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23

남포 서해갑문사업소 해설원 최영옥 - 통일뉴스



남포 서해갑문사업소 해설원 최영옥 - 통일뉴스





남포 서해갑문사업소 해설원 최영옥<연재> 정창현의 ‘북녘 여성을 만나다’ (6)
정창현 | tongil@tongilnews.com





승인 2013.04.16 07:34:48






▲ 2003년 9월 28일 최영옥 해설원이 서해갑문 입구에 나와 남측대표단을 맞이했다. [사진 - 정창현]
북의 유적지와 명소를 방문했을 때 꼭 만나게 되는 북녘의 여성 해설강사들. 구수한 말솜씨로 어렵게 평양을 방문한 방문객에게 하나라도 더 설명하기 위해 노력하는 그들의 모습을 잊지 못하는 남쪽 방문객들이 많다.

해설강사는 남쪽식으로 표현하자면 ‘관광안내원’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북측에서 해설강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남쪽에서 대학을 나온 전문 관광안내원들이 늘어나듯이 북쪽에서도 해설강사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문 교육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사회적 대우도 높고, 자부심도 강하다. 전국적으로 6,000명 이상의 해설강사들이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남포 서해갑문처럼 사적지가 아닌 곳에는 해설강사가 아닌 해설원들이 배치돼 있다. 2004년 2월 서해갑문에서 만난 최영옥 해설원에게 질문을 했다 무안당한 기억이 떠오른다.

▷ ‘최영옥 동무’는 해설강사 한 지 얼마나 됐어요?
“저는 해설강사가 아니라 해설원입니다.”
▷ 해설강사와 해설원은 어떻게 다른지?
“선생님은 지난해(2003년 9월)에 오셨을 때도 같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기억 안 나십니까?”
기억이 전혀 나질 않았는데, 7개월 전 최 해설원을 처음 만났을 때도 같은 질문을 한 모양이다.
“해설강사는 해설원보다 직급이 훨씬 높습니다. 해설원은 사적지가 아닌 일반 관리소에 배치되어 있지요.”

노무현 대통령 가장 기억에 남아



▲ 2003년 9월 28일 서해갑문 사적관에서 최영옥 해설원이 서해갑문의 공사진행 과정과 규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 - 정창현]
“남포사범학교(남포교원대학을 지칭하는 듯)를 나왔다”고 하는 최 해설원은 톡톡 튀는 말솜씨가 일품이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 기간에 노무현 대통령이 방문했을 때도 그녀가 해설을 맡아 남쪽에 방송되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12년간 해설원으로 있으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인사로 노무현 대통령을 꼽았다.

최 해설원을 처음 만난 것은 2003년 9월 28일이었다. 당시 그는 서해갑문에 배치된 지 2년 정도 됐고, 22살(남쪽 나이로는 23살)이었다. 흰색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고 나온 앳된 모습의 최 해설원은 능숙한 솜씨로 서해갑문의 역사와 현황에 대해 설명했다.

“서해갑문은 1981년 공사를 시작해 5년 후인 1986년에 완공됐습니다. 여덟 킬로미터에 이르는 둑은 서해 바다와 대동강을 막아 평안남도 남포와 황해북도 은율군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이 곳의 조수간만의 차는 7m입니다. 이 갑문이 없었을 때는 밀물 때 바닷물이 대동강까지 올라와 대동강에 소금기가 많았고, 비가 올 때는 평양도 홍수 피해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 갑문 건설로 홍수피해를 없앴고, 가뭄으로 대동강물이 부족할 때는 반대로 바닷물을 끌어들여 강물을 관계용수로 사용하게 됐습니다. 바닷물을 끌어들이면 바닷물이 무거우므로 강물이 위로 뜨게됩니다. 이 갑문을 만드는데는 3만 명의 인민군대가 동원됐고, 40억 달러가 들었습니다. 수령님의 지시에 따라 이 사업을 시작할 때 중국, 러시아 등 주변국들은 너무 황당한 사업이라서 도와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만 순전히 우리의 힘으로 밀어붙여서 3년 만에 완공했습니다.”

그는 김일성 주석이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과 회담할 당시의 일화도 소개해줬다.

“1994년에 수령님께서 카터 전 대통령과 회담을 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평양에서 요트를 타고 이곳까지 왔더랬는데 수령님께서 강가에서 낚시하는 인민들을 보고는 요트의 시동을 끄라고 지시했습니다. 카터가 궁금해서 왜 시동을 껐는가하고 물었더니 수령님께서는 ‘태공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뭔지 아오? 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이지요’라고 했더랍니다. 그래서 카터가 ‘아 이렇게 중요한 회담을 하는 가운데서도 인민들의 생활을 돌보는구나’라면서 감복했다고 합니다.”

첫 만남 3개월 전쯤 최 해설원은 직장 청년동맹원들과 함께 신천박물관에 다녀왔다. 그때의 감상에 대해 남쪽의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그는 “지금도 공화국에 대한 압살정책이 극에 달해 있지만 신천을 생각하며 조그마한 환상도 가지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합니다. 미국과 결산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현재 미국의 태도는 ‘도적이 매를 드는 격’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인차 결혼합니다”



▲ 2006년 5월 17일 최영옥 해설원과 함께. [사진 - 정창현]
첫 만남 이후 매해 한 번 꼴로 최 해설원을 만날 기회가 생겼다. 2008년 5월 15일에 본 것이 마지막 만남이었다. 이날 11시쯤 서해갑문기념관 앞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자 단번에 알아 본 최 해설원이 미소를 짓는다.

“선생님, 이제 제 해설에 흥미가 없나 봅니다. 사적관에 들어와 해설도 듣지 않고 말입니다.”
대표단에서 이탈해 여기저기 사진만 찍는 나를 보고 또 ‘타박’이다. 몇 차례 만나다 보니 정이 많이 들어 개인사를 이야기할 정도가 됐다.

▷ 이제 여드름이 나나? 얼굴에 뭐가 잔뜩 났군.
“그러게 말입니다. 아주 속상합니다. 얼마 전에 중국에서 들여온 화장품을 발랐는데 그 뒤부터 얼굴에 이렇게 나기 시작했습니다. 제 주위에 같은 화장품을 쓰고 낭패를 본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에요. 위에 제기해 봤더니 그 화장품이 중국에서 엉뚱하게 만든 가짜였다지 뭡니까? 중국인들은 먹는 것까지도 가짜로 만든다고 하찮아요.”
▷ 이제 시집가야지?
“인차 가을쯤 결혼할 예정입니다.”

의례적으로 던진 말인데, 진지하게 대답했다. 세대주(남편)가 될 사람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그의 연애이야기는 남쪽 방문객들 사이에서도 알려져 있기 때문. 그가 털어놓은 연애담이다.



▲ 2008년 5월 15일 양산을 쓴 최영옥 해설원이 남측대표단을 배웅하고 있다. [사진 - 정창현]
“제가 저쪽 남포에 사는데 황해남도에 사는 총각이 제 강의에 반했는지 미모에 반했는지는 몰라도 날마다 집에 찾아와서는 귀찮게 굴었습니다. 호호... 저는 그 동무에게 혁신자의 영예를 안고 다시 당당하게 찾아오라고 말해줬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일주일에 한 번이나 찾아올까 말까한 거리지만 서해갑문이 건설되면서 2시간이면 찾아올 수 있는 거리가 됐습니다. 그러니까 이 서해갑문은 사랑을 이어주는 오작교로도 됩니다.”

자신의 연애담을 통해 서해갑문의 기능을 알기 쉽게 설명하는 기지를 발휘한 것이다. 몇 년 전에 이야기한 연애담의 주인공 남자가 결혼상대인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침 기념품으로 사 두었던 평양화장품공장에서 나온 화장품세트를 결혼선물로 건넸다.

▷ 다음에 왔을 때는 못 보겠군.
“인차 통일이 되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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