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명의 하이라루 - 육군 특무부대장 김창룡 장군 비망록
김창룡 (지은이),남정옥 (엮은이)청미디어2022


책소개
대한민국 반공의 상징인 육군 특무부대장 김창룡 장군이 생전에 기록해 둔 대공수사 비망록. 일제 강점기로부터 해방 전후, 그리고 대한민국 건국을 거쳐 6·25 전쟁 전후를 아우르고 있는 국군의 대공수사 기록물이자 대한민국의 반공 역사이다. 60여 년 전 건국 전후의 혼란과 6·25의 동족상잔의 아픔, 그리고 전후 분단이라는 절체절명의 국가적 위기 속에서 우리나라와 국민 그리고 우리 군과 장병들, 특히 김창룡 장군이 지휘했던 특무부대원들이 북한 공산주의에 맞서 목숨 걸고 싸웠던 대한민국 현대사의 중요한 부분을 다루고 있다.
목차
^^제1부
Ⅰ. 운명의 시간, 하이라루 5년^^
1. 하이라루의 첫날 밤 … 18
2. 3년간의 중국인 ‘뽀이(boy)’ 생활 … 23
3. 국제공산당원 왕근례의 체포와 그의 전향 … 30
4. 고력두는 제2의 직업 … 40
^^Ⅱ. 조국의 품으로^^
1. 고향으로 … 46
2. 철원에서의 피검 … 53
3. 사형선고와 탈출 … 56
4. 두 번째의 사형선고 … 66
5. 소련 장교 타살과 38도선 월경 … 71
6. 남한의 하늘 밑에서 … 79
^^Ⅲ. 무너진 붉은 아성^^
1. 공산당의 발악상과 숙군의 동기 … 84
2. 초대 군감사령관 이병주 체포기 … 94
3. 제1연대 장병 몰살계획 사건 … 100
4. 숙군의 전야 … 106
5. 오일균 소령 체포기 … 109
6. 김종석 중령 체포기 … 114
7. 최남근 중령 체포기 … 119
8. 미소공동위원회 소련대표의 촬영 사건 … 123
^^Ⅳ. 남로당의 근멸^^
1. 남로당 군사부 세포 김영식 체포기 … 128
2. 남로당 특수부책 이재복 체포기 … 131
3. 남로당 조직부장 이중업의 체포와 그의 탈출 … 138
4. 김삼룡의 비서 특수조직책 김형육의 전향 … 146
5. 이중업의 탈출 계획 … 149
6. 이중업 탈출의 밤 … 152
7. 이중업의 보복행위와 그의 월북 … 155
8. 남로당 위원장 김삼룡, 이주하의 말로 … 160
(1) 김삼룡의 체포기
(2) 이주하 체포기
9. 민보단장 000 변사사건의 진상 … 167
^^Ⅴ. 6·25이후의 좌익 발악상^^
1. 인민공화당 경남위원장 김동산 체포기 … 174
2. 승려를 가장한 남로당원 … 178
3. 걸인 유격대 체포기 … 181
4. 남로당 경남도 도당책 안소주 체포기 … 186
5. 밀매음의 여성유격대 … 188
6. 국군 위문을 가장한 여학생 인애회사건 … 192
7. 북한 괴뢰 유격대와의 결전 … 195
8. 인민재판준비위원회 사건 … 199
9. 인민해방군 사건 진상 … 202
^^제2부
Ⅰ. 천인공노할 197명의 학살 사건 … 208
Ⅱ. 일본인 중공군 전사 생포 사건 … 215
Ⅲ. 상이포로로 가장한 괴뢰 간첩 … 219
Ⅳ. 지리산 공비들의 부산 침투 … 224
Ⅴ. 대구시당 재건공작의 전야 … 231
Ⅵ. 공산당의 남북협상 음모 내막 … 238
Ⅶ. 유엔군을 아편으로 마취시키려는 적 … 244
Ⅷ. 조병창 방화범, 석방과 재체포 … 250
Ⅸ. 미장원을 경영하던 부부 간첩 … 259
Ⅹ. 국군을 가장한 무장 공작원 … 264
Ⅺ. 적십자 북한 괴뢰 대표와의 도모기 … 269
Ⅻ. 중공 간첩 체포기 … 274
ⅩⅢ. 북한 괴뢰 유격총사령 남도부 체포기 … 280
^^제3부
Ⅰ. 제2의 위조지폐 사건^^
1. 주범 손근욱의 악몽 … 292
2. 제2의 위조지폐 계획 … 297
3. 실천의 길로 … 300
4. 새로운 공포 … 303
5. 체포되는 날 … 307
^^Ⅱ. 붉은 밀사의 최후 : 소위 대남 평화사절 사건^^
1. 김평의 반생 … 313
2. 공산주의 유혹 … 316
3. 남하 준비 … 319
4. 청계장 마담 … 323
5. 일로(一路) 부산으로 … 327
6. 김평의 새로운 계획 … 330
7. 월하의 고백 … 335
8. 김평의 체포와 처형 … 344
^^Ⅲ. 이조실록 탈취 사건^^
1. 심상구의 반생기 … 351
2. 모욕과 자존심 … 355
3. 여(女) 밀정 이연이의 재현 … 358
4. 이조실록 탈취의 명령 … 363
^^Ⅳ. 김일성의 전속 간호원 조옥희^^
1. 김일성의 전속 간호원이 되기까지 … 371
2. 김성주와 김일성 … 380
3. 장군 부인의 질투 … 388
4. 관저 내의 죄악상 … 392
5. 한국동란 발발의 진상 … 397
6. 자유로운 질서의 위력 … 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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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김창룡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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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룡 장군은 1916년 함경남도 영흥에서 태어나 영흥공립농잠학교를 마치고 영흥군청을 다니다가 만주로 가서 철도학교를 졸업한 후 역무원으로 근무 중 일본군에 강제 입대하게 되었다.
일본 관동군 헌병대에 배치된 김 장군은 그로부터 필생의 업으로 대공(對共) 업무를 맡게 되었다.
해방 후 월남하여, 1947년 육군사관학교 제3기 정보과 소위로 임관한 이후 방첩대장, 군·검·경 합동 수사본부장 등을 지냈고, 6·25전쟁시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하였으며, 1951년 육군특무부대장, 1953년 준장, 1955년 소장으로 진급하며 대공업무의 최선봉에서 자유대한민국 건립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전쟁 후 매우 혼란했던 시기에 국방부 원면(原綿)부정사건 특무대 내사, 대통령 특명에 의해 군내 축첩자(蓄妾者)내사 활동을 하다가 1956년 대통령께 업무 보고를 하기 위해 출근하던 중 암살당해 국군 최초 국방장(중장 추서)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접기
최근작 : <숙명의 하이라루>
남정옥 (엮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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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대학교 졸업. 단국대학교 졸업 미국 현대사 전공. 단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문학박사. 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현 우남이승만연구회 이사. 주요 논문 및 저서로는 '한미군사관계사', '한국전쟁사의 새로운 연구', '6.25 전쟁자', '알아봅시다! 6.25 전쟁사', '전투지휘의 실과 허', '한국전쟁 주요 10대 전투고찰', '국민방위군', '미국 군사전략의 발전과 분석 고찰', '미국의 마샬Marshall 계획과 유럽통합정책', '미국 트루먼 행정부의 대율업정책', '미국의 국제전쟁 개입원인과 국가안보', '한국전... 더보기
최근작 : <숙명의 하이라루>,<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대한민국과 함께 한 국군과 주한미군 70년> … 총 21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이 책은 대한민국 반공의 상징인 육군 특무부대장 김창룡(金昌龍, 1916~1956) 장군이 생전에 기록해 둔 대공수사 비망록이다. 평생을 공산주의자들을 상대하며 대공(對共) 분야에서 올곧은 삶을 살았던 김창룡 장군은 자신이 수행해 왔던 대공 관계 일들을 주요 사건별로 분류하여 200자 원고지 1,600장에 기록해 놓았다. 이 기록들은 김창룡 장군이 1956년 순직한 이후 미망인 도상원(都相媛) 여사가 보관해 오다가 2022년 김창룡 장군 순직 66주기를 맞이하여 장군의 따님인 김미경·미영 두 자매의 지극한 소망에 따라 단행본으로 발간하게 된 것이다.
이 책은 일제 강점기로부터 해방 전후, 그리고 대한민국 건국을 거쳐 6·25 전쟁 전후를 아우르고 있는 국군의 대공수사 기록물이자 대한민국의 반공 역사이다. 이 책은 김창룡 장군이 일제 강점기 공산주의와 싸웠던 시절의 회상으로부터 시작된다. 김창룡 장군의 공산주의와의 싸움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자신의 강한 신념과 이에 반한 공산주의에 대한 강한 불신에서 비롯됐다. 그때부터 그는 공산세력의 발본색원에 진력한다. 그 과정에서 그는 강압적이거나 반인권적인 방법 대신에 보다 과학적인 수사방법을 택하였다. 그 결과 대한민국을 공산주의 침략에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반공 국가로 다져 나갔고, 국군을 공산주의와 싸워 이길 수 있는 믿음직스러운 반공 군대로 태어나게 했다. 이 책에는 김창룡 장군의 그런 반공 비사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은 60여 년 전 건국 전후의 혼란과 6·25의 동족상잔의 아픔, 그리고 전후(戰後) 분단이라는 절체절명의 국가적 위기 속에서 우리나라와 국민 그리고 우리 군과 장병들, 특히 김창룡 장군이 지휘했던 특무부대원들이 북한 공산주의에 맞서 목숨 걸고 싸웠던 대한민국 현대사의 중요한 부분을 다루고 있다. 이 시기는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결코 떼어내 버리거나 부정할 수 없는 대한민국의 엄연한 역사임에 틀림없다. 그런 점에서 이 기록은 대한민국의 반공투쟁사이자 국군의 반공건군사(反共建軍史)이며 특무부대의 대공수사기록(對共搜査記記錄)이라고 할 수 있다. 접기
1956년 1월 30일, 이승만 정부의 정보기관장이던 육군 특무부대장 김창룡 소장이 출근길에 암살되었다. 현직 육군 대령이 지휘한 암살단의 배후에는 현직 제2군사령관(중장)에 이어 육군 참모총장까지 있었다. 이 사건은 건국 이후 국가권력 핵심부에서 벌어진 최대의 정치·군사 사건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7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사건의 실체는 충분히 규명되지 못하였다. 더구나 오늘날 대다수 한국인에게 김창룡은 ‘독재정권의 비밀경찰’, ‘고문과 조작의 상징’, ‘김구 암살의 배후’로 기억된다.
하지만 그러한 이미지는 과연 사실에 입각한 것인가. 『김창룡의 재조명』은 대한민국 건국과 호국의 격동기 속에서 사실상의 국가 정보기관장 김창룡이 실제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왜 그는 도중에 흉탄에 쓰러졌는지를 새롭게 추적한 연구서이다.
이 책은 김창룡 암살사건 재판기록, 군 자료, 당시 언론, 회고록과 증언 등을 종합 분석하여 사건의 실상을 복원하는 한편, 김창룡이라는 인물이 사후 어떻게 대한민국 현대사의 ‘악인’으로 재구성되었는지도 함께 추적한다. 아울러 이 책은 건국 초기 한국 정치가 왜 파동과 투쟁으로 점철되었는지도 구명한다. 이 책은 제목 ‘김창룡의 재조명’에 머물지 않고 그가 몸담았던 이승만 시대의 정치에 대한 전면적 재해석도 시도한다.
목차
발간사
머리말
제1부 김창룡 사건의 진실과 왜곡
1 1956년 특무부대장 김창룡 암살 사건의 진상
2 6·25전쟁 후 육군 특무부대 팽창과 작전계통과의 충돌
3 한국 현대사의 악인이 된 김창룡
보론 김창룡 장군 유족의 KBS 사자명예훼손 손해배상청구 사건 판결
4 대한민국 건국기 군 정보수사기구의 조직과 활동
제2부 한국 정치의 원형
5 대한민국 초창기 정치사의 재해석
제3부 나의 아버지 김창룡
6 아버지의 아리아
7 오래 기다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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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 77 • (김창룡 암살 사건의 진상) 1956년 1월 육군 특무부대장 김창룡 암살사건의 본질은 군 고위층의 비리를 파헤치던 김창룡과, 그 수사망에 포착된 정일권 파벌 사이의 정면충돌이었다. 김창룡이 ‘국방부 원면 부정 사건’에 대한 수사 내용을 이승만에게 직보하려 들자, 정일권 파벌은 대대적 숙군에 따른 공멸 위기를 직감했다. 이에 정일권은 허태영의 약점과 자신의 권력을 활용해 암살을 기획·유도하고, 사건 이후에도 허위 보고, 수사 정보 유출, 도피자금 제공 등 사후 수습에 개입했다. 실행은 허태영 일당의 몫이었으나, 그 배후에는 비리 폭로를 두려워한 정일권 파벌의 조직적 암살 음모가 개입되어 있었다. 요컨대, 김창룡은 정일권 파벌과 부패와의 전쟁에서 희생당한 순국자였다. 접기
P. 80 • (암살의 배후 정일권, 강문봉이 제대로 처벌되지 않은 이유) 이승만은 정일권 기소에 따른 함경도 파벌의 연공합작 쿠데타 등 군부 파열과 급변 사태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은 강문봉의 감형과 정일권의 불기소라는 소프트 랜딩soft-landing으로 사건을 갈무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군 내부의 동요와 파열을 저지하고 사건을 조속히 수습하려는 이승만 대통령의 고뇌에 찬 결단이었다. 접기
P. 133 • (이승만 대통령의 군 관리와 김창룡 암살) 6·25전쟁을 겪으면서 군부가 가장 영향력이 큰 사회집단으로 성장하고 대통령의 통치권까지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자 이승만은 군내 파벌을 조성해서 서로 경쟁시키고 자신에 대한 충성심을 유도하는 통치술을 구사했다. 백선엽파, 정일권파, 이형근파 등 3개 군벌이 군지도부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군벌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는 군내부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필요했다. 이승만은 특무부대를 활용해서 그러한 정보를 수집, 통치권 행사에 활용했다....
김창룡 특무부대장의 개인적 캐릭터와 함께 그에게 그러한 권한을 부여해준 법률적·제도적 요인이 중첩되어 특무대의 기능이 팽창하고, 그 결과 군의 지휘권이 작전권한과 정보권한으로 이원화되면서 결국 두 권한이 충돌하여 김창룡 특무부대장이 암살되는 사건을 낳았다. 국가최고통치권자인 대통령에게 필요한 정보를 범정부 차원에서 종합하여 보고하고, 부문정보기관을 통합·조정하는 권한을 가진 별도의 국가정보기관이 없었던 당시의 국가정보구조적 결함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접기
P. 182~184 • (김창룡 악인화는 국가 서사의 변화 때문) 세계 냉전체제 속에서 반공 투쟁을 통해 건국된 자유국이라는 국가 서사가 지배적이던 1950년대에는 김창룡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 몸을 바친 모범적 군인이었다... 그는 이 나라 타공사打共史에 찬연히 빛나는 공훈을 세운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1960~70년대에 국가 서사에 변화가 왔다. 박정희는 자신의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지난 이승만 정권을 비하했으며 이승만을 격하하고 김구를 상찬하였다. 국가 서사에서 반공주의에 민족주의가 더해졌다. 이와 함께 역사학계에서 민족주의가 강화되었는데, 그에 수반하여 1970년대 말부터 반공국가의 정당성을 문제삼는 분단체제론, 친일미청산론이 등장하였고 이는 1980년대에 민중민족주의 역사학으로 발전하였다.
민중민족주의 역사학에서 1948년 대한민국의 건국은 국토와 국민을 폭력으로 두 동강내고 통일을 염원하는 수많은 국민과 지사들을 탄압한 일대 해악害惡으로 서술된다... 민중민족주의 역사학은 처음엔, 좌익 폭동의 진압 과정에서 무고한 양민이 희생되었다는 국가폭력 서사를 만들고 그에 기반해 희생자 추모 및 명예회복운동을 벌였다. 이것이 4·3 특별법 등으로 공식적 지위를 얻자 이 역사학은 더 나아가 타공 투쟁 자체를 국가폭력으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과거 제주4·3폭동, 여순반란으로 불리던 것이 교과서에서는 제주4·3사건, 여수순천10·19사건이라 쓰이고,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4·3항쟁, 여순항쟁으로까지 불린다... 국가에 대한 반역이 부당한 지배체제에 대한 항쟁으로 완전히 탈바꿈했다...
이렇게 국가 서사가 바뀌자, 타공 투쟁의 대표 전사요 공훈자이던 김창룡은 ‘고문-조작의 기술자’를 거쳐서 친일-반민족-냉전 폭력의 상징이 되었다. 김창룡이 오늘날 한국 현대사의 일대 악인, 빌런이 된 것은 새로 밝혀진 그의 행적 때문이 아니라, 국가 서사에서 냉전 정당성보다 민족 정당성이 우선시되고 자유민주주의보다 통일민족국가가 더 중시되는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접기
• (KBS 사자명예훼손 소송) KBS가 허위 사실로 사자(死者) 김창룡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유족의 소송은 1심부터 3심 대법원에서까지 모두 기각되었다. 재판부는 드라마 제작진이 김창룡을 김구 암살 배후로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고 판단하여 제작진에게 사실 여부의 검증 책임을 면책하였다. 이 판결은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사실을 악용하여 역사를 왜곡하는 행위를 사실상 방치한 것이다(현성삼, 제3장 보론) 접기
P. 251~252 • (이승만 정부의 특무대에 대한 평가) 이승만이 설치한 한국군 방첩대, 그리고 후속의 육군 특무부대는 이념적 투쟁과 혼란의 시기에 국가 유지에 필수적인 방첩 활동을 하였다. 방첩대와 후속 육군 특무부대는 남로당의 남한 내 조직과 북로당이 파견한 간첩 등에 의한 사회혼란, 폭동, 반란의 정보를 수집하고 정부에 보고함으로써 대한민국 정부는 그것들에 대응하는 방안을 갖출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정보기구는 부패 등에 대하여서도 이를 미연에 방지하거나 수습하는 데 앞장섰다. 따라서 건국기의 군 정보수사기구는 당시의 국가안보와 사회 안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접기
P. 291 • (당쟁하는 마음으로 작성된 제헌헌법) 신익희가 헌법기초위원회에 이승만도 내각제에 찬성했다고 전한 것은 그의 의도적인 와전임이 분명하다. 당시 이승만은 누구보다 강력한 영향력의 지도자였으며, 그를 배제하고선 새로운 나라의 성립을 선포하기 힘든 실정이었다. 달리 말해 이승만은 새로운 나라의 정부형태에 관해 누구보다 강력한 발언권을 보유하였다. 그런 사람의 입장을 듣지 않고 신익희 등이 사사롭게 헌법 초안을 작성하고 국회의 심의에 부친 것 자체가 졸속일 뿐 아니라 당파적이었다....(283쪽) 1948년 이 나라의 헌법 제정에 참여한 법률가나 정치인 대다수는 ... 헌법이 대통령에게 부여한 각종 권리와 특권을 통해 대통령 권력이 국회가 통제할 수 없는 전제정치로 변질할 위험성을 방지하는 데만 특별한 관심을 쏟았다. 그것은 장차 대통령으로 선출될 이승만과 대립해 온 정치세력의 당쟁하는 마음이기도 하였다. 이 같은 배경에서 1948년 당시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4년 임기에 1차 중임이라는 대통령 임기 규정이 이후 두고두고 이어질 정변의 불씨로 헌법에 심어졌다. 접기
P. 314~315 • (이승만은 독재자였나) 김성수가 이승만 대통령을 독재자로 규탄하였을 때 그 독재는 문자 그대로 인사나 국정을 홀로 재단한다는 뜻이었다. 그러한 지도자의 행태는 전통시대의 도덕정치가 금기시한 바였다. 매사에 원만하고 중용을 취하는 김성수의 성품은 부지불식간에 도덕정치의 원리를 재현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같은 수준의 독재와 그로 인해 발생한 실정에 책임을 지지 않은 것을 두고 근대 정치사에서 때때로 출현하여 국민의 자유 제권을 억압하고, 법의 지배를 부정하거나 의회권력을 해산하거나 정적을 수용하거나 살해하는, 그 전형을 히틀러,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 등에서 확인하는 이념 내지 계급의 독재와 같은 것으로 감각하는 것만큼 커다란 범주 착오도 없을 것이다. 김성수가 선창한 이승만 독재론은 전통시대의 도덕정치가 비판한 문자 그대로의 독재에, 관점을 달리하면 대통령제의 충실한 실현에 다름이 아니었다.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이영훈 (지은이)
서울대에서 한국경제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신대, 성균관대를 거쳐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로 정년퇴직, 현재 이승만학당의 교장으로 활동 중이다. 『조선후기사회경제사』(한길사, 1988),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공저, 서울대출판부, 2004), 『대한민국역사』(기파랑, 2013), 『한국경제사』 Ⅰ, Ⅱ(일조각, 2016), 『반일 종족주의』1·2권(공저, 미래사, 2019~2020) 등의 저서가 있다.
최근작 : <김창룡의 재조명>,<반일 종족의 역사 내란>,<숨결이 혁명 될 때 : 박정희정신의 모든 것> … 총 29종 (모두보기)
주익종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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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에서 일제하 한국경제사 연구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을 거쳐 현재 이승만학당 이사로서 한국 근현대사 연구와 교육 업무를 하고 있다. 『대군의 척후』(2008), 『고도성장 시대를 열다』(공저, 2017),『반일 종족주의』1·2권(공저, 2019~2020), 『일본군 위안부 인사이드 아웃』(2023) 등의 저서가 있다.
최근작 : <김창룡의 재조명>,<반일 종족의 역사 내란>,<일본군 위안부 인사이드 아웃> … 총 17종 (모두보기)
정안기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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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대학(京都大學)에서 일본경제사 연구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학술진흥재단(JSPS) 특별연구원, 고려대학교 연구교수, 서울대학교 객원연구원을 거쳐 현재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과 한국연구재단(NRF) 인문사회학술연구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테러리스트 김구』(미래사, 2024), 『충성과 반역』(조갑제닷컴, 2020), 공저로는 『김창룡 재조명』(이승만북스, 2026), 『반일 종족주의와의 투쟁』(미래사, 2020), 『반일 종족주의』(미래사, 2019) 등이 있다.
최근작 : <반역자 김구>,<김창룡의 재조명>,<테러리스트 김구> … 총 14종 (모두보기)
정주진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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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에서 정책정보관으로 30년간 일하고 정년 퇴직후 연세대 국가관리연구원에서 외국과 차별적인 한국적 국가정보의 특성에 대해 중점 연구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박정희와 김일성의 스파이전쟁』(2021), 『김창룡 특무대장 암살사건 해부』(2022), 『한권으로 읽는 국정원법 이야기』(2023), 『이후락과 그의 시대』(2025) 등이 있다.
그 외 국가정보학회에서 발간하는 학술지 『국가정보연구』에 「소련 군정기 북한정보체계 형성과정」(2018) 등 다수 논문을 게재했다.
최근작 : <한국형 정보기관>,<김창룡의 재조명>,<이후락과 그의 시대> … 총 13종 (모두보기)
윤서하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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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기무사령부 및 육군 정보부대에서 28년을 근무하고 명예퇴직하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군 정보기구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관으로 근무하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사학 박사학위 과정 중에 있으며 6.25 당시 군 정보수사기구의 활동과 한미동맹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최근작 : <김창룡의 재조명>
현성삼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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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법과대학과 동아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졸업 후 제2회 변호사시험에 합격하여 현재 부산의 법무법인 청안로 변호사로 근무 중이다. 한반도 인권과 통일을 위한 변호사모임 부산지부장을 역임했으며 부정선거 감시 운동 등 공익 변론 활동을 펼쳤다. 저서로 『STOP THE STEAL 대법원의 부정선거 은폐기록』(공저, 2025)이 있다.
최근작 : <김창룡의 재조명>,<STOP THE STEAL 대법원의 부정선거 은폐기록> … 총 2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김창룡은 누구인가?
1916년 함남 영흥 출생. 만주의 일본군 헌병대에서 공산주의자 수사의 실무를 익혔고, 1946년 월남 후 대한민국 육군에 투신하였다. 해방후 남한에서 공산 세력은 미국 후원 하의 대한민국 건국을 저지하려 대규모 폭동을 일으켰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 후에도 남북 공산 세력은 국회와 사법부 내 첩자 침투, 군대의 반란, 무장유격대 파견으로 신생 국가의 내부 전복을 기도하였다. 이때 김창룡은 미군정의 CIC를 모델로 형성된 한국군 정보수사기구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며 군 내외 공산주의 세력 색출에 앞장섰다. 그는 대한민국 국가 수호와 안보 역량 구축의 핵심 공신이었다. 그는 1951년 육군 특무부대장에 취임한 뒤, 1956년 1월 암살당할 때까지 이승만 대통령의 신임을 바탕으로 정부 최고의 정보기관장으로 활동하였다.
그의 대공 수사는 집요하고 철저했다. 그는 혐의만으로 서둘러 체포하지 않았으며, 확실한 증거가 포착될 때까지 몇 달이고 잠복과 미행을 거듭하였다. 유족과 부하들의 기억에 의하면 그는 청렴하고 강직한 군인이었다. 계절별 두 벌의 군복이 그가 가진 외출복의 전부였고, 5년 가까이 정보기관장직에 있었지만 부정하게 남긴 재산은 한 푼도 없었다. 신상필벌에 엄격하여 부하들은 그를 두려워했지만, 사적으로는 자애로운 상관이었다. 그는 장교와 사병의 식당 구분을 없앴으며, 일상 대화에선 하급자에게도 경어를 썼다. 일이 바쁘면 사무실 야전침대에서 군복을 입은 채 잠들곤 했다는 부하들의 증언도 남아 있다.
하지만 1956년 1월, 김창룡은 일단의 군부 인사들에 의해 암살되었다. 이 사건은 단순한 개인 원한 사건이 아니라, 특무부대의 군 비리 수사와 군벌 간 갈등, 작전계통과 정보계통의 충돌, 이승만의 군 통제체제와 군 파벌의 대립이 한꺼번에 폭발한 사건이었다. 본서는 암살사건 재판기록을 토대로 그 과정을 치밀하게 복원한다.
특무기관장은 왜 육군 참모총장 일당에 의해 암살되었나?
1956년 1월 30일 아침, 출근길에 나선 김창룡의 지프를 번호판 없는 차량이 가로막았다. 군복 차림의 괴한 둘이 다가와 권총 여섯 발을 쏘았다. 다섯 발이 명중했고 김창룡은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현역 육군 대령 허태영 일당의 범행이었다.
70년간 이 사건은 ‘사원私怨이 빚어낸 비극’ 혹은 ‘군부 파벌 싸움의 결과’로 설명되어 왔다. 그러나 이 책의 결론은 그보다 깊다. 김창룡 암살은 단순한 개인 원한 사건도, 단순한 비리 은폐 살인도 아니었다. 그것은 이승만 통치체제를 지탱하던 두 축, 곧 군부 내 최대 실력집단이던 정일권 군벌과 대통령 직속 정보기구 역할을 하던 김창룡 특무대가 정면으로 충돌한 사건이었다.
당시 김창룡의 특무부대는 육군참모총장 정일권을 정점으로 하는 함경도 파벌의 비리를 수사하고 있었다. 국방부 원면 부정 사건, 장성들의 비자금과 사생활 문제, 군 고위층의 부패가 수사망에 걸려들었다. 그러나 정일권 군벌은 단순한 부패 집단이 아니었다. 6·25전쟁 이후 비대해진 군부를 장악하고 있던 정일권은 이승만 정부가 군을 통솔하는 데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핵심 인물이었고, 자유당의 2인자 이기붕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반면 김창룡 특무대 역시 이승만이 군부를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해 의지한 또 하나의 핵심 보루였다.
결국 김창룡 암살은 이승만 체제 외부에서 가해진 공격이 아니라, 그 체제를 떠받치던 내부 세력들 사이의 충돌에서 발생한 비극이었다. 이승만은 군벌을 이용해 군을 통제했고, 특무대를 이용해 그 군벌을 감시했다. 그러나 국가정보기구가 제도적으로 확립되지 못한 상황에서 특무대의 정보권은 군 지휘계통의 작전권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군부의 비리와 파벌을 파헤치던 김창룡은 바로 그 충돌의 한복판에서 희생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정일권에 대한 전면적 수사가 군 통수체제의 파탄을 초래할 것을 우려하여 수사 범위를 제한하였다. 그 결과 사건의 최고 배후로 지목될 정일권은 끝내 단죄되지 않았다. 김창룡 암살은 군 고위층 비리 은폐 사건이었을 뿐 아니라, 신생 대한민국이 군부를 장악하고 국가정보체계를 세워가는 과정에서 빚어진 통치체제 내부의 파열이었다.
희생자가 ‘현대사의 악인’이 된 이유는?
1956년 암살 직후, 이승만 정부에 비판적이었던 경향신문과 동아일보조차 그를 '타공전선의 제1인자', '공과 사를 엄연히 구별한 모범적 군인'으로 애도하였다. 그러나 불과 30~40년 뒤 그는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 '김구 암살의 배후'로 규정되기에 이른다. 무엇이 이 극적인 전도를 가능하게 하였는가.
악마화의 시동을 건 것은 암살범들 자신이었다. 허태영과 강문봉 등은 김창룡을 '전횡과 조작의 화신'으로 매도하였다. 4·19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5·16 이후 암살 가해자들이 오히려 득세하자 가해자들이 '민주화 영웅'의 지위를 얻었고 그들의 자기 정당화 서사가 대중에 유포되었다.
결정적인 전환은 1980~90년대 민중민족주의 사관의 확산과 함께 왔다. '반공투쟁을 통한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성립'이라는 국가 서사가 '분단과 양민학살'의 서사로 뒤바뀌면서, 반공 투쟁의 최전선에 섰던 김창룡은 '국가폭력의 상징'이 되었다. KBS 드라마는 아무런 사실적 근거 없이 그를 김구 암살의 배후로 묘사하여 이 이미지를 수천만 시청자의 뇌리에 각인시켰다. 유족이 사자명예훼손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하였으나 법원은 1심부터 대법원까지 모두 기각하였다. '믿을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으면 허위 사실도 방송해도 좋다는 것이었다. 역사 왜곡에 법원까지 면죄부를 준 셈이다.
이 책이 밝히듯이 김창룡 개인의 악마화는 대한민국 건국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역사 서사 전복과 동전의 양면이다. 역사의 공로자를 악인으로 만드는 사회는 병든 사회이다.
이승만 정권이 독재정권?
김창룡의 특무부대가 지키고자 한 이승만 정권은 오늘날 흔히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독재정권이었다고 평가된다. 이 책의 제2부는 이승만 정권이 독재정권이었는가를 정면으로 다룬다.
당시 야당은 부산정치파동(1952)과 사사오입 개헌(1954)을 이승만 독재의 증거로 내세웠고, 이러한 주장은 오늘날까지도 널리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이것은 당파적 입장에서의 피상적인 관찰에 불과하다. 1948년 제헌헌법은 국회가 대통령을 선출하고 국무원이 과반수 의결기관이며 대통령 임기를 4년의 1차 중임으로 제한한 '준내각제적' 체제였다. 유진오 등 몇몇 법률가와 임정 출신의 신익희와 한민당 등은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면서도 내각제적 헌법으로 실권을 국회에 붙들어두려 했다. 1948년 당시 세계에서 대통령 임기를 4년의 1차 중임으로 제한한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하였다. 제헌헌법이 일그러진 공화체제를 담았던 것은 이승만에 대한 제헌의원들의 ‘당쟁하는 마음’에서 기인하였다. 결국, 이승만은 직선제 및 중임제한 철폐의 두 차례 개헌을 관철하였는데, 그것은 억압과 무리수를 동반하는 정치파동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이 책은 1950년대 정치사의 혼란을 이승만 개인의 권력욕으로 돌리는 통설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야당이 내세운 '민주주의'는 막스 베버가 말하는 '신념윤리'의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것은 선의와 정의라는 명분에 따라 행동하되 그 결과는 중요시하지 않는 전통적 도덕정치였다. 조선왕조 이래 혈연·지연·학연에 기초한 가산제(家産制) 문화와 신념윤리가 지배하는 정치 풍토에서 이승만은 국가와 민족의 생존이라는 목표를 위해 강건한 책임윤리의 정치를 추구한 것이었다. 이런 해석이 타당하다면, 야당이 '독재'라 규탄한 이승만의 행동은 전통적 당파 정치의 한계를 뚫고 근대적 책임윤리의 정치를 실현하려는 소명의 과정이었다고 재해석될 수 있다.
이승만은 1904년 한성 감옥에서 집필한 『독립정신』에서부터 국민이 선출하는 대통령중심제를 '인간 사회가 고안한 가장 선미한 정부형태'로 보았다. 야당과 한국 정치학계는 이 점을 외면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공산세력으로부터 국가를 수호하고 또 야당의 거센 당쟁을 이겨내고 군을 통솔하는 가운데 이 나라 자유민주주의의 토대를 닦았다. 그 통치체제의 핵심 보루였던 김창룡 특무부대의 역할 역시 새롭게 평가받아야 한다.
왜 지금 김창룡인가?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1948년 건국의 정당성이 의심받고 있다. 건국을 반대한 김구가 국부로 추앙받고, 이승만은 친일 독재자로 매도된다. 아울러 김창룡도 국가폭력의 실행자로 간주된다.
그러나 한 국가의 성립과 유지 과정에서 폭력 여하가 판단 기준이 될 수는 없다. 대한민국이 실제로 어떠한 위협 속에서 건설되었으며,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어떠한 정보·수사체계를 필요로 했는가. 그리고 그 과정은 왜 훗날 ‘국가폭력’의 서사로만 기억되게 되었는가. 이 책은 우리가 이 질문에 새로 답할 것을 촉구한다.
가족이 기록한 ‘인간 김창룡’
본서 제3부에는 김창룡의 두 딸이 쓴 글이 수록되었다. 아버지가 암살된 뒤 가족은 긴 세월 사회적 낙인과 왜곡된 기억 속에서 살아야 했다. 먼 브라질로의 이민, 타국에서의 생존과 자립,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담담하면서도 절절한 필치로 기록되어 있다. ‘현대사의 악인’으로 기억되는 인물 의 실재 모습과 남겨진 가족의 삶 역시 이 책의 중요한 부분이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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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룡(군인) 나무위키
김창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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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룡 金昌龍 | |
|---|---|
| 대한민국의 국방부 특무부대장 | |
| 임기 | 1952년 11월 23일 ~ 1956년 1월 30일 |
| 대통령 | 이승만 |
| 부통령 | 함태영 |
| 총리 | 백두진 국무총리 서리 이갑성 국무총리 임시서리 백두진 국무총리 변영태 국무총리 백한성 국무총리 임시서리 |
| 장관 | 신태영 국방부 장관 손원일 국방부 장관 |
| 차관 | 이호 국방부 차관 장건식 국방부 차관 직무대리 김용우 국방부 차관 |
| 이름 | |
| 별칭 | 호(號)는 옥도(玉島) |
| 신상정보 | |
| 출생일 | 1920년 7월 18일 |
| 출생지 | 일제강점기 함경남도 영흥군 |
| 거주지 | 대한민국 서울 |
| 사망일 | 1956년 1월 30일(35세) |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용산구 원효로1가 |
| 정당 | 무소속 |
| 본관 | 수안(遂安) |
| 배우자 | 도상원(都相媛) |
| 자녀 | 장녀 김미원(金美元) 아들 김경진(金慶震) 차녀 김미경(金美敬) 삼녀 김미영(金美英) |
| 종교 | 불교 |
| 군사 경력 | |
| 복무 | 관동군, 대한민국 육군 |
| 복무기간 | 1941년 ~ 1956년 |
| 근무 | 육군 특무부대 |
| 최종계급 | 관동군 헌병 오장 대한민국 육군 소장(중장 추증) |
| 지휘 | 육군 특무부대장 |
| 주요 참전 | 태평양 전쟁, 여순 사건, 한국 전쟁 |
김창룡(金昌龍, 1920년 7월 18일[1] ~ 1956년 1월 30일)은 일본군과 대한민국 국군에서 복무한 한국의 군인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 호(號)는 옥도(玉島), 창씨명은 다마시마 쇼류(玉島 昌龍).
함경남도 영흥 출생이다. 일제 시절 만주 관동군 헌병으로 근무하며 중국 공산당을 정탐하는 활동을 하였다. 해방 이후 국군에서 여순 사건의 진압과 한국 전쟁에 참여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비호를 받던 정치 군인으로서, 당시 방첩대장, 특무부대장 등을 맡으며 온갖 정치공작과 사건 조작, 전횡, 비리를 일삼았다. 여순 사건과 관련해서 체포된 박정희(朴正熙, 후에 5~9대 대통령을 역임) 소령을 수사하기도 했다. 1956년 허태영 등 군인 4명에게 암살당했다.
생애
초기 활동
일정기 활동
김창룡은 함경남도 영흥에서 출생하여 어린 시절 경상남도 김해를 거쳐 경성부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으나 만 두 살 때(1922년) 귀향한 이후 줄곧 영흥에서 자랐다. 그야말로 가난한 가정 환경에서 자란 그는 2년제 농잠학교를 마친 후 만주국 철도부 소속 신징(장춘)역 말단 역원을 거쳐 만주국 신징의 철도회사 예하 말단 평사원으로 각각 잠시 종사했다.
1940년 초 일본인의 소개로 관동군 소속 헌병보조원이 되었으며, 1940년부터 만주에서 관동군 헌병보조원과 헌병 이등병으로 근무했다. 1941년 소련 국경 부근에서 첩보 부대원으로 이력을 시작하여 이후 평생 동안 정보 공작의 전문가로 살아가게 되었다. 그 뒤 김창룡은 헌병교습소의 훈련을 마치고 관동군 헌병이 되었으며, 소련-만주 국경에 파견되어 소련 공산당과 중국 공산당의 움직임을 탐지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 뒤 일본 사복헌병이 되어, 사복 차림으로써 일본의 정탐원으로 활약했다.
1943년 상하이에서 파견되어 활동 중이던 중국공산당의 왕근례(王近禮)를 체포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왕근례가 이끌던 비밀 조직을 일망타진한 성과를 올렸다. 김창룡은 공로를 인정받아 오장(伍長)(국군의 하사)으로 진급하였으며 이후로도 많은 비밀 조직을 적발하는 공을 세웠다. 해방 전 2년 동안 적발한 항일조직은 50여 개에 달한다.
미군정
태평양 전쟁이 종전된 후 고향에 돌아왔다가 치안대에게 구금되었고, 북한 지역에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다시 체포되었다. 이때 일본군 헌병 오장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두 차례나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탈출했다. 1946년 결국 월남하였고, 전라북도 이리에 있는 국군 제3연대에 신병으로 입대한 후 3연대 정보요원으로 활동했다. 1947년 조선경비사관학교 제3기에 입교, 조선경비사관학교를 속성으로 졸업한 뒤 1947년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첩보 부대에 근무한 경력으로 쓰임새를 인정받아 정보소대 소대장을 맡았으며, 미소공동위원회에 참가한 소련군 장교의 사진 촬영 사실을 적발해 그를 추방하게 하는 등 곧 첩보 능력을 드러냈다. 그 뒤 육군 제1연대에 배속되었다.
군 복무
정부 수립 초기
북한에서 죽을 고비를 넘겼던 김창룡은 반공 전선의 일선에 섰고, 동료들을 정탐하고 군부 내 좌익 인사들을 감시하기 시작하였다. 남로당 간부들인 이재복과 이중업 등을 체포하였고, 남로당의 거물인 김삼룡, 이주하도 그의 손에 체포되었다. 군 내에서 송호성 등이 좌익과 연계를 갖고 있다며 숙군 작업도 주도했는데, 그에게 용공 세력으로 지목 받은 장교 중에는 송호성처럼 광복군이었거나 오동기처럼 중국군 소속으로 단순 항일 활동을 하던 인물들이 포함된다는 지적도 있다.
1948년 육군 대위로 승진하여 육군본부 정보국 정보장교로 보직되었다. 육본 정보장교로 근무하면서 좌익 색출과 검거에 앞장섰으며, 여수 순천 사건의 진압과 좌익 군인 색출, 숙청작업을 주도했다. 여수 순천 반란 토벌 사령부에 작전장교로 참여했다가 남로당 출신의 박정희 소령을 체포 후 심문하였으나, 정보국장 백선엽 대령을 위시한 각계의 압력에 순응해서 도리어 박 소령의 연대 신원 보증에 참여하여 그를 살려주었다. 군내 좌익숙청을 기치로 한 숙군사업의 이면에는 사실 국군을 구성하는 각 파벌들의 생존과 주도권 투쟁의 성격이 포함되었는데, 만주군, 일본군, 광복군 모든 파벌을 포괄하는 경력을 지닌 박정희의 구명은 쉽게 각 파벌에게 양해될 수 있는 사안이었다.
1949년 1월 방첩대장으로 부임하였고, 그해 6월 한국독립당 당수 김구가 암살되었다. 이때 암살자가 방첩대 소속 현역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였으므로, 그의 배후로 의심받는 등 백범 김구 선생의 암살을 주도했다는 증거 역시 다수 발견됐다.
한국 전쟁 참전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1950년 8월 1일 부산 방첩대(CIC) 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서울 수복 후에는 부역자를 가려내 처벌하는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의 본부장을 맡아 막강한 권력을 갖게 되었다. 대한민국 국군과 국제연합군이 북진할 때 평양지구 특무대장으로 일하다가 1·4 후퇴로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장 일을 계속했다. 이때 김창룡은 31세의 젊은 나이였지만 이미 권력의 실세였다. 그는 수사권을 독점했으며, 이승만과 직통 보고 라인을 갖고 있었다.
종전 뒤에도 대통령 이승만의 각별한 신임 속에 제1공화국의 각종 공안 사건들을 맡아 처리했다. 그러나 그가 처리한 거의 대부분의 용공 사건, 간첩 사건들은 후에 조작이라는 진술이 나왔다.
예를 들어 1949년 제14연대장 오동기 등이 연루된 인민해방군 사건이나, 1950년 남로당 이강국의 연인이라는 김수임을 체포해 처형한 사건, 소총을 관 속에 숨겨 대구로 이동하던 불순 분자들을 적발한 사건, 부산 정치 파동의 빌미가 된 부산 금정산 공비 사건 등이 있다.[2]
제1공화국 이후
6·25전쟁 중 서울 수복 직후에도 군·검찰·경찰 합동수사본부장이 되어 잔류 시민들의 부역자 여부를 색출, 탐문, 조사했다. 이 과정에서 좌익 부역자들을 엄히 다루어 원성을 샀다. 특무대장으로 있으면서 '동해안 반란사건', '국가원수 암살미수사건' 등 각종 정치사건을 조작하여 정치에 깊이 관여하고 이승만 대통령의 반대파를 축출하였다. 1952년 부산 정치파동의 계기가 된 ‘부산 금정산 공비 위장사건’을 꾸미는 등 용공 사건 조작을 일삼았다.
1953년 국제간첩 정국은을 적발한 사건도 이범석의 족청계 숙청을 위해 조작 또는 과장된 사건이라는 설이 있었다. 그밖에 동해안 1군단이 연루된 동해안 반란사건, 1955년 한국 전쟁 때 북으로 간 조소앙이 이승만 암살 지령을 내렸다는 개천절 이승만 암살 음모 사건도 사실상 마찬가지이다.[2]
그 밖에 국방부장관과 참모총장까지 몰아내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으나 실패하였다. 혁혁한 전공과 실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신임을 얻는 가운데, 자신보다 상관인 강문봉 중장 등을 무시하면서 감정의 골이 패이게 된다. 당시 그가 자기 권력보존과 확대를 위해 얼마나 권력을 남용했는지는, 당시 반공검사로 자타가 공인하던 오제도(吳制道)까지 용공으로 몰아 제거하려 시도했다는 사실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3]
정일권, 강문봉 등과의 갈등
1954년 5월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은 그와 친밀한 사이에 있던 공국진을 육군 헌병사령관으로 임명하여 군내 부패의 척결과 수사기관 사이의 갈등 해결 등을 주요 과제로 지시한 바 있다.[4]: 271 공국진은 이 과제들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직무한계를 자의로 무시하는 김창룡 특무대장과 잦은 갈등을 빚게 되었고, 김창룡은 이 과정에서 공국진이 탄피를 일본에 밀수출하려 하였다는 혐의를 씌워 해임을 기도했다. 소위 경무대 유시를 근거로 하는 김창룡의 공세 앞에 정일권 참모총장도 역부족으로 그가 임명한 헌병사령관의 해임을 명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4]: 271
이후 공국진이 강문봉이 군단장으로 있는 제2군사령부의 참모장으로 발령되는 것도 김창룡의 방해로 무산되었고, 이 과정에서 김창룡은 참모총장 정일권의 명령을 정면으로 무시하고 공국진의 보좌관을 체포, 연행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김창룡의 월권행위에 분노한 정일권과 강문봉은 1955년 10월 진해에 머물고 있던 이승만에게 직접 찾아가 김창룡의 전근 내지는 유학을 건의하기도 했다.[4]: 272 그러나 이승만은 이들의 건의를 수용하지 않음으로써 김창룡에 대한 신뢰를 재확인하였다. 김창룡은 정일권과 강문봉의 비리에 대한 집중 수사로 이에 대응하였고, 이는 정일권과 강문봉의 김창룡 암살음모와 교사라는 극단적인 대응으로 이어졌다.[4]: 272 이 과정에서 주목할 것은 이승만은 김창룡에게 정일권의 비리를 수사하게 했고, 정일권에게는 역으로 김창룡의 비리를 수사하라는 밀지를 내렸다는 사실이다.[4]: 272
사망
숙군 사업과 용공 사건 조작에 무수히 관여해 온 그는 군과 정계의 실력자로 부상하는 과정에서 적을 많이 만들었고, 결국 1956년 1월 30일 아침, 출근길에 괴한의 총격을 받고 적십자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사망했다. 이승만은 김창룡의 암살 소식을 접하자마자 적십자병원으로 직접 찾아가 유해를 살펴본 뒤 그 날짜로 김창룡을 육군 중장으로 추서했다.[5]: 194 그는 담화를 발표해 애도의 뜻을 표한 후 빠른 시일 내에 범인을 체포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군은 전국에 비상경계망을 펴고 수사에 착수했으며 전군 장병의 휴가 및 외출 금지령을 내렸다.[5]: 194
2월 3일 김창룡의 장례는 대한민국 최초의 국군장으로 성대하게 치러졌다. 그 날 하룻동안 전 육해공군 부대가 조기를 게양하였고 장병들에게는 가무음곡과 음주 금지령이 내려졌다. 이승만은 그 날 조사에서 "김 중장은 나라를 위해서 순국한 것이며 충령의 공을 세운 것이다"라고 말하고 비문을 직접 써서 보낸 후 범인 체포를 거듭 독촉하였다.
김창룡의 묘비 비명은 역사학자 두계 이병도가 썼다. "그 사람됨이 총명하고 부지런하고 또 불타는 조국애와 책임감은 공사를 엄별하여 직무에 진수하더니 급기야 그 직무에 죽고 말았다. 아 그는 죽었으니 그 흘린 피는 전투에 흘린 그 이상의 고귀한 피였고 그 혼은 기리 호국의 신이 될 것이다." 이병도의 비명은 "동란 중에는 군검경합동수사본부장으로 맹활동을 개시하여 간첩오렬 부역자 기타를 검거 처단함이 근 2만5천 명"이라는 김창룡의 업적도 소개했다. 그러나 이 업적에는 수많은 민간인 학살도 포함된 것이라는 비판이 있다.[6]
범인은 한달 후에 그의 특무대 부하로 대령인 허태영 등 현직 군인들로 밝혀졌다. 허태영은 김창룡의 전횡과 비리를 보다 못해 군 민주화를 위해 거사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이 사건에는 다른 배후가 있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고, 정확한 진실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김창룡 암살사건 전개 과정은 이승만이 작위적으로 조성한 3대장 사이 갈등이 충성경쟁을 일으키는 차원을 넘어서서 그들 사이 살기 띤 경쟁을 일으켰음은 물론 그 위에서 줄을 당기고 있던 이승만 자신에게까지 예측할 수 없는 충격으로 다가올 정도로 격화되었음을 보여주었다.[4]: 278
사후
평가
윤치영은 김창룡이 오래 살았다면 4.19 사태와 같은 허술한 사태 처리로 이승만이 맥없이 하야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았다.[7]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군 부문에도 포함되었다. 그의 유해는 대전현충원 장군묘역에 있다. 그가 국립묘지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는 주장이 계속되어 찬반 양론이 있다.[8][9]
의혹
그는 제1공화국 시절 각종 정치적 음모의 중심에 있었으며, 특히 김구의 암살을 지시했다는 설 또한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김구가 안두희에게 암살될 때 김창룡은 육군본부 정보국의 방첩대장을 맡고 있었는데, 체포된 안두희에게 여러 편의를 보아준 사실이 있다. 심지어 김창룡이 김구 암살의 배후일 뿐 아니라 역시 김구 암살과 관련이 있던 채병덕, 장은산, 신성모의 입을 막기 위하여 이들의 죽음에도 개입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이러한 소문들은 아직까지 확인된 바 없다.
김구의 아들 김신은 당시 계급이 소령에 불과했던 김창룡이 단독으로 살해를 지시했다고 볼 수 없다며 사건전모에 비춰볼 때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고 말했다.[10]
학력
- 함경남도 영흥보통학교 졸업
- 함경남도 함흥고등보통학교 졸업
- 함경남도 영흥농잠실습전문학교 전문학사
-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3기
- 통위부 보병학교 졸업
- 조선경비보병학교 졸업
- 대한민국 육군보병학교 졸업
김창룡을 연기한 배우들
같이 보기
각주
- “보관된 사본”. 2007년 10월 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6년 12월 24일에 확인함.
- 임채민 (2007년 7월 4일). “[잘 몰랐던 경남문학지대]⑤함안 출신 양우정(하)”. 경남도민일보. 2008년 7월 8일에 확인함.
- <한국에도 베리아는 있다 4> 『주간 삼천리』 (1961. 7. 1) 40~41쪽
- 유영익, 《이승만 대통령 재평가》 (연세대학교출판부, 2006)
- 반민족문제연구소 (1994년 3월 1일). 〈김창룡, 일제관동군헌병에서 대한민국특무부대장까지 (김혜진)〉. 《청산하지 못한 역사 1》. 서울: 청년사. ISBN 978-89-7278-312-1.
- 정지환 (2004). 《대한민국 다큐멘터리: 독립기자 정지환의 역사추적기》. 인물과사상사. 31~33쪽쪽.
- 윤치영, 《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삼성출판사, 1991) 308페이지
- 심규상 기자 (2006년 6월 6일). “김창룡 묘 이장 찬반 '맞대결' 시위”. 《오마이뉴스》.
- 정혁수 기자 (2008년 6월 6일). “시민연대 “친일파 김창룡 묘 국립묘지서 옮겨라””. 《경향신문》.
- "당시 정권차원의 범행 안두희)증언 빙산일각 일뿐 1992년 4월 15일 경향신문
참고 문헌
- 이대인 지음, 대한민국 특무부대장 김창룡, 기파랑, 2011년 6월 9일.
- 배진영의 기무사(機務司) 비록 〈2〉 김창룡 특무대장 암살 사건 월간조선 2016년 6월호
- 배진영, 특무부대장 김창룡 口述 회고록 ① “공산주의와 싸우지 않은 날은 과거 나의 생활에 있어서 하루도 없었다” 월간조선 2022년 1월호
- 배진영, 특무부대장 김창룡 口述 회고록 ② 5년간 점원·노무감독으로 위장해 소련간첩단 100여 명 검거 월간조선 2022년 2월호
- 김창룡 지음, 남정옥 엮음, 숙명의 하이라루 : 육군 특무부대장 김창룡 장군 비망록 청미디어, 2022년 3월 17일
- 하이라루는 한자로 海拉甫가 아닌 海拉爾(海拉尔)이며, 오늘날 중국 내몽골 자치구 후룬베이얼 시(呼倫貝爾市, 呼伦贝尔市)의 행정 중심지인 하이라얼 구(海拉爾區, 海拉尔区)이다. 소련 국경과 가깝다.
- 남정옥, 戰史家가 보는 ‘김창룡 口述 회고록’의 의미 : 해방 후 대한민국 초기 對共수사실록이자 反共建軍史 월간조선 2022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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