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없는 교회가 너무 많다”
시대의 지성이자 ‘예수 따르미’ 한완상 박사 특별 대담(2)
“십자가 고난의 뼈아픈 눈물 흘림과 피 흘림 사건을 인정하지 못하고,
거기에서 부활의 꽃이 핀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기독교 신자가 아니다.”
사회학자이자 신학자인 한완상의 예언자적 가르침
《한완상 마지막 고언-예수의 길을 가라》 출판 기념
에큐메니안과 조곤조곤TV 공동기획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평생을 예수 따르미로 산 한완상은 뼛속까지 복음의 사람이다. |
한국교회-발선(發善)은 안하고 발악(發惡)은 잘해
Q: (주석적 성경읽기가 승한 한국 교회에서는 상대적으로 바울의 혁명성이 저평가 되고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중요한 것은 해석학의 문제라는 말씀을 하셨고, 또 아마 한국 교회의 바울 이해도 그 결과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바울과 관련하여 더 짚어주실 게 있을까요?
A: 바울에 대한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바울에 대한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는 해석학적인 관점을 갖고 있습니다. 내가 영화를 보고서 깨달은 바가 많았습니다. 바울의 때에 로마가 불탔잖아요. 네로 황제는 자기가 불을 질러 로마를 불태웠습니다. 그 엄청난 화재의 주범으로 초대교회를 지목하여 기독교를 핍박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초대 교회 교인들이 로마를 많이 떠났어요.
로마에 있는 교인들이 날로 줄었다는 이야기를 듣는 그 와중에 누가는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울을 만나러 갑니다. 누가는 폭력이 난무하는 그 현장으로 다시 거슬러 올라가서 감옥에 갇혀 있는 스승 같은 바울을 위로하기 위해서 갔는데 바울이 누가를 아주 자랑스럽게 받아들여요. 누가가 그 위험한 감옥까지 찾아온 거에 대해서 고맙게 생각하고, 자네는 예수님하고 직접 만나서 대화도 했을 텐데 내가 모르는 거 좀 배우자 해서 여러 가지를 물어봅니다.
그런데 거기서 놀라운 게 나타나요. 예수님이 하신 주옥같은 많은 말씀 중에 가장 본질적 복음의 핵심이 되는 말씀이 무엇인가. 나도 많이 고민을 하고 찾아보려고 그랬는데 내 생각에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이 예수님이 남긴 복음의 핵심입니다. 바울 서신 가운데 제일 무게가 있는 게 로마서잖아요. 로마서에 보면은 로마서 12장에 나오는 이 말씀이 저를 옛날부터 미치게 만드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은 로마서 12장 19절부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그 일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십시오. 성경에도 기록되기를-이 성경은 신명기입니다.-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겠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건 내가 할 일이야. 내 역할을 너희들이 내게서 빼앗지 마라.”
한국교회는 이 말씀을 복음의 핵심으로 받아들여야 돼요.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겠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하였습니다. 내 원수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되느냐. 예수의 복음을-미국이나 한국이나-잘못 축소해서 해석합니다. 그 뜻은 이런 겁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이게 아니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겁니다. 이웃과 원수는 천양지 차이입니다. 이웃은 가까이 지나는 사람이고 원수는 때려 죽여야 할 사람이고, 피해야 할 사람이고, 더불어 같이 살 수가 없는 사람이죠. 근데 여기서 핵심적인 말씀이 20~21절인데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어라. 그렇게 하는 것은, 네가 그의 머리 위에다가, 숯불을 쌓는 것이 될 것이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이게 복음의 핵심 중의 핵심입니다. 그러니까 원수를 때려죽일 사람으로 보는 게 아니고 원수가 배고프다. 그러면 먹여 주고, 목마르다 그러면 마실 것을 주라. 그렇게 하면 어떤 효과가 나느냐. 너 머리 위에 숯불을 얹어 놓는 거다. 숯불을 얹어 놓으면 얼굴이 벌겋게 되잖아요. 이것은 하나의 은유적인 표현인데 이게 해석학으로서는 해석이 됩니다.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은 얼굴이 뻘겋게 달아오르는 게 따라옵니다. 복음의 핵심이 얼굴을 붉게 부끄러워하게 하고 수치심을 갖게 하는 것인데, 그것도 폭력으로서 수치심을 갖게 하는 게 아니고, 고문을 통해서 수치심을 갖게 하는 게 아니고, 예수의 말씀으로 사랑의 말씀으로 수치심을 갖게 해서 변화시키는 겁니다.
원수를 갚으려고 하면 폭력이 나오잖아요. 폭력은 기독교 신자가 끝까지 그걸 반대했대요. 쿠데타를 일으킨 사람한테 다시 어게인하는 기독교 신자가 있다면 기독교 신자인 것을 사표를 내야 해요. 이 말씀으로 보면 부끄러워해야죠.
또 로마서 12장 말씀에는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씀하죠. 그것을 저는 발선(發善) 즉 “선을 발해라.”이라고 해요. 우리 한국 교회는 발선은 안 하고 발악(發惡)은 잘해요. 발악하며 닌 예수 편이다. 난 그리스도 편이다면서, 싸우지 않아야 할 사람들끼리는 싸우면서 서로 이단으로 규정하고 저주하고, 욕하면서도 부끄러워서 발선하지는 못해요. 복음은 발선이에요.

고난이 있으면 반드시 거기 부활의 희망이 있다
Q: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요약하면 다시 한국 교회는 예수 따르미로 돌아와야 된다. 예수 어게인이군요. 우리 한국 교회가 교수님 말씀대로 우리 사회에서 그동안 반(反) 예수적 삶을 살아왔다면 이제 이것을 인정하고 회개해야 한다 이 말씀이죠. 사실 회개도 말뿐인 회개가 아니라 어떤 대안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교수님께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제시하셨는데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A: 대안을 찾으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행적을 우리가 제대로 똑바로 봐야 합니다. 도대체 전지전능하신 신이 그렇게 나약하게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실 수가 있어요. 왜 성서는 그 사실을 불편한 사실을 그대로 적었을까요? 그러면 그 십자가에 처형당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처형 현장에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그것을 지켜봤던 가족들이나 친지나 지인들이 느꼈던 공포심을 ‘과연 우리가 가지고 있는가’ 이것을 우리가 늘 생각해야 돼요.
성서 가운데 이 기사를 고난의 기사 소위 이것을 패션 내러티브(Passion Narrative)라고 그러는데, 이 고난의 이야기를 빠뜨린 교회들이 있어요. 고난의 이야기를 빠뜨리고 겟세마네 동산에 피눈물 나는 기도를 하신 주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안 알려주는 교회가 있다면 그건 잘못이에요. 그건 아주 큰 잘못이에요. 그런데 고난이 있으면 뭐가 옵니까? 억울한 고난이 있으면 반드시 거기에 부활의 희망이 있다고요. 고난 없는 부활은 없어요.
처절한 죽음의 십자가 위에서 온몸이 찢어지다시피 해서 돌아가셨는데, 그 십자가에 돌아가신 주님의 십자가를 오른쪽으로 팍 꺾고-모두 다 오른쪽으로 꺾으면-나치의 ‘갈고리 십자가<하켄 크로이츠((Haken Kreuz)>'가 됩니다. 그렇게 왜곡되고 뒤틀린 형태의 십자가는 전체주의적인 히틀러의 십자가란 말이죠.
한국의 도시에는 십자가가 참 많습니다. 근데 과연 그 십자가가 ‘진짜 예수님의 십자가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가 없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생략된 복음은 없다
Q: 어떤 부분에서 그 많은 십자가들은 십자가의 무덤이다 이렇게까지도 비유를 했다고 그러죠. 교수님 말씀을 들으면 결국 한국 교회의 대안은 다시 십자가로 돌아와야 된다. 부활로 돌아가자는 거죠. 십자가는 부활을 당연히 지향하고 있으니까, 십자가와 부활의 믿음을 고백하고 또 실천해야 된다는 말씀으로 귀결되겠군요.
A: 제가 아주 뼈아픈 고백을 하겠습니다. 제가 새길교회를 세우고 이제 40년 가까이 됐죠. 그런데 교우 가운데 누가 나한테 이렇게 묻더라고요. “한 박사님! 우리가 꼭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됩니까? 마호메트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안됩니까? 붓다의 이름으로 안 됩니까? 공자의 이름으로 안 됩니까? 마르크스의 이름으로는 안 됩니까?”
그렇게 질문을 할 때 내가 대답을 못 했습니다. 왜 나는 새길교회를 실패한 걸로 봤기 때문에…. 아니 공산주의자들은 마르크스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싶겠죠. 레닌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싶겠죠. 또 무당들은 잡신의 이름으로 기도를 하고 싶겠죠. 그건 복음이 아니에요. 십자가의 고난에 뼈아픈 눈물 흘림, 피 흘림에 대한 사건을 우리가 인정하지 못하고 거기에서 부활의 꽃이 핀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기독교 신자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내가 왜 이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한국 교회 아주 소수 일부에서는 십자가를 부끄러워해서 안 하고 그냥 리본으로 대체하려고 하는 교회가 있어요.
십자가 위에 돌아가신 그 하나님의 고통,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이 곧 하나님의 고통 아닙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추상적으로, 시적으로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는 게 아니고, 골고다까지 내려와서 정치범으로 그 고통을 당했단 말이에요. 그 그리스도 예수의 아픔과 고난의 이야기를 빼고서 우리가 복음을 말할 수 없어요.
도마복음이 그런 겁니다. 도마복음에는 고난의 기사가 전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생략된 복음은 있을 수가 없다. 우리 어머니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피가 뚝뚝 떨어진다”는 이야기를 나한테 너무 많이 했어요. “완상아!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서 뚝뚝 떨어지는 그 피 흘리는 거 보고서 내 마음이 괴롭고, 그러나 그게 구원의 힘이라는 걸 내가 안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 세대는 십자가에 피가 떨어지는 그 아픔에 동감하려고 하는 몸부림이 있었어요. 근데 지금은 없다고요.

복음의 힘은 아픔을 나누는 데서 오는 힘이다
Q: 교수님 말씀을 들으면 아! 우리가 신앙의 가문을 이어온다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또 한편 우리 한국 교회가 예수 정신을 따른다는 것에 다시 한 번 두려운 마음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어느덧 우리 사회에도 봄이 왔고 또 자연도 오늘 창문을 열어놓고 이렇게 대담할 만큼 봄기운이 따뜻합니다. 제 생각에 교수님은 시대의 아픔을 껴안고 저항해 온 학자이기도 하시고 또 우리 국가적으로도 실천하는 행정가로도 복무하셨고, 그 모든 것보다도 온 생애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진정한 예수 따르미로서 살아오신 것이 가장 아름다운 저희들의 기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한국 교회와 또 후세대들에게 뜨거운 가슴으로 고언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A: 이 고언은 유언이 아닙니다. 잔소리입니다. 예수 없는 교회가 너무 많아요. 예수님도 없고 그리스도도 없고 하나님도 없고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성서가 쓰여지던 그 1세기나 그전에 세계를 지배했던 나라들-예를 들어 희랍 같은 나라에 있었거든요. 페르시아 같은 그런 고대 국가-의 신과는 근본적으로 달라져요. 이를테면 올림푸스 높은 산에 있었던 희랍의 신, 헬레니즘의 신을 보면 자기들끼리는 질투도 하고, 또 기분 좋을 때는 노래도 부르고, 유희도 하고 그러는데 거기에 있는 신들은 올림푸스 산 밑에 있는 그 백성들의 아픔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어요. 그래서 철학자들이나 신학자들이 소위 헬레니즘의 희랍의 신들은 ‘무관심의 신’이라고 했어요.
십자가만이 고통을 인지하고 감수성을 갖게 하는 복음입니다. 복음의 힘은 아픔을 나누려고 하는 데서 오는 힘이에요. 그것이 기독교의 힘인데 저도 철이 없어서 감옥에 들어가서 비로소 여러 가지 어려운 고난 속에서 고통의 힘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감옥에서 제일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새벽이 되면 내 제자일 것 같은 젊은이들의 신음 소리가 은은히 들려 듣게 되는데 “어머님! 왜 나를 낳았어요? 왜 나를 낳아서 이렇게 고생을 시킵니까?” 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참 내 마음이 괴로웠어요.
지금 얼마 전에 돌아가신, 이해찬 총리, 이해찬 군, 내 제자니까 군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세대들이 가서 고문당하고 죽을 때 새벽에 그런 신음소리를 냈는데 그 신음소리가 들려요. 그 들릴 때마다 아! 참 가슴 아팠어요. “엄마! 왜 나를 낳았어요?” 하고 이렇게 신음하는 내 제자들의 소리, 그 소리가 죽은 거 아닙니다. 5.18로 다시 살아나야 되죠. 5.18의 정신이 헌법 전문에 수용이 되는 것을 난 원래 바라고 또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데 그렇게 들어올 겁니다.
제가 유언은 아니지만은 이 책에서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고난 후에 참 기쁨이 온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 다 아시는 대로 우리가 좋아하는 성서의 구절이 사랑장(고전 13장) 이 아닙니까? 거기 그런 말씀이 있잖아요. 지금은 내가 희미하게 보지만은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만 알지만은 그때는-그때가 어떤 때냐 하면은 죽어서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서 보는 기쁨, 그리스도 예수와 얼굴과 얼굴을 눈과 눈을 마주 보면서 이야기하는 기쁨, 이 기쁨을 느끼게 될 때 그게 진짜 사랑인 거야. 지금은 진리가 부분적으로 보이고, 조그마하게 보이지만 그때는 진리의 전체 모습이 나타나기 때문에, 그 아름다운 전체의 모습을 보고 감탄할 것이다. 이게 천국을 맛보는 거 아니겠습니까?
복음은 눈을 뜨게 하는 것이다.
Q: 조금 다른 말씀도 듣고 싶습니다. 1970년대 유신독재와 1980년대 전두환 군사독재 시절에 교수님은 불의한 권력에 맞서 감옥에 갇히는 고난을 자초한 삶을 사셨고, 또 신앙인으로 시대의 양심으로 책과 강연으로 많은 젊은 사람들에게 역사의식을 갖게 하는데 큰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역사의 아픔, 시대의 아픔을 보시면서 어떤 사명을 가졌습니까?
A: 기독교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눈을 뜨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구원을 받았다. 내가 죽어도 죽지 않는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산다는 이런 신앙이 있다면 역사에 대해서 새로운 눈을 뜨게 됩니다. 고난의 시대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가 똑똑하게 직시해야 됩니다.
이를테면 그 시대에 무슨 사건인가요? 아! 인혁당사건. 조작된 그 사건으로 사형선교를 받고, 사형선교를 받은 그날 그 분들은 바로 사형이 집행되었어요. 인혁당 사건에 관련된 가족들은 아마 지금 내 나이가 되었거나 더 되었을 겁니다. 그들의 가슴에는 멍이 들어도 보통 들었겠습니까? 그런데 인혁당 사건이 일어나서도 사람들이 그 잔인한 박정희 정권에서 폭력에 대해서 눈을 뜨지 않았어요. 눈을 못 뜨게끔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깜깜한 그 어둠의 시대에 그들에게 뜨도록 하는 것은 먼저 눈을 뜬 예수 따르미로 나의 사명이라 생각했습니다.
[한완상 교수가 말한 인혁당사건은-1974년 민청학련의 배후로 조작된 제2인혁당사건이다. 이 사건으로-1974년 7월 서도원, 도예종, 송상진, 우홍선,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여정남 등 8인에 대하여 사형 선고를 내렸다. 그들의 항소는 모두 기각되었고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판결이 확정되고 다음 날 4월 9일 비상보통군법회의는 8인에 대한 형을 집행하였다. 국제법학자협회는 이 날을 ‘사법살인의 날’로 선포하였다. |

주님은 전태일을 순교자보다 더 높은 반열에 올려 두셨을 것
Q: 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박정희 유신독재와 전두환 군사독재 시절에 교수님께서는 특별히 젊은이들에게 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안목을 갖게 해줬습니다. 그 시대는 역사적으로 민중에 대한 새로운 통찰이 있었던 시대였습니다. 신학적으로는 민중신학이 태동하고, 교수님은 민중사회학자로 불렸습니다. 1970년 11월 13일 감리교 청년 전태일은 청계천 평화시장 봉제공장의 어린 여성 시다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자신의 죽음으로 고발합니다. 전태일의 죽음으로 신학계는 민중을 새롭게 발견하고 민중신학이 태동됩니다. 기독교의 신앙으로 청계천 평화시장 봉재공장의 어린 여성 시다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시킨 청년 전태일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A: 앞서 애기 했지만 한국교회는 발악은 잘 하는데 발선은 못 해요. 아쉬운 부분은 한국 교회가 눈을 뜨고 좀 넓은 안목으로 바라보면은 발선의 믿음을 실천한 전태일 청년이 죽은 것은 예수가 죽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아직까지 한국교회가 전태일을 바라보는 수준이 그 수준에 못 미칩니다. 성숙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에서 더 많아지게 되고, 성숙한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교회를 즐겁게 찾아오게끔 되는 때가 있으면 그 때는 자연스럽게 그를 순교자라고 부르게 되겠죠.
Q: “전태일의 죽음은 예수가 죽은거나 마찬가지”라는 그 말씀이 전태일에 관한 모든 것을 정의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렇게 예수님처럼 돌아가셨기 때문에 한국교회가 전태일의 죽음을 순교자로 다시 보고 다시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요?
A: 그것은 성숙한 신안인들의 몫입니다. 아마 성숙한 신앙인들 사이에서는 이미 그런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을 겁니다. 주님은 전태일을 사랑하시고 벌써 그(순교자)보다 더 높은 반열에 올려 두셨을 겁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이미 그걸 보는 눈이 열려있습니다.
대담을 마치면서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다. 그러나 성소수자들에 대해서 많은 교회가 무지한 교인들이 사랑의 언어를 혐오와 차별과 폭력의 언어로 사용하고 있다. ‘거룩한 방파제’라는 이름으로 성소수자들을 비인간화시키는 한국교회에 대해서 《고언》은 이렇게 충고한다.
선교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이 존엄한 존재로 취급당하지 못하여 비인간화 될 떼, 비인간으로 취급당하는 인간을 존엄한 존재로 취급하는 활동이다. 비인간(non-person, non-entity)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면서 비인간화시키는 악의 세력을 제거하는 활동이 선교이며 그것이 예수 십자가의 의미입니다.(59쪽)
선교에 대한 이 가르침은 시대의 양심이요 노 신학자이자 영원한 예수 따르미인 한완상의 예언자적인 외침이기도 하다. 최근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기독교 인권단체들과 관계자들이 국회 공론관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우리는 기독교인임에도 불구하고 차별금지법을 지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신앙을 가진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지지합니다.”는 입장은 예수 따르미 한완상의 키즈들이 시대의 예언자 한완상을 빙의하여 밝힌 입장이었다.
발선(發善)은 안 하고 발악(發惡)은 잘하는 한국교회는 여전히 너무나도 당당하게 사회적 소수자들을 비인간화 시키면서도-참으로 안타깝게도-자신들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를 성찰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의 발악에 대해서 노(老) 예언자의 가르침인 《고언》은 그들의 뼈를 때리고 있다. 발악에 사로잡힌 한국 교회가 다시 발선의 교회로 거듭나는 길이 바로 거기 《고언》 가운데 있음을 깨닫게 되기를 바라면서-그들에게-꼭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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