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 서울대 인문 강의 시리즈 6
박훈 (지은이)민음사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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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서울대 인문 강의' 6권.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박훈 교수의 <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일본 역사에서 메이지 유신은 실로 극적인 변혁이었다. 메이지 유신을 통해 적극적인 서양 문물 수용과 과감한 체제 개혁을 단행한 일본은 동양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를 이룩하며 강대국으로의 도약을 준비할 수 있었다.
왜 유독 일본은 이를 신속히 받아들였고, 큰 파탄 없이 사회변혁을 이루었던 것일까? 대체 그 시기 일본 열도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일본사 연구의 권위자 서울대 동양사학과 박훈 교수는 막부 말기에서 메이지 유신에 이르는 정치 변혁의 다층적인 역사를 탐색하며, 19세기 일본의 극적인 도약이 가능할 수 있었던 조건들을 추적한다.
당대 일본인들의 대외 인식, 구체제인 막부 세력과의 영향 관계, 서구화에 앞선 유학(儒學)의 영향까지 살피며 메이지 유신의 전모를 파헤치는 이 책은,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 대한 단선적인 시각과 편견을 깨는 날카로운 역작이다.
목차
머리말
1장 도쿠가와 체제의 구조와 특징
1. 정치체제의 성격: 막부, 번 조정
2. 사무라이 신분과 쇄국 체제
| 더 살펴보기 | 많은 인구, 더 많은 도시인구
2장 일본은 어떻게 서양 문물을 신속히 수용할 수 있었나
1. 서양의 외압과 ‘과장된 위기의식’
2. 위기에 대한 대응, 해외웅비론(海外雄飛論)
3. 신속한 개항 결정의 비밀
| 더 살펴보기 | 해외 유학생과 사절단 파견
3장 도쿠가와 막부는 왜 패했는가
1. 자기 혁신 하는 ‘앙시앵 레짐’, 도쿠가와 막부
2. 막말기 도쿠가와 막부의 정치적 약점
| 더 살펴보기 | 막부보다는 일본! 가쓰 가이슈의 결단
4장 유학의 확산과 ‘사대부적 정치 문화’의 형성
1. 도쿠가와 시대 유학의 위치와 19세기의 확산
2. ‘사대부적 정치 문화’란 무엇인가
| 더 살펴보기 | 사무라이들의 독서 모임, 회독(會讀)
5장 ‘사화(士化)’하는 사무라이와 메이지 유신
1. 사무라이의 ‘사화(士化)’
2. ‘학적(學的) 네트워크’와 학당(學黨)의 출현
3. 상서(上書)의 활성화와 그 정치적 역할
4. 군주 친정(親政)의 요구와 실현
| 더 살펴보기 | 당파 혐오와 근대 동아시아의 정당정치
맺음말
주(註)
더 읽을 거리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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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첫문장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臣秀吉)는 1598년에 죽었다.
군사적 무경험은 나태한 사회에는 평화 지속에 대한 환상을 심어 주지만,
18세기 말의 일본처럼 외부 정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사회에는 곧 닥칠지 모르는 미지의 사태에 대한 과잉 반응을 일으키기 쉬웠다 - swingtime
위기의식을 갖게 되면 그에 대한 대응은 두 가지로 나타날 수 있다.
하나는 그 위기를 피하기 위해서 더욱 폐쇄적으로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위기를 정면 돌파하여 오히려 스스로 팽창하는 것이다 - swingtime
P. 7 위기감은 퇴영적인 쇄국으로 나아가게도 하지만, 반대로 위기를 타파하기 위한 적극적인 체제 변혁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19세기 일본은 후자를 감행했다. 위기감은 그 후로도 근대 일본을 움직이는 동력이 되었다. - 세류
P. 8 그러나 ‘강렬하고도 과장된 위기감‘은 신속히 체제 개혁을 수행하고 자국의 독립을 유지하는 데에는 큰 역할을 한 반면, 곧바로 외부에 대한 거친 공격으로 이어졌다. 그것이 이웃 국가들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침략욕으로 나타난 것은 잘 아는 대로이다. - 세류
P. 8 역사를 생각할 때 우리는 흔히 변혁 세력에만 관심을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결국은 그들이 승리하여 지금의 사회를 만들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구체제(앙시앵 레짐)와 그 지배자들의 영향력은 대부분의 경우 최후의 순간까지 변혁 세력보다 강력했다. 청조가 무너지는 순간에도 쑨원보다는 청 조정 지배자들의 영향력이 강했을 것이며, 김옥균보다는 고종이나 조선 조정 대신들의 힘이 더 셌을 것이다. 구체제의 각 행위자들이 구질서 내에서 어떤 행동과 조치를 취하는가, 즉 어떤 역사적 선택을 하는가 하는 것은 그 사회의 향방에, 또 변혁 세력의 운명에도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접기
P. 10 일본은 18세기 말부터 급속히 유학이 확산되었다. 19세기는 아마도 일본 역사상 가장 유학(중심은 주자학)이 번성한 때일 것이다. 그런데 이 유학은 병영국가인 도쿠가와 체제와는 잘 맞지 않는 사상이다. 도쿠가와 체제에서 유학은 ‘위험 사상‘이 될 수 있었다. 유학이 확산됨에 따라 이 사무라이 체제는 동요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서양의 충격‘이 있기 전에 ‘유학적 영향‘에 따른 체제 동요가 이미 시작되었다. 즉 ‘일본적 사회 → 유학적 영향(동아시아 국가 모델의 수용 시도) → 서양의 충격 → 근대화‘라는 궤도를 걸었다는 것이다. 접기
P. 35 번들은 변혁 과정에서 사회적 중간 단체 역할을 했다. 번이 중간 단체로서 존재했기 때문에 일본은 대대적인 변혁 과정에서도 사회질서가 파국적으로 붕괴되지 않고 어느 정도의 치안이 유지될수 있었다. 조선이나 청의 경우 이 중간 단체가 없거나 취약했다는 점이 변혁을 추진하지 못한 하나의 원인으로 지적되는 걸 생각해 보면이 점은 주의할 만하다. 더구나 번의 국가화가 진행되면서 번 정부와 가신단, 영민 사이의 관계가 더욱 긴밀해짐에 따라 중간 단체인 번의 영향력도 점점 증대되어 갔다. 접기
P. 37 그러나 18세기 후반 이래 유학이 급속히 확산되자 세상은 점점 쇼군 권력의 근거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을 요구하게 되었다. 막부는, 쇼군은 도대체 정치적으로 어떤 존재인가? 국왕인가, 아닌가? 왜 도쿠가와씨는 정권을 잡고 있는가? 천명인가? 그렇다면 교토의 천황은 어떤 존재인가? 막부와 그의 관계는 뭐라고 설명할 수 있는가? 막부는 이런 질문들에 대답해야만 했다. 접기
P. 69 ‘강력한 소수파‘는 서양 열강의 제계 진출을 사실 이상으로 공격적으로 묘사하여 제시했다. 실제로 서양 열강이 세계 각지를 무차별적으로 침략하기 시작한 것은 산업혁명의 성과가 쌓이고 증기선과 신형 무기들이 발명된 이후, 즉 19세기 중반 이후부터인데, 이들은 18세기 말, 19세기 초에 이미 서양을 무자비한 세계 정복자로 보고 있었다. 접기
P. 70 18세기에는 중국이나 조선, 서양과는 구별되는 일본과 일본인의 정체성에대한 담론이 활성화되었다. 이른바 ‘원(原)민족주의‘의 성립인데, 그중에서 중요한 것들이 천황의 혈통이 만세일계(혈통이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는 것)로 이어져 역성혁명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외국 군대에 국토가 유린된 적이 없고 지금까지 독립을 보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중략) 이것은 일본이 다른 나라들과 달리 ‘순결‘하다는 이미지를 만들어 내었고 따라서 자칫하면 이 순결을 더럽힐 수도 있다는 강한 공포감, 경계심을 조장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 국가나 민족에 대한 자의식이 강해질수록 그것의 훼손과 상실에 대한 위기감도 커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순결한 일본‘ 이미지의 형성은 기독교에 대한 공포를 강화했다. 접기
P. 71 기리시탄이 이단 한 명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당시 대부분의 일본 지식인들은 기독교를 서양이 끼칠 최대의 해악, 일본을 망국으로 이끌 최고의 적으로 규정하였고, 기독교에 대한 이 같은 과도한 공포가 이들의 위기의식을 부채질했다. - 세류
P. 72 위기의식을 갖게 되면 그에 대한 대응은 두 가지로 나타날 수 있다. 하나는 그 위기를 피하기 위해서 더욱 폐쇄적으로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위기를 정면 돌파하여 오히려 스스로 팽창하는 것이다. ‘강력한 소수파‘들은 일본도 서양에 맞서 해외로 진출, 즉 웅비(雄飛) 해야만 한다고 역설했다. 여기에는 순수하게 경제적으로만 진출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대개는 그와 함께 군사적·정치적 진출도 주장하는 자들이 많았다. 접기
P. 84 일본 지식인들은 이미 18세기 후반부터 서양이 세계 각지를 식민지화하고 있는 현상을 잘 알고 있었으며, 결국 세계는 몇몇 강대국의 권역으로 구분될 것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좋든 싫든 따라갈 수밖에 없는 시대의 대세라고 보았다. 따라서 식민지가 되기 싫으면 스스로 강대국이 되어 하나의 권역을 구축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실로 20세기 전반기 대동아공영권의 기원이 되는 발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은 서양이 식민지를 통해 큰 이득을 보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무주지(無主地: 국제법상 어느 국가의 영토로도 되어 있지 않은 지역)의 경우 먼저 점령하지 않으면 다른 국가가 차지할 것이라는 인식이 해외 팽창론을 더욱 부채질했다. 접기
P. 87 청과 전쟁을 벌인 영국이 다음에는 일본을 침략할 거라는 소문도 파다했다. 전쟁 당사자인 청이나 조선이 아편전쟁으로 그다지 큰 위기의식을 갖지 않았던 데 비해 일본 전역은 아편전쟁에 대한 갖가지 뉴스와 소문으로 끓어올랐다. - 세류
P. 89 막부에 서양 정보가 풍부하게 축적되어 있었기 때문에, 막부의 많은 우수한 역인들이 개국주의자로 변해 갔다. 적지 않은 정권 핵심 분자들이 개항과 무역을 시대의 대세로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것은 일본의 신속한 개항 결정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이다. - 세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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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박훈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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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동양사학과에서 학사· 석사를, 도쿄대에서 박사학위를 마친 뒤, 국민대 일본학과를 거쳐 현재 서울대 역사학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19세기 일본과 동아시아의 정치체제 비교, 일본인의 대외 인식과 내셔널리즘의 형성 과정을 연구해왔다. 저서로 《위험한 일본책》, 《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메이지 유신과 사대부적 정치문화》 등이 있다.
최근작 : <한국인의 눈으로 본 근대 일본의 역사>,<동아시아의 앙시앙 레짐과 근대>,<사료로 보는 아시아사> … 총 33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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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분야 : 고전 1위 (브랜드 지수 7,202,197점),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3위 (브랜드 지수 1,434,716점), 일본소설 3위 (브랜드 지수 978,729점)
출판사 제공 책소개
19세기 동양에서 유일하게
근대화를 이룬 나라,
일본의 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서울대 인문 강의 시리즈 제6권,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박훈 교수의 『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가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일본 역사에서 메이지 유신은 실로 극적인 변혁이었다. 메이지 유신을 통해 적극적인 서양 문물 수용과 과감한 체제 개혁을 단행한 일본은 동양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를 이룩하며 강대국으로의 도약을 준비할 수 있었다. 왜 유독 일본은 이를 신속히 받아들였고, 큰 파탄 없이 사회변혁을 이루었던 것일까? 대체 그 시기 일본 열도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일본사 연구의 권위자 서울대 동양사학과 박훈 교수는 막부 말기에서 메이지 유신에 이르는 정치 변혁의 다층적인 역사를 탐색하며, 19세기 일본의 극적인 도약이 가능할 수 있었던 조건들을 추적한다. 당대 일본인들의 대외 인식, 구체제인 막부 세력과의 영향 관계, 서구화에 앞선 유학(儒學)의 영향까지 살피며 메이지 유신의 전모를 파헤치는 이 책은,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 대한 단선적인 시각과 편견을 깨는 날카로운 역작이다.
■ 일본의 도약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19세기 동양에서 유일하게 근대화를 이루었던 나라, 일본. 그 계기가 되었던 메이지 유신은 실로 극적인 변혁이었다. 메이지 유신을 통해 적극적인 서양 문물 수용과 체제 개혁을 단행한 일본은 동양에서 가장 먼저 근대 국민국가를 수립하며 강대국으로의 도약을 준비할 수 있었다. 19세기 말까지 미국과 서유럽의 몇 개국 정도를 제외하고, 산업혁명과 헌정(憲政)을 함께 이룬 나라는 유라시아 대륙 맨 끝의 일본이 유일했다. 조선 땅의 근대국가 수립을 꿈꾸던 김옥균은 그것을 목도했던 당대의 대표적인 지식인이었다.
“1884년 33세의 김옥균이 구체제와 격투하고 있을 때(갑신정변), 일본은 성공적으로 근대 국가를 건설하고 있었다. 일본에 건너간 김옥균의 눈에 일본의 성공은 휘황찬란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가? 김옥균은 이 물음에 답을 얻기도 전에 암살당하고 말았고, 김옥균 이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 물음을 계속 던졌다.” (6쪽)
일본 역사를 바라보는 한국인이라면 두 나라의 역사를 비교하며 한번쯤은 던져 보게 되는 질문일 것이다. 메이지 유신을 대하는 한국인의 심정은 그 어느 국민보다 복잡하다. 한편에서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의 역사에 분노하며 그 원인을 메이지 유신에서 찾기도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우리와 별로 다를 바 없던 일본이 어떻게 그런 변혁에 이를 수 있었는가 놀라워하며 궁금증을 던지기도 한다. 왜 유독 일본은 이를 신속히 받아들였고, 큰 파탄 없이 사회변혁에 성공했던 것일까? 대체 그 시기 일본열도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일본사 연구의 권위자 서울대 동양사학과 박훈 교수는 그 동안의 연구와 고민을 바탕으로 이 물음에 대한 답을 탐색하며, 일본의 막부 말기에서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지는 역사를 조망한다.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메이지 유신은 당대 일본 지배층의 일부 세력이 전근대의 잔재인 도쿠가와 막부 세력을 무너뜨리고, 천황을 옹립한 새 정부를 수립하여 적극적인 근대화 정책을 편 사건이라는 점까지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하루아침의 쿠데타로만 이루어진 변혁은 아니었다.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지는 막부 말기의 시기는 일본의 정치 주체들이 서로 다양한 영향을 주고받은 다채롭고 역동적인 공간이었다. 이 책은 ‘메이지 유신’이라는 변혁의 뇌관이 폭발하기까지, 과거로부터 이어진 당대 일본 정치사의 다층적이고 입체적인 단면들을 분석한다.
■ “세계는 지금 바야흐로 전국시대(戰國時代)”:
19세기 일본 지식인들의 ‘과장된 위기의식’
“지금 세계는 모두 7웅(雄)으로 나누어져 주나라 말기의 이른바 7웅이라는 것과 약간 차이가 있지만 그 형세는 매우 비슷하다. 러시아와 튀르크는 토지가 넓고 군대가 강하며 땅을 접하고 자웅을 다투는 것이 진(秦)과 초(楚)의 형세이다. 만청(滿淸: 청나라)은 부강하고 동방에 있으니 제(齊)와 같다. 무굴 제국과 페르시아는 그 중간에 있으니 한(韓)과 위(魏)이다. 신성 로마 제국은 명위(名位)가 있어 여러 나라(諸蕃)가 존숭하기는 하지만 사실은 프랑스, 에스파냐, 영국 등 여러 나라와 백중지세이다. 큰 나라는 한(韓), 위(魏), 작은 것은 송(宋), 위(衛), 중산(中山)일 뿐이다. 또한 신주(神州: 일본)가 만청의 동쪽에 있는 것은 마치 연(燕)이 제(齊)와 조(趙)에 가려져 있는 것과 같다.” (57쪽)
당시 일본인들은 어떻게 서양 문물을 일찍부터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일까? 일본의 지식인들이 세계정세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해외로의 팽창을 주장하기 시작한 것은 메이지 유신이 발발하기 한참 전의 일이었다. 그들은 당시 열강들이 배를 타고 각국으로 진출하는 세계정세를 군웅이 할거하던 중국 고대의 ‘전국시대’에 비유하며, 일본이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 이러한 흐름에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이처럼 위기를 부르짖는 이들의 목소리는 비록 다수는 아니었지만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북방에는 러시아라는 교활한 나라가 있어, 신주(神州: 일본)를 빼앗으려고 노리며 항상 남하하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아아, 한탄스럽게도 사람들은 작은 지혜에 우쭐대고 있어 러시아인의 큰 지혜에 미치지 못합니다. 작은 새의 좁은 식견으로 대붕(大鵬)이 하는 일을 비웃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장작의 비유 그대로이니, 쌓아 놓은 장작 위에 불을 붙이고 그 위에서 자면서 아직 불길이 올라오지 않았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 일본의 모습이 바로 이러합니다.” (55쪽)
재미있는 것은 당시 이들의 이러한 위기의식이 상당히 과장된 것이었다는 점이다. 시간이 흐른 후 이 위기감이 정말로 현실화된 시점에서 이 주장들을 보면 역사의 오묘함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아직 이 시기에 서양 열강은 일본을 침략할 의사도 능력도 없는 상태였으므로, 실제로 당시 외세의 압력은 이들이 생각했던 것만큼 위협적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과장된 위기의식’은 일본 사회가 일찍부터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고 개혁을 촉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 책은 당시 이런 주장을 펼친 지식인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인용하고 그들의 세계 인식을 분석함으로써, 19세기 일본 사회의 담론과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해 준다.
■ 전근대 일본의 ‘앙시앵 레짐’,
도쿠가와 막부의 혁신과 몰락
1867년 10월 14일, 에도 막부의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메이지 천황에게 정권을 돌려준다는 대정봉환(大政奉還)을 선언했다. 일본 역사에서 수백 년 동안 막부에게 주어졌던 권력이 다시 천황에게로 넘어가고, 새 시대로 가는 길의 서막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그의 이러한 선택으로 구체제인 막부 세력은 변혁 세력과의 전면적인 충돌은 피하게 되어, 일본이 메이지 유신으로 가는 길목에 막대한 부담을 남기지 않았다.
우리는 역사를 생각할 때 흔히 변혁 세력의 활동에만 관심을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저자는 구체제의 각 행위자들이 구질서 내에서 어떤 행동과 조치를 취하는가 하는 것은 역사의 고비에서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고 지적하며, 이처럼 메이지 유신은 전근대 일본의 ‘앙시앵 레짐’이었던 도쿠가와 막부의 여러 역사적 선택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밝힌다. 결과적으로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한 공로의 반은 도쿠가와 막부에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19세기 일본의 과장된 위기의식은 막부의 서양 문물 수용과 자기 개혁으로 이어졌다. 저자는 19세기 중반은 막부 타도의 역사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막부 개혁의 역사이기도 했다고 말한다. 또한 막부는 여전히 막강한 힘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결정적인 순간에 스스로의 해체를 용인하여, 일본의 근대화를 앞당기게 되었다고 평가한다.
일반적으로 유신 직전 전근대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는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고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발버둥친 무능한 정부였다는 평가가 많다. 그러나 저자는 각국의 구체제와 비교했을 때 도쿠가와 막부가 시대의 흐름에 대처하는 보기 드문 역동성을 지니고 있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비교적 건재했던 막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스스로 몰락할 수밖에 없었는지, 천재적인 정치가라는 평판이 자자했던 막부의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어째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는지를 당시 정세의 맥락에서 차근차근 설명한다.
■ ‘서구화의 충격’만이 전부인가:
‘유학’의 영향과 메이지 유신
지금까지 메이지 유신을 이해하는 기존의 입장은 근대에 들이닥친 서양의 충격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것이었다. 즉 ‘일본적 사회→서양의 충격→근대화’라는 공식이다. 일면 타당하지만, 이 책에서 저자는 동아시아 속 일본 사회의 특수성에 주목하며, 메이지 유신으로 가는 정치 변혁 속에 전통적으로 동아시아 국가들의 근간이 된 사상인 ‘유학(儒學)’이 미친 영향 역시 있었음을 밝힌다. 일본이 근대로 나아가는 길목에 놀랍게도, 일반적으로 전근대의 구태(舊態)라고만 여겨지던 유학의 영향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저자의 이러한 문제의식이 유학 자체에 근대적인 요소가 있었다는 주장은 아니다. 다만 유학적 질서 속에 있었던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과는 달리, 사무라이 사회라는 병영국가 체제였던 일본 사회에서 유학은 전통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오히려 체제를 흔드는 ‘위험 사상’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19세기 일본에 뒤늦게 불어 닥친 유학 열풍은 일본 사회의 모습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군인인 사무라이들이 칼을 차고 유학 경전을 강독하는 독서 모임에 드나들고, 정치와는 인연이 먼 존재였던 그들이 ‘사대부’로서의 정체성을 학습해 가며 정치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기 시작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이러한 현상이 기존의 체제를 어떻게 뒤흔들고, 메이지 유신으로 가는 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또 메이지 정부 수립 이후 근대적 정치체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해서 이 책은 흥미롭게 풀어나간다. 이를 통해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상식과 다르게 역사 속에 숨어 있던, 당대 일본 사회의 독특한 역동성을 발견하게 한다.
■ 질문에 다시 질문하기:
‘근대화 원인 찾기’의 한계
프랑스 혁명이 유럽 여러 나라에 영향을 미쳤듯이, 일본의 메이지 유신은 조선의 김옥균을 비롯한 이웃국가의 지식인과 지도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준 사건이었다. 이후 한국 역시 숨 가쁘게 달려온 근대화의 역사를 거치며 발전과 상처를 거듭해 온 오늘날, 단순히 ‘일본의 성공적인 근대화 모델’이라는 프레임으로 메이지 유신을 바라보는 시각은 이제 낡은 논의가 되어 버렸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 박훈 교수는 거꾸로 이것은 우리가 메이지 유신을 객관적으로, 또 지적으로 관찰하고 분석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메이지 유신을 하나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서 다층적이고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유용한 시각들을 제공해 준다.
‘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이때까지 이 물음을 던지는 시각은 오로지 ‘근대화’라는 가치에만 집착해서, 일본인들이 근대화에 ‘성공’할 수 있었던 단선적인 원인 찾기에만 급급한 것이었다. 우리가 당시 이루지 못한 근대화를 그네들은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서 일찍 이룰 수 있었는가 하는 물음일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것이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준다. 가령 2장에서 지적하는 19세기 일본 지식인들의 ‘과장된 위기의식’은 역사상의 결과가 단순히 인간의 노력이나 능력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여러 착오와 우연이 결합하여 나타난, 가능성의 산물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이러한 ‘과장된 위기의식’이 도쿠가와 막부의 자기 개혁으로 이어졌고, 구체제였던 막부의 선택이 오히려 메이지 유신으로 가는 길에 신속한 다리를 놓아 주었다.(3장) 또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지는 정치 변혁 속에 그것과 별 상관이 없을 것 같은 ‘유학’의 영향이 있었다는 점 역시, 그동안 근대화에 대한 단선적인 역사 인식에 가려 엿보지 못했던 역사의 새로운 결을 발견하게 한다.(4, 5장) 그러면서 저자는 근대로 이어지는 근대 이전의 동아시아사를 근대화라는 가치 기준 하에서 바라보는 연구 방법론을 비판하며, 근대화라는 강박에서 벗어난 동아시아사의 특수한 경험을 복원하고자 했다.
“역사학자들은 오랫동안 유럽 근대를 가치 기준으로 전제하고 전근대를 연구해 왔다. 특히 ‘근세’나 ‘근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에게 이런 연구 태도는 피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 그리하여 유럽 이외 지역의 역사학자들은 자신들의 역사가 특수한 것이 아니고 보편적일 수 있다는 것, 또는 후진적인 것만은 아니고 선진적인 점도 있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연구 분야에서 ‘근대적(유럽적) 요소’를 찾기 위해 정열을 쏟아 부었다. (...)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유럽의 근대화 과정에서 기반을 둔 설명틀이 아니라 ‘근세’ 동아시아 정치사의 전개 과정에 대한 면밀한 검토 위에서 만들어진 설명틀을 바탕으로 ‘근세’ 동아시아 정치사를 포괄적으로 구축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136~139쪽)
메이지 유신으로 이르는 과정은 단순히 ‘근대화에 매진한’ 과거로만 환원될 수 없는 다양한 요소들이 복합된 역사이다. 때문에 이 책은 과거로부터의 연속성 위에서 당대 일본 정치사의 다종다양한 지점들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바라보려고 노력했다. 또한 ‘과장된 위기의식’ 등 일본의 근대화를 촉진한 요소들이 일본 내에서는 긍정적으로 작용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외부에 대한 반사적인 침략주의로 나타나기도 했다는 점 역시 아울러 경계하며 지적하고 있다. 이를 통해 오늘날의 시각에서 메이지 유신을 새롭게 탐색하는 이 책은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 대한 단선적인 시각과 편견을 깨는, 일본 근세·근대사를 다룬 한국 연구자의 날카로운 역작이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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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번체제를 확립한 도쿠가와 막부는 체제 유지를 위해 쇄국정책을 지속하였다. 서구의 위협에 직면한 막부는 동아시아 끝에 고립된 섬이라는 지리적 조건, 네덜란드를 통해 얻고 있던 정보를 활용하여 ‘신속히’ 개항으로 선회하였다. 이후 도쿠가와 막부가 무너지고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화에 이르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사화(士化)한 사무라이들이 새롭게 만들어낸 정치 문화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1603년 성립한 도쿠가와 막부의 정치체제는 ‘복합국가’라고도 하는 막번체제였다. 막번체제는 일종의 봉건제인데, “각 번이 막부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대신 막부는 번의 행정권, 경찰권, 징세권을 인정해”주었다. 막부는 ‘무가제법도’라고 하는 일련의 제도를 통하여 번을 견제하였다. 그렇지만 막부의 권력에는 한계가 있었고 막말 막부와 조정, 막부와 번의 갈등은 이러한 느슨한 정치체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또한 막말의 갈등은 사무라이 신분의 변동과도 관계가 있었다. 본래 지주였던 사무라이들은 도시(조카마치)에 모여 살게 되면서 봉록을 받아 생활하였는데, 화폐경제가 발전하자 사무라이의 실질임금은 하락하였다. 막부 권력의 한계, 불만을 품은 사무라이, 이렇게 체제 내 갈등이 잠재한 상황에서 막부는 체제를 위협하는 기독교를 탄압한 후 쇄국정책을 단행하였다.
도쿠가와 막부는 미일화친조약을 통하여 쇄국정책을 포기하고 개항하였다. 막부는 당시 청과 조선보다도 서구의 위협을 더 크게 받아들였다. 1780년대 러시아가 에조치로 접근했을 때, 지식인들은 ‘과장된 위기의식’을 드러내 보였고 아편전쟁에서 청이 패하였다는 소식은 막부 내의 쇄국론이 힘을 잃는 계기가 되었다. 이같이 당시 막부가 느낀 위기의식이 막부로 하여금 신속한 개항을 가능하게 하였는데 이 위기의식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저자가 내놓은 가설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먼저, 동아시아 끝에 위치한 데에서 오는 고립감이다. 제국의 그늘 아래서 안보상의 도움을 기대할 수 있었던 조선과 비교해볼 때 일본의 고립은 두드러진다. 두 번째로 네덜란드로부터 매년 받는 ‘풍설서’를 통해 세계정세를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 점이 막부로 하여금 서구의 위협에 직면하여 신속히 개항을 결정하게 하였다.
개항 이후 도쿠가와 막부는 서구의 제도를 받아들이는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부는 체제에 내재한 권력의 한계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졌다. 이제 일본은 본격적으로 근대 국가 건설에 들어서게 된다. 이 단계, 즉 도쿠가와 막부가 무너지고 메이지 유신을 통해 서구화하는 과정에서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유학의 영향이다. 본래 막부는 엄격한 서열을 중시하여 정치참여를 제한하였는데, 유학의 부산물로서 ‘사대부적 정치 문화’가 학당과 번교를 통해서 확산되자 사무라이들은 집단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며 ‘병영국가’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렸다. 유학은 이렇게 막부를 무너뜨리고, 일본이 서구 문화를 수용하게끔 하는 ‘가교’ 역할을 한 뒤 서구화의 물결에서 ‘자살’하였다.
느슨한 정치체제였던 도쿠가와 막부는 개항 이후 사화(士化)한 사무라이들의 집단 상소로 무너졌고 이후 일본은 “19세기 동양에서 유일하게 근대화를 이룬 나라”가 되었다. 그렇지만 메이지 유신이 가능했던 이유가 사상으로서의 ‘유학’보다도 ‘사대부적 정치문화’였다면 유학이 중요하긴 했던 것이었을까, 그 ‘정치문화’는 막번체제에 잠재한 체제 내 특징이 아니었을까? 이러한 질문은 유학, 당시 조선과 청, 일본의 체제를 비교하는 공부로 나아가게끔 한다.
알료샤 2023-05-30 공감 (13) 댓글 (0)
<메이지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는 <메이지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의 후속편 같은 느낌이다. 즉 후자가 메이지유신으로의 길을 연 사무라이들을 소개한다면 전자는 어떻게 그들이 메이지유신을 성공하게 만들었는지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기존의 연구들은 일본이 위기 속에서 급속한 서구화를 통해 근대화에 성공했다고 평하지만 박훈 교수는 다른 답을 내놓는다. 그의 오랜 연구 주제이기도 한 메이지유신은 중국과 조선에서 유행하던 유학의 영향을 받은 사무라이들이 ‘사화(士化)‘함으로써 성공의 길을 열었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 한 가지 요인만 중요했다고 평하지는 않는다. 18~9세기를 거치면서 일본 사회에 유학이 확산되고 사대부적 정치 문화가 형성됨으로써 사무라이들이 ‘학적(學的) 네트워크’를 결성한다거나 상서(上書) 문화를 활성화시키는 등의 노력이 이어졌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된 사무라이들은 군주의 친정을 요구한다거나 좀 더 넓은 세계관 등을 형성하게 되었는 데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메이지유신이라는 놀라운(?) 혁명을 성공하게 되었다. 이런 주장은 기존의 개설서나 교과서에는 전혀 실리지 않은 새로운 내용이어서 흥미로웠다.
개인적으로 메이지유신을 추동하고 설계한 이들이 사무라이들이었으며 이들이 유학 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그런데 왜 유학이 부흥한 중국과 조선은 식민지의 길을, 일본은 제국주의의 길을 걸었을까? 앞 두 나라는 유학에 얽매여 사회는 보수화되고 쇄국이라는 극단의 길을 반면, 일본에서의 유학은 일종의 도구여서 거기에 모든 것을 걸고 극단화하지 않았다. 즉 일본은 유학에서 배운 바대로만 살지 않았며 이를 서구화에도 적용하였고 또한 주체적으로 나아갈 바를 체득하여 근대화에 성공한 것이다. 메이지유신을 모두 긍정적으로만 바라볼 수는 없다. 그 속에도 부정적 요소는 있었다. 하지만 이후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하게 된 배경만큼은 우리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조선의 많은 근대 지식인들이 그렇게 부러워하고 배우고 싶어했던 메이지유신을.
knulp 2022-01-17 공감 (1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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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좋고 안좋고를 떠나서, 지금까지 꽤나 많은 쇄를 찍어낸 것으로 아는데, 오류같은 것좀 수정했으면 좋겠다. 43쪽에 보면 ˝1543년 다네가시마섬에 사비에르가˝왔다고 하는데, 사비에르는 1549년 가고시마에 온거다. 1543년에는 포르투갈인이 중국인 배를 타고 다네가섬에 온 것임.
싱클레어 2019-09-16 공감 (10) 댓글 (0)
일본 메이지 유신에 이르기까지 일본 사회에 있었던 다양한 변화의 조짐에 관한 흥미로운 서술. 낯선 일본 사회/정치용어와 고유명사가 가득 등장하지만 의외로 쉽게 읽힌다.
아라 2018-02-17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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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술술 읽힌다. 저자 나름의 생각이 담긴 책이다.
shuita 2022-01-15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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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일본이 메이지 유신에 성공하여 서구화에 성공하여 근대국가로 나아갈 수 있는 이유의 기반을 설명한 입문자들을 위한 책
꿈꾸는사나이 2017-04-01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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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이지만 자신이 연구했던 내용을 잘 담고 있는 책이다. 대중서답게 쉽게 쓰여졌고 기존에 신경쓰지 않았던 '유학화'에 관심갖는다는 점에서 고전관념을 깨고 있다.
ktf_ycraah 2014-12-09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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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메이지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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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의 세계는 대부분이 서유럽의 몇 개국과 미국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은 서양인과 함께 상륙한 천연두로 인구의 4분의 3이 몰살하고 남은 이들은 서양인들에 의해 서서히 절멸해갑니다. 커피와 목화같은 대규모 플랜테이션을 운영하는데 일손이 모자르니까 수 천만명의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잡아와 죽을 때까지 노예로 부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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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식민지가 되지 않은 지구상의 마지막 지역은 아시아네요. 머지않아 동아시아의 맹주인 청나라 또한 서양의 침탈에 갈가리 찢겨나가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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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동아시아에서 벌어지는 식민지화과정에 특이한 나라가 등장합니다. 동아시아를 수천년동안 중화사상의 질서로 지배하던 청나라가 바로 극동아시아의 한 섬나라인 일본에게 처참하게 박살이 나게 됩니다. 일본은 청일전쟁을 전후로 오키나와. 대만.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면서 중화사상에서 벗어나 아시아의 중심이 되고자 합니다. 만주사변으로 자신의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우고 중일전쟁을 시작으로 중국영토 3분1이상을 점령하지요. 거대한 중국이 곧 항복하기 일보 직전에 도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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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일본은 미국과도 개전을 합니다. 태평양전쟁이죠. 그 유명한 진주만 기습으로 말이죠. 이때 일본의 지배영역은 서쪽으로는 태국에서부터 동쪽으로는 남태평양 전역에 이르럽니다. 그야말로 ‘제국‘에 해당하는 위세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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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죠? 무엇이 일본을 그렇게 강성하게 했을까요? 기저귀나 차고다니고 머리모양도 기괴하며 할복운운하는 야만적 문화의 미개한 섬나라로 알려졌던 일본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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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원인으로는 빠른 근대화라고 합니다. 비서구권에서 최초로 근대화에 성공한 것이죠. 대단합니다. 어떤 의미에선 굉장한 나라죠. 인종우월주의에 빠져 있던 서양을 러일전쟁으로 깜짝 놀라게 해주었죠. 결론적으로는 조선을 비롯한 이웃국가들에게는 불행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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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유신은 이 기적과도 같은 근대화의 원인입니다. 비서구권에서의 유일한 근대화를 이루게 한 메이지유신에 대한 연구는 그래서 중요하고도 흥미롭지요. 이 책은 박훈 교수의 기존의 알려진 메이지유신의 흐름에 한 가지 가설에 대한 주장과 근거입니다. 그점이 흥미로운데요. 바로 유학적 영향이 박훈 교수의 가설입니다. 근대화의 원인에 ‘서양의 충격‘ 뿐만 아니라 유학의 영향으로 이른 바 ‘칼 찬 사대부‘의 등장이 메이지유신의 성공에 일조했다는 겁니다. 일리있고 납득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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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훈 교수의 이 주장을 통해 무엇보다 고무적인 것이 하나 있습니다. 메이지유신이 다른 혁명과 같이 피지배층의 봉기만이 아니라는 겁니다. 혁명이지만 엘리트층이나 지배층의 주도하에도 이루어진다는 선례가 바로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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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유신 #박훈 #민음사 #책은내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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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강 2018-08-20 공감(2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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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적 정치문화’가 만들어낸 메이지 유신
막번체제를 확립한 도쿠가와 막부는 체제 유지를 위해 쇄국정책을 지속하였다. 서구의 위협에 직면한 막부는 동아시아 끝에 고립된 섬이라는 지리적 조건, 네덜란드를 통해 얻고 있던 정보를 활용하여 ‘신속히’ 개항으로 선회하였다. 이후 도쿠가와 막부가 무너지고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화에 이르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사화(士化)한 사무라이들이 새롭게 만들어낸 정치 문화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1603년 성립한 도쿠가와 막부의 정치체제는 ‘복합국가’라고도 하는 막번체제였다. 막번체제는 일종의 봉건제인데, “각 번이 막부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대신 막부는 번의 행정권, 경찰권, 징세권을 인정해”주었다. 막부는 ‘무가제법도’라고 하는 일련의 제도를 통하여 번을 견제하였다. 그렇지만 막부의 권력에는 한계가 있었고 막말 막부와 조정, 막부와 번의 갈등은 이러한 느슨한 정치체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또한 막말의 갈등은 사무라이 신분의 변동과도 관계가 있었다. 본래 지주였던 사무라이들은 도시(조카마치)에 모여 살게 되면서 봉록을 받아 생활하였는데, 화폐경제가 발전하자 사무라이의 실질임금은 하락하였다. 막부 권력의 한계, 불만을 품은 사무라이, 이렇게 체제 내 갈등이 잠재한 상황에서 막부는 체제를 위협하는 기독교를 탄압한 후 쇄국정책을 단행하였다.
도쿠가와 막부는 미일화친조약을 통하여 쇄국정책을 포기하고 개항하였다. 막부는 당시 청과 조선보다도 서구의 위협을 더 크게 받아들였다. 1780년대 러시아가 에조치로 접근했을 때, 지식인들은 ‘과장된 위기의식’을 드러내 보였고 아편전쟁에서 청이 패하였다는 소식은 막부 내의 쇄국론이 힘을 잃는 계기가 되었다. 이같이 당시 막부가 느낀 위기의식이 막부로 하여금 신속한 개항을 가능하게 하였는데 이 위기의식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저자가 내놓은 가설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먼저, 동아시아 끝에 위치한 데에서 오는 고립감이다. 제국의 그늘 아래서 안보상의 도움을 기대할 수 있었던 조선과 비교해볼 때 일본의 고립은 두드러진다. 두 번째로 네덜란드로부터 매년 받는 ‘풍설서’를 통해 세계정세를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 점이 막부로 하여금 서구의 위협에 직면하여 신속히 개항을 결정하게 하였다.
개항 이후 도쿠가와 막부는 서구의 제도를 받아들이는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부는 체제에 내재한 권력의 한계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졌다. 이제 일본은 본격적으로 근대 국가 건설에 들어서게 된다. 이 단계, 즉 도쿠가와 막부가 무너지고 메이지 유신을 통해 서구화하는 과정에서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유학의 영향이다. 본래 막부는 엄격한 서열을 중시하여 정치참여를 제한하였는데, 유학의 부산물로서 ‘사대부적 정치 문화’가 학당과 번교를 통해서 확산되자 사무라이들은 집단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며 ‘병영국가’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렸다. 유학은 이렇게 막부를 무너뜨리고, 일본이 서구 문화를 수용하게끔 하는 ‘가교’ 역할을 한 뒤 서구화의 물결에서 ‘자살’하였다.
느슨한 정치체제였던 도쿠가와 막부는 개항 이후 사화(士化)한 사무라이들의 집단 상소로 무너졌고 이후 일본은 “19세기 동양에서 유일하게 근대화를 이룬 나라”가 되었다. 그렇지만 메이지 유신이 가능했던 이유가 사상으로서의 ‘유학’보다도 ‘사대부적 정치문화’였다면 유학이 중요하긴 했던 것이었을까, 그 ‘정치문화’는 막번체제에 잠재한 체제 내 특징이 아니었을까? 이러한 질문은 유학, 당시 조선과 청, 일본의 체제를 비교하는 공부로 나아가게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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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료샤 2023-05-30 공감(1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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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메이지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는 <메이지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의 후속편 같은 느낌이다. 즉 후자가 메이지유신으로의 길을 연 사무라이들을 소개한다면 전자는 어떻게 그들이 메이지유신을 성공하게 만들었는지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기존의 연구들은 일본이 위기 속에서 급속한 서구화를 통해 근대화에 성공했다고 평하지만 박훈 교수는 다른 답을 내놓는다. 그의 오랜 연구 주제이기도 한 메이지유신은 중국과 조선에서 유행하던 유학의 영향을 받은 사무라이들이 ‘사화(士化)‘함으로써 성공의 길을 열었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 한 가지 요인만 중요했다고 평하지는 않는다. 18~9세기를 거치면서 일본 사회에 유학이 확산되고 사대부적 정치 문화가 형성됨으로써 사무라이들이 ‘학적(學的) 네트워크’를 결성한다거나 상서(上書) 문화를 활성화시키는 등의 노력이 이어졌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된 사무라이들은 군주의 친정을 요구한다거나 좀 더 넓은 세계관 등을 형성하게 되었는 데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메이지유신이라는 놀라운(?) 혁명을 성공하게 되었다. 이런 주장은 기존의 개설서나 교과서에는 전혀 실리지 않은 새로운 내용이어서 흥미로웠다.
개인적으로 메이지유신을 추동하고 설계한 이들이 사무라이들이었으며 이들이 유학 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그런데 왜 유학이 부흥한 중국과 조선은 식민지의 길을, 일본은 제국주의의 길을 걸었을까? 앞 두 나라는 유학에 얽매여 사회는 보수화되고 쇄국이라는 극단의 길을 반면, 일본에서의 유학은 일종의 도구여서 거기에 모든 것을 걸고 극단화하지 않았다. 즉 일본은 유학에서 배운 바대로만 살지 않았며 이를 서구화에도 적용하였고 또한 주체적으로 나아갈 바를 체득하여 근대화에 성공한 것이다. 메이지유신을 모두 긍정적으로만 바라볼 수는 없다. 그 속에도 부정적 요소는 있었다. 하지만 이후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하게 된 배경만큼은 우리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조선의 많은 근대 지식인들이 그렇게 부러워하고 배우고 싶어했던 메이지유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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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ulp 2022-01-17 공감(1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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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 박훈
도쿠가와 막부는 다이묘들에 대한 통제력과 방대한 관료제를 갖춘 중앙집권 정권이었다. 또한 막부는 전국 쌀 생산량의 25%를 차지하고, 경제 요충지인 간토와 기나이 지역, 특히 오사카를 장악했으며, 나가사키 직할령의 해외무역과 전국의 주요 광산을 운영했다. 막부는 "광산 지배권을 바탕으로 화폐를 발행하였는데 일본의 중앙정부가 통일 화폐를 발행한 것은 고대 이래 수백 년 만이었다. 그만큼 도쿠가와 막부의 전국 지배권이 단단했던 것이며 중앙정부로서의 신용이 높았다는 얘기다." 이 안정성은 나중에 막부에 독이 되는데, 19세기 막부 재정이 악화될 때 과감한 개혁을 실시한 번들과 달리, 막부는 "금화, 은화의 순도를 낮추는 안이한 방식"을 되풀이했다.(21)
"각 번이 막부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대신 막부는 번의 행정권, 징세권, 경찰권을 인정해 주었다. 이 때문에 각 번은 막부의 강한 규제를 받기는 하지만 흡사 별개의 국가 같은 성격을 띠었다. 그래서 도쿠가와 체제를 '복합국가'라고 말하기도 한다."(32) 번들 간에는 경쟁 의식이 있었는데, 19세기 내우외환의 시기에 접어들자, "생존을 위한 부국강병의 경쟁, 개혁의 경쟁"이 시작된다. 복수의 정치체가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노력했다는 점이 대내외 위기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었던 원인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또한 번이 "중간 단체로서 존재했기 때문에 일본은 대대적인 변혁 과정에서도 사회질서가 파국적으로 붕괴되지 않고 어느 정도의 치안이 유지될 수 있었다."(34-5)
18세기 후반 이래 급속히 확산된 유학은 "쇼군 권력의 근거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을 요구"하였다. 막부는 여기에 "천황에게서 대권을 위임받아 전국을 통치"한다는 '대정위임론(大政委任論)'을 내놓는다. 막부가 정당성의 원천을 "독자적으로 창출해 내지 못하고 천황에게서 구한 논리는 양날의 칼이었다." 실제로 19세기 들어 막부는 스스로 '대정'을 '봉환'하게 되는데, 이것이 "1867년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행한 대정봉환(大政奉還)이다."(37) 이러한 변혁은 개항 이후 외국 무역이 시작되면서, 생필품 물가의 급등으로 치명타를 입은 "하급 사무라이와 도시 빈민"들이 대거 혁명의 대열에 뛰어든 것이 주요 원인이었다.(41)
일본이 서양 문물을 신속히 수용하게 된 것은 1780년대 "북쪽의 에조치, 즉 지금의 사할린과 훗카이도 일대"에 러시아인들이 등장하면서부터이다. 당시 일본은 약 200년간 군사적 위기 상황이 전무했는데, 서양의 발달된 항해술과 선박 제조 능력을 목도하면서, "일본의 국방 강화와 내정 개혁을 촉구하는 지식인들의 주장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게 된다."(53) 러시아가 에조치를 점령하기 전에 일본이 "직접 통치해야 한다는 주장이 18세기 말부터 제기되었고, 19세기 전반 서양인들이 류큐에 출몰하자 류큐에 대한 지배 강화를 주장하는 목소리도 높아져 갔다. 훗날 메이지 정부가 오키나와와 훗카이도를 각각 '남북의 자물쇠'로 삼은 전략은 이때 이미 마련된 것이다."(68)
"일본 지식인들은 이미 18세기 후반부터 서양이 세계 각지를 식민지화하고 있는 현상을 잘 알고 있었으며, 결국 세계는 몇몇 강대국의 권역으로 구분될 것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좋든 싫든 따라갈 수밖에 없는 시대의 대세라고 보았다. 따라서 식민지가 되기 싫으면 스스로 강대국이 되어 하나의 권역을 구축"해야만 했다. 특히 "무주지(無主地, 국제법상 어느 국가의 영토로도 되어 있지 않은 지역)의 경우 먼저 점령하지 않으면 다른 국가가 차지할 것이라는 인식이 해외 팽창론을 더욱 부채질했다."(83-4) 막부 내에 쇄국파가 우세한 상황에서, 아편전쟁의 발발과 참담한 결과는 부국강병파의 영향력을 크게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의 양이론자들은 부국강병을 국가 목표로 삼는 것을 혐오했지만, 일본 양이론자들의 목표는 적극적 개국론자들과 마찬가지로 부국강병이었다." 장래에 도래할 개국을 위해 일본은 전면 쇄신을 단행해야 했지만, 그들이 보기에 "당시 일본은 태평의 잠에 취해 깨어날 줄 몰랐고, 막부는 태평을 유지하려고 '굴욕 외교'를 거듭했다." 양이론자들은 내정개혁을 위해 '양이의 수단화'를 주장했다. 여기에는 "대선(大船) 제조 금지의 해제, 참근교대의 완화, 농병제(農兵制) 채용(당시는 사무라이만이 군인이 될 수 있었다)" 등이 있었으며, 그들이 추구한 "가장 급진적인 개혁은 천황 친정(天皇 親政)이었다."(97)
일찍이 유학 등 학문이 발달했던 미토 번은 "천황의 관점에서 역사를 기록한 <대일본사(大日本史)>를 편찬하는 등 존왕(尊王)의 풍조가 강했다. 19세기 들어 내우외환이 심각해지자, 천황을 일본이라는 국가의 핵심에 위치시키고 그 존재를 신성시하는 국체(國體)라는 관념"이 만들어지는데, 이를 미토학(水戶學)이라고 한다. 미토 번은 정치적 야심이 큰 도쿠가와 나리아키를 중심으로 "존왕양이론(尊王攘夷論)의 메카"가 된다.(120-1) 여기에 막부의 핵심 세력인 후다이번들이 "탁월한 로비 능력으로 막부의 재정 원조를 받아내 안일하게 재정 문제를 해결"하는 동안, 도자마 번 같은 신흥 세력들은 번정 개혁(藩政 改革)을 대대적으로 벌여나갔다.
유학의 확산이 사무라이들을 정치화했다는 점도 중요한 개혁 동인이 되었다. 그들은 "점점 국가 대사, 천하 대사에 관심을 갖고 발언"하면서, "단순한 군인도 서리도 아닌 사(士)가 되어 갔다(사무라이의 '사화士化')." 이들은 무사의 정체성을 간직한 채 여전히 칼을 차고 무를 존중했지만, "학적 네트워크에 기반하여 정치조직을 만들고(학당學黨), 상서를 이용하여 정치투쟁을 벌였다. 또 자신을 천하 공치(天下 共治)의 담당자로 여기고 군주의 친정(親政)을 요구했다." 뜻밖에도 이 '사대부적 정치 문화'가 "19세기에 무인(武人)의 나라 일본에서 출현하여, 병영국가 도쿠가와 체제를 동요시키기 시작한 것이다."(135-6)
"막번 체제의 근간은 월소(越訴, 직속상관을 뛰어넘어 그 윗선에 곧바로 의견을 표명하는 것)와 도당(徒黨)의 금지이다." 사대부적 정치 문화를 수용한 사무라이들은 "상서를 통해 월소의 금지를, 당파를 통해 도당의 금지를 무력화"하면서, 가신단 내의 엄격한 서열을 뒤흔들었다.(180) 18세기 후반부터 각 번 정부들은 "재정 위기와 사회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할 것을 번사(藩士)들 뿐 아니라 민중에게까지 요구했다. 이에 따라 일반 사무라이와 상층 영민(領民)들이 봇물같이 의견을 내놓았다." 과거제가 없던 일본에서 상서는 인재 발탁의 수단으로 이용되었고, 이것은 "막부 정치에 도자마 번, 신번 등의 세력이 간여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196-7)
18세기 말부터 서서히 진행된 정치적·사상적 면에서의 일본 사회의 유학화는 "도쿠가와 체제를 무너뜨리고 메이지 유신 직후 정점을 맞은 듯이 보였다. 그러나 전성기는 짧았다. 대외적 위기감 속에서, 특히 1871년 폐번치현(廢藩置縣) 쿠데타 이후 일본 사회는 급속히 서구화, 즉 문명개화·부국강병 노선으로 달려갔다."(217) 학적 네트워크에 의존한 당파 정치는 "자신을 군자당으로 인정하고 상대 당을 소인당으로 매도"하던 구양수 식의 붕당론 앞에서 사회적 낭비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사상 흐름 속에서 일본은 메이지 초기 정당 무용론과 '올바른 유일 정당론(公黨)', 군국주의 일본의 대정익찬회(大政翼讚會) 등 군주독재 체제를 옹호하고 보완하는 길로 들어선다.(2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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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na35 2017-06-19 공감(5)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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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유신이 가능했던 일본 근대사회 분석
아, 이렇게 재밌을 수가!
오랜만에 별 다섯 개를 줘 본다.
"너무너무너무" 재밌다.
<현대 일본을 찾아서>를 읽으면서 일본 근대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했었는데 그 책은 번역서이기도 하고 솔직히 내 수준에서 좀 어려웠다.
반면 이 책은 나 같은 일반 대중의 수준에 딱 맞춰 너무나 쉽고 재밌게 그러면서도 깊이 있게 설명해 준다.
이런 교수들의 강의를 듣는 학생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서울대 인문 강의 시리즈는 하나같이 정말 수준이 높고 무엇보다 지루하거나 어렵지 않다.
교양인들을 위한 강의로 딱 맞는 시리즈라 적극 추천한다.
신상목씨의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일본사>와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세계사>를 읽으면서 일본 사회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커 갔고 그 정점이라 할 수 있는 메이지 유신에 대한 확실한 이해를 도와주는 책이다.
사실 제목 때문에 어려울까 걱정했는데 누구나 쉽게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수준이라 더 좋다.
230 페이지 정도 되는 분량인데 딱 두 시간 밖에 안 걸렸다.
번역서가 아닌 책들은 가독성이 있어서 참 좋고 저자의 문장력도 읽기에 아주 좋다.
페리 제독의 방문 이전부터 일본에서는 개항에 대한 충분한 사회적 논의가 있었다.
한국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에 붙어 있고 삼면이 바다인 반도국이었기 때문에 중국의 안보 우산에 안주하여 대외 침략에 대한 걱정없이 19세기 말까지 국제정세에 크게 신경쓰지 않고 쇄국정책 속에서 무사히 지낼 수 있었다.
반면 일본은 중국에 기댈 수도 없는 나라였고 오히려 임진왜란 이후 명이 쳐들어 올까 걱정했을 정도였으며 바다로 둘러싸여 러시아나 서양 함대의 공격 가능성에 매우 예민해진 상태였다.
무사의 나라이니 외적의 공격 가능성에 대해 조선보다는 훨씬 민감했을 것이고, 이미 포르투갈이나 네덜란드 등과 무역을 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서양 세력이 세계를 지배해 가고 있는 상황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페리 제독이 내항하기 전부터 러시아가 극동 정책으로 캄차카 반도까지 진출하자 이미 조정은 러시아 침공 가능성에 대해 민감해진 상태였다.
지나친 기우였지만 혹시나 하는 가능성으로 위기론이 고조된 가운데 페리 제독이 강압적으로 통상을 요구했으니 막부는 개항을 결정하고 나라의 체제를 변혁하는데 힘을 기울인다.
이 막부의 태도 변화가 일본 근대화의 핵심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앙시앵 레짐, 즉 프랑스 왕정이나 조선 왕실 같은 구체제는 보통 개혁에 저항하고 혁명이나 외세에 의해 사라지고 만다.
그런데 도쿠가와 막부는 서양의 개항 압력에 대해 쇄국으로 일관하지 않고 체제 변혁을 시도하면서 유럽에 유학생을 보내고 해군을 창설하며 서구의 동향을 살피기 위해 많은 정보를 수집한다.
그리고 개항 이후 사쓰마와 조슈 번의 내전을 치루면서도 15대 마지막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천황에게 권력을 돌려주는 대정봉환을 단행한다.
저자는 이 결단을 매우 높이 평가한다.
어찌 보면 도쿠가와 막부의 권력을 반납했으니 그가 가문을 멸망시킨 것이지만 역사적으로는 매우 높이 평가받을 만한 결단이었던 셈이다.
이로써 프랑스 혁명이나 신해 혁명처럼 큰 피를 흘리지 않고 내부의 동요를 최소화시켜 근대화에 매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준다.
저자는 권력층에 있는 이들의 개혁적 선택을 매우 높게 평가한다.
반체제의 개혁 노력도 중요하지만 권력층에 있는 이가 개혁 쪽을 택한다면 그 영향력은 훨씬 크고 개혁에 따른 혼란도 최소화할 수 있다.
일본 엘리트들은 이 시대적 조류 변화에 아주 능동적으로 바람직한 방향으로 대처했던 것이다.
저자는 이런 변화에 대해 18세기 이후 일본 무사들 사이에 퍼진 유학의 역할을 언급한다.
솔직히 이 부분은 다 공감하지는 못했다.
유학이라고 하면 근대화와는 매우 동떨어진 학문이고 조선이 바로 유학 중에서도 가장 완고한 주자학의 대표적인 나라인데 쇄국정책으로 일관해 근대화에 실패하지 않았던가.
일본이 택한 주자학은 사무라이들을 士 로 변신시켜 봉록만 받고 평화시대에 할 일이 없었던 그들을 지사로 만들어 변혁의 시대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여론을 형성했다고 본다.
사실 조선의 언관 제도는 좋게 보면 강력한 공론의 정치가 아닌가.
붕당 역시 긍정적인 쪽으로 보면 오늘날의 정당제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저자는 유학의 붕당이 갖는 한계점에 대해서도 명확히 선을 긋는다.
붕당은 기본적으로 군자당이 있을 뿐이라 오늘날의 다당제 개념이 아니었다.
군자당의 반대는 소인당이니 이들은 나라의 해가 되므로 없어져야 한다.
그러니 서로 군자당임을 주장해 사화로 수많은 이들이 죽고 결국은 왕권의 약화와 더불어 한 가문이 독점하는 세도정치로 변질되고 만다.
저자는 각주에도 오늘날 한국 사회에 정당정치가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것에 대해 "현인지배의 선정정치" 라는 유교적 이념이 자리잡은 탓이라고도 밝힌다.
매우 동의하는 바다.
조선보다 늦게 유학이 전수되서인지 일본에서는 유학을 조선처럼 내제화 신념화시킨 것이 아니라 경세치용 관점에서 이용했기 때문에 보다 열린 자세로 일부 가문에서 독점했던 정치를 공론의 장으로 끌어냈다고 평가한다.
유교적 교조주의가 아니었기 때문에 유교식 혼례나 제례도 없었고 난학 같은 서양 학문도 쉽게 받아들였다.
과연 유학이 일본 사회의 근대화에 얼마나 기여했는지에 대해서는 좀더 살펴보고 싶다.
좋은 책을 읽는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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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20-04-07 공감(2)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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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훈 교수의 <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2014)에 대한 요약입니다.
요약: 메이지 유신을 가능케 한 다층적 동인과 유교적 역설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박훈 교수의 <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2014)는 19세기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성공적인 근대화 및 근대 국민국가 수립을 이루어낸 일본 메이지 유신의 내적·외적 원인을 입체적으로 규명한 연구서이다. 저자는 '서구의 충격에 대한 신속한 수용'이라는 단선적인 근대화론에서 벗어나, 도쿠가와 막부 체제의 구조적 특성, 당대 일본 지식인들의 대외 인식, 그리고 유학(儒學)의 보급이 가져온 정치 문화의 변용이라는 세 가지 축을 중심으로 메이지 유신의 전모를 파헤친다.
책은 총 5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장의 주요 내용과 핵심 논지는 다음과 같다.
1장: 도쿠가와 체제의 구조와 특징
도쿠가와 막부의 '막번 체제'는 중앙의 막부와 지방의 번(藩)이 권력을 분점하는 분권적 병영 국가 체제였다. 군사적 상명하복을 기반으로 한 사무라이 계급이 지배층을 형성했으나, 200여 년간 지속된 에도 시대의 평화 속에서 이들의 실질적 역할은 행정 관료로 변화했다. 한편, 에도 시대 상업의발전과 도시화는 민간의 경제력을 증대시켰으나, 미곡 수입에 의존하던 사무라이 계급은 경제적 궁핍에 직면했다.
2장: 서양 문물의 신속한 수용과 '과장된 위기의식'
일본이 서구 문물을 신속히 수용하고 개항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핵심 동인은 지식인층 사이에 형성된 '과장된 위기의식'이었다. 19세기 초·중반 아편전쟁 등을 목도한 일본의 지식인들은 세계 상황을 중국 고대의 '전국시대'에 비유하며 일본이 집어삼켜질 것이라는 위기감을 유포했다.
3장: 도쿠가와 막부의 자기 혁신과 한계
도쿠가와 막부는 단순히 무능하거나 보수적인 구체제(앙시앵 레짐)에 그치지 않았다.
4장 & 5장: 유학의 확산과 사무라이의 '사화(士化)'
저자가 제시하는 가장 독창적인 논지는 유학(儒學)이 메이지 유신의 정치적 동력이 되었다는 점이다. 에도 후기 유학, 특히 성리학과 양명학이 보급되면서 사무라이 계급은 단순한 칼잡이에서 국가와 사회의 의제를 논하는 '사대부(士)'로 변모했다(사무라이의 사화).
독서 모임인 회독(會讀)과 학적 네트워크를 통해 전국의 하급 사무라이들이 정치적으로 각성했고, 이들은 상서(上書)라는 상소 제도를 통해 막부와 번정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했다.
결론
<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는 서구화와 전통 유교 문화가 대립 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유교적 political culture(정치 문화)의 성숙이 서구식 근대 국가 건설이라는 과감한 결단을 가능하게 한 동력이었음을 증명한다. 메이지 유신은 단순한 서구의 모방이 아닌, 에도 시대 내부에서 축적된 유학적 정치 성숙과 구체제의 자기 균열, 그리고 대외적 위개의식이 결합하여 나타난 다층적 변혁이었다.
===박훈 『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 1,000단어 요약
박훈의 『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는 2014년 민음사에서 나온 243쪽의 책으로, 도쿠가와 체제에서 막말을 거쳐 메이지 유신에 이르는 정치변동을 다섯 장으로 설명한다. 책의 질문은 단순하다. <왜 19세기 중엽 서구의 충격을 받은 동아시아 여러 나라 가운데 일본에서는 비교적 짧은 기간에 정치체제를 전면적으로 바꾸는 변혁이 가능했는가?> 저자는 메이지 유신을 몇몇 영웅적 사무라이의 활약이나 서양 문명의 우월성만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도쿠가와 체제 자체의 구조, 서양에 대한 위기의식, 막부의 자기개혁, 그리고 무엇보다 19세기 사무라이 사회에 퍼진 유학과 <사대부적 정치문화>를 함께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1. 출발점은 의외로 안정된 도쿠가와 체제이다
첫 장은 <도쿠가와 체제의 구조와 특징>을 다룬다. 일본은 쇼군이 지배하는 막부가 있었지만 전국을 하나의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로 직접 통치한 것은 아니었다. 각 지역에는 번(藩)이 있었고 다이묘가 상당한 자율성을 가지고 통치했다. 여기에 교토의 천황과 조정도 존재했다. 따라서 일본의 정치체제는 <막부-번-조정>이라는 복합적인 권력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이 구조가 메이지 유신의 중요한 전제가 된다. 중앙정부가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각 번이 독자적인 교육·군사·재정 개혁을 실험할 수 있었고, 사쓰마·조슈·도사 같은 번에서는 막부와 다른 정치적 움직임이 성장할 수 있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사무라이였다. 오랜 평화가 계속되자 본래 전사였던 사무라이는 실제로 전쟁할 기회를 잃었다. 많은 사무라이가 행정관료가 되었고 책을 읽고 정치와 사회 문제를 논하는 지식인으로 변해갔다. 박훈이 뒤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사무라이의 사화(士化)>는 바로 이 변화를 가리킨다. 칼을 쓰는 무사가 점차 글을 읽고 천하와 국가를 논하는 <선비 같은 정치적 인간>으로 변화했다는 것이다.
2. 서양의 충격보다 중요한 것은 일본인의 <위기의식>이었다
두 번째 장의 제목은 <일본은 어떻게 서양 문물을 신속히 수용할 수 있었나>이다. 박훈은 페리의 흑선이 나타난 1853년만을 출발점으로 삼지 않는다. 일본은 이미 러시아·영국 등 서구세력이 동아시아로 다가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아편전쟁에서 청이 영국에 패배한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여기서 저자가 주목하는 것이 <과장된 위기의식>이다. 일본이 당장 서구의 식민지가 될 상황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일본의 지식인과 정치지도자들은 서구세력의 접근을 엄청난 국가적 위기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바로 이 과장될 정도로 강렬한 위기의식이 신속한 행동을 촉진했다. 책의 2장은 이 위기의식, <해외웅비론>, 신속한 개항, 해외 유학생과 사절단 파견을 하나의 과정으로 다룬다.
흥미로운 것은 위기의식이 곧 <쇄국>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서구가 위험하기 때문에 서구를 배척하기보다, 오히려 서구를 배워야 한다는 결론이 강해졌다.
따라서 일본의 서양화는 처음부터 친서양주의자들의 운동이 아니었다. 서양에 매우 적대적이었던 존왕양이파 인물조차 실제 서양의 군사력을 경험하면서 <서양을 이기려면 서양을 배워야 한다>는 방향으로 전환한다.
<반서양의 위기의식이 오히려 적극적인 서양 학습으로 이어진 것>이 막말 일본의 중요한 역설이다.
3. 막부는 무능해서 망한 것이 아니다
세 번째 장 <도쿠가와 막부는 왜 패했는가>는 흔히 알고 있는 메이지 유신 이야기와 상당히 다르다.
보통 메이지 유신을 설명할 때는 낡고 무능한 막부에 맞서 사쓰마·조슈의 젊은 혁명가들이 새로운 일본을 만들었다고 이야기하기 쉽다. 그러나 박훈은 막부 역시 놀라울 만큼 적극적으로 자기개혁을 했다고 강조한다.
즉 도쿠가와 막부는 단순한 반동적 <앙시앵 레짐>이 아니었다. 서양식 군대와 해군을 도입하고 군사제도를 개혁하며 서양 지식을 받아들였다. 역설적으로 막부가 실시한 개혁들이 나중에 메이지 정부가 근대국가를 건설하는 토대가 되기도 했다. 책의 목차 자체가 이를 <자기 혁신 하는 앙시앵 레짐>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왜 막부는 결국 패배했는가?
핵심은 군사력이나 개혁 능력만이 아니라 <정치적 정당성>의 문제였다.
외교정책처럼 전국의 운명을 결정하는 문제가 등장하면서 사람들은 묻기 시작했다.
<왜 막부가 일본 전체를 대표해서 결정하는가?>
각 번의 사무라이들이 천하국가를 논하기 시작했고, 교토의 천황과 조정이 정치의 중심으로 다시 등장했다. 그 결과 막부가 독점하던 정치적 권위가 흔들렸다.
따라서 메이지 유신은 단순히 강한 세력이 약한 세력을 군사적으로 쓰러뜨린 사건이 아니다. <정치를 할 자격이 누구에게 있는가>라는 문제 자체가 변화한 사건이었다.
4. 박훈의 독창적인 설명 — <유학이 메이지 유신을 만들었다>
이 책에서 가장 독특하고 중요한 부분은 4장과 5장이다. 4장은 <유학의 확산과 ‘사대부적 정치 문화’의 형성>, 5장은 <‘사화(士化)’하는 사무라이와 메이지 유신>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일본 근대화를 설명할 때 이렇게 생각하기 쉽다.
<유교적 전통에서 벗어나 서양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했다.>
박훈은 이 도식을 뒤집는다.
그가 강조하는 사실은 <일본이 서양화하기 직전에 오히려 가장 활발하게 유학화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18세기 말~19세기에 번교와 사숙이 확대되고 사무라이들의 독서와 학문 활동이 활발해졌다. 학문을 매개로 지역과 신분을 넘나드는 <학적 네트워크>도 형성되었다.
그 결과 사무라이는 단순히 자기 영주에게 충성하는 군인이 아니라,
<나는 천하의 일에 대해 의견을 말할 책임이 있다>
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것을 박훈은 <사대부적 정치문화>라고 부른다.
중국과 조선에서는 오래전부터 유교적 사대부가 국가의 일을 자기 일로 생각하고 군주에게 상소하며 정치적 공론을 형성했다. 그런데 무사사회였던 일본에서도 19세기가 되면서 이와 비슷한 정치문화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후 박훈은 이 문제를 별도의 학술서 『메이지유신과 사대부적 정치문화』에서 더욱 상세히 발전시켰다.
5. <칼 찬 선비>들이 정치에 들어오다
유학의 확산은 사무라이의 행동방식까지 바꾸었다.
사무라이들은 함께 책을 읽는 <회독(會讀)> 모임을 만들고, 번교와 사숙을 통해 인맥을 형성했다. 여기에서 <학적 네트워크>와 일종의 <학당(學黨)>이 탄생했다. 서로 글을 읽고 토론하면서 정치적 견해를 공유하는 집단이 형성된 것이다.
그들은 상서(上書)를 통해 위정자에게 의견을 제출했다. 이전에는 상관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사무라이의 기본적인 행동이었다면 이제는 하급 사무라이까지 국가정책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난다.
<정치가 소수 최고 권력자의 전유물이 아니게 된 것이다.>
물론 이것을 현대 민주주의라고 할 수는 없다. 사무라이들은 보통 사람들에게 주권을 주려고 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정치에 참여하고 공론을 형성하는 사람들의 범위가 크게 넓어졌다.
박훈에게 이것은 메이지 유신의 중요한 정치문화적 전제이다.
6. 왜 천황이 등장했는가
사대부적 정치문화와 연결되는 또 하나의 현상이 <군주 친정(親政)>이다.
유교 정치사상에서는 좋은 군주가 단순히 상징적인 존재가 아니라 직접 정치를 살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 그런데 도쿠가와 체제의 쇼군이나 각 번의 다이묘는 오랫동안 행정실무를 가신들에게 맡기는 경우가 많았다.
19세기 유학화된 사무라이들은 군주에게 직접 정치를 책임지라고 요구하기 시작한다. 이 움직임은 궁극적으로 천황에게까지 연결된다. 박훈의 논리를 따라가면 메이지 유신에서 천황이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군주는 직접 국가를 책임져야 한다>는 유교적 정치문화의 확산이 천황의 정치적 복귀를 가능하게 만든 하나의 토양이었다.
따라서 메이지 천황제에는 서양식 근대 주권국가의 군주라는 요소와 동아시아 전통의 유교적 <친정 군주>라는 요소가 동시에 들어 있었다.
7. 그렇다면 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책 전체를 종합하면 박훈의 답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조건의 결합이다.
<① 도쿠가와 시대의 장기적인 평화와 사회발전
② 막부와 번이 병존하는 분권적 정치구조
③ 서구 침략에 대한 강렬하고 때로는 과장된 위기의식
④ 막부를 포함한 기존 지배층의 적극적인 자기개혁
⑤ 유학과 교육의 급속한 확산
⑥ ‘칼 쓰는 무사’에서 ‘정치를 논하는 사(士)’로 변한 사무라이
⑦ 학적 네트워크·상서·공론을 통한 정치참여의 확대
⑧ 군주 친정론과 천황의 정치적 부상>
이것들이 겹치면서 메이지 유신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이 책은 그래서 유신을 <1868년에 갑자기 일어난 쿠데타>라기보다 그 이전 수십 년에 걸쳐 진행된 정치문화의 변화가 폭발한 결과로 본다.
8.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이 책에서 가장 기억할 만한 주장은 의외로 <서양화>가 아니다.
<일본은 유교를 버렸기 때문에 근대화한 것이 아니라, 사무라이가 유학을 공부하면서 정치적 인간으로 변하던 바로 그 시기에 서양의 충격을 받았다.>
라는 주장이다.
즉 <서구의 충격>만 있었다고 메이지 유신이 일어난 것이 아니다. 그 충격을 받고 토론하고 상서를 올리고 번주와 막부를 비판하며 국가의 장래를 자기 문제로 생각할 수 있는 상당수의 정치적 엘리트가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
그래서 박훈에게 메이지 유신을 만들어낸 주인공은 단순히 요시다 쇼인, 사카모토 료마, 사이고 다카모리 같은 몇몇 영웅이 아니다.
<책을 읽고, 토론하고,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한 수많은 사무라이들>이다.
이 점에서 『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는 메이지 유신을 <서양화의 성공사>에서 <정치문화가 변화한 역사>로 다시 읽는 책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저자가 이후 『메이지유신과 사대부적 정치문화』에서 이 문제를 본격적인 학술연구로 확장했다는 사실도 이 주장이 박훈의 메이지 유신 해석에서 얼마나 중심적인지를 보여준다.
한 문장 요약
<메이지 유신은 서양의 충격 때문에 저절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도쿠가와 체제 안에서 성장한 교육·공론·유학적 정치의식과 ‘사화한 사무라이’들이 서구의 위기에 반응하면서 가능해진 정치혁명이었다.>
앞서 다룬 『한국인의 눈으로 본 근대 일본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도 이 책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특히 다음 문제는 별도로 비교해볼 가치가 큽니다. <그렇다면 조선에는 일본보다 훨씬 강한 유교적 사대부 정치문화가 있었는데, 왜 조선의 사대부 정치문화는 메이지 유신과 같은 변혁으로 이어지지 않았는가?> 박훈의 논리를 검토하려면 사실 이 질문이 가장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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