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군란은 왜 일어났나?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24회
법률방송
44,659 views Apr 2, 2025 #일본 #한중일 #법률방송
본 강연은 함재봉의 『한국 사람 만들기 II: 친일개화파』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
이번 시간에는 19세기 근대화 바람 속에 조선이 일본에 이어 미·영·독 등 서양 국가들과 수교를 맺으며 급속한 개국의 과정을 걷고 있던 중 일어난 임오군란(壬午軍亂)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임오군란은 단순히 신식 군대에 대한 차별을 견디지 못한 구식 군대의 반란만이 아니라 당시 동아시아 국제 정세를 명확히 드러낸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사건인데요.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책과 위정척사파들의 봉건 사회를 지키고자 하는 움직임 속에 이웃 나라였던 청과 일본은 어떤 선택을 했고, 또 그 선택은 조선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요?
생각보다 복잡하고, 치열했던 임오군란 속 근대 국제 정치를 살펴보겠습니다.
===
<임오군란은 왜 일어났나?> 요약 및 평론
1. 내용 요약
강좌 24회에서 함재봉은 1882년 임오군란을 단순한 구식 군대의 '봉급 차별에 대한 폭동'으로만 축소하지 않고, 급격한 개항과 미·영·독 수교에 반발한 친중 위정척사파와 대원군 세력의 복벽 쿠데타, 그리고 조선을 둘러싼 청나라와 일본의 치열한 국제 정치적 셈법이 부딪힌 복합적 사건으로 해명한다.
(1) 구식 군대의 불만과 위정척사파·대원군의 결합
구식 군대의 차별과 봉기: 고종의 친정과 개국 추진으로 신식 군대인 별기군이 우대받은 반면, 13개월간 벼슬과 봉급을 받지 못하던 전통 구식 군대는 쌀에 모래와 겨가 섞여 나오자 폭동을 일으켰다.
대원군의 권력 복귀와 한양 난입: 군인들은 구식 군대의 수호자이자 1874년 쫓겨났던 흥선대원군에게 몰려갔다. 대원군은 이들을 지휘하여 대궐을 습격하고, 민씨 척족의 핵심인 민겸호와 영의정 이채응(대원군의 형) 등을 살해했다.
개혁 기구의 폐지와 쇄국 복귀: 8년 만에 정권을 재잡은 대원군은 개국을 위해 만든 통리기무아문과 별기군을 즉각 폐지하고, 삼군부와 오영 체제를 부활시켰다.
(2) 지석영의 우두종두소 파괴가 보여준 문화적 보수성
지석영의 종두법 이식: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에서 천연두 예방 종두법을 배워온 지서경은 서울에 우두종두소를 세우고 치료를 시작했다.
무당과 민중의 표적: 임오군란 당시 군중과 무당들은 마마(천연두) 굿판이라는 기득권을 빼앗겼다는 이유로 종두소를 파괴했다. 이는 당시 민중과 기득권층의 의식 수준이 근대 문명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적나라한 사건이었다.
(3) 일본 공사관 습격과 청나라의 전격 개입
하나부사 공사의 탈출: 난민과 구식 군대는 별기군 교관이던 일본인 교관을 죽이고 일본 공사관을 불태웠다. 하나부사 요시모토 공사 일행은 한양 도성 입성을 거부당하자 제물포로 탈출하여 영국 군함의 도움으로 일본에 겨우 복귀했다.
청나라의 대원군 납치·압송: 조선이 쇄국으로 회귀하여 <조선책략>(다자 수교를 통한 세력 균형)이 파탄 나는 것을 우려한 청나라 이홍장은 오장경, 마건충, 정여창, 원세개(위안스카이) 등의 군대(회군 3,000명)를 조선에 전격 투입했다. 김윤식과 어윤중의 제안을 받은 청군은 대원군을 청어로 유인해 체포한 뒤 중국 바오딩으로 강제 압송·구금했다.
(4) 청·일의 타협과 조선의 종속 심화
일본의 현실적 타협: 일본 역시 군사력이 청나라에 미치지 못함을 냉정히 자각하고, 최우선 목표를 전쟁이 아닌 배상금 수령(제물포 조약)과 개항 유지로 한정하며 물러섰다.
청의 내정 간섭 전면화: 대원군을 제거하고 민씨 정권을 재립시킨 청나라는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통해 내정 및 외교 간섭을 전면화했다.
2. 평론: 개혁의 좌절과 주권 부재가 초래한 동아시아의 격랑
강좌 24회는 임오군란을 단순한 내부 소요 사태가 아니라, 동아시아 주권 재편 과정에서 조선이 보여준 '준비되지 않은 개국'과 '구체제 보수성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첫째, 근대화 추진 과정에서 발생한 '행정 무능과 소외'의 고발이다.
개국과 신식 군대(별기군) 창설이라는 하드웨어적 명분에 매몰되어, 정작 기존 체제를 떠받치던 구식 군인들에게 13개월 동안 밥을 주지 않고 모래 섞인 쌀을 배급했던 민씨 정권의 부패와 행정 파 탄이 어떻게 체제 자멸(임오군란)로 귀결되었는가를 냉정하게 직시하게 한다.
둘째, 청·일 양국의 '냉철한 국익 계산'과 대비되는 조선의 자폐성이다.
일본은 자국의 군사적 한계(수송선 및 해군력 부족)를 인지하고 실리적 배상금만 챙긴 채 후일을 도모(해군력 증강)한 반면, 청나라는 자국의 대전략(<조선책략>)을 지키기 위해 속방의 대원군을 서슴없이 납치해 갔다. 외세의 침략과 주변국의 치열한 셈법 속에서, 우두종두소를 파괴하던 조선 민중과 수구 사대부들의 모습은 주권 국가로서의 대외 정세 인식 부재를 가슴 아프게 보여준다.
셋째, 갑신정변과 청일전쟁으로 이어지는 '동아시아 비극의 복선' 규명이다.
청나라 군대의 주둔과 대원군 압송으로 민씨 정권이 완전한 친청 사대주의로 돌아서자, 이에 분노한 김옥균 등의 개화파가 완전히 입지를 잃고 2년 후 '갑신정변'이라는 극단적 쿠데타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인과적 사슬을 선명하게 연결해 낸다.
결론적으로, 함재봉의 24회 강연은 임오군란이 쇄국으로 돌아가려 했던 위정척사파와 대원군 세력의 마지막 몸부림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청나라의 내정 간섭을 심화시키고 일본의 군비 증강을 자극함으로써 조선의 주권을 더욱 위태롭게 만든 비극적 분수령이었음을 입증한다.
===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24회
<임오군란은 왜 일어났나?> 요약 + 평론
이번 24회에서 함재봉은 임오군란(1882)을 흔히 설명하듯 <13개월 동안 봉급을 받지 못한 구식 군인들의 폭동>으로만 보지 않는다. 그것은 분명 직접적인 발단이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개항과 급진적 개혁에 대한 전통세력의 반발, 대원군과 민씨 세력의 권력투쟁, 청·일 양국의 조선 개입이 한꺼번에 폭발한 사건>이었다고 해석한다.
특히 이번 강의의 핵심은 임오군란 이후의 변화다. 이 사건을 계기로 청이 조선에 군대를 보내 직접 개입하고, 일본도 군대를 파견하면서 <조선 문제를 둘러싼 청·일 경쟁>이 본격화된다. 따라서 함재봉은 임오군란을 1894년 청일전쟁으로 가는 출발점 가운데 하나로 본다.
요약
• 1864년 고종이 12세로 즉위하면서 흥선대원군이 약 10년 동안 실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1873~74년경 고종이 친정을 시작하면서 대원군은 권력에서 물러난다. 이후 민씨 척족이 권력 중심으로 들어오고 조선의 대외정책도 급격히 바뀐다.
• 대원군 시기 조선은 병인양요·신미양요를 겪으면서도 쇄국정책을 유지했다. 그런데 고종 친정 이후 1876년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고, 수신사를 일본에 보내며, 1882년에는 미국과 수교한다. 영국·독일 등과의 수교도 이어진다. 불과 몇 년 사이 조선이 수백 년의 고립에서 급격하게 벗어난 것이다.
• 함재봉은 여기서 <전통적 위정척사파의 입장으로 당시 상황을 한번 생각해 보라>고 한다. 그들에게 조선은 500년 동안 지켜온 성리학적 문명국가였다. 그런데 갑자기 일본과 서양의 제도·군사·기술·사상이 밀려들고 있었다. 이들의 눈에는 단순한 정책변화가 아니라 <문명 전체가 무너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
• 따라서 임오군란은 단순히 군인들의 경제적 불만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함재봉은 이를 개화정책에 대한 사회적·정치적 반발이 폭발한 사건으로 본다.
• 직접적인 원인은 구식 군인들의 처우 문제였다. 조선정부는 일본식 근대군대를 만들기 위해 별기군을 창설했다. 일본인 교관이 훈련을 맡았으며 새로운 무기와 군사훈련을 도입했다.
• 반면 기존 군인들은 심각한 차별을 받았다. 정부 재정이 부족하여 봉급이 계속 밀렸고, 무려 13개월 만에 급료를 지급한다면서 현금이 아닌 쌀을 지급했다. 그런데 그 쌀마저 양이 부족하거나 질이 나빴다.
• 구식 군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은 오랫동안 나라를 지켜온 군인이었는데, 정부가 새로 만든 별기군에는 돈을 쓰면서 자신들에게는 제대로 봉급조차 지급하지 않았다. 따라서 경제적 불만과 <신식군대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이 결합했다.
• 함재봉은 이 군인들이 단순한 정규군만은 아니었다는 점에도 주목한다. 대원군이 과거 활용했던 포수 등 전통적 군사세력이 포함되어 있었고, 일부는 대원군과 정치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 군인들이 항의하자 민씨 정권의 민겸호가 강경하게 대응한다. 일부 군인이 체포되고 처벌될 상황이 되자 동료 군인들이 감옥을 습격하여 이들을 풀어준다.
• 이때부터 군인들의 불만은 정치적 폭동으로 바뀐다. 민겸호를 비롯한 민씨 계열 인사들이 공격당하고, 일본 공사관도 습격된다.
•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와 공사관 직원들은 탈출한다. 일본인들이 살해되고 일본 공사관도 불탄다. 하나부사는 인천으로 도망가 영국 군함의 도움을 받아 일본으로 귀환한다.
• 군인들은 대원군에게 찾아간다. 대원군은 약 8년 만에 다시 정치 전면에 등장한다. 그는 군인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정권을 장악하고 민씨 세력을 제거하려 한다.
• 명성황후는 궁궐을 탈출한다. 대원군은 명성황후가 죽었다고 발표하고 장례까지 준비한다. 실제로는 명성황후가 살아서 피신해 있었다.
• 대원군은 고종의 개화정책을 뒤집기 시작한다. 별기군을 폐지하고, 기존 군제를 복원하며, 통리기무아문 등 개화를 위해 만든 기관들도 폐지한다.
• 즉 함재봉에게 임오군란은 단순한 군인폭동이 아니라 <개화정책 자체를 되돌리려는 정치적 반동>의 성격을 가진다.
청과 일본의 개입
• 그런데 여기서 임오군란은 국내정치 사건에서 국제정치 사건으로 바뀐다.
일본 공사관이 공격당하고 일본인이 사망하자 일본에서는 강경한 여론이 형성된다. 일본은 군함과 군대를 조선으로 보내 배상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한다.
• 조선정부 입장에서는 일본군이 들어오는 것이 큰 위협이었다. 따라서 청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 청 역시 임오군란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일본이 조선을 장악할 가능성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 이홍장은 조선에 청군을 파견한다. 이때 등장하는 중요한 군대가 <회군(淮軍)>이다. 앞선 태평천국 강의에서 설명했던 이홍장의 군대다. 함재봉은 이 연결을 중요하게 본다.
• 회군은 태평천국 진압과정에서 성장한 근대적 지방군이었다. 이 군대를 통해 청은 조선에 직접 군사적으로 개입할 능력을 갖게 되었다.
• 여기에는 훗날 조선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치는 젊은 원세개도 포함되어 있었다. 임오군란은 원세개가 조선과 본격적으로 관계를 맺기 시작하는 계기가 된다.
• 청 측에서는 김윤식 등 조선 인사들에게 대원군을 제거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된다. 김윤식 역시 대원군을 체포하여 사태를 정리해야 한다는 방향에 동의한다.
• 청군은 대원군을 만나러 가서 사실상 체포한다. 대원군은 청나라 군함에 태워져 톈진으로 압송된다.
• 이것은 매우 놀라운 사건이다. 조선의 전직 최고권력자를 청이 조선 안에서 체포하여 중국으로 데려간 것이다.
• 함재봉은 이것을 청의 조선 내정개입이 본격적으로 강화되는 계기로 본다. 청은 전통적인 종주국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제는 군대를 주둔시키고 조선정치에 직접 개입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대응과 제물포조약
• 한편 일본도 물러나지 않는다. 일본은 군대를 보내 조선정부에 일본인 희생과 공사관 공격에 대한 책임을 요구한다.
• 일본과 조선은 결국 1882년 <제물포조약>을 체결한다.
• 조선은 일본에 배상금을 지급하고 일본 공사관 경비를 위해 일본군이 서울에 주둔하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 함재봉은 이것을 중요한 변화로 본다. 이제 서울에는 청군뿐 아니라 일본군까지 들어오게 된 것이다.
• 따라서 조선의 수도가 사실상 두 외국군의 경쟁공간이 된다.
<청군>
↔
<일본군>
이라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 이것이 1884년 갑신정변에서 다시 폭발하고, 궁극적으로 1894년 청일전쟁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함재봉의 설명이다.
청은 왜 대원군을 제거했는가
• 이 대목에서 함재봉은 흥미로운 역설을 제시한다.
대원군은 쇄국정책의 상징이었다. 그렇다면 서양과 일본의 개입을 싫어하는 청이 대원군을 지지해야 할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실제로 청은 대원군을 제거했다.
• 이유는 국제정치의 현실 때문이었다. 청은 조선이 완전히 쇄국정책으로 돌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 청에게 중요한 것은 조선을 <러시아나 일본 어느 한 나라에게 빼앗기지 않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조선이 미국 등 여러 국가와 수교하여 세력균형을 만드는 것이 오히려 유리했다.
• 따라서 대원군의 전면적 쇄국정책은 청의 전략과도 충돌했다.
• 함재봉은 이 점을 통해 당시의 정치구도를 단순한
<개화파 대 수구파>
로 보면 안 된다고 강조한다.
청도 조선의 제한적 개화를 원했고, 일본도 개화를 요구했으며, 조선 내부 개화파도 개혁을 주장했지만 <각자가 원하는 개화의 목적은 서로 달랐다>.
청과 일본은 왜 바로 전쟁하지 않았나
• 서울에 청군과 일본군이 동시에 들어왔으니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양국은 일단 충돌을 피한다.
• 함재봉은 당시 일본의 국력이 아직 청과 전면전을 벌일 수준이 아니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 일본 내부에서도 <지금은 조선 때문에 청과 전쟁할 때가 아니다>라는 현실론이 강했다.
• 그래서 일본은 조선으로부터 배상과 공사관 경비권 등을 확보하는 선에서 타협한다.
• 청도 일본을 완전히 몰아내기보다는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는 쪽을 택한다.
• 따라서 임오군란은 청일전쟁이 아니라 <청일 간의 일시적인 타협>으로 끝난다.
그러나 경쟁 자체는 사라지지 않았다.
일본의 중요한 선택 — ‘아직은 참는다’
강의 후반부에서 함재봉이 상당히 강조하는 부분이다.
당시 일본에는 조선을 군사적으로 압박해야 한다는 강경론이 있었지만 일본 지도부는 전면전을 피한다.
함재봉은 이것을 일본이 자신의 국력을 비교적 정확하게 계산한 결과로 해석한다.
일본은
<지금 싸우면 청을 이길 수 없다>
고 판단하고 기다렸다.
그리고 그 사이
군대,
해군,
수송선,
군수산업,
재정,
교육
을 강화한다.
함재봉에게 이것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 교훈이다. 국가가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자신의 실제 역량을 계산했다는 것이다.
1873년 정한론 논쟁 때도 일본정부는 즉각적인 조선 출병을 자제했고, 1882년 임오군란 때도 청과의 전면전을 피했다.
그러나 1894년에는 상황이 달라진다.
약 20년 동안 일본은 군사·경제·행정 능력을 강화했고 마침내 청과 싸울 수 있다고 판단하게 된다.
임오군란에서 갑신정변으로
• 임오군란은 개화파에게도 커다란 충격이었다.
김옥균은 일본에 있으면서 군란 소식을 접한다. 개화파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이 추진하려던 근대화가 국내의 반발로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 동시에 청군이 조선에 들어와 대원군을 납치하고 내정에 개입하는 것을 보면서 <청의 영향력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개혁이 불가능하다>는 생각도 강해진다.
• 반대로 일본은 임오군란에서 자신들이 조선을 충분히 보호하거나 장악할 힘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따라서 양쪽 모두 임오군란에서 서로 다른 교훈을 얻는다.
<개화파>
→ 청의 영향력을 제거해야 한다.
<일본>
→ 청과 싸울 수 있을 만큼 국력을 더 키워야 한다.
이 두 흐름이 1884년 갑신정변에서 다시 만난다.
• 함재봉은 결국
임오군란(1882)
→ 갑신정변(1884)
→ 청일전쟁(1894)
을 하나의 연속선상에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평론
이번 24회는 함재봉의 강좌 가운데 특히 <국제정치적 해석>이 강한 강의다.
일반적인 설명에서는 임오군란을
<구식 군인들이 13개월 동안 봉급을 받지 못했다 → 나쁜 쌀을 받았다 → 폭동을 일으켰다>
라는 사회경제적 사건으로 설명하기 쉽다.
함재봉은 그것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한 단계 크게 본다.
<군인 처우 문제>
+
<민씨 척족정치>
+
<대원군의 복귀>
+
<개화에 대한 위정척사적 반발>
+
<청의 조선정책>
+
<일본의 조선정책>
이 동시에 작동했다는 것이다.
이 접근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청과 일본 모두 개화를 원했지만 그 이유는 달랐다>는 지적이다. 청은 조선을 자신의 영향권에 두면서 러시아와 일본을 견제하려 했고, 일본은 조선을 청의 영향권에서 떼어내 자신의 전략적 공간으로 만들려 했다.
따라서 <개화 대 쇄국>이라는 국내정치적 이분법만으로는 1880년대 조선정치를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함재봉의 해석에는 한 가지 특징적인 편향도 보인다.
그는 일본이 1873년과 1882년에 전쟁을 자제한 것을 <자국의 실력을 냉정하게 계산하고 국력을 축적한 합리적 선택>으로 상당히 높게 평가한다. 실제로 일본 지도부가 청과의 전쟁 가능성을 고려하며 군사력을 확충한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이것을 단순히 <현명한 근대국가의 전략>으로만 보면 문제가 생긴다. 일본이 축적한 국력의 목적 가운데 하나가 결국 조선에 대한 영향력 확대와 제국주의적 팽창이었기 때문이다. <전쟁을 자제했다>는 것과 <평화적이었다>는 것은 전혀 같은 말이 아니다.
오히려 이 강의에서 더 주목할 만한 것은 조선의 선택지가 얼마나 빠르게 좁아졌는가 하는 점이다.
1876년에는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었고,
1882년에는 미국과 수교했으며,
같은 해 임오군란으로 청군과 일본군이 동시에 조선에 들어왔다.
불과 6년 사이에 조선은
<외국군이 거의 없던 나라>
에서
<수도에 두 외국군이 주둔하며 경쟁하는 나라>
가 되었다.
이것이 훨씬 중요한 변화다.
그리고 여기서 지난 23회의 <조선책략>과 연결되는 역설이 나타난다.
조선책략은
<여러 나라와 관계를 맺으면 어느 한 나라가 조선을 독점하지 못한다>
는 세력균형 전략을 제시했다.
그런데 실제 결과는
<여러 열강이 서로 견제하므로 조선의 독립이 보장되는 것>
이 아니라,
<여러 열강이 조선 안으로 들어와 경쟁하는 것>
이 되어갔다.
이 점은 함재봉의 전체 개화론을 평가할 때 상당히 중요한 문제다.
또 하나 주목할 부분은 <대원군>이다. 함재봉의 설명을 따르면 대원군을 단순한 반동적 쇄국주의자로만 볼 수 없다. 임오군란에서 그는 실제 정치권력을 다시 잡으려 했으며 군제와 개화기관을 폐지했다. 따라서 그의 반개화는 사상적 입장이면서 동시에 <권력투쟁>이었다.
마찬가지로 민씨 정권의 개화 역시 순수한 근대화운동만은 아니었다. 새로운 군대와 외교정책은 민씨 세력의 권력기반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따라서 임오군란은
<근대화 세력 vs 반근대화 세력>
이라는 단순한 싸움이라기보다
<근대화의 방향을 둘러싼 국내 권력투쟁이 청·일의 제국적 경쟁과 결합한 사건>
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이번 강의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
제가 보기에는 함재봉의 이번 강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임오군란 자체보다 그 이후>다.
임오군란 이전까지 조선의 개화 문제는 주로
<조선 내부에서 개화할 것인가, 척사할 것인가>
의 문제였다.
그러나 임오군란 이후에는 문제가 달라진다.
<누구의 도움을 받아 개화할 것인가?>
라는 문제가 된다.
청을 이용할 것인가,
일본을 이용할 것인가,
미국과 서양을 끌어들일 것인가.
바로 여기에서 김옥균의 급진개화파와 민씨 정권의 온건개화파가 갈라지고, 청과 일본의 경쟁이 조선 국내정치와 결합한다.
그래서 24회를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다.
<임오군란은 구식 군인들의 봉급문제로 시작했지만, 개화에 대한 사회적 반발과 대원군·민씨의 권력투쟁을 거쳐 청과 일본이 군대를 조선에 투입하는 국제정치적 위기로 발전했고, 그 결과 조선의 개화문제는 청·일 세력경쟁의 일부가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다음 25회에서 다룰 <갑신정변>을 이해하는 결정적인 배경이다. 갑신정변은 임오군란 이후 강화된 청의 지배적 영향력을 김옥균 등이 <일본의 힘을 빌려 단번에 제거하려 한 시도>라는 측면에서 보아야 함재봉의 전체 논리가 연결된다.
===
Transcript
===
[음악] 안녕하십니까 한국인의 탄생의 함재봉
있니다 지난 시간에는 어 조선이 미국하고 어떻게 외교관계를 맺게 되고 어
본격적인 개국을 하게 되는가를 쭉 살펴봤고요 오늘은 이제 어 이모 군란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어 위정 사파가 주류를 이루던 조선에서 어 외부
세계와 너무 오랫동안 고립돼 있던 조선에서 급스러운 어 계곡이
이루어지고 미국하고 국하고 독일하고 수교가 이루어지고 어 거기에 또
일본이 앞장서는 모습을 보이고 이러면서 전통적인 친중 이정 사파의 반동이
본격적으로 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가장 컸던 단계가 이모란이고 이모군은
참 여러 가지 의미에서 어 조선의 근대화 조선의 본격적인 계곡을
지연시키는데 큰 목수 합니다 오늘은 모란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 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국인의 탄생 이제
[음악] 시작하겠습니다 이모 군란이 일어나게
되는 배경이었습니다 우선 어 고종이
1864년에 직위를 하고 적유 당시에 12살 밖에 안 됐으니까 그 아버지
흥선 대원군이 완전히 정권을 잡 1874년 10년
동안 어 대원군이 섭정을 합니다 그리고
1874년에 고정하고 민비가 이제 친정을 시작하게 내가 직접 통하겠다
그러면서 대원군을 물러나게 합니다 대원군이 권력을 잡고 있던 10년
동안은 계속해서 정책을 밀어붙입니다 미국하고
전투를 해보고 부남도 격해 보고 또 프랑스 하고도 어 격렬한 전투를 해가면서 어
병인 양여 심미 양녀를 치르면서 계속해서 쇄국을 유지했었는데
그런데 고종이 이제 친정을 시작하고 나서 74년부터 그때부터 이제
본격적으로 개국의 문제에 봉착 이제 하기 시작하면서 자 이반 타이반
1876년에 일본하고 강화도 조약을 맺으면 으로서 개국을 합니다 그 개국을
했는데도 사실은 조선 사람들 본인들이 개국의
의미를 정확히 몰랐습니다 아직은 일본하고 관계만 있었고 특히 일본이 그냥 부산포 하나 열 열어 달라는
정도밖에 아니었으니까 지난 200년 동안에도 외관이 있었던 거니까 그냥
뭐 원래 똑같은 관계인데 약간 확대됐다 뭐이 정도로 이제 생각을 했었던 거죠 그러다가 이제 수신사
왔다 갔다 하고 그러면서 결국은 미국하고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 같이 미국하고 수결을 하게 됩니다 어
영국 하고도 하고 이제 독일하고 그러면요 이것이 우리 입장에서 봐서는 지금 우리 입장에서 봐서는 야 좀
개국이 어떻게 이렇게 느리게 될 수 있을까 특히 중국은 이미 벌써 아편 전쟁 때부터 계곡을 했던 거고 일본도
1850년부터 계곡을 해서 급격하게 근대화를
과정을 겪고 있는 상황인데 그런데 여러분 한번 원군의
입장에서 또는 쇄국을 끝까지 부르짖던 의정
척사파 입장에서 한번이 상황을 거꾸로 한번 생각을 해 보세요 대원군의 입장에서는 자기가 권력에서 쫓겨난지
2년 만에 자기가 그렇게 막을 려던 그 외 놈들하고
도대체 수교하는 걸 해버리고 그 산포를 열어버리고 그리고는 또 이따가
82년 들어오면 미국하고 영국하고 독이라고 하면서 뭐 통리 기이라 걸
만들고 갑자기 별기군이라는 걸 만들어서 일본 장교를 불러와서 조선
군대를 신식 군대로 자기가 그렇게 강력한 전통국 군대 그 군대를
만들려고 애를 썼었던 거 군부를 통해서 그런 걸 만들려고 애를 썼는데 그거를 다 없애 버리고 이거 도대체
뭔지도 잘 모르겠는 번식으로 또 군대를 조직하고 이러는 모습을
보고서는 얼마나 속으로 화가 정사파의 입장에서는 지난 시간에
홍재학 상소 같은 데서도 보셨지만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을 하시는 겁니까
어떻게 이룩한 종묘 사지인 500년 종묘 사직이 우리가 전 세계에서
문명이 다 사라졌을 때도 우리만은 소중화 그 문명국 유일한 지구상의
유일한 문명국으로 이루고 있는데 서양의 문물들이 쏟아져 들어오는데 하나같이 상스럽고
하나같이 잘못된 거 같고 인간성 왜곡하는 거 같고 이런데 이제 와서 왜 이제 와서 양이 서양 오랑 캐들
이런 놈들한테 굴복을 해 가지고는 여러 제끼고 이거를 어떻게 계속해서
하고 계십니까 라면서 전화 정신 차리십시오 뭔가 크게 잘못하고
있습니다라고 이제 드디어 반격이 시작이 됩니다 그런데
그 반이 그냥 어 뭐 상소로 어 그리고 여기저기서 병 불만의 목소리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드디어 폭동으로 곤란으로 던지는 것이 모 군란 있니다
계기는 이렇습니다 대원군이 만들었던 전통 군대를 고종이 근대화를 한다 그러면서
별기군 만들기 시작하고 근대 군대를 만들면서 어차피 재정이 부족한
나라였었소 훈련하는데 부족하니까 원래 있었던 전통 군대는
그냥 완전히 무시를 해버리 재정이 부족해서 그런 측면도 있지만 다른 한편은 행정이 엉망이었습니다
그러니까는 그냥 내버려둔 셈이죠 그랬더니 군인들이 지금 월급도 못
받는 시간이 이제 점점점점 길어집니다 그런데다가 정권은 완전히 민씨이 잡고
있습니다 대원군이 쫓겨나면서 민비의 척족이 이제 들어와서 모든 거를 잡기
시작하면서 그전까지 있었던 뭐 풍양조씨 뭐 안동김씨 다 쫓아내고
여흥 민씨의 세상이 돼버려서 모든 거를 다 씨들이 하고 있었고 병부
그러니까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국방부 장관도 어 민겸호 그 민비에 어 삼춘
되는 사람들이죠이 사람들이 이제 담당을 하고 있었습니다 근데이 민겸호
어 뭐 병부 잡았던게 아니라 호조고 선해 여기가 세금 걷는 대입니다
그러니까 완전히 잡고 있었던 거죠 근데 월급을 안 주고 있었어
그러다가 1882년 7월 19일 날 드디어 13개월
만에 월급을 주겠다고 모이라 그랬습니다 다 이제 배급소 앞에 이제
모여 가지고 나눠 주는 거를 월급을 받으려고 모여들어서 드디어 줬습니다
어 그러면서 군려 중에 한 달 치안을 우선 줍니다 그래서 그것도 뭐 돈으로
주는게 아니라 쌀로 주는 거죠 그런데 그 한달 7월 13개월 기다려서
한달치를 받았는데 그거나마 어떻게 됩니까 반이 모래 나머지는 겨
이랬답니다 그러니까 그중에 어 몇 사람이 도저히
못 견디 했어서 가서 항의를 했겠죠 그러다가 이제 옥신각신 하다가 이제
싸움이 벌어져서 그 그러다 보니까 이제 결국 이제 구속이 돼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그중에 이제 주동자가 포수였던 어 김춘영 유복만 정일기 이런 사람인데
저는이 포수라는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포수가 뭐냐면이 사람들이 바로 저
신미 양여 이럴 때에 대원군이 적극 사용했던 사람들이죠 정규군의 일부분이
아니라 전국의 포수들이 이제 뭐 사냥 다니고 그런 사람도 있었을 거 아닙니까 호랑이도 사냥하고 뭐 뭐
새도 사냥하고 그런 그 포수들이 있었을 텐데 포수들은 조총이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전쟁이나면 그
포수들을 이제 고용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군의 일부가 됐던 거고 그 그
사람들 포괄하는 군이 그게 대원군이 만든 전통 군죠 그니까이 사람들이 이제 대원군이 만들어 줘서 거기 가서
열심히 자기는 싸웠고 그런데 월급은 안 주고 그러니까 이제 거기서 앞장서서 싸우다가 이제 잡혀 들어간
겁니다 그러고 나서는 포만 한게 아니라이 사람들 이제 처형하라 그러죠 그랬더니 잡혀간 사람들의 아버지 뭐
동생 이런 사람들이 이거 안 되겠다 그러고는 습격을 해서 감옥을 습격을
해 갖고 다 자기 아들하고 자기 형들을 진짜 다 풀어냅니다 그러면서
본격적으로 어 폭동이 시작됐는데 그러고 나서 이제 민경호 집으로
쳐들어가서 다 때려 보시고 민 경호를 죽이고 그리고는 대원군 테 갑니다 그
전통 군대를 제대로 만들어줬던 대원군 테 운영으로 이제 몰려갑니다 그래서 저하 이렇게 됐습니다 그랬더니
대원군이 거기에 탁 나섭니다 그러니까 74년에 권좌에서 물 권력에서 쫓겨난
다음에 딱 8년 만입니다 자기가 반대하던 대국으로 계속 치닫고 있었는데 어 느닷없이 자기가 키웠던
전통 군대가 폭동을 일으켜서 자기랑 숙적인 민시 처단을 하고는 자기한테
나타나서 우리 좀 이끌어 주십시오 이러는 겁니다
그랬더니 대원군이 이렇게 명령을 합니다 궁궐을 쳐들어가고 민씨를 다
죽여버리고 그리고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고 그래서이 사람들이 무기고를
습격해서 무기를 탈취한 다음에 옥에 갇혀 있던 사람 물론 다 풀어주고요
그리고 영남 만인소 뭐 홍작 상소 해 갖고 계속해서 갇혀 있었던 사람이 800 80 몇 명 그러니까 거의
900명 가까웠던 의정석
사파들은 폭동이 그렇지만 괜히 옆에서 다른 거의 불만을 갖고 있었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합류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때에 특히
태원하이테크 하나부사 일본 직원들은 피할 데가 없으니까
얼른 그래도 시내로 들어와서 조선 정부에 오면 되겠다 싶어 갖고 오히려
그래서 한양 도성으로 와서 그러면 궁 1에도 좀 가갖고
고정한라도 좀 의탁을 하려고 도성으로 들어 올라가는데 도성 문을 닫아버리고
들어오지를 못 들어오게 합니다 도성문 앞에서 완전히 둘러쌓여서 격전을
벌리면서 외교관도 죽고 조선 군대를 별기군 훈련하러 왔던 떤 교관도 죽고
그러면서 이제 간신이이 사람들을 탈출해서 그럼 이제 제물포로 도망갈 수밖에 없죠 어떻게해서 거기 가서
배를 타고도 떠나야 되니까 근데 여러분 이때 참 그 이목 글란 자체가
굉장히 수구 반동적인 사건이었지만 조선 사람들 대부분이 아직도이
개화라는 거 근대화라는 거에 대해서 무지했고 반대 있는가를 보여주는 가장
극명했던 것이 뭐냐면 이때에 한양의 처음으로 종두 그라
것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뭐냐면 지석영 선생이 신사유람단 때에
일본으로 건나 가서 일본에 가서 종두법을 배웁니다 그니까 천연두는게 조선에 항상 창고를 하고 있고 유명한
재상들이 선비들의이 초상화를 보면 전부 다 소위 말해서이 공보가 있거든요 자 그래서 이제 그거를
막으려고 종두법을 배워 갖고 와서 지서경 선생은 부산에 내리자마자 자기
먼 친척한테 가서 먼저 놔주고 또 자기 고향에 가서 자기 조카 그러니까 자기 집안의
종손이 우두 접종을 시킵니다 그게 진짜로 효과가 있다는 걸 알고서 자기
가족한테 먼저 실험을 해 갖고는 그다음에 서울에 와서 이거 해야 됩니다 그래 갖고는 그게 이제
종료소리 하기 시작해서 우두 접종을 하기 시작했던 거죠 그런데 이모 곤란이 일어나니까
뭐 물론 뭐 대궐도야지
이 종두 왜 그런지 아세요 종두를 누가 습격했고 무당들이 습격을 합니다
천연두가 뭡니까 마마 아닙니까 마마 마마는 누가 쫓으니 무당들이 자기네가 구수해서이
마마를 쫓는게 자기네 역할이었습니다 우두를 접종을 한다 그래서 정두
소라는 걸 만들어 갖고 자기네 일감을 자기 먹이를 쫓아 뺏어간 거죠 그래서
그렇게 대거 무당들이 들고 일어나 갖고 우두 정서들을 다 때려
붙었답니다 이게 사실 이란의 성격을 정확하게 규정을 해 주는 거고 그
당시에 바깥 세상에 대한 이해 근대화에 대한 이해가이 정도였다는 걸
너무나 잘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일본 하나부사
공사하고 일본 직원들이 도성에 못 들어가고 결국은 제물포로 향합니다
인천에 도착할 때 좀 되니까 인천에도 벌써 곤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들면서
인천에 있었던 조선 군인들이 일본 사람들을 죽이겠다고 해
갖고 거기에서 또 일본 군인들을 죽이고 공사관 직원을 포함을 해서
일본인들 또 여섯 명을 죽입니다 공사관 불 타고 도성에 들어가다가 못
들어가고 공격 당하고 재물까지 왔는데도 또 공격을 당해서 이제 또 죽고 이제 그렇게 되는 거죠 그래서
간신이 배에 올라가지고 월미도로 이제 노를 급격하게 져서 마구 가고 있는데
그때에 때에 영국 군함 플라잉 피라는 군함이 지나가다가이 사람들을 구출해
줍니다 그래서 그 라잉 피시를 타고서 하나 부사가 나가사키에 입항을 하고
그 나가사키에 하나 부사가 입항할 때 거기에 누가 있었습니까 그때 김옥균이 거기 있었죠 그죠
김옥균이 일본에 건너가서 여러 가지 사람들 만나보고 협상하고 그래서 아 이제 드디어 우리도 제대로 된 개혁을
하겠다 그러면서 일본을 처음으로 방문을 하고 다시 귀국을 하려고 나가서 학기에서 배를 기다리고 있는데
모란이 났다는 소식을 들었다는게 바로 이겁니다 그때 이제 하나 부사가
와서 큰일났습니다 자 그러니까 이거를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때부터 이제
일본 청 이제 움직이기 시작을 합니다 조선에서는 민들이 습격을 받기
시작하고 이제 대궐에 어 폭도들이 대원군을고 들어가니까 우선 민비가
급격하게 합니다 그래서 자기 고향으로 이제 피신을 가고 그리고 이때
폭도들이 대원군의 형 이채응 영의정이 미국하고 우리가 척질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이제 이러면서 그 논의를 다해서 적극적으로 대국에 앞장섰던
이체 형을 죽여버립니다 대원군의 형을 죽여버립니다 그러고 나서는 대원군이
경복궁의 입공 하니까 어떻 하겠습니까 8년 만에 내가 이제부터 한다 그래서
7월 25일 고종은 전권을 대원군 테 위임을 한다라는 포고령을 내립니다
그리고 고종의 친형 그죠 어 대원군의 큰아들 이재면 테 훈련대장 호조판서
선혜청 당상 그러니까 민겸호 하고 있던 거 민 시들이 갖고 있었던 군대
세금 걷는데 이거를 다 이제는 어 다시 대원군이 장악을 해버립니다
그리고는 통기 문을 폐지를 해버립니다 개국을 위해서 만들었던 조선 최초의
근대 정부 조직을 폐쇄를 해 버리고 군부를 다시 부활을 시킵니다 삼군부
아는 것이 아까이 폭동을 일으킨 사람들이죠 월급을 별기군 테 뺏기면서 못 받아서
불만을 터트리면서이 모란을 일으킨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을 다시 제대로
이제 조직을 해서 군부나 다시 걸어서 군부가 우리의 국방을 맞는다 이렇게
이제 하는 겁니다 그리고 별기군 폐쇄해 버리고 오영 원래 오영을 다시
설립을 합니다 이러면서 그래서 이제 하나 부사는 일본으로 갑니다 그럼
일본에서 곧바로 이제 정부에서 최고 청에서 회의를 열어서 이제 어떡할 거냐 근데 이때 참이 사람들이 대단한
결정을 됩니다 하나부사 보고 당장 돌아가라 군대를 데리고 가라 그렇지만
지금 공격하러 가는 것이 아니다 가서 협상을 해라 그냥 배상만 받고 모든
것을 원위치 시키라는 것만 하지 절대 다른 거는 하지 말라 그래서 일부러
군함도 안 보냅니다 소수 병력과 하나 부사를 해가지고 수송선에 일부러 태워
가지고 도로 보냅니다 그래서 하나 부산은 가서 이제 정부 그니까 뭐
대원군 고종 이런 사람들 이제 만나보게 됩니다 일본이 어쨌든
소수지만 하나 를 호하고 군을 해서 군 수송선을 해서 이제 조선에 보냅니다 그러면 청이 이제
어떡하겠습니까 청도 첫 번째 석방이 이런 나라에서 이런 이런 벌어졌으니
빨리 우리가 가서 정리를 해야겠다 그랬던 거고 특히 일본도 군대를 보낸다 그러니까 우리가 시급히 가야
된다 그럽니다 여러분 여기에서부터 이게 계속해서
갑신정변 청일전쟁으로 이어지는 조선을 중간에 둔 중국과 일본간의 계속이
각축이 이게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어 지점입니다 그래서 이때에
청나라에서 급격하게 급히 회의를 열어 가지고 이제 곧바로 광서제 테 가서
어 조성의 정부를 쳐서 빨리 우리 어 군대를 파견해야 됩니다 이럽니다 이때
마침 이홍장은 모친상을 당해서 3년상을 치르러 고향인 안위성가
있어서 이홍장은 현장에는 없었습니다만 아무튼 그래서 급격하게 청 정부도
이제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그럼 우리도 군대를 보내야겠다 이제 결정을 합니다
장수성이라는 사람이 대행을 하면서 이제 급격하게 군대를 움직이기 시작해서 정여창 제독 테 빨리 이제
군대를 싣고서 조선으로 파병을 하라 이제 명령을 내리고 있고 그런데 그때에 텐진에 누가
있었냐면 김윤식이 있었습니다 근데 여러분 김윤식이 왜 여기 있었냐면
바로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을 협상하러 갔었던 거죠 아시다시피 조미 수호통상조약 협상은
슈펠트 하고 이홍장이 다 해버렸어요 조선 조정 보고 빨리 특명 정권 대사를 보내라 보내라 보내는데 안
오다가 협상을 끝낸 다음에야 김윤식이 도착을 했었습니다 근데 그 김윤식이
가지 않고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느라고 이제 거기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청 조성은 당장
김윤식을 불러 가고 야 지금 이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 같냐 너의 나라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 그런데
그러니까 김윤식이 이거는 분명히 대원군이 다시 을 하려 그러는 것
같다 그러면서 빨리 군대를 파견해야 됩니다 그러면서 이제 그 협상 때문에
왔 그 왔었던 어윤중 뭐 이런 사람들이 다 그니까 조선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니까 어윤중
입장에서나 김윤식의 입장에서나 딱 아는 거죠 아 곤란이 일어나서 대원군이 다시 권력을 잡았다는 거는
그동안에 자기네가 협상했던 조미 수호 통상 약이고 모구가 다 물거품이 되는
일이구나 걸 아는 거죠 여러분이 이이 지금 그때에 일어난 상황을 청의
입장에서나 일본의 입장에서 심지어는 조선의 조미 수호 통상 조약 같은
거를 주도를 했고 조선 책략을 이해를 해서 그걸 이행을 해 보자고 했던 그
사람들의 입장에 봐서는 대원군이 삼군부 전통 군대의 군란 내
힘을 얻고서 정권을 장악했다는 거는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이 사람들이 김윤식고 어중이 정여창 하고
청병고 같은 배를 타고 조선으로 들어옵니다 그때
이제이 청나라 내부에서는 파병을 해야 되는 이유로 광서제 상소를
올리면서 파병 칙령을 내려달라 그러면서 우리의 속방 대해서 일본이 점차 잠식해 들어가는 거 같다 이거
막을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다 더군다나 일본도 군대를 보내니까 우리가 더 많은 군대를 보내야 된다
그래서 급하게나마 1천 정도의 병력을 보내자 그럼 일본이 보낸 병력에서 엄청나게 이제 많은 병력이 그래서 자
이제 조선으로 군대를 어 파견합니다 그러면서 이제
어 청나라에 광서제는 어 지금 일본하고 이런 일이 벌어지지만 중국
영토에 있는 일본 사람들은 절대 해하면 안 된다 그러면서 결국은 그
파병을 윤허를 합니다 그리고 이홍장 보고는 3년 상이고 뭐 빨리 와라
빨리 복귀를 하라고 이제 얘기를 하고서 군대를 파병을 합니다 그래서 8월 9일 날 이제 마건충고 정여창이
이끄는 군대를 어 어연 중하고 이제 같이 도착을 합니다 근데 이제 거기에 이미 일본 군함도 와 있었던 거죠
그러니까 굉장히 빠르게 들 움직이죠 우선 무슨 사건이 터지면 군 군부
하나씩 두 개씩 꼭 제물포에 보내 놓습니다 그러면서 내부에서 이제
들어가서 협상을 하도록 하는 거죠 청일 전쟁이 나든 러일 전쟁이 나든 뭐가 나든 항상 여러 열강들의
군함들이 먼저 와 있고 그걸 바탕으로 이제 협상을 하고 그렇게 되는 거죠 자 그래서 어윤 중을 먼저 정여창이
먼저 보내 가지고 너 아는 사람들한테 가서 정확하게 사태를 파악하고 와라 그랬더니 가서 이제 어윤 중이
파악하고 와서 분명히 이거는 대원군이 주도하는 것이고 대원군에 이걸 계속
맡겨선 안 된다 대원군을 제거해야 된다 이러한 의견이 이제 청나라 하고 조선이 오히려
공유를 하게 되는 겁니다 어쨌든 청의 입장에서는 이홍장의 입장에서는 조선을
개국을 시키는 방법이 여러 나라랑 수교를 하도록 하는 것이 자국 이익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을 했던 것이죠 자기 혼자 힘으로 조선이라는 는 속방
못 지키겠습니다 어느 한 열강의 수중에 떨어지기보다는 여러 나라들고
동시에 수결을함으로써 서로 견제를 하도록 해서 누구도 조선을 독차지
못하게 하겠다라는 소위 말해서 이의 전략이 되겠죠 어 그렇게 이제 그
전략을 짜고 있었던 거기 때문에 대원군이 청의 입장에서도 제거해야 될 세상으로 떠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청나라 사람도 거기 와 있는 천에 와 있는 일본 어
사람들하고도 만나 갖고 어 일본의 곤도마리이 사람들 이모글한테 도망을 갔다가 다시 하나무 사고 복귀한
사람입니다 복귀한 사람이라서 이제 정확하게 내용을 알고 있는 거죠 그러면서 맞다 대원군이 권력을 잡은
거고 이제 다시 수국으로 들어갈 것 같다 이제 이렇게 얘기를 해 준 겁니다 그때에 뭐라 그러냐면 어
잘못된 정보였어요 왜냐면 그 당시에 다 그렇게 생각을 했었거든 고종도 그렇게
생각을 했었고 대원군 그렇게 다 믿었었던 거고 이모란 초기에는 다 민중도 살해됐다고 그렇게들 여기고
있었고 그래서 곤도 마스키 청나라 사람들한테도 그런 정보를 이제 줬던 겁니다 그리고 이제
청에서는 천명 군대만 아니라 회군 군이라는게 기억하시죠 그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는데 있었 해서 국번이 일으킨 것이 군이고 이장을 시켜서
희성 그 군대를 일으키게 했었던 것이 그 사람게 회군 있데 그게 이제 이홍장의 세력 기반이 되는 거죠
그래서 그 회군을 움직여서 그 회군의 육개 대대를 덮어 거죠 여러분이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려고 상군고 회군이 일어났는데 산군은 중국은
국번은 정말로 충신이었던
그 회군이 것이 지금 이제 이모글 란에 개입을 할 수가 있게 되는 그
군대인 거고 그 회군의 장수로 이제 조금 있으면 오게 되는 것이 원세계
아는 젊은 청년이고 그리고 나중에이 원세계 점점점 커지면서 그 군 그
군을 장악하게 되고 그때쯤 되면 그 회군을 북양 군이라고 부르게 되는
거죠이 권력이 다 이홍장고 원 세계가 이제 갖게 되는 그 권력이고 중국을
한동안 좌주 가게 되는 아무튼 이때 바로 그 회군이 이제 실력발휘를 하는
거죠 태평천국의 나을 진압한 이후 처음으로 거의 처음으로 회군이 조선에
이제 진주를 하게 되는
겁니다 김윤식은 정현한테
이런 상황에서 빨리 천군이 가서대
포위하고 대원군을 잡아와야 된다 그럽니다 그거를 김윤식이 먼저 제안을
합니다 그걸 하기 위해서는 조대비 아직도 조대비가 살아 있습니다 고종을
왕위 앉힌 그죠 그 조대비 조대비가 어
그한테 가서 칙령을 받아 갖고 대원군을 체포해서 사에
하자고 그럽니다 천군이 잡고 대비의 조칙을
받아 가지고 대원군을 잡아서 처형을 시켜 버리자 이렇게 합니다 이홍장의 마구
마구 마구라 것이 중국의 군벌들이 생기게 되는 핵심적인 기구인데 뭐냐면
그냥 마구들 나라의 관리가 아니라 자기
사병이 있고 북양군이 되는 그 막강한 사병이 있고 다 유학을 다녀고 이런
사람들을 나라에 가서 일하지 않고이 개인들 밑에 가서 일합니다 일하게
되는 거죠 마건 충이 그렇습니다 마건 충이 프랑스에 유학을 가서 중국 사람
최초로 거기에 시앙 스포하는 최고 학부에서 법을 전공하고 왔는데 나라에
관리가 돼 봐야 아무 할 일도 없고 그러니까 증국번이나 이홍장 같은 정말
실권을 잡고 있는 사람 밑에 들어가서 그 사람의 월급을 받으면서 그 사람의 개인 망료 되는 거죠 이제 이런 이런
사람들도 전부 다 대원군은 무조건 제거해야 된다 어떻게 체포를 해 가드 가더라도 제거를 해야 된다라고 다
조언을 하기 시작을 합니다 빨리 우리가 그 손을 쓰지 않으면은 조선도
또 일본한테 넘어간다 우리가 류규 규라게 웃기 나와 그죠 규라 왕국이
있었는데 원래는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스마의 조공을 치긴 했었지만 양쪽으로
조공을 바치는 거였는데 그게 이제 일본이 대만 정벌 전에 먼저
쳐들어가서 그 규를 완전히 자기 영토로 어 병합을 시켜 버렸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그런 일이 조선에도 벌어질테니까 절대 못 하게 빨리 들어가서 대원군을 제거하고 우리가
상황을 장악해야 됩니다라고 전부 다 그 제한들을 합니다 그래서 8월
13일 하나 부산은 일본 군남 대척 수송선 세척 육군 대대 하나를
대동하고 이제 도착을 합니다 그러니까 청군 도착을 하고 일본 군대도 이제
같이 도착을 합니다 그리고 그 8월 16일 날 군대를 이끌고 한양에
입성을 합니다 그리고 8월 20일 날 고정을 아을 어 하고 대원고 면담을
합니다 그런데 대원군은 이때 하나보살 보고 오랜만에 정권 잡았는데 나 가만
놔두라고 좀 그러면서 내가 정권을 잡았지만 절대 세국 정책으로 돌아가진
않겠다라고 이제 그러면서 이제 거꾸로 하나 부사를 설득을 하고 이제 그럽니다 자 그리고 이제 하나부사 온
이유가 그러면 우리 공사 문제 죽은 일본 사람들을 어떻게 배상을 해 줄 거냐
이제 이런 여러 가지 문제들을 협상을 해야 되고 협의를 해야 된다 그래서 그래서 왔다 그랬더니 이제 아 뭐 그
그러겠다고 그랬어요 근데 그러고 나서는 협상을 하나부 사고 협상을 담당해야 되는 홍순목 영의정 느닷없이
협상을 하겠다 그래 놓고 나서는 어떡합니까 민비가 죽었다 돌아갔다 그래서 장애를
치르러 가야 된다 그러고 한양을 떠나 버립니다 홍순목이 누굽니까
홍의 아버지 나중에 갑신정변이 났을 때에
홍식이 죽고 나니까 역적이 돼버리니까 홍영식 아들 자기 손자를 죽이고
자기도 독약을 먹고 죽는 바로 그 홍순목 그리고 그 집이 알렌 넘어가서
알렌이 광원을 세우게 되는 그 집이 그게 바로이 홍순목 홍영식 집이라고
말씀을 드린 적이 있었는데 바로 그 홍순이 영정이 그러면 이제 하나사고 협상을 해야
되는데 느닷없이 떠나니까 그리고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이 상이니까 장일 치고
언제까지 돌아와 갖고 협상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가보니까 이제 하나 부사는이 전혀 협상할 생각이 없구나
어 그러면서 새로운 대응 책을 이제 마련하려고 다시 인천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이제 어이 상황에서 원충이 누구를 냐면
저의 신주를 만납니다 회가 누구냐 면은 나중에 갑신정변이 일어날 때에
조선 공사로 와 있는 일본 그 외교관이이 사람을 만나
가지고 얘기를 합니다 서로가 이거이이 문제를 어떻게 할 거냐 그니까 이게
지금 조선을 놓고서 둘이서 굉장히 각축을 버리고 있지 않습니까 실력
대결에 들어갈 것 같은데요 그런데 여러분이 당시에 중국이나 일본
외교관들을 보면요 그렇게 단순하지가 조회가 원충 보고 뭐라
그러냐면 우리가 이번에 굉장히 피해를 많이 봤다 그리고 일본 국내 여론은
엄청나게
여강이씨 충분히 이해를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떤 무리한 요구를
조선한자 않고 어떻게 서지 좋게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중국하고 같이
힘을 합쳐서이 문제를 좋게 해결하고자 한다라고 먼저 얘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조선 문제를 놓고 사실 중국의 입장에서나 일본의 입장에서 서로 충돌할 일이 없습니다 아무리 조선을
자기 영향권 하에 각자가 두겠다고 주고 싶다하고 그게 절대적으로 국가전략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선 때문에 서로가 전쟁까지 갈 수 있는 갈 필요는 전혀 없다고
생각을 하는 거죠 어떻게든지 다른 방법으로 외교를 통해서 협상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이
사람들은 다 생각을 합니다 그니까 나중에 청일 전쟁 때 가서는 결국은
결국은 이해 관계라는 것이 번의 입장에선 전쟁을 치르는 것이 오히려
비록 여러 가지 피해를 입고 손해보는 측면도 있겠지만 그게 궁극적으로
국익에 도움이 된다 그랬을 때는 전쟁을 하지만은 그전까지는 이모글
란에서 터 시작해서 갑옥 갑신정변을 해 갖고 계속해서 서로가 충돌할 거
같고 충돌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도달 때마다 외교관들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
끝이자 더 이상 문제를 크게 확산하지 말 넘어가겠다 배상금 조금내는 걸로
하고 그냥 넘어가자 넘어가자 상황을 계속해서 이대로 유지를 해 나가자
해결을 하자 그렇게 얘기를 계속해서 합니다 이게 그 첫 번째 조선 문제로 본격적으로 충돌하게 되는 첫
번째이면서도 역시 일본에서 좋게 넘어가자 그러면서 협상을 제안을
합니다 그러니까 이제 마건 충은 또 다져보고 좋은 생각이다 지금 조선이
많이 어려우니까 너무 과도한 요구하지 말고 좀 관대하게 대하면 넘어갈 수 있겠다 그러면서 벌써 일본하고 청이
합의에 도달을 합니다 8월 20일 정 창과 장경이 천군 2천명을 더 추가로
데리고 이제 조선에 도착을 합니다 인천에는 이미 재물 포에는 일본
함대가 다을 내리고 있으니까 청 함대는 그걸 피해서 남양만으로 갑니다
그래서 남만의 정박을 합니다 이때 군하고 김윤식 먼저 청군이 왔을 때는
윤중이 같이 왔었고 이번에는 식도 이제 같이 귀국을 합니다 그리고 월
11일 날 마건충이 대원군으로부터 긴급 전가를 어 받 받습니다 일본이
말하자면 군대를 입고 가서 최후통첩 같은 거 했다 그러니까 사실 일본도 협상을 하자 그랬었던 건데 그거를
이제 대원군은 뭐라 하냐면 이게이 일본이 와 갖고 막 여러 가지 요구를 하는데 당신들이 좀 빨리 와서
도와달라 그럽니다 역시 또 청에 의탁을 하는 거죠 마원 충이 좀 와
갖고 나를 도와달라 일본을 상대하는데 있어 나를 도와달라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어 마원이 급히 이제
남양만 서울로 갑니다 요때가 바로 하나 부사가 이제 조선 조정이 협상할
의지가 없다 그러면서 이제 화를 내면서 제물포로 돌아왔을 때 바로 그때 이제 마건충이 한양에 가서
대원군과 만납니다 대원군을 만나고 8월 24일 날 다시 제물포로 돌아옵니다 제물포에 돌아와서
하나부사 일본 영사를 만납니다 일본 영사를 만나서 자기가 가서 대원
군하고 면담도 해보고 그랬는데 대원군이 정권을 잡고 있는 하는 이게
상황이 진정이 될 수가 없다 그러니까 청은 대원군을 체포해서 압송해 가기로
했다라는 것을 하나부사 먼저 통보를 합니다 그리고 8월 25일 날 마건충
오장경 정여창이 군대를 이끌고 그동안에 남양만 있던 군대가 아예
한양으로 입성을 합니다 그리고 26일 날이 사람들이 대원군을
어 운현궁 사조로 예방을 합니다 예방을 하니까 항상 그 그 당시
풍습이 누가 한번 예방을 하면 꼭 답방을 합니다 그래서 그날 오후에는 대원군이 마건충 답방을 갑니다
대원군이 답방을 하니까 마건충고 이제 앉아서 또 얘기를 하죠 얘기를 한다는게 이제 필입니다 그때는 서로가
어 한문에 능통하게 이제 필담을 하는 거죠 필담을 하는데
갑자기 하다 말고 갑자기 어 원충이 당신은 청의 황제가 책봉한 왕을지
멋대로 가서 겁박을 하고 왕위를 찬탈 하였다
그러니까 황제의 칙령을 어긴거다 그래서 황제 앞에 끌고 가겠다 라면서
체포를 합니다 그리고는 오밤중에 밤이 되니까 대원군을 감마에 태워 가지고
남양에 있 정박했던 천군 군함에 태우고 바로 다음날 텐진으로 합성을
해 버립니다 자 그러니까 여러분 왜 청이 대원군을 압송해
갔는가이 당시에 각자의 국가 전략과 국익을 어떻게
따졌지만 친하고 했던 충성을 하고 있었던 대원군이 다시 권력을 잡으면
아 뭐 청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일본하고 친해지는 거보다는 낫다고 생각했 수도 있겠지만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청의 입장에서는 지금 청의 국익은 오히려 조선이 열 여는
데에서 도모할 수 있다고 생각을 했던 거죠 그러니까는 그것에
역행하는 세국 정책의 상징이었던 대원군이 들어오는 거는 본만
싫어하는게 아니라 청의 입장에서도 싫어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다고 그 대원군을 일본의 실력 는 대원군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청은 충분한 실력이 있었습니다 이때만 하더라도 여러분
국력을 비교해 보십시오 일본은 물론 군남 대척하는
몇 개 대대만 옵니다 중국은 그냥 몇 천 병력을 그냥 보낼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일본이 근대화를 하고 있다 그러지만 역시 어 중국의 힘은
막강했습니다 일본 보고도 훈계를 하면서 아유 너무 조선 막대하지 말라고 우리가 그 대신 대원군 그냥
압송해 가겠다고 그렇게 타협을 하는 겁니다 모든 사람들이 대원군은
쇄국정책의 상징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지금 쇄국 정책이라는
것은 청이 그렇게 조선을 설득해서 채택하려 되는 그 조선 책략을 완전히
망치는 일입니다 하여장 통해서 황주를 통해서 김웅집 며칠간 설득을 하고
책을 만들어서 주구 조선 책략을 해서 주고 영남 만인 소가 나오고 홍작 상소가 나오고 난리 법석이 치
일어나는데도 신사유람단 파견을 시키고 영선사 보내게 하고 그러면서 온갖
변화가 일어나면서 드디어 미국하고 수결을 하고 이제 이러는 와중에 대원군이 복귀를 하는
거죠 그러면 이거는 중국의 입장에서도 용납할 수가
없는 그런 상황이 되는 겁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요 이렇습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호글란 때도 그렇고 나중에 2년 후에라 하는 갑신정변 때도 그
일본이 굉장히 선선히 물러납니다 82년이나 84년이나 우선 물러나는
기본적인 이유는 국력이 군사력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갑신 정변지 이모글
란거 갑신정변을 겪은 다음에 일본이 84년부터 94년 까지 그 10년
동안 정치 경제 사회 모든 거를 완전히 바꿉니다 그리고 그때에 군대를
양성하는데 그때의 군대의 양성의 핵심은 뭐냐면 야마가 따리 도모가 딱
뭐라 그러냐면 우리가 이모 군란 하고 갑신정변 때에 우리가 실력 행사를 할
수 없었던 이유가 뭐냐 우리는 수송도 없었다 군대를 대규모 군대를 보내서
하고 야 될데 그거하고을 수 있는 설 수 있는 수조차도 없다 해군이 없다
우리가 갖고 있는 군대는 기껏해 스마 반란 사무라이 반란을 진압할 정도의
육군 조금밖에 없는데 우리는 바다에 둘러싸이는 나라인데 우리는 해군이 있어야 남이 쳐들어오는 것도 맞고
우리가 실력 발휘를 군사력을 전개할 수 있다 그런 얘기를 하면서 급격하게 이제
해군을 시하고 수송선들을 대그 이제 건조하기 시작하고 이제 그런 일이
벌어지는데 그 전이죠 그러니까 지금 일본의 입장에서는 대내적으로 뭔
변화가 일어나고 있지만은 어떤 의미에서도 중국하고 싸울 이유가 안
됩니다 그 1873년에 정론이 일어났을 때에 사이고다카모리 자기가 건너가서 조선하
협상하다 죽으면 쳐 들어오라 그랬더니 오쿠모 도시 미치가 장문에 글을 쓰면서 절대로 정한 불가한 이유
우리가 지금 어떻게 중국하고 전쟁을 하냐 그런 실력 전혀 안 된다 그리고
지금 가면은이 경제라는 걸 키운다는게 얼마나 민감한 그건데이 전쟁하는데
모든 물자 쓰고 돈 쓰고 국력 낭비하고 나면 우리 다시 못 일어난다 이러는 겁니다 그게 불과 10년
전인데 84년 여전히 마찬가지죠 일본의 입장에서 안 됩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현실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래 기본적인 보상금만 받고 우리 그만둔다
그렇게 82년에 물러나는 거죠 그리고이 물러난 다음에 어떻게 됩니까
박영호가 그죠 김옥균고 뭐를 합니까 이때 바로 하나부사고 결국은 협상을
해서 뭡니까 그래 사죄를 하겠다 이모 군란 때 죽은 일본 사람들에 대해서
사죄를 하고 공관도 불타고 그랬으니까 그거에 대해서 보상금도 배상금도
내겠다 그래서 그거를 사제 사절단을 보냈는데 그 그 배를 타고 가면서
거기서 박영하 기복이 태극기를 만들고 그래 갖고 일본에 도착을 해서 결국은
어떡합니까 일본에서 정부가 주선을 해서 보상금
배상금을 줘야 되는 그 돈이 조선이 없지 않습니까 그 돈을 일본 은행이 빌려
주는 거고 그리고 배상금도 왕창 깎아서 그래서 그거를 그냥 갚 그 돈으로 갚아 버리게 하는 거죠 이렇게
하면서 번은 어떻게 해서든지 조선이 자기네를 적대시 하는 거보다는 좀
말을 잘 들어서 하나는 좀 자강 운동을 벌려서 개화를 좀 해라 계곡을
해라 우리같이 좀 해라 그래야지 외세가 딴 열강들이 들어올 때에
조선이 먹히지 않지 않느냐 우리는 너를 너희를 못 지키고 아무리 자기네 국익이 조선에 있다 하지만은 그걸
지킬 힘이 없으니까 조선 보고 자꾸 자하라 얘기만 하고 미국하고 수하라는
얘기만 이제 하고 있었던 그런 맥락입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1884년에 갑신 장변이 나지
않습니까 그러면요 갑신 변에서 또 한번 부딪칠 뻔합니다 똑같은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그때에도 일본이 다 물러 서죠 일본이
딱 물러서면서 텐진 협약이라는 거를 이홍장 하고 이도 히로부미가
1885년에 맺으면서 뭐라 그럽니까 그때에 맺으면서 조선에 전쟁이나서
무슨 출병을 게 될 경우에는 서로 통보를 한다 조선의 군대는 일본 군인도 안 되고 천군 훈련 못시킨다
이제 이런 이런 약속을 서로가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고는 일본은 그때부터는 외교 문제는
다 끊는다 우리는 거기에 신경 쓸 겨울이 없다 지금부터는 대내 문제에 모든 신경을 써서 아까
말씀드린 대로 경제 교육 군대 경찰
헌법 이거를 만들어 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1890년대에 들면 91년이 되면
메이지 헌법이 나와서 의회가 생겨서 의회 정치가 이루어지기 시작을 하고 독일 사람들을 고문들을 빌려서 배워와
갖고 완전히워 게임을 다 해보기 시작하고 수송선들을 다 짓고 이런
거를 준비를 하면서 이제 청일 전쟁으로 그 치닫게 되는 거죠 반면에
이모 군란 갑신정변을 통해서 조선을 우리가 뺏기면 안 된다 남한테
넘겨서 안 된다라고 하면서도 이게 당장 어느 나라에 넘어가지 않는 한 그냥 청이 원래
속방 데리고 있듯이 그냥 그 정도로 가고 있는 한은 자기네가 개입을 하지
않겠다 그서려 끊습니다 그러니까 갑신정변이 끝나고 나서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이분들 간신히 탈출을 해서 돌아갔을 때에 그때에 이장하고
이또 보미가 텐지님 협약을 맺으면서 그래 우리 서로 조선에서 일본은 특히
손 뛰겠다 그러면서 일본에 와온 망명 온 김옥균 박영서 재표를 완전히
무시를 합니다 도와주질 않습니다 그러니까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일본이 우리를 안 도와주는구나 그러면서 미국으로 건너가 버리고
김옥만 일본에 남으면서 번 면서 혹독한 귀양 생활을 외로운 섬에
귀향도 보내주고 그러면서 그런 생활을 할 수밖에 없고 그거를 못 이겨서
결국은 중국으로 건너가서 다른 기회를 모색해 볼까 하다가 암살을 당하고
그런 모든 것이 일본의 그 여론을 경황을 시키고
그리고 동학 난이 일어나니까 천군이 또 개입을 하니까 아 우리 개입 안
하기로 했었는데 너희가 군대 를 보내 그래 그럼 이번에는 우리 가만히 안 있어 우리 준비 다 됐어 그러면서
대군을 보냅니다 그러면서 청일 전쟁이 일어나게 되는 거고 그 사이에 이제
김규은 버림을 받고 있다가 결국은 암살까지 되는 어 그런 역사가 전개가
됩니다네 오늘은 어 이모 군란 대해서 살펴봤는데요 중요한
것은 아 일본하고 중국이 이때 그냥
맹목적으로 조선을 차지하겠다 점령하겠다는 아닙니다 자기네 국 나라의 실력을 정확하게 알고 군사력을
정확하게 알고 국제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확하게 알아서 지금 우리가 그럼 국내의 경제를 일으키고
나라를 일으키려 그러면은 외교에서는 어떠한 공간을 확보를 해야 되고 어떤 숨통이 트여야 되고 이런 거를
명확하게 정확하게 계산들을 해냅니다 청은 청대로 하는 거고 일본 일본대로
하는 거고 그러니까는 이무 곤란이 일어나는데도 청은 대원 군을 성을
해가고 1번은 조선에서 입은 피해에 대해서 얘기를 하지 않고 조선이
오히려 계속해서 개화 개국 개방 쪽으로 계속 갈 수 있도록 그문을 안
닿도록 유도하는 방향으로 갑니다 이것이 1880년대
초반에 중반에 청과 일본의 대조선 정책이었고 그 정책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거는 1894년 청일 전쟁 된데 그때는 1882년이나 84년 이모란 갑신정변
때 국제정세가 각국의 국력이 판이하게 달라진 후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어 갑신정변 그리고 특히 그 이후에 일본에 가서 김옥균이 겪게
되는 고초 그리고 그 김옥균의 어 그 일본에서의
삶의 삶이 결 은 상해로 가서 홍종한 암살되는 걸로 이제 결이 되는데요
그것이 청일전쟁의 발발에 어떤 역할을 하게 되는가 어 그 부분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음악] 하겠습니다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통해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한국인의 탄생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시청해 주 주셔서 감사합니다 [음악]
C [음악]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