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호에 대한 논문이 있기에 읽어 봤다. (무려 <한국민족운동사연구>라는 학술지에 실렸다)
이하는 논문을 통해 알게 된 안상호의 생애.
“일본인 의사의 추천으로 일본에서 의술을 배워 일본병원에서 치료하고 가르치다 그를 신뢰한 의친왕의 종용으로 귀국했으나, 왕실에 속하는 게 싫어 종로에서 개업해 서민치료도 하고 봉사도 했던 왕실촉탁의. ”
우선 그렇게 정리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지금 논란은, 그저 한사람의 우수한 의사로서 자기 일에 최선을 다했던 사람에게,
자신을 의사로 만든 일본, 혹은 사회와 얼마나 거리를 둘 수 있었는지를 묻는 논란이 되어야 한다.
쉬운 규탄이 아닌 어려운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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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은 역참(관아에서 물건을 운반하고 심부름 맡아 하는 사람)출신.
아버지를 4살때 여의고 어머니 삯바느질로 키워짐.
형제 8명 모두 죽었고 10살때 엄마도 사망.
친척집에 얹혀 산 고아였고, 사촌은 공부하는데 자기는 하인으로 부려지는 상황을 타개하고자 상경.
10월에도 여름옷밖에 없어 떨어야 했던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자수성가한 이다. (당시 의사계에 곰보 많았다며 그 중 한사람으로 거론되었는데, 그건 제 때 예방주사를 맞을 수 없었다는 얘기. )
갑오경장때 영재교육기관으로 설립된 관립일어학교 1회 졸업생. 교관이 되었으나 부모형제 죽음에 영향을 받아 의사지망. 당시 서울에 와 있던 일본인의사의 추천서를 받아 일본으로 유학.
사환으로 일하면서 점심을 고구마로 때우고 의사공부. 2,3등 성적을 유지했고 어려운 환경에도 우수한 성적을 낸 결과로 졸업생 대표로 답사 낭독.
졸업후에도 병원에 남아 수련했고 가르치기도 했다. 도끼로 목을 다친 사람이나 총탄으로 쓰러진 환자를 살린 일로 일본신문에도 남.
1903년에 일본 내무성 의사검정 시험에 합격. 성공적인 유학생 케이스로 당시 일본 거주 조선인들 신문도 “의료계의 태두”“학생계의 모범”이라 칭송.
조선인이 자혜병원 의사가 된 것은 ”우리나라의 영광”이라며 미주신문도 칭찬.
의친왕 신뢰를 얻어 그의 종용으로 귀국할 때 유학생 신문에 그의 활약에 감사하는 기사도 났다. 그러니까 조선인의 긍지를 드높인 이였다.
그러나 궁중의로 속박당하는 걸 싫어해 개업하고 주1회만 왕실 진료를 보는 걸로 약속, 왕실 촉탁의로 머물렀다.
개원때는 일본인 장모가 시골 집과 땅 팔아서 건물 사줌. 환자가 많아서 길거리까지 줄을 섰다고.
1909년 콜레라가 만연 했을 때 의료 봉사활동도 주도적으로 행했다.
일본인 의사들의 이익단체 계림의학회에 대항해 김익남 등과 함께 최초의 한국인 의사 단체 ‘의사연구회’를 결성했고, 1915년에는 한성의사회를 조직해 회장을 역임.
왕실을 비롯, 사회 각계층 인사부터 서민까지가 그의 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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