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5-22

알라딘: 맹자의 땀 성왕의 피 - 중층근대와 동아시아 유교문명



알라딘: 맹자의 땀 성왕의 피 - 중층근대와 동아시아 유교문명

[eBook] 맹자의 땀 성왕의 피 - 중층근대와 동아시아 유교문명
대우학술총서 신간 - 문학/인문(논저) 603
김상준 (지은이)아카넷2015-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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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페이지수 6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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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중층근대성론에 따르면 동아시아에서도 근대문명의 기틀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동아시아 문명의 중심 내용, 그 축은 과연 무엇인가? 김상준 교수는 동아시아 문명의 축을 우리가 낡은 사상이라고 치부했던 유교에서 찾는다. 책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는 유교의 근본 원리, 제2부는 유교의 작동 원리, 제3부는 유교 동아시아, 제4부는 유교 조선을 다룬다.



목차


책머리에: 동아시아 유교문명과 인류 보편적 가치

제1부 중층근대와 유교
제1장 중층근대성: 근대성 이론의 혁신
제2장 맹자의 땀: 인류 진화와 도덕적 몸의 탄생
제3장 성왕의 피: 폭력과 성스러움, 유교적 안티노미
3장 보론 유교적 초월성: 양계초 대 막스 베버

제2부 유교세계의 작동 원리
제4장 유교정치의 키워드: 모럴폴리틱
4장 보론 조선 그리고 중국, 일본, 베트남의 유교정치와 군주주권: 예외와 법칙
제5장 유교의 예는 어떻게 사회를 규율했는가?
제6장 유교 노블레스 오블리주: 여성적 절의와 도덕권력

제3부 동아시아 초기근대의 전개 양상
제7장 잊혀진 지구화: ‘긴 12세기’와 동아시아 초기근대혁명
제8장 유교사회 영구정체론, 아시아적 생산양식론 비판
제9장 동아시아 유교소농체제
9장 보론 동아시아 유교소농체제에서의 자유 공간과 체제 안정성 비교


제4부 조선 후기 유교 근대의 다이내미즘
제10장 1659년 기해예송의 전말과 유교 국민국가의 태동
제11장 유교군주와 근대주권: 윤휴, 정약용, 정조
제12장 “온 나라가 양반 되기”: 조선후기 유교적 평등화 메커니즘
제13장 동학(東學): 대중유교와 인민주권
제14장 결론: 21세기 문명의 흐름과 유교의 재발견
에필로그: 동아시아의 여명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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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김상준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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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해남에서 태어나 광주에서 자랐다. 1980년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에 입학하여, ‘서울의 봄’과 ‘광주사태’를 겪고 운동권 학생이 되었다. 1982년 강제 징집되었다가 1985년 만기 제대하여 이후 1992년까지 인천, 구로의 공단 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했다. 1993년 뉴욕으로 유학하여, 뉴스쿨에서 석사학위(사회학)를,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박사학위(사회학, Paul F. Lazarsfeld Fellow)를 받았다. 

2001년부터 경희대학교 공공대학원(전 NGO 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로 『미지의 민주주의: 신자유주의 이후의 사회를 구상 하다』(2009, 증보판 2011), 『유교의 정치적 무의식』(2014), 『진화하는 민주주의: 아시아·라틴아메리카·이슬람 민주주의 현장 읽기』(2014) 등이, 주요 논문으로 “The Genealogy of Confucian Moralpolitik”(2002), 「헌법과 시민의회」(2006), 「중층근대성」(2007), 「성찰성과 윤리」(2007), 「중간경제론」(2008), 「동아시아 유교소농체제」(2010), 「비서구 민주주의 연작」(2012~2013), 「동아시아 근대의 고유한 위상과 특징」(2015) 등이, 주요 역서로 『유쾌한 감옥』(2010, 스리 오로빈도 저) 등이 있다. 여러 저술상과 논문상을 수상했다. 접기


최근작 : <맹자의 땀 성왕의 피>,<동양사상과 현대적 가치>,<진화하는 민주주의> … 총 14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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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우리의 도덕적 몸에 숨겨진 근대성을 찾아서
- 동아시아의 유교문명에서 세계보편윤리를 발견하다 -


“서구중심 문명 판도의 재편과 동아시아 유교문명권의 부상(浮上). 새 천년 들어 대두된 거대한 전환의 움직임이다. 대전환의 이 두 측면은 서로 의미 있게 연관되어 있는가? 즉 동아시아 유교문명권은 문명 판도의 지구적 재편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가? 할 수 있는가?
이 책은 이 물음에 대한 오랜 숙고의 결과다. 우리는 동아시아 유교문명의 성취를 인류 보편적 가치의 좌표 위에서 재발견하였다. 이는 동시에 인류 보편적 가치의 재발견, 재해석 과정이기도 하였다. 보편이란 멈춰 있는 무엇이 아니다. 확장하고 심화하는 것이다. 이 책은 유교문명이 걸어온 길을 재해석하여 인류의 보편 차원을 확장하고 심화시킨다. 인류문명의 바람직한 재편은 바로 이 길, 인류 보편 가치의 확장과 심화를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이러한 확장과 심화를 통해 보이지 않았던 문명 간 통로들이 넓고 다채롭게 열리고, 횡단 불가능하다 생각했던 해협들로 수많은 배들이 오갈 수 있게 된다.” - 「책머리에」 중에서

근대성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틀을 바꾸다 

막스 베버는 보편사적 의미를 갖는 근대성은 “서구, 오직 서구에서만(in the West, in the West only)” 형성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기존의 근대성 담론은 서구가 비서구에 비해 물질적, 경제적으로만이 아니라 정신적, 문화적으로도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도록 했다. 그러나 김상준 교수는 근대성의 구조가 장기적인 역사의 흐름 속에서 중층적으로 형성되어왔다고 말한다. 이러한 중층근대성론의 입장에서는 유럽 근대문명만이 순수한 근대고, 비유럽 근대문명은 아직 완전히 순수하지 못한 근대라는 발상과 논리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 근대성이 발현되는 데 다양한 경로가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동아시아 문명의 축을 유교에서 찾다

중층근대성론에 따르면 동아시아에서도 근대문명의 기틀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동아시아 문명의 중심 내용, 그 축은 과연 무엇인가? 김상준 교수는 동아시아 문명의 축을 우리가 낡은 사상이라고 치부했던 유교에서 찾는다.
그는 이러한 관점에서 유교의 정초(定礎) 지점을 독창적으로 재발견한다. 그것이 바로 ‘맹자의 땀’과 ‘성왕의 피’이다. ‘맹자의 땀’은 장례 풍습이 생기기 이전에 들판에 방치된 부모의 처참한 시신을 목격한 고대인이 땀을 흘리며 괴로워했다는『맹자』의 구절에서 가져온 것이다. ‘성왕의 피’란 요순우탕 등 성왕(聖王)의 행적을 기록한『서경』의 감추어진 이면에서 발견한 핏자국, 왕권을 둘러싼 폭력을 말한다. 유자들은 이 ‘성왕의 피’를 한사코 지우려 했다. 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군주를 창조하려 했던 것이다. 결국 인류의 도덕적 몸의 탄생을 의미하는 ‘맹자의 땀’은 유교의 윤리적 기원을, 왕위 없는 왕을 지향한 ‘성왕의 피’는 유교 비판성의 기원을 풀어주는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저자가 ‘맹자의 땀, 성왕의 피’를 이 책의 제목으로 삼은 이유는 이 두 개념이 그만큼 유교문명을 이해하는 핵심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는 유교의 근본 원리, 제2부는 유교의 작동 원리, 제3부는 유교 동아시아, 제4부는 유교 조선을 다룬다. 뿌리에서 시작하여 점차 넓게 펼쳐가다 마지막 부분에서 조선의 구체적인 사례들을 통해 총체적으로 마무리하는 구성이다.
제1부는 인류문명사의 흐름 전체를 다시 새롭게 보는 방법에서 시작한다. 그렇게 해야 유교와 유교세계를 다시 새롭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각 전환의 핵심은 제1장「중층근대성론」에 들어 있다. 제1장의 목표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고 너무나 깊이 내재화되어 있는 서구중심의 고전적 근대성 이론을 완전히 새로운 근대관으로 대체하는 데 있다.
제2부의 키워드는 ‘모럴폴리틱’이다. 모럴폴리틱이란 정치와 윤리가 합체된 도덕정치다. 유교에서 그 수단은 예(禮)인데, 따라서 모럴폴리틱은 예치(禮治)라고도 할 수 있다. 저자는 모럴폴리틱 안에서 정치와 윤리 사이의 긴장이 극도로 고조된다고 본다. 유교세계의 정치, 사회, 일상에서 모럴폴리틱이 어떻게 작동했는지 살폈다.
제1부와 제2부가 주로 이론적, 철학적 고찰이라면, 제3부와 제4부는 구체적인 역사 분석이 주를 이룬다. 이 책은 유교세계가 영구히 정체되어 있었고, 오직 서구세력이 들어와 충격을 가함으로써 정체에서 깨어났다는 널리 퍼진 항간의 통념을 뒤집는다. 오히려 동아시아 문명이 근대 세계로 가는 인류사적 여정의 서막을 열었음을 밝힌다. 제3부는 그 근거를 동아시아 전체사 차원에서 규명한다. 여기에서는 11~13세기 연간 중국 강남 지역을 핵으로 하여 전개된 초기근대혁명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제4부는 17세기 이후 조선 후기의 역사에 집중한다. 1659년의 기해예송(己亥禮訟) 이후 전국화한 유교 공론장과, 정약용이 “온 나라 양반 되기”라고 불렀던 뜨거운 양반열에 대해 이야기한다. 유교정치는 군주의 주권을 내파(內破), 즉 안으로부터 깨뜨리는 숨은 본질을 가지고 있었고, 그 내파의 힘은 오늘날의 민권정치, 민주정치의 동력과 연결된다. 조선 후기의 양반열은 유례없는 평등화 에너지였다. 우리에게 자유 전통, 민주, 평등 사상, 국가 너머를 생각하는 문명관, 그리고 인민주권론은 결코 서구 외래 사상만이 아니다. 유교체제에 이미 내장되어 있었다. 제4부는 조선 후기에 발생했던 여러 사건들과 동학운동에 대한 상세한 분석을 통해 이를 입증한다.

저자는 새로 태어날 유교는 밝고 능동적인 시민사상과 시민윤리가 될 것이라 했다. 그럴 때 유교의 ‘천하위공(天下爲公)’ 정신이 제약 없이 진정으로 만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천하위공이란『예기』의 한 대목에 나오는 말로 인간 문명, 천하의 모든 일은 공(公)의 실현을 향해 나아간다는 뜻이다. 아울러 현 시점이 동아시아가 지구권 문명 재편에 능동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매우 귀하고 중차대한 때임을 강조했다. 그는 20세기의 좁디좁은 냉전적 사유 틀을 버리라고 말한다. 그래야 동아시아 공통의 문명적 잠재력을 꽃피울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동아시아 문명이 인류문명을 한 단계 높이 끌어올릴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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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대단하다. 올해 최고의 책이 될 것 같은 예감이다.
밭고랑 2011-09-03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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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직도 ‘극동’에 사는가?

‘세계 속의 한국’많이 들어본 말이고 많이 해온 말이다. 그러나 그 의미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했을까? 지금도 그렇지는 않겠지만 지난 한 세기 그말을 할 때 우리는 한 없이 작아졌다. 세계의 변방에 불과한, 별볼일 없는 나라. 세계지도를 펴놓으면 한 없이 작아질 뿐인 나라. 스스로는 호랑이라 우기지만 사실은 겁많고 별볼일 없는 토끼일 뿐이라 속으로 되뇌이던 나라.세계 속의 한국을 정의하던 감정은 열등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세계지도의 중심은 태평양이 아니라 대서양이었으니까.



우리는 가운데에 태평양이 그려진 세계지도를 보고 자랐다. 그러나 지구 반대편을 가본 사람은 그것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미국이나 유럽에 가서 보는 세계지도는 영국 그리니치가 중앙에 온다. 세계의 중심은 대서양이다. 그런 지도에서 한국은 ‘쉬렉’의 대사처럼 far far far away (‘겁나 먼’이라 번역되었다,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 far east 어디에 처박힌 변방이라 부르기도 힘든 나라일 뿐이다. 그들로서야 당연한 지도이고 당연한 생각이다.



그러나 우끼는 것은 우리 스스로 그들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그들의 입장에서야 우리는 far east에 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왜 그말을 그대로 번역해 극동이라 말했는가? 그들이 세계의 중심이라 인정하고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기가 바뀌면서 많은 것이 달라졌다. ‘초가집도 없애고~~’ 과거는 부정하고 잊어야 할 무엇일 뿐이었다. 단군 이래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자던 새마을운동은 우리의 과거를 청산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새마을운동 전까지만 해도 농촌에서 풍물놀이를 보는 것은 흔한 일이었고 그런 전통문화가 많이 살아남아 있었다. 그러나 새마을운동은 그런 과거를 부정하고 경멸하며 없어져야 할 것으로 규정했다. 사라진 것은 초가집만이 아니라 초가집에 살던 문화도 함께였다. 그때 없어진 것이 식민지 시절 없어진 것을 월등히 넘어선다.



그러나 더 이상 우리는 과거는 부정할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시절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 이제는 떳떳하게 세계 속의 한국을 외치고 나아가 한국 속의 세계를 말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런 자신감을 보이는 우리 자신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이다.



한세대 전만 해도 ‘Japan as No.1’이라 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세계제일은 커녕 세계의 병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이지만 흔히 비전의 상실을 말한다. No.1이란 말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따라가지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다 따라잡고(catching up) 나니 방향을 잃었고 무엇을 해야 할지, 비전을 잃어버렸기에 잃어버린 10년이 20년이 되고 어쩌면 30년이 될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외환위기 이후 성장동력이 바닥났다, 경제시스템의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 10년을 허송세월했다. 흔히 하는 말이다. 이유는 여러가지이겠지만 일본처럼 비전의 상실이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더 이상 서쪽을 보아봤자 무엇을 할 것인가 말해주지 않는다. 우리 스스로 답을 찾을 때이다. 이책의 저자는 그 답을 찾기 위해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어떻게 따라잡을 수 있었던가? 오직 동아시아만이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저자는 따라갈 길이 남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라 말한다. 근대화(솔직치는 서구화)의 길은 사실 우리에게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란 말이다. 왜냐하면 그 길은 13세기 중국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근대화의 핵심어인 근대란 개념은 거의 베버의 정의를 따른다. 베버에 따르면 근대성은 합리성이며 근대화는 합리화의 과정이다. 베버가 여기서 말하는 합리화의 내용은 보통 도구적 합리성으로 이해된다. “한 마디로 집약하면 전 사회의 합리화이고 그 기본축은 1. 합리적 자본주의, 2. 합리적 법-행정체계 3. 합리적 사회분화이다.”



베버에 따르면 그러한 합리화는 ‘서구, 오직 서구에서만(in the West, in the West only)’만 일어났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저자는 합리화의 과정으로서 근대화를 도구적 합리성이 관철되는 과정으로만 보지 않는다. 저자는 근대성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도구적 합리성과 가치 합리성, 베버의 두가지 합리성 모두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도구적 합리성으로만 보더라도 근대화 과정은 ‘서구, 오직 서구에서만’ 일어난 것도 아니고 서구에서 시작된 것도 아니다. 서구에서 근대화가 일어난 것은 먼저 송제국에서 일어난 합리화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서구는 후발자의 이점을 이용하여 다른 문명의 근대적 요소를 빠르게 흡수하였고 특정한 역사적 국면(여기서 저자는 ‘리오리엔트’에서 프랭크가 지적한 시점을 염두에 두는 것같다)을 이용하여 특정한 역사적 국면을 이용해 본격근대로 진입하는 계기를 앞서 포착하였을 뿐이다.’



물론 본격근대(High Modernity)은 영국의 산업혁명과 함께였다. 그러나 근대성의 시작은 서구가 아닌 13세기 중국이었다. 이 시기를 본격근대가 시동하는 장기16세기와 대비해 초기근대(early modernities)가 시동한 장기12세기라 부른다.



“초기근대의 최초 표출양상은 서유럽이 아니라 중국 송원 연간의 사회경제적, 정치문화적 전개 양상에서 풍부하게 발견된다. 그 특징은 정대주의적 통치권의 확립과 비판적 권위를 확보한 학인-관료집단의 형성, 농업생산력의 발전과 농촌수공업의 성장, 수력양수기, 수력풀무, 대형방적기 등의 기계발명과 코크스 (강철) 제련 등 철강 부문에서의 혁신 등에서 보이는 다양한 기술혁명과 초기공업화, 도시, 교통, 화폐 및 무역 영역의 인프라 발전이다. 그 기반은 송대에 이루어졌고 몽골제국은 그 성취를 흡수하여 당시로는 가공할 수준의 전쟁, 행정, 건설, 교역 역량을 갖춘 세계체제를 구축했다.”



대원제국과 함께 처음으로 실제적인 세계화가 시작된다. “’긴 16세기’의 결과 팍스 브리태니카와 팍스 아메리카나가 출현했다면 유라시아의 ‘긴 12세기의 결과는 몽골세계제국, 즉 팍스 몽골리카였다. 유럽의 긴 16세기가 그렇듯 송원 연간의 긴 12세기 역시 세계적인 변화의 시대였다.”



팍스 브리태니카와 팍스 아메리카나가 본격근대를 전 세계로 확장했듯이 팍스 몽골리카 역시 송조에서 시작된 초기근대를 전세계로 확장했고 그 바탕 위에서 장기 16세기가 가능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팍스 아메리카나와 팍스 몽골리카는 분명 닮아있다. 몽골 전통의 초원의 군사력에 유라시아 세계 최대 ‘중화의 경제력’을 합체시키고 게다가 종래부터 몽골과 공생에 가까운 관계에 있었던 ‘무슬림의 상업권을 전면적으로 활용한 경제 지배하는 신방식이었다. 현대풍으로 말을 바꾸면 쿠빌라이의 신국가는 군사 초대국이며 경제 초대국임과 동시에 초대형의 통상입국이 된다.”



본격근대만 폭력으로 세계화를 가능하게 한 것이 아니었다. 초기근대 역시 폭력으로 세계화되었다. 그러나 서구의 세계화가 그랬듯이 팍스 몽골리카 역시 하드웨어만 강했던 것이 아니라 소프트웨어 역시 강했기에 가능했다. 그 소프트웨어는 송조에서 시작된 근대성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면 그 초기근대는 어떻게 가능했는가? 장기 12세기와 장기 16세기의 결과인 세계화는 베버의 도구적 합리성 개념만으로도 설명이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장기 12세기가 왜 시작되었는가를 설명할 수는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장기 12세기를 설명하기 위해선 근대성이란 개념을 재정의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베버를 깨기 위해선 다시 베버로 돌아가야 한다. Return to Weber!



저자는 지금까지 베버는 제대로 이해되지 않았다고 본다. 베버 이론체계가 해결하려는 모순을 파악한 경우가 드물다고 저자는 본다.



TRIZ 이론에 따르면 혁신은 모순의 극복이다. 예를 들어보자. 90년대초 까지만 해도 하드 디스크의 용량은 80MB가 최대였다. 어느 업체에서 “200MB를 상용화하겠다고 했다. 3-4개월이 지난 후 연구원은 열심히 목표 달성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기록용량을 올리려면 기록이 정확해지지 않는다. 데이터 저장 시 에러가 너무 많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에러를 줄여 기록의 정확성을 높이면 용량이 작아진다. 그래서 하드디스크의 헤드부분의 길이를 조절하거나 하드디스크의 기록 플래터 모양을 최적화 하는 등 각 부분의 개선과 최적화로 목표를 달성하고자 안간힘을 썼다.” 그런데 그해 8월 “IBM 왓슨 연구소에서 획기적인 하드디스크 저장 원리를 개발하여 년말까지 1GB 하드디스크 양산이 가능하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다음 날 연구원은 인터넷에 발표된 IBM의 새로운 저장방식을 이해할 수있었다. IBM의 방식은 정확성을 희생하지 않으면서도 저장용량을 10GB까지 늘릴 수 있는 획기적인 발상이었다. 이후 이 방식은 업계의 표준이 되었고 수많은 업체들이 로열티를 주고 그 방식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구원은 이렇게 되뇌었다. ‘이렇게 간단한데 왜 이걸 생각하지 못했을까?” (김효준)



IBM의 방식은 플래터를 여러장 쓴다는 아주 간단한 방식이었다. 그러면 용량과 정확성의 기술적 ‘모순’은 간단하게 해결된다. 모순을 해결한 IBM의 방식이 업계 표준(dominant design)이 되었듯이 학계의 표준(dominant design) 역시 모순과 관련이 있다.



물론 이론은 공학과는 다르다. 공학의 현장이 모순의 해결이라면 이론은 모순의 파악과 관련이 있다. 현실의 근본 모순이 무엇인가를 제시하는 것이 이론이다. 그 모순이 근본적이고 화해불가능할수록 이론의 힘은 강력하다. 저자는 베버의 이론체계 역시 모순과의 대결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모순이 무엇이엇는지 베버의 사후 잊혀졌다고 저자는 본다.



“베버의 사회적 행위이론의 핵심은 행위 동기의 이원성, 그 이원성의 화해불가능한 대립성을 강조한 점에 있다. 그 대립이란 행위의 수단합리적 성격과 가치합리적 성격 간의 대립이며 물질적 이해와 이념적 이해 간의 대립이다. 이러한 행위 동기의 적대적 이원성에 관한 이론은 베버 사회이론의 또 다른 특징인 정치와 윤리 간의 영원한 갈등이라는 문제의식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베버에게 물질적 이해(또는 수단합리성)와 이념적 히애(또는 가치합리성)는 근본적으로 화해불가능한 동기이다. 그 근원에서 볼 때 전자는 현세적 이해추구인 반면, 후자는 구원의 이해, 즉 피안적 이해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전자는 경제-정치 영역과 후자는 종교-윤리 영역과 관렫된다. 이 양 가치의 대립이 화해부가능한 이유는 종교-윤리적 정의는 현세 존재 자체의 부정의한 성격과 근본적으로 대립하기 때문이다.”



베버의 모순은 물론 베버가 발견한 것은 아니다. 이성과 오성을 분리한 칸트의 발견이었다. 칸트에게 도덕은 현실에서 발견될 수 없다. 그것은 이성에 의해 요청되어야 한다. “베버의 이념적 이해 개념은 칸트가 말한 도덕적 이해관심 또는 실천이성의 진정한 동기에 준하는 개념이다. 칸트는 정념의 경향성과 무관한 요청인 도덕성이 또 하나의 이해관심과 옹기의 형태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철학적으로 풀이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정주학의 理나 性 개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조선유학을 풍미했던 理氣論을 베버의 ‘전철수(switchman)’ 이론이나 칸트의 도덕동기론으로 풀이해도 크게 어색하지 않다. 문제의 핵심은 왜 윤리적 요구인 理가 현세적 인과고리의 논리인 氣의 형상을 빌려 또는 기를 타고(乘) 나타나는가에 있었다. 칸트 역시 욕구능력이 감각에 의존하는 ‘경향성’의 원환에 갇힌 인간존재에게 도덕적 동기가 ‘경향성’으로 드러나는 난제를 풀기 위해 고심했다. 칸트에게 도덕동기란 기를 탄 이와 다르지 않다. 이와 기, 성과 속, 양자는 항상 얽혀 있었다.”



베버라면 떠오르는 말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일 것이다. 베버의 이론체계에서 그책은 종교사회학이란 거대한 프라젝트의 작은 사례연구일 뿐이었다. “베버 종교사회학의 주제는 다양한 가치합리성의 존재양식에 관한 분석이다.” 이는 기의 세계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이는 기의 초월이기 때문이다. 기 즉 속, 또는 차안에 대해 이 즉 성은 피안이다. 베버는 성이 어떻게 속의 세계에서 태어날 수 있었는가를 파고들었고 속의 세계, 차안에서 태어난 피안, 성의 세계를 세계윤리종교라 불렀다. “세계윤리종교의 탄생과 함께 의식과 제도의 차원에서 세계성과 초월성이 출현하고 그 결과 현존 질서가 최초로 의문에 부쳐졌다. 이러한 점들은 세계윤리종교의 공통된 특징이다.” 야스퍼스가 말한 ‘축의 시대’는 베버의 종교사회학 연구에 기초한다. 저자는 축의 시대에 근대성의 원형이 태어났다고 말한다. 그리고 근대는 성과 속의 관계가 어떻게 변했는가의 문제라 말한다.



저자는 축의 시대를 성이 속을 통섭(encompass)하는 세계로의의 전환이라 요약한다. “통섭이란 원리에 의한 통괄적 포섭을 의미한다. “유럽 중세 카톨릭의 교황정치, 유교의 성인 정치, 불교의 전륜성왕정치, 힌두교의 브라만-푸로히다 정치, 이슬람의 이맘-울라마 정치는 역사적으로 각각 다르게 현상하지만 성이 속을 통섭했다는 구조에 있어서는 상동이다. 성이 속을 통섭하는 세계질서의 기원은 막스 베버가 말하는 고대 ‘세계윤리종교’의 출현과 맞물린다. 세계윤리종교의 탄생과 함께 의식과 제도의 차원에서 세계성과 초월성이 출현하고 그 결과 현존질서가 최초로 의문에 부쳐졌다. 이러한 점들은 세계윤리종교의 공통된 특징이다.”



물론 이때 처음 종교가 출현한 것도 성이 탄생한 것도 아니다. 보편종교는 성의 위기 때문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기독교 에덴동산이나 노자의 소국과민은 모두 고대도시, 고대국가가 출현하기 이전의 상황을 말한다. 도시와 국가는 예나 지금이나 고도의 인위와 작위의 산물이다. 착취와 전쟁이 체계화, 대규모화한다.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방법론들이 고도화된다. 고대과학, 고대재정, 고대행정, 고대병참의 술과 학이 발전한다. 이러한 연상은 인류역사상 최초의 세속화라 불러야 마땅하다. 마술적 힘으로 가득한 신화적 세계 인식에 균열이 생기고 세속적 힘과 이해관계, 욕망의 계량학과 함수관계가 새로운 군주로 등극하기 때문이다. 기축시대를 전후했던 상황은 근대가 출현했던 상황과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이 상황을 위기로 인식한 결과가 보편윤리, 세계종교엿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초월의 탄생이란 점에서 이 시기를 원형근대성이 태어난 시기라 말한다. 세속화, 즉 근대는 (내용은 다를지라도) 보편성의 합리화, 즉 기를 초월한 이가 기를 압도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형식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들어 기든스는 근대성의 본질을 구체성을 탈피한 추상체계의 운동으로 본다. 그가 근대성의 핵심으로 보는 시공간 거리화는 power가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disembedding되는 abstraction이 전제되어야 한다. 즉 시공간 거리화로 나타나는 권력은 구체적 氣의 세계에서 추상된 理로서, 초월로서 작동한다. 기로부터 독립한 이의 발견이 있었기에 가능한 과정이다. “근대성이 해방시킨 과학기술과 물질적 생산력은 애초에 혁명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 역시 현재에 없는 현재를 보는 비전과 새로운 것을 창출해내는 돌파가 없다면 불가능했다.”



저자가 고대 윤리종교에서 읽어낸 근대의 원형은 초월이다. 그리고 축의 시대에 탄생한 초월 즉 성의 본질은 폭력이 촉발한 윤리의식이엇다. “야스퍼스는 이 시기에 인류가 최초로 윤리적 감각을 갖게 된 것으로 본다. 여기서 말하는 윤리란 주어진 현세의 현상과 힘 자체를 회의하고 초월하는 반성력이다(기든스는 reflecxivity를 근대성의 핵심으로 본다). 이러한 윤리적 각성은 현세의 불완전성에 대한 자각에서 비롯한다. 따라서 이러한 각성 이후에는 현세적 사실과 윤리적 초월 간에 팽팽한 긴장이 발생한다.” 칸트가 말했듯이 윤리는 현실에서 주어지 않는다. 윤리는 현실을 초월한다. 저자가 말하는 근대의“원형이란 눈 앞의 주어진 시공 안의 현실과 ‘시간 밖의 시간’, ‘공간 밖의 공간’에서 오는 이념 사이의 윤리적 긴장관계였다.”



유교를 유교답게 하는 근본적 안티노미는 “폭력과 성스러움의 화해할 수 없는 긴장”이었고 그 긴장의 집약은 ‘성왕론’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성스러운 임금의 교의 즉 성왕론은 유교이념의 핵심일 뿐 아니라 유교정치체제의 근간이다. 유교의 예란 이러한 이념과 체제를 작동시키는 행동원리다. 성스러운 임금이라는 교의에는 강한 역설이 배어 있다. 어떻게 권력투쟁의 중심에 서 있는 현세의 군주가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한 성인일 수있는가?” 성왕론은 성과 속의 긴장이며 나쁘게 말해 반사실적인 픽션일 수 밖에 없다. 성왕론의 근거 자체가 픽션이었다.



성왕론의 근거는 요순이다. “서경의 요임금 묘사에서 우리는 전쟁, 질투, 패륜, 음모, 갈등과 관련된 어떤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이처럼 한 점 폭력의 티끌조차 존재하지 않는 션세의 군주에 대한 묘사는 참으로 전례를 찾기 어렵다. 유교적 안티노미의 핵심은 바로 이 지점에 모아진다. 요순이 성스러운 이유는 신화적 영웅들의 성스러움과 정반대의 이유 때문이다. 그들은 한없이 선하고 한없이 부드럽고 한없이 검약하고 한없이 백성과 혈육을 사랑한다. 이것이 유교의 창건자들이 바라던 군주의 모습이다.”



그러나 과연 그랬을까? 폭력의 흔적을 유자들이 제거한 결과일 뿐 실제 역사는 어디서나 그랬듯 폭력의 역사였다. 고대국가가 성립하던 시절 중국 역시 다른 문명권과 마찬가지로 영웅시대였고(영웅시대에 대해선 ‘축의 시대’ 리뷰 참조) 전쟁귀족의 시대였다. “회남자에서 요임금의 모습은 무인 군주에 가깝다. 여씨춘추에는 요임금의 모습은 여러 종족들 간의 치열한 투쟁의 존재와 이 투쟁에서의 최종적 승자로서 나타나고 있다.”



성왕론의 요순은 조작된 이미지이다. “유교의 창건자들은 ‘폭력에 대한 윤리적 혐오감’이라는 전혀 새로운 감성을 중국 문명에 최초로 이념적으로 체계화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이념은 현실에 없었다. 과거에도 없었다. “공자는 요순을 주자는 공맹을 보았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아브라함을 보았고 루터와 칼뱅은 다시 구약의 예언자들을 보았다. 인도의 개혁 사상가들은 늘 우파니샤드와 바가바드기타로 돌아갔다. 그들은 현재에 없는 현재., 즉 미래를 보고 있었다. 그것은 현재에 업는 것이므로 과거를 빌려 이야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이 현재에 없는 현재를 보았던 까닭은 그들이 살고 잇는 현재가 너무나 많은 부조리와 폭력으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에 없는 현재를 보는 그들의 비전은 현존하는 시공의 인과 안에서는 탄생할 수 없다. 현실 질서의 인과의 밖, 시간의 밖의 시간의 차원이 없다면 인류문명의 결정적인 톨파는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러나 비현실적인 이념의 탄생이야말로 윤리적 각성, 초월적 긴장의 탄생을 말해준다. 무엇인가 부당하고 잘못되었다는 의식이 내포되어 있다면 초월적 계기가 싹트고 있는 것이다.”



세계윤리종교들은 성과 속의 대립 위에 태어났다: “불의가 존재하는 무질서의 우주와 어떤 불의도 존재하지 않는 질서의 우주” 그러나 유교는 특이하게도 그 성과 속이 모두 현세에 있다. 다른 종교들이 내세적 초월주의였다면 현세적 초월주의인 유교는 정치종교였다. “유학자들은 정치현실을 떠날 수 없다. 그들의 성인 군주는 하늘이 아닌 현실에 있었던 것으로 상정되어 있고 그들이 살아가는 당대의 현실군주의 모습 속에서 실현되어야 할 이상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성왕응ㄴ 비현ㅅ길이자 당위적 현실이다. 그들의 군주를 성왕에 가깝게 변화시켜야 하는 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엄숙하고 신성한 명령이다. 이 명령을 이행하는 일은 현실과 당위 사이의 끝없는 갈등과 긴장의 연속이다.” 그 긴장의 핵심은 “왕권의 폭력성과 비도덕성에 대한 끊임없는 경계였다.”



막스 메버의 말마따나 “모든 국가의 본질은 ‘폭력의 합법적 독점’에 있다. 더 줄여 이야기하면 국가문제의 핵심은 폭력이다. 유교 성왕론 안에는 ‘국가에 대항하는 국가’라는 유토피아적 신화가 감추어져 있다. 유교는 국가폭력의 주인인 현실 군주를 절대적으로 평화로운 ‘무결점의 요순 임금’이라는 신화로 꽁꽁 묶었다. 유교의 국가 이념이 잇다면 그것은 폭력 없는 구가다. 폭력 없는 국가체제, 그리고 국가간 체제가 가능한가? 그것은 이미 국가 너머의 국가요 국가 간 체제일 것이다.”



카톨릭 교회가 그랬고 유교가 성왕론으로 그랬듯이 현실을 초월한 성의 이름으로 속을 컨트롤한 시기를 저자는 통섭 I의 시대라 부른다. “통섭 I의 세계에서는 성의 영역이 물적 현상계를 물샐틈없이 감싸면서 통섭하고 경고하고 계도하고 잇다고 믿었다. 물적 현상계는 그를 통섭하는 성의 영역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그림자와 같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 단계에서 성과 속은 비록 분별되지만 같은 거소, 같은 시공을 나누어 쓰고 있었다. 물론 성의 압도적 위에서였다. 그래서 높은 곳, 하늘의 공간적 이미지가 어느 문명에서나 중요한 역할을 햇다.”



저자는 우리가 말하는 근대성은 통섭I의 세계에서 자라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축의 시대와 함께 인류는 고등문명의 세계로 진입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근대성의 세계를 통섭II의 질서라 부른다.



“통섭I의 질서는 막대한 긴장을 수반했다. 그 진장의 근본적 원천은 베버가 통찰했던 바와 같이 현세적 질서가 초월적 질서에 의해 상대화되었기 때문이다. 즉 성속 통섭의 틀 자체가 강한 긴장의 원천이 되엇다. 그 긴장의 내가 결과 통섭II의 질서가 출현했다. 베버의 종교사회학과 역사사회학은 그러한 통섭관계에서 비롯한 역사적 제도적 긴장응ㄹ 강조했다.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유럽에서 발생한 통섭 전환(통섭I에서 통섭II로의 역적)에 대한 하나의 뛰어난 사례분석이다. 통섭전환의 예는 유럽의 종교개혁이다. 중세 카톨릭 교황정치는 성이 속을 통섭하는 전근대 모럴폴리틱의 유럽적 표현형태였다. 개신교는 현세의 질서 자체를 신성화한 중세 카톨릭 교리에 반발했다. 예정설은 현세 인과의 의미를 종교적으로 중립화했다. 그 결과 신성함의 근거는 내면화된다.”



저자는 그러한 통섭전환이 중국에선 장기12세기에 일어났다고 말한다. ‘송원연간에 관찰되는 초기근대의 증거들은 이 시기가 한당으로 이어졌던 중구의 고대제국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수립되었던 시기였다는 점에 있다.” 위진남북조와 5대10국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세습귀족체제는 무너지고 사대부 계층이 등장한다. “성의 구현이었던 황실, 조정의 질서는 더 이상 절대적인 신성함의 지위를 독점하지 못한다. 조정만이 아닌 재야가 공의 영역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공 개념의 함의 자체가 현실 체제의 황통의 정당성을 초월하는 보다 높은 수준의 보편성과 정당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여기서 하버마스가 말했던 부르주아 공론장의 유교적 표현 형태를 읽을 수 잇다. 아니 근대적 公觀은 중국에서 일찍이 선취되었다” 공권력을 분점하던 귀족의 몰락하면서 “송 이래 중국에서 성립한 절대주의적 황권이란 바로 이러한 황제 아래 전 인민의 평등(月印千江 萬川明月)이라는 새로운 신분적 상황의 표현이기도 했다. 이 절대주의란 16세기경 유럽에 등장하는 절대주의 체제와 비견된다. 근대주권의 초기 형태 역시 동아시아에서 선행하고 있었다.”



주자학은 이런 시대의 이념이었다. 주자학의 이기론은 이와 기를 나눈다는 점에서 새로웠다. “한당 시기까지 중국적 사유에서 이 양자는 뚜렷이 구분되지 않았다. 세계는 天(유교), 眞(불교) 道(도교)의 신성함 속에 잠겨 있었다. 즉 성이 속을 통섭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정주학에서 세계는 기로 이루어지고 기에서 理가 분리된다. 정주학에서 이는 내면화된 윤리 개념이다. 이제 이는 기의 바다 속에서 힘써 탐구하여 찾아야만 하는 대상이 되었다. 이제 자연과 사회질서가 그 자체로 성스러운 것으로 표상되지 않고 그 곳에서 작동되어야 할 이의 원리가 발견되고 구성되어야 한다.” 종교개혁 이후 신이 인간의 내면으로 숨었듯이(Hidden God) 이는 기의 바다에 숨어 버렸다. 숨은 신이 찾아야 할 대상이듯 이는 기의 바다에서 찾아내야 할 대상이 되었다.



초기근대는 어느날 갑자기 태어난 것이 아니다. 장기12세기의 오랜 결과가 누적된 것이었다. “이슬람과 당 제국이 흥기했던 7,8세기는 주요 문명권을 연결하는 세계교역망이 사상 최초로 전면화된 시기다. 광대한 이슬람권의 형성으로 중국과의 교역통로가 안정되었고 동남아의 번영으로 바닷길 무역로 역시 안정되었다. 송대의 도약은 당대에 형성된 세계교역망의 임팩트에서 탄생한 것이다. 당시 세계화의 네트웤에서 당제국은 7세기 이후 번성했던 이슬람 제국과 함께 당대에 가장 거대했을 뿐 아니라 잘 조직되고 효율적인 정치체였고 대외문명교류에도 열린 태도와 자신감으로 적극적이엇다. 당시로는 최상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모두 구비하고 있었다. 그 결과 세계 도처의 최선의 주요 문명적 문화적 자양분들이 국제적 네트웤의 여러 매듭들을 따라 그 핵심 허브인 중국으로 모여들 수 있었고 그것이 송대에 집중적으로 결실을 맺게 되었다.”



그런 자양분이 뿌려진 토양이 귀족이 몰락한 신분적 상황이었기 송대의 초기근대혁명이 가능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황제 아래 모두 평등한 상황은 “사회적 잠재력의 해방”을 불렀고 “이러한 변화는 후일 유럽의 15-16세기 초기근대와” 유사했다. 이 시대의 이념이었던 주자학은 대원제국이 과거의 필수과목으로 만들었다. 보편성을 갖춘 세계제국으로서 초기근대라는 시대에 맞는 주자학의 보편성을 알아보았기 때문이라 저자는 말한다.



“미조구치 선생은 북송 시대 정명도의 天卽理라는 언명의 혁명성에 주목하면서 이러한 하늘(과 우주)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초월적이거나 혹은 알 수 없는 힘의 지배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 신의 이성으로 세계를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면서 이는 ‘이성의 시대를 열었다는 점에서 ‘사건’이라 했다.” 천즉리 이전 중국의 세계관인 “‘주재자적인, 운명론적인 하늘에서 법칙적인 하늘로의 변화였다. 송대 이전 고대의 중국인은 하늘을 도(天卽道)라고 생각했고 ‘그 도를 주재자적인 그래서 만물의 밖에 있는 초월적 실체로 생각했다. 따라서 인간은 각각 초월적인 그 도에 운명을 맡길 수 밖에 없었다고’고 한다. 반면 정명도의 천즉리는 ‘인간세계의 일을 포함한 우주자연의 현상이 어떤 법칙성 가운데 있고 그 법칙성은 인간의 이성으로 인식될 수 있다고 보는 새로운 우주자연관이다’라고 풀이했다. 정주학은 기즉 속 우선의 교의였다. 따라서 정주학이 최초로 정립한 이기론은 통섭I이 아니라 통섭II와 원리가 같다.”



저자는 주자학의 천즉리 또는 이기론이 태어나기까지의 배경을 이렇게 정리한다. “통섭II의 질서란 일종의 세속ㅎ솨의 질서라고 할 수 있다. 세속화한 통섭I의 질서가 뿌리에서부터 크게 흔들리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중국의 경우에는 앞서 설명했던 유라시아의 세계화 상황이 그런 것이었다. 당연히 믿어왔던 신성한 질서의 체계가 흔들리고 이내 거침없이 무너져갔다. 이미 남북조시대에 천즉도의 확고한 믿음은 조금씩 다른 형태로 변형되기 시작했다. 무정부주의와 쾌락주의, 허무주의가 만연했다. 천은 다만 물질적 세계 그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일 뿐이라는 사상도확산되었다 여기서 속을 물샐틈없이 통섭하던 성의 질서에 균열이 가고 이어 조각나기 시작한다. 속의 세계가 성의 통제를 벗어나 꿈틀러기고 올라온다. 이러한 혼란과 방황의 이행기에 다른 문명의 종교와 문화가 홍수처럼 밀려든다. 夷狄은 군주가 되고 세상은 蠻戎의 가르침을 따른다. 이러한 상황인식에서 정주학은 정초되기 시작했다. 그들의 사명은 조각나 흩어진 성의 체계를 다시 이어 보다 견고한 형태로 완성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코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는 과업이엇다.”



이상에서 저자가 이책에서 말하고 하는 근대성의 재정의를 살펴보았다. 이후에도 저자는 유교적 근대성의 완성형으로서 조선후기의 유교정치를 자세하게 분석한다. 그러나 이책의 기본적인 요점은 이상에서 제시되었다고 보므로 여기서 줄일까 한다.



개인적으로 이책은 올해 읽었던 책중에서 최고의 책이었다. 개인적으로 상당히 의미있게 보았던 프랭크, 아리기, 암스트롱 등의 논의를 종합하여 하나의 거대한 틀로 마감하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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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lu 2011-12-24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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벅차지만 아름다운 책








0.중얼중얼

매번 하는 말이라 질리시는 분들이 계시겠지만 이 책 역시 제게는 버거운 책이었습니다.

어느정도는 일반독자 보다는 학자에 가까우신 분들을 타켓으로 하는 책이라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눈으로는 읽어도 머리로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었으며, 오독을 한 경우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해했다 싶은 일부분들을 추려서 적어봅니다. 감안하고 읽어주십시오.

-아무튼 이 책은 그 스케일이나 전인미답을 두드리는 면에서나 대단한 책이라 생각합니다.



1.중층근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근대는 막스 베버의 근대라 보면 될듯 합니다.

서양 근대만 진짜다. 다른 세계는 서양 근대의 발전 순서를 뒤늦게 따라가는 것이라는 겁니다.

어설프게 우리나라도 자체적으로 서양 근대의 방향을 가려 했다고 주장하는게 실학입니다.



저자는 이런 주장을 넘어서서 전지구적인 시선으로 근대를 바라봅니다. 순서는 모르겠지만 저자와 도올이 통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인류는 우선 성스러운 것에 대해 눈뜨고 성스러운게 세속을 지배하게 되며(통섭1)

이러한 성스러움을 세속안으로 내재화 하는 단계로 넘어갑니다. (통섭2) 이러한 통섭2가 근대라고 보면 됩니다.

통섭1 : 중세 카톨릭의 교황, 유교의 성인, 불교의 전륜성왕, 힌두교의 브라만-푸로히다, 이슬람 이맘-울라마

통섭2 : 주자학, 르네상스, 계몽주의 등등 - 신이 아닌 사람이 먼저다 라는 명제로 이해하시면 될까요?



초기 근대는 12세기 송나라때에 이루어져 원나라 팍스 몽골리카를 통해 유럽으로 전해집니다.

*본격 근대는 영국 산업혁명으로 보면 되겠습니다.



2.유교

춘추전국시대는 피의 시대였습니다.

유교는 제자백가 모두가 공유했던 선진시대(=진나라 통일 이전) 문헌들에서 피를 최대한 걷어내어 이를 이상으로 봅니다.



요순은 피냄새가 거의 없고,

우탕문무는 최소한의 피로 왕조를 바꾸었으며,

주공으로부터 공자로 오면서는 실제적 왕과 성인의 계통이 나뉘게 됩니다. 왕통과 도통이라 하면 될까요?



유학자들은 어쩔 수 없이 왕을 세우지만 왕에게 불가능에 가까운, 요순과 같은 피없는 성왕이 되도록 갈구며

그렇지 않으면 왕조의 혈통보다 훨씬 고귀한 도통의 사수를 위해 초개와 같이 자신의 몸을 던져가며 왕과 싸웠던 것입니다.



여기서 종법제도라는걸 짚어야 하는데

춘추전국시대란 결국 왕권을 위한 혈족간의 다툼에서 일어난 것이라 보면

이러한 피의 세상을 막기위해 종법제도를 엄격히 정하고 사수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3.기해예송

인조의 둘째 아들이었던 효종이 죽고 현종이 등극하는데 이때

인조의 계비(=왕비가 죽은후 새로 얻은 왕비라면 될까요?)였던 자의대비가 효종에 대한 상복을 1년 입을지, 3년 입을지를 따지게 되는게 기해예송입니다.



현종의 입장에서는 자기 아버지인 효종을 적통(=죽은 소현세자)이 아닌 둘째아들이니 부모인 자의대비가 1년만 상복을 입으라는

송시열의 주장은 눈에서 피가 나올 소리인겁니다.



반면 송시열로 봐서는 양반가에서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 왕가에서 일어나려 하는데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며

왕가의 예 역시 유교, 종법이라는 큰 틀을 벗어날 수 없다는 나름의 대쪽같은 소리였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윤휴, 허목등의 왕권강화파 등등간의 관계까지 이야기나 송시열이 옳았나 여부는 아껴두고

왕이 부모의 장례절차 정도도 자기 마음대로 못했던, 유교의 극치까지 이루어졌던 순간으로서의 의미도 있었다 정도로 기억해두시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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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빤스 2013-02-28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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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이번달 '독서인'에 실은 '독서카페'를 옮겨놓는다. 자유롭게 쓰는 독서 에세이인데, 이달에 고른 책은 김상준 교수의 <유교의 정치적 무의식>(글항아리, 2014)이다. 출간시에 관심도서로 올려놓았었던 책. 저자는 <맹자의 땀 성왕의 피>(아카넷, 2011)의 저자이기도 하다. 참고로, <유교의 정치적 무의식>의 4장 '온 나라에 굶주린 자 없도록 하라: 유교 양민론과 구민 정책'은 한국국학진흥원 기획의 <500년 공동체를 움직인 유교의 힘>(글항아리, 2013)에 먼저 수록됐던 글이다. 유교에 대한 시각을 크게 긍정론과 부정론으로 나눈다면, 저자는 강력한 긍정론자로 분류할 수 있다. 그에 대한 이견을 덧붙였다.







독서인(14년 5월호) 유교를 어떻게 볼 것인가



어떤 책은 제목 때문에 눈길이 가고, 또 어떤 책은 만만하다 싶은 분량 때문에 손길이 간다. 김상준의 <유교의 정치적 무의식>(글항아리)은 그 두 경우에 모두 해당한다. 유교란 주제를 다룬 책은 적지 않기에 특별히 눈에 띌 건 아니지만 ‘정치적 무의식’은 호기심을 갖게 한다. 저자도 적고 있듯이 “미국의 문예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의 유명한 문화비평서의 제목”이어서다. 정확하게는 ‘문학비평서’라고 해야겠다. 발자크와 기싱, 콘라드 같은 서구의 정전 작가들을 견본으로 삼아서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학을 접목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 책이다. 그에 견줄 만한 이론과 해석을 제시한 책이라면 지적 자극으로는 충분하다. 게다가 분량이 상대적으로 얇은 책이라서 독서의 부담이 적다는 것도 장점이다. 저자의 전작 <맹자의 땀 성왕의 피>(아카넷)를 나처럼 모셔두고만 있는 독자라면 ‘후기’이자 ‘입문’ 격이 될 수 있는 이런 속편이 나름 유용하지 않겠는가.


책을 읽기 전에 미래 해본 계산이 그랬다면, 읽은 뒤의 정산은 반타작이다. 일단 제목은 제임슨의 책에서 따왔지만 저자는 “제임슨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정치적 무의식을 다룬다. 그가 유교의 정치적 무의식으로 지목하는 것은 “비판성, 윤리성, 민주, 민생, 문명화, 여성화라는 기호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호들이 오늘날 문명 재편의 시기에 여전히 유효한 현재적 가치임을 웅변하려는 것이 저자의 의도다. 제임슨이 시도한 것과 같은, 텍스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빠져 있어서 좀 추상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맹자의 땀 성왕의 피>을 읽어보려는 독자에게는 좋은 길잡이가 돼주는 것도 사실이다. 너무 두껍다는 불평도 들었다는 전작에 비하면 훨씬 얇은 분량이고 한결 자유로운 기분으로 썼다는 고백이다. 그렇다고 내용까지 가볍다는 뜻은 결코 아니라는 주의도 저자는 잊지 않는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무엇인가. 유교에 대한 재인식과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제 유교를 교양이나 상식 수준에서 대강 알고 넘어가는 것으로 충분하지 못하다. 정확하고 비판적으로 인식할 필요가 전례 없이 커졌다. 특히 사회과학적인 유교 이해가 긴요하다”고 말한다. 물론 새로운 이해가 필요한 것은 그 가치를 재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저자는 유교의 비판성과 윤리성을 우리가 재발견하고 재평가해야 할 핵심 덕목으로 제시한다.


“그렇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유교가 뭡니까?”라는 질문이 자연스레 주어질 법한데, 저자는 <맹자의 땀과 성왕의 피> 서두에서 미리 그에 대한 답을 마련해놓았다. 한마디로 ‘천하위공(天下爲公)’이라는 것이다. <예기>를 출전으로 하고 있는 이 말은 “인간문명, 천하의 모든 일은 공(公)의 실현을 향해 나간다는 뜻”이다. 여기서 공(公)은 요즘말로 공공성이요 정의라고 저자는 덧붙인다. 이 ‘천하위공’에 짝이 되는 것이 ‘우환(憂患)’ 의식인데, 천하위공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을 때 갖게 되는 근심, 혹은 윤리적 고통이 우환 의식이다. 그리고 그것이 공맹(孔孟)의 마음이었으며, 이러한 마음가짐은 ‘인류사 보편적인 윤리정신’으로 확장될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유교 이해다.


얼핏 유교 예찬론으로 분류됨직한데, 자연스레 갖게 되는 의문은 저자가 유교를 너무 긍정적으로만 바라보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공맹의 마음’을 하나의 제도와 종교로서의 유교와 곧바로 동일시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저자 스스로도 말하고 있듯이 유교 역시 두 얼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폭압과 약탈의 구조를 합리화하는 유교도 있었고, 여기에 항의하며 맞서 싸우는 유교도 있었다. 이 둘을 날카롭게 구분해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주문은 저자에게도 향한다. ‘천하위공의 유교’가 한편에 있다면 다른 한편에는 ‘폭압과 약탈의 구조를 합리화하는 유교’도 있었다. 이 모순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폭압과 약탈의 구조를 합리화하는 유교’는 진정한 유교가 아니라 사이비 유교라고 배제할 게 아니라면, 유교의 두 얼굴을 날카롭게 구분하는 것 못지않게 그 두 얼굴 사이의 깊은 연관성도 들여다보아야 하지 않을까.


일례를 들자면, 저자는 <맹자의 땀 성왕의 피>에서 북한의 권력 ‘3대 세습’을 ‘유교적’이라고 보는 항간의 속설에 대해 비판하면서 “왕위는 세습이 아니라 선양(禪讓)에 의해 전승되어야 한다는 것이 공맹의 유교원론(原論)”이라는 근거를 댄다. 이를 그대로 수용하면,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개창한 조선왕조는 선양이 아닌 세습 왕조였기에 유교원론에 따른 ‘유교국가’가 아니었다는 게 된다. 군주가 바로 국가였던 왕조시대에 국가를 매섭게 비판하고 엄하게 다스리는 역할을 유교가 담당했다지만, 그러한 유교정치의 주역인 사(士) 계급을 저자는 ‘국가 부르주아’라고도 부른다. 알다시피 군주와 국가 부르주아는 서로를 견제하는 관계이면서 동시에 공생관계였다. 저자가 지적하듯 국가 부르주아로서 유자들의 한계는 국가-정치라는 틀을 결코 빠져나올 수 없었다는 데 있다. 유교의 현재적 가치에 대한 재평가에 앞서 이러한 한계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더 우선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14. 05.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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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14-05-09 공감 (1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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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 강의 준비





3월 4일부터는 청소년 고전학교에서 4개월간 맹자를 읽는다. 게다가 3월 6일부터는 2개월간 인천 서구 도서관에서 맹자 강의를 맡게 되었다. 맹자 강의를 준비하면서 참고한 책들을 정리해보도록하자. 물론 아래엔 읽어본 책도 있고 읽어보지 않은 책도 있다.




1. 번역본









일단 이쪽 공부를 하는데 참고해야 하는 책 가운데 성백효의 번역본을 빼놓을 수는 없다. 비록 언제나 '읽기 불가능한 번역(?!)'이라는 이상한 수식을 붙일 수 밖에 없기는 하나, 사서四書를 공부하는데는 꼭 참고해야 하는 번역본이다. 일부에서는 사서를 공부하는데 경전 급으로 대우 받는 책이니 무시할 수 있겠는가.




그 다음으로 참고해볼 번역본으로는 우재호의 번역본. 양백준의 풀이를 참고했다고 알고 있다. 이 책의 장점이자 단점은 한쪽을 두 단으로 나누어 왼쪽엔 원문을 오른쪽엔 번역을 실었다는 점이다. 이점이 공부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하나 맥락을 따라 읽기에는 방해가 되기도 한다. 게다가 치명적 단점이 있는데 너무 두껍다는 점이다. 분명히 분량을 줄일 수 있었을 텐데... 각주로 한자에 대한 풀이를 담아놓아서 공부하는데 참고하기 좋다.






그 다음으로는 청소년과 맹자를 읽으며 선택한 번역본. 본래는 책세상에서 나온 안외순본을 선택했었다. 일단 분량이 짧고, 술술 읽히는 번역이기 때문이다. 단점이 있다면 맹자 전문을 번역한 것이 아니라는 점. 그러나 세밀한 맹자의 철학적 번론을 접어두고 맹자의 정치사상을 이해하기에는 이 책이 가지는 장점이 크다. 그러나 이번 청소년 고전학교에서는 맹자 전문을 읽는 것을 목표로 했으므로 이 책을 선택하지 않았다. 일반 독자가 읽기 편하게 되어 있는 책을 찾던 끝에 홍익출판사에서 나온 번역본을 택했다. 일단은 편집이 깔끔해서 보기 좋다. 일단 읽기 좋게 번역을 해두었고 참고할 수 있도록 각 장의 끝에 원문을 배치했다. 나름 만족하고 있다.








2. 해설서









가장 먼저 읽었던 것은 이혜경의 <맹자, 진정한 보수주의자의 길>. 사실 워낙 오래전에 읽었던 책이라 기억도 잘 안 난다. ㅡㅡ;; 그래도 꼽아 둔 것은 맹자를 일반 독자에게 소개한 몇 안되는 책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물론 최근에 맹자 관련 서적이 많았지만 예전엔 맹자 관련 책을 찾기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일단 기억을 더듬어 인상을 말해보면, 그렇게 재미있게 읽었던 것은 아니었... 인상비평으로 지명을 낭비하지 말고 다음.




그 다음은 정현근 선생의 책. 책을 읽기 전에 먼저 프레시안 북스에 실린 신정근 선생의 서평(클릭)을 읽었다. '풍성한 맹자 밥상'이라고 소개하기는 했으나 풍성하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다. 그것은 신정근 선생이 밝혔듯 '10가지 반찬의 논리적 연관성이랄까 유기적 상호관계랄까 이에 대한 배려가 약하다'는 데 있다. 상관 없는 10개의 주제가 따로 노는 느낌. 그래도 맹자에 대한 핵심적인 내용을 읽을 수 있는 책으로는 괜찮은 편. (더 나은 책이 있으면 나중에 소개하겠음)




백민정의 <맹자: 유학을 위한 철학적 번론>은 배송이 늦어지는 탓에 뒤늦게 구입했다. 철학적 비평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오래전에 구입해 놓고 몇 장을 읽다 팽개쳐둔 <맹자 교양 강의>. 돌베개의 고전 강의 시리즈 가운데 하나인데 언급된 책 가운데는 가장 쉬운 책이 아닌가 싶다. 일단 읽어보고 비평을...(이런 불성실한!)









청소년들에게 소개할만한 책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드는 책은 전호근 선생의 <천하를 돌아다니다 맹수레 맹자>. 그런데 절판 되었다. ㅠㅠ 맹자의 핵심적인 내용을 꽤 재미있고 흥미진진하게 소개한 책이다. 꽤 완성도 높은 청소년을 위한 고전 리라이팅의 모범으로 보았으나 절판 크리...


이번 청소년 강좌를 준비하며 선택한 책은 두리미디어의 청소년을 위한 고전 시리즈. 이 시리즈의 단점은 일단 분량이 많고, 정확히 어떤 독자층을 겨냥한 것인지 애매모호하다는 점. 이론적인 부분을 많이 다루고 있어서 어떻게보면 성인 독자가 읽어도 될 정도. 서문만 보았는데 청소년들이 술술 읽기엔 부담되는 책이긴 하다.


다음은 아이세움에서 나온 책. 돈이 없어 구입하지는 못했으나 관심이 가는 책. 이론적인 내용을 깔끔하게 전달한다는 아이새움 시리즈가 가진 장점이 있는데 그게 이 맹자에서도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저자 김태완은 <경연, 왕의 공부>의 저자이며, <성학집요>를 번역하기도 했다. 나름 검증된 저자이다. 물론 검증된 저자가 청소년 서적을 영 아니게 쓰는 경우도 적지 않지만.






3. 그 밖에...














맹자 당시의 시대상을 고찰하는 데는 우선 벤자민 슈워츠의 <중국 고대 사상의 세계>를 빼놓을 수 없다. 이택후-리쩌허우의 <중국 고대 사상사론>도 함께 참고할 수 있다. 쉬우면서도 핵심을 놓치지 않는 책으로는 김승혜의 <유교의 뿌리를 찾아서>라는 책이 있다.




구입해보고 싶은 책은 채인후의 <맹자의 철학>, 이우재의 <맹자 읽기>, 김상준의 <맹자의 땀, 성왕의 피>가 있다. 뒤 두 권은 그나마 최근에 나온 책인데 어떻게 맹자 독법이 바뀌고 있는지 볼 수 있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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