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족은 어떻게 청나라를 세웠을까?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17회
법률방송
441,544 views Dec 25, 2024 #한국인 #역사 #함재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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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시간에는 근대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동북아시아는 물론, 세계 역사에서 큰 획을 그은 청나라의 건국 과정을 살펴볼까 합니다. 5만에 불과했던 군사를 가지고 청은 어떻게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중원을 차지해 중국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이룰 수 있었을까요? 또 새롭게 나타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조선은 어떤 선택을 해나갔는지 차근차근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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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함재봉 한국인의 탄생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어 지난주 하고 지지난 회에는 어 저희가 그 정론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어 정한론이라는 거에 대한 여러가지 잘못된 해석도 많고 몰리도 있고 그래
갖고 어 한번 정원이라는게 정확하게 왜 일어났었고 그리고 특히 그것이
이제 조선하 일본의 관계 그리고 동부가 전체의 국제정세를 어 어떻게 바꿨는지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오늘은 좀라 에 대해서 어 청나라의 건국에 대해서 좀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우선
조선과 같이 중국 일본이 같이 이제 근대화의 과정을 겪 근데 세 나라의
정권들이 어떻게
변했었죠 자 호란은 왜 일어났고 그 세국 정치가 왜 일어났고 이런 모든 것을 이해를 할 수가 있게 됩니다
그래서 어 청나라의 건국에 대해서 말씀을 드려 보려고 그러고요 특히 한
가지 더는 뭐냐면 정말로 한 줌밖에 안 되든 한
줌밖에 안 되는 여진족이 어떻게 한 불과 한 50년 만에 작은
부족에서 시작해서 대륙을 정복해서 청나라를
건설하게 되가이는 이것은 국가 건설이라는 어 과제에 대한 제가 봐서 아주
교과서적인 교훈을 줄 수 있는 어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메이지유신을 살펴보면서 일본이 근대 국가를 이렇게 건설했고를 보았듯이
여진족이 어떻게 청을 건국하게 되었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국인의 탄생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음악]
네 우리가 그 청나라의 건국을 살펴보려고 하면 당연히 이제
그런 명은 그전에 있었던 명이 어떻게 쇠퇴하게 됐는가 어 어떻게 해서
변방에 아주 작은 부족한 테 어 나라를 뺏길 정도로 왜 명이 그렇게
쇠퇴하게 됐는가 우선 그걸 살펴봐야 됩니다 사실 나라하고 조선은 뭐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죠 조선
사람들이 전부 다 같은 체제 같은 이념 그리고 거의 동시에 어 계곡을
했었기 때문에 굉장히 같은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더해서
임진 외란이 터졌을 때 명나라가 조선을 적극 도왔습니다 임진 회란
당시에 어 일본이 30만 대군을 보냈습니다 명은 또 이것을 그 조선을
지키기 위해서 어 그 대군을 파 을합니다 그래서 어 역사학자들이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명이 조선을 외로 일본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 임진
외란 동안에 쓴 어 돈은 1,700만 양의 은과 보급품 즉 명 조정 1년
세입의 50% 썼답니다 물론 궁극적으로 이제 명까지 더더 히데오
시가 쳐 들어오겠다 그러니까 자국의 이해를 위해서 그 군대를 보내서 어 그 그 격퇴를 시킨 거지만 아무튼
결과적으로는 어 명과 조선이 힘을 합쳐서 어 일본을 외를 격퇴를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미 이때 이미 이때에 명은 완벽하게 쇠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 10대 정덕제이 사람은 완전히
주색에 빠져 가지고 전혀 정사를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모든 정사를 이때부터 환관 맡기기 시작했습니다 뭐
한 나라 때부터 시작해서 계속해서 나오는게이 환관 정치로 가면 나라가 망한다 그랬습니다 그 환관 정치가
그게 달하기 시작하는게 어 10대 정덕제 때부터입니다 12대 정
융경제 목정이라고도 하죠이 사람 역시 굉장히 짧은 재회 기간이었지만
국사를 돌보지 않습니다 몽골이 이때 계속해서 만리장성을 넘어서 다시
쳐들어오고 그러는데 국방을 튼튼히 할 생각을 하지 않고 그때마다 그냥 뇌물을 줘서 돌려보내 돌려보내고 어
그 하면서 위기를 넘겼습니다 그리고 그다음이 바로 누구냐면 만력제 신종
황제주이 사람이 조선에 군대를 파견해서 왜군을 격퇴하는데 도움을
줬던 저 황제고 나중에 조선이 나라를 구해 준 은인으로서 끝까지 어 섬기는
바로 그 그 신정 있니다 그런데이 만력제는 조선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고마운 사람이었지만 명나라 입장에서 정말 최악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전혀 국가의 제정하고
왕실의 재정 개인의 재정을 구분 하지를 못했습니다 3천 국와 2만
명의 환관을 두면서 완전히 어 국고를 탕진을 합니다 그리고 만력제가 48년
거의 50년 어 반세기를 제위를 하는데 재상을 직접 만나서 국사를
돌본 것 등을 해서 국사를 돌본 것은 딱 한 번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황제가 저럴 때에는 역시 대신들과 환관들이 결탁해서 국정을 농단할
수밖에 없는 어 그런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함으로써 조선은
구하지만 명은 급속히 쇠락을 하고 있었고 이틈을 타서 바로 만주에서
어 누루 하치라 사람이 부상을 하면서 청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
여진족이 그러면요 너무나 익숙합니다 고려에서 터 시작해서 실 저
조선회까지 내내 조선이 지속적으로 어 교류를 해야 됐었고 지속적으로 국경
수비에 신경을 써야 됐던 것은 순전히 외와 여진 때문이었습니다이 여진족은
조선 사람들한테 너무나 익숙한 존재였습니다 예를 들어서 대표적인 것이 함경도 사람들을 부인이라
그랬습니다 근데 그 북인은 전에도 한번 말씀드렸지만 숙종 같은 사람은
그 부인이라 그랬을 때는 함경도 사람을 칭하는게 아니라 사실 뭡니까 여진족을 칭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함경도는 사실은 여진족의 땅으로 조선 시대에도 많이 생각을 했던 거죠 근데
태조 이성계가 바로 그 여진족의 땅의 한복판인 함경도의 한복판인 함흥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태조에 가장 친했던 동지 의형제를 맺고 나중에 이성계의
묘에 같이 배양이 되는 이지란이는 사람이 있었죠이 사람이
바로 여진 출신입니다 원래 이름이 퉁두란 있니다 고륜 2란 천막 5
쿠란
티르라리고 나서는 이제 이성계에 휘하로 들어가는 거죠 청해 이시의
시조이기도 합니다 무슨 말씀이냐 그만큼
밀접했던 할 정도로 어 같은 어 족속이었다 어 그렇게 할 수가 있고요
근데이 건주여진 특히 이제 지란도니 어 누루하치 건주 유진 출신인데이
사람들이 누구냐면 원래 백두산 근처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백두산을
자기내 영산으로 생각을 합니다 우리랑 굉장히 비슷합니다 조선 사람들이랑 너무 비슷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면이 사람들이 제일 주된 건주 여진의 주된 상업이 뭐였냐면
장사하는게 뭐냐면 인삼이 인삼을 캐 갖고 산삼을 캐서
그걸 가지고 명나라는 교육하면서 살았습니다 굉장히 비슷한 족속 들이었다는 것을 어
말씀드릴 수가 있겠습니다 자 그런데 다음에이 그림들을 보시면 이런 거죠
여진 족하고 잘 지냈지만 여진 쪽에서 가뭄이 일거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 그러면 다 남쪽으로 또 넘어와서 고려나 조선을 침공하기 시작하는 거죠 그래서 북관 유적
도첩이라는 그림들을 보면요 이게 뭐냐면 고려 말에서부터 세종이 그다음에 세조가
선조가 계속해서 군대를 보내서 여진족을 어 공략을 하고 제압을 해야
됐었습니다 그렇지만 말씀드린 대로 또 동시에 굉장히
밀접했던 청 그러니까 송골매 산삼 모피 등을 수입을 했고 포목 농기구
종이 이런 거를 이제 교환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어 그
한양에 북평관이라는 첫 그 처소가 있었습니다 여관이 있었습니다 그건
뭐냐면 교육하라 오는 여진 족들을 묻게 하는 것이 그게 바로 북평
관이었다 그런데 그러면 여지는 지금이이 지도를 보시면은 나옵니다
우선 압록강 바로 넘 넘어서 백두산 바로 옆에 있는게 건주 여진 있니다
그런데 그 위쪽으로 보시면은 명나라 쪽으로 가까운게 해서
여진이라는 야인 여진이라는이 여진이 해서 여진 권주
여진 야인 여진으로 이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자 그래서
명나라가 사실 말리장성 바깥에 지금의 만주를 정복을 못 하죠 만리장성을
지키기만 하고 그 대신에 이제 여진 족들을 이제 분할 해서 이렇게
다스리려 그러 거죠 분열시켜서 다스리려 그런 겁니다 그래서 특히 해서 여진 테 많은 혜택을 주고 말리
장성에 있는 도움들로 와서 교육을 할 수 있게 해주고 이런 여러 가지 해서
여진으로 하여금 어 그 다른 여진 족들을 누를 수 있도록 그렇게 이제
쭉 해왔었습니다 자 그런데 이때에
명이 만주를 다스리도록 임명한 사람이 이성양자
이성양자 받아 가지고 지금 만주를 관할을 하고 있었던 거죠 명예
장수로서 근데 재밌는 사실이 이성량 고조 할아버지가 이영은 조선
사람이었습니다 조선 사람이 건너가서 명예 직위를 받고 그리고는 이제
몽고족 여진족을 계속해서 어 격퇴하면서 그 평화를 유지하면서
요동을 다스렸던 겁니다 바로이 이성량 아들이 누구냐면이
여성입니다 임진란 때 명나라의 군대를 오만 대군을 끌고 와서 조선을
구하는데 일조를 한 바로 그 유명한 이여성은 사실은 뭡니까 조선 사람의
후회입니다 그니까 사실 여러분 이렇게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이 요동이 데는 요동반도 라는 데는
뭐냐면은 한족들 물론 살고 있지만 몽골 족들 살고 있고 다양한 여진
족들 살 있고 심지어는 조선 사람들도 굉장히 많이 이주를 해 갑니다 그래서 그 요동이 데는 그야말로 다문화 아
그 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자 1583년 이성량이 니칸
와란이라는 말하자면 이제 여진족이 명나라의 재이가 되 거죠 한족의
앞잡이라는 어떤 사람이 이성양자 빨리 공략을 해야 되겠다
아무래도 건주 여진이 자꾸 뭐가 세지는 거 같은데 해서 여진을 지키기 위해서는 건주 여진을 한번 눌러 줄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제 건주 여진을 공략을 합니다 근데이 전투에서 그
나중에 청을 일으키는 누루 아치의 할아버지하고 그의 아버지가 죽습니다이 전투에서 그래서
어 그로부터 3년 뒤인 1586년에 어 누르하치가 그 앞잡이를 앞잡이를
했던 니칼 라이라 그 앞잡이를 가서 죽입니다 그랬더니 그걸 보고 이성양자
보니까 아주 대단한 대단한 인물이 하나 나왔네
이성양자 도지휘사 임명을 해버립니다 그러니까 해서 여진과 건주 여진의 세력 판도가
이제 확 바뀌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때부터 누르하치가 본격적으로 이제 세력을 키우기 시작합니다 누르하치는
사실 참 그 전쟁만 하는게 아닙니다 항상 다른 부족들 하고 결혼을 통해서
몽골 족들고 다른다른 여인들고 끊임없이 결혼을 통해서 혼인 관계를
맺으면서 세력을 넓혀 갑니다 그러니까 다 혈연 관계로 이제 엮으려고 하는
거였죠 자 그러면서 누르하치가 계속해서 세력을 넓혀가고 어 이성의
의 그 지원까지 받고 어 이런 상황이 되니까 안 되겠다 해서 해서여 진에서
일어나서 공격을 합니다 그래서 어 1593년에
어 훈허 하변의 자하 전투에서 누르하치의 건주 여진이 해서여진 군
4천명을 사살하고 3천 마리의 말을 포획하는 대승을
거듭니다 그러고 나서 1599년에 부족 1607년에 후파
부족 1613년에 우족 1619년에 예호 부족을 차례로 병화 시키면서
1619년 되면 여진족을 완전하게 통합을 합니다 근데 누르하치가
대단했던 사람인게 뭐냐면요 그냥 정복만 하고 전쟁만 해갖고 통화만
하는게 아닙니다 그다음에 놀라운 일을 합니다 뭐냐면은 문물을 제대로 정하기
시작을합니다 본적으로을 하면서 나라를 명이나 조선에 준하는 나라의 모습을 갖춰
나가기 시작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뭐냐면 이때 누 아치가 만주 문자라는
걸 만듭니다 학자들을 시켜서 우리도 우리만의 문자를 가져야 된다 그래 갖고 몽고 저 만주 문자를
만듭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뭐냐면은 팔기군이라는 당시로서는 정말로 어
무적의 군대를 만듭 이 팔기군이라는 군대는 군사 조직만이
아니라 정치경제 모든 어 것을 아우르고 청나라가 망할 때까지도 청을
지키는 가장 기본적인 군사 제도이고 정치
체제였지만 그리고이 팔기군이 대륙을 휩쓸면서
어 그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그다음에 신장 구를 복속시키고 하면서 그
제국을 어 이제 일으키게 됩니다 군군 역사에 있어서 정말 아주 유명한 군대
조직인데이 팔기군 대한 최초의 기록이 어디서 나오냐 면요 선조 실록에
나옵니다 선조 실록에 나왔는데 저는이 기록을이 이렇다는 사실을 어디서
알았냐면 패라 크로스라고 미국의 다트머스 대학의 교수를 하고 있는
청나라 역사의 유명한 학자가 자기책 그렇게 썼더라고요 그걸 쭉 설명하면서
뭐라 하냐면 대만에 유학할 때 대만의 헌책방에가 갖고 무슨 책들을 뒤지고 있었는데 거기에 보니까이 팔기군 대한
기록이 조선의 실록에 나와 있다 그 책 이름이 건주기정도기
아는 책이라는 거죠 그래서 그 책을 보고서 역사상 최초의 팔기군 대한
기록을 알았다는데 저는 이걸 이제 미국 학자의 책을 보고서 알게 됐습니다 자 그래서 그 내용을 보면
이런 겁니다 남부주 부라는 그 벼을 갖고 있는
신충이를이 건주 여진 테 보냅니다 근데 여러분 1596년이면 뭡니까 임진왜란 당시입니다 임진 회란
당시에 그래도 선조가 신충 이을 보내는 거죠 건주여진 왜냐면 뭔가가
수상하다고 느꼈었던 거죠 너무 움직임이 이상하다고 해서 보냅니다 그런데이 신원이 신충일이 거기를
다녀오면서 정말 기가 막힌 기록을 남깁니다 우선 신충일 가게 되는
목적은 뭐냐면 이런 겁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건주 여진도 인삼을
재배하고 인삼을 캐고 맨날 그럽니다 너 왜 우리 땅 와서 캐 갔어 이러면서 맨날 투닥투닥하면서 사로
잡아가기도 하고 그런데 이때도 우리 땅에서을 우리 삶을 캤다 그래서 잡아간 조선 사람들을 석방하기 위해서
이제 포로 석방 교섭을 하기 위해서 이제 가는 거죠 그래서 그때에 가서
건주 여진이 막 일러사기 시작했던 초기의 모습을 보기 시작합니다
1596년 12월 21일 날 어 만포진 평안북도 강계 여기에 신충일
도착을 해서 22일 마중나온 여진 족하고 이제 같이 압록강을 건넙니다
그리고 12월 28일까지 일주일 동안 건주
머물면서 노추 누르하치의 최초 기록입니다 노추 아고 나옵니다
누루하치 여러 차례에 만나고 이때 여진족의 군사체제 경제 주택 성각
음식 풍습 등에 대해서 아 정말로 자세하게 써납니다 그리고 그때에 벌써
기록에 나오는 것이 여진족이 만주족이 한족이 조선족들이 포로로 잡혀 오거나
투항을 하면서이 사람들을 어떻게 누르하치가 아우르기 시작하면서 다민족
국가를 건설해 가면서 어 세력을 어 그 키우고 있는지가 정확히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말씀드린 대로 이제 팔기군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정월
4일에 호인 일백여 기가 각각 변기와 양식 두어 알식 가지고 깃대를
세워들고 부문으로 나가고 있었는데 연대 및 방비를 살피러 간다고 하였습니다 기는 청색 황색 적색 백색
흑색으로 각각 두 폭씩 붙여서 만들었는데 길이는 두 자증 되었습니다
오일에도 역시 이와 같이 하였습니다 것이 역사 최초 의 외부인이 팔기군
모습을 보고 기록한 기록입니다 자 그러면 팔기군이 뭐냐 여러분 최종병기
활 이런 영화에서도 보셨겠지만 그 만주 병사들은 뭐냐면 사실은 사냥하는
사람들입니다 원래 만주족이 니루 아는 한 300명 정도의 남자들이 모여서
사는 그런 부족들로 작은 족들 구성이 되 있었던 거죠 근데 이제 누르하치가
뭐냐면 자 우리가이 사냥하는이 기본 우리의 단위를 그대로 군사 조직으로
만들면 되겠다 그래서 전사 300명 플러스 식솔이었던 그거를 이제
니루가메이면 자란이 되고 잘난 열 개가 모이면 구사 즉 기가 되는 거죠
그걸 일기라 그러는 거죠 그래서 1635년에
419개의 니루가메 군사 조직으로 이제 정비를
해 나가기 시작하는 거죠 그리고 자기가 속한기에 따라서 같은 색깔의
어 그 갑옷을 옷을 제복을 입고 같은 그 빨간 술이 달린 철제 투구를 쓰게
하고 그리고 갈대로 만든 방패를 들게 하고 한 사람이 말 두 세 마리
그니까 꼭 말을 한 병사가 말을 꼭 세 마리씩 데리고 다니게 갖고 다니게 했습니다 그리고 제일 강 막강했던
것은 역시 활 활 쏘는 사람들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이성계가 활 쏘는 사람이었고 백발백중 명수
아니었습니까이 만주 족들이 여진족들이 활의 명수였다 거죠 그래서이 사람들이
갖고 있는 활이 한 1m 밖에 안 되는 활이 있데 엄청난 체력과 훈련과
연습이 있어야만 쓸 수 있는 그런 활이다 그럽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최소한 활을 30개씩 들고 다녔었고
그리고이이 만주족의 기병이 여진족의 기병이 팔기군 기병이 제일 유명했던게
뭐 면은 왼손에 말에 고비와 활을 잡고 오른손으로 활을
당기면서 최고 속도로 달리면서도 백발백중 마치는 그러한
특수한 전투력을 갖고 있었답니다 그것이 팔기군이 만주족의 군대를
최강의 군대로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이었습니다 어이 팔기에 배속이
되면은 거기에 이제 땅을 맞고 그기 솔들이 다 배속이 되고 팔기군
병사들은 세금도 안 내고 어 그리고 그 일도 안 하고 그러니까 농사는 안
짓고 그 대신 식솔들 하고 노예들이 이제 다 농사를 짓고 그러면서 자기는 이제 어디까지나 군인으로서 어 국방을
담당하는 그런 역할을 하게 됩니다 자기네만의 문자를 갖추고 그리고
자기네만의 군사 조직을 정비를 하고는 1616년에 드디어
누르하치가 국어를 후금이 칭합니다 옛날에 고려 시대에 일으켰던 금나라
있지 않습니까 계속해서 송 나라랑 싸워서 결국은 양장한 이북을 다 그때에 뺏기는데 금날한테 뺏기는데
자기네가 그 후에라 그러는 겁니다 그 정통성을 자기네가 이어받았다 그리고
이제 칭제 권원 자기도 황제다 그래서 어 그 연호를 천명 그리고 2년 후에
1618년 명에 대해서 선전 포고를 합니다
그러면서 7대 한 일곱개 한이 있다 내가 명을 쳐야만 되는 한이 있다
노골 쪽으로 명을 쳐서 정복해서 대륙을 정복하겠다는 야망을 밝히게
됩니다 자 이렇게 해서 이때에 이때에 이제 조선 역사하고 얽히기 시작
본격적으로 또 얽히기 시작합니다 자이 정도가 되니까 이제 어떡합니까 명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으니까 누치를
이거 가만 놔두면 안 되겠다 치를 제압을 해야겠다 그러면서 임진란 때
조선에 보냈던 양호 장군을 사령관에 임명해서 해서 여진과 예호 부족
하고도 동맹을 다 맺고 그러면서 명나라는 아무래도 자 자신이 없으니까
조선에도 원병 원병을 요구를 합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광해군 테 우리를
도와서 누르 하치를 쳐야 되는 거 아니냐 그랬는데 광해군이 그걸 안 합 안 하려고 무지 내를 씁니다 그래서
엄청나게 꾀를 써서 차일 필 미룹니다 그래서 나중엔 뭐라 그러냐면 아니
황제 칙령이 직접 잊지 않으면 나 못하겠다 그럽니다 그래서 도이 안 돼서 명나라가 진짜로 황제 령지
보내고 나니는 강홍립 장군한테 천명의 군사를 보내서 가서 그럼 어쩔 수
없이 어 도와라 그럽니다 그런데 그때에 광해군이 강홍 님한테 밀지를
내립니다 야 우리거 괜히 지금 명은 쇠퇴 가고 있고 후금은 저렇게 불같이
일어나고 있는데 우리 괜히 편 잘못 썼다가 나중에 큰 화를 당하는데 전쟁하다가 전투하다가 만일에 완전히
저쪽으로 기우는 거 같으면 그냥 투항해 그래서 실제로 천명의 군대를
끌고 강홍립이 가서 연합군을 만들어서 누르하치의 군대하고 도를 하는 것이
1619년 3월 명해서 여진 조선의 47만
대군이 루후 전투에서 누르하치의 5만 군하고 격돌을 하는데 결과는 뭡니까
누르하치의 압승입니다 5만 군이 괴멸을 시켜 버립니다 강훈의 조선
군사도 5천명이나 전사를 하거나 그럽니다 그런데 강홍립은 결국은
누루하치 넘어갑니다 누루 아치는 이때만 하더라도 다 자기한테 항복하고
투항하고 하는 사람을 다 받아줍니다 한족이 됐든 몽골족이 됐든 여진 됐든 다 받아줍니다 그래서 극진하게 강을
어 대접을 하고 그러면서 조선 하고는 아주 친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
거죠 자 그래서 명군을 사후 전투에서 명 조선
해서여진 연합군을 격파한 와치는 점점점점 이제 어 그 쪽으로 영나라
쪽으로 가는 거죠 6월 26일에 개원을 점령하고 9월 3일엔 령을 공략하고 그때까지만 해도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했던 선양을 심양을 1621년 5월에 결국은 어
점령을 합니다 그럼으로써 어떻게 됩니까 누르하치가 요동반도 전체를
손에 집어넣게 됩니다 해서 여진을 야인 여진을 다 다 통합을
하고 복속시키고 그리고는 요동 반도까지 점령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는 1626년 1월 누루 아치가 드디어 어떻게 됩니까
본격적으로 명 군을 공략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영원성이
만리장성에서 가장 어 그 중요했던이 성을 그 점령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만리장성을 넘을 수가 없었습니다 영원성을 점령을 해야지만 만리장성까지
길이 열리는 거고 그래서 산해관을 마지막으로 넘으면 그럼 이제 명예
본토로 중국 본토로 들어가게 되는 거죠 그런데이 영원성을 원숭환이 아는 시대의 명장이
정말 명나라를 마지막까지 지킬 수 있었던 충신이 지키고 있었습니다이 원숭환이 사람은 영원성이 너무
중요하다는 알고서 이미 1622년 완전히 영원성을 개축을 해서이 누르하치 의 여진족의 군대에 맞설
준비를 해왔습니다뿐만 아니라이 사람이 뭐를 하냐면요 홍이포 아는 대포를
두렵니다 여러분 홍이포 아는 대포는 이게 우리가 이때부터 시작해서 사실은
강화도 지을 맡게 된 운요 사건 때까지도 조선하 명이 저 청이
계속해서 쓰던 대포 이름이 왜 홍이 포냐 하면요 이게 포르투갈 사람들이
만들어 준 대포다 근데 왜 만들어 주냐 면요 여러분 명나라는 명나라는
카톨릭의 예수회 신부님들이 일찌감치부터 들어와서 포교를 했지
않습니까 그래서 마태오 리치부 시작해서 아담 샤에 이르기까지
흠천감이 그 우주 달력 이런 거를 그 천체를 연구하는 중요한 직책을
맡으면서 명나라에 뿌리 내리면서 수많은 포교 활동도 하고 그런
천주교도 다 세우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예수 입 입장에서는 그 포트
갈 령인 마카오에 본부를 두면서이 성결을 했던 거고이 사람들은
어떻게해서든지 명나라를 살려야 되는 겁니다 명나라가 자기한테 굉장히 우호적으로 했습니다 그러니까
신부님들이 당시 포르 포르투갈이 갖고 있었던 최첨단 대포들을 주조를 해서
사용 방법과 훈련 병까지 보내 가지고 이거 사용해서 지금 여진족이 일어나고
있는데 그거를 선열을 하라고 보냅니다 근데 그 이름이 홍이 포인
이유가 그때 중국 사람들이 봤을 때이 포르투갈 사람들이 얼굴이 벌거든이 얼굴이 붉은 야만인들의
포라는 뜻입니다 그게이 포르투갈을 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거를 명한테 주는데 이게
이제 명이 멸망하게 되는 또 하나 이유 중에 하난데 원숭환 제외하고 모든 사람들이 야 무슨 이런 서양
오랑캐들이 만든 대포 같은 거를 전투를 하냐 이거 안 된다 이렇게 되는 거죠 그래서 굉장히 거부를
한는데 원숭환 같은 사람들은 이걸 적극적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이제 대포들을 포르트갈 신부님들한테 예수의
신부님한테 부탁을 해서 그걸 다 끌고 와 갖고 영원성에 다 배치를 합니다 근데 영원성에 배치만 하는데 그친게
아니라 원숭환은 연구까지 합니다 뭐냐면 사실은 사르후 전투 때에도
홍이포 그이 있었습니다 대포들이 있었고 특히 조선에 강홍립이 데리고간 군사 중에는 500명의 포병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조선에서도 포가 있었던 거죠 그런데 왜 도대체 사루 전투에서 그 47만 대군이 포까지
갖고 있었는데 도대체 누루하치 멸을 당했냐 이게 전술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냐면 대포들을이 사람들이 쓸 줄을 몰라 갖고 그 대포들을 전투하는데 맨
앞에 보병 기병 다도 더 앞에다가 갖다 배치를 합니다 지금 누루하치
여진족은 기구는 뭡니까 병이에요 한번 뻥 쏘아요 뻥 쏘고 나면 그거를 다시
장전하는 데까지 시간이 걸린 동안에 벌써 기병들이 바람같이 그 돌격을 해 갖고 다
선열을 시켜 버렸다는 겁니다 그랬더니 원숭환이 그걸 알고서 어떡합니까 이번에는 처음으로 대포들을 망루에 다
올려놓습니다 망루에 올려 놓고 나서 전투를 시작합니다 그래서
1626년 누루하치 군대가 드디어 영원성 앞에 나타났을 때에 대포를
쏘기 시작하고 아무리 누르하치의 팔기군이 돌 기병들이 돌벽을 해 오더라도 위에서 다 대포를 쏘고
그리고 가까이 온 온 적군들은 조청으로 활로 사격을 하면서 선열을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어떻게 됩니까 누르하치가 어 6 6일만에 영원성
포위를 풀고 퇴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누르하치의 팔기군
최초의 패배였습니다 그리고 누르하치가 7개월 후에 죽습니다
학자들은 이때 누르하치가 사실은 영원성 전투 때에 부상을 당했고 그
부상 때문에 일어나지 못하고 결국은 죽게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영원성
전투를 승리로 이건 원숭환이 명나라를 더 지켜내는 듯이 보였습니다 어
누르하치는 비록 영원성 공약에는 실패하지만 이제 요동반도를 다
차지합니다 그러니까 원래 살고 있었던 많은 조선족이나 한족이 이런 사람들이
아니면 누르하치가 싫은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가기 시작하냐 면은
노강 서안에 이제 모이기 시작하는 거죠로 모여들기 시작하는데 이때에
여기에 명예 장수 모문룡이라는 사람이 이제 기반을 이제 넓혀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밑으로 이제 막고 모여들기 시작을 하는 거죠 여동 사람들 한족 이런 사람들 모으면서 어 그러면서 계속해서
여진 족하고 싸우니까 명 조정에서는 너무나 반가우니 몸은 영한
공식적인 벼도 내려주기 시작하고 그럽니다 그러면서 모형이 점점점점 점점 세력을 넓혀 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이 산동 반도에서 바로 바다가 암강 어 어까지 가면서 모용이 거기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있는데 그걸 이제 지원을 해 주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제 모문 영은 점점점점
세력이 커지면서 완전히 이제 군벌이 되기 시작하고 사실은 조선 사람들을 약탈을 하기 시작하면서 마을들을 약탈
하기 시작하면서 아주 조선 조정의 입장에서도 아주 큰 골칫거리로 전락을 합니다
그런데 조선이이 모문 영을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 그 못한 이유가 뭐냐면요 모형이 다름이 아니라 조정에
다 얘기를 해서 인조가 책봉을 받도록 해 줍니다 명예 책봉을 받도록 해 줍니다 광해군이 원래 책봉을 받았고
명예 책봉을 받아서 정통성이 있는 왕이었는데 그 사람을 쿠테타로 쫓 쫓아냈고 아직은 정통성이 없고 그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명예 책봉을 받아야 되는데 책봉을 받을 길이 없었는데 모형이 딱 그 역할을
해줍니다 그러니까 전혀 조선은 아무리 모형이 뭐 약탈하고 나쁜 짓을
하더라도 건드린 생각을 하지를 못하면서 모욕의 세력이 점점점점
커지기 그러니까 1626년에 영원성 전투에서
패하고 7개월 후에 누르하치가 죽고 그의 여덟 번째 아들
홍타이지가 대를이어서 적기를 합니다 나중에 청태종이 일컫는 바로 그
청입니다 남한산성을 공략해서 인조가 삼전도의
구력을 당하도록 하는 바로 그 청태종 있니다이 청태종이 어 적기를 하고
나서는 어 이거 모을 제거를 해야 되겠는데 근데 모을 제거하기 전에
어떡합니까 모이 조하고 너무나 밀접하고 관계를 끊도록 하기 위해서
조선을 쳐들어갑니다 그게 바로 정명 란입니다 물하고 너무조
가까워지고 힘들어지게 만들고 물은 저 명나라의 지원을 받고 그러니까 그
관계를 끊어버리려고 조선부터 쳐들어가서 무령 하고의 관계를 끊겠다는 약속을 받고서 다시 청군이
철수한게 그게 정묘 안이었습니다 자 그런데 이때에 이때에
원숭환이 가만 보니까이 물이 이게 거리거든요이 물이 도대체가 지금
편이라고는 하면서 완전히 독자적인 세력을 만들기 시작하고 사방을 약탈하고 그러면서 군벌로 변질이 돼
가면서 저게 도대체 어느 쪽에 충성하는 건지 모르고 너무 문제를 일으킨다고 생각을 해서 원숭환이 모을
불러 가지고는 명제의 재가를 받지 않고 그냥 모을 처단을 해버립니다
그러니까 명 조종에서 이제 난리가 났죠 근데 홍타이지가 딱를
보고선어야 내분이 일어나고 이거 원숭환은 도대체 이거 제대로 지키는
거야 안 지키는 거야 하니까 이때다 하고서는 영원성을 돌아서 공략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사실은 이때 청태종의 군대가 북경성 앞에까지 다
돌아가지고 갑니다 그럴 때 급히 원숭환이 조대수 장군이라는 사람을
시켜 갖고 급히 군대를 보내 갖고 북경 성 바로 앞에서
격퇴를 합니다 그래서 간신히 어 명나라가 또 한숨을 돌립니다 그런데
명 조종이이 실수를 용서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모물 령을 죽인 죄
그리고이 국경 방비를 허술하게 해 갖고 여진족의 군대가
북경까지도 올 수 있게끔 내버렸던 죄를 물어 가지고 능지처참을 합니다 원숭환 그리고 가족들을 다 도력을
하고 노비를 팔아넘기고 그럽니다 그러면서 명나라를 지킬 수
있었던 마지막 지략과 모든 것을 갖췄던 마지막 장수가 저렇게 해서
죽게 됩니다 그러면서 여진족이 드디어 어 이제 본토를 중국 본토를 공략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홍타이지는 자기가 적기를 한 다음에
정말 시를 기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홍타이지가 조 제도를 도입을 합니다
그러니까 제대로 된 나라의 모습을 갖추는 거죠 그러니까 아버지 누르하치가 어 팔기군 만들고 글자를
만들고 하는 거지만 제대로 된 그 국가의 모습을 갖추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이조 병조 호조이 이거를 다 국가의 정부 조직을 완벽하게 어
갖추기 시작합니다 동시에 본격적으로 시작하는게
뭐냐면이 홍이포의 버금가는 최첨단 대포를 자기네도
주조를 하겠다 그런 거죠 우린 역시 팔기군이야 뭐 기병으로 이기면 돼가
아니라 아 첨단 전투는이 전쟁은 이렇게 해야 되는 거구나 하면서
그때부터 뭐냐면 한족이 됐든 조선족이 됐든 기술자들은 다 모아드립니다 어디를 가서 전쟁을 하면은 항상
뭐냐면 기술자 대장장이 이런 사람들은 꼭 아주 아주 중책을 맡긴 뭐냐면
대포를 만들어라 철을 주어야 되고 그걸 가지고 이제 대포를 만들게 합니다 그서 엄청난 재원을 쏟아붓고
인력을 쏟아부으면서 드디어 홍이포의 복음과는
대포를 저 청태종이 만들어냅니다 그러면서
1631년이 대포들이 대량 생산되기 시작합니다 드디어 어 홍타이지가 청태종이 대력 공략할 수 있는 발판을
기술적인 군사적인 발판을 마련합니다대 하성 전투에서 드디어이 대포들을 쓰기
시작합니다 막의 성에 있는 명의 대포들을 자기네가 바깥에서 포격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걸 먼저 초토화를 시킨 후에 군사를 투입을 해서 포일을
해 갖고는 외부로부터의 모든 어 연결을 꿇고 끊고 80일
동안 포일을 하면서 결국은 자기 아버지 누르하치가 함락시키지 못한 그
영원성을 함 킵 그리고는 곧바로 기술를
돌려서 몽골을칩니다 명나라가 몽골을 멸망시킨 다음에
몽고의 그 황실의 후예들이 몽골로 돌아가서 거기서 북원을 세우죠 그
부원을 세운 후회들이 아직도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때에 드디어 어
청태종이까지도 완전히 흡을 합니다 흡수를 합니다 그러니까 여진족을
반도를 흡수하고 그리고 몽골까지 흡수를 합니다 1635년 되면은
이때부터 진이라고 부르지 않고 주라고 이제 부르라 그러면서 우리를 진이라
그러는 사람들 다 죽여버리겠다 그러면서 우리는 지금부터 만주 그 그
여러분 만주라는 건요 만들어낸 공동체입니다
1636년에 드어이 마지황 스칸의 그 전국 옥새를 들고서
무릎을 꿇고 삼계 구고 두레를 하면서 그걸 바치면서 그때부터 칸이 되는
거죠 공식적인 칸의 호칭을 받게 되는 겁니다 칸이 되면서 국호를 후금에서
이제 대청으로 바꿉니다 그리고 나서는 어떡합니까
1637년 드디어 뭡니까 명나라를 쳐야 되는데 마지막 남은게 뭡니까
자기네 후방이 뭡니까 조선이 정묘 호란을 치르고 형제 의를 맺기까지
맺자고 했는데도 여전히 계속해서 명나라 하고 교류를 하거든요 그리고
인조가 들어와서는 숙명 반청 정책을 계속 하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대륙을
정복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어떡합니까 후방을 평정하기 위해서 조선에
쳐들어오는데 그것이 바로 1637년에 병자 혼란입니다 그래서
그 병자 호란을 1개월 만에 이겨버리고 그리고 나서는 50만의 포로를 이끌고 돌아가고 그러고 나서는
그때부터 이제 명의 본격적인 공략에 나섭니다 이때 명예 상황이 어땠습니까
명나라 같이 부강 있던 나라가 멸망하는 데는 물론 황제들의 형편
없는 국정 환관들의 국정농단 이런 것도 있었지만 또 하나가 결정적인게
뭐냐면 이때가 소빙하기가 옵니다 이때 전세계적으로 소빙하기가 옵니다
그러면서 극심한 가은하루 대홍수가 계속해서 일어납니다
중국에서도 1638년 메뚜기 엄청난 메뚜기 때의 습격이
있었고 1639년 1643년 5년 동안 전국적으로
천년도 창고를 합니다 1640년에 41년는 허난 하남에서
11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습니다 양자강 유역의 그 곡창을 극심한
한파고 폭설래 시달리고 고요 그리고 41년의
대가에서 대운하가 바닥을 드러내면서 공물 리고 뭐고 아무것도 수송을 못
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사자가 병사자기개발비용
그 중에 농민 반란군의 수계 중에 하나던 이자성이 아는 사람이이 사람이
자금성을 함락을 시킵니다 그때에 마지막 명예 마지막 황제 숭정제는
가장 뒤에 후원회 아지 도망을 쳤다가 결국은 황후가 자결을 하니까 자기
딸과 자기 후궁들을 죽이고 자기도 거기에 있는 나무에 목매달아서 자결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함으로써 명나라는 16대
26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됩니다 자 그런데
청태종 홍타이지 대륙 정복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1년 전에 1643년에 죽습니다 그리고 어 그의 이복
동생이죠 누르하치의 14번째 아들 도르곤이 청태종의 아들을 형을
이어받게 하고 자기는 이제 섭정으로 앉으면서 실권을 잤습니다 그게 도르곤 있니다 그리고이 도르곤이
드디어 이제이 대륙 정복의 대업을 이루게 됩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영원성은 점령을 했지만 지금 문제는 뭐냐면 산해관 있니다
만리장성의 맨 끝에 해관이이 서해를 만나는 그렇죠 거기에
만나는 지점에 있는 천하제일문이라는 그 그 산해관
있니다이 산해관을 넘어야 되는 겁니다 사실 웬만한 사람이 지키면 이거 못 엽니다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이
산해관 오삼계라는 또 당대의 명장이 지키고 있었고 그러고 있는데 정말로
하늘이 돕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면 자금성을 차고 앉은게이 농민군 반란군
대장 이자성 있니다이 이자성이 오삼계 보고 항복을 하라 왜냐면 오삼계는
아직도 명나라에 충성을 하고 있었던 장수이이 이성이라는 사람이 역시 좀
수가 부족했던 거 같습니다 분모 형제들을 다 잡아다가 결국은 말을 안 듣는다고 다
죽이고 오삼계의 부모의 목을 복경 성의 막에 효수 합니다
그러니까 오삼계가 어떻게 됩니까 로해서 어떻게 됩니까 도르곤 테 가갖고 야 우리 손잡고 같이 이자성을
치자 이렇게 됩니다 그래서 오삼계가 절대로 넘을 수 없다고
말하던 그 천하제일문 산해관을 열어 주면서 그러니까 삼계 군과 도르곤의
군사가 합쳐서이 이자성의 군대를 격파를 합니다 1644년 5월 27일
산하이관 전투에서 이자성을 군대를 격파하고 베이징으로 옵니다이 이자성은
빨리 재빨리 도망을 쳐서 자금성으로 들아와서 자금성을 일주일 동안 약탈을
하고 자금성을 불 지릅니다 그러면서 후퇴를 합니다 그리고 청구는
6월 5일 자 이자성 군대가 빠져나간지 하루 만에 드디어 6월
5일 베이징에 입성을 합니다 그리고는 어 도르곤이 소현세자를 시켜서 아직
심양에 남아 있는 청태종의 아들 진짜
왕이죠을 불러오도록 합니다 그래서 소현세자가 다시 심양으로 가서 청태종의 아들을 데리고 옵니다 그리고
자금성에서 천 단에 올라가서 천자로서 하늘의 아들로서 제사를
지내면서 순치제가 되는 겁니다 이름으로써 노추 불렸던 건주 여진의
부족장이 청태종의 이어서는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꾸 대청으로 바꾸고
카의 칭호까지 받고 그리고 그
동생이 내관을 넘고 그리고 자기 조카를 다시 불러와서
천자로 직위를 하게 합니다 이렇게함으로써 청은 드디어 어 대륙
정복에 어 대망을 어 이루게 됩니다이
순치제의 아들이 바로 강희제 그 강희로 시작해서 강희 웅종 제로
이어지는 강건의 치를면서 청나라가 불같이 일어나는 그런 역사가 전가
되고 나라를 건설한 모든 사람들하고 절친했던 그 소현은 조선으로 돌아가지만 너무 청하고 가깝다이
야만인들 하고 너무 가깝다 그러면서 결국은 아버지한테 독사를 어 당하게
되는 그럼으로써 제가 봤을 때는 조선이 열릴 수 있었던 기회가
사라지는 그런 역사가 또 전개가 됩니다 자 그러면
청이 왜 이렇게 성공을 할 수 있을까 한 도자들이 누루하치
청태종 도르곤 순치 강희재 이렇게 계속 나왔다라는 것도 있고요 계속해서
한게 있습니다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다민족 국가 건설입니다 정묘 호란을 일으키고 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지금 여진족이 다 모든 거를 다 합쳐서 50만이 안 됐습니다 50만
인구 중에서 군대로 동원할 수 있는게 5만 잘해 봐요 만입니다 조금밖에 안
되는 숫자를 가지고는 대륙 정복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어떡합니까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몽골족이 됐든 다른
여진족이 됐든 한족이 됐든 조선족이 됐든 다 결혼을 통해서 하나로
만듭니다 그러면서이 사람들을 다 어울러서 뭐라 그럽니까 만주라는 여진
족만이 안 되니까 몽골 족도 합치고 조선족도 합치고 한족도 요동 있던
한쪽까지 다 합쳐서 만주 족이다 이러는 거죠 충분한 숫자를 가지고
충분한 기술과 별 병력을 가지고 이제 대륙을 정보 합니다 두 번째는 뭐냐면 경제력
있니다 누르하치는 10만 이들을 만 명을 고용을 했다 그럽니다 자기 밑에
신만 이들이 만 명이 있었습니다 정말로 수많은 엄청난 양의을 캡니다
그리고 이걸 가지고 저 명나라 사람들하고 교육을 하는 거죠 명나라 사람들은이 인삼에 아주 미쳐
있었습니다 근데 고려 인삼이 점점점점 줄어들기 시작하고 중국에서 나던 인삼이 다 고갈이 되고 나니까
누르하치가 갖고 있는이 인삼이 굉장히 귀해지는 거죠 명 명예
입장에서는 그 반대 국부를 줄 수 있는게 없으니까 어떡합니까 그때에 명나라가 갖고 있었던 은화를 주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명나라는 전 세계와 교육을 하면서 차 비단 도자기
이런 거를 끊임없이 서양이 사 가니까 엄청난 무역 흑자가 생기는 거고 서양
사람들이은 전부 다 명한테 주고 차나 이런 거를 사가기 시작하는 거죠
그래서 이때에 명나라는 서양 은혜 무덤이라고 불렀어
너무 많이 은이 흘러 들어가니까 명나라로 그런데 더 놀라운게 뭐냐면이 은의
3분의이 여진족한테 넘어갑니다 인사함 값으로 이런 부와 모든 거를 이용해서
청태종 같은 사람이 대포를 만들라 최신 대포를 만들라 그리고 새로운 군대를 만들어
나가면서 강력한 나라를 만듭니다 에서도 말씀드렸듯이이 국가 건설이라는
것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이 시대와 뭐뭐 민족과 지리를 초월해서 다양한
문명을 흡수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다 흡수함으로써 다나 국가를 만들고 그
상업에 밝아서 그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면서 국가를 형성시켜 나가는이
과정은 정말로 큰 교훈입니다네 이번 시간에는
어 여진족이 어떻게 청나라를 건설하게 됐는가 여진족을 통합을 하고 몽골을
정벌을 하고 요동을 정벌을 하고 그러면서 어 산해관을 넘어서 어 중국 대륙을 정복하는 그 드라마틱한 어
장면을 관경을 우리가 어 살펴봤습니다 사실 우리가 청에이 모습을 알아야
되는 이유가 뭐냐면 바로 다음 시간에 이제 예속 논쟁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봐야 볼 차례인데요 예속
논쟁이라는 것은 청나라와 완전히 단절을 하면서 청나라는 어디까지나
오랑게 다라는 정책을 계속해서 유지를 해 가기 위해서 일어나는게 예송
논쟁입니다 저는 정말로 소현세자가 독사를 당하고 그러면서 그 동생 복림
대군이 나라를 이어받으면서 조선이 완전히 개방적이고 무섭게 일어나고
있는 청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해 하고 무너진
명과의 관계만을 이어가겠다 라면서 국으로 들어가게 되는이 과정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우리 역사에 가장 안타까운 장면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면 더대체 왜 청을 배제를 할 수밖에
없었고 무슨 논 논쟁을 하기 위해서 예속 논쟁이 일어나는가 그것을 다음
시간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을
통해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알아보는 한국인의 탄생 지금까지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시간에 [음악]
뵙겠습니다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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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족은 어떻게 청나라를 세웠을까>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17회 요약 및 평론
<요약>
본 강연은 한 줌의 여진족에 불과했던 변방 부족이 쇠퇴하는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동북아시아와 중원을 제패하여 대제국 청나라를 건국한 입체적 배경 및 과정을 다룬다.
명의 쇠퇴와 동북아 정세의 변동
명나라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돕기 위해 1,700만 양에 달하는 막대한 재정과 군사를 지출하여 자국 재정에 큰 타격을 입었다.
정덕제, 융경제, 만력제 등 연이은 황제들의 국정 방치와 환관 정치, 소빙하기로 인한 천재지변(한파, 가뭄, 천연두, 농민 반란)이 겹치며 명은 급속히 쇠락했다.
누르하치의 여진 통합과 근대적 국가 기틀 마련
건주여진의 누르하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원한을 딛고, 명나라 장수 이성량과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세력을 키웠다.
단순히 무력 점령에 그치지 않고, 만주 문자 창제, 정치·경제·군사가 통합된 팔기군(八旗軍) 제도의 창설, 몽골 및 타 부족과의 혼인 정책을 통해 여진족을 완전히 통합하고 후금(後金)을 건국했다.
팔기군에 대한 역사상 최초의 외부 기록은 조선 선조 때 신충일이 남긴 <건주기정도기>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청태종 홍타이지의 개혁과 군사적 부상
영원성 전투에서 명장 원숭환과 서양식 대포(홍이포)에 가로막혀 누르하치가 사망하자, 뒤를 이은 홍타이지(청태종)는 제도적·기술적 혁신을 추진했다.
육조 제도를 도입하여 정부 기틀을 확립하고, 한족과 조선의 기술자들을 포섭하여 자체적으로 최첨단 대포를 대량 생산했다.
몽골(북원)을 복속시켜 대국새를 확보하고 국호를 '대청(大清)', 민족명을 '만주'로 개칭했다. 대륙 침공 전 후방의 불안 요소를 제거하고자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복속시켰다.
산해관 입성과 중원 평정
명나라는 내부 농민 반란군인 이자성에 의해 베이징이 함락되며 멸망했다.
명나라의 국경 방어선인 산해관을 지키던 오삼계가 이자성에게 반발하여 청나라의 섭정왕 도르곤과 손을 잡았고, 산해관 문을 열어줌으로써 청군이 베이징에 입성하고 순치제가 중원의 천자로 즉위했다.
청나라 성공의 핵심 요인
다민족 통합 유연성: 여진족에 국한하지 않고 몽골족, 한족, 조선인을 포섭하여 '만주족'이라는 다민족 국가 공동체를 형성했다.
막대한 경제력: 산삼·모피 무역을 독점하고, 명나라로 유입되던 은(銀)을 대량 흡수하여 대포 주조와 군사력 강화에 필요한 재정을 확보했다.
<평론>
본 강연은 청나라의 건국사를 단지 '소수 민족의 중원 정복'이라는 결과론적 역사에 국한하지 않고, 국가 건설(State-building)의 관점에서 제도·기술·경제·외교가 결합된 원동력을 정밀하게 분석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할 수 있다.
첫째, 국가 건설 및 유지를 위한 핵심 요소로서 '제도적 혁신'과 '기술 수용'의 중요성을 입체적으로 조명했다. 누르하치의 팔기군 창설과 만주 문자 제정, 홍타이지의 육조 체제 도입과 홍이포 자체 주조 등은 청이 단순한 유목 어로 부족의 무력 집단에 머물지 않고 문명국 수준의 시스템을 구축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기존의 오랑캐라는 관념적 평가를 넘어 청나라의 성공을 실용주의적 체제 경쟁력의 승리로 해석한 지점이다.
둘째, 청의 부상을 동북아의 지정학적 무역 구조와 경제적 맥락에서 풀어낸 시각이 매우 탁월하다. 명나라가 서구와의 무역으로 확보한 글로벌 은(銀) 자금이 산삼·모피 상업을 매개로 여진족에게 대량 유입되고, 이것이 다시 군사 기술 개발과 국가 기틀 마련의 자본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은 동아시아 역사를 세계사적 경제 네트워크와 연결하여 이해하도록 돕는다.
셋째, 급변하는 동북아 정세 속에서 조선 외교와 국가적 선택의 한계를 성찰하게 만든다. 조선은 명과의 도덕적·명분론적 의리에 매몰되어 후금과 청의 가파른 성장과 실용적 기술·경제 역량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 청나라의 현실적 개방성과 기술 수용 능력을 보여줌으로써, 훗날 조선이 정묘·병자호란을 겪고도 청을 배척하며 쇄국과 명분론으로 치달았던 역사적 아쉬움(소현세자의 비극 등)을 명확하게 대비시켜 보여준다.
===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17회
<여진족은 어떻게 청나라를 세웠을까?> 요약 + 평론
이번 강의의 중심 질문은 <5만 명 안팎의 작은 여진 세력이 어떻게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중국 대륙을 지배하는 청나라를 세울 수 있었는가>이다. 함재봉은 이를 단순한 군사정복사로 보지 않고, <국가 건설·군사조직·문자·경제·인재 흡수·정체성 형성>이 결합된 과정으로 설명한다. 동시에 이 과정을 조선과의 관계, 특히 병자호란과 이후 조선의 선택 문제로 연결한다.
요약
1. 명나라의 쇠퇴와 여진의 부상
함재봉은 먼저 명나라 말기의 쇠퇴를 설명한다. 환관정치, 재정문제, 내부 반란과 외적 압박이 겹치면서 명의 통치력이 약해지고 있었다. 반면 만주의 여진 세력은 명과 조선 사이의 변방에서 세력을 키우기 시작한다.
조선과 여진은 오랫동안 매우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었다. 여진족 일부는 조선에 귀화하거나 조선과 교역했고, 조선인과 혼인하기도 했다. 함재봉은 이를 통해 여진을 조선과 완전히 낯선 타자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2. 누르하치의 등장
강의의 핵심 인물은 누르하치다.
누르하치는 16세기 후반 여러 여진 부족을 통합하기 시작한다. 함재봉은 누르하치의 성공을 단순한 전투력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결혼과 동맹, 포섭과 군사력을 함께 사용해 주변 세력을 흡수했다. 즉, 무조건 죽이고 정복하는 방식이 아니라 적을 자기편으로 만들고 인재와 병력을 끌어들이는 방식이었다.
1583년경부터 세력을 넓힌 누르하치는 1590년대 후반부터 주요 여진부족들을 차례로 병합하고, 1616년 후금을 세운다.
3. 독자적인 문자와 제도의 창설
함재봉은 누르하치가 국가를 만들기 위해 단순히 군대만 조직한 것이 아니라 <문자와 행정체계>를 만들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여진어를 기록할 수 있는 만주문자를 만들고, 국가 조직을 정비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변화였다. 부족연맹 상태에서는 구두명령과 개인적 충성으로 운영할 수 있지만, 큰 국가를 만들려면
법,
명령,
세금,
군사,
행정
을 기록하고 전달할 수 있는 체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함재봉은 이 점을 근대 일본에서 국가문서와 행정제도를 정비한 것과 비슷한 <국가 만들기>의 과정으로 본다.
4. 팔기제의 중요성
누르하치의 가장 유명한 제도는 <팔기제>이다.
함재봉은 팔기제를 단순한 군사편제가 아니라 <군사·행정·사회 조직이 결합된 체계>로 설명한다.
초기에는 네 개의 기에서 출발해 여덟 개의 기로 확대되었다.
각 기는 일정한 색과 깃발로 구분되었고, 구성원들은 전쟁 때 군인이 되고 평시에는 생산과 생활을 담당했다.
즉,
군사조직
+
사회조직
+
행정조직
이 하나로 묶인 것이다.
5. 팔기제의 장점
함재봉은 팔기제가 작은 여진 인구로 훨씬 큰 명나라와 싸울 수 있었던 핵심 이유 가운데 하나라고 본다.
첫째, 조직력이 강했다.
둘째, 기병 중심의 전투력이 뛰어났다.
셋째, 정복한 사람들을 기존 조직에 흡수할 수 있었다.
넷째, 만주족뿐 아니라 몽골족·한족까지 편입시킬 수 있었다.
즉, 팔기제는 단순히 혈통 중심의 여진군대가 아니라 확대되는 제국을 흡수할 수 있는 조직이었다.
6. 여진족은 혼자 싸우지 않았다
강의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함재봉은 청나라 건설을 <소수 여진족이 수억 중국인을 군사력으로 굴복시킨 사건>이라고 단순화하지 않는다.
누르하치와 후계자들은
여진족,
몽골족,
한족,
조선계 인물
등 다양한 사람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기술자, 관리, 군인, 포병 전문가 등이 청나라 건설에 참여했다.
따라서 청은 처음부터 다민족 제국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7. 명나라의 포병 기술도 흡수한다
여진은 뛰어난 기병을 가지고 있었지만 성을 공격하는 데는 약점이 있었다.
그래서 명나라와 전쟁하면서 한족 기술자와 포병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함재봉은 특히 홍이포 같은 서양식 대포가 중요했다고 설명한다.
즉 청나라의 성공은
<전통적인 여진 기병>
+
<한족의 행정·기술>
+
<서양식 포병기술>
을 결합한 결과였다.
이것이 함재봉이 말하는 <개방적인 국가 건설>의 한 사례다.
8. 누르하치의 명나라 공격
1618년 누르하치는 명나라를 상대로 본격적인 전쟁에 나선다.
강의에서는 그가 <칠대한>을 내세워 명나라를 공격했다고 설명한다.
1619년 사르후 전투에서 명·조선 연합군을 크게 격파하면서 여진의 군사력이 국제적으로 확인된다.
조선은 강홍립이 이끄는 군대를 파견했지만 결국 후금에 항복한다.
함재봉은 이를 <조선이 명과 여진 사이에서 얼마나 어려운 외교적 위치에 놓여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사건으로 본다.
9. 영원성 전투와 누르하치의 패배
그러나 누르하치는 계속 이기기만 한 것이 아니다.
1626년 영원성 전투에서 명장 원숭환이 서양식 대포를 이용해 후금군을 격퇴한다.
누르하치는 부상을 입고 몇 달 뒤 사망한다.
함재봉은 이 전투를 중요하게 다룬다. 이유는 여진이 강한 기병만으로는 명나라를 완전히 무너뜨릴 수 없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청은 이후 바로 이 기술적 약점을 보완하게 된다.
10. 홍타이지의 계승
누르하치 사후 홍타이지가 권력을 이어받는다.
함재봉은 홍타이지를 단순한 후계자가 아니라 국가의 성격을 바꾼 지도자로 평가한다.
홍타이지는
국가명을 후금에서 청으로 바꾸고,
여진이라는 명칭을 만주로 바꾸며,
몽골과 한족을 더 적극적으로 편입하고,
행정제도를 정비하고,
대포와 새로운 군사기술을 흡수한다.
즉 누르하치가 <정복의 기반>을 만들었다면 홍타이지는 그것을 <제국의 체제>로 바꿨다는 것이다.
11. 조선과의 관계 악화
초기에는 조선과 후금 사이에 어느 정도 타협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은 명나라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지 못했다.
함재봉은 특히 인조반정 이후 조선의 대외정책이 문제를 악화시켰다고 본다.
광해군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비교적 실용적인 균형외교를 시도했지만, 인조정권은 친명정책을 강화했다.
후금과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명과의 의리를 강조했고, 결국 후금과의 충돌 가능성이 커졌다.
12.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이어지는 구조
강의 후반은 점점 조선 문제로 이동한다.
홍타이지는 조선을 완전히 적으로 돌리기보다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다.
그러나 조선은 명에 대한 의리와 성리학적 명분론 때문에 청과의 관계를 동등하게 인정하기 어려웠다.
함재봉은 여기서 다시 <현실과 명분의 충돌>이라는 자신의 중요한 주제를 끌어낸다.
조선은 국제정세가 바뀌고 있음에도 명나라 중심의 질서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13. 청나라 건국의 핵심은 ‘흡수 능력’
함재봉은 누르하치와 홍타이지의 성공을 다음 요소로 정리한다.
<군사적 혁신>
+
<효율적인 조직>
+
<문자와 행정>
+
<다민족 통합>
+
<외부 기술의 적극적 수용>
+
<경제적 기반 확보>
특히 중요한 것은 <자기보다 발전한 상대의 기술과 인재를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함재봉에게 이것은 메이지 일본과도 통하는 성공의 원리다.
14. 청나라는 ‘여진족만의 나라’가 아니었다
후금과 청이 성장하면서 점차
만주팔기,
몽골팔기,
한군팔기
가 만들어진다.
즉 청은 혈통적으로 순수한 만주족국가가 아니라 여러 민족을 조직적으로 흡수한 제국이 되었다.
함재봉은 바로 이 점에서 청나라가 단순한 유목민족의 중국 정복이 아니라 하나의 새로운 국가 건설 프로젝트였다고 본다.
15. 명나라의 붕괴는 내부붕괴와 외부공격이 겹친 결과였다
강의는 1644년 이자성의 농민반란과 명나라 멸망까지 이어진다.
숭정제는 자금성이 함락되자 자살한다.
명나라가 먼저 내부에서 붕괴하고, 산해관에서 오삼계가 청군을 끌어들이면서 청군이 북경에 들어가게 된다.
함재봉은 이것을 중요한 점으로 본다.
청이 단순히 정면전쟁으로 명나라 전체를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명 내부의 정치·경제적 붕괴>
+
<농민반란>
+
<명 장수들의 이탈>
+
<청의 군사력>
이 결합되어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16. 도르곤과 순치제
홍타이지 사후에는 어린 순치제가 황제가 되고, 도르곤이 실권을 행사한다.
청은 북경에 입성한 뒤 중국의 기존 행정체제를 상당 부분 유지하면서도 만주족 지배질서를 결합한다.
이를 통해 소수 만주족이 거대한 중국을 통치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든다.
함재봉의 결론은 청나라의 성공이 단순한 <무력의 승리>가 아니라 <조직·제도·인재·기술을 결합한 국가경영의 승리>였다는 것이다.
평론
이번 17회는 함재봉의 역사관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강의다. 겉으로는 청나라 건국사지만 실제 주제는 다시 <성공적인 국가 만들기란 무엇인가>이다.
함재봉은 누르하치와 홍타이지를
<작은 부족을 강한 조직으로 만들고>
<외부 인재와 기술을 적극적으로 흡수하며>
<혈통보다 조직과 충성을 중심으로 사람을 통합하고>
<필요하면 제도와 정체성까지 바꾼 지도자>
로 묘사한다.
이것은 그가 앞서 메이지 일본을 설명할 때 사용한 논리와 매우 비슷하다.
즉 함재봉에게 역사적으로 성공한 국가는 <전통을 순수하게 지킨 나라>가 아니라 <외부의 좋은 것을 빠르게 흡수하여 자기 것으로 만든 나라>다.
이 강의의 강점은 청나라를 단순한 <오랑캐의 중국 정복>으로 보지 않고 복합적인 다민족 국가건설 과정으로 설명한다는 데 있다. 팔기제, 만주문자, 한족 기술자와 포병, 몽골과의 동맹, 오삼계의 역할까지 연결함으로써 청의 성공을 구조적으로 설명한다.
다만 함재봉식 설명에는 한 가지 반복되는 경향이 있다.
<성공한 국가 = 현실적이고 개방적이며 외부 기술을 흡수한 국가>
<실패한 국가 = 명분에 갇히고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국가>
라는 대비가 점점 강해진다.
그 결과 청은 매우 능동적이고 합리적인 국가로, 조선은 점차 수동적이고 이념에 갇힌 국가로 묘사될 위험이 있다.
또한 팔기제를 효율적인 국가조직으로 강조할 때 그 조직이 정복과 폭력, 강제이주, 약탈에도 사용된 군사체제였다는 점은 상대적으로 약하게 다뤄진다. 다민족 통합 역시 오늘날 의미의 관용적 다문화주의와는 전혀 다르며, 명확한 위계와 군사적 복종을 전제로 한 제국적 통합이었다.
그럼에도 이번 강의에서 가장 중요한 통찰은 충분히 남는다.
<청나라는 강한 기병만으로 중국을 정복한 것이 아니다. 작은 여진 세력이 문자·행정·군사조직·대포·인재흡수·다민족 통합을 통해 자신보다 훨씬 큰 국가를 운영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들어냈기 때문에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17회는 다음 회의 <예송논쟁>으로 넘어가기 위한 배경 설명이기도 하다. 함재봉이 보고 싶은 대비는 점점 분명해진다.
<청은 국제질서와 권력의 현실에 맞춰 자신을 계속 변화시켰는데, 조선은 왜 명나라가 사라진 뒤에도 명에 대한 의리와 성리학적 정통성 문제에 그렇게 집착했는가?>
이 질문이 17회에서 18회로 넘어가는 핵심 연결고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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