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3-09

권정생 선생님의 ‘강아지똥’ 이데올로기는 틀렸다

손영옥 - 안녕하세요. 여러분!권정생 선생님의 ‘강아지똥’ 이데올로기는 틀렸다, 라고 말하고 싶어요. 90년대생... | Facebook

안녕하세요. 여러분!권정생 선생님의 ‘강아지똥’ 이데올로기는 틀렸다, 라고 말하고 싶어요.
90년대생 자녀를 둔 나같은 ‘86년 세대’는 아이가 어릴 때 무릎에 앉힌 채 읽어주던 강아지똥 그림책에 대한 추억이 있습니다.
“비는 사흘 동안 내렸어요. 강아지똥은 온몸이 비에 맞아 자디잘게 부서졌어요. (…) 부서진 채 땅속으로 스며들어가 민들레 뿌리로 모여들었어요. 줄기를 타고 올라가 꽃봉오리를 맺었어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강아지똥이 아름다운 민들레꽃을 피워내기 위해 온몸을 다 바쳐 거름이 된다는 이 마지막 대목에서 아이들은 눈물을 뚝뚝 흘립니다. 누구나 쓸모 있고 소중한 존재라는 점을 조용히 일깨워 지금까지 그림책의 고전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런데 이 ‘강아지똥 신화’에 딴지를 걸고 싶었습니다.. 이야기에 내재된 이데올로기는 모더니즘의 산물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중심에서 밀려난 하찮은 것, 주변화된 것에 주목하긴 했지만 여전히 중심과 주변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근대적 사고가 깔려 있습니다.
원작이 탄생한 1960년대는 서구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태동하고 가시화되던 시기였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중심과 주변의 경계 해체를 주장합니다. 서구와 비서구, 남자와 여자, 이성과 감정, 백인과 아시아인 등 거창한 이분법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삶의 도처에 중심과 주변이 있습니다. 드라마에 주인공과 조연이 있듯이 말입니다.
미술계에도 이분법적 경계는 분명하다. 작가가 중심입니다. 어떤 영상 작품은 저 음악이 없으면 절대 저 완성도가 나올 수 없는데도 작가만 중심에 드러나고 음악 제작자는 엔딩 크레디트에 이름 한 줄로 들어갈 뿐입니다. 전시 관람 문화도 작가 중심입니다. 전시장에는 의자 하나 없이 작가의 작품이 숭배의 대상처럼 걸려 있습니다.
이런 근대적 인식에 균열을 낸 작가 그룹이 있습니다. 2021년 영국에서 권위 있는 현대미술상 터너상 후보에 오른 신경다양성 작가 커뮤니티 ‘프로젝트 아트 워크스(Project Art Works)’입니다. 자폐 작가, 이들의 부모, 심지어 간호 보조자까지 그룹 이름 아래 동등하게 활동한다. 자폐 작가가 붓을 들지만 그 붓을 씻어주는 도우미, 작가의 정서적 안정을 돕는 부모, 그리고 이 환경을 설계하는 큐레이터까지 N분이 1의 지분을 갖고 활동하는 그야말로 수평적인 관계망입니다.
한국이라면 자폐 작가들만 무대 위에 올릴 뿐 부모도 기획자도 무대 아래 존재한다. 거칠게 이야기하면 이들은 민들레꽃을 피워내는 강아지똥 거름의 역할로 보람을 느낍니다.
프로젝트 아트 워크스의 모델은 ‘강아지똥 거름’식 행복감이 관행에 의해 학습된 감정이 아닌지 묻게 만듭니다. 이들이 터너상 후보에 올랐다는 것은 현대미술에서 ‘개별적 자아’에 매몰돼 있던 근대적 작가관(觀)이 이제는 ‘공동체적 연결’로 확장돼야 한다는 필요성을 공신력 있는 기관이 화두로 던졌음을 의미합니다. 그해 터너상은 모든 후보를 ‘예술 콜렉티브(집단)’로 채웠습니다.
강아지똥 이야기는 다시 써져야 합니다. 하찮은 존재에 대한 긍정을 넘어 기여도에 대한 ‘가시화’된 평가, 필요하면 ‘공동 제작’으로까지 인정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담아야 합니다. 새 버전이 탄생한다면 마지막 장면 봉오리를 피운 민들레꽃 옆에 ‘민들레 씨앗과 강아지똥 공동 창작’이라는 이름표가 붙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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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영옥의 컬처 아이] 권정생 ‘강아지똥 신화’는 틀렸다 입력: 2026-03-05 00:37 권정생(1937~2007) 선생은 틀렸다. ‘강아지똥’ 이야기 말이다. ‘몽실언니’ 등 주옥같은 동화를 남긴 아동 문학가였던 그는 경북 안동의 작은 교회 종지기로 봉사하며 가난하게 살았다. 그런데도 인세 수입 등 전 재산 10억원을 아이들에게 기부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떠나 사후 ‘성자가 된 종지기’로 추앙받았다. 1969년 데뷔작 동화 ‘강아지똥’은 96년 정승각 그림의 그림책으로 개작돼 100만부 이상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됐다. 90년대생 자녀를 둔 ‘86년 세대’는 아이가 어릴 때 무릎에 앉힌 채 이 그림책을 읽어주던 추억들이 다 있다. “비는 사흘 동안 내렸어요. 강아지똥은 온몸이 비에 맞아 자디잘게 부서졌어요. (…) 부서진 채 땅속으로 스며들어가 민들레 뿌리로 모여들었어요. 줄기를 타고 올라가 꽃봉오리를 맺었어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강아지똥이 아름다운 민들레꽃을 피워내기 위해 온몸을 다 바쳐 거름이 된다는 이 마지막 대목에서 아이들은 눈물을 뚝뚝 흘린다. 누구나 쓸모 있고 소중한 존재라는 점을 조용히 일깨워 지금까지 그림책의 고전으로 평가받는다. 그런데 이 ‘강아지똥 신화’에 딴지를 걸고 싶었다. 이야기에 내재된 이데올로기는 모더니즘의 산물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중심에서 밀려난 하찮은 것, 주변화된 것에 주목하긴 했지만 여전히 중심과 주변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근대적 사고가 깔려 있다. 원작이 탄생한 1960년대는 서구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태동하고 가시화되던 시기였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중심과 주변의 경계 해체를 주장한다. 서구와 비서구, 남자와 여자, 이성과 감정, 백인과 아시아인 등 거창한 이분법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삶의 도처에 중심과 주변이 있다. 드라마에 주인공과 조연이 있듯이. 미술계에도 이분법적 경계는 분명하다. 작가가 중심이다. 어떤 영상 작품은 저 음악이 없으면 절대 저 완성도가 나올 수 없는데도 작가만 중심에 드러나고 음악 제작자는 엔딩 크레디트에 이름 한 줄로 들어갈 뿐이다. 전시 관람 문화도 작가 중심이다. 전시장에는 의자 하나 없이 작가의 작품이 숭배의 대상처럼 걸려 있다. 이런 근대적 인식에 균열을 낸 작가 그룹이 있다. 2021년 영국에서 권위 있는 현대미술상 터너상 후보에 오른 신경다양성 작가 커뮤니티 ‘프로젝트 아트 워크스(Project Art Works)’다. 자폐 작가, 이들의 부모, 심지어 간호 보조자까지 그룹 이름 아래 동등하게 활동한다. 자폐 작가가 붓을 들지만 그 붓을 씻어주는 도우미, 작가의 정서적 안정을 돕는 부모, 그리고 이 환경을 설계하는 큐레이터까지 N분이 1의 지분을 갖고 활동하는 그야말로 수평적인 관계망이다. 한국이라면 자폐 작가들만 무대 위에 올릴 뿐 부모도 기획자도 무대 아래 존재한다. 거칠게 이야기하면 이들은 민들레꽃을 피워내는 강아지똥 거름의 역할로 보람을 느낀다. 프로젝트 아트 워크스의 모델은 ‘강아지똥 거름’식 행복감이 관행에 의해 학습된 감정이 아닌지 묻게 만든다. 이들이 터너상 후보에 올랐다는 것은 현대미술에서 ‘개별적 자아’에 매몰돼 있던 근대적 작가관(觀)이 이제는 ‘공동체적 연결’로 확장돼야 한다는 필요성을 공신력 있는 기관이 화두로 던졌음을 의미한다. 그해 터너상은 모든 후보를 ‘예술 콜렉티브(집단)’로 채웠다. 강아지똥 이야기는 다시 써져야 한다. 하찮은 존재에 대한 긍정을 넘어 기여도에 대한 ‘가시화’된 평가, 필요하면 ‘공동 제작’으로까지 인정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담아야 한다. 새 버전이 탄생한다면 마지막 장면 봉오리를 피운 민들레꽃 옆에 ‘민들레 씨앗과 강아지똥 공동 창작’이라는 꼬리표가 붙지 않을까. 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s://www.kmib.co.kr/article/view.asp?arcid=1772607242&fbclid=IwY2xjawQbKEVleHRuA2FlbQIxMABicmlkETE4cTdOZXhHNEdRd3hTUHl1c3J0YwZhcHBfaWQQMjIyMDM5MTc4ODIwMDg5MgABHqilBo8-6rgxgGAyXVLaPdcpLveTHBRUbSdCTddJMkWdS2BR7L_VF80_sZ0p_aem_Shltl2NIcNls9hqT8oxjB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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