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동인
이동인 李東仁 | |
|---|---|
| 본명 | 이동인 |
| 로마자 표기 | Lee Dong-in |
| 출생 | 1849년? |
| 사망 | 1881년 5월 한성부 |
| 성별 | 남성 |
| 국적 | 조선 |
| 경력 | 금위영 예하 별선군관, 통리기무아문 참모관 |
| 직업 | 승려, 외교관, 개화 사상가 |
| 종교 | 불교 |
| 불교 |
|---|
이동인(李東仁, 1849년? ~ 1881년 5월)은 조선 후기의 불교 승려이자 외교관, 개화 사상가이다. 법명(法名)은 천호(淺湖)이다. 개화기에 활동한 인물 가운데 처음으로 창씨개명을 한 사람이며(1880년 10월), 일본명은 아사노 도진(일본어: 朝野 東仁)이다.[1] 애초 일찍부터 개화된 승려였던 그는 유대치, 오경석 등을 통해 김옥균, 서광범, 윤치호 등의 청년들을 만나 신문물을 전하며 그들과 교류하였다. 1879년 김옥균의 주선으로 일본을 다녀왔으며 이후 여러 번 일본을 다녀와 신문물을 시찰하였다.
1880년말에는 조선 정부의 밀사로써 일본에 파견됐다. 귀국 후 서울 도착 즉시 이동인은 국왕으로부터 조선국 금위영 예하 별선군관 직책에 임명되어 자유로이 왕궁을 출입하게 되었다.[2] 이후 통리기무아문의 참모관으로서 이동인은 1881년 신사유람단을 일본에 보낼 때에도 막후에서 활동하였으며, 총포 등의 무기와 군함을 구입하기 위해 일본과 비밀교섭을 하기도 했다.[2] 1881년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에 다시 파견되기 직전 갑자기 의문의 실종을 당하는데 1881년 5월경 한성부에서 암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생애
승려 생활
이동인은 1849년 조선 경상도 양산군(지금의 대한민국 경상남도 양산시)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의 가계나 출신 성분, 유년 시절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며 일찍이 승려가 되었다. 부산 범어사에 승려로 있었으며, 양산 통도사에 있었다는 말도 있다.[1] 그 뒤 1860년대부터 한성부 봉원사에서 활동하였다. '일본통'으로 알려진 인물로, 처음에는 유대치와 교류하다가 1870년경 유대치의 소개로 그의 문하에 출입하던 김옥균 등을 만나게 되었다.
한자와 일어에 능했던 이동인은 일본 혼간사(本願寺)의 부산 별원을 왕래하면서 일본의 승려들로부터 입수한 〈만국사기〉(萬國事記)와 세계 각국의 풍물 사진을 청년 관리들에게 전해 주었다.
신문물 접촉
1879년 3월에 이동인은 일본 불교 오타니 파 혼간사의 부산별원에 드나들면서 서구 여러 나라에 관한 사진과 〈만국사기〉, 성냥 등을 얻어서는 서울 봉원사에서 김옥균, 서재필, 유대치, 오경석 등에게 개화 문물을 보여줌으로써 개화파와 교류를 하였던 것이다.[3]
1870년대 초에도 청나라를 다녀온 뒤 서구 문물의 놀라움을 말하던 박규수나 오경석 등의 말을 아무도 듣지 않자, 이들과 일찍부터 친하게 지내던 이동인은 부산과 일본을 오가거나 개성의 송상을 통해 들여온 괘종 시계, 태엽 기계와 시계 등을 보여주어 박규수, 오경석의 주장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음을 입증해주었다. 이동인이 혼간사 부산별원에 드나들었다는 것은 오쿠무라의 〈조선국포교일지〉에 의하여 1878년 6월 2일부터 2회, 12월 9일부터 4회에 걸쳐 드나들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4]으로 확인되었다.
일본 밀항
1879년 3월부터 오쿠무라의 포교소(부산 별원)에 드나들면서 일본 밀항을 준비한다. 1879년 6월 일본의 국정을 살피고 세계 정세를 파악할 목적으로 유대치 등과 함께 일본으로 밀항해 일본어를 배웠다. 1880년 5월 이래로 주일 영국 공사관의 서기관 사토우(Ernest M. Satow)와 빈번히 접촉하여 그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주며 그와 정치 문제를 논의하기도 하였다. 개화승으로 행세하면서 조선과 일본을 건너다니며 다수의 유학생을 일본으로 보내어 친일파로 육성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5]
이동인은 일본에 가보길 원했으나 승려였고, 이러한 사정을 딱하게 여긴 김옥균은 그의 일본행을 적극 주선, 건의하여 1876년(고종 16년) 조선정부의 사신 자격으로 일본에 보내 신문물을 견학하고 돌아오게 했다.
2차 일본 왕래
이동인은 양산 통도사의 승려인데 오쿠무라와의 접촉으로 개화 문물을 손에 넣은 다음에는 서울로 올라와, 봉원사에서 김옥균, 서재필을 비롯한 개화파들과 교류하면서 김옥균이 여비로 준 금덩이 네 개를 오쿠무라에게 내보이면서 일본 도항을 부탁하였다.[6] 그러나 이들은 이동인의 금을 받지 않고 여비나 생활비로 쓰라 하며 오히려 추가 여비와 각 지방 별로 무사집단이 난립하는 혼란상임을 주지시키고 조심할 것을 충고했다.
이리하여 이동인은 오쿠무라와 마에다(前田獻吉) 영사의 주선으로 교토에 가서 그곳 혼간사 본산에 머물면서 일본어를 배웠다.[6]
1879년 4월 이동인은 득도식을 하고 일본 진종(眞宗)의 승려가 되었고, 도쿄 아사쿠사 별원(草別院)에 기숙하면서 주지 스즈키(鈴木惠順)의 각별한 보살핌을 받으면서 일본 외무성의 요인들을 비롯한 여러 일본 명사들과 접촉하였다. 또한 그는 이때 수신사로 도일한 김홍집을 만나서 친교를 쌓았다.[6]
이동인은 동경에서 데라다(寺田福壽)의 소개를 받아 당시 일본의 외교가로 명망을 떨치던 후쿠자와 유키치와 교류하기도 하고[6], 일본 각지를 다니면서 미국과 프랑스, 영국 선함과 백인들을 만나보기도 했다. 이동인은 이들의 행동, 신체 구조 이들이 먹는 특이한 고기 등에 대해서 편지로 적어 유대치와 김옥균 등에게 보냈다.
일본·중국의 유지들과 간친회로서 아시아 및 세계 정세를 분석하고 구미제국에 대항한다는 명분 아래 활동하던 흥아회(興亞會)에 출석하는 등 일본 조야의 정계, 재계의 유력자들과 교유의 폭을 넓혔다. 그리고 많은 서적과 자료 등을 오쿠무라에게 부탁하여 김옥균 등에게 보내기도 하였다.[6]
제3차 일본 왕래
이동인은 일본에 머무르고 있던 1880년 6월에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한 김홍집과 만났는데, 이동인의 식견에 감동한 김홍집의 추천으로 조선 조정에도 연이 닿게 되었다. 1880년 8월에 이동인은 제2차 수신사로 와서 아사쿠사 관음사에 유숙하던 김홍집과 만나면서 조선 정계에 두각을 나타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6] 김홍집과의 면담 이후 급격히 그와 가까워진 이동인은 수신사 일행이 1880년 9월 16일 일본을 떠나 귀국하자 이들 일행과 함께 귀국, 9월 28일 귀경하였다.[6]
그해 9월 귀국하면서 가져온 램프·석유·잡화 등의 일본 제품을 왕실·세도가와 친지에게 선물로 주었다. 이때 처음으로 일본 제품이 서울에 들어왔다. 서울에서는 일본 공사관에 드나들며 1881년 신사유람단의 막후 참모 역할을 하였다. 1880년 10월에 일본으로 다시 건너가서 아사노 도진(淺野東仁)으로 개명하면서[1] 일본 외무성에서 잠시 근무하기도 했다.[7]
귀국 직후 이동인은 김옥균 등에게 서적 및 기타 자료를 건네주었다. 이동인이 귀국할 때 혼간지에서는 이동인에게 쌀 2백 가마 값에 해당하는 일본화 1천 엔을 주었다.[6] 이와는 별도로 포교 비용은 나중에 부쳐 주었다. 일화 1천 엔으로 이동인은 램프, 석유, 잡화 등을 들여와서 왕실, 세도가와 친지들에게 선물했는데, 이것이 조선인에 의해 외제 상품이 서울에 공식적으로 들어온 최초였다.[6]
조선정부 밀사 파견과 귀국
김홍집은 귀국 직후 민영익에게 이동인을 소개하였다. 민영익은 이동인을 만나보고 그의 식견의 탁월함에 경탄하여 자기의 사랑방인 연당(蓮堂)에 거처를 정해 주고 여러 차례 국왕에게 알현토록 주선하였다.[8]
이동인은 일본 국정의 견문, 분석은 물론 세계의 정세와 이에 대처할 조선왕조의 방책을 상주하여 고종을 감복시킨데다가 김옥균 등의 강력한 조언에 힘입어 크게 중용되기에 이르렀다.[8] 뿐만 아니라 그는 국왕의 밀사로서 1880년 10월에 재차 도일하였다. 이동인은 제2차 일본행은 조미수호통상교섭의 알선을 주일청국공사 하여장(何如장)에게 의뢰하는 고종의 밀명을 수행하는 것이었다.[8]
11월 19일 하여장 청국공사를 찾아가 고종의 밀명을 이행하였다. 한편 국내에서는 대원군과 그 당료들이 고종의 개방정책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고종의 밀명으로 일본에 밀파된 이동인이 귀국하면 제거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8] 이 정보를 접한 유대치가 급거 부산으로 달려갔다.[8] 귀국한 이동인은 동래부에 체포 구금되었다.[8] 그러나 유대치의 주선으로 7일 만에 속방되어 1881년 1월 초순에 상경하였다.[2]
일본 밀파와 실종
서울 도착 즉시 이동인은 국왕으로부터 별선군관에 임명되어 자유로이 왕궁을 출입, 고종과 대담하고 진언하기에 이르렀다.[2] 통리기무아문의 참모관으로서 이동인은 1881년 신사유람단을 일본에 보낼 때에도 막후에서 활동하였으며, 총포 등의 무기와 군함을 구입하기 위해 일본과 비밀교섭도 벌였다.[2]
김옥균은 곧 자신도 일본에 가고자 했고, 이동인이 입수해온 서적과 물건들을 선물로 받았다. 김옥균은 1881년경 일본에 갈 것을 결심하고 고종에게 여러번 건의하여 설득한다. 이때 이동인 역시 신사유람단에 동행하기도 하였다.
이원회와 함께 일본과의 군함 구매 비밀교섭을 하다가 실패한 뒤 행방을 감추었다. 1881년 5월 서울에서 암살당하였다고 전해진다.[1]
평가
한 불교학자는 그가 오래 생존하였다면 한국의 개화에 크게 기여하고 불교 근대화에도 새로운 장이 열렸을 것으로 전망하기도 한다.[2] 하지만 승려 겸 사학자인 임혜봉은 그를 일본의 조선 침략 세력에 부화뇌동한 전형적인 친일 인물로 평가하였다.[4] 왜냐하면 이동인이 개화문물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일본 정부의 침략 밀명을 받고 부산에 처음 상륙한 일본 불교의 접근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평가하였다.[4]
가족 관계
- 증조부 : 이신명(李申命)
- 할아버지 : 이세위(李世瑋)
- 아버지 : 이덕중(李德中)
- 어머니 : 김숭렴(金崇濂)의 딸
- 할아버지 : 이세위(李世瑋)
기타
그밖에 그는 본래 승려가 아니었으나 1880년 정식으로 일본 승려가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7]
같이 보기
이동인을 연기한 배우
각주
- 임종국 (1991). 《실록 친일파》.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돌베개. 24~25쪽.
- 임혜봉, 《한권으로 보는 불교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4) 276페이지
- 임혜봉, 《한권으로 보는 불교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4) 273페이지
- 임혜봉, 《한권으로 보는 불교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4) 265페이지
- 김삼웅 (1995년 7월 1일). 《친일정치 100년사》. 서울: 동풍. 40쪽. ISBN 9788986072037.
- 임혜봉, 《한권으로 보는 불교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4) 274페이지
- 임종국 (1991). 《실록 친일파》.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돌베개. 59쪽.
- 임혜봉, 《한권으로 보는 불교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4) 275페이지
李東仁
| 李東仁 | |
|---|---|
| 各種表記 | |
| ハングル: | 이동인 |
| 漢字: | 李東仁 |
| 発音: | イ・ドンイン |
| 日本語読み: | り とうじん |
李 東仁(イ・ドンイン、1849年 - 1881年)は、李氏朝鮮末期の仏教僧。早くから開化思想に目覚め、日本にも密航した開化派の先駆者。僧李東仁(スン・イ・ドンイン)と呼ばれることが多い。
生涯
1870年代前半の時点で、既に日本に深い興味を持つに至っており、江華島事件の通訳を務めた本願寺の僧侶・楓玄哲と親交を結んだ。また、花房義質公使一行が交渉のために江華島へ来る度に彼らの許を訪れ、日本人との交流を深めていった。1878年に浄土真宗 大谷派が釜山に東本願寺別院を開いて布教活動を開始すると、そこに出入りして更に日本との人脈を開拓していった。また、仏教徒である金玉均と知り合った。
1879年、李東仁は金玉均や朴泳孝、さらに花房公使らの支援を得て、日本に向けて密出国した。日本に潜入してからは京都・東本願寺に潜伏した。京都で約半年間日本語を学んだ後に東京に赴き、東本願寺の僧侶である寺田福寿の紹介で福沢諭吉の許を訪れ、その後も朝野の偽名を用いて[1]度々福沢邸に出入りした。
また、日本の政治家・民間人だけでなく、アーネスト・サトウを訪ねて、英国の支援を求めた[2]。サトウは李東仁の人間性を信頼し、代理公使ケネディの許可を得て、李東仁を「英国の代理人」に任命している。
東京では、修信使として来日していた金弘集と会って親交をむすび、1880年9月に一緒に帰国した。金弘集の紹介で閔妃の甥である閔泳翊を知り、その肝いりで、朝鮮国王高宗に拝謁して日本の国情と開国の必要なことを説き、高宗の特別な寵愛を受けた。
1880年10月駐日清公使何如璋に米韓条約締結のあっせんを要請するために来日、約1か月間東京に滞在しながら、日本の指導者と接触して帰国した。 1881年2月統理機務衙門参謀官に任命され、「紳士遊覧団」と呼ばれる日本への視察団を派遣することを推進したが、同年3月頃に朝鮮王朝の政権勢力によって暗殺された[3]。やや高慢の振る舞いがあったのが暗殺の原因ともされている。
脚注
- 李東仁はサトウに対して、偽名の朝野の由来を「朝鮮から来た野蛮人」の意味だと述べている。
- 当時朝鮮では、米・仏・露はそれぞれの理由で嫌われており、それに対して英国は嫌悪感を持たれていないとの理由で、サトウを尋ねたそうである。
- 朝鮮王朝末期の「開化党」に通説覆す新研究登場 朝鮮日報 2017/08/13
이동인李東仁
개항기 통리기무아문 참모관을 역임한 승려. 개화승.
인물/근현대 인물성별남성
출생 연도미상
사망 연도1881년(고종 18) 3월
집필 및 수정집필 1995년
이종춘
최종수정 2023년 02월 07일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의
개항기 통리기무아문 참모관을 역임한 승려. 개화승.
생애 및 활동사항닫기
일찍이 유홍기(劉鴻基)와 만나 개화사상에 눈을 떴고,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일본의 발전상에 관심을 가지고 밀항하여 처음 시찰에 나선 개화파의 선구자이다. 일본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가 청수관(淸水館)에 오자 그들과 자주 접촉하며 일본어를 배웠다.
1879년(고종 16) 6월 유대치·김옥균(金玉均) 등 개화당 요인의 도움으로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밀항하였다. 이후 경도(京都)의 혼간사[本願寺]에서 10개월간 체류하며 변모된 일본 사회를 살피고, 동경으로 가서 일본의 조야 정치가와 접촉하는 한편, 수신사(修信使)로 와 있던 김홍집과 만나 친교하였다.
1880년 9월 김홍집과 함께 귀국, 김홍집의 소개로 민영익(閔泳翊)을 알게 되었다. 그 뒤 그 사랑방 연당(蓮堂)에 거처하며 민영익의 주선으로 국왕을 만나고, 일본의 국정과 세계 각국의 형세를 알리어 국왕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1880년 10월 주일청국공사 하여장(何如璋)에게 한미 조약 체결을 알선해 주도록 요청하기 위해 일본으로 밀파되었다.
사명을 마친 뒤 1개월간 동경에 체류하면서 흥아회(興亞會)에도 참석하며 일본의 지도자와 접촉하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앞으로 미국과의 수호조약 체결을 위해 미리 조약문의 초안을 작성하였는데, 이것은 1882년 1월 김윤식(金允植)이 청나라에 가서 이홍장과 조약 내용을 검토할 때 기준이 되었다.
1881년 2월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 참모관에 임명되어 신사유람단이라는 일본시찰단을 파견하는 일을 추진하였다. 이 때 유길준(兪吉濬)·윤치호(尹致昊)와 같은 유학생을 보낸 것은 전적으로 이동인이 계획한 일이다.
이 해 3월 참모관으로 총포와 군함 구입의 임무를 받고 이원회(李元會)와 함께 일본에 파견될 예정이었으나 출발 직전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는데, 이는 암살당한 것이 분명하다.
참고문헌
- 『일성록(日省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본외교문서(日本外交文書)』
- 「개화승이동인』(이광린, 『개화당연구』, 일조각, 1973)
근현대 불교인물 탐구③ 이동인 / 한상길
기자명 한상길
입력 2011.04.04 불교평
1. 이동인 자료 찾기
한국 근대불교의 전개 과정에서 이동인(李東仁, 1849~1881?)은 가장 드라마틱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근대사회의 격동기였던 1877년 무렵 어느 날 별안간 등장하였다가 1881년 갑자기 사라졌다. 불과 4년간의 짧은 활동이었지만, 30대 중반 나이의 이동인은 근대불교의 형성과 조선의 근대화 과정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지니고 있다. 역사소설가로 유명한 신봉승은 이 점에 착안하여 그의 일생을 다룬 소설 《이동인의 나라》(전 3권, 동방미디어, 2002)를 집필하기도 했다.이동인의 높은 위상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해 알려진 사실은 그리 많지 않다. 심지어 어느 해에 어디서 태어났는지도 모르고, 출가 승려였지만 소속 사찰도 분명하지 않다. 이처럼 어둠에 싸인 그의 생애는 결국 생사를 확인할 수 없는 ‘실종’으로 마무리돼 버렸다. 그런데도 근현대의 불교 인물을 탐구하는 이 자리에서 선뜻 이동인을 주제로 쓰겠다고 대답한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헌신한 숭고한 가치를 널리 알리고 싶은 마음이다. 이동인은 승려의 신분이었지만 불교계보다는 근대 정치와 외교의 일선에서 조선의 근대화를 이룩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일본에 밀항하여 근대화의 항로에 순풍을 달고 있었던 일본의 근대문명을 국내의 개화파 인사들에게 전달하였고, 마침내 국왕 고종을 알현하여 근대화의 필요성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종의 지원으로 개화 운동을 열정적으로 실천하던 1881년 3월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되면서 개화기의 ‘풍운아’는 무대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가 남긴 자취는 근대사의 한 페이지에 뚜렷이 남아 있다. 이러한 가치를 다시 한 번 되새기려는 것이 이 글의 첫 번째 의도이다.
두 번째는 오늘을 계기로 이동인의 행장과 활동에 관한 자료를 발굴하겠다는 나 스스로와의 약속이다. 최근 우연한 기회에 이동인의 친필 편지 두 통을 발견하였다. 1997년에 출간된 경봉 스님의 《삼소굴 소식》에 원본과 내용이 실려 있다. 사실 ‘발견’이라 할 것도 없는 ‘열람’이지만, 그동안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었다. 이동인의 출신 사찰과 일본에서의 활동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자료를 찾는 연구자의 기본 소임을 소홀히 하고 있었음을 자백한다.
지금까지 선학들의 노력으로 이동인에 관한 대체적인 윤곽은 살펴볼 수 있으나, 아직도 그가 2년 넘게 활동했던 일본에서의 행적은 많은 사실이 공백으로 남아 있다. 이동인은 1879년 9월 일본에 건너가 교토(京都)의 동본원사(東本願寺)와 도쿄(東京)의 천초별원(淺草別院)에 머물렀다.
이곳에서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을 방문한 조선 관료를 안내하고, 많은 일본 인사들을 만났으며, 각종의 모임에 참가하는 등 다양한 활약을 펼쳤다. 이러한 과정이 모두 동본원사와 천초별원을 토대로 이루어졌다. 신분을 감추기 위해 동본원사에서 정토진종의 승려로 출가하여 계를 받기도 하였다. 여기에는 동본원사의 도움이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동본원사와 천초별원에는 그에 관한 기록과 자료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동인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린 자료가 오쿠무라 엔신(奧村圓心, 1843~1913)의 《조선국포교일지(朝鮮國布敎日誌)》인데, 이 자료 역시 1970년에 동본원사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그러므로 동본원사 등의 기록물을 꼼꼼히 탐색한다면, 이동인에 관한 새로운 자료를 발굴할 수 있을 듯하다. 열 일 마다하고 당장 시작해야 할 일이지만,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오늘을 계기로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는다.
2. 개화사상의 형성과 이동인
이동인이 역사의 무대에 처음 등장한 것은 유대치와 김옥균 등의 개화사상가들과 만나면서부터이다. 잘 알다시피 김옥균(金玉均, 1851~1894)은 1884년 갑신정변을 주도한 근대화의 상징적 인물이다. 유대치(劉大致, 1831∼?)는 김옥균을 비롯한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 개화사상가들을 이끌었던 스승과도 같은 존재이다. 이들과의 만남에서 이동인은 출가승 신분이었지만 근대화의 당위성을 깨달았고, 비로소 근대화의 실천에 헌신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동인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개화사상의 의미와 개화사상가들의 활동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개화사상은 한국근대사의 새벽을 연 새로운 사조였다. ‘개화(開化)’라는 용어는 《주역》에서 비롯되었다. 즉 “사물을 열어서 그 이치를 탐구해 일을 이루고, 백성을 교화시켜서 아름다운 풍습을 만든다(開物成務, 化民成俗)”는 사상이다. 1873년 이후 일본에서 ‘문명개화’라는 말이 크게 유행하였고, 19세기 중엽 양반사회의 부정과 유학적 지배이념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새로운 움직임으로서 수용되었다. 개화사상의 선구자는 박규수(朴珪壽, 1807~1877)와 강위(姜瑋, 1820~1884), 오경석(吳慶錫, 1831∼1879) 등이다. 박규수는 18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할 당시 온 나라가 개항을 반대하였지만, 개항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사람이다. 개항만이 국제사회에서 고립을 면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선진기술을 수용해야 하며 국가 간의 교역을 통해 부국(富國)을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근대화를 위해 무엇보다도 젊은 세대들의 역할을 강조하였고, 그들의 교육과 계몽에 힘썼다.
강위는 시문으로 이름을 떨친 인물이었으나 민란을 겪으면서 현실 개혁에 참여하였다. 박규수의 추천으로 강화도조약 체결 과정에 참여하여 개항을 관철시켰다. 1880년에는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하여 개화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였다.
오경석은 중인 출신 역관으로, 일찍부터 중국을 왕래하며 개화문명의 힘과 가치를 깨달았다. 그는 중국에서 《해국도지(海國圖志)》 《영환지략(瀛環志略)》 《박물신편(博物新編)》 등 세계 각국의 지리와 역사, 문물, 과학기술 등에 관한 서책을 들여와 개화사상 보급에 힘을 쏟았다. 특히 절친한 친구였던 유대치와 함께 풍전등화 같은 조국의 앞날을 걱정하며 언젠가는 개화를 위한 일대 혁신을 일으켜야 한다고 공감하였다.
이러한 개화사상의 선구자들은 조선의 개혁을 위해서는 양반 자제들에게 혁신의 기운을 일으켜야 한다는 데 뜻을 모았다. 양반들 중에서도 기성세대가 아니라 젊고 진취적인 인재들이 그 대상이었다. 이들을 규합하는 과제는 박규수의 몫이었다. 1870년 무렵 박규수는 자신의 사랑방에서 김옥균, 홍영식(洪英植), 서광범(徐光範), 박영교(朴泳敎), 박영효(朴泳孝), 김윤식(金允植) 등 엘리트들을 본격적으로 교화하기 시작하였다. 개화사상의 실천에 앞장섰던 박영효는 개화사상을 “박규수 집 사랑채에서 나왔다.”라고 증언하였다.
김옥균 등은 개화사상을 실천하기 위해 1874년 무렵 개화당(開化黨)을 결성하였다.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시작하여 박영효의 집, 탑골 승방[普門寺], 화계사(華溪寺)로 이어진 공부방이 이제 조선의 근대화를 지향하는 어엿한 정치적 당파로 성장한 것이다. 대략 50명 정도로 추산되는 개화당 인사들은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정치와 외교, 교육 등 여러 방면에서 활동하였다.
1877년 김옥균 등에게 개화사상을 전파하던 박규수가 사망하자 그 선도 역할은 유대치에게 돌아갔다. 유대치는 오경석과 박규수 등이 외교 활동의 전면에서 개화 활동을 펼친 반면, 재야에서 개화사상을 선양하는 일을 맡았다. ‘백의정승(白衣政丞)’이라는 별명이 말해 주듯, 그의 활동은 막후에서 개화 활동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유대치는 의관(醫官)으로서 청계천에 의원을 운영하였다. 이곳에 개화를 꿈꾸는 젊은 인사들이 드나들었고, 그는 오경석의 지원을 받아 각종의 신서적과 문물을 전파하였다. 바로 이 무렵에 이동인이 등장한다. 구체적인 정황은 전하지 않으나 출가 승려로서 남다른 개혁 의지를 지녔던 이동인은 유대치를 만나 불교사상을 가르치고, 개화사상을 배우면서 김옥균 등의 개화당 인사들과 뜻을 함께하였다.
개화당의 결성 목적은 자주적 근대국가의 성립에 있었다. 이를 위해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켜 개화사상을 실천에 옮겼지만, 불과 3일 만에 실패하였다. 갑신정변의 실패와 함께 개화사상도 몰락한다. 이로 말미암아 19세기 말 열강의 침탈에 맞서 정세를 올바르게 판단하고 주체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인재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렸다. 결국 조선의 근대화는 한동안 유예될 수밖에 없었다.
3. 이동인의 개화 실천 운동
1) 국내에서의 활동
개화파는 일본을 모델로 삼아 근대화를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친다. 당시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통해 서구의 사상과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근대사회로 발전하고 있었다. 일본을 통해 ‘근대’를 수용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였고, 그 구체적 실천 방안이 조선에 들어온 일본불교 종파와의 접촉이었다. 이 과정에서 이동인이 비로소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이동인은 부산 출신으로 통도사에서 출가하여 법명을 기인(琪仁), 법호를 서명(西明)이라고 하였다.
1877년 무렵 이동인은 서울 화계사 삼성암(三聖庵)에 머물고 있었다. 이곳을 기반으로 개화파들에게 불교사상을 전수하고, 그들로부터 개화사상을 습득하였다. 훗날 개화운동을 이끌었던 김옥균, 박영효, 오세창, 서재필 등의 진술에 한결같이 등장하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들의 회고담에는 이동인의 등장과 활동에 관한 정확한 시점은 보이지 않는다. 이동인의 활동 시기를 정확히 전하는 첫 기록은 1878년 6월 2일 정토진종 본원사(本願寺)의 부산별원 방문 사실이다.
일본불교 종파가 공식적으로 조선에 포교소를 개원한 것은 1877년 10월의 부산별원이 처음이었다. 책임자는 오쿠무라 엔신으로 부산의 일본 영사관 관사에서 포교를 개시하였다. 오쿠무라는 이후 1897년까지 20년간 일본불교의 최초 포교사로서 한국 근대불교의 전개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는 당시의 활동을 《조선국포교일지》와 《조선개교 오십년지》 등에 상세히 남겼고, 이를 통해 개화기 불교의 현실과 한일 근대사의 다양한 모습들을 살필 수 있다.
《조선국포교일지》의 1878년 6월 2일 기록에 이동인이 처음 등장한다. “경기도 삼성암의 승려가 찾아와 하루 종일 정토진종의 교리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 이동인은 처음에는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출가 승려로서 일본불교에 관해 문의하였고, 석 달이 지난 9월 15일에 다시 찾아가 3일 동안 머물며 역시 불교에 관한 이야기만 나누었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사실 불교가 아니라 일본의 근대문명에 있었다. 만남 초기에는 불교 이야기를 통해 접근하였지만, 친숙해진 이후에는 “항상 시사를 말하고 국제 간의 정세를 설명하면서도 불교에 관해서는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라고 한다(《조선개교오십년지》 한국근현대불교자료전집 제62권, 민족사, 1996. p.137).
당시 이동인은 30세 전후로 일본의 신문물과 사상을 익히기 위해 스스로 별원을 찾아갔다. 그런데 이동인이 부산별원을 찾아가기까지에는 개화파의 치밀한 계획과 의도가 반영된 듯하다. 개화파의 일본 교섭은 유대치의 계획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유대치에게서 개화사상을 익힌 이동인은 그를 통해 개화파의 리더였던 김옥균을 만났다. 개화파는 일본을 통해 근대화를 실현하기 위해 일본과의 접촉을 시도하였고, 그 방안이 출가 승려인 이동인으로 하여금 일본의 불교종단을 찾아가도록 한 것이다.
위의 기록에서 보듯이 이동인과 오쿠무라의 만남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오쿠무라의 눈에 비친 이동인은 매우 특별한 인물이었고, 포교의 사명을 지닌 그는 오히려 자기가 먼저 한국인들에게 다가갈 일이었다. 즉 오쿠무라는 이동인을 한국 포교의 일선(一線)으로 삼고자 예우하였던 듯하다. 이동인은 불과 몇 차례의 만남만으로 신임을 얻었고, 그해 12월 11일에는 오쿠무라에게 간청하여 정박 중이던 일본 군함 비예함(比叡艦)을 관람하기도 하였다.
이동인과 오쿠무라의 만남은 1879년 초여름까지 계속되었다. 그해 4월 25일에는 일본의 초대 공사(公使)로 부임하던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 1842~1917)를 만난다. 하나부사는 1877년 9월에 외무부의 대리공사(代理公使) 자격으로 조선에 들어와 개항장 개설 등의 업무를 담당한 일이 있었다. 2년 뒤인 1879년 4월 다시 입국하여 부산에서 29일까지 머물다 서울로 올라갔다. 바로 이 기간인 4월 25일 이동인은 오쿠무라의 알선으로 하나부사를 만난다. 당시 하나부사가 이동인과의 대화를 기록하여 〈동인문서(東仁聞書)〉라는 문건을 남겼고, 현재 일본 도쿄도립대학 도서관에 《화방문서(花房文書)》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이광린, 〈개화승 이동인에 관한 새 사료〉 《한국개화사의 제문제》 pp.2~15. 일조각, 1986).
이동인과 하나부사의 만남은 두 시간 남짓 진행되었다. 내용을 대략 살펴보자.
조선은 빈약(貧弱)하지만 우국지사가 여럿 있다. 그 첫 번째 인물이 김옥균이고, 오경석·강위·유대치·박영효 등이다. 나라를 걱정하는 말을 꺼낼 수도 없고, 입을 열면 화를 당한다. 조선에서 큰일을 도모하려면 세도가의 힘이 필요하다. 조선의 무역은 대부분 서양과 이루어지는데, 서양인은 타인이다. 그러나 일본인은 형제이므로 조선과 일본이 무역을 통해 이익을 도모해야 한다. 조선의 풍부한 광산과 전야(田野)를 일본과 함께 개발해야 한다. 조선의 상업은 육의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데 일본이 자금을 투자하여 선박과 기기를 구입하면 개항장 등의 전국을 왕래하면서 상업 유통을 활발히 할 수 있다. 조선의 근대적 개혁을 위해서는 일본을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 이를 위해 조선인 수십 명을 선발하여 일본의 육해군, 외무, 회계 등의 제도를 배워야 하는데 일본이 이를 지원할 의사가 있는가를 묻는다. 이에 대해 하나부사는 자질을 가진 인사라면 일본 입국을 허락하고, 계획을 지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대답한다.
이상의 대화를 통해 이동인의 풍모를 엿볼 수 있다. 특히 대화 기록의 첫머리에 하나부사는 이동인을 “옷차림과 두발 모두 고위관리나 서생(書生)과 같고 말하는 품이 우리와 달랐다.”라고 평가한 점이 눈길을 끈다. 당시 30세 전후의 이동인은 출가 승려였는데 승려의 당연한 모습인 삭발이 아니라 서생의 모습이었다는 점이다. 이 글의 앞부분에 실은 이동인의 사진은 1879년에서 1881년 사이에 일본에서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삭발이 아니라 짧지만 머리를 기른 모습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동인이 처음 유대치를 만난 것은 불교사상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이후 개화당 인사들과 동지의 인연을 함께 하면서 본격적으로 개화운동에 뛰어들었다. 삭발이 아닌 서생들처럼 머리를 기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보인다. 즉 위의 기록에서처럼 나라를 걱정하는 말조차도 꺼내기 어려운 실정에서 삭발한 승려의 모습으로는 개화운동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동인은 하나부사에게 조선의 근대화를 위한 도움을 요청하였다. 조선의 자원을 개발하고, 상업과 무역을 진흥시키기 위해 일본의 지원 여부를 묻는다. 끝으로 조선의 개화 인사를 초빙하여 일본의 근대문물을 체득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 달라고 한다. 언뜻 보면 참으로 경우에 어긋나는 이야기이다.
낯선 외국인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솔직하게 조선의 현실을 토로하고 자원 개발과 무역, 나아가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던 일본 방문까지 청탁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무례함이나 결례보다는 나라의 근대화를 위한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경략가(經略家)의 모습을 먼저 발견한다. 이보다 앞서 6개월 전쯤에 정토진종 부산별원을 찾아가 오쿠무라에게 시사와 국제정세를 말하고, 군함을 견학시켜 달라던 모습 그대로이다. 당시 이동인은 아무런 관직이나 경력이 없는 일개 승려일 뿐이었지만, 오쿠무라와 하나부사는 공통적으로 그의 풍모와 의욕을 높이 평가하면서 기록을 남겼던 것이다.
2) 일본에서의 활동
하나부사와의 면담 이후 두 달여 만에 이동인은 오쿠무라를 다시 찾아와 일본으로 유학을 청탁하였다. 개화파의 일본 방문은 원래 김옥균이 직접 할 예정이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이동인이 대체 인물로 발탁된 것이다. 두 달가량의 공백은 이러한 계획의 수립 과정이라 짐작된다.
1879년 9월 상순 이동인은 오쿠무라의 도움으로 마침내 일본의 화물선을 타고 밀항을 감행한다. 교토의 동본원사에 도착한 그는 신분을 감추기 위해 이름을 ‘조야계윤(朝野繼允)’이라는 일본식으로 바꿨다. 이후 ‘조야동인(朝野東仁)’으로 쓰기도 하고, 동경에 있을 때는 ‘조야각지(朝野覺遲)’라고도 썼다. 성(姓)으로 사용한 ‘조야(朝野)’는 ‘조선의 야인’이라는 뜻으로 당시 본인이 처한 시대적 환경을 표현한 듯하다.
동본원사에서 이동인은 일본말을 공부하고, 정세(政勢)와 문화를 익히는 데 애썼다. 이 무렵에 이동인이 오쿠무라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 있다.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일 경성의 노옹(老翁)께서 찾으려고 하는 화물을 무사히 출관(出館)할 수 있겠습니까? 이후부터 경성에서 오는 소식을 듣는 대로 곧바로 저에게 적어 보내 주시기를 천만번 간절히 바랍니다. 11월 8일 조야각지(朝野覺遲) 재배(再拜) 오쿠무라 엔신 전(殿)
이 자료는 통도사 경봉(鏡峰, 1892~1982) 스님의 유품으로 1997년에 출간된 《삼소굴 소식》(역주 석명정, 영축총림 통도사 극락선원, pp.337~338)에 원본 사진까지 소개되었으나, 그동안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필자도 최근에야 이 편지의 존재를 확인하였다.이 편지에서 지칭하는 ‘경성의 노옹’은 유대치를 말한다. 11월 8일은 1879년이라 추정된다. 그가 일본에서 활동한 시기는 1879년 9월부터 1880년 12월까지이다. 즉 편지를 보낸 11월 8일은 1879년과 1880년 둘 중 하나인데 1880년 11월 8일에 그는 원산에 귀국해 있었다. ‘조야각지’는 ‘조선의 야인으로 깨달음이 늦다’라는 뜻의 겸손한 표현이다.
이동인이 일본에서 고국의 개화 인사들에게 근대문명에 관한 다양한 서책과 사진 등을 보낸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위에서 말하는 화물은 필시 이러한 물건들이었을 것이다. 이 편지를 통해 밀항 초기의 활동 내용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삼소굴 소식》에는 위의 편지와 함께 1880년 6월 20일에 보낸 또 다른 편지가 있다. 잠시 뒤에 살펴볼 것이다.
이동인은 1880년 4월 정토진종에 출가하여 정식으로 수계하였다. 일본 승려의 신분으로 개화운동을 원활히 실천하기 위함이었다. 이후부터 그는 본격적인 개화운동을 실천하였다. 우선 발전하는 일본의 모습을 관찰하고 국내의 김옥균 등에게 신서적과 근대 문물의 실상을 전했다. 또한 정치·사회의 유력자와 교제하며 일본의 정책, 정세, 제도 등을 폭넓게 탐구하였다. 그 구체적 활동 가운데 하나가 흥아회(興亞會) 참석이었다. 흥아회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아시아의 흥성을 모색하는 사회단체로서 1880년 3월 동경에서 창립되었다. 흥아회에서는 매월 《흥아회보고(興亞會報告)》라는 기관지를 발간하였고, 1880년 4월호에 이동인은 〈흥아회에 참석하여(興亞會 參)〉라는 글을 기고하였다. 이 글에는 필자를 “동파본원사(東派本願寺) 유학생 모(謀)”라고 하여 본명은 없으나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 이동인이 틀림없다고 한다. 글은 순 한문체로 약 690자 정도의 한 페이지 분량이다. 대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성인이 나라를 다스린다 해도 제도를 시대에 맞게 개혁해야 한다. 오늘날 아시아가 유럽에 곤욕을 받는 이유는 옛 제도에 안주하여 새로운 개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럽은 발달한 상공업과 함포 등을 내세워 인도 등의 아시아를 능멸하고 있다. 아시아인들은 근대기술을 수용하여 미국의 조지 워싱턴이 영국의 간섭을 배격하고 독립을 쟁취하였듯이 아시아 7억의 인구도 분발해야 한다.’
이와 같이 이동인은 아시아인이 힘을 모아 근대문명을 발전시키고 자주적 발전을 도모할 것을 역설하였다. 흥아회는 한·중·일 삼국이 힘을 모아 구미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봉쇄하자는 목표를 내세웠으나, 그 이면에는 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일본의 야욕이 숨어 있었다. 즉 창립 과정에 황실의 하사금이 있었고, 내무장관도 참여하는 등 정부의 국책 단체였다. 일본에 온 지 열 달 만인 당시의 이동인으로서는 이러한 은밀한 배경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그의 성품으로 볼 때, 흥아회가 내세운 아시아 공영(共榮)의 모토는 큰 매력으로 보였던 것 같다. 이후 1880년 9월 5일과 11월 18일의 월례회에 참석했다는 기록이 있어 꾸준히 동참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1881년 신사유람단 일원이었던 강위도 이듬해에 다시 일본을 방문하여 흥아회에 참석하였다. 이처럼 흥아회에 대한 포장된 인식은 당시의 개화 인사들이 지녔던 시대적 한계라고 보인다.
흥아회 활동 등으로 인맥을 넓혀가던 이동인은 당시 일본 사회의 거물이었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를 만나기도 하였다. 후쿠자와는 오늘날에도 일본인이 근대의 위인으로 손꼽는 인물로서 현재 사용하고 있는 일본 지폐 만 엔짜리에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그는 계몽가이자 교육자로서 일본의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을 제창하여 제국주의 침략 이론을 선동하고 한국을 병합하려는 야심을 지녔다. 그는 1884년 갑신정변의 배후에 참여하여 정변에 사용되었던 총칼과 화약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두 사람의 만남 과정과 대화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근대화의 꿈을 이루기 위해 일본의 도움을 강조하는 이동인과 조선 지배의 야욕을 지닌 후쿠자와의 대화는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이동인의 행보는 일본인과의 만남에 국한되지 않았다. 1880년 5월 12일 그는 주일 영국공사관 서기관인 어니스트 사토(Ernest Satow, 1843~1929)를 찾아가 영국과의 수교 방안을 모색하였다. 사토는 영국의 극동 관계 전문가이다. 1862년에 일본에 건너가 1883년까지 주일영국공사를 지냈다. 이보다 앞선 1878년 사토는 제주도와 부산에 다녀간 일이 있었다. 이동인은 사토를 통해 조선에서의 영국의 역할을 강조하였고, 사토는 그를 통해 한국어를 익히고자 하였다. 사토는 일기 형식으로 그에 대한 기록을 남겼고, 이동인과의 만남을 자신의 상관인 당시 일본 고베(神戶) 주재 영국 공사 애스턴(W.G. Aston)에게 보냈다.
애스턴은 훗날 초대 주한 영국 총영사를 역임하고 1884년 갑신정변 때 우정국 현장에 있었던 인물이다. 이 기록은 현재 영국 공문서보관소(Public Record Office)에 〈사토 문서(Satow Papers)〉라는 이름으로 소장되어 있다. 이광린 교수가 〈개화승 이동인의 재일 활동〉(《신동아》 1981년 5월호)이라는 제목으로 일부를 번역·소개하였다.
5월 이후 두 사람의 만남은 계속되어 7월부터 9월 초까지 한 달 이상을 거의 매일 만났다. 이동인은 조선의 자원개발 필요성과 국제정세를 피력하였다. 사토는 유럽의 근대 문물에 관한 사진 자료 등을 제공하고, 몇몇 유럽인을 소개하였다. 이보다 조금 앞선 6월 20일 이동인이 오쿠무라에게 보낸 편지가 전한다.
뜻밖에도 6월 14일 자로 보내신 혜서(惠書)를 6일 만에 받아 읽게 되니 그 기쁨은 목마를 때에 미음 먹는 것과 시장할 때에 맛좋은 음식이 생긴 것보다 더 좋습니다. 곧 달려가서 서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으나 대개 움직거림은 반드시 사람을 쓸데없이 마음만 쓰이게 할 것 같아서 그만두었습니다. 그러나 서로 이야기하고 의논할 일은 산과 같고 바다와 같이 많은데 어느 날에나 동녘(일본)으로 건너오시겠소. 느릿느릿한 세월 같지만 일각(一刻)이 삼추(三秋) 같아서 이마에 손을 얹고 목을 빼고 기다리오니 양해하소서. 번거로워하실까 봐서 이만 줄입니다.
6월 20일. 동경 천초(淺草) 추방정(陬訪町) 6번지 조야학인(朝野學人) 삼가 드림. 오꾸무라 선생께.
—《삼소굴 소식》 pp.339~340.
편지의 내용은 별다른 주제가 없는 안부 인사 정도이다. 사실 비밀리에 개화 운동을 펼치던 이동인의 입장에서 편지를 통해 진솔하게 구체적 일을 의논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다만 ‘서로 이야기하고 의논할 일이 산과 바다처럼 많다’는 표현에서 오쿠무라와의 긴밀한 협조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이 편지와 앞서 말한 1879년 11월의 편지는 모두 경봉 스님의 유품으로 현재는 통도사 극락선원의 명정(明正) 스님이 소장하고 있다. 편지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이 편지를 경봉 스님이 소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이동인에 관한 중요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이동인의 출신 사찰이 어디인가의 문제인데, 논자에 따라 통도사와 범어사로 나뉜다.
경봉 스님은 1907년 통도사의 성해(聖海)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으므로 이동인의 시대와는 조금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위의 편지는 성해 스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 짐작된다. 구체적인 전수 과정은 알 수 없으나 편지를 받은 오쿠무라는 이동인의 본 절인 통도사에 전해 주었고, 성해−경봉−명정 스님으로 이어지며 현존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오쿠무라의 일지에 적혀 있듯이 이동인은 자신을 통도사 승려라고 소개하였고, 결국 이 말은 사실이었다.
1880년 8월 11일 이동인은 수신사로 동경에 온 김홍집(金弘集)을 만나 외교 활동에 참여하였다. 그런데 수신사 일행이 머무는 처소가 이동인이 있던 천초별원이었다. 우연한 결과가 아니라 여기에는 개화파의 어떤 의도와 계획이 있었던 것 같다. 즉 이동인과 김홍집을 연결시켜 개화의 일정을 앞당기려는 구체적 계획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특히 일본 측이 요구하는 인천항의 개항 문제가 주요 의제 중의 하나였다. 당시 이동인은 통역을 담당하였는데 김홍집은 유창하게 일본말을 구사하고 남다른 자질을 지닌 그의 모습에 매료되어 ‘쾌남아(快男兒)’라고 칭송하였다. 1880년 9월 8일 이동인은 수신사 활동을 마치고 귀국하는 김홍집과 함께 돌아왔다.
1880년 9월 28일 이동인은 일본에 밀항한 지 15개월 만에 원산으로 귀국하였다. 부산이 아니라 원산으로 온 것은 당시 오쿠무라 엔신이 정토진종의 원산별원을 개원하기 위해 이곳에 와 있었기 때문이다. 이동인은 도착 즉시 오쿠무라를 만난 후 다음 날 서울로 향한다. 그런데 며칠 뒤 10월 4일 이곳에서 유대치와 오쿠무라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앞에서 말했듯이 개화파의 일본 교섭은 유대치의 계획에서 시작되었다. 즉 유대치는 이동인과 오쿠무라의 만남을 기획하였던 장본인인데, 그동안 철저히 장막 뒤의 그림자로 남아 있었다. 오쿠무라로서는 1년 전 이동인을 만나면서부터 익히 유대치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었는데, 유대치는 탁정식과 김옥균의 소개 편지까지 지참하고 있었다.
이후 개화파와 오쿠무라의 긴밀한 교류는 유대치가 전담하였다. 첫 만남 이후 한 달 사이에 유대치는 십여 차례나 오쿠무라를 만났다. 유대치가 오쿠무라를 만난 직접적인 이유는 이동인, 탁정식 등의 도일(渡日) 경비를 마련하는 데 있었고, 나아가 개화파의 자금을 조성하는 데 큰 목적이 있었다. 이를 위해 오쿠무라에게서 상당한 금액을 차입하고, 그의 도움으로 일본과의 사무역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유대치는 오쿠무라에게 우골을 보내고, 회화·당목을 받았으며 또 월 이자를 주는 등 두 사람의 사이에 일정한 물건 거래와 금전 관계가 있었다(한석희 《일제의 종교침략사》 김승태 옮김, 기독교문사, 1990, p.45).
이후 이동인은 서울에 도착하여 김홍집을 만났다. 김홍집은 그를 민영익(閔泳翊, 1860∼1914)에게 추천하였다. 민영익은 명성황후의 조카로 당대의 세도가였지만, 일찍이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개화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민영익은 이동인의 범상한 자질과 국제정세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확인하고 그를 국왕 고종에게 안내하였다. 조선 말 천민 신분의 승려 출신 이동인은 마침내 국왕을 알현하기에 이르렀다.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고종에게 근대문명의 실상을 설명하고,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조선의 앞날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열심히 피력하는 그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고종 역시 평상시에 김옥균 등을 가까이 두고 개화문물의 실체를 청해 듣는 등 조선의 변화를 꾀하고 있었다. 고종은 이동인을 통해 근대 일본의 발전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국제정세의 변화를 전해 들었다.
이동인이 국왕을 만나기까지는 개화파의 치밀한 기획이 밑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개화파는 조선의 안위를 위하여 미국과의 조약 체결을 추진하였다. 이를 위해 중국의 협조가 필요하다는 판단하에 고종으로 하여금 이동인을 일본 주재 청국 공사 하여장(何如璋, 1838~1891)을 만나는 밀사로 삼도록 하였다. 고종은 다시 일본으로 떠나는 그에게 밀서와 친필로 서명한 여행허가서를 건네주었다.
1880년 10월 15일 이동인은 다시 원산에 도착하여 6일간 마에다 겐키치(前田獻吉) 일본 총영사의 관사에서 유대치와 긴한 밀담을 나눴다. 10월 23일에는 서울에서 찾아온 밀사를 만나 최근의 정황을 들었다. 24일, 30일에는 마에다 총영사, 오쿠무라, 유대치 등과 함께 향후의 계획을 논하였다. 아마도 인천항 개항을 둘러싼 개화파의 추진과 수구파의 반대 등에 대한 대처 방안을 모색하는 자리였던 것 같다.
11월 5일 이동인은 탁정식과 함께 일본의 천성함(天城艦)을 타고 원산을 출발하였다. 11월 15일 도쿄에 도착하자마자 여행 가방을 든 채로 사토(Satow)를 찾았고, 그의 관저에서 머물렀다. 이동인은 사토에게 조선이 러시아의 침공 위협에 직면해 있으니 영국이 서둘러 병력을 이끌고 조선에 가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당시 관리들은 독일의 협조를 기대하지만, 자신은 영국의 도움이 한층 더 적절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사토가 이동인과의 만남을 지속한 이유는 무엇보다 한국어 공부에 목적이 있었다. 전체 28건의 서신 기록 가운데 한국어 공부에 관한 이야기가 가장 많이 등장한다. 그러나 만남이 지속되던 7월 19일의 편지에서는 이동인을 영국과 조선과의 외교를 진행하는 데 대리인(agent)으로 삼자고 하였다. 만남이 깊어지면서 이동인의 자질과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단순한 한국어 선생이 아니라 외교 관계의 수립에 중요한 역할을 기대하고 있었다.
11월 18일 이동인은 동경에서 열린 흥아회 월례회에 참석하고, 19~20일에는 유대치와 함께 청국 공사 하여장을 찾아갔다. 이동인은 국왕의 밀서를 전달하며 미국과 수호조약을 체결하기 위한 중국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 무렵에 이동인은 한미수호조약의 조약문 초안을 작성하였다. 1882년 1월에 김윤식(金允植, 1835∼1922)이 중국의 이홍장(李鴻章)을 만나 미국과 수교를 요청하며 조약문을 건넸는데, 이 초안을 이동인이 작성한 것이다.
3) 이동인의 실종
이동인은 1880년 12월 1일 마지막으로 사토를 만나고, 12월 18일 부산으로 귀국하였다. 부산에는 유대치가 마중을 나와 대원군 일파가 이동인에게 위해를 가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그는 개의치 않고 동래부를 찾아가 왕의 특사라며 내일 서울로 올라갈 가마를 준비하도록 시켰다. 12월 19일 서울로 가기 위해 동래부를 찾았다. 그러나 동래부사는 이동인을 의심하여 투옥해 버렸다. 유대치가 백방으로 노력하여 일주일 만에 방면되어 12월 27일 서울로 출발하였다. 서울로 올라온 이동인은 다시 고종을 알현하고 하여장을 만난 일 등을 상세히 보고하였다.
1881년 2월 25일 이동인은 통리기무아문의 참모관에 임명된다. 통리기무아문에서 신식 군대를 창설한 이후 무기와 군함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이동인을 일본에 파견하여 그 구입에 관한 일을 맡겼다. 그가 당시 최고의 일본 전문가로 인정받았다는 증거이다.
불과 2년 전 승려의 신분으로 일본에 밀항한 그였지만, 이제는 당당한 조선의 관리로서 수시로 궁궐을 드나들며 세도가와 함께 국정을 논의하였다. 이동인은 3월 9일 일본으로 떠나기 위해 바쁜 나날을 보내던 중 갑자기 행방불명되었다. 누구도 정확한 행방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소문에 따르면, 그가 머물고 있던 민영익의 집에 궁궐의 문기수(門旗手)가 찾아와 국왕의 부름이라고 데리고 나간 이후의 일이라고 한다. 누군가에 의해 암살되었음이 분명한데, 그 실체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당시의 소문은 대개 대원군 등의 수구파에 의한 소행이라고 하였다. 이동인이 국왕의 밀사로 일본에 갔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대원군 세력들이 분노하고 그를 처치할 것이라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김옥균은 김홍집의 소행이라고 의심하였다. 김홍집은 수신사로 일본에 가서 이동인을 만나 그를 귀국시키고, 민영익에게 소개해 준 장본인이다. 그런데 이동인은 여러 차례 김홍집의 의견에 맞서, 그를 따르지 않고 민영익에게 밀착하고 있었다. 김홍집은 개화파 중에서도 온건 개화파로, 민영익·김옥균 등의 급진 개화파와는 국정에 대한 인식이 달랐다. 특히 개화를 위해 중국의 역할을 중시하였으나, 이동인은 철저하게 일본 중심적이었다. 당시 김홍집의 참모였던 이조연(李祖淵, 1843~1884)은 이러한 이동인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무기와 군함 구입 등의 일은 일급의 국가기밀 사항이었으나, 이동인이 이를 공공연하게 발설하였다고 했다. 이동인이 사라진 직후의 일이므로 김옥균의 생각은 신빙성이 높다. 그러나 정확한 사실은 여전히 미궁으로 남았다.
1881년 3월 9일 이전에 이동인은 암살되었지만, 그에 관한 이야기는 사토의 편지에 여전히 계속되었다. 1881년 4월 28일 탁정식은 애스턴에게 이동인이 본국에서 수구파의 위협으로 생명이 위태로운 처지에 놓여 있으므로, 그를 구명하는 데 필요한 1, 2천 엔을 도와달라고 요청하였다. 사토는 이때부터 탁정식을 통해 이동인의 이야기를 듣는다. 탁정식은 강원도 백담사의 강사 출신으로 자는 몽성(夢聖), 법명은 각지(覺地)·무불(無佛)이었다. 화계사에서 김옥균을 만나 개화 운동가로 변신하였다. 1880년 5월 함께 일본에 들어와 이동인과 함께 다양한 개화 운동을 펼쳤다. 또한 1883년에는 차관 교섭차 일본을 방문한 김옥균을 수행하였으나, 1884년 2월 고베에서 병사하였다.
탁정식의 동경 여정 역시 오쿠무라의 알선으로 이루어졌다. 이동인은 사토에게 탁정식을 소개하고, 사토는 다시 탁정식을 애스턴에게 소개하여 한국어를 배우도록 하였다. 이 인연으로 사토는 이동인이 행방불명된 이후 탁정식을 통해 저간의 사정을 전해 들었다. 5월 3일 탁정식은 사토를 찾아와 이동인은 수구파의 위협을 피해 은신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6월 22일 두 사람은 다시 만났으나 탁정식은 이동인에 관해 아무런 소식을 듣지 못했고, 죽었을 것이라는 말을 전했다.
사실 탁정식이 사토와 애스턴에게 했던 말은 대부분 거짓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이동인이 암살된 직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미 4월 초순에 일본의 부산 영사 곤도 모토스케(近藤眞鋤)에게 암살 배후에 관한 이야기를 전한 일이 있었다. 즉 고종은 배후가 대원군이라고 의심하지만, 김옥균은 김홍집 일파의 소행으로 짐작한다는 내용이다. 이처럼 탁정식은 이동인의 사망을 알면서도 사토 등에게 ‘이동인은 수구파의 위협으로부터 피신하고 있다’며 그를 구명하기 위해 돈을 빌려 달라고 하였다.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었겠지만, 여기에는 ‘수구파의 위협’ 운운하여 김홍집 관련설을 감추려는 의도도 보인다. 정확한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탁정식과 김홍집과의 관계에 대한 좀 더 세밀한 고찰이 필요할 듯하다.
8월 23일 사토는 이동인이 규슈(九州)의 나가사키(長崎)에 도착했다는 소문을 듣는다. 이 소문이 사실이기를 바란다는 심정을 토로하며 그는 매우 흥미있는 사람이며, 목숨만 부지할 수 있다면 틀림없이 자기 나라의 역사에 큰 자취를 남길 것이라는 말을 남긴다.
이동인이 일본에서의 2년 남짓 활동 중에서 가장 많이 만났던 인물이 사토이다. 즉 사토는 당시 이동인을 가장 잘 알고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는 인물이다. 사토는 한국어 공부를 위해 이동인을 계속 만났지만, 만남이 이어지면서 그를 한·영 관계의 대리인으로 지목할 만큼 중요한 존재로 인식하였다. 결국 이동인은 낯선 영국인의 말처럼 ‘자기 나라의 역사에 큰 자취를 남길 인물’이었으나 아쉽게도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말았다.
4. 이동인의 역사적 위상
이동인은 3년이 못 미치는 짧은 기간 동안 개화기 정치와 외교의 무대에서 활동하였다. 1878년 6월 그에 관한 첫 기록이 등장한 이후부터 1881년 3월까지 2년 9개월 동안 개화를 위해 헌신하였다.
이동인의 활동은 대체로 세 시기로 구분된다. 첫째는 국내의 활동으로, 1877년 이전 유대치와 김옥균을 만나 개화사상을 체득하고, 1878년 6월 이후 개화의 모델이었던 일본을 배우기 위해 부산별원의 오쿠무라를 찾아간 시기이다. 오쿠무라에게 근대문명과 국제정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피력하고 일본의 역할을 요청한다. 또한 일본의 공사로 부임하는 하나부사를 만나 조선의 광업 개발과 상업 진흥을 위해 일본의 투자를 권하였다.
두 번째 시기는 일본에 밀항하여 교토 본원사에 머물던 1879년 9월부터 1880년 4월까지이다. 이 시기에 이동인은 일본말을 배우고 근대문명을 직접 체험하였다. 주요 임무는 국내의 개화파에게 근대문물을 전하고, 국제정세를 제공하는 일이었다.
세 번째는 1880년 4월 거주지를 도쿄로 옮겨 본격적으로 근대화 방안을 모색하고, 국내를 오가면서 구체적 실천을 감행한 시기이다. 흥아회에 자주 참석하여 아시아인의 결속을 강조하고, 후쿠자와 유키치와 같은 일본의 유력자를 만나 조선의 근대화를 위한 방안을 논의하였다. 또한 영국인 사토에게 러시아의 위협을 영국의 군사력으로 방비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또한 고종의 밀서를 지참하고 하여장을 만나 미국과의 조약 체결을 추진하였다.
이동인은 아시아의 긴밀한 협력 관계를 구축하여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국제적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 이동인을 만난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의 안목과 열정에 감복하였다. 일본을 두 차례나 왕래하며 개화를 향해 거침없이 달려가던 그는 1881년 3월의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고 만다. 개화를 원치 않았던 수구 세력의 소행이었는지, 개화파 내의 갈등 때문이었는지 사실은 알 수 없으나, 그의 죽음은 우리 역사의 근대화를 정지시키는 불행한 사건이었다.
이렇게 이동인은 개화 격동기의 무대에서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30대 초반의 젊은 승려가 꿈꾸었던 ‘개화 세상’은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3년 후 그가 없는 가운데 개화당이 일으킨 갑신정변은 ‘3일천하’로 막을 내렸다. 이제 역사의 도도한 흐름이었던 개화는 그 누구도 입에 담지 못하는 ‘짐승의 짓’으로 전락하였고, 외세의 무력에 의해 왜곡된 근대사가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
한상길 /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연구교수. 동국대 사학과 졸업, 동 대학원 석사·박사. 저서로 《조선후기 불교와 寺刹契》 《월정사》 《근대 동아시아의 불교학》 《동아시아 불교의 근대적 변용〉 등이 있다. 논문으로 〈개화사상의 형성과 근대불교〉 〈개화기 일본불교의 전파와 한국불교〉 〈한국 근대불교의 형성과 일본, 일본불교〉 〈일본 근대불교의 한·중포교에 대한 연구〉 〈한국 근대불교의 대중화와 석문의범〉 〈한국 근대불교 연구와 ‘민족불교’의 모색〉 등이 있다.
한상길 oldfan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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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의 불씨 개화승 이동인
[겨레의 인물 100선 87] 국제정세를 보는 안목이나 세계관 등 당시로서는 국량이 대단히 큰 개화된 인물
김삼웅(solwar)
등록|2024.02.14
https://m.ohmynews.com/NWS_Web/Mobile/amp.aspx?CNTN_CD=A0003001614
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BR> <BR>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 개화승 이동인조선의 개화를 위해 장벽인 일본과 한양을 드나들며 조선의 근대화를 추구하며 다양한 정보를 개화파에 제공하였다. ⓒ 이병길
조선후기 두 차례의 기회가 있었다. 개화를 통해 서구의 문명과 제도를 수용하자는 가파른 길목이었다.
첫 번째 기회 갑신정변(1884년)은 수구파가 끌어들인 청국군에 의해 '3일천하'로 끝나고, 두 번째 동학농민혁명(1894년)은 제멋대로 들어온 일본군에 의해 1년여 만에 좌절되었다. 두 차례의 기회를 잃은 조선왕조는 왜적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역사는 개혁의 기회를 놓치면 보복한다고 했다.
갑신정변 즈음에 조선사회는 몇 갈래 정치·사회 세력과 사조가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광범 등 신진 엘리트 파워를 중심으로 한 급진 개화파, 김홍집·김윤식·어윤중·신기선 등을 중심으로 한 온건 개화파, 민비·민태호·민영익과 그 척족 및 한규직·이조연 등의 민비 수구파, 흥선대원군·이재원·이재면 등의 대원군 수구파, 그리고 재야 유림 수구파로 최익현·김평묵·이만손을 비롯한 위정척사파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신용하, <개화사상과 갑신정변 연구>)
갑신정변은 일본의 메이지유신(1868)보다 불과 16년 후의 거사였다. 이때 성공했으면 우리 국민의 역량으로 보아 일본과 자웅을 결하며 근대국가로 발돋움하고도 남을 것인데, 기회를 잃게 되고 식민지의 악몽과 현실의 분단이라는 비극의 원천이 되었다. 당시 동북아의 국제질서는 변화와 개혁의 시기였다. 중국의 양무운동과 일본의 메이지유신, 조선의 갑신정변이 그것이다.
이같은 흐름에 따라 조선에서는 1850~60년대에 실학을 계승한 박규수, 중인출신 역관 오경석, 의관출신으로 외국 문물에 관심이 많았던 유홍기 등 개화사상가들이 등장하고, 이들은 김옥균·김홍집·홍영식·서광범·박영효·어윤중·서재필 등 양반층 지식 청년들에게 개화사상을 주입시켰다. 이른바 개화파의 형성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놓친(빠진) 인물이 있다. '개화승'으로 불리는 이동인(李東仁)이다. 김옥균 등 개화파 인사들에게 사상적 영향을 미치고, 각종 책과 일본의 정보를 가져다 준 인물이다.

▲ 1884년 갑신정변의 주역들왼쪽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이들은 친일 의존적인 급진적 개화 운동을 펼쳤다. 이들은 이동인의 사상적 제자였다. ⓒ 이병길
서재필의 증언부터 들어보자.
그래서 그 책을 다 읽고 나니까 세계 대세를 대강 짐작할 것 같거든. 그래서 우리나라도 다른 나라처럼 인민의 권리를 세워보자는 생각이 났단 말이야. 이것이 우리가 개화파로 첫 번 나서게 된 근본이 된 것이야. 다시 말하면 이동인이라는 승려가 우리를 인도해 주었고 우리는 그 책을 읽고 그 사상을 가지게 되었으니 봉원사 새 절이 우리 개화파의 온상이라고 할 것이야.(<서재필박사 자서전>)
조선시대 서울(한양)의 거리도 자유롭게 걷지 못하게 했던 승려여서 신분이 제대로 밝혀지긴 어려웠다. 개화파에 큰 역할을 하고도 그의 신분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이동인은 누구일까.
이동인의 출생과 성장과정은 물론 죽음도 베일에 가려있다. 급진 개화파가 동지를 규합해나갈 무렵, 이동인은 유대치를 통해서 김옥균을 알게 되었고, 그의 자금지원을 받아 1879년 6월 일본에 밀항하게 되는데, 그때 그의 나이 30세 전후였다.
그는 동래 범어사 승려로 그가 일본에 간 것은 일본의 정세를 파악하여 선배 유대치와 급진 개화파 리더 김옥균에게 알려주고 선진문물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서였다. 이동인은 도쿄에 있을 당시 수신사로 온 김홍집을 만났으며, 그는 귀국시 일본사정에 밝은 이동인을 데리고 와 당시 실력자인 민비의 조카 민영익에게 소개하여 후에 국왕까지 알현, 대일 외교에 상당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이동인은 통리기무아문이 설치되면서 후세에 사상의학자로 널리 알려진 이제마와 함께 참묘관에 임명(고종 18년)되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이동인은 약 한 달 뒤 행방불명이 되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김홍집과 가까웠던 이동인이 김옥균과 내통하는 것이 알려져 수구파에서 그를 암살, 처치했다고 하나 진위 여부는 알 길이 없다.(안승일, <김옥균과 젊은 그들의 모험>)
이동인은 김옥균 등 개화파 인사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일본에서 많은 서책을 구입하여 개화파 인사들의 세계관을 넓혀주었다. 뿐만 아니라 수신사 김홍집을 만나 현지에서 일본의 각종 정보와 자료 등을 제공하여 국익에 도움을 주었다. 그는 또 유창한 일본어를 구사하여 일본에서 민간외교의 역할도 충실히 수행하였다.
일본공사관의 책임관 하나부사 요시히토가 부산에서 1874년 4월 25일 이동인과 만난 소회를 남겼다.
"4월 25일 이동인이 왔다. 나아가 만났더니 의복과 두발 모두가 고위 관리 같기도 하고 또 선비같기도 하고 앉아서 이야기하는 것이 우리와 달랐다."(곽승훈, <개화승 이동인은 어떤 인물이었어?>)
이동인은 국제정세를 보는 안목이나 세계관 등 당시로서는 국량이 대단히 큰 개화된 인물이었다. 한 달여 일본에 머물면서 주일 영국공사관과 독일공사관에 출입하면서 그쪽 사람들과 교류하였다. 그는 수구파가 똬리를 틀고 있는 조선 정부에서 설 땅이 주어지지 않았다. 당시 상대를 쉽게 찾기 어려운 국제적 안목과 개혁의 시국관이 그들에게는 걸림돌일 뿐이었다. 민씨 척족과 대원군세력 양쪽으로부터 박해를 받고 어느 날 지상에서 자취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동인은 우리나라의 근대개화사에 있어 빠뜨리고 넘어갈 수 없을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에 따라 그에 대한 평가도 여러 사람들에 의해 내려졌는데, 영국 외교관 사토가 내린 다음의 평이 가장 잘 나타내준다.
"이동인이 나가사키에 도착했다는 정보가 정확한 정보로 판명되기를 바랍니다. 그는 실제로 매우 흥미 있는 사람이며, 목숨만 부지할 수 있다면 자기 나라의 역사에 큰 자취를 남길 것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안승일, 앞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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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승 이동인에 대한 연구A Study of Reformist Monk Lee, Dong-Inn
한국불교학, 2010, vol., no.58, pp. 193-223 (31 pages)
발행기관 : 한국불교학회
박용모 [동국대학교]
초록
본 연구는 조선 개화기에 김옥균을 중심으로 당시의 개화파 인물들과함께하면서 개화기 조선의 정치적․외교적 역정 및 조선 불교를 개화하고자 중요한 동선을 제공한 승려 이동인에 관한 연구이다. 불교계에서는 개화기 조선 불교의 존재성과 역사성에 대한 다양한 논의와 연구를 하지 못했을 뿐더러 이동인에 대한 연구를 할 수 있는 연구 기관도 없었다. 지금껏 이동인은 비중 있게 다루어졌던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개화승’이었다는 정보만 알고 스쳐 지나가는 것은 너무나 통탄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다. 개화승 이동인이 없었다면 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광범․서재필 등 개화파 젊은들이 탄생되기 어려웠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개화기 시대 조선이라는 국가는 근대화 정책에 눈을 떠야 할 시기에 처해 있었지만, 국제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문호 개방을 거부한 결과 주변 강국들의 패권 다툼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격동의 시대 조선의지식인 중에서 근대화의 필요성과 방향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하고 조선을위해 한 몸을 바치고자 했던 분이 개화승 이동인이 아닐까 싶다. 이동인은 개화파인 김옥균과의 교류를 통하여 개화파들에게 일본의 유신 사상을 전해 주었던 역할을 하였다. 이동인은 이 과업을 충실히 이행하면서 고종과 친분을 맺게 되고, 승려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역할까지 하게 되었다. 이동인은 개화파들이 요구하는 일본의 유신 사상 전파의 소임을 다하던 중 행방불명이 되었고, 그에 대한 죽음의 진상은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따라서 이동인 연구를 통해 조선 개화기에 활동했던 불교인들에 대한 역사적인 조명이 필요하다고 보고 그의 업적과 사상을 바르게 조명해보고자 한다.
This study explores Lee, Dong-Inn who tried to reform Buddhism with other reformist monks devoted to the reformation of Joseon Buddhism, and with the civilization of the Joseon Dynasty. Buddhist studies has not inquired into the reason for the existence of Buddhism during the Joseon civilization. In particular, a study of Lee Dong-Inn who is an important person when discussing the history of the Buddhism in the Joseon period has not been conducted. Also,there has been no research institute to study him and no creation of adequate conditions to hand down a historical tradition of Joseon Buddhism. First, in the history of Joseon Buddhism in its civilization period,Joseon Buddhism went through some changes after King Sunjo and newly developed during the. Under the influence of reformation in Japan, are form group was organized in Joseon. Lee Dong-Inn, a Buddhist monk, cooperated with there formist group that endeavored to open a new era through reformation. Second, the reform group, which was intended to make Buddhism into a new idea for a new era, tried to change the Joseon Dynasty with reference to the development of Daicing Gurun and Japan. Especially, with the help of Lee Dong-Inn, they paid attention to the reformation of Japan. He delivered the idea of reformation of Japan to the reform group through - Gyun. While Lee devoted himself to passing along the in formation about reform ation of Japan to the group, Empero he go tacquainted with Gojong. It is fair to say that he engaged in politics. Third, knowledge of Lee Dong-Inn giving information about the reformation of Japan to the reform group was missing. Therefore,the Buddhist circle could not identify the truth of his death and properly recognize his achievements at that time. Now I think there is the necessity of historical review, through the examination of Lee Dong-Inn, of Buddhists who worked in the civilization period of the Joseon Dynasty. So this study aims to analyze his ideas correct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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