랑케에 적용하면 오랑케 것으로 되므로 비록 오랑캐라고 하더라도
중국의 예법을 시행하면 찬양하여 내세우고 비록 중국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오랑캐의 법을 쓰면 내리깎까 배척합니다.대 대체로 성인들은 중국과
오람의 구분을 이와 같이 엄격하고도 단호하게 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기자가 동쪽으로 와서 백성들에게 여덟 가지 조항을 가르친 때로부터 문물
제도가 차년이 크게 갖춰져서 소중화라고 불렸습니다. 우리 왕조에
이르러서는 훌륭한 임금들이 서로 [음악] 이어 거듭내어서 오늘과 같은 경사회까지 이르렀으니 어떻게 이전에
훌륭한 조상들의 아름다운 규범과 선대 임금들이 남긴 제도를 버리고 그만이
지경에 이르게 하겠습니까? 이것을 어떻게 참을 수 있겠습니까? 설사 응당 시행해야 할 법이 있다고
하더라도 예사로운 변경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면 응당 조종에 있는 신하들에게 널리 물어서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명령을 급작쓸 내려 사람들이 감히 그 속마음을 헤아릴 수 없게
하니 이것이 또 어찌 된 일입니까? 신체와 털과 피부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으로서 감히 손상시킬 수 없다는 것은 바로 공자의 말입니다. 만대를
두고 내려오는 공자의 말도 믿을 것이 된단 말입니까? 대체로 만물의 뜻을
개발하여 세상 일을 성취한 것고 오제보다 나은 것이 없으며 백성들을
교화시켜 좋은 풍속을 잃은 것이고 사망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우리
열성들이 서로 전해오는 신법을 조술하면서 지키고 놓치지 않은 데에서
다시 다른 무엇을 구한다고 오랑케의 법을 선대 임금들의 가르침 위에다 더
놓겠습니까? 장차 이런 몰골로 종묘에 들어가 신하와 백성들을 대하겠습니까?
신은 지극히 원통하고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신은 지금 병들고 혼미하여 죽을 날이
멀지 않았지만 어리석은 생각이 북받쳐 어리석음을 무릎 쓰고 우로러 말씀드립니다. 삼가 바라는데 폐하는
분연히 조심하고 가다듬어 무망한 거조를 가지고 그대로 영원히 변치
않을 법으로 만들지 말며 종묘 사직의 중함을 생각하여 해와 달리 바뀌듯이
특별히 마음을 전환하셔 이미 내린 명을 도로 취소하소서. 이것은 비단
우리나라의 다행일뿐만 아니라 또한 이웃 나라의 수치를 면하는 것인만큼 신은 비록 죽는 날이라도 오히려 살아
있는 때와 같이 땅에 엎드려 손을 모아 비일 뿐입니다.
이렇게 가장
어떻게 보면 전통 중에서도 제도도 아니고 어떠한 국가의 큰기로
움직인 것도 아니지만 조선 문명의 조선 4대부 문명의 핵심인 상투를
건드리는 것이 결국은 모든 개혁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는 그런 계기가 됩니다. 그러면서
민비 시핵 을미사변 소식과 단발령이 합쳐지면서
이제 걷잡을 수 없는 저항이 일어납니다. 사실 동학난만 하더라도
삼남지방, 전라남도, 뭐 충청남도, 황해도, 경상남도 등 사실 폭창지대에서 일어났었습니다.
그런데 단발령으로 촉발된 상투폭동은요. [음악]
강원도, 충청북도, 경상북도를 포괄한 훨씬 넓은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납니다. 저항 세력은 모든 지역의 선비 4대부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민비 시혜뿐만 아니라 [음악] 상투를
자르라는 단발령은 자기들이 주인인 전통 체제에 대한
침탈의 가장 적나라한 상징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단발령에 반대하는 그 전국적인 폭동 시위가 얼마나 대단했었는지는
당시 조선 주제 외교관들의 기록에도 남아 있습니다. 영국 영사 힐리에
어이 사람이 1889년에서 1896년까지 무려 7년 동안 어
영국 영사를 어 여김을 했습니다. 조주 조조선 영국 영사죠. 근데
그때에이 사람이 뭐라고 그때 보고서에 써 있냐면은
일본군하고 경찰이 주둔하고 있는 수도 한양은 일단 안전하겠지만 다른
지역에는 전혀 안전하지 않다. 그리고 만일 일본군이 철수하면은 한양도 전혀
[음악] 안전을 보장할 방법이 없다. 그러면서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왜 그러냐면 [음악] 조선 군대는 전혀 믿을 수 없다. 조선 군대는 웃음거리에 불과하다. 그니까 is
little more than a farce. F스라는게 진짜 코메디 코메디 같다라는 거죠. 그니까
조선군이라는 거는 있으나 많는 존재기 때문에 일본군하고 일본 경찰이 빠져
버리면은 모든 치한은 장담할 방법이 없다. [음악] 그러니까 여러분 지금 이런
상황이 뭡니까? 고종도 똑같이 느끼고 있는 겁니다. 어쨌든
고종의 입장에서는 자기의 내각 그죠. 총리 [음악] 김홍집이 총리 대신인
거기서 자기의 이름으로 측령을 내렸는데 단발을 하라는 측령을
내렸는데 거기에 대해서 전국적으로 을미 의병 을미 사변 때문에 일어난
의병은 [음악] 어떻게 보면 자기 편이죠. 자기의 왕비가 그렇게
처참하게 시된 거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 거 있으니까. 그런데 단발령은 이건 또 다른 얘기거든요.
단발령은 사실은 나도 잘랐다. 머리를 깎았다 그러면서 다 하라고 했었던
건데 지금 거기에 대한 폭동이 걷을 수 없이 오히려 을미
사변에 대한 폭동보다도 훨씬 더 광범위하게 특히
늘 자기 편이라고 생각했었던 4대부들이
사대부들조차도 조조차도 들고 일어나는 걸 보고 내가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은 은 어떤 강력한 군대를 갖고 있는 외세
밖에 없다. 내 군대도 나를 못 지켜주고 여태까지 일본을 믿었는데 일본도 믿을 바가 전혀 못 되고 왜
을미 사변을 이렇게 어으니까 그러니까는 내가 어디로 도망가야 되느냐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가야 가는 수밖에 없다라고 하는 그 판단이 그래서
일어나는 겁니다. 감정
급격하게 퍼집니다. 을미사변과 아까 말씀드린 대로 반발령조차도 1번이
시키는 것이다. 조선 사람들을 조선의 양반들을 일본의 오랑캐 같이 만들려는
그런 지시다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사변과 단발령이 반일 감정으로
합쳐지면서 감정이 폭발을 해냅니다. 1895년 12월에서 1896년 1월
사이에 조선을 시찰하러 러시아의 참모 알프탄 중령이라는 사람입니다.이
알프탄 중명은 중령은 나중에 자세히 말씀드릴 기회가 있겠지만은 고종이
민영환을 러시아의 니콜라의 대관식대 특사로 보내서 러시아의 군대를 파견을
해 달라. 나를 러시아 군이 와서 나 내 공성을 지켜 지켜 달라. 그리고
와서 조선에 나한테 돈을 빌려 달라. 뭐 이제 이런 부탁을 하는 거죠.
그것 때문에 러시아 정부에서 야, 조선 상황이 어떤지 좀 가서 보라. 그러면서이
알프단 중령이라는 사람을 보내는 겁니다. 그래서이 알프단 중령이어와 가지고 어 그 와서는 쭉
계속해서 러시아의 입장에서 조선의 상황을 [음악] 정탐을 하면서 다니면서 그때 이런 얘기를 써
놓습니다.이 이 나라 어느 구속에 가더라도 일본에 대한심을 표하면서
자신들의 나라가 불행에 빠진 것은 모두 일본 때문이라며이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에 대한 광적인 증심으로
불타오르지 않은 것이 없다 고를 합니다. 그니까 얼마나
반일 감정이 극도에 달했는지 그리고 임진회란의 경험이 있고 했기 때문에
굉장히 쉽게 조장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때에도 단발령은
일본의 짓이라 하면서 반일 감정이 폭발합니다. 1896년인 2월에는
폭도들이 전보 전선을 모두 끊어 버리고 한양은 따라서 바깥 세계로부터
완전히 고입이 되고 조선 정부는 아예 폭동을 진압할 생각을 하지도 못하게
됩니다. 이렇게 극도의 치한 위협까지
가중이 되면서 고종은 자기의 위험으로 자기의 권위로
왕실을 지키고 왕을 지키고 나라를 지키고 할 생각을 하지 않고 여기서 어디로 가야 되는가 내가 어디로
피신해야 되는가에 골모를 하게 되고 이때는
사실 어떻게 보면 당연하죠. 삼국 간섭을 통해서 그 막강한 일본으로 하여금 요동반도도 다시 토해내게 하는
그 러시아 러시아밖에 없겠구나 싶어서 러시아의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그야말로 도망쳐 들어가는 악관 파천을 단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국광이 한 나라의 국광이 한 나라의 국가 원수가 자기의 신변 위협 때문에
자신의 군의 자기의 신변을 의탁하지 못하고 자신이
다스리는 백성들이 폭동을 일으킨 것을 진압할 방법이었고
거기에 위협을 받아서 그래서 자기 나라에 주제하고 있는
다른 나라의 의 공사관에 숨어 들어가는 일은요. 그거는
참 복이 드은 일입니다. [목을 가다듬음] 정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악관파, 악관 파천 하면서 굉장히 잘 알려진 우리한테
익숙한 사건이었고 그렇지만 사실 그 내용을 들여다 보면요.
있을 수가 없는 일이죠. 물론 을미 사변도 있을 수가 없는
일이죠. 한 나라의 국모가 그 나라의 왕비가
왕이 보는 앞에서 타국 낭인들에 의해서
사례를 당한 일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얼마나 나라가 못 났었고
얼마나 나라가 자위 능력이 없었으면은 이런 일을 당합니까?
그런데 거기에 덧붙여서 그거를 목격했던 왕은 자기의 신변
위협을 느껴서 또 다른 있을 수 없는 일을 하는게 그게 뭐냐면 남의 나라
공사관으로 숨어 들어가서 다른 나라 군인들 보고
다른 나라 외교관들 보고 나를 지켜 달라. 나를 누구로부터 지킵니까?
내 백성들로부터. 내가 다스린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이
정치적인 혼란으로부터 자기가 집 시행하고자 했던 정책
때문에 약이 된 백성들의 폭동이 무서워서 나를 지켜 달라고 외국
공사관의 자신을 의탁하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 벌어집니다. 고종의 입장에서는 이렇습니다.
자기 나라의 개혁을 못하고 자기의 [음악] 군대와 자기의
자신의 경찰과 자신의 대신들과 자신의 백성들을 믿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게 비극이죠. 그게 조선의 비극이고 그게 고종의 비극입니다.
자신이 통할 수 있고 자신을 믿고 따르는 그런 군대도 없고
경찰도 없고 관려도 없고 백성도 없는 그런 왕이 돼 버린 겁니다. 그런
왕은 그다음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실제로 고종했듯이
어떤 나라가 어떤 외세가 그럼 나를 지켜줄 것인가? 찾아다닙니다.
동학난이 일어나니까 청나라를 불러드리고 그렇죠. 그리고는 청일
전쟁이 일어나고 그 일본에 또 의탁을 해 봤다가 결국은 그것도 안 되니까
러시아를 선택을 하고 아예 자기 나라와 백성과
[음악] 관료와 군대와 경찰을 다 버리고 남의 나라에 공사관에 들어가서
러시아의 군과 러시아 공사관의 호위병들이죠.
그리고 재물포에 정박해 있는 러시아의 전함 그리고 거기 있는 병사들한테
의존해서 자기 신분을 유지하고 자기의 권력을 유지해 가는
그러한 구력적이고 너무나도 초라한 모습을 고중이 보여줍니다. 그게 악관
파천입니다. 사실 조선은 이때에
명실상부 사실을 망한 거죠. 다른 나라의 공사관님은요.
다른 나라의 영토입니다. 국제법상으로 다른 나라의 영토입니다.
선조가 임진회란 때 의주까지 한양을 버리고 의주까지 가서 의주에서
감독강을 건너서 아예 중국으로 갈까 말까 할 때 그때에 결국은 신하들이
말려서 이것까지 건너가시면 정말 큰 일 난다 해 갖고 말려서 안 건너가지 않습니까? 그래도 지금 여기는 어떻게
된 겁니까? 아예 남의 나라 영토로 들어가 버립니다.
그리고 그 남의 나라 영토에 들어가서 1년 동안 나오질 않습니다.
딴 나라에 보호를 받으면서 국광이
저는 이런 맥락 속에서 우리가 을미사변을 이해를 하고 단발령을
이해를 하고 악관 파천을 이해를 해야 되는 겁니다. 이게 독립적인 사건들이
아닙니다. 이것이 당시의 조선의 상황을 당시 조선을 통치하는 사람들의
수준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고 그런 맥락에서 종합적으로이 사건들을 보면서
그 시대의 조선을 통치한 사람들의 선택 판단을 우리가 지금 역사적으로
평가를 해야 된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오늘은 어 진짜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조선의 모습을 또 한번 살펴봤습니다. 특히 단발령이라는 것이
그 당시 상황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거였고 왜 그렇게 극심한 저항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4대부들까지도 도저히 못 참겠다고 들고 일어나서 전국적인 폭동으로 확산이 되면서 악관
파천로 이어지는지 살펴봤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아관 파천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어나는지 어떤 과정들을 거쳐서 어떤 선택들을 거쳐서 그 악관
파천이라는 사실 있을 수가 없는 그러한 치욕적인 사건이 또 일어나게
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통해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한국인의
탄생. 오늘 이만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니다.
단발령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43회
법률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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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929 views  Dec 24, 2025
본 강연은 함재봉의 『한국 사람 만들기 IV: 친일개화파 2』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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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한국 사람은 무엇일까?"
그 질문을 시작으로 오랜 시간 '한국 사람'에 대해 연구해 온 『한국 사람 만들기』의 저자 함재봉 한국학술연구원장!

법률방송에서 함재봉 원장과 함께 역사적 사건과 인물 등을 통한 한국 사람의 정체성을 알아봅니다.

이번 시간에는 을미사변 이후 또 한 번 조선을 격랑 속으로 밀어 넣은 사건 단발령을 살펴보겠습니다. 미우라 고로의 만행 때문에 일본에 대한 반일 감정이 커지던 상황에서 김홍집 내각에서는 개혁 정책 중 하나로 단발령을 무리하게 추진하면서 사대부들까지 들고 일어나 전국적인 폭동이 벌어집니다. 이는 단순히 단발령에 대한 반감이 아닌 일본과 개혁 정책에 대한 불만이 터진 사건이었는데요. 이 사건이 조선 사회에서 어떤 의미였고, 우리 근대사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되는지 짚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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