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3-25

한국의 독립운동 - 위키백과


한국의 독립운동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한국의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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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독립운동은 한국이 일제를 주축으로 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 및 지배로부터 대항한 일련의 운동이다. 이러한 독립운동은 19세기 중엽부터 시작해 1945년 8월 15일에 일제가 항복을 선언할 때까지 진행되었다.

독립 운동의 전개

일제의 한국의 강제 병합 이후, 한반도에서 전개된 헌병 경찰을 통한 무단통치 시기에는 공개적으로 독립운동을 하기가 어려웠다. 이로 인해 한반도에서는 비밀결사형태의 항일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이들은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주력하였다. 특히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 이후 결성된 신민회는 애국계몽세력 등이 주축이 되어 서간도의 삼원보에 있는 한국의 독립운동사에 큰 영향을 미친 신흥무관학교의 설립에 밑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105인 사건 등의 일제의 조작 사건에 의해 1911년에 해산되었다. 특히 신민회 이후의 거의 모든 단체는 공화제를 내세웠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외에도 독립군 자금 모집을 위한 대한광복회나, 독립 자금 전달을 한 평양의 송죽회 등이 존재하였다. 특히 대한광복회는 애국계몽운동 계열과 의병 활동을 한 세력이 연대하여 만든 단체인데, 독립군 기지 건설에 노력하였다.

이 시기에 한반도에서는 왕정복고를 내세우고 고종의 복위를 주장한 독립의군부도 존재하였다.

해외에서는 일제의 토지수탈에 의해 쫓겨난 농민들은 간도와 연해주로 대거 이주하였는데, 이들은 해당 지역서 신한촌 등의 한인촌을 형성하여 해외 독립운동 기지의 밑거름이 되었다. 특히 북간도를 중심으로 만주 지역에서는 대종교 세력들이 많이 존재하였다.독립운동가들의 가문은 조선 초기부터 조선 왕조를 받드는 큰 세력을 자랑하던 양반 가문 출신들이 많으며,경술국치를 격고 신분제 폐지로 인하여 사노비들이 자유민이 되어 가난해지는 등의 수탈을 격는등 많은 수난이 있었다.일부 소장파 학자들은 독립 운동가들을 수많은 사람들을 노비로 부리며 착취했던 조선의 사대주의 양반가 출신이 많다고 하며 친일파에 반대되는 의미의 조선의 친중파이며 갑오개혁으로 인해 노비들이 자유롭게 되자 생계 수단을 잃고 중국등지로 떠난 자들도 많다는 비판을 하지만 그것으로 일제 강점기의 수많은 악행을 정당화할 수는 없으며 조선이 스스로 갑오개혁과 근대화를 할 기회를 박탈시킨 일본의 일제강점기에 대한 비판이 오히려 더 많다.

민족해방운동의 모색

경술국치 이후 일제의 강압적 통치로 한반도에서 민족해방운동이 어렵게 되자, 독립운동가들은 해외에서 민족해방운동의 근거지를 마련하는 데 힘을 쏟았다. 이에 따라 연해주에서는 이범윤(李範允)이 중심이 된 권업회(1912년)와 이상설(李相卨)·이동휘(李東輝)가 중심이 된 대한광복군정부(1914)가 만들어졌고, 북간도에서는 의병장 출신 홍범도(洪範圖)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서간도에서는 신민회 세력이 주축이 된 경학사·부민단 등 항일 민족단체들이 잇달아 생겨났다. 미주지역에서도 안창호(安昌浩)와 박용만(朴容萬) 등이 중심이 되어 대한인국민회를 만들어 동포 사회를 만들었다.

3·1 운동

탑골공원에 설치된 3·1운동 기념비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조선인을 미개 민족시하여 무단 통치를 실시하고 토지조사사업을 추진하여 많은 농민들을 농토에서 내쫓는 등 갖은 수탈을 했다. 이에 조선인들은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전개된 세계적인 민족해방운동의 조류에 편승하여 대규모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3월 1일 낮 12시 서울의 탑골공원에서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을 선언한 학생과 청년들은 수십만 명의 군중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온 거리를 휩쓸음으로써 3·1운동은 시작되었다. 한번 불붙은 만세 시위는 일제의 헌병 경찰의 무자비한 탄압 속에서도 삽시간에 전국 방방곡곡 퍼져나갔고, 간도·시베리아·연해주·미주지역까지 퍼져나갔다.

200만 명이 넘는 민중이 참여하여 약 2개월에 걸쳐 투쟁하는 동안에 232개의 부·군 가운데 229개의 부·군에서 시위와 무력항쟁이 일어났고, 1,491건의 시위를 벌였으며 160개가 넘는 일제 통치기관을 파괴했다. 그러나 4월 말에 접어들면서 일제의 집단학살·살인·방화·고문 등 무력 탄압으로 3·1운동은 차츰 사그라졌다.

1920년대의 민족해방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기념 사진(1919년 10월 11일) 앞줄 왼쪽부터 신익희, 안창호, 현순. 뒷줄 김철, 윤현진, 최창식, 이춘숙.
니콜라옙스크 일본 영사관의 불탄 자리 1920년 6월

3·1 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가들은 독립 운동의 구심점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에 따라 각 지역에 존재한 망명정부의 통합을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에 따라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한반도의 한성임시정부, 상해의 상해임시정부 등이 한민족의 광복의지를 담아 1919년 4월 11일 중국의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발족시켰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3도 대표회의로 결성된 한성정부의 법통을 이어 정부가 수립되었다. 정부가 수립된 상하이는 프랑스 조계지로서 당시 세계의 외교의 각축장이었는데 1차 대전 이후 각종 국제회의에 영향을 받아 외교적으로 독립을 할 수 있다는 입장에서 상하이에 기반을 두었다.

임시정부는 초반 대통령제를 표방하였으며,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은 외교론자로 외교로서 독립을 이루고자 하였다. 임시정부는 1919년 파리 강화회의나 1921년 워싱턴 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독립을 호소했으나, 이미 식민지 지배를 하고 있는 열강의 냉담한 반응으로 전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외교활동에 소득이 없고, 특히 외교론의 이승만의 이러한 위기 속에서 청원한 위임 통치 청원서가 임시정부에 알려지자 임정의 독립운동가들은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위해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이 회의서 실력양성을 주장하는 개조파와 무장투쟁을 주장하는 창조파가 대립하였는데, 결국 합의점에 이르지 못한 채, 대부분의 임정의 독립운동가들이 이탈하게 되었다. 이 이후 항일운동에서 민족의 대표기관이었던 임시정부는 일개 단체로 전락한 체, 이후 김구의 활약으로 부활하기까지 오랜시기가 걸렸다.

한편 간도와 만주 연해주의 조선 동포들을 기반으로 조직된 항일무장단체들은 3·1운동을 계기로 평안북도 갑산·함경남도 혜산 일대와 압록강과 두만강을 중심으로 한 국경 지방에서 격렬한 무장투쟁을 벌였다.

1920년 3월 12일에는 니콜라옙스크 사건으로 독립군과 붉은 군대는 일본군과 하얀 군대를 전멸시켰다.[1][2] 일제는 국경 지방의 독립군을 뿌리 뽑지 않고서는 조선을 지배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대규모로 군대를 동원하여 독립군 토벌에 나섰다. 이때 홍범도 부대는 북간도 왕청현 봉오동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쳐들어오는 일본군을 전멸시켰다(1920년 6월). 또 김좌진(金佐鎭)과 홍범도 등이 지휘하던 독립군 연합부대도 작전상 후퇴를 거듭하면서도 북간도 화룡현 청산리에서 매복하여 일본군 1,500여 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다. 일본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간도에서 약 5,000명에서 수 만명에 이르는 한국 민간인을 학살하는 간도참변을 일으켰다. 독립군은 결국 일제의 토벌에 밀려 소련으로 들어갔는데, 여기서 각 부대들은 대열을 정비하기도 전에 독립운동의 주도권을 놓고 서로 대립했다.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 대오는 흩어지고 말았다.

이와 같은 공황 속에서도 노동쟁의·소작쟁의·학생운동·사상운동 등 일련의 항일투쟁은 꾸준히 전개되었고, 이 시기에 한반도에서는 6·10 만세 사건(1926년)과 3·1운동 이래 최대의 항일 운동인 광주 학생 항일 운동(1929년 11월 3일)이 일어나 일본에 일격을 가했다. 또한 만주지방에서는 유망민중이 교민회를 조직하여 자활을 모색하였으며, 많은 독립운동단체가 조직되어 조선 내외에서 일본 요인의 암살, 파괴활동을 적극적으로 펴나갔다.

계급투쟁

3·1운동을 거치면서 크게 각성한 노동자·농민들에 의해 계급투쟁이 급격히 발전했다. 1921년 9월 부산의 부두노동자 5,000여 명의 총파업투쟁, 1923년 8월 평양의 양말공장노동자 2,000여 명의 파업, 1923년 9월부터 1년이 넘게 전개된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도(현재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면)소작농민의 지주를 상대로 한 투쟁, 1929년 1월부터 3개월 동안 계속되었던 원산 총파업, 그리고 1930년 1월 3,000여 명의 여성노동자들이 1개월 동안 전개했던 부산 조선방직 파업투쟁 등이 대표적인 투쟁이었다.

이러한 노농투쟁은 점차 폭력화되어 1930년 5월 함경남도 신흥의 장풍탄광 노동자 300여 명은 노동조합의 설립을 방해하는 일본인 자본가와 경찰의 노동운동 탄압에 맞서 탄광 시설과 사택을 부수고, 을 쏘며 달려드는 경찰에게 도끼·망치·곤봉으로 맞서 육박전을 벌였다. 1930년 7월 함경남도 단천의 2,000여 명 농민들이 일제의 산림정책을 반대하여 군청을 포위·습격했다가 여러 명이 경찰의 총탄에 맞아 목숨을 잃기도 했다. 이러한 노동자·농민들의 계급투쟁은 생존권 확보에서 출발한 민중의 투쟁이었지만, 일제의 식민지 착취와 지배구조를 반대하는 항일의 성격을 띤 민족해방운동의 일환이었다.

신간회의 결성과 활동

1927년 2월 14일, 신간회 창립 모습.
1927년 2월 14일자 조선일보에서 신간회 창립을 보도하는 기사.

1920년대에는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의 영향으로 사회주의 사상이 한반도에 널리 퍼져 서울청년회·신사상연구회·북풍회 등 사회주의 사상단체가 대거 조직되었다.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운동농민운동 등 민중들의 계급투쟁을 지도하는 한편, 민중의 이익을 대변하는 계급정당 건설에 힘을 기울여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과 조선청년총동맹을 결성했으며, 1924년 4월 조선공산당을 지하에서 결성함으로써 사회주의 운동은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중국에서 1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지고, 사회주의자들은 민족주의 계열 내에서 자치 운동을 주장하는 타협적 민족개량주의자가 분화되자,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1927년 2월 신간회를 결성했다. 신간회 결성 후 각 지방에서 신간회 지회가 잇달아 결성되었는데, 1928년 말에는 모두 143개의 지회가 조직되었으며, 회원 수는 2만 명에 이르렀다. 신간회 본부와 각 지회는 당시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던 갖가지 계급투쟁을 주도하거나 지원했다.

특히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들 사이에서 일어난 충돌로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터지자, 진상 조사단을 파견하고 서울에서 대규모 민중대회를 준비하여 전국적인 항일운동으로 발전시키고자 했다. 일제는 민중대회 사건을 빌미로 삼아 신간회의 핵심 간부 40여 명을 체포했다. 이때부터 신간회의 활동은 움츠러들었고, 1931년 5월 사회주의자들의 주도로 해소되었다.

근우회

1927년 조선에서는 여성운동 단체인 근우회가 건설되었다. 근우회는 계몽을 주장하는 기독교계와 계급투쟁을 주장하는 사회주의계의 대립이 있었지만,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가부장주의적 사회구조로 차별과 억압을 받던 여성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었다는 의미가 있는 단체였다.

혁명적 대중조직 건설운동

1930년대에 들면서 혁명적 노동 조합·농민 조합 운동이 활발히 일어났다. 노동 조합 활동가들은 경성트로이카 등 조직하여 지하에서 비합법적인 준비조직을 결성하고 표면으로는 합법적인 노동조합, 파업본부, 노동자 친목회 등을 결성하여 운동을 지도했다. 또한 공장신문·팜플렛·전단 등을 통해 노동자들에게 8시간 노동제, 최저임금제, 동일노동·동일임금을 선전하고 나아가 민족해방운동을 선동했다.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은 공업 시설이 집중된 흥남·함흥·원산 일대에서 가장 활발하게 일어났다. 1931~35년까지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을 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된 사람의 수는 전국에 걸쳐 1,759명이나 되었다.

농민조합 운동가들은 농촌 내의 기존 청년동맹·여성동맹·소년동맹을 혁명적 농민조합에 편입해 각각 농민조합의 청년부·부녀부·소년부로 만들어 역량을 강화하는 한편 농민의 이익을 위해 투쟁했다. 혁명적 농민조합의 지도하에 농민들은 격렬한 반일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했는데, 특히 함경북도 명천의 농민들은 동과 면마다 계엄대·동지탈환대·규찰대·연락대 등을 조직하고 일제의 폭력에 맞서 싸우는 등 투쟁을 대중적 폭동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혁명적 농민조합은 전국 70여 개 군에 조직되었고, 1931~35년에 경찰에 적발된 혁명적 농민 조합 사건은 43건, 검거된 사람은 4,121명에 이르렀다. 중일전쟁이 일어난 뒤 더욱 엄혹해진 상황에서도 혁명적 농민 조합 운동은 비밀리에 계속되었다.

임시정부의 활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도하의 독립 운동은 1920년대 중반 대체로 침체되었으나, 김구의 주도하에 다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김구는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을 시켜 일왕을 암살하려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해외의 동포들이 격려 편지와 자금을 보내왔다. 김구는 이덕주와 유진식에게 일본 총독의 암살을 지시하여 본국으로 보냈다. 또한 윤봉길은 일본 천황의 생일연(천장절(天長節)) 겸 상하이 사변 전승 기념 행사에서 단상 위 일본 수뇌부들을 향해 수통폭탄을 투척하여 일본 제국의 주요 인사들을 처단하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두 사건의 주모자로 수배된 김구는 숨어다녀야 했으나 난징으로 거처를 옮긴 국민당 정부는 이러한 사건들로 임시정부를 협력 대상으로 생각하였고, 김구를 보호하였다. 일본의 영향력하에 들어간 상해에서 피신하여 1933년에는 장제스와 항일전선협력에 합의하였다.

이 무렵에 양기탁이 1933년 10월 국무령에 선출되어 1935년 10월까지 재직한다. 그러나 일본군이 중국을 침공함과 함께 임시정부는 상하이를 탈출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러 난징과 창사를 거쳐 1940년에는 충칭(重慶)으로 그 본거지를 옮기게 된다. 충칭에서 국민당과 미국의 도움을 얻어 1940년 9월 17일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하고, 제2차 세계 대전이 태평양 전선에서 확대된 1941년 12월 10일에는 연합군에 가담해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발표하지만, 본국 탈환 작전의 준비 중에 일본의 항복을 맞이하게 된다.

항일무장투쟁과 민족의 해방

한국의 독립운동에서 독립 전쟁이라 부를 만큼 항일무장투쟁이 활발했던 시기를 보면, 구한말의 의병 전쟁, 1910년대 국내 대한광복회와 조선국민회의 활동 및 국외 독립군 기지 개척과 독립전쟁의 준비체제 구축[3], 1920년대 만주와 연해주에서 전개된 독립군의 독립 전쟁, 1930년대 후반 만주에서 조국광복회 등의 보천보 전투를 비롯한 독립 전쟁, 1940년대 중국 관내에서 전개된 한국 광복군과 조선의용군의 독립 전쟁 등이 대표적인 것이었다.[4]

일제말기 국외 독립운동

광복군 청년공작대.

일제가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국을 건국하자, 만주에 있던 조선인들은 즉각 무장을 하고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먼저 양세봉(梁世鳳)·지청천(池靑天) 등 민족주의자들이 이끌었던 조선혁명군과 한국독립군은 중국인들과 손을 잡고 치열하게 저항했으나, 일제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아 차츰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한편 사회주의자들은 1932년 봄에 조선인이 많이 살고 있던 동만주를 중심으로 여러 지역에서 유격대를 결성하고 반일 투쟁에 나섰다.

중국 관내에서는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김원봉(金元鳳)·윤세주(尹世胄)·한빈(韓斌)·김학무(金學武) 등 130여 명이 중국 국민당으로부터 공식적인 지원과 도움을 받아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를 창설했다. 조선의용대는 중국군을 도와 일본군 포로 심문 대적 심리전, 적후방에서 벌이는 첩보 및 공작활동에 종사했다. 조선의용대의 주력 부대는 1941년 봄에 황허 강(黃河)을 건너 조선인이 많이 사는 화베이(華北)지방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의용대원들은 이곳에서 팔로군과 협력하여 호가장 전투, 반소탕전 등 여러 전투에 참가하여 크게 활약했다.

한편 중일전쟁 발발 후 일본군에 쫓겨 자싱·항저우·창사 등지로 전전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0년 충칭에 안착했는데, 그 해 9월 17일 간부 12명으로 한국 광복군을 창설했다. 광복군은 1942년 화베이로 가지 않은 조선의용대의 잔류부대를 흡수하여 대열을 늘리는 한편, 1943년 8월 구(舊) 조선의용대원 출신 광복군 8명을 선발대로 심리, 선전전 특수요원을 인도, 버마 전선에 파견해 영국군을 도와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다.

그리고 중국 주둔 미국 전략첩보기관인 OSS와 합작하여 조선 진입작전을 추진했다. 광복군과 OSS 사이에 "광복군 대원들을 선발하여 첩보훈련을 실시하고 이들을 한반도에 침투시켜 적 후방 공작을 전개한다."는 내용의 '독수리작전(Eagle Project)'을 매개로 하여 1945년 5월부터 4개월 과정으로 훈련이 실시되었던바, 이무렵 서안에 있던 제2지대와 부양에 있던 제3지대가 훈련을 받아 제1기생 훈련이 8월 4일 완료되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일제가 일찍 항복하여 조선 진입작전이 좌절되었다.[5]

1940년대 조선에서의 독립운동

서울 종로구 낙원동의 건물. 이 건물은 1944년 8월 10일, 여운형을 중심으로 조직된 지하 비밀 결사 독립운동 단체인 건국동맹이 결성되었던 곳이었다.
8월 16일 오전 9시 마포형무소[6]

1930년대 중후반 중일전쟁과 수양동우회 사건 등을 계기로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등 수 많은 독립운동가들 가운데 전향서를 쓰거나 변절자가 속출했다. 1939년 10월 말경 일제 경찰에게 요시찰, 요주의 인물로 등재된 인원은 약 7600여명에 달했는데 그 중 전향자는 3076명으로 약 40%를 차지했다. 비전향자는 23%인 1765명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심경불명으로 구분되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도 193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한반도의 반일운동은 민족주의자들의 비중이 커져가는데, 이는 1940년대에도 나타났다. 당시 사상범 검거 상황을 보면 1941년 경우 공산주의자들이 전년이 668명에서 대폭 줄어 158명인데, 민족주의자는 72명 ~ 176명으로 늘었다. 이무렵 일제는 전시체제였고 거의 모든 분야에 발악을 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수 많은 이들이 강제 징집, 징용 등등 끌려가는데도 불구하고 유언비어 유포, 태업, 공출 기피, 징용 및 학병 기피 거부 등등 소극적인 반일 움직임이 곳곳에서 펼쳐졌다.[7]

건국동맹은 1944년 8월 10일, 여운형조동호 등을 주축으로 결성되었다. 건국동맹의 강령은 간략했다.

#각인각파를 대동단결하여 거국일치로 일본 제국주의 제 세력을 구축하고 조선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할 것.

  1. 반추축 제국과 협력하여 대일 연합전선을 형성하고 조선의 완저한 독립을 저해하는 일체 반동세력을 박멸할것.
  2. 건설부면에 있어 일체 행위를 민주주의적 원칙에 의거하고 특히 노동대중의 해방에 치중할 것.[8]

중앙조직과 지방조직을 세우면서 건국동맹은 치안대와 군사단체 조직, 국외 독립운동 단체와의 제휴 활동을 벌였다. 조동호 등으로 군사위원회 조직하여 후방 교란 활동을 벌이게 하였고, 박승환 등 만주군 장교들을 규합했으며 북경을 거점으로 하여 화북 조선의용군과 연결했고, 충칭 임시정부와도 연락하고자 했다.

이어 1944년 10월에는 농민동맹이 조직되었는데, 이 조직은 건국동맹의 우군이었다. 여운형은 학생, 교사, 철도원, 여성 등도 조직하였고, 징용, 징병 거부자들의 조직에 관여하였으며 공산주의자들과도 연결되어 있었다.[9]

1944년 말~1945년 초에 이르러 조선건국동맹·공산주의자협의회·자유와독립그룹·경성콤그룹 세력 등이 무장투쟁을 위해 비밀연락·연대를 활발히 벌였다.

정병준,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 광복 직전 독립운동세력의 동향, 2008[10]

8월 15일 아침 조선총독부 요청에 따라 엔도 류사쿠 정무총감을 만난 여운형은 5가지 조건을 요구[11] 하였고, 엔도 정무총감은 상황이 상황인지라 여운형의 5가지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전국의 옥문이 열리고 정치범(독립운동지사들)이 석방되었다.[12]

건국동맹은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후 기구를 확대 개편하여 건국준비위원회로 발전하게 된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전으로 해방이 되면서 일본과 식민지 주종관계를 완전히 청산하고, 한국의 모든 독립 운동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1940년대 일본에서의 독립운동

1942년 이홍장 등 중학교 학생들이 조직한 지하단체 일진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만주로 망명하려다 적발되어 체포된 이홍장은 1944년 6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및 육군 형법 위반 혐의로 5년형을 선고받고, 소년원에서 복역 중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지만, 정체 모를 주사 등 고문 후유증으로 8·15 광복을 3일 앞두고(1945년 8월 12일) 순국했다.

같이 보기

각주

  1. The destruction of Nikolayevks-on-Amur: An episode in the Russian civil war in the Far East, book review in th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 Kim Young Sik, Ph.D. The Free City (Amur River – Hukgang) Incident The left-right confrontation in Korea – Its origin 보관됨 2015-09-23 - 웨이백 머신 Association For Asian Research 11/13/2003
  3. 예컨대 서간도 백서농장군영(白西農庄軍營) 등.
  4. 우리역사넷 > 신편 한국사 > 근대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5. 《지배자의 국가/민중의 나라》, 서중석 저.p112
  6. 8월 15일 서대문 형무소로 알려졌으나 이는 잘못 알려진 것이다. 한편, 가운데 검은색 바지 입은 인물 뒤에 이마만 보이는 인물이 당시 22살의 나이로 마포형무소에서 수감한 이갑상
  7. <지배자의 국가/민중의 나라>, 서중석 저.
  8. 고등학교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금성교과서.
  9. <지배자의 국가/민중의 나라>, 서중석 저. p116
  10. 정병준,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 광복 직전 독립운동세력의 동향, 2008
  11. 1.전국적으로 정치범, 경제범을 즉시 석방할것. 2.서울의 3개월 분 식량을 확보할 것. 3.치안 유지와 건국 운동을 위한 정치 운동에 대하여 절대로 간섭하지 말것. 4.학생과 청년을 조직, 훈련하는 데 대하여 간섭하지 말 것. 5. 노동자와 농민을 건국 사업에 동원하는 데 대하여 절대로 간섭하지 말 것.
  12. <지배자의 국가/민중의 나라> 서중석 저.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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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독립운동

출처 : 무료 백과 사전 "Wikipedia (Wikipedia)"

조선독립운동 은 조선왕국시대 · 일본통치시대 · 연합국군군정시대 에 조선인이 실시한 조선 의 독립운동 이다.

조선왕국시대의 독립운동

 · 이홍장 편 '통상장정성안 휘편'( 1886년 ) 수록의 '고려(이씨 조선) 국기' 그림. 「대청국속」이라고 부기되어 있다.
대청제국의 독립을 축하하며 건립된 독립문

이 시대의 독립운동은,  을 중심으로 한 책봉체제 로부터의 이탈을 목적으로 행해졌다.

1637년 미타도와의 맹약 체결 이후 조선왕조 는 청의 책봉  이었고, 청은 조선을 종속국 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는 청의 북양통상 대신 이강장이 1886  에 편찬한 '통상장정성안 휘편'에서 조선의 국기 인 태극기 를 '대청국속 고려국기'로 명기해 게재하고 있다 [ 1 ] 는 사실 에서 볼 수 있다. 다만, 책봉체제에서 책봉을 받는 측의 국가는 고도의 자치를 보장받고 있었기 때문에 완전히 주권 을 빼앗는 식민지화 와는 다른 개념임을 주의해야 한다. 하지만, 메이지 유신 후의 일본 에서 정한론이 높아지면, 조선과의 근대적 인 외교 관계 구축을 목표로 하는 메이지 정부(후의 대일본 제국 )는, 책봉 체제의 유지를 명목으로 국교 체결을 범하는 조선 에 대해 무력으로 압력을 가해, 1876년 에 조선 최초의 근대적인 조약 이 된다. 이에 따라 조선은 책봉체제를 유지하면서 서양식 외교관계도 가진 대외적으로 불안정한 상태가 됐다.

당시 조선은 왕가인 이씨 와 양반 으로 불리는 지배 계급 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지만, 일본에 의한 압력이 강해짐에 따라 일본에 대항하는 측( 사대당 )과 일본과 협력해 책봉 체제를 벗으려는 측( 개화파 )에 헤어진 대립이 일어났다. 일본 측에서 보면 후자가 독립파로 취급된다. 책봉체제 이탈을 목표로 하는 세력은 일본에 유학해, 후쿠자와 유키치 등의 지원을 받고 있었지만, 왕을 비롯한 이탈을 원하지 않는 세력에 의해 숙청되어 갔다( 임오군 난등 ). 이런 가운데 동학당의 난( 갑오농민전쟁 )을 비롯한 조선국내 농민반란에 대해 책봉체제 유지를 바라는 청은 조선과 협조해 반란을 진압하는 등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해 나갔다. 조선의 책봉체제 이탈을 바라는 일본은 청국과 전단을 열고( 일청전쟁 ) 시모노세키 조약 에 따라 조선의 책봉체제 이탈이 확인됐다. 덧붙여 시모노세키 조약은 일본과 청 사이에 맺어진 조약이며, 조선의 의사는 반영되어 있지 않다.

시모노세키 조약의 체결을 받아 조선왕국은 국내 체제를 재차 대한제국 (구한국)이 되어 현대적인 국가 로서 독립 한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조선에의 영향력을 강화하고 싶은 일본의 의도와는 반대로, 일본의 영향하에 들어가고 싶지 않은 한국 황제를 비롯한 파벌은 러시아 제국 에 접근해 갔다. 이 때문에 한국과 러시아의 접근을 두려워한 일본은 마찬가지로 러시아의 극동에서의 영향 확대를 싫어한 영국 과 동맹( 일영동맹 )하고 러시아와의 사이에 전단을 열어( 일러전쟁 ), 포츠머스 조약 의 체결로 러시아의 조선에 있어서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 후 일본은 한일협약 등 다양한 불평등조약 을 구한국과 맺어 조선의 영향력을 강화한 끝에 결국 한일병합조약 체결에 이르고 조선을 일본 일부에 병합했다( 한국병합 ).

일본 통치 시대의 독립 운동

이 시대의 독립운동은 대일본제국 으로부터 조선의 주권을 되찾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당초 민족해방운동과 신민회

한국 병합 에서 대한 제국이 가진 주권이 대일본제국 으로 이관되자 이에 따라 특권 을 빼앗긴 양반 과 민족주의자 등이 조선독립운동을 벌였다. 조선총독부 의 헌병경찰제도 에 의한 무단통치 시기에는 항일 운동은 언론의 자유 · 결사의 자유 와 함께 엄격히 단속되었다. 이로부터 한반도 내에서는 비밀결사 형태의 항일 운동이 전개되었으나 당초는 주로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특히 이씨 조선 시대 말기에 고종이 퇴위된 뒤 결성된 신민회 는 애국 계몽세력 등이 주축이 되어 서간도 의 삼원도에 세워져 조선의 독립운동사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 신흥강습소( 신흥무관학교 의 전신) 설립. 그러나 신민회는 안악사건 이나 105명 사건 등에 의해 곧 해산될 수 있게 됐다. 또한 신민회 이후 결성된 독립운동단체의 대부분은 공화제 를 주장하게 되었다.

신민회 이외에도 만주 에 무관학교를 설치하는 자금모집을 하기 위해 1915년 대구에서 만들어진 대한광복회와 독립운동 자금조달과 그 자금 해외로 송부하기 위해 1913년 평양 숭의 여학교에서 만들어진 송죽회 등이 존재했다.

일본 국외에서의 운동 모색

한국 병합 이후 일본에 의한 통치에 반발한 농민 들은 만주 간도 와 러시아 연해주  대거 이주해 이 지역에서 신한촌 등  조선인 촌락이 형성되어 갔다. 한편 조선총독부 에 의한 항일운동의 엄격한 단속으로 반도 내에서의 민족해방운동이 어려워지자 독립운동가들은 반도외에서 민족해방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이 양자의 움직임이 합쳐져 만주와 러시아가 한반도 밖의 독립운동기지의 기초가 되었다. 구체적으로는 연해주에서는 이범정이 중심이 된 권업회와 이상원과 이동휘 가 중심이 된 대한광복군 정부, 북간도에서는 의병장 출신인 홍범 그림이 이끄는 대한독립군과 대구교 세력, 니시마섬에서는 구신민회 세력이 주축이 된 경학사나 부민단 등 항일민족단체가 잇따라 시작됐다.

또 미국주 에서도 안창호 와 박용만 등이 중심이 되어 대한인 국민회를 시작하여 이 지역에서 독립운동의 활발화를 시도했다.

삼·일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탑콜 공원의 독립 선언서 기념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기념 사진(1919년 10월 11일)
후열 왼쪽에서 시계방향으로 김택, 윤현진, 최창식, 이춘학, 현사, 안창호 , 신익희 .

제1차 세계대전 말기인 1918년 1월 미국 우드로우 윌슨 대통령 이 ‘14 조의 평화원칙 ’ 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조선인들 사이에서 민족자결 의 의식이 높아져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 장례  맞춘 대규모 운동이 계획됐다.

1919년 3월 1일 정오, 경성부 의 탑골공원 에서 독립선언서의 낭독으로 독립을 선언한 학생과 청년들이 수만 명의 군중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 을 한 것을 발단으로 삼·일운동은 시작됐다. 운동은 총독부 경찰과 군대 투입으로 치안유지가 전개되는 가운데 한반도 전체에 퍼져 몇 달에 걸쳐 시위행동이 이어졌다. 3월~5월에 걸쳐 시위에 참가한 인원수는 205만명, 시위 발생 횟수는 1,542회로 되어 있다. 그러나 총독부가 헌병 이나 순사 , 군대 를 증강한 것에 의한 무력탄압에 의해 운동은 점차 종식해 나가게 되었다.

삼·일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가들은 독립운동에는 구심점이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각 지역에서 창설된 망명정부 를 통합할 필요성이 주장되게 되었다. 그로부터 당시 세계에서의 외교의 각축장에서 각국의 외교관 에게 접근이 취해져 일본의 경찰권이 미치지 않는다는 이점이 있던 중국· 상해 의 프랑스 조계 에서 191 9년 4월에 '한민족의 광복 의지의 결속'을 내건 ' 대한민국 임시정부 '가 발족해 같은 시기에 발족한 블라디보스토크 의 대한국민의회와 반도의 한성정부도 통합해 나갔다.

임시정부는 당초 대통령제 를 표방했고,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 이었다. 이승만은 외교론자로 외교전략에 의해 독립을 이기려고 했다. 임시정부는 1919년 파리강화회의 와 1922년 워싱턴 회의 에 대표를 파견해 독립을 호소했지만 일본과 마찬가지로 식민지 를 보유하고 있는 열강 국가들의 반응은 매우 냉담한 것으로 전혀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외교활동에서는 소득을 얻을 수 없고, 특히 외교론자 이승만이 이런 위기 속에서 청원한 위임통치 청원서가 임시정부에 알려지자 임시정부의 독립운동가들은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위해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했다. 그러나 이 회의에서는 실력양성을 주장하는 개조파와 무장투쟁을 주장하는 창조파가 대립하게 되어 결국 쌍방의 걸음을 볼 수 없는 채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이 임시정부를 떠나게 되었다. 이 이후 항일운동으로 민족의 대표기관이었던 임시정부는 일약소단체로 전락해 김구 의 활동으로 복권할 때까지 장기간이 걸렸다. ( 복권 후의 활동에 대해서는 후술 .)

1920년대 항일운동

하마 사건 으로 소실 된 일본 영사관

1920년 에는 조선인 파르티잔 은 러시아 적군 파르티잔과 협력하여 니콜라예프스크 를 점령하고, 일본군 수비대를 전멸시켜, 일본 영사 일가를 비롯해 일본인 거류민 수백명을 살해했다( 아마나토 사건 ) [ 2 [ 3 ] .

한편, 간도를 중심으로 한 만주 및 연해주에 잠복하고 있던 독립운동가들에 의해 조직된 항일무장단체인 독립군 은 3·1운동을 계기로 헤이안 북도 ·고산이나 함경남도 · 혜산 일대  압록강  두만강 유역 의 국경 지대에서 양민과 관공  .

1920년 10  에는 만주 의 훈춘 에서 마적 과 독립군이 주훈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고 일본인 20명을 살해 하고 일본 영사관을 태우는 사건이 발생했다( 간도 사건 ) . 총독부는 중국 측과의 절충을 개시해, 10월 16일 에는 길림성 도독의 허가를 얻어 게릴라 소토를 개시했다( 아오야마리 전투 ). 독립군과의 전투는 오로지 연길 · 화룡 방면에 전개된 조선군 제19사단 동지대와의 사이에서 전개되었지만, 일본측의 피해는 지극히 경미한 것으로, 전투가 시작된 5일 후인 10월 26일 까지 작전 구역에서 독립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하여 다음 1921  한편, 독립군은 만주를 포기하고 레닌이 구상한 원동혁명군에 참가하기 위해 시베리아 로 향했지만, 독립운동에서 주도권을 둘러싼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의 내분과 적군 에 의한 무장 해제에 의해 1921년 6월에는 괴멸 상태에 빠졌다( 자유시 참

다만 만주에서는 독립군 이외에도 승민회를 비롯한 많은 독립운동단체가 조직되어 국내외에서 일본 요인에 대한 습격과 파괴활동을 전개했다.

또 같은 시기에는 일본 내지( 내지 )에서 구 조선 왕가인 이왕가 의 왕태자 살해를 도모한 이왕 세자 암살 미수 사건 도 발생하고 있다.

6·10만세 운동과 신간회·간우회

신간회의 창립을 전하는 동아 일보의 지면(1927년 2월 14일)

1920년대 에는 학생운동 , 사상 운동을 통한 항일운동이 끊임없이 전개되었지만, 이 시기는 러시아 제국 에서 일어난 10월 혁명 의 영향으로 사회주의 사상이 조선에서도 만연하게 되어 서울청년회·신사상연구회·북풍회 등 사회주의사상단체가 많이 결성됐다.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운동 이나 농민운동 등 민중들의 계급투쟁을 지도하는 한편, 민중의 이익을 대변하는 계급정당 건설에 노력하고, 1924년 에는 앞서 언급한 조선노농총동맹과 조선청년총동맹이 발족해, 같은 해 4월에는 지하조직으로서의 조선공산당 을 결성하는 것.

1924년 중국 에서 제1차국공합작이 성립하자 조선인 사이에도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 사이에서 협조하는 분위기가 태어나 1926년 한반도에서 6·10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이 결과 조선총독부 경찰 의 적발로 조선공산당이 괴멸상태에 빠지지만 신간회와 근우회 등 결성에 영향을 미쳤다.

신간회는 민족주의 계열이 자치운동을 주장하는 대일 타협적 민족 개량주의자와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로 분화된 것을 받아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결탁하여 1927년 2월에 결성했다. 신간회의 결성 후, 각 지방에서 신간회의 지회가 잇따라 결성되어, 1928 년 말 에는 전부 143의 지회가 조직되어, 회원수는 2만명에 이르렀다. 신간회 본부와 각 지회는 당시 활발히 일어났던 다양한 계급투쟁을 주도하거나 지원했다.

특히 1929년 11월 광주 에서 조선인 학생 그룹과 일본인 학생 그룹 간 충돌 사건( 광주 학생 사건 )이 일어났을 때는 진상조사단을 파견해 경성에서 대규모 민중대회를 준비하고 반도 전역에서 항일운동을 일으키는 것을 목격했다. 광주 학생사건이 삼·일운동 이후 최대 항일운동이 된 뒤 총독부는 신간회 주요 간부 약 40명의 체포에 착수했다. 이것에 의해 신간회는 쇠퇴해, 1931년 5월에 해산하게 되었다.

또한 근우회 조선어판 ) 는 여성운동단체로서 1927년 5월에 창설되어 신간회의 자매단체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근우회는 계몽을 주장하는 기독교계 와 계급투쟁을 주장하는 사회주의계의 갈등이 있었다.

사회주의자에 의한 계급투쟁

1920년대 에 지식인들 사이에서 삼·일운동의 탄압을 계기로 한 민족주의 세력의 쇠퇴나 사회주의 사상에 있어서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의 대두가 일어나자, 정치적·경제적면에서 사회주의 에 각성한 노동자 나 농민 들이 한반도에서도 증가했다. 이들은 제1차 세계대전 후 전후 공황 속에서 노동운동 과 소작쟁의 를 통한 대규모 계급투쟁 을 전개하게 되었고, 이 시대의 민족운동에서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20년 4월에는 경성 에서 '노동사회의 조직과 제도의 개선'을 최종 목적으로 한 '조선노동공제회'가 결성되어 그 후는 '조선노동연맹회', '조선노농총동맹'으로 개편을 거쳐 1927년 9월에 '조선노동총동맹', '조선농민총동맹'

그 밖에도 1921년 9월 부산에서 일어난 부두노동자 5,000명에 의한 파업 투쟁을 시작으로 반도 전역에서 장시간 노동과 부당한 위약금 징수, 일본인 노동자와의 임금 격차 등 조선인 노동자들이 자신의 열악한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대규모였던 것은, 1923년 8월에 평양 양말 공장에서 일어난 노동자 2,000명에 의한 파업, 1923년 9월부터 1년 이상에 걸쳐 전개된 전라남도 신안군 이와타시마에서의 소작 농민의 지주를 상대로 한 투쟁, 1929년 1월부터 3개월간 계속된 모토야마 제네스트 , 1930년 1월에 3,000명의 여성 노동자들이 1개월간에 걸쳐 갔다, 부산 조선

이러한 노농투쟁은 점차 폭력적이 되어 1930년 5월에는 함경남도 신흥 장풍탄광 노동자 300명이 노동조합 설립에 반대하는 일본인 자본가 와 조선총독부 경찰 의 탄압에 대해 탄광시설과 자본가의 사택을 파괴하고 위협 사격을 계속하는 경찰에 대해 도끼 나 망치 , 동봉 등에 의한 육탄전으로 맞이하려고 했다. 1930년 7월에는 함경남도 단천 에서 2,000명의 농민들이 총독부에 의한 산림정책에 반대하여 군청을 포위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나오는 소란이 되었다.

혁명적 대중조직 건설운동

1930 년대 에 들어서 혁명적 노동조합 · 농민조합 운동이 활발하게 활동하게 되었다. 노동조합 활동가들은 경성 트로이카를 조직해 지하에서 비합법적인 준비조직을 결성하는 한편 표면에서는 합법적인 노동조합, 파업 본부, 노동자 간친회 등을 결성해 운동을 지도했다. 또 공장신문과 팜플렛 등을 통해 노동자들에게 8시간 노동제 와 최저임금제 도, 동일노동 동일임금 을 선전하고 나아가 민족해방운동을 선도했다.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은 공업시설이 특히 많았던 함경남도 의 흥남 · 함흥 · 원산 일대에서 가장 활발하게 일어났다. 1931년 ~ 1935년 에 이루어진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으로 조선총독부 경찰 이 체포한 인원수는 반도 전체에서 1,759명에 달했다.

농민조합 활동가들은 농촌 내 기존 청년동맹·여성동맹·소년동맹을 혁명적 농민조합에 편입하고 각각 농민조합의 청년부·부녀부·소년부를 창설해 역량을 강화하는 한편 농민의 이익을 위해 투쟁을 계속했다. 혁명적 농민조합의 지도하에 조합에 소속된 일부 농민들은 격렬한 민족주의적 해방운동을 전개했지만, 특히 함경북도 · 아카가 와의 농민들은  과  마다 계엄대·동지탈환대·감시대·연락대 등을 조직해 총독부의 탄압에 대항하는 등 투쟁. 1931년 ~ 1935년 까지 진행된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으로 조선총독부 경찰 이 적발한 사건은 43건, 체포한 인원수는 4,121명에 달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복권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도 아래 독립운동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20년대 중반 이후에는 쇠퇴하고 있었지만 김구 의 주도 아래 다시 활발하게 이뤄졌다. 김구는, 1932년 1월 8일 에 이봉창 을 보내고, 천황 의 암살을 시도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사쿠라다몬 사건 ). 이어 김구는 윤봉길 을 일본에 의한 제1차 상하이 사변 의 전승을 기념한 대관병식과 천장절 축하회에 보내 폭탄 테러를 감행시켰다( 상해 천장절 폭탄 사건 ). 이후 항일 테러 사건의 수모자로 일본 경찰에 지명 준비된 김구는 도망생활에 들어갔지만 중국 정부는 임시정부를 협력대상으로 생각하고 김구 를 보호해 1933년 에는 담개석 과 항일선전 협력에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이 무렵梁起鐸이 1933년 10월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1935년 10월까지 재직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중국 침출에 따라 임시 정부는 상하이를 탈출해야 하고 난징과 장사 를 거쳐 1940년 에는 충칭 으로 그 본거를 옮겼다. 충칭으로 국민당과 미국의 원조를 얻어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하고, 제2차 세계대전 이 태평양 전선으로 펼쳐진 1941년 12월 10일 에는 대일 선전 포고(일본 정부에 포고문서는 통달되지 않았고, 실효성은 전무)를 실시했지만, 일본군과는 한 번도 교전하는 일이 없는 채, 일본의 패전을 맞이하게 되었다(후술 참조).

항일무장투쟁과 민족의 해방

국외에서의 독립운동

삼·일운동이 일본군 앞에 감히 진압되었기 때문에 독립운동가들은 청원이나 시위운동보다 무력에 의한 타도를 중시하고 만주에서 독립군을 결성해 무장투쟁  시작 했다 . 그러나 독립군도 1920년 말에는 일본군의 군사력 앞에 무잔으로 패퇴하고 소련령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 5 ] .

이 경험으로부터 무력투쟁으로 해도 근대전에 정통한 군인의 필요성을 느끼고, 우수한 젊은이를 중국 각지의 군관학교에 파견할 계획을 세워 그것을 실행했다 [ 5 ] . 여기에는 김구와 로운료 등이 관련되어 있어 한국 임시정부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 5 ] . 황양군관학교 에서는 제3기에 4명, 제4기에 24명, 제5기에 6명, 제6기에 9명, 제7기에 1명이 입학했다 [ 6 [ 7 ] . 이들 한적학생의 대부분은 국민혁명군의 북벌과 중국 공산당의 광저우 기의 에 참가했다 [ 7 ] . 중국군 장교로서 북벌종군 후에 일부는 탈대해 동북부의 독립군에 참가했다 [ 8 ] . 또 군에 남은 자도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예를 들어 4기생 김종, 이집중, 양경, 노일룡, 박건웅 , 이우연, 오세진, 노세요시는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의 골간요원이 되어 제5 기생 박시창 이나 신악도 뒤에 조선의용대와 광복군에 참가, 장흥 은 중국군 헌병기관에 근무하면서 독립운동가의 통신연락공작에 종사하고 있었다 . 7 ] . 또 상하이 천장절 폭탄 사건에서 사용된 폭탄은 당시 중국군에서 무기를 관리하는 장교였던 김홍단 이 김구측에 제공한 것이었다.

1932년 중국 정부의 지원으로 김원봉 등 조선민족혁명당이 간부훈련반 제6대를 조선혁명간부학교로 운영해 제1기생 및 제2기생 80명에 대해 교육을 했다 [ 8 ] . 그 밖에 1935년에는 강택 중국어판 ) 을 주임으로 하는 중앙 육군 군관학교 특별반에 적 후방의 공작 훈련을 목적으로 84명이 입학하여 조선의용대의 골간요원이 되었다 [ 8 ] .

또 중국 정부는 임시 정부도 지원해 1932년 중앙 육군 군관학교 낙양분교군관 훈련반 제17대에 92명이 입학했다 [ 8 ] . 1935년에는 한국 독립군 특무대 예비훈련소가 설치돼 28명이 교육을 받았다 [ 8 ] . 이 학생들은 한국 광복군의 골간이 되었다 [ 8 ] .

일본이 1931년 9월 만주사변 을 일으켜 동년 말까지 만주 전토를 점령하자 재만의 독립운동가들은 즉시 무장해 일본군과 대치했다. 먼저 양세봉과 연못청천 등 민족주의자들이 이끈 조선혁명군과 한국독립군은 중국인들과 제휴해 일본군에 전투를 했지만 연전 연패를 계속해 만리장성 이남으로의 후퇴를 강요당했다. 한편 사회주의자들은 1932년 봄에 조선인이 많이 살았던 만주를 중심으로 많은 지역에서 유격대를 결성해 항일 투쟁  펼쳤다 .

1937년 일중 전쟁 이 발발하자 김원봉 과 윤세교, 한장, 김학무 등 약 130명이 중국 국민당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지원을 설치,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 를 창설했다. 조선의용대원에게는 중국어 · 조선어 · 일본어 에 능통한 자가 많았기 때문에, 일본군의 포로에 대한 심문이나 대적 심리전, 적 후방에서의 첩보 및 공작 활동에 종사하는 케이스가 많았다. 조선의용대의 주력부대는 1941년 봄에 황하 를 건너 조선인이 많이 사는 화북지방으로 활동  거점 을 옮겼다 . 화북으로 옮겨진 의용대원들은 팔로군 과 협력해 후가소 전투나 반소 토전 등 많은 전투에 참가 했다 .

광복군 청년공작대

가흥 · 항주 ·장사 등을 전전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0년 충칭에 안착했지만 같은 해 9월 간부 12명으로 한국 광복군 을 창설했다.

이처럼 광복군은 한번도 일본과 교전하지 않고 일본의 항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김구는 일본이 항복했다는 일보를 들었을 때, 하늘을 부르고 장탄식한 후, “한국군은, 일본군을 깨는 일은 없었다. 멸망 해도 좀 더 몹시 재건될 것이다 . 힘을 갖고 있을까 . 9 ] .

1946년 2월 3일 통화 사건 때 조선인민의용군은 동북민주연군 과 협력하여 중화민국 정부 와 일본인 의 봉기를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 진압 후에는 일본인 수천명을 처형한 이후 통화에서 일본인의 봉기는 없어졌다.

반도 내에서의 독립운동

서울특별시 종로구 낙원동에 있는 건국동맹 발족지가 된 빌딩

1930년대 후반부터 수양동우회 사건 조선어판 ) 과 만주사변 이나 초기 일중전쟁 에서 연전연승을 계기로 한반도에서는 일본을 사대주의 의 대상으로 하는 의식이 점차 침투하게 되어 최린을 비롯한 삼·일독립 선언문. 1939년 10월 말경 총독부 경찰에 요주의 인물로 표시되어 있던 인원수는 약 7,600명에 달했지만, 그 중 약 40%인 3,076명이 전향을 표명하고 있다. 비전향자는 약 23%의 1,765명 밖에 남지 않았고, 나머지 37%는 알 수 없었다. 또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자금으로 칭하여 일반 양민으로부터 금품을 강도를 하는 사건도 다수 발생하고 있어 “도에게 민원을 초대”하고 있다고 보고되고 있다 [ 10 ] .

이런 상황 속에서도 1930년대 후반부터 반도 내 항일활동가 중 민족주의자의 비율은 증가의 일도를 거쳤으며, 1940년대에 들어가도 그 경향은 계속되었다. 1940년~1941년에 걸친 사상범 검거 상황에 따르면 공산주의자의 체포자 수가 668명에서 158명으로 감소한 반면 민족주의자의 체포자 수는 72명에서 176명으로 증가하고 있다.

일미 개전 이후 일본에서는 전시 체제가 깔려 외국인 한반도에서도 모든 분야에서 물자 부족이 외치게 되었다. 전쟁 말기의 국민징용령 의 조선에 있어서의 시행에 따라, 내지에서 일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드마의 유포나 사보타주, 징용 이나 징병, 학병, 공출의 거부라고 하는 소극적인 형태로의 항일 활동도 보였다 요출전 ] [ 11 ] [ 링크 끊어짐 ] .

제2차 세계대전 중 국외에서의 독립운동은 반도에서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고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때문에 사이판 섬 옥쇄를 계기로 일본의 패전이 농후해도 충칭의 임시 정부에서는 임시 정부가 연합국으로부터 독립 후의 정당한 정부로 인정되지 않는 즉시 반도로 귀환할 수 없는 것은 우려가 떠오르게 되어 동포들이 사는 반도의 전후 상황을 불안시. 이런 점에서 1940년대 반도에서 유일한 독립운동단체였던 건국동맹 의 역할은 큰 것이 있었다. 건국동맹은 1944년 8월 10일 에 일본의 패전을 예상한 로운亨과 조동우 등을 주축으로 시작했다. 건국동맹의 강령은 간단하고,

# 각인 각파를 대동단결하고, 거국 일치로 일제를 구축하고, 한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한다.
  1. 연합국과 연합전선을 형성하고 일체의 독립을 저해하는 반동세력을 박멸한다.
  2. 민주주의적 건설과 노농대중 해방에 중점을 둔다.

라는 것이었다.

중앙과 지방에서 조직을 세우면서 건국동맹은 치안대와 군사단체조직, 국외독립운동단체와의 제휴 활동을 전개했다. 조동강 등에서 군사위원회 조직해 후방교란활동을 전개시켜 만주군관학교 장교들을 소수 규합하고 베이징을 거점으로 화북의 조선의용군과 연결해 충칭 임시정부와도 연락을 하려고 했다.

1944년 10월에는 농민동맹이 조직되었지만, 이 조직은 건국동맹의 우군이었다. 로운亨은 학생이나 교사, 철도원, 여성 등의 조직도 각각 소규모이면서 시작해 징용이나 징병의 거부자들의 조직에 관여하면서 공산주의자들과도 제휴하고 있었다.

서대문 감옥 을 출소한 정치범들

1945년 8월 15일 에 조선총독부의 요청에 따라 엔도 야나기 작정 무총감을 만난 로운亨은

#전조선의 정치범 ·경제범을 즉시 석방하라.
  1. 집단 생활지인 경성의 식량을 3개월분 확보하라.
  2. 치안 유지와 건설 사업에 아무런 간섭도 하지 말라.
  3. 조선에 있어서 지도력이 되는 학생의 훈련과 청년의 조직에 간섭하지 말라.
  4. 전조선에 있는 사업장의 노동자를 우리의 건설사업에 협력시켜 아무런 고통도 주지 말라.

라고 하는 5개조의 요구를 제시했다. 루에게 일본인의 생명 및 재산보호를 위한 치안협력을 요구하고 싶었던 엔도정무총감은 상황이 상황이었던 만큼 루의 요구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날부터 반도 전역의 옥문이 열리고 정치범들이 석방되었다.

건국동맹은 1945년 8월 15일 광복 직후 개편하여 ‘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로 발족했다. 이날 일본 항복 으로 조선독립운동은 상대를 연합국군 으로 바꾸어 계속됐다.

연합군 점령 하에서의 독립운동

1945년 9월 6일 조선 건국준비위원회 관계자의 손에 의해 조선인민공화국 의 건국이 구했다. 하지만 일본 항복 전후부터 조선으로 무력 진주 를 시작한 연합국 의 미국 과 소련 은 조선인민공화국의 정부 승인 을 거절하고 조선총독부 의 항복과 함께 각 점령지에서 군정을 깔아 조선을 남북으로 분할 통치했다. 연합군 점령하의 조선에서는 일본 통치 시대와 달리 강제 기출이나 재해 등으로 역병 유행과 물가 상승이 속발하고, 1946년 10월에는 남조선 [ 주석 1 ] 에서 230만명의 조선인이 연합국군 에 대해 봉기하는 대구 10월 사건 이 일어났다 .

조선의 즉각 독립을 부정한 연합국은 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국 외상회의 를 열고 조선을 일단 국제연합 의 신탁통치 하에 두는 것을 결정했다. 이 결정에 대해 남조선에서는 신탁통치에 찬성하는 사회주의 (소련) 세력의 동조자(좌파)와 구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 지도자에 동조하는 민족주의자 (우파)로 여론이 이분되어 테러 활동 도 포함한 격렬한 항쟁이 일어났다. 최종적으로 신탁통치 구상은 냉전 에 의한 미소 대립의 격화로 실현되지 않고, 미국은 1947년 조선독립문제를 유엔총회 에 반입했다. 유엔 총회는 “유엔 감시하에 조선 전토를 대상으로 하는 총선거를 실시하고 국회에 의한 정부 수립을 실시”하기로 결정했고, 선거가 가능한지 알아보기 위해 다음 1948년 1월 유엔 임시 조선 위원단(UNTCOK)을 조선에 파견했다. UNTCOK는 같은 해 2월 유엔 소총회에 'UNTCOK가 '임무 수행 가능한 지역'(남조선)에서 단독 선거 실시안'을 제출하고 찬성 다수로 통과됐다.

유엔의 의결은 남조선에서만 신정부를 수립하는 것으로, 조선이 독립할 수 있어도 남북으로 분리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전조선제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 의는 5.10 단독선거를 막기 위해 열렸다. 4월 19일부터 평양 모란봉 극장 연석회의에서 남조선의 41개 정당·사회단체와 북한의 15개 정당·사회단체에서 선출된 695명의 대표자가 참석했지만 이는 당시 남북을 모든 좌·우 세력의 대부분을 망라했다. 실제로 남조선에서는 남조선노동당·근로인민당 등 좌익계열의 정당뿐만 아니라 한국독립당·민족자주연맹 등 우익계열의 정당도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박헌영 · 백남운 ·김구·김규식·  소마  유명인 등 좌익 및 우익도 참석했다.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 군정청이 가장 싫은 좌파 배제에 성공한 이승만 과 한국민주당 은 1948년 5월 10일 열린 국제연합 감시하 총선거에 임했다(초대총선거). 이 선거는 '미소 양군 철수→남북요인회담→총선거라는 순서로 정부수립'의 3단계 방안에 반하고 있으며 한반도 남북분단을 고정화한다는 이유로 민족파 김구와 중도파 김규식 등 유력자도 포함한 대반대 안에서 강행되어 각지에서 반대파에 의한 무장투쟁이 전개되었지만,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승만과 한국민주당 등에 의한 일파는 정부 수립에의 움직임을 강행해, 남북 분리 독립에 반대하는 시민의 봉기를 군사력이나 테러로 진압했다. 특히 저항이 심했던 제주도 에서는 공권력에 의한 주민의 학살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져 진압까지 수만명이 살해되었다( 제주도 4·3사건 ). 결국 유엔 감시하의 남조선 단독선거 는 1948년 5월에 실시되었고, 단시간 독립준비를 거쳐 같은 해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선언되었다. 남은 조선지역(북한)도 선거를 거쳐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 건국되어 조선독립운동은 목표가 달성됐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조선통일문제 라는 새로운 과제를 만들어 2021년 에 이르기까지 미해결되고 있다.

각주

주석

  1.  여기서 말하는 남조선이란,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 의 점령 통치 를 받은 북위 38도선 이남의 조선 지역을 가리킨다. 북위 38도선 이북의 소련 점령 지역은 북한이라고 부른다.

출처

  1. ↑ 『통상장정안안안편』 권 삼십리 코장편 『통상장정안안휘편』(1886년) Google 북스
  2.  『일본 외교 문서 다이쇼 9년』 제1권 하권 p773
  3. ^ 아마 고토 일본인 전멸 언어로 끊어지는 과격파의 참학 미인의 보고
  4. ↑ 키타만 각지에 뛰어넘는 불량 선인의 정체(1~5) 만주일일 신문
  5. ↑ d 김찬정 『북한 건국신화의 붕괴 김일성과 ‘특별 저격 여단’’ 2012년, 122쪽.
  6. ↑ “ 황양군관학교 화한인 독립운동 ” (한국어). 국사 편찬 위원회. 2016년 1월 28일 열람.
  7. c 시론 한국 독립 운동 여 중국 광저우 관계 PDF )
  8. ↑ f “옛날 황양군관 요정지 니시공 병영” (중국어). 해협지성망 . (2014년 4월 16일) 2017년 2월 8일 열람.
  9. 코무로 나오키『한국의 비극―아무도 쓰지 않았던 진실』 광분사, 1985년
  10. 조선 총독부 시정 연보
  11. ↑ 서중석 "일제의 조선강점과 ​​한국의 독립운동 I. 일제의 지배정책"
  12. “ 주린배 움켜쥔 소시민들의 저항운동 (아끼는 배를 잡은 소시민들의 저항운동)” (조선어). 대구일보 . (2007년 2월 8일) 2011년 12월 18일 열람. 링크 끊김 ]

관련 항목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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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독립운동

출처 : 무료 백과 사전 "Wikipedia (Wikipedia)"

조선독립운동 은 조선왕국시대 · 일본통치시대 · 연합국군군정시대 에 조선인이 실시한 조선 의 독립운동 이다.

조선왕국시대의 독립운동

 · 이홍장 편 '통상장정성안 휘편'( 1886년 ) 수록의 '고려(이씨 조선) 국기' 그림. 「대청국속」이라고 부기되어 있다.
대청제국의 독립을 축하하며 건립된 독립문

이 시대의 독립운동은,  을 중심으로 한 책봉체제 로부터의 이탈을 목적으로 행해졌다.

1637년 미타도와의 맹약 체결 이후 조선왕조 는 청의 책봉  이었고, 청은 조선을 종속국 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는 청의 북양통상 대신 이강장이 1886  에 편찬한 '통상장정성안 휘편'에서 조선의 국기 인 태극기 를 '대청국속 고려국기'로 명기해 게재하고 있다 [ 1 ] 는 사실 에서 볼 수 있다. 다만, 책봉체제에서 책봉을 받는 측의 국가는 고도의 자치를 보장받고 있었기 때문에 완전히 주권 을 빼앗는 식민지화 와는 다른 개념임을 주의해야 한다. 하지만, 메이지 유신 후의 일본 에서 정한론이 높아지면, 조선과의 근대적 인 외교 관계 구축을 목표로 하는 메이지 정부(후의 대일본 제국 )는, 책봉 체제의 유지를 명목으로 국교 체결을 범하는 조선 에 대해 무력으로 압력을 가해, 1876년 에 조선 최초의 근대적인 조약 이 된다. 이에 따라 조선은 책봉체제를 유지하면서 서양식 외교관계도 가진 대외적으로 불안정한 상태가 됐다.

당시 조선은 왕가인 이씨 와 양반 으로 불리는 지배 계급 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지만, 일본에 의한 압력이 강해짐에 따라 일본에 대항하는 측( 사대당 )과 일본과 협력해 책봉 체제를 벗으려는 측( 개화파 )에 헤어진 대립이 일어났다. 일본 측에서 보면 후자가 독립파로 취급된다. 책봉체제 이탈을 목표로 하는 세력은 일본에 유학해, 후쿠자와 유키치 등의 지원을 받고 있었지만, 왕을 비롯한 이탈을 원하지 않는 세력에 의해 숙청되어 갔다( 임오군 난등 ). 이런 가운데 동학당의 난( 갑오농민전쟁 )을 비롯한 조선국내 농민반란에 대해 책봉체제 유지를 바라는 청은 조선과 협조해 반란을 진압하는 등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해 나갔다. 조선의 책봉체제 이탈을 바라는 일본은 청국과 전단을 열고( 일청전쟁 ) 시모노세키 조약 에 따라 조선의 책봉체제 이탈이 확인됐다. 덧붙여 시모노세키 조약은 일본과 청 사이에 맺어진 조약이며, 조선의 의사는 반영되어 있지 않다.

시모노세키 조약의 체결을 받아 조선왕국은 국내 체제를 재차 대한제국 (구한국)이 되어 현대적인 국가 로서 독립 한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조선에의 영향력을 강화하고 싶은 일본의 의도와는 반대로, 일본의 영향하에 들어가고 싶지 않은 한국 황제를 비롯한 파벌은 러시아 제국 에 접근해 갔다. 이 때문에 한국과 러시아의 접근을 두려워한 일본은 마찬가지로 러시아의 극동에서의 영향 확대를 싫어한 영국 과 동맹( 일영동맹 )하고 러시아와의 사이에 전단을 열어( 일러전쟁 ), 포츠머스 조약 의 체결로 러시아의 조선에 있어서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 후 일본은 한일협약 등 다양한 불평등조약 을 구한국과 맺어 조선의 영향력을 강화한 끝에 결국 한일병합조약 체결에 이르고 조선을 일본 일부에 병합했다( 한국병합 ).

일본 통치 시대의 독립 운동

이 시대의 독립운동은 대일본제국 으로부터 조선의 주권을 되찾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당초 민족해방운동과 신민회

한국 병합 에서 대한 제국이 가진 주권이 대일본제국 으로 이관되자 이에 따라 특권 을 빼앗긴 양반 과 민족주의자 등이 조선독립운동을 벌였다. 조선총독부 의 헌병경찰제도 에 의한 무단통치 시기에는 항일 운동은 언론의 자유 · 결사의 자유 와 함께 엄격히 단속되었다. 이로부터 한반도 내에서는 비밀결사 형태의 항일 운동이 전개되었으나 당초는 주로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특히 이씨 조선 시대 말기에 고종이 퇴위된 뒤 결성된 신민회 는 애국 계몽세력 등이 주축이 되어 서간도 의 삼원도에 세워져 조선의 독립운동사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 신흥강습소( 신흥무관학교 의 전신) 설립. 그러나 신민회는 안악사건 이나 105명 사건 등에 의해 곧 해산될 수 있게 됐다. 또한 신민회 이후 결성된 독립운동단체의 대부분은 공화제 를 주장하게 되었다.

신민회 이외에도 만주 에 무관학교를 설치하는 자금모집을 하기 위해 1915년 대구에서 만들어진 대한광복회와 독립운동 자금조달과 그 자금 해외로 송부하기 위해 1913년 평양 숭의 여학교에서 만들어진 송죽회 등이 존재했다.

일본 국외에서의 운동 모색

한국 병합 이후 일본에 의한 통치에 반발한 농민 들은 만주 간도 와 러시아 연해주  대거 이주해 이 지역에서 신한촌 등  조선인 촌락이 형성되어 갔다. 한편 조선총독부 에 의한 항일운동의 엄격한 단속으로 반도 내에서의 민족해방운동이 어려워지자 독립운동가들은 반도외에서 민족해방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이 양자의 움직임이 합쳐져 만주와 러시아가 한반도 밖의 독립운동기지의 기초가 되었다. 구체적으로는 연해주에서는 이범정이 중심이 된 권업회와 이상원과 이동휘 가 중심이 된 대한광복군 정부, 북간도에서는 의병장 출신인 홍범 그림이 이끄는 대한독립군과 대구교 세력, 니시마섬에서는 구신민회 세력이 주축이 된 경학사나 부민단 등 항일민족단체가 잇따라 시작됐다.

또 미국주 에서도 안창호 와 박용만 등이 중심이 되어 대한인 국민회를 시작하여 이 지역에서 독립운동의 활발화를 시도했다.

삼·일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탑콜 공원의 독립 선언서 기념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기념 사진(1919년 10월 11일)
후열 왼쪽에서 시계방향으로 김택, 윤현진, 최창식, 이춘학, 현사, 안창호 , 신익희 .

제1차 세계대전 말기인 1918년 1월 미국 우드로우 윌슨 대통령 이 ‘14 조의 평화원칙 ’ 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조선인들 사이에서 민족자결 의 의식이 높아져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 장례  맞춘 대규모 운동이 계획됐다.

1919년 3월 1일 정오, 경성부 의 탑골공원 에서 독립선언서의 낭독으로 독립을 선언한 학생과 청년들이 수만 명의 군중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 을 한 것을 발단으로 삼·일운동은 시작됐다. 운동은 총독부 경찰과 군대 투입으로 치안유지가 전개되는 가운데 한반도 전체에 퍼져 몇 달에 걸쳐 시위행동이 이어졌다. 3월~5월에 걸쳐 시위에 참가한 인원수는 205만명, 시위 발생 횟수는 1,542회로 되어 있다. 그러나 총독부가 헌병 이나 순사 , 군대 를 증강한 것에 의한 무력탄압에 의해 운동은 점차 종식해 나가게 되었다.

삼·일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가들은 독립운동에는 구심점이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각 지역에서 창설된 망명정부 를 통합할 필요성이 주장되게 되었다. 그로부터 당시 세계에서의 외교의 각축장에서 각국의 외교관 에게 접근이 취해져 일본의 경찰권이 미치지 않는다는 이점이 있던 중국· 상해 의 프랑스 조계 에서 191 9년 4월에 '한민족의 광복 의지의 결속'을 내건 ' 대한민국 임시정부 '가 발족해 같은 시기에 발족한 블라디보스토크 의 대한국민의회와 반도의 한성정부도 통합해 나갔다.

임시정부는 당초 대통령제 를 표방했고,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 이었다. 이승만은 외교론자로 외교전략에 의해 독립을 이기려고 했다. 임시정부는 1919년 파리강화회의 와 1922년 워싱턴 회의 에 대표를 파견해 독립을 호소했지만 일본과 마찬가지로 식민지 를 보유하고 있는 열강 국가들의 반응은 매우 냉담한 것으로 전혀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외교활동에서는 소득을 얻을 수 없고, 특히 외교론자 이승만이 이런 위기 속에서 청원한 위임통치 청원서가 임시정부에 알려지자 임시정부의 독립운동가들은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위해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했다. 그러나 이 회의에서는 실력양성을 주장하는 개조파와 무장투쟁을 주장하는 창조파가 대립하게 되어 결국 쌍방의 걸음을 볼 수 없는 채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이 임시정부를 떠나게 되었다. 이 이후 항일운동으로 민족의 대표기관이었던 임시정부는 일약소단체로 전락해 김구 의 활동으로 복권할 때까지 장기간이 걸렸다. ( 복권 후의 활동에 대해서는 후술 .)

1920년대 항일운동

하마 사건 으로 소실 된 일본 영사관

1920년 에는 조선인 파르티잔 은 러시아 적군 파르티잔과 협력하여 니콜라예프스크 를 점령하고, 일본군 수비대를 전멸시켜, 일본 영사 일가를 비롯해 일본인 거류민 수백명을 살해했다( 아마나토 사건 ) [ 2 [ 3 ] .

한편, 간도를 중심으로 한 만주 및 연해주에 잠복하고 있던 독립운동가들에 의해 조직된 항일무장단체인 독립군 은 3·1운동을 계기로 헤이안 북도 ·고산이나 함경남도 · 혜산 일대  압록강  두만강 유역 의 국경 지대에서 양민과 관공  .

1920년 10  에는 만주 의 훈춘 에서 마적 과 독립군이 주훈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고 일본인 20명을 살해 하고 일본 영사관을 태우는 사건이 발생했다( 간도 사건 ) . 총독부는 중국 측과의 절충을 개시해, 10월 16일 에는 길림성 도독의 허가를 얻어 게릴라 소토를 개시했다( 아오야마리 전투 ). 독립군과의 전투는 오로지 연길 · 화룡 방면에 전개된 조선군 제19사단 동지대와의 사이에서 전개되었지만, 일본측의 피해는 지극히 경미한 것으로, 전투가 시작된 5일 후인 10월 26일 까지 작전 구역에서 독립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하여 다음 1921  한편, 독립군은 만주를 포기하고 레닌이 구상한 원동혁명군에 참가하기 위해 시베리아 로 향했지만, 독립운동에서 주도권을 둘러싼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의 내분과 적군 에 의한 무장 해제에 의해 1921년 6월에는 괴멸 상태에 빠졌다( 자유시 참

다만 만주에서는 독립군 이외에도 승민회를 비롯한 많은 독립운동단체가 조직되어 국내외에서 일본 요인에 대한 습격과 파괴활동을 전개했다.

또 같은 시기에는 일본 내지( 내지 )에서 구 조선 왕가인 이왕가 의 왕태자 살해를 도모한 이왕 세자 암살 미수 사건 도 발생하고 있다.

6·10만세 운동과 신간회·간우회

신간회의 창립을 전하는 동아 일보의 지면(1927년 2월 14일)

1920년대 에는 학생운동 , 사상 운동을 통한 항일운동이 끊임없이 전개되었지만, 이 시기는 러시아 제국 에서 일어난 10월 혁명 의 영향으로 사회주의 사상이 조선에서도 만연하게 되어 서울청년회·신사상연구회·북풍회 등 사회주의사상단체가 많이 결성됐다.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운동 이나 농민운동 등 민중들의 계급투쟁을 지도하는 한편, 민중의 이익을 대변하는 계급정당 건설에 노력하고, 1924년 에는 앞서 언급한 조선노농총동맹과 조선청년총동맹이 발족해, 같은 해 4월에는 지하조직으로서의 조선공산당 을 결성하는 것.

1924년 중국 에서 제1차국공합작이 성립하자 조선인 사이에도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 사이에서 협조하는 분위기가 태어나 1926년 한반도에서 6·10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이 결과 조선총독부 경찰 의 적발로 조선공산당이 괴멸상태에 빠지지만 신간회와 근우회 등 결성에 영향을 미쳤다.

신간회는 민족주의 계열이 자치운동을 주장하는 대일 타협적 민족 개량주의자와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로 분화된 것을 받아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결탁하여 1927년 2월에 결성했다. 신간회의 결성 후, 각 지방에서 신간회의 지회가 잇따라 결성되어, 1928 년 말 에는 전부 143의 지회가 조직되어, 회원수는 2만명에 이르렀다. 신간회 본부와 각 지회는 당시 활발히 일어났던 다양한 계급투쟁을 주도하거나 지원했다.

특히 1929년 11월 광주 에서 조선인 학생 그룹과 일본인 학생 그룹 간 충돌 사건( 광주 학생 사건 )이 일어났을 때는 진상조사단을 파견해 경성에서 대규모 민중대회를 준비하고 반도 전역에서 항일운동을 일으키는 것을 목격했다. 광주 학생사건이 삼·일운동 이후 최대 항일운동이 된 뒤 총독부는 신간회 주요 간부 약 40명의 체포에 착수했다. 이것에 의해 신간회는 쇠퇴해, 1931년 5월에 해산하게 되었다.

또한 근우회 조선어판 ) 는 여성운동단체로서 1927년 5월에 창설되어 신간회의 자매단체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근우회는 계몽을 주장하는 기독교계 와 계급투쟁을 주장하는 사회주의계의 갈등이 있었다.

사회주의자에 의한 계급투쟁

1920년대 에 지식인들 사이에서 삼·일운동의 탄압을 계기로 한 민족주의 세력의 쇠퇴나 사회주의 사상에 있어서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의 대두가 일어나자, 정치적·경제적면에서 사회주의 에 각성한 노동자 나 농민 들이 한반도에서도 증가했다. 이들은 제1차 세계대전 후 전후 공황 속에서 노동운동 과 소작쟁의 를 통한 대규모 계급투쟁 을 전개하게 되었고, 이 시대의 민족운동에서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20년 4월에는 경성 에서 '노동사회의 조직과 제도의 개선'을 최종 목적으로 한 '조선노동공제회'가 결성되어 그 후는 '조선노동연맹회', '조선노농총동맹'으로 개편을 거쳐 1927년 9월에 '조선노동총동맹', '조선농민총동맹'

그 밖에도 1921년 9월 부산에서 일어난 부두노동자 5,000명에 의한 파업 투쟁을 시작으로 반도 전역에서 장시간 노동과 부당한 위약금 징수, 일본인 노동자와의 임금 격차 등 조선인 노동자들이 자신의 열악한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대규모였던 것은, 1923년 8월에 평양 양말 공장에서 일어난 노동자 2,000명에 의한 파업, 1923년 9월부터 1년 이상에 걸쳐 전개된 전라남도 신안군 이와타시마에서의 소작 농민의 지주를 상대로 한 투쟁, 1929년 1월부터 3개월간 계속된 모토야마 제네스트 , 1930년 1월에 3,000명의 여성 노동자들이 1개월간에 걸쳐 갔다, 부산 조선

이러한 노농투쟁은 점차 폭력적이 되어 1930년 5월에는 함경남도 신흥 장풍탄광 노동자 300명이 노동조합 설립에 반대하는 일본인 자본가 와 조선총독부 경찰 의 탄압에 대해 탄광시설과 자본가의 사택을 파괴하고 위협 사격을 계속하는 경찰에 대해 도끼 나 망치 , 동봉 등에 의한 육탄전으로 맞이하려고 했다. 1930년 7월에는 함경남도 단천 에서 2,000명의 농민들이 총독부에 의한 산림정책에 반대하여 군청을 포위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나오는 소란이 되었다.

혁명적 대중조직 건설운동

1930 년대 에 들어서 혁명적 노동조합 · 농민조합 운동이 활발하게 활동하게 되었다. 노동조합 활동가들은 경성 트로이카를 조직해 지하에서 비합법적인 준비조직을 결성하는 한편 표면에서는 합법적인 노동조합, 파업 본부, 노동자 간친회 등을 결성해 운동을 지도했다. 또 공장신문과 팜플렛 등을 통해 노동자들에게 8시간 노동제 와 최저임금제 도, 동일노동 동일임금 을 선전하고 나아가 민족해방운동을 선도했다.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은 공업시설이 특히 많았던 함경남도 의 흥남 · 함흥 · 원산 일대에서 가장 활발하게 일어났다. 1931년 ~ 1935년 에 이루어진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으로 조선총독부 경찰 이 체포한 인원수는 반도 전체에서 1,759명에 달했다.

농민조합 활동가들은 농촌 내 기존 청년동맹·여성동맹·소년동맹을 혁명적 농민조합에 편입하고 각각 농민조합의 청년부·부녀부·소년부를 창설해 역량을 강화하는 한편 농민의 이익을 위해 투쟁을 계속했다. 혁명적 농민조합의 지도하에 조합에 소속된 일부 농민들은 격렬한 민족주의적 해방운동을 전개했지만, 특히 함경북도 · 아카가 와의 농민들은  과  마다 계엄대·동지탈환대·감시대·연락대 등을 조직해 총독부의 탄압에 대항하는 등 투쟁. 1931년 ~ 1935년 까지 진행된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으로 조선총독부 경찰 이 적발한 사건은 43건, 체포한 인원수는 4,121명에 달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복권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도 아래 독립운동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20년대 중반 이후에는 쇠퇴하고 있었지만 김구 의 주도 아래 다시 활발하게 이뤄졌다. 김구는, 1932년 1월 8일 에 이봉창 을 보내고, 천황 의 암살을 시도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사쿠라다몬 사건 ). 이어 김구는 윤봉길 을 일본에 의한 제1차 상하이 사변 의 전승을 기념한 대관병식과 천장절 축하회에 보내 폭탄 테러를 감행시켰다( 상해 천장절 폭탄 사건 ). 이후 항일 테러 사건의 수모자로 일본 경찰에 지명 준비된 김구는 도망생활에 들어갔지만 중국 정부는 임시정부를 협력대상으로 생각하고 김구 를 보호해 1933년 에는 담개석 과 항일선전 협력에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이 무렵梁起鐸이 1933년 10월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1935년 10월까지 재직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중국 침출에 따라 임시 정부는 상하이를 탈출해야 하고 난징과 장사 를 거쳐 1940년 에는 충칭 으로 그 본거를 옮겼다. 충칭으로 국민당과 미국의 원조를 얻어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하고, 제2차 세계대전 이 태평양 전선으로 펼쳐진 1941년 12월 10일 에는 대일 선전 포고(일본 정부에 포고문서는 통달되지 않았고, 실효성은 전무)를 실시했지만, 일본군과는 한 번도 교전하는 일이 없는 채, 일본의 패전을 맞이하게 되었다(후술 참조).

항일무장투쟁과 민족의 해방

국외에서의 독립운동

삼·일운동이 일본군 앞에 감히 진압되었기 때문에 독립운동가들은 청원이나 시위운동보다 무력에 의한 타도를 중시하고 만주에서 독립군을 결성해 무장투쟁  시작 했다 . 그러나 독립군도 1920년 말에는 일본군의 군사력 앞에 무잔으로 패퇴하고 소련령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 5 ] .

이 경험으로부터 무력투쟁으로 해도 근대전에 정통한 군인의 필요성을 느끼고, 우수한 젊은이를 중국 각지의 군관학교에 파견할 계획을 세워 그것을 실행했다 [ 5 ] . 여기에는 김구와 로운료 등이 관련되어 있어 한국 임시정부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 5 ] . 황양군관학교 에서는 제3기에 4명, 제4기에 24명, 제5기에 6명, 제6기에 9명, 제7기에 1명이 입학했다 [ 6 [ 7 ] . 이들 한적학생의 대부분은 국민혁명군의 북벌과 중국 공산당의 광저우 기의 에 참가했다 [ 7 ] . 중국군 장교로서 북벌종군 후에 일부는 탈대해 동북부의 독립군에 참가했다 [ 8 ] . 또 군에 남은 자도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예를 들어 4기생 김종, 이집중, 양경, 노일룡, 박건웅 , 이우연, 오세진, 노세요시는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의 골간요원이 되어 제5 기생 박시창 이나 신악도 뒤에 조선의용대와 광복군에 참가, 장흥 은 중국군 헌병기관에 근무하면서 독립운동가의 통신연락공작에 종사하고 있었다 . 7 ] . 또 상하이 천장절 폭탄 사건에서 사용된 폭탄은 당시 중국군에서 무기를 관리하는 장교였던 김홍단 이 김구측에 제공한 것이었다.

1932년 중국 정부의 지원으로 김원봉 등 조선민족혁명당이 간부훈련반 제6대를 조선혁명간부학교로 운영해 제1기생 및 제2기생 80명에 대해 교육을 했다 [ 8 ] . 그 밖에 1935년에는 강택 중국어판 ) 을 주임으로 하는 중앙 육군 군관학교 특별반에 적 후방의 공작 훈련을 목적으로 84명이 입학하여 조선의용대의 골간요원이 되었다 [ 8 ] .

또 중국 정부는 임시 정부도 지원해 1932년 중앙 육군 군관학교 낙양분교군관 훈련반 제17대에 92명이 입학했다 [ 8 ] . 1935년에는 한국 독립군 특무대 예비훈련소가 설치돼 28명이 교육을 받았다 [ 8 ] . 이 학생들은 한국 광복군의 골간이 되었다 [ 8 ] .

일본이 1931년 9월 만주사변 을 일으켜 동년 말까지 만주 전토를 점령하자 재만의 독립운동가들은 즉시 무장해 일본군과 대치했다. 먼저 양세봉과 연못청천 등 민족주의자들이 이끈 조선혁명군과 한국독립군은 중국인들과 제휴해 일본군에 전투를 했지만 연전 연패를 계속해 만리장성 이남으로의 후퇴를 강요당했다. 한편 사회주의자들은 1932년 봄에 조선인이 많이 살았던 만주를 중심으로 많은 지역에서 유격대를 결성해 항일 투쟁  펼쳤다 .

1937년 일중 전쟁 이 발발하자 김원봉 과 윤세교, 한장, 김학무 등 약 130명이 중국 국민당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지원을 설치,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 를 창설했다. 조선의용대원에게는 중국어 · 조선어 · 일본어 에 능통한 자가 많았기 때문에, 일본군의 포로에 대한 심문이나 대적 심리전, 적 후방에서의 첩보 및 공작 활동에 종사하는 케이스가 많았다. 조선의용대의 주력부대는 1941년 봄에 황하 를 건너 조선인이 많이 사는 화북지방으로 활동  거점 을 옮겼다 . 화북으로 옮겨진 의용대원들은 팔로군 과 협력해 후가소 전투나 반소 토전 등 많은 전투에 참가 했다 .

광복군 청년공작대

가흥 · 항주 ·장사 등을 전전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0년 충칭에 안착했지만 같은 해 9월 간부 12명으로 한국 광복군 을 창설했다.

이처럼 광복군은 한번도 일본과 교전하지 않고 일본의 항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김구는 일본이 항복했다는 일보를 들었을 때, 하늘을 부르고 장탄식한 후, “한국군은, 일본군을 깨는 일은 없었다. 멸망 해도 좀 더 몹시 재건될 것이다 . 힘을 갖고 있을까 . 9 ] .

1946년 2월 3일 통화 사건 때 조선인민의용군은 동북민주연군 과 협력하여 중화민국 정부 와 일본인 의 봉기를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 진압 후에는 일본인 수천명을 처형한 이후 통화에서 일본인의 봉기는 없어졌다.

반도 내에서의 독립운동

서울특별시 종로구 낙원동에 있는 건국동맹 발족지가 된 빌딩

1930년대 후반부터 수양동우회 사건 조선어판 ) 과 만주사변 이나 초기 일중전쟁 에서 연전연승을 계기로 한반도에서는 일본을 사대주의 의 대상으로 하는 의식이 점차 침투하게 되어 최린을 비롯한 삼·일독립 선언문. 1939년 10월 말경 총독부 경찰에 요주의 인물로 표시되어 있던 인원수는 약 7,600명에 달했지만, 그 중 약 40%인 3,076명이 전향을 표명하고 있다. 비전향자는 약 23%의 1,765명 밖에 남지 않았고, 나머지 37%는 알 수 없었다. 또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자금으로 칭하여 일반 양민으로부터 금품을 강도를 하는 사건도 다수 발생하고 있어 “도에게 민원을 초대”하고 있다고 보고되고 있다 [ 10 ] .

이런 상황 속에서도 1930년대 후반부터 반도 내 항일활동가 중 민족주의자의 비율은 증가의 일도를 거쳤으며, 1940년대에 들어가도 그 경향은 계속되었다. 1940년~1941년에 걸친 사상범 검거 상황에 따르면 공산주의자의 체포자 수가 668명에서 158명으로 감소한 반면 민족주의자의 체포자 수는 72명에서 176명으로 증가하고 있다.

일미 개전 이후 일본에서는 전시 체제가 깔려 외국인 한반도에서도 모든 분야에서 물자 부족이 외치게 되었다. 전쟁 말기의 국민징용령 의 조선에 있어서의 시행에 따라, 내지에서 일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드마의 유포나 사보타주, 징용 이나 징병, 학병, 공출의 거부라고 하는 소극적인 형태로의 항일 활동도 보였다 요출전 ] [ 11 ] [ 링크 끊어짐 ] .

제2차 세계대전 중 국외에서의 독립운동은 반도에서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고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때문에 사이판 섬 옥쇄를 계기로 일본의 패전이 농후해도 충칭의 임시 정부에서는 임시 정부가 연합국으로부터 독립 후의 정당한 정부로 인정되지 않는 즉시 반도로 귀환할 수 없는 것은 우려가 떠오르게 되어 동포들이 사는 반도의 전후 상황을 불안시. 이런 점에서 1940년대 반도에서 유일한 독립운동단체였던 건국동맹 의 역할은 큰 것이 있었다. 건국동맹은 1944년 8월 10일 에 일본의 패전을 예상한 로운亨과 조동우 등을 주축으로 시작했다. 건국동맹의 강령은 간단하고,

# 각인 각파를 대동단결하고, 거국 일치로 일제를 구축하고, 한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한다.
  1. 연합국과 연합전선을 형성하고 일체의 독립을 저해하는 반동세력을 박멸한다.
  2. 민주주의적 건설과 노농대중 해방에 중점을 둔다.

라는 것이었다.

중앙과 지방에서 조직을 세우면서 건국동맹은 치안대와 군사단체조직, 국외독립운동단체와의 제휴 활동을 전개했다. 조동강 등에서 군사위원회 조직해 후방교란활동을 전개시켜 만주군관학교 장교들을 소수 규합하고 베이징을 거점으로 화북의 조선의용군과 연결해 충칭 임시정부와도 연락을 하려고 했다.

1944년 10월에는 농민동맹이 조직되었지만, 이 조직은 건국동맹의 우군이었다. 로운亨은 학생이나 교사, 철도원, 여성 등의 조직도 각각 소규모이면서 시작해 징용이나 징병의 거부자들의 조직에 관여하면서 공산주의자들과도 제휴하고 있었다.

서대문 감옥 을 출소한 정치범들

1945년 8월 15일 에 조선총독부의 요청에 따라 엔도 야나기 작정 무총감을 만난 로운亨은

#전조선의 정치범 ·경제범을 즉시 석방하라.
  1. 집단 생활지인 경성의 식량을 3개월분 확보하라.
  2. 치안 유지와 건설 사업에 아무런 간섭도 하지 말라.
  3. 조선에 있어서 지도력이 되는 학생의 훈련과 청년의 조직에 간섭하지 말라.
  4. 전조선에 있는 사업장의 노동자를 우리의 건설사업에 협력시켜 아무런 고통도 주지 말라.

라고 하는 5개조의 요구를 제시했다. 루에게 일본인의 생명 및 재산보호를 위한 치안협력을 요구하고 싶었던 엔도정무총감은 상황이 상황이었던 만큼 루의 요구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날부터 반도 전역의 옥문이 열리고 정치범들이 석방되었다.

건국동맹은 1945년 8월 15일 광복 직후 개편하여 ‘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로 발족했다. 이날 일본 항복 으로 조선독립운동은 상대를 연합국군 으로 바꾸어 계속됐다.

연합군 점령 하에서의 독립운동

1945년 9월 6일 조선 건국준비위원회 관계자의 손에 의해 조선인민공화국 의 건국이 구했다. 하지만 일본 항복 전후부터 조선으로 무력 진주 를 시작한 연합국 의 미국 과 소련 은 조선인민공화국의 정부 승인 을 거절하고 조선총독부 의 항복과 함께 각 점령지에서 군정을 깔아 조선을 남북으로 분할 통치했다. 연합군 점령하의 조선에서는 일본 통치 시대와 달리 강제 기출이나 재해 등으로 역병 유행과 물가 상승이 속발하고, 1946년 10월에는 남조선 [ 주석 1 ] 에서 230만명의 조선인이 연합국군 에 대해 봉기하는 대구 10월 사건 이 일어났다 .

조선의 즉각 독립을 부정한 연합국은 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국 외상회의 를 열고 조선을 일단 국제연합 의 신탁통치 하에 두는 것을 결정했다. 이 결정에 대해 남조선에서는 신탁통치에 찬성하는 사회주의 (소련) 세력의 동조자(좌파)와 구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 지도자에 동조하는 민족주의자 (우파)로 여론이 이분되어 테러 활동 도 포함한 격렬한 항쟁이 일어났다. 최종적으로 신탁통치 구상은 냉전 에 의한 미소 대립의 격화로 실현되지 않고, 미국은 1947년 조선독립문제를 유엔총회 에 반입했다. 유엔 총회는 “유엔 감시하에 조선 전토를 대상으로 하는 총선거를 실시하고 국회에 의한 정부 수립을 실시”하기로 결정했고, 선거가 가능한지 알아보기 위해 다음 1948년 1월 유엔 임시 조선 위원단(UNTCOK)을 조선에 파견했다. UNTCOK는 같은 해 2월 유엔 소총회에 'UNTCOK가 '임무 수행 가능한 지역'(남조선)에서 단독 선거 실시안'을 제출하고 찬성 다수로 통과됐다.

유엔의 의결은 남조선에서만 신정부를 수립하는 것으로, 조선이 독립할 수 있어도 남북으로 분리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전조선제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 의는 5.10 단독선거를 막기 위해 열렸다. 4월 19일부터 평양 모란봉 극장 연석회의에서 남조선의 41개 정당·사회단체와 북한의 15개 정당·사회단체에서 선출된 695명의 대표자가 참석했지만 이는 당시 남북을 모든 좌·우 세력의 대부분을 망라했다. 실제로 남조선에서는 남조선노동당·근로인민당 등 좌익계열의 정당뿐만 아니라 한국독립당·민족자주연맹 등 우익계열의 정당도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박헌영 · 백남운 ·김구·김규식·  소마  유명인 등 좌익 및 우익도 참석했다.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 군정청이 가장 싫은 좌파 배제에 성공한 이승만 과 한국민주당 은 1948년 5월 10일 열린 국제연합 감시하 총선거에 임했다(초대총선거). 이 선거는 '미소 양군 철수→남북요인회담→총선거라는 순서로 정부수립'의 3단계 방안에 반하고 있으며 한반도 남북분단을 고정화한다는 이유로 민족파 김구와 중도파 김규식 등 유력자도 포함한 대반대 안에서 강행되어 각지에서 반대파에 의한 무장투쟁이 전개되었지만,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승만과 한국민주당 등에 의한 일파는 정부 수립에의 움직임을 강행해, 남북 분리 독립에 반대하는 시민의 봉기를 군사력이나 테러로 진압했다. 특히 저항이 심했던 제주도 에서는 공권력에 의한 주민의 학살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져 진압까지 수만명이 살해되었다( 제주도 4·3사건 ). 결국 유엔 감시하의 남조선 단독선거 는 1948년 5월에 실시되었고, 단시간 독립준비를 거쳐 같은 해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선언되었다. 남은 조선지역(북한)도 선거를 거쳐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 건국되어 조선독립운동은 목표가 달성됐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조선통일문제 라는 새로운 과제를 만들어 2021년 에 이르기까지 미해결되고 있다.

각주

주석

  1.  여기서 말하는 남조선이란,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 의 점령 통치 를 받은 북위 38도선 이남의 조선 지역을 가리킨다. 북위 38도선 이북의 소련 점령 지역은 북한이라고 부른다.

출처

  1. ↑ 『통상장정안안안편』 권 삼십리 코장편 『통상장정안안휘편』(1886년) Google 북스
  2.  『일본 외교 문서 다이쇼 9년』 제1권 하권 p773
  3. ^ 아마 고토 일본인 전멸 언어로 끊어지는 과격파의 참학 미인의 보고
  4. ↑ 키타만 각지에 뛰어넘는 불량 선인의 정체(1~5) 만주일일 신문
  5. ↑ d 김찬정 『북한 건국신화의 붕괴 김일성과 ‘특별 저격 여단’’ 2012년, 122쪽.
  6. ↑ “ 황양군관학교 화한인 독립운동 ” (한국어). 국사 편찬 위원회. 2016년 1월 28일 열람.
  7. c 시론 한국 독립 운동 여 중국 광저우 관계 PDF )
  8. ↑ f “옛날 황양군관 요정지 니시공 병영” (중국어). 해협지성망 . (2014년 4월 16일) 2017년 2월 8일 열람.
  9. 코무로 나오키『한국의 비극―아무도 쓰지 않았던 진실』 광분사, 1985년
  10. 조선 총독부 시정 연보
  11. ↑ 서중석 "일제의 조선강점과 ​​한국의 독립운동 I. 일제의 지배정책"
  12. “ 주린배 움켜쥔 소시민들의 저항운동 (아끼는 배를 잡은 소시민들의 저항운동)” (조선어). 대구일보 . (2007년 2월 8일) 2011년 12월 18일 열람. 링크 끊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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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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