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 - 김기협의 역사 에세이
김기협 (지은이)돌베개2010-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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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밖에서 본 한국사>, <뉴라이트 비판>을 통해 우리 사회의 국수주의적 역사관을 비판했던 역사학자 김기협의 역사 에세이.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에서는 경술국치 100년을 맞아 '망국'(亡國)이라는 화두로 조선의 실패를 유교 정치의 좌절과 동아시아 문명 전환의 관점에서 짚어냈다.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망국의 귀결보다는 그에 이르는 과정이다. 저자는 그동안 우리 사회가 조선이 무너지는 과정 자체를 복기하는 데는 소홀했다고 주장한다.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것은 당연히 비난받을 일이지만, 강제병합이라는 결과만으로 조선 망국의 모든 책임을 일제에 지우는 것은 조선 망국의 의미를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볼 기회를 빼앗고 있다는 지적이다.
저자가 보기에 조선이 망국에 이르는 과정은 17세기부터 이어진 유교 정치의 쇠락과 지배층의 권력 사유화, 그리고 서세동점이라는 문명사적 전환이라는 배경이 맞물려 있었고, 1910년 강제병합은 그 귀결이었다. 결국 일제의 조선 망국 책임론은 식민 지배의 피해자인 우리 민족 구성원들에게 분노를 쏟아낼 출구는 만들어줄지언정, 스스로 망국에 대한 내부적 진단과 성찰을 방기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는 비판이다. 책은 17세기부터 1910년까지 총 3부에 걸쳐 조선의 쇠퇴와 망국 과정을 살핀다.
목차
머리말_ 망국의 의미
프롤로그 _ 서세동점(西勢東漸)의 풍경
1부 조선은 어떻게 시들어갔는가(17~18세기)
1. 조선과 중국의 관계 (1)_ 천하 체제 속의 전통 질서
2. 조선과 중국의 관계 (2) _ 껍데기만 남은 조공 관계
3. 사림(士林)의 권위와 사림의 권력
4. 실용주의의 보루, 대동법
5. 신권과 왕권의 힘겨루기, 예송논쟁
6. 정조의 어찰 정치
7. 정조의 권도(權道) 정치
8. 실학의 좌절
2부 조선은 어떻게 쓰러져갔는가(19세기)
1. 조선 망국의 두 단계
2. 실종된 왕권
3. 대원군도 못 벗어난 세도 정치의 틀
4. 동도서기론의 한계
5. 『매천야록』의 고종 시대
6. 망국의 마지막 고비, 임오군란
7. 친일의 두 자세, 김홍집과 박영효
8. 세도 정치의 종점, 을미사변
9. 왕 노릇을 거부한 고종
3부 조선은 어떻게 사라져갔는가(대한제국기)
1. 외세 줄서기의 천태만상
2. 중국과 일본의 엇갈린 행로
3. 조선의 마지막 지킴이, 의병
4. 고종만을 위한 나라, 대한제국
5. 고종의 마지막 짝사랑, 러시아
6. 러일전쟁을 향한 길
7. 오적의 죄인가, 고종의 죄인가?
8. 죽음의 품격
에필로그_ 근대화의 길
맺음말_ 한국은 아직도 식민지 사회다
접기
책속에서
이 답답한 상황이 우리가
근대적 가치관에 묶여 있기 때문은 아닐까?
전통의가치를 외면한 채
뿌리 없는 근대적 가치만을 쳐다보고 있는 한
서로 상치되는 근대적 제 가치의 갈등을
뛰어넘는 길이 구조적으로 막혀 있는 것이 아닐까?
일본을 모델로 한 경제 발전과
미국을 모델로 한 정치 발전에 한계를 느낀다면
이제 ‘우리 길을 찾아 나서야 하는 것 아닌가? 접기
당파에서 찍어내는 ‘사문난적‘의 낙인은
임금의 형벌 못지않은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고,
당파의 추대는 임금의 지우에 버금가는
명예와 신분 보장을 가져왔다.
당쟁 완화를 제창하려면
자기 당파에서사문난적으로 몰릴
위험을 무릅써야 했고, 현실 정책에
힘을 쏟으려면당파에 대한 충성심을 확인받기가 어려웠다. 접기
P. 66 깃털 하나를 들지 못하는 것은 힘을 쓰지 않음이요,
장작더미를 보지 못함은 밝음을 쓰지 않음이요.
백성이 보살펴지지 못함은 은혜를 쓰지 않음이니,
임금이 임금 노릇 못하는 것은 하지 못함이 아니라
하지 않음이니라
(一之不擧 爲不用力焉 輿薪之不見 爲不用明焉
百姓之不見保 爲不用恩焉
故 王之不王 不爲也非不能也). 접기
P. 129 이런 변화의 과정을 역사로서 되돌아볼 때도
자기 사회의 고유한조건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는 것은
역사적 주체성을 버리는 길이다.
현재의 상황에서 부각된 요소만을 과거에서 찾는다면
그것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대화‘가 되지 못한다.
‘현재와 현재 사이의 대화‘일 뿐이다.
현재에 매몰되어 과거를 보지 못하는 자는
미래 또한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접기
P. 219 그런데 문제는 모델의 올바른 선택만으로
행복한 결과가 보장되지 않는
상황이었다는 데 있다.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조선의 중앙집권 체제가 일본보다
더 큰 관성을 가지고 급진 노선의 실행에
제약을 주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일본과 달리
조선에게는 강한침략 의욕을 가진
외세가 작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일본 자신이었다 접기
의병의 역사적 의미가 경시되는 것은
결과만 쳐다보는 우리 사회의
천박한 풍조 때문이다.
망국을 막지 못했으니
‘실패‘ 한 행위로 보는 것이다.
예법을 너무 중시해서
전투력을 떨어뜨렸다는 비판도 마찬가지다.
의병은 다른 무엇인가를
지키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의병 현상 자체가
전통의 발현으로서
지킴 받을 대상이었다.
여러 계층이 의병 운동에
힘을 모았지만, 사대부의 나라를
지키려는 사대부의 노력이
의병의 뼈대였다.
예법이 전투력보다 중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접기
일본은 식민지가 된 조선이 쉽게
독립하지 못하도록 지배를 펼쳤고,
조선의 전통을 말살하는 것이 그 요체였다.
조선의 재물을 빼앗아가는 것보다
조선인들을 식민지인의 의식구조에 빠뜨리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었다. - little-dream
한국인들, 특히 엘리트 계층
한국인들의 도덕성 수준이 20세기에
들어와 형편없이 떨어진 것은
국가가 망하고 이민족의 악질적 지배를
받은 때문이었다. 그런데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밑바닥에서 헤매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지금 우리는 엽기적 수준으로
부도덕한 정치,경제 시스템에 빠져있다.
앞장서서 문제를 드러내고 있는
몇몇사람만 처리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무능한 진보보다 부패한 보수가 낫다˝,
˝도덕성이야 어쨌든
경제를 살릴 능력만 있으면 된다˝
는 국민의 사고방식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접기
일본의 야욕이 패전으로 좌절되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한국이 독립할 수있는 것이 아니었다.
식민지인의 의식구조를 벗어나야
독립국이 되고 건강한 사회를 이룰 수 있다.
한국은 아직도 식민지 사회다.
정해진 식민 지배자가 없는데도
미국이든 국제 거대자본이든
상전을 모시고 싶어 하는 식민지 사회다. 접기
이 답답한 상황이
우리가 근대적 가치관에
묶여 있기 때문은 아닐까?
전통의가치를 외면한 채
뿌리 없는 근대적 가치만을 쳐다보고 있는 한
서로 상는 근대적 제 가치의 갈등을 뛰어넘는 길이
구조적으로 막혀 있는 것이 아닐까?
일본을 모델로 한 경제 발전과
미국을 모델로 한 정치 발전에
한계를 느낀다면 이제
‘우리 길을 찾아 나서야 하는 것 아닌가?‘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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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 중앙일보(조인스닷컴) 2010년 8월 28일자
저자 및 역자소개
김기협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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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사학자. 경북대에서 석사논문으로 중국 고대 천문학을, 연세대에서 박사논문으로 마테오 리치의 적응주의를 다룬 후 동아시아 문명권 안팎의 교섭관계를 연구해왔다. 저서로 『밖에서 본 한국사』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 『아흔 개의 봄』 『해방일기』 『냉전 이후』 『오랑캐의 역사』 『뉴라이트 비판』 이 있다. 근년에는 중국과 동남아시아 사이의 관계에 집중하고 있다.
최근작 : <뉴라이트 비판>,<오랑캐의 역사>,<냉전 이후> … 총 47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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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퍼펙트패밀리 주식회사>,<동물의 향기, 인간의 풍경>,<웹툰이라는 전쟁터>등 총 614종
대표분야 : 역사 3위 (브랜드 지수 940,558점), 음악이야기 5위 (브랜드 지수 26,867점), 한국사회비평/칼럼 8위 (브랜드 지수 63,910점)
출판사 제공 책소개
강제병합 100주년,
망국(亡國)의 역사에 대한 복기와 성찰
저자는 이미 『밖에서 본 한국사』,『뉴라이트 비판』을 통해 우리 사회의 국수주의적 역사관을 비판했던 역사학자. 그가 이번에는 경술국치 100년을 맞아 ‘망국’(亡國)이라는 화두로 조선의 실패를 유교 정치의 좌절과 동아시아 문명 전환의 관점에서 짚어냈다.
이 책은 17세기부터 1910년까지 총 3부에 걸쳐 조선의 쇠퇴와 망국 과정을 살핀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조선의 망국 원인을 두고 신채호 같은 한말·일제 때의 많은 지식인들이 주장한 유교 망국론,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서양인들의 한국 발전의 비결로 꼽는 ‘유교 자본주의론’이 엎치락뒤치락했다. 망국의 원인을 내부에서 찾으려는 경향조차 우리 민족에 대한 자부심을 꺾으려는 식민사관으로 간주하여, 대한제국기와 고종을 과대평가하는 자위(自慰) 사관으로 흐르는 경향도 보였다. 이런 논란의 흐름 속에 아직도 조선의 망국에 대한 결론을 제대로 내리지 못하고 여전히 같은 수준에서 머물러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강제병합으로부터 한 세기, 해방으로부터 두 세대가 지난 지금 시점에 출간된 이 책은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민주화·경제성장의 성취를 통해 자부심을 갖게 된 우리 사회가, 이젠 과거 식민 지배의 트라우마를 걷어내고 100년 전 망국의 과정을 냉정하게 읽어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에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망국의 귀결보다는 그에 이르는 과정이다. 저자는 그동안 우리 사회가 일제에 의해 조선이 망한 결과에만 주목했지 무너지는 과정 자체를 복기하는 데는 소홀했다고 주장한다.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것은 당연히 비난받을 일이지만, 강제병합이라는 결과만으로 조선 망국의 모든 책임을 일제에 지우는 것은 조선 망국의 의미를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볼 기회를 빼앗고 있다는 지적이다.
저자가 보기에 조선이 망국에 이르는 과정은 17세기부터 이어진 유교 정치의 쇠락과 지배층의 권력 사유화, 그리고 서세동점이라는 문명사적 전환이라는 배경이 맞물려 있었고, 1910년 강제병합은 그 귀결이었다. 결국 일제의 조선 망국 책임론은 식민 지배의 피해자인 우리 민족 구성원들에게 분노를 쏟아낼 출구는 만들어줄지언정, 스스로 망국에 대한 내부적 진단과 성찰을 방기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는 비판이다.
유교 정치의 쇠퇴, 어떻게 조선의 망국을 불렀나?
권력 사유화는 곧 국가 위기의 지표
저자는 조선이 망국에 이르는 원인으로 유교 정치의 쇠퇴를 지목한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권력 사유화’가 있다.
조선 후기 유교 질서 퇴화의 가장 중요한 문제가 ‘권력 사유화’에 있었다고 나는 본다. 권력의 공공성은 사회 내의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지키기 위한 필수적 기반 요소다. 권력 사유화는 광해군 시대 이후 지속적으로 진행된 현상이었다. (……) 19세기의 조선은 권력의 공공성이 완전히 증발되어가는 상황을 보여주었다. - 48쪽
저자에 따르면 유교 정치에서 원칙적으로 지배층의 권력은 공공에 복무하도록 제한된다. 주어진 권한 이상으로 무리하게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동아시아의 ‘관료 봉건제’에서 구체화되는데, 무력·경제력 등에서 우월한 유력 계층이 관료층으로 편성되어 특권을 부여받는 대신에 왕권의 통제하에 놓이게 된다. 중간 권력의 경쟁과 발호를 억제하여 국가의 목적을 달성시키는 시스템인 것이다. 그러나 광해군 이후 인조반정, 붕당정치, 세도정치로 이어지는 왕권의 쇠퇴로 인해 이런 유교 정치의 틀은 작동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져버렸고, 철종을 왕으로 세운 것에서 보듯 19세기 세도정치하에서는 신하가 왕을 갈아치우는 단계에까지 이른 것이다.
이젠 왕 주변으로 친위 세력이 형성되면서 지배층의 권력은 공공성이 아닌, 자신의 사익을 목적으로 행사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정점을 보여준 것이 고종의 대한제국기이다.
대한제국 건립은 권력 사유화의 절정이었다. 의정부가 유명무실해지고 궁내부가 비대해진 것이 그 단적인 징표였다. 이런 권력 사유화는 유교 정치의 원리에 용납되지 않는 것인데, 오랜 세도정치를 통해 정치의 공공성이 약화된 끝에 (……) 유교적 질서가 말살된 상황을 보여준 것이다. - 212쪽
저자는 고종이 왕조 위기의 순간에도 수시로 의정부 관리들을 갈아치우며, 자신의 부와 권력 쌓기에만 몰두했다고 비판한다. 『매천야록』 곳곳에 진상품에 따라 신하를 평가하는 왕의 추태가 기록되어 있는데, 저자는 고종에게 망국의 책임을 돌리기는 힘들겠지만 조선의 ‘품위 없는 죽음’에는 분명한 책임이 있다고 강조한다. 이 같은 권력 사유화가 오늘날에도 되풀이되고 있는 현상은 조선의 망국에서 보듯, 곧 권력 집단의 위기의 지표로 읽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대원군의 쇄국 정책이 없었다면 과연 조선은 망하지 않았을까?
조선의 실패와 유교 정치의 종말은 별개
유교 국가는 대규모 보험 체계의 성격을 가진 조직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납입금이 많은 고객에게 더 큰 혜택을 제공하지만, 납입금이 거의 없는 고객에게도 최소한의 생존 조건을 보장해주는 보험 체계다. 오늘날의 정치론으로는 사회주의에 가까운 것이다. 부와 권력의 성장에 한계를 두고 생존 조건을 보장하는 체제이므로 부와 권력을 추구할 동기도 약하기 때문에 자원의 효율적 배분에 큰 장애를 일으키지 않는다. 농업 사회에 매우 적합한 체제로서 중국과 한국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105쪽
저자는 유럽 열강들이 동아시아로 밀고 들어오기 전까지 유교 정치는 동아시아 전통 질서의 원리로서 제 역할을 잘 해왔다고 주장한다. 특히 유력 계층의 권력을 견제하는 사회적 기능에 효과적이었는데, 건국 초기 조선 사회의 안정성도 이런 유교 정치에 바탕을 두었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만약 동아시아 국가들에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주어졌다면 유럽식 근대화 못지않은 나름의 독창적인 근대화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이런 측면에서 저자는 대원군의 쇄국 정책을 ‘유교 정치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읽어낸다. 대원군 입장에서는 당시 세도 정치로 망가진 조선의 유교 국가 체제를 복구하는 것이 유럽식 근대화를 받아들이는 것보다 훨씬 시급한 일로 판단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가 보기에 개항 이후 유럽식 근대화 도입만 빨랐어도 조선이 망하지 않았으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개항 무렵의 조선의 정치사회적 조건을 무시하는 논리라는 것이다. 쇄국이든 개국이든 조선의 망국은 “유교 국가 체제를 유지하지도 못하고 있던 세도 정치”에서 이미 조짐을 드러내고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저자의 이런 논리를 따라 가면 조선의 실패와 유교 정치의 실패를 함께 묶는 것은 큰 오해를 부를 수 있다. 조선의 실패로 유교 정치 체제가 사라졌을 뿐이지, 그 거꾸로는 아니었다.
고종은 계몽군주인가 암군인가?
“요즘 일각의 보수적인 사학자들이 고종을 ‘계몽군주’쯤으로 높여주고 (……) 예술인들이 명성황후를 뮤지컬의 주인공이자 민족 저항의 상징으로 만들고 있다. 하지만 당시 백성들에게 고종의 집권기는 분노와 절망의 시대였다.” - 박노자, 『나를 배반한 역사』 중에서
강제병합 100주년이 되는 올해 구한말 황실 인물들을 조명한 소설들이 나오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던 명성황후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와 드라마도 속속 만들어지고 있다. 특히 연초 ‘조선의 마지막 황녀’라는 부제를 달고 나온 한 소설은 베스트셀러가 됐고, 최근에는 고종의 리더십을 높게 재평가한 평전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대중문화 상품으로 만들어지고 소비되는 왕실의 모습이 정말 우리 역사 속 모습이었을까?
저자는 고종과 그 시대를 긍정적으로 재평가함으로써 대한제국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로 연결시키려는 이태진 교수식의 논리를 강하게 비판한다.
이태진은 『고종 시대의 재조명』(태학사 펴냄)에 실은 ‘고종 황제 암약설 비판’ 맺음말에 이렇게 썼다.
“한국사에서 고종 시대는 근대화가 시작되어야 하는 시점이었다. 따라서 이 시대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인식의 방향은 아주 달라질 수 있다. 이 시대의 군주정에서 근대화의 가능성이 있거나 진행되었으면 일본의 36년간의 한국 지배는 그것을 꺾은 불법 강점이 되고, 그 반대라면 일본의 한국 통치는 한국을 위한 것이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된다. 고종 암군설-암약설 등은 바로 후자의 논리를 세우기 위해 침략주의자들이 고의적으로 세운 것으로 확인되었다.”
참 답답한 이야기다. “침략주의자들이 고의적으로 세운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장담하는데, 황현이 침략주의자들 말에 따라서 『매천야록』을 썼단 말인가? (……) 고종이 암군이라는 이야기는 일본 침략을 지지하려는 목적 없이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는 것이었다. (……) 나는 고종이 보기 드문 암군이었다고 믿지만, 그렇다 해서 일본 침략이 정당하다고 생각할 이유는 찾지 못하겠다. - 178쪽
또한 저자는 이태진 교수가 “고종의 평판을 보호하기 위해” 주한 미국공사 알렌이 고종을 평하는 1903년 일기의 한 대목까지 잘못 번역했다고 주장한다(179쪽).
저자는 이런 무리한 해석과 번역이 나온 이유를 고종 암약설을 반박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라고 본다. 한때 조선 지배계급의 부패와 무능을 망국의 원인으로 돌린 일제의 식민사관에 대한 반작용으로 고종 시대를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식민사관으로 오인 받지 않기 위해 조선 지배계급에 대한 비판을 자제하거나 그들을 미화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오히려 그런 자위 사관이야말로 그 시대를 바로 보지 못하게 하는 장애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조선의 종말은 피할 수 없었다?
그래도 품격 있게 망할 수는 있었다!
조선 왕조의 멸망 자체에 대해서는 일본에게 큰 죄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왕조가 왕조 노릇 제대로 못하면 망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조선 왕조는 일본의 도움 없이도 망할 길을 오랫동안 잘 찾아 왔다.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진짜 피해자는 왕조가 아니라 민족사회였다. 왕조가 왕조 노릇 못한 것은 이 피해를 막거나 줄여주지 못한 하나의 주변 조건일 뿐이었다. 대단히 큰 조건이기는 했지만 식민지화의 본질적 조건은 아니었다. - 180쪽
저자는 20세기 초 우리 민족의 식민지화는 어쩌면 막을 수 없는 흐름이었을 것이라고 진단한다. 대한제국기 고종이 비밀리에 자금을 모아 특사를 파견하고 조선의 중립국화를 위해 노력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저자가 보기에 조선이 독립국으로 남을 확률은 희박했다. 청일전쟁 이후 조선 영토에 필사적인 관심을 가진 나라는 일본 하나뿐이었다. 고종은 러시아에 구애의 손길을 뻗었지만, 러시아의 주된 관심은 중국이었고, 만주에 정신이 팔려 조선까지 봐줄 형편이 아니었다. 더구나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조선의 식민 지배는 일본에 형식적 절차만 남은 수준이었다. 저자가 보기에 우리나라의 숱한 이권을 유럽 열강에 넘기고 일본을 견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그 시대를 제대로 읽어낼 수 없었던 “고종만의 환상”이었다고 꼬집는다.
저자는 또한 고종 양위의 직접적 원인이 된 헤이그 밀사 사건에 대해서도, 고종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고종은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양위 압박에 몰리자 박영효를 궁내부대신에 임명한다. 박영효는 갑신정변의 주역이자 민비 암살 음모 혐의로 망명했다가 다시 고종 폐위 음모로 궐석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인물로, 고종과는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그러나 황제 자리가 위험해지자 고종은 일본에 연줄이 많은 박영효에 매달린 것이다. 저자는 이 같은 고종의 일련의 돌출 행동들이 한국을 ‘식민지화’ 하자는 일본 내 강경파에 힘을 실어준 계기가 됐다고 주장한다.
일본 내에는 그의 온건 노선을 비판하는 세력이 있었고, 고종은 그들에게 계속 이토 노선을 공격할 꼬투리를 만들어줬다. 이토도 물론 조선보다 일본의 국익을 생각하는 사람이었지만 (……) 할 수만 있다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기보다 보호국으로 관리하는 쪽을 그는 원했다. - 265쪽
저자의 이런 주장들이 물론 일본의 입장을 옹호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 또한 조선이 망국에 이르는 과정에서 일본이 저지른 일련의 사건을 누구보다 강하게 비판한다. 다만 저자의 관점에서 구한말 고종이 자리보존을 위해 했던 “술수와 책략”은 결코 조선의 멸망에 결코 이롭게 작용하지 못했음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죽음에도 숭고하고 비천한 품격의 차이가 있는 것처럼 한 국가의 멸망에서도 그 사회의 격조가 나타난다. (……) 조선 왕조 멸망의 책임을 고종 한 사람에게 물을 일은 아니지만, 왕조 멸망에 임해 민족사회를 비참한 상태에 몰아넣은 책임은 그가 회피할 수 없을 것이다. - 268쪽
한국은 여전히 식민지 사회인가?
기회주의자가 승리하고 지배층의 도덕성이 문제가 되지 않는 나라
왕조의 개폐는 이민족 지배 없이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100년 전에 우리 사회가 입은 피해의 본질은 전통의 단절에 있었고, 전통의 단절로 잃어버린 것이 도덕성이었다. 전통과 도덕성에 집착한 사람들을 대거 도태시키고 도덕성이 박약한 집단에게 사회의 주도권을 맡긴 것이 식민 통치의 가장 큰 죄악이었다. - 298쪽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 황제 순종이 양국의 조칙을 내림으로써 대한제국의 종결이 확정되었다. 일본은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넘겨받고, 우리 민족은 일본의 실질적인 식민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의 일이다.
저자는 조선의 식민 지배가 우리에게 안긴 가장 큰 해악이 바로 도덕성을 갖춘 인물보다 기회주의자가 승리하는 구조로 역사가 흘러왔다고 점에 있다고 주장한다. 17세기부터 이어온 권력 사유화는 조선의 가장 큰 병폐였지만, 결국 고종의 손으로 뽑힌 을사 7적은 조선을 판 대가로 일본 통치하에서 권력을 누렸다. 홀로 조약을 반대한 한규설은 쫓겨나고 한말 유생의 꿋꿋한 의를 보여준 최익현과 황현은 죽음을 택했다. 이후 역사는 지배자와 그들의 취향에 맞는 기회주의자들의 뜻에 따라 움직여왔다.
저자가 비록 유교 예찬론자는 아니지만 책 전체 서술에서 유교 정치를 강조한 것은, 현재 우리 사회의 도덕성 부재의 근원을 살피면 100년 전 조선 사회의 유교 전통의 단절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는 진단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 사회가 정상적인 도덕 수준의 틀을 갖추지 못하는 한 “한국은 아직도 식민지 사회”라는 저자의 일갈은 유효해 보인다.
한국인들, 특히 엘리트 계층 한국인들의 도덕성 수준이 20세기에 들어와 형편없이 떨어진 것은 국가가 망하고 이민족의 악질적 지배를 받은 때문이었다. 그런데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밑바닥에서 헤매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지금 우리는 엽기적 수준으로 부도덕한 정치-경제 시스템에 빠져 있다. 앞장서서 문제를 드러내고 있는 몇몇 사람만 처리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무능한 진보보다 부패한 보수가 낫다”, “도덕성이야 어쨌든 경제를 살릴 능력만 있으면 된다”는 국민의 사고방식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일본의 야욕은 조선 망국의 원인 중 일부일 뿐이다. 따라서 일본의 야욕이 패전으로 좌절되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한국이 독립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식민지인의 의식구조를 벗어나야 독립국이 되고 건강한 사회를 이룰 수 있다. -299쪽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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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한국은 식민지사회"라고 부르짖으며 ˝강간당해 태어난 아이˝인 ˝근대화˝, 고종, 엘리트에 대한 비판에 슬쩍 보수를 끼워넣어서 싸잡아 비난하는 얕은 재주
madwife 2012-09-11 공감 (2)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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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삽하다
청보리 2012-07-04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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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 패망과 식민지화에 따른 트라우마는 현재에도 치유 불가능이다.
MAKWANGSOO 2022-06-07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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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역사를 알수 있다. 보수적인 관점에서 본 역사도 역사인 것이다.
거북이 2014-10-09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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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권의쇠퇴와일본의근대발전을잘대비하여설명되었지만가끔씩글이어려운면도있네요
삼국지 2010-09-18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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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
오랜만에 재밌는 역사책을 읽었다. 전문 학술서라기 보다 표지에 써 있듯이 역사에세이다. 정연한 논리성과 근거를 갖춘 전공서라기보다 저자만의 판단과 비판에 입각한 책이다. 그리하여 다분히 주관적이기는 하지만 일견 일리가 있는 책이다. 책에 매달릴수만은 없는 상황이라 한 번에 다 읽어내진 못했지만 천천히 곱씹으며 읽은 탓에 다른 책보다 내게 남긴 것이 많다.
저자의 관점 중 내게 와닿는 것은 중화세계와 유럽의 전통 시대를 대해 바라보는 시각이다. 즉 근대 이전 시대는 중국 중심의 세계가 세계를 압도한 반면 산업혁명 이후는 유럽 문명이 압도했다는 주장이다. 그것은 양대륙의 사회 질서의 안정도와 전쟁 양상을 통해 알 수 있다. 유명한 선교사 마테오 리치 또한 그 사실을 입증해준다. 그렇다고 중국과 조선을 높이자는 것은 아니다. 그저 사실이 그랬다는 것일 뿐. 그렇다면 문제는 뭘까. 사회도 안정되고 질서도 잡혔던 조선을 어찌하여 망국의 대열에 끼게 된 것일까?
임진왜란 후 조선, 특히 인조반정 이후에는 왕권이 약화되고 신권이 강조된다. 아마 송시열 같은 이가 가장 대표적이 아닐까 싶다. 이는 왕권과 신권의 조화 혹은 상호 견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왕도정치의 붕괴로 이어진다. 숙종, 영조, 정조 년간에 어느 정도의 회복을 이루기는 했지만 세도정치 이후 조선의 정치는 완전히 파탄나게 된다. 이를 이어 흥선대원군 집권, 민씨정권의 등장, 고종의 무능 등으로 이어지면서 조선은 되돌릴 수 없는 망국의 길을 걷는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은 말했다. 조선은 일본이 식민지화 하지 않더라고 다른 어떤 나라에게 식민지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여기에 저자는 그것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조선은 일본을 제외한 그 어떤 나라도 거들떠 보지 않고 있었다고. 외교적 정치적 경제적 이득이 없는 조선에 목메는 나라는 없었고 또한 이런 조선을 힘들여 경영할 나라도 없었다. 반면 일본은 대륙 진출의 교두보이자 제국주의로 가는 첫걸음으로써 식민지가 필요했고 여기에 가장 가까이 있는 조선의 식민지화는 절대적이었다. 저자의 주장에 심히 공감하는 바다.
한편 조선 후기의 세도정치기에 엘리트들의 도덕성도 거덜난다. 사회의 엘리트들은 어느 사회에서건 높은 도덕성을 갖추고 있기 마련이다. 그들은 정보력, 경제력, 권력 등을 갖춘 이들로 사회가 안정되어야 자신들의 이득이 많이 생긴다. 그렇기에 엘리트들은 자신에게 높은 도덕성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는 사회 전반으로 이어지며 사회의 안정을 꾀한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가 조선 후기에 깨지고 일제 침략기에는 친일파 등 도덕성이 없는 인물들이 출세하면서 사회 전반적으로 도덕성의 결여가 일상화된다. 대신 돈으로 상징되는 물질 최우선시 하는 사람들이 반도덕을 등에 업고 권력층에 나서게 된다. 이런 분위기는 해방 이후에도 이어서 오늘날에 이른다. 그것은 또한 대한항공의 조씨 일가를 비롯핫 이땅의 재벌들을 보면 쉬 알수 있다. 물론 고위공직자들도 빠질 수 없겠다. 그들에게 지난 날의 갑질이나 부도덕은 그리 부끄럽지가 않다. 왜냐면 도덕적 기준이 그들에게는 중요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그런 이들을 내세운 최고위층도 그런 점에 대해서는 관용적이니까. 부끄러운 세태로다.
과거를 통해 현재를 읽는다. 역사는 그래서 중요하다. 간만에 재미난 역사책을 읽었다. 모두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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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ulp 2018-04-18 공감(2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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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고종
뭔가 다른 시각을 기대했는데 전체적인 느낌은 반론의 여지가 많았다는 것.
고종에 대한 통렬한 비판은 나도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바이고 이태진 교수의 주장, 고종은 군주로써 최선을 다했지만 모든 것은 일제의 잘못이다는 관점은 나 역시 매우 비판적이다.
KBS 역사 프로그램에서 이태진 교수의 입장에서 고종을 매우 긍정적으로 해석했던데 그 때도 굉장한 반발심을 느꼈고 책을 읽으면서 역시 고종은 망국이라는 이 엄청난 사건 앞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명백한 책임을 져야 할 최고 지도자임을 확인했다.
<궁궐의 눈물, 백년의 침묵> 이라는 책을 보면 고종이 대한제국을 수립한 후 황제국에 적당한 격식을 차린다는 이유로 엄청난 국고를 쏟아 부은 내용이 나온다.
지금은 대한제국의 건원칭제를 대단히 자주적인 사건으로 언급하지만, (마치 조선도 황제국이었다, 이런 식으로) 10여 년 안에 결국은 식민지가 되고 말아야 했던 현실에서 황제가 된다는 것이 재정파탄 이상의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정말 회의적이다.
더군다나 대한제국은 황제의 전제권을 강조한 매우 반동적인 체제였다.
개혁파와 시대의 흐름이 원했던 입헌군주제를 고종은 굉장히 싫어했고 자신의 권력을 뺏어가는 것에 대해 매우 민감했다.
독립협회와 틀어진 것도 이런 시각차 때문이었다.
저자는 고종이 권력의 사유화에 몰두했다고 통렬하게 비판하는데 그간 고종이 보여준 일련의 행태들로 미루어 봤을 때 이 비판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한다.
기존의 유교적 군주의 왕권강화와는 전혀 다른 1인 절대 권력을 지향했기 때문에 말년에 남은 사람은 정상적인 국가 체제에서는 절대 관료가 될 수 없는 일종의 친위부대만 남았다는 것이다.
고종이라는 전근대적 인물에게만 이런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일견 불공평해 보이기도 하지만, 시대적 흐름에서 벗어난 인물이었음은 분명하다.
영조나 정조나 왕권강화 하던 시절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왕 노릇을 한 것이 고종의 불행이라고 할까?
고종 독살설에 대해서는 특별한 언급이 없어 저자의 시각이 어떤지 궁금하다.
소현세자나 효명세자에 대해서는 명백한 독살설이라고 단정짓던데 그렇다면 과연 독살이라는 의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왕이 누가 있겠는가?
소현세자의 경우 문제가 되는 것은 청에서 돌아온 후 급사한 것이 아니라 그 후에 보여준 아버지 인조의 태도가 아닐까 싶다.
<인조 대왕과 친인척> 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새롭게 발견한 것이 바로 당시 정치 상황이었는데, 뜻밖에도 소현세자의 장인인 강석기는 반청파였고 봉림대군의 장인 장유는 비교적 청에 호의적이었다고 한다.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김자점의 입장에서는 반청파인 강석기 쪽 보다는 봉림대군이 더 편했을 것이다.
효종은 즉위한 후 김자점 일파를 축출했지만, 소현세자의 급사 이후 왜 원손이 아닌 봉림대군이 세자로 책봉되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친청파인 김자점의 영향력에 대해서도 분명히 언급해야 할 것이다.
효명세자의 독살설은 이 책에서 처음 접한 거라 더 어리둥절 하다.
스물 한 살에 갑자기 죽은 게 문제가 된다면 열 아홉에 즉위하자마자 사망한 예종은 어떻고, 정조와 경종은 또 어떤가?
재위 1년을 못 채우고 죽은 인종은 정말 계모가 준 떡 먹고 급사한 것은 아니고?
이덕일씨의 관점을 싫어하는 이유는 이런 저런 가설과 추측이 지나쳐 자의적인 역사 해석을 하기 때문이다.
이 독살설이야 말로 정말 경계해야 할 문제 같다.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평가는 뜻밖이었다.
안중근 열사가 저격한 조선 침탈의 일등공신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의외로 조선의 식민지화 대신 그 보다 약한 단계인 보호국 정도를 원한 온건파였다고 한다.
이 점은 좀 더 논의가 필요할 것 같은데 다른 책에서 읽기를, 안중근이 저격할 때만 해도 이미 정계에서 은퇴한 상태라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했다.
<현대 일본을 찾아서> 라는 미국인의 저서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정치 행로에 대해 읽긴 했으나 일본 정치사의 관점에서 서술한 책이라 조선 문제에 대한 특별한 언급은 없었던 것 같다.
과연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에 대해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좀 더 알아봐야겠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을미사변을, 일본의 강경파가 저지른 실수라고 생각한다.
고종과 러시아의 결탁을 끊고 왕을 공포에 몰아 넣기 위한 지나친 제스쳐 때문에 오히려 반일 감정이 확대되고 아관파천과 대한제국이라는 반동적인 결과가 나타났다고 했는데 을미사변에 대한 새로운 해석 같아 신선했다.
저자는 자꾸 왕조 국가에서 명이나 청에 대한 사대 관계가 현재 대한민국의 미국 종속보다 훨씬 약하다고 주장하는데 전근대적 국가의 책봉 문제와 현대 국가의 미군 주둔이 어떻게 같은 관점에서 평가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역사는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하지만, 이런 과도한 비유는 정말 신중하고 자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맥락이 다른데 같은 선상에서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한 가지 저자의 관점에서 동의했던 것은, 명이 조선을 구원하기 위해 출병한 것이 단순히 자국 보호라는 순망치한의 논리보다는 기존의 사대 관계에 입각해 조선을 보호하려는 전통적 의리 문제도 매우 중요했다는 점이다.
보통 한국 학자들의 임진왜란 관련 책을 읽어 보면 명의 출병을 순전히 자신들의 이익 때문이라고 일관하고 실제로 조선에 엄청난 피해를 줬다는 점만 강조하는데 지나치게 한쪽 면만 본다고 생각한다.
왜 명이 멸망한 이후에도 조선에서 숭명반청 의식이 강했는지는 충분히 생각해 볼 문제다.
단지 선비들이 주자학에 빠져 명분만 외치는 바보들이어서가 아닐 것이다.
저자는 실학이 근대 지향적이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반드시 모든 근대화가 서구식이어야 하냐고 반문한다.
실학의 한계를 지적하는 말에는 동의하지만, 근대화가 결국은 산업화를 동반한 서구식 모델을 받아 들이는 것이라는 점에는 다른 해석의 여지가 없지 않을까?
세계화란 결국 서구식 모델의 수용이 아닌가.
현실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서구식 산업화가 아닌 어떤 대안이 가능할까?
산업화가 아니라면 궁극적인 사회 변화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왕조 타도와 민주주의, 인권 사상, 개인주의 이런 일련의 모든 사성적 변화가 주류가 되는 것도 산업화를 통해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되고 개인의 권리 의식이 높아졌기 때문이 아닌가.
식민지라는 불행한 경험을 통해 근대화를 이룩해야 했던 아시아나 아프리카 등 모든 제국주의 피해국에서는 이 문제가 언제나 논란의 여지가 있겠으나 옳고 그름을 떠나 산업화를 배제한다면 궁극적인 근대화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자꾸 주장하는 서구식이 아닌 다른 형태의 근대화는 어쩐지 공허하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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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10-09-20 공감(8)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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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의 현재적 의미를 되짚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조선 왕조는 500년이란 시간을 뒤로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됨으로써 역사에서 사라진다. 하나의 왕조가 500년간 지속된 사례가 희귀하 듯, 우리 역사에서 이민족의 식민지가 된 것 또한 처음이었다. 1259년 고려가 몽골족에게 또 1637년 조선이 만주족에게 항복한 것은 말 그대로 `항복'에 그쳤다. 이민족의 간섭과 인명,경제적인 피해를 입은 것은 사실이지만, 20세기 초 대한제국의 망국처럼 국가와 국민이 해체되고 이민족에게 편입되는 수순을 밟은 것은 한민족의 사상 처음이다.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나라가 망한 사건은 지금의 관점에서 여전히 두가지 시사점을 준다. 일단, 망국이란 사건과 지금 시대가 근접해 있다는 것이다. 망국은 물리적으로 불과 100년 전 일이다. 두번째, 일본 식민지배 트라우마가 아직 치유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한반도 분단과 전쟁, 그 이후 정세들이 조선의 멸망과 긴밀히 연결 돼 있다. 매주 수요일이면 일본 대사관앞에선 위안부 할머니들의 반일 집회가 천회를 넘겨 계속 되고 있다. 망국은 전쟁과 분단, 남북대립과 국론분열을 불러왔다. 여전히 망국의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조선의 망국은 한 왕조의 멸망이 아니라, 국민과 민족 정체성의 해체였다. 대체, 조선은 왜, 어떻게, 일본에게 잡아먹힐 수 있었을까? 역사를 공부하며 한번쯤 드는 의문이다. 기본적 역사교육을 받은 사람들조차도 그런 질문에 막연한 답을 하게 된다. 망국의 의미를 깊이 파헤치기보다는 피상적인 공부에 만족했다. 역사학자 김기협은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에서 일단 19세기 조선과 일본, 세계의 정세를 풀어놓고 조선 왕조 500년의 역사를 되짚는다. 시야를 몇 가지 사건에 두지 않고 망국의 근원적 원인을 탐색한다.
서양문명은 19세기 중반을 넘어 동아시아 지역으로 밀고 들어온다. 이것을 서세동점(西勢東漸) 현상이라 한다. 동아시아를 지배하고 있던 중국은 아편전쟁(1840)과 중영전쟁(1856)을 거치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일본도 1854년 미국에 의해 강제로 개항을 하지만 그들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국가로 뻗어나갈 체제를 정비한다. 메이지 유신에서 일본은 무사정권인 막부를 해체하고 왕정복고를 이룬다. 경제적으론 자본주의를 정치적으로 천황제를 기반으로 한 입헌정치를 시작했고, 사회 전 분야에 대한 근대화에 성공한다. 더불어 강력한 군사력을 키워 일본은 왕조시대에 머물러 있던 중국과 조선을 선점하기 위해, 서양세력과 일대 기득권 싸움에 뛰어들 수 있었다.
"19세기 후반에 일본을 경유해 한국을 덮친 서양 근대문명은 막강한 힘을 가진 것이었다. 한국보다 힘과 덩치가 훨씬 큰 중국조차 그 위세 앞에서 1840년경부터는 자세가 흔들리고 1860년경부터는 휩쓸려 들어가고 있었다. 게다가 그 위세는 시간이 지날수록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었다. 조선이 아무리 굳건한 체제를 지키고 있었더라도 정체성의 큰 훼손과 그에 따른 변화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120쪽, 김기협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
조선왕조의 종말은 그러면 19세기 말 세계적 열강들과 탐욕스런 일본의 제국주의 노선이 불러온 불가피한 재물이었을까? 힘있는 나라가 힘없는 나라를 선점해서 이권을 차지하는 양육강식의 세계가 제국주의였다. 제국주의는 힘있는 국가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게 도덕적으로 꺼리낌 없던 시대다. 그러면 근대화에 뒤진 조선이 일본에 먹힌 것은 자연스럽지 않은가? 하지만, 여기엔 다른 문제가 있다. 망국의 원인을 전적으로 외부적 요인에 두는게 맞느냐 하는 점이다. 19세기 조선은 통치이념인 유교질서가 피폐해진 시기다. 당시 조선은 군군신신(君君臣臣)의 나라가 아니었다. 즉 임금은 임금으로서의 도리를 다하고, 신하는 신하로서의 도리를 다한다는 유교통치 질서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던 게다.
저자 김기협은 피치못할 외부적 요인보다는 망국의 내부적 요인에 집중한다. 우리가 감기에 걸리는 것은 바이러스나 추위 때문이다. 하지만, 몸 상태가 양호하다면 쉽게 바이러스나 추위로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한말 조선이 일본에게 먹히고 만 것은 일본이 강했다기 보다는 이미 나라의 기운이 망국의 조건을 다 갖추고 있었다 하는게 옳다. 세도정치로 권력은 사유화되고 권력의 공공성이 증발되고 말았다. 19세기 말 조선은 내부의 민란조차 스스로 진압할 수 없을 정도였다. 조선은 어느 시점부터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걸까? 저자는 17세기의 명분없는 광해군 축출(1623년)를 그 시발점으로 본다.
저자는 유교국가의 작동 원리인 왕권이 중간 권력의 지나친 경쟁과 발호를 억제해서 국가의 목적을 달성하게 되는데, 17세기 조선에서는 이 메카니즘이 작동하지 않았다고 분석한다. 당쟁이 정책 결정보다 정권 쟁탈에 치우쳐 정치의 안정성이 무너지고 정통론이 정치 담론을 지배하게 되면서 변화에 대한 적응력이 줄어든 것이다. 약화된 왕을 명분없이 축출한 사건은 결국 이후 상황 변화에 유교 국가로서 대응할 자세를 잃어버리고, 군군신신의 정신또한 조선 정치에서 사라진 계기가 되었다.
"신하가 임금을 고르는 것은 임금과 신하 모두 자기 노릇을 못하는 극단적 상황이다. 충간(忠奸)의 기준이 확고할 수 없는, "성공하면 공신, 실패하면 역적"이 되는 상황이다. 왕도가 사라진 상황이며, 유교 국가의 기본 원리가 무너진 상황이다." 93쪽, 김기협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
조선의 마지막 왕 고종은 1907년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하지만, 저자는 고종의 무능함을 비판하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세도정치로 허수아비 왕이되고, 민비와 대원군 사이에서 갈팡질팡했고 상납의 정도에 따라 신하의 충성심을 치하했던 그는 정치적 판단력이 없었다. 을사조약 체결 당시 의정부 8대신 중 확고한 반대자는 참정대신 한규설 하나뿐이었다. 저자에 따르면 을사5적 뿐만 아니라 나머지 대신들도 친일에 있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국가와 민족을 아낄 줄 모르고 제 이익만 생각하는 사람들을 의정부에 모아놓은 것은 누구였나? '
조선 왕조는 결국 말기에 이르러 `전통과 도덕성에 집착한 사람들을 대거 도태시키고 도덕성이 박약한 집단에게 사회적 주도권을 맡긴 것'이 신민통치라는 치욕의 역사를 만들어 낸 군불 같은 것이라고 저자는 분석한다. 왕권과 유교정치의 원리를 되살리고자 한 마지막 왕, 정조 시대만 보더라도 정약용을 비롯한 많은 실력있는 실학자들이 정치에 기용되지 못하고 산야를 배회하다 이승을 떴다. 도덕정치와 유교 원리, 민본정치의 이념이 그들의 저서속에서만 살아 생동했던 것, 현실 정치에 응용되지 못한 것이 결국 100년 후 조선의 망국을 불러왔다. 을사늑약을 통해 일본에 나라를 판 의정부 8대신의 예에서 보듯, 한말 정치는 국가와 민족에 대한 애정보다는 사사로운 이익에 눈 먼 자들의 것이었다. 이같은 망국의 논의는 그대로 현재적 관점에서 새로운 교훈을 준다.
" 한국인들, 특히 엘리트 계층 한국인들의 도덕성 수준이 20세기에 들어와 형편없이 떨어진 것은 국가가 망하고 이민족의 악질적 지배를 받은 때문이었다. 그런데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밑바닥에서 헤매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지금 우리는 엽기적 수준으로 부도덕한 정치-경제 시스템에 빠져 있다. 앞장서서 문제를 드러내고 있는 몇몇 사람만 처리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무능한 진보보다 부패한 보수가 낫다', 도덕성이야 어쨌든 경제를 살릴 능력만 있으면 된다'는 국민의 사고방식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299쪽, 김기협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
역사에서 배우지 않으면 잘못된 역사는 반복된다. 망국의 역사는 조선 사회를 지배했던 엘리트 계층의 부도덕성에서 그 첫째 원인을 찾아야 한다. 자신의 이익앞에 나라를 파는 조약에조차 이름 석자를 올리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훗날 어떤 친일 문학가는 일본이 그렇게 빨리 망할지 몰랐다는 변명을 늘어놓는다. 이런 부도덕한 엘리트들에게 나라를 맡긴 국민은 불행하다. 일본의 야욕과 제국주의의 동물적 논리에 앞서, 조선은 이미 일본이 아니더라도 그 어떤 나라의 식민지가 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빵보다 중요한 것은 가치라고 생각한다. 굶주릴지언정 자유가 소중한 법이다. 도덕적이지 못한 지도자가 주는 빵은 역시 부정하다. 21세기 그런데 `가치'보다 빵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도덕적 빈곤보다 흠있는 부자가 되는 길을 선호하는 이들도 많다. 정치도 결국 국민의 수준과 요구를 따르는 법이다. 우린 여전히 망국의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있는 게다. 그 역사가 반복되지 않는다 어찌 장담하겠는가?
2013.1.5
- 접기
개츠비 2013-01-05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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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관점은 언제나 변한다.
조선, 조용한 선비와 아침의 나라...
500년을 지탱하며 문화를 창달하며, 태평성세와 때로는 외침을 받으면서도 국가를 유지한 세계에서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진 국가중 하나...
기실 조선은 태조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으로 시작되어 공양왕에게 선위라는 형식을 통해 1392년 개국한 나라이다. 그런 조선 또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지배체제의 근간인 양산,사대부 통치가 무너지기 시작하며, 많은 단점을 잉태한 채 단지 역사에서 버티면서 내려오는 국가의 하나로 전락한다. 물론 대동법이나 영정조의 탕평책, 문화 르네상스 등은 조선을 다시 보게끔 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은 아니였고, 이후 정조대를 지나 세도정치에 이르며 조선은 나라를 일본에 내주게 된다.
이 책은 조선의 망국의 시점을 정조대부터 시작한다.
우리가 흔히 아는 성공한 국왕, 정치의 달인이며 학자군주로 유명한 정조의 대부터 조선의 망국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정조의 일련의 개혁 조치가 종결을 짓지 못한 채 정조의 급작스러운 붕어로 오히려 건드리지 않는 것만 못한 결과를 만들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런 정조대부터 조선의 망국 120~30년을 돌아보는 책이다.
또 다양한 역사관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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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는살아있다 2015-08-15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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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역사를 냉철히 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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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0년은 [경술국치 100주년]이 되는 해로서 우리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오욕의 역사 한 페이지를 기록
하게 한 100년이 되는 그런 해였다.
나를 비롯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경술국치"를 단순히 친일파들에 의해 일본에 나라를 팔아 먹은 날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지, 그런 사건이 왜 생겼고, 그 때 우리의 위정자들은 무엇을 했으며, 우리에게는 진정 문제가
없었는지 등에 대한 자기반성은 철저히 외면한 채 모든 것이 '다 네 탓이다!'라는 자세로 우리의 굴욕사를
해석해 왔고 자위해 왔다.
최근 우리 사회 일각에서 당시를 반성하는 자성의 목소리가 조금씩 들려오고 있는 가운데 본 작품이 나온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조선의 망국사에 대해 개인적으로 여러 의문이 있어 접하게 되었다.
망국사를 이야기하기 전에 저자는 이런 말씀을 작품 중간(127쪽)에 하고 있다.
[실패를 반성하는 자세 자체에 반성할 만한 하나의 추세가 있다. 실패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고, 그 원인만 아니었다면 실패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하는 낙관적 성향이다.
특정한 원인만 없었다면 성공이 당연한 것이었다고 보는 환원주의적 관점이기도 하다.
한 개인이 잘못된 일을 반성함에도 잘못의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 데는 특별히 강한 의지가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한 사회의 반성에도 자아비판을 회피하려는 성향이 작용한다. 반성에 인색한 자세는 실패를
극복하지 못한 자세이기도 하다. 실패를 완전히 극복한 사람은 과거의 허물을 부끄러워는 할지언정 그것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투철한 반성은 실패 극복의 조건이면서 또한 극복의 증거이도 한
것이다. 변화의 과정에서 전통은 자산이면서 부채이기도 한 것이다. 부채의 측면이 부담스러워서 전통을
부정하는 사회는 스스로 종속 변수의 위치를 찾아 주변적 존재가 된다. 부채의 측면도 기꺼이 짊어지고
앞길을 찾아 나가는 사회가 역사의 주체가 된다.]
아마도 상기의 글은 본 작품이 나오게 된 배경을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치욕적 역사적 현실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한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역사를 전공하지 않은 문외한들에게 많은 관점과 지식 그리고 시대적 흐름에 대한
이해를 제고시켜 주고 있는데 단원 하나하나가 무슨 역사 논문인 듯한 착각이 들게 하였으나,
일부 대목에 있어서는 자칫 저자가 친일, 친미주의자가 아닐까 하는 느낌과 함께 조선 왕조 최고의 비운의
임금으로 평가되고 있는 [고종]에 대한 과한 폄하성 발언은 사건의 사실 여부를 떠나 내게는 그렇게 개운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작품을 다 읽은 지금, 수 백 년에 걸쳐 융성해 왔던 한반도의 마지막 왕조인 '조선'이 망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나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첫째, 임진왜란으로 인해 기본적인 국가 기강이 와해 되었고
둘째, 한반도를 둘러 싼 주변 국가들의 급진적인 변화에 둔감하였으며
셋째, 변화를 거부하고 외면한 기득권 세력의 짧은 안목
등의 요소가 시대적, 환경적 요인과 어우러져 급격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작품 후반부에 저자께서는 강력하게 [고종]의 근시안적이고도 치졸한 행태에 대해 힐난을 하고 있는데,
나는 솔직히 저자의 그런 주장에 동의할 수가 없다.
[고종]을 현대 지도자적 자질 기준으로 보았을 때는 절대적으로 결함도 많고 좀 부족한 임금일 수는 있지만 개인적으로 국가를 그렇게 내 팽게치는 수준으로 관리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우리 역사는 어디를 보아도 임금이 권좌에 오른 순간부터 최고의 사부를 붙여서 왕의 신분에 걸 맞는 교육을
통해 나라와 백성을 책임지도록 성군이 되는 교육을 했으면 했지 임금이 사리사욕을 채우도록 교육을 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고종]을 거의 시정 잡배 수준으로 평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에 대한 반론의 증거가 바로 [고종] 자신이 주도했던 '헤이그 밀사' 사건이다.
저자가 주장하시는 그런 수준의 임금이었다면 차라리 일본이나 러시아 등 기타 열강들에게 나라를 통째로
받치고 안락한 노후를 보장 받았을 것이다.
작품을 읽으며 [고종]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다.
기득권 세력인 외척들이 활개치는 조정에서 좀 자신의 편이 되어 달라고 고르고 고른 마누라 일파가 오히려
더 난리를 치니 속이 뒤집어 졌을 것이다. 여러 경로를 통해 외척들의 온갖 비리에 대해 정보를 얻었으나
더 이상 [고종]은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고 궁궐 내에는 여러 권력들이 얽히고 설킨 채 관계를
형성하고 있어 [고종] 혼자만의 힘으로 처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현실 속에서 [고종]은 자신과 나라가 처한 상황에 몹시 힘들었을 것이고 애틋한 부부간의 정도 남아
있지 않았음은 물론 마누라도 싫었을 것이다. 그러다 눈에 가시처럼 여기던 마누라(민비)가 죽자, 그간 마음에 두고 있던 상궁을 곁에 두고 조금이라도 안위를 받으며 생활하고 싶었을 것이다.
[고종]은 한 사람의 개인이기 이전에 나라의 얼굴이라는 생각에서 스스로 이를 타파할 자구책을 마련했을
것이다. 서구의 개화문명을 들고 들어오는 세력에 맞서 신 문물을 조금이라도 배웠음직한 인력을 과거를
통해서 뽑지 않고 인물 천거 방식으로 뽑아서 신문명 세력들과 대응하도록 하였을 것이다.
기득권들의 천거에 의해 신규 인력들이 궁궐에 들어와 보니 [고종]은 '지는 해'요 서양 열강과 기득권은
'뜨는 해'라는 것쯤은 금방 파악하였을 것이고,
천거된 인력들은 기득권층과 이해관계로 뭉쳤을 것이다.
[고종]에게 힘이 되어 달라고 뽑아 놓은 놈들을 중용해 보니 외국 편이 되어 헛소리만 삑삑거리기만 하고
도대체 도움이 되지를 않고 오히려 기득권층에 달라 붙어 호가 호위하는 모습에 정말로 역겨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 모습을 보는 [고종]은 정말 답답했을 것이다. 진정으로 자신을 이해하고 도와줄 집단과 후원 세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망연 자실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권위가, 지시가 받아 들여지지 않자 또 사사건건 제약을 거는 집단을 향해 경고의
의미로 국가를 상징하는 '옥쇄'도 내 던졌던 것이다. 그것도 안 통하자 [고종]은 최후의 수단으로 세상과
주변의 인맥들과 싸우기 보다는 그들 속에서 우선 살아 남아야겠다는 선택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고종]의 주위에 있던 일단의 무리들은 [고종]의 비위를 맞추고 아첨과 술수에 능한 놈들이 나타나 [고종]을
돕는 척하고 온갖 교설을 부려 [고종]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였을 것이다.
어느 날 야비한 기득권 층 속에서 살아 보겠다고 비굴하게 변한 자신을 돌아 본 [고종]은 이렇게 살아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라는 자성 속에 정면 돌파를 추진하게 된다.
그래서 [고종]은 러시아, 미국, 영국 등의 열강들에게 진정으로 도와 줄 것을 요청하며 '헤이그'에 밀사까지
파견하여 도움을 요청하나 열강들은 아시아의 소국인 조선에 그다지 관심도 없었고 오로지 만주로의 진출을
꿈꾸던 러시아와 대륙으로의 진출을 꿈꾸는 일본에 의해 망국의 길로 접어 들고 만다.
(작품을 근간으로 한 나의 생각을 이야기 식으로 정리한 것임)
저자께서 작품을 쓰실 때 모든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작품을 쓰셨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몇몇 가지의 사실과 증거를 갖고 '그럴 것이다'라는 주장을 포함해 유추한 부분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몇몇 사항에서 왕으로서의 행동답지 못했다는 이유로 [고종]을 너무 폄하하는 것 같아 솔직히 기분이 별로
안 좋다. – 나는 이씨도, 왕가의 자손도 아닌 그냥 단순한 평민 출신의 후손임 -
그렇다면 나는 이런 이야기를 전개해 보고자 한다.
'계백 장군'께는 정말 죄송한 이야기이지만 인터넷 어디를 뒤져도 계백 장군의 출생년도 및 살아 생전의
공과가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는데 '황산벌 전투'만 갖고 현대적 '명랑화' - '불온한 경성은 명랑하라'를 읽은
분들은 무슨 의미인지 알 것이다 - 를 너무 시킨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데, 계백 장군이 전장에 출전하기 전에
행한 행동과 관창에게 보여 준 행동을 임의적으로 해석해서 나도 이런 이야기를 꾸며 보았다.
황산벌 싸움에 나서기 직전 계백장군이 자신의 가족을 도륙 했는데 사실은 계백 장군 역시 당시 의자왕에 버금가는 바람둥이였다고 한다. 백제가 멸망하면 자신의 부인이 다른 놈의 처첩으로 가는 게 싫어서 부인을
죽이고 전쟁터로 나갔는데, 첫 전투에서 부하들이 생포해 온 신라의 젊은 군사(관창)를 조사하다 보니 목에
걸고 있던 '옥 구슬'이 자신이 한 창 젊은 시절 몰래 신라로 넘어 가 놀 때 어느 젊은 처자와 짧은 사랑을
나누고 올 때 주었던 사랑의 증표임을 알고는 당시 그 여인을 생각해 그 놈을 풀어 주었다.
이 놈은 자신이 왜 풀려 나는지 영문도 모른 채 풀려 났다가 전후 사정을 들은 자신의 사령관에게 작살나게
혼난 후 '너 여기서 맞아 죽을래 싸우다 죽을래'라는 협박에 못 이겨 계백의 진영에 재차 진격했다가 불귀의
객이 되었다.
어떤가?
계백의 가족 살해 현장에, 관창과의 전투 현장에 없었던 입장에서는 당시 상황을 어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아마도 몇몇 가지의 정황을 가지고 모든 것을 만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고종]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은 채, 역사적 몇몇 사실만을 갖고 해당되는 사람과 사건에 대해 일방적
평가를 하는 것은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것도 한 나라의 임금을 말이다.
분명 [고종]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실수는 여러 군데 있었다.
그 실수를 악용해 결정타를 날린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을사 오적'이었고 '시대적 상황' 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무튼 이 한 권의 작품으로 우리 조선의 흥망사 전체를 아우르기에는 부족함이 많다는 게 나의 개인적인
소견이다 시간을 두고두고 연구해 볼 가치가 있는 역사적 진실이기 때문에 심층적 연구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고종]만이 나빴다는 이야기는 비록 역사에 문외한이고 이씨 조선 문중과 전혀 관계
없는 나이지만 좀 받아 들이기가 어려워 이렇게 강변 아닌 강변을 저자께 드려 보는 바이다.
어쨌든 작품으로 돌아 와서 '조선 망국사'의 배경을 논하기 전에 또 그 원인을 이야기하기 전에 동 시대
주변국의 상황을 간략하게 나마 먼저 이해하고 있어야 할 것 같아 일부 내용은 축약해서 또 일부 내용은
2~3개 단원을 묶어서 여기에 내용을 요약해 본다.
[중국의 상황]
- 15세기 말 유럽의 '대항해 시대'가 시작되고, 16세기 초 인도양과 남 중국해까지 유럽인의 항해 활동이
확장된 이후 서세동점(西勢東漸) 현상이 두드러진다.
이런 현상의 밑바탕에는 16세기 초에 일어난 '종교개혁'이 그 단초를 제공하고 있는데 종교개혁은 가톨릭
교회에 큰 타격을 주었다. 특히 개혁적 측면을 대표하는 단체가 [예수회] 였는데, 1540년 교황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후 새로운 사업인 '교육'과 '해외 선교'사업을 활발히 펼쳐 나가게 되는데,
예수회 창시자의 한 사람인 포르투칼인인 '사비에르'는 인도를 거점으로 하는 아시아 선교 사업의 길을
연다. 사비에르는 아시아 선교 사업의 궁극적 무대를 중국으로 보았고 그 후계자들은 이를 이어받아
중국 선교를 지상 과제로 삼는데 사비에르 사후 포르투칼이 마카오에 항구적 거점을 가지게 되면서 중국
진출을 위한 선교사들의 전진기지가 된다.
- 1583년 '마테오 리치'는 동료 선교사와 함께 중국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인 선교 활동을 펼치게 되는데,
교회 입장에서 보면 중국 선교의 개척자였고, 역사학의 관점에서 보면 유럽과 동아시아 문명간 접촉의
수준을 일거에 끌어 올린 거인이었다.
마테오 리치는 오랜 시간과 많은 노력을 들여서라도 지배 계층을 포섭하는 것이 궁극적 성공을 바라볼
길이라는 전략을 세워 사회 주류를 선교 대상으로 삼았고, 종교적 진리를 일방적으로 주장하기보다
기독교와 맺어진 유럽 문명의 훌륭한 점이 중국 지식층의 인정을 받게 하는 작업에 매진하여 큰 성공을
거둔다. 중국에서 벌어진 아편 전쟁(1840 ~ 42)은 서세동점의 불가항력적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의 상황]
- 명나라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을 불신해서 교역을 거부했기 때문에 일본은 유럽인의 중개무역을 계속
필요로 했다. 그러나 주민들의 사상에 영향을 끼치는 기독교 선교는 용납 할 수 없었다.
- 1600년대 들어 일본에 모습을 나타낸 네델란드인과 영국인들이 포루투칼인의 역할을 넘겨 받게 되고
막부의 통제 편의를 위해 외국 무역 주체를 단일화하는 과정에서 영국의 양보로 외국과의 접촉 대상은
네덜란드로 단일화되면서 이후 200여 년 동안 일본의 서양인 접촉을 독점하게 된다.
-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해 근대화의 성공에 자부심이 넘칠 때, 란카쿠(蘭學,서양학문)의 전통을 성공의
중요한 이유로 내세웠다. 동아시아 지역의 상황이 1890년대 이후 격화되는 데는 만주로의 진출을 꿈꾸던
러시아가 일본을 거들어 준 데 그 원인이 있다.
[조선의 상황]
1. 어떻게 조선은 시들어 갔는가?
- 15~16세기 한국 사회의 상황에는 유교 정치 질서가 적합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 왕조 아래 한국 사회가 누린 안정과 번영은 인류 역사상 유례가 많지 않은 높은 수준의 것이었다.
그런데 19세기에는 상황이 크게 달라져 있었다. 조선의 망국은 그 사이의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어느 사회의 변화에서도 전통을 등지는 개화는 '자기 부정'이라는 정체성의 질곡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런 개화의 성공은 바로 식민지를 향해 가는 길이다.
(외교권의 난맥상)
- 한 세기 가까이 몽골의 지배기를 거치면서 고려라는 왕조는 크게 망가졌다.
왕조 교체를 단순히 임금의 성만 바꾸는 것으로는 안 될 정도로 망가져 나라를 새로 만들 정도의 큰
변화가 요구되었다. 고려가 망가진 첫 번째 이유는 안보를 원나라에 의지해 오랫동안 도외시했고
원나라에 더 이상 의존하지 못하게 된 '공민왕' 때에야 본격적인 개혁이 추진된 되다가 기득권의 반발로
좌절되고 만다.
-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조선에 출병한 궁극적인 이유는 '조공 관계의 의리"때문이었다.
임진왜란을 축으로 조선과 명의 관계는 예절의 관계에서 힘의 관계로 넘어가게 된다.
(세력화된 사림)
- 학자로서의 '송시열'의 업적은 어떠한지 몰라도, 당파의 이해관계에 따라 가까운 인간 관계까지 번복한
그의 행적을 보면 정치가로서는 극심한 파벌주의자였음이 분명하다.
조선 후기의 지식층은 현재의 권력에 매몰되어 미래에 대한 준비를 너무 적게 하고 있었다.
- '훈구'와 '척신'은 왕권에 기생하는 존재에 불과했지만 왕권과 거리를 가진 사림의 팽창은 국가의 구조적
문제가 되었다. 사림 성장의 발단 요인은 '임금이 임금 노릇을 하지 않음'에 있었다. 땅바닥에 굴러 다니던
왕의 권위를 완전히 박살내 버린 것이 '인조'이다.
송시열는 사림의 권위가 권력으로 변질되는 단계를 대표한 인물이다.
(서민의 생활)
- 왜란 후 호구 파악이 어려운 상황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호구보다 파악이 쉬운 농지를 부과 대상으로
하는 대동법이 제안되었다. 대동법은 중세 체제를 벗어나는 발전의 열쇠이면서 전통적 명분의 포기라는
이면성을 가진 갈림길이었다. 조선 정부는 대동법조차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한 채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개항기를 맞았다.
- 임진란 이후 충격에 따른 파괴를 수습해서 원래의 질서를 회복하자는 노선이 산당(山黨)이었다면 새로운
상황에 맞춰 새로운 질서를 벗어나가자는 노선이 한당(漢黨)이었다. 산당의 원리주의 노선이 득세함으로써
조선이 적절한 발전의 길을 찾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 유교적 정치 원리는 경쟁이 격화되었던 춘추전국 시대에 경쟁을 완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전국 시대까지 현실 정치에서 큰 힘을 쓰지 못하던 유교가 한나라가 안정된 후에 통치의 중심 원리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제국의 질서가 경쟁을 억제하는 방향으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신권과 왕권의 힘겨루기)
- 사림의 권위를 확고히 세운 이가 조광조이다.
그가 '도학 정치'라는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왕권의 쇄신을 꾀하다가 '기묘사화'로 좌절된 이후
그의 뒤를 잇는 정치 이념 탐구는 재야 사림의 당당한 과제가 되었다. 지배 집단이 권력 투쟁에
매몰되면서 정치와 학문이 모두 선명성 경쟁에 매달리게 되었다. 학문에서도 실용적 경세론보다 시비에
집착하는 정통론이 일세를 풍미했다.
- 임진왜란 전까지는 사림의 권위가 자라나면서도 왕의 권위를 보좌하는 위치를 지키고 있었다.
왜란을 겪는 동안 왕의 권위가 급격하게 하락한 결과 광해군 때는 왕이 사림의 권위에 의존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 숙종이 키운 왕권은 권위가 아닌 권력일 뿐이었고, 그 권력도 왕권의 기반을 키우는 건설적 노력이 아닌
신하 집단들의 이간질이라는 파괴적 노력으로 얻은 부실한 것이었다. 숙종의 뒤를 이은 경종은 가장
미약한 왕권을 물려받은 임금의 하나였다. 숙종 말년에 영조 초년에 걸친 최악의 당쟁 양상은 다른
무엇보다 숙종이 정치를 서바이벌 게임으로 만든 탓이었다.
(정조의 권도정치)
- 세도정치의 주체가 세도가였던 것과 달리 정조의 권도정치는 왕이 주체였다.
19세기의 권력자는 부패를 억누르려 애쓰기는커녕 권력 유지와 확대에 오히려 부패를 이용하게 되었으니
총체적 난국을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실학의 좌절)
- 실학 형성의 배경으로 외래적 요인과 내재적 요인으로 구분해서 이야기하는데, '외래적 요인'이라면
청나라의 고증학이나 중국을 통해 소개된 서학에 자극 받은 측면을 이야기하고, '내재적 요인'이라면
조선 국내에 제반 변화, 특히 사회 경제적 여건의 변화에 의해 촉발된 측면을 말하는 것이다.
- 실학(수사학)의 학풍은 정통론과 명분론에 매달린 주류 성리학의 퇴행성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
이데올로기의 모색 노력이었다.
2. 어떻게 조선은 쓰러져갔는가?
- 19세기 후반에 일본을 경유해 한국을 덮친 서양 근대문명은 막강한 힘을 가진 것이었다.
한국보다 덩치가 큰 중국조차 그 위세 앞에서 1840년대 경부터는 자세가 흔들리고 1860년 경부터는
휩쓸려 들어가고 있었다. 게다가 그 위세는 시간이 지날수록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었다. 조선이 아무리
굳건한 체제를 지키고 있었더라도 정체성의 큰 훼손과 그에 따른 변화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조선 망국의 두 단계)
- 천하 체계의 붕괴가 완전히 확인된 계기는 청일전쟁(1894~95)이었다.
이 체제의 붕괴는 개별 국가의 쇠퇴와 멸망을 넘어, 동아시아 문명권 전체의 존재 양식을 청산하는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조공 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조선 왕조의 존재 양식도 이로써 단절을 맞게 되는데,
여기에 조선 망국의 큰 의미가 있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이것이 한 단계이고 나머지는 새로운 생태
환경에 적응하려는 노력의 실패 즉, 좌절이 또 다른 단계였다.
(실종된 왕권)
- 이조원의 옥사는 국왕에게 조차 세도 정치에 대항할 수단이 남아 있지 않음을 보여 준 사례이다.
또한 왕실의 예법은커녕 양반다운 교육도 받지 못한 '강화도령(철종)'을 왕위에 앉힌 것은 똑똑하고
힘 있는 왕을 귀찮아 한 당시 세도가의 취향을 보여 준 대표적인 사례였다.
이렇듯 세도 정치의 폐해가 그 정도를 더해 가고 있었다.
- 권력 투쟁이 정적의 목숨을 노리는 사태는 조선 전기부터 간간이 있었으나 이것이 권력 투쟁의 일반적
양상으로 자리 잡은 것은 숙종 때의 일이었다.
(대원군의 몸부림)
- 대원군은 국가의 기본 질서를 세우기 위해 서원철폐를 감행한다 한편으로는 당시 기득권 층으로 많은
인재를 거느린 '안동 김씨', '풍양 조씨'에 대항하기 위해 '전주 이씨'를 종친 우대라는 명분으로 관직에
대거 끌어들였다. 특히 노론 명문가의 하나인 '여흥 민씨'를 외척으로 힘을 키워 주었다. 그 결과 대원군의
처남이면서 민비 집안으로 입양되어 민비의 오라버니가 되고 대원군 실각 후 권력을 민승호가 쥐게 된다.
- 대원군 실패의 원인 한가 중요한 문제점이 왕이 '경연'을 하지 않은 것이다.
'경연'은 스킨 쉽을 통해 군신간의 신뢰와 충성을 강화하는 것은 부수적 효과다. 왕세자의 경우는 경연의
축소판인 '서연'을 군왕 교육의 중심으로 잡는다.
(임오군란, 박영효, 김홍집)
- 대원군은 민씨의 허수아비가 된 것이다. 임오군란(1892년)까지 계속된 민씨 세도기에 조선 국가 체제의
부패는 극에 달했었다.
- 군대를 주둔시켜 무력으로 조선 정부를 통제하고 국왕의 아버지를 황제가 심문하겠다고 데려간 것은
전통적 관계의 포기였다. 조선과의 '특수 관계'를 전략적 이점을 이용할 생각 뿐, 그 특수 관계의 본질적
가치를 도외시한 조치였다.
내적으로는 국왕의 권위가 완전히 소멸하는 상황이었다.
- 박영효는 친일파 중에서도 '저질 친일파'의 행적을 남겼는데 1884년 이후 박영효의 행적 중에서
갑신정변보다 더 화끈한 친일 행위를 찾을 수 없다. 갑신정변은 임금이 임금 노릇을 못하고 신하가 신하
노릇 못하게 된 조선의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 준 사례이다.
- 박영효의 행실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일본과 조선의 관계'보다 '일본과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앞웠다는
점이다. 정변 실패 후 일본으로 달아난 박영효를 대신해 김홍집이 아관 파천 때 '친일'로 몰려 죽임을
당한다. 청일 전쟁 후 갑오개혁의 진행 속에 김홍집이 친일 행적을 한 것은 맞지만 그러나 그의 친일은
주제성 있는 친일이었다.
즉, 청일 전쟁에서 패한 청나라가 쫓겨 나는 것을 보고 일본의 주도권을 대세로 받아 들였다. 일본이
요구한 '개혁' 수행에 김홍집이 앞장 선 것은 주어진 상황에서 국가를 위해 최선을 다하려는 뜻으로
이해된다
(을미사변)
- 1864~73년 세도 정치의 틀을 따르면서도 극단적 쇄국 정책과 함께 전례없이 강한 개혁 정책을 추진한
대원군 집권은 위기에 대한 첫 국가적 대응이라 할 수 있다.
- 1891년 이후 민씨 세력 수령으로서 당대 으뜸의 탐관오리로 명성을 날린 민영준(후에 '민영휘로 개명)이
그 대표적 인물이다. 민영준은 원세개의 조정을 받아 동학혁명 진압을 위한 청나라 출병을 요청을
주도하여고, 청일 전쟁의 도화선을 제공한 장본인으로서, 나중에는 일본 쪽에 붙어 합방 후 작위까지
받는다. 청일 전쟁을 통해 일본은 조선에서 최대의 경쟁자를 물리쳤다.
(왕 노릇을 거부한 고종)
- 미국 공사 '알렌'은 "내 일찌기 구만리를 돌아다녔지만 상하 4천년에 한국 같은 이는 처음 보는
인종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 갑오개혁과 아관파천을 거치는 동안 조선의 정치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 정통과 관료의 비중이 계속
떨어져 갔다. '개화 관료'라 하여 과거를 거치지 않고 외국어나 기술을 갖고 채용된 사람들 그리고
왕에게 무조건적 충성을 바치는 친위 세력의 비중이 커졌다. 왕 자신이 전통적 덕목을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변화가 빠르게 일어났고, 전통적 덕목을 대치할 근대적 덕목이 갖춰진 것도 아니기 때문에
사회 전체의 도덕적 긴장이 줄어드는 '도덕적 공동화 현상'이 진행되었다.
- 아관파천은 조선의 조정이 고종의 수준에 맞춰 하향 평준화를 이루는 결정적 계기였다.
3. 어떻게 조선은 사라져갔는가?
19세기 후반 산업화의 확장 과정에서 인류 역사상 미증유의 경쟁 열기가 전 세계를 휩쓰는 가운데 승패의
결정적 열쇠는 근대국가의 효율성에 있었다.
독일처럼 급조된 국가라도 근대적 효율성을 갖추면 강자가 되었고, 러시아처럼 오래된 국가라도 그러지
못하면 약자가 되었다. 유럽 어느 나라보다 더 오래된 동아시아 국가들에게도 같은 상황이 닥쳤다.
식민지가 되었다는 '결과'보다 식민지가 되던 '과정'을 더 세심하게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예나 지금이고 사회의 장래를 결정하는 일차적 요인은 힘 있는 사람들의 행동양식이다.
조선 후기의 성리학이 극단적 정통론에 집착해 사회의 생산성과 건강을 해친 것이 바로 '독단'과 '독선'
때문이었으며 더욱 문제가 된 것은 고종의 인품에 관한 것으로 고종은 술수와 책략에 사족을 못쓰는
임금으로 평가하고 있다.
(외세 줄 서기)
- 아관파천으로 친일 정부가 전복되고 중요 인물 몇이 살해 당한 후 고종의 자의적 통치를 견제할 수 있는
국내 정치의 매커니즘이 사라졌다. 고종의 절대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힘은 외세뿐이었다. 고종은 자신의
개인적인 야욕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독립협회를 이용했다가 나중에는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 대한제국의 건립은 권력 사유화의 절정이었다.
의정부가 유명무실해지고 궁내부가 비대해진 것이 그 단적인 징표였다.
(중국과 일본의 행보)
- 중국은 1840년에 서양 열강으로부터 본토 침략을 당하기 시작했고, 한국은 개항 6년 후인 1882년부터
외국군이 주둔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일본에는 그처럼 강한 외세의 작용이 없었다.
특히 개항에서 유신에 이르는 14년간 일본은 거의 아무런 외부 위협을 겪지 않았다. 또 한가지 일본이
개화에 유리했던 점은 중국과 조선 같은 중앙집권 체제가 없었다는 것이다.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 내는
혼란스러운 과정에 외세의 과도한 작용이 없었던 것이 일본 성공의 결정적 조건이었다.
(의병의 출현)
- 순수한 농민들의 봉기는 '의병'보다는 '민란'이나 '농민 항쟁'으로 규정되기 쉽다.
지도층이 주도하는 항쟁이라야 '의병'으로서의 명분을 명확히 표현하고 또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의병이란 위기에 처한 체제 지도층의 대응 방식이다.
- 우리 사회에서 의병의 역사적 의미가 충분이 인식되지 못하는 이유
첫째, 의병의 존재가 국면 전개를 좌우하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지 못했고
둘째 의병 운동의 위정척사 사상이 시대 변화의 방향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
(고종의 마지막 짝사랑 러시아)
- 만주에서 러시아가 약간의 우선권을 가지는 대신 조선은 완전히 일본에게 맡긴다는 '신사 협정'이 1896년
2월 아관파천 당시 일본 정부에서도 러시아 정부에서도 양국 간의 절충점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 고종의 대한제국은 중립화를 통해 일본의 야욕을 봉쇄한다는 환상을 오랫동안 추구했다.
그 환상을 실현시켜줄 주체로 어느 나라보다 러시아를 쳐다 봤다. 일본에게 요긴한 한국을 일본에게
양보하는 대신 만주에서 일본의 양보를 얻는 것이 대한 제국에 얽매이는 것보다 러시아의 국익에 더
유리한 길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직시하지 못한 것은 고종의 개인적 환상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기 타)
- 일본이 짧은 시간 내에 열강의 대열에 올라 설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중국 대륙을 침략하는 데 유리한
위치 덕분이었다. 중국 침략은 일본이 제국주의 국가로 자라나기 위한 필연의 길이었다.
- 고종과 민비는 러시아와 미국에 의지해 일본의 영향력을 원천적으로 거부하려 했고, 이에 대한 반발로
을미사변이, 다시 이에 대한 반발로 아관파천이 일어났다.
- 일본의 통제를 피하려는 고종의 노력에 주권 수호의 뜻이 있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주권 수호를 하더라도 합당한 방법이 있고 그렇지 못한 방법이 있다. 전형적인 고종의 수법
한 가지는 의정부 대신들을 자주 갈아 치우는 것이었다. 일본은 대한제국의 정책 결정이 황제가 아닌
의정부에서 공개적으로 이뤄질 것을 요구했다. 고종은 대신을 자주 바꿈으로써 의정부의 활동이
연속성을 가지지 못하게 하고 대신들이 자기 눈치를 보게 만들었다.
- 왕조로서의 조선은 망해가고 있었고 국가가 망하는 가장 뚜렷한 지표의 하나가 권력의 사유화다.
책 속에서 읽는 상식들
- 향초(herb)는 원재료를 거의 그대로 쓰는 것인데, 향료는 재료를 말려서 오래 보관할 수 있게 하는 것이고,
가루로 빻아 쓰는 것이 보통이다.
- 동인도회사는 네덜란드 의사 한 명을 '데지마'에 배치해는데, 이 의사가 일본 란카쿠(蘭學)의 촉매가 되었다.
란카쿠의 주춧돌을 놓은 사람은 2년간 체류했던 '카스파르 샴배르거'이며 큰 열매를 맺은 사람은 '필리프
폰 지볼트'이다.
- 천하 체계를 가르켜 '사대주의'라는 말이 많이 쓰여 왔는데, 이것은 천하 체제의 전복을 꾀하던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천하 체제의 한 측면만을 악의적으로 폄훼한 것이다.
'사대(事大)'는 약소국이 강대국을 대하는 원리로서 강대국이 약소국을 대하는 '자소(字小)'의 원리와 짝을
이루는 것이었다.
[맹자]의 '양혜왕 편'에 그 원리가 설명되어 있다.
【 인(仁)이 아니고는 큰 것이 작은 것을 섬길 수 없나니, 그런 까닭으로 탕임금이 갈(葛)을 섬기고.....
(중략).....큰 것이 작은 것을 섬김은 하늘을 기쁘게 함이요, 작은 것이 큰 것을 섬김은 하늘을
두려워함이니, 하늘을 기쁘게 하면 지킬 것이요, 하늘을 두려워하면 나라를 지킬 것입니다】
- 조선과 명나라 사이의 가장 큰 이견은 조공 빈도에 있었다. 3년에 한 번씩 오라고 명나라에서는 거듭거듭
일렀지만 조선에서는 1년에 세 번씩 가겠다고 뻗댔다. 결국 1410년부터 1년에 세 차례 조공이 상례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조선에 출병한 궁극적인 이유는 '조공 관계의 의리" 때문이었다.
임진왜란을 축으로 조선과 명의 관계는 예절의 관계에서 힘의 관계로 넘어가게 된다.
- 임진란 이후 충격에 따른 파괴를 수습해서 원래의 질서를 회복하자는 노선이 산당(山黨)이었다면
새로운 상황에 맞춰 새로운 질서를 벗어나가자는 노선이 한당(漢黨)이었다.
- 유원형, 이익에서 후기 실학의 태두 정약용이 이르는 학통은 실학 발전의 가장 두드러진 흐름이었다.
이을호는 이들의 학품을 수사학(洙泗學)이라 이름 붙였는데 이는 각각 공자와 맹자가 살던 곳의
'강 이름'이니 송대 이후의 성리학을 뛰어넘는 원시 유학의 모색이라는 뜻이다.
- 1905년 을사보호 조약을 맺을 때 의정부 8대신 중 확고히 반대한 것은 '한규설'뿐이다.
- 접기
광야에서 2020-05-27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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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 요약 및 평론
1. 책 개요 및 핵심 요약
김기협의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2010)는 조선의 500년 역사, 특히 조선 후기부터 1910년 경술국치에 이르기까지의 궤적을 재조명하며, '조선은 왜 망했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에 답하는 비판적 사서이다. 저자는 조선의 멸망을 단순히 일제의 강압적 침략이나 특정 위정자의 개인적 무능 때문으로 치부하는 피해자 중심의 역사관을 배격한다. 대신 조선 체제가 자체적으로 지니고 있던 구조적 모순과 이데올로기적 정체(靜滯)가 국가의 자멸을 불러왔다고 진단한다.
주요 내용 분석
성리학적 질서의 고착화와 이념의 교조화: 조선 전기에 국가 발전을 이끌었던 성리학은 후기로 접어들수록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유연성을 잃고 도덕적 명분론으로 전락했다. 16~17세기 환국과 예송논쟁을 거치며 학문적 성과였던 성리학은 정적을 제거하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정치 이데올로기로 고착화되었다. 이로 인해 사회 변화에 발맞춘 제도적 갱신이 불가능해졌다.
민중과의 이탈 및 지배층의 사유화: 조선 후기 지배층인 양반 사대부 세력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공공 체제를 사유화했다. 삼정의 문란으로 대표되는 수탈 체제는 민중의 삶을 도탄에 빠뜨렸고, 국가와 민중 사이의 유대감을 완전히 해체시켰다. 민중에게 조선이라는 국가는 더 이상 보호자가 아닌 수탈의 주체에 불과했다.
세계사의 흐름에 대한 무지와 해양 진출의 부재: 서구 열강이 산업혁명과 대항해시대를 거치며 세계적 차원의 변화를 이끌어낼 때, 조선은 성리학적 소中華 의식에 갇혀 외부 세계와의 교류를 스스로 차단했다. 19세기 개항기라는 급박한 환경 속에서도 지배층은 세계 정세를 직시하기보다 내부의 권력 투쟁과 안이한 명분론에 골몰하며 국가 개혁의 골든타임을 허송세월했다.
근대화 이행의 실패와 자멸적 수순: 동학농민혁명이나 갑신정변 등 내부로부터의 자발적 개혁 시도가 존재했으나, 지배층은 이를 수용하여 국가적 에너지를 한데 모으기는커녕 외세를 끌어들여 민중을 탄압하는 비극적 선택을 했다. 결과적으로 조선이라는 국가 체제는 일제의 무력 침략이 본격화되기 이전에 이미 내부로부터 완전히 해체되어 있었다.
2. 평론: 성찰적 역사관과 현대적 시사점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는 자국 역사에 대한 감상주의적 온정주의나 식민사관에 대한 반발로 형성된 무조건적인 자화자찬을 모두 경계하는 냉철한 성찰의서이다. 역사를 피해와 가해의 이분법으로 바라보는 대신, 내부의 문제점을 직시하고 평가함으로써 진정한 역사적 교훈을 도출하고자 한다.
장점 및 가치
첫째, 구조적·체제적 관점의 깊이이다. 저자는 망국의 원인을 고종이나 이완용 같은 특정 인물의 잘못으로 단순화하지 않는다. 조선이라는 국가 체제가 작동 불능 상태에 빠지게 된 사상적, 사회적, 경제적 원인을 유기적으로 분석하여 망국의 전말을 입증한다.
둘째, 민족주의적 피해의식의 극복이다. 역사적 비극을 외세의 침략 탓으로만 돌리는 서사는 위안을 줄 수 있을지언정 미래를 위한 타산지석이 되지 못한다. 저자는 내부의 허약함과 지배층의 무책임이 어떻게 침략을 불러왔는가를 직시하게 만든다.
셋째, 사상사적 통찰력의 우수성이다. 역사학자이자 사상사 연구자인 저자의 내공이 발휘되어, 성리학이 초기 통치 이념에서 어떻게 기득권 수호용 교조주의로 변화했는가를 명확히 파헤친다. 이는 오늘날 한국 사회의 진영 논리와 이념적 대립을 반성하게 하는 유용한 틀을 제공한다.
한계 및 보완점
책의 비판적 시선이 조선 체제의 한계에 강하게 집중되다 보니,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국가를 바로잡고자 했던 실학자들의 개혁 구상이나 민중의 자발적 역량이 다소 과소평가될 여지가 있다. 또한 19세기 후반 제국주의 열강이 가했던 압도적인 무력적·경제적 수탈이라는 외부적 압력의 크기를 다소 약화시켜 볼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총평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는 역사를 통해 오늘을 비추어 보는 지혜를 선사하는 작품이다. 국가와 지배층이 공공성을 잃고 내부 혁신을 외면할 때 어떤 비극이 도래하는가를 서늘하게 보여준다. 감정적 반일이나 가공된 민족적 자긍심에 안주하지 않고, 냉정한 눈으로 역사를 직시하고자 하는 독자에게 깊은 지적 경각심을 주는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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