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8-10

숙명의 하이라루 | 김창룡 | 나무위키

숙명의 하이라루 | 김창룡 | 알라딘


숙명의 하이라루 - 육군 특무부대장 김창룡 장군 비망록
김창룡 (지은이),남정옥 (엮은이)청미디어2022





책소개
대한민국 반공의 상징인 육군 특무부대장 김창룡 장군이 생전에 기록해 둔 대공수사 비망록. 일제 강점기로부터 해방 전후, 그리고 대한민국 건국을 거쳐 6·25 전쟁 전후를 아우르고 있는 국군의 대공수사 기록물이자 대한민국의 반공 역사이다. 60여 년 전 건국 전후의 혼란과 6·25의 동족상잔의 아픔, 그리고 전후 분단이라는 절체절명의 국가적 위기 속에서 우리나라와 국민 그리고 우리 군과 장병들, 특히 김창룡 장군이 지휘했던 특무부대원들이 북한 공산주의에 맞서 목숨 걸고 싸웠던 대한민국 현대사의 중요한 부분을 다루고 있다.


목차


^^제1부

Ⅰ. 운명의 시간, 하이라루 5년^^
1. 하이라루의 첫날 밤 … 18
2. 3년간의 중국인 ‘뽀이(boy)’ 생활 … 23
3. 국제공산당원 왕근례의 체포와 그의 전향 … 30
4. 고력두는 제2의 직업 … 40

^^Ⅱ. 조국의 품으로^^
1. 고향으로 … 46
2. 철원에서의 피검 … 53
3. 사형선고와 탈출 … 56
4. 두 번째의 사형선고 … 66
5. 소련 장교 타살과 38도선 월경 … 71
6. 남한의 하늘 밑에서 … 79

^^Ⅲ. 무너진 붉은 아성^^
1. 공산당의 발악상과 숙군의 동기 … 84
2. 초대 군감사령관 이병주 체포기 … 94
3. 제1연대 장병 몰살계획 사건 … 100
4. 숙군의 전야 … 106
5. 오일균 소령 체포기 … 109
6. 김종석 중령 체포기 … 114
7. 최남근 중령 체포기 … 119
8. 미소공동위원회 소련대표의 촬영 사건 … 123

^^Ⅳ. 남로당의 근멸^^
1. 남로당 군사부 세포 김영식 체포기 … 128
2. 남로당 특수부책 이재복 체포기 … 131
3. 남로당 조직부장 이중업의 체포와 그의 탈출 … 138
4. 김삼룡의 비서 특수조직책 김형육의 전향 … 146
5. 이중업의 탈출 계획 … 149
6. 이중업 탈출의 밤 … 152
7. 이중업의 보복행위와 그의 월북 … 155
8. 남로당 위원장 김삼룡, 이주하의 말로 … 160
(1) 김삼룡의 체포기
(2) 이주하 체포기
9. 민보단장 000 변사사건의 진상 … 167

^^Ⅴ. 6·25이후의 좌익 발악상^^
1. 인민공화당 경남위원장 김동산 체포기 … 174
2. 승려를 가장한 남로당원 … 178
3. 걸인 유격대 체포기 … 181
4. 남로당 경남도 도당책 안소주 체포기 … 186
5. 밀매음의 여성유격대 … 188
6. 국군 위문을 가장한 여학생 인애회사건 … 192
7. 북한 괴뢰 유격대와의 결전 … 195
8. 인민재판준비위원회 사건 … 199
9. 인민해방군 사건 진상 … 202

^^제2부

Ⅰ. 천인공노할 197명의 학살 사건 … 208
Ⅱ. 일본인 중공군 전사 생포 사건 … 215
Ⅲ. 상이포로로 가장한 괴뢰 간첩 … 219
Ⅳ. 지리산 공비들의 부산 침투 … 224
Ⅴ. 대구시당 재건공작의 전야 … 231
Ⅵ. 공산당의 남북협상 음모 내막 … 238
Ⅶ. 유엔군을 아편으로 마취시키려는 적 … 244
Ⅷ. 조병창 방화범, 석방과 재체포 … 250
Ⅸ. 미장원을 경영하던 부부 간첩 … 259
Ⅹ. 국군을 가장한 무장 공작원 … 264
Ⅺ. 적십자 북한 괴뢰 대표와의 도모기 … 269
Ⅻ. 중공 간첩 체포기 … 274
ⅩⅢ. 북한 괴뢰 유격총사령 남도부 체포기 … 280

^^제3부
Ⅰ. 제2의 위조지폐 사건^^
1. 주범 손근욱의 악몽 … 292
2. 제2의 위조지폐 계획 … 297
3. 실천의 길로 … 300
4. 새로운 공포 … 303
5. 체포되는 날 … 307

^^Ⅱ. 붉은 밀사의 최후 : 소위 대남 평화사절 사건^^
1. 김평의 반생 … 313
2. 공산주의 유혹 … 316
3. 남하 준비 … 319
4. 청계장 마담 … 323
5. 일로(一路) 부산으로 … 327
6. 김평의 새로운 계획 … 330
7. 월하의 고백 … 335
8. 김평의 체포와 처형 … 344

^^Ⅲ. 이조실록 탈취 사건^^
1. 심상구의 반생기 … 351
2. 모욕과 자존심 … 355
3. 여(女) 밀정 이연이의 재현 … 358
4. 이조실록 탈취의 명령 … 363

^^Ⅳ. 김일성의 전속 간호원 조옥희^^
1. 김일성의 전속 간호원이 되기까지 … 371
2. 김성주와 김일성 … 380
3. 장군 부인의 질투 … 388
4. 관저 내의 죄악상 … 392
5. 한국동란 발발의 진상 … 397
6. 자유로운 질서의 위력 … 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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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김창룡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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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룡 장군은 1916년 함경남도 영흥에서 태어나 영흥공립농잠학교를 마치고 영흥군청을 다니다가 만주로 가서 철도학교를 졸업한 후 역무원으로 근무 중 일본군에 강제 입대하게 되었다.
일본 관동군 헌병대에 배치된 김 장군은 그로부터 필생의 업으로 대공(對共) 업무를 맡게 되었다.
해방 후 월남하여, 1947년 육군사관학교 제3기 정보과 소위로 임관한 이후 방첩대장, 군·검·경 합동 수사본부장 등을 지냈고, 6·25전쟁시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하였으며, 1951년 육군특무부대장, 1953년 준장, 1955년 소장으로 진급하며 대공업무의 최선봉에서 자유대한민국 건립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전쟁 후 매우 혼란했던 시기에 국방부 원면(原綿)부정사건 특무대 내사, 대통령 특명에 의해 군내 축첩자(蓄妾者)내사 활동을 하다가 1956년 대통령께 업무 보고를 하기 위해 출근하던 중 암살당해 국군 최초 국방장(중장 추서)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접기

최근작 : <숙명의 하이라루>

남정옥 (엮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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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대학교 졸업. 단국대학교 졸업 미국 현대사 전공. 단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문학박사. 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현 우남이승만연구회 이사. 주요 논문 및 저서로는 '한미군사관계사', '한국전쟁사의 새로운 연구', '6.25 전쟁자', '알아봅시다! 6.25 전쟁사', '전투지휘의 실과 허', '한국전쟁 주요 10대 전투고찰', '국민방위군', '미국 군사전략의 발전과 분석 고찰', '미국의 마샬Marshall 계획과 유럽통합정책', '미국 트루먼 행정부의 대율업정책', '미국의 국제전쟁 개입원인과 국가안보', '한국전... 더보기

최근작 : <숙명의 하이라루>,<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대한민국과 함께 한 국군과 주한미군 70년> … 총 21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이 책은 대한민국 반공의 상징인 육군 특무부대장 김창룡(金昌龍, 1916~1956) 장군이 생전에 기록해 둔 대공수사 비망록이다. 평생을 공산주의자들을 상대하며 대공(對共) 분야에서 올곧은 삶을 살았던 김창룡 장군은 자신이 수행해 왔던 대공 관계 일들을 주요 사건별로 분류하여 200자 원고지 1,600장에 기록해 놓았다. 이 기록들은 김창룡 장군이 1956년 순직한 이후 미망인 도상원(都相媛) 여사가 보관해 오다가 2022년 김창룡 장군 순직 66주기를 맞이하여 장군의 따님인 김미경·미영 두 자매의 지극한 소망에 따라 단행본으로 발간하게 된 것이다.

이 책은 일제 강점기로부터 해방 전후, 그리고 대한민국 건국을 거쳐 6·25 전쟁 전후를 아우르고 있는 국군의 대공수사 기록물이자 대한민국의 반공 역사이다. 이 책은 김창룡 장군이 일제 강점기 공산주의와 싸웠던 시절의 회상으로부터 시작된다. 김창룡 장군의 공산주의와의 싸움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자신의 강한 신념과 이에 반한 공산주의에 대한 강한 불신에서 비롯됐다. 그때부터 그는 공산세력의 발본색원에 진력한다. 그 과정에서 그는 강압적이거나 반인권적인 방법 대신에 보다 과학적인 수사방법을 택하였다. 그 결과 대한민국을 공산주의 침략에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반공 국가로 다져 나갔고, 국군을 공산주의와 싸워 이길 수 있는 믿음직스러운 반공 군대로 태어나게 했다. 이 책에는 김창룡 장군의 그런 반공 비사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은 60여 년 전 건국 전후의 혼란과 6·25의 동족상잔의 아픔, 그리고 전후(戰後) 분단이라는 절체절명의 국가적 위기 속에서 우리나라와 국민 그리고 우리 군과 장병들, 특히 김창룡 장군이 지휘했던 특무부대원들이 북한 공산주의에 맞서 목숨 걸고 싸웠던 대한민국 현대사의 중요한 부분을 다루고 있다. 이 시기는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결코 떼어내 버리거나 부정할 수 없는 대한민국의 엄연한 역사임에 틀림없다. 그런 점에서 이 기록은 대한민국의 반공투쟁사이자 국군의 반공건군사(反共建軍史)이며 특무부대의 대공수사기록(對共搜査記記錄)이라고 할 수 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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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룡의 재조명
이영훈,주익종,정안기,정주진,윤서하,현성삼 (지은이)
이승만북스2026-06-15












책소개

1956년 1월 30일, 이승만 정부의 정보기관장이던 육군 특무부대장 김창룡 소장이 출근길에 암살되었다. 현직 육군 대령이 지휘한 암살단의 배후에는 현직 제2군사령관(중장)에 이어 육군 참모총장까지 있었다. 이 사건은 건국 이후 국가권력 핵심부에서 벌어진 최대의 정치·군사 사건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7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사건의 실체는 충분히 규명되지 못하였다. 더구나 오늘날 대다수 한국인에게 김창룡은 ‘독재정권의 비밀경찰’, ‘고문과 조작의 상징’, ‘김구 암살의 배후’로 기억된다.

하지만 그러한 이미지는 과연 사실에 입각한 것인가. 『김창룡의 재조명』은 대한민국 건국과 호국의 격동기 속에서 사실상의 국가 정보기관장 김창룡이 실제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왜 그는 도중에 흉탄에 쓰러졌는지를 새롭게 추적한 연구서이다.

이 책은 김창룡 암살사건 재판기록, 군 자료, 당시 언론, 회고록과 증언 등을 종합 분석하여 사건의 실상을 복원하는 한편, 김창룡이라는 인물이 사후 어떻게 대한민국 현대사의 ‘악인’으로 재구성되었는지도 함께 추적한다. 아울러 이 책은 건국 초기 한국 정치가 왜 파동과 투쟁으로 점철되었는지도 구명한다. 이 책은 제목 ‘김창룡의 재조명’에 머물지 않고 그가 몸담았던 이승만 시대의 정치에 대한 전면적 재해석도 시도한다.


목차


발간사
머리말

제1부 김창룡 사건의 진실과 왜곡
1 1956년 특무부대장 김창룡 암살 사건의 진상
2 6·25전쟁 후 육군 특무부대 팽창과 작전계통과의 충돌
3 한국 현대사의 악인이 된 김창룡
보론 김창룡 장군 유족의 KBS 사자명예훼손 손해배상청구 사건 판결
4 대한민국 건국기 군 정보수사기구의 조직과 활동

제2부 한국 정치의 원형
5 대한민국 초창기 정치사의 재해석

제3부 나의 아버지 김창룡
6 아버지의 아리아
7 오래 기다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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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 77 • (김창룡 암살 사건의 진상) 1956년 1월 육군 특무부대장 김창룡 암살사건의 본질은 군 고위층의 비리를 파헤치던 김창룡과, 그 수사망에 포착된 정일권 파벌 사이의 정면충돌이었다. 김창룡이 ‘국방부 원면 부정 사건’에 대한 수사 내용을 이승만에게 직보하려 들자, 정일권 파벌은 대대적 숙군에 따른 공멸 위기를 직감했다. 이에 정일권은 허태영의 약점과 자신의 권력을 활용해 암살을 기획·유도하고, 사건 이후에도 허위 보고, 수사 정보 유출, 도피자금 제공 등 사후 수습에 개입했다. 실행은 허태영 일당의 몫이었으나, 그 배후에는 비리 폭로를 두려워한 정일권 파벌의 조직적 암살 음모가 개입되어 있었다. 요컨대, 김창룡은 정일권 파벌과 부패와의 전쟁에서 희생당한 순국자였다. 접기
P. 80 • (암살의 배후 정일권, 강문봉이 제대로 처벌되지 않은 이유) 이승만은 정일권 기소에 따른 함경도 파벌의 연공합작 쿠데타 등 군부 파열과 급변 사태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은 강문봉의 감형과 정일권의 불기소라는 소프트 랜딩soft-landing으로 사건을 갈무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군 내부의 동요와 파열을 저지하고 사건을 조속히 수습하려는 이승만 대통령의 고뇌에 찬 결단이었다. 접기

P. 133 • (이승만 대통령의 군 관리와 김창룡 암살) 6·25전쟁을 겪으면서 군부가 가장 영향력이 큰 사회집단으로 성장하고 대통령의 통치권까지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자 이승만은 군내 파벌을 조성해서 서로 경쟁시키고 자신에 대한 충성심을 유도하는 통치술을 구사했다. 백선엽파, 정일권파, 이형근파 등 3개 군벌이 군지도부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군벌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는 군내부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필요했다. 이승만은 특무부대를 활용해서 그러한 정보를 수집, 통치권 행사에 활용했다....
김창룡 특무부대장의 개인적 캐릭터와 함께 그에게 그러한 권한을 부여해준 법률적·제도적 요인이 중첩되어 특무대의 기능이 팽창하고, 그 결과 군의 지휘권이 작전권한과 정보권한으로 이원화되면서 결국 두 권한이 충돌하여 김창룡 특무부대장이 암살되는 사건을 낳았다. 국가최고통치권자인 대통령에게 필요한 정보를 범정부 차원에서 종합하여 보고하고, 부문정보기관을 통합·조정하는 권한을 가진 별도의 국가정보기관이 없었던 당시의 국가정보구조적 결함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접기

P. 182~184 • (김창룡 악인화는 국가 서사의 변화 때문) 세계 냉전체제 속에서 반공 투쟁을 통해 건국된 자유국이라는 국가 서사가 지배적이던 1950년대에는 김창룡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 몸을 바친 모범적 군인이었다... 그는 이 나라 타공사打共史에 찬연히 빛나는 공훈을 세운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1960~70년대에 국가 서사에 변화가 왔다. 박정희는 자신의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지난 이승만 정권을 비하했으며 이승만을 격하하고 김구를 상찬하였다. 국가 서사에서 반공주의에 민족주의가 더해졌다. 이와 함께 역사학계에서 민족주의가 강화되었는데, 그에 수반하여 1970년대 말부터 반공국가의 정당성을 문제삼는 분단체제론, 친일미청산론이 등장하였고 이는 1980년대에 민중민족주의 역사학으로 발전하였다.
민중민족주의 역사학에서 1948년 대한민국의 건국은 국토와 국민을 폭력으로 두 동강내고 통일을 염원하는 수많은 국민과 지사들을 탄압한 일대 해악害惡으로 서술된다... 민중민족주의 역사학은 처음엔, 좌익 폭동의 진압 과정에서 무고한 양민이 희생되었다는 국가폭력 서사를 만들고 그에 기반해 희생자 추모 및 명예회복운동을 벌였다. 이것이 4·3 특별법 등으로 공식적 지위를 얻자 이 역사학은 더 나아가 타공 투쟁 자체를 국가폭력으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과거 제주4·3폭동, 여순반란으로 불리던 것이 교과서에서는 제주4·3사건, 여수순천10·19사건이라 쓰이고,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4·3항쟁, 여순항쟁으로까지 불린다... 국가에 대한 반역이 부당한 지배체제에 대한 항쟁으로 완전히 탈바꿈했다...
이렇게 국가 서사가 바뀌자, 타공 투쟁의 대표 전사요 공훈자이던 김창룡은 ‘고문-조작의 기술자’를 거쳐서 친일-반민족-냉전 폭력의 상징이 되었다. 김창룡이 오늘날 한국 현대사의 일대 악인, 빌런이 된 것은 새로 밝혀진 그의 행적 때문이 아니라, 국가 서사에서 냉전 정당성보다 민족 정당성이 우선시되고 자유민주주의보다 통일민족국가가 더 중시되는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접기

• (KBS 사자명예훼손 소송) KBS가 허위 사실로 사자(死者) 김창룡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유족의 소송은 1심부터 3심 대법원에서까지 모두 기각되었다. 재판부는 드라마 제작진이 김창룡을 김구 암살 배후로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고 판단하여 제작진에게 사실 여부의 검증 책임을 면책하였다. 이 판결은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사실을 악용하여 역사를 왜곡하는 행위를 사실상 방치한 것이다(현성삼, 제3장 보론) 접기

P. 251~252 • (이승만 정부의 특무대에 대한 평가) 이승만이 설치한 한국군 방첩대, 그리고 후속의 육군 특무부대는 이념적 투쟁과 혼란의 시기에 국가 유지에 필수적인 방첩 활동을 하였다. 방첩대와 후속 육군 특무부대는 남로당의 남한 내 조직과 북로당이 파견한 간첩 등에 의한 사회혼란, 폭동, 반란의 정보를 수집하고 정부에 보고함으로써 대한민국 정부는 그것들에 대응하는 방안을 갖출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정보기구는 부패 등에 대하여서도 이를 미연에 방지하거나 수습하는 데 앞장섰다. 따라서 건국기의 군 정보수사기구는 당시의 국가안보와 사회 안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접기

P. 291 • (당쟁하는 마음으로 작성된 제헌헌법) 신익희가 헌법기초위원회에 이승만도 내각제에 찬성했다고 전한 것은 그의 의도적인 와전임이 분명하다. 당시 이승만은 누구보다 강력한 영향력의 지도자였으며, 그를 배제하고선 새로운 나라의 성립을 선포하기 힘든 실정이었다. 달리 말해 이승만은 새로운 나라의 정부형태에 관해 누구보다 강력한 발언권을 보유하였다. 그런 사람의 입장을 듣지 않고 신익희 등이 사사롭게 헌법 초안을 작성하고 국회의 심의에 부친 것 자체가 졸속일 뿐 아니라 당파적이었다....(283쪽) 1948년 이 나라의 헌법 제정에 참여한 법률가나 정치인 대다수는 ... 헌법이 대통령에게 부여한 각종 권리와 특권을 통해 대통령 권력이 국회가 통제할 수 없는 전제정치로 변질할 위험성을 방지하는 데만 특별한 관심을 쏟았다. 그것은 장차 대통령으로 선출될 이승만과 대립해 온 정치세력의 당쟁하는 마음이기도 하였다. 이 같은 배경에서 1948년 당시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4년 임기에 1차 중임이라는 대통령 임기 규정이 이후 두고두고 이어질 정변의 불씨로 헌법에 심어졌다. 접기

P. 314~315 • (이승만은 독재자였나) 김성수가 이승만 대통령을 독재자로 규탄하였을 때 그 독재는 문자 그대로 인사나 국정을 홀로 재단한다는 뜻이었다. 그러한 지도자의 행태는 전통시대의 도덕정치가 금기시한 바였다. 매사에 원만하고 중용을 취하는 김성수의 성품은 부지불식간에 도덕정치의 원리를 재현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같은 수준의 독재와 그로 인해 발생한 실정에 책임을 지지 않은 것을 두고 근대 정치사에서 때때로 출현하여 국민의 자유 제권을 억압하고, 법의 지배를 부정하거나 의회권력을 해산하거나 정적을 수용하거나 살해하는, 그 전형을 히틀러,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 등에서 확인하는 이념 내지 계급의 독재와 같은 것으로 감각하는 것만큼 커다란 범주 착오도 없을 것이다. 김성수가 선창한 이승만 독재론은 전통시대의 도덕정치가 비판한 문자 그대로의 독재에, 관점을 달리하면 대통령제의 충실한 실현에 다름이 아니었다.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이영훈 (지은이)

서울대에서 한국경제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신대, 성균관대를 거쳐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로 정년퇴직, 현재 이승만학당의 교장으로 활동 중이다. 『조선후기사회경제사』(한길사, 1988),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공저, 서울대출판부, 2004), 『대한민국역사』(기파랑, 2013), 『한국경제사』 Ⅰ, Ⅱ(일조각, 2016), 『반일 종족주의』1·2권(공저, 미래사, 2019~2020) 등의 저서가 있다.

최근작 : <김창룡의 재조명>,<반일 종족의 역사 내란>,<숨결이 혁명 될 때 : 박정희정신의 모든 것> … 총 29종 (모두보기)

주익종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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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에서 일제하 한국경제사 연구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을 거쳐 현재 이승만학당 이사로서 한국 근현대사 연구와 교육 업무를 하고 있다. 『대군의 척후』(2008), 『고도성장 시대를 열다』(공저, 2017),『반일 종족주의』1·2권(공저, 2019~2020), 『일본군 위안부 인사이드 아웃』(2023) 등의 저서가 있다.

최근작 : <김창룡의 재조명>,<반일 종족의 역사 내란>,<일본군 위안부 인사이드 아웃> … 총 17종 (모두보기)

정안기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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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대학(京都大學)에서 일본경제사 연구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학술진흥재단(JSPS) 특별연구원, 고려대학교 연구교수, 서울대학교 객원연구원을 거쳐 현재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과 한국연구재단(NRF) 인문사회학술연구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테러리스트 김구』(미래사, 2024), 『충성과 반역』(조갑제닷컴, 2020), 공저로는 『김창룡 재조명』(이승만북스, 2026), 『반일 종족주의와의 투쟁』(미래사, 2020), 『반일 종족주의』(미래사, 2019) 등이 있다.

최근작 : <반역자 김구>,<김창룡의 재조명>,<테러리스트 김구> … 총 14종 (모두보기)

정주진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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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에서 정책정보관으로 30년간 일하고 정년 퇴직후 연세대 국가관리연구원에서 외국과 차별적인 한국적 국가정보의 특성에 대해 중점 연구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박정희와 김일성의 스파이전쟁』(2021), 『김창룡 특무대장 암살사건 해부』(2022), 『한권으로 읽는 국정원법 이야기』(2023), 『이후락과 그의 시대』(2025) 등이 있다.
그 외 국가정보학회에서 발간하는 학술지 『국가정보연구』에 「소련 군정기 북한정보체계 형성과정」(2018) 등 다수 논문을 게재했다.

최근작 : <한국형 정보기관>,<김창룡의 재조명>,<이후락과 그의 시대> … 총 13종 (모두보기)

윤서하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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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기무사령부 및 육군 정보부대에서 28년을 근무하고 명예퇴직하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군 정보기구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관으로 근무하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사학 박사학위 과정 중에 있으며 6.25 당시 군 정보수사기구의 활동과 한미동맹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최근작 : <김창룡의 재조명>

현성삼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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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법과대학과 동아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졸업 후 제2회 변호사시험에 합격하여 현재 부산의 법무법인 청안로 변호사로 근무 중이다. 한반도 인권과 통일을 위한 변호사모임 부산지부장을 역임했으며 부정선거 감시 운동 등 공익 변론 활동을 펼쳤다. 저서로 『STOP THE STEAL 대법원의 부정선거 은폐기록』(공저, 2025)이 있다.

최근작 : <김창룡의 재조명>,<STOP THE STEAL 대법원의 부정선거 은폐기록> … 총 2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김창룡은 누구인가?
1916년 함남 영흥 출생. 만주의 일본군 헌병대에서 공산주의자 수사의 실무를 익혔고, 1946년 월남 후 대한민국 육군에 투신하였다. 해방후 남한에서 공산 세력은 미국 후원 하의 대한민국 건국을 저지하려 대규모 폭동을 일으켰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 후에도 남북 공산 세력은 국회와 사법부 내 첩자 침투, 군대의 반란, 무장유격대 파견으로 신생 국가의 내부 전복을 기도하였다. 이때 김창룡은 미군정의 CIC를 모델로 형성된 한국군 정보수사기구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며 군 내외 공산주의 세력 색출에 앞장섰다. 그는 대한민국 국가 수호와 안보 역량 구축의 핵심 공신이었다. 그는 1951년 육군 특무부대장에 취임한 뒤, 1956년 1월 암살당할 때까지 이승만 대통령의 신임을 바탕으로 정부 최고의 정보기관장으로 활동하였다.

그의 대공 수사는 집요하고 철저했다. 그는 혐의만으로 서둘러 체포하지 않았으며, 확실한 증거가 포착될 때까지 몇 달이고 잠복과 미행을 거듭하였다. 유족과 부하들의 기억에 의하면 그는 청렴하고 강직한 군인이었다. 계절별 두 벌의 군복이 그가 가진 외출복의 전부였고, 5년 가까이 정보기관장직에 있었지만 부정하게 남긴 재산은 한 푼도 없었다. 신상필벌에 엄격하여 부하들은 그를 두려워했지만, 사적으로는 자애로운 상관이었다. 그는 장교와 사병의 식당 구분을 없앴으며, 일상 대화에선 하급자에게도 경어를 썼다. 일이 바쁘면 사무실 야전침대에서 군복을 입은 채 잠들곤 했다는 부하들의 증언도 남아 있다.

하지만 1956년 1월, 김창룡은 일단의 군부 인사들에 의해 암살되었다. 이 사건은 단순한 개인 원한 사건이 아니라, 특무부대의 군 비리 수사와 군벌 간 갈등, 작전계통과 정보계통의 충돌, 이승만의 군 통제체제와 군 파벌의 대립이 한꺼번에 폭발한 사건이었다. 본서는 암살사건 재판기록을 토대로 그 과정을 치밀하게 복원한다.

특무기관장은 왜 육군 참모총장 일당에 의해 암살되었나?
1956년 1월 30일 아침, 출근길에 나선 김창룡의 지프를 번호판 없는 차량이 가로막았다. 군복 차림의 괴한 둘이 다가와 권총 여섯 발을 쏘았다. 다섯 발이 명중했고 김창룡은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현역 육군 대령 허태영 일당의 범행이었다.

70년간 이 사건은 ‘사원私怨이 빚어낸 비극’ 혹은 ‘군부 파벌 싸움의 결과’로 설명되어 왔다. 그러나 이 책의 결론은 그보다 깊다. 김창룡 암살은 단순한 개인 원한 사건도, 단순한 비리 은폐 살인도 아니었다. 그것은 이승만 통치체제를 지탱하던 두 축, 곧 군부 내 최대 실력집단이던 정일권 군벌과 대통령 직속 정보기구 역할을 하던 김창룡 특무대가 정면으로 충돌한 사건이었다.

당시 김창룡의 특무부대는 육군참모총장 정일권을 정점으로 하는 함경도 파벌의 비리를 수사하고 있었다. 국방부 원면 부정 사건, 장성들의 비자금과 사생활 문제, 군 고위층의 부패가 수사망에 걸려들었다. 그러나 정일권 군벌은 단순한 부패 집단이 아니었다. 6·25전쟁 이후 비대해진 군부를 장악하고 있던 정일권은 이승만 정부가 군을 통솔하는 데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핵심 인물이었고, 자유당의 2인자 이기붕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반면 김창룡 특무대 역시 이승만이 군부를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해 의지한 또 하나의 핵심 보루였다.

결국 김창룡 암살은 이승만 체제 외부에서 가해진 공격이 아니라, 그 체제를 떠받치던 내부 세력들 사이의 충돌에서 발생한 비극이었다. 이승만은 군벌을 이용해 군을 통제했고, 특무대를 이용해 그 군벌을 감시했다. 그러나 국가정보기구가 제도적으로 확립되지 못한 상황에서 특무대의 정보권은 군 지휘계통의 작전권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군부의 비리와 파벌을 파헤치던 김창룡은 바로 그 충돌의 한복판에서 희생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정일권에 대한 전면적 수사가 군 통수체제의 파탄을 초래할 것을 우려하여 수사 범위를 제한하였다. 그 결과 사건의 최고 배후로 지목될 정일권은 끝내 단죄되지 않았다. 김창룡 암살은 군 고위층 비리 은폐 사건이었을 뿐 아니라, 신생 대한민국이 군부를 장악하고 국가정보체계를 세워가는 과정에서 빚어진 통치체제 내부의 파열이었다.

희생자가 ‘현대사의 악인’이 된 이유는?
1956년 암살 직후, 이승만 정부에 비판적이었던 경향신문과 동아일보조차 그를 '타공전선의 제1인자', '공과 사를 엄연히 구별한 모범적 군인'으로 애도하였다. 그러나 불과 30~40년 뒤 그는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 '김구 암살의 배후'로 규정되기에 이른다. 무엇이 이 극적인 전도를 가능하게 하였는가.

악마화의 시동을 건 것은 암살범들 자신이었다. 허태영과 강문봉 등은 김창룡을 '전횡과 조작의 화신'으로 매도하였다. 4·19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5·16 이후 암살 가해자들이 오히려 득세하자 가해자들이 '민주화 영웅'의 지위를 얻었고 그들의 자기 정당화 서사가 대중에 유포되었다.

결정적인 전환은 1980~90년대 민중민족주의 사관의 확산과 함께 왔다. '반공투쟁을 통한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성립'이라는 국가 서사가 '분단과 양민학살'의 서사로 뒤바뀌면서, 반공 투쟁의 최전선에 섰던 김창룡은 '국가폭력의 상징'이 되었다. KBS 드라마는 아무런 사실적 근거 없이 그를 김구 암살의 배후로 묘사하여 이 이미지를 수천만 시청자의 뇌리에 각인시켰다. 유족이 사자명예훼손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하였으나 법원은 1심부터 대법원까지 모두 기각하였다. '믿을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으면 허위 사실도 방송해도 좋다는 것이었다. 역사 왜곡에 법원까지 면죄부를 준 셈이다.

이 책이 밝히듯이 김창룡 개인의 악마화는 대한민국 건국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역사 서사 전복과 동전의 양면이다. 역사의 공로자를 악인으로 만드는 사회는 병든 사회이다.

이승만 정권이 독재정권?
김창룡의 특무부대가 지키고자 한 이승만 정권은 오늘날 흔히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독재정권이었다고 평가된다. 이 책의 제2부는 이승만 정권이 독재정권이었는가를 정면으로 다룬다.

당시 야당은 부산정치파동(1952)과 사사오입 개헌(1954)을 이승만 독재의 증거로 내세웠고, 이러한 주장은 오늘날까지도 널리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이것은 당파적 입장에서의 피상적인 관찰에 불과하다. 1948년 제헌헌법은 국회가 대통령을 선출하고 국무원이 과반수 의결기관이며 대통령 임기를 4년의 1차 중임으로 제한한 '준내각제적' 체제였다. 유진오 등 몇몇 법률가와 임정 출신의 신익희와 한민당 등은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면서도 내각제적 헌법으로 실권을 국회에 붙들어두려 했다. 1948년 당시 세계에서 대통령 임기를 4년의 1차 중임으로 제한한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하였다. 제헌헌법이 일그러진 공화체제를 담았던 것은 이승만에 대한 제헌의원들의 ‘당쟁하는 마음’에서 기인하였다. 결국, 이승만은 직선제 및 중임제한 철폐의 두 차례 개헌을 관철하였는데, 그것은 억압과 무리수를 동반하는 정치파동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이 책은 1950년대 정치사의 혼란을 이승만 개인의 권력욕으로 돌리는 통설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야당이 내세운 '민주주의'는 막스 베버가 말하는 '신념윤리'의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것은 선의와 정의라는 명분에 따라 행동하되 그 결과는 중요시하지 않는 전통적 도덕정치였다. 조선왕조 이래 혈연·지연·학연에 기초한 가산제(家産制) 문화와 신념윤리가 지배하는 정치 풍토에서 이승만은 국가와 민족의 생존이라는 목표를 위해 강건한 책임윤리의 정치를 추구한 것이었다. 이런 해석이 타당하다면, 야당이 '독재'라 규탄한 이승만의 행동은 전통적 당파 정치의 한계를 뚫고 근대적 책임윤리의 정치를 실현하려는 소명의 과정이었다고 재해석될 수 있다.

이승만은 1904년 한성 감옥에서 집필한 『독립정신』에서부터 국민이 선출하는 대통령중심제를 '인간 사회가 고안한 가장 선미한 정부형태'로 보았다. 야당과 한국 정치학계는 이 점을 외면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공산세력으로부터 국가를 수호하고 또 야당의 거센 당쟁을 이겨내고 군을 통솔하는 가운데 이 나라 자유민주주의의 토대를 닦았다. 그 통치체제의 핵심 보루였던 김창룡 특무부대의 역할 역시 새롭게 평가받아야 한다.

왜 지금 김창룡인가?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1948년 건국의 정당성이 의심받고 있다. 건국을 반대한 김구가 국부로 추앙받고, 이승만은 친일 독재자로 매도된다. 아울러 김창룡도 국가폭력의 실행자로 간주된다.
그러나 한 국가의 성립과 유지 과정에서 폭력 여하가 판단 기준이 될 수는 없다. 대한민국이 실제로 어떠한 위협 속에서 건설되었으며,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어떠한 정보·수사체계를 필요로 했는가. 그리고 그 과정은 왜 훗날 ‘국가폭력’의 서사로만 기억되게 되었는가. 이 책은 우리가 이 질문에 새로 답할 것을 촉구한다.

가족이 기록한 ‘인간 김창룡’
본서 제3부에는 김창룡의 두 딸이 쓴 글이 수록되었다. 아버지가 암살된 뒤 가족은 긴 세월 사회적 낙인과 왜곡된 기억 속에서 살아야 했다. 먼 브라질로의 이민, 타국에서의 생존과 자립,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담담하면서도 절절한 필치로 기록되어 있다. ‘현대사의 악인’으로 기억되는 인물 의 실재 모습과 남겨진 가족의 삶 역시 이 책의 중요한 부분이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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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룡(군인)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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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대 특무부대장
김창룡
金昌龍
김창룡
창씨명
타마시마 쇼류
玉島昌龍
출생
함경남도 영흥군 요덕면 인상리[2]
(現 함경남도 요덕군 흥상리)
사망
1956년 1월 30일 (향년 35세)[3]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1묘역-69호[4]
본관
호
옥도(玉道)
직업
가족
아내 도상원
아들 김경진
딸 김미원 김미경, 김미영
경력
임관
복무
1947년 ~ 1956년
최종 계급
중장[8] (대한민국 육군)
비고

1. 개요2. 일생
2.1. 일제강점기 및 광복 직후2.2.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2.2.1. 여수·순천 10.19 사건 당시 숙군 및 김구 암살 관여2.2.2. 민간인 학살 및 간첩 조작2.2.3. 권력투쟁 끝에 암살당하다
3. 평가4. 기타5. 대중매체에서6. 참고/관련 문헌7.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군인, 친일반민족행위자. 국군기무사령부의 전신인 특무대의 대장을 맡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육군 관동군의 헌병 소속으로서 항일 무장세력을 토벌하다가 광복 이후에도 출세해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는 점에서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고 고문하는 데 앞장섰던 악질 친일 경찰 노덕술의 군인 버전으로 취급되기도 한다.

2. 일생[편집]

2.1. 일제강점기 및 광복 직후[편집]

1916년/1920년 7월 18일[9] 함경남도 영흥군 요덕면 인상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은 그리 풍족하지 않았다. 10살이 되던 해 덕성사립보통학교(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영흥공립농잠실습학교에서 누에를 키우고 실을 뽑는 기술을 배우고 일본인이 운영하는 직물회사에 취직했지만 2년 만에 회사를 나와서 만주철도 신경역 직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2년 만에 철도 직원을 그만두고 일본인의 추천을 받아 만주 주둔 일본 육군 헌병 군속으로 일하게 되었다. 3년 동안 군속으로 온갖 노력을 기울인 끝에 1941년 4월 일본 관동군 소속 헌병 교습소에 입소했고 교습소를 수료한 후 1941년 10월 육군 헌병보조원이 됐다.

그는 소련과 만주국 국경지역에서 항일 인사를 감시하는 일을 맡았다. 사복을 입고 주요 인물들을 탐색하고 접근하는 것이 주로 그가 한 일이었다. 당시 그는 자신의 임무 수행을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예를 들면 중국공산당의 거물 왕진리(王近禮)[10]를 체포할 때 그는 중국인 거지로 위장해 왕진리의 가게 종업원으로 일하게 된다. 그는 왕진리의 신임을 사기 위해 경찰서 유치장을 7번이나 드나들어 왕진리와 주변 중국인들조차 그를 '진짜 중국 사람'으로 인식했다.

일제는 그의 활약으로 왕진리를 검거했을 뿐만 아니라 왕진리와 관련된 9개 항일 지하조직을 색출하고 50여 명을 검거했다. 이때가 1943년이었다. 그의 활약에 탄복한 일제는 바로 육군 헌병 오장으로 특진시켰다. 이후에도 그는 1943년 9월부터 1945년 8월 15일 일제 패망까지 불과 2년 사이에 무려 50여 개의 항일 조직을 적발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자 사복으로 갈아입고 바로 고향인 영흥으로 돌아왔다. 이때 영흥에서 소련군에게 친일부역 혐의로 체포당해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탈출했고 이후 다른 지역을 전전하다 다시 친일 혐의로 체포돼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거듭 탈출에 성공했다고 한다. 2차례 친일파로 체포됐기에 그는 한반도 이북지역에서는 도저히 살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38선을 넘어 월남해 서울로 왔다. 도시전설에 의하면 하도 얻어터져서 폐인이 된 모습으로 넘어와 미군 경비병들이 놀랐다고 한다.

서울에서도 그는 마땅한 일을 찾지 못해 전전하던 중 마침 만주군에서 안면이 있던 박기병을 만났다. 당시 3연대에서 소대장으로 복무하던 박기병은 그를 국방경비대 5연대 일반 사병으로 입대시켜 주었다.

그러나 그는 사병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다시 박기병을 찾아간 그는 3연대에서 정보하사관으로 복무했다. 그러던 중 만주군 대위 출신인 김백일의 추천으로 1947년 1월 조선경비사관학교[11] 3기로 입교해 그해 4월 소위로 임관했다.

이런 그에게 날개를 달아준 인물이 광복군 출신의 이성가 제1연대장(당시 소령)이었다. 우익 성향의 이성가는 중국에서 국민혁명군 소속일 때도 남의사에서 활동하며 곳곳에 암약하는 공산주의자를 발본색원해야 한다는 생각이 뚜렷했으며 제1연대 내의 공산주의자를 솎아내기 위해 김창룡을 연대 정보주임 보좌관으로 발탁하고 정보소대 지휘를 맡겼다.

여기서 김창룡은 그의 재능을 십분 발휘하여 이병주 소령[12]을 비롯한 연대 내 좌익 장병들을 대거 색출해냈다. 이후 여순 반란 사건을 계기로 숙군 작업이 본격화되고 반공 이데올로기가 맹위를 떨치면서 그에게는 출세의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투철한 반공 이미지를 보이기 위한 오버스러운 행동에 대한 일화도 많다. 1947년 5월, 당시 서울에는 미소공동위원회 소련측 대표 경비병력으로 소수의 소련군이 주둔하고 있었는대 그는 한 소련 군인이 사진을 찍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격투 끝에 소련 군인을 제압하고 필름을 압수했다. 미소공동위원회에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소련은 난처해졌다. 미국은 소련 측에게 '정탐을 하러 왔느냐'고 따졌고 그의 이 행동은 군 수뇌부의 주목을 받아서 1948년 1월 중위로 진급했다.

2.2.1. 여수·순천 10.19 사건 당시 숙군 및 김구 암살 관여[편집]

그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더불어 대위로 진급했으며 8월 말 대한민국 육군본부 정보국에 배속됐다. 그러던 중 1948년 10월 여수·순천 10.19 사건이 일어났다. 여순사건 직후 이승만은 대대적인 숙군[13]을 지시했다. 1946년 국군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사실 군대의 '진입장벽'이 낮았다.

영어 한 마디만 할 줄 알면 장교가 될 수 있었고 추천서 한 장이면 요직에도 손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당장 군대를 육성하는 것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일본군 출신들도 쉽게 군에 들어갈 수 있었고 마찬가지로 좌익 계열도 어렵지 않게 군에 들어갈 수 있었다.
여순사건 당시 숙청당하는 군인...
숙청당하는 군인들.
1948년 10월, 여수·순천 10.19 사건으로 14연대가 통째로 반란을 일으키자 이승만은 군법무관이었던 김완룡에게 "한 달 내로 빨갱이들을 다 잡아 죽이고 오라"고 지시를 내렸다. 이때 김창룡이 실무자로 있던 육군 정보국 3과인 방첩과가 나섰다.

1948년 11월 11일 김창룡과 정보 요원들은 박정희 당시 소령을 체포하고 심문했다. 박정희가 체포됨으로써 군대 내 세력을 확장하던 남조선로동당 조직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1949년 3월까지 방첩과는 불과 4개월 동안 1,500명에 달하는 이를 숙청했는데 당시 군 병력의 3%에 해당하는 엄청난 인원이었다.

그러나 짧은 시간 안에 실적 쌓기식 숙청이 됐기 때문에 문제가 많았다. 대부분 증거보다 자백을 받아내는 식으로 심문했고 고문이 혹독하게 가해졌다. 자백한 뒤에는 연루된 좌익 인물을 대라고 또다시 고문이 이어졌다. 이 같은 방식으로 애매하게 숙청되는 인물이 많았다.

대표적인 예로 최남근[14] 중령은 남한 정부를 전복할 목적으로 동지들을 규합했다는 죄명이 씌워졌는데 처형당할 때 애국가를 부르고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 자신이 억울하다는 것을 마지막까지 항변한 것이다.

당시 숙군 작업으로 처형된 사람 가운데서는 이처럼 애국가를 부르거나,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거나, 심지어 '이승만 대통령 만세'를 외치면서 죽어간 사람도 있었다. 이후에도 숙군은 이어져 1949년 7월까지 4,749명이 처벌받았다. 숙군 과정에서 짧은 시간 안에 뛰어난 실적을 올린 그는 1949년 초 소령으로 승진하고 6월 육군 방첩대(CIC) 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7월 중령으로 승진했다. 불과 2년 3개월 만에 소위에서 중령까지 올라간 것이다.

그는 애먼 사람만 빨갱이 딱지를 붙여 때려잡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력을 개인적인 원한을 갚기 위해 남용한 치졸하기 그지없는 자였다. 1946년 그가 이리 소재 3연대에서 하사관으로 복무할 때 소대장은 일본군 하사관 출신 김도영이었는데 어느 날 그에게 야간 순찰 후 보고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그가 이를 어기자 그를 꾸짖으며 지휘봉으로 몇 차례 때렸다.

이 일로 김도영에 대한 앙심을 품은 그는 육사 3기로 임관한 후 특무대 소속 장교로 근무하던 중 1949년 제주 4.3 사건 토벌 시 6연대 1대대장으로 출전한 김도영이 제주도 내 좌익 세력과 내통하여 토벌을 소홀히 했다는 누명을 씌우고 특무대에 무려 6개월간 구금시킨 채 혹독하게 취조했지만 혐의가 없다는 것이 밝혀지며 간신히 풀려났다.

6.25 전쟁 도중에 부산지구 합동수사본부 본부장이던 그가 부산 제2훈련소 부소장 김도영과 마주친 자리에서 "당신은 왜 이북으로 안 가고 아직 여기 있느냐?"며 조롱하자 격분한 김도영은 권총을 뽑아들고 저 놈을 죽이겠다며 달려들어 한바탕 소동을 일으키면서 둘의 사이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전쟁이 끝난 후인 1954년 그는 또다시 논산훈련소 소장이던 김도영이 야당 인사인 신익희의 사주를 받아 훈련병들을 규합하여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고 모함하면서 그를 4개월 동안 구속수사 했고 또다시 무혐의로 석방되기는 했지만 이로 인해 장성 진급에서 미끄러진 김도영은 그가 죽을 때까지 약 2년간 무보직으로 군생활을 하는 고역을 겪어야 했다.

안두희에게 김구 암살을 지시한 배후로 가장 유력한 인물이다.# 안두희는 김구를 살해한 직후 경교장 주위에 있던 대한민국 육군 헌병들에게 체포됐다. 체포된 안두희가 끌려간 곳이 김창룡 앞이었다. 이때 그는 안두희에게 "안 의사, 수고하셨소"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이후 안두희를 끊임없이 챙겼는데 감옥에 있을 때 좋은 음식을 대접했고 책 쓰는 것을 도와줬으며 6.25 전쟁이 발발하자 안두희를 형무소에서 빼내 주었다. 안두희가 소위로 다시 임관할 때부터 대령으로 제대할 때까지 그는 살뜰하게 챙겨주었다. 그래서 김구 암살의 배후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1950년 9월 28일, 이승만은 북한군에 점령당했던 서울을 수복하자마자 그를 군·검·경 합동수사본부 본부장으로 임명했다. 합동수사본부는 북한군이 수도권 지역을 점령하고 있을 때 북한군에 협조한 '부역자'를 찾아내고 처벌하는 무시무시한 권한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합동수사본부장은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했다. 정치적으로도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6.25 전쟁 당시 부역자 체...
6.25 전쟁 당시 부역자 체포 장면.
1950년 10월 초부터 1951년 5월까지 그는 숙군 때와 마찬가지로 그야말로 엄청난 속도로 부역자를 처벌하기 시작했다. 당시 내무부 치안국 자료에 따르면 1950년 말까지 검거된 인원만 15만 3,825명, 자수한 인원 39만 7,090명으로 총 55만 915명이 부역 혐의를 받았다고 한다. 이 가운데 서울에서만 1,298명이 처형됐다.

이에 따라 실적을 중시한 그의 부역자 처벌은 여론과 정치권의 거센 비판을 받아 왔다. 특히 합동수사본부는 어느 법에도 설치 근거가 없었다. 결국 합동수사본부는 1951년 5월 23일 해체됐지만 그는은 이 시기 이승만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얻었다. 그는 1950년 10월 말에 대령으로 다시 승진했으며 1951년 5월 15일 육군 특무부대[15] 대장으로 임명됐다.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30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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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으로부터 훈장을 받는 김...
이승만 전 대통령으로부터 태극무공훈장[16]을 수여받는 김창룡.
이렇듯 엄청난 출세와 이승만의 신임을 얻었지만 문제가 있었다. 숙군과 학살, 부역자 처벌로 대부분의 좌익들을 소탕했을 뿐 아니라 남아 있던 좌익들도 북한으로 넘어가 버려 이제 남한 내 좌익들은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됐다. 빨갱이를 때려잡을 기회가 줄어든 것이다. 그는 이 상황에서 기발한 돌파구를 마련했는데 이를 테면 '빨갱이가 없으면, 빨갱이를 만들면 된다'는 것이다.

1951년 한 무리의 청년들이 상복을 입은 채 관을 메고 지리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당시 특무부 대장이었던 그는 이들이 관 속에 총기를 숨겨 놓고 지리산 빨치산에게 가는 것을 붙잡았다고 이승만에게 보고했다. 기분이 좋아진 이승만은 국무회의에서 "여러분들, 김창룡 대령을 자식처럼 사랑해 주세요"라고 공개적으로 칭찬하고 나서 국무회의장으로 그를 불러들인 뒤 노획한 총기를 전시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는 그가 벌인 숱한 조작 사건 중 아주 사소한 것에 불과했다. 최초의 '빨갱이 만들기 작전'은 1950년 10월 그가 군·검·경합동수사본부 본부장으로 취임한 직후 일어났다. 인민군 패잔병으로부터 빼앗은 무기를 삼각산 뒤편에 있던 주민들에게 쥐여주고 이들을 공산분자로 몰았고 이들이 서울을 습격하려고 한다고 꾸며 모두 죽인 사건이다. 이것이 소위 '삼각산 사건'이라고 한다.

1952년 5월 24일 무장 북한군으로 보이는 일당이 임시수도 부산 금정산에 나타나 총격을 가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경남 지역에 남도부가 지휘하는 북한군 패잔병들이 빨치산 활동을 하고 있어 당시에는 남도부 부대의 공격으로 발표되었지만 사실 이 또한 그가 조작한 사건이었다. 당시 그는 대구형무소에 있는 무기수, 중형수들을 상대로 '큰 일을 치르고 나면 석방해 주겠다'라고 제안했는데 그는 이 제안에 따른 형무소 재소자 7명을 북한군으로 꾸민 다음 부산 금정산에서 총격을 하도록 했다. 물론 이들 7명은 순식간에 사살당했다.

하지만 그의 공작에 힘입어 이승만은 다음날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5월 26일 야당 국회의원들이 탄 버스를 통째로 납치한 '부산 정치 파동'을 일으켰다. 이를 토대로 이승만은 재집권에 성공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이 사건을 직접 마무리하고 싶었지만 직속상관 김종평(육군 정보국장)이 그가 부산으로 이동하는 것을 막았다. 결국 공은 원용덕 헌병사령관 등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다. 공을 빼앗긴 그는 김종평에 원한을 품었는데 이는 또 다른 조작사건으로 만들어진다.

1953년 그는 '동해안 반란 사건'을 적발했다고 발표했다. 동해안 속초에 있는 1군단에 이승만이 방문하면 이승만을 저격하고 김종평 육군 정보국장이 군 병력 1000명을 동원해 부산을 장악해 정부 요인을 처단한 다음 조봉암 국회부의장을 대통령으로 추대한다는 엄청난 내용이었다. 나중에 군법회의에서 여러 증인들이 그의 조작임을 증언하면서 사건은 커지지 않았지만 김종평은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17]

1953년 5월 그는 육군 준장이 됐고 이때부터 간첩 조작과 함께 권력 투쟁에 직접 개입하게 된다.
정국은 처형 직전 모습
처형 직전에 찍힌 정국은의 모습.
가장 먼저 타겟이 된 이는 '정국은'이라는 사람이었는데 당시 가장 영향력이 강하던 연합신문과 동양통신의 양사 편집국장을 겸임하고 있었다. 정국은은 이범석, 원용덕 등과 함께 이승만 정권의 외곽 세력인 '조선민족청년단(약칭 족청)' 출신이었다. 김창룡은 족청과 대립 관계에 있었고 이러한 족청을 밀어내기 위해 1953년 8월 31일 정국은을 간첩 혐의로 체포했다. 정국은이 체포된 지 10일 만에 내각에서 족청 계열 장관 3명이 동시에 파면되고 곧 자유당에서 족청 계열 거물인사 8명이 제명됐다. 김창룡의 반대 세력이었던 족청은 순식간에 권력에서 이탈했다.

족청을 제거한 김창룡은 다음 타깃으로 반공검사로 유명한 오제도[18]를 삼았다. 김창룡은 이승만에게 '오제도는 빨갱이입니다.'라고 보고했다. 이 사실을 듣자 오제도 또한 '아닙니다. 김창룡이 빨갱입니다.'라고 보고했다. 그래서 김창룡의 오제도 검사 제거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박정희 역시 견제의 대상이었다. 박정희가 남로당에 있을 때 그를 잡아내고 심문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로서는 박정희의 출세를 막아야만 했다. 1953년 박정희가 미국 유학을 떠나려고 할 때 그가 막았다. 당시 미국 유학을 다녀오면 그 이력이 쌓여 군대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렇듯 그가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자 육군참모총장인 정일권과 그 파벌 핵심인 강문봉 중장, 전쟁 전 육군정보국장으로 김창룡의 직속 상관이었던 백선엽등도 쟁쟁한 거물들도 김창룡을 감당하지 못했다. 수틀리면 국군의 중추 인물들에게도 빨갱이 혐의를 뒤집어씌울 수 있는 것이 그였다.
"지금 김창룡이가 나를 빨갱이로 보고, 나를 못잡아서 안달인데 내가 어떻게 하겠소."

당시 육군참모차장 정일권 대령
"형님 말도 마십시오! 김창룡이는 지금 나를 잡아넣지 못해 안달입니다."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장 백선엽 대령
위는 여수·순천 10.19 사건 이후 숙군 당시 김정렬 육군항공사관학교장이 박원석(항공사 교수부장. 박정희 자백명단에 있어 심문됨), 박정희 구명을 위해 위 두 명을 찾아갔을 때 들은 말이다. 결국 그는 자기의 일본 육사 선배이자 국방부참모총장이던 채병덕에게까지 요청을 하고나서야 그를 구명할 수 있었다. 그에 따르면 일본군 현병 하사관출신이던 김창룡은 일본정규육사 출신에게는 꿈벅 죽어주는 면이 있었다고 하며 이후 채병덕의 설득으로 김창룡이 구명을 받아주자 박정희의 육사동기생 정보국 소령 김안일과 만주군선배 백선엽의 보증까지 받아 살아날 수 있었다.

1954년 그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논산훈련소장 김도영이 야당 국회의원 신익희의 사주를 받아 훈련병들을 이끌고 쿠데타를 기도했다는 혐의로 구속하기도 했다. 김도영은 4개월 뒤 풀려났지만 그 때문에 번번이 승진의 기회에서 누락됐고 변변찮은 보직도 맡지 못했다.

1955년 1월 심지어 그는 육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당시 그를 사람들은 '이승만의 오른팔', '이승만의 양자'라고 불렸다.[19]

1955년 '이승만 암살 음모 사건' 역시 그의 작품이었다. 그는 1955년에 과거 독립운동을 했던 나재하, 김병호, 민영수[20], 김재호, 김익중, 이범륜, 유성연, 김동혁, 김동훈에게 '이종태'라는 청년을 접근시켰는데 이승만을 비판하면서 나재하 등에게 '이대로는 안 된다. 도탄에 빠진 국민을 구하기 위해서는 이승만을 제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이에 그들은 이종태에게 1955년 10월 3일 개천절 행사 때 수류탄을 터뜨려 이승만을 죽여달라고 부탁했으며 수류탄 등을 지원했다. 결국 당연하게도 이 음모는 거사 직전 특무대에 발각됐다.[21]

이 사건을 납북된 조소앙이 암살 지령을 내렸다는 식으로 엮어서 한때 조소앙이 몸 담았던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는 정치인들도 제거하려고 했다.[22] 김수임 간첩 사건 등 숱한 사건이 그의 손에 의해 조작돼 많은 사람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1955년 10월 그의 횡포를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던 정일권과 강문봉은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이 있는 진해에 직접 찾아갔으며 "김창룡을 다른 부대로 보내거나 차라리 미국 유학을 보내 달라"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들의 요청을 거부했다. 이 소식을 들은 그는 발 빠르게 대응했다. 그는 때마침 터진 원면[23] 비리를 활용하려 했다. 당시 알려진 바에 따르면 원면을 받은 장성들이 이를 시장에 되팔아 10억 환 이상의 부당이익을 취해 자유당 고위층에 상납했다고 한다. 그는 이를 가지고 자신을 탄핵한 정일권, 강문봉 등 군 장성을 제거하려고 시도했다. 이기붕조차 그에게 '그만 들춰라'고 경고했지만 김창룡은 멈추지 않았다.

1955년 11월, 일제 경찰 출신으로 고문의 달인인 노덕술 헌병사령부 범죄수사단장(중령)이 파면됐다. 노덕술도 김창룡과 마찬가지로 이승만에게 신임을 받고 있었지만 군수물자를 빼돌린 정황이 포착됐고 언론에 대문짝만하게 실리면서 파면되고 말았다. 이 사건도 그가 잠재적 경쟁자가 될 수 있는 노덕술을 제거한 것이라는 설이 우세하다.

2.2.3. 권력투쟁 끝에 암살당하다[편집]

김창룡 암살사건 범인 이유회와...
김창룡 암살사건의 범인 이유회와 허태영.
결국 1956년 1월 30일 아침, 김창룡은 출근하던 도중 골목길에서 특무대 출신 4명(허태영 대령, 신초식 중령[24], 송용고 소령[25] , 이유회 중사[26])의 저격을 받고 암살당했다. 특히 이 가운데 주범인 허태영은 1950년 6.25 전쟁 때 김창룡이 방첩대(CIC) 대장을 맡고 있는 동안 특무대 마산파견대를 이끌었으며 이후 특무대 대전파견대장을 지냈을 정도로 김창룡과는 잘 아는 사이였다. 허태영은 법정 진술에서 김창룡을 죽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김창룡은 평소 개인의 영달을 위해 무분별하게 사람들을 잡아들였으니 공산당 1명에 무고한 양민 10명의 비율로 무고한 사람들이 그의 손에 희생되었다. 김창룡이 취급한 사건들도 전부가 협박 공갈로 자백을 받은 것으로 대부분 허위 날조됐거나 침소봉대된 것들이었다. 한편 뒤켠에서는 살인, 약탈, 협박 등으로 군수품을 빼돌리고 밀수를 하는 식으로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 김창룡이 그간 모은 재산만 20억 환이다."
김창룡 빈소 모습
김창룡의 빈소 모습.
허태영은 이유회와 함께 1957년 9월 24일 대구 육군정보학교 야외훈련장에서 총살됐고 총을 맞고 쓰러질 때까지 애국가를 불렀다고 한다. 송용고와 신초식 역시 1957년 12월 27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어 1958년 5월 21일 교수형을 당했으며 암살 사주자인 강문봉도 1957년 3월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한 달여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4.19 혁명 뒤인 1960년 10월 1일 석방, 1961년 3월 15일 복권되었다. 공모자인 공국진(1910~2014) 준장도 당초 7년이었다가 5년으로 감형되었으며 1960년 8월 31일 특별사면으로 가석방되었다. 이들 중 허태영, 송용고, 신초식은 사형당하기 전 김홍섭(1915~1965) 판사의 권유로 천주교에 귀의했다.

한편 이승만은 김창룡의 죽음을 보고 받은 그날로 중장으로 추서했다. 사건 발생 4일 후인 1956년 2월 3일, 국군 최초로 국군장이 열렸다. 그날 하루 육해공군 전 군부대는 조기를 게양했고 장병들의 음주와 가무도 금지됐다. 이승만은 김창룡 영전에 3번이나 조문하면서 진심으로 애통해했다. 이승만은 조사에서 "김 중장은 나라를 위해서 순국한 것이며 충령의 공을 세웠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항목#, 2016년 월간조선 <배진영의 기무사 비록> 2회에도 나오며 2007년 국가기록원은 특무대 측의 김창룡 저격사건 관련 수사기록, 검찰 측 판결문, 법무부의 사형집행종료보고, 미국 국무부 측 본 사건 보고서 등 총 3,000여쪽 분량의 문건들을 공개했다.#

3. 평가[편집]

대한민국 공안정치의 원조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공산당과 연관이 있다고만 하면 부모 형제, 백년지기 할 것 없이 즉각 체포, 구속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그의 이와 같은 생활은 붉은 고추만 보아도 즉각 처넣고 싶고, 여성들의 붉은 치마만 보아도 온 신경을 곤두세워 공산당과 연관시켜 볼 정도로 되게 하였다. 붉은 빛에 대한 노이로제 기미라고나 할까.

강준만의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3권>에서 재인용된 당대인의 평가들 출처 1 출처 2
한 번은 김창룡이 잡아들인 수백 명의 영등포 특별부대 장병들이 재판에 회부됐다. 사건을 담당한 이운기 법무관은 이들의 진술서가 판에 박은 듯이 똑같아 이상하다고 내게 문의해 왔다. 알아보니 김창룡이 부평을 순찰하는데 술집에서 조선인민군 노래가 울려 퍼져 즉각 술집을 포위해 잡아들이고 보니 특별부대 장병들이었다. 중대장이 무조건 한 곡씩 노래를 하라고 시켰는데 한 병사가 노래를 못한다고 극구 사양하면서 "아는 노래는 월남하기 전 이북에서 배운 노래밖에 없다"고 했더니 "그거라도 하라"고 해 생긴 소란이었다. 김창룡은 이들을 잡아들여 "친한 놈 이름을 대라"고 족쳤는데 그래서 수백 명이 검거됐다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책임질 테니 무조건 무죄로 상신하라"고 했는데, 이 일로 이운기 법무관은 김창룡으로부터 "너도 빨갱이다. 꼭 잡아넣겠다"는 위협을 받았고 나(백선엽)와도 몇 달간 신경전을 폈다.

백선엽, 『실록 지리산』 중에서
"김창룡은 직속상관인 참모총장이나 국방부장관을 무시하고 직접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따위의 월권을 자행했다. 비위사실의 보고내용도 사적인 감정에서 나온 것이 많았다. 김창룡은 정보를 군사목적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세력 확장에 이용했다. 그는 또 지휘관 사이를 이간시켜 장성들을 분열시켰다. 특무대는 본래의 사명을 망각하고 군 지휘관들을 감시하는 데 열중했다. 특무대는 군의 암적 존재다."

반공주의자로 온갖 무리수를 두어가며 공산주의자들을 솎아내려고 했기 때문에 그의 측근이나 반공극우 입장에서는 찬양의 대상이다. 반면 그에 반감을 가진 군인이나 그 과정에서 가혹한 탄압을 당한 직간접 희생자 입장에서는 증오의 대상이다.

후술할 1974년 8월 21일자 동아일보 연재물 <비화 제1공화국> 344회차에 따르면 1974년 기준으로 김창룡 본인과 암살 당사자 4명이 다 사망한 상태임에도 암살 사건조차 의견이 엇갈렸으며 당시 생존해 있던 대다수 관계자들도 "20여 년이 지난 뒤에 와서 굳이 서로 원한을 품어서 무얼 하겠는가"라는 식으로 말을 아꼈다고 한다. 그의 후임 특무부대장이던 정인택 준장 등 측근들은 한결같이 "어수선했던 시기에 공산당 타도에 앞장선 인물"이란 식으로 높이 평가했으며 제1연대 때부터 그를 보좌했던 최열 중위도 "부대장은 오로지 국가를 위해 일하다 암살당했다"고 했다. 반면 강문봉, 이진용 등은 김창룡이 군 내부의 기강을 문란시키고 사기를 저하시켜 전 군이 공분을 느껴오던 터라 제거됐던 것이라고 보았다.

21세기에도 반공극우 성향 사람들은 그를 찬양해마지 않는다. 그의 무덤에 매 해 꽃도 바치고 그를 욕하는 건 종북 행위라고 주장하며, 2011년에는 이대인(당시 한국정보문화연구원 원장)이 쓴 전기 <대한민국 특무부대장 김창룡#>, 2022년에는 비망록 <숙명의 하이라루>[27]가 출간되었으며 군사학자 남정옥(현 국방부 국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이 엮었다. 당연히 내용도 서문에서부터 미화 일색이며 독자들도 그를 미화하는 후기(뉴데일리)를 남기고 있다.

반면 대다수 학계나 정치권에서의 평가는 당연히 부정적이다. 공산주의자 몰이만이 아니라 군대 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 수많은 촌극을 벌였다는 점, 그리고 그 촌극의 내용이 상당히 가관이라는 점에서 인간이 아닌 짐승 이하로 취급하는 시각이 만연해 있다.

군 출신 인사들 사이에서는 그에 대한 시각이 엇갈린다. 일단 남북 분단 후 여수·순천 10.19 사건과 같은 반란이 일어날 정도로 혼란한 상황에서 숙군 자체는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다. 어느 정도의 부작용을 감수하고 빨리 끝낼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선 그가 필요악이라는 시선도 있다. 다만 이후 김창룡 개인의 권력욕이 개입해 억울한 피해자를 무수히 양산했다는 점은 빼도 박도 못하게 많은 이들의 지탄을 받는다. 권력을 남용하고 군의 지휘계통을 무시한 데다 숙군 과정에서는 지나친 무리수로 억울한 희생자를 많이 만들었다[28]는 이유로 한국군 원로들의 상당수가 그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한다.

1949년 숙군 당시 그를 직접 접했던 김정렬의 회고에 따르면 김창룡에 의해 좌익 혐의자로 걸려들어간 군인이 약 3,000명인데 이 중에 기소되어 실제로 형을 산 사람은 그 10%도 안 되었다고 하니 얼마나 주먹구구식이고 앞뒤 없이 좌익 여부 판단이 이루어졌는지 알 수 있다.

특히나 자유당 독재 시절에는 우익 성향이더라도 반 이승만 세력이라고 판단되면 가차 없이 공산주의자로 모함해서 더 원성을 샀다. 이로 인해 많은 보수/우익 인사들조차 김창룡을 자신들을 빨갱이로 모함한 미친놈이라고 평가한다. 대표적으로 박정희와 그 주변의 인사들도 김창룡이라면 이를 갈았다. 박정희가 5.16 군사정변을 일으켜 친 이승만계 인사들을 혁명 후에 조리돌림시키고 숙청한 것을 보았을 때 김창룡이 암살당하지 않고 살아 있었다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당하여 반병신이 되거나 처형당했을 것이란 이야기도 있다. 같은 이승만의 오른팔이자 자신보다 더 한 술 떠뜬 살인귀였던 김종원과 같은 친일 경찰 출신인 노덕술의 비참한 운명이 그에게도 재현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그를 옹호하는 측에서는 그가 원한을 산 것은 방첩 활동 뿐 아니라 목적이 무엇이었든 간에 군 고위층의 비리를 캐낸 것도 큰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한다. 1940년대~1950년대 한국군은 전쟁 전에도 혼란했고, 전쟁 중 및 이후 극도로 어려운 상황에서 파벌싸움과 부정부패가 만연해 있었다. 군내에 평안도계, 함경도계, 구 일본군계 등이 고위직을 독식하고 많은 비리를 저지르고 있었다. 그는 이승만에게 잘 보이고 싶은 권력욕은 있었을지언정 의외로 금전비리에 대해서는 비교적 깨끗했다는 증언이 있다.[29] 이런 그가 군내 고위장성들의 비리를 파헤쳤기 때문에 큰 원한을 살 수밖에 없었다.[30] 당장 강문봉이 김창룡 암살을 사주한 것도 김창룡이 그와 관련된 각종 비리를 깊이 캐들어갔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강문봉은 은 육군 최대 파벌이던 함경도계의 핵심 인물이었기 때문에 자칫하다가는 정일권을 정점으로 하는 함경도계 군맥 전체가 위기에 빠질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김창룡 암살이 사실상 정일권의 지시였다는 주장까지 등장한다. 이처럼 김창룡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에는 부정부패를 저지르다 발각당한 인사들의 사적인 원한도 한몫을 했다는 것이다.[31]

창군기 임관한 군 원로들의 증언에 따르면 대부분 김창룡이 권력을 남용하는 경우가 많고 거리를 두고 지냈다고 한다. 숙군 당시 처형을 당한 최남근조차 인간성, 지휘능력을 긍정적으로 평하는 데 비해, 김창룡은 그보다도 더 평가가 안 좋은 편이다.

대체적인 평가는 권력욕을 위하여 죄없는 사람들을 빨갱이로 모함하며 학살한 인물이므로 죽어도 싸다는 평이다. 그래서 비교적 젊은 나이에 비명횡사했다.

그런가 하면 축구계 원로들 중에도 이 사람에 대하여 부정적인 이들이 많다.[32] 네이트 김현회 칼럼에 축구대회에서 횡포를 부린 일화들이 소개된 바 있다.#

결론적으로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이라는 엄청난 국가적인 혼란 속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열하고, 잔혹한 수단으로 친일과 학살과 배신 등 온갖 악행들을 저질렀으며, 대통령의 신뢰와 국가유공자라는 타이틀 뒤에 숨어 대한민국 최악의 흑역사들을 만들어낸 최악의 비선실세이자 악질 민족 반역자, 전쟁범죄자이다.[33]

4. 기타[편집]

  • 원래 일제강점기의 스파이 양성학교인 나카노 학교를 나왔다는 말이 있다.#
  • 휴전 직전인 1953년 7월 이승만의 병세[34]를 알아채고 미군 대장에게 미국의 1급 군의관을 공수하도록 해 이승만의 병을 치료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
  • 첩을 둬가며 호의호식하는 고관들은, 감찰에 들어가 이삭 훑듯 여죄를 밝혀내 가면서 잡았다고 한다. 4.19 혁명 이후 열린 재판에서 축첩, 재산 문제가 얽힌 고관 수가 당초 예상보다[35] 적었던 건 김창룡의 기여도(?)가 적지 않을 것이라고.
  • 안양 관악산 묘역에 있던 그의 비석은 정일권이 세웠으며 비문은 이병도가 썼다. 이병도는 조문에 '그 사람됨이 총명하고 부지런하고 또 불타는 조국애와 책임감은 공사를 엄별하여 직무에 진수하더니 급기야 그 직무에 죽고 말았다'라고 적기도 했다. 1998년 국립대전현충원 이장 당시 규격화된 둘레석 및 묘비만 설치할 수 있다는 규정에 따라 장군묘역에서 300~400m 떨어진 연못이 있는 빈 터에 세웠지만 현충원 이장 반대 여론이 점차 형성된 2001년 3월에 유족 측이 인수해서 아무도 모르게 가져갔다. 이것을 정지환 <시민의신문>[36] 기자가 2003년에야 충남 금산군 추부면 승마장 구석에서 찾아내 특종으로 보도하였다.[37]
  • 죽고 나서 경기도 안양시 석수1동 산33-1 관악산 기슭의 약 1천여 평짜리 땅에 묻혔는데 안두희 증언이 이슈화되던 1992년 <한겨레신문>을 통해 존재가 재조명되었고 1998년 2월 13일 국군기무사령부의 지원으로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1묘역에 이장된 후 2001년 <동아일보>를 통해 이장 사실이 처음 알려져 점차 여론화되면서 이에 대해 찬반논란이 일었고 관련 집회가 있을 때마다 경찰이 출동할 정도로 현충원에서 비상이 걸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현행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7조 1항에서 유족이 이장을 요청하지 않는 한은 불가능하며 대전현충원 안장을 찬성하는 사람들은 그가 '반공투사'였다는 이유를 들어 극찬하고 칭송했고 유족들도 ''공산화를 막기 위해 제일 공헌을 많이 했다.', '민간인을 많이 죽였단 것은 헛소문이고 이승만 대통령을 도와 공산화를 막기 위해 제일 공헌한 분'이란 발언을 하기도 했다.# 심지어 뉴데일리에서는 그의 행적을 확대 과장해서 선전하고 있다.
    특히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가 국립대전현충원 앞에서 '김창룡은 백범 김구 선생 암살범 안두희를 비호한 반민족 행위자'라는 내용의 전단지를 배포했고 이를 <한겨레>, <대전일보>, <중도일보> 등에서 보도하자 김창룡의 장녀 김미원이 민문연과 대전지부장 이규봉(당시 배재대학교 교수), <한겨레> 등 언론사들을 상대로 서울중앙지방법원에 1억 5천만 원 가량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걸었다가[38] 2006년 3월 김미원이 사망하면서 아내 도상원이 원고 자격을 승계받아 진행했으나, 2007년 법원은 민문연의 손을 들어주었다.# 2014년 현충일에는 재야 언론인 서울의소리에서 김창룡 묘 파묘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다.
  • 그가 죽자 아내 도상원은 홀로 슬하 1남 3녀를 키웠으며[39] 세인의 지탄을 받다 못해 1971년 말 브라질 상파울루로 이민갔다가[40] 아내는 1990년대 이후 귀국해 대전에 정착했으며, 2022년 기준으로도 생존해 있었다.[41] 자식들 중 장녀 김미원은 아버지의 명예회복에 평생을 매진했으며 1995년 드라마 <김구> 제작진,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 등을 각각 고소하며 법적 투쟁을 벌이다 2006년 3월 사망했고 외아들은 여전히 브라질에 거주 중이다. 나머지 두 딸들은 첼로(2녀)/바이올린 연주자(3녀)로 살아가다가 2022년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해 아버지의 비망록을 출판하기도 했다.[42] 반대로 장인어른 도정호(1903~1930)는 독립유공자이며 항일투쟁을 하다가 옥사하였고, 장모 이고명(1906~1996)은 도정호의 독립운동을 도와 3년 옥살이까지 했다. #
  • 한반도에서 최초로 축구 야간경기를 연 기록도 갖고 있다. 1954년 전국체전에서 있었던 일인데 본인의 팀이 유리한 상황에서 경기종료 3분을 앞두고 그라운드가 어두워지자 스무 대의 지프차를 불러 라이트를 켜고 경기를 속행시킨 게 시초였다. 그런데 이마저도 그라운드를 제대로 비추지 못했고 결국 심판이 도망가는 바람에 재경기를 치러야 했다. 윗 문단의 김현회 칼럼 참고.

5. 대중매체에서[편집]

  • 1981년작 MBC 드라마 제1공화국에선 배우 김기일이, 1989년작 제2공화국에서는 백범 역 전문 배우 이영후가 김창룡으로 나왔다. 박정희를 전화기로 전기고문하는 장면 및 이후 박정희가 중요한 순간마다 그 광경을 떠올리는 장면이 묘사된다. 1993년작 제3공화국에서도 유사한 장면이 나오는데 이때 김창룡은 중견배우 김영인이 역할을 맡아 연기했다.
  • 1995년작 KBS 광복 50주년 기획드라마 <김구>에선 배우 서상익이 연기했는데 제1화 및 16화에서 안두희(정진각 분)를 만나 "백범 밑에는 빨갱이들이 많아요. 큰 나무를 쓰러뜨려야 그 밑에 숨어 있는 빨갱이들을 자연스럽게 없앨 수 있다"는 대사를 해서 백범 암살의 배후라는 설정으로 나왔다. 이에 장녀 김미원이 명예훼손이라고 주장하며 KBS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걸었으나 1996년 1심, 1997년 2심, 1998년 대법원 상고심에서 각각 패소 판결을 받았다.(서울고법 96나36700, 대법원 97다19038)
  • 1998년에 이인화 작가가 지은 박정희 미화 소설 <인간의 길>에서는 악마사촌 고문 기술자로 나온다.


  • 2003년 SBS 대하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배우 최한호가 연기했는데 102회 후반에 사사오입 개헌에 자유당 소속이던 김두한이 반대하는 입장으로 나오자 이기붕과 원영덕, 검찰총장, 치안국장과 함께 특무대 안가로 불러내 사사오입 개헌에 협조할 것을 이기붕이 부탁하나 끝까지 김두한이 거부하자 갑자기 급발진하여 권총으로 김두한을 협박하나 이때 김두한에게 오만불손하게 굴면서 "너 같은 거 빨갱이로 몰면은 그만이다, 여기서 죽어도 아무도 몰라." 라며 돼도 안 되는 협박을 하는데 오히려 김두한을 자극하는 꼴이 되었다. 이 말을 들은 김두한은 어이없다는 표정과 헛웃음을 한번 짓고는 여유롭게 차를 한 모금 들이키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가 빨갱이들과 싸워온 거 온 세상이 다 알아. 근데 나를 빨갱이로 몰아?", "너 사람 죽여봤어? 난 수없이 사람을 죽였어. 어디 쏠 테면 쏴봐! 쏘란 말이야! 임마!"라며 사자후를 시전하며 가슴 팍을 총구 앞에 들이대며 다가가자 가까이 오지 말라며 역으로 쫄아버렸다.(...) 그 후 김두한이 "너가 이러고도 특무대장이야? 너 이런 식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때려 잡았어? 너 관동군 헌병대 출신이지?"라고 말끝나기 무섭게 권총을 밀어내 떨쳐내고는[43] 바닥에 매쳐지면서 "정신차려. 임마!"라는 일갈을 들으며 굴욕을 겪는다.
  • 2004년 EBS 문화사 시리즈 제1탄 명동백작에서는 배우 이계영이 연기했다.
  • 2006년 KBS 대하드라마 서울 1945에 등장하는 박창주(박상면 분)는 이 인물에서 일부 설정을 따와서 만든 가상의 인물이다.
  • 선우휘의 '추적의 피날레'에서는 다른 이름으로 등장하는 악역 장군이 김창룡을 모델로 하고 있다. 대북 첩보를 자신의 권력장악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인물인데 이 인물도 출근하다가 암살당했다.

6. 참고/관련 문헌[편집]

  • 도서/연재물
    • 동아일보 <비화 제1공화국> '김창룡 소장 저격사건' (1974. 6. 24. ~ 8. 21.) #
    • 대한민국 특무부대장 김창룡 - 이대인 저. 기파랑. 2011.
    • 대한민국 악인열전 - 임종금 저. '6화. 빨갱이는 만들어지는 것, 용공조작의 달인 김창룡' (2015. 7. 13.) #
    • 숙명의 하이라루: 육군 특무부대장 김창룡 장군 비망록 - 김창룡 저 / 남정욱 편. 청미디어. 2022.

7. 둘러보기[편집]

[1] 본인 서기에는 1916년생으로 되어 있으며 그 시절엔 영아사망률도 높고 출생신고도 의무가 아니어서 주민등록상 생일과 실제 생일이 다른 경우가 매우 많았다. 다만 대부분의 기록에서 1920년생이라고 나오니 공식적으론 1920년생이다.[2] #[3] 만약 1916년생 설이 맞다면 향년 39세.[4] 원래는 안양에 안장되었으나 1998년 2월 13일 이장되었다.[5] #[6] 군번 10579[7] 국군기무사령부의 전신이다.[8] 사후 추서[9] 공식 기록은 1920년이지만 본인 기록으로는 1916년생이라고 되어 있다.[10] 다만 구글에 왕진리의 이름을 검색해 보면 김창룡 관련 외에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아마 여러 가명으로 활동한 스파이였던 모양이다.[11] 현재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이다.[12] 참고로 이병주는 박정희와 만주국육군군관학교 동기생으로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이병주가 먼저 공산주의에 경도되어 남로당에 가담했고 박정희도 그 영향을 받아 남로당과 연을 맺게 되어 숙군의 홍역을 치른다.[13] 군대 내 반체제 인사를 숙청하는 것이다.[14] 참고로 이 사람은 간도특설대 출신이다.[15] 육군 특무부대는 현재 국군기무사령부의 전신으로, 역대 정권에서 막강한 권한을 누려왔다.[16] 김창룡이 수여받은 태극무공훈장은 구형 디자인이며 현재와는 다르다. 김창룡 같은 문제 많은 군인이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는 사실에 어이가 없을 수 있는데 초창기 태극무공훈장은 높으신 분들에게 수여되는 커리어 장식용이나 다름없는 훈장이었다.[17] 김종평은 이후 '김종면'으로 개명하였다. 1970년대 서울신문 감사를 역임한 것으로 남재희 전 장관의 회고록에서 언급된다. # 90세이던 2013년 한국학중앙연구원 현대한국구술자료관에서 구술자료로 기록한 영상이 남아있는 걸로 보아 적어도 2013년까지는 생존한 것으로 보인다. #[18] 1950년 10월 김창룡이 군·검·경합동수사본부 본부장으로 임명될 때 마지막까지 본부장 자리를 놓고 경쟁하던 인물이다. 국가보안법의 기틀을 만들고 진보당 사건으로 조봉암을 사형시키는 등 자타공인 극우 반공 검사였다.[19] 사실 이승만은 반공에 미쳐있던 미국까지도 지적할 정도로 극단적인 반공 성향도 그렇고 후술하듯 자기 목숨도 구해준 인물이었기 때문에 김창룡의 문제점이나 사건사고를 알더라도 김창룡을 더더욱 아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20] 독립유공자 민영수와 동명이인이다.[21] 4.19 혁명 이후 나재하, 민영수 등은 이승만 정권의 악정을 개선하고자 그런 것일 뿐, 사리사욕으로 이승만을 죽이려 했던 게 아니니 특사를 신청했다고 한다. #[22] 6.25 전쟁 중에 납북된 조소앙은 북한에선 아무런 권력이 없이 그저 대외홍보용 명예직 감투만 가지고 있던 상태였다. 그나마도 말년에는 북한 정권과 마찰을 빚어서 단식투쟁 와중에 병사했다. 암살 시도가 사실이었다고 해도 북의 조소앙이 지시했다는 건 신빙성이 매우 떨어진다.[23] 군복에 들어가는 원자재.[24] 1928년 1월 10일 평안남도 대동군 출생으로 육군포병학교를 졸업했으며 수도사단을 거쳐 당시 국방부 방첩대의 작전담당관이었다.[25] 1926년 12월 23일 경상남도 울산 출신이며 신초식과 함께 육군포병학교를 졸업하였고 제 1사단, 제 6관구사령부을 거쳐서 당시 국방부 방첩대의 행정담당관이었다.[26] 1930년 11월 5일 경기도 양주 태생. 1949년 경기도 양주 송추국민학교에서 급사 (심부름꾼이나 업무보조원에 해당하는 직업)를 하다가 육군보병학교에 입교 하였으며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7월에 육군 을종하사관으로 임관하여 을지무공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 후 서울 중앙지역 병사구사령부에서 근무했다.[27] 여기서 하이라루는 중국 내몽골 자치구 후룬베이얼시의 행정 중심지인 하이라얼구(海拉尔区)이다.[28] 다수의 억울한 희생자라는 도의적 문제뿐 아니라 그나마 얼마 안 되는 다수의 숙련병/전문 장교들이 숙군 과정에서 갈려 나가 군의 전력 측면에서도 해가 되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마디로 스탈린의 대숙청이 뻘짓인 것과 마찬가지다.[29] 다만, 이런 증언의 신빙성에 대해선 각자가 알아서 판단하자. 당장 위의 본문에도 김창룡이 지금 돈으로도 적지 않고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20억 환의 치부를 이뤘다는 증언이 나오는 판이다. 단, 김창룡이 실제로 증언처럼 20억 환의 치부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없다.[30] 특히나 첩을 둬가며 호의호식하는 고관들은 감찰에 들어가 이삭 훑듯 여죄를 밝혀내 가면서 잡았다고 한다. 4.19 혁명 이후 열린 재판에서 축첩, 재산 문제가 얽힌 고관 수가 당초 예상보다 적었던 건 김창룡의 기여도가 적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옹호측의 주장이다.[31] 다만, 이러한 의견은 후대의 보안사-기무사-방첩사를 옹호하는 의견들과도 정확히 결이 일치한다.[32] 50년대 중순 군인 축구 대회를 열면서 민간 축구 대회를 병행하라고 했으며 자신이 직접 보러 올 때까지 일절 경기를 하지 말라고 지시를 내렸는데 이걸 어기고 축구 경기를 하자 뒤늦게 오더니 축구협회 간부 따귀를 때린 적도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33] 지금도 그가 국립대전현충원에 묻혀있는 것에 대해서는 그의 안장 자격에 대한 의문과 이장 요구가 현재진행형으로 거론되고 있다.[34] 이 무렵 간 쪽의 병이었다고 한다.[35] 깨끗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해하지 말자![36] 1993년에 경실련, 환경운동연합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시민주를 투자해서 창간한 재야 신문으로, 2006년에 이형모 당시 대표의 성추행 사건을 계기로 내홍을 겪다가 2007년에 폐간되었다. 반면 구 시민의신문 직원들은 <시민사회신문>을 새로 창간했다.[37] 해당 사례는 정지환이 2004년에 쓴 저서 <대한민국 다큐멘터리(인물과사상사 刊)>에도 나온다.[38] 김미원 측은 안두희가 1992년 당시 "조선호텔 앞 대륙상사로 위장된 특무대 사무실에서 만나 백범 암살을 지시받았다"고 증언했는데 암살 시점인 1949년 당시에는 특무대 자체가 없었으며 당시 생존한 사건 관계자들도 '김창룡의 지시는 말이 안 된다'고 했다고 하며 그 근거를 밝혔다.#[39] 3녀는 유복녀였다.[40] 브라질에서는 자식들을 (음악 교육 차원으로) 미국, 스위스에 유학보낼 정도로 잘 살았다고 한다.[41] '좌파정권 하에서 출판을 미루고 있던 중에'란 구절과 '별세'라는 언급이 없다는 점에서 적어도 2022년까지 생존 중이었다는 것을 암시 가능하다.[42] 그나마 3녀는 유복녀라 만나보지 못한 아버지를 그리워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아버지 미화에 대한 최소한의 동정의 여지는 있다.[43] 그냥 옆으로 밀어내자 바보같이 권총을 놓쳐 날려버렸다. 그냥 권총 하나만 믿고서 김두한에게 까분 것으로 보이는데 얼마나 이 작자가 무능하고 멍청한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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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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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룡
金昌龍
대한민국의 국방부 특무부대장
임기1952년 11월 23일 ~ 1956년 1월 30일
대통령이승만
부통령함태영
총리백두진 국무총리 서리
이갑성 국무총리 임시서리
백두진 국무총리
변영태 국무총리
백한성 국무총리 임시서리
장관신태영 국방부 장관
손원일 국방부 장관
차관이호 국방부 차관
장건식 국방부 차관 직무대리
김용우 국방부 차관

이름
별칭호(號)는 옥도(玉島)
신상정보
출생일1920년 7월 18일
출생지일제강점기 함경남도 영흥군
거주지대한민국 서울
사망일1956년 1월 30일(35세)
사망지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용산구 원효로1가
정당무소속
본관수안(遂安)
배우자도상원(都相媛)
자녀장녀 김미원(金美元)
아들 김경진(金慶震)
차녀 김미경(金美敬)
삼녀 김미영(金美英)
종교불교
군사 경력
복무관동군, 대한민국 육군
복무기간1941년 ~ 1956년
근무육군 특무부대
최종계급관동군 헌병 오장
대한민국 육군 소장(중장 추증)
지휘육군 특무부대장
주요 참전태평양 전쟁, 여순 사건, 한국 전쟁

김창룡(金昌龍, 1920년 7월 18일[1] ~ 1956년 1월 30일)은 일본군과 대한민국 국군에서 복무한 한국의 군인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 호(號)는 옥도(玉島), 창씨명은 다마시마 쇼류(玉島 昌龍).

함경남도 영흥 출생이다. 일제 시절 만주 관동군 헌병으로 근무하며 중국 공산당을 정탐하는 활동을 하였다. 해방 이후 국군에서 여순 사건의 진압과 한국 전쟁에 참여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비호를 받던 정치 군인으로서, 당시 방첩대장, 특무부대장 등을 맡으며 온갖 정치공작과 사건 조작, 전횡, 비리를 일삼았다. 여순 사건과 관련해서 체포된 박정희(朴正熙, 후에 5~9대 대통령을 역임) 소령을 수사하기도 했다. 1956년 허태영 등 군인 4명에게 암살당했다.

생애

초기 활동

일정기 활동

김창룡은 함경남도 영흥에서 출생하여 어린 시절 경상남도 김해를 거쳐 경성부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으나 만 두 살 때(1922년) 귀향한 이후 줄곧 영흥에서 자랐다. 그야말로 가난한 가정 환경에서 자란 그는 2년제 농잠학교를 마친 후 만주국 철도부 소속 신징(장춘)역 말단 역원을 거쳐 만주국 신징의 철도회사 예하 말단 평사원으로 각각 잠시 종사했다.

1940년 초 일본인의 소개로 관동군 소속 헌병보조원이 되었으며, 1940년부터 만주에서 관동군 헌병보조원과 헌병 이등병으로 근무했다. 1941년 소련 국경 부근에서 첩보 부대원으로 이력을 시작하여 이후 평생 동안 정보 공작의 전문가로 살아가게 되었다. 그 뒤 김창룡은 헌병교습소의 훈련을 마치고 관동군 헌병이 되었으며, 소련-만주 국경에 파견되어 소련 공산당과 중국 공산당의 움직임을 탐지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 뒤 일본 사복헌병이 되어, 사복 차림으로써 일본의 정탐원으로 활약했다.

1943년 상하이에서 파견되어 활동 중이던 중국공산당의 왕근례(王近禮)를 체포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왕근례가 이끌던 비밀 조직을 일망타진한 성과를 올렸다. 김창룡은 공로를 인정받아 오장(伍長)(국군의 하사)으로 진급하였으며 이후로도 많은 비밀 조직을 적발하는 공을 세웠다. 해방 전 2년 동안 적발한 항일조직은 50여 개에 달한다.

미군정

태평양 전쟁이 종전된 후 고향에 돌아왔다가 치안대에게 구금되었고, 북한 지역에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다시 체포되었다. 이때 일본군 헌병 오장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두 차례나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탈출했다. 1946년 결국 월남하였고, 전라북도 이리에 있는 국군 제3연대에 신병으로 입대한 후 3연대 정보요원으로 활동했다. 1947년 조선경비사관학교 제3기에 입교, 조선경비사관학교를 속성으로 졸업한 뒤 1947년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첩보 부대에 근무한 경력으로 쓰임새를 인정받아 정보소대 소대장을 맡았으며, 미소공동위원회에 참가한 소련군 장교의 사진 촬영 사실을 적발해 그를 추방하게 하는 등 곧 첩보 능력을 드러냈다. 그 뒤 육군 제1연대에 배속되었다.

군 복무

정부 수립 초기

북한에서 죽을 고비를 넘겼던 김창룡은 반공 전선의 일선에 섰고, 동료들을 정탐하고 군부 내 좌익 인사들을 감시하기 시작하였다. 남로당 간부들인 이재복과 이중업 등을 체포하였고, 남로당의 거물인 김삼룡, 이주하도 그의 손에 체포되었다. 군 내에서 송호성 등이 좌익과 연계를 갖고 있다며 숙군 작업도 주도했는데, 그에게 용공 세력으로 지목 받은 장교 중에는 송호성처럼 광복군이었거나 오동기처럼 중국군 소속으로 단순 항일 활동을 하던 인물들이 포함된다는 지적도 있다.

1948년 육군 대위로 승진하여 육군본부 정보국 정보장교로 보직되었다. 육본 정보장교로 근무하면서 좌익 색출과 검거에 앞장섰으며, 여수 순천 사건의 진압과 좌익 군인 색출, 숙청작업을 주도했다. 여수 순천 반란 토벌 사령부에 작전장교로 참여했다가 남로당 출신의 박정희 소령을 체포 후 심문하였으나, 정보국장 백선엽 대령을 위시한 각계의 압력에 순응해서 도리어 박 소령의 연대 신원 보증에 참여하여 그를 살려주었다. 군내 좌익숙청을 기치로 한 숙군사업의 이면에는 사실 국군을 구성하는 각 파벌들의 생존과 주도권 투쟁의 성격이 포함되었는데, 만주군, 일본군, 광복군 모든 파벌을 포괄하는 경력을 지닌 박정희의 구명은 쉽게 각 파벌에게 양해될 수 있는 사안이었다.

1949년 1월 방첩대장으로 부임하였고, 그해 6월 한국독립당 당수 김구가 암살되었다. 이때 암살자가 방첩대 소속 현역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였으므로, 그의 배후로 의심받는 등 백범 김구 선생의 암살을 주도했다는 증거 역시 다수 발견됐다.

한국 전쟁 참전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1950년 8월 1일 부산 방첩대(CIC) 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서울 수복 후에는 부역자를 가려내 처벌하는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의 본부장을 맡아 막강한 권력을 갖게 되었다. 대한민국 국군과 국제연합군이 북진할 때 평양지구 특무대장으로 일하다가 1·4 후퇴로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장 일을 계속했다. 이때 김창룡은 31세의 젊은 나이였지만 이미 권력의 실세였다. 그는 수사권을 독점했으며, 이승만과 직통 보고 라인을 갖고 있었다.

종전 뒤에도 대통령 이승만의 각별한 신임 속에 제1공화국의 각종 공안 사건들을 맡아 처리했다. 그러나 그가 처리한 거의 대부분의 용공 사건, 간첩 사건들은 후에 조작이라는 진술이 나왔다.

예를 들어 1949년 제14연대장 오동기 등이 연루된 인민해방군 사건이나, 1950년 남로당 이강국의 연인이라는 김수임을 체포해 처형한 사건, 소총을 관 속에 숨겨 대구로 이동하던 불순 분자들을 적발한 사건, 부산 정치 파동의 빌미가 된 부산 금정산 공비 사건 등이 있다.[2]

제1공화국 이후

6·25전쟁 중 서울 수복 직후에도 군·검찰·경찰 합동수사본부장이 되어 잔류 시민들의 부역자 여부를 색출, 탐문, 조사했다. 이 과정에서 좌익 부역자들을 엄히 다루어 원성을 샀다. 특무대장으로 있으면서 '동해안 반란사건', '국가원수 암살미수사건' 등 각종 정치사건을 조작하여 정치에 깊이 관여하고 이승만 대통령의 반대파를 축출하였다. 1952년 부산 정치파동의 계기가 된 ‘부산 금정산 공비 위장사건’을 꾸미는 등 용공 사건 조작을 일삼았다.

1953년 국제간첩 정국은을 적발한 사건도 이범석의 족청계 숙청을 위해 조작 또는 과장된 사건이라는 설이 있었다. 그밖에 동해안 1군단이 연루된 동해안 반란사건, 1955년 한국 전쟁 때 북으로 간 조소앙이 이승만 암살 지령을 내렸다는 개천절 이승만 암살 음모 사건도 사실상 마찬가지이다.[2]

그 밖에 국방부장관과 참모총장까지 몰아내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으나 실패하였다. 혁혁한 전공과 실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신임을 얻는 가운데, 자신보다 상관인 강문봉 중장 등을 무시하면서 감정의 골이 패이게 된다. 당시 그가 자기 권력보존과 확대를 위해 얼마나 권력을 남용했는지는, 당시 반공검사로 자타가 공인하던 오제도(吳制道)까지 용공으로 몰아 제거하려 시도했다는 사실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3]

정일권, 강문봉 등과의 갈등

1954년 5월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은 그와 친밀한 사이에 있던 공국진을 육군 헌병사령관으로 임명하여 군내 부패의 척결과 수사기관 사이의 갈등 해결 등을 주요 과제로 지시한 바 있다.[4]: 271  공국진은 이 과제들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직무한계를 자의로 무시하는 김창룡 특무대장과 잦은 갈등을 빚게 되었고, 김창룡은 이 과정에서 공국진이 탄피를 일본에 밀수출하려 하였다는 혐의를 씌워 해임을 기도했다. 소위 경무대 유시를 근거로 하는 김창룡의 공세 앞에 정일권 참모총장도 역부족으로 그가 임명한 헌병사령관의 해임을 명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4]: 271 

이후 공국진이 강문봉이 군단장으로 있는 제2군사령부의 참모장으로 발령되는 것도 김창룡의 방해로 무산되었고, 이 과정에서 김창룡은 참모총장 정일권의 명령을 정면으로 무시하고 공국진의 보좌관을 체포, 연행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김창룡의 월권행위에 분노한 정일권과 강문봉은 1955년 10월 진해에 머물고 있던 이승만에게 직접 찾아가 김창룡의 전근 내지는 유학을 건의하기도 했다.[4]: 272  그러나 이승만은 이들의 건의를 수용하지 않음으로써 김창룡에 대한 신뢰를 재확인하였다. 김창룡은 정일권과 강문봉의 비리에 대한 집중 수사로 이에 대응하였고, 이는 정일권과 강문봉의 김창룡 암살음모와 교사라는 극단적인 대응으로 이어졌다.[4]: 272  이 과정에서 주목할 것은 이승만은 김창룡에게 정일권의 비리를 수사하게 했고, 정일권에게는 역으로 김창룡의 비리를 수사하라는 밀지를 내렸다는 사실이다.[4]: 272 

사망

숙군 사업과 용공 사건 조작에 무수히 관여해 온 그는 군과 정계의 실력자로 부상하는 과정에서 적을 많이 만들었고, 결국 1956년 1월 30일 아침, 출근길에 괴한의 총격을 받고 적십자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사망했다. 이승만은 김창룡의 암살 소식을 접하자마자 적십자병원으로 직접 찾아가 유해를 살펴본 뒤 그 날짜로 김창룡을 육군 중장으로 추서했다.[5]: 194  그는 담화를 발표해 애도의 뜻을 표한 후 빠른 시일 내에 범인을 체포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군은 전국에 비상경계망을 펴고 수사에 착수했으며 전군 장병의 휴가 및 외출 금지령을 내렸다.[5]: 194 

2월 3일 김창룡의 장례는 대한민국 최초의 국군장으로 성대하게 치러졌다. 그 날 하룻동안 전 육해공군 부대가 조기를 게양하였고 장병들에게는 가무음곡과 음주 금지령이 내려졌다. 이승만은 그 날 조사에서 "김 중장은 나라를 위해서 순국한 것이며 충령의 공을 세운 것이다"라고 말하고 비문을 직접 써서 보낸 후 범인 체포를 거듭 독촉하였다.

김창룡의 묘비 비명은 역사학자 두계 이병도가 썼다. "그 사람됨이 총명하고 부지런하고 또 불타는 조국애와 책임감은 공사를 엄별하여 직무에 진수하더니 급기야 그 직무에 죽고 말았다. 아 그는 죽었으니 그 흘린 피는 전투에 흘린 그 이상의 고귀한 피였고 그 혼은 기리 호국의 신이 될 것이다." 이병도의 비명은 "동란 중에는 군검경합동수사본부장으로 맹활동을 개시하여 간첩오렬 부역자 기타를 검거 처단함이 근 2만5천 명"이라는 김창룡의 업적도 소개했다. 그러나 이 업적에는 수많은 민간인 학살도 포함된 것이라는 비판이 있다.[6]

범인은 한달 후에 그의 특무대 부하로 대령인 허태영 등 현직 군인들로 밝혀졌다. 허태영은 김창룡의 전횡과 비리를 보다 못해 군 민주화를 위해 거사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이 사건에는 다른 배후가 있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고, 정확한 진실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김창룡 암살사건 전개 과정은 이승만이 작위적으로 조성한 3대장 사이 갈등이 충성경쟁을 일으키는 차원을 넘어서서 그들 사이 살기 띤 경쟁을 일으켰음은 물론 그 위에서 줄을 당기고 있던 이승만 자신에게까지 예측할 수 없는 충격으로 다가올 정도로 격화되었음을 보여주었다.[4]: 278 

사후

평가

윤치영은 김창룡이 오래 살았다면 4.19 사태와 같은 허술한 사태 처리로 이승만이 맥없이 하야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았다.[7]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군 부문에도 포함되었다. 그의 유해는 대전현충원 장군묘역에 있다. 그가 국립묘지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는 주장이 계속되어 찬반 양론이 있다.[8][9]

의혹

그는 제1공화국 시절 각종 정치적 음모의 중심에 있었으며, 특히 김구의 암살을 지시했다는 설 또한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김구가 안두희에게 암살될 때 김창룡은 육군본부 정보국의 방첩대장을 맡고 있었는데, 체포된 안두희에게 여러 편의를 보아준 사실이 있다. 심지어 김창룡이 김구 암살의 배후일 뿐 아니라 역시 김구 암살과 관련이 있던 채병덕, 장은산, 신성모의 입을 막기 위하여 이들의 죽음에도 개입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이러한 소문들은 아직까지 확인된 바 없다.

김구의 아들 김신은 당시 계급이 소령에 불과했던 김창룡이 단독으로 살해를 지시했다고 볼 수 없다며 사건전모에 비춰볼 때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고 말했다.[10]

학력

김창룡을 연기한 배우들

같이 보기

각주

  1. “보관된 사본”. 2007년 10월 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6년 12월 24일에 확인함.
  2.  임채민 (2007년 7월 4일). “[잘 몰랐던 경남문학지대]⑤함안 출신 양우정(하)”. 경남도민일보. 2008년 7월 8일에 확인함.
  3. <한국에도 베리아는 있다 4> 『주간 삼천리』 (1961. 7. 1) 40~41쪽
  4.  유영익, 《이승만 대통령 재평가》 (연세대학교출판부, 2006)
  5.  반민족문제연구소 (1994년 3월 1일). 〈김창룡, 일제관동군헌병에서 대한민국특무부대장까지 (김혜진)〉. 《청산하지 못한 역사 1》. 서울: 청년사. ISBN 978-89-7278-312-1.
  6. 정지환 (2004). 《대한민국 다큐멘터리: 독립기자 정지환의 역사추적기》. 인물과사상사. 31~33쪽쪽.
  7. 윤치영, 《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삼성출판사, 1991) 308페이지
  8. 심규상 기자 (2006년 6월 6일). “김창룡 묘 이장 찬반 '맞대결' 시위”. 《오마이뉴스》.
  9. 정혁수 기자 (2008년 6월 6일). “시민연대 “친일파 김창룡 묘 국립묘지서 옮겨라””. 《경향신문》.
  10. "당시 정권차원의 범행 안두희)증언 빙산일각 일뿐 1992년 4월 15일 경향신문

참고 문헌

하이라루는 한자로 海拉甫가 아닌 海拉爾(海拉尔)이며, 오늘날 중국 내몽골 자치구 후룬베이얼 시(呼倫貝爾市, 呼伦贝尔市)의 행정 중심지인 하이라얼 구(海拉爾區, 海拉尔区)이다. 소련 국경과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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