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은 누구였나?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22회
법률방송
82,860 views Mar 5, 2025 #역사 #법률방송 #법률
본 강연은 함재봉의 『한국 사람 만들기 II: 친일개화파』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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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시간에는 19세기 세계적인 근대화 바람 속에서 조선의 개화와 근대화를 위해 고민하고 노력했던 인물 김옥균에 대해 알아보려고 합니다.
안동 김씨 가문이라는 배경과 영특한 능력을 가졌던 김옥균은 왜 기존 체제를 답습하지 않고, 조선의 변화를 추구했을까요? 또 그가 꿈꾼 근대 조선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조선의 개화와 함께 자주 독립국가를 꿈꿨던 인물, 김옥균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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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은 누구였나> 요약 및 평론
1. 내용 요약
강좌 22회에서 함재봉은 19세기 말 조선의 근대화를 도모한 개화파의 핵심 지도자 김옥균의 출생적 맥락과 개인적 좌절, 중인(중간 계층)과의 사상적 교류, 태극기의 창제, 그리고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치도)를 향한 고뇌와 몰락 과정을 추적한다.
(1) 신분적 출신과 개인적 울분: 안동 김씨의 몰락과 외척 민씨의 독점
장원 급제와 관직의 한계: 김옥균은 1872년 알성시(왕이 성균관에서 여는 가장 권위 있는 과거)에서 장원 급제한 인재였다. 정6품 성균관 전적으로 시작해 종5품까지 승진했으나, 고종 친정 후 세도 가문이 안동 김씨에서 여흥 민씨로 넘어가면서 실력과 관계없이 관직 승진이 막혔다.
체제 개혁의 사상적 동인: 실력 면에서 상대가 되지 않는 어린 민씨 일가(민영익, 민영준 등)가 최고 관직과 권세를 독점하자, 김옥균은 개인적 좌절과 불평등을 겪으며 낡은 성리학적 체제 자체를 개혁하려는 신사상으로 나아갔다.
(2) 중인(中人) 계층 및 불교와의 교류
역관 오경석과 한의사 유대치: 김옥균의 개화 사상은 중인 계층과의 깊은 교유에서 비롯되었다. 중국을 왕래하며 악록서원 위원의 <해국도지> 등 최신 서적을 들여온 역관 오경석과, 그의 동지인 한의사 유대치가 북촌 양반 자제(김옥균, 박영효, 서재필)들에게 세계 지식과 개화 사상을 전파했다.
불교적 내면세계와 이동인과의 연결: 유대치는 깊은 불교 신앙인으로서 김옥균에게 불교 연구를 권했다. 김옥균과 박영효의 첫 사귐 역시 불교 토론이었으며, 이러한 불교적 인맥은 훗날 범어사 출신 개화승 이동인과의 운명적 만남으로 연결되었다.
(3) 태극기 창제, 청나라로부터의 독립, 그리고 '치도양론(馳道良論)'
최초의 태극기 제작: 1882년 임오군란 후 사죄 사절단으로 일본에 가던 메이지마루 호 안에서, 박영효와 김옥균은 영국 영사 에스턴(Aston) 및 선장과 논의하여 주역의 태극과 팔계(4괘로 조정)를 바탕으로 한 조선 최초의 국기를 제작·사용했다.
대원군 납치와 '청나라로부터의 독립': 1882년 청나라가 대원군을 강제 납치·압송하자, 김옥균은 이를 조선의 자주권과 왕가에 대한 엄중한 유린으로 규정했다. 1882년 청이 강제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조선은 청의 속방임을 명시)에 분노하며, 김옥균과 개화파는 "일본이나 서구 열강처럼 청나라의 종주권에서 벗어난 완전한 독립국"을 세우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정했다.
근대화의 핵심, 도로 망과 위생(<치도양론>): 김옥균의 대표 저술인 <치도양론>은 근대화의 핵심을 '도로 정비(인프라)'로 보았다. 도로를 넓히고 똥오줌 등 오물을 치워 전염병을 막는 위생(衛生)을 확립해야 농업과 물류, 공업이 살아난다는 후쿠자와 유키치식 실용주의 근대관을 제시했다.
(4) 차관 도입의 좌절과 갑신정변이라는 파국
민씨 정권의 파행과 재정 난: 민씨 정권과 독일인 고문 멜렌도르프가 당오전을 찍어내며 물가를 폭등시키자, 김옥균은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일본 정부에 300만 엔의 차관을 요청했으나 오쿠보 도시미치 계열의 무개입 정책으로 거절당했다.
조력자들의 사망과 정변: 개화파의 핵심 조력자이던 이동인이 암살당하고, 우불 탁정식이 도쿄에서 급사하면서 개화파의 일본 인맥이 차단되었다. 더 이상 합법적 개혁이 불가능해진 김옥균은 1884년 12월 갑신정변이라는 극한의 수단을 선택했으나 3일 만에 참패하고 망명길에 올랐다.
2. 평론: 주류의 일탈이 이끈 자주독립의 열망과 역사적 한계
강좌 22회는 김옥균을 단순히 '친일 모반자'나 '급진적 계몽가'로 단평하지 않고, 조선 성리학 체제의 최고 엘리트가 겪은 사회적 모순과 자주독립을 향한 문명사적 열망의 관점에서 심층적으로 해부한다.
첫째, 엘리트의 개인적 좌절과 '중인(中人) 계급과의 결합'이 가져온 사상적 화학작용이다.
알성시 장원 급제자이자 안동 김씨 가문의 핵심 인재였던 김옥균이, 외척 민씨 세력의 관직 독점으로 겪은 개인적 울분이 기존 체제에 대한 비판적 시각으로 전환된 맥락을 정밀하게 짚었다. 특히 실무적 지식과 외신 문물을 먼저 접한 오경석, 유대치 같은 '중인 지식인'들과 깊이 결합하면서 주류 양반 체제를 깨뜨리려 한 사상적 동인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둘째, 김옥균이 정립한 '자주독립'의 사상사적 정체성 입증이다.
개화파가 부르짖은 독립이 서구나 일본이 아니라, 오랫동안 한반도를 속방(屬邦)으로 짓누르던 <청나라의 종주권>으로부터의 탈피였음을 명확히 했다. 청나라의 대원군 납치 사건을 보며 비록 정적일지라도 외세가 자국의 실권자를 압송한 것에 분노했던 김옥균의 모습을 통해, 그의 개화 운동이 주체적 자주국가를 향한 열망이었음을 재확인시킨다.
셋째, 실용적 기술관으로서의 '치도(馳道)'관과 조급함이 낳은 비극의 경고다.
<치도양론>을 통해 인프라와 위생 체계 구축이 곧 부국강병의 출발점임을 파악한 김옥균의 개혁 안목은 비범했으나, 민씨 정권의 보수화와 재정적 고립(차관 실패) 속에서 조급하게 외세(일본 무력)에 의존한 정변을 선택했던 한계를 보여준다. 이는 선각자의 열망이 현실적 세력 기반과 결합하지 못했을 때 초래되는 사상사적 비극을 서늘하게 고찰하게 만든다.
결론적으로, 함재봉의 22회 강연은 김옥균이라는 인물이 조선 왕조의 성리학적 껍질을 깨고 나와 '청나라에 종속되지 않은 근대 자주국가'를 최초로 꿈꾼 '친일 개화파 정체성'의 독보적 아이콘이었음을 증명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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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안녕하십니까 한국인의 탄생
함입니다 간에는 어 이동인이라는 화승의 삶 그리고 조선을 근대로
이끌어 가는데 어 그 사람이 한 역할에 대해서 한번 살펴봤고요 오늘은
이동인 도움을 받아서 그 개화의 바통을 이어받으면서 조선을 근대
쪽으로 이끌려고 어 이끈 개화파의 태도이기도 하고 지도자였고 어 또
가장 잘 알려진 김옥균에 대해서 좀 살펴보 도록 하겠습니다 어 우리가
막연히 어 김옥균이 개업하였다 이런 것은 알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서 개화파가 됐고 그리고 본인이 생각했을 때 개화라는게
뭐였고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이루어 가려고 노력을 했고 그리고 궁극적으로
좌절하게 되는가를 살펴봄으로써 본인은 비극적인 치유를
맞지만 어쨌든 어 조선을 새로운 어 문명으로 이끌어가는데 있어서 가장 큰
역할을 한 인물 중에 하나라서 오늘 그 사람의 면면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국인의 탄생 이제
시작하겠습니다네 김학규는 안동김 씨 어 당시 그 세도가 어 절정에 달라던
사실 안동김씨 어 집안에서 태어납니다 물론 어 그 직게 아버지와 할아버지
때는 이제 완전히 그 과거에 실패하고 그래서 몰락한 집안이었고 굉장히
어려운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자랐습니다
김병태도 과거에 실패를 하고 하여튼 무관 이제 말으로 있었고요 어머니는
삭지 해서 어 그 집안 살림을 꾸려나갈 정도였으니 사실 굉장히
양반은 양반 고 대분 대부였던 먼 친척
김병기는 사람 집으로 입양이 되면서 이제 서울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기고 어 그럽니다 서울에 가서는 양부 밑에서 그래도 공부를 할 기회가
생기고 그래서 그리고 워낙 영특하고 출중했기 때문에
1872년에 알성시 장원 급제 합니다 알성 시라는 거는 임금이 문묘에 어
참배할 때에 그때 성균관 유생들을 대상으로 직접 왕이 이제 실시를 하는
겁니다 사실 그래서 가장 권위 있는 최고의 과거였다 10는 조선조를
통해서 치료진 유적도 굉장히 적습니다 500년 5 10년 역사 속에서여 다섯 번 밖에 치러지지 않았습니다
19세기 들어서서는 11번 어 100년 동안에 번밖에 안
치러졌습니다 근데 거기에서 어 장원 급제를 했다 그러면은 사실 김옥균이
얼마나
출중했지만 바람에 곧 곧바로 이제 정육품 어 성균관 전적이라는 지위에
임명이 됩니다 집안도 안동김 시에다 본인도 똑똑하게 이럴 데가 없는데
문제는 바로 이때에 안동김씨의 세도가 끝납니다 왜 더 이상 안동김 씨가
외척이 아니거든요 고정 이 되면서 왕이 되면서 누가 외척이 됩니까 여흥민 씨가 외척이 됩니다
여흥민씨 외척 때문에 어 안동 김씨 세력이 급격히 세가 약화가 됩니다
이게 어디서 사실 드러나 나냐는 정 6품의 임명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거보다 한 단계인 종 5품 아지는 올라가요 진급을 해요 김옥균이 그런데
그다음부터 진급을 못 합니다 사실 이게 세도를 하는 집안이었습니다
쭉쭉쭉쭉 올라갔을 텐데 종 오프에서 거의 그냥 막혀 버리고 맙니다 이거를
말씀드리는 이유가 뭐냐면 어 어떤 인물이 태어날 때 위대한
인물이 탄생할 때 왜 그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죠 개인사 가족사 사회사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은 사실이 개인적인 좌절 울분 이런 것도 항상
크게 작동을 하는데 제가 봐서는 김옥균은 같은 비슷한 나이에 예를
들어서 민영익 자기보다 좀 어리지만 민영익 민영준 이런 사람들 자기가
봤을 때에는 자기하고 실력이 비교가 안 되거든요 그런데 비교도 안 되게
높은 관직에 빨리빨리 올라가고 엄청난 권세를 누립니다 민시 척 쪽이 세도를
누렸기 때문에 그런 거죠 그때는 자기 이제 그게 없었던 거죠 그러니까 실력은 있고 능력 출중한 거 분명한데
그 인정을 못 받고 실력을 발휘 못하 게 되 데서 오는 어떤 그런 울분이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 아이 체제에 대해서이 체제가 뭔가 잘못됐다 그거를
개혁해 보려고 하는 생각을 갖게 되고 다른 모델을 모색하게 되고 하는 거는 사실 그러한 배경이 저는 항상
주요하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서 정도전 본인이 모개 쪽으로 천 천민이었던
그니까 그런 경우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조선의 개국 공신 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천출 한쪽으로가 모개 쪽으로 천출이자 기존 체제에 대해서
완전히 인정을 하고 그 속에서 안락하게 모든 걸 누리면서는 사는
사람들은 당연히 그 체제를 바꿀 생각을 안 하죠 그런데 그 체제에 의해서 본인이 생각했을 때 부당한
대접을 받고 차별을 받고 그런 대접을 받으면 체제를 바꿔 보고자 하는 생각이 생기게 나름인데 저는 김균도
그런 면에서 개혁을 개화를 내걸고 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는 것도 그런 개인적인 울분이까 좌절 이런 것도
크게 작용했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어 김옥균이 사귀든 사람 중에서는
중인들이 그렇게 있었습니다 물론 사대부들 그리만 사귀는데 뭐 예를 들어서 박영도 있었고 서재필 있고
사대부 지들 어 사람들이었지만 그런 사람들은 항상 그 체제에 어쨌든
람 그런데 규는 유희도 당대의 최고의
중인 그니까 저는이 중인의 역할이라는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을 하는데 사실 조선의 근대화라는게이
중인들의 계급 혁명이라 저는 생각을 합니다 뭐냐면은 중인들은
어 그 출신 신분 때문에 할 수 있는 역할이 딱 정해져 있습니다 관직이 딱
정해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중인들이 사람들은 과거과 과도 못 보고 잡과는
실험을 봐야 되고 역관이 되기 위해서 시험을 보면은 그다음부터는 그냥 역관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역관 집안에서는 역관 계속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이 사람들은 진짜 중국 말을 하면서 중국
사람들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역관 중인들이 훨씬 더 중국을 제대로 경험을 하고 온다고
생각을 합니다 근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사람 중에선 오경석이 사람이 있었고 또 유대치 사람이 있었습니다
특히 오경석이 는 중국에가 갖고 온갖 책들을 가지고
오는 거죠 중국의 바로 그 악록서원 출신의 위원이라는 사람이 쓴 해국
도지고 당시이 개화파를 일본이나 중국이나 조선의 개화파의 필독서가 됐던 그
해국 도지는 게데 그 책을 갖고 와서 박규수 줘서 박규수가 그 책을 가지고
제자들을 모아서 그 제자가 바로 김옥균 박영요 서광범 서재필 이런 사람들이죠 북촌에 있는대 집안 젊은
똑똑한 친구들을 모아 가지고 그런 책을 읽히면서 개화를 꿈꾸게 하는데
그런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게 오경석 있니다 오경석은 또 누구냐면
그 그 미적 감각이나이 골동품 미술품 감정하고 이런 능률이 또 능력이
출중했던 사람이고 그 아들이 바로 오세창 씨입니다 오세창 씨는 누구냐면 김미 독립선언서 33인 어 삼일운동
33인 중에 한 명이기도 하지만은 당대 최고의 어 심미안을 갖고서 우리
골동품들 수집하고 화들을 갖다가 그 감정을 할 줄 알고 참 유명한
문학에도 유명했던 분인데 그러니깐 그 오경석이 이런 물건들을 가지
중국으로부터 가져와서 박수나 이런 사람들을 통해 갖고 김옥균을
만나면서 사람들을 바꾸기 시작하는데 저는 김옥균이 이런 중인들 고도
그렇게 친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이 역시 주류들 하고만 도 충분히 할 일이 많았던 사람이었다면 안 그랬을
수도 저는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워낙 똑똑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진짜
뭔가 새로운 거 놀라운 것을 가지고 오는 사람들하고 교류를 하고 싶어해서
그랬을 수도 있었겠지만 아무튼 어이 오경석 고의 만남은 굉장히 각별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 오경석고 김옥균이 만나는 그리고 김옥균 테 어떤 여향을
미쳤을까 대해서 바로 그 오경석의 아들 오세창이 기록해 놓은 것이
있습니다 부 5경 그이 중국으로부터 신 사상을 품고 돌아오자 평상 가장 친교가 있는
우인 중에 대치 유홍기 아는 동지가 있었다 대치 유대치 학식 인격이
아울로 고매 탁월하고 또 교양이 심원한 인물이었다 오경석은 중국으로부터 가지고 온 각종 신설을
그 사람에게 주어 연구를 권하였다 이래 두 사람은 사상적 농지로서 결합되어 서로 만나면 자국의 형세가
실로 풍전 등화와 같은 위험에 닥쳤음을 장 탄식하고 언젠가는 일대
혁신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상해 오고 있었다 어느 때 유대치 오경석 이게 묻기를 우리나라의
개혁을 어떻게 하면 성취할 수 있겠는가라는 먼저 동지를 북촌의 양반
자재 중에서 구하여 혁신의 기운을 일으킨 데에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얼마 안 돼요 한국 대조의 목탁 오경석은 병을 얻어 죽었다 유대 치는 오경석 다 몇 년 아래였던 오가 죽은
이후 북천 방면에 교재를 넓히고 노소를 묻지 않고 인물을 물색하여
동지를 모으고 있었다 때마침 우연히 김옥균과 서로 만나 세상 이야기를
나누 보에이 청년의 비범함을 알고 사상 인격 학제가 우뚝솟아 무리에서
빼어나고 장내 반드시 큰 일을 도모함에 충분한 인물임을 통찰하고로부터 얻은 세계 각국의 지리
역사 번역본과 신 서사를 김옥균이 읽도록 모두 제공하였다 그니까 유대
치라는 또 다른 중인 있니다 한의사라고 였었다고 들 그런데 어쨌든 중인들 끼니까 오용하고
친해졌다 그 오경석이 어 별세를 하고 나니까 그 후를이어서
유대치이 김옥균을 비롯한 북천의 양반 자재들을 모아서 개화사상을 주입하는
그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재밌는 것은 바로이 유대 치가 불교에 취했었던 사람이고 대치가 김옥
한테 불교에 대한 관심을 불어넣어 줬던 거고 저는 그래서 지난 시간에
우리가 논했던 이동인 하고의 그 만나는 고리는 바로 유대 치였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자 그러면 또 오경석 유대치 김옥균의 관계에 대해서
논하는 기록입니다 또 열심히 천하의 대세를 설명하고 한국 개조가 시급하다는 것을 역설하였다 오경석은
중국에서 감득 신 사상을 유대치게 전하여 는 이것을 균에게 전하여 이에
김옥균의 신 사상이 태어나기에 이른 것이다 오는 한국 개조의 개조의
예언자이다 김옥균은 그 담당자가 되었다 김옥균이 대치로 배운 사상
감화 이외에 특이해야 할 것은 대치의 불교 신앙이다 대치는 조선 학사들이
의뢰에는 능하지만 도에는 얕은 것을 탄식하여 김옥균을 권하여 불교 연구를
하게 하였다 대치의 불교 신앙은 참으로 두터웠다 무욕 염담 즉 욕심이 없이
마음이 깨끗하고 담담했던 인물로서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신앙의 힘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기억합니다 기록을 합니다 자 그러니까
저는이 이런 거를 생각하면 나중에 어 김옥균 그다음 세대죠 예를 들어서
서재필 윤치오 이런 화들이 기독교 사상을 받아 는 그러면서 기독교
사상으로부터 얻는 그 어떠한 그 신념 그 내면 세계의 어떤 광고함 같은
거는 어 나중에 서재필 윤치 사람은 기독교로 이제 얻어오는데 사실 이때는
어 그 오창에 하면은 사대부들이 불교에 심취하게 되는 것이 그냥
의뢰만 아니라 그 내면적인 세계의 어떠한 어 충족을 위해서라도 불교에
심취했던 것도 있고 그 불교로 이끌어진 것이 유대 치였고 저는
그래서 이동인지 연결고리가 생겼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김옥균이 불교에
심했다는 것은 박영의 증언에서 수도 있습니다 김옥균이 다른 사람들과 달리
청년 시대부터 불전의 문구나 불서 자주 입에 올리는 것은 유대치
강화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김옥균과 내가 처음 사귀게 된 것은 불교
토론에서 비롯되었다 김규은 불교를 좋아해서 불교 이야기를 했는데 나는
그것이 재미가 나서 김옥균과 친하게 되었어 내 백형이 김옥균과 사귀라고
해서 사귀게 되었지만 그때 김옥균은 27세 나는 17세였다 이랬습니다
그니까이 불교가 오경석의 유대 치에서 김옥균의 박영효 그리고 이제 결국은
이동이 내까지 연결이 되는 그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불교 있다라는 거 어 참 역사라는게 어
어떻게 흘러갈지 정말 알 수가 없 없습니다 그렇게 천대받고 차별만 받던
불교가 문명 전환기에서 또 이런 엄청난 역할을 할 수 있다라는 것은
참 어 역사의 그야말로 아이러니 동시에 역사의 묘미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김혁규는 우리가 이동인
대해서 어 살펴볼 때도 봤듯이 신사유람단 꾸리고 하는데 이제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원래 김옥균 신사유람단 하고 같이 건너가기 일본에 건너가게 돼 있었는데 부산까지
가는데 이상하게 안 건너갑니다 그래서 그냥 추정컨데 병이 갑자기 나서 못
건너간 거 같습니다 아무튼 신사유람단 다 몇 개월 늦게 일본에 따라가죠
그래서 일본에 가서 물론 일본 조야의 모든 인물들 다 만나고 후쿠사 귀치도
만나고 그러지만 맥클레이 목사한테 가서 맥클레이 목사 부인한테 부탁을 해서 부인이 그 조선 사람들을 영어를
가르쳐 주 있었다라고 제가 말씀을 드렸는데 그 맥클레이 목사가 나중에 이제 그 보빙사 간 민영익을 미국
감리교 목사님이 만나서 갑자기 조선 선교를 부탁을 해서 이제 조선에 건너오게 되고 하는 바로 그 맥클레이
어 그 목사인데 아무튼 그때에도 벌써 김옥균 하고 만나는 거죠 그러니까
이런 역할들을 하는 겁니다 여러 사람들을 만나 보면서 어떻게 서든지 건너간 유학생들이나 제대로 일본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이제 합니다 여러 사람들 만나고 후쿠다 유기체와 만나 가지고 이제 조선 이걸 꼭
도와달라고 해 갖고 굉장히 적극적으로 이제 후쿠사 그때부터 나서기 시작을 하는 거죠 자 그랬는데 그 신사유람단
본 데는 이제 다 먼저 돌아가고 자기하고 어 한 몇 사람은 좀 남아서
일본을 더 깊이 공부하겠다고 그래 갖고 그 공부를 합니다 그래 갖고
1881년 7월 달에 귀국을 하겠다 그래 갖고 나가 사기에 이제 도착을
해요 배편이 오면은 다시 귀국을 하겠다고 기다리고 있는데 무슨 소식이 들리냐 이모 군란이 터졌다는 소식이
그래서 이모 군란이 터져 가지고 일본 공사로가 있었던 하나 부사가 일본
공사관이 다 불타고 그래서 간신이 쫓겨서 목숨만 부지해 배를 타고서는
도망쳐 피신해 온 거죠 그 피신해 온 하나 부사가 나가사 학교에 도착하니까 거기에서 이제 김옥균이 만나서 자세한
얘기를 듣고 일본 인호의 가오로 보고 이거 군사 일으켜서 쳐들어간다 이동인
보내서 먼저 1년 동안 가서 그걸 해 갖고 다 일본 스님이 돼서 그리고는 도쿄로
가서 1번 조야를 다 만나고 그리고 김몽 집과 어렵게 만나서 돌아와서 갑자기 조선이 열리면서 신사유람단이
파인이 되고 통리 기무 아무이 생기고 제물포가 열리고 그래서 처음으로 자기는 따라와서 일본에 와 갖고 온갖
사람들 다 만나고 드디어 이제 우리나라를 개화를 할 수 있겠구나 시킬 수 있겠구나 하고 딱 배를
기다리고 있는데 들려오는게 뭐냐면 90 군대가 일어나 가지고는 신식 군대를 다 때려부은 것뿐만 아니라
나라가 뒤집히면서 결국은 대원군이 다시 권력을 잡은 거죠
1864년에 즉위한 고정이 10년이 지난 1874년이 되면 자기 아버지를
형선 대원군을 밀어내고 자기하고 민비가 친정을 시작을 합니다 그래서
82년까지 그 8년 동안 7년 8년 동안 완전히 쫓겨나 있었던 대원군이 다시
잡는데 대원군이 누굽니까 세국 정책 하은 사람 병인 양녀 신미 양녀
일으키면서 서양 아고 끝까지 맞서고 그리고 그 부하 안동주 외관 훈도를
있으면서 일본이 와서 아 우리가 이렇게 나라의 정권이 바뀌어서 조선하 잘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했을 때 그때
서에 파문을 일으켜서 다 거절하고 그랬었던 바로 그 대원군이 다시 골격을 잡으니까 얼마나
허탈했다 좀 일으켜서 우리 가서 이거 다시 바로 잡아야 된다 이제 이런 얘기까지 하고 그러지만 결국은 이제
그 모란에서 청이 완전히 들어와서 민시 하고 다시 잡아 버리죠 왜 다시
대원군이 권력을 잡았을 때 그때에 어떡합니까 민들이 청나라 하고 연락을 해서 원
세계가 들어와서 원세계 하고이 사람들이 어떻게해요 우리가 책봉을
해서 정통성 있는 왕위 된 고정의 왕위를 네가 가 찬탈했다 그러면서
대원군을 배에 실어 가지고 그리고 바오딩으로 데려가서 3년 동안 구금을
어 시키게 되는 거죠 그런 일이 벌어지고 나니까 민시이 다시 정권을 잡습니다 청나라 덕분에 정권을
잡습니다 따라서 청하고 친하지 일본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때에 김옥균이 일본을 따라가야
되겠다라는 청원의 꿈에 그 꿈에 부풀어서 조선에 건너 오니까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무것도 안 되는 거죠 그런데 그다음에 김옥균이 일본에
건너가게 되는 기회가 뭐냐면 이모 글란 때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일본 공사관이 불탔습니다 일본 상인들 일본
외교관들 일본 군인들이 무수히 죽었습니다 그러면서 조선 조정이 어떻게 하냐면 어쨌든 조선 사람들
때문에 1번 외교관도 죽고 군인도 죽고 민간인들이 죽었으니까 거기에 대한 주 를 하기 위해서 사제
사절단을 일본에 파견을 합니다 그 사절단의 단장으로 박영효가 임명이
되고 거기에 김옥균 따라가게 됩니다 사실 뭐 따라가는 거지만 어떻게 보면
김옥균이 더 큰 밀명을 받고 다시 일본하고 뭐를 해보려고 고정의 밀명을
받고 이제 가는 거가 되는 거죠 그래서 김옥균 서강범이 어 가는데 그때 이제 일본이 그 제공한 메이지
마루라는 지금도 도쿄에 가면 그 모델이 있는 는 일본 역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배인데 하여튼 그 메이지
마루라는 어 배를 타고 갑니다 그때에 배를 처음에 탔을 때에 배에 있는
요리사가 전속 요리사가 서양 양식 요리를 다 해주고 그러면서 너무 배가
화려하고 크고 그래서 놀래는 어 그런 장면들도 있고 그렇습니다 길을 떠나는
장계를 만들어 올리고 일제히 본선으로 향하니 일본선 이름은 명치 메이지
마루이다 타루의 오르니 참판 민영익이 벌써 배안에 도착하 기쁘게 서로 인사하였다 배 모양은
묘하고 엄한데 선장이 서양요리를 대접하였다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자 그래서 이렇게 해서 배를 타고 건너가는데이 항해가 굉장히 중요한
우리 역사에서 중요합니다 왜냐면 여기서 태극기를 만듭니다 영하고
김옥균이 여기서 태극기를 만듭니다 박영효의 어 기록입니다 이렇게 기록이
나와 있습니다 기의 표식은 명치 선중 있을 국영사 아수 스턴과 논하니 그가
말하기를 그 배의 선장인 영국 사람이 사해를 두루 다녔기 때문에 각국의 기호를 잘 알고 또 각 세계 분별과
원근의 이동도 함께 능히 화하게 한다 하므로 그와 더불어 의는 하 아니
그러니까 배를 타고 가다가 영구 영사 애던이 애던이라
사람은 무블 탁 정식한 테 한국말도 배우고 적시 하테 영어도 가르쳐주고 하던 그 턴입니다 그 스턴이 이 배
선장을 소개를 하면서 사실 아마 그랬 그랬을 것 같아요
추런 컨데 이런 거 같아요 선장이 뭐라 그러냐면 아니 이제 가면은 그래도이 대사가 그러면 이렇게 다른
나라에 한구 입항할 때는 그래도 국기를 이렇게 올리고 입항하는 거 아닙니까 그러 국기가 있습니까 이랬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국기 없는데요 그랬더니 아니 국기가 없으면 어떡합니까 그러니까 스턴이 그런 거죠
고배 있는 일본 영사 였었는데이 사람이 이제 조선도 담당하니 조선에 왔다가 배편이 흔한게 아니니까 배를
탔는데이 사과 사절단을 사제 사절단이 만난 거죠 그래서 이제 얘기를 하다가
이제 박영한 하고 김균하 얘기하다가 그렇게 얘기 했겠죠 그랬더니 지금
우리이이 선장이 내가 잘하는 사람인데이 사람이 많이 돌아다니고 있으니까 국기라는 거 어떻게 만들고
잘할테니까 한번 얘기를 들어 보자고 그래 갖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거기서부터 국기 대를 만들어야 되는 거구나 그리고 대략 이렇게 만들면
되겠구나 하는 얘기가 나옵니다 그와 더불어 논하니 태극 팔계 형식은 특별히 뛰어나 눈에 뜨지만 8개의
분포가 잠옷 조잡하여 명백하지 못한 것을 깨닫게 되며 또 각국이 일을
모방하여 만드는데 있어서 매우 불편하니 그니까 커피 하기가 자꾸 만들어내기가 힘들죠 다만
괴만들기 의 기표가 있기 마련이니 대게 기 국기와 모양을 비슷하게 하고
채색을 하고 무늬를 놓는 것인데 매우 선명하 아 아주 좋다 하였습니다
기호는 태극이 복판에 있고 팔기가기에 변폭 가장자리에 껴서 배치하는 것이
아마 좋을 듯하고 바탕은 오로지 홍색을 사용하는 것이 선명할 듯합니다 이미 각국과 통화한 후이니 무릇
외국의 사신으로 나가는 사람이 예 이상 국기가 없을 수 없는데 항구마다 각각 대포 6문 이상을 싣고 있는함을
만난다면 반드시 축포가 있어 예로서 대접을 함로 그때에 사신의 국기를
높이 달아서 일를 구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모두 이러한 여러 조건으로 국기를 만들어 가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인데 영국 미국 독일 일본의 여러 나라가 모두 그려 가기를 청하니 이것은 천하에 알려 밝히는데 관련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에 박영효가 한 카피를 만들어서 옆에 사람한테 줘서
그거를 고정한 빠로 전달하게서 이렇게 이렇게 해서 우리가 태극기는 거를
만들어서 뭐 태극기 안 불렀겠지 국기라는 걸 만들어서 이렇게 올리고
그리고 일본에 입항을 하겠습니다 이렇게 했습니다 태극기는 이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최초로 어
사용이 되는 것니다 그래서 1번에 가서 사제 사절단을 하는데 예를
들어서 일본이 이때 굉장히 적극적으로 돕습니다 어떻게 돕냐 원래 에 대해서
보상금을 내야 되는데 몇십만 엔을 내야 됩니다 근데 우선 당장 5만 엔을 내야 되는데 그 돈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일본 정부가 보장을 서줘 갖고 일본 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려서 그 돈으로 어 그 보상금을 이제 내고 이런 역할을 합니다 어
김균하 박현은 인호의 가오를 만나 갖고 외무상이 그때 외무상을 만나서
정말 우리 개화를 할테니까 좀 적극적으로 도와달라 우리는 개화파 개화당이 그러는데 일본에서는 그
화상을 독립당이라고 알았습니다 왜냐면이 사람들한테 제일 큰 문제는
중국으로부터 청나라로부터 독립이 제일 중요했거든요 일본 사람들로부터 이제 배우기 시작하면서 어 속방이라는 거
안 돼 그러면서 우리는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해야 되겠다 그래서 독립
독립해서 이제 아예 이름 자체가 독립 당으로 어 돼버립니다 그래서
노회가 자기의 제일 친하고 제일 중요 한 동지였던 어 이또 어 히로부미 테
유럽에 지금 그때 어 체류하고 있었는데이 또는 이때 그 유럽에
체류하고 있었던 이유가 헌법을 공부하기 위해서가 있었습니다 메이지 헌법을 만들기 위해서 유럽에 건너가
있었는데 아무튼이 또한테 편지를 보내 가지고 아 조선이 이렇게 이렇게 도와
달라고 그러니까 도까 말까 그랬더니 아 돕자고 이또 이러까지도 그럽니다 그런데 누가 어 그 그 제동을
거냐면이 라도 몸입니다 가장 현실주의적인 사람이죠이 와보라는 딱 보더니 지금 상황에서 우리가
청이 힘을 써서 이모 군란 잠재우고
민시이 청나라에 의지해서 모든 상황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지금 섣불리 움직이기 시작하면은 청이
우리를 괜히 의심하고 우리를 견제하기 시작할 되니까 지금 우린 그런 힘이 안 된다 여러분 이게 1882년
있니다 1894년 이되면 일본이 드디어 청하고 전쟁을 치어 보겠다 실제로
청일 전쟁을 일으키는 그때 하고는 천양지차로 아직 국력이 뒤떨어지는
때입니다 그러니까이 와보라 도면 직공 우이 그런 짓해서 안 된다 그리고
더군다나 제일 중요한 거는이 독립당이라 친구들이 우리한테 와서 이렇게 얘기하지만 민비 아고 민시
적을 이겨 갖고 조선에서 정권을 잡아서 개화를 추진할 수 있는 능력이나 실력이 있는지도 전혀 검증된
없다 아직 우리가 움직 가 아 아주 적은 금액에 차관 정도는 제공해 주는
걸로 하지만 편하는 짓 하지 말자 이렇게 해서 일본의 정책이 사실은
정해집니다 일본의 정책이 이렇게 정해지기 때문에 2년 후에 갑신정변을
일으키는데 일본이 돕지 않는
겁니다 이때 그 김옥균이 와서 이동인 전에 벌 부탁을
했지만 김기도 또 와서 부탁을하고 그러면서 계속해서 후구 다유 기지를 만납니다 처음으로 조선 사람들이
일본에 건너와서 자기한테 부탁을 하면서 개회에 와서 공부를 하게 해 달라 뭐 여기저기에 와서 일본을
배우게 해 달라고 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어 그 회고를 한 어 부분이
있는데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이달 초순에 조선인 수명이 일본 사정을 시찰하기 위하여 왔다 그중 청년 두
명이 본에 입학하여 나의 집에서 하고 있다 참으로 20여년 전 나 자신의
일을 생각하면 동정을 금할 길이 없다 이것은 조선인의 외국 유학의 처음이요
본도 또한 외국인을 최초로 입학시킨 것이니 실러 기우라 하겠다 그들
때문에 많은 조선인이 나의 집을 방문하여 조선 사장을 말하고 있는데 30년 전에 1번 사정과 유사하다 어
이동인 대해서 그 설명할 때도 말씀드렸죠 후쿠사 키치가 1860년에
샌프란시스코에 가서 정말 그 호기심을 못 이겨서 거기 있는 사진사 딸하고
사진도 찍고 있는 돈을 다 털어서 책을 갖고 오고 그러면서 적극적으로 서양을 배우려고 하는 모습 그 모습을
이동인 테서 봤었던 거고 김옥균 테서 봤었던 거고 이렇게 사람들을 끌고 와서 자기의 학교에다 사람들 맡기고
공부 좀 시켜 달라고 하는 거를 보면서 야 30년 전 우리랑 너무 닮았다 그러니까 내가 어떻게지 돕겠다
이제 이렇게 해서 후쿠사 아와 김옥균의 그 단단한 어 관계가 어 어
그 형성이 됩니다 사제지간 후구 4로부터 김옥균과 모든 개화당이 자칭타칭
독립당이라고 할 정도로 가장 중요한 것을 배운 것은 지금 중국하고 속방
관계 때문에 우리는 독립국이 아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뼈저리게이 사람들이 느끼고 조선이 개화를 하고 근대국가로
나가기 위해서 우선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해야겠다 이렇게 하는 겁니다를 만나서 요러한 것을 깨닫기 시작했을
때 개화파가 그때 상황을 말씀드렸습니다 일본은
1871년 9월 13일 날 이미 청수 조약을 맺습니다 10년 전에 이미
일본하고 중국은 서로가 대등한 국가다 인정을 하고서 근데 조약을 맺었습니다
1882년 10월 4일 날 조약을 청나라 조선하 최초에 조약을 맺습니다
82년 10월 4일 날 조청상민 수력 무역 장정이라도 조약을 체결을 합니다
이게 조선은 속방 있기 때문에 청의 일부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외국이 아닌데 조약을 맺을 일이 없는 거죠 어쩔 수 없이
조약을 맺나 왜냐면 장사를 해야 되거든요 서로가 무역을 해야 되는 거예요 이제는 청나라가 조선은
무역하는 관계가 아니고 조공 받치는 관계였어요 일일본 사람들이 부산에 와서 막 무역을 하기 시작하고
제물포에까지 오 그러니까 청에서도 이홍장 이런 사람들이 아 이 우리 가만히 있으면 안 되는 알게 되는
거죠 그래서 청나라 상인들을 갖다 보내기 시작해서 재물포 이런 데는 엄청나게 이제 몰려 들어와서 일본
상인들고 경쟁을 하고 근데 그럼 이거를 관세는 어하고 이런 거가 있어야 할 거 아니에요 그냥 마구
왔다 갔다 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외교 관계는 없는 두
나라지만 무역을 위해서 협정을 맺는다 그 그런데 여러분 그 내용을 보면요
이미 일본하고는 11년 전인 1871년에 대등한 근대 조약을
맺었지만 이때에 맺어지는 청날 아고 조선 간의 첫 번째 조약은 분명하게 합니다 조선은 청의
속방이다 조약의 전문이 서문이 이렇게 됩니다 조선은 오랜동안의 제후국으로 전례에
관한 것에 정해진 제도가 있다는 것은 다시 의논할 여지가 없다 다만 현재
각국이 수로를 통하여 로 통하여 상하고 있어 해금을 속히 열어 이제
해금을 없애고 양국 상인이 일체 상호 무역하기 해야 한다 변에서 시하는
규례도 시의에 맞게 변해야 한다 이번에 제정한 수육 무역 장정은
중국이 속방 우대하는 뜻이며 각국과 일체 같은 이득을 보도록 한데 있지
않다 이에 각 조항을 아래와 같이 정 이거 다른 나라랑 하는 통상 조약고
전혀 차원이 다르다 이거는 그냥 속국 테 여러 가지 시혜를 베푸는 거라고
생각을 해라 따라서 이거는 근대 조약이 전혀 아니다라고 해서 하는
겁니다 여러분 그러니까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이런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일본은 중국하고 벌써 10년 전에 저렇게 다 근데 조약을 대등한 조약을 맺고 그랬었는데
일본한테 저러면서 조선은 아직도 속방이라고 바로 이런 맥락이 때문에
김옥균 박영의 서제 이런 사람들은 분노를 하면서 중국을 타도하고 우리는
독립 국가를 독립을 쟁취해서 독립 국가가 돼야 되겠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때에 서재필이 나중에 김옥균에 대해서 이렇게 회고를 합니다 그 즉 김옥균은 천국의 종주권 아래에
있는 구력을 참지 못하고 어떻게 하면이 치욕에서 벗어나 조선을 세계 각국 중에 평등과 자유의 일원이 되게
하느냐 하고 불철 주야로 노심 조사하였다 그는 현대적 교육은 받지 않았으나 시대 추위를 시대의 추위를
통찰하고 조선도 강력한 현대 국가가 될 것을 절실히 바랐다 그리고 신지식을 주입하고 신 기술을
채용함으로써 정부와 일반 사회의 구투 인습을 일변 킬 필요를 확신하였다
그는 구미의 문명이 일조일석에 된 것이 아니고 열국 간의 경쟁과 노력에 의한 전진의 결과로서 몇 세기를
했는데도 일본은 이것을 1대 동안에 속성한계 이해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일본을 모델로 하기로 하고 백방 분주하였다 것이다 자
그런데 아까 제가 김옥균이 어 그 나가사키에서 귀국하려고 딱 했을 때
이모란 소식이 듣고서 군대를 보내서라도 빨리 지금 어 대원군
세력을 타도해야 되겠다라고 했다라고 말씀을 드렸는데요 실제로
대원군이 청구에서 청나라로 송이 됐다라는 소식을 듣고서는 그때에 그때에
김옥균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저는 이것이 김옥균의 독립 사상 김옥균이 갖고 있었던 독립 국가라는 것은 어떤
것이라는 개념을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 주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섭정 국부는
완고하고 대원군 있니다 섭정 국부는 완고하기 정대하 국왕 전하는
총명하지만 과단성이 부족하다 죽음으로써 국부를 설득해야 한다
라면서 어떻게든지 국부를 설득해야 된다라고 처음에는 얘기를 했다가 그다음에 청군이 그 대원군을 납치를
해 갔다는 소식을 듣고 이렇게 얘기를 했답니다 김혁규는 대원군의 구속 납치 소식을 듣자 개헌이 일어서서 천국
타도의 결심을 구였다 그는 국제정치의 정세 여하에 관계없이 국부를 속여서
그를 납치하여 가는 것은 국토를 유린하고 국민을 모욕하고 조선의 왕가를 노예로 하며 나라의 면목을
유린한 것이라고 하여 개헌이 일어나서 천국 타도를 결의한 것 같다 그가
뒷날 갑신정변 때에 오로지 한 뜻으로서 사대당 경멸을 결심한 것은
실로 대원군 납치 사건에 기인한다고 어 말하여진다
그러니까 자기랑 철학이 다르고 이념이 다르고 국가를 어느 쪽으로 가야 되는
거 쇄국을 하는 거 자기 반대하고 그렇지만 외국이 간섭을 해서 대운
권을 납채 간다 이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짓을 하는 나라하고는 종주국 속방 이런 관계
이거 절 안 된다 독립해야 된다라고 결심을 했다는 겁니다 저는 이런 면이
보면은 아 독립 국가라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김옥균이 정확히
이해를 했었구나 것 제가 어 느낍니다 이때 이제 그 영국 그러니까 주영
영국공사 해리 파스 어가 또 김옥균을 만나고 한 얘기했습니다 해리 파스는
1번에 주일 영국 공사로 몇 년을 일하면서 바로요 사건이 있 후에 이제
중국 영사로 공사로 건너갔지만 이때까지만 해들이 일본에 있어서 김옥균 어하고 교류가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때에 김옥균에 대해서 본국 정부에대 이런 보고서를
씁니다 그는 김옥균이 조선의 이해 관계를 위해서는 영국과 우호 관계를
가급적 빨리 수립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정확히 인지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이어서 자신의
생각으로는 청이 조선에 대해 펴고 있는 전책 정책은 완전히 청의 이기심의 발로이며 겉으로는 조선의
안위를 생각하는 척하지만 조선이 외국과의 관계를 증진시키고자 하는 바람을 돕기 위해서 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지금까지는 청은 조선의 이해를 증진시키기다는 오히려
호전의 진보를 막기 위해서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고 하였습니다
영국과의 우호 조약과을 기반으로 그러니까 김규은 국제 정세를 꿰 뚫었던 거죠 영국이다 영국하고 이걸
맺어야 된다 안보 조약을 맺 동맹을든지 해야 된다 해서 파크를
만서 열심히 이제 설득을 했던 겁니다 영국과의 우호 조약과이를 기반으로 한 양국간의 통상 관계는 조선이 청의
압력에 맞서는데 그 무엇보다도 큰 힘이 될 것이며 따라서 조선이 독립을
유지하는데도 큰 힘이 될 것이라고 하면서 외국 열강들과 조약이 없다면 조신 조선의 독립은 오해 유지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경계이 대화 내용 김옥균과 대화 내용을 보고
드리면서 김균 씨의 언질이 조선 정부의 견해를 완벽하게 반영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인 데는 신중해야 할
것이라는 제 의견을 아울러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아는 거죠 지금 실제로 사신으로 온 거는 박영이
하고 김옥교 아무런 공식 직함은 없는데 굉장히 중요한 사람인 거 같이 보이긴 한하고 자기한테 와서도 이런
이런 대화도 나누 거면 중요한 거 같은데 그렇다고 고종이 조선의 조종이
김옥균의 맘대로 돌아가는 거 같지 그러니까 얼마나 영국 외교관들이 빠릅니까 정확하게 사태를 파악하고 있
있다는 것이죠 그는 조약 관계가 필요하다는 자신의 신념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었겠지만 지난번 조선에서
애스턴 씨를 만났을 때 그가 보인 소극적인 태도를 놓고 볼 때 그의 신념과 그가 갖고 있는 정보가 조선의
지배계층 사이에서 얼마나 널리 공유되고 있는 것인지 의문스럽습니다 아무튼
일본을 거듭 다녀오면서 일본과 어떻게 서진 관계를 맺고 그리고 영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들 서구 열강들과 관계를 만들어 보려고 어 백방으로
노력하는 것이 그 목입니다 자 이렇게 해서 아무튼 신사유람단이 어렵게
건너가서 어렵게 그걸 보고 오고 일본도 아무튼 제한된 한도 내에서
조선의 개화를 돕겠다고 특히 후사와 육치 같은 사람은 신문을 만들라 그래 갖고 신문
제조하는 사람들까지 보내고 신문은 언문 한으로 혼용으로 만들라는 그런 것까지 다 얘기를 하면서 그걸 다
보내주고 자 그러고 박영효가 돌아와서는 그 사죄 사절단 대신으로
갔다 돌아와서는 한성부윤 임명이 됩니다 서울시장의 임명이 됩니다 그리고 일주이 신문을 맡아서 이제
신문이 나올 때가 되는 거고 그리고 서재필은 도야마 유년 어 군사 학교를
나와서 조선군에 훈련을 맞는 사관 장이든
입니다 일본에서 배 근대 식으로 이제 훈련을 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개화파가 꿈꾸는 독립당이 꿈꾸는 대로
한성부윤 군대 언론 이런 거를 이제 장악을 하면서 본격적인 개화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분위기 포부와 희망을 갖고 다들 일본으로부터 곡을
합니다 그리고 김옥균이 남긴 확실하게 김옥균의 거라고 책이라고 생각되는
여겨지는 책이 딱 하나 있습니다 그 론이란 책입니다 근데이 책이 너무나
재밌습니다 왜 재밌냐 면요 도대체 개화라는게 뭐냐 도대체 근대화라는게
뭐냐 했는데요 김학규는 치도 양론이 데서 뭐라 그러는지 아세요 도로를
놓는 것이다 어 한국이 경제 발전을 하데 있어서 우리 경제 대동맥인 뭐
경부고속도로 그렇죠 그다음에 경부선 지금 우리나라의 물류 얼마나
놀랍습니다 어딜가나 길들이 고속도로 뚫려 있고
텍스가 다니고 srt 다니고 비행기들이 다니고 정말
놀랍습니다 인프라가 깔려 있는게 도로가 조선엔 그런게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전근대 국가들이 어디나 그랬던 거죠 그러니까 근대와 요청은
도로 놓는거다 근데 이걸 어디서 배웠냐 후크 한 배웠습니다 후사가
이렇게 도로의 중요성에서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서양 제국의 문명 개화는 덕이 있는
가르침도 아니요 문학도 아니고 또는 이론도 아니다 그러면 이것을 어디에서
찾으면 되는가 나에게 있어 이것을 보면 서양 제국의 문명 개화는 인민의
교통편에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사회 교통이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것이고
서양 제국에 있어서는 일찍이 항해 기술을 연구하고 오래 전부터 서양인들은 북해 지중의 지방을 왕
했을뿐만 아니라 대양을 건너서 지구 어디에도 안 가본 것이 없을 정도이다
이거를 김옥균이 배우는 겁니다 그래서 치도 양론을 씁니다 치도 양론 내용을
잠깐 같이 살펴보겠습니다 지금은 나라 안의 기운이 크게 변하여 만국이 교통하여 수레와 배가 바다위로 마구
달리고 전선이 온세계 그물처럼 렸으며 광을 열어 그문을 캐고 쇠를 녹여
모든 기계를 만드는 등 일체 민생과 일용의 편리한 일들을 잠못 이루다 말 할수 없다 그중에서 각국의 가장
요긴한 정책을 구한다면 첫째는 위생이 둘째는 농상 이요 셋째는 도로인데이
세 가지는 비록 아시아의 성현이 나라를 다스리는 도라 해도 또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춘추 시절에도 남의 나라에 가면 우선 그 나라의 도로와 교량을 보고서 그 나라
정치의 시를 알았다고 한다 내가 일찍이 들으니 외국 사람이 우리나라에
왔다가면 반드시 사람들에게 말하 를은 산천이 비록 아름다우나 사람이 적어서
부해지는 어려울 것이다 그보다도 사람과 짐승의 똥 오줌이 길에
가득하니 이것이 더 두려운 일이다라고 한다 이것이 어찌 참아들을 말이냐
수십년 이래로 질과 역질이 가을과 여름 사이에 성행해서 한 사람이 병에 걸리면 그 병이 전염되어 100명
천명에 이루고 죽는 자가 계속해서 생기고 죽는 자의 대다수는 일을 한창할 들이었다 이것은 비 거처가
하지 못하고 음식물에 절제가 없는 것뿐만 아니라 더러운 물건이 거리에
쌓여 있어 그 독한 기운이 사람의 몸에 침입하는 까닭이다 이때를 당해서
기도하고 빌고 주문을 외우고 부적을 써붙이는 등 별짓을 다한다 또
조금이라도 의수를 아는 자는 이러한 장소에서 도망하여 다른 곳으로 가려 해도 되지 않아서 이리 닫고 저리
달려 장황하게 돌아다닌다 이리하여 요행이 살아남으면 문득 말하기를
올해는 운기가 그렇다고 할 뿐이다 날씨가 조금 추워져서 전염병의 증세가
차츰 가라앉으면 사람들은 모두 양양하게 기뻐하고 모든 일을 잊어버린다 그러니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저번에 전권대사 박영효 부사 김만식이 일본의 사신으로 갔을
때 나 옥균 또한 일본을 두루 돌아 도쿄에 두 번이나 간 일이 있었다 어느 날 두 사람은 나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장차 취도능한 학자 몇 명을 데리고 함께 본국에 돌아가 정부에 보고하고 취도 일을 급히 행하려
하는데 그대의 의견은 어떠한가 한다 우리나라는 지금 크게 경장을 해야 할 때를 당해서 그대들은 여기에 대한
소중한 책임을지고 이제 외국에 온 것이니 공명하는 날에는 여러 가지 보고들은 것을 가지고 정부의 권위에서
국가의 훈을 수립한 것이 곧 그대들의 책임인데 겨우이 치도 아는 일을 가지고 급 선물을 삼으려는 했다
그들은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에 있어서 오늘날 급히 해야 할 일은 농업을 일으키는 일보다 더한
것이 없고 농업을 일으키는 요점은 실로 전답에 걸음을 많이 주는데 있다
전답에 걸음을 부지런히 주면 더러운 것을 없앨 수 있고 더러운 것을 없애면 전염병도 없앨 수 있다 가령
농사 짓는 일이 제대로 되었다고 할지라도 운반이 불편하다면 양식이 남는 곳에 곡식을 양이 모자라는
것으로 옮길 수 없다 그러므로 길을 닦는 일이 시급히 요구된다는 것이다
길이 이미 잘 닦아 져 검화가 편하게 다닐 수 있게 되면 열 사람이 할 일을 한 사람이 할 수가 있을 것이니
나머지 아홉 사람의 힘을 공업의 기술로 돌린다면 옛날에 놀고 먹기만 하던 무리들은 모두 일정한 항구적인
직업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니 국가를 편하게 하고 백성을 이롭게 하는 것이
이보다 나은 것이 있겠는가 한다 이에 나는 일어나서 저라고 말하기를 참으로
그러하다 그대들이 말하는 위생이 농상이니 도로니 하는 것은 고금 천하에 바꿀 수 없는 올바른 법이다
법이다 내가 본국에 있을 때 일찍이 아는 친구들과이 일에 대하여 의논한 일이 있었지만 그래도 오히려 한
가지만 행하면 여러 가지가 있도록 갖추 조밀하게 해결되는 줄은 몰랐었다 나는 또 들으니 일본이 변법 한
이후로 모든 것을 경장 있지만 오 오직 도로를 닦는 공이 효력을 크게 거두었다고 한다 이에 그대들이 본국에
돌아가 정부에 보고하여 일을 행하게 하면 전일 외국에 조사받던 일이
오히려 서로 기쁘게 치하하 되지 않겠는가 우리나라가 부강해진 방법은
실로 여기에서 시작될 것이다 했다 이에 김공원 옥균게 부탁하여 치도
규칙 몇 조목을 만들어 이것을 시행토록 하라고 한다 옥균이 감히 글을 하지 못한다고 사용할 수 없어서
3과 다음과 같이 조목을 만드는 바이니 여러분들은 여기에 유의하여 채택해 주신다면 매우 다
다행스럽습니다 그러니까 도로 하나만 놓으면은 도로만 제대로 되더라도 위생 농업 경제 모든
것이 살 수 있다라는 걸 아는 거죠 그래서 박영효가 더군다나 한성 부인까지 됐으니까 서울시장까지
됐으니까 뭐 청개천 다 고치고 그렇죠 이제 이런 거 하천 다 고치고 길 쭉
뭐 아마 이런 생각을 하고 왔었죠 그래 갖고 돌아왔지만 어떻게 됐습니까
이미 군란 후에 청나라에 도움을 받아서 민시 족이 다시 정권을 잡은
후였습니다 그때에 또 돈이 모자란다고 나라에서 당호를 찍어내기 시작합니다
그도 민시이 이제 어전을 또 찍습니다 여러분 당백전 기억나시죠 경복궁을
중건 하자고 그래서 똑같은 동전인데 그냥 이거는 배다 그래서 당백전이다
인플레가 나서 몇 달 만에 그냥 취소해 버렸던 겁니다 이번에는 또
당오전 기존의 거보다 다섯 배다 소전은 똑같은데 이제 이러면서 또 찍어내기 시작하 안 된다 그런 식으로
하면은 경제 엉망 돼 버린다 또 차라리 일본에 가서 일본 같은데 가서
내가 차관을 받아 오겠다 개혁하고 돌로 놓고 하는데 그렇게 쓰자 그랬더니이 멜렌도조차도
멜렌도 누굽니까 청나라에 임명돼 조선의
해관장두석 말만 듣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김옥균이 차관을 들여와서 이런 걸 해야 되겠다 당어 쓰지 말라 그러니까 지금 고정하고
친해졌다고 위험한 일을 꾸미는 자라고 그러면서 비난을 합니다 결국은 82년
4월 23일 박영효가 한성 부윤에서 임명된지 얼만 돼서 해임이 돼
버립니다 6일 주는 통리 교섭 통상 사무화 문 직을 사직을 해버립니다 그러면서 신문을
뺏깁니다 서재필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도야마 군간 학교를 졸업하고 동생
서제 찬과 함께 와서 조선 군대를 훈련을 하려고 했는데 역시 민들한테
뺏기고 가면서이 사람들은 아무 할 일이 없이 어 밀려납니다 오시바
다꾸족 후사와 기치가 방 박영 귀국할 때 같이 보내서 6일 도와서 신문을
만들려고 했던 순보 만들라고 했던 그 사람도 아무것도 안 되니까 실망을
하고 다시 그냥 귀국을 해 버립니다 다만 귀국할 때 조선 유학생 40명을
또 데리고 갑니다 그래서 그 40명을 데리고 가서 후쿠사 또 의탁을 해서
후쿠자와가 일본 빈 군사 막사에 다이 사람들 분산시켜서 먹이고 재우고 정부
가서 실습을 받게 하고 그러면서 개화 운동을 꾸준히 어
해나가 입니다 그렇지만 국내에서의 개화파의 모든 길은 철저하게
막혀버립니다 1883년 4월 23일 날 김옥균이 동남 제도 개척사 겸 관포 경사라는데
임명이 됩니다 그러니까 고래잡이 울릉도의 나무 벌 채권 이런 거 이런 거를 그 자기가 이제 결정을 할 수
있는 위치가 됩니다 김학규는 이걸 가지고 일본에 건너갑니다 그러면서 아까도 말씀드렸죠 지금
조선은 재정이 없어요 돈이 없습니다 개혁을 하려고 무슨 정책을 팔려도 아무 돈이 없으니까 기껏 민 시들하고
멜렌도 이런 사람들 당호 전이나 찍어내고 앉아 있는 거죠 백해무익한 그런 정책들만 펴고 있으니까 처음부터
일본에서 좀 차관 좀 얻어와서 크게 한번 개혁을 일으키려고 노력을 했었는데 와보라도 모미가 아유 지금
아직시기 상조도 하지 말라 해서 못 했는데 이번에 또 가는 겁니다 300만
엔만 빌러 달라 그런데요 사실 조선정부 1년 예산이었다 돈으로 일본
정부 예산의 20% 있습니다 이거를 빌려 달라 그러면서 무슨 뭐 울릉도
벌칙이 어떻고 고래잡이 권한을 주겠다 그러니까 일본 정부가 그걸 해줄 방법이 없는 거죠 그래서 일본 정부가
도저히 못 하겠다 그럽니다 그랬더니 그다음에 이제 겉도 쇼지로 어 이런
여러 그 자유민권 운동파 사람들이 자기네들이 아는 개인적인 연출들을
이용해 갖고 은행에서 돈을 빌려주려고 그렇게 애를 쓰고 그럽니다 그런데
결국은 돈을 못 빌립니다 지금은 청나라 군데가 들어와 있고 민시 척
적들이 정권을 잡고서 개혁은 커녕 국고를 탕진을 하고 있고 나라의
성장 도력을 오히려 갉아먹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 카드였던
일본으로부터의 차관도 역시 어 무산이 돼 버립니다 그때에 또 비보가
들려옵니다 이 동인이 암살이 돼서 아무도 모르게
사라진 것도 부족해서 이번에는 무을 탁 정식이 급사를 합니다 일본에서
이동인 함께 조선의 개화를 일본과의 통교를 이끌었던 우블 정식 에스턴 테
한국말 가리키고 수많은 사람들한테 어 일본의 커넥션을 다지고 있었던 어 그
블 정식이 1884년 2월 고발에서 급사를 합니다 그래서 1884년 2월 24일
날 아 아사쿠사 도쿄 있는 홍간지 교도의 히가시 홍간지 어 벼원 이죠
도쿄 벼원에서 장례를 치릅니다 김옥균이 상 상주 있었고 수스키 앤준 오쿠마 엔신
데라다 후쿠지 그다음에 열명의 히가시 홍간지
승려들이 어 집전을 합니다 장례를 그리고 후쿠자와 기치와 본 관리들
조선 사람 50명을 포함해서 수백명이 어 문상객이 어 와서 장례를 성대하게
지내 줍니다 그리고 5월 달에 김옥균은 11개월 만에 빈손으로
귀국을 합니다 이제 모든 옵션이 사라졌습니다 모든 가능성은
내부로부터의 개혁의 어 가능성은 없어졌습니다 김옥균 하고 박영효
서재필이 대안으로 내놓 수 있는 것은 정변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은
1884년 12월 4일 날 갑신 정변을 일으키지만 3일 천하로
끝나면서 김옥균 박영혁 서재필이 사람들 몇 사람만 간신히 탈출을 해서
10년 동안 해외 유랑의 길에 또 오르게 됩니다 김옥균이 어 겪게 되는
고초 극적인 드라마틱한 삶이 결국은 해라는 어 곳에서 비극적인 종말을
맡게
되는 역사적 사건과 임무를 통해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탐구해 보는
한국인의 탄생 오늘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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