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25회
<김옥균은 누가 죽였나?> 요약 + 평론
이번 25회는 제목만 보면 1894년 김옥균 암살사건을 다루는 강의처럼 보이지만, 실제 중심 주제는 훨씬 넓다. 함재봉은 <갑신정변 실패 이후 김옥균의 10년간 일본 망명생활 → 일본 정부의 냉대와 추방 → 조선정부의 암살 시도 → 상하이에서 홍종우에게 피살 → 시신의 능지처참 → 이 사건이 일본 여론을 격앙시켜 청일전쟁과 일본의 대조선정책 전환에 미친 영향>을 하나의 연속된 과정으로 설명한다.
이 강의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김옥균을 바라보는 세 시선이 전혀 달랐다는 점이다.
<조선정부에게는 역적, 일본 개화파에게는 개혁의 동지, 일본정부에게는 점점 부담스러운 외교적 존재>였다.
요약
1. 갑신정변의 실패와 일본 망명
• 강의는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에서 출발한다. 김옥균·박영효·서재필·서광범 등 급진개화파는 고종과 민씨 세력을 설득하는 방법으로는 근본적 개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정변을 일으킨다.
• 그러나 정변은 불과 <3일 천하>로 끝난다. 청군이 개입하면서 일본군이 후퇴하고, 김옥균·박영효·서광범 등은 제물포로 탈출한다.
• 12월 8일 김옥균 일행은 제물포에 도착하여 일본으로 탈출하려 한다. 그런데 일본 정부의 태도는 뜻밖에도 냉담했다.
•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는 처음에는 이들을 일본 영사관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고, 일본 배 <지토세마루> 역시 승선을 거부하려 했다. 결국 선장을 설득하여 12월 11일 일본으로 탈출한다.
2. 일본은 왜 김옥균을 버렸는가
• 함재봉은 여기서 일본정부와 일본 민간 개화세력을 구별한다.
• 후쿠자와 유키치 같은 일본 개화지식인들은 김옥균과 조선 개화파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러나 일본정부의 판단은 달랐다.
• 일본정부는 당시 청과 전쟁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판단했다.
• 따라서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김옥균은 일본정부에게 <보호해야 할 개혁동지>라기보다 <청·조선과의 외교관계를 악화시키는 부담스러운 존재>가 된다.
• 1885년 4월 이토 히로부미와 이홍장이 <톈진조약>을 체결하면서 이러한 노선이 더욱 명확해진다.
3. 톈진조약의 중요성
• 함재봉은 톈진조약을 매우 중요하게 다룬다.
• 청과 일본은 조선에서 군대를 철수하기로 한다.
• 조선군 훈련을 위해 외국 군사고문을 초빙할 경우 청이나 일본이 아닌 제3국 사람을 쓰도록 한다.
• 어느 한쪽이 앞으로 조선에 군대를 파견할 경우 상대방에게 미리 통보하기로 한다.
• 함재봉은 이것을 일본의 전략적 후퇴라고 해석한다.
<지금 청과 싸우지 않는다.>
→ <조선 문제를 일단 안정시킨다.>
→ <국력을 더 키운다.>
라는 것이다.
• 실제로 일본은 이후 약 10년 동안 군사력·해군력·수송능력을 대폭 강화한다.
4. 일본정부에게 김옥균은 골칫거리가 된다
• 김옥균은 일본에 남아 조선 개화를 계속 추진하고 싶어 했다.
• 그러나 일본정부 입장에서는 그가 활동할수록 조선정부와 청을 자극하게 된다.
• 갑신정변 당시 일본의 개입도 국제적으로 문제가 되었기 때문에 일본은 김옥균과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 김옥균·박영효·서광범 가운데 서재필 등 일부는 결국 미국으로 간다.
• 김옥균에게도 미국행 가능성이 있었지만 그는 일본에 남으려 한다.
5. 오사카 사건 — 일본 민간의 조선 개입 시도
함재봉이 특별히 강조하는 사건이 1885년의 <오사카 사건>이다.
• 일본 자유민권운동 계열의 일부 인사들은 일본정부가 조선 개화파를 버렸다고 비판한다.
• 이들은 스스로 무기를 마련하여 조선으로 건너가 민씨 척족을 제거하고 김옥균·박영효 등 개화파를 다시 집권시키려는 계획까지 세운다.
• 일본 경찰이 이를 적발하면서 계획은 실행되지 못한다.
함재봉은 이 사건을 통해 <일본정부의 신중한 외교정책>과 <민간의 적극적 조선개입론>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고 설명한다.
6. 조선정부에게 김옥균은 끝까지 ‘역적’이었다
• 일본정부가 김옥균을 부담스럽게 생각했다면 조선정부의 태도는 훨씬 단호했다.
• 김옥균은 갑신정변을 일으킨 <대역죄인>이었다.
• 조선정부는 그를 송환하거나 제거하려 한다.
• 조선정부가 일본정부에 김옥균의 신병인도를 요구했지만 일본은 공식적으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7. 김옥균의 편지 — 자신의 실패를 어떻게 이해했나
강의 5쪽에서 함재봉은 김옥균이 이재원에게 보낸 편지를 길게 소개한다.
김옥균은 갑신정변 실패를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취지로 말한다.
그의 생각을 함재봉은 대략 이렇게 정리한다.
<나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로 일했다.>
<개혁이 당장 성공하지 못해도 조선 500년의 역사가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언젠가는 변화가 올 것이다.>
함재봉에게 이것은 김옥균의 강한 신념을 보여주는 자료다.
8. 일본의 추방
• 조선정부가 계속 김옥균 추방을 요구하자 일본정부도 곤란해진다.
• 결국 일본은 김옥균을 일본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보내기 시작한다.
• 1886년 오가사와라 군도로 유배한다.
• 1888년까지 그곳에서 생활하고 이후 홋카이도로 옮겨진다.
• 1890년경에는 도쿄로 돌아올 수 있게 된다.
즉 김옥균은 일본에 망명했지만 실제로는 상당 기간 <일본정부의 감시 아래 유배생활>을 한 셈이다.
9. 일본 야당과 민간세력은 김옥균을 돕는다
• 반면 일본 민간의 일부 개화·자유민권 인사들은 김옥균을 계속 지원한다.
• 이누카이 쓰요시 같은 정치인과도 관계를 맺는다.
• 박영효가 세운 조선인 학교를 돕는 일본인들도 있었다.
• 1890년대 일본의 의회정치가 발전하면서 김옥균 문제는 일본 국내정치의 쟁점으로까지 발전한다.
함재봉은 이 부분을 통해 <일본이라는 하나의 단일한 행위자가 존재한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10. 조선정부의 암살 시도
• 조선정부에게 김옥균은 여전히 제거해야 할 인물이었다.
• 일본 안에서 그를 암살하면 일본과 외교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일본 밖으로 유인하여 살해하는 방법>이 모색된다.
•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인물이 <홍종우>다.
11. 홍종우는 단순한 자객이 아니었다
함재봉은 홍종우의 배경을 상당히 자세히 소개한다.
• 홍종우는 프랑스에서 약 2년 동안 생활한 경험이 있었다.
• 이후 일본으로 돌아와 조선인들과 교류한다.
• 일본어와 서양사정에도 어느 정도 익숙했다.
• 따라서 김옥균에게 접근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인물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홍종우가 단순히 <전통적 수구파 자객>으로 설명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 자신도 외국을 경험한 사람이었다.
12. 이일직의 암살 공작
강의에서는 김옥균을 상하이로 유인하는 데 <이일직>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설명한다.
• 이일직은 김옥균에게 새로운 사업과 정치활동 가능성을 제시한다.
• 러시아나 프랑스와 접촉하는 방법도 거론한다.
• 중국의 이홍장과 연결될 가능성도 제시한다.
• 김옥균은 처음에는 경계하지만 결국 상하이행을 결정한다.
13. 김옥균은 왜 상하이로 갔는가
• 일본에서는 활동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 김옥균은 러시아·프랑스·중국 등 다른 외교적 통로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 특히 이홍장과 접촉하여 새로운 정치적 돌파구를 찾으려 했던 것으로 강의는 설명한다.
• 홍종우가 동행한다.
14. 상하이로 향하다
1894년 3월 10일 김옥균은 도쿄를 떠난다.
홍종우와 함께 상하이로 향한다.
• 홍종우는 한복 두루마기를 준비하고 안쪽 주머니에 권총과 단도를 숨긴다.
• 3월 27일 상하이에 도착한다.
• 당시 상하이는 미국·영국·프랑스·일본 등 여러 나라의 조계가 나뉘어 있던 국제도시였다.
• 김옥균과 홍종우는 미국 조계에 있는 <동화양행> 계열 호텔에 머문다.
15. 1894년 3월 28일 — 암살
• 3월 28일 오후 3시경 홍종우는 권총을 들고 김옥균의 방으로 들어간다.
• 첫 번째 총탄은 김옥균의 왼쪽 턱 아래를 맞힌다.
• 두 번째 총탄은 몸통 부위를 맞힌다.
• 김옥균이 방에서 탈출하려 하자 홍종우는 다시 총을 쏜다.
• 김옥균은 약 20m 정도 도망쳤지만 결국 쓰러져 사망한다.
16. 매우 복잡해진 국제법 문제
함재봉은 이 부분을 흥미롭게 설명한다.
사건이 발생한 곳은 중국이지만 외국인 조계였다.
<조선인이>
<조선인을>
<중국의 외국 조계에서>
<일본과 관련된 정치적 이유로>
살해했다.
따라서 어느 나라가 이 사건을 처리해야 하는지가 복잡해졌다.
결국 사건은 중국 측으로 넘어간다.
17. 조선정부는 시신까지 돌려달라고 한다
김옥균의 암살 소식이 전해지자 조선정부는 청에
<홍종우와 김옥균의 시신을 모두 보내달라>
고 요청한다.
청은 이를 받아들인다.
홍종우와 김옥균의 시신은 청의 군함을 통해 조선으로 보내진다.
18. 시신에 대한 능지처참
이 강의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이다.
1894년 4월 13일 조선정부는 이미 죽은 김옥균에게 다시 역적죄를 적용한다.
• 시신을 능지처참한다.
• 몸을 여러 부분으로 나눈다.
• 머리와 신체 일부를 전국에 보내 공개한다.
함재봉은 이것을 조선정부가 김옥균을 얼마나 심각한 <반역자>로 생각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으로 본다.
19. 일본에서 김옥균은 ‘영웅’이 된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난다.
갑신정변 당시까지만 해도 김옥균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다.
그러나
<망명객을 암살하고>
→ <시신을 가져가>
→ <능지처참하고>
→ <전국에 전시했다>
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일본 여론이 크게 격앙된다.
특히 일본의 자유민권계열과 야당언론은 이를 강하게 비판한다.
김옥균은 일본에서 점차 <조선 근대화를 위해 싸우다 희생된 개혁가>로 영웅화된다.
20. 일본정부의 대조선정책도 변화한다
함재봉은 이 부분을 25회의 가장 중요한 결론으로 제시한다.
1884~85년의 일본은
<청과 싸우지 않는다>
<김옥균과 거리를 둔다>
<조선 문제에 깊이 개입하지 않는다>
는 신중론이었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1894년에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 일본의 군사력과 경제력이 크게 성장했다.
• 메이지헌법이 제정되고 의회가 생겼다.
• 군대와 해군이 강화되었다.
• 청의 상대적 약점도 점차 드러났다.
• 일본 국내에서는 조선 문제에 강경하게 대응하라는 여론이 커졌다.
21. 김옥균 암살과 동학농민전쟁
그리고 바로 이때 조선에서는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난다.
조선정부는 청에 군대를 보내 달라고 요청한다.
1885년 톈진조약에 따라 청이 조선에 군대를 보내면 일본도 군대를 보낼 수 있었다.
함재봉은
<김옥균 암살>
→ 일본 여론의 격앙
→ 동학농민전쟁
→ 청군 출병
→ 일본군 출병
→ 청일전쟁
이라는 연쇄를 강조한다.
평론
이번 25회는 지금까지의 강의 가운데 함재봉의 <국제정치 현실주의>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회 중 하나다.
가장 좋은 점은 <일본>을 하나의 행위자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함재봉은 적어도 세 일본을 구별한다.
<일본정부>
→ 청과 전쟁을 피하고 김옥균을 부담스럽게 여김
<후쿠자와 등 개화지식인>
→ 조선 개화파를 지원
<자유민권운동·야당 세력>
→ 일본정부가 조선 개화파를 버렸다고 비판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하다. <일본이 김옥균을 지원했다> 또는 <일본이 김옥균을 버렸다>는 한 문장으로는 당시의 복잡한 상황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김옥균은 누구에게 영웅이고 누구에게 역적인가>라는 문제다.
조선정부에게 그는 왕을 위협하고 외국군을 이용하여 정권을 탈취하려 한 역적이었다.
반대로 일본의 개화파에게 그는 낡은 조선을 근대화하려다 희생된 선구자였다.
함재봉 자신은 명백히 두 번째 평가에 상당히 가까이 서 있다.
여기에는 다소 주의가 필요하다.
김옥균이 근대적 개혁을 주장했고 조선의 독립을 추구한 것은 분명하지만, 갑신정변은 <일본군의 무력을 이용한 소수 엘리트의 쿠데타>라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따라서 그를 단순히 <시대를 앞서간 근대주의자>로 영웅화하면 그의 정치적 방법과 사회적 기반의 취약성이 가려질 수 있다.
특히 중요한 문제 — 김옥균 암살이 청일전쟁을 일으켰는가?
여기서는 함재봉의 설명을 조금 조심해서 읽을 필요가 있다.
강의 마지막은 김옥균 암살이 일본 여론을 크게 자극하고 일본의 대조선 강경론을 강화하여, 몇 달 뒤 동학농민전쟁을 둘러싼 일본의 군사개입과 청일전쟁에 영향을 미쳤다고 강조한다.
이것은 <영향을 미친 요인>으로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김옥균 암살 → 청일전쟁>
이라는 직접적인 인과관계로 이해하면 지나치게 단순해진다.
이미 청과 일본은 1880년대부터 조선에서 경쟁하고 있었고, 일본은 군비를 대폭 확장하고 있었다. 청일전쟁의 보다 구조적인 원인은
<조선을 둘러싼 청·일 세력경쟁>
+
<일본의 군사력 증강>
+
<청의 조선 내 영향력>
+
<동학농민전쟁>
+
<청·일 양국군의 조선 출병>
이었다.
김옥균 암살은 이 구조 위에서 일본의 <국민감정과 정치적 강경론을 폭발시키는 촉매>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24회와 25회를 연결해서 보면
여기서 지난 임오군란 강의와 연결하면 함재봉의 논리가 아주 선명해진다.
<1882 임오군란>
→ 일본은 청과 싸울 준비가 안 되어 후퇴
<1884 갑신정변>
→ 다시 청군에게 밀려남
<1885 톈진조약>
→ 청과 일단 타협하고 조선에서 철군
<1885~1894>
→ 군대·해군·경제력 강화
<1894 김옥균 암살>
→ 일본 여론 격앙
<1894 동학농민전쟁>
→ 청군 출병
→ 일본군 출병
→ <청일전쟁>
이것이 함재봉이 그리고 있는 큰 그림이다.
따라서 25회는 사실 <김옥균의 전기>라기보다 <일본이 왜 1884년에는 물러났지만 1894년에는 전쟁을 선택했는가>를 설명하는 강의라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그리고 여기에는 함재봉 역사관의 중요한 특징도 나타난다.
그는 반복해서 <국력>을 강조한다.
사상이나 도덕적 명분만으로 국가가 독립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
군사,
교육,
행정,
외교,
수송능력
같은 실제적인 국가능력이 있어야 독립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관점에서 김옥균의 비극도 결국 여기에 있다.
<조선은 개혁해야 한다는 것을 김옥균은 보았지만, 그 개혁을 스스로 실행할 국가적 힘이 없었다.>
그래서 일본의 힘을 빌렸고, 그 일본마저 1884년에는 청과 싸울 힘이 없었다.
10년 뒤 일본은 그 힘을 갖추었다.
그러나 그때부터 일본의 <조선 개화 지원>은 점차 <조선 지배>로 변한다.
이 마지막 전환이 매우 중요하다. 25회까지 함재봉의 이야기를 따라오면 일본은 여러 차례 조선에 개혁을 요구하거나 개화파를 지원하면서도 직접 병합으로 나아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1894년 이후 일본의 국력이 커지면서 <조선을 개혁시키겠다>는 명분과 <조선을 장악하겠다>는 제국주의적 목표 사이의 경계가 급속히 무너진다.
바로 다음 <동학농민전쟁>부터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은 이 결정적인 단계로 들어가게 된다.
[음악] 안녕하십니까. 한국인의 탄생의
함재봉입니다. 어 지난 시간에는 우리가 그 이모군란에 대해서 살펴봤고
특히 그 이모란이 막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어 김옥균이
나가사께서 그야말로 어 망연자실한 그러면서 분노하는 그런
장면이었었습니다. 오늘은 어 그 김옥균이 이제 돌아와서 어 어떻게서든지 그래도 어
개혁을 하려고 하다가 결국은 갑신정변을 일으켰고 그 갑신정변이 어
3일 천하로 끝나면서 어 일본으로 망명을 어 가게 되는 과정. 그리고
왜 어 일본에 갔을 때에 일본에서 전혀 갑신정변을 일으킨 사람들을
환영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디목균이 어떤 대접을 받았고 결국은 어떻게
암살되는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까지 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근대
사이에 있어서 제가 봐 가장 어 앞서가는
근대주의자였고 어 가장 큰 꿈을 꿨었고 그리고 어떻게 보면 가장
적극적이고 달리 말하면 과격했던 어 그 개혁주의자였던
김옥균의 어 참 슬픈 말로 어 어떻게 보면은 조선의 말로를 어 미리 보는
것과 같은 어 그런 어 사건이었습니다. 것이 바로 김옥균의
암살 사건이었습니다. 한국인의 탄생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김옥균이 갑신 정변에 실패할 때 한 때까지 그때까지 잠깐만 우리가 역사를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조선이 굉장히 어려운 상황에서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계국을 하고 이동인이나 이런 사람들이 결국은 일본에 미랑을 해서
일본을 알게 되고 김옥집이 2차 수신사로 가서 또 이동인을 만나고는
드디어 고종한테 소개를 시키면서 고정도 이젠 더 이상 안 되겠다.
이제는 계국을 진짜로 본격적으로 해야겠다. 그러면서 이제 신사율람을 꾸리지 않습니까? 그리고 김옥균도
이제 따라서 일본에 건너가서 처음으로 후쿠사와의 귀치도 만나고 아 일본의
문물들을 보고서 와서 이제 우리 본격적으로 개혁을 해야겠다 그러면서 이제 돌아오려고 하는 참인데 귀국을
하려고 나가사께서 배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때에 그때에 하나부사 일본
영사가 이모군란이 일어나서 이모군란의 그 폭도들한테 쫓겨서 간신히
빠져나와서 목숨만 건져서 이제 나가게 도착을 하는 거죠. 그래서 이제 김옥균이 그때 어
이임목란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김옥균 같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아니 간신히 아
이제 뭐처럼 나라가 열리는 거가 보다 했더니 이모군란이 일어나서 바로
쇠국주의자였던 대원군이 다시 집권을 하게 되고 청군이 또 개입을 해서 대원군을 총으로 압을 해 가고 민시
척적들이 권력을 잡아 버리고 이러니까 김옥균의 입장에서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거 같았겠죠. 그런
상황에서도 어 어떻게든지 개혁을 해 보려고 애를 씁니다. 어 물론
그러다가 고종을 설득해서 민시들을 설득해서 무슨 뭐 나라를 개혁을
한다라는 것은 어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깨닫고는 어 1884년 12월
4일 날 정변을 일으키는 거죠. 그 정 만에 실패를 하고 김옥균, 어
서제필, 박용효 어 서광범이이 사람들은 이제 간신히 살아서 피해서
이제 재물포로 어 가면서 일본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이모근란에서부터 갑신정변의 어떠한 그 사건을 쭉
간략하게 말씀을 드린 거고요. 지금부터는 이제 그러면 어 재물포에
도착한이 김옥균의 일행이 일본에 어떻게 건너가고 그리고 일본에 가서는
어떤 대접을 받는지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2월 8일 오전
8시에 김옥균 일행이 재물포에 도착을 합니다. 그러니까 12월 4일 날
밤에 정변을 일으켰다가 3일 천하 하고 나서는 이제 결국은 쫓겨서 8일
오전에 일본 영사관이 이제 거기 재물에 있었으니까 거기에 도착을 합니다. 자 그런데 닭케조 일본 공사
역시 같이 쫓겨서 그 재물포에 이제 같이 김목균 일행하고 도착을 했는데
그러니까이 게조회가 원래는 같이 거사를 다 논했었다가 일본 정부에서
훈령이 섣불리 조선의 내정에 개입하지 말라 동참하지 말라는 훈령을 바꿔서는
이제 우종국 낙성식에 가지도 않았고 결국은 여기까지 도망은 쳐 왔는데
김옥균 박용 일행이 일본 영상원 내에 들어온 거조차도 도 거부를 합니다.
그리고 그때에 일본 배 치토세마루라는 일본 배가 거기에 정박해 있었는데이
닭게저의 공사는 김옥균이 거기 타는 거조차도 거절을 합니다. 이때에 누가
나서냐면 인호의 각국로 인호의 각국어로가 누구냐면은 후쿠사와 유기치의 제자로서 박영 6일준 이런
사람들하고 같이 조선 최초의 신문을 발행하려고 한정순보라는 실문을
발행하려고 했었던 사람이죠. 근데 이제 그 신문 계획마저도 민시들한테 그 뺏기면서 결국 같이 인호의
갖꾸어도 김옥 박영과 이제 여기까지 피신해 온 거죠.이 이 인호의 각국으로가 나서
각국 지토세마루라는 배의 선장을 설득을 합니다. 결국은 어 김옥균
박영 서재 서광범이 지토사의 마루에 어 올라서 어 12월 11일 어 아침
일찍에 어 추항을 해서 일본으로 어 망명의 길을 떠나게 됩니다. 자
그러면 일본에 이제이 사람들이 도착을 합니다. 일본에 도착을 하는데 일본
정부는 완전히 모른 척을 합니다. 냉대를 합니다. 메이지신 정부가 지금
추진하고 있는 그 개화를 그대로 조선에서도 해 보려고 했던 그 김옥균이 박영이 사람들이 그 정변에
실패하고 일본의 망명을 왔는데도 바로 그 일본의 개화 정부가 모른 척을
합니다. 그 이유는 뭐냐면은 그때의 일본 정부 특히 이도
히로미의 판단에서는 지금 일본의 실력으로
중국하고 청하고 조선 문제로 싸울 때가 아니라고 판단을 내립니다.
그러니까 박계조의 일본 공사보구도 절대 거기 개입하지 말라는 훈련을
보냈었던 거죠. 그리고 실제로이 그 망명훈 사람들을 냉대를 하는 거죠.
그러면서 그때 어 이또 히로보미가 이홍장하고 우리 협상하자
이또 히로보미가 티엔진으로 갑니다. 천진으로 가서 티엔진에서 어 이홍장과
만나서 어 단판을 어 하기 시작합니다. 이또민은 1878년에
집권을 합니다. 자기의 선배이면서
멘토역이기도 했던 오쿠보도시미치 오크보가 암사를 당해서 죽으니까
그다음에 곧바로 이제 이도가 이제 전면에 나서면서 오쿠보의 그 정책을
물려받고 일본을 이제 그 발전시키는데 앞장서는 그 입도의
입장에서는 지금 모든 거를 살펴봤을 때 우리가 외교 관계에서 틀어져
가지고 분쟁을 일으킬 때가 아니다. 이이가 직권하기 1년 전에는 어 선남
전쟁이라는 큰 어 사스마 사라이들의 반란 어 사이고닷가머리가 일으켰던 그
반란도 있었고 그러니까 일본의 입장에선 지금 대내적으로 대회적으로 도대체 바깥 외교 문제 얽히고 이럴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을 했던 거죠. 그래서 결국은 오랜 협상 끝에
1885년에 4월 18일 날 그러니까는 갑신 정변이 일어난지 한 다섯 달 후에 드디어 이용장하고이가
텐진 협약을 맺습니다.이 이 체진 협약이 굉장히 중요해지는 이유가 만년
후에 1894년 7월에
청일 전쟁이 일어날 때에 그 청일 전쟁을 일어날 때 일본이 군대를
보내게 되는게이 10년 전에 맺었던 텐진 협약을 위반했다고 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그 텐진 협약이
뭐였는지 우리가 잘 알아야 됩니다.이 텐진 협약에서 이용장하고
이돈 이렇게 약속을 합니다. 첫 번째 청과 일본은 조선반도에서 즉시 철수를
시작해서 4개월 안에 철수를 완려한다. 그러니까 그전까지 이모군란을 통해서 원세계하고 청군이
대고 조선에 진주를 했죠. 이모근도 진압을 하고 그 대원군도 압을 해
가고 그러면서 그때 이제 군대를 대거친 줄 시켜 놨던 상태고 일본도 계속해서 그 사이에 군대를 갖다
놨었는데 안 되겠다. 우리 양쪽 다 최소한의 군대 그러니까 경비병력
빼놓고 다 철수한다. 이렇게 이제 약속을 있대 하는 거죠. 그리고 4개월 안에 철수 완료한다. 둘째,
청일양국은 조선에 대한 군사 고문을 파견하지 않는다. 조선은 청일 양국이
아닌 제3국에서 한 명 이상 수명의 군인을 초취한다. 그니까 왜
그러냐면 지금 갑신정변이 일어난 것도 서재필, 서재창 등이 일본에 건너가서
도야마 군사학교 같은 데를 나오면서 이제 신식 군대를 만들기로 돼 있었는데 이제 그게 좌절이 되는
거죠. 민시 척적들이 원세계한테 어 조선 군대의 훈련을 맡겨 버리니까
그러니까 이제 또 그것도 하나의 저 정변의 이유가 됐었죠. 그리고 뭐 그
전에 사실 별기군이라는 거를 또 일본 사람들이 일본 군대가 와서 훈련을 하고 있다가 이모군란 때 그 훈련하던
어 소 소 소위도 결국은 어 죽고 이렇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는 야, 조선군대 훈련 문제 이런 거
천군 장교도 안 되고 일본군 장교도 안 된다. 만일에 조선 군대가 근대화를 하기 위해서 근대 군대를
일으키겠다 그러면 제3국의 사람을 부르도록 하자. 이렇게 되는 거죠.
세 번째 이게 이제 청일 전쟁의 이유가 되는 겁니다. 10년 후에 장례 조선에 출할 경우 상호
통지한다. 서로한테 알린다. 누가 한쪽이 군대를 보내게 되면 파병이 불과할 불가피할 경우에도 속히
철수시켜 주둔하지 않는다. 지금 1885년의 상황에서 갑신정변이 갓
일어난 상황. 아직 청일 전까지 10년이 남습니다.이 10년 전만
하더라도 일본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청의 대들 상황이 아니었다고 본
거죠. 청에 대비해서의 자기네 국력 그다음에 외교 관계 모든 거를 봤을 때 우리가 움직일 때가 아니라는
거를 이때는 정확히 알았던 겁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썼는지 청하고 모든
다들 모든 나라들하고 좋은 대회 관계를 유지해야 된다. 왜?
대적으로 나라를 일으켜야 됐기 때문에 지금 너무나 많은 문제들이 산재해
있고 반란들이 일어나고 있었고 아무것도 정돈된 건 없 없는 거고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든지 대회관계는 안정시키면서 국가 발전에 집중을 해야 된다라는 판단을 내립니다. 그러기
때문에 김옥균, 박영, 서재필 어 서광범이 일본으로 정변 실패라고
왔는데도 일본 정부가 완전히 무시를 합니다. 그때에 일본이 어
그 어떤 자세를 취했는가에 대해서 조선의 미국 공사관에 와 있던
후크소위가 이런 보고서를 보냅니다. 미국 자기 정부에 과거에는 일본이
적극적으로 조선의 내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였으나 지난 4월 청과
조약을 체결한 후로는 텐진 협약이죠. 매우 소극적인 방관자에 지나지 않는
모습을 보여왔습니다. 새로 짓고 있는 일본 공사관도 이전 것과는 달리 매우
작고 보잘 것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모근란 때 잘 지어놨던 일본 공사관이 불이 타버렸던 불에 타
버렸던 거죠. 그거를 다시 짓는데 이번에는 아주 조그맣게 아주 보잘 것
없는 건물을 짓는다라고 훈크소희가 보고를 하는 겁니다. 공사관의 수속 외교관도 임시 대리공사에 불과합니다.
제대로 된 공사가 아니라 아예 대리공사라고 격할을 시켜 버리는 거죠. 일본이 조선에 대한 정책을
대폭 수정하였고 청이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보여주는 여러 가지
정황들입니다. 1번의 입장에서는 청이 그래 조선 자기가 자기네가
조선의 종주국이다. 조선이 우리는 청의 석방이라고 하는 거에 대해서
계속해서 강화도 조약 때부터 시작해서 그게 아니다 아니다. 조선은 독립국이다. 따라서 중국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손을 손을 떼어야 된다라는 주장을 내내 해 왔었고 처음으로부터 독립을 하라고 뭐 이런
거를 했었는데 막상 갑신 정변이 실패하고 갑신정변에서 청하고 거의 전쟁
직전까지 가본 일본의 입장에서선 아니다. 스톱 차라리 지금 상황에서는
청이 뭐 조선이 자기의 뭐 종주국이고 어쩌고 어쩌고 다 상관없다. 내버려둬라 그러다 보니까 어떻게
됩니까? 일본에 건너갔던이 개화파들 입장에서는 아주 분통이 터지는 거죠. 실제로 어
처음에는 아예 무시를 하다가 어쩔 수 없이 인노의 가오루가 그때 외무 대신이었었는데 인호의 가오루가 어
김옥균 어 박영효 서제피를 만납니다. 그래서 우리가 개입할 수 없다. 전혀
지금 할 수 없다. 그러니까 서제필이 막 일어나서 소통을 치면서 어떻게 우리 같은 사무라이들끼리 이럴 수가
있냐고. 우리가 다시 쳐들어가서 저 수급파들 없애고 개발을 해야 되는 거 아니냐? 개혁을 해야 되는 거
아니냐라고 그러면서 나는 여기 도저히 너희들하고 같이 있을 수 없다. 나는 미국으로 가겠다. 그러면서 그때
그래서 서재필, 박영, 서광범이 미국으로 갑니다. 정확히 그 미국으로
가는 그 여비 같은 거를 어디서 얻었는지는 아직도 정확하게 하지 않지만 어떤 학자들은 미국 선교사들로
받았다.부터 부터 받았다라는 사람들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결국은 후크사와 기치가 자기가 직접 준 거라 일본
정부가 줘서는 안 되니까 다른 데서 돈을 어떻게 돌려 갖고 그 미국으로 건너갈 수 있는 자금을 마련해
주었다. 이런 얘기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김옥교는 미국에 안 가겠다 그럽니다. 김옥교는 끝까지 나는
미국에 안 가고 일본에 남아서 어떻게든지 훗나를 도모하겠다 그러면서
어 남아 있습니다. 자, 그런데 시대와 상황이 그를 가만히
나와두지 않습니다. 김옥균이 뭐를 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의 위치,
김옥균의 중요성 때문에 주변에서 온갖 일들이 일어날 때마다 김옥균이 어쩔
수 없이 거기에 연로되기 시작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1885년 11월에
일어나는 오사가 사건이라는게 있습니다. 이게 우리 역사책에서 거의 안 가르쳐 주는 거고 거의 들어본
분들이 없겠는데 이게 굉장히 중요했던 사건입니다. 뭐냐하면요. 간단히 말씀드리면
이겁니다. 일본에서 조선을 개화를 하겠다고 하는 세력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돕는 세력들이 있었죠.이 이 세력들이 결국은 뭐라 뭐냐면은 왜
우리 정부가이 사람들을 내버려 두느냐 도와주지 않느냐 지금 얼마나 이분들이
순고한 순고한 뜻을 가지고 조선을 개혁하려 그런다. 근대화시키려 그런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듯이
일본을 근대화시키듯이 똑같은 거를 하려는데 도대체 뭐 하는 거냐? 그러면서 일본의 야당에
있었던 세력들이 적극적으로 이제이 개화파들 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오사가 사건이 뭐냐면 그중에 일부 사람들이 아예 자기네가 모음을 해서
무기들을 사 가지고 그리고는 배가지 구해서 조선에 쳐들어가겠다는 겁니다.
조선에 쳐 들어갔는데 거기에 김옥준하고 박영를 앞세우고 자기내가
쳐들어가서 가서 고정하고 민시 척적들 척적들을 다 없애 버리고 김옥균하고
박영를한테 정권을 어 잡게끔 해 주고 적극적으로 일본하고 함께 근대화를 할
수 있도록 돕자 이런 사실은 좀 황당했지만 어쨌든 이런 구상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오이겐따로 고바야시 구스오, 갓게야마
히데코 등 그 당시에 굉장히 유명했던 소위 일본의 야당의 자유민권 운동
지도자들이었습니다 합니다. 그러니까 정부를 비난하는 야당 입장에서는 조선의 개화파를 돕겠다는 거고 자기네
정부에도 압박을 압력을 행사하고 그러면서 군자금을 모으고 어 그리고
오사의 어떤 호텔에 모여 가지고 사람들이 그러면서 이제 배를 구해
가지고 조선에 건너가겠다 이렇게 됩니다. 이거를 이제 일본에서 경찰이 알아 가지고 결국은 그 오사카 호텔을
급습을 해서 조선을에 쳐들어가려고 했던 그 자유민권파 지도자들을 다 백
몇십 명을 구속을 해 버립니다. 실제 일본의 경찰이 어 명시했던 구속 사유
자체도이 사람들이 군사를 이끌고 조선으로 건너가서 김옥균 박영 등
친일 교합파들이 권력을 잡도록 돕겠다. 그거를 모의했다라는 거였습니다. 아무튼이 사건이이 사건이
조선 조종에 정해 전해집니다. 조선 조종에서 발칵 뒤집힙니다. 그니까
갑신정변이 난지 1년이 안 된 상황에서 거의 진짜 정부가 한번
휘청했었고 그리고 수많은 민시들이 죽고 수많은 대신들이 소위 수급화
대신들을 개화파들이 처단을 하고 그랬는데 간신히 그래도 청분의 도움으로 다시 정권을 잡았고 개합하던
일본으로 망명을 갔는데 몇 따로에 또 들려오는 소식이 뭐냐면 거기에 있는
세력들이 김옥준하고 박영호를 앞장 장세워갖고 군대를 이끌고 다시 쳐들어오겠다라는 그 소식이 이제 전에
들어왔던 거죠. 그러니까 이제 그 조선 정 조정에선 기업을 합니다. 그
얼마나 조선 조정이 놀랐었던가를 그 당시에 역시 미국 공사관에 있었던 폴크소위의 보고서
우리가 어 읽을 수가 있습니다. 이달 13일 두 명의 조선 관리가 관복을
입은 채 늦은 오후에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국광전하가 저에게 김옥균의
지위하의 원정대가 일본을 출발하였다는 소식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 제
의견을 물어보라고 하셔서 왔다고 했습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뭐냐면 이런 사건이 터졌다. 그러니까 소식이
와전이 된 거지. 다시는 이미 김옥균 박영규를 앞세온 일본군 원정대가
추항을 했다. 이거를 고정이 그 소식을 듣고서는 빨리 신화 두
사람한테 얘기해서 미국 공사관에가 갖고 야 이게 어떻게 된 얘긴지 한번 좀 물어보고 오라고 그래서 왔다라고
이제 그 두 저 관리들이 포워크한테 얘기를 하는 거죠. 그들에 의하면
국강께서는 중국 대표가 주 일본 공사로부터 받은 전보 12월 13일자 전보에 의하면 김옥균이 낭인 일본
무사들과 여덟척의 목판선을 타고 심모노 새끼를 추량하여 겉으로는 다른 일본 한구를
향해 가는 척을 하지만 실제로는 조선을 향하여 오고 있으며 많은 양의 총탄을 선적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관리에 의하면이 소식은 조종의 왕족과 관려들이 매우 당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런 해프닝까지 있었던 거죠.이 오사가 사건까지 나니까 사실
고정과 민비 민시척 입장에서는 이모군란에서도 죽고 그다음에 갑신 정면에서 또 죽습니다. 민시들이.
그런데 이제 일본 자체적인 원정대까지도 또 온다라는 얘기까지도
듣고 나니까 어떻게 쓰든지 김옥균하고 박영은 죽여야 되겠다. 이런 결정을
내립니다. 그래서 암사를 하기로 합니다. 물론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조선으로 다시 어떻게든지 불러들여서 암사를 한다는 생각을 했지. 일본에서라든가 외국에서 뭐 자격을
보내서 암살한다라는 것까지 아직은 생각을 못 했습니다. 그래서 일단은 뭐냐면은요. 어떻게 김영 아 저
김옥균을 조선으로 요인을 하려고 그럽니다. 그 방법 방편으로 어떡하냐면은 고종의 사촌형 이재원이
있었습니다. 이재원으로 하여금 편지를 김욱한테 편지를 보내게 합니다.
이재원이 자기 밑에서 던 장은규 그리고 이제 송병준한테 글을 줘서 이재원의 한글
밀서를 줘서 김옥균에게 어 전하면서 어 임금님께서는 어 고정께서는 여전히
김옥균 당신을 믿고 그래서 만일에 당신이 진짜 군세를 군사를 일으켜서
와서 다시를 시도한다 그러면은 적극적으로 어 밀어 주실 것이다라는
내용의 그런 편지를 밀서를 일본의 그 김옥균한테 전달합니다. 거기에 대해서
김옥균이 답을 한게 있습니다. 그 답을 한 것은 지금 청 어 중국의
문서에 남아 있습니다. 뜻밖에 보내 주신 서환을 받았습니다. 엎드려 읽고
나니 온 마음이 경복해서 희경이 매우 깊음에 도리어 비감이 생깁니다.
대감께서 군주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하셔서 변변치 못한 사람을 이처럼 대워하시니 더 저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예전에 제가 우리나라에는 다시 나라를 위해 복숨을
바치는 인물이 없다고 말씀드렸는데 대감께서 바로 이와 같으시니 비록 일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우리나라
500년의 기업은 반드시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대감의이 마음은 천지십명께 묻더라도 떳떳해서 결코
변할 리 없지만 혹여 이루어지지 않을 우려가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응당
대감을 위해 질정할 것입니다. 그래서 김옥균이 사람을
시켜서 자기가 직접 가지 못하고 자기 밑에 있었던 백춘배라는 사람을 조선에
미리국시켜서 조선 내부 사정을 정탐을 하게 합니다. 이게 진짠가 정말로
이재원의 말을 믿을 수 있는가? 뭐 이런 거를 어 그 합니다. 그런데이
백춘배가 체포가 됩니다. 그러면서 당연히 이제 자백을 하고 그러니까
이거를 기화로 해서 조선 정부가 일본 정부에 뭐라 그러냐면 야 지금 너희
나라에가 있는 김옥균이 우리 왕실과 내통을 해서 또 반란을 일으키려
그런다 그랬으니까 그 김옥균을 빨리 추방을 해라 그럽니다. 일본 정부로
하여금 김옥균을 어떻게든지 추방을 하라고 어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이제 일본 정부 입장에서는 굉장히 일이 곤란해지기 시작하는 거죠. 아,이 김옥균이 지금 말을 안
듣고 남아 있으니까 미국으로가 버렸으면 좋을 텐데 남아 있는 바람에이 어이 없는 오사카 사건 같은
것까지 일어나고 결국은 이재원이가 또 내통까지 해 갖고 또 잡피부 이래
갖고는 조선 정부가 공식적으로 이제 항의까지 하고 추방을 하라 그러니까 아주 그냥 일본 정부 입장에서는
곤란하기 짝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일본 정부도
결국은 어떡합니까? 김옥균을 추방 하기로 결정을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어 김옥균을 조선으로 다시 유인을 해서 죽이는 거는 이제 실패로
돌아가니까 어쩔 수 없이 어 고정하고 민비가
민시척은 자을 보내기로 합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보내는 자객이 지운형입니다. 지석영의 형입니다.
지은영이 일본으로 건너가 갖고 박영하고 어 김옥균을 그 암사를
하려고 그럽니다. 그런데 이제 이때 아직 이런 것에 서툴러서 그런지 지은영이 어 박영의 지인한테가 갖고
당신들이 나를 도와주면은 내가 돈도 이렇게 주겠고 하겠으니까 우리 같이 김옥교하고 박영를 암살하자 이러니까
이제 그 사람이 김옥균하고 박영현한테 가서 얼렁 잃는 거죠. 그래서 이제
김옥균하고 박영가 일본 정부에다가 야 이런 사람이 건너와서 우리를 죽 암사를 하려고 그런다. 그러니까 이제
일본 정부가 지은영을 체포를 해 버립니다. 그러고 나서 그
체포를 한 상황에 대해서 인노의 가우루 외무상이 이런 훈령을 내립니다.
조선인 지훈영은 왕의 위임장을 가지고 김옥균을 암살하던 도중 발견되었다.
그리고 김옥규는 지운영이 가진 전권 위임장을 증거로 재판부의 항의를 제기하며 일본 정부에게 정식으로
보호를 요청하였다. 만일 이것이 성공했을 시니까 암살이 됐을 시 상당히 심각한 상황이 되었을 것이며
이러한 상황을 회피하고 조선과의 관계와 내지의 안정을 위해 본 정부는 김옥균에게 정해진 기내에 일본
국경에서 퇴고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김옥은 계속해서 몇몇
외국인들의 지원활 아래 정식으로 항의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지운형의 부제가 일본에게 있어서 가장
바람직하다고 갈 수 있다. 공사는 이런 상황을 조선 정부에게 알리고 조선 정부가 지훈영객에게 귀국하는
명령을 전보로 보내라고 하도록 무슨
말이냐면요. 자기네가 그러지 않아도 자꾸 골차퍼지니까 김옥균 보고 나라를
떠나 일본에서 나가라고 그런 거죠. 나가라 그랬지만 어떻게 해서지 이제 김목규는 추방을 안 당하려고 이제
그러고 있다. 버티고 있다. 그러니까 일단은이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해결하겠지만은 일단이 지은형은 빨리
추방을 해야 된다. 그러니까 조선 정부한테 얘기를 해서 조선 정부로 하여금 지은영을 빨리 공축적으로
귀국하라는 명령을 내리도록 하라. 이렇게 이제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제 일본 정부 입장에서는이 결국은
아 그래 너무 골차지니까 일본 영토에서 나가 나가라고 김옥현의
명령을 내렸다는 어
[음악] 얘기입니다. 자, 그러다
보니까 결국은 버티고 버티고 버티다가 어 말을 안 들으니까 일본
정부가 김옥균을요 결국은 자기네 무인도로 일본 영토네에 있는
오가사와라 군도라는 그중에 무인도의 귀향을 보내 버립니다. 다음은
야마갔다 당시 네무 대신이 간나가와 혈령 훈령을 보낸 겁니다. 즉
김옥균을 그리로 어 유배를 보내라는 그 훈령 내용입니다. 조선인 김옥균이라는 자가 국사범이라는 이유로
본국에서 탈출하여 현재 일본에 체류하고 있다. 일본 정부의 입장에서는 그가 우리나라에 체류하는
것은 일본 정부와 우의 후정의 관계가 있는 현 조선 정부의 불쾌한 감정을 일으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치한을
방해하고 외교상 평화에 지장을 줄 우려가 있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으므로 본 대신은
김옥균에게이 명령서가 송달된 다음 날부터 계산해서 15일 이내에 우리 제국을 떠나서이 명령서에 취소가 있기
전까지 다시 우리 영지 내에 들어오지 말 것을 명한다. 따라서 귀하에게
명하노니 김옥균이 만약 귀하에 관할 있을 경우에는이 명령서의 정사를 김옥균에게 송달하고 앞에서 말한
15일이 경과해도 김옥균이 여전히 우리 제국을 떠나지 않을 경우에는 그를 억유하여 퇴고 명령을 결행하는데
필요한 힘을 써서 가능한 속히 김옥균을 우리 일본 국회로 추방하라
이에 따라이 명령서를 통해 이상의 권한을 귀하등에게 부여한다. 결국은
어떡합니까? 두 개로 추방은 못 하고 일본에 있는 무인도에다가 어 귀향을 보냅니다.
아마 역사에서 이런 거 잘 못 들으셨을 겁니다. 김옥균이 일본에
가서 일본 사람들로부터 또 일본 정부로부터 또 유배를 어 갔었다는
것. 1886년 8월에 오가사라 군도로 유배를 가서 만년
1888년 7월까지 그 군도에서 어 유배 생활을 합니다. 어 김옥균이 어
그 군도에서 너무 힘들다고 계속해서 이제 탄원을 하니까
1887년 이번엔 호카이도 또 어 북회도의 사보로 또 옮겨집니다.
사보로 옮겨지니까 좀 너무 거기가 거기서 추우니까 또 옮겨 달라 그래서
1890년 말에나 도쿄로 기환을 합니다.이 소식을들은 조선의 조종 고종과 민비
민시척들은 다시 김옥균을 암살해라. 1892년
5월에 병조판서 민영소 어가 이일찍 권어 권동수
권제수이 사람들을 어 일본으로 보냅니다. 이일찍은
1892년에 일본에 건너가서 오사카에서 집을 짓고 살고 일본 첩도
없고 그러면서 박영하고 김옥균한테 적극적으로 마치 그를 도울 듯이
적극적으로 접근을 합니다. 실제로 김옥균이 암살되는게 1894년이죠.
그러니까 2년 동안이나이 암살 공작을 지금이 일찍이 하는 겁니다. 그래서이
일찍은 소해지마, 다네오미, 도야마미수이 사람들이 민권 운동파 또는 나중에 일본의 거구파가 되는
사람들이죠. 또 뒷바르지고 밀고 지원을 한 하는 어 그런 상황이 어
벌어집니다. 그리고 박영효가 칠린 의숙이라는 조선 사람들을 위한 학교도
세우고 그럴 때 이일찍이 또 거금을 대면서 도움을 주고 그러면서 아주 친하게 됩니다.
1893년에는 어 홍종우를 포섭을 합니다. 홍종우는 어떻게 어떻게 해서
1890년에 프랑스에 건너가서 2년 동안 프랑스에서 유학을 어 하고 온
사람입니다. 어쨌든 어 프랑스를 경험하고 돌아와서 일본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 이일직에 의해서 포섭이 됩니다. 그러면서 이때부터
이제 본격적으로 김옥균 암살라는 계획을 세우는데 문제는 뭐냐면 일본
내에서 김옥균을 암살했을 경우에이 간단치 않은 문제가 생기죠.
이건 어쨌든 우리 영토에서 이런이 사람들을 조선 정부가 맘대로 해서 안
된다라는 거를 명확히 했기 때문에 암사를 하려는 입장들 사람들 입장에서는 지금 일본 내에서 암살를
하는게 문제가 있다는 걸 아는 거죠. 그러니까 어떻게서든지 외국으로 빼내서 외국에서 이제 암사를 해야 된다라는
결론에 도달을 하게 됩니다. 그럼 어떤 식으로 그 김옥균을 어 유인을
했었느냐? 2일찍이 나중에 어 잡혀서 잡혀서 일본에서 재판을 받을
때에 그때 2일찍이 어 증언을 한게 있습니다. 언젠가 김옥균이 혁명을
기도하는데 어떠한 수단을 쓰는 것이 좋겠느냐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드디어 기회가 왔다고 생각해서
김옥균에게 우선 사업을 일으키고자 한다면 프랑스를 이용하건 혹은 러시아를 이용하건 두 나라 가운데
한쪽을 이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이를 이를 위해서는 아무튼 먼저 러시아에 가서 시기를 살피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홍종우도 곁에서 계속 같은 말을 거들며 권유하자
김옥균도 크게 마음이 동했던 듯 한 번은 러시아에 가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됐습니다. 그때 러시아에 가서
프랑스를 하면 말도 통할 것이니 홍종우를 데리고 가면 좋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원래 진화
중국에서 14년간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이홍장과 그의 양자 이경방
등과도 아는 사이이기 때문에 진하에 가면 중국에 가면 크게 상황이 좋을 것이며 이형장만 진력해 준다면 대체로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지나 중국에 갈 때는 오버인을
대동하면 좋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뒤로 김옥도 상하에 가겠다는 결심을 조금씩 하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김옥균이 이일찍이 와서 돈도 많이대 주고 적극적으로 돕는 모습을
2년씩이나 지금 공을 드리고 있으니까 앞으로 우리가 다시 어 일을 도모해서
조선을 개혁을 하려 그러면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그랬더니 이제이 일찍이 나서서 아 지금 상황에서는
어쨌든 러시아나 프랑스하고 해야 되는 거 뭔가 손을 잡는 것이 좋고 러시아로 가든지 아십시오. 홍정우가
마침 프랑스 유학생으로 다녀서 불어도 유창하게 가니까 홍종우도 데려가면 좋겠습니다라고 이렇게 쭉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이제 이일찍이 생각하기를 이용도 알고 이홍장의 양자
이경 이경방이죠. 이경방은 그 당시 도쿄 어 주일본 천국 공사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 다 잘 아니까이 사람들하고 잘 얘기를 하면은 일을 도모하기가 굉장히 쉬울
겁니다라고 결국은 상해로 가서 이형장하고 손을 잡는 것이 어떻겠는겠습니까라고
얘기를 해 주는 거죠. 어 그래서 김옥균이 설했다 그러면서 그때부터
상해로 갈 생각을 본쩍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그럽니다. 저는 근데 참 사실 이분이 이제 안타까운 거죠.
아직도 이홍장이 어떤 입장이라는 거를 김옥균이 정확히 파악을 못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홍장은 분명히 원세계를 통해서 조선을 꽉 잡고 있었던 인물이고 민시척과 고정을
도았던 것이 그게 청이고 이홍장이었거든요. 이제 와서 김옥균이
다시 어 혁명을 어 쿠테타를 예를 들어서 기획을 하는데 동참을 한다.
그건 사실 굉장히 어 그 납득하기 어려운 어 그런 일이 되겠는데 아무튼
김욱는 어 상황이 여러 가지로 어렵고 일본도 돕지 않고 아무도 손을 내밀지
않으니까 아마 그런 생각도 어 하게 되지 않았는가
싶습니다. 그니까 상황이 너무 어려워지니까 어 일본 내에 있어 봐야
자꾸 유배나 당하고 그런 상황에서 이제 그한 나머지 중국으로 갈 생각을
자꾸 하고 있는데 다만 돈이 없어서 못 가고 그랬는데 이때 일찍이 내가
5,000엔을 빌려 주겠다 그럽니다. 그러면서 그 5천엔 내가 지금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상하에 있는 은행에 그 돈을 갖고 있으니까
당신이 상해로 가서 상해에 가서 그 은행에서 그 돈을 받으라고 그 수표를
끊어 줄테니까 내 이름 있는 수표를 끊어 줄테니까 홍종우가 가서 그 수표를 현금화할 수 있을 있다.
그래서 그러면 홍종우를 데리고 가라 그럽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김옥균이 설득을 당하고
홍종우와 함께 어 그 상해로 건너갑니다. 그래서 김옥규는
시종 와다지와 함께 그리고 이제 가군지 그 추종자 그 오가사하라
군도에서부터 따라다니는 추종자 이런 사람들과 같이 1894년 3월 10일
밤 열차로 도쿄를 출발해서 11일 오사가에 도착해서
이제 오사가에서 이제 준비를 떠날 준비를 합니다. 이때 이일찍이 조선에서 갖고 온연발 권총 그리고
단도 한자료를 홍종우에게 어 전달을 하고
홍종우한테 한복 두루마귀를 맞춰주고 그 안쪽 주머니에다가 총하고 단도를
숨기도록 꿰매서 어 그걸 맞춰 줍니다. 94년 3월 22일 날 어
김옥균이 와다인지르와 홍종우를 대동하고 고배로 가서 고배의 상하의
왕복 배표를 구입하면서 사교마루라는 일본 배에 올라서 어 상해로
향합니다. 사교 마르호는 23일 고배를 추항해서 3월 27일 상해에
어 도착을 합니다. 상해에 도착하자마자 홍종우는 즉시 미국 조개 그니까
조개라는게 뭡니까? 어 조차한 지역들이죠. 그러니까는 상해가 여러
조개로 나눠져 있었습니다. 미국 사람들이 사는 미국 조개, 일본 조개, 프랑스 조개, 독일 조개
이렇게 다 나눠져 있었던 거죠. 그 미국 조개 내에 어 철마로 대교
북쪽에 동화양행이란 여행에 묻게 됩니다. 그래서 먼저 홍종우가 거기에
가서 객시를 예약하고 어 7시 반쯤에 그 여관에 어 투석을 합니다.
김옥규는 2층 1호실에 시종함과 함께 묻고 홍정우는 3호실에 그리고 4
4호실에 오버인 그러니까 그 주일본 천국 공사관의 통역이죠. 그 사람까지
같이 왔습니다. 그래서 2층에 1 3 4 5실에 이제 이렇게 다 투수을
합니다. 3월 28일 홍종우가 아 자 이제 내가 드디어 가서 수표를 현금해
갖고 오겠다. 잠깐만 기다려라. 그러면서 은행에 간척했다가 다시 어
돌아왔고 그때는 오보인 통역도 어디 외출 중이어서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후 3시경에 어 홍정우가 그 일찍이 맞춰줬던 그 총하고 칼이 들어 있는
그 한복으로 갈아입고 김옥균의 방으로 들어갑니다. 근데 이제 문제는 그때 시종 어 그 와다인지로가 같이
있었으니까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홍정호가 그러고 있는데 마침 김옥균이
와다인지로한테 신부름을 시킵니다. 그래서 와다가 방으로 나가서 1층으로
내려갑니다. 그때 와다가 방을 나가자마자 홍정훈은 권총을 꺼내서
김옥균을 쏩니다. 첫 번째 총알은 김옥균의 왼쪽 광대뼈 아래쪽에 그리고
두 번째는 복부에 명중합니다. 김옥교는 총을 맞으면서도 필사적으로
방에서 탈출을 하려고 합니다. 그때 홍정호가 세 번째 총알를 쏴서
김옥균의 등 어깨뼈 아랫부분을 맞춥니다. 그래도 방에서 나와서
필사적으로 도망을 치려고 하다가 문 앞에 20m까지 어 간신이 어 기어가지만
결국은 8로 객실 앞에서 쓰러집니다. 와다인즈로는 이게 폭죽 소리였지
처음으로 착각을 합니다. 그래서 별 생각을 안 하고 있는데 그때 이제 홍종우가 도망을 치느라고 내려와서
2층에서 뛰어내려서 여관 로비를 지나서 바깥으로 나가는 걸 보고 그때 이제 바다가 이상하게 느껴서 2층으로
급히 올라갑니다. 그때 8호실에 투수하고 있던 일본 해본 장교가
나와서 총맞은 김옥균을 발견하고 이렇게 어떻게 부축을 해 보려고 어 하고 있었습니다. 와다지가 도착을
하지만 김옥규는 곧 절명을 합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뭐냐면 이게
도대체 조개에서 일어난 겁니다. 그러니까 외국 사람들이 치외법권 지역입니다. 천국의 경찰이 아무
관할권이 없는 지역입니다. 그러면 미국 조개에서 일어난이 살인 사건
그것도 일본의 막가 있는 조선 사람의 살인 사건. 그걸 살인자는 또 조선
사람이고 이거는 이제 어떻게 다뤄야 되는 문제 누가 이게 관할 건냐 문제를 갖고 이제 굉장히
어지럽습니다. 사실 이때에 만일에 조선 조선의 영사가 있었거나 그러면은
조선의 영사가 뭘 할 수가 있었고 그러는데 아무도이 일에 나서질 않습니다. 일본 영사도이 국제 문제에
개입해서 안 될 거 같으니까 일본 영사도 아무 저기를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어이 사건을
공부국에서 상하이의 청나라의 경찰국에다가 사건을 이첩시켜
버립니다. 홍종우는 도망을 쳐서 20어 9일 딴 여관에 숨 숨어
있다가 결국 29일 새벽에 어 챔포가 또 됩니다. 중국 측에서 이제 다 그
신문을 하기 시작하고 홍종우도 신문을 하고 이제 이렇게 됩니다. 그러면서이 소식이
당연히 조선에 이제 알려집니다. 그래서 원세계가 이거를 재빨리 이런
사건이 터졌다는 거를 파악을 하게 됩니다. 원세계가 이홍장한테 즉각
전보를 칩니다. 그러면서 홍종우하고 그다음에 김옥균의 시신 이런 거를 우리가 빨리 장악해서 우리가 처리해야
됩니다. 특히 조선 조정이 그걸 원합니다. 빨리 하십시오라는 전보를
보냅니다. 그래서 그때 이홍장이 훈령을 이런 훈령을 보냅니다. 원세계
전보를 받자마자 이런 훈령을 보냅니다. 원세계 전보가 다음과 같다. 조금 전에 조병직이 말을
전하기를 일본 도쿄 주제 한원이 보낸 전보를 받았는데 어제 신각에 한인
홍종우가 상하에서 김옥균을 살아했습니다. 홍종우는 조개의 순포들에게 잡혀서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 뜻이 가상하니 부디 호도에게 명령을 내려서 조치를 취해 구해
구허해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김옥교는 한국의 입장에서는 모반의
수범인이 중화에 왔을 때 처리하기 어려웠다. 이제 한인에게 조개 내에서
칼에 찔려 죽었으니 그 죄의 처분은 우선 놓아두고 논하지 말라. 외인들이 시끄럽게 하면 바로 보고하라.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고정은 3월 31일 날 주차 천진 독립 통상사무
서상교라는 그러니까 조선에 파견하는 어 외교관이죠. 서상교에게 빨리
상해로 가서 기소된 홍정우와 김옥균 시신을 인도받아서 그리고 인도받을 수
없으면 이홍장한테 도움을 청하라 하고 요청을 합니다. 그러니까 이홍장도
상해 해관도 자기 부하 섭직규에게 곧바로 명령을 어 전달을 합니다.
서상교가 4월 6일 날 상해에 도착해서 섭집규에 도움을 받아서
홍종우와 김옥균의 시신을 다 인도받습니다. 그리고는 어떡합니까?
청의 남양수사이 남양 함대에 군남 위정에
태워서 귀국을 시켜 버립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에 조선 조정의
입장에서는이 역적 김옥을 쳐하는 거니까 빨리 인도받아서 어떻게든지
조선으로 데려 가다 하라. 그래서 청해군에 배까지 태워 가지고 조선으로
돌려보냅니다. 4월 12일 오후 1시 인천에 도착하고 어 조선 배로
옮겨져서 13일 날 양화진에 한강을 거슬러 가서 이제 양화진에 도착을
합니다. 4월 13일 날 조선조은 형조와 한성부에서 어 김옥균의 사체를
거만하게 합니다. 그 거만의 어 결과 보고소가 이렇습니다. 어제 역적
김목균의 시체를 검사할 일을 초기하여 윤호를 받고 회사에 당일로 거행하도록
신축하였는데 방금 경조와 형조에서 보고한 것을 보니 규정 규정대로
검사한 결과 그것이 역적 김목균의 시체가 의심할 바 없이 확실하다고
하였습니다. 아이 역적은 바로 천하 고금에 없는 흉악한 역적으로서 온
나라 사람들 치고 누군들 그의 사지를 찢고 그의 살점을 씹으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외국에 가서
목숨을 부지하여 오랫동안 천벌을 받지 않았으므로 여론이 갈수록 더욱
들끌었습니다. 지난번에 상하에서 온 전보를 받고 홍정우가 사살한 거사가
있었던 것을 알았는데 역적의 시체가 이제 압성되어 왔고 그 진위를
판명하였으니 10여년 동안 귀신과 사람의 격분이 이제 조금 풀리게 되었습니다. 비록 산체로 잡아다가
시원하게 방영을 바로잡지는 못하였지만 그래도 괴하고 왕법을 소금하여
펼으니 반란을 음모한 무도한 큰 역적에게 부도율을 적용하고 이과
신치운에게 시행하였던 전례를 더 시행하여서 천하 후세의 반역을
음모하는 역적들을 두려워하게 하소서. 신들은 감히 눈을 부릅고 귀여움을
토하는 의리를 본받아 서로 이끌고 연명으로 진술하니 삼과 바라건데 속히
처분을 내리소서 하니 비을 내리기를 지금 경들의 간절한 청은 피를 뿌리고
눈물을 먹음고 징계하고 성토하는 의리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 당연하며 또한 귀신과 사람이 공분하고 여론이
더욱 격화되어 그 그만둘 수가 없다. 아대로 윤호한다 하였다. 그래서
김옥균의 수급은 효수되고 능치 처참된 그 시신은 여덟각으로 나뉘어져서
전국에 보내집니다. 김옥균의 어 부관 참시와 함께 어 갑신정변의 이후
10년 동안 옥에 갇혀 있던 그의 생부 김병태 역시 이때 10년 만에
꺼내서 감옥에서 꺼내서 교수형에 처 처해 줍니다. 그 우리가 역사에서 막연히
어 뭐 김옥규는 갑신 정면을 일으켰다 실패하고 일본으로 갔고 뭐 그다음에
결국은 어 유배를 갔다 암살되고 이게 저는 우리가 역사를 볼 때 정확하게
봐야 되는게 뭐냐면 일본의 어 개화파들 특히 일본의
야당한테는 김옥균이 영웅이었습니다. 일본 정부
입장에서는 아주 애매한 존재입니다. 개화를 하겠다라는 것까지는 일본과
같이 하겠다는 거니까 맞는데 지금 자기네 나라 입장에서 봐서는 자꾸
조선하고 불란을 일으키고 청하고 불란을 일으키는 골치 아픈 존재가 되는 거는 그거는 싫었던 거죠.
그러니까 이제 귀양도 보내보고 여러 짓을 하다 결국은 이제 암사를 당하게 되는 거죠. 고종과 민비 민시척정
입장에서선 이거는 정말 역적 중에 역적이죠. 그 김옥균을 잡으려고
10년 동안 공작을 하다가 드디어이 일찍이 성공을 해서 홍정우를 보내서 이제 암사를 한 겁니다.
그러니까 어떻게서든지이 역을 불러들여야 되는 거죠. 그러니까 김옥교는 참 누가 보느냐에
따라서 영웅일 수도 있었고 역적일 수 있었습니다. 그게 그 조선이 처했었던
상황이죠. 조선은 지금 어느 쪽으로 가야 되느냐? 그대로 갈 거
같으면은 김옥균이 영웅이고 조선을 유지해야 되는 거
같으면 김옥균은 역정인 거죠. 그러니까 역사라는 거는 우리한테
냉철하게 결정을 내려라. 선택을 해라라는 거죠.
조선 정부로부터도 보호하고 일본 정부의 냉대로부터 그래도 뭔가를 보호해
주려고 했었던 흑사의 기치부터 시작해서 민권운동가들 야당 사람들의
입장에서 봐서는 어떻게 자기 나라의 망 정치 망명을 와 있던 사람을
외국에 가서 저렇게 말도 안 되는 암사를 당하게 하고
시신조차도 인도받지 못하고는 엉뚱하게 조선에 또 넘겨 주게 하는
그런 일까지 당하게 하는 이건 정부가 도저히 이제 용납할 수 없다. 이렇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일본의 여론들이 특히 이제 야당에서 하는
모든 신문들이 전부 다 들고 일어나서 문명화를 위해서 투쟁하다가
희생된 영웅이다. 김옥균을 영웅으로 만듭니다. 일본의 야당 입장에서는
이런 거죠. 대회 정책에 있어서 이렇게 약해 빠졌냐? 맨날 당하기만 하고 이모근란 때도 청나라한테 쫓겨
나오고 갑신정변 때도 청나라한테 쫓겨 나오고 기껏 텐진 협약해서 뭐 다 철수하자 이런 소리나 했다가 이번에도
또 이런 일이 나는데 찍소리 못 하고는 결국은 김옥균 시신을 저쪽에다 넘겨 주고 이렇게 되는 거예. 어
김옥균의 암살은 일본 정부의 대회정책의 나약함, 무능함에 상징이
돼 버립니다. 일본 정부도 그 공격을 받으면서 다시 야
이제는 완전히 군대를 개혁을 했고 메이지 헌법을 만들어서 헌정을 하기 시작했고 경제를 일으켜서 대회 정책도
1884년 85년 텐진 협약을 맺을 때와 지금 10년 후에 일본의 국력은
전혀 달라졌었고 달라진 상황인데다가 그동안에 중국하고 러시아의 부상으로
인해서 일본이 대회 대전략을 완전히 재검토해야 될 상황이다라는 상황에
봉착했는데 김옥균이 암살이 되면서 여론이 전부 다 청을 가만놔서 안
된다. 조선을 감안놔서 안 된다라고 야당의 여론까지 들끊기 시작하는
거죠. 그러니까 아 이거를 바꿔야 될 때가 된 거 같다라고 하는데 무슨
일이 또 벌어집니까? 바로 동학란이라는게 지금 조선에서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이 동학난을 조선 정부가 전혀 진압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이 동학난을 진압을 하기 위해서 조선 조종이 청의 군대 파견을
요청할 거라는 정보까지 입수가 되면서 일본 정부의 계산이 완전히 바뀌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아 이제 지난 10년 동안 우리가 물러섰고
개화파를 냉대하고 김옥균을 유배를 보내고 김옥균의 시신까지도 저렇게
그냥 조선에다가 힘없이 넘겨 주고 했는데 아 이제는 그 정책이
끝날 때가 됐구나 그러면서 적극적인 개입 정책으로 다시 들어가고 조선에만
개입을 하는게 아니라 청을 조선으로부터 완전히 축출해야 되겠다라는 급격한 정책의 변환에 의
계기로 삽니다. 딱 그때에 절로의 기회가 오는 것이 그게
바로 동학난의 발발입니다. 오늘은 어 김옥균의 암살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김옥균의 암살은 그저 한 인물의 어 죽음에 대한 얘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이런 사건을 볼 때 국제 정세 전체를 봐야 되는 거죠. 그 맥락 속에서
김욱균의 죽음이 천국에도 파장이 있었고 특히
일본에 엄청난 파장을 미치면서 결국은 청일 전쟁의 가장 직접적인 요인 중에
하나로 작용을 했다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하게 인식을 해야 됩니다. 그리고
청일 전쟁을 일으키는 두 번째 가장 직접적인 영영 영 그 원인이 바로
동학란입니다. 그 동학이 김옥균의 암살에 일어난 불과 한두 달 이후에
이후부터 동학란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기 시작을 합니다. 다음 시간에는이
동학난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살펴보도록 [음악]
하겠습니다.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통해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탐고해 보는
한국인의 탄생. 오늘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입니다.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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