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운동가 김낙중(1931~2020) 선생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그를 둘러싼 역사적·현실적 논쟁을 다룬 김낙중 인물론입니다.
작성하신 저서들과 회고록, 딸 김선주 씨의 수기 <탐루>, 그리고 최근 유동열 원장의 기사와 김상준 교수의 칼럼, 위키백과 등 첨부해 주신 모든 자료와 사료를 포괄하여 작성하였습니다.
[김낙중 인물론] 분단 체제의 경계를 넘으려 한 평화주의자, 혹은 패배의 자유인
1. 서론: 분단이 낳은 가장 아이러니한 '경계인'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김낙중이라는 이름은 가장 극단적인 평가가 교차하는 지점에 서 있다. 한쪽에선 남북 양쪽 체제 모두로부터 '간첩'으로 낙인찍혀 생애 도합 18년 넘는 세월을 감옥에서 보낸 <대한민국 최고의 장기수/사상범>이자, 평생을 비타협적 평화통일운동에 바친 <순교자적 평화주의자>로 기억한다
그러나 그의 저서들과 삶의 궤적을 톺아보면, 김낙중이라는 인물의 본질은 남한의 반공주의나 북한의 수령독재 체제 어디에도 편속되기를 거부했던 '체제 초월적·절대적 평화주의자'이자, 분단 권력이 만들어 놓은 '법 밖의 예외(호모 사케르)' 공간에서 평생을 투쟁한 지식인이었다
2. 사상의 원형과 형성기: 식민지와 전쟁의 참상 (1931~1955)
1931년 파주 조강(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접경지) 부근의 부농가에서 태어난 김낙중은 유년기에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목도하며 자랐다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꾼 것은 6·25 한국전쟁이었다
<"왜 한 민족이 서로를 죽여야 하는가? 생각이 다르고 체제가 다르다고 해서 죽여야 하는가?">
이 깊은 회의와 절망 속에서 그는 '절대적 평화주의'를 사상적 좌표로 확립했다
3. '임진강을 건넌 청년'과 거듭된 잔혹사 (1955~1980년대)
1955년의 평화통일안과 월북
1955년, 서울대 사회학과를 중퇴한 20대의 김낙중은 남북이 체제 승패를 다투지 말고 과도기적 공동체를 형성하자는 <통일독립청년공동체 수립안>을 작성하여 경무대(이승만 정부)에 제출했다
그러나 북한 역시 그를 '미제/남한 공작원'으로 의심해 평양 예심처 감옥에 6개월간 수감했다
국가 폭력과 잔혹한 수난사
이후 그의 삶은 분단 독재 정권이 안보 위기를 창출할 때마다 호출되는 '희생양'의 역사였다
1962년 (박정희 군정): 학원 간첩 사건으로 사형을 구형받았으나 항소심에서 간첩 무죄, 반공법 위반 3년 6개월 선고
. 1973년 (유신체제):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사무국장 재직 중, 정부전복 음모 및 '고려대 NH(National Humanism)회 사건'으로 고문 끝에 사형 구형, 징역 7년 복역
. (이 사건은 43년 후 재심에서 무죄 선고) .
이 시기 그는 <굽이치는 임진강>(1985, 회고록)과 <사회과학원론>(1986)을 집필하며, 독재 체제와 자본·노동의 소외를 비판하고 인간 존엄성에 기반한 '소망스러운 인간공동체'를 학술적으로 체계화했다.
4. 사상의 집대성과 '1992년 간첩 사건'의 진실과 딜레마
87년 체제와 <민족통일을 위한 설계>
1987년 민주항쟁 이후 열린 자유의 공간에서 김낙중의 사상은 가장 찬란하게 피어났다
1988년 <민족통일을 위한 설계>를 출판하고, 1989년 국회 청문회에서 '3단계 7년 계획에 의한 4단계 통일론'(평화공존→국가연합→연방국가→통일민족국가)을 발표하며 한반도 영세중립화 구상을 현실 정치의 대안으로 제시했다
1992년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과 관념적 자유의 한계
그러나 1992년 대선을 앞두고 터진 '김낙중 간첩 사건'은 우리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여기서 김낙중의 '사상적 진정성'과 '현실적 책임' 사이의 극심한 균열이 발생한다
김낙중의 법정 진술 (1993): "나는 북한 사람들을 악마로 대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으며 똑같은 동포 형제로 대했다. 대북 접촉 창구를 정부가 독점한 상황에서 평화통일을 위해 그들과 회합했을 뿐, 국가 기밀을 수집하거나 간첩 행위를 하지 않았다."
현실적 비판 (김상준 교수 / 유동열 원장): 김낙중은 관념과 소망 속에서 남북 간의 현실적 경계를 지워버렸다
. 북한 정권은 그를 대남 공작의 도구로 이용하려 했고, 남한의 안보 권력은 이를 역용하여 남북 화해 기조를 꺾고 정권 안보를 강화하는 빌미로 삼았다 . 결과적으로 그의 '경계 초월적 순수성'은 현실 분단 체제의 구속력을 더욱 강화하는 아이러니를 낳고 말았다 .
그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98년 8·15 특별사면으로 형집행정지 가석방되었으나, 2020년 89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무기수' 신분으로 부자유한 삶을 마감했다
5. 사상적 유산: <민족의 형성, 분열, 통일>과 <인류 문명사의 전환을 위하여>
말년의 김낙중은 학술적·문명사적 결산에 매진했다
<민족의 형성, 분열, 통일>(2008): 우리 민족을 '고려민족'으로 칭하며 역사적 통사성을 정립하고, 한반도가 유라시아 대륙과 태평양 해양 세력이 만나는 요충지로서 세계 평화의 거점이 되어야 함을 설파했다
. <인류 문명사의 전환을 위하여>(2013): 자신의 사상적 '유서'라고 명명한 이 책에서, 그는 남북한 분단 극복을 넘어 약육강식과 군사주의에 기반한 기존 '서구/지중해 문명'의 한계를 지적했다
. 21세기 한반도가 지향해야 할 방향은 이념과 종교, 체제를 뛰어넘는 '생명·사랑·평화 공존의 한겨레(Hankyorae) 문명'으로의 전환임을 유언처럼 남겼다 .
6. 종합 평가: 분단 체제에 맞선 패배의 자유인
김낙중의 일생은 한마디로 "남북 분단 체제라는 철옹성에 온몸으로 부딪혀 파쇄당하면서도 포기하지 않은 패배의 자유인"의 삶이었다
사상적 진정성과 순수성: 그는 자본주의의 소외도, 북한의 관료주의 독재도 거부한 제3의 인본주의자이자 평화주의자였다
. 그가 흘린 눈물과 가족(아내 김남기, 딸 김선주 저 <탐루>)이 견뎌내야 했던 주홍글씨의 고통은 한국 현대사의 가장 아픈 비극을 증언한다 . 현실정치적 한계와 딜레마: 그러나 적대적 남북 권력이 도모하는 냉혹한 비상국가체제(Emergency State System)의 현실을 관념 속에서 지워버림으로써, 역설적으로 분단 권력이 내부의 적(호모 사케르)을 생산하고 정권을 유지하는 데 이용당했다는 치명적 한계를 남겼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중 패권 갈등과 남북 간 강 대 강 대치가 극에 달한 오늘날, "상대를 타도하려는 통일은 민족 전멸이며, 평화적 공존과 영세중립만이 살길"이라 부르짖었던 김낙중의 예지적 경고와 평화론은 한반도와 인류의 미래를 향해 여전히 무거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김낙중 인물론
평화주의자, 공동체 사상가, 그리고 분단체제의 가장 위험한 경계인
김낙중(1931~2020)을 한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를 지지한 쪽에서는 평생 평화통일을 추구하다 남북 양쪽에서 고난을 겪은 <평화주의자>라고 평가한다. 반대쪽에서는 북한 공작원과 장기간 접촉하고 거액의 공작금을 받은 <고정간첩>이라고 규정한다. 업로드하신 자료만 놓고 보아도 두 평가가 정면으로 충돌한다. 한쪽 자료는 김낙중의 “자유와 책임”을 함께 문제 삼으면서도 분단체제에 맞선 독특한 사상가로 평가하고, 다른 자료는 “평화주의자로 미화된 36년 고정간첩”이라는 제목으로 그를 비판한다.
그러나 김낙중의 여러 저작, 자신의 영문 자전적 증언, 딸 김선주의 <탐루>, 그리고 상반된 평가의 기사들을 함께 읽으면 이 양자택일 자체가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김낙중은 <평화주의자였기 때문에 간첩혐의를 받았던 사람>이라고만 할 수도 없고, 반대로 <본래 간첩이었는데 평화주의자로 위장했던 사람>이라고만 하기도 어렵다.
오히려 그는 <분단의 현실적 경계보다 자기 양심 속의 남북공동체를 더 वास्तविक한 것으로 믿었던 사람>이었다. 바로 그 때문에 위대한 도덕적 일관성을 보여주었고, 동시에 매우 위험한 정치적 판단도 했다.
이 두 측면을 함께 보는 것이 김낙중 인물론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1. 출발점은 민족주의보다 ‘전쟁에 대한 공포와 혐오’였다
김낙중 자신의 2005년 영문 발표문 <My Life and the Destiny of My Nation>은 그의 내면을 이해하는 데 특히 중요한 자료다.
그는 자신을 1931년생이라고 명시하면서,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해방 뒤에는 한국전쟁을 경험했다고 회고한다. “나는 전쟁 중에 태어나 전쟁 속에서 자랐다”는 것이 그의 자기이해에 가깝다.
흥미로운 것은 청소년기의 김낙중이 처음부터 정치운동가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는 서울에서 교회 성경공부에 참석했고, 점심 뒤에는 불교사찰에 가 승려의 설법을 들었으며, YMCA에서는 함석헌이 이끄는 공부모임에 참여했다. 학교보다 도서관에서 종교와 철학을 읽으며 “진리”를 찾았다고 회상한다.
이 점은 김낙중의 평생 사상을 설명해준다.
그에게 정치보다 먼저 있었던 것은 <도덕적·종교적 질문>이었다.
“무엇이 진실인가?”
“인간은 왜 죽이는가?”
“왜 생각이 다르다고 서로 죽여야 하는가?”
한국전쟁이 이 질문들을 추상적 철학에서 현실문제로 바꾸었다.
북한군이 내려왔을 때 친구들은 인민군에 들어갔고, 전선이 바뀌자 이번에는 남한군에 들어가야 했다. 김낙중은 자신이 러시아제 총을 들고 미국제 총을 든 같은 민족을 쏘아야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고 쓴다. 서울대 사회학과를 선택한 것도 “사회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사람들을 서로 죽이게 하는가”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김낙중 사상의 원점은 공산주의도 민족주의도 아니다.
<반전(反戰)>이다.
2. 1954년의 등불 — 김낙중이라는 사람의 원형
1954년 부산에서 일어난 유명한 사건은 그의 성격을 거의 완벽하게 보여준다.
그는 죽음을 생각할 정도의 절망에 빠졌다가 등불을 들고 거리로 나가 전쟁을 중단하고 평화통일을 하자고 외쳤다. 자신은 디오게네스를 흉내 냈다고 회고한다. 경찰에 잡혔을 때 “그러면 어떻게 통일할 것이냐”는 질문을 받았지만 구체적인 답을 제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좋은 뜻만으로는 부족하다. 설계가 필요하다.>
그 결과 나온 것이 <통일독립청년 고려공동체 수립안>이다.
남북 어느 정부도 다른 쪽을 흡수하지 않고,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점차 권한을 이전하면서 통일한다는 발상이었다.
1955년에는 이 안을 이승만 정부에 제출한 뒤 북한에도 전달하겠다며 실제로 임진강을 건넜다.
이 사건은 보통 그의 “기행”으로 설명되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저작들을 함께 읽으면 단순한 기행은 아니다.
김낙중의 평생 행동양식이 이미 여기에서 완성되어 있다.
<도덕적 확신 → 제도적 설계 → 직접 행동 → 현실권력과 충돌>
이라는 패턴이다.
그리고 이 패턴은 1990년대까지 반복된다.
3. 남도 북도 아닌 ‘제3의 자리’를 찾았다
김낙중은 북한에 들어가자 남한 간첩으로 의심받았다. 다시 남한으로 돌아오자 북한 간첩으로 의심받았다.
이 경험에서 그는 매우 중요한 결론을 얻는다.
남과 북 모두 평화통일 자체보다 자기 권력의 확대에 더 관심이 있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영문 회고에서 그는 남쪽은 자유를 말하지만 가난과 불평등 속에서는 그것이 공허할 수 있고, 북쪽은 평등을 말하지만 권력이 집중되면 역시 인간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비판한다.
따라서 김낙중을 일반적인 의미의 친북인사라고 규정하면 그의 사고의 중요한 부분을 놓친다.
그의 평생 이상은
<대한민국 중심의 통일>도 아니고
<북한 중심의 통일>도 아니라
<양쪽을 넘어서는 제3의 공동체>
였다.
‘고려공동체’라는 명칭도 이 때문에 나온다.
4. 운동가에서 사회과학자로 — <사회과학원론>
김낙중을 단순한 통일운동가로만 이해하면 또 하나를 놓친다.
그는 경제학을 공부했고 노동·농민운동을 연구했으며 <한국노동운동사>를 썼다. 자신의 영문 회고에서도 1957년 이후 농민운동 가능성을 연구하고, 이후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에서 노동자와 농민 교육에 관여했다고 설명한다.
이 경험이 1986년 <사회과학원론 ― 인간공동체의 소망스러운 실현을 위하여>로 집약된다.
앞서 올려주신 실제 목차에서 이 책의 독특함이 아주 잘 보였다.
경제는
<소비 → 생산 → 교환·분배 → 경제운동 → 공동체운동(I)>
으로 간다.
정치는
<가족공동체 → 민족공동체와 국가 → 국가권력 → 국가발전 → 자유민주정치운동·사회주의혁명운동·민족독립운동 → 공동체운동(II)>
으로 간다.
문화 역시
<문화 → 문명과 세계사 → 종교운동·사상운동 → 공동체운동(III)>
으로 끝난다.
따라서 김낙중의 핵심개념은 사실 <통일>보다 <공동체>다.
경제·정치·문화가 모두 인간공동체를 더 잘 만드는 방향으로 작동해야 한다고 보았다.
특히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법·도>라는 표현이 흥미롭다.
그는
<사회가 실제로 어떻게 움직이는가>와
<사회가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가>
를 분리하려 하지 않았다.
현대 사회과학자의 눈에는 지나치게 규범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바로 이 때문에 김낙중의 사회과학은 그의 삶과 분리되지 않는다.
그에게 학문은 <세상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기 위해 이해하는 것>이었다.
5. <민족통일을 위한 설계> — 이상주의자의 제도적 상상력
1988년의 <민족통일을 위한 설계>는 이 공동체론의 한반도 적용판이라고 할 수 있다.
남북국가를 당장 없애거나 어느 한쪽에 흡수시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중간공동체를 만들고 점진적으로 통합한다.
DMZ를 단순한 군사적 경계가 아니라 공동생활의 실험공간으로 바꾸고, 기성세대가 만든 분단을 새로운 세대가 넘어가도록 한다.
오늘날 보아도
상호체제 인정,
단계적 통일,
공존에서 통합으로의 이행,
이라는 부분은 놀랄 만큼 현대적이다.
반면 현실정치 측면에서는 심각한 약점도 있다.
<남북 국가가 왜 자기 권력을 자발적으로 공동체에 넘겨주는가?>
라는 질문에 충분한 답을 주지 못한다.
이것은 김낙중 평생의 약점으로 남는다.
그는 사람의 <도덕적 가능성>을 매우 높이 평가했지만 권력의 <자기보존 본능>은 상대적으로 과소평가했다.
6. <굽이치는 임진강> — 자기 신화를 만든 책이면서 동시에 진실한 자기고백
1985년 김남기와 함께 낸 <굽이치는 임진강>은 김낙중 사상의 출발점을 가장 생생하게 보여준다.
식민지 말기의 전쟁 분위기, 해방, 한국전쟁, 종교적 방황, 평화통일운동, 임진강 월북 등이 하나의 정신적 성장사로 연결된다.
이 책에서 김낙중은 자신을 정치전략가라기보다 <양심에 사로잡힌 사람>으로 그린다.
그것은 실제 모습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기서사의 한계이기도 하다.
김낙중은 자신의 행동을 대부분
<평화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
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타인이 보기에는 같은 행동이 무모하거나 위험하거나 때로는 불법적일 수 있다.
바로 이 차이가 나중의 1992년 사건에서 결정적인 문제가 된다.
7. <탐루> — 김낙중의 가장 중요한 비판은 가족 안에서 나온다
딸 김선주의 <탐루>는 그래서 매우 중요하다.
김낙중 자신의 책만 읽으면 그의 삶은 숭고한 신념을 지킨 한 사람의 순교담처럼 보일 위험이 있다.
그러나 딸의 책은 질문을 바꾼다.
<그 신념을 위해 가족은 무엇을 지불했는가?>
아내 김남기는 감옥 밖에서 가족을 지켰고, 자녀들은 “간첩의 자식”이라는 사회적 낙인을 감당했다.
김선주는 아버지의 모든 주장에 동의해서 그를 존경하게 된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아버지의 생각에 모두 동의하지는 않지만, 아버지가 평생 자신의 믿음대로 살았다는 것은 인정한다>
는 데 도달한다.
이것은 김낙중을 평가할 때 매우 중요한 기준이다.
<진정성>과 <정당성>은 같은 것이 아니다.
김낙중이 진심으로 평화를 원했다는 사실만으로 그의 모든 행동이 옳아지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그의 일부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해서 평생의 평화주의 전체가 거짓이 되는 것도 아니다.
8. 1990~92년 사건 — 김낙중 인물론의 가장 어려운 지점
이 부분은 피해서는 안 된다.
김낙중 자신의 영문 회고에서도 1990년 북한에서 온 사람이 자신을 찾아왔음을 인정한다. 그는 국가보안법상 이를 신고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신고하면 상대가 체포되고 남북 대화의 가능성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해 신고하지 않았으며, 이후 그들과 평화통일 문제를 계속 논의했다고 쓴다.
따라서
<김낙중은 북한 사람과 접촉한 적 자체가 없다>
고 말할 수는 없다.
김상준의 <김낙중의 자유와 책임 III>도 이 점에서는 매우 중요하다. 이 글은 김낙중에게 우호적이지만, 1990년 이후 북한 측 인사를 실제로 여러 차례 만난 사실까지 ‘조작’이라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기에서 그의 <자유와 책임> 문제가 시작된다고 본다. 그는 현실의 국경보다 자신의 “소망 속 남북”을 더 진짜라고 여기면서 행동했고, 그 행동의 결과를 가족과 주변 사람들이 함께 감당해야 했다고 비판한다.
반대쪽 자료인 <평화주의자로 미화된 36년 고정간첩 김낙중>은 훨씬 더 강한 주장을 한다.
북한 공작원과의 접촉, 공작금 총 210만 달러 수령, 무전장비와 난수표 등의 확보, 민중당 관련 활동 등을 들어 실제 고정간첩이었다고 주장한다.
이 자료를 무시해서도 안 된다.
다만 그대로 전부 받아들여서도 곤란하다.
첫째, 이 기사에는 김낙중을 1935년생이라고 쓰는 등, 김낙중 자신의 2005년 증언과 다른 자료들이 제시하는 1931년생과 일치하지 않는 기본적인 전기상의 오류가 있다.
둘째, 업로드하신 위키 자료가 요약한 국정원 과거사 진실규명 조사에서는 1990년 이후 북한 측 접촉과 금품·장비 수수의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이를 근거로 과거 모든 사건을 연결하여 <1950년대부터 36년간 계속된 고정간첩>이라고 발표한 것은 사실관계와 달랐다고 정리한다. 특히 1957년·1960년대 사건과 1973년 사건에는 고문·강요에 의한 허위자백 및 별개의 문제가 있었다는 취지다.
따라서 가장 조심스럽고 정확한 결론은 이렇다.
<1990년대의 불법적·비밀 대북접촉과 북한 측 자금·장비 수수 문제는 실제로 존재했지만, 그것을 근거로 그의 1950년대 이후 생애 전체를 하나의 36년 고정간첩 활동으로 소급해 설명하는 것도 과도하다.>
두 사실은 동시에 성립할 수 있다.
이것이 김낙중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다.
9. 그는 북한에 이용당했는가?
나는 상당 부분 <그렇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김상준의 글도 이 점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북한은 김낙중이라는 개인의 평화통일에 대한 열망과 신뢰를 이용해 자신들의 남한 정치전략을 수행하려 했다. 반대로 남한의 안보기관도 김낙중 사건을 이용해 당시 남북화해 움직임과 진보정치세력을 공격할 수 있었다.
즉 김낙중은 양쪽 모두에게 이용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에게는 목적과 수단의 경계가 위험할 정도로 희미해질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평화통일이라는 목적이 절대적으로 선하다고 생각하면,
“평화를 위해 북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왜 잘못인가?”
라는 생각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민주사회에서 중요한 질문은 한 단계 더 있다.
<누구와 어떤 방식으로, 누구에게 책임을 지면서 만나는가?>
김낙중에게 가장 부족했던 것은 이 부분이었다고 생각한다.
10. 그렇다고 그를 ‘위장 평화주의자’로 볼 수도 없다
반대로 김낙중의 평화주의를 단순한 위장으로 보는 것도 자료 전체와 잘 맞지 않는다.
1954년의 등불시위는 북한과의 조직적 관계보다 앞선다.
1955년에 들고 간 <고려공동체 수립안> 역시 북한체제에 남한이 복속되는 통일안이 아니었다.
그는 북한에서도 간첩으로 의심받았고, 자신의 회고에서는 남북 양쪽 체제를 모두 비판했다. 이후 수십 년의 저작에서도 그의 관심은 북한 사회주의의 승리가 아니라 <남북 어느 한쪽의 승리를 피하는 공동체적 통일>이었다.
그리고 1980~2010년대의 저작들을 보면 그 핵심 사고가 놀랄 만큼 일관되어 있다.
따라서
<북한의 지령을 수행하기 위해 평화주의를 만들었다>
는 설명보다
<평화통일에 대한 극단적으로 강한 신념 때문에 북한 측의 접근을 받아들이고 결국 위험한 관계에 들어갔다>
는 설명이 그의 사상과 생애 전체에는 더 잘 들어맞는다.
다만 이것은 그의 동기에 대한 해석이지, 법률적 면책은 아니다.
11. <민족의 형성, 분열, 통일> — 민족주의의 성숙
2008년 <민족의 형성, 분열, 통일>에서는 그의 통일론이 역사학적 형태를 취한다.
그는 민족을 순수혈통집단이라기보다 오랜 기간 함께 살아온 <운명공동체>로 이해하고, ‘한민족’보다 <고려민족>이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책은
<민족의 형성 → 민족 내부의 분열 → 식민지와 해방 → 미·소 점령과 분단 → 통일운동 → 21세기의 통일설계>
로 이어진다. 업로드하신 출판기념회 자료에서도 그는 이를 반세기 동안의 고민을 다음 세대에 남기는 일종의 유언으로 설명한다.
여기서도 흥미로운 것은 그의 민족주의가 배타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민족공동체는 최종목표가 아니다.
더 넓은 인류공동체로 가는 중간단계다.
12. <인류 문명사의 전환을 위하여> — 마지막에는 민족을 넘어간다
2013년 <인류 문명사의 전환을 위하여>에서 김낙중의 사상은 가장 넓어진다.
책은
<인류문명>
→ <나의 삶과 겨레의 운명>
→ <남북의 화해와 통일>
이라는 순서로 되어 있다.
82세의 김낙중은 이 책을 사실상 자신의 “유서”라고 불렀고, 남은 세대에게 평화를 실현해달라고 부탁한다.
여기서 그의 질문은
<어떻게 한국을 통일할 것인가?>
에서
<인간은 서로 죽이지 않고 살아가는 문명을 만들 수 있는가?>
로 확장된다.
그가 비판하는 궁극적인 것은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어느 한쪽이라기보다 <타도(打倒)의 문명>이다.
상대방을 없애야 내가 살 수 있다는 정치, 경제, 국제질서를 문제 삼는다.
그 대안은
<생명·사랑·평화적 공존의 문명>
이다.
2005년 퀘이커 아시아·서태평양 모임에서 발표한 영문 원고에서도 그는 미래의 ‘한겨레(hankyorae)’를 민족을 넘어 모든 인간의 운명이 연결된 세계공동체로 확대한다. 마지막에는 미래 문화를 “life, love, peaceful coexistence”의 문화라고 표현한다.
다만 이 자료만으로 김낙중 자신이 퀘이커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업로드된 문서에도 그 점은 불확실하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함석헌에게 영향을 받았고, 평화·양심·비폭력·보편적 인간공동체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퀘이커와 상당히 친화적인 사상적 분위기>가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13. 김낙중이라는 사람의 다섯 가지 특징
지금까지의 자료를 종합하면 김낙중의 성격과 사상을 다섯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극단적인 양심주의>다. 그는 자신의 양심에 맞지 않는 현실을 단순히 참고 살아가는 능력이 매우 약했다. 등불을 들고 거리로 나가고, 임진강을 건너고, 수십 년 뒤에도 북한 사람을 만난 것은 모두 이 성격의 연장선이다.
둘째는 <반(反)이분법>이다. 좌냐 우냐, 남이냐 북이냐,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라는 선택을 거부하고 늘 제3의 공동체를 찾았다.
셋째는 <제도설계형 이상주의>다. 단순히 “통일합시다”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영토·구조·단계·세대까지 구체적으로 설계하려 했다.
넷째는 <놀라운 일관성>이다. 1950년대의 고려공동체에서 1986년 <사회과학원론>, 1988년 통일설계, 2008년 민족론, 2013년 문명론까지 “상대를 제거하지 않는 공동체”라는 중심명제가 거의 변하지 않는다.
다섯째는 바로 그 장점의 반대편에 있는 <위험한 현실감각의 부족>이다.
자신이 선의를 가지고 있으면 상대도 결국 선의를 이해할 것이라는 기대, 개인적 접촉이 국가 간 적대를 넘어설 수 있다는 믿음, 목적의 정당성이 비공개 접촉이라는 수단의 문제를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다는 사고가 있었다.
이것이 그의 비극을 만들었다.
14. 가장 어려운 문제 — 자유와 책임
업로드하신 김상준의 글 제목 <김낙중의 자유와 책임>이 김낙중 평가에 가장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김낙중에게 자유란 단순히 국가가 허락한 범위 안에서 행동하는 자유가 아니었다.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는 것>
이었다.
그래서 남한 정부가 금지해도 북한으로 갔고, 북한이 의심해도 자기 주장을 했으며, 다시 남한으로 돌아와서도 통일운동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놀라울 정도로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자신이 북한 측 인사와 비밀리에 접촉하고 자금을 받았을 때 그것이 자신뿐 아니라 가족, 동료, 정당, 남북화해운동 전체에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충분히 고려했는가?
여기에서는 높은 평가를 주기 어렵다.
<탐루>가 보여주는 가족의 오랜 고통도 같은 문제다.
김낙중이 평생 자신의 운명의 주인이 되려고 노력한 만큼, 때로는 가족에게 그 선택의 비용을 지게 했다.
따라서 그의 삶은 <자유의 위대함>과 <자유의 책임>을 동시에 보여준다.
15. 최종적인 인물평
김낙중을 <영웅>으로 만들 필요도 없고 <간첩>이라는 한 단어에 가둘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무엇보다 <분단이 만들어낸 매우 특이한 인간형>이다.
남한도 북한도 자신이 속해야 할 완전한 공동체라고 인정하지 않았고,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제3의 공동체를 평생 먼저 마음속에서 살아간 사람이었다.
김상준은 이를 현실의 남북 경계와 달리 김낙중의 “소망 속 남북에는 경계가 없었다”고 분석한다. 이것은 그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면서 동시에 가장 위험한 부분이었다.
그 때문에 그는 1955년 임진강을 건널 수 있었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1990년대에는 법과 현실의 경계를 너무 가볍게 넘어갔다.
그래서 나는 김낙중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싶다.
<김낙중은 북한을 위해 평화를 이야기한 사람이기보다는, 평화를 너무 절대적으로 믿었기 때문에 북한에게도 이용될 수 있었던 사람이다. 동시에 남한의 분단국가 역시 그의 그러한 성격을 이용하여 그를 필요 이상으로 거대한 ‘고정간첩’으로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 두 측면 가운데 하나만 보면 김낙중은 이해되지 않는다.
그는 <순교자도 아니고 위장간첩도 아닌, 분단선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 급진적 양심주의자>였다.
그리고 그의 저작 전체를 하나의 긴 문장으로 읽으면 그 사상의 발전은 이렇게 정리된다.
<굽이치는 임진강>
— “왜 서로 죽이는가?”
↓
<한국노동운동사>와 노동·농민 연구
— “사회를 움직이는 힘은 무엇인가?”
↓
<사회과학원론>
— “소망스러운 인간공동체란 무엇인가?”
↓
<민족통일을 위한 설계>
— “남과 북이 상대를 없애지 않고 어떻게 하나가 될 것인가?”
↓
<민족의 형성, 분열, 통일>
— “우리는 어떤 역사 속에서 하나의 공동운명체가 되었고 왜 갈라졌는가?”
↓
<인류 문명사의 전환을 위하여>
— “이 문제는 사실 한민족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 아닐까? 인간문명 자체가 상대를 제거하지 않고 함께 사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보면 김낙중의 사상은 <평화통일론>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의 평생 주제는 결국 하나였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를 없애지 않고 함께 살 수 있는가?>
그 질문에 대한 그의 답은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이었고, 때로는 정치적으로 무책임했으며, 1990년대에는 실제로 매우 위험한 행동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한국 현대사에서 그 질문을 20대부터 80대까지 거의 60년 동안 그렇게 집요하게 붙들었던 사람도 흔치 않다.
그런 점에서 김낙중은 <한국의 대표적인 통일이론가>라기보다 더 정확하게는
<한국전쟁이 만들어낸 급진적 평화주의자이자 공동체 사상가, 그리고 분단체제의 경계를 평생 넘으려다 그 경계에 반복해서 붙잡힌 사람>
이라고 평가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