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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3

박정미 - 바람부는 날에는 예언이 그리워진다 삶이 기로에 서있어 앞으로 한발자국도 나갈 수 없을 때

박정미 - 바람부는 날에는 예언이 그리워진다 삶이 기로에 서있어 앞으로 한발자국도 나갈 수 없을 때 미래를 묻고싶은... | Facebook
20230913

박정미
  · 
바람부는 날에는 예언이 그리워진다

삶이 기로에 서있어 앞으로 한발자국도 나갈 수 없을 때 미래를 묻고싶은 유혹에 빠지곤 한다.
젊어서 뒤늦게 시작한 고시공부가 힘겨워졌을 때 친구 손에 이끌려 처음 철학관이라는 곳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 이후 지금까지 생년월일을 넣고 사주를 대여섯번은 본 것 같은데 돌이켜보면 시험에는 떨어지고 결혼에는 성공했으니(내 친구들 중에는 아직도 미혼인 친구들이 많다) 굵직굵직한 것은 대부분 들어맞은 것 같다.

 하지만 이따금 그 사주쟁이 아저씨들 생각이 나면 꼬리를 무는 다른 의문이 떠오르곤 한다.
사주풀이가 맞았다면 팔자대로 내 운명이 흘러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니면 내 기질이 말과 미래 예언에 대한 피암시성이 강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예언이나 미래에 대한 예측은 현실에 중립적인 쪽일까, 아니면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될까.
 젊어서는 나라와 민족의 미래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아서 이런저런 비결서와 예언서도 뒤적여보곤 했다. 그 중 기억에 남는 것은 봉우선생,  육관도사 , 증산교, 탄허스님의 관련서였다. 그들의 예언은 대부분 비스무레한 이야기였는데 김지하의 책을 읽다가 루돌프슈타이너까지 같은 말을 했다고 나와서 깜짝 놀랐던 적이 있다. 

 

2023-07-10

박정미 - 조동일, [동아시아문명론>을 읽고

박정미 - 조선조 선비의 세상을 보는 감각 -조동일, <동아시아문명론>을 읽고 조동일 교수의... | Facebook

박정미
  · 
조선조 선비의 세상을 보는 감각
        -조동일, <동아시아문명론>을 읽고


 조동일 교수의 <동아시아 문명론>을 읽다가 뜻하지 않게 조선조와 그 시대를 살았던 양반선비들에 대한 내 오랜 의문이 풀리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그 어둡고 깊은 의문은 국사에 서술된 우리 조상들의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역사적 행태에서 나왔다. 그 의문은 우리 역사를 바라보는 근본시각을 결정하는 것이어서 학창시절 국사교과를 공부하기가 괴로울 지경이었다.
 아무리 약소국이라지만 사건들의 편린으로만 이해한 우리역사는 너무나 부끄러웠다. 특히 그 중  조선시대는 제대로 밥맛이었다. 
제 나라, 민족에 대한 자긍심은 일도 없이 큰 나라 중국에 절대적으로 굴종했다. 태조 때부터 임금의 첫번째 과제는 중국의 책봉을 받는 것이라니 이게 말이 되는가. 집현전 학자들마저 세종이 창제한 자랑스러운 한글을 배척하고 다른 나라의 글자 한문에 끝까지 매달렸다. 이미 망해버린 명나라에 대한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내세워 병자호란을 불러일으킨 것도 모자라 나라가 망해갈 때까지 숭명반청을 읊어댔다. 수입한 중국의 신유학을 중국 지식인들보다 더 독실한 믿음으로 모시고 섬겼다.
 이런 껍데기 지식인들이 주역으로 설쳐대는 역사, 그런 매력 없는 역사를 배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처음으로 조선시대의 국제정세와 문화감각과 생활감정을 가지고 조선시대를 생각해보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근대인의 상식으로 보면 도저히 이해못할 행동양식이 그 시대의 패러다임을 인정하고 바라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 조상들이 세계사에서 특출나게 못난 사람들이어서가 아니라 그 시대는 그런 시대였음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 잘난 유럽인들도 그랬고, 아랍인들도, 인도인들도 큰 틀에서는 다들 그렇게 살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선을 인류사 보편의 발전과정 단계에 있는 필연적 산물로 이해하게 되었다.
 조동일교수는 세계역사를 대략 네개의 거대문명권으로 구분하는데 이는 고대의 반짝이는 지혜가 중세에 들어와 보편화되면서 다수의 집단 또는 민족을 하나로 묶었기 때문이다.  
“고대문명에서 이룩한 유산을 내용이나 지역에서 대폭 확대해 참여자는 누구나 대등하게 향유할 수 있는 보편주의 가치관을 이룩한 것이 중세문명의 특징이다. 보편주의 가치관이 공동문어로 표현되고 세계종교로 구현되었다.”
한국과 일본, 월남을 아우르는 동아시아지역에서는 공자의 유학이 널리 전해진 5세기 무렵에 중세화가 시작되어 중세문명의 시대에 들어섰다. 
동아시아의 공동문어는 한문(漢文)이고 동아시아아의 세계종교는 유교와 불교이다.
 동아시아문명은 산스크리트어 힌두교-불교문명, 아랍어 이슬람문명, 유럽의 라틴어 기독교문명과 나란히 형성되고 비슷한 변천을 겪었다. 
이러한 문화적지표로 결합된 시대가 세계사의 진정한 중세라고 조교수는 본다. 사회과학에서 상식으로 전해지는 ‘중세 봉건사회’라는 개념설정은 중앙집권체제를 유지한 채 중세를 관통한 동아시아에는 적용될 여지가 거의 없어 보편성이 없다는 주장이다.
 중국에서 마련한 유산이 중국의 범위를 벗어나고 다른 여러 민족의 동참으로 보편적인 의의를 가질 수 있게 발전해 동아시아문명이 이루어졌다. 
중국문명이라는 말은 고대문명을 일컬을 때 쓸 수 있지만, 중세문명은 동아시아문명이라고 해야 한다. 국가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중세문명의 본질에 배치된다.
외래문화를 멀리하고 민족고유의 문화를 온전하게 가꾸어야 한다는 주장은 중세의 힘을 모르고 하는 이야기이다. 한문과 유교 사상을 받아들임으로써 동아시아 각국은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주권을 수호할 수 있었다. 고대의 힘으로는 진일보한 중세의 힘을 막을 수 없었다.
이 중세시대의 사람들은 두개의 소속을 가진다. 하나는 동아시아인으로서의 정체성과 또 하나는 자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다. 중세는 그 두개의 소속감이 상호모순되지 않고 조화롭게 합치되는 시대였다.
한문은 동아시아의 공동문어로서 문명인으로서 반드시 습득해야할 기본이었다. 왜 세종대에 창제된 한글이 한문을 밀쳐내지 못하고 공존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공동문어와 세계종교를 문명의 지표로 삼는 중세보편주의 세상의 감각을 나는 다른 데서도 읽은 적이 있다.
“당시의 유럽은 지금의 유럽이 아니었다. 어떤 사람이든 일단 기독교도라면 모든 나라가 그의 조국이었다. 어디로 가나 그가 속한 유일무이한 교회가 있었으며 그는 그 교회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교육받은 사람이라면 라틴어로 말했는데, 이 라틴어는 모든 교회의 언어이면서, 어느 정도 지체가 있는 유럽인의 언어이기도 했다. ----그(이탈리아 학생으로 도보여행자)는 콘스탄츠 호 근처의 성 갈 수도원으로 가서 문지기에게 인사를 했다. 누구도 그가 영국사람인지 아일랜드사람인지 독일사람인지 또는 이탈리아사람인지 묻지 않았다. 그는 수도사들에게 라틴어로 말을 걸었고, 그러면 즉시 그들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 
                               - D.H.로렌스 <유럽사이야기> 중에서
 유럽에서도 자국어로 시를 쓰는 것은 근대의 여명이 밝아온 후의 이야기였고 중세의 지식인이라면 라틴어는 기본이었다. 조선시대 지식인들이 한문으로만 통문했다고 욕하는 것은 토마스아퀴나스가 라틴어로만 글을 썼다고 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중세의 감각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 시대의 문화와 정치와 지식인들을 평가해야 한다.
 동아시아문명권에서 중국은 중심부, 일본은 주변부이고, 한국과 월남은 중간부를 차지한다. 중심부는 문명권의 공유재산이 많고 사유재산이 적으며, 주변부는 공유재산이 적으며 사유재산이 많다. 중간부는 공유재산과 사유재산이 균등한 비중을 가졌다.
일본이 오래 전부터 자국의 독자적문화를 발전해온 것에 열등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것은 문명권 주변부의 고유한 특성이다. 
동아시아에서 과거제를 시행하지 않은 유일한 나라인 일본은 공용문어인 한문을 사용하는데 가장 뒤쳐졌고 반면에 자국어로 글을 쓰는 데는 가장 앞서간 것일 뿐이다. 대신 그 반작용으로 일본은 동아시아문명권 일반의 심도깊은 철학적 사유를 공유할 수 없었다.
 근대인에게는 부끄러운 책봉체제도 동아시아문명권의 필수적 요소임을 이해한다면 다른 평가가 가능하다. 중세에는 다른 여러 문명권에서도 기본적으로 동질적인 책봉체제를 유지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정상적 논의가 가능해진다.
동아시아의 중세에는 중국에 있던 천자(天子)가 한국, 일본, 월남, 유구 등 여러나라의 국왕을 책봉했다.
산스크리트문명권에서는 중국의 천자에 대응한 전륜성왕(轉輪聖王, 차크라바르틴)이 존재했다. 부처의 대리자로 여겨진 전륜성왕은 조공은 요구하지만 각국의 왕에게 정통성을 부여할뿐 나라의 자주성을 침해하지는 않았다.
이슬람문명권에서는 예언자 무하메드의 대리인인 칼리파가 문명권 전체의 천자노릇을 해왔다.
 마찬가지로 중세유럽에서는 예수의 대리자로 인정되는 총대주교가 왕과 황제를 책봉하고 신권을 행사하여 정통성을 부여해왔다.
 책봉은 임명이 아니다. 국왕은 정복, 찬탈, 계승 등의 방식으로 스스로 권력을 장악했다. 국왕이 임명되는 경우는 없다. 임명되는 자는 국왕이 아니다. 국왕은 스스로 국왕이 되어 책봉받을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한다.
 이렇듯 각 문명권마다 천자와 국왕사이의 정치권력의 배분관계는 조금씩 다르지만 책봉은 통치자가 이미 스스로 얻은 지위를 공인하는 행위였고, 이를 통해 중세문명권의 주권국가로 승인하는 행위였다.
 책봉체제는 하나의 문명권을 이루는 근본제도였는데 근대가 되자 책봉체제가 무너지고 여러 민족국가로 나누어졌다. 책봉체제하  중세인은 이중의 소속관계를 가졌지만 근대로 들어서자 동아시아라는 공동의 영역은 없어지고 자국인만 남았다.
근대인은 책봉체제가 동아시아문명의 공유 영역이 아니고 불평등한 국제관계였다고 이해한다.
근대 중국은 책봉체제에 포함된 전 영역을 자기네가 지배했다고 여긴다. 근대 일본은 책봉체제에서 일찍 벗어난 것이 자랑스럽다고 여긴다. 근대 한국은 중국과의 책봉관계를 사대주의 때문이라고 하고 부끄럽게 여긴다.
하지만 책봉은 문명권 전체의 공동문어를 사용하면서 이루어진 국제관계였다. 책봉체제가 무력의 강약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형태가 아님을 입증하는 사례는 당나라 말기와 북송시대 북방민족과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또 15세기 명(明)과의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월남의 여조가 자청하여 책봉을 받은 사례도 특기할 만하다.
  조선은 중세인의 감각으로 이해해야 한다. 중세를 중세 그대로 바로 볼 수 있어야 아직 미완인 근대의 과제를 이해할 수 있고 근대를 넘어선 다음 시대를 준비할 수 있다.
“중세인이 근대인이 아니라는 이유에서 나무라는 것은 부당하다.”
조동일교수의 이런 항변을 인정한다면 재조지은을 말하며 명(明)을 숭상한 조선중기 지식인들의 행태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현시대 민주당정권 고관대작들이 우루루 중국에 몰려가 만절필동(萬折必東)까지 운운하는 것은 도저히 묻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최근 들어 586정치인들의 퇴행적 정치를 비판하며 조선을 재조명하는 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조선을 현대의 선비질, 중세의 잔재로 현실을 어지럽히는 지적미숙아들을 통해 평가해서는 안된다. 조선을 지금 북한에 남아있는 북조선의 행태를 통해서 바라보는 것도 금물이다. 나쁜 후손들이 조상을 욕되게 하는 전형으로 보인다.
우리가 근대화에 뒤쳐져 나라를 빼앗기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철저하게 반성하고 복기해야 하지만, 그것이 조선시대에 시대를 초월한 인식수준과 능력치를 요구하는 것이라면 멈추고 살펴 볼 일이다. 이 또한 쓰잘데기 없는 역사적 망상이기 때문이다.
14 comments
Sejin Pak
중세의 유럽 국가들의 바티칸과의 관계가 책봉이라고 부른다해도 조선의 중국과의 관계처럼 조공을 바치는 것은 아닌 것 아니었나 생각되는데요. 영어로 tributary relation이라고 하는데, 유럽의 중세의 경우, 그런 이야기 들어본적이 없습니다만 제 전문이 아니라서 모르겠습니다
Reply11 h
박정미
Sejin Pak 다른 문명권과는 달리 바티칸은 제국의 성질을 가지지 않은 점에서 특이성이 있지요.
즉 교황은 종교의 수장이기만 하고 자기 자신이 황제가 아닌 점에서 칼리파, 차크라바르틴, 천자와 달랐습니다. 그래서 국가간 무역에 버금가는 조공무역이 성립될 수 없는 변칙이 있었지요.
조동일교수는 조공을 수탈체제가 아닌 동일문명권의 동질성을 다지는 상징적 교역관계로 이해하기 때문에 책봉체제의 필수요소로 크게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Reply10 hEdited


김정흠
그때는 중국이 선진문명이었으니까요
지금은 미국이 선진문명이고
선진문명을 받아들여서 우리의 문명으로 발전시킨게 한국이죠
Reply6 h
박정미
김정흠 그런 제대로 된 역사적 자긍심을 되살리는게 우리 역사학계의 과제인것같습니다. 말도 안되는 국뽕 말고요.
Reply3 h
김정흠
박정미 당연한 말씀입니다
Reply3 h


Paul Shin
지금 시대의 지적 미숙아들을 어떻게 계몽하거나 권력에서 배제하는 일이 역사적 과제가 되었군요.
Reply6 h
박정미
신평 지금의 심리적 내전상태는 중세와 근대의 싸움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Reply3 h


Kim Allen
한자와 책봉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것으로 만절필동과 근대화가 늦은 걸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때도 중국왕조는 계속 바뀌고, 중시 철학도 바뀌고, 국가들은 중국과 싸웠습니다
Reply3 h
박정미
김정일 우암 송시열은 중세인이었습니다. 만절필동은 중세인의 신앙고백이었다고 이해합니다.
문명권의 중간부가 중심부보다 사회적 문화적으로 더 깊이 문명의 핵심에빠져들어 헤어나오기 어려운 것도 세계사적 보편성 측면에서 조명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동아시아는 중세인 채로 근대의 힘에 도전을 받았고 그 결과 중심부 중국은 반식민지, 중간부 월남과 조선은 식민지로전락한 반면 주변부 일본은 문화적 짐이 크지 않아 근대제국으로 재빨리 변신할 수 있었다는 것을 조금은 감안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흥선대원군과 그 아들을 비롯한 구한말 지배계층의 전혀 핀트를 못잡은 대응은 비판받아 마땅하지만요.
Reply3 h


Hyuk Cho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많은 공감이 있습니다. 제가 가진 틀과는 일부 차이도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한화(Sinification/중국화) 되었던 것을 부끄러워 하는데 저는 상반되는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걸 위에서 중세라는 시대로 이해하자고 하는데, 역사라는 틀을 가진 분의 글이므로 동의는 할 수 있으나 저는 달리 사용합니다. 저는 문명화 과정으로 이해합니다. 동아시아?의 문명어가 한자였던 것이고, 그래서 한자문명권이라는 용어를 쓸 수 있습니다. 반도는 2중 문명화 과정을 겪은 것입니다. 한자문명화와 근대 문명화. 한화에서 중국화를 부인할 수 있느냐? 없습니다. 근대문명화 과정에서 서양화와 미국화를 부인할 수 있느냐. 없습니다. 한화는 중세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종교적이지 않습니다. 한화의 혜택은 국가를 조직하는 영감과 방법을 배운데 있습니다. 위에서 예로 들은 과거도 그 한 제도가 되겠지요. 루이14세 이전에 서양에 국가가 없었습니다. 왕과 왕실은 있었죠. 왕이 임명하는 관리가 생긴 것입니다. 왕의 침실 담당 관리, 수건 담당 관리...... 한화된 인족은 '조정'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조정을 운영하는 기초와 방법이 경과 서이며, 방법론이 주례와 같은 '예'였습니다. 당연히 관리가 되기 위해서는 교양이 필요했고, 그 수준을 측정해서 관리로 임용을 했습니다. 그 효용을 아직도 인정해서 '고시'라는 형태로 운영되고 있겠죠. 근대라는 시기도 특정한 역사적 단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역사적 단계나 시대가 두부모 썰듯이 나누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전근대 속에 근대가 자라듯이, 근대 속에 포스트모던이 공존합니다. 미래가 비정상이란 이름으로 숨겨져 있겠지요. 좋은 글로 제가 가진 관점을 가늠할 수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Reply1 h
Hyuk Cho
중국에서 언어 대신에 어언이라고 하는데, 음미해 볼 만 합니다.
Reply55 m
박정미
Hyuk Cho 역시 선배님의 혜안에는 탄복을 금할 수 없습니다. 선배님과 조동일교수의 논지는 전혀 배치되지 않습니다. 선배님의 탁월한 인문학적 혜안과 역사의식에 언제나 놀랍니다.
다만 조교수는 제도적선진화뿐만 아니라 문명적 가치관의 확립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습니다. 조교수는 유교 단독이 아니라 유불선이 합체해서 동아시아적인 내면을 이루었다고 봅니다.
또한 저는 이 글에서 조교수가 과거를 해석한 것에 국한지어 거론했습니다만 근대 이후 포… See more
Reply25 mEdited


Chee-Kwan Kim
중국사를 공부하면서 흥미로웠던 대목 중 하나는, 이민족왕조가 들어설 때마다 어김없이 (그 정도는 다르겠습니다만) 한족 문화에 흡수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한족의 문화적 성취도는 뛰어났고, 그러한 기반 위에 동아시아의 문화가 형성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근대민족국가로서의 정신적 물질적 정체성이 구한말까지도 확립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일본과 조선의 시차는 상당했습니다.
Reply16 m
박정미
김치관 앞의 다른 댓글에서도 말씀드렸는데 조교수의 견해에 따르면 그 또한 세계적 보편성으로 해명할 수 있습니다.
중세문명권 주변부는 문명의 짐이 그렇게 무겁지 않아서 독자적사고와 민족문화에 더 빨리 눈을 뜨고 다음의 근대시대로 가볍게 넘어갈 역량을 비축하게 됩니다.
유럽문명권의 영국과 동아시아문명권의 일본을 비교해보면 충분히 설득력있는 견해라고 생각합니다.


2023-05-30

박정미 살아있는 광주를 위한 기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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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미
35 m  · 

살아있는 광주를 위한 기념사

 다시 오월이 왔다가 간다. 
 동네 구립도서관 어두컴컴한 서가를 뒤적이는데 5.18을 소재로 한 중편소설,  <소년이 온다>가 눈에 띄었다. 
얼마 전 부커상을 수상한 한강의 작품이라서 그런지 일곱권이나 꽂혀있다. 망설이다가 그 중 한 권을 빼서 대출데스크로 가져가니 자리에 앉아있던 청년이 반색을 한다.내 과잉된 자의식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훌륭한 책을 선택한, 개념있는 사람을 만나서 반갑다는 듯한 표정이다. 그런 청년이 아주 반갑지만은 않았다.

 집에 와서 앞 페이지를 열어보니 초판은 2014년 5월에 발행됐고 이 책은 그해 6월 찍은 초판 5쇄본이었다. 잘 나간 책이다. 그 동안 많은 사람이 빌려본 듯 표지는 날긋날긋해졌지만 책은 아직도 낙장이 없이 온전했다.

 뒷표지에는 두 문학평론가의 발문이 발췌되어 인쇄되었는데, 몇 줄의 헌사를 읽다가 힘이 쪽 빠졌다. ‘어둠과 폭력’, ‘상처’ ‘잔혹한 학살의 참상’ ‘증언’ ‘소명의식’, ‘간절한 고백의 서사’, ‘순결한 어린 새’, ‘붙들어야 할 역사적 기억’과 같은 단어들로 빽빽했다.


 다들 5월이 오면 이 책을 이야기하길래 궁금했지만 그 케케묵은 헌사를 보자니 도저히 읽을 엄두가 안났다. 도대체 언제까지 5월 광주는 고통의 단어들로 기리는 피해자에 머물러야 하는가.

 언제나 그랬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한편은 사십년이 넘도록 광주를 신성하게 우러러보며 조심스레 향불을 지키며 예우하고 있다. 맞은편은 광주를 자해공갈단의 죽음처럼 침뱉고 묻어버리고 싶어한다. 흡사 아직 사인이 규명되지 않고 피가 마르지 않은 장례식장에서 싸움이 오가는 형국이다. 

하지만 아무리 뒷공론이 치열해도 지난 43년 동안 오월의 진상은 규명되었다. 그 동안 정권이 엎치락뒷치락 바뀌면서 국가차원에서 진상조사가 끝나고 관련자들의 처벌과 보상이 이루어졌다.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과 슬픔은 생이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겠지만 그래도 5월은 역사에 제 좌표를 찾았고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5월이 오면 순결한 소년의 죽음을 내세운 <소년이 온다>를 다시 불러내는 것이 못마땅하다.
다시 광주의 죽음을 애도하며 광주의 순결함을 증명하고 싶은 사람들, 경건한 그들은 자신의 무신경함과 잔인함을 알까? 

올 5월에도 그 숱한 정치인과 언론은 죽은자를 제사 지내려 망월동을 찾았다. 학살과 폭력의 순결한 희생자로서 광주는 다시 소환되고 종교상품처럼 다시 소비된다.

 하지만 광주는 살아있다. 아직도 광주를 5월에 붙박아놓고 싸움질하는 사이 살아남은 소년은 자라 어른이 되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그 때의 소년 나이가 되었다. 광주는 현실을 살아야 하고 돈을 벌어서 아이와 노모를 부양해야 한다.
 광주는 고통의 기억과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만으로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 앞으로 나아갈 힘을 낼 수 없다. 고통과 죄책감에서 얻어낼 수 있는 에너지는 서너번도 더 기름을 뽑아내서 부스러진 깻묵보다 더 많이 짜내지 않았던가. 지금 거기에 또 물을 치고 착즙하겠다고 달라드는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제 광주는 오월에서 과거의 고통을 파고들게 아니라 미래로 나아갈 희망을 길어올려야 한다. 그런 면에서 윤석열대통령의 5.18기념사는 정말 특별한 시각을 보여주었다.
 윤대통령은 지난해 취임 후 첫 지역방문으로 5월의 광주를 택했다. 
대통령은 광주 5.18 민주화운동 기념사에서 “오월 정신은 보편적 가치의 회복이고, 자유민주주의 헌법정신 그 자체”라며 “5.18은 현재도 진행 중인 살아있는 역사다. 이를 책임있게 계승해나가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후손과 나라의 번영을 위한 출발”이라고 말했다.
 윤대통령은 올해도 망월동을 찾아 “자유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피로써 지켜낸 오월의 항거”가 오월정신임을 반복해 강조했다. 

오월의 정신을 부정하려는 세력들과 오월을 이념적, 정치적으로 윤색하려는 세력들에 맞서 오월의 좌표를 확인한 것이다.

 올해 대통령은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한발자국 더 앞으로 나아갔다.
 윤대통령은 “오월의 정신은 자유와 창의, 그리고 혁신을 통해 광주와 호남의 산업적 성취와 경제발전에 의해 승화되고 완성된다”고 밝혔다.

 대통령은 “저는 광주와 호남이 자유와 혁신을 바탕으로 AI와 첨단 과학기술의 고도화를 이루어내고, 이러한 성취를 미래세대에게 계승시킬 수 있도록 대통령으로서 제대로 뒷받침하겠습니다.”라고 개인적 의지를 강하게 드러냈다.

역대 대통령의 기념사보다 꽤 짧았고, 5.18 기념사에서 경제발전이라는 단어가 나온다는 것이 생경했다. 야당도 대부분의 언론도 성의도 없고 내용도 없는 겉치레용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구구절절 죽은 오월을 불러내고 고통을 쥐어짜는 그 숱한 기념사가 겉치레인가, 관성을 깨고 살아남은 광주에 대해 처음으로 희망의 말을 건네는 기념사가 겉치레인가.
윤대통령은 역대 대통령과 다르게 처음으로 죽은 광주가 아닌, 살아있는 광주를 향해 기념사를 썼다.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으로 발목이 잡힌 도시가 아니라, 인권과 자유의 도시로서의 자기정체성을 찾고 자유와 창의의 정신으로 새롭게 깨어날 때가 왔음을 알렸다.
 지금 살아있는 광주사람이 잘 살아갈 수 있는 광주, 힘차게 움직이는 생활력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광주, 서울로 오지 않고도 고향에 일자리를 가지고 대대손손 살아갈 수 있는 풍요로운 광주의 꿈을 제시했다.
 그런 도시를 만드는 것은 자유와 창의의 정신으로 움직이는 도시의 기풍이다. 오월의 정신이 자유와 창의가 넘치는 도시 기풍의 밑거름이 될 것임을 대통령은 꿰뚫어본 것이다.
 이번 오월은 특별한 오월이다. 국가권력의 체현자가 기념사로 살아있는 광주에게 말을 건 최초의 오월이다.
 광주가 좌에도 우에도 발목잡히지 않고 보편가치의 단단한 중심을 잡고 광주만의 새롭고 대담한 미래를 열어가는 것이 진정한 오월정신의 계승이라고 한다.
광주가 첨단과학과 산업의 중심도시로 발전하여 오월의 정신을 드러내는 드높은 건축물을 도청옆 하늘 높이 우뚝우뚝 새로 들어올리면 얼마나 좋을까.
광주가 살아있음을 일깨우는 새 오월이다.


Comments

이헌목
깊이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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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미
이헌목 고맙습니당! 비개인 오월의 남은 날들이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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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won Yoon
오우, 평론이 매우 좋습니다. 미래의 광주, 죽은 고목에서조차 꽃을 피우는 5월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해양으로 향했던 그 힘을 다시 되살려낸다면 못할것도 없는 광주, 그 빛을 다시 한번 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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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
깊이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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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13

박정미 더글러스 머리, [유럽의 죽음> 을 읽고 23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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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유럽이 자기 땅에서 유배되고 있다
-더글러스 머리, <유럽의 죽음>을 읽고

유럽이 죽어가고 있다는 소문은 백 년 전부터 나돌았다.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이 20세기 초에 이미 음울한 예언처럼 전세계 지식인들 사이를 떠돌았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예언은 현실화 되어 유럽은 빈사상태로 호스피스병동에 누워있다. 유럽의 3대 맹주인 독일, 프랑스, 영국을 비롯한 유럽전역이 죽음을 앞 둔 한탄과 비명소리로 가득하다.
 
2010년 독일의 전 상원의원인 틸로 자라친의 <독일이 사라지고 있다>를 필두로, 2017년에 영국인 저자의 이 책 <유럽의 죽음>이 베스트셀러로 떠올랐고, 2014년에 출간되었지만 최근에 국내번역된 에릭 제무르의 <프랑스의 자살> 역시 대히트를 쳤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유럽이 죽어가는 것은 자살에 다름없다고 진단하고, 자기 목을 조르는 손으로는 유럽의 좌파정치를 주로 거론한다.
그들 모두 자국내 여론지형에서 우파로 분류된다지만 자라친은 독일사민당출신이고 이 책의 저자 더글러스머리의 경우도 읽어본 바에 따르면 자유주의적 사고에 충실한 인물로 보인다. 정치적 올바름에 거짓아첨하거나 평판을 걱정하기보다는 자유주의적 이상을 지키기 위해 정확히 현실을 드러내려는 노력으로 보였다.
유럽에서 파시즘과 인종주의는 우리나라의 친일적폐논란과 같이 정치적도구로 악용된다. 파시즘이 역사에서 멀리 물러날수록 더 많은 자칭 반파시스트들이 정치적 이익을 위해 반파시즘 팔이에 나서는 것은 유럽도 마찬가지다.
인종주의자나 파시스트로 낙인찍힌 사람들은 누구든지 엄청난 정치적, 사회적 대가를 치러야 했다. 하지만 이런 낙인을 부당하게 덮어 씌우는 측은 아무런 사회적 정치적 대가를 치를 필요가 없다.
나는 정치게임의 불리한 지형에 굳이 선 사람의 말은귀담아들으려고 한다. 최소한 거기에는 어떤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의 전근대성에 고통당하는 유럽

유럽은 서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계 무슬림으로 거의 점령당하다시피 하고 있다는 것이 작가의 인식이다. 상징적인 장면은 중세유럽의 할아버지격인 샤를 마르텔의 영묘가 있는 파리 북부 도시 생드니에서 벌어지고 있다.
샤를 마르텔이 742년에 투르푸와티에전투에서 이슬람세력의 유럽침공을 막아낸 이후 유럽은 이슬람세력과 거리를 두고 살았다. 하지만 1300여년이 지난 지금 생드니 유역은 무슬림과 이슬람문화로 가득 차있다. 자신의 사후에 이슬람과의 전쟁에서 졌나보다고, 샤를 마르텔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일이다.
생드니는 지역인구의 30퍼센트가 무슬림인데, 나이가 어릴수록 무슬림 비중은 커져서 지역의 카톨릭학교 학생의 70퍼센트가 무슬림일 정도다. 프랑스라기보다는 북아프리카의 도시 같은 생드니에 다른 지역사람들은 가기를 두려워한다.
2016년 지금 생드니에서는 신부들이 얼마 안되는 신자들을 위해 미사를 집전하는 동안 성당 바깥에서는 중무장한 군인들이 신부들과 프랑스 왕들의 무덤을 지켜야 한다.
프랑스의 지식인들은 작가 라스파유의 말마따나 기로에 서서 고뇌한다. “무엇을 할 것인가? 인종주의를 묵인함으로써 자신의 인간적 존엄을 포기하고 싶은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 다시 무엇을 할 것인가? 그와 동시에 모든 사람과 모든 민족은 자신의 미래와 과거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차이와 정체성을 보전할 성스러운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영국은 지난세기 식민지였던 파키스탄 등 서남아시아계 무슬림이주민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다. 거기에 인종주의를 피하려는 필사적인 자기검열 때문에 더 문제는 복잡해진다.
2011년 파키스탄계 무슬림남성 아홉명으로 이루어진 갱단이 런던 중앙형사법원에서 11~15세 아동을 성폭력과 인신매매한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 일은 2004년부터 2012년까지 옥스퍼드셔에서 벌어졌지만, 많은 이들이 인종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을까 두려운 나머지 범죄를 신고하지 못했고, 언론도 선례를 따르면서 묻힐 뻔했다. 게다가 범죄가 드러난 후에도 이슬람혐오로 불릴까봐 그냥 <아시아계>라고 보도되었다.
그보다 더한 사례도 있다. 영국 로더럼시에서 벌어진 1997년부터 2014년까지 아동 1400여명에 대한 강간과 그루밍사태도 파키스탄계 갱단이 저질렀다. 이 또한 지역의회와 지역경찰들이 <인종주의자>로 비난받을까봐 초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2015년 새해전야 독일 쾰른에서 벌어진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중앙역 앞 메인광장과 쾰른 대성당 거리에서 이천명에 달하는 남자들이 무리를 이루어 현지 여성 천이백명을 대상을 성폭력과 강도행각을 벌였다. 경찰은 마찬가지 이유로 가해자들의 신원을 가리려고 노력했고 가해자들의 인종적출신을 가리려고 노력했다.
이런 사건들은 그 이후에도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데, 이는 일부 이민자들, 특히 이슬람문화에 젖은 남자들의 독특한 문화적관념과 태도, 즉 여성, 특히 비무슬림여성과 다른 종교와 인종, 성소수자에 대한 중세이전의 시각을 보여준다.

◇난민인지 이주민인지 혼란스러운 유럽

2011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외국에서 태어나 잉글랜드와 웨일스에 거주하는 사람은 지난 10여년간 300만명이 늘어났고, 런던거주자 가운데 스스로를 백인영국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44.9퍼센트에 불과했다. 2014년 외국태생의 여성들이 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 이루어진 출산의 27퍼센트를 차지했고, 신생아의 33퍼센트가 적어도 부모 중 한 명이 이민자였다.
유럽인들의 낮은 출산율과 지나치게 많은 이민, 특히 무슬림이민의 높은 출산율 때문에 유럽사회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전세기 말과 금세기 초 유럽각국정부는 국민의 동의를 얻지 않은 채 대규모이민을 받아들이는 정책을 추진했다. 고령화사회에서는 이민증가가 필요하므로 이민자유입은 나라에 이익이 된다, 이민은 문화적 다양성을 통해 문화를 발전시킨다는 것이 정부측의 주요논거였고,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세계화 때문에 대규모이민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최후의 이론적 보루로 내세웠다.
역설계과정과 마찬가지로 정부는 이민에 관한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해 <증거>를 찾아내 홍보하는 식이었다. 바람직하지 않다고 간주되는 상황에 대해서는 <증거가 전무하다>거나 <일화적 증거>에 불과하다고 치부되고 주택과 교육기반시설 등 우려되는 명백한 문제점들에 대해서는 <이론상의 추정>일뿐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많은 수의 젊은 이민자를 수입한다고 해서 인구 고령화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민자들 또한 노인이 되고 그들 역시 똑 같은 권리를 기대한다면 <피라미드방식의 사업>이 그렇듯이 점점 더 많은 젊은 이민자를 들여와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유럽각국의 이주민 정책이 잘못 됐다면 정책을 바꾸면 된다. 하지만 유럽에 밀입국하는 제3세계 사람들은 모두 난민을 표방하고 있어 그 변별이 거의 불가능할 지경이다.
반란이 일어나고 정부가 불안정한 나라들, 특히 에리트레아, 아프가니스탄, 시리아뿐만 아니라 파키스탄처럼 유럽강대국의 동맹으로 정부가 안정된 나라에서도 이주자들이 몰려왔다. 생활수준이 일정 정도 이상인 사람들만이 이주를 감행할 수 있다는 것도 고려해봐야 한다. 진짜로 가난한 사람들은 밀입국알선업자에게 줄 돈이 없다.
그리고 이런 이주자 물결은 독일총리 메르켈이 텔레비전생방송 중에 레바논을 탈출한 팔레스타인태생의 소녀를 울리고 뒤이어 세살짜리 시리아소년의 주검이 터키해변으로 밀려온 2015년을 기점으로 둑이 터지듯 밀려왔다. 죄책감과 부끄러움이라는 전반적인 감정이 유럽과 북미전역에 퍼지면서 정작 이주민가족들을 위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관한 모든 현실적인 문제들이 밀려나고 이민자 유입의 부정적인 면을 거론하기만 해도 편협성과 불관용, 외국인혐오와 인종주의자라는 비난을 듣는 사회적 분위기가 자리잡았다.
결국 여론 앞에 백기를 든 메르켈은 2015년 베를린에서 외국언론 앞에서 이렇게 발표했다.
“유럽 전체가 움직이고 각국이 피난처를 찾는 난민들에 대한 책임을 분담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보편시민권은 유럽 및 그 역사와 하나로 결합됐습니다. 만약 유럽이 난민문제 해결에 실패한다면 보편시민권과 유럽의 밀접한 연계가 깨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상상하는 유럽은 사라질 겁니다.”
그리고 독일이 활짝 문을 열자, 1995년 셍겐 협정으로 국경의 칸막이를 없앤 유럽대륙은 난민을 앞세워 밀려오는 이주자의 물결로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다문화정책의 실패, 통합의 실패

유럽은 초기에 이주민들 고국의 다양한 관습과 문화를 그대로 포용하며 존중하고자 하는 다문화정책을 표방했지만 이는 역으로 사회통합을 저해했으며 이주민과 원거주민의 문화적 사회적 괴리현상은 심각해졌다.
메르켈은 2010년 포츠담에서 “다문화사회를 건설해서 서로 나란히 살면서 즐겁게 지낸다는 접근법은 실패, 그것도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라고 말했다. 하지만 총리는 이 때문에 “더욱 더 통합이 중요하다”라고 주장했다. 독일사회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독일의 헌법과 법률과 따라야 하면 또한 독일어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메르켈이 금기시되던 다문화주의 비판의 물꼬를 트자 뒤이어 영국의 캐머런, 프랑스의 사르코지, 오스트레일리아, 스페인의 총리들도 이 대열에 합류했다.
사르코지는 “사실 유리의 모든 민주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정체성에만 지나치게 몰두하면서 그들을 환영하는 나라의 정체성에는 충분히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습니다.”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그들이 비판한 것은 국가가 후원하는 정책으로서의 다문화주의였다. 국가가 거주민들로 하여금 같은 나라에서 평행세계를 살 것을, 특히 그들이 지금 살고 있는 나라의 것과 정반대의 관습과 법률 아래 살 것을 장려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 지도자들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법치와 일정한 사회적규범을 적용하는 ‘포스트다문화사회’를 호소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다문화주의는 통일된 정체성으로 이어지기는커녕 정체성들의 균열을 낳았고, 피부색이나 정체성에 무감한 사회를 만드는 대신 갑자기 정체성이 모든 담론을 지배하게 했다. 일종의 선심성사업(pork barrel)정치가 사회에 들어왔다. 갖가지 정체성 집단을 대변한다고 스스로 주장하는 각종 단체와 이익집단이 급조되어 공적자금을 지원받고 정치적야망이 있는 사람들의 스펙으로 작용했다. 이는 정부의 실패인정에도 불구하고 시민사회단체가 다문화주의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로 작용하기도 한다
.

이후 유럽에서는 <명예살인>과 여성할례가 문제화되면서 다문화주의에 있어 ‘관용의 한계’를 둘러싼 논쟁으로 모아졌다. 자유주의 사회는 관용없는 자들을 관용해야 하는가?
일찍이 이런 질문에 관해 시리아출신 이주민학자인 바삼 티비는 <핵심문화>를 옹호하는 정책으로 나가야 한다고 제안했다. 국민들이 법치와 정교분리, 인권 같은 근대 자유주의 국가의 핵심개념에 대한 믿음으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슬람의 신성모독죄와 위협의 내면화

지난세기 1989년에 살만 루시디의 <악마의 시>를 둘러싸고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신성모독죄를 규정한 파트와를 적용, 사형선고를 내린 이후 유럽사회에서 이슬람에 대한 언급은 금기시되었으며 유럽사회 지식인들은 반대견해를 표명할 때는 목숨을 걸 것을 요구받았다.
이슬람은 근대적 정교분리가 이루어지지 않은 종교다. 하지만 그 많은 무슬림 이주민들을 받아들이면서 어느 누구도 새 이주자들이 반유대주의와 동성애자 때리기의 증대로 이어질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누구 하나 이슬람 신성모독이 21세기 유럽에서 가장 심각한 문화, 안보문제로 대두될 것임을 예측하지 못했다.
이를 경고한 사람들은 비방을 받거나 왕따를 당하거나 박해받거나 살해당했다. 진실이 드러난 뒤에도 피해자들은 거의 공감을 받지 못했다. 언론들도 공포와 비겁함, 위협의 내면화가 결합한 결과 투명한 보도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인종주의를 반대하는 유럽에서 정작 반유대주의가 고조되고 있는 것은 젊은 무슬림들이 주도하고 있는 현상이다. 프랑스에서 유대인은 전체 인구의 1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인종주의적 공격피해자의 절반가까이를 차지했다.
대규모 테러공격, 2004년 마드리드, 2005년 런던, 2015년 파리에서 이어진 이슬람 테러리스트의 공격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진실을 감추려는 정부당국자들의 비상한 노력은 계속되었다.
2007년 런던도심 테러사건에서 노동당정부의 내무장관인 재퀴 스미스는 “ 이런 공격을 <이슬람테러>라고 규정하는 것보다는 그들이 평화의 종교인 이슬람 신앙에 위배된 행위를 했으므로 <반이슬람활동>이라고 규정하는게 더 적절하다”는 얼빠진 소리를 했다.
이제 상시적인 테러의 위협에 시달리고 표현의 자유를 억압당하는 유럽사람들은 자신들의 관용과 개방과 품위가 너무 지나친 것은 아닐까, 의심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선거에서 우파정당의 득세로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무서운 것은 한번 방향을 전환한 여론의 흐름은 더 앞으로 나갈 것이다.
◇유럽인들의 피로, 자기확신의 결여

유럽의 정신적지주인 기독교가 세속주의와 진화론 등 비판적 사고 때문에 생명력을 잃은지 오래다. 하지만 이를 대신해 생에 의미를 채울 새로운 종교와 사상은 정립되지 않았으며, 그 이 빈 공백을 이성보다는 계시를 앞세우는 전근대적 이슬람 종교가 밀고 들어오고 있다
유럽대륙에서 기독교적인 믿음과 신앙을 잃었다는 사실은 그 자체보다 더 큰 파급효를 낳는다. 유럽사회는 도덕적, 윤리적 관점에 구멍이 생겼을뿐만 아니라 그 토대를 이루는 이야기를 상실했다는 것이다.
전후의 인권문화는 마치 신앙처럼 이야기되며 그 자체가 기독교적 양심의 세속적형태를 실행하려는 시도다. 하지만 이 문화는 그 토대를 이룬 기독교가 무너지면서 인권의 언어조차도 온통 불확실성과 의문의 바다로 빠지게 되었다.
20세기 말에 이르러 유럽인들은 일정한 피로감을 느끼게 되었다. 유럽인들은 이미 종교와 반종교, 신앙과 비신앙, 인간의 합리주의와 이성의 신앙을 시험해보았다. 독일관념론철학에 이어 마르크시즘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정치적, 철학적 기획을 거의 모두 창시한 바 있고 이를 끝까지 밀어붙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제1, 2차 세계대전이었고 지금 유럽인들은 갈 길을 잃은 것이다.
이제 대륙의 철학자들은 진리의 정신과 거창한 질문에 대한 탐구에 고무되는 대신 질문을 피하는 법에 매료되고 있다. 철학자들이 관념뿐만 아니라 언어도 해체하자 그 결과로 모든 고정된 것들 것들에 대한 불신이 들어섰다.
유럽의 예술 역시 진리와 의미에 대한 당대의 해답을 제출할 능력을 상실하고 표류하고 있다. 기술적 야심은 크게 위축되었고, 예술의 도덕적 야심도 그 뒤를 따라갔다. 이런 변화는 예술을 대하는 대중의 접근법이 존경(나도 저렇게 할 수 있다면)에서 경멸(어린애라도 저 정도는 하겠다)로 바뀐 과정에서도 드러났다.
통합신봉자들은 시간이 흐르면 유럽에 오는 모든 사람들이 유럽인과 비슷해질 것으로 가정한다. 하지만 이런 가정은 유럽의 자기의심과 자기불신의 문화 때문에 다른 이들을 설득하지 못한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로마의 멸망은 반복되는가

그 찬란한 고대의 빛 로마가 게르만족의 침입에 의해 무너지고 중세의 암흑시대가 시작되었다. 믿을 수 없는 역사의 역행이지만 실제로 역사는 그렇게 천년 동안이나 흘러갔다. 지금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인류의 한 사람으로서 불길하게 바라보는 이유다. 유럽은 수명이 다한 로마처럼 공허하고 이슬람이민자들은 훈족에 쫓긴 게르만처럼 끝도 한도 없이 밀려온다. 역사는 이 시대를 민족의 이동과 뒤섞임으로 전세계가 열병을 앓는 시기로 기록하겠지만 그 끝이 어떻게 끝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역사는 반복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종교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하고 종교적 다양성은 옹호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여성평등, 정교분리, 성소수자보호, 다양성을 부정하는 교리를 인정해야 하는가? 자유주의의 반대를 자유주의로 옹호해야하는가? 이슬람교는 양성평등에 관한 근대적 견해를 공유하지 않았다. 계시보다 이성이 우위에 있다는 견해도, 자유와 해방에 관한 견해도 공유하지 않았다. 즉 고대 그리스와 로마로부터 이어져 기독교로 촉진되고 계몽주의의 불꽃을 통해 정련된 유럽의 보기 드문 합의의 정신은 이제 유럽에서 생존의 시험대에 올라서게 된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외국인근로자, 국제결혼자, 불법체류자 등 국내 체류 외국인이 230만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유럽이 몸살을 앓다 못해 죽어가는 지금 강 건너 불 보듯 볼 수 만은 없는 이유다.

이 책은 주로 유럽각국의 이주자정책을 타겟으로 삼고 있지만, 그 와중에 드러난 유럽의 문화, 정치, 종교, 심리, 삶의 의미를 모색하는 저자의 깊고 진지한 탐색을 통해 나는 이 시대의 전모를 들여다본 느낌이 들었다.
내가 대학시절에는 캄캄한 골방에서 <자기 땅에서 유배된 사람들>이라는 책을 읽었다. 알제리독립운동가 프란츠 파농이 프랑스의 압제에 시달리는 식민지인들의 현실을 고발한 책이다.
하지만 이제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인들은 유럽본토에서 이슬람에 의해 가스라이팅 당하고 자기 정체성마저 흔들리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제는 유럽인들이 옛 식민지인들에 의해 자기 땅에서 유배되고 있다.
역사는 이렇게 뒤집어지지만, 책을 덮은 지금 결코 좋은 느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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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08

박정미 | 서늘하고 애틋하고 찬란한 봄날의 [킹메이커>

(3) 박정미 | Fac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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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늘하고 애틋하고 찬란한 봄날의 <킹메이커>

 이렇게 재미있고 멋진 영화가 왜 안떴을까, 안타까울 정도였다.
<길복순>을 보고 변성현감독의 스타일에 꽂혔다. 뎅강데강 사람의 목을 베고 동맥에서 솟구치는 붉은 피가 난무하는 이야기를 끝까지 견뎌낸 것은 화면구성이 너무 예쁘고 신선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찾아본 변감독의  <불한당>은 또 지긋지긋한 폭력물이어서 초반에 집어치우고, 정치물이라는 이 영화에 마지막 기대를 걸었다. 
과연 감각적이고 신선한 장면구성이 돋보였는데 거기에 예기치 못한 묵직한 감동에 얼얼했다. 
===

 영화는 디제이의 1961년 인제재보궐선거부터 시작해서 박정희의 삼선개헌 직후 유신전야인 1971년 대선까지 김대중대통령(설경구)과 그의 선거참모인 실존인물 엄창록(이선균)씨의 얽힌 인연을 보여준다. 
설경구는 완벽하게 디제이에 빙의된 사람같았다. 그 말투와 표정과 자세, 따뜻한 인품과 학식과 유머감각, 참모들이하는 말을 묵묵히 듣다가 결론을 내리는 외유내강형 리더쉽, 특히 문장의 어미를 위로 급격하게 치올리며 격렬하게 감정을 끓게하는 그의 연설스타일은 생시의 김대통령을 불러낸듯 싶었다. 
 이선균 역시 어마어마한 연기력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계속 겉도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는데 그것은 그의 마스크와 발성의 어쩔 수 없는 한계 때문인 듯 했다.
 이선균은 <나의 아저씨>나 <검사내전>에서는 그렇게 잘 어울렸지만 이 영화는 아니었다.
그는 이글이글 불타는 야망과 디제이에 대한 숭모의 감정 사이에 찢겨져가는 내면의 고통을 담기에는 너무나 지적이고 세련된 도회적 이미지를 풍긴다. 
 설경구는 굉장히 복합적인 얼굴이라 깡패도 협잡꾼도 신사도 찌질함과 위대함도 다 끌어낼 수 있다.
하지만 이선균은 소시민인텔리의 진실을 전달하는데 특화된 얼굴과 목소리와 걸음걸이를 가지고 있다.

 나보다 한바퀴 띠동갑으로 젊은 변성현감독은 어찌 그리 우리 엄마아빠 시대의 사회적분위기를 이토록 능청스럽고 맛깔스럽게 잘 표현해낼 수 있을까. 

 '목적과 수단'이라는 고전적이다 못해 진부한 주제를 어쩌면 이렇게 진영논리로 갈갈이 찢겨져 정치가 실종된 작금의 문제의식에 맞추어 새롭게 해석해낼 수 있을까.

 승부의식에 떠밀려 정치꾼으로 전락할듯 하다가도 다시금 정치의 기본대의에 끊임없이 회귀하는 디제이와 디제이의 대의를 지지하고 숭모하면서도 끝내 그를 이기게 할 승부욕을 접지 못하고 음지의 술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엄창록의 대결이 무시무시하다.

"자네는 지랄맞게 똑똑한 사람이여. 판세 정확히 읽어내고 이기는데 탁월한 사람이지. 근디 이기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고 왜 이기느냐는 것이 중요한 것이여."

디제이의 이 대사를 현 정치권, 특히 디제이의 후예 민주당과 그 지지자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지금의 민주당은 디제이의 후예가 아니라 엄창록의 직계인것처럼 디제이정신의 뿌리를 잃고 이기는 기술에만 몰두하고 있으니 말이다.

 만일 1971년 선거에서 엄창록이 지역감정을 선거도구로 불러내 쓰지 않았다면 우리시대의 이 망국적 분열상은 없었을까. 그리하여 만일 1971년도에 김대중대통령이 당선됐다면 우리의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지만 분명한 것은 그때는 이미 70년대라는 것이다. 옛것이 가고 난 후에 새것이 오는 거 봤는가.
 옛것 속에 태어나 온갖 구박을 다 받고 모진시련 속에 살다가 겨우 살아남아 이기는 것이 새것이다.

그때 박정희는 낡아 생명력이 다한 시대정신을 붙잡고 독재의 서슬푸른 칼날을 휘두르던 헌것이었고 김대중은 새로운 역사를 세우고자 한 새것이었다.

 이 영화는 첫 장면에서 '달걀도둑놈 일화'를 통해 문제를 제기하고 마지막 장면에서 디제이의 해결책을 듣는 수미쌍관의 기법을 쓴다. 디제이를 배신하고 떠나고서도 끝내 그의 그림자속에  살아가는 엄창록은 디제이와의 내면속 대화를 통해 나름의 결론을 내린다.

"지들이 양심이 있다면 돌아서겄제."
"그들이 양심이 없다면요."
"글면 자네를 찾아왔겄제."
맞다. 디제이라면 그랬을 것이다. 지금은 다들 모질이같다고 지탄받는 햇볕정책, 북한문제도 그래서 그랬을것이다. 

인간으로서 같은 민족으로서 해야 할 도리를 다 하고 그래도 안된다면 현실적인 술수의 세계로 넘어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디제이는 인정했을 것이다.
어제의 봄날씨는 너무나 찬란하고 애틋한 서늘함이 감돌았는데 영화는 그 밤을 같은 정조로 물들여주었다. 세상에는 사랑하면서도 같이 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2023-01-15

박정미: 백낙청-고은 관계 - 진보운동의 치명적이고 근원적인 업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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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청 교수, 백낙청 선생
한국문학과 문단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관심도 없던 내가 백.낙.청. 세 글자를 생각해볼 기회가 왔다.
얼마 전 백교수의 D.H.로런스에 관한 책을 감명깊게 읽은 데다, 때 마침 고은의 문단복귀로 새롭게 고은과 백교수의 인연이 조명되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최근에 발표된 ‘2023년 백낙청 신년칼럼’의 얼토당토 않는 시국관에 많은 사람들과 같이 황당해하던 참이었다.
희대의 성범죄중독자 고은이 아무런 사과와 반성도 없이 문단에 슬며시 얼굴을 다시 비추자 애먼 불똥이 백교수에게 튄 게 아니다. 백교수는 지난 세월 고은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이자 파트너로서 그의 악마성을 가려주고 덮어주고 키워준 사람이기 때문이다.
백교수는 약관 27세의 나이에 창작과비평을 창간한 후 이른바 ‘순수문학’에 반기를 든 ‘참여문학’을 주창하여 문단을 양분하여 지금은 거의 삼켜버린 거목이다.
고은과 손을 잡은 이후로는 거의 모든 문화권력을 자신의 발 아래 놓고 현실정치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펼치고 있는 거목 중의 거목이다.
그런 백낙청교수와 고은의 만남은 1994년에 발표된 이문열의 대표작 <사로잡힌 악령>에 상세하게 그려져있다. 얼마 전 페친 주동식선생 포스팅을 통해 다시 읽을 기회를 가졌는데, 최영미시인의 미투 함성이 터지기 이십오년 전에 그 대단한 문단권력 고은을 고발한 이문열의 용기와 귀기 어린 문체에 다시한번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그들의 첫 만남은 자신의 천박한 허영심과 이름값을 부풀리기 위한 전략으로 ‘명사 사냥’을 일삼아왔던 고은의 주도면밀한 기획하에 이루어졌다.
”’명사 사냥’시절과는 동떨어지게 그쪽에서 적극적으로 저지르는 실수도 있었다. 전 같으면 스스로 찾아가 교유를 구했던 어떤 명사의 출판기념회에 찾아가 시비를 걸고 행패를 부린 일이었다. 그 명사는 외국의 명문대학에서 당시만 해도 이 나라에 몇 없다는 철학박사를 따온 장안 명문가의 자제일 뿐만 아니라 ‘사상계’의 정신적인 적장자를 지향하는 어떤 문학 전문지의 발행인이었다. 그런데 그 명사가 서구에서 갈고 닦은 새 이론으로 바야흐로 첫 평론집을 펴내고 자축하는 자리를 그가 뛰어들어 엉망으로 만들어버린 것이었다.”
철학박사라고 슬쩍 뺑끼칠을 했지만 글 속의 명사가 백낙청임은 삼척동자라도 알 것이다.
작중 화자는 이 문장 다음에 ‘내게는 완전한 파탄을 느끼게 하는 그의 실수였다’라고 이 장면을 회고했지만 문단사정에 밝은 소식통을 빌어 그 이면을 들추어낸다.

”그런데 그게 바로 그 사람식의 접근방식일 수도 있지. 나는 너희와 함께 일할 준비가 되어있는데 우두머리인 너는 왜 나를 인정하지 않느냐는 강경한 의사표시와 함께 사과를 통해 새로운 친분관계의 구축을 모색할 수도 있으니 양수겸장 아니겠어? 내가 그를 나쁘게만 보아서 그런지도 모르지만 실제 그 뒤의 진행도 그랬지. 술 깬 다음 그는 그 발행인을 찾아가 공손하게 사과했고 곁들여 간곡한 전향선언도 한 모양이라.
어쨌든 그 뒤 발행인은 그를 평론에서 언급하게 되었고 그는 아무 잡지 발행인 아무개와 친구라고 떠벌일 수 있었으니까”
당시 고은은 더러운 성범죄 행각과 거짓된 행실로 문단과 대중의 인내수위를 넘어가 철저히 고립된 처지였다.
그렇다면 그런 평판을 알고서도 운동의 대의에 부담이 될 수 있었던 고은을 받아들인 백낙청의 셈속은 무엇이었을까. 문단소식통의 고변은 계속된다.
“그래도 그보다는 당장의 이익이 크지. 모든 운동은 세력다툼이야. 그런데 그 발행인, 외국서 갓 돌아와 포부만 거창하고 깃발만 화려하지 그 쪽에 제대로 이름 얻은 사람 몇 돼? 만들어낸 작가나 시인은 아직 어리고……그런 상황에서 다소 하자가 있는 것이라도 그만한 지명도는 쉽게 외면하기 어렵지. 더구나 저쪽 순문단에서 하나 빼와 이쪽에다 하나를 더 보태는 것이니 문단판도에서 보면 둘을 얻은 것이나 다름없고. 뿐인가. 앞으로 그가 행실만 자제해준다면 과거의 그의 개별적인 과오가 아니라 순문단의 병폐로 돌려버릴 수있 으니 금상첨화고. 두고 봐. 그게 언제까지일지는 모르지만 둘은 좋은 짝이 될 거야. 공생의 조건으로는 거의 갖춘 셈이니까.
이쯤 되면 백낙청교수는 세력확장을 위해 고은이라는 희대의 허섭쓰레기 악마를 창비로 끌고들어와 살려준 꼴이 된다. 더구나 창비와 손을 잡은 후 고은은 그 빽으로 민주투사, 민족문학을 이끌 위대한 시인의 호칭까지 넘겨보고 언감생심 노벨문학상까지 노리는 거대괴물로 자라난 것이다.

그는 가장 진솔하고 거짓됨 없이 우리 민족의 영혼과 정신을 노래해야 할 문학계에 거짓대마왕을 끌어들여 권력을 쥐여준 것이다.

나는 이것이 백낙청교수의 그리고 그가 지분을 갖고 있는 이 땅의 진보운동의 가장 치명적이고 근원적인 업보라고 생각한다. 악마가 양지 높은 봉우리를 차지하고 있는 골에 어떻게 선하고 참되고 아름다운 것들이 피어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것은 그가 불가피하게 악에 잘 못 말려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그의 책임이다. 그는 힘을 원했고 힘을 주겠다는 악마와 손을 잡았던 것이다. 대학시절 그의 책을 읽고 자랐던 86세대가 모든 사유를 미루고 정권획득, 권력투쟁에만 능한 진영정치기술자로 웃자란 것도 넓게 보면 그의 책임범위에 있다 할 것이다.
이러한 백낙청교수의 악업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를 경칭없이 부르기를 주저하면서 백교수와 백선생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첫번째로는 그가 없이는 반독재민주화투쟁과 민중중심의 새로운 길을 모색한 우리현대사의 절반이 성립되지 않을만큼 그 시대 그의 역할과 공훈이 크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는 그냥 투사가 아니라 거대한 사상가였고 그의 천재는 역사의 흐름에 순기능을 할 때만큼이나 역기능을 하는 지금에서조차도 빛을 발하고 있다.
백낙청이 펼친 '근대극복과 적응의 이중과제론', '분단체제론과 과정으로서의 통일론' 등은 지금에 와서는 그 시대적 부적합성으로 많은 현실적 폐해를 일으키고 있다지만 아직도 새로운 진보의 재구성을 모색하는 이들에게는 자기정체성을 새로이 확립할 수 있는 강력한 반면교사의 준거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분단체제를 그대로 놔둔 채 남쪽 사회만 개혁해서 우리 사회문제를 풀어보겠다는것은 불가능하므로 통일에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는 백낙청교수의 통일론에 대해 인문운동가 이남곡선생님은 이런 반론을 제시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 해결방식이 왜 ‘통일’이어야 하는가? 남과 북은 국가적과제가 상당한 시간차를 두고 현격히 달라져 있다. 지금의 상황으로 볼 때 ‘통일’을 전제로 분단체제를 극복할 수 있다는 주장은 이미 낡은 것이라고 나에게는 보인다.
오히려 통일을 강조할수록 통일에서 멀어지며, 오히려 남남갈등만을 키워 ‘다수의 결집’을 어렵게 하는 현실을 보지 못하면 ‘변혁적 중도주의’는 환상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남과 북이 각각의 국가과제를 ‘통일’이라는 ‘고정관념’에 방해받지 않고 인류의 보편적 진로에 맞게 개혁해감으로써 그 공유하는 가치가 커질 때 통일을 시도하는 것이 민족공동체 전체의 이익에 부합할 것이다.”(이남곡 페북, 2021년 12월 10일, 2022년 4월 27일)”
그리고 또 하나 백교수의 로런스론을 읽으면서 그가 ‘근대적응과 극복의 이중과제’를 동시에 해결해나갈 사상적 방법론으로서 우리민족 고유의 ‘개벽사상’을 지목한 것은 역시 대가답다고 느꼈다.

하지만 구체적 현실로 돌아와보면 그의 정치적실천이 지난 세기 반민주투쟁의 잔영을 벗어나지 못하고 진영놀음에 철저히 복무하는 편벽된 것인데다 ‘신념칼럼’에서 현 정세를 분석하면서 구사하는 용어의 수준이나 인식이 김어준류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을 보게 된다.
그 깊은 원론적 사유와 실천방침으로서의 천박한 각론 사이에 골 깊게 패어있는 수준차이에 깜짝 놀라게 되는 것이다.
개인주체성과 책임성이 기본이 되는 근대화과제 성취가 아직도 너무나 요원한 이 사회에서 근대적응보다는 근대극복을 섣불리 강조하는 그의 논리는 결국 전근대성으로의 퇴행이 그 논리적귀결이 아닐까. 고작 중국혁명사나 들여다보고, 조선시대의 사유를 뒤적이며 개벽과 근대극복을 말한다는 것은 너무나 이상하다.

새로운사상은 새로운 과학적발견에 의해서만 굳건한 토대를 얻게 되는 법. 양자이론과 불교이론의 접목을 통해 개벽사상을 이해하려는 여류 이병철선생님을 비롯한 진보운동 일각의 흐름에 희망을 거는 이유다.
대학시절 벗들과 함께 한 문학세미나는 백교수의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을 거의 교과서로 받들다시피 했고, 그가 번역한 아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비록 다 읽지는 못했지만) 그 척박한 시절 지적 목마름에 한 줄기 단비와도 같았다. 그 시절 창작과 비평이 한 권 나올 때마다 계절의 흐름을 실감했으니, 백낙청교수는 결코 나와도 무관한 이름이 아니다.

오랜만에 그의 글을 읽고 그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백교수가 고은을 허용하지 않았더라면, 우리세대가 비록 권력을 잡지 못했다하더라도 좀 더 아름다운 사람들로 남기를 택했다면 우리의 젊음과 우리의 진보운동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이병철, Jeong-Woo Lee and 69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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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st relevant

  • 이군희
    샘? 대학 때 전공이?
    가끔 궁금했거든요.. 물어봐도 되나요?
    • 박정미
      이군희 법대 가서 망했습니다.ㅋㅋㅋ
    • 이군희
      박정미 언젠가 글에서 고시원 이야기를 하셨을때 그렇게 짐작했었는데...
      오늘 글때문에 잠시 문과신가? 했어요...ㅎ
      판결문 쓰셨으면 명문장이 많이 나왔을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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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d
      • Edited
    • 박정미
      이군희 책과 글쓰기를 어렸을 때부터 좋아해서 대학에서도 법대문학회를 했었어요. 사실 당시 전공서적보다는 문학서적을 더 많이 읽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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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군희
      박정미 너무도 부러운 재능을 가지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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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정미
      이군희 아이고! 남달리 글쓰기를 좋아하는 것일뿐입니다. 고맙습니다!
  • 김재진
    악마라고 부르시는 그 분이 제 책 표4의 글을 두 번이나 썼습니다 ㅎㅎㅎ 그를 비유한 소설을 쓴 그 소설가는 처음 집을 샀을 때 끌려가서 밤을 새며 같이 술 마셨던 선배고요. 세상엔 양 극에 서서 사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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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정미
      김재진 우와와! 김작가님의 생의 경험은 도대체 어디까지인가요!
      저는 고은을(이렇게 부르는 것이 불편하다면 죄송해요) 대학입학을 앞둔 겨울방학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봤어요. 친구아빠가 문인이셔서 그 빽으로요. 정말 더럽게 인상 깊었죠. 그러고도 대학시절에는 그의 책을 반신반의하면서도 읽었는데
      이문열의 글이 나오자 내 내적느낌이 그제야 이해가 되더라고요. 이문열이 진실을 말한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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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재진
      박정미이문열 선배 입장에선 진실이고 고은 입장에선 선동이지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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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정미
      김재진 저는 최영미를 비롯한 여자문인들의 입장에 제일 가까운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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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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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재진
      이문열의 금시조같은 뛰어난 소설과 유감스럽지만 고은의 문의마을에 가서 같은 시집들이 묻히는 것이 안타까울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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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정미
      김재진 저도 금시조 참 좋아해요. 예술가의 천형이라는게 있다는 걸 알았어요.
      2
    • 김재진
      박정미 그 입장에선 100프로 그 입장이 옳습니다.
    • 김재진
      박정미 그 시대가 문학의 시대였습니다. 지금은 유튜브 시대니까 ㅎㅎㅎ
    • Sang Rang Lee
      박정미 금시조
      저도 좋아해요
      단편은 정말 말할필요도 없 지요
      달팽이의 집 ? 칼레파 타 칼라 , 익명의 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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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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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정미
      Sang Rang Lee 그죠! 지나치게 무거운 관념체로 누르지 않는 글들은 정말 좋은 것 같아요.
    • Sang Rang Lee
      박정미 새벽에 잠깨어
      반가운 책 제목보고
      눈 반만 뜬채로 썼군요 ㅎㅎ
      놀이터 가는버스안
      오늘 날씨도 좋습니다ㅡ
      😀
  • Eunhee Kim
    잘 읽었어요. 고은과 이재명이 겹쳐 보이네요. 고은과 손잡았던 사람이 어찌 이재명을 칭송하지 않겠어요.
    4
    • 박정미
      Eunhee Kim 저도 그 말을 하고 싶었어요! 찌찌뽕! 다만 정치인을 끌어들이는 것이 너무 나간 것 같아 그만두었지요.
      권력을 위해 악과 더러움을 용인해버리면 이재명으로 갈 수 밖에 없지요!
      3
    • Eunhee Kim
      박정미 ㅎㅎ 우리 통했군요! 그의 최근의 책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그의 여성관은 어떨까 궁금해요. 고은의 여성관과 다를까? 북한의 혁명전사적 여성관과 다를까? 그의 여성관을 알면 그의 정치사상이 구체적으로 어떤 건지 알수 있을 것 같아요.
      2
    • 박정미
      Eunhee Kim 여기서 궁금하신 그의 여성관은 이재명의 여성관을 말씀하시는거죠? 그거라면 저는 김부선씨를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어요^^
    • Eunhee Kim
      박정미 백낙청씨의 여성관을 말했어요. 그런데 고은이나 이재명의 여성관과 비슷할 것 같아요.
    • 박정미
      아! 제가 오독했군요. 백낙청교수의여성관 말씀 하신건데.
      백교수의 여성관은 서울대 페미니스트들에게 널리 조리돌림 당했듯이 로런스사상 그대로로 보여져요.
      '안되는 줄 알면서도 왜 그랬을까.'라는 응답으로 백교수가 피해간 질문이 그의 여성관이죠.
    • 박정미
      아닌 것 같아요.고은과 이재명류와는 아무래도 품격이 다른 인간이라고 봐요.
      여성관도 그래요. 로런스는 새로운 남녀관계를 깊이 사고하고 새로운 문명의 전환점으로 삼았지요.거칠게 말하면 여성의 사회적진출추세를 막을 수는 없지만 여성의 가정에서의 역할을 더 중요시하죠.
      대신 여성이 가모장적지위를 가지고 친권과 재산권등 가정내모든 권력을 회복하는게 바람직하다고 보고 있어요.
      그렇게 가정ㅈ문제에서 풀려난 남자는 남자들끼리의 영원한 우정관계를 통해 세상을 좀더 아름답고 살기좋은 곳으로 개선시키는 역량을전적으로 발전시키고요.
      백교수는 영적이고 지적인 사람같아요. 정치가 그의 천재성을 너무 소모시켜 안타까워요.
    • Eunhee Kim
      박정미 답변 고마워요^^ 백낙청씨의 책을 읽어보고 싶네요.
    • 박정미
      Eunhee Kim 아이고! 저는 고생했어요. 지젝이니 들뢰즈니 라깡이니 하는데서는 던져버리고싶을 정도였어요 ㅎㅎㅎ
      건투를빕니다.(근데 꼭읽을만한 가치는 있어요!)
    • Eunhee Kim
      박정미 ㅋㅋ PMS(Post Modernism Stress)와 싸우며 읽은 열정에 감동!
  • Ilwon Yoon
    "악마가 양지 높은 곳을 차지하고 있는 곳에 어떻게 선하고 참되고 아름다운 것들이 피어날 수 있겠는가." 문장에 힘이 있어유. 제 지론 5년, 10년, 20년도 못 버티는 사상가들은 사상가라기 보다는 주장만 펼치는 선동가에 가깝다라고 생각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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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정미
      윤일원 아침에 제 글을 또 읽어보면서 이 문장을 다듬어 보고 싶어졌어요.
      "악마가 양지 높은 봉우리를 차지하고 있는 골에 어떻게 선하고 참되고 아름다운 것들이 피어날 수 있겠는가"로요.
      선하고 참되고 아름답지 않은 것들은 살아있을 때 가진 영향력을 잃자마자 쓰레기로 다들 알게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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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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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상태
    고은과 백낙청에 맞잡은 손에 그런 사실이 존재하는군요. 우리 시대에 일그러진 정체성을 봅니다.
    진보에 허명이 벗겨지는 시대를 또 관통하며 산다는 것이 어쩜 업보 같기도 하고 잔인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균형을 잡아가는 듯 하여 다행스럽단 생각을 하게 됩니다.
    5
    • 박정미
      강상태 바닷물 한번 왔다가면 아무리 높게 쌓은 모래성이라도 곤죽이 되고야 말지요.
      시절인연이 그들 발밑에 밀물을 쏟아붓는군요.
    • 강상태
      박정미 당대 민비도 누구도 그 커다란 정체성에서 벗어날 수 없음이니....
  • 하정호
    결국은 별 내용(근거) 없다는 걸로 끝나는데 왜 그 분을 대단한 사상가로 계속 얘기하죠?
    • 박정미
      하정호 백교수 아니었으면 우리의 한 시대를 짱짱하게 버팅겨줄 한 쪽이 무너지고 말았을거예요. 지금이야 시절인연이 다 해서 쓸모없이 느껴지지만 쓸데없이 문약해지고 감정적 마음으로만 파고드는 문단에 새로운 흐름을 굳건하게 세운 그의 정초능력은 천재의 무서운 확신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봐요.
      그렇게 문단정치에 깊숙이 발을 담그면서도 50여년간 로런스와 개벽사상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면서 새로운 것을 세우려는 그의 노력을 지켜보면서 저는 그렇게 느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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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d
      • Edited
  • 박인성
    공감합니다.
    백낙청씨의 "추상적 사유의 깊이와 실천 층차의 천박함"에~.
    • 박정미
      박인성 사실 그의 인생을 들여다보면 문학적 천재성이 현실정치에 끊임없이 소모되는 과정이라고 보입니다.
  • May be an image of outdoors
    2
    • 박정미
      이병철 와! 기가 막힌 밤정경입니다. 중앙박물관 왔다가셨군요. 저희집에서 걸어서 삼십분인데요. 아이고 아쉽습니다!
  • Lee Bomchul
    지켜볼 흐름같은 .. 물길일까 ..ㅎ
    흠과 결..
    그것에 데한 씨줄 날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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