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5-22

알라딘: 지배받는 지배자: 미국 유학과 한국 엘리트의 탄생 - 미국 유학과 한국 엘리트의 탄생



알라딘: 지배받는 지배자: 미국 유학과 한국 엘리트의 탄생 - 미국 유학과 한국 엘리트의 탄생




[eBook] 지배받는 지배자: 미국 유학과 한국 엘리트의 탄생 - 미국 유학과 한국 엘리트의 탄생
김종영 (지은이)돌베개2015-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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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편집 회의
"미국 유학파 지식인은 어떻게 한국을 장악했는가"
중국, 인도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미국 유학생을 배출하는 한국에서, 미국 유학은 더는 특별한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미국 유학을 떠난 이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이들, 혹은 그곳에서 자리를 잡고 사는 이들의 여정과 현재는 사회적 시선으로 살펴볼 주제다. 사회학자 김종영은 지난 15년 동안 이들을 면 대 면으로 만나 취재한 결과를 바탕으로 미국 유학파 엘리트가 어떻게 한국사회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유지하는지를 밝힌다.

제목 ‘지배받는 지배자’는 미국 유학파 지식인을 일컫는 말로, 한국사회에서 교육적, 문화적 헤게모니를 가지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미국 대학의 글로벌 헤게모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중적 지위를 드러내는 표현이다. 미국 대학과 학문의 우수성과 탁월함을 경험한 이들은 한국 대학과 지식사회의 부족함을 근거로 글로벌 헤게모니의 격차를 더욱 강화하고, 격차를 줄이기보다는 이 격차에서 오는 이점을 활용하려 들며, 이런 경향이 구조화되면서 새로운 진입 역시 같은 방식으로만 가능하게 된다. 미국으로 유학을 가든 가지 않든 미국 유학파 지식인 중심의 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다. 물론 미국 유학이 잘못은 아니지만, 그 결과는 되새길 필요가 있겠다. 무엇이든 고이면 썩는 법이다.
- 사회과학 MD 박태근 (2015.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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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사회학자가 15년간 추적한 미국 유학 현상과 유학파 지식인의 실체. 미국 유학파 엘리트들이 학계와 기업에서 어떻게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그 기득권을 유지하는지를 탐색한다. 미국 유학파 엘리트가 한국과 미국 사이에 어떤 상황과 위치에 놓여 있는지를 분석하고, 그들의 독특한 정체성을 규명한다. 이를 통해 학벌사회의 최상위에 있는 한국 엘리트 지식인 집단이 어떻게 탄생하는지를 밝힌다.

저자는 부르디외의 계층 이론의 개념을 빌려와, 한국과 미국 대학 간의 지정학적 관점에서 미국 유학파 엘리트 지식인을 ‘지배받는 지배자’로 다시금 명명한다. 한국 사회를 지배하면서 미국 학계에 종속되어 있는 미국 유학파의 식민성을 저자는 ‘지배받는 지배자’로 일갈하는 것이다.

미국 유학파는 미국에서는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하지 못하는 ‘열등한 유학생’이었고 학문적으로 주류에 진입하지 못하는 이방인이었으면서도, 한국에서는 미국 대학에서 배운 지식으로써 생존을 도모하고 영향력을 행사한다. 미국과 한국 대학 간의 트랜스내셔널 격차는 오히려 그들에게는 취업의 기회로 작용하는 것이다.

부연하자면 그러한 트랜스내셔널 격차와 우열 관계가 심화될수록 미국 유학파 지식인이 한국 사회에서 갖는 상징자본의 가치는 커지고, 직업 기회는 많아진다. 이 책에서는 미국 유학파의 중간자적인(미들맨) 특성을 들어 그들을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이라고 정의한다.


목차


책을 펴내며 한국 대학과 지식 공동체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하여

1장 지배받는 지배자
미국 유학과 한국 엘리트의 탄생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
미국 대학의 글로벌 헤게모니
문화자본의 지정학
트랜스내셔널 위치 경쟁과 직업 기회
미국 유학 지식인의 트랜스내셔널 궤적
미국 대학의 글로벌 헤게모니를 극복하기 위하여

2장 글로벌 문화자본의 추구
미국 유학 동기
코즈모폴리턴 비전과 양육
대학과 기업에서 우대받는 미국 유학파
학문의 중심에서 배움 추구
“엄마가 미안하다” / “한국이 싫어서요”
큰물에서 놀고 싶은 우물 안 개구리
트랜스내셔널 지위 경쟁 전략과 욕망과 가치 추구로서의 미국 유학

3장 미국 대학의 글로벌 헤게모니의 일상적 체화
미국 유학 경험
‘엄친아’에서 열등생으로
눈치와 차별 사이에서
학문자본과 생존 전략 전수받기
트랜스내셔널 학문적 관계망 속에서의 탐구
연구 중심 대학에 압도되다
‘대가’라는 학문권력과의 만남과 학문 공동체로의 진입
‘똥밭’이 ‘거름’이 되기를 꿈꾸는 이방인

4장 트랜스내셔널 위치 경쟁
멤버십, 실력, 시장
트랜스내셔널 위치 경쟁
멤버십
실력
시장

5장 글로컬 학벌 체제
한국 대학의 교수 임용 과정과 미국 학위의 우위
교수 임용 ‘과정’의 중요성
교수 임용의 우발성과 복합성
인정의 매체와 글로컬 학벌 체제에서의 실력 평가
아카데믹 특수주의의 비루함
글로컬 학벌 체제와 학문적 폐쇄

6장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
미국 유학파 한국 대학 교수들의 연구 경험
연구의 트랜스내셔널 시공간 격차
열등한 연구 환경
파편화된 인정 시스템
집중할 수 없는 연구 문화
학문 공동체의 폐쇄성과 타율성
학문적 열정의 쇠락
왜 한국에서 탁월한 연구는 드문가

7장 한국 글로벌 기업의 코즈모폴리턴 엘리트
한국 기업에서의 직장 생활
글로벌 인재 전쟁
트랜스내셔널 문화 충돌
직장의 사다리, 영어
미국 학위가 주는 엘리트 멤버십
글로벌 지식의 활용
글로벌 인성자본
미국 학위자들의 동문 네트워크
코즈모폴리턴 분할

8장 개인화된 기능적 이민 지식인
미국 대학에서의 교수 생활
미국 대학의 교수로 임용되기
테뉴어를 향한 고군분투
연구, 오로지 연구!
영어 장벽과 사회적 소외
개인화된 기능적인 삶
트랜스내셔널 학문 교류

9장 트랜스내셔널 이방인 엘리트
미국 기업에서의 직장 생활
미국 기업에 취직하는 과정
위치 경쟁에서 기술적 지식의 중요성
‘착성겸’(착함·성실·겸손) 아비투스에 울다
영어, 영원한 아킬레스건
한인 공동체를 지원하는 전문가
트랜스내셔널 연줄
아메리칸 라이프스타일

에필로그 Academia Immunda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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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지배받는 지배자`는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계층 이론에서 `지식인`을 일컫는 말이다. 그에 따르면 현대 사회의 지배충은 자본가 계층과 지식인 계층으로 양분되어 있다. 이 중에서도 경제적 영역을 지배하는 자본가 계층이 문화적 영역을 지배하는 지식인 계층보다 우위에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지식보다 우선한다는 것이다. 지식인은 지배층에 속하지만 이런 이유로 지배층이면서도 지배를 받는 모순적인 집단이다. - 20쪽 접기 - 붉은눈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은 어떤 의미에서 지식 생산의 경제적 지위를 뜻하며, 지식인의 계급적 질서에서 중간적 위치에 있음을 의미한다. 미들맨 소수자가 식민지적, 전근대적 상황에서 출현하듯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은 한국 학계의 지적 식민성과 전근대성 속에서 탄생한다. - 24쪽 - 붉은눈
미국에서 교육받은 한국 지식인들은 귀국하거나 미국에 정착한다.트랜스내셔설 이동의 상황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지식인은 미국에서 생산된 지식을 한국으로 수입하는 역할을 하며, 이를 한국 실정에 맞게 변형, 적용시킨다. 이들의 한국에서의 지식 생산은 일반적으로 미국의 연구 중심 대학보다 독창성, 중요성, 파급력이 떨어지는데, 이는 연구 자원의 부족, 연구 인력의 전문성 부족, 연구 인정 체계의 파편화, 연구 집중 강도의 약화, 연구 문화의 파벌화와 정치화, 한국 학문 공동체의 천민성(pariahhood)으로부터 기인한다. 따라서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의 주요 생존 전략은 미국에서 생산된 지식을 빨리 받아들여 한국의 로컬 지식인들에게 판매하는 것이다. 미국에서 훈련받은 한국 지식인들은 영문 저널 투고, 국내외 특허 출원, 연구의 글로벌 네트워킹에 참여하여 세계적인 지식 생산에 기여함에도 불구하고 중요하고 독창적인 연구 성과를 내지 못하고 세계 지식체계의 주변에 머무르는 경향이 있다. - 25쪽 접기 - 붉은눈
가르침과 배움은 지배-피지배의 관계다.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가 말하듯이 모든 헤게모니적 관계는 교육적 관계다. 미국은 `가르치는 나라`이고, 한국은 `배우는 나라`다. 학문을 배운다는 것은 또한 제도적 공간인 대학 내에서의 지배의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학은 위계를 가지며 고로 이 배움의 구조에서 탄생한 지식인들도 계층화되어 있다. 대학은 학문의 성지(temple)인 동시에 일종의 분류 기계(sorting machine) 또는 체(sieve)다. - 27쪽 접기 - 붉은눈
대학은 개인에게 사회적 지위를 부여하는 `학위`라는 특정 상품을 공급한다. 학위는 제도화된 문화자본의 형태로서 지위재(positional goods)다. 지위재의 가치는 대학의 명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즉 명성이 높은 대학일수록 수여되는 학위의 가치가 높다. 어떤 대학이 더 높은 명성을 가지는가? 근대 대학은 `연구 중심 대학의 승리`로 요약할 수 있으며,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볼 때 새롭고 중요한 지식을 생산하는 대학일수록 명성이 높다.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는 학자들은 연구 중심 대학에 속한 경우가 많으며, 이는 그 대학 명성의 중요한 척도가 된다. 학문과 과학은 글로벌한 활동이며 대학의 명성도 이에 따라 글로벌하게 형성된다. - 28쪽 접기 - 붉은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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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김종영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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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연구 분야는 지식사회학, 과학기술사회학, 교육사회학, 사회운동론, 세계화의 사회학 등이다. 저자의 첫 번째 책 《지배받는 지배자: 미국 유학과 한국 엘리트의 탄생》은 한국사회학회 저서상을 수상했고 대한민국학술원 우수도서와 경향신문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최근작 : <지민의 탄생>,<지배받는 지배자> … 총 4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미국 유학파 엘리트는
어떻게 한국 사회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는가

사회학자가 15년간 추적한 미국 유학 현상과 유학파 지식인의 실체


한국 엘리트 지식인 집단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이 책은 미국 유학파 엘리트들이 학계와 기업에서 어떻게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그 기득권을 유지하는지를 탐색한다. 미국 유학파 엘리트가 한국과 미국 사이에 어떤 상황과 위치에 놓여 있는지를 분석하고, 그들의 독특한 정체성을 규명한다. 이를 통해 학벌사회의 최상위에 있는 한국 엘리트 지식인 집단이 어떻게 탄생하는지를 밝힌다.

지배받는 지배자 또는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

저자는 부르디외의 계층 이론의 개념을 빌려와, 한국과 미국 대학 간의 지정학적 관점에서 미국 유학파 엘리트 지식인을 ‘지배받는 지배자’로 다시금 명명한다. 한국 사회를 지배하면서 미국 학계에 종속되어 있는 미국 유학파의 식민성을 저자는 ‘지배받는 지배자’로 일갈하는 것이다.
미국 유학파는 미국에서는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하지 못하는 ‘열등한 유학생’이었고 학문적으로 주류에 진입하지 못하는 이방인이었으면서도, 한국에서는 미국 대학에서 배운 지식으로써 생존을 도모하고 영향력을 행사한다. 미국과 한국 대학 간의 트랜스내셔널 격차는 오히려 그들에게는 취업의 기회로 작용하는 것이다. 부연하자면 그러한 트랜스내셔널 격차와 우열 관계가 심화될수록 미국 유학파 지식인이 한국 사회에서 갖는 상징자본의 가치는 커지고, 직업 기회는 많아진다. 이 책에서는 미국 유학파의 중간자적인(미들맨) 특성을 들어 그들을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이라고 정의한다.


미국 유학파 엘리트는 어떻게 한국 사회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는가

저자는 미국 유학파가 한국 사회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을 대학의 글로벌 위계와 한국 사회의 학벌 체제가 결합하는 데서 찾는다. 그리고 이를 ‘글로컬 학벌 체제’라 요약한다. 즉 글로벌한 차원에서 작동하는 대학의 위계 관계와 로컬 차원에서 작동하는 학벌 체제가 공히 미국 유학파가 한국 사회에서 우월한 지위를 구축하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는 보편적 과학주의를 추구한다는 학계에서 사실상 비합리적이고 전근대적인 ‘사회적 폐쇄’(social closure)가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력주의와 과학주의가 힘을 쓰지 못하고, 학위라는 문화자본이 ‘멤버십’으로 기능하기 때문에 이것을 가지지 못한 자는 뛰어난 실력이 있어도 학계에 진입하지 못한다. 이러한 사회적 폐쇄는 한국 학계를 더욱 비민주적이고, 인맥과 가부장적 유교문화, 조직문화 등의 특수주의가 팽배하는 비합리적인 집단으로 만든다. 더욱이 문제적인 것은 사회적 폐쇄가 개방적이고 창의적인 연구를 가로막는 ‘학문적 폐쇄’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미국 유학파 엘리트가 한국 사회에서 우위를 점하는 현상은 단순히 학문의 종속성과 식민성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미국 유학파 지식인은 왜 탁월한 연구를 하지 못하는가
미국 유학파 지식인은 특유의 트랜스내셔널 위치성으로 말미암아 탁월한 연구 성과를 내는 데 한계가 있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그들은 한국에서 교수직을 유지하며 연구 활동을 하지만, 그들의 학문적 뿌리는 미국에 있다. 유학파의 “연구 활동은 트랜스내셔널 구조를 지니는데, 한국과 미국 사이에 끼여 있는 모순적인 상태에서는 연구에 대한 고도의 집중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연구 방법론은 미국 학문에 기반하지만 한국에서 연구 활동을 하기 때문에, 연구는 한국적 맥락을 띠고 있다. “한국과 미국 사이에 ‘양다리’를 걸쳐야 하는 학문의 트랜스내셔널 상황으로 인해”(198쪽) 오리지널리티가 있는 창의적 연구를 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 밖에도 한국 대학의 연구 자원에 대한 투자 및 연구 인력의 전문성의 부족이 한국에서 탁월한 연구가 수행되지 못하는 요인인데, 이것은 아이러니하게 한국 학생들이 미국 유학을 떠나는 이유가 되기도 하다. 한국 대학 문화의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은 이루어지지 않고, 미국 유학을 떠나는 것으로 문화자본의 획득과 트랜스내셔널 변신을 기획한다. 이러한 악순환은 한국 학계의 종속성을 지속시키며, 주체적이고 창의적인 연구의 가능성을 봉쇄한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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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추행교수에서 이제는 인분교수까지... 자신을 지배자라고 생각하는 대학교수들은 절대반지를 끼고 대학원생들의 몸과 마음을 착취한다. 그들이 왜 그런 괴물이 되었는지, 왜 괴물이 될 수 밖에 없었는지를 촘촘하게 보여주는 연구물. 권력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무얼 해야할까?
이팝 2015-07-17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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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사회의 일면을 통찰력있게 꼬집어 주어서 시원함.
그노 2015-12-22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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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접하고 미국 유학을 한 분과 잠깐 대화를 나눠본 적이 있는데 미국대학의 치열함 때문에 잠도 줄일 만큼 힘든 시간을 보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물론 모든 미국 유학출신 교수가 그런건 아니겠지만 ˝지식수입상˝으로 머물게 된 이유 등을 조금은 알것 같기도 하다.
즐거운하루 2015-06-28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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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궁금했던 내용. 미국의 대학 시스템이 부러웠다. 씁쓸하기도 했지만 아는 편이 나은듯하다. 삶은 어디서나 치열하다. 공부 더 열심히.
도시맘 2015-06-05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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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글픈 현실.....
양산박 2015-12-17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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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받는 지배자>를 읽고




1. 유학을 앞두고 미국에 대한 우리 학문의 종속성을 분석한 책을 한 권 사서 읽었다. 비록 1만 6천원의 비용을 지출했을 뿐이지만, 책 한 권을 사면서도 나름 '미국 유학과 한국 엘리트의 탄생'이라는 흥미로운 부제 못지 않게, 알라딘 '편집장의 선택', '돌베개'라는 출판사에 대한 신뢰도를 따져 고른 책이었다.



2. 그런데 몇 장을 채 넘기기도 전에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이 책은 한국 지식인의 트랜스내셔널 탄생을 미국 대학의 글로벌 헤게모니, 트랜스내셔널 위치 경쟁, 트랜스내셔널 직업 기회들 사이의 역학 관계 속에서 이해한다."라든지 "이 책은 일종의 절충적 질적 종단 연구이며 두 단계의 질적 면접에 기반하고 있다."와 같은 문장들이 곳곳에 포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 이해한다"라는 주술관계의 호응을 비롯해서 '트랜스내셔널 ㅇㅇㅇ'이라는 정체불명의 조어를 남발하거나 '~적 ~적 ㅇㅇ'이라는 표현들 모두 논문이나 보고서 등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는 잘못된 문장들이다. (저자 자신이 교수라는 건 알겠지만)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책을 내고자 한다면 이런 문장들은 한 번쯤 충분히 다듬었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이것은 편집의 문제(혹은 책임)이기도 하다.


3. 이렇게 말하는 나도 보고서와 논문에 잘못된 표현들을 자주 사용하는 사람이지만, 학술논문이든 대중서적이든 글을 쓰는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의 글을 퇴고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낀다.




4. 책을 요약하면, 미국 대학이 갖는 헤게모니에 이끌린 사람들은 국내 대학들이 갖는 불평등과 차별, 비루함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유학을 결행하고, 미국에서는 주변인과 비영어권자로서의 한계를 인식하다가 학위 취득 후 국내에 돌아와 미국 현지에서의 열악했던 자신의 위치를 지식의 전달자로 '전환'하게 되며, 한국 사회 내 엘리트로서의 이러한 이익을 고수하기 위하여 결국 미국에 대한 학문적 종속에 이바지한다는 것.



5. 무슨 보고서 같은 류의 책을... 힘들게 읽었다.





------ 추가 (위 아킬레우스님의 비평에 대해)



깜짝 놀랐다. 누군가가 내가 쓴 것을 읽고, 그에 대한 평을 해주다니... 처음 겪는 일이어서 다소 놀랍기도 하고, 긴장되기도 하고, 부끄러우면서 왠지 모르게 즐겁기도 하다. 하지만, 굳이 제목에서부터 내 별명을 밝히면서까지 내 의견에 일일히 토를 달아 반박하면서 이 책의 가치를 설파하기 보다는 그냥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듯 내 의견도 받아들여 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이 책의 가치 여부가 독자들의 논쟁으로 드러나거나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각자가 읽으면서 판단하면 될 일을 (저자의 지인이나 출판사 관계자가 아닌 다음에야) 굳이 시간을 들여 내 짧은 식견을 비판하면서 이 책의 유용성을 설파할 것 까지야...

아무튼 그냥 끄적인, 어찌보면 너무 단순한 낙서 수준의 초라한 글에 이렇게 분석적인 글을 남겨주셔서 이 책에 대한 다른 관점 일부는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 책에 대한 독자로서의 불만은 여전하다. 책을 읽고 느낀 점들은 다 제각각이어서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고, 전공자 수준의 학식을 갖춘 분과 굳이 논쟁할 생각/능력도 없지만 애초 내가 이 책을 읽으며 불편했던 점 이상을 과도하게 지적하신 것 같아 약간의 내용을 추가한다. (참고로 나는 사회학적 지식이 거의 없다.)



1. 나는 이 책을 단편적으로 이해해서 한국의 엘리트들이 미국에서는 열등한 위치였다는 것만을 강조하였다. 누군가가 이 책을 읽고 한 줄로 요약하라고 한다면, 난 위 4. 처럼 말할 수 밖에 없다.

반면, 아킬레우스님이 강조하듯 에필로그에서 제시한 짧지만 강력한 문장 "학문은 더럽다(Academia Immunda)"가 이 책의 '핵심'이라고는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건 이 책의 구성(지배받는 지배자, 글로벌 문화자본의 추구, 미국 대학의 글로벌 헤게모니의 일상적 체화, 트랜스내셔널 위치 경쟁, 글로컬 학벌 체제,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 중 저자가 어떠한 부분을 많이 할애하였는가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에필로그에 있는 이야기를 억지스럽게 숨어 있는 결론으로 이끌어낼 것 까지는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2. 이 책의 제목만으로도 그 내용이 굉장히 기대되었다. "지배받는 지배자"라는 모순적 표현이 미국 유학 후 한국의 엘리트 지식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을 아주 적확하게 지칭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1장의 앞부분을 제외하면 이 책의 키위드, 즉 이중적 지위에 있는 한국의 엘리트를 지칭하는 용어는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이다. 정말 좋다고 생각했던 제목과 글의 내용에서 실제 활용되고 있는 용어의 불일치가 일단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내가 위 2. 에서 지적한 것은 사회학적 용어에 대한 낯섦이 아니다.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트랜스내셔널 ㅇㅇㅇ'이라는 정체불명의 조어를 남발"하는 것이 읽기 불편했다는 것이다. 즉,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 트랜스내셔널 위치 경쟁, 트랜스내셔널 직업 기회와 같은 영어와 한글이 조합된 용어들을 말한다. (사회학계에서는 이 용어를 반드시 이렇게 써야 하는지 모르지만 그런 이해가 없는 나로써는) 굳이 한글로 번역하기가 곤란한 경우 학술적으로 이렇게 쓰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아는데 '트랜스내셔널리즘'과 같이 하나의 단어도 아닌 형용사 'transnational'을 왜 '트랜스내셔널'로 표기해야 하는 것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인터내셔널과는 달리 아직 적합한 국내 용어를 못찾았기 때문인가?). 용어를 발음 그대로 한글로 치환한 것은 그 용어가 중요하기 때문이어서 일수도 있지만, 그 용어를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를 몰라서 일수도 있다.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이라는 용어는 내가 볼 때는 후자에 속한다.



3. 이건 글의 전문성이 아닌 '퇴고'에 관한 생각이었다. 최근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이나 이오덕의 <우리글 바로쓰기>와 같은 책을 읽으며 우리말로 쓰는 좋은 글은 어떤 것일까에 천착하고 있었던지라, 책을 읽다가도 특히 문체에 관한 부분이 많이 거슬렸다. 그래서 특히 이 글의 문체에 대해 안 좋은 점을 비판한 것이다. 글의 용어나 내용이 전문적인 것과 글을 읽기 어렵게 쓴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아킬레우스님이 그렇게 강조하는, 내가 사회학적 기본지식이 없다는 비난을 인정한다고 해도 이 책의 문체와 강준만, 조한혜정, 엄기호, 오찬호 등의 문체가 확연히 차이가 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이건 저자가 독자의 입장에 서서 얼마나 자신의 글을 다듬었는가 하는 퇴고의 문제이며, 정성의 문제이다.

이에 대해 대중서를 (읽기) 어렵게 쓰면 안되냐고 반문한다면 할 말은 없다. 그것은 저자의 특성이고, 권리이자, 취향이다. 반대로 조금 더 쉽게 읽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 (적어도 '나'라는) 독자로서의 특성이고, 권리이자, 취향이다. 그리고 나는 적어도 저자라면 이러한 차원에서는 독자들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찾아보지는 않았지만, 이 책은 논문이나 보고서 등의 다른 학술적 형태로 게재되었으리라 짐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문이나 보고서가 아닌 다른 형식으로 글을 선보였다면, 학계 외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출판의 목적, 의도, 기대는 달랐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아킬레우스님은 이상한 비유를 들어 나를 비판하고 있는데, 나는 사회학 일반에 관한 대중서적으로 이 책을 구입한 것이 아니다. 만약 내가 수학에 관심이 있어서 책을 고른다고 하더라도 그 제목이 '대학수학'이었다면 나는 그 책을 구입하지도, 그 책이 그래도 읽기 수월할 것이라는 기대도, 그리고 책을 다 읽은 후에 책에 수식이 많다고 굳이 시간을 내어 비평을 쓰지도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책의 제목이 "지배받는 지배자"가 아니라 '한국에서의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의 위치 경쟁에 대한 분석'이었다면 당연히 구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러한 비용을 치루고 싶지 않다면 연구서가 아니라 대중교양서적을 읽어야 한다."라고 지적하신 부분을 100% 인정한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한 것이다. 다만, (저자와 출판사가 밝히지 않은 관계로) 이것이 그토록 전문적인 '연구서'임을 몰랐을 뿐. 그리고 전문적인 연구서라는 이유로 읽기 어려운 문체를 사용하는 것이 허용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뿐.



4. 1.에서 개략적으로 언급한 바 있으므로 생략한다.



5. 지적하신 대로 내게는 "질적 연구와 질적 연구의 글쓰기에 대한 무지"가 있다고 하자. 하지만 나는 그것이 '연구'일지라도 그 분야의 지식인뿐 아니라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연구서에는 대중서와는 다른 그 나름의 체계와 글쓰기 방법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글쓰기 방법이라는 것에 가독성이 좋지 않은 허술한 문체들이 포함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없다면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니다', '쉽게 설명할 수 없다면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나는 신봉한다. 이 책이 쉽게 쓰여지지 않을 것이었다면, 저자가 비판적으로 연구했던 내용, 즉 "한국의 학문세계 또한 불평등하고 구조화/계층화 되어 있다는 점"을 이 책 스스로가 학계 외부로 확장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을 비판하면서 그것을 국내적으로 체화하지 못한 채,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을 운운하는 저자와 아킬레우스님은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이 아닌가?

그럼에도 학술서적은 질적 연구 글쓰기 방법과 형식을 유지해야 하며, 이것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은 저자를 비판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무지를 비판하라, 그리고 쉽게 짜집기 한 대중서나 읽으라는 것인가? 만약 그런 의도라면 굳이 시간과 감정을 낭비하면서까지 구구절절 이런 말을 할 필요 없다. 책 표지에 작은 글씨로 '전문서적', '학술총서'라고 표기하는 것으로 족하다.







`지배받는 지배자`는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계층 이론에서 `지식인`을 일컫는 말이다. 그에 따르면 현대 사회의 지배충은 자본가 계층과 지식인 계층으로 양분되어 있다. 이 중에서도 경제적 영역을 지배하는 자본가 계층이 문화적 영역을 지배하는 지식인 계층보다 우위에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지식보다 우선한다는 것이다. 지식인은 지배층에 속하지만 이런 이유로 지배층이면서도 지배를 받는 모순적인 집단이다. - 20쪽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은 어떤 의미에서 지식 생산의 경제적 지위를 뜻하며, 지식인의 계급적 질서에서 중간적 위치에 있음을 의미한다. 미들맨 소수자가 식민지적, 전근대적 상황에서 출현하듯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은 한국 학계의 지적 식민성과 전근대성 속에서 탄생한다. - 24쪽



미국에서 교육받은 한국 지식인들은 귀국하거나 미국에 정착한다.트랜스내셔설 이동의 상황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지식인은 미국에서 생산된 지식을 한국으로 수입하는 역할을 하며, 이를 한국 실정에 맞게 변형, 적용시킨다. 이들의 한국에서의 지식 생산은 일반적으로 미국의 연구 중심 대학보다 독창성, 중요성, 파급력이 떨어지는데, 이는 연구 자원의 부족, 연구 인력의 전문성 부족, 연구 인정 체계의 파편화, 연구 집중 강도의 약화, 연구 문화의 파벌화와 정치화, 한국 학문 공동체의 천민성(pariahhood)으로부터 기인한다. 따라서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의 주요 생존 전략은 미국에서 생산된 지식을 빨리 받아들여 한국의 로컬 지식인들에게 판매하는 것이다. 미국에서 훈련받은 한국 지식인들은 영문 저널 투고, 국내외 특허 출원, 연구의 글로벌 네트워킹에 참여하여 세계적인 지식 생산에 기여함에도 불구하고 중요하고 독창적인 연구 성과를 내지 못하고 세계 지식체계의 주변에 머무르는 경향이 있다. - 25쪽




가르침과 배움은 지배-피지배의 관계다.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가 말하듯이 모든 헤게모니적 관계는 교육적 관계다. 미국은 `가르치는 나라`이고, 한국은 `배우는 나라`다. 학문을 배운다는 것은 또한 제도적 공간인 대학 내에서의 지배의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학은 위계를 가지며 고로 이 배움의 구조에서 탄생한 지식인들도 계층화되어 있다. 대학은 학문의 성지(temple)인 동시에 일종의 분류 기계(sorting machine) 또는 체(sieve)다. - 27쪽



대학은 개인에게 사회적 지위를 부여하는 `학위`라는 특정 상품을 공급한다. 학위는 제도화된 문화자본의 형태로서 지위재(positional goods)다. 지위재의 가치는 대학의 명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즉 명성이 높은 대학일수록 수여되는 학위의 가치가 높다. 어떤 대학이 더 높은 명성을 가지는가? 근대 대학은 `연구 중심 대학의 승리`로 요약할 수 있으며,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볼 때 새롭고 중요한 지식을 생산하는 대학일수록 명성이 높다.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는 학자들은 연구 중심 대학에 속한 경우가 많으며, 이는 그 대학 명성의 중요한 척도가 된다. 학문과 과학은 글로벌한 활동이며 대학의 명성도 이에 따라 글로벌하게 형성된다. - 28쪽



연구는 커뮤니케이션에 기반한다. 영어는 학문과 연구 영역에서 지배적인 언어다. 한국인에게 영어는 `권력어`이며, 한국 연구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특히 이공 계열에서는 영어로 논문을 쓰는 것이 보편화되었으며, 인문사회 계열에서도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무엇보다 SCI로 대표되는 `영어 논문`은 학휘 취득 후 교수직과 연구원직에게는 필요불가결한 문화자본이다. 특정 언어자본의 능숙한 구사가 학문적 실력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 31쪽



예전에는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은행에 취직할 수 있었다면 요즘은 많은 경우 대학을 졸업해야만 은행에 취직할 수 있다. 따라서 은행원이 되기 위해 필요한 학위증을 따려고 대학에 지불하는 등록금은 일종의 상징적 지대다. 이는 직업에 필요한 실질적 기술과 직업에 진입하기 위해 사회에서 요구하는 상징적 요건 사이의 간극에서 발생한다. 한국의 학벌 체제가 큰 사회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이 인종주의를 만연시켜 사회적 부정의와 불평등을 낳을 뿐만 아니라, 지극히 비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언론과 SNS에서 회자되었던 부산의 한 초등학생의 <여덟 살의 꿈>이란 동시는 한국 사회가 지불하는 상징적 지대가 얼마나 큰지를 잘 대변한다. ˝나는 사립초등학교를 나와서 / 국제중학교를 나와서 / 민사고를 나와서 / 하버드대를 갈 거다 / 그래 그래서 나는 / 내가 하고 싶은 / 정말로 하고 싶은 미용사가 될 거다.˝ - 40, 41쪽



무엇보다 한국 대학은 학벌 차별, 성 차별로 가득하며, 유교적 질서에 복종해야 하는 비합리적인 공간으로 인식된다. 즉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미국 유학 동기는 미국 대학과 한국 대학 간의 지위 간극뿐만 아니라 `윤리적 간극`(ethicdal gap) 때문에 발생하며, 유학생들에게 미국 대학은 한국 대학의 천민성과 억압에서 탈출할 수 있는 해방적 기능을 가진다. 동시에 미국 유학은 코즈모폴리턴 생활방식의 추구와 연관된다. 영어, 전문 지식, 서구적 삶은 한국의 `답답한` 삶과 대비되어 자유로움과 실력을 동시에 부여해줄 수 있는 기회로 여겨진다. 따라서 미국 유학은 글로벌 대학 체제 속에서 지위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계급적 전략이기도 하지만, 특정한 삶과 도덕성을 갈구하는 문화적 욕망이자 전략이기도 하다. - 60쪽



˝한계를 인정하고 핸디캡을 받아들이는 것˝은 결국 미국 학생들과 교수들의 기준에 못 미치는 자신의 위치를 숙명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정체성의 형성은 이들의 교육적 궤적에서 아주 드라마틱한 사건이다. 초기에는 많은 학생들이 자신의 열등함을 받아들이는 것을 몹시 괴로워하지만 글로벌 교육체제에서 극복할 수 없는 자신의 위치 지어짐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현실과 타협한다. 여기서 타협이란 미국 원어민처럼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학점을 잘 받고 무사히 수업 과정을 마치며 수업시간에 어느 정도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정도로 기대 수준을 낮추는 것을 말한다. - 93쪽



한국의 엘리트 학생이라는 지위와 정체성은 미국 유학 과정에서 드라마틱하게 바뀐다. 수업 시간, 조교 생활, 연구 활동에서 자신을 열등한 존재로 여기게 되며 자신의 장애와 능력의 한계를 숙명적으로 받아들인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탈구화(dislocated), 방향감각 상실(disoriented), 뿌리 뽑힘(uprooted)을 경험하게 된다. 영어는 완전 정복이 불가능하며 미국 학생과 동일한 선산에서 경쟁할 수 없다는 패배의식과 자기 모멸감을 느끼게 된다. 여기서 유학생들은 미국인과 한국인의 차이를 명확히 인식하게 되며, 미국 대학원 또는 미국 사회에서 완전한 사회적, 문화적 멤버십을 획득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한국에서의 엘리트 학생의 위치와 미국에서의 열등한 학생의 위치 사이에서의 트랜스내셔널 긴장은 유랑(유학)과 정착이라는 대립의 공간에서 발생한다. 미국 교수들과 학생들로부터 `인정`받으려는 필사의 노력은 심리적, 육체적 고난으로 이어지며, 수업과 연구에서 동등한 참여와 멤버십은 좌절된다. - 116, 117쪽



유학생들은 그들이 밟는 트랜스내셔널 궤적 때문에 `탈구 속에서의 희망과 가능성`이라는 이방인성을 지닌다. 즉 트랜스내셔널 이방인으로서 미국 유학생은 한편으로는 `똥밭`을 구르지만, 이는 자신의 미래에 `거름`이 되는 가치 있는 장소라는 이중성을 띤다. 미국 대학의 교수진이 전수하는 학문자본의 양과 질, 미국 대학 인프라의 탁월함, 대가라는 학문권력과의 만남, 우수한 연구 네트워크, 미국 학문 활동의 에토스와 규범은 한국 대학이 제공하지 못하는 귀중한 `거름`이다. 이것들을 경험하게 되면서 미국 대학은 학문을 하는 이상적인 장소로 인식되고, 미국 대학의 학문적 규범은 누구나 따라야 할 준거가 된다. - 118쪽



학문은 감정적 작업이다. 감정적 투신 없이는 탁월한 작업이 나올 수 없다. 학문적 열정은 특정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발생한다. 랜들 콜린스는 성공적인 학자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를 갖추어야 한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학문자본과 학문에 대한 열정(emotional energy)이다. 양질의 학문자본은 탁월한 선생으로부터 전수받아야 한다. 훌륭한 선생을 찾기 위해 한국의 인재들은 미국 유학을 간다. (...) 탁월한 선생 또는 대가와의 접촉은 학문자본의 전수뿐만 아니라 학문적 열정의 고양과 연결된다. 따라서 학문적 열정은 사회적 상호작용의 지속성 안에서만 유지된다. 즉 짧고 단기적인 만남보다 지속적인 만남을 통해서 계속해서 고양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집합 흥분`(collective efervescence)이 없는 `탁월한` 학문 공동체는 존재하기 어렵다. 곧 공부는 사회적인 것이다. - 195, 196쪽



˝공부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교수를 한다˝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는 학문의 왕, 철학의 어원에서 방점을 찍어야 할 곳은 지혜가 아니라 사랑이다. - 197쪽



학문은 더럽다(아카데미아 임문다 Academia Immunda). 정치가 그러하듯이. 학문 지배의 글로벌 구조에서 열등한 위치에 있는 한국 지식인은 이 궁극적인 리얼리티에 직면하게 된다. 피라미드 구조인 학문의 세계에서 극히 소수만이 그 정점에 오를 수 있다. 민주적 이념을 가진 학문의 세계가 결과적으로는 가장 불평등한 세계인 것이다. 제아무리 진리와 초월을 꿈꿀지라도 학문은 어디까지나 `세계-내-학문`이다. 지식인은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하고 사회적 인정을 갈구한다. 이들에게 학문적 배척은 곧 지옥이며 존재 이유의 상실이다. 그러나 이 지옥은 대다수의 한국 지식인들이 처절하게 경험하는 현실이다. 거들떠보지 않는 학벌, 인용되지 않는 논문, 인정해주지 않는 동료들, 그리고 수여되지 않는 사회적 지위. 피라미드의 정점에 있는 지식인들은 경외와 숭배의 대상이지만 학문자본이 미천한 지식인은 언제나 손쉬운 먹잇감이다. 이는 곧 지식인은 지식인에 대한 신이자, 지식인에 대한 늑대이기 때문이다. - 296쪽



학문의 제도적 담지자인 대학은 진리의 전당일 뿐 아니라 호모 사피엔스의 등급을 분류하는 기계다. 학벌 인종주의로 물든 한국 사회에서 한국 엘리트들에게 최고의 지적 등급을 부여하는 곳은 미국 대학이다. 한국 대학과 비교도 되지 않을 재정, 수많은 유수의 교수진, 우수한 연구 시설, 학문에 집중할 수 있는 조직과 문화 등등 압도적인 비교 우위가 한국 지식인이 미국 대학의 글로벌 헤게모니에 종속되는 이유다. 이 트랜스내셔널 간극과 대학의 글로벌 불평등이 미국 유학 션상의 원인이다. 이것이 문제시되는 것은 교육을 통한 불평등이 한 국가를 넘어 재생산되기 때문이다. 미국 유학 지식인의 사회적 특권은 학문적, 사회적 폐쇄 속에서 작동하며, 이는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경쟁을 막고 특정 집단의 이익에 봉사한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 296쪽



헤게모니 이론을 정치인류학적 관점에서 세련화시킨 제임스 스콧(James Scott)의 논변은 이런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약자의 무기(Weapons of the Weak)라는 책에서 피지배층 농민들은 지주들에게 토지개혁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밝힌다. 아니 그것은 그들 머릿속에서는 상상 밖의 일이다. 이들은 현재의 계급질서를 무너뜨릴 혁명보다는 일상적인 저항을 통해 자신들의 조건을 조금씩 낫게 만들려고 한다. 한국지식인들에게 한국 대학과 학계에서 미국 대학의 글로벌 헤게모니를 전복시킨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the unthinkable)일 것이다. 그들은 스콧이 묘사하는 약자들처럼 대학에서 좀 더 좋은 자리를 얻고, 강의 시수를 줄이고, 연구 시간을 늘리고, 학계와 전문가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좋은 논문을 쓰고, 만약 기회가 온다면 정계와 같이 더 큰 사회에 나가 기여하고픈 욕심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 297쪽



무엇보다 미국 유학파가 이 헤게모니에 도전할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그들은 미국 대학의 글로벌 헤게모니에 지배받는 자이지만 한국 대학과 사회에서는 지배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즉 이들은 약자가 아니다. 이들은 자신의 `트랜스내셔널 위치성`(transnational positionality)을 사회적 지위 향상의 기회로 삼을 수 있다. 이들은 외국인 대학원생이라는 학문적 약자에서 출발하여 한국과 미국의 지식 엘리트로의 전환이라는 트랜스내셔널 궤적을 가진다. 국내 학위 소지자들이 이따금 담론적으로 이 헤게모니에 도전하지만, 그것이 어떤 변화를 가져온 적은 없다. 무엇보다 이들은 한국 대학의 개혁을 기획할 조직적 연대도 치밀한 전략도 없다. - 297쪽



무엇보다 한국 대학과 학계의 천민성은 미국 대학의 헤게모니에 철저하게 종속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다. 한국 지식인 집단은 정치사회와 시민사회에 민주화와 근대화를 거세게 요구해왔지만 정작 본인들은 비민주적이고 전근대적인 가장 모순된 집단을 이루고 있다. 학벌 인종주의, 남성 우월주의, 폐쇄적 학벌주의, 유교적 위계질서, 검증되지 않는 전문가, 상징 폭력(symbolic violence)이 난무하는 학계... 이는 베버가 말한 비합리적 천민주의의 대학버전이다. 이 점에서 미국 대학은 한국 대학의 변혁을 이끌어내는 해방자의 역할을 담당한다. 즉 미국 대학의 근대성은 한국 대학의 전근대성을 타파하는 문화적 전범이며, 몇몇 미국 유학파들은 이를 한국 대학에 설파하는 개혁가들이 된다. - 2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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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눈 2015-05-26 공감(1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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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유학의 현실



<지배받는 지배자>는 미국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은 한국인 엘리트들을 분석한 책이다. 한국의 학계가 국내 박사보다는 미국 박사를 더 우대하고 그러한 미국 박사들을 중심으로 한국의 학계에 헤게모니가 구성된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이러한 미국 학계의 글로벌 헤게모니에 대해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보고 비판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대학원 진학을 생각하고 있는 한국인 학생에게는 한국의 대학원보다 미국의 대학원이 더 매력적인 선택임이 분명하다.


세계 최상층을 차지하는 연구 중심 대학 집단, 영어의 글로벌 지배력, 세계 최고의 연구 생산성과 영향력, 전 세계로부터 인재를 끌어모으는 견인력 등은 미국 대학의 글로벌 우위를 구조화시키는 요소들이다. 조직적 측면에서 미국 대학은 기능적으로 분화되어 있고, 우수한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연구에 집중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학문적 리더십을 바탕으로 교수진을 끊임없이 검증하고, 우수한 연구진에게 차등적 보상을 제공하며, 다양한 방식을 사회적 인정을 부여한다. 문화적인 측면에서 미국 대학은 합리적이고 개방적이고 경쟁적이다. 한국 대학과 달리 학벌 인종주의가 미약하고 파벌이 약하며 업적주의를 철저하게 견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무엇보다 이들은 헤게모니를 쥔 입장에서 유학파/국내파의 위계와 같은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다. (298, 299)


즉 학생 입장에서 기왕 대학원에 진학한다면, 재정이나 시설 면에서 지원이 탁월하고, 훨씬 민주적이고 개방적인 분위기인 데다가, 소위 '대가'라 불리는 석학들이 많고, 세계적 학문의 트렌드를 선취할 수 있는 미국 명문대가 당연히 합리적인 선택일 것이다. 더구나 영어 논문, 영어 강의, SCI급 저널 등재를 중시하는 한국 대학은 미국 유학파를 선호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학계의 미국 학계에 대한 종속성은 당연한 귀결인 측면이 있다.


문제는 이러한 미국 유학파 엘리트들이 폐쇄적인 한국 대학에서 헤게모니를 잡고 그 자체가 권력화되는 현상이다. 미국 유학이라는 경력 자체가 일종의 지위재로서 과대평가받고 있고, 그로 인해 뒤틀린 학문적 구조가 나타난다면 문제인 것이다. "국내 박사 출신 교수들을 대상으로 한 질문에서 외국 박사가 국내 박사보다 우수하다는 긍정적인 응답이 24.1퍼센트, 그렇지 않다는 부정적인 응답이 55.1퍼센트였다. 반면 같은 질문에 대해 외국 박사 출신 교수들은 긍정적인 답변이 66.7퍼센트로 나타나, 양 집단 간의 인식 차이가 크다는 것을 보여주었다"(152)는 연구 결과는 그러한 문제의 단면을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미국 유학 경험과 정착 과정에 대한 인터뷰가 흥미로웠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미국에 유학하여 학위를 취득하고 미국의 대학이나 기업에 취득하더라도, 미국의 주류 사회에 진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영어의 벽이 가장 큰 난관이다. 결국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미국 원어민들에게 상대적으로 열등한 주변적 위치를 차지하는 것에 만족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공계에 비해 인문사회 전공은 그러한 벽이 더 심각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미국 유학의 현실에 대해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도움이 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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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짱짱맨 2017-03-08 공감(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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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받는 지배자 - 미국 유학과 한국 엘리트의 탄생




2015년은 아직 절반도 지나지 않았지만, 이 책은 '올해 가장 중요한 책' 중 하나가 될 것을 확신한다.


중국과 인도에 이어서 3번째로 미국 유학생이 많은 국가, 하지만 인구비율로 따지면 중국보다 7.8배, 인도보다 17.5배 많은 미국 유학생을 보내는 국가.


그러한 국가에서 '미국 유학'이라는 것이 한국이라는 나라/ 한국인 유학생이라는 한 개인의 인생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 지에 대해서 15년간의 인터뷰와 조사로 정리한 책이 지금에서야 나왔다.


아마 이 책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미덕을 꼽자면 '풍문으로 들었소' 수준이 아닌 인터뷰와 조사를 통해서 '한국에서 교육받지 않은 한국의 엘리트'인 미국 유학생들의 과거-현재-미래를 정리했다는 것에 있겠다.


1. 이 책을 보도하는 미디어들은 '미국에서 열등했던 유학생이 한국에서 엘리트 지식인으로 변신' 등의 문구를 사용하면서 이 책을 소개 하고 있다. 자극적인 문구이긴 하지만 이 단어는 '엄친아에서 열등생으로'라는 챕터에서 실제 유학생들의 인터뷰에서 등장하는 단어이기도 하다.한국에서는 나름 명문대 출신에 탁월한 학업성취를 자랑한 유학생들은 아래와 같이 자신이 겪은 열등감을 드러낸다.


" 열등감 병에 걸렸었다니깐요. 난 열등하다. 내가 이 클래스에서 더 워스트(최악)다. 항상 그렇게 생각했어요. 수업시간에 말도 못 알아듣겠고, 그 다음에 말도, 질문도 못하겠다. 그 다음에 페이퍼 코멘트 받은 건 정말...이거 보는 순간 난 열등아다..." (90p)


" 점수를 받고나서 되게 서러웠어요. 내가 뭐하는 짓인가. 여기가지 와서 잠도 안 자고 그렇게 했는데.... 나는 능력이 이거 밖에 안 되나. 정말 눈물이 안 멈추는 거에요. 그래서 수업시간에 그냥 울어버렸어요. 막 교수님도 (내가 우는게)안 보일래야 안 보일수도 없는거고, 다른 애들도..." (92p)


하지만 그들은 지적인 능력이 모자라서 열등한 사람이 아니다. 그들의 열등함은 문화자본(부족한 영어), 사회자본 (부족한 인적 네트워크와 기회)에 기인한다. 비백인, 비주류 인종으로서 소외됨은 결국'문화자본'에서의 열등함이다.


하 지만 유학생들이 한국에서 이득을 보는 부분이 바로 미국에서는 그렇게 부족했던 문화자본 그 자체다. 미국 유학파로서 갖고 있는 언어 능력과 유학생 네트워크를 통한 문화 사본/ 사회 자본이 한국에서 강점으로 작용한다. 그리하여 열등생이 다시 '엄친아'로 전환된다.


2. 또한 저자의 생각에 한국 대학은 미국 유학의 원인을 제공하는 곳이자 미국 유학을 통한 성과를 가장 누리지 못하는 집단이기도 하다.


" 여학생에 대한 차별은 문화적, 구조적으로 일어난다. 지영의 경우는 여자라는 이유로 지도교수로부터 외면당했다. 그 교수는 애초부터 여학생은 박사과정으로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고 한다. 지영은 하는 수 없이 미국 유학을 선택했지만 그 교수를 이해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여자가 박사학위를 받아봤자 취직할 곳이 마땅치가 않기 때문이었다". (78p)

"교수가 싫어서 미국 유학을 왔다는 경우도 상당수였다. 이들이 말하는 한국 교수들의 특징은 권위주의적이면서 실력이 없고 학생들을 부려먹는다는 것이다." (79p)



이렇게 한국의 대학에서 겪는 일상적인 불합리로 인해 미국에서 공부를 마친 유학박사들은 한국에서는 미국에서 배워온 것을 써 먹을 기회도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

" (한국에서는) 지적 자극도 덜하고, 지적으로 교류하는 과정에서, '아 이런 새로운 걸 해야겠다'는 생각이 전혀 안생기는 거죠. 왜냐하면 어차피 내 연구를 읽고 평가해줄 사람도 없고, 내 연구에 관심있는 사람도 정말 뻔하고...."(176p)


"시류를 타면 언제 석학이 나오겠어요. 시류 안 타면 바보 되니까. 그렇게 인정을 안 해주니까 시류를 타는 거잖아요. 시류 타야 멋잇고 시류타야 돈 나오고 그러니까 그 시류를 타는 거죠"(190p)

3. 이 책에서 대상이 된 미국 유학생들의 진로는 한국 직장(주로 금융권, 대기업), 한국 교수, 미국 직장, 미국 교수의 진로로 나뉘어 진다. 그리고 가장 흥미를 끄는 부분은 아마 한국 대학에서의 교수 선발 부분이다.


' 인문사회 계열의 교수 다수가 교수 임용 과정에 대한 질문에서 다른 교수들에 대한 강한 불신을 드러냈다"서로를 너무 불신해요", "너무 구려요" "개판이죠" 등의 말은 인문사회 계열 교수들이 교수 임용을 묘사 할 때 흔히 쓰는 표현이었다. 실력을 퍼포먼스로 평가받는 예체능 계열은 불신의 정도가 더 심했다. 한 후보자는 소위 '딜'을 받은 적이 있다고 고백하면서 8,000만원에 교수직을 제안받았으나 거절했다고 한다. (저자 주 : 한국 대학의 교수 임용 과정을 자극적으로 묘사한다는 지적의 나올 수 있겠다. 하지만 실제 인터뷰 내용은 훨씬 더 자극적이었는데 이 글을 쓰면서는 최대한 이를 누그러뜨리려 노력했다) (152-153p)

"인맥은 임용의 거의 필요조건이라고 할 수 있죠. 전혀 모르는 사람을 실적만 보고 뽑는 건 어려운 것 같습니다. 적어도 레퓨테이션 체크라도 하겠죠. 꼭 친하다고 해서 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전혀 모르는 사람을 뽑기는 어렵습니다. 근데 너무 친해도 견제를 받습니다. 그 사람이 너무 많이 눈에 띄면 다른 편에서 경계를 하기 시작하죠. 예를 들어 특정교수와 논문을 많이 쓴다거나, 일을 많이 한다거나, 강의를 많이 맡아서 한다거나 하면 저 사람이 앞으로 교수자리를 노리나 싶어 다른 입장에 있는 교수들이 경계를 하는 것 같아요" (159p)



이 에 대해 저자는 "토마스 쿤은 패러다임의 전환은 이전세대의 저항이 심해서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고 그들이 죽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과학사의 통찰로 볼 때, 한국 학계의 자율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신진 세대와 구세대와의 갈등은 필할 수 없는 것 처럼 보인다" (195p)라고 비관적인 평가를 내린다.


이 책은 전체적으로 '셀프 디스'의 책이다. 저자인 김종영 교수는 미국 출신으로 경희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다는 점을 보면 어쩌면 저 인터뷰 대상들 중에서 자기자신 혹은 자기자신을 투영한 사람들이 하나 쯤은 있지 않을까 싶다. 그만큼 미국 유학 출신의 한국 대학교수로서 할 말이 많아 보인다.


4.한국 대학의 취약함은 미국 유학을 다시 부추키게 된다. 결국에는 누가 많이 , 오래 투자를 했는지에 대한 경쟁, 학문이 아닌 학벌자본의 경쟁만 심화 될 뿐이다.


" 이것이 문제시되는 것은 교육을 통한 불평등이 한 국가를 넘어 재생산되기 때문이다. 미국 유학 지식인의 사회적 특권은 학문적, 기회적 폐쇄 속에서 작동하며, 이는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경쟁을 막고 특정 집단의 이익에 봉사한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296p)
" 미국 대학의 글로벌 헤게모니는 한국 대학의 구조적, 조직적, 문화적 취약함으로 인해 더욱 공고해진다. 이는 또한 미국 유학 지식인들이 한국 대학을 혐오하고 저평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학의 짧은 역사, 일천한 근대과학의 전통, 열악한 재정, 학문후발주자로서의 위치, 영어의 세계적 지배력 등은 한국 대학과 학계를 구조적으로 열등한 위치에 놓이게 만든다" (299p)

저자의 요청은 이런 헤게모니를 장악한 한국 엘리트들이 이 판을 바꾸기 위한 노력을 해 주기를 부탁한다.
" 숙명론적이고 비관적인 전망보다 냉철하면서 긍정적인 안목을 가족 꾸준히 매진하는 것 외에 길은 없다. (...) 학문 후속 세대를 위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더 나은 환경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비록 이곳이 아무리 더럽고 열악하더라도" (302p) 라고 요청한다.


하 지만 나는 이런 문장보다 "그러나 한국 엘리트들은 미국 대학과 한국 대학의 엄청난 격차를 줄이려는 시도를 하기보다 이 격차에서 오는 이점을 활용하려는 전략을 택할 가능성이 크다"(300p) 쪽에 눈이 더 가는 것을 보니 난 아마 긍정마인드는 안될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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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살카 2015-06-09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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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지만 의미있는 문제제기




한국 학계에 속한 사람이 이런 문제제기를 공식적으로 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인정할 만하다. 게다가 미국 유학을 다녀온 학자로서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현실에 대한 착실한 보고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은 아쉬운 점이다. 책에서 다뤄지고 있는 한국과 미국 학계의 모습은 (아마도 이 책의 주요 독자들일) 관련 분야 종사자들에게는 새롭지 않다. 상식을 뒤집는 반전이랄까, 결정적인 한 방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제기 자체로 훌륭하다. 과거 '토착적 사회학' 등의 문제제기가 담론 수준에서 이루어졌다면 이 책은 실제 행위자들의 전략 수준과 글로벌한 수준에서 대학들이 갖는 지위의 차원을 다룬다. 보다 현실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 관련된 후속 논의의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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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루 2015-07-30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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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지배받는 지배자


나는 오래 전부터, 미국에서 각종 지원을 받아 공부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 지배계층을 형성하면서 미국의 정책을 적극 지지하는 트로이의 목마 역할을 한다는, 그냥 별 근거는 없는 생각을 해왔다. 이 책의 제목은 나로 하여금 위 생각에 대한 뭔가 근거를 제공해주리라는 기대를 하게 했다. 정작 열어보니 실 내용은 전혀 딴 얘기를 하고 있다. 한국 대학과 미국 대학, 한국 기업과 미국 기업의 각 차이점을 미국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분석 비교하는 내용이다. 미국은 서양 학문 주류를 이끌고 있고 지원도 오래 막대한 수준으로 이루어져 왔으니, 한국이 그에 현저히 미치지 못하리라는 건 누구나 다 아는 내용 아닌가. 관습이나 문화도 전혀 다르고 언어도 다르니 미국 유학생들이나 취업자들이 마이너에 불과한 한계를 느끼리라는 것도 당연히 예상되는 일이다. 미국 기업이나 학계가 대단한 장점을 가지고 있기는 하겠지만 그만큼 단점도 있을텐데, 주로 그곳에서 한계를 느낀 마이너의 관점에서 메이저를 평가하니 당연히 대단한 장점만 나열될 수 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점점 이야기가 마이너는 마이너, 메이저는 메이저... 이렇게 예상대로 흘러가고, 끝까지 다 읽고 나서는 이 분은 이 연구를 왜 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재미있게 읽었지만 기대만큼 실망을 하게 한 책.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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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 2016-07-29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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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영-선대인-송호근




사회학자 2인과 경제전문가 1인으로 '이주의 저자'를 고른다. 먼저, 경북대 사회학과의 김종영 교수가 화제가 되었던 첫 책 <지배받는 지배자>(돌베개, 2015)에 이어서 두번째 책을 펴냈다. <지민의 탄생>(휴머니스트, 2017). 지민(知民)은 한자를 병기해야 알 수 있는 저자의 신조어. '지식민주주의를 향한 시민지성의 도전'가 부제인 걸 보면 지식민주주의의 주체를 '지민'이라고 일컫는 걸로 보인다.






"첫 번째 저서 <지배받는 지배자>를 통해 한국사회 지식엘리트의 미국유학파에 대한 의존성과 그 한계를 날카롭게 짚었던 김종영 교수는 2000년 이후 한국사회를 관통하는 주요사건(삼성백혈병 사태, 광우병 촛불운동, 황우석 사태, 4대강 사업) 속으로 직접 뛰어들어 그 프레임의 실체를 벗겨내고 누가 이 사건들을 움직이고, 그에 대항해 싸운 주체들이 누구인지 밝혀내고자 했다. 그리하여 지민이 분투한 10년의 기록을 이제 책으로 엮어낸다. 저자가 이 책을 펴내는 이유는 단순하다. 지난 한국사회의 적폐의 핵심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고 새로운 민주주의로 나아가기 위해서 이제 우리는 지식민주주의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식인의 시대는 가고 지민의 시대가 도래했다!"

'지민'이란 말이 널리 쓰이게 될지는 미지수이지만 '시민지성'이나 '지식민주주의'란 말은 한국 민주주의의 현단계를 설명하는 데 활용할 만하다. 더불어 민주주의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게 될는지도.







확실한 독자층을 갖고 있는 선대인경제연구소의 선대인 소장도 새 책을 펴냈다. <일의 미래, 무엇이 바뀌고 무엇이 오는가>(인플루엔셜, 2017). 경제전문가라도 누구라도 할 말이 있을 법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저성장, 인구 마이너스, 기술 빅뱅, 로봇화와 인공지능. 이 네 가지가 맞물려 진행되는 한국의 일자리 변화. 도대체 오늘 무엇이 바뀌고 있고, 내일 무엇이 새롭게 오고 있는가. 이제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 <일의 미래>는 미래 일자리의 변화를 경제적 관점에서 제대로 분석한 책이다. 그간 기술발전의 관점에서 먼 미래의 직업을 예측하거나, 실업, 임금 등과 같이 노동의 관점에서 일자리 문제에 접근하던 시각을 벗어나, 한국 경제의 구조를 바탕으로 일자리 변화를 바라본다. 당장 5년 뒤에 우리는 어디에서 일하고 있을 것인가. 이제 변화의 방향을 제대로 파악하고, 자신의 미래를 지켜내는 통찰을 키워보자."

내가 하는 일은 5년 뒤에도 별로 달라질 성싶지 않지만, 2년 뒤에는 대학생이 돼 있을 아이를 위해서 일독은 해봐야겠다.







서울대 사회학과의 송호근 교수도 새 책을 펴냈다. <촛불의 시간>(북극성, 2017)은 이슈 도서라고 해야겠지만 <가보지 않은 길>(나남, 2017)은 '한국의 성장동력과 현대차 스토리'란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오랜 현장관찰기다. 현대자동차라는 기업에 초점을 맞춘 '기업사회학' 책이기도 하다.


"제4차 혁명의 도래와 미증유의 경제위기라는 변화의 소용돌이 앞에서 대한민국은 어디에 서 있고, 어디로 가는가? 정치, 경제 등의 분야를 넘나들며 오늘의 사회 분석에 천착해 온 사회학자 송호근 교수는 대한민국의 오늘과 내일을 진단하기 위하여 현대차 울산공장으로 향한다. 현대차그룹의 성장과정은 곧 한국 제조업의 역사다. 성장과정도, 그 특유의 오기도 한국을 닮았다. 창립자 정주영 회장의 일대기 자체가 한국 산업화의 스토리이고, 현대 재벌의 강점과 허점이 고스란히 한국경제의 내부 구조로 이전됐다. ‘현대차’ 연구는 곧 ‘한국’ 연구인 것이다."

이론이나 담론을 다루기보다 '실물'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더 기다리는 책은 <인민의 탄생>과 <시민의 탄생>에 이어지는 3부작의 마지막 셋째 권이다. 앞서 두 권을 읽은 독자라면 결말이 궁금한 건 지극히 당연한 노릇이다...



17. 0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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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17-03-18 공감 (3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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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적 사회학으로의 초대




피에르 부르디외 사회학의 좋은 입문서가 될 만한 책이 출간됐다. 부르디외가 로익 바캉과 공저한 <성찰적 사회학으로의 초대>(그린비, 2015)다. 제목부터가 입문서라는 걸 웅변한다. 지난해 <언어와 상징권력>(나남, 2014)이 나오기도 했지만 그밖에 관련서가 스테판 올리브지의 <부르디외, 커뮤니케이션을 말하다>(커뮤니케이션북스, 2007)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걸 보면, 생각보다 드물게 출간된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래도 한 권으로 모든 걸 갈무리해주는 '일당백' 입문서가 나온 터라 반갑다.






현대 사회학을 대표하는 학자 중 한 명인 피에르 부르디외의 방대한 학문 세계를 집대성한 책. 제자인 로익 바캉이 질문을 던지고 부르디외가 답하는 인터뷰(2부)가 중심을 이루고, 바캉이 쓴 부르디외 사회학 개관(1부)과 학문하는 자세에 관해 부르디외가 학생들에게 행한 강연(3부)이 더해졌다. 이 책에서는 부르디외가 연구했던 거의 모든 주제(사회학을 위시한 학문 환경 자체에 대한 성찰, 권력, 불평등, 관습, 언어, 젠더 등등)와 관련 논쟁들이 다루어지며, 다른 저작들에서는 선명히 드러낼 수 없었던 그의 솔직한 연구 동기들, 다른 사상가들과의 영향(또는 대결) 관계 또한 밝혀진다. 더불어 부록으로는 바캉이 제시하는 부르디외 저작 독법과 옮긴이의 꼼꼼한 부르디외 용어 해설 등이 함께 실렸다

<언어와 상징권력>에 대한 독서만 틈틈이 엿보고 있었는데, 방향을 <성찰적 사회학>으로 틀었다.







찾아보면 부르디외 사회학에 대한 소개나 입문에 해당하는 책들은 2000년 전후로 몇 권이 나온 바 있다. 2000년대 중반까지가 사회학자로서 가장 많이 호명되던 때가 아닌가 싶다(앤서니 기든스, 울리히 벡 등과 함께 '스타 사회학자'였다). 이후에는 비교적 적조한 편인데, 부르디외 이후 이론사회학자로서 그만한 명성과 평판을 누리고 있는 사회학자가 누가 있는지 얼른 떠오르지 않는다(감정사회학의 에바 일루즈? 하지만 아직 대가급은 아니다).







생각해보면 부르디외의 주저인 <구별짓기>(새물결, 2005) 등도 지금 시점에서 더 적실하게 읽을 수 있는 게 아닌가란 생각도 든다. 혹은 그의 취향의 사회학 분석틀을 더 다듬거나 한국적 상황에 적용해보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부르디외를 상기하게 된 건 <성찰적 사회학> 때문만은 아니다. '미국 유학과 한국 엘리트의 탄생'을 다룬 김종영 교수의 <지배받는 지배자>(돌베개, 2015)도 부르디외의 방법론을 원용하고 있고, 이번주에 나온 김경만 교수의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문학동네, 2015)도 제목에서부터 '부르디외적'이다. 후자는 '한국 사회과학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부제로 소개만 보자면 꽤 흥미로운 문제제기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가 이번 책에서는 한국 사회과학계, 나아가 학술문화와 지적 풍토 전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의 칼을 들이댄다. 강신표, 김경동, 한완상 등의 원로 사회과학자나 강정인, 조한혜정 같은 중견 사회과학자를 향한 비판은, 글로벌 지식장에 참여해 지그문트 바우만, 앤서니 기든스, 로익 바캉 등 세계적인 학자들과 논쟁을 통해 학문적 성숙에 이르는 과정이 예시된 저자의 자기민속지와 절묘하게 조응하면서, 읽는 이로 하여금 ‘여우와 신포도’ 같은 핑계나 빈말이 아닌, 진정한 학문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장의 구조를 변형시켜 세계 학계에서 우리만의 이론을 창출해낼 수 있는가에 대한 묵직하고 깊은 성찰적 울림을 준다.
<지배받는 지배자>나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이나 한국의 지식사회를 들여다보는 드문 시도로 평가할 만하다.







다시 부르디외로 돌아오면, <성찰적 사회학>의 원서(영어판)를 찾다가 뜻밖에도 <국가에 대하여>란 신간이 나온 걸 보고 바로 주문했는데, 저자와 타이틀만 보고서도 충분히 관심을 갖게 되는 책이다(소개됨직하다). 부르디외의 <국가 귀족> 같은 책이 번역되었었나 궁금해지는데, <호모 아카데미쿠스>(동문선, 2005)와 같은 맥락에서 지식과 권력과 제도가 어떻게 맞물려 돌아가는지 들여다보게 해주는 것이 부르디외 사회학의 강점으로 여겨진다. <국가에 대하여>는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를 엮은 책이다...



15. 0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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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15-05-23 공감 (2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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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한 시간, 동그란 시간









작년 여름, 비오는 날 종로에서 <논픽션 다이어리>를 봤다. 저녁은 없었고 약간 지쳐서 나왔다. 영화가 끝나고 고향 동생과 꽤 오래 전화 했던 기억이 있다. 종로의 낮은 지붕의 술집이 늘어선 거리.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며 내내였다. 넥타이를 느슨하게 맨 회사원들이 삼삼오오 앉아있었다. 그때 나는 다른 일을 하기 위해 '준비'라는 허울의 어떤 교육에 동원되었는데, 그 결과 그 시간을 조금도 지치지 않고 혐오할 수 있었다. 나는 내가 무슨 옷을 입어야 할지 몰랐으며-



어떤 옷을 입고 싶은지도 알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조금 더 고백하자면 어떤 옷이 있는지도 알 수 없다고 해야겠다. 보도블럭의 구역 반쯤까지 플라스틱 의자를 드밀어 술을 먹는 이들 덕분에 종종 도로에 나와 걸어야 했다. 도로에는 차가 느리거나 없었다. 아스팔트에 저 멀리서부터 쬐는 노란색 조명은 어딘가 너무 촌스러웠고. 그럴 때마다 가게 유리문에는 어깨가 좁은 실루엣이 아주 잘 보였다.



그것을 보며 언젠가 등교길의 수고를 줄이기 위해 달리던 논두렁을 기억할 수 있었다. 교복 스커트, 짧은 숨을 몰아쉬며 차부에 도착했을 때 종아리마다 차갑게 묻어났던 아침 이슬에 양말 언저리가 동글동글 젖었던 느낌도 함께. 몇 개의 제자리 뜀으로 이슬을 털어냈던 순간도 지나갔다. 그때 나는 버스가 오기를 기다리며 차부의 지져분한 유리 새로 나를 보았던 모양인데. 후에 그 유리간에는 내가 잘 보이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그것은 내가 졸업 후 수년이 흘러 도서관 한쪽에 다른 이들의 원고지와 함께 쌓여 있었으며, 버리기 위해 종이류로 분류되던 중 동생이 내 것임을 알아보고 가져왔다. 원고지라는 고전적인 공간에 얼마간의 분량과 연필을 든 행위가 중요했던 고등학교 시절 흔한 과제였다.



다시 스콜같은 비가 내리는 여기는 서울의 변두리. <논픽션 다이어리>의 내용을 적을 정도로 기억이 비상한 것이 아니지만 제목을 언급하는 이유는 그날 마련됐었던 '감독과의 대화'를 적기 위해서다. 그는 '19세기의 인물이 20세기에 산다는 것'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다고 했다. <논픽션 다이어리는>1990년대 일어났었던 충격적인 사건, 지존파 살인사건을 축으로 성수대교 붕괴, 삼풍 백화점 붕괴를 다큐 형식으로 연결한다. 다큐가 지존파 살인사건에 대해 짓는 의문은 이렇다. 범죄를 저질렀던 일부 인간의 악마적인 행위의 결과였는지? 1990년대라는 격변의 시간에 대한 논의 없이 충격적인 결과에 대해 몸서리 치는 것이 과연 맞는지? 누군가에게는 아직 끝나지 않은 19세기라는 시간이 있다. 헌데 저 멀리 변화의 축을 감지할 수 도 없이 다리가 지어지고 건물이 올라서는 변동과 당연하게 따라오는 부의 격차. 압구정동을 향하며, 악에라도 들려서 움직이고 싶었던 것은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었던 세기의 차이를 몸으로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지. 영화에서 주요한 물음은 5명을 직접적으로 살인한 지존파의 빠른 사형과, 무수한 생명을 빼앗고 가족을 파탄시켰던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사건에서 처벌자 없었다는 점을 환기한다. 몰아가기 쉬운 증오와 수많은 고통에서 고통에 함몰할 뿐인 모습이다. 저이들의 얼굴은 이렇게나 잘 보이는데, 수많은 어깨를 걸치고 있을 재앙같은 사건에 가담했던 이들의 얼굴은 좀처럼 볼 수가 없다.




영화는 앞으로 더 많은 것을 의구하며 전개된다. 그러나 나는 벌써 어쩐지 19세기와 20세기라는 전혀 다르게 생긴 시간의 언급에 감동해 오래 머물렀다. 그리고 새로운 문물의 태동은 극단적으로 절멸하고 시작하지 않는점이 떠올랐다. 대부분 앞 뒤로 꼬리가 어느정도 있으며 가운데 가장 두텁게 발달하는 형상. 이를 '전함형 그래프'라고 하는데, 이것은 인간 군상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다.




가장 두터운 공간, 중심세기에 사는 이들이 있고, 중심세기보다 앞서 무엇을 선도하거나 선도에 의해 괴리되는 집단이 있다. 그리고 저 끄트머리에는 그 반대 유형의 인물이 이름없이 살아갈 것이다. 19세기의 인물이 20세기에 살기 위해서.


















한 권의 책이 있다. <지배받는 지배자>라는 유려한 제목이었다. 논문을 거의 그대로 실어 유연한 제목이 주는 내용의 인상은 거의 받을 수 없었다. 교육이 계급을 만들고 미국이라는 공간에서 얼마나 권력화 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었으며, 어쩌면, 연구 결과 전에도 공공연히 알고 있던 사실을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느냐고 이의를 제기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책에서 오히려 실감났던 부분은 유학생활을 하며 느낌 어려움, 긍정적이었던 부분,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현재의 삶에 만족하고 있느냐의 문제와 유학이후 미국에 남거나 한국에 돌아왔을 때 인생의 비교를 인터뷰를 통해 실제적인 대답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미국 유학을 하면서 완벽한 소통을 구축하지 못해 그들의 리그, 엘리트에서 제외되었던 이들이 국내에 들어오면서 계급의 정점에 가는 모순을 확인한다. 유학이 갖는 선진국과 비교할 수 없는 인프라부터 학구열, 보장의 격차 등을 하루아침에 수정할 수 없기 때문에 문제 해결에 대해서는 이 책도 대안을 갖는다고는 할 수 없다.

실제 유학에서 느끼거나 겪게 될 일을 미리 선행하는 인터뷰집, 실용서로 읽는 점에 대해서 희망은 유학을 준비중이 이들이 이런 내용을 숙지 후 학계의 고질적인 문제를 바꿔야겠다는 의지를 품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이 알 수 없는 지점을 시간이 흘러 확인케 된다면, 그것이 이 책이 가져갈 최대의 수확이 아닐런지.



책이 어떻게 읽히는지 책이 정할 수 있는 운명은 아니겠으나 이 책을 대하는 태도와 <논픽션 다이어리>를 마주하는 시선에는 동일한 부분이 흐르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시간의 전함 가장 안전한 곳에서 타고 노는 것을 상상했던 십대가 있었다. 그러나 세기의 전함, 가늘어지고 끝내는 소멸될 끄트머리에서 언제나 부족한 시간을 터무니 없이 살아내고 있는 무명자가 바로 나임을 느낀다. 9호선을 탈 때마다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자리에서 무거운 다리, 내가 미쳐 몰랐을 죄를 생각한다. 그러나 서늘하면서도 청량하게 종아리를 흐르던 아침 이슬을 기억하는 고등학생때로부터 나의 몸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20세기도 아니고 그대로 적기에는 촌스러운 이십일세기를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저 끝에서 이끌려지는 시간에 못견디는 19세기의 사람들이 말이다. 그것은 아주 가까운 얼굴로부터 시작한다. 한때는 글을 잘 썼으나 이제 글을 어떻게 쓰는 건지 모르겠다고 고백하는 아주 슬픈 사건이 벌써 수년전의 일이다. 매일 일기를 쓰지만 그 내용이 한 줄이나 길어야 쉼표로 구분되는 분절을 넘지 못하는 이가 있다. 내가 가로질러 뛰어갔던 시퍼런 논두렁, 테두리를 이루는 다각의 균절에서 자신의 시절을 다 보내야 했던이의 이야기다. 어떤 감정이 개입할 대상이 아니며 아무도 모르게 잊혀질 페이지도 아니다. 눈물과 감동, 회한과 아픔으로 소비되는 것은 지친다. 그들의 말이 아주 작으며, 작게 위치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나. 이것을 읽는 위상이 제목보다 더 강렬한 부제<미국 유학과 한국 엘리트의 탄생>과 다르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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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 2015-09-20 공감 (9)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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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이 본 한국 지식인의 초상


한국의 언론이 파헤친 한국의 지식인 집단에 대한 보고서입니다.

한국의 지식인들은 왜 시장, 자본 그리고 서구편향적 일 수 밖에 없는지, 특히 서구 중에서도 왜 유독 더 친미적일 수 밖에 없는지를 경향신문의 기자들과 외부 필자들이 같이 집필했습니다.

외부집필자들 중에는 이번에 공정거래위원회 위원장으로 지명된 김상조 교수님도 있습니다.

지식인들이 왜 지식인들이 재벌 앞에서 ‘자기 검열 ‘을 하게되는지에 대한 글을 쓰셨더군요. 지식인들이 논문을 출판하면서 기업들이 스폰서가 되는 경우가 있는데 기업의 이익에 반하게 되는 결론을 내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풍토는 공공의 자산이어야 할 지식이 스폰서인 기업의 이익만을 대변하면서 공공성을 상실할 수 있는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얼마전 인터넷 매체에서 읽은 단국대 서민 교수의 인터뷰에서의 그의 발언 내용이 생각나네요.

기자가 마지막으로 한 지식인에 대한 견해에 대해 그는 ‘지식인은 다른 이들이 No라고 말해도 혼자 꿋꿋이 Yes라고 말해야 한다‘ 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자식을 자신의 출세를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앞서 나가는 선구자로서 ‘등불‘의 역할을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책이 출간된 시기는 2008년으로 이명박 정부 초기입니다. 한국사회의 본격적인 퇴행이 시작되었던 시기로 사회 전반에서 새로 들어선 보수정권의 이해 못할 4대강 사업수행과 ‘싸다‘는 이유만으로 품질과 위생상태를 알 수없는, 심지어 사람이 먹어도 괜찮은 것인지 알 수 없는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개방 합니다.

권력자의 불통과 오만 그리고 일방통행이 지속되는데도 지식인들은 침묵하거나 권력의 입맛에 맞는 이론을 제공했습니다.

지금도 지탄받고 있는 많은 토목학자들이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을 지지했습니다. 물이 고이면 썩는다는 단순한 논리를 궤변으로 덮어버리고 말았죠.
결과는 강물 생태계의 변화와 ‘녹조라테‘로 대변되는 강물의 부영양화입니다.

이런상황을 지켜보게 되니 ‘지식인의 죽음‘이라는 말이 실감이 나더군요.

또 하나 인상적인 것은 이 책이 한국에서는 희귀하기까지 한 ‘‘지식 사회학‘ 책이라는 점입니다.
더구나 한국의 지식인을 탐구한 책은 극히 접하기 어렵습니다. 이 역시도 한국의 지식인 사회가 반성해야 할 부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자식인과 관련해 근래 읽고 싶은 책이 한권 출간되었습니다.
지식인과 미국과의 관계를 조명한 책입니다.

서점에서 보았지만 기회가 되면 한번 읽고 글을 올릴 예정입니다. 한국은 이상할 정도로 거의 모든 지식인들이 ‘친미‘적인 성향이 있고 자신의 사회에 맞는 독자이론을 발전시키기보다 끊임없이 서구 특히 미국의 이론을 수입해왔습이다.

따라서 미국과 지식인의 관계가 과연 어떤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은 자기성찰로서 의미있는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늦었지만 의미 있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려고 합니다. 지식이란 우리가 처한 현실을 설명하거나 인간 자체에 대한 성찰을 하는데 도움을 주지 않는 한 무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독서도 단순히 지식의 흡수에민 그친다면 별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반드시 우리가 사는 현재와 연결해봐야 하고 그 책애서 이야기하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느냐를 고려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행간‘을 읽는다는 의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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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nnis Kim 2017-06-09 공감 (7)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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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집에 가야하는데, 갑자기 마구 배가 고파서... 마침 책상위에 있던 약밥을 먹었는데... 하아. 평소 진밥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약밥이 질어도 너무 질어서... 맛이 안느껴져. 그러니까 왠지 더 배가 고파오네. ㅠㅠ허기진 것을 좀 달래고 집으로 가야할텐데, 뭔가 ... + 더보기
  • chika 2015-05-12 공감 (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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