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3-18

05 친일인명사전, 민족 양심의 고해서로 - 월간참여사회 - 참여연대



친일인명사전, 민족 양심의 고해서로 - 월간참여사회 - 참여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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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인명사전, 민족 양심의 고해서로

2005년 10월
2005.10.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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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국치 95주년을 맞아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가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3,090명을 발표한 것을 두고 예상했던 대로 수구세력의 반발이 만만치 않다.

요즘 화두가 되어 있는 ‘친일’ ’친일파’라는 말은 일제가 조선을 넘보기 시작한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을 전후로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서구 열강들이 조선을 자신들의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치열한 각축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열강들의 길라잡이 역할을 한 수많은 사대세력이 존재했음은 물론이다. 그들은 누구의 이익에 복무하느냐에 따라 친러파, 친미파, 친청파, 친영파 등으로 불렸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 정도는 정치적인 견해 차이로 여겨졌을 뿐 그 자체로 크게 비난받을 상황은 아니었다. 실제로 이완용의 경우도 미국통에서 친러파로, 다시 친일파로 변신한 경우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일제에 의해 망국을 당한 상황에서 친일파는 오늘날까지도 불명예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이는 나치 독일의 식민지였던 유럽에서도 마찬가지다. 나치에 4년 간 점령당한 프랑스에서는 우리의 친일 부역자에 해당하는 ‘콜라보(collabo, 대독 협력자)’라는 말은 가장 모욕적인 욕설로 통한다. 우리와 같이 일제에 점령당한 중국은 친일협력자들을 ‘한간’(漢奸)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처럼 제 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전범국인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에 협력한 자국민에 대해 어느 나라건 가혹한 응징을 가해 사회의 기강을 세우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친일파 청산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렇다면 왜 60년 전 일을 왜 이제 와서 청산하자고 하는 것일까. 이는 <조선> <중앙> <동아> 같은 수구 언론의 지면에 단골로 등장하는 우문(愚問)이기도 하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60년 동안 못했으니 더 늦기 전에 해야 하는 것이며, 우리 시대에 하지 않으면 사회적 논란을 거듭하고도 후대에 짐을 떠넘기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더 늦기 전에, 이제라도

공동체, 특히 민족공동체의 성질을 강하게 띠고 있는 우리나라의 경우 민족 차원의 공통적인 역사 인식기반을 갖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중동의 여러 나라들은 코란이란 종교 경전을 기반으로 자기네 나라를 지켜나간다. 우리에게는 특정 종교나 이념이 아니라 한민족이라는 공통의 의식·역사 기반이 정체성을 지켜주는 중요한 요소이다. 민족사에서 삼국의 각축이나 한국전쟁과 같은 내전보다는 외세, 즉 이민족과의 대립 과정에서 민족공동체는 그 내부의 에너지를 강하게 발휘한다. 결국 우리 근현대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뭐니뭐니해도 35년 간의 일제 통치가 아닐 수 없다.

강한 민족 정체성을 일제 식민통치기간에도 면면히 이어온 우리 민족은 외세에 의해 분단되었을망정 남북한 모두 건국 직후 친일청산을 주요 과제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우리 내부의 과제이면서 동시에 시대정신의 자연스런 발로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의 경우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자 친일파 청산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독일이나 이탈리아와 마찬가지로 제국주의는 본원적으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보여 왔고 일제 역시 식민 통치 기간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 진영의 항일세력을 ‘공비’(共匪)라고 폄하하며 강하게 탄압하였던 터라 북한 지역에 남아있던 친일세력들은 혼비백산하여 월남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일제시대 관료라 할지라도 자신의 과거를 공개적으로 반성하면 북한의 관료로 등용하는 탄백(坦白)제도를 운영하는 유연성도 보여주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남한은 8·15 이후 친일청산은커녕 친일세력이 오히려 ‘해방’을 맞았다. 일제가 물러가면서 생긴 힘의 공백을 이들이 차지한 것이다. 관료 사회를 예로 들면 주로 중하위직에 머물러 있던 조선인 친일 관료들은 일본인이 물러가면서 생긴 고위직을 자연스럽게 ‘승계’한다. 이는 비단 관료사회 뿐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언론, 교육 등 사회 전 분야가 그러했다. 총독부의 조선사편수회에 근무했던 이병도가 해방 후 한국 사학계의 태두로 등장하고 음악의 현제명, 미술의 김기창 등 일제시대 친일단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이들이 해방과 더불어 그 분야의 거두로 우뚝 솟아오르며 단박에 신분 상승을 이룬 것이다.

레지스탕스들이 정부와 사회의 주요 직책에 오른 프랑스가 우리에게는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다. 프랑스 현대정치에 드골 이후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지도자로, 14년이라는 긴 세월을 대통령직에 앉아있었던 프랑수아 미테랑 역시 2차 대전 때 보병에 입대, 독일군 포로가 되었으나 탈출해 레지스탕스에 가담한 독립운동가 출신이다. 작가 카뮈, 철학자 사르트르, 여성운동가 보부아르 등 프랑스의 지성을 대표하는 인물들 역시 하나같이 반나치 활동에 헌신한 경력의 소유자들이다.

역사적·도덕적 청산을 하자는 것

왜 친일인명사전이 필요한지 이제 짐작이 갈 것이다. 친일인명사전의 편찬은 친일청산의 최소한이다. 그것은 1948년 국회에서 만들어져 불과 1년 만에 이승만과 친일세력에 의해 무참히 해산된 반민특위(반민족행위조사특별위원회)의 역사적인 계승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완용의 손자가 실정법의 보호 속에서 재산을 찾아가는 현실 속에서 친일파를 부관참시하자거나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자는 인적·물적 청산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 대한 역사적·도덕적 청산을 하자는 것이다. 그들의 죄상을 객관적으로 남겨놓고 민족 성원 전체를 향한 반성을 요구하는 민족 양심의 고해서로 삼자는 것이다. 어느 사회나 모순을 가지고 있고, 그 모순은 반드시 인과관계가 있으며, 그 해결책도 바로 그 사회가 지니고 있는 법이다. 지금 이 순간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거의 모든 근본모순이 바로 친일파와 친일잔재의 청산 실패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1세기에 접어든 이 시간에도 20세기의 과제와 씨름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2002년부터 5개년 계획으로 추진 중인 친일인명사전 편찬작업은 등산으로 치면 이제 막 산의 8부 능선 정도를 올랐다. 가장 어려운 고비에 직면한 것이다. 지지자들이 늘어나는 것과 동시에 저항세력도 눈에 띄게 조직적으로, 그리고 과격하게 움직이고 있다. 명단 발표 이후 두 차례에 걸친 반대세력의 사무실 난입 시도를 보면 반민특위 습격 사건이 시야에 겹쳐져 들어온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절대로 그러한 역사의 후퇴와 질곡을 반복할 수 없다. 국민들의 강력한 지지와 성원이 절실한 이유이기도 하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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