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8-09

* 한국의 유교화 과정 | 마르티나 도이힐러 2023

[전자책] 한국의 유교화 과정 | 마르티나 도이힐러 | 알라딘




[eBook] 한국의 유교화 과정 - 신유학은 한국 사회를 어떻게 바꾸었나 | 너머의 역사담론 4
마르티나 도이힐러 (지은이),이훈상 (옮긴이)너머북스2023 
원제 : The Confucian Transformation Of Korea: A Study Of Society And Id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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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한국학의 대가’ 스위스인 마르티나 도이힐러가 내놓은 역작. 15~16세기 당시 사회에 신유학(성리학)의 도입과 정착이 지속적으로 강력히 추진된 동기는 무엇이었으며, 신유학이 사회 구조에 미친 영향은 어떠했는가에 대한 공백을 메운 최초의 본격 시도였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업적으로 평가받는 책이다.

20여 년이 걸린 마르티나 도이힐러의 역작은 약 150여 종이나 되는 사료와 290여 편의 각종 저작을 인용한다. 특히 사회인류학과 교류하면서 친족, 조상 숭배, 가계계승, 상속, 결혼, 상장례 등 6개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고려 초기에서 조선 후기까지 한국의 역사를 통찰하는 가운데 매우 중요한 사실에 도달한다.

1392년 조선의 건국세력에 의하여 본격적으로 추진된 유교 사회로의 전환이 이후 약 250년에 걸쳐서 점진적으로 완성되었고, 그 결과 17세기 중반에 이르러 조선의 양반 사회가 적장자 중심의 문중 사회로 재편성되었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렇게 재구성된 조선 사회는 고려시대의 사회 구조와 확연히 달랐고, 유교사상이 중국 사회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지만 한국에서는 세계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보기 힘들 정도로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목차


한국어판 서문
감사의 말

서론 사회와 이데올로기
조선 후기의 사회상 | 유교의 전래 | 신유학의 초기 형성 | 변화의 이데올로기로서의 신유학

1장 신유학 수용 전의 과거, 고려 사회의 재구성
친족과 출계 | 계승과 상속 | 혼인의 정치사회적 측면 | 혼인의 제도적 측면 | 상복과 장례 | 다시 생각해 본 고려 사회

2장 신유학, 조선 초기 개혁 입법의 이데올로기적 기초
조선 왕조 건국 세력의 등장 | 신흥 엘리트의 지적 형성 | 고려 사회의 해체와 불교 문제 | 새로운 사회 모델의 모색 | 사회의 재편 | 신유학자의 연구 전거와 제도 | 고대 모델의 타당성 | 동화와 갈등 | 엘리트주의와 이데올로기

3장 종법과 계승 문제, 그리고 제사
신유학의 사회관 | 제사의 도입 | 종법 개념의 초기 형태 | 승중과 제사 | 제사와 서얼 | 제사와 여성 | 외손의 제사 계승 관행 | 족보, 출계집단의 도해 | 봉사자의 경제적 지위 | 조상 의례의 제도적 측면 | 예학과 예서 | 조상 의례의 종교적 측면 | 장자 중심의 제사 정착

4장 상장례의 변화
상례 개정의 전주곡 | 오복제도의 변화 | 상례와 사회적 위계 | 장례식과 풍수지리

5장 상속, 균분에서 장자 우대로
국가와 사유재산 | 종법과 상속 | 상속문서의 효력과 규정 | 상속과 여성 | 장자 상속제의 정착

6장 신유학의 입법화와 여성에게 일어난 결과
처첩의 제도화 | 혼인 규정과 전략 | 『주자가례』와 혼례식 | 왕실의 혼례식 | 조선의 혼례식 | 여성에 대한 훈육과 교화 | 시집살이 | 기혼 여성의 법적·의례적 역할 | 첩과 서얼 | 혼인관계의 해소 | 과부와 재혼 | 변하지 않는 유교적 여성 이미지

결론 종족사회의 출현

저자 후기
옮긴이 개정판 후기
옮긴이 초판 후기
부록1 친족용어 풀이와 개념
부록2 마르티나 도이힐러의 연구 업적

참고문헌
미주
인명·씨족 찾아보기
내용 찾아보기


접기


책속에서


P. 21~22 이 책은 두 가지 중요한 가설을 검증하는 데 목적이 있다. 첫째, 조선 후기 한국의 사회상이, 윤곽을 대략 파악할 수 있는 고려시대 한국의 사회상과는 뚜렷이 다르다는 가설이다. 이렇듯 현저한 차이는 틀림없이 한국 사회가 고려 후기부터 조선 중기까지의 전환기에 일어난 근본적 변동에서 비롯했을 것이다. 두 번째로 이러한 변동을 일으키고 연출한 원동력은 정치적 또는 경제적 요소가 아니라-정치적 또는 경제적 영역에서는 지속성이 상당하다- 신유학이라는 가설이다. 고려 후기부터 중요한 지적 영향력을 행사해온 중국의 신유학은 한국의 학자 관료계급(사대부)에 사회조직에 대한 특별한 이상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그들이 이것을 환경에 이식하는 데 필요한 기준이 되었다. 그리하여 새로 시작된 한국 사회의 재조직화는 다른 어떠한 곳에서도 사회적 행동으로는 도달하기 어려울 정도의 깊이와 넓이에 이르렀다. 이것은 시기나 연대를 산정할 수 있는 어떤 단일한 사건과 결부되지 않았으므로 특정 시기의 것도 아니고 명칭도 없다. 그런데도 한국의 유교를 기초로 한 변동은 한국 역사에서 획기적인 변화의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알린 것이다. 접기
P. 116~117 고려에서 사람들이 성장하는 데 가장 있을 법한 사회 환경은 모친이 원래 출생한 집단에서 성장한다는 사실이다. 부친은 혼인하면서 정치적·경제적 이유에서 신부집으로 이주할지 선택하였다. 처가 거주제도〔婦處制〕는 고려에서 흔한 일이었다. 거주지를 선택하는 데 뚜렷한 제약은 없었다. 처가 거주제도냐 본가 거주제도〔夫處制〕냐에 관계없이 부모의 거주 형태가 아이들의 신분을 결정짓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머니의 집에서 아이들은 어머니 쪽 친족에 둘러싸였다. 어머니의 남자형제들은 출생 서열에 따라 각기 다른 혈연 용어로 구분되는데, 이들은 아마도 아이의 인생 초기에 중요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중 한 사람이 아마도 미래의 장인이 되었을 것이다. 외사촌과 혼인하는 일이 적어도 고려 초기에는 보기 드문 일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선호까지 한 것 같다. 집안의 연장자는 외조부모로, 이들의 사랑과 관대함에 상응하여 1년 동안 상복을 입는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접기
P. 385~386 서자 차별은 부분적으로 한국의 제사에서 사용되는 규제방식의 직접적 결과이다. 중국에는 이와 대응하는 것이 없었다. 아버지의 아들로 인정받더라도 서자는 모친의 지위가 낮아서 계보 면에서나 사회적인 면에서 유대가 약했으므로 서자 출계집단은 서자를 주변화했다. 그러므로 서자는 기껏해야 자신의 아버지 계통을 잇는다는 수준에서 받아들여질 ... 더보기
P. 383 고려시대 출계집단이 이렇듯 부계로 출계 범위가 축소된 것은 장자상속이 제도화되어 우애에 입각한 계승과 균분 상속을 종식하면서 정점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2세기 이상 제도화와 교화를 거친 후수평적 사고방식에서 수직적으로 힘겨우면서도 복잡한 이동이 마무리되었다. - puttyclay
P. 383 중국의 경우 장자상속은 오랜 세기 동안 제기능을 하지 못했으며, 장자를 선호하는 것은 이름에 불과했다. 장자 선호는 고작 장자가 형제자매 중 수위에 있음을 인정하여 통상 상속 재산에서 여분의 몫을 주는 가운데 존속했을 뿐이다. - puttyclay
P. 384 한국에서는 장자 한 사람을 당대의 이상적이며 바람직한 대표로 선정하였는데, 이것은 지가를 희생하더라도 본가는 유지하는 데 더 중점을 둔 데에서 비롯했다. 장자가 의례를 계승하는 것이 균분 상속의 완전한 종식을 직접 이끌지는 못했다.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경제적인 면에서 완전한 장자상속은 드물다 하더라도 장자상속을 선호하는 경향은 ... 더보기 - puttyclay
P. 32 유교는 아래로 침투하면서 평민이나 노비에 대해서도 양반과 마찬가지로 일상생활에 대한 문화적 지침을 제공하였다 - 승주나무



저자 및 역자소개
마르티나 도이힐러 (Martina Deuchler)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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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스위스에서 태어나 네덜란드 라이덴대 동아시아학과를 졸업했고, 하버드대 동아시아 언어문명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7년부터 1969년까지, 1973년부터 1975년까지 서울대 규장각에서 연구했다. 1988년부터 2000년까지 런던대 아시아·아프리카 대학(SOAS) 교수를 지냈다. 현재는 런던대 명예교수이다. 저서로 《한국의 유교화과정: 신유학은 한국사회를 어떻게 바꾸었나》(서울: 너머북스, 2013), 《조상의 눈 아래에서: 한국의 친족, 신분 그리고 지역성》(서울: 너머북스, 2018) 등이 있다.

『한국의 유교화 과정 The Confucian Transformation of Korea』으로 1993년 위암 장지연상을, 2001년에는 용재학술상을 수상하였다. 영국학술원 회원이며 2008년 1회 한국국제교류재단상과 2009년 미국동양학회 아시아연구공로상을 수상하였다. 『Confucian Gentlemen and Barbarian Envoys: The Opening of Korea, 1875~1885』, 『Culture and the State in Late Chos? Korea』(공 편저) 등의 저서와 다수의 한국사 관련 논문이 있다. 접기

최근작 : <추억의 기록>,<조상의 눈 아래에서>,<한국의 유교화 과정> … 총 13종 (모두보기)

이훈상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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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현재 동아대학교 인문학부 사학전공 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조선 후기의 향리』, 『향리의 역사서 ‘연조귀감’과 그 속편을 편찬한 상주의 향리 지식인 이명구 가문과 그들의 문서』(편저), 『조선 후기 동래의 엘리트와 천주교 수용자들 그리고 이에 관한 고문서』(공편저), 『조선 후기 언양의 창녕 성씨 가문과 천주교 수용자들, 그리고 이에 관한 고문서』,『조선후기 동래의 武廳先生案과 武任 총람』(공편저) 외 다수의 고문서 편저가 있고, 역서로는 제임스 팔레의 『전통 한국의 정책과 정치』, 메리 더글러스의 『순수와 위험: 오염과 금기의 분석』(공역), 에드워드 와그너의 『조선왕조사회에 있어서 성취와 귀속』(공역)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순창의 성황대신사적과 단오난장>,<조선후기의 향리> … 총 8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부계중시, 장자우대 상속, 제사의 관행은 언제 형성되었으며,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다시 출간되었으면 하는 책 1순위
- 로쟈(이현우, 서평가)

부계중시, 종손의 가계계승, 장자우대상속, 제사의 관행들은 17세기에 형성되어 20세기까지 존속한 한국 사회의 특징이다. 우리는 소위 ‘전통’이 되어버린 이것이 아주 특별한 발달 과정을 거친 최종 결과물이라는 사실에 대해 아예 모르거나 종종 잊는다. 한국의 유교화 과정은 정말로 획기적인 것이었으며 거대한 변화였다.
‘한국학의 대가’ 스위스인 마르티나 도이힐러(런던대 명예교수)가 내놓은 『한국의 유교화 과정-신유학은 한국 사회를 어떻게 바꾸었나』는 15~16세기 당시 사회에 신유학(성리학)의 도입과 정착이 지속적으로 강력히 추진된 동기는 무엇이었으며, 신유학이 사회 구조에 미친 영향은 어떠했는가에 대한 공백을 메운 최초의 본격 시도였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업적으로 평가받는 책이다.
20여 년이 걸린 마르티나 도이힐러의 역작은 약 150여 종이나 되는 사료와 290여 편의 각종 저작을 인용한다. 특히 사회인류학과 교류하면서 친족, 조상 숭배, 가계계승, 상속, 결혼, 상장례 등 6개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고려 초기에서 조선 후기까지 한국의 역사를 통찰하는 가운데 매우 중요한 사실에 도달한다. 1392년 조선의 건국세력에 의하여 본격적으로 추진된 유교 사회로의 전환이 이후 약 250년에 걸쳐서 점진적으로 완성되었고, 그 결과 17세기 중반에 이르러 조선의 양반 사회가 적장자 중심의 문중 사회로 재편성되었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렇게 재구성된 조선 사회는 고려시대의 사회 구조와 확연히 달랐고, 유교사상이 중국 사회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지만 한국에서는 세계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보기 힘들 정도로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마르티나 도이힐러 교수는 『한국의 유교화 과정』 출간에 맞추어 너머북스를 방문한 자리에서 새로운 저서에 대한 계획도 밝혔다. 4~5세기 신라시대부터 한말까지 한국 사회의 기본 단위였던 고유한 씨족 형성과 발전을 구명한 『조상의 눈 아래에서 Under the Ancestors' Eyes: Kinship, Status, and Locality in Pre-modern Korea』를 하버드대 아시아센터에서 출간할 예정이다.
도서평론가 로쟈(이현우)가 “다시 출간되었으면 하는 1순위”라 한 이 책은 2003년의 초판이 절판된 이후 저·역자의 노력을 더하여 출간한 개정판이다. 소농사회론을 주창한 미야지마 히로시의 『나의 한국사 공부』, 고려-조선왕조 교체의 역사적 의미를 밝힌 존 던컨의 『조선왕조의 기원』에 이어 2013년 너머북스가 한국사의 새로운 이해를 찾아 펴내는 해외 석학 3부작의 마지막 책이다.

거대한 전환, 신유학은 한국 사회를 어떻게 바꾸었나?

마르티나 도이힐러는 조선왕조의 건국을 단순한 왕조 교체로서가 아니라, 신유학의 이념에 입각한 사대부들의 이상사회 건설을 향한 의지의 표현으로 보고 있는데, 여기에 바로 『한국의 유교화 과정』의 독특한 점이 있다. 조준과 정도전을 비롯한 조선 건국의 주역들이 의식적으로 과거의 전통과 단절되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 했다는 점에서, 저자는 조선왕조의 등장을 중요한 역사적 분기점의 하나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 정치적 배경은 고려후기로 올라간다. 무신정권기와 원 체제를 거친 공민왕 대의 큰 과제는 지금 말로 하면 ‘국정의 정상화’였다. 여기에 동참한 사대부들의 개혁은 조선왕조를 건국하였고, 세종을 거쳐 경국대전이 완성되기까지 150여 년 동안 정치 사회 개혁을 추진하며, 또한 보기 드문 방대한 법률을 제정했다. 이는 새 왕조의 초기에 일반적으로 예상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넘었다.
저자는 조선 초기의 일련의 입법에 대해 중국에서 11세기 왕안석의 개혁이 실패한 이후 동아시아세계에서 가장 야심차고 창조적인 개혁 시도였다고 평가한다. 조선 초기에 입법을 주도한 이들은 이미 확립된 전통과 어긋나는 개념과 견해를 한국 사회에 도입하려고 했으며, 이에 따라 갈등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그렇다면 그토록 과감하게 입법을 밀고 나간 동기는 무엇일까?

한국의 유교화 과정, “전통과 유교를 조화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타협의 산물”

조선 건국의 주역들은 성리학적 이념에 기반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함으로써 당시 한국 사회가 당면하고 있던 정치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하려 하였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고려 사회는 친족 구조상 양계적인 사회였고 또한 한 남자가 여러 명의 부인을 둘 수 있었다〔竝妻〕. 역설 같지만 이는 남편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지 않아도 되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대부분은 친정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그 아들들은 모두 신분적으로 동등한 자격을 부여받았다. 게다가 고려 말에는 첨설직이나 검교직의 음직 들을 통한 신분 상승이 대대적으로 일어나고 있었으므로, 기존의 사회구성 원리가 계속 통용되는 한에서는 지배층의 팽창이 필연적이었던 것이다.
조선 건국의 주역들이 신유학 이론에 의거하여 적장자가 중심이 되는 문중 사회를 확립하려 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즉 부계 귀속성을 강조함으로써 모계를 통한 지배 신분의 확산이나 사회적 특권의 계승을 저지하려 했다는 것이다. 조선 초기 개혁적인 입법과 의식적인 노력의 결과, 조선 초기에 병처의 관행이 점차 폐지되어 갔다. 그리고 서얼 차별과 같은 중국에 없는 독특한 사회 관습이 생기게 되었다.
이후 양반층의 수가 자연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다수 양반들의 정치적 진출이 전에 비하여 어려워지면서 경제적 기반 또한 약화되는 처지에 놓였다. 그러자 양반층은 신유학이 말하는 적장자 중심의 문중 사회 이론을 확대 적용하여 장자우대 상속제를 확립함으로써, 가문의 명맥을 계속 유지하고자 했다. 이처럼 사회 구조와 변화를 지배 이데올로기와 관련하여 검토한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다.
그러나 도이힐러 교수가 내리는 결론은 한국 사회가 유교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음에도 완전한 유교사회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회의 재편이 신유학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주형에 따라 이루어졌지만, 동시에 한국의 전통적 가치를 일면 보전하면서 타협하는 방향을 선택하였다는 것이다. 그 특징 가운데 중요한 것이 엘리트의 신분이 조선시대에도 계속 양계적인 조건으로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출계는 부계에 따라 결정되지만 신분, 즉 사회 지위의 정통성은 부계뿐만 아니라 모계를 통하여도 좌우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도이힐러 교수는 “전통과 유교를 조화시키기 위해 만들어 낸 독특한 타협의 산물”이었다고 말한다.

여성의 눈으로 본 유교화 과정의 역사적 조류

특기할 만한 것은 조선시대에도 계속하여 모계가 중요한 역할을 하기는 했지만 고려 말부터 조선 중엽에 걸친 과도기에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는 것이다. 이 책이 고려와 조선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와 역할을 유교 사회로의 전환이라는 큰 역사적 조류를 염두에 두고 파악하려 한 점은 참으로 주목된다.
예를 들면, 고려시대 여성은 결혼 후에도 시댁의 일원이라기보다는 여전히 친가의 구성원이었으며 자녀 균분 상속으로 경제적으로도 독립적이었다. 그러나 출계 개념이 양계에서 부계로 바뀌게 됨에 따라 조선시대 여성은 결혼과 더불어 시가의 새로운 구성원으로 간주되었으며, 점차 경제적 독립성도 상실하게 되었다. 심지어 과부가 된 부인은 남편의 사후에 단지 일시적으로 그 유산을 간수하였을 뿐, 재산 처리에 대한 결정적인 권한이 없었다. 이혼이나 재혼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고, 산사의 출입은 금지되었으며, 친정의 방문초자도 특별한 경우에만 허락되는 등 사회적 행동이 전에 없이 많은 제한과 구속을 받게 되었다.
여성의 권위 상실은 가족제도에서 깊은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신분제도에도 주목할 만한 변화를 일으켰다. 일례로 적서 차별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한 것이다. 엘리트 여성만이 적자를 낳을 자격이 있고, 사회 지위가 낮은 여성은 첩이 되어 그 자식은 서자(녀)가 되었다. 이는 일견 부계 제도와 모순으로 보이지만 실은 양계 제도가 부계제를 강화한 결과였다. 4조라는 개념에서 이 문제는 쉽게 이해된다. 4조란 부, 조, 증조, 외조를 가리키는 말인데 사대부 가문에서 시가에 들어간 여성만 처가 될 수 있었던 데 반해 첩의 경우에는 외조가(물론 있었지만) 없다고 생각되었다. 즉 처로 간주되는 여성만 자식에게 완전한 양계 제도를, 부계를 약화하지 않고 오히려 엄격한 제도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한국학’을 세계에 알린 명저, 사회인류학과 협동하며 중국과의 비교사 시도

한국 사회의 유교화 이전과 그 이후를 비교하기 위하여 저자는 고려시대 친족제도 자체에 대한 해명에 힘을 기울였다. 고려시대의 제한된 사료를 분석하고 심층 해석하기 위하여 사회인류학의 친족제도에 대한 성과를 원용한다. 친족, 조상 숭배, 가계 계승, 상속제, 결혼, 상장례를 기본 축으로 하는 가운데 고려시대 친족의 양계성, 외손이나 타성에 의한 가계 계승, 토지와 노비의 여성 균분 상속, 양계 친족간의 결혼 등을 깊이 있게 다룬다. 부계와 모계, 양계였던 한국의 전통적 친족 구조가 이른바 ‘당내(堂內)’라 하는 부계 문중으로의 변동하는 과정을 해명하는 저자의 작업은 세계적인 사회인류학 연구사에 있어서도 선례를 찾기 힘든 일대 개가로 꼽힌다.
한편 저자는 한국의 유교화 과정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중국 사회(일본 사회와 함께)와 시종일관 비교한다. 이 책에서 저자가 전환기의 한·중 사회를 구체적으로 비교하여 얻은 결과 중 흥미로운 대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 사회는 중국 사회에 비하여 모계가 지니는 사회적 의미가 컸다. 상장례에서 한국은 모계 친족에 대한 배려가 훨씬 많았다. 혼례에서 중국은 신부가 신랑집에 와서 결혼식을 거행하는 ‘친영’이 보편화되었으나 한국에서는 왕실을 제외하면 조선 중기까지도 신부집에 가서 혼례를 거행하고 처가살이를 하였다. 때때로 친영제 시행이 강조되었지만 ‘반(半)친영’을 채택하는 정도에서 타협하였다. 또한 중국과 달리 조선에서는 관혼상제 중 관례가 별로 중시되지 않았다. 그밖에 고려나 조선에서 신원을 공식적으로 조사할 때면 언제나 4조라 하여 ‘외조’를 포함하는데 반해 중국 사회는 부계에 한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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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기] 한국의 유교화 과정 : 양계 사회에서 부계 사회로

수세기 동안 고려 사회는 성격이 점차 바뀌었다. 확산되는 중국의 영향으로 부계 중심 철학이 공계적인 한국의 원래 친족 체제에 미묘하게 덧붙은 것이다. 그 결과는 전통으로부터의 거대한 전환이 아니다. 오히려 전통 한국 체제가 개인과 집단에 부여하는 선택의 폭을 점차 좁히는 것이다. 고려 사회조직 고유의 융통성과 전략은 부계를 기초로 한 규칙에 점차 제한되면서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게 되었다... 때맞춰 한국 사회가 부계적 변환을 완결한 것은 바로 이 신유학 이데올로기의 추진력 덕분이다. _ 마르티나 도이힐러, <한국의 유교화 과정> , p126

마르티나 도이힐러(Martina Deuchler, 1935 ~ ) 의 <한국의 유교화 과정 The Confucian Transformation Of Korea: A Study Of Society And Ideology>은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시대 상황에서 부계(父系)/모계(母系) 중심의 양계(兩系) 중심에서 부계 중심, 특히 장자(長子) 중심의 사회로 변화되는 과정을 면밀하게 따라가는 책이다. 저자는 본문을 통해 신유학(新儒學)이라는 성리학(性理學)의 도입이 몽골, 전통사회 이데올로기를 몰아내고 소중화(小中華)로 자리매김하려는 사대부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존 사상과의 융합을 통해 한국만의 독자적인 제도가 정착되었음을 밝힌다. 이에 대한 상세 내용은 리뷰에서 살펴보는 것으로 넘기자...

특기할 만한 것은 조선시대에도 계속하여 모계가 중요한 역할을 하기는 했지만 고려 말부터 조선 중엽에 걸친 과도기에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는 것이다.... 출계 개념이 양계에서 부계로 바뀌게 됨에 따라 고려시대에는 자년 균분 상속으로 경제적 독립을 누리던 여성이 조선시대에 와서는 상속권을 잃음으로써 경제적으로 남편에게 종속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처 primary wife로 간주되는 여성만 자기 자식에게 완전한 양계 제도를 부계를 약화하지 않고 오히려 더 엄격한 제도로 만들었다. 이 사실은 중국 사회와 크게 구별되는 중요한 점이다. _ 마르티나 도이힐러, <한국의 유교화 과정> , p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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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21-08-18 공감(46)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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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유교화 과정 / 마르티나 도이힐러



# 조선 후기 한국 사회의 특징 : 고도로 구조화된 부계 출계집단(patrilineal decent group)을 기초로 한 친족제도




1장 신유학 수용 전의 과거, 고려 사회의 재구성




"고려에서 사람들이 성장하는 데 가장 있을 법한 사회 환경은 모친이 원래 출생한 집단에서 성장한다는 사실이다. 부친은 혼인하면서 정치적·경제적 이유에서 신부집으로 이주할지 선택하였다. 처가 거주제도[婦處制]는 고려에서 흔한 일이었다." "어머니의 남자형제들은 출생 서열에 따라 각기 다른 혈연 용어로 구분되는데, 이들은 아마도 아이의 인생 초기에 중요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외가 생활은 부친이 자기 출생 집단으로 가족을 데리고 오면서 끝났을 것이다. 그 동기는 다양하다. 가장 중요한 동기는 부친이 부모 유산 가운데 자기 몫을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부친의 정치 관직을 계승하는 것도 그 동기였다. 중년이 되면 남자는 본족, 외족, 처족(이 중 후자 둘은 일치할 수 있었다) 세 친족 집단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 것 같다. 부친은 이 세 집단의 잠재적 성원이었다. 궁극적으로 이들 집단 가운데 어느 하나에 충원되는지 결정한 것은 정치적·경제적 이해였다."(116-7)




"고려의 맥락에서 볼 때, '족族'은 후손뿐 아니라 선조들까지 묶는 출계집단을 지칭한다. 혈통은 남성과 여성의 연결 고리 모두로 추적할 수 있다. 특별히 왕조 초기의 다양한 출계 계통은 근친혼으로 얽히거나 후손이 여전히 유명한 줄기를 구성하는 그들 선조의 특권을 누리면서 그 선조에 관하여 기억하는 데 불과했다. 유명한 출계집단은 공계(共系, cognatic) 친족체계라는 큰 저수조에 새로운 구성원을 충원함으로써 자신들의 지위와 특권을 그대로 유지하였을 것이다. 계승의 융통성 역시 많은 경우 결정적 역할을 했을 것이다. 출계집단이 부계친이 없어 거의 끊어지게 될 때 사위나 그들의 자식을 통하여 새로운 활기를 얻었을 것이다." "출계집단은 중국식 성姓으로 집단의 정체성을 인식하였는데, 성은 6세기 무렵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한 신라의 왕실이 중국과 외교 관계를 맺기 원하면서 처음 소개되었다. 신라의 왕족인 김씨족과 박씨족은 성을 사용한 첫 번째 가문이다."(122-3)




점차 성이 '본관'과 동일시되면서, "어느 개인의 본관을 지칭하는 것이 더는 출생지나 거주지와 아무 관련이 없다고 생각되지만, 이것은 고위 신분을 입증하는 것으로 지속되었다."(124) "확산되는 중국의 영향으로 부계 중심 철학이 공계적인 한국의 원래 친족 체제에 미묘하게 덧붙어갔다. 그 결과는 전통으로부터의 거대한 전환이 아니다. 오히려 전통 한국 체제가 개인과 집단에 부여하는 선택의 폭을 점차 좁혔다. 고려 사회조직 고유의 융통성과 전략은 부계를 기초로 한 규칙에 점차 제한되면서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게 되었다. 위로부터 추진된 이러한 발전이 정부에 몸담고 있는 엘리트 계층의 공적 영역에 영향을 준 것이다. 반면 귀족의 사적 생활로는 거의 뚫고 들어가지 못했다. 그리고 사회의 하위 계층에도 거의 침투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왕조 말기에 신유학이 도래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때맞춰 한국 사회가 부계적 변환을 완결한 것은 바로 이 신유학 이데올로기의 추진력 덕분이다."(126)




2장 신유학, 조선 초기 개혁 입법의 이데올로기적 기초




"고려 왕조를 '불교시대'로 규정한 신유학자들은 신유학을 기초로 한 사회 질서 확립을 새 시대 출발을 보여주는 역사의 구분선으로 그으려 했다." "신유학 수용 초기에 주자를 추종한 한국의 신유학자들은 고대 중국의 고전에서 자신들의 새로운 사회 모델로서 적합한 이상적인 사회 질서를 찾아냈다." "고대의 제도와 의례를 만든 이들은 이 제도와 의례가 인간의 본성을 면밀히 검토하고 사회제도를 인간의 요구에 맞춤으로써 백성의 마음을 평화롭게 하여 위협하지 않고도 순순히 따라오도록 한 뒤 확립되었으므로 모델로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고대 제도를 기술한 텍스트의 권위를 신봉한 신유학자들은 "고전 문헌에서 적절한 증거를 찾지 못할 때는 결정을 내릴 수 없었으며 때로는 결정을 몇 년간 미루기도 했다. 고대의 모델은 편리하지만 이단의 정책으로 손상받지 않을지 경계하면서 유학자들은 그 어떤 것도 중국 성현들의 전통적 지혜에 가감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151-3)




"통치는 백성의 거친 본성을 국가 통제에 종속시키고 우주와 조화되도록 만드는 것으로 기본적으로 교육적이면서 규제를 수반하는 절차였다. 그것은 풍속으로 나타나는 (사회의 구조적 원리인) '강기(綱紀)'를 활성화함으로써 백성을 새롭게 하는 신민新民의 문제였다." "풍속의 기본 정수는 인간 사회에 근본적이고 변함없는 구조, 다시 말해 군신, 부자, 부부 관계를 제공하는 삼강三綱에 들어 있다. 삼강은 군신 사이의 의[義], 부자 사이의 친[親], 부부 사이의 구분[別], 형제 사이의 출생 서열을 인정하는 서[序], 친구 사이의 신[信]같은 오륜으로 다시 강화된다. 이들 관계는 적절한 의례 행위라고 할 수 있는 예의 관념으로 유지되는데 이것은 백성이 질서를 잘 지키도록 교화하는 핵심이 된다. 예의 발전을 촉진하는 것이 바로 관혼상제의 사례(四禮)이다." "법은 단순히 백성을 통제하는[治] 수단만은 아니다. 법은 백성의 타고난 도덕적 잠재력을 발전시킴으로써 통치를 도와주는 보조 요소이다."(155-7)




"신유학자들은 중국 고대 성왕들이 고안한 모델을 기초로 이상적인 인간 질서를 개념화한 뒤 이데올로기적 외형을 내용으로 채워야 했다. 이데올로기에 구현된 원칙은 일상에서 사회 행위의 지표가 될 실행할 수 있는 계율로 축소되어야 했다." "이데올로기를 일상생활에서 실천하기 위하여 이를 정의하고 해석한 가장 대표적인 저서는 『주자가례朱子家禮』였다." "1403년에는 처음 입사入仕한 관리들과 이미 입사한 관리들 중 7품 이하는 모두 『주자가례』를 시험 보도록 하였다. 한국인은 주자가 고대와 당대의 시간 격차를 메우고, 의례와 법 사이의 균형을 잡으며, 그 안에서 천지의 원리를 구현하여 인간의 본성과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에 『주자가례』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주자는 백성이 불교 전통에서 해방되어 도덕적인 삶을 지향하도록 이상적 의례 편람을 제공하였다고 했다. 특히 상례와 제사에 대한 입법은 불교의 오용을 막는 유익한 해독제로 평가되었다."(159)




"주자의 『근사록近思錄』과 『소학』도 사서와 함께 일관된 몸체를 형성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신유학의 정수를 담은 『근사록』은 특히 15세기 후반 사회적 입법화에서 중요한 책이었다. 이 책은 철학적 개념을 일상생활의 관심사와 명확하게 연결하면서 도덕적 의무의 실천을 바탕에 두고 정리하였다. 그리고 출계집단을 분명히 밝혀 조상 숭배를 제도화할 것을 강조하였다. 또 이 문헌은 수신에서부터 국가를 굳건한 도덕적 기반 위에 올려놓는 것까지 몇 단계를 모색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정치 문제를 해결하는 기본 텍스트이자 유용한 길잡이로 간주되었다. 한편 어린이의 초급 독본이라 할 『소학』은 교육적 가치를 높이 평가받았다. 1407년 권근은 이 책을 모든 학생의 필수 입문 텍스트로 만들자고 추천하였다. 말하자면 과거에 응시하는 모든 이도 이 책을 충분히 이해하지 않고는 합격할 수 없게 하자는 것이었다."(162-3)




"신유학의 행동 강령은 조선 왕조가 전개되면서 제기된 다양한 사회, 정치, 경제적 이슈에 착수함으로써 스스로 추진력을 얻게 된 웅장한 구성체였다. 우선 현존하는 사회적 무질서에 대처할 실용적 대안을 찾는 과정에서 고전들 속의 교훈을 사회 정책으로 치환하였다. 그 다음에는 유학자로서 사명감이 점차 차별화되었다. 끝으로 유학자들은 고유 전통이 지속되는 것의 중요성을 충분히 고려하였다. 이 과정은 중국의 사회제도를 모방하는 데 집중된 초기 사업부터 유교를 한국의 사회 상황에 융합하는 개념으로 발전시키는 것까지를 포함하였다. 이것은 '국가의 관습'[國俗]이라는 표현에 포함된 문화적 정체성의 명확한 개념을 정비하는 것으로 정점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조선 사회에는 재구성된 문인계급이 일어났는데, 이들은 혈통과 세습을 기초로 하는 신유학적 지식을 활용하여 "송나라의 신유학자들이라면 꿈에도 가능하지 않았을 정도로까지 사회정치적 환경을 다시 만드는데 성공하였다."(176-7)




3장 종법과 계승 문제, 그리고 제사




"한국에서 유교사회를 확립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첫걸음은 종법(宗法, agnatic principle)을 사회 기반으로 이식하여, 출계집단 안에 부계친 의식을 활성화하는 것이었다. 이 목적을 달성하는 데 제사보다 더 적절한 방법은 없었다." "제사는 친족관계에서 없어서는 안 될 종교적 영역이기도 하다. 그러한 유교 구도 속에서 제사는 종법을 의례적으로 실천하여, 산사람과 죽은 사람을 하나의 부계 출계집단의 성원으로 동등하게 이어준다. 무엇보다도 제사는 집안과 공적 영역 모두에 의미 있는 체계를 규정한다. 예를 들어 부계친에서 의례를 수행하는 서열의 위치는 출계집단 안에서 개인의 권리와 의무를 결정하며, 정치의 장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지위를 보장한다."(180) "계승 문제에 장자상속을 도입한 것은 한국 사회가 고려 전통에서 벗어나는 결정적인 첫걸음이었으며, 1471년의 법전 편찬은 이데올로기적으로 꼭 필요한 것을 법적 장치로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198)




"서자(또는 첩자) 문제는 1413년(태종 13)에 적실(처)과 첩 사이의 엄격한 차별을 법제화하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조선 초기에 서자(특히 양인 출신의 첩에게서 태어난 아들)가 먼 친척, 심지어 같은 형제의 아들보다 후사로서 선호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부친의 선대를 봉사하는 서자는 사회적으로 더 중요한 인물이 되었고, 경제적 혜택도 조금 누렸다. 더 나아가 봉사자가 아니라면 맡을 수 없는 관직에도 나아가는 등 국가로부터 어느 정도 인정도 받았다. 그렇지만 남녀가 정식으로 결합하지 않은 사례에 대하여 사회적으로 낙인을 찍었으므로 존엄한 가문에서는 서자에게 제사의 우선권을 맡기는 것을 여전히 못마땅하게 여겼다. 더구나 차자가 형이 죽은 뒤 후사로 세운 형의 서자에게서 봉사 권리를 빼앗으려는 시도는 통상적으로 일어나는 종족 내분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그러므로 서자를 승중자承重者로 지명하는 것은 도덕적·법적·경제적·사회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일이었다."(207-8)




"서자 봉사는 실제로 문제가 있었는데, 이것이 출계 계통을 분명하게 세우는 것과는 반대로 치달았기 때문이다. 서자 계승은 본가가 단절되면서 결과적으로 조상에 대한 본가의 특권이 지가로 옮겨가는 것을 의미하였다. 더구나 서자에게 봉사 우선권을 주는 것은 귀천을 무시하거나 심지어 폐기하여 사회 이동을 불러올 위험이 있었다. 서자의 지위가 갖는 넓은 사회적 함의의 관점에서 볼 때, 『경국대전』이 서자를 가능한 한 입후자 또는 봉사자로 언급하려고 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조선 초기 입법가들은 첩의 아들을 조금은 인정함으로써 첩의 운명을 완화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것이 인간의 감정과 법적 합리성이 타협한 것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이는 왕조 후반 이후까지 존속하지는 못했다."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법 관념에도 불구하고) 서자를 봉사에서 강제로 배제하려는 경향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두드러졌다. 1746년에 편찬된 『속대전』에서는 서자에 대하여 더는 언급하지 않았다."(211)




"공신들은 특별히 친손 개념을 의식하였지만 그럼에도 외손은 계속해서 봉사 자격을 가진 후보였다." "외손봉사는 금지되지 않았다. 『경국대전』 편찬자들은 이것을 무시하였으나 이 같은 관행은 16세기에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렇지만 관리들이 종법을 계속 내세우면서 외손봉사 관행이 부적절하다는 사실을 크게 드러냈다. 이황(1501~1570)은 하늘이 천지를 창조할 때 하나의 뿌리만 주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하나의 사당에 서로 다른 두 출계집단이 제사지내는 것은 자연 법칙에도 어긋나며, 그같이 부정확한 제물은 조상의 영도 좋아하지 않으리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이황도 후계자가 없는 어머니 쪽 조상들에 대한 딜레마를 인식하였다. 그는 임시방편으로 특별히 방을 따로 마련하여 외조의 위패를 봉안하자고 제안하였다. 그 뒤 예학자들은 이황의 이러한 관점을 되풀이하였는데, 이 같은 관점은 주자의 권위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렇지만 뿌리 깊은 관습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221-2)




4장 상장례의 변화




"상례는 죽은 이들에게 이별을 고하는 동시에 죽음으로 붕괴된 사회적 연결 고리를 다시 구성한다. 죽음을 기념하는 이 과정은 친족 사이에 그 어떤 사회적 의례보다도 특별한 감정과 행동을 강력하게 불러일으키는 통과 의례이다." "부계 친족을 확실하게 분류하는 오복제는 '사회적 혈족의 멀고 가까운[親疎] 관계'를 기초로 5등급으로 나누어 상복을 입도록 규정하고 있다. 상복을 입는 기간은 (부모의 경우에 해당하는) 3년부터 3개월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상복 재료도 거친 베부터 고운 베까지 다양하다. 상복을 입는 친척은 위아래로 4대까지이며, 방계는 육촌까지로 한정하였다. 오복제는 부계친을 특히 강조하며 비부계친과 모계친 그리고 아내의 친족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구조화된 도해인 「오복도」는 사람의 애정과 감정의 정도를 표현한 것만은 아니다. 공자가 주장한 것처럼 이것은 애도를 넘어 사회생활의 거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규범적인 친족 행동의 패러다임이었다."(244-5)




"조선 전기의 입법가들은 부모상의 경우, 3년상을 치르는 것이 기본이라고 계속 주장했다. 3년상은 중국 고대 성현들이 사람의 감정을 기초로 고안한 것이므로 사대부들이 의무적으로 준수해야 하는 '완벽한 제도'라고 믿었다. 이 같은 성현들의 가르침은 매우 분명하여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3년상을 지지하는 기본적인 논의는 『논어』에 포함된 공자의 가르침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아이는 3살이 되어야 부모의 품을 떠나므로 3년 동안 애도하는 것은 하늘 아래 어디에서나 같아야 한다." 그렇지만 『의례』에 따르면 모친에 대한 3년상은 부친이 먼저 사망한 뒤에만 적용되었다. 『의례』에는 모친이 부친보다 일찍 사망하면 모친이 하위에 있다는 표시로 재최장기를 갖추고 1년상만 치르도록 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주석자는 "가장인 부친이 살아 있는 동안 아들은 모친에게 개인적으로 느끼는 존경을 감히 완전하게 나타낼 수 없다"라고 설명하였다."(251)




"상복을 입는 규정은 상주가 평소 생활에서 벗어나야 하는 특별한 행동을 수반했다. 죽음은 오염을 의미했으며, 상喪은 길한 일과는 분리되어야 하는 흉한 일에 속했다. 길과 흉이라는 삶의 서로 다른 두 영역의 거리는 상을 지내는 동안 지켜야 하는 규범으로 전해졌다. 상주는 조악하고 색깔 없는 복을 입었는데, 이것을 지은 천이 조악하다는 것은 애도의 정도를 의미했다. 상주는 고기와 술, 양념을 삼가야 했으며 여자들의 거처에 가는 것도 금지되었다. 그 대신 여막을 짓고 살면서 무덤을 지켜야 했다. 시끄럽고 즐거운 오락거리와 말 타기, 성행위는 죽은 이를 모욕하는 것으로 비난받았다. 상중에는 혼례식을 치를 수 없었고 과거시험에도 응시할 수 없었다. 상중에 겪어야 하는 고초와 옹색한 일상생활을 피하려고 부모의 죽음을 숨기는 것은 큰 범죄가 되었다." "가장 흔한 위반은 부모 상중에 혼인하여 의도적으로 신부집에 거처를 정하는 일이었는데, 이는 자식의 도리와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었다."(261)




"사후세계에 대한 불교와 유교의 관념은 기본적으로 상호대립적이었다." "불교에서는 주검이 흩어져서 '물고기와 새들이 먹이'가 되는 반면, 유교에서는 주검을 매장하여 삶과 죽음 사이를 순환한다고 여겨지는 기를 보존하도록 하였다. 만일 조상이 땅에서 평안을 찾는다면 자손은 세상에서 평안을 찾는다고 여겨졌다. 이러한 상호의존은 나무에 비유되었다. 즉 나무뿌리가 불탄다면 그 나무의 가지와 잎은 말라죽으므로 번성할 수 없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성현들은 시체가 너무 빨리 부식할 것을 우려하여, 안팎이 견고한 관을 짜고 시체에 두꺼운 수의를 입혔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해 관 속에 침입한 해충이 주검 대신 먹을 수 있는 곡류를 넣었다." "유교의 관점에서 볼 때 묘는 이승[冥]과 저승[幽] 사이를 근본적으로 연결하는 것이므로, 묏자리를 마련하는 일이 장례식에서 가장 중요하였다."(267-8)




5장 상속, 균분에서 장자 우대로




"아들과 딸에게 고르게 상속하는 고려의 관행은 조선 초기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이 관행은 매우 뿌리 깊은 것으로 당시에는 아들과 딸 사이의 차별이 아니라 아버지의 여러 부인에게서 태어난 자식들 사이의 차별이 오히려 더 큰 문제였다." "서자 상속에 관한 규정은 모든 부계 후손에게 상속 특권을 주기 위한 것 같지만 사실은 어머니의 사회적 출신이 여전히 개인 몫을 결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적실이 낳은 아들이 있을 경우, 양첩자는 7분의 1을, 천첩자는 10분의 1을 받았다. 양첩자가 없을 때는 천첩자의 몫이 7분의 1로 늘어났다. 천첩자가 유일한 남자 자손이라 할지라도 그는 결코 완전한 후사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양첩자는 후사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라도 양첩자는 아버지와 가까운 방계친인 아버지 형제들과 공동으로 상속받아야 했다. 1405년 법규는 서자의 입지를 후사로 승격했지만 동시에 고려의 수평적 상속 전통을 마찬가지로 재확인하였다."(283-5)




"법에는 딸도 남자형제와 똑같이 재산을 나누어 가질 권리가 있다고 규정되어 있다. 그럼에도 조선 왕조 전반기에 딸의 상속권은 상당히 변하였다. 사실 16세기 초반까지도 아들이 없으면 외손이라도 조상 제사는 지내야 한다는 특별한 바람과 더불어 딸이 아버지 쪽 재산의 주요한 수여자로 지명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와 같이 각별한 목적으로 딸에게 재산을 주는 사례(유교적 시각에서는 틀림없이 잘못된 것이었다)가 있었는데도 딸이 점차 재산 상속 자격을 잃는 경향이 뚜렷하였으며 이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처음에는 느슨하게나마 친정에 있던 여성의 상속 재산은 결국 양도할 수 없는 남편의 혼인 자산에 크게 보태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그 같은 재산이 혼인할 때 지참금 형태로 가져온 것이라면 이는 신부가 첫 부인이 되기 위한 부가적 요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부모가 사망하여 상속받았으면 남편 재산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303-4)




양대 전란 이후 노비들이 대거 흩어지면서 토지 소유의 중요성은 한층 높아졌다. "경제상황이 악화되면서 대응책이 절박해졌으며 이에 따라 제례를 시급히 혁신해야만 했다. 가장 효과적인 대응책은 현존하는 상속 관행을 개정하여 토지 분산을 과감하게 줄이는 것이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전략은 의례편람에서 주장하듯이 장자를 세습 재산의 주요 상속자로 인정하면서 조상을 봉사하기 위해 세습 재산의 상당 몫을 따로 떼어놓는 것이었다." "세습 재산은 조상들이 자손 모두에게 물려주는 일종의 경제적 보험이라는 성격 대신 부계 자손들이 조상들에게 적절한 제례 행위를 하도록 지원하는 수단이 되었다. 이렇듯 달라진 관점은 대를 잇는 데 초점을 맞추면서 그들 자신의 권리에서 후사로서 여성의 입지를 손상시켰다. 여성이 남편 집안에 통합되면서 이전에 받은 상속이나 지참금 형태로 가져온 재산은 그녀가 출생한 가족과 영원히 분리되었다."(306-7)




6장 신유학의 입법화와 여성에게 일어난 결과




"유교는 남성 중심 철학이지만 남녀의 결합을 매우 중요하게 여겨 이것을 모든 인간관계의 뿌리, 즉 인간 도덕성의 토대로 간주한다. 그뿐만 아니라 부자관계에서 군신관계로 확대되는 사회화 과정의 원천으로도 본다. 우주론적 용어에서 볼 때 하늘[陽]은 땅[陰] 위에 군림하며, 남성은 여성에 비해 우위에 있다. 남녀 사이에 존재하는 이러한 명확한 위계질서는 우주론적으로 공인되어 인간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절대적 권위를 갖는다. 이 질서는 인간의 욕망을 억제해야만 유지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서 유학자들은 여성의 내부·가사 영역과 남성의 외부·공식 영역을 명확하게 구분하였다. 그들은 성적 타락이나 이기심이 사회 불안이나 부부간의 역할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고 보았으므로 남녀 구분이 그러한 현상을 억제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생각하였다." "여성은 사회 변화를 주도하지는 못했지만 사회 변화는 종종 남성보다 여성의 삶에 더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된다."(316-7)




"1413년에 처첩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조처는 인간관계와 사회 지위를 분명하게 하는 결정적 수단으로 환영받았다. 이것은 유교 법제화의 이정표로 왕조의 사회조직에 대하여 많은 것을 함축하였다. 한 명의 배우자를 처와 합법적 후사의 어머니로 격상한 것은 종법 원리에 명확한 개요를 마련하였으며, 여성을 남편의 출계집단에 굳게 결속해놓았다. 아울러 이 조처는 결과적으로 출신 계급과 연관되어 있는 여성의 세계에 구조적 불평등을 가져왔다. 대체로 처는 양반 엘리트에서 고른 반면 첩은 더 낮은 계급에서 고르기 때문이다. 넓은 관점에서 보면, 부인들을 서열화하는 것은, 사회를 존비尊卑와 귀천貴賤으로 이분하는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양반을 다른 계급과 분리하고 신분 내혼적 지위 집단으로 만드는 '사회적 방어막'은 한국을 세운 기자가 가져온 금법에서 유래한다고 믿어, 한국 사회의 고유한 것으로 간주하기에 이르렀다."(322-3)




"신유학을 신봉한 입법가들은 '여성의 길을 바로잡기 위해' 그리고 그들을 가사 영역에 가두기 위해 여성이 절에 자주 출입하는 것에 특별히 주목하였다. 1404년 여성이 부모를 추모하는 목적 이외에 절에 출입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여성은 법으로 절에 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풍속을 해치는 온상이 된다고 하여 1431년에는 무당집 출입도 금지되었다." "여성의 사찰 출입을 제한하려는 사간원의 노력은 1447년 열매를 맺었는데, 여성이 이런 위반을 하게 되면 최고 연장자와 가장 가까운 남성 친족이 공동 책임을 져야 한다는 판결을 국왕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15세기 중반 새로운 복장과 장식 형태는 보이지 않지만 여성은 옷을 어떠한 불온한 눈길도 닿을 수 없도록 입어야 했다. 특히 적처가 바깥에 나갈 때는 얼굴을 완전히 덮고 위로 올려서는 안 되는 쓰개치마를 사용하라고 특별히 강조하였다." "『경국대전』에서는 눈으로 쉽게 사회 계층을 알아볼 수 있도록 의복 재료와 색깔 선택에 제한을 두었다."(353-4)




"조선 왕조의 유학자들은 아내를 내칠 수 있거나 그럴 수 없는 두 가지 조건을 모두 법적 가치보다는 도덕적 압력으로 인식하였다. 혼인으로만 인정받고 사회 지위를 얻는 여성에게 남편 가족으로부터 쫓겨나는 것과 재혼할 경우 따라오는 사회적 오명이 가져다주는 위협은 여성을 복종적이고 순종적으로 만드는 효율적 수단이었다. 유교 이데올로기는 가정의 평화를 유지하는 궁극적 책임을 천성적으로 열등한 아내보다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는 남편에게 돌리기 때문에 사간원은 큰 이유 없이 아내를 내쫓는 남편을 엄하게 다루었다." "남편이 아내와 이혼하기를 요구하는 이유를 질투·중병·수다라고 해서 올린 사건은 대개 기각당했는데, 그런 것들은 단지 여성의 천성의 일부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배우자끼리 협의할 수 있는 것[完聚, 復合]으로 간주되었다." "남편이 호소하는 가장 큰 이유는 불효인데, 최고 불효는 계승자를 낳지 못하는 것이었다."(369-70)




"혼인은 출계집단 전체의 일이므로 남편이 죽은 뒤에도 혼인관계는 지속되었다. 배우자가 죽으면 아내의 지향점은 다음 세대로 향한다. 어머니로서 그녀는 집안의 어른이 된다. 유교 이데올로기는 여성의 가장 큰 미덕으로 남편과 출계집단에 대한 아내의 헌신을 강조하였다. 혼인관계의 이러한 배타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여성이 재혼할 정당성을 제거하였다." "유교 입법가들은 '정절을 지킨' 과부들을 특별한 경제적 수단으로 지원하였다. 남편이 죽은 후 적처로 인정받은 과부는 남편의 과전科田 일부를 받았는데, 아들이 있는 경우는 3분의 2를, 없는 경우는 3분의 1을 받았다. 이 토지는 '절의를 지키기 위한 토지'[守身田]라고 불렸으며 과부의 경제적 독립을 위한 것이었으나 오래 지속되기에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다. 1466년 과전이 공전公田으로 전환됨에 따라 수신전은 폐지되었다. 수신전을 복원하자는 요구가 자주 있었지만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374-5)




결론 종족사회의 출현




여말선초에 "가장 눈길을 끄는 분명한 변화는 출계 범위를 엄격하게 좁히는 것이다. 남성은 물론 여성으로 이어지는 모든 후손을 망라한 고려의 출계집단은 이제 엄격하게 부계 체계가 되어야 했다." 출계집단의 구성원을 충원하는 기반은 "모든 후손을 망라하는 출계 원칙에서 배타적 원칙으로 교체되었다. 이것은 모변의 친족 대부분에게 작용했다. 모변의 친족이 고려의 친족 구조에서 차지하던 압도적 위치를 점차 잃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는 남계친 가운데 유명한 조상이 있는 후손은 대체로 자신의 남계 출계집단을 형성하고 유지하기 위한 출발점을 확보하려고 그 조상을 기억하였다. 결국 고려시대 출계집단이 이렇듯 부계로 출계 범위가 축소된 것은 장자상속이 제도화되어 우애에 입각한 계승과 균분 상속을 종식하면서 정점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2세기 이상 제도화와 교화를 거친 후 수평적 사고방식에서 수직적으로 힘겨우면서도 복잡한 이동이 마무리되었다."(382-3)




출계 범위를 현저히 좁히는 변동을 가져온 "이데올로기적 기반은 조상 숭배였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친자접합親子接合, patrifiliation을 인간의 가장 기본 고리로 찬미하면서 장기간에 걸쳐 구조적 중요성을 획득하기 위하여 더 큰 계보적 출계의 맥락에 깊숙이 뿌리내려야 했다. 출계집단 내에서 각 남계 구성원의 위치를 바꿀 수 없는 세대[世] 체계와 방계 구도에 따라 규정하면서 제사는 남계의 친족관계agnation를 이데올로기에서 살아 있는 실재로 바꾸었다. 제사는 종(출계 계통)을 분명히 하고 친족의 경계를 그었다. 이와 함께 조상의 사당 앞에 모인 남계친 사이에 같은 후손이라는 의식과 더불어 결속력을 촉진하였다. 그리하여 조상 의례는 정치경제적 상황과 분리된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단체를 창안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조선시대 부계 출계집단의 형성에서 가장 중요한 동인으로 작용하였다."(384)




16-17세기의 신유학 이론가들은 중국 고전 및 신유학 이론과 배치되는 한국의 특수성을 감안하여 "국속國俗이라는 개념을 새로 만들었는데, 이 개념은 한국적 가치의 지속적인 힘, 특히 그중에서도 출계 및 사회 지위와 관련된 것을 서슴없이 인정하고 있다." 국속의 주요 요소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엘리트의 지위를 결정하고 재생산하는 출계에서 모계가 지속적으로 힘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여성은 각각의 부계를 대표하면서 그들의 출생을 완전하게 만드는 중요한 세습적 정수精粹를 전하며, 그들에게 이러한 정수가 부족하다면 그들 남편의 출계집단은 반쪽 구성원이 된다. 엘리트에게 지위의 재생산은 앙변적兩邊的이다. 여성의 혈통에 대하여 여성 자신의 자녀를 합법화하는 지속적인 중요성을 부여한 것은 신유학 수용 이전 과거 사회의 중요한 유풍이었다. 유교에서 부계친을 강조하는 것과 대조를 이루지만 이것은 사실상 한국인의 부계 출계집단의 배타성을 강화하는 구실을 했다."(3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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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na35 2019-01-14 공감(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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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거친 요약



s 지배계급의 전환? Not once!


- 신라에서 고려로의 전환: 지배계급 바뀌지 않음(육두품은 최고 지위로의 상승만 좌절되었을 뿐, 사회 전체로 보아서는 명백한 지배계급. 육두품이 이미 유학을 통한 나름의 중국화를 주장하며 한반도에서 자신의 몸값 올리려 함).

- 마찬가지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전환도 지배계급 바뀌지 않음, 다만 지배 이데올로기를 불교에서 신유학으로 갈아탐. ‘그러면서 한반도 사회는 어떻게 바뀌었나’가 이 책이 묻고 답하는 질문.

- 신라 이래 조선까지 지속되는 한반도 사회 갈등의 핵심은 ‘국왕 vs 귀족’(으로 이 학자는 파악함, 이 언어는 조금 정비될 필요가 있음).

- 신라 이래로 한반도에서 언제나 가장 최고의 자산은 지위자산!



s 신유학 in 중국

- 북송말(11세기)-(원)-송의 주돈이, 정호정이에서 시작, 주희에서 만개한 大철학체계(우주-통치-가정-마음).

- 유교제일주의. 전설의 하은주 3대를 이상사회로 보고, 복고를 추진(하였으나 조선만큼 철두철미하게 추진하지는 않았음.).

- 고려에는 13세기에 들어와서 추종자를 낳기 시작.



s 신유학 in 고려(는 어쩔 수 없이 중국화를 의미하였으나 완벽한 중국화는 당연 불가능. 한반도의 풍속이 중국화에 끊임없이 저항하고 살아남음. 한반도의 한반도화가 진행될 뿐임.)

- 10C 중반 고려에서 과거제 도입. 그 뒤로 없앴다 사라졌다 요리조리 바꿨다를 계속하다가 조선으로 넘어가서 과거제 완전 뿌리내림. 그래도 과거제가 거의 완전한 meritocracy를 의미하는 적은 한반도에서 한번도 없었어. 늘 지위자산이 먼저 왔고 그 뒤에 과거가 오는 것. (*중국 사대부와 조선 사대부의 차이)

- 고려 말, 불교 무신세력 원나라 개입 귀족의 토지 사유화 등등으로 문란하기 짝이 없어진 사회 질서, 아니 아예 no 질서. 이에 삶-사회-우주를 통합 설명하고 관리하는 새로운 시스템(담론+제도)으로서 완전히 새 판 만들려는 세력이 기존 지배계급 내에서 등장. 지배계급 내의 소수 근본주의파! (*근본주의: 이들은 하은주 고대중국의 재현을 실천목표로 삼음. 송대 성리학자도 그리 안 했을 정도로 근본주의적으로 나옴!)

- 고려 유학자들은 허례허식과 공허한 사후담론에 집중하는 불교 & 포악한 무인정권과 대비하여 신유학을 ‘실학’이라 불렀고 ‘실용’의 입장에서 왕에게 권함.

- 초기에는 불교와 유교가 조화할 수 있다고 간주되었음. 무인정권 아래서 사찰은 유학자들을 보호하는 둥지가 되어 주기도.

- 그러나 빠른 속도로 고려 귀족들 중 신유학파는 불교를 불구대천으로 인식하기 시작.

- 이성계는 친명파. 그러나 신유학파와 고려파 사이에서 갈등했고 조선의 왕이 된 뒤에도 조선 왕궁조차도 고려의/한반도의 풍속과 제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음.



s 신유학 in 조선

- 조선 건국 이후 200년 간 조선은 스스로를 유학화하느라 바쁘고도 고달펐음.

- 조선의 지배계급은 고려의 지배계급이 거의 그대로 내려왔는데(출계집단 거의 그대로 유지됨) 물론 담론은 완전히 많이 바꿨지, 유교로.

- 조선의 지배계급인 사대부는 동네에선 유학자, 진출하면 관료&정치가(이 때는 3권 분립이 안 되었으니까). 학문을 관으로, 관을 돈으로 바꿔서 먹고 사는 계급. 재야와 재관이 다 한통속.

- 신유학화의 특징상 그것은 인간의 마음과 가정과 사회와 궁궐, 나아가 우주가 하나의 원리—유학—으로 연결되는 것. 그 최종 지향은 전설의 이상시대를 한반도에 재현하기.

- 그 전설의 이상시대를 기자조선으로 봤던 정도전. 정도전도 완전히 근본주의자. 고려 말부터 이미 한반도의 유학자들은 두 파로 나뉨. 동시기 중국도 시도한 적 없게 고대중국의 이상향을 완벽하게 재현하자는 ‘꿈속의 중국파’와 아무리 중국 좋아도 한반도의 현실 존중해야 한다는 ‘국속(國俗)파’. 국왕이란 자는 이 둘 사이에서 편의와 필요에 따라 타협했던 존재.

- 그러한 타협의 대표 산물이 <경국대전>. 물론 이 <대전>은 강경파의 꿈의 규정집에 가깝지만 이 나라의 풍습과 맞지 않아 어쩔 수 없이 타협하거나 뭉뚱거리거나 언급 안 하고 지나간 부분 많음—그런 부분들이 조선시대 내내 당정거리가 됨. 조선 신유학의 thoroughness로 인해 <경국대전>은 귀족(과 백성)의 가정사의 구석구석을 관여하는 오지랍을 펼침. 그래서 두꺼워. 관례, 혼례(가장 국속의 저항이 심했던 부문), 장례 등등.




s 신유학이 만든 사회: 조선

- 신유학이 원하는 바른 인간 / 바른 사회 만들고 싶다 à 만들 수 있다 à 어떻게? à 외부 환경을 조성해서 외부 자극으로 인간 변화시킬 수 있다 (웬 낙관론!) à 외부 환경을 신유학적으로 만들고 à 그런 환경 속에서 제대로 큰 인간들을 관리로 채용하면 à 나라도 잘 되는 거지 뭐. (또 낙관론! 개체 논리와 집단 논리를 하나로 생각하는 아메바)

- 신유학이 원하는 인간은 바로 신유학적 정통성(雜하면 안 되!)을 띠고 가정에서부터 길러져야 à 그건 바로 유교적으로 성장한 아들, 중에서도 장자 à 장자는 그 가문의 유학적 정통성을 대표하는 자. 음서(조상의 관직 물려 받음)와 봉사(제사 모시기)를 할 자격과 권리 있음 à 조선의 신유학은 이 유교적 정통성을 기준으로 인구집단을 연필 깍듯이 계속 깍아내는 시스템 à 웬만하면 다들 짤려 나가고 오직 연필심만, 그 하나의 수직 정통성만 인정 받는 구조.








고려(수평, 공계)

조선(수직, 부계)


지배 이데올로기

불교

- 죽음 이후를 불교로 이해.

신유학(성리학)

- 사후세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는 모르겠음. 제사를 통해 대충 해결한 듯. 민간신앙은 계속 이어짐.


가정

婦處제

- 아이들은 외가와 동거

- 사위도 처가와 동거 (남편이 자기 집에 대해 상당히 출가외인 신세)

- 여성의 이혼 가능. 이혼 후 두번 세번 결혼 가능

- 과부인 것도 거의 전혀 문제 안 됨. 재혼할 경우 여자가 자기 아이들 데리고 감. 과부도 왕비 되.

- 자유로운 入後

夫處제

- 여자는 친정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됨(출가외인)

- 시집올 때 재산도 없음 (남편 재산에 완전히 의지)

- 여자는 결혼관계를 해소할 방법 없음

- 남자는 물론 결혼 해소할 수 있음: 칠생 등


중혼 (방문남편제)

중혼 금지하고 처첩제로 감

처첩 차별 극심

입후 차별 극심 (수양 아들이 아니라 조카아들이 봉사)

서얼 차별 극심 (서얼은 봉사의 자격 없음)


형제 수평&균분 상속

여성 균등(?) 상속

- 여성도 분명한 자기 몫 있고, 결혼해도 그 몫은 그대로 임.

- 여성의 몫이 자동으로 그 남편에게 넘어가는 법은 없음. 오직 여성의 자식을 통해서만 남편이 간접적으로 그 재산 누릴 수는 있겠지만.

정통성 띤 장자 몰아주기 (형제 균등 상속 짤 없음)

- 여자형제에게 돌아가는 재산 없음

- 족보에서(족보 완전 중시!) 태어난 순서대로 나열하던 것을 딸들은 아들 뒤로, 서얼은 처의 자식 뒤로 보내버림. 또는 아예 비존재로 만들어 버림.

- 여성: 여성인구는 이 체제의 최대 피해자이면서도 이 체제의 담지자(캐리어) 역할을 해야 했음.






s 중국과의 비교






조선

중국(남송, 명)


건국세력이 고려의 지배계층 중 신유학파(친명파)

이 신유학파가 고려를 인위적으로 폐기하고 조선을 연 것임

송의 경우에도 당나라의 몰락과 신유학자들은 아무 관련 없음 당에서 송으로 넘어가면서 당나라의 귀족들은 폭삭 몰락. 송에서는 과거를 통한 새로운 지배계층이 생겨남.

명의 건국세력도 완전한 신흥세력: 원나라에 대해 반란 일으킨 농민계층


사대부 또는 양반이라 불림

사대부 또는 신사라 불림


신분지위가 가장 중요. 이 계층은 이데올로기적으로 단일.

지위에 따라 과거 응시 자격 주어짐 (이 부분은 확인 要)

경제지위가 가장 중요. 이데올로기적으로 다양.

기본적으로 과거는 누구나 다 볼 수 있음.


학자=관료=정치가, 그 놈이 그 놈

학자(이데올로기 생산자) ≠ 관료(이데올로기 실천자)


장자 몰아주기

장자를 선호할 뿐 형제 균등 상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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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二 2016-11-01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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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전통에 대한 재해석











기억이 구체화되어 있는 모든 장소들은 종교적, 정치적, 상징적 성격과 아울러 역사 및 족보 편찬의 성격을 띠기 마련이다. 그 기억의 주요한 측면들이 '유산(heritage)' 이라는 기호(記號) 아래 재편되어 나타나는 것은, 그런 기억이 펼쳐지는 바로 그 시대에 그것 자체가 스스로 시대를 초월한 하나의 의례처럼 표현되는 것에 관심을 쏟으며, 시간적으로 유한한 자신의 흔적을 초시간성 또는 초자연성의 낙인으로써 확증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 기억 속에는 아직 민족은 없지만 민족적 신성성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것은 이후에 나타난 민족적 기억의 온갖 형태들에 그러한 성격을 물려줄 것이며, 또 그런 신성성이 그 기억에 영속적인 정당성을 부여한다. _ 피에르 노라 외, <기억의 장소 2 : 민족>, p494




<기억의 장소 Les Lieux de Memoire>는 민족적 기억(memoire nationale)과 사람들의 행동이 상호작용을 통해 특별한 표상과 뚜렷한 상징물로 남은 물질적, 비물질적 장소를 통해 프랑스 역사를 삶 속에서 발견하는 노력의 결과물이다. 기억들이 현재적인 것이라면, 역사는 과거의 산물이며 재해석되어야 한다는 차이가 있는데, <기억의 장소>에서는 장소 속에서 이들을 펼쳐낸다. 특히, <기억의 장소 1 : 공화국>에서 '전사자 기념비'는 이런 역사의 흔적이 잘 남겨진 기억의 장소로, 우리는 애국심의 전형을 여기서 발견할 수 있다. 역사의 자취가 남겨진 장소에서 찾는 현재의 의미 또는 기억. 때로는 역사와 기억의 가치가 일치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경우에는 충돌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기억의 장소>는 장소를 통해 역사와 기억의 대화를 잘 보여주는 책이다.







자신의 의무를 다했던 시민들을 기념하는 것은 각자에게 자신의 의무를 다하라고 권고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공민적 의무를 이행하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것을 수행했던 사람들은 결코 망각되어서는 안 되고, 역으로 국가(la cite)를 위해 죽은 시민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은 공민적 의무의 위대함을 분명하게 드러내 보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억하는 이 일은 곧 공민으로 개조하고 교육시키는 일이었다.(p226)... 교육하지 않고 기념하지 않는 공화국은 죽은 공화국, 다시 말해 사람들이 그것을 위해 더 이상 죽으려고 하지 않는 공화국이다._ 피에르 노라 외, <기억의 장소 1 : 공화국>, p227




<기억의 장소>의 주저자 피에르 노라(Pierre Nora, 1931 ~ )는 기억은 곧 삶이고 언제나 살아있는 집단에 의해 생겨나 끝없이 진화해 가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의 연장선상에서 조선시대의 조상묘(祖上墓) 재발견 역시 집단 기억의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차이를 찾는다면, <기억의 장소>의 기억 집단은 국가, 민족인데 반해 <조상의 눈 아래에서>는 가문(家門), 문중(門中) 이라는 정도일까.









기억의 문화는 조상숭배의 본질적 요소였다. 추모적인 실천행위로서, 조상숭배는 주요 선조의 무덤이나 가모에서 공동의 출계에 대한 기억을 의식화했다. 직계의 재구성을 위한 문서적 증거가 없었을 때, 조상의 묘는 유력한 기억 환기 장소로 기능할 수 있었다. 이런 통찰이 주요 조상의 무덤을 찾으려는 노력의 동기가 되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옛 무덤들은 관리가 되지 않았을 경우 서서히 사라졌기 때문에, 자손들은 "산양과 소가 짓밟고 다니는" 곳이 선조들의 무덤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무심코 지나치기 일쑤였다. _ 마르티나 도이힐러, <조상의 눈 아래에서>, p358




마르티나 도이힐러(Martina Deuchler, 1935 ~ ) 교수는 <조상의 눈 아래에서>를 통해 15세기까지 조선 사회에서 크게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던 조상묘가 친족 이데올로기 강화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면서 16세기부터 '조상 장지'를 찾아내고 보호하는 일이 중요해졌음을 지적하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성묘가 과거 기억의 결과임을 확인할 수 있다.





정해진 족보상의 관계에 따라 남계친을 가묘 앞에 모이게 하는 당내와 대조적으로, 문중은 명백하게 '결사체적 associational'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특정 조상의 모든 남계 후손을 포함했고 그들에게 동등한 혜택을 주었다. 공동자산의 혜택은 적어도 처음에는 경제적이라기보다는 상징적인 것이었을 터이다. 그렇지만 걸출한 선조의 무덤에서 개혁된 의례를 과시적으로 봉행하는 것이나 대종을 확실하게 지원하는 것은 단지 극진한 효행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집단 전체의 이익을 위해 조상의 위세를 이용하는 행위이기도 했다... 전자가 직계라는 유교적 원리에 입각한 수직적인 친족관계를 강조했다면, 후자는 평등한 형제관계라는 토착적 전통을 떠올리는 친족의 수평적 측면을 만족시켰다. _ 마르티나 도이힐러, <조상의 눈 아래에서>, p356




이러한 기억이 전통으로 자리잡게 되는역사적 과정에는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 ~ 1597)과 정유재란(丁酉再亂, 1597 ~ 1598), 정묘호란(丁卯胡亂, 1627)과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으로 인해 흔들리는 사회질서에 대한 반발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나, 여기에 더해 문중의 이익이라는 경제적 문제도 관여되었다는 사실도 함께 확인하게 된다. 극기복례(克己復禮)라는 유교 본연의 정신을 강조하고 흔들리는 사회질서를 바로 잡고자한 조선 후기 지배층의 노력 뒤에는 결국 그들의 기득권 보호를 위한 숨은 의도가 있던 셈이다. 그 과정에서 가문의 '직계'는 강조된 반면, 이들을 제외한 이들 - 여성, 서출 등 - 은 철저하게 배제되어 왔고, 기억이 만들어 낸 전통은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긍정적,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평소 여러 곳에서 각자의 삶은 살던 후손들이 자신의 뿌리를 찾아 한데 모이고 화합을 다지는 것이 긍정적인 영향이라면, 이러한 명절의 후유증을 겪는 이들도 있다는 것은 부정적인 영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남계로 연결된 친척들이 결국 특정 장소 한 곳에 집중적으로 매장됨에 따라, 묘지는 점차 비남계친에게는 폐쇄되었다... 남계친과 비남계친의 무덤들이 종종 섞여 있었다는 사실은 이따금 후손들 사이의 장기적인 토지 분쟁을 불러일으켰고, 그 결과 중요한 묘지의 발견을 지연시켰다. _ 마르티나 도이힐러, <조상의 눈 아래에서>, p361




주요 조상의 장지를 보호하려면 당연히 새로운 부계 친족모델에 일치하도록 묘지를 정비해야 했다. 비남계 후손과 서출은 명시적으로 배제되었다. 정리된 묘역의 조성은 분명히 '직계'의 의미를 후손의 마음에 심어주는 추가적인 수단이었다. _ 마르티나 도이힐러, <조상의 눈 아래에서>, p363




민족의 명절인 추석을 맞이해 성묘를 다녀왔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해 준 선조들을 생각하고, 이들의 후손들이 한데 모여 서로 안부를 확인하는 것. 이것은 분명 역사를 기억하는 작은 노력이라 여겨진다. 동시에, 시대에 따라 이제는 지키기 어려운 전통들(가문에 따라 다르겠지만)에 대해서는 후손들이 함께 고민하고 고쳐나가야하지 않을까도 생각하게 된다. 전통으로 내려져 온 것들이 현재의 우리에게 심한 갈등과 본목을 가져다 준다면, 이제는 그것을 재해석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처음부터 전통(傳統)이란 존재한 것이 아니라, 발명된 것이기에.











전통을 발명해낸다는 것은, 한 마디로 무엇이냐 하면, 여기서 가정하듯이 과거에 준거함을 특징으로 하면서 다만 반복되는 것만으로도 공식화되고 의례화되는 과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_ 에릭 홉스봄, <만들어진 전통>, p25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 CH, 1917 ~ 2012)이 <만들어진 전통 The Invention of Tradition>에서 말한 바처럼 오늘날 우리가 전통으로 알고 있는 것들도 끊임없이 재해석된 최근의 결과물임을 생각해본다면, 맹목적인 전통 유지가 아닌 전통 인식에 대한 창조적 파괴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명절을 맞아 누군가에게는 '우울한 연휴'가 된다면, 그것은 아마도 조상님들이 원하시는 바는 아닐것이다. 기억은 곧 삶이고 언제나 살아있는 집단에 의해 생겨나 끝없이 진화해 가는 것이라면, 명절에 대한 인식도 꾸준히 바뀌어져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분명, 과거 명절보다는 나아졌지만, 명절 후유증을 겪는 이들이 더이상 없었으면 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통상 낡은 것처럼 보이고 실제로 낡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른바 '전통들(traditions)'은 실상 그 기원을 따져 보면 극히 최근의 것일 따름이며, 종종 발명된 것이다.(p19)... '만들어진 전통'은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통상 공인된 규칙에 의해 지배될 뿐만 아니라 특정한 의례나 상징적 성격을 갖는 일련의 관행들을 뜻하는 것으로 간주되는데, 그것들은 특정한 가치와 행위 규준을 반복적으로 주입함으로써 자동적으로 과거와의 연속성을 내포한다. 기실 그런 관행들은 가능하다면 언제나 역사적으로 기념하기에 알맞은 과거와의 연속성을 확립하려고 든다. _ 에릭 홉스봄, <만들어진 전통>,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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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20-10-03 공감 (41)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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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문화재단 독서챌린지 1기] 7주차 : 지배 이데올로기로서의 유교와 경세사상, 러일전쟁







아들을 하나 이상 낳아만 준다면 김훈장은 날로 퇴락해가는 집만 남아 있는 김진사댁의 대도 이어줄 생각이었다. 생각이라기보다 간절한 희망이었다. 마음을 놓아서였던지 며느리를 본 후 김훈장은 며칠을 앓았고 앓고 난 뒤 그의 머리카락과 수염은 더욱더 희어졌다. _ 박경리, <토지 4> , p21/672




<토지 4>의 처음은 러일전쟁(日露戰爭, Russo-Japanese War 1904 ~ 1905)이라는 상황을 바라보는 김훈장과 조준구의 입장 차이를 보여준다. 유학(儒學)을 따르며 위정척사(衛正斥邪)를 위해 노력하는 김훈장과 어른 없는 최참판댁 자산을 노리는데 여념이 없는 조준구. 이들의 모습은 말 그대로 당대 지배층들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이들 중 김훈장을 살펴보자. <토지인물사전>에 '봉건제적 질서에 충실한 보수주의자'로 설명된 김훈장. 가문의 후사를 이어야한다는 그의 강박관념은 당시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신유학(新儒學) - 성리학(性理學)'에서 비롯되었다.






이에 대해, 마르티나 도이힐러(Martina Deuchler, 1935 ~ ) 는 <한국의 유교화 과정 The Confucian Transformation Of Korea: A Study Of Society And Ideology>에서 '신유학' 이데올로기는 한국 사회가 부계 중심 사회로 개편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지적한다. 장자(長子) 중심의 승계는 얼핏 유럽 중세의 봉건제도와 연계점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유럽에서는 차남(次男) 이하 다른 자녀들은 성직자, 기사 등 다른 직업으로 진출한 데 반해 조선 시대의 엘리트 층은 그렇지 않았다는 점에서 같은 듯 다르다. 이에 대해서는 '자본주의 資本主義'와 관련한 다른 페이퍼에서 다루도록 하고 일단 넘기자.





장자는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아버지와 아버지 쪽 조상과 연결되었다. 다시 말해서 장자만이 선조들의 유일한 후사로서 후손을 대신하여 아버지의 권리와 의무를 받는 '정체 正體'를 가졌던 것이다. 장자는 형제자매 집단을 대표하면서 세대를 잇는 이상적인 고리로 인식되기에 이르렀으며, 이것은 장자가 법적, 의례적, 경제적으로 우위에 놓이도록 만들었다. 이 같은 장자의 모습이 완전히 드러난 것은 17세기이다. 이것은 이상사회에 대한 주자의 개념을 기초로 한 부계친 사고의 절정을 나타낸 것이다. _ 마르티나 도이힐러, <한국의 유교화 과정> , p241






<토지 4>에서 김훈장은 가문을 잇는다는 가문의 책무를 완수한 후 자신의 시선을 비로소 나라로 돌린다. 이러한 그의 행동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작품 안에서 김훈장은 어느정도 가문의 문제를 해결하고 난 뒤 그는 지배 엘리트 층으로서 문제를 자각하고 이에 대한 대책을 고민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그의 모습이 오롯이 우국충정(憂國衷情)의 붉은 마음(丹心) 때문일까. 김훈장의 처지를 생각하면 순수하게 받아들이기 힘들다.





"나라나 한 집안이 망하고 흥하는 것은 천운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그러나 인화가 없고 신의가 없고 예절을 잃으면 그것으로써 마지막이야. 지금 나라 꼴이 어떠한가? 동가숙서가식하는 천기보다 못한 지조 잃은 인사들이 황공하게도 임금을 볼모로 삼아서 오늘은 아라사요 내일은 왜국이요, 해서 자신의 영달에만 급급하니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느냐.(p22)... 가통을 이어야 한다는 골수에 박힌 사상은 이 나라의 꽃이요 정기요 하며 의병의 항쟁을 흐느끼듯 칭송해 마지않던 감정을 누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p25)... 가통을 잇는다는 집념과 정열의 성취를 본 지금, 이제 그 정열과 집념은 갈 곳이 없게 되었다. 아니 갈 곳이 없다기보다 차디찬 재로 변해버린 것이다. _ 박경리, <토지 4> , p31/672




마르티나 도이힐러는 다른 책 <조상의 눈 아래에서 Under the Ancestors' Eyes: Kinship, Status, and Locality in Premodern Korea>에서 향촌의 양반인 향반(鄕班)이 지방에서 영향력 유지를 위해 종법(種法)에 기초한 네트워크가 구성되었음을 말한다. 중앙의 정치권력에 대항하는 사회권력으로서 향약(鄕約)에 근거한 김훈장의 힘은 바로 지방민들의 지지와 존경으로부터 나왔기에 '평사리의 존경받는 어른'으로 남기 위해서 그는 움직여야만 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고유의 친족 이데올로기는 신분의 위계와 신분의 배타성을 찬미하면서 운명의 붉은 실처럼 신라 초부터 19세기 말에 이르는 한국의 역사를 관통했다. 사회적인 것을 정치적인 것보다 우선시함으로써, 이 이데올로기는 출생과 출계를 기반으로 지배력을 행사하는 엘리트를 창출했고, 엘리트에게 시공을 초월하는 엄청난 내구력을 부여했다._ 마르티나 도이힐러, <조상의 눈 아래에서>, p727



한편으로는 중앙으로부터 갈수록 소외당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능하지만 결코 간섭을 멈추지 않는 국가의 압력에 시달리면서 엘리트 신분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지자, '향촌의 양반(향반 鄕班)'은 점차 '지역주의 전략'에 기대어 본인들의 사회적 지위를 공고히 하고 향촌 지배권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그들이 구사한 가장 효과적인 장기 전략은 종족제도의 체계화와 강화였고, 이 제도는 17세기에 성숙한 단계에 접어들었다. _ 마르티나 도이힐러, <조상의 눈 아래에서>, p473




<토지>저자 박경리(朴景利, 1926 ~ 2008)는 당대 서민들의 생각이 동학(東學) 사상에 잘 드러난다고 본다. 동학농민혁명에 드러난 민의(民意)는 동학교도만의 것이 아니었다는 것으로, 이러한 작가의 생각은 동학농민혁명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는 사실로부터 대표성을, 표영삼(1925 ~ 2008)의 <동학>에 나타난 일본상려관에게 보낸 글을 통해 도덕성과 반외세 성격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전자는 무위하고 후자는 종양(腫瘍)으로써 왕실 붕괴, 국가 파탄의 촉진제가 될 것이지만 수구 사상에서는 정예한 근위병(近衛兵)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면 이 두 줄기를 타고 뻗어난 들판, 그 들판을 메운 서민들은 어떠했을까. 한마디로 이들은 모두 수구파다. 수만 동학이 개혁을 부르짖고 일어섰으나 시초부터 그들은 인륜 도덕을 강렬하게 내포한 집단이었으며 그들의 기치는 위국진충(爲國盡忠)이며 소파왜양(掃破倭洋)이었던 것이다. _ 박경리, <토지 4> , p75/522









일본 상려관은 펴보아라... 천도란 지극히 공평하여 다만 착한 사람은 음덕이 있게 하고 악한 사람은 벌이 있게 했다. 너희들은 비록 변경에 살고 있으나 받은 성품은 하나의 이치임을 또한 알지 못하는가... 아직도 욕심 많은 마음으로 다른 나라에 자리잡고 앉아 공격하는 것을 으뜸으로 삼으며 살육을 근본으로 삼으니 진실로 어떤 마음이며 필경 어찌 하자는 것인가... 우리 스승님의 덕은 넓고도 가없어 너희들에게도 구제의 길을 베풀 수 있으니 너희들은 내 말을 듣을 것인가 안 들을 것인가. 우리를 해칠 것인가 아니 해칠 것인가... 스승님은 이미 훈계하였으니 평안하고 위태로움은 너희들이 자취하는 것인 바 죽도록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우리는 다시 말하지 않으리니 서둘러 너희 땅으로 돌아가라. 계사 3월 초2일 자시 조선국 삼사원우초 _ 표영삼, <동학 2>, p276












인내천(人乃天)에 기반한 반외세(反外勢)를 주창한 동학농민혁명의 성격을 고려했을 때, 삼대조(三代祖)가 미관밀직에 있었으며, 등과를 못한 향반으로 살아가야 했던 김훈장은 마을에 연고가 없는 경화사족(京華士族)인 조준구와는 달리 앞장서 움직여야할 이유가 있었다.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과 함께 자신의 지지 기반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 이러한 이유가 김훈장을 의병장으로 떠밀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거슬러 올라가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 ~ 1598) 당시의 양반 출산 의병장들의 동기도 이같은 요인이 부분적으로는 작용했던 것은 아닐까.





어느 덧 김훈장은 마을 사람들 이야기 속에서 의병장으로 등장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차츰 전설적인 인물로 변모되어 가고 있었다. 그것은 마을 사람들 자신의 자존심의 소이였다. 왕시, 김훈장을 두고 화심리에 사는 장암 선생 수제자로서 학식이 깊다고 믿었으며 자랑으로 생각했던 그 심리와 흡사했던 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마을 사람의 공통 심리였다. 꼭히 믿는 것도 아니면서 즐거움을 위해 믿어보는 것이다. 희망이 적은 그들의 감정적 사치였을 것이다. _ 박경리, <토지 4> , p245/522




작가는 작품 안에서 지배층의 두 움직임 수구(守舊)와 개화(開化) 모두를 비판한다. 김훈장으로 대표되는 전자의 움직임은 물론, 조선 후기의 변혁 움직임 역시 제대로 된 방향성을 찾지 못하고 허둥대다가 무너지고 말았음을 작가의 목소리로 직접적으로 비판한다. 작품 안에서 작가의 목소리는 한 인물을 지적한다. 반계 유형원.





중국의 정신문화, 그 속에서도 유교를, 유교 중에서도 철학과 인륜 도덕의 정주학(程朱學)을 숭상하였던 이조 오백 년 동안 그 이지적이며 귀족적인 사상을 골육으로 한 절도 높은 선비들과 왕실에 밀착된 명문 거족들은 기존의 정신적 가치를 옹호하며 또는 외향적 기득권을 주장하며 지금도 수구(守舊)를 고집하고 있거니와 그것은 참으로 부수기 어려운 거대하고 준엄한 조선의 산맥 그 자체는 아니었는지. _ 박경리, <토지 4> , p73/522




하기는 햇볕 안 드는 뒷방에는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을 시조로 하는 경세학파(經世學派)의 불우한 사류(士類)들과 현실적인 중인 계급의 일부가 있어 진실한 개화에의 꿈을 기르고 있었으나 이네들은 일본을 업고 재주를 부리는 정치적 무대도 능력도 없었으며 민주주의라는 낯선 장단에 춤을 추며 백성들을 모아보는 주변도 없었고 청나라가 일본에 패한 후 수구파들이 열어놓은 혈로(血路) 아라사에게도 줄이 닿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이네들은 조선의 토종이었던 것이다. _ 박경리, <토지 4> , p76/522




작품 안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는 인물은 유형원(柳馨遠, 1622 ~ 1673)이다. 조선 후기 반계의 경세사상(經世思想)이 갖는 한계점을 작가는 지나가듯 말했지만, 제임스 버나드 팔레 (James Bernard Palais, 1934 ~ 2006)의 <유교적 경세론과 조선의 제도들 - 유형원과 조선 후기 Confucian Statecraft and Korean Institutions: Yu Hyongwon and the Late Choson Dynasty>에 의하면 그 영향력은 스치듯 지나갈만한 것은 아니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중국(中國)을 중심으로 한 중화(中華)사상의 틀을 벗어나지 못해 청일전쟁 후 방향성을 잃었지만, 도덕성에 근거한 윤리사상은 조선 후기 변화되는 사회의 문제점에 대한 해결책을 진지하게 모색했다는 점을 말한다. 이러한 점을 고려했을 때 <토지>에 드러난 박경리 작가의 비판은 다소 매섭게도 느껴진다.









유교적 경세사상은 정책에 직접 반영되지는 않았지만, 정부의 도덕성을 강조한 그 논리는 국가가 인간의 약점, 부패, 부도덕으로 악화되었을 때도 영향력을 잃지 않았다. 유교의 기준에 따른 도덕적 질서를 창출하려는 궁극적인 목표는 유지됐다. 농업의 우위와 상업 및 이익 동기의 비도덕적 결과에 대한 우려는 여전히 중요하게 간주됐지만, 유교적 관원과 학자들은 경제적 활동의 어떤 이점을 인식했다.... 경세사상의 중심은 중국 고전에 서술된 중국 고대의 제도에 머물러 있었는데, 현실적 경세론의 실천에서 주요한 지혜의 원천은 중국의 역사와 제도를 서술한 방대한 방대한 문헌이었으며 조선의 안전을 유지한 주요한 버팀목은 1894년 청일전쟁까지 청이 제공한 보호였다. _ 제임스 B. 팔레, <유교적 경세론과 조선의 제도들 - 유형원과 조선후기 2> , p589






이와 함께 <토지 4>에서 주요하게 다뤄지는 배경은 러일전쟁이다. 청일전쟁 후 대만과 요동반도를 점령하려던 일본의 계획이 삼국간섭(三國干涉 Tripartite Intervention)이 무산되면서 전쟁으로 이어지는 역사가 대화 속에서 설명된다. 1885년 영국이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거문도를 불법 점거한 거문도 사건(巨文島事件)에서 드러나듯, 극동지역에서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영국-일본 동맹은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의 일부였으며, 삼국간섭이 전쟁의 한 동기가 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다만, 당시 일본이 러시아보다 한 수 아래의 전력으로 여겨졌던 만큼 전쟁 이전 여러 타협안이 오고 갔음을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1938 ~ )의 <러일전쟁 : 기원과 개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내어주기로 한 청나라 얼빠진 위정자들은 차치하고 늑대같이 한반도도 먹고 싶고 만주 땅도 먹고 싶고, 그도 유유자적하게 노리고 있던 아라사가 어찌 되었겠소? 그러니까 아라사는 기고만장했던 일본에게 찬물을 끼얹었던 게요. 당사자인 청나라도 아닌 아라사가 독일과 불란서라는 나라에 충동이질하여 협박을 했단 말씀이오. 아무리 일본이 전승국이라고는 하나 대국 아라사와 불란서 독일의 삼국을 상대하여 이길 재간이 있었겠소? 문명이 앞서고 신식 무기로 무장한 그네들을 말이오. 게다가 영국하고 미국이라는 나라는 어부지리나 얻을까 싶어 관망하는 상태였으니 일본으로서는 눈물을 머금고 요동반도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그때부터 일본은 아라사에 대해서 보복의 칼을 갈았던 게지요. _ 박경리, <토지 4> , p60/672




일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아라사는 숙적이요 영국으로 말할 것 같으면 세계 각처에 저희들 식민지가 있는 만큼 아라사가 한반도로 만주로 하여 바다 쪽으로 진출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 아니겠소?... 그러나 미련한 곰 같은 아라사가 그런다고 밀려나겠소? 한술 더 떴지요. 그러니까 지난 오월 우리 땅 용암포(龍岩浦)를 점거하는 사태까지 몰고 왔으니 일본이 콩 튀듯 할 수 밖에요. 이러니 일본과 아라사는 전쟁으로 판가름을 할 수." _ 박경리, <토지 4> , p66/672




러시아의 만주 지배와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상호 인정하자는 타협안이 대한제국의 중립화 정책과 부딪히면서 시작된 러일전쟁. 개전 직전의 치열한 외교전의 상황 속에서 개항 이후 여러 외교 문서에 등장했던 '조선은 자주국'이라는 조항이 얼마나 무의미한 조항이었는가를 우리는 <러일전쟁>을 통해 확인하게 된다. 또한, '청일전쟁', '러일전쟁' 두 전쟁 직전에 맺은 조선과의 협약을 통해 조선의 물자, 식량 등을 마음껏 징발하여 전쟁을 수행하는 그네들의 모습 속에서 '근대화 近代化'라는 껍질가 실상은 과거 무사도(武士道)가 군국주의(軍國主義)로 변신한 '제국주의 帝國主義'에 다름 아님을 실감한다.















청일전쟁은 열강을 자극했다. 야심가인 신 외무장관 무라비요프도 황제의 뜻을 존중해, 러시아 해군이 원하지도 않는 부동항 뤼순, 다롄의 획득이라는 모험을 적극 시도했다.(p1195)... 일본은 러시아의 랴오둥(遼東)반도 조차(租借)에 대해서도 당초에는 신중한 태도였다... 그러나 일본도 러시아의 만주 전면점령에 이르러서는 일본에게 조선을 전면적으로 양도하라는 만한교환론을 정면으로 제기하게 되었다. 러시아가 만주를 장악한다면 한국은 일본의 것이라고 명확하게 주장해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한국 황제는 한국이 중립국이 되기를 희망하는 노선을 처음으로 내세우며, 일본 정부에 교섭하자고 요청했다. 1901년 1월 일본정부의 가토 외상은 주청 공사 고무라의 의견을 듣고, 이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고무라의 의견은 이미 단순한 만한교환론이 아니었고, 한국의 확보가 러시아의 만주 지배를 견제하는 거점이 될 것이라며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조선을 둘러싼 러일의 주장은 완전히 어긋나게 되었다. 이때부터 러일의 대립은 결정적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_ 와다 하루키, <러일전쟁 2>, p1196




<토지 3>에서는 초반부의 주요 인물들이 한번에 퇴장하면서 작품의 전개가 빨라졌다면, 이번 주부터 들어간 <토지 4>에서는 러일전쟁 이후 을사늑약(乙巳勒約, 1905)으로 급격하게 국운(國運)이 기운다. 급류처럼 빨라진 쇠망의 역사 속에서 이와 함께 읽을 좋은 책들이 많지만, '독서 챌린지 페이퍼'라는 글의 성격 상 짧게만 언급하고 넘어간다. 페이퍼에서 잠시 언급한 <한국의 유교화 과정>, <조상의 눈 아래에서>, <유교적 경세론과 조선의 제도들>, <러일전쟁>은 별도의 리뷰에서 보다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이번 주 <토지 4>는 개인적으로 유교 사상에 투철한 김훈장을 통해 조선 후기 지배층의 이데올로기와 충효(忠孝), 반계 유형원을 통해 후기 개화 사상의 한계와 러일 전쟁의 배경 등을 정리할 수 있었던 좋은 시간이었다. 조준구를 통해 친일(親日)이라는 부분도 다뤄볼 수 있겠지만, 이는 후반부의 인물인 배설자와 함께 종합적으로 보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어져 다음으로 넘긴다. 어쨌든 독서 챌린지의 끝은 지금 당장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있으니까...






Ps. 개인적으로 <토지> 후반부의 인물인 친일파 배설자의 모습에서 실존인물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 ~ 1909)의 양녀 배정자(裵貞子, 1870 ~ 1952) 그림자가 어른거림을 느낀다. 이름의 유사성, 친일 행적 등이 이러한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듯한데, 배정자와 다른 배설자의 비참한 최후에서 친일파에 대한 작가의 감정을 읽는다면 지나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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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21-08-21 공감 (41)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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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티나 도이힐러의 한국학

스위스 태생으로 현재는 런던대 명예교수로 재직중인 저명한 한국학자 마르티나 도이힐러의 <조상의 눈 아래에서>(너머북스)가 번역돼 나왔다. <한국의 유교화 과정>과 함께 도이힐러 한국학을 대표하게 될 책. 국내에 소개된 한국학자(한국사 전공)로는 미국의 제임스 팔레와 브루스 커밍스, 그리고 일본의 미야지마 히로시와 함께 도이힐러는 그저 놀랍다고 여겨지는 학자다.

이번 책도 매우 흥미로우면서도 신선한 시각으로 한국사 내지 한국인의 역사를 들여다 본다(한편으론 ‘조상의 눈 아래에서‘란 제목이 그렇듯 매우 친숙한 시각이기도 하다). ‘한국의 친족, 신분 그리고 지역성‘이 부제.

˝마르티나 도이힐러 교수가 여든이 넘은 나이에 지난 50년 동안의 열정을 다한 한국사 공부를 집대성한 <조상의 눈 아래에서>. 신라시대 초기에 생겨나 가장 대표적인 사회 단위로 뿌리내린 한국 고유의 출계집단(씨족 또는 족, 겨레라 불리는)에 초점을 두고, 신라 초기(4~5세기)부터 19세기 후반에 이르는 한국 출계집단의 역사를 다룬다.

도이힐러 교수는 신유학의 변혁능력을 강조한 기존 한국사의 관점은 토착적인 친족 이데올로기의 지속성을 간과했다고 한다. 경상도의 안동과 전라도의 남원을 선택하여 그들이 만들고 다진 촘촘하게 짜인 사회구성을 들여다보고, 한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안한다.˝

‘한국 출계집단의 역사‘를 다룬 책이 있었는지는 저자가 참고한 자료목록을 봐야 알겠지만 희소하지 않았을까. 이런 수준의 연구를 기획하고 밀어붙일 수 있는 안목과 역량이 놀랍다고 할 수밖에. 우리의 역사라고는 하지만 한국사에 대해 우리가 더 깊이 이해하고 있는 건지 문득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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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18-11-18 공감 (38)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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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의 유교적 변환과 조선유학사



오랜만에 '사라진 책들' 카테고리의 페이퍼를 적는다. 조선 유학사 관련서를 검색하다가 다시 생각이 나서인데, 마르티나 도이힐러의 <한국사회의 유교적 변환>(아카넷, 2003)이 문제의 '사라진 책'이다. 작년에 원서까지 구해놓았지만 정작 번역본을 구할 수 없다.







품절인지 절판인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책은 시중에서 구할 수 없고 어지간한 도서관에도 구비가 돼 있지 않다. 대출해서 읽을 수는 있지만 나는 소장용 도서로 분류해놓고 있어서 가급적 재출간되기를 바라는 입장이다. 도이힐러 교수가 편저한 책으론 <후기 조선의 문화와 국가>(2002)란 책도 있다.







조선 유학 얘기가 나온 김에 말하자면 재일 학자 강재언의 <선비의 나라 한국유학의 2천년>(한길사, 2003)도 품절이 아쉬운 책이다. 일본에서도 평판이 좋은 책으로 아는데, 정작 우리는 읽을 수 없다. 아니 시중에서 구할 수 없다. 책의 수명이 10년도 안 돼서야 문화국가라고 말하기 멋쩍은 것 아닌가.







거기에 덧붙이자면 일본 학자 다카하시 도루의 <조선유학사>(예문서원, 2001)도 읽어보고픈 책이다. <조선의 유학>(소나무, 1999)은 아직 절판되지 않았기에 대신 읽어볼 수 있긴 하지만(두 책이 대동소이해 보이는데,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카하시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조선어학과에서 문학 제1강좌를 담당했던 교수로 주로 문학사와 사상사를 강의했다. 소개에 따르면 "다카하시는 노골적으로 조선과 조선인을 멸시하는 등, 악질적인 식민지 관료이자 교수였다. 그럼에도 그는 근대적인 의미에서 조선의 유학을 연구한 최초의 학자라는 점에서 무시할 수 없는 존재이다. 특히 조선 유학의 학파와 지역별 분류를 넘어서 '주리.주기론'의 개념적 분류를 시도하여 조선유학을 근대적으로 재구성하려한 것은 크게 인정받고 있다." 조선 유학 연구의 기본틀을 만든 것이라고 할 텐데, 개인적으로는 그의 연구를 우리가 얼마나 넘어서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런 맥락에서 궁금한 책은 현상윤의 <조선유학사>(심산, 2010)다. 소개에 따르면 "1953년 3월 25일 고려대학교 대구 임시교정 졸업식에서 '朝鮮儒學史'로 대학원 제1호 박사학위를 수여했다. 이것은 동시에 한국 최초의 박사학위 논문이다." 더 자세한 소개는 이렇다.
조선 유학사상의 큰 맥을 체계적으로 처음 정리한 책이 바로 고려대학교 초대 총장을 지낸 현상윤 선생의 <조선유학사>이다. 1949년에 첫 출간된 이래 한국유학을 연구하는 국내외 학자들에게는 반드시 열람(閱覽)해야 하는 필독서로서 자리매김하였다. 선생이 6.25전쟁 당시 납북된 후로도 여러 해를 거듭하는 가운데 몇 차례 중간되어 오던 것을, 교주자가 원저서에 인용된 한문 원전을 모두 한글로 풀어 옮기고 인용문과 설명문에 대하여 많은 교정과 상세한 주석을 가하여 교주본을 출간하고 이를 다시 수정 보완하여 <현상윤의 조선유학사>로 새롭게 태어났다.

다카하시 도루나 현상윤 선생의 책은 말하자면 기본서에 해당한다. 조선 유학에 교양 수준 이상의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전체적인 그림은 그려보고 싶다.







조선 유학과 관련하여 구비해놓고 있는 책은 한형조 교수의 <왜 조선유학인가>(문학동네, 2008)와 <조선유학의 거장들>(문학동네, 2008), 그리고 이승환 교수의 <횡설과 수설>(휴머니스트, 2012) 등이다. 거기까지가 내가 생각하는 교양이다...



13. 01. 13.







P.S. 도이힐러의 <한국사회의 유교적 전환>이 <한국의 유교화 과정>(너머북스, 2013)으로 제목을 바꿔 다시 출간됐다. 역자는 같다. 아쉬움을 표한 지 1년이 안 돼 책이 다시 나와서 퍽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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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13-01-13 공감 (2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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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학은 한국 사회를 어떻게 바꾸었나



올초에 '사라진 책들' 가운데 하나로 언급했던(http://blog.aladin.co.kr/mramor/6079979) 한국사학자 마르티나 도이힐러의 <한국사회의 유교적 변환>(아카넷, 2003)이 드디어 다시 나왔다. <한국의 유교화 과정>(너머북스, 2013). '신유학은 한국 사회를 어떻게 바꾸었나'가 부제다. 수집 목록에 있던 책이 재출간돼 반갑다. 어떤 책인가.




‘한국학의 대가’ 스위스인 마르티나 도이힐러가 내놓은 역작. 15~16세기 당시 사회에 신유학(성리학)의 도입과 정착이 지속적으로 강력히 추진된 동기는 무엇이었으며, 신유학이 사회 구조에 미친 영향은 어떠했는가에 대한 공백을 메운 최초의 본격 시도였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업적으로 평가받는 책이다. 20여 년이 걸린 마르티나 도이힐러의 역작은 약 150여 종이나 되는 사료와 290여 편의 각종 저작을 인용한다. 특히 사회인류학과 교류하면서 친족, 조상 숭배, 가계계승, 상속, 결혼, 상장례 등 6개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고려 초기에서 조선 후기까지 한국의 역사를 통찰하는 가운데 매우 중요한 사실에 도달한다. 1392년 조선의 건국세력에 의하여 본격적으로 추진된 유교 사회로의 전환이 이후 약 250년에 걸쳐서 점진적으로 완성되었고, 그 결과 17세기 중반에 이르러 조선의 양반 사회가 적장자 중심의 문중 사회로 재편성되었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렇게 재구성된 조선 사회는 고려시대의 사회 구조와 확연히 달랐고, 유교사상이 중국 사회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지만 한국에서는 세계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보기 힘들 정도로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쟁론의 대상이 될 만한 주장을 치밀하게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국외 한국사 연구의 주요 성과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서 재출간의 의의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국내 학자들의 주장과는 어떻게 대비가 되는지는 따로 관련 논문이나 서평을 찾아봐야겠다(이런 정보의 품앗이도 필요하다). 여하튼 월요일부터 건질 만한 책이 여럿 눈에 띄는데, 일단 '오래된 새책'부터 적었다...



13.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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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13-10-14 공감 (2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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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티나 도이힐러 교수 저서 <한국 사회의 유교적 전환> (원제: The Neo-Confucian Transformation of Korea)에 대한 요약 및 평론입니다.

1. 서론: 유교화라는 신화와 실체

한국 사회를 흔히 <전통적으로 강렬한 유교 사회>라 부른다. 그러나 스위스 출신의 한국학자 마르티나 도이힐러(Martina Deuchler)는 그의 저작 <한국 사회의 유교적 전환>을 통해 이 명제가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만들어진 결과물임을 분명히 밝힌다. 도이힐러는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일어난 유교화가 단순한 사상적·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수용을 넘어, 친족 제도, 혼인 습속, 상속 체계, 그리고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지배하는 <사회적 구조의 근본적 개조> 과정이었음을 입증한다.

이 책은 여말선초에서 시작하여 17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가 어떻게 성리학적 교의에 맞추어 자신들의 사회적 삶을 재형성했는지를 방대한 문헌적 근거와 함께 추적한다.

2. 요약: 고려의 양계적 친족에서 조선의 부계 정통으로

고려 사회의 일상: 양계적 친족 체계와 여성의 지위

조선 초기의 지배층이 정립하고자 한 성리학적 질서는 기존 고려의 사회 구조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고려 사회는 양계적(Cognatic) 친족 구조를 가졌다. 부계와 모계가 균형을 이루었으며, 결혼 후 남편이 처가에 들어가 사는 처가살이가 보편적이었다. 재산 상속 또한 남녀 구분 없이 균등하게 이루어졌고, 제사 역시 자녀들이 돌아가며 지내는 분할 제사(윤회제)가 일반적이었다.

여성은 친가와 처가 모두에서 독립된 재산권을 행사했고, 재가(再嫁) 역시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아니었다. 도이힐러는 고려 시대의 이러한 평등한 친족 체계가 조선 초기까지도 상당한 관성으로 남아있었음을 강조한다.

여말선초: 신흥사대부의 국가 재편과 유교 이데올로기

고려 말의 사회적 혼란을 수습하며 등장한 조선의 신흥사대부들은 성리학을 새로운 통치 이념으로 채택했다. 주희의 <주자가례>(朱子家禮)는 단순히 가정 내 예법서가 아니라 사회 구조를 재편하기 위한 강력한 정치적 도구로 활용되었다.

조선의 신흥 엘리트들은 불교적·무속적 관습을 타파하고 성리학적 질서를 이식하려 했다. 그러나 유교화는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법전인 <경국대전>이 완간되고 지배층 내부의 의식 변화가 일어났음에도, 오랫동안 내려온 고려적 습속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17세기의 결정적 전환: 종법제 확립과 친족 구조의 변동

도이힐러 분석의 핵심은 유교화의 완성 기점을 17세기 후반으로 본다는 점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두 차례의 대란을 거치며 조선 사회는 극심한 위기감을 겪었고, 양반 지배층은 자신들의 신분적 특권과 사회적 질서를 공고히 하기 위해 성리학적 종법제(宗法制)를 엄격하게 적용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친족 체계의 거대한 변화가 일어난다.

  • 친영례의 정착: 남귀여가혼(처가살이) 대신 신부가 시댁으로 들어가는 친영(親迎) 관습이 완전히 정착한다.

  • 장자 우대 상속: 균등 상속이 사라지고 제사를 전담하는 적장자(嫡長子)에게 재산이 집중된다.

  • 부계 친족(문중)의 강화: 문중과 족보가 활성화되며 모계와 외가는 친족의 범위에서 점차 배제된다.

  • 여성 지위의 하락: 재산권과 제사권에서 배제된 여성은 시댁 종중의 부속물로 전락하였고, 절개와 정절을 강요받는 유교적 규범 아래 갇히게 된다.

3. 평론: 구조주의적 분석의 성과와 한계

성과: 사상사를 넘어선 사회사·인류학적 통찰

마르티나 도이힐러의 가장 뛰어난 공헌은 유교를 단지 철학적 사상이나 정치적 담론의 영역에서 끌어내려 <실제 사람들의 삶과 친족 제도를 규정한 사회적 입법>으로 재해석했다는 데 있다. 한국의 사학계가 오랫동안 성리학의 이기론(理氣論) 파벌이나 정치적 붕당 정치에 집중할 때, 그는 실록과 족보, 문집, 입의(立議) 문서를 분석하여 친족 제도의 실질적 변화 과정을 정밀하게 규명해냈다.

특히 전통이라는 이름 아래 신화화되었던 <가장주의적 부계 사회>가 실상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야 인위적으로 완성된 비교적 최근의 창조물임을 밝혀낸 점은 서구 한국학뿐만 아니라 국내 학계에도 거대한 충격을 주었다.

한계 및 비판적 논점

그러나 도이힐러의 분석 틀에는 몇 가지 논쟁적인 지점이 존재한다.

첫째, 유교의 능동성과 사회의 수동성 구도이다. 도이힐러는 성리학이라는 외부적 이데올로기가 완성된 형태로 존재하고, 조선의 사회가 이 이데올로기에 맞춰 일방적으로 재형성되었다는 식의 구조주의적 시각을 드러낸다. 이는 조선 사회 내부의 주체적 역동성이나 경제적 변화(농업 생산력 발전, 대동법 시행 등)가 친족 구조 변화에 미친 영향을 상대적으로 경시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둘째, 양반 엘리트 중심의 시각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유교적 전환의 주체와 대상은 주로 양반 지배층에 국한된다. 조선 인구의 다수를 차지했던 기층 민중과 노비 계층에서 유교적 종법제가 실제로 어느 정도의 속도와 깊이로 침투했는지에 대해서는 체계적인 설명을 제공하지 못한다. 민중의 삶에서는 여전히 고려적 관습이나 유교화되지 않은 다채로운 문화가 조선 후기까지 지속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4. 결론: 유교적 전환이 남긴 유산

도이힐러의 <한국 사회의 유교적 전환>은 조선 사회를 바라보는 지평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은 명저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 남아있는 강력한 가부장제와 종교적이라 할 정도의 제사 문화, 그리고 혈연 중심주의가 고대의 유산이 아니라, 조선이라는 국가가 유교적 이상향을 구현하기 위해 사회적 기술을 동원해 완성해 낸 <기획된 전환>의 산물임을 깨닫게 된다.

오늘날 한국 사회가 경험하고 있는 유교적 가치관과 현대적 개인주의 사이의 충돌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도이힐러가 재구성해 낸 500년의 사회적 재편 과정은 여전히 매우 강력하고 유효한 역사적 통찰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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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티나 도이힐러(Martina Deuchler), <한국의 유교화 과정: 신유학은 한국 사회를 어떻게 바꾸었나>
원제: <The Confucian Transformation of Korea: A Study of Society and Ideology>

이 책은 조선시대 유교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한국학 연구 가운데 하나다. 핵심은 간단하다. 조선의 성리학은 왕과 선비들이 공부한 철학에 머물지 않았다. 그것은 가족을 구성하는 방법, 재산을 물려주는 방법, 결혼하고 사는 방법, 죽은 조상을 제사하는 방법, 남성과 여성의 관계까지 바꾸어 놓은 <사회구조의 혁명>이었다. 도이힐러는 특히 고려 말에서 조선 중기까지 약 200여 년 동안 일어난 이 변화를 추적한다. 하버드 한국학연구소의 소개도 이 책이 제사·상례·상속·혼인·여성의 지위·친족집단 형성을 중심으로 고려 사회가 어떻게 공격받고 재구성되었는지를 분석한다고 설명한다.

1. 출발점: 고려는 우리가 생각하는 ‘전통적 유교사회’가 아니었다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도이힐러가 설정한 고려와 조선의 대비다.

오늘날 흔히 ‘한국의 전통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모습, 즉 부계혈통, 장자 중심 제사, 출가외인으로서의 딸, 시집 중심의 여성생활 등이 수천 년 동안 계속된 한국 고유의 전통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도이힐러에 따르면 고려의 친족제도는 상당히 <양변적·쌍계적(bilateral)>이었다. 사람은 아버지 쪽 친족뿐 아니라 어머니 쪽 친족에게도 중요한 소속감을 가졌다. 정치적 신분을 확인할 때도 부계만 추적하지 않고 외조부를 포함했다. 아들과 딸은 부모의 재산을 대체로 함께 상속했으며, 여성은 자기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결혼생활도 훗날 조선의 모습과 크게 달랐다. 혼례는 신부 집에서 이루어지고 남편이 처가에 상당 기간 거주하는 관행이 강했다. 자녀들은 외가에서 성장하는 경우가 많았고, 여성과 친정 형제들 사이의 관계도 긴밀했다. 이런 사회에서는 딸이 결혼했다고 해서 친정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가는 존재가 아니었다.

따라서 우리가 흔히 ‘유교적 한국 전통’이라고 부르는 상당 부분은 고려 이전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역사적 제도>라는 것이 이 책의 출발점이다.

2. 성리학은 사회개조 프로그램이었다

고려 말에 들어온 주자학은 단순히 새로운 철학이나 윤리학이 아니었다.

고려 말의 정치·사회적 위기 속에서 신진 유학자들은 불교 중심의 사회질서와 기존 귀족사회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국가와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다. 이들은 주자의 <주자가례>와 중국 고전의 예제에서 사회개혁의 청사진을 찾았다. 도이힐러의 해석에서 조선 건국은 단순한 왕조교체인 동시에 거대한 <유교적 사회공학>의 시작이었다.

그 핵심은 ‘부계’를 중심으로 사회를 다시 짜는 일이었다.

고려에서는 형제와 자매, 외가와 처가가 모두 중요했다. 그러나 주자학적 친족질서에서는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는 한 줄의 계통이 중심이 된다. 장남, 특히 적장자가 조상의 제사를 계승하고 가계를 대표해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족보를 바꾸는 문제가 아니었다.

<누가 제사를 지내는가>라는 문제는 곧 <누가 집안을 대표하는가>, <누가 재산을 관리하는가>, <누가 조상의 정통성을 계승하는가>라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3. 제사가 사회를 바꾸었다

도이힐러의 가장 탁월한 통찰 가운데 하나는 제사를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를 만드는 제도>로 본다는 점이다.

조선 정부는 사당을 설치하고 장자가 조상을 제사하도록 권장했다. 주자가례식 제사를 제대로 시행하려면 누가 정통 후손인지 명확해야 했다. 결국 제사의 질서가 부계혈통의 질서를 강화했다.

그러나 이 변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고려식 친족관계에 익숙한 조선 초기 사람들은 장자를 특별대우하는 원칙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형제들 사이에는 본래 상당한 평등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도이힐러는 부계 원리가 정착하는 데 약 한 세기의 입법과 갈등이 필요했다고 설명한다. <경국대전>에서 적장자를 우선하는 원칙이 법적으로 강화되었지만 실제 관습이 따라오는 데에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여기에 이 책의 중요한 방법론적 특징이 있다.

<법이 만들어졌다고 곧바로 사회가 바뀐 것은 아니다.>

도이힐러는 법과 현실 사이의 저항, 타협, 지체를 끊임없이 추적한다.

4. 상속제도의 변화

고려와 조선 초기까지도 아들과 딸이 재산을 상당히 균등하게 나누어 받는 관행이 강했다.

흥미롭게도 조선 초기의 유교적 개혁가들은 이것을 즉시 폐지하지 못했다. <경국대전> 역시 일정 기간 아들과 딸의 균분상속 전통을 인정했다. 다만 제사를 담당하는 장자에게 추가 몫을 주면서 부계적 원칙을 조금씩 심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가 누적되었다.

딸은 시집으로 들어가 남편 집안의 구성원이 되었고, 친정의 제사에서 점차 멀어졌다. 그러자 ‘친정 제사에 참여하지 않는 딸에게 왜 친정 재산을 똑같이 나누어 주어야 하는가’라는 논리가 힘을 얻었다.

16~17세기로 가면서 딸의 상속 몫은 줄고 남자 후손이 가문의 재산을 집중적으로 계승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따라서 상속 변화와 제사 변화는 따로 움직인 것이 아니었다.

제사 → 장자 중심화 → 부계혈통 강화 → 재산의 부계 집중이라는 하나의 연결된 과정이었다.

5. 가장 큰 변화의 희생자는 여성

이 책은 한국 여성사 연구에서도 큰 영향을 끼쳤다.

도이힐러의 설명에 따르면 고려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것보다 상당히 높았다. 여성은 재산을 상속받았으며, 결혼 후에도 친정과 강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부계 중심 질서에서는 여성이 구조적으로 불편한 존재가 된다.

딸은 아버지 집안의 혈통을 이어갈 수 없고, 결혼하면 다른 집안으로 이동한다. 따라서 부계친족의 논리가 강화될수록 여성은 자신의 친정에서 점차 주변화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처와 첩, 적자와 서자의 엄격한 구별도 강화되었다. 15세기 초 조선의 법제는 정실과 부실을 구분했고, 이에 따라 그 자녀들의 사회적·정치적 지위도 차등화되었다. 서얼차별 역시 이런 부계적 정통성의 강화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즉 조선의 유교화는 단순히 남성의 권력이 커진 것이 아니라,

<여성을 혈통과 제사의 중심에서 체계적으로 밀어내는 과정>

이었다.

6. 문중과 족보의 탄생

이 변화가 충분히 진행되면서 조선 후기에 우리가 잘 아는 문중사회가 형성된다.

같은 남계 조상을 가진 남성들이 하나의 혈족집단을 구성하고, 공동조상의 제사를 지내고, 족보를 만들고, 선산과 종중재산을 관리한다.

도이힐러에게 문중은 아주 오래된 한국 고유의 제도가 아니다. 오히려 고려의 양변적 친족질서와 성리학적 부계원리가 충돌하고 타협하면서 형성된 역사적 산물이다.

이 점이 대단히 중요하다.

‘한국은 원래부터 부계사회였다’는 설명을 뒤집기 때문이다.

7. 그렇다고 중국의 복사판은 아니다

이 책의 논의를 ‘한국이 중국 유교를 받아들여 중국처럼 되었다’고 단순화하면 잘못이다.

오히려 도이힐러는 한국의 유교화가 중국과 상당히 달랐다고 본다.

2021년 자신의 논의를 다시 정리하면서도 그는 고려의 양변적 전통이 조선사회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사회를 ‘완전히 유교화되었다’고 부르는 데에는 주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대표적인 예가 혼례다. 성리학의 원칙대로라면 신랑 집에서 혼례를 해야 하지만 조선에서도 오랫동안 신부 집에서 혼례하는 전통이 유지되었다. 또한 한국의 문중 역시 중국 종족제도를 그대로 모방한 것이 아니라 한국의 신분의식과 기존 친족 전통이 결합해 만들어진 독특한 형태였다.

따라서 결과는

<중국 유교 + 한국의 기존 친족질서>

사이의 타협이었다.

8. 이 책의 가장 큰 공헌

이 책의 첫 번째 공헌은 <유교를 사상사에서 사회사로 옮겨 놓았다>는 것이다.

보통 성리학을 이야기하면 이황, 이이, 사단칠정, 이기론 같은 철학적 논의를 떠올린다.

도이힐러에게 더 중요한 질문은 다르다.

“성리학 때문에 사람들이 누구와 결혼하게 되었는가?”

“딸에게 얼마나 상속했는가?”

“누가 부모의 제사를 맡았는가?”

“누가 가족의 정통 후손으로 인정받았는가?”

철학을 생활세계 속에서 읽는 것이다.

두 번째 공헌은 ‘전통’을 역사화했다는 점이다.

우리가 전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실제로는 특정 시대의 정치적·사회적 투쟁을 통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9. 그러나 비판할 점도 있다

가장 중요한 비판은 도이힐러가 고려사회를 지나치게 ‘양변적’, 조선사회를 지나치게 ‘부계적’으로 대비한다는 문제다.

한국의 가족사회학자 최재석 등은 도이힐러가 고려시대의 비부계적 요소를 지나치게 강조했으며, 고려에도 이미 상당한 부계적 요소가 존재했다고 비판했다. 이 때문에 ‘양변적 고려 → 부계적 조선’이라는 도식이 실제보다 지나치게 선명하다는 논쟁이 생겼다.

또 하나는 분석대상이 주로 엘리트라는 점이다.

법령, 족보, 제례문헌, 양반가문 자료를 중심으로 연구하기 때문에 농민이나 노비, 지방의 하층민이 유교적 가족질서를 언제 어느 정도 받아들였는지는 상대적으로 덜 보인다.

따라서 이 책의 제목인 <한국의 유교화>를 문자 그대로 전체 한국인의 유교화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우선

<조선 지배층에서 시작하여 점차 사회 전체로 확산된 유교적 친족질서의 형성>

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정확하다.

10. 종합평가

<한국의 유교화 과정>은 한국사를 보는 눈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책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한국의 전통가족’이라는 말을 이전처럼 쉽게 사용하기 어렵다.

족보, 장자상속, 제사, 종손, 문중, 시집살이, 출가외인이라는 관습들이 영원한 한국문화가 아니라 상당 부분 조선시대의 특정한 역사적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변화가 폭력적인 국가명령 하나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국가의 법률 → 성리학 지식인의 주장 → 제사의 변화 → 상속의 변화 → 거주형태의 변화 → 문중의 형성이라는 과정을 거쳐 수백 년 동안 사회의 일상생활 속에 스며들었다.

그래서 이 책에서 유교는 단순한 ‘사상’이 아니다.

<사람들이 자기 가족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를 바꾸어버린 제도적 힘>이다.

도이힐러 자신도 훗날 한국의 유교화를 동아시아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광범위한 사회변형으로 평가하면서, 동시에 고려의 양변적 전통이 완전히 소멸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결국 이 책의 가장 중요한 한 문장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한국은 원래부터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의 ‘유교사회’였던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 약 200~300년에 걸쳐 유교사회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이 책은 유교를 평가하는 책이라기보다 <전통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보여주는 책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사를 이해하는 데뿐 아니라 현대 한국의 가족주의, 종중, 제사문화, 여성의 지위까지 역사적으로 이해하는 데도 여전히 강력한 설명력을 가진 고전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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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이힐러의 <한국 사회의 유교적 전환>은 조선 사회를 바라보는 지평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은 명저] --- 도이힐러는 이 책을 1992년에 내었는데, 
1] 외국인 연구자가 한국 역사에 대해 그런 근본적인 연구 성과를 내었다는 점이 약간 놀랍고, 
2] 한국의 역사가들이 이 책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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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진님, 질문하신 두 가지 핵심 논점에 대해 정리해 드립니다.

1. 서구 연구자가 이러한 근본적 연구 성과를 낼 수 있었던 배경

마르티나 도이힐러(Martina Deuchler) 교수가 1992년 를 출간하며 세계 학계에 던진 충격은 매우 컸다. 외부자의 시선이 어떻게 내부자가 놓치기 쉬운 본질을 포착해 냈는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 수 있다.

사회인류학적 방법론의 도입

당시 국내 한국사학계는 주로 사상사(성리학 이기론, 붕당 정치)나 제도사(과거제, 토지제도) 중심으로 역사를 다루었다. 반면, 하버드대에서 동아시아 역사를 전공하고 런던대 SOAS 등에서 연구한 도이힐러는 서구의 사회인류학(Social Anthropology) 방법론을 한국사에 과감히 이식했다.

그는 사상이나 제도를 텍스트 자체로만 보지 않고, 그것이 실제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친족 구조(Kinship)>, <출계(Descent)>, <상속>, <결혼 습속>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라는 인류학적 질문을 던졌다.

방대한 1차 사료에 대한 실증적 독해

외국인 연구자라는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도이힐러는 한국인 학자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실증적 연구를 감행했다. 실록과 법전뿐만 아니라 족보, 분재기(재산 분할 문서), 입의(문중 결의서), 문집 등 400여 종에 달하는 1차 사료를 직접 번역하고 분석했다. 내부 학자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해서 스쳐 지나갔을 분재기 속 남녀 균등 상속의 기록이나 처가살이의 흔적을 샅샅이 파헤쳐 구조적 변화의 증거로 제시한 것이다.

<내부자의 통념>으로부터의 자유로움

한국 학자들은 자신들이 살아가고 있는 당대의 유교적 가부장제나 제사 문화를 <수천 년 내려온 고유한 전통>으로 은연중에 전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스위스 출신의 이방인 학자였던 도이힐러는 어떠한 문화적·감정적 선입견도 없이 한국 사회를 객관적 연구 대상(Object)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그 결과, <우리가 전통이라 믿는 부계 가부장제는 사실 17세기 후반에 완성된 비교적 최신의 인위적 창조물>이라는 냉철한 진단을 내릴 수 있었다.

2. 한국 역사학계의 반응과 논쟁

1992년 미국 하버드대 출판부에서 이 책이 출간되고, 2000년대 들어 국내에 번역·소개되면서 한국 역사학계는 거대한 자극과 함께 뜨거운 논쟁에 휩싸였다. 학계의 반응은 크게 <찬사와 수용>, 그리고 <비판적 반론>의 두 축으로 나뉜다.

찬사: 조선 후기 사회사 연구의 패러다임 전환

국내 학계는 도이힐러의 연구를 조선 시대 사회사를 재구성한 <획기적인 명저>로 높이 평가했다.

  • '17세기 전환론'의 정착: 고려부터 조선 초기까지 유지되던 양계적(부계+모계) 친족 구조가 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인 17세기에 이르러서야 엄격한 부계 종법제로 재편되었다는 그의 학설은 이후 한국 역사학계의 통설이자 표준적 시각으로 자리 잡았다.

  • 여성사 및 생활사 연구의 폭발: 유교화 과정에서 일어난 여성 지위의 하락, 상속제의 변화, 제사권의 적장자 독점 등 그가 던진 주제들은 1990~2000년대 한국 여성사와 가족사, 문화사 연구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결정적 계기를 제공했다.

비판 및 논쟁: 학계가 던진 세 가지 반론

1) 신흥사대부 부정과 '세족(世族) 연계론'에 대한 반발

국내 학계의 대표적 정설은 고려 말의 무능한 권문세족을 타파하고 새로운 사상(성리학)으로 무장한 <신흥사대부>가 조선을 건국했다는 신진사대부론이었다.

그러나 도이힐러는 후속 연구 등에서 "조선을 건국한 주역들은 신흥 세력이 아니라 고려의 기존 엘리트 가문(세족)이었으며, 자신들의 기득권과 신분을 단단히 굳히기 위해 부계 종법제라는 유교적 도구를 채택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전통적인 민족주의 사학 및 사회경제사학자들은 조선 건국의 역동성과 역사적 진보성을 지나치게 폄하하고 지배 엘리트의 연속성만 강조했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2) 유교 이데올로기 결정론에 대한 비판

도이힐러는 사회 변동의 원동력을 성리학이라는 <신유학 이데올로기>에서 찾았다. 학계에서는 이를 두고 '관념론적/구조주의적 편향'이라는 지적을 제기했다. 17세기 친족 구조의 변화는 단순한 유교 이념의 주입 때문만이 아니라, Agricultural Revolution(농업 생산력의 발전), 모작 체계의 변화, 대동법 시행,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 등 내재적인 사회·경제적 요인과 맞물려 일어난 복합적 결과인데, 도이힐러가 이념의 힘을 지나치게 절대화했다는 비판이다.

3) 양반 엘리트 중심 시각의 한계

도이힐러가 분석한 족보, 문집, 분재기 등은 대부분 양반 지배층의 기록이다. 따라서 그의 논리가 <양반층의 유교화>를 설명하는 데는 탁월하지만, 당시 조선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던 평민, 노비, 서자 등 기층 민중의 삶까지 대변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 남았다. 민중 사회에서는 18~19세기까지도 고려적 관습이나 양계적 요소가 훨씬 오랫동안 잔존했기 때문이다.

3. 요약

도이힐러의 <한국 사회의 유교적 전환>은 한국학계 내부의 타성적 시각을 깨뜨린 외부 학자의 위대한 승리이자, 한국사 연구자들에게 사회사·인류학적 방법론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촉매제였다.

비록 이데올로기 결정론이나 엘리트 편중이라는 학계의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오늘날 도이힐러의 이 연구를 거치지 않고서는 조선 시대의 사회와 가족, 그리고 한국인의 정체성을 논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역사적 이정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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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이힐러의 <한국 사회의 유교적 전환>은 조선 사회를 바라보는 지평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은 명저] --- 도이힐러는 이 책을 1992년에 내었는데, 
1] 외국인 연구자가 한국 역사에 대해 그런 근본적인 연구 성과를 내었다는 점이 약간 놀랍고, 
2] 한국의 역사가들이 이 책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는지 궁금합니다.

그 두 가지 질문은 이 책의 학문사적 의미를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1] 도이힐러의 성취는 ‘외국인이 한국사를 더 잘 봤다’기보다 <한국사 연구에 당시 한국 역사학계가 상대적으로 덜 사용하던 사회인류학적 질문을 들고 들어왔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정확하고, 2] 한국 학계는 그의 큰 문제제기를 상당 부분 받아들였지만 세부 논지는 적극적으로 수정·비판했습니다.

1. 어떻게 외국 연구자가 이런 근본적인 연구를 할 수 있었을까

도이힐러는 한국사를 잠깐 연구한 외부인이 아니었습니다. 1960년대부터 한국에 와서 연구했고, 서울대 규장각에서 연구한 초기 외국인 학자 가운데 한 명이었으며, 에드워드 와그너(Edward Wagner)의 제자였습니다. 이후 문헌 연구뿐 아니라 안동·남원 등 지방 문중을 직접 찾아가 후손들을 만나고 제례와 친족관계를 조사했습니다. 즉 <고문헌 + 현지조사 + 사회인류학>을 함께 사용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의 학문적 배경입니다.

당시 한국 역사학자가 흔히 묻던 질문은 대체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왜 왕조가 교체되었는가?”
“신진사대부는 어떤 계급이었는가?”
“성리학은 어떤 사상인가?”
“양반 지배체제는 어떻게 성립했는가?”

도이힐러가 던진 질문은 조금 달랐습니다.

“왜 어느 시점부터 딸이 아들과 똑같이 상속받지 못하게 되었는가?”
“왜 남자가 처가에서 사는 것이 사라지고 여자가 시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는가?”
“왜 외손과 친손의 의미가 달라졌는가?”
“왜 장자가 제사의 중심이 되었는가?”
“왜 족보가 부계 중심으로 재편되는가?”

이것은 정치사나 사상사보다는 <사회인류학적인 질문>입니다. 실제로 하버드의 책 소개에서도 도이힐러가 사회인류학을 이용해 제사, 상례, 상속, 혼인, 여성의 위치, 출계집단(descent groups)을 하나의 체계로 분석했다고 명시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외국인의 이점’이 생겼습니다.

한국인 연구자는 ‘제사’, ‘종손’, ‘본가’, ‘시집’, ‘족보’를 너무 익숙한 전통으로 볼 가능성이 있습니다. 반면 사회인류학자는 이렇게 묻습니다.

<왜 이런 제도가 존재하는가? 언제부터 이런 식이 되었는가?>

낯설게 보는 시각이 역사적 변화를 발견하게 한 것입니다.


2. 그렇다고 도이힐러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발견한 것은 아니다

이 부분도 상당히 중요합니다.

“외국 학자가 처음 발견했는데 한국 역사학자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말하면 지나칩니다.

도이힐러 이전에도 한국에서는 김두헌, 최재석 등을 중심으로 가족제도·친족·혼인·상속에 관한 상당한 연구가 축적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사회학자 최재석은 1983년에 이미 <한국가족제도사연구>를 출간했습니다.

그래서 최재석은 나중에 아주 직접적으로 도이힐러를 비판했습니다. 2005년 논문의 제목부터

<A Criticism of M. Deuchler's The Confucian Transformation of Korea with Reference to Preceding Studies>
<선행연구와 관련하여 본 도이힐러의 『한국사회의 유교적 변환』 비판>

입니다.

그의 문제의식 가운데 하나는 도이힐러의 연구가 한국 학계의 기존 가족사 연구와 충분히 관계 설정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도이힐러의 위대함을

“한국인들은 몰랐는데 외국인이 발견했다”

라고 보는 것보다

<한국 학계에 이미 축적되어 있던 개별적 가족사 연구를, 도이힐러가 성리학의 사회적 전환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설명틀 속에 통합했다>

고 보는 것이 더 공정합니다.

저는 이것이 도이힐러의 진짜 공헌이라고 봅니다.


3. 가장 결정적인 것은 ‘변화’를 발견한 것이다

이 책 이전에도 조선이 부계적이고 유교적인 사회였다는 것은 누구나 알았습니다.

도이힐러의 새로운 주장은 그것이 아닙니다.

그의 새로운 질문은

<조선은 처음부터 그런 사회였는가?>

였습니다.

답은 “아니다”였습니다.

고려와 조선 초기까지는

아들·딸 균분상속
→ 처가살이
→ 외가와 친가의 상대적 균형
→ 여성의 강한 재산권
→ 딸과 외손도 포함되는 친족관계

가 존재했는데,

16~17세기를 지나면서

부계 출계
→ 장자 중심 제사
→ 장자 우대 상속
→ 시집살이
→ 여성의 친정 내 지위 약화
→ 문중과 족보의 확대

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의 거대한 <Confucian transformation>으로 파악했습니다.

이 틀은 매우 강력했습니다.

왜냐하면 제사·상속·혼인·족보·여성·가족을 따로 연구하던 여러 현상이 갑자기 하나의 역사적 과정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4. 한국 학계는 상당히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한국 학계에서 이 책은 무시되지 않았습니다.

영문판은 1992년에 나왔지만 한국어 번역은 2003년에 이훈상 번역으로 출판되었습니다. 바로 다음 해인 2004년 김훈식이 <역사와경계>에 10쪽 분량의 전문 서평을 실었습니다.

더 상징적인 것은 도이힐러가 이미 1993년 위암 장지연상 한국학 부문을 받았고, 2001년에는 연세대학교의 용재학술상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즉 한국어 번역이 나오기 전부터 한국 학계가 그의 연구를 중요한 한국학 성과로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 뒤 한국의 조선시대 가족사 연구에서는

<조선 전기와 후기는 가족구조가 다르다>

는 생각이 거의 기본 전제가 되었습니다.

현재 국사편찬위원회의 <우리역사넷> 설명에서도 조선 초기에 기존 가족제도와 유교적 가족질서가 충돌했고, 서류부가혼(壻留婦家) 같은 관행이 종법적 질서의 정착을 방해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도이힐러 한 사람의 이론을 그대로 채택했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가 강조했던 <유교화는 점진적인 역사적 과정이었다>는 관점이 한국사 서술의 상당히 일반적인 틀이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5. 그러나 한국 학자들은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논쟁했다

흥미로운 것은 한국 학계가 도이힐러의 결론을 통째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가장 큰 쟁점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고려는 정말 그렇게 ‘양계적’이었는가?

도이힐러는 고려사회의 친족관계를 상당히 양계적(bilateral)인 것으로 설정합니다.

그런데 일부 한국 학자들은 이에 대해

<고려에도 이미 부계적 요소가 상당히 있었다>

고 주장했습니다.

즉,

도이힐러:
고려의 양계적 사회 → 조선의 부계사회

라는 강한 대비를 설정했다면,

비판자들은:

고려에도 부계적 원리가 존재했고 → 조선에서 그것이 점차 강화되었다

라는 연속성을 더 강조합니다.

최재석의 비판도 이러한 문제와 연결됩니다.


6. 둘째, 왜 하필 17세기에 급격히 바뀌었는가?

이 문제는 도이힐러 이후 한국 학자들이 특히 발전시킨 부분입니다.

도이힐러는 기본적으로

<성리학적 이데올로기의 침투>

를 강하게 강조합니다.

그러나 실제 자료를 보면 상당히 이상한 현상이 생깁니다.

조선은 1392년에 건국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전형적인 유교적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형태가 사회적으로 확실하게 자리 잡는 것은 대체로 17세기 전후입니다.

그렇다면 약 200년의 시차가 있습니다.

<왜 그렇게 오래 걸렸는가?>

이 문제를 계승범이 2009년에 정면으로 다루었습니다.

그는 도이힐러의 이데올로기 설명과 마크 피터슨(Mark Peterson)의 사회경제적 설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보고, 17세기의 병자호란과 명나라 멸망을 중요하게 추가합니다. 조선 지식인들의 ‘소중화’ 의식과 예학 강화가 가족의 유교화를 급격히 촉진했다는 설명입니다.

이것은 도이힐러의 모델을 부정한다기보다는 <더 역사화한 것>입니다.


7. 셋째, 원인이 정말 ‘유교 이데올로기’였는가?

이것도 큰 논쟁입니다.

도이힐러의 설명을 간단하게 하면

성리학 도입
→ 종법적 가족이 이상으로 제시됨
→ 제사제도가 바뀜
→ 상속·혼인·친족관계가 바뀜
→ 사회구조가 바뀜

입니다.

그런데 사회경제사 쪽에서는 거꾸로 질문할 수 있습니다.

<혹시 재산과 신분을 유지하기 위한 양반의 필요가 먼저 있었고, 유교가 그것을 정당화해준 것은 아닐까?>

마크 피터슨은 상속과 입양의 변화 등을 통해 사회경제적 요인을 더 강조했고, 계승범은 이런 서로 다른 설명들을 명시적으로 비교합니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유교가 한국 가족을 바꿨다”

라는 단선적인 설명보다

<성리학 이데올로기 + 양반의 신분전략 + 재산상속 문제 + 국가 법제 + 17세기 정치·국제질서의 충격>

이 결합하여 부계적 가족질서가 만들어졌다고 보는 편이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8. 그래서 재미있는 역설이 생깁니다

도이힐러의 연구는 한국 학계의 ‘정설’이 되면서 동시에 계속 비판받았습니다.

이것은 좋은 학술서의 특징입니다.

정말 중요한 책은 사람들이

“맞다.”

하고 끝내는 책이 아닙니다.

그 책 이후에 연구자들이

“도이힐러의 설명은 여기까지는 맞는데 이 부분은 아니다.”

“실제 변화 시점은 더 늦다.”

“고려사회에도 부계제가 있었다.”

“이데올로기보다 경제적 요인이 중요하다.”

라고 논쟁하기 시작합니다.

2009년 계승범이 아예 <한국의 유교화와 17세기: 도이힐러의 『한국 사회의 유교적 변환』과 그 해석>이라는 27쪽 논문을 쓴 사실 자체가 이 책이 하나의 연구 기준점이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9. 그런데 도이힐러에게는 더 파격적인 주장이 하나 있습니다

이것은 <한국 사회의 유교적 변환>보다 후기 저작 <Under the Ancestors' Eyes>(2015, 한국어 <조상의 눈 아래에서>)에서 더욱 강해지는데, 기존 한국사학계와 상당히 충돌합니다.

전통적인 한국사 서술에서는 흔히

고려 말 권문세족
→ 신진사대부의 성장
→ 신진사대부가 조선을 건국
→ 새로운 양반사회

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도이힐러는 이 단절을 상당 부분 부정합니다.

그녀는 고려 말의 세족과 조선의 사족 사이에 강한 사회적 연속성이 있었다고 봅니다. 2018년 한국 방문 때도 이기백 등의 기존 견해를 직접 비판하면서 고려의 세족이 조선에서 사족으로 변했을 뿐이라는 취지의 주장을 했습니다.

이것은 <유교적 변환>보다 훨씬 더 급진적인 주장입니다.

왜냐하면 조선 건국 자체를

<새로운 사회세력의 혁명>

이라기보다

<기존 엘리트가 새로운 유교적 이데올로기를 채택하면서 자신을 재편한 과정>

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10. 저는 이것이 ‘외국인 연구자’라는 사실과 어느 정도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한국 역사학에는 20세기의 정치적 경험 때문에 자연스럽게 강한 문제의식이 있었습니다.

식민지배
→ 민족
→ 봉건제 해체
→ 근대화
→ 계급
→ 민중
→ 새로운 사회세력

같은 질문들입니다.

그 틀에서는 <신진사대부> 같은 새로운 정치세력의 출현이 매우 중요합니다.

도이힐러는 그런 한국 현대사의 문제의식에서 비교적 자유로웠습니다.

대신 그녀는

친족
출계(descent)
혼인
상속
의례
신분 재생산

이라는 사회인류학적 언어로 한국사를 바라봤습니다.

그러니 왕조가 바뀌는 1392년보다

<딸의 상속권이 언제 줄어들었는가>

가 더 중요하게 보였던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1392년은 생각보다 별로 큰 사회적 단절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1600~1700년 무렵>이 한국인의 실제 생활에서는 훨씬 더 큰 단절일 수도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도이힐러가 한국사의 지평을 바꿨다고 평가받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도이힐러의 위대함은 한국인이 몰랐던 한국의 사실을 외국인이 발견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한국 학자들이 알고 있던 수많은 사실들을 전혀 다른 질문으로 재배열하여, “조선의 유교사회는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만들어졌다”라는 거대한 설명을 만들어낸 것>에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 학계의 반응은 대략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도이힐러 이전>
“조선은 유교사회였다.”

→ <도이힐러>
“그렇다면 언제, 어떻게 유교사회가 되었는가?”

→ <도이힐러 이후 한국 학계>
“맞다. 그러나 그 변화는 도이힐러가 말한 것보다 더 복잡했고, 특히 17세기를 설명해야 한다.”

그래서 지금의 관점에서 <한국 사회의 유교적 변환>은 모든 결론이 정답이라서 고전인 것이 아니라, <그 책 이후 한국 가족사를 묻는 질문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에 고전>이라고 평가하는 것이 가장 적절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상당히 흥미로운 다음 문제가 생깁니다. <도이힐러의 설명대로라면 우리가 ‘조선의 전통’이라고 부르는 가족제도 상당수는 사실 조선 전기의 전통조차 아니고 17~18세기에 완성된 비교적 ‘새로운 전통’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인이 ‘유교 때문에 한국이 이렇게 되었다’고 말할 때 무엇까지 유교의 책임으로 볼 수 있는가?> 이 문제까지 가면 도이힐러 연구의 의미가 훨씬 더 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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