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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한국인의 탄생의 황제입니다. 지난 시간에 [음악] 우리가 삼국 간섭에 어 대해서 두
시간에 걸쳐서 살펴봤습니다. 어 동북시아 역사에 있어서 결정적인 [음악] 숙면이었고 그리고 그다음에
올 러일 전쟁 어 그다음에 일본이 조선을 결국은 [음악] 식민지화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어 영향을 미치는 그런 사건이었기 때문에 저희가 좀
깊이 있게 [음악] 살펴봤습니다. 오늘은 어떻게 보면은 삼국간섭의 가장 직접적인 즉각적인 어 효과로 일어난
사건을 살펴보겠는데 다름 아니라을 의미 사변입니다. 조선의 [음악]
역사에 있어서 구한말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참혹하고 비참했던 사건이고 그
당시는 [음악] 물론이지만 지금까지도 한일 관계에 있어서 가장 악영향을 미치고 [음악] 있는 그러한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이 시간에는 좀 객관적인
자료들을 동원해서 그 당시의 상황을 가급적이면 면밀하게 재구성을 해서 왜
일어났고 어떤 국제정치적인 [음악] 배경이고 어떤 국내 정치적인 배경에서이 사건이 벌어졌는지 시시각과
그 전개 과정까지도 [음악] 기록에 남아 있는 것을 어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역사책을
통해서나 [음악] 역사 시간에 다 배워서 들어본 적은 있지만 그 내용의
그 깊이 그 중요성을 사실은 [음악] 잘 모르고 있기 때문에 다음 시간까지
두 시간에 걸쳐서 어 몇밀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국인의 탄생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을미사변을 우리가 이해하기 위해서는 을미사변의 어 그 뒷배경이었던
삼국한섭 그리고 국내적으로는 어 갑경이죠.이 이 갑경이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와중에 삼국 간섭이 일어나고 일본의 세력이 약화되기
시작하고 러시아의 간섭이 늘기 시작하고 이러는 과정에서 이제 일본이
무리수를 두게 되는 것이 이제 을미 사변인데요. 그 부분은 우리가 좀
면밀하게 절차를 그 과정을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갑장을
일본이 청일 전쟁과 동시에 시작을 하면서 조선의 내정을 개혁하려고 이제
시작을 합니다. 그러면서 민비하고 민식척한테 완전히 밀려나서 아무런
정치 활동을 못 하도록 묶어 놓고 있던 대원군을 흥선 대원군을 1번측이
다시 불러내려내서 1차 갑보을 맡깁니다. 그렇지만 흥선대 형군은
사실 개혁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고 [음악] 어떻게서든지 그 권력을 이용해서 어
고종을 폐위시키고 민들을 폐선시키고 자기 손주 [음악] 이준영을 왕위
앉치려고 하는 그런음 꿈이다가 결국은 인호의 가오르 공사한테 쫓겨납니다.
결국은 1차 갑보 개혁이 갑보 경장이 실패로 돌아가고 그 대신 2차 갑보
경장을 1894년 [음악] 12월부터 시작을 하는데 이때는
갑신정변 실패하고 일본에 망명을가 있던 7년 동안 망명을 가했던
박영효를 들여와서 고종하고 민비하고 화해를 시켜서 이제 박영한테 이차가
맡기는 거죠. 그래서 1894년 [음악] 12월부터 박영효가 권력을 잡고
정권을 잡고 인호의 가오르가 밀뤄주는 어 가운데 급격한 어 계약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1894년 12월 박영현은 조선 500년 동안 내려오던
가장 조선 조정의 최상위 기구였죠. 의정부를 폐지시켜 버리고 그 대신
서양식 그리고 일본도 얼마 전에 도입한 [음악] 내각 제도라는 거를 이제 본격적으로 도입을 합니다.
그래서 박영 본인은 이제 내무 장관이 되는 거고 같이 미국의 막 같은
서왕범을 법무 장관에 앉치고 이제 이러면서 자기네가 권력을 잡고 근대 개혁에 박찰를 가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조선의 구강하고 왕배 호층을 격상시킬 거를 어 상주합니다. 나중에
고종이 대한 조선을 대한제국이라 그러고 칭권 원어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이전에 이미 박영가 왕과 왕비의 존칭과 이런 모든 거를
격상시켜야 된다. 왜? 개화파들은 독립당이었기 때문에 중국에 비해서
우리가 중국의 속방이라는 거를 못 견뎌서 그 중국의 속방 지우로부터 벗어나는 그런 개혁을 하자는 것이
개화파드였기 때문에 조선 왕실의 지위를 격상시켜야 된다라고 [음악] 하면서 상주를 합니다. 그 내용이
이렇습니다. 주상전화는 대군주 폐하 왕대비 전하는 왕태후 폐하 왕비전
전하는 왕후폐하 왕세자 저하는 왕태자 전하 왕세잡인 저하는 왕태잡이 전하로
부르고 전문은 전문이라는게 나라의 기름이 있을 때 신하가 임금에게 또
임금이 그 어버에게 써올린 글인데 그 전문은 표문이라 칭하자 이렇게
합니다. 그래서 이게 승의를 받습니다. 무슨 말씀이냐면은 전하 왕한테 전하라 그러고
세자한테는 저하라고 부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중국의 왕 황제는 패하였었고
중국의 황태자가 전하였었는데 조선은 조선의 왕이 전하고 조선의 세자는
한다이 또 미친 저하였던 거죠. 그랬던 거를 왕과 왕비는 패하고 우리의 왕세자 [음악] 왕세자비는
전하라 그래야 된다고 이제 격상을 시킵니다. 그러면서 중국하고 같은
급으로 우리가 나가 나가야 된다라는 우선 기억부터 합니다. 그리고 95년
2월에는 영혼문을 부습니다. 그러니까 영혼문이라는게
중국의 식사가 올 때 조선의 왕이 거길 가서 참국에
도래를 하고 측령을 받고 했던 [음악] 바로 그 자리죠. 그 영혼문 위에 있던 그이
그 기와 지붕 같이 만들어 놓은 부분을 부서 버립니다. 어 그 후로 한 10개월 후에 서제필 [음악]
선생이 와서 그 앞에다 독립문을 세우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박영은 미리 와서 영혼을 부숴 버립니다.
그리고 4월에는 1895년 4월에는 일본군 고문의 훈련을 받는 훈련대라는
걸 설치합니다. 그리고 또 각 아암문을 부로 어 나누고 그러니깐 내무암은 이런 거를 이제 내무부 뭐
재무부 이런 부로 이제 바꾼 바꾸고 고등 사범학교라는 걸 만듭니다.
그러니까 이제 교육 제도를 고쳐야 되기 위해서 선생을 길러야 되기 때문에 사범학교를 설립을 합니다.
4월에는 또 88개 항목으로 된 네모함화문 훈시를 전국에 그 퍼트림
[음악] 저 반포를 하면서 정말로 세세한 부분까지 근대 개혁을 어
추진을 합니다.이 이 네무화문 훈시라는 것은 사실은 1번 망명 당시에 이미 고종한테 공개 상소를
올린 건백서라는데 담겨 있던 [음악] 내용들 거의 그대로입니다. 그러니까 1894년
12월에 결국은 대원군이 축출이 되고 박영가 권력을 잡고 자기의
동료들이었던 서광범을 비롯한 개화파들이 다시 권력을 잡고 드디어
이제 갑신 정변 때 못했던 그 개혁을 [음악] 밀어붙이고 특히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일으켰던 핵심 인원 중에 세력 중에 하나였던 인누의 가오르가 뒤를
봐주면서 일본이 적극 지지를 하면서 조선을 이제 개혁해 나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게 이제 4월 내 오면서 절정에 달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때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바로
1895년 4월 23일 날 삼국 간섭이 일어난
겁니다. 러시아, 독일, 프랑스가 간섭을 하면서 일본 보고받은
야동반도, 요동반도를 뱉어내라 그럽니다. 일본이 어쩔 수 없이 5월
5일 날 우리 요동반도 그대로 반환한다라고 [음악] 공격적으로 발표를 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이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조선에서 강력하게
갑경장을 밀고 있던 일본의 힘이 쭉 빠져 버리는 겁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박영현은 계속해서 조선의 개혁을 밀어붙입니다. 5월
5일 날 일본이 요동반도 포기 선언을 한지 했는데 다세 후에 박영현은 뭐를
하냐면요. 5월 10일 5월 10일 독립
경축일이라는 걸로 지정을 합니다. 조선 역사상 최초의 국경일을 지정을 합니다. 시모느 새끼 조약을 통해서
조선은 더 이상 중국의 속방이 아니다라는 것을 제 1조에다가 못 박았기 때문에 그때부터 어여한 독립
국가다. 그래서 우리가 이거를 기념하는 독립 기념일을 [음악] 만들자. 그래서 독립 경축일이라는
거를 지정을 합니다. 그리고 이날 독립을 축하하는 교지를 [음악]
고정을 통해서 내립니다. 그 교지의 내용이 이렇습니다. 나는 개국 503년 12월 12일에 종묘와
사직에 종내 청나라의 간섭을 끊어버리고 우리 대조손국의 고유한
독립 기초를 국건히 할 것임을 고했다. 또한 [음악] 이번 시모노새끼 조약을 통하여이 사실을
더욱더 세계에 빛나게 드러내게 되었다. 나는 신하나 백성들과 기쁨을
같이하여 이제부터 우리나라의 영광스러운 명예를 축하하기 위해 꼭 들어맞는 방법을 세우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나는 여러 대신에게 명령한다. [음악] 나의 신하와 백성들은 나의 뜻을
충분히 본받아 영원히 독립하는 업적을 기념하여 나라를 위하는 간절한 나의
마음에 [음악] 구합되게 해야 할 것이다. 해마다 열게되는 독립 경축일을 정하여 영원히 우리나라의 큰
경축일의 하나로 삼는다. 내가 신하와 백성들과 함께 축하하는 규범에
대해서는 나의 뜻을 [음악] 신하 백성들에게 알리겠다. 그리고 5월 14일 [음악]
날 조선 역사상 최초의 가든 파티가 열립니다. 원유회 원유회라는게
가든 파티를 그 당시로 이제 번역을 한 겁니다. 그 당시의 상황을
정교의 대한 개념사에선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5월 10일 측량을 내리고 가든 파티를 열어서 오늘날
나라의 태평과 청나라의 종내 간섭을 끊어 버린 것을 축하하게 했다. 농상공부 대신 김가진을 각 대신의
총대 위원으로 임명하여 동적 [음악] 군궐 즉 창동궁 연경당의 연석을
준비하고 14일자로 우리나라와 외국의 신사 및 상인들을 편지로 초청하여
경축의 뜻을 장식하게 [음악] 했다. 임금이 국내 대신 김종한에게 명령하여
치거를 내렸다. 나는 맑고 아름다운 날씨 아래 열린 오늘의 가든 파티에 우리 정부와
각국의 사신 및 신사 상인이 함께 잔치를 즐기니이는 진실로 세계 평화의
복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매우 기뻐하며 특별히 국내 [음악] 서리
대신 김종환에게 명령해 나의 뜻을 널리 알린다. 자리를 가득운 귀한
손님들은 나의 [음악] 뜻을 기꺼이 모두 받아들이기 바란다. 외국인 서양 오랑캐들도
궁에 들어와서 [음악] 가든 밭에 참여를 하고 산농공상 조선에서 가장 학급였던 상인들까지도
불러서 까드밭을 열었다. 굉장히 중요한 역사의 전환점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역사에서 완전히 잊혀지고 있는 그러한 또 하나의 사건이었습니다. 이렇게 삼국
간섭으로 일본의 힘이 약화되고 있는데도 [음악] 박영원은 개혁을 이끌고 가져버럽니다. 그래서 5월
21일에는 순검들 경찰이죠. 처음으로 경찰들한테
서양총으로 무장을 하도록 합니다. 제대로 [음악] 서양식으로 경찰이 무장을 할 수 있도록 해 달라.
그래서 고정의 인호를 받아내고 그러면서 [음악] 처음으로 경무청 관제라는 거를 법을
만들어서 한양의 경찰력을 대폭 강화를 합니다. [음악] 조선 정부의 힘으로
수도 한양의 치한을 맞게 되는 겁니다. 이것조차도 개혁이었습니다.
5월 26일에는 예를 들어서 [음악] 전통적인 지방 관직들 있죠. 감사, 안무사,
유수, 부윤, [음악] 목사, 부사, 군수 이런 거를 다 협과하고 전국을 24네 3개 부 [음악] 331개
군으로 나누고 부에는 관찰사, 군에는 군수를 두기로 관제를 처음으로 이렇게
정리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조선조의 지방 행정 이런 것이 얼마나
복잡했었고 혼란스러웠던가를 거꾸로 우리가 유추해 볼 수 있는게 부를
정확히 나누고 그리고 군으로 나눠서 군수하고 관찰사만이 있으면 되는 거지
그 많은 관직은 사실 다 필요 없는 거고 중첩적인 거였고 필요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런 거를 처음으로
정리를 하는게 바로 박영의 2차 갑옷 경장입니다.
6월에는 이미 폐지된 그러니까 전레군이죠. 총위영, 장영, 총사
이런 여러 군대로 나눠 있던 군대를 [음악] 대체할 신식 군대를 본격적으로 만들기 시작합니다. 기존에
두 개 대대로 [음악] 돼 있던 훈련대를 여섯 개 대대로 확장하고 3,명의 병력을 [음악] 한양,
평양, 청주 등 주요 도시에 배치하고 여덟 개 대대 공병, 두 개 대대
경중병, 두 개 대대 기병 등 총 4,800명의
신설대를 창설하는 계획을 말이 합니다. 그러니까 이것도 처음으로
근대적인 군대 [음악] 편제를 조선이 갖추게 됩니다. 그리고 훈련대 사관 양성소. 그러니까는 육군사관학교를
처음으로 만들고 육군 무관 진급령이라는 걸 반포해서 어떨 때의
진급하고 이러는 거조차도 안 갖추 있던 거를 다 처음으로 갖춥니다. 1894년 12월 말에 집권을 해서
지금 5개월 후까지 수두 없는 개혁을 반포를 하고 추진을
해 나가고 있습니다. 불과 7개 후료인 1895년 7월에는 끝날 수밖에 없는 중란할 수밖에 없는
제2차 가보 경장을 통해서 총 213건의 개혁관이 통과됩니다. 그중에서 예순
여덟 개가 박영가 직접 검토하고 사인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중 절반
이상이 1800 95년 5월 말에서 그가 1번
망명길에 다시 오른 7월 4 7월 초 사이에 반포가 됩니다. 그러니까
개혁은 [음악] 또 역시 시간이 부족했었습니다.이 개혁이 2차 갑보 개혁이 결국은
7개월도 못 갑니다. 민시 척이 다시 권력을 잡기 시작하면서 박영와 고종
민간의 관계가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기억하시겠지만은
박영효가 갑신 정변에 실패해서 일본의 망명을가 있는 10년 동안은 완전히 역적이었고
고정하고 민비는 박영하고 김옥균을 암살시키려고 그렇게 애를
썼고 결국은 이일찍을 시켜서 김옥균을 상해로 보내서 홍종우를
시켜서 암살를 시키는데 성공하지만 박용현은 암살은 못 시키지 않습니까? 그런데
동학난이 일어나고 일본이 개입을 하기 시작하고 청일 전쟁이 일어나면서
갑보장까지 일으키니까 일본이 어떻게 쓰든지 박영효 이런 개파들
다시 불러드리도록 [음악] 하는 거죠. 그래서 그 사람들이 다시 들어와서 권력을 어 잡았던 겁니다.
그리고이 과정에서 이노의 가오루가 개입을 해서 원수지관이었던
고정관 민디 그리고 박용 서강범들 간의 관계를 화해를 시킵니다. 1번이
강력한 힘을 구사하면서 어떻게 쓴지 같이
하십시오. 고정관님미도 그 위세에 억눌려서 사실은 박영을 받아들이고 그래서 2차
갑보 개혁이 됐던 거죠. 한때 완전히 원수로 [음악] 척을 졌던 그 박영가
개혁을 추진했던 거죠. 그런데 어떻게 됩니까? 일본의 세력이 약해지니까
고종과 민비가 다시 박영을 의시한 개화파들을 하고 등을 주기
시작합니다. 너무나 급격하게 삼국 간섭으로 일본의 힘이 약해지니까 박용현은 한쪽으로는 급한 마음에 여러
가지 개혁을 마구 밀어붙이면서 다른 한편은 어떻합니까? 상황을 다시
장악하기 위해서는 어 어떻 결국은 보정관 민비를 호위하고 있는 군궐
수비대를 자기가 그리고 1번이 훈련시킨 그 훈련대로 대체를 시켜야
되겠다라고 결정을 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고종한테 가서 얘기를 해서 그 군궐
수비대를 1번이 훈련시킨 일본군 훈련대로 해체하기로 합니다. 기존에
공 군궐 수비되는 미군 뭐 이런 사람들이 훈련을 시켰던 한 700에서 800명 정도로 구성되 있었는데
그리고 훈련되는 외곽을 군궐의 외곽과 정비하고 있었는데 이참 거꾸로 한
800명에 달하는 이재 대대로 돼 있는 그 일본군 훈련대가 왕거 왕비를
직접 호위하도록 그래서 말하자면 자기가 이제 왕거와 왕비를 인질로
잡은 채 계속해서 개혁을 밀어붙이려고 그렇게 했던 거죠. 구두로 구두로
박영현은 고종에 허락을 받습니다. 그래서 6월 25일 날 박영가
박정양을 통해서 박영가 실권은 잡고 있었지만 자기 내무 장관이었고 명목적인
실권자는 권력 최고 권력자는 어 박정이었었죠. [음악] 그래서 총리대신 박정양 한을 통해서 고종한테
가서 이제 공식화를 하는 거죠. 상의했던 어 군궐 수비대를 훈련대로
바꾸겠습니다. 탕주하게 합니다. 그런데 그때 박정이이 얘기를 꺼내니까 고정이
박정향을 향해서 대놓하면서
무슨 소리냐 라면서 혼을 냅니다. 그러니까 박정은 놀래서
곧바로 사직설을 제출하고 그냥 나와 버립니다. 그러니까 너무나도 놀라운
사태에 반전이 벌어지 일어나니까 그때에 일본 공사관을 맡고 있던
참사관 스기무라 스기무라가 곧바로 일본에 있는 무수
자기네 외무 [음악] 대신한테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냅니다. 총리 대신 박정이 군궐에 가서 근위병을 훈련대로
교체하는 안을 보고하자 고종은 경로하면서 근위대를 교체하는 것을
애초에 원하지 않았으며 [음악] 왜 총리와 다른 대신들이 교체를 제안하는지 모르겠다고 하였습니다.
총리가 근이대의 교체는 고정이 이미 제가 한 것이라고 하자 고정은 더욱
화를 내면서 작년 6월 이후에 공표된 모든 조치들 즉 갑경장 이후에 조직
시작된 이후에 모든 조치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음악] 아니었으며 따라서 모두 무효화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총리 대신과 다른 대신들은 이에 놀라 결국 총리 대신은
사표를 제출하였습니다.이 이 1년의 사건들은 여왕이 비밀리의 첩자를
통하여 러시아 공사와 내통한 후에 일어났으며 민시 척의 세력을
회복하려는 시도입니다. 따라서이 사건은 아무도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뒷받침된 것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박영의 일파는 과거에 갖고 있었던
영향력을 [음악] 모두 상실하였기에 우리는 더 이상 그에게 의존할 수 없습니다. 인호의 공사가 곧바로
귀임하지 않는다면 저희들만의 힘으로는 사태를 우리에게 유리하게 역전시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우리나라의 안보를 위협하는 위기가 불어닥치고 있습니다.이 보고서를 인호의 [음악]
공사께 전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인호의 공사가 일시 귀국을 일본의
일시 귀국을 하고 있던 사이에 고종이 갑자기 사태를
완전히 뒤집어 버린 거죠. 근데 왜 그랬습니까? 민비가 삼국 간섭을 일으켜서 갑자기
세력이 강해진 영향력이 막대해진 러시아와 내통을 [음악] 하면서 일본의 영향력을 끊어버리고 특히
일본이 추구하는 조선의 내정 개혁을 앞장서서 규도하고 있던 박영현 박영을
[음악] 내치고자 하는 겁니다. 어차피 고정하고 민비는 박영를 원수로
보고 있었데 억지로 어쩔 [음악] 수 없이 화해를
잠감했었던 것뿐이죠. 그렇지만 역시 민시 척이 다시 세력을 잡기 위해서는
박영을 내치는 [음악] 수밖에 없고 2차가 경제 경장을 무위로 돌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위규무라는
이렇게 분석을 합니다. 처음에는 고정과 민미가 박영호랑 세력을 손을
잡을 수밖에 없어서 일본의 힘이 너무 크니까 그러면서 박영호를 통해서 자기네의 힘을 다시 회복을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박경현은 어떡합니까? 완전히 고정과 민비를
무시하고 철저한 개혁으로 나가기 시작합니다. 고정과 민비 입장에서는 박영란
계속해선 역시 오히려 우리의 권력 기반이 완전히 무너져 버릴 수밖에 없겠구나라고 판단을 내렸다. 스김무란
그렇게 분석을 합니다. 이쯤 되니까
박영가 스기무라한테 민비를 암살할 것이 어떻겠냐라는
얘기를 합니다. 글쎄요. 실제로 민비를 암살하려고 했는지 아니면은 뭔가 일본한테 잘
보이려고 왜냐면이 당시만 해도 일본하고 박영의 관계도 좀 껄어졌거든요. 박영은 독립독립하면서
사실 일본이 너무 개입한다라는 거에 대해서도 굉장히 싫은 표정을 했기
때문에 이노웨이하고도 사실 관계가 별로 안 좋았었습니다. 그러니까 박영의 입장에서는 어떤 해석에 박영이
입장에서는 아유 멀어졌던 일본하고 다시 힘을 합치지 않으면 민비가
러시아 힘을 얻고서 다시 권력을 회복하려고 하는데 대항할 방법이 없겠다 싶어서 일본한테 접근하는
방식으로 그런 제안을 했을 수도 있겠다. 어쨌든간에 어쨌든간에
처음으로 민비의 암살 계획이 박용회로부터 나와서 입으로부터 나와서
일본 사람들한테 전달이 됩니다. 그리고이 계획이
고정과 민비의 귀에 들어갑니다. 박용의 그런 뜻이
일본 측에 전달된 경인이 이렇습니다. 7월 6일 일본인 어 소식 장사
장사라 그러는데이 장사라는게 뭐냐면 그냥 불량배들입니다. 그니까 딱히 일본에서 보낸 외교관도 아니고 와서
장사하는 사람들도 아니고 그 메이지 유신을 통해서 나오기 시작하는 그 많은 그 젊은 지사들이라는 중요한
지사들은 이제 메이지신을 주도했던 뭐 야마가다리 이도 히르부이 뭐 기도
다까시 이런 사람들이기도 하지만 정권 창출에 참여하지 못했던 그런 전국에 흩어져 있던 수많은
그 하급 무사들 이런 친구들이 있었던 거죠.이 이 친구들이 이제 일본이 세력이 강해지고 조선이 계국을 하고
중국하고 그 관계를 일본이 트면서 일본 내에서 답답해서 못 있겠으니까
이제 조선과 중국에 이제 퍼져 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가서 온갖 뭐 장사도 해 봤다가 온갖 일에 간섭도
하고 하는 그러한 계층이 생겨나는데 이건 이제 장사 우리말로 그냥 불량배입니다. 근데 7월 6일 날
일본인 소식 조선에서 그냥 환냥해서 왔다 갔다 하던 불량배 중에 하나인 사사기 도메조가
한재익이라는 사람한테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에 뭐라 그러냐면은 박영가
고정을 폐시키고 민비를 암살할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라고 편지를 보냅니다.
한재이 누구냐면 당시 일본 공사관 직원들한테 우리 조선말을 가르키고 있었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본 공사관하고 밀 늘 와서 조선마을
일본 사람들한테 가르키고 있는데 이제 거기에서 옆에서 같이 배우기도 했고 그랬겠죠.이 이 사사기 도메조가
그 사람한테 민들을 암살하자 뭐 이런 얘기가 오 같다라는 얘기를 편지를
써서 보냅니다. 탄재익은 곧바로이 [음악] 편지를
민시척적파였던 심상훈 대원구파로 분류되었던 6일준한테 이걸 다
보냅니다. 그리고이 사람들이 당연히 그 내용을 그 편지를 고정과 민피한테
보냅니다. 그러지 않아도 러시아의 힘까지 얻기 시작한 민비의 입장에서는
고정의 입장에서는 이때 박영을 내쳐야 되겠다 해서 박영규가 이미 사전에 다
합의를 봤던 훈련대 얘기를 꺼내니까 박정향을 통해서 꺼냈는데 그 자리에서
그걸 내쳐 버립니다. 글쎄요. 박영가 실제로 고종 폐율의 하고 민비 시를
계획을 세웠는지는 그 당시의 증언들도 엇갈립니다. 미국 공사 시 그리고 [음악] 1번 영사 우찌다 사다사스
이런 사람들은 본국의 보고서에 박영가 훈련대를 이용해서 빈을 암살하려고
하고 있다라는 보고서를 실제로 보냅니다.
아니면 일본 대리공사 스무라는 사실 박영욱가 좀 과격한 행동을 계획한
것으로 개혁한 것은 사실이지만 자기가 설득을 해서 그건 다 철해를 했다라고
이렇게 또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박용현은 아직 실권을 잡기 전인
1894년 8월에 스기무화한테 5계조 개혁관을 올린게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뭐냐면은 1차 갑이 대원군을 우두머리를 앉혀 놓고 군국기 무초를
통해서 벌어지고 있지만 이게 개혁이 영지부진하니까 옆에서 보고 있던 박영현 입장에서는
이거 갖고 안 되겠습니다. 해서 그때 쓰기무르한테 아니 개혁을 할 거면 이렇게 해야 됩니다라면서 오계적
개혁관을 보낸게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오계적 개혁 안에서 이미 박영도
민비는 폐서인을 해야 됩니다.라고 라고 명시를 한 바가 있었습니다.
결국 7월 6일 내각회의가 개최되는데 그때는 박영하고
서강범은 없었습니다. 그때 고종이 박영가 역적 음모를 했다. 불괴
음모를 저질렀다면서 그의 관직을 박탈하고 체포령을 내려버
박영은이 얘기를 듣고 7월 7일 새벽 일본 공사관으로 피신합니다. 그리고
곧 이어 고종의 교지를 들고 외무되신 김윤직이 일본 공사관에 도착을
합니다. 그러니까 박영가 참석 안 한각회에서 고종이
역적이다. 박영의 역적이니까 당장 체포하라 그랬고 그 얘기를 전에 듣자마자 박영현는 일본 공사관으로
피신을 하고 그러니까 고정은 곧바로 외모 대신 김윤식을 보내 갖고 일본
공공 공공사관으로 보내서 분명히 거기가 있을 거다. 가서 박영를 체포하라고 보냅니다. 다음은 당시
스기무라의 기록입니다. 보종은 나에게 일본 외교관들로 하여금 박영효를 돕지
말라고 명령할 것을 부탁했다. 나는 상황이 돌변한 것에 대해 놀라면서
저는 무척 놀랐지만 물론이는 귀국의 내정 문제이기 때문에 저는 간섭할 수
없습니다. 저는 최대한 일본 외계관들이 박영효를 돕지 말라고 하겠지만 모든 것이 너무
급작스럽습니다고 했다. 고종의 전령 외교 장관은 알겠다고 하고 떠나려고
할 때 문쪽에서 소란이 일어나더니 누군가가 급히 들어왔다. 박영였다.
외모 대신는 떠났다. 박영효가 들어오자 내가 어떻게 하시렵니까? 하자 박은 나는 일본으로 가야만
하오라고 했다. 나는 알겠다고 하고 그를 2층에 숨겼다. 그리고는
사이또와 호시를 불렀으나 그들은 오지 않았다. 그 대신 오꼬모또가 왔다.
벌써 아침 6시였다. 이때 50에서 60명의 순사들이 내
사무실로 들이닥쳤다. 대장은 박영효를 내놓으라고 했고 나는 거부했다.
그들은 앉아서 기다렸다. 7시쯤 우리는 박영효를 보호할 준비를 하였지만 사이도도 호시도 오지
않았다. 나는 그들에게 오가모도를 보냈다. 드디어 그들이 도착했다. 우리는 좋은 안이 생각나지 않아 일단
박영을 인천으로 보내기로 했다. 우리는 일본 사복 경관들과 우리 공사관의 호위병 10명 정도를 공상한
뒷문으로 데리고 옆길로 해서 인천으로 가도록 하였다. 한양의 대문을 지날 때 문에는 박영회의 체포를 알리는
고종명이의 방이 붙어 있었다. 사람들은 박영효 일행에게 도을 던졌으나 일행은 무사히 빠져나간다.
인천으로 피신한 박영원은 8일 새벽 인천에 와
있던 후지가와 마루라는 배에 승선에서 또다시 일본 망명길에 오릅니다.
갑진정변 실패하고 망명길에 올랐다가 10년 만에 돌아와서 1894년
12일에 정권을 잡고 7개월간 급격한 개혁을 추진하다가 또다시 역으로
물려서 두 번째 악력길에 고르게 됩니다. 박영가 일본으로 탈출한 후
스기무라가 고정을 아련합니다. 고정은 일본 공사관이 박영효를 도은 것은
유감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2차 가보 경장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갑니다. 자, 그러면 이제 남은 것은 뭡니까? 일본 인노의 가로
아직도 공사입니다. 그러면 인노의 입장에서는 그럼 조선의 내정 개혁을
도대체 이제 어떻게 추진할 것인가? 삼국 간섭으로
러시아의 영향력은 극대화된 상황에서 과연 일본이 어떻게 조선의 과보
경장을 계속 끌고 갈 갈 수 있는가? 이것이 이제 숙제가 됩니다. 이노에
가울은 절망합니다. 어 자기가 아주 젊었을 때부터 어 김홍집을 만나서
1차 수신사, 2차 수신사를 만나 가지고 그렇게 설득을 했던 그
계혁을 그로부터 20년이 지나서 자기가 실권을 잡고 추진해 버렸는데
역시 그 역시 숲으로 또 돌아가고 있는 거를 목격하면서 망연실에
합니다. 이때쯤 바로이 이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을 때 이미 러시아의 영향력이
증대하는 거가 어디서 나타냐면요. 러시아가 일본한테
야 일 조선의 개혁을 추진하는 거는 좋지만 어느 정도 조선의 독립이라는
거를 좀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해야 될 거 아니냐라고 러시아 정부가 일본
정부한테 충고를 할 것이라 이런 이제 소문이 쫙 퍼집니다. 일본은 아
드디어 이제 이게 러시아의 [음악] 본격적인 조선 내정 개입이 벌어지고 자기네 세력을 꺾으려고 하는 시도가
있구나는 이제 그걸 감지하고 주 러시아 일본 공산 니시를 러시아 외무
장관 로바노프한테 보냅니다. 이런 소문이 있는데 사실입니까? 그랬더니 로바노프는 아 그건 사실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일본이 조선정부의 일본 관리들을
입력하라는 압력을 행사하고 [음악] 조선의 탄광 철도 등에 대한 특해를
받아내려고 하는 등 막무관로 조선 내정에 간접하고 있으며 [음악] 이에
대한 불만이 조선에 팽배하고 있다라는 보고를 자기가 받기는 했다. 그러면서
일본에 대한 굉장히 부정적인 인식을 줬던 사람들에게 버티고 있다라면서 마치을
생각해 주는 거 같이 충고하는 식으로 로바노프가 얘기를 하지만 사실 저희는
확실했던 거죠. 너희들 갖고 안 돼. 조선에서 개입 끝. 이렇게 나오는
거죠. 이때에 인노회가 일본 정부의 보고소를 보냈니다.
자기가 이렇게 아무리 노력을 해도 열강의 방해 그죠. 삼국간 조선 정부
내에 수많은 음모 때문에 조선의 내정 계약은 여전히 지지부진하고 정부
자체가 이게 제대로 갈 수 있는지 불안할 정도라고 [음악] 하는 겁니다. 그래서 뭐라 하냐면 조선의
무수한 당파들 간의 화해는 절대로 불가능해 보이고 [음악] 현재 위기는 지나겠지만 곧바로 또
다른 위기가 닥칠 것이다. 그러면서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면서 정부의 [음악]
조종에 물어봅니다. 우리의 정책 기조가 어느 정도의 개입을 허락할
것인지 더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서 앞으로의 어떻게 우리가 조선
정책을 펼칠지에 대해서 내 논의하기 위해서 결국 나 귀국 좀 하고 싶다. 얼마나
실망을 하고 조선의 개혁이 결국 무의로 돌아가고 있는가를 절감을 하는
그러한 모습을 인어애가 보입니다. 6월 4일 [음악] 결국 일본은
삼국간섬으로 요동을 포기한지 딱 한 달만입니다. 조선의 내정 개혁을 포기한다라는
결정을 내립니다. 그 결정 내용이 [음악] 이렇습니다. 우리의 조선 정책은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고 조선이
청의 속방이라는 주장을 거부하는 것이었고 결국 조선의 독립을 실현시켰다. 작년에 벌어진 일본과
청간의 전쟁도 이러한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우리의 승리로
인하여 청은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였고 우리는 러시아가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인정할 것을 요청하였을 때 우리의 과거 정책에 입각하여 이미 수차례
명실상부한 조선의 독립을 인정한다는 것을 천명하였기에 우리는 [음악] 지금부터 가능한 한 조선의 내정에
개입하는 것을 자제함으로써 조선이 자치를 이룰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수동적인 정책을 추진할
것을 결의한다. 이러 결정에 따라 우리는 그 나라 조선의 [음악] 강제로 철도와 전봉망을 건설하는 것을
포기한다. 러시아가 걱정하듯이 우리가 더 이상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고 조선을 개혁하려는 그 정책은 지금까지
[음악] 굉장히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펼쳐와서 대원군도 앉혀 보고
궁극기처도 만들어 보고 박영도 앉혀 보고 해서 내각제도 해보고 다 해
봤는데 이제 그런 거 안 한다. 그리고 조선에 뭐 기차를 길을 놓고 전보 전보선을 깔고 하는 그런 것도
우리가 강제로 자꾸 한다 그러는데 우리 강제 안 하겠다라고 [음악] 발표를
그러면서 이노웨는 결국은 러시아를 상대로 지금
일본이 어떻게 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떡합니까? 조선에서 그나마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권력을 갖고
있는 것은 역시 고정하고 민비밖에 없구나.이 이 안량한 개혁이라도 하려
그러면 역시 고정하고 민비하고 잘 하는 수밖에 없겠구나라는
참 어떻게 보면 어초운이 없는 그렇지만
당시 조선의 현실을 너무나도 명확하게 반영하는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고정과 민비 때문에 민시 척 때문에 안 일어나는 개혁인데
어떻게 해서든지 개화파를 부르고 시원것 심면 대원군까지도 불러오면서까지 개혁을 해 보려고 그
무지내를 쓰고 청과 전쟁을 하면서 청을 조선해서 축출하고 하지만 그
모든 권력 노름에서 결국은 어떻니까 고정과 민비가 다시 이깁니다.
마지막까지 조선에서 개혁을 추 근대 개혁을 추진해 보겠다는 인노에도
결론이 그래 고정하고 [음악] 민비하고 손잡는 수밖에 없겠다.라고
합니다. 고정과 민비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결국은이 노예는
뭐를 합니까? 고정이 제일 좋아하는 돈을 많이 주기로 합니다.
막대한 재정 지원을 약속을 합니다. 300만이라는 엄청난 거금을 고정한테
직접 주겠다고. 당신한테 직접 줄테니까 당신이 [음악] 기억을 해 보라고 이렇게까지 약속을 합니다.이
이노에는 심지어는 고정과 민비하고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대원군이
[음악] 청문한테 썼던 편지를 평양 전투에서 수거하면서 그거를 내놓고 대원군을
쫓아내고 정기에서 물러나게 하고 동시에 고정하고 민비한테 가서 민비는 내정
간섭 절대 못 한다라는 거를 21조 개혁관 안 중에 들어가 있는 20조였습니다. 민비가 다시는 정치를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호회가 이번에 그 20조 삭제한다. 민비 다시
정치해도 좋다. 이렇게 합니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7월 25일 날 고정과 민비를 인호회가 [음악]
아련을 하고 1번은 조선의 독립과 안녕. 특히 왕실 [음악] 위에 모든
것을 우리가 다 한다. 그리고 300만 원을 제공하겠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가을에서 열리는 일본
의회에서이 300만 고종 지원금 안이 통과될 것인
것이다라고 이회가 얘기를 합니다. 그리고 1차 가보 계획을 시작하면서
전부 다 귀양을 보냈던 모든 민시 척들을 전부 다 사면시켜서 권력에 다 복귀할 수 있도록 하고
이때부터 이노에는 자주 궁을 덜락거리면서 고종과 민비를
만납니다.이 노의 사무실은 군으로부터의 손님들로 북쪽됐다라고
당시에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면서이 노에는 이제 고정하고
민비하고만 국정을 논합니다. 오히려 개화파들 남아 있는 개화파들하고는 전혀 국정을 논하지 않니다. 이러면서
이노회하고 개화파는 완전히 [음악] 갈라쓰기 시작합니다. 이때 박영효가
이렇게 얘기합니다. 어제까지도 이노에는 개화당의 친구였으나 [음악] 오늘은 구강의 친구다.
인노의 임무은 이때부터 고종한테 비자금을 전해주고 민시 척들을 일본에
유학시키는 이런 일들을에 앞장서기 시작을 합니다. 민시 척적 중에서
25세에서 34세 사이였던 청년들 20명이
일본 유학을 떠납니다. 아니면 내각은 물론 박영효가 빠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완전히 무시를 당하고 이노웨가 고정하고 민비하고
[음악] 민시척들하고 직접 조선을 조선 내정을 이어갑니다. 7월
6일 날 박영희가 내가 괴의에서 없는 자리에서 내가 교회에서 해임이 돼 버리고 7월 8일 날 일본으로
망명하고 그 이후에 8월 10일에 가서 다시
김몽집이 또 총리 대신에 임명이 됩니다. 1차 가보 기역 때 총리 대신에 임명됐던 기봉집이었죠. 2차보
기역 때는 박정양이 총리 대신이었지만 실제 권력은 내무 대신이었던 박영효가
잡고 있었던 거고 3차의 때는 다시 김홍집이 총리 대신이 내 임명이
됩니다. 그렇지만 내각은 더 이상 일본의 지원을 받지 못합니다.이 노예는 고정하고 민비 민시척들하고만
일을 합니다. 직접 돈을 주고 그러니까 사실 3차 갑경장은 완전히
표를 합니다. 정부를 뭐 개혁을 한다. 근대 개혁을 한다. 이런 목표는 완전히 상실를
하고 아주 지역적인 문제들만 건드리기 시작합니다. 3차 가보 경쟁에서 나오는 법령들이 이런 겁니다.
관려들의 부인들의 소실들의 명칭을 어떻게 할 것인가? 명책을 제정하라고
낭비를 줄이기 위해서 양반 잎히는 담배의 길이를 줄여야 된다. 남자들의 윗돌이에 섣불을 줄여야 된다.이 너무
옷감을 낭비한다. 한복이 섣을 줄이고 가챙의 넓이도 줄여야 되겠다. 외투의
색깔을 주제하고 감마를 들고 갈 수 있는 하인 숫자가 몇 명 이런 거를 이제 국가의 법령으로
계속해서 반포를 합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은 그런 안들이 나올 때마다 이게 도대체
뭐 무슨 일이냐면서 점점 점점 정부에 대한 소위 개혁에 대한 불만이
급격하게 쌓여가기 시작을 합니다. 1884년 7월 갑장이 시작해서 1차, 2차,
3차까지 오는 동안에 그 개혁의 홍수 속에서
백성들이 지쳐갑니다. 그러지 않아도 피곤하고 필요하고 되는 건 없고 혼란스럽기만 하고 그 개혁의 절정이
뭐였냐면 바로 단발력이었습니다. 상투를 자르라는 거였죠.이 상투
자르는 문제는 사실은 일본 같은 데서도 메이지신의 가장 큰 개혁 중에 하나가 사무라이들의 상투 자르는
거였습니다. 외형적으로 신분을 나타내는 것들을 다 없애야 되는 것이 근대 개혁이죠. 대표적인게 조선의
양반이 상투를 투는 거고 일본에서 사무라이들이 상투를 탔던 거죠. 그러니까 상투를 잘라버리는
큰 일을 벌리고 다 서양식으로 두발을 바꾸는게 일본의 매주신의 큰 개혁이지 않습니까? 조선에서도 이제 드디어
단발령을 내리는 거죠. 다만 조선 선비들한테 조선 양반들한테이
상투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자기 신분과 자기 정체성의 핵심이었던
거죠. 이거를 그러지 않아도 민감한 가장 민감할 수밖에 없는 개혁이고
사실 어떻게 보면 당장 필요한 개혁도 아니었는데 지금 3차 개혁을 주도하는이 김홍집 내각에서는 아이디아
부제로 뭔가를 바꾸겠다 하다 보니까 아 두 발 정리해야 되는 거구나
그래서 단발령을 내려 버립니다.이 단발령으로 완전히
전국이 뒤집어집니다. 그때까지는 문반 4대부들, 양반 4대부들은
정부가 하는 거에 대해서 그냥 감내하고 있었고 그런가 보다 하고 있었습니다. 동학 이런 데는
들고 일어나고 여러 가지 불란이 있었지만 문만 사대부들까지 양반들까지 들고
일어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때 단발력으로 인해서 드디어 문반
사대부들이 들고 일어납니다. 그때 미국 사람 한 사람이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단발령이야말로 낙타의 등을
불러뜨린 마지막 지프라기. 그러니까 영어 표현에 있지 않습니까? 어 the last draw that
broke the camels back. 아무리 지풀하기도 많이 쌓이다 보면 무게가 너무
많아져서 결국은 낙타의 등이 부러질 수밖에 없다. 뭔가 쌓이고 쌓이고 쌓였다가 마지막 촉발제 혁명의 촉발
이런 이런 거를 표현할 때 낙타등을 부어뜨린 마지막 지푸라기라고
이제 그런는데 외국 사람 미국 사람이 보고 있다가 그러는 거죠. 야, 이거 언젠가는 뭔가 이게 퍼지대 [음악]
이거 백성들이 참 잘도 참고 가만히 있다라고 생각을 했었는데이 학정과
폭정과 실정 속에서이 어지러움 속에서 그래도 잘들도 저러고 감내하고
[음악] 있구나 했던 그 문반 4대부들까지 양반들까지 드디어 들고
일어나는 걸 보고 야 저거야말로 낙타등을 [음악] 불 부 불어뜨린 마지막 지프라기
그런데 이제 거꾸로 사실은 는 that broke
the straws back 거꾸로 낙타가 지풀하게 등을 부르티는 거 같아.
이게 진짜 말도는 일을 가지고 어떻게 이런 일들이 지금 벌어지고 있느냐라면서
아주 냉수적으로 쓴 기록이 나와 있습니다. 한편 일본에서는 인노의 가오르가
부탁했던 그 300만 이것만이라도 그래도 있어야지 내가 고정하고 민비를
구워 삶아서 일말의 개혁을 조선해서 추진해 나갈 수 있을테니까 그것만
이래도 좀 통과해 달라 그러는데 일본은 당연히 이제 의회 정치를 하고 있으니까 임시회의를 열어서 의회를
개최해서 그걸 통과시켜야 되는데 임시 의회를 개최를 안 합니다. 삼국간습 정부는
엄청난 비난에 직면을 하고 있습니다. 정부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고 있는 가운데 조선한테 무슨 또 지원금을
300만 원을 준다. 이런 나안을 꺼냈다가는 당장 정부가 무너질 거다고
생각을 해서 아예 상정을 하지 않고 임시 의회 자체를 계회를 하지도 않습니다. 바로 이때에 미우라고
조선공사로 부임을 합니다. 노의 가오로 후임으로 미우라고 [음악]
을미사변을 주도하는 미우라가 조선의 공사로 일본 공사로 부입을
[음악] 합니다. 그래서 9월 3일 날 고종한테 신인장을 제초를 합니다.
사실 이노에는 자기는 미우라가 도착함은 자기는 이제 선임
공사로서 남아서 미우라를 고정하고 어 조선의 내각에 잘 소개를 하고 그리고
자기가 세워놓은 개혁을 미우라가 잘 어 그
이행하도록 그렇게 한량으로 자기는 어 남아 있었고 그리고 고종한테도 아
미우라라는 새 젊은 친구가는데 제가 그 친구를 잘 저기해서 해서 어 폐화를 도와서 이렇게 이렇게 개혁을
하겠습니다. 이렇게 얘기를 고정한 때까지 얘기를 해 놓습니다. 그런데
9월 4일 미우라가 신임장을 고종한테 신임장을 제정한 바로 다음날 미유라가
사회지로부터 온 전보를 인호한테 전합니다. 사연진은 누구냐면 사연진은
일본에 이제 귀족 귀족 출신인데 그때만 해도 와병 중이었던 무스
문네미츠 그 무스의 어 대신으로 외무 대신 서리로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외모 대신 서리가 이노한테 편지를
보냅니다. 근데 거기에 이렇게 써 있습니다. 조선의 일본 공사가 둘이
있을 수 없으니까 이노의 공께서는 귀국하십시오.
이렇게 전부가 옵니다. 그리고 경해 185호 전보에 관해서는 즉 차관
문제에 대해서는 차관을 통과시키기 위한 긴급 회의를 소집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결정이 났습니다.라는 내용을 저 미우라를 통해서
인노아한테 전하 그러니까 이노에는 뭡니까? 자기가 여태 거 다 실패했고 박영호
완전히 일본으로 다시 망명 갔고 인시척하고 고정이 다시 정권 잡았고 그런
상황에서 그나마 뭐를 해 보려고 마지막 300만 원만 엔일이라도 좀 가져와서 어떻게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을 유지해 보자. 개혁을 조금이라도 추진해 보자라고 하는 그
계획마저도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입니다. 인노에는 경로합니다.
그는 곧바로 사회원자한테 편지를 보내면서 이게 말이 되냐 이러면은
나는 이제 고정 앞에 나타을 들 수가 없다. 그리고 미우라도 앞으로 조선의 내정에 관해서 아무런
발언권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어 고정한테 가서 공서직을 사임했다라고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저는 오늘 왕에게 신임장을 반환하였습니다. 저는
더 이상 주조선 공사가 아닙니다. 그저 일계의 민간인일 뿐입니다. 나는
새 공사가 적응할 때까지 이곳에 머물 것으로 예상했었지만 이제 경은 저에게
모든 것을 그만두고 돌아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모든 것을 멈추고 내일 떠날 것입니다. 그런데
이노에는 차마이 300만엔 차관을 받을 수 없다는 얘기를 고정과
민비한테 끝까지 못합니다. 이노회가 마지막으로
고정을 아련하면서도 어쨌든 [음악] 우리 국내 문제상 이게 조금 오래 걸리지만 곧 제공이
될 것입니다. 300만 원 회학게 드리겠습니다라고 얘기를 또 해 놓고 9월 17일 날
1번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그 돈은 오지 않습니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모든 영향력이 사라져 가고 있는 가운데 민비가 주도해서 다시 민치척쪽이 러시아와 손을 잡으면서
권력을 되찾기 [음악] 시작하자 미우라가 을미사변을 일으켜서
민비를 시해하는 만행을 [음악] 저지르는 것이 그게 바로 을미 사변입니다. 일본의 영향력은 완전히
땅에 떨어집니다. 을미 사변이 일어나게 된 배경을 어
한번 살펴봤습니다. 모든 역사적인 사건들이 그렇듯이
정말로 많은 이해 관계, 정말로 많은 사건들 그리고 누구도 예측 못하는
상황 전개 속에서 이런 사건들이 벌어집니다. 우리가 그 당시에 국제정치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를 해야
되는 것이고 국내 정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간지 심지 내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걸 알아야지만 을미 사변이라는이 비극적인 사건이 왜
일어났고 그것이 어떤 영향을 실제로 [음악] 조선에 미쳤고 우리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을미사변을 일으키는
그 미우라 고로가 누군지 왜 그 사람이 어 조선의 [음악] 공사로
부임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어 실제로 을미 사변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음악]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통해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한국인의
탄생 만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 [음악]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니다.
을미사변Ⅰ[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4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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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833 views Nov 26, 2025
본 강연은 함재봉의 『한국 사람 만들기 IV: 친일개화파 2』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도서 구입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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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한국 사람은 무엇일까?"
그 질문을 시작으로 오랜 시간 '한국 사람'에 대해 연구해 온 『한국 사람 만들기』의 저자 함재봉 한국학술연구원장!
법률방송에서 함재봉 원장과 함께 역사적 사건과 인물 등을 통한 한국 사람의 정체성을 알아봅니다.
이번 시간에는 조선왕조 500년사에서 가장 참혹했던 사건, 을미사변을 다뤄볼까 합니다. 청일전쟁에서 일방적으로 승리한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를 중심으로 삼국간섭이 발생하자, 일본의 주도하에 진행되던 갑오경장에 불만을 품은 고종과 민씨 척족이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조선 정국엔 다시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결국 조선 국모의 시해라는 참변이 일어나기까지 당시 상황은 어떻게 돌아갔는지, 조선의 개혁은 또 어떤 결말을 향해갔고 또 어떻게 을미사변으로까지 이어지는지 객관적 자료를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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