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주의자로 미화된 36년 고정간첩 김낙중
기자명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 원장
입력 2024.10.13
1993년 6월 간첩 혐의로 구속 기소된 김낙중 전 민중당 대표가 항소심 선고공판을 받기 위해 법정으로 들어서고 있다. photo 연합2020년 7월 30일 자 각 일간신문에는 ‘평화·통일운동가 김낙중 전 민중당 대표 별세’라는 기사가 게재되었다. 김낙중은 36년간 고정간첩으로 암약하다 1992년 8월 검거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인물. 과연 그가 평화주의자고 통일운동가인지 살펴보자.
김낙중은 1935년 12월 11일 경기도 파주군 탄현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부농(富農)이었다. 파주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상경하여 서울중학교와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문리대 사회학과에 입학하였으나 2학년 때 중퇴하였다. 그는 나름 여유 있는 환경에서 성장하였으나 대학 시절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된 것으로 보인다. 6·25 남침전쟁의 잔악성을 경험하고도 “조국통일을 위해서는 서로의 통치권을 승인하고 초국가적인 기관으로 고려민주연방회의를 조직, 운영해야 한다”라는 이른바 ‘통일독립청년 고려공동체 수립안’를 정립하고 통일에 기여하겠다는 망상을 가지고 1955년 6월 25일 고향집에서 가까운 임진강을 통해 자진 월북하였다.
임진강 통해 자진 월북
월북 후 김낙중은 1년 정도 대남공작부서인 연락부(현 문화교류국)의 초대소에 수용되어 간첩교육을 받았다. 또한 5개월간 인민경제대학(당 간부양성기관) 특설반에 입교하여 체계적으로 공산주의 혁명사상과 전략전술 및 대남혁명론을 이수하는 혜택을 누렸다. 김일성에게 충성맹세문을 제출한 후 지령을 받고 1956년 6월 20일 판문점을 통해 귀환하였다.
그의 공작암호명은 ‘김강천’이었다. 그는 검거 후 수사기관 조사를 받으며 북한 간첩으로 포섭된 사실을 철저히 숨겼다. 단순히 통일에 기여하기 위해 월북했는데 미제의 간첩으로 몰려 수감되었다가 겨우 풀려났다고 주장했다. 결국 간첩 혐의는 무죄를 받았고 월북 행위 등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여 대법원에서 면소 판결까지 받았다. 당시 대공수사기관과 사법체계의 허술함을 엿볼 수 있는 사례이다.
김낙중이 북한으로부터 하달받은 지령은 귀환 후 장기매복하여 노동계에 들어가 활동할 것, 노동자와 청년학생들을 포섭하여 지하조직을 구축할 것, 북한당국의 ‘평화통일호소문’을 남한당국에 전달할 것 등이었다. 그는 북한과의 비상연락선과 해외도피선까지 구축했다. 그는 1957년 10월 고려대 경제학과 2학년에 편입하여 서울대 및 고려대 출신들과 협진회, 신조회 등 지하조직을 결성하고 기관지까지 발행하며 북한 사회주의노선을 학습, 전파하였다. 고려대 후배인 정◯암과 안◯협을 포섭하여 1961년 8월 15일 임진강을 통해 월북시키기도 했다. 고려대생 10여명을 규합하여 지하조직인 북악회를 결성하고 활동하다 1963년 검거되어 3개월간 복역한 일도 있다.
그는 1968년에 고려대 대학원(경제학)을 졸업하고 1972년부터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사무국장으로 근무하면서 노동문제연구원을 개설하여 좌경 노동운동을 전파하였다. 또한 지하조직 NH회(National Humanism)를 결성하여 활동하다 1973년 정부전복음모로 수배되자 도주하여 서독을 통해 입북을 기도하다 검거되어 징역7년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그는 만기출소 후 ‘굽이치는 임진강’(1985) 등을 저술하며 자신의 활동을 통일운동, 평화운동으로 미화하고, 북한의 대남노선인 “주한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철폐, 조미(북한·미국) 평화협정 체결, 연방제통일” 등을 전파하였다. 1988년 말 자신이 정책실장으로 있는 ‘민족통일촉진회’가 주관한 세미나에 베이징대 사회대학원 교수 이상문이 찾아오자 자신의 저서와 활동사항을 북한에 전해줄 것을 부탁하였고 1990년 2월 재차 방한한 이상문 교수와 접촉하여 북한과의 연락선을 재개하였다.
안기부 관계자들이 1992년 8월 검거된 김낙중 간첩 사건을 발표하고 있다. photo 연합직파간첩 최모와 접선
그는 북한에서 보낸 직파간첩과도 접선했다. 1990년 2월 경기도 강화군 양도면 해안으로 침투한 북한 사회문화부(구 연락부, 현 문화교류국) 소속 공작원 최모(35세)가 이상문 교수를 언급하며 찾아오자 서재로 안내하여 접선하였다. 당시 김낙중은 “당신이 북한에서 왔는지 내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고 의심했는데 최모는 1955년 입북 시 김낙중의 행적을 상세히 설명하고 중국대사관으로부터 전달받은 자신의 저서를 언급하며 자살용 독약앰플을 보여주기까지 했다. 그때서야 경계를 풀고 “동조자를 포섭하여 지하망을 구축하라”라는 등의 지령을 하달받았다.
김낙중은 최모에게 평화통일연구회 사무총장 노중선(1940년생)을 하부망으로 구축하고 자금책으로 심금섭(1929년생, 청해실업 대표)을, 정치권 침투망으로 권두영(1929년생, 고려대 교수 역임, 민중당 고문)을 포섭하겠다고 보고했다. 그는 최모로부터 ‘무두봉 11’이라는 암호명을 받았고 무인포스트(간첩장비 비밀 매설장소) 설정, 간첩통신 장비, 독약앰플 등을 수령하고 관련 훈련을 받았다. 공작금으로 미화 30만달러도 수수하였는데 그때까지 북한의 공작금으로는 최대 액수였다.
김낙중은 1990년 10월 직파간첩 최모의 안내로 서울에 침투한 거물급 공작지도원 임모(65세가량)를 서울 시내 다방과 파주 고향집에서 접선하였다. 임모는 “새로이 창달될 민중당에 우리 인자를 침투시켜 민중당을 혁명의 전위당으로 육성하라. 김선생(김낙중)도 민중당에 입당하여 합법적 토대를 구축하고 이를 통해 혁명사업을 수행하라. 각종 세미나와 강연회 등을 통해 북한 노선을 지지하라. 차기 총선(국회의원 총선거)에 인자를 원내에 진출시켜라” 등의 지령을 내렸다.
1991년 10월 재차 남파된 공작지도책 임모와 다시 접선하여 “민중당 선거를 지원하겠다. 무슨 수단을 쓰더라도 국회에 진출, 원내교두보를 확보하라. 총선에 당선가능한 인사를 집중 지원하라”는 지령을 받았다. 그는 이미 약정해놓은 무인포스트에서 공작금 150만달러를 발굴하여 총 18명의 민중당 후보에게 총 7900만원씩 선거 자금을 지원했다. 북한은 1992년 총선에서 민중당이 참패하면서 해체되자 A3지령을 통해 새로운 혁신정당을 건설할 것을 다시 지령하기도 했다.
북한의 합법정당 공작
북한은 1990년대에 들어와서 혁명적 전위정당이라는 지하당 공작 외에 합법공간에서 남조선혁명전략을 수행할 ‘합법적 전위정당’, 이른바 ‘진보정당’의 구축을 위해 주력해왔다. 1980년대부터 꾸준히 확산된 종북 주사파세력 등이 1990년대 들어서 우리 사회 각계각층에 안착하였고 이들의 영향력이 사회 전반에 확대되자 자신감을 갖고 합법적인 공간에서 혁명과업을 수행하기 위한 정당 결성에 매진한 것이다. 북한은 1990년 초 대남 간첩공작부서인 ‘사회문화부’(현 문화교류국)에 ‘정당지도과’를 신설하고 진보정치세력 양성지원, 진보정당 창당 지원 및 진보정당 침투·장악 등의 공작을 전개해 왔다.
여기서 진보정당은 ‘전술당’이며, 지하당은 ‘전략당’의 위상을 갖는다. 북한은 전술적 차원에서 한국의 변화된 정세에 부응하여 합법공간에 진보정당을 구축하여 활용하고 혁명의 주·객관적 상황(이른바 결정적 시기)이 조성되면 혁명의 참모부이자 사령탑인 혁명적 전위정당인 지하당 주도로 봉기하여 혁명을 완수하려는 목표를 세웠다. 북한이 고정간첩 김낙중을 통해 민중당 창당공작을 지령한 것도 그런 전략의 일환이었다. 그 결과 1990년 11월 10일 민중당 창당대회에서 김낙중은 공동대표로 선출되었다.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거물급 여간첩 이선실이 10년간 국내에 암악하며 민중당 창당공작에 매진해왔는데, 이선실망과 김낙중망은 구분된다는 점이다. 이외에도 또 다른 간첩 손병선망을 구축하여 침투하는 등 북한은 이른바 복선포치(複線布置)의 전형적 양태를 보여주었다.
김낙중은 그간의 간첩활동 공로를 인정받아 1991년 10월 김일성 훈장을 받았으며 같은 해 12월에는 조국통일상을 받았다. 이때 거물급 직파간첩 임모를 통해 김일성이 보낸 산삼과 녹용을 받기도 했다.
김일성 훈장과 210만달러의 공작금 수령
김낙중이 북한에서 받은 공작금은 확인된 것만 3회에 걸쳐 미화 210만달러(당시 우리돈 15억원 정도)다. 이 중 110만달러는 남대문시장 등에서 암달러상을 통해 쪼개서 환전하여 공작금으로 사용하였고, 100만달러는 자신의 집 장독대 밑에 비닐봉지로 밀봉하여 보관했다가 압수되었다. 그가 받은 공작금은 역대 최고액이었다. 36년간 암약한 고정간첩 김낙중은 하부망 심금섭, 노중선, 권두영과 함께 1992년 8월 안기부(현 국정원)에 의해 검거되었다.
당시 안기부(현 국정원)가 노획한 물품을 보면, 권총 1정, 실탄 48발, 소음기 1개, 대북송신용 메모리식 무전기 1대, A3 지령 수신용 단파라디오 2대, 난수표, 기본암호표, 약어 등 간첩통신문, 자살용 독약앰플 4개, 대북보고용 은서 만년필 및 해독약품, 공작금 보관액 100만달러 등 총 60여종 150여점이었다.
간첩에게 관대한 사법시스템
김낙중은 1993년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5년도 안 되어 김대중 정부 때인 1998년 8월 형집행정지로 출소했다. 출소 후 자신의 간첩활동을 참회하고 반성하기는커녕 평화운동가, 통일운동가로 자신을 미화하며 언론 기고, 대담, 강연 활동 등을 통해 국가보안법 철폐, 미군 철수, 핵무기 철거, 양심수 석방, 연방제통일 등 북한 노선을 대변하고 다녔다. 2006년 국정원과거사건진실규명을통한발전위원회(2004년 노무현정부 발족)는 조사 결과를 통해 김낙중이 북한 공작원을 접선하고 공작금 210만달러와 공작장비를 받은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김낙중이 간첩이 맞다는 발표다. 김낙중은 2020년 8월 8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김낙중은 통일운동가인가? 통일운동가는 맞는데 ‘자유민주 통일운동가’가 아니라 ‘적화 통일운동가’였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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