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5-19

알라딘: 상실의 시대, 동양과 서양이 편지를 쓰다 - 혁명의 딜레마, 고객이 된 시민, 지식인의 브랜드화



알라딘: 상실의 시대, 동양과 서양이 편지를 쓰다 - 혁명의 딜레마, 고객이 된 시민, 지식인의 브랜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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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페이지수 2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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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체 게바라와 함께 혁명을 이끈 프랑스 사상가 레지 드브레가 문화대혁명을 냉철한 시선으로 바라본 중국의 철학자 자오팅양을 만났다. 끝없이 변화하며 더 세련된 방식으로 우리를 길들이는 권력과 체제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서로 다른 이력만큼이나 서양과 동양이라는 이질적인 환경에 놓여 있는 두 사람은 시간과 공간, 주제에 제약받지 않으며 12편의 편지를 나눴다.

근대적 혁명의 한계에서 시작한 이 서신 토론은 정치, 종교, 역사, 철학을 넘나들며 자본에 잠식당한 현실을 폭로한다. 혁명에 투신했던 드브레는 거대담론이 아니라 미세한 현실에 주목하는 매체학 연구를 통해 작은 변화에 주목하고, 스스로를 '탁상공론'의 철학자라고 여기는 자오팅양은 복수의 진리를 인정하고 개인 중심의 이성에서 관계 중심의 이성으로 초점을 이동한다.

이들은 학술적 은어나 논조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민감한 주제를 회피하지도 않으며, 여러 가지 단순화된 구호 뒤로 숨어들지도 않는다. 서로 다른 언어와 방법론이 공통적으로 담고 있는 것은 근대적 사유방식을 뛰어넘고자 하는 의지다. 차이와 조화, 관계와 우정에 대한 통찰은 이들이 나눈 지적 대화의 중요한 주제인 동시에 이 서신 토론이 맺은 소중한 결실이다.


목차


한국의 독자들에게
첫 번째 서문
두 번째 서문

첫 번째 편지 - 반혁명을 초래한 혁명의 두 얼굴
두 번째 편지 - 혁명을 대체한 키워드, 민주주의
세 번째 편지 - 새로운 지평을 여는 관계이성과 매체학
네 번째 편지 - 진실과 거짓, 상상이 빚어내는 세계
다섯 번째 편지 - 정치적 정확성에서 교차 모방까지
여섯 번째 편지 - 권력 구조의 변동과 새로운 체제에 대하여

옮긴이의 말


책속에서



P. 24 저는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행동이 바로 근대적 의미에서 혁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상은 결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쉽게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떤 것이 이상이라고 충분히 불릴 수 있다면 그것은 완벽한 일이라는 걸 의미하는데, 실제로 완벽은 불가능하죠. 이런 의미에서 저는 이상을 하나의 척도로 간주하기를 희망합니다. 다시 말해, 이상은 실현하는 데 쓰이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측정하는 데 쓰여야 합니다. 접기
P. 46 근본적 문제로 돌아가면, 별의 운행이라는 순환적 의미 밖으로 뛰쳐나온 유일한 혁명은 정치혁명이 아니라 기술혁명입니다. 기술혁명만이 본래 자리로 되돌아오지 않기 때문이죠. 전류를 갖게 된 뒤에는 더 이상 양초를 사용하지 않고, 기륜선이 생긴 뒤에는 더 이상 범선을 이용하지 않아요. 그러나 10월 혁명이 일어난 뒤에는 다시 그리스정교회로 돌아갔고, 장정 이후에도 유교와 풍수로 돌아갔습니다. 접기
P. 78 맞습니다. 혁명의 ‘상상임신’은 끝났습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저는 1968년 ‘5월의 폭풍우’가 포스트모던의 시작을 상징한다고 생각해요. 포스트모던 비판은 더 이상 실질적 반란을 동반하는 혁명을 일으킬 수 없어요. 포스트모던에는 체제를 전복하는 능력이 없습니다. 오로지 모든 체제와 권위를 풍자할 뿐이죠. 이것은 혁명의 불쌍한 대체물 아닐까요? 아니면 혁명의 불임증에 불과한 것일까요? 접기
P. 135 우정은 이른바 자선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식입니다. 즉 모든 사람에 대한 보편적 사랑이란 실은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자선입니다. 우정은 항상 기이한 경험이에요. 개별적으로 보편을 취득하게 하고, 허위도 빈말도 없습니다.
P. 175 시대정신과 시공간을 정복하는 기술 사이의 신비로운 대응 관계에서, 저는 늘 도대체 무엇이 다른 것을 결정하는지 궁금합니다. 우리가 도덕적으로 기술에 맞추는 것일까요? 아니면 도구가 우리의 도덕적 가치를 강제한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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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레지 드브레 (Regis Debray)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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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시절 체 게바라와 함께 라틴아메리카 혁명에 뛰어든 프랑스의 작가이자 매체학자다.
1940년 파리 출생으로, 파리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철학교수 자격을 취득했다. 1960년대에 카스트로의 초청을 받아 쿠바로 가서 혁명에 참여한 데 이어 체 게바라와 함께 볼리비아에서 혁명 투쟁을 이끌었다. 1985년부터 1993년까지 미테랑 대통령 자문위원을 맡았고, 이후 1994년 소르본대학에서 〈매개론 강의〉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학술과 문화 분야에서도 왕성하게 활동하면서 프랑스의 4대 문학상 중 하나인 페미나상(Le Prix Femina)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 《이미지의 삶과 죽음》(글항아리, 2011), 《전쟁이 끝난 후》(공저, 이후, 2000), 《매개론 선언》(갈리마르, 1994), 《유혹자 국가》(1993), 《일반 매개론 강의》(갈리마르 사상총서, 1991), 《예찬》(갈리마르, 1986), 《정치이성 비판》(갈리마르, 1981)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상실의 시대, 동양과 서양이 편지를 쓰다>,<이미지의 삶과 죽음>,<지식인의 종말> … 총 49종 (모두보기)

자오팅양 (趙汀陽)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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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사상계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끼친 철학자 중 한 명이다.
1961년 중국 광둥 성 산터우에서 태어나 런민대학(人民大學) 철학과를 졸업했다. 현재 중국사회과학원 철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있으며, 유네스코 등 국제학술기구에서 활발히 연구 활동을 펼치고 있다. 중국 철학계에서 ‘트러블메이커’로 일컬어지고 있는 저자는 “현대 중국의 진정한 철학자”이자 “사유가 정밀하면서도 가장 창조적인 학자”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저서로 《천하체계天下體系》(길, 2010), 《觀念圖志》(2004), 《沒有世界觀的世界》(2003), 《談可能生活》(1... 더보기


최근작 : <상실의 시대, 동양과 서양이 편지를 쓰다>,<천하체계>,<참 자유로운 생각> … 총 4종 (모두보기)

송인재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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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HK교수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중국 사상계의 해빙 분위기에서 진행된 후스(胡適) 재평가, 1990년대 자유주의 논쟁, 2006년의 1980년대 붐을 접하면서 중국 현대 사상 연구에 입문했다 중국 현대 사상에 대한 비판적 독해, 중국 지식계와의 생산적 대화, 현재성을 가진 사상 담론 형성을 목표로 삼고 관련 연구를 하고 있다. 2009년부터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인문한국(HK) 연구부의 일원이 되어 현대 사상의 뿌리가 되는 근대의 정치, 사회, 문화 개념을 연구하고 있다. 아울러 정보 기술과 인문학 연구를 접목한 디지털인문학 연구도 국내외 파트너와 협력해 추진하고 있다. 박사 논문은 『1978년 이후 중국의 계몽, 민족국가, 문화 담론 연구: 간양과 왕후이의 비판 담론을 중심으로』다. 후속 연구로 문명, 천하, 유학, 전통 등 과거의 역사적 기억으로 중국의 비전을 모색하는 담론을 다룬 논문을 집필했다. 번역서로 최근 중국의 사상 동향을 보여 주는 『단기 20세기: 중국혁명의 논리』(왕후이 저, 가제, 근간), 『문명, 국가, 대학』(간양 저, 근간), 『권학편』(2017), 『상실의 시대, 동양과 서양이 편지를 쓰다』(2016), 『절망에 반항하라: 왕후이의 루쉰 읽기』(2014), 『왕단의 중국현대사』(2013), 『왜 다시 계몽이 필요한가: 현대 지식인의 사상적 부활』(2013), 『아시아는 세계다』(2011)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과학 질주 시대, 학문과 인간이 던지는 질문>,<왕후이>,<왕후이 (큰글씨책)> … 총 16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문화대혁명을 냉철한 시선으로 바라본 중국 철학자와
체 게바라와 함께 혁명을 이끈 프랑스 사상가의
근대적 사유의 한계와 동서양의 경계를 허무는 지적 대화

◆ 이 책은…

“혁명의 상상임신은 끝났다!”
혁명의 시대가 끝나고 민주주의조차 위기에 처한 지금,
왕년의 혁명가와 동양의 철학자가 만났다

체 게바라와 함께 혁명을 이끈 프랑스 사상가 레지 드브레가 문화대혁명을 냉철한 시선으로 바라본 중국의 철학자 자오팅양을 만났다. 끝없이 변화하며 더 세련된 방식으로 우리를 길들이는 권력과 체제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서로 다른 이력만큼이나 서양과 동양이라는 이질적인 환경에 놓여 있는 두 사람은 시간과 공간, 주제에 제약받지 않으며 12편의 편지를 나눴다. 이들은 학술적 은어나 논조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민감한 주제를 회피하지도 않으며, 여러 가지 단순화된 구호 뒤로 숨어들지도 않는다.

근대적 혁명의 한계에서 시작한 이 서신 토론은 정치, 종교, 역사, 철학을 넘나들며 자본에 잠식당한 현실을 폭로한다. 혁명에 투신했던 드브레는 거대담론이 아니라 미세한 현실에 주목하는 매체학 연구를 통해 작은 변화에 주목하고, 스스로를 ‘탁상공론’의 철학자라고 여기는 자오팅양은 복수의 진리를 인정하고 개인 중심의 이성에서 관계 중심의 이성으로 초점을 이동한다.
서로 다른 언어와 방법론이 공통적으로 담고 있는 것은 근대적 사유방식을 뛰어넘고자 하는 의지다. 차이와 조화, 관계와 우정에 대한 통찰은 이들이 나눈 지적 대화의 중요한 주제인 동시에 이 서신 토론이 맺은 소중한 결실이다.

자본과 기술에 감정과 정신이 잠식당한 상실의 시대,
근대를 넘어선 ‘새로운 혁명을’ 말하다

“오늘날 우리는 사실상 ‘자유’와 ‘자주’ 개념과 결별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본과 기술이 공모해서 인간의 생활을 통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본과 기술에 지배당하며 사는 동안 인간의 감정과 정신은 쇠약해졌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편안함과 편리함을 누리기 위해 욕심을 부립니다.”
_ 한국의 독자들에게

한국의 독자들에게 쓴 자오팅양의 이 서문은 우리가 놓인 현실을 정확하게 진단한다. 한국 역시 이러한 위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사물에 대한 직접적인 인식이 아니라 미디어를 통한 간접적 인식은 우리의 감정을 무디게 만들고, 주류의 담론에 의해 걸러진 사실만이 우리의 인식 속으로 들어온다. 우리는 이렇게 감정, 정신, 이상, 자유를 모두 상실한 시대에 살고 있다.
자오팅양과 드브레가 토론의 소재로 삼은 이상, 이성, 진리, 조화, 보편 등은 모두 근대에서 비롯된 개념들이다. 자본과 기술, 권력이 끊임없이 진화할 때 우리의 대응이 근대적 방식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 서신 토론의 결실은 그 근대적 개념들의 사이와 그 너머의 사유를 열어젖힌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두 사상가의 토론을 따라가며 ‘새로운 혁명’의 실마리를 풀 수 있을 것이다.

◆ 도서 소개

50주기를 맞는 중국의 문화대혁명,
떨쳐낼 수 없는 마오의 그림자

중국은 2016년 5월 16일로 문화대혁명 50주기를 맞는다. 1966년 5월 16일 중국 공산당 정치국회의에서 낭독된 ‘5·16 통지’로 발발한 문혁은 오늘날 중국에서 금기시되고 있음에도 아직 그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자본의 침투가 심화됨에 따른 빈부격차와 마오를 부정할 때 빠질 수밖에 없는 체제의 모순 때문이다. 무엇보다 전통과 문화를 파괴시키고 발전마저 후퇴시켰다는 평가를 차치하고라도 문혁이 정치적 정확성을 내세운 근대적 혁명임은 자명하다.

이 책에서 토론을 풀어가는 동서양 두 사상가는 각기 다른 근대적 혁명의 격정을 보낸 자리에 서 있다. 자오팅양에 따르면 근대 혁명은 이상 실현을 위한 행동으로, 이미 상정해놓은 ‘정확한’ 세계를 구현하고자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굶주리지 않고 생활의 편안함을 느끼고자 할 뿐이다. 이것은 그의 표현에 따르면 ‘인성의 실망스러운 현실’이다. 이성이 견인하는 근대 혁명이 다시 민족적 전통으로 회귀하고 반혁명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오팅양이 이렇게 이상과 현실의 괴리 때문에 혁명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지적하면 드브레는 “혁명의 상상임신은 끝났다”고 선언하며 혁명의 자리를 민주주의가 대체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혁명과 달리 민주주의는 그 의미가 모호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무엇보다 이 틈을 파고드는 자본과 권력을 경계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의 변형,
퍼블리크라시(publicracy)와 미디어크라시(mediocracy)

오늘날의 세계는 바로 이렇게 허점을 가진 민주주의를 마치 ‘가치’처럼 여기는 함정에 빠져 있다. 현대의 많은 국가들은 서구에서 수출한 정치 제도인 민주주의를 그들의 체제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민주주의 사회에서 담론을 이끄는 미디어는 권력과 자본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지식인은 이런 상황에서 스스로를 브랜드화하지 않으면 공론장에 입장조차 하지 못하게 된다는 점을 드브레는 지적한다.

또한 그에 따르면 더 세련된 방식으로 시민들을 길들이는 권력에 의해 시민은 ‘고객’이 되어버리고 체제에 순응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는 점은 자명하다. 이러한 드브레의 비판에 자오팅양은 민주주의가 가치가 아니라 공공 선택의 수단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좋은 공공 선택을 낳을 수도, 나쁜 공공 선택을 낳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민주주의라는 수단은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드브레는 나아가 중국이 문혁을 금기시 하고 개방을 외치더라도, 민주주의와 함께 체제에 스며들 자본주의를 경계하라고 주문한다. 아무런 이상을 추구하지 않는 듯 보이는 자본주의는 권력을 은폐시키고 우리가 스스로를 노예화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에 자오팅양은 기존의 민주주의가 퍼블리크라시(publicracy)로 변형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즉 새로운 권력에서 기인한 지배적인 전체 의지가 사회를 이끌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드브레는 실천적 지식인이 공인이 되어 공적 네트워크에 진입해야 하는 상황을 미디어크라시(mediocracy)라는 용어로 진단한다.

작은 현실에 주목하는 드브레의 매체학,
보편을 재정의하는 자오팅양의 관계이성과 복수의 진리

드브레가 매체학(mediology) 연구에 몰두하는 이유는 그의 정치적 행보와 무관하지 않다. 혁명의 격정이 사라진 자리에서 그는 거대 담론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피로감과 이상 추구의 한계를 절감했다. 따라서 그는 물질의 변화와 그 매개물 사이의 실천적 조작을 연구하는 매체학 연구를 통해 개념이 선행하는 근대적 사유방식을 뛰어넘고자 한다. 이러한 사상의 전환은 그가 현실에 매몰된 학자도 아니고 더 이상 낭만에 빠진 혁명가도 아니기에 가능했다.

스스로를 현실주의자이자 이상주의자라고 말하는 자오팅양은 근대 철학의 원칙인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를 ‘파키오(facio)’로 대체한다. ‘나는 행동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원칙을 철학의 토대로 삼는 그는 유물론과 관념론 중 어느 쪽에도 매몰되지 않고자 한다. 두 이론 모두 사물을 새롭게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동시에 존재론과 창조론을 하나로 합쳐 철학의 정초 문제가 나타나는 지점을 밝힐 수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자오팅양은 신의 창세 문제가 아니라 인류가 창조한 역사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며 근대의 사유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한편 드브레는 보편주의가 다양성을 해치고 사람들을 숨 막히게 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내비친다. 또한 누구라도 자신이 속해있는 환경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 즉 민족성을 떨쳐내기가 어렵다는 점을 지적하며 정체성(그것이 비록 상상과 거짓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 하더라도)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에 대해 자오팅양은 보편주의라는 것이 근대적 발상인 ‘개인의 이성’을 토대로 하지 않고, 특수한 관계에서 보편적으로 유효한 ‘관계이성’을 토대로 한다면 다양성을 해치지 않고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각각의 정치제도 위에 그려진 판에 박힌 이미지만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덕분에 저는 가능한 한 제가 사는 곳에서 겸허하게 파리의 베이징인이 되었습니다.”

드브레는 자오팅양과 철학적 토대를 완전히 공유하고 있지는 않지만, 토론을 진행하며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한다. 바로 오늘날의 전 지구화 시대에 세계는 미국의 자본주의와 패권의 영향 아래에 있지만, 정신적으로 공생성과 혼합성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중국을 닮아간다는 것이다. 서양은 점차 인간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관계를 통해 정체성을 파악하려 한다는 사실 역시 드브레에게는 중요했다. 동양과 서양의 교훈이 상호 흡수되어 교차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자오팅양 역시 중국의 복잡한 상황이 서양이 이미 중국 현실을 구성하고 있는 영역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고대 중국이 인도에서 불교를 수용했듯 오늘날에는 서구의 기술과 문화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중국의 한 속성이 된 서양을 해석하고 조화시키는 것이 중국이 놓인 과제라고 말한다. 또한 이런 방식이 중국의 존재방식이라는 점을 지적하며, 세계가 중국을 닮아간다는 드브레의 말에 대응한다.

이렇게 서로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독자들은 공존과 조화라는 이 토론의 주요한 주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드브레의 편지에 담긴 이 말은 동양의 철학자와 나눈 지적 대화가 서로에게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이었는지 보여준다.
“정의를 찾는 시간에 우리는 동지를 만날 수 있습니다. 진리를 찾을 때 친구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단언컨대 선생님은 제 친구입니다.”

언론 서평
연합뉴스 2016. 5. 18일자 기사 보러가기


한겨레 2016. 5. 19일자 기사 보러가기


경향신문 2016. 5. 20일자 기사 보러가기


한국일보 2016. 5. 21일자 기사 보러가기


머니투데이 2016. 5. 21일자 기사 보러가기


조선일보 2016. 5. 21일자 기사 보러가기


매일경제 2016. 5. 20일자 기사 보러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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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 동양과 서양이 편지를 쓰다




문명의 동과 서를 가르기 이전, 지식인이라면 문화권 사이의 건널 수 없는 강을 한탄하기 전에 보편이라는 이름의 배로 무해통항을 향유할 방법은 없는지 먼저 고민할 만합니다. 인류의 공영과 해방, 자유, 평등, 깨끗한 환경의 혜택 등은 누구나 공감을 보낼 수 있는 가치입니다. 혹여 좌파 지식인으로서 젊은 시절 커리어 대부분을 보낸 분들이라면, "혁명", "자유", "민주주의" 등의 화두(말 그대로 화두더군요)로 보다 속 깊은 대화를 나눌 수도 있겠습니다.

레지 드브레는 벌써 인생의 황혼기를 한창 넘긴 분이고, 겸손되게 "고령으로 인한 무능"을 스스로 언급할 만큼 지긋한 나이지만, 편지들을 구성하는 문장에서 우러나는 지적 활력은 여느 젊은이 못지 않은 듯합니다. 자오팅양(한국식 독음이라면 조정양)은 중국 철학계를 대표할 만한 리쩌허우 박사의 수제자로서, 학자로서 원숙기에 접어들었다 할 세대입니다(그래서 나이로는 저 드브레의 아들뻘이죠) "트러블 메이커"라는 달갑지 않은 비판도 들어가면서 학계와 독자의 인식 지평을 여러 신선한 시도를 통해 넓힌 공헌이 있는 분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분의 "천하 체계"를 다룬 개념서가 번역되어 나왔고, 이 책에 실린 편지들 중에서 그 개요가 여러 번 언급됩니다.

두 분 다 자신의 속한 체제, 민족, 국가 안에서 이단아처럼 인식되는 면이 있는 지식인들입니다. 드브레는 대학생 시절 체 게바라 등의 혁명 활동에 직접 가담하다 징역형까지 선고받은 이력이 있습니다. 자오팅양은 좀 놀랍게도 "유물론적 변증법"에 과하게 집착할 필요 없으며, 관념론의 출발점에 서서 세계의 인식은 같은 지점에 도달할 수 있다는 주장을 폅니다. 이런 생각이 현 중국 공산당 수뇌부에 마냥 마뜩하게 받아들여질 리가 없습니다. 정통파 사관에 의하면 어차피 중국사 3대 혁명 중 앞의 두 개는 최종의 단계에 의해 지양될 수밖에 없는 과거의 유물입니다. 허나 자오 박사는 첫째 혁명의 산물인 주 무왕의 체제에서 큰 의의를 찾고, 이것이 현대 국제 정치 체제 확립에도 큰 시사를 준다는 쪽입니다.

한편 드브레 역시, 아들뻘 학자에게 보내는 서신치고는 정말 겸손하고 정중한 어조로(사실 좌파 지식인치고도 대단히 우아한 말투를 구사합니다) 대담하고 속 깊은 소통을 시도합니다. "진-한의 혁명은 그저 궁정 쿠데타에 가깝지 않은가? 그것이 왜 혁명인가?" 아마도 드브레는 자오 박사의 대표작을 진지하게 읽은 후 머리 속에 떠오른 의문을 이처럼 제기한 듯합니다. 하지만 이 질의는 견해의 차이가 아니라 기본 사실을 착오한 면이 없지 않은 것 같네요. 시황제의 진 건국이든, 한 고제의 군국제 확립이든, 혹은 무제의 본격 군현제 실시이든 간에, 이 "혁명"은 기존 봉건제의 근본적 한계를 뛰어넘은, 동아시아 세계 체제의 근본적 요소에 초석을 놓은 말 그대로 혁명적 시도였습니다. 그 이후에 벌어진 위, 진, 수, 당, 송 등의 등장은 궁정 쿠데타로 볼 여지가 있지만 말이죠.

"혁명"이 아래로부터 민중의 참여를 그 필수 요소로 삼는지 여부를 놓고도 두 지식인은 적잖은 견해 차이를 보입니다. 드브레는 처음부터 68 혁명 세대의 일부이므로, 특히 그의 후견인 격이었던 사르트르가 고안한 "연대와 박애 정신에 기반한 폭력"에 대해 매우 우호적입니다. 한편 그는 우둔하고 투박한 하층민이 아무 개념 없이 미신적 국부 신앙 비슷하게 마오를 숭배하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합니다. 교육과 인식이 미비한 하층민은, 스스로 좌파 정치 이념을 뿌듯한 각성의 지표인 양 과시적으로 언표하면서도, 그 아득한 조상뻘 원류가 될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는 "자신이 그에 대해 무지하다는 이유만으로" 적대시합니다.

이런 드브레에 대해, 자오 박사는 "지금은 cogito가 아닌 facio의 시대"라며 자신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합니다. 물론 "코기토"는 데카르트의 그 유명한 논변에서 나온 용어지만, 사실 20세기 들어 바로 드브레의 스승이자 후견자인 사르트르 자신이 <존재와 무>에서 상당 분량을 할애하여 그 실존적 재해석을 시도한 바 있죠. 자오 박사가 이 점을 의식하고(따라서 다분히 도발적 의도에서) 이 토픽을 꺼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두 사람 다 불꽃 튀는 논쟁의 향연을 벌이기보다는, 너무 정중하고 우아한 담론을 꾸려 가는 모습이라서요.

드브레는 설혹 자유롭고 깨인 지성을 가진 개인이라 해도, 그 소속 민족의 집단적 인식 한계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지에 대해 많은 질문을 던집니다. 가령 한(漢)족은 얼마나 좡 족(광서 장족)을 편견 없이 바라볼 수 있는지 같은 다소 정치적으로 민감한 질문까지도 포함합니다. 이에 대해 자오 박사는 "12세기에 동양으로 유입된 유대인들조차 아무 충돌 없이 동화시킨 게 중화의 체질"이라며, 고정된 틀이나 제약 없이 모든 문화 요소를 수용할 수 있었던 지난 역사를 환기시키기도 합니다.

두 사람이 비교적 이론의 여지 없이 합의를 이루는 대목은 "탐욕스러운 자본에 공동 대응하는 지성인의 자세"입니다. 민중은 처음에 신민(臣民)의 지위에서 시민의 위상을, 혁명이라는 과정을 통해 쟁취 획득하였으나, 이제 자본에 의해 강제로 "고객"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는 데 두 분은 거의 충돌이 없습니다. 여기서 자오 박사는 모호하고 위험하며 내용이 거의 박탈되기까지 한 democracy 대신, 자신이 입안한 publicracy 개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드브레 역시, 중세에 가톨릭의 라틴어, 20세기에 마르크스주의의 혁명 신앙(이 말 안에 어느 정도 회의주의가 내포된 거죠. 저는 소위 레지스탕스 신화에 대해 "아름다운 거짓말"로 규정하는 드브레의 이 책에서의 태도를 보고 놀랐습니다)을 대신할 만한 그 어떤 "보편"에 대한 간절한 희구를 표현합니다. 서신 왕래를 통한 지식인들의 의견 교환 역시, 인류가 "더 많은 빛, 광채"를 갈구하는 오랜 전통 속에 유지해 온 아름다운 소통의 장입니다. 앞으로도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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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혈 2016-06-17 공감(5)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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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이 사라진 시대에 혁명을 꿈꾸는 것.








이 책은 2011년 프랑스 트레이에서 열린 프랑스-중국 문화 원탁회의에 참여했던 레지 드브레와 자오팅양이 회의에서 서로에게 감응받아 주고 받은 이메일 토론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한국어판의 제목은 “상실의 시대, 동양과 서양이 편지를 쓰다”이고, “혁명의 딜레마, 고객이 된 시민, 지식인의 브랜드화”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한국어판 서문’을 보면, 이 책의 프랑스판의 제목은 “하늘과 땅 사이”로 하늘과 땅 사이의 큰 문제를 다루었다는 의미이고, 중국어판 제목은 “두 얼굴의 개념”, 부제는 ‘혁명 문제에 관한 통신’이라고 한다. 제목에 관해 언급하는 것은, 이 책은 전혀 다른 분야의 학자들이- 드브레는 ‘매체학’ 전공자라고 하지만 체 게바라와 쿠바에서 함께 투쟁했던 혁명투사로 더욱 잘 알려져 있다- 주고받은 서신이기 때문에 전문적인 논의가 들어있다기 보다는 시대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제기일 수 밖에 없으며, 그런 이유로 저자 개인들의 문제의식은 각 나라에서 부각된 책의 제목으로 가장 일차적으로 드러나지 않겠는가 싶어서이다.



서신을 주고받았다고 하지만, 책을 보면 자오팅양이 먼저 장황하게 문제를 제기하면 그에 대해 레지 드브레가 답을 하거나 반론을 펼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자오팅양은 보다 관념적으로 자기의 생각과 의견을 제시하는데, 그의 사유는 많은 중국 지식인들의 사유가 그렇듯 자국의 전통에 대한 자부심을 엿보이는 고전 인용과, 그가 인용하는 서구 사상가들의- 지젝도 수차례 언급된다- 경구들을 보면, 중국 지식인들의 얼마나 서구를 의식하고 있는지 엿볼 수 있다. 자오팅양은 한국에 번역되어 있지만 나는 읽어보지 못한 『천하체계』(길, 2015)라는 시스템 내에서 말을 건네고 있는 듯 하다. 그는 자신의 존재론이 데카르트로 상징되는 서구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이원론과 다른 “나는 행동한다, 고로 존재한다(facio, ergo sum)”로 설명한다. 이는 중국적 사유가 가진 현세적 성격, 즉 “지금 이 곳도 알 수 없는데, 저 곳(죽음)을 어떻게 알겠느냐”고 물었던 공자의 사유의 연장이며, “인간이 세계의 초월적 본질을 사유할 수 없는 것은 세계는 인간이 창조한 것이 아니며, 인간은 생활세계의 창조자”(109)여서 초월적인 일을 사유할 수 없다는 태도이다. 자오팅양은 “관계이성”라는 말을 쓰면서 “‘관계’가 기본 분석 단위가 되면 보편 가치를 더 합리적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111)이라며 서구와는 다른 새로운 보편성을 정의하려고 한다.



자오팅양이 서구와는 다른, 그러나 근본적으로, 끊임없이 서구를 의식한 사유를 전개해 나간다면, 서구 전통에 대한 레지 드브레의 태도는 보다 “쿨”하다. 드브레는 서구의 전통이나 철학 보다는, 그러한 것들이 만들어내는 꿈과 공동의 이상에 더욱 관심을 보인다. 그는 “오늘날 민주주의가 혁명을 대신하는 키워드로 등장”(56)했지만, “유토피아에 대한 신념이 없다면 사회는 썩을 뿐만 아니라 무료하고 변화없는 사회가 될” 뿐이어서 “혁명은 현대 사회 공간에서 희열에 도취하는 최후의 원천이자 보루”(55)라고 말한다. 드브레는 혁명적 이상을 위해서는 동물로서 인간이 가진 한계와 특성을 긍정하며(52), 사회와 민족이 움직이기 위해서는 심장과 감정이 들어있는 “진실과 거짓을 뛰어넘어 쉽게 구상되고 누구와도 공유될 수 있는 신화”를 통해 역량을 계발해야 한다고 주장(165)하는 리얼리스트이다. 그는 국제 사회의 힘의 냉혹함을 알고, 아름다운 거짓말이 ‘진실’한 효과를 낳는다는 마키아벨리적 지혜를 습득하고 있으며 그럼에도 유토피아로, 시대정신으로 나아가자고 주장하는 로맨티스트이다.



그러면 우리는 [한국어판의 부제가 가르키는 것처럼] 무엇을 상실한 세계에 살고 있는가? 우리는 이제껏 우리가 잘 살기 위해서, 올바르게 살기 위해서 추구해왔던 그 모든 가치를, 두 저자가 말하는 “혁명적” 가치를 모두 상실한 세계를 살고 있다. 드브레는 우리가 “시민이 아닌 고객이 되어 버렸고”, “지도 계층의 부패, 공동체 구조의 붕괴, 미래에 대한 불안감, 믿음에 대한 보편적 상실, 논리적 부작용으로서 합법성, 자기정체성의 위기까지(218)” 겪고 있다고 말한다. 지난 일백 년이 넘게 추구해온 모든 가치가 쓰레기가 되고, 애써 이룩해 놓은 성과는 “자본(주의)”이라는 새로운 괴물이 삼켜버린 시대가 도래한 것이며, 우리는 혁명 전야 보다 더 큰 혼돈에 맞부닥쳐 있는 것이다.



저자들은 혁명의 시대를 온전히 온 몸으로 거쳐온 이들이다. 그러면 혁명이란 무엇인가. 드브레가 지적하듯이, “프랑스어 revolution에 정치적인 혁명의 의미가 부여되기 전에는 하늘에서 별자리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주기”(43)를 의미했다. 혁명이란 시간(객관)과 삶(주관)의 주기를 파악하는 일이다. “하늘과 땅 사이의 큰 문제들”을, “두 얼굴의 개념인 혁명 문제”를 다룬다는 것은 바로 우리의 삶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파악하는 문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두 사람이 다루는 내용이 혁명이라는 국부적 주제에서 시작되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관계이성과 매체학, 정치와 권력의 구조 변동의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 확대되어 가는 것은 그러므로 자연스러운 과정인 것이다.



이 책에서 우리가 얻을 것은 어떤 지식이 아닐 것이다. 동서양을 대표하는 석학들이면서 혁명을 몸으로 치러온 혁명가들로서 그들에게서 듣는 현대의 문제, 자본주의의 문제나 그에 대한 해결책은 비슷한 류의 교과서나 문제작들에서 훨씬 더 자세히 다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이 가지는 의미는 혁명 세대들이 자신들이 가졌던 혁명이 아니라, 앞으로 도래할/도래해야할 또 다른 혁명의 의미에 관해 말한다는 것이다. 실체가 명확했던 타도의 대상이 있었던 시대에, 추구해야 하고 이루어야 할 것이 명확했던 시대에 혁명을 이루고자 했던 이들이 “(구세대가 쓰러지는) 혁명의 신화가 현대의 미신 중의 하나임을 발견하고, 혁명의 종교성이 혁명의 이성보다 강함을 발견하라”(83)고, 그리고 현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국가와 정부가 금융자본, 신기술, 대중매체, 인터넷과 같은 ‘무대 뒤의 권력’의 경리부서”에 지나지 않을 시대에서 진정으로 상실되고 있는 저 많은 진짜 문제들을 직시하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혁명의 시대에 혁명의 전위에 서 있던 루카치가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라고 탄식했던 것처럼, 우리 각자가 대면하는 우리의 시대는 어둡고 혼란스러우며, 혁명의 시대는 항상 바로 '지금 여기'를 바꾸는 것이여야 하고, 혁명은 항상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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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 2016-06-07 공감(5)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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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




여전히! --- '혁명'이란 단어가 제시해주는 이미지는 저 개인에겐 버겁기만 한 무게를 지니고 있습니다. '5·16'은 반란인가 혁명인가, '4·19'는 의거로 불리어져야 할까, 혹 누군가에게는 아직도 난(亂)으로 인지되고 있지나 않을까 등등의 개념적 구분은 차치하고라도 여전히!








저의 일상과는 절대 가깝지 않은 단어이며, 앞으로의 일상과도 결코 가까와지지 않을 것 같은 단어임에는 분명합니다. 단지 --- '유전자 혁명'이니, 'IT혁명'이니 등과 같은, 뭔가 '파격적 변화'만을 의미하는 상징적 단어로서나 일상 속 뉴스 등에서 목격되어질 수 있는 단어일 뿐이겠지요.








……………………………………………………………………








"왕년의 혁명가와 혁명을 옆에서 목격한 사람이 만났다."(p266)








전자는 프랑스인 저자 레지 드브레를, 후자는 중국인 저자 자오팅양을 일컫는 말입니다. 혁명1을 목격한 이(자오팅양)가 지적하는 "혁명의 부작용"(p266)에 대하여, 혁명을 실천했던 이2(레지 드브레)가 '저 친구와 끝장 토론을 해보고 싶군!'이란 소망을 가지게 되었고, 편지3로 각자의 생각을 주고 받은 결과물이 바로 이 책입니다.4











​【 혁명의 '상상임신'은 끝났다! 】



​자오팅양의 지닌 '혁명'에 대한 생각을 먼저 보죠. --- 자오팅양은 "정서적으로는 혁명에 동의합니다. …… 그렇지만 이성적으로는 혁명을 신중하게 대합니다."(p25)라는 지극히 완곡한 표현으로 자신의 의견을 밝힙니다. 읽히기에 따라선 '혁명은 잘못된 선택이다'로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실제 전 그렇게 이해했더랬습니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자오팅양이 반대하는 '혁명'이란 과연 어떤 의미인 것일까요?







그는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행동이 바로 근대적 의미에서 혁명이라고 생각"(p24)라고 말합니다. 그리곤 '이상'이란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해주고 있지요.








"저는 이상을 하나의 척도로 간주하기를 희망합니다. 다시 말해, 이상은 실현하는 데 쓰이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측정하는 데 쓰여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현실과 이상의 거리가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알 수 있고, 현실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어떻게 개선해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p24)



​즉! 두 발 딛고 있는 현실이 어디에선가 옳지않다,라 느껴졌을 때, 그렇다면 어떤 것이 옳은 것인가, 어떤 모습이 되어야 옳은 현실이 되는 것인가,를 설계해보는 하나의 기준점으로서만 가능한 것이 이상(理想)이거늘, (근대적 의미의) 혁명은 그 이상을 현실에서 구현하려 했었5을 뿐 아니라, (옳지않은 현실의) 파괴를 내세우는 방식6으로 진행되었다라는 점에서, 그는 '혁명'이란 단어에 동의하지 않는다라는 것이지요. 굳이 지금의 옳지 않은 현실을 바꾸겠다면,








"부드러움으로 단단함을 이기는 침투력7은 유연한 대처로 상황을 유리하게 이끌도록 만들어주고, 정서와 정세에 따라 점진적이고 세부적으로 추진해나갈 때 개혁이 더 풍부하게 작용할 것이다. 작은 것이 쌓여 큰 변화를 이룰 때 결국 현실을 복종시킬 수 있으며, 여기서 형성된 변혁의 효과가 훨씬 안정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pp14-15)



​이렇게 하라는 겁니다. 여기에 더해, "혁명이 동원한 대규모 집단 행동은 개인 이성이 모여서 초래한 비이성적 결과가 아니라 그 자체로 비이성적인 집단행동8"(p26)이라는 다소 충격적인 단정을 내림으로써, '혁명'이란 개념/방식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의견을 명확히 피력하고 있지요.9 ​







이처럼 자오팅양은 혁명이란 개념의 사용에 매우 신중합니다. 역사적으로 보였던 여러 사례들 -"사회에 불만을 품은 사람이 일부의 이익과 권력이 분배되는 상황을 바꾸라고 요구하고, 통치집단을 타도해서 그것을 대체하려"(p30)하는 것은 결코 혁명이 아니며, '반란, 봉기, 또는 정변'으로 불리어야 한다라 주장하지요. 그가 정의하는 혁명은 "사회의 총체적 변화'로서, 이는 "사회 전체의 생산양식과 정치법률, 제도의 변화를 요구하고 개개인의 생활방식, 사유방식, 가치관의 변화를 요구"(p31)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오팅양의 정의를 따른다면, 대한민국의 1987년 6월을 단순히 '항쟁'이라 표현하는 것은 우리 스스의 과도한 겸손이 되겠지요.)







​​자! 이번엔 레지 드브레의 답변을 들어볼 차례입니다. --- 드브레는 "​(혁명이라는) 상상임신은 끝났습니다!"(p56)란 다소 과격한 표현으로, 현대 사회에서 더 이상의 '혁명'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점에서 자오팅양의 의견에 동의를 표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는 이상과 환상도 필요합니다. 유토피아의 우울한 최후를 겪고도 계속 살겠다는 용기가 남아 있다면 어떤 유감도 없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p57)



라는 것으로, 예의 자신의 일생에서 '혁명을 몸소 주도했었던 자'로서의 혁명의 필요성을 주장하지요. 암튼!







​이 책의 서문엔 "두 사상가는 학술계의 은어나 논조를 사용하지 않았다"(p10)라 쓰여있거늘, 두 사상가10가 주고받은 글의 내용은 이해하기 정말 힘들었습니다. '혁명'에 관해 주고받은 이들의 <첫 번째 편지 : 반혁명을 초래한 혁명의 두 얼굴>은 위와 같은 내용으로, 은근 흥미롭게 읽어낼 수 있었더랬습니다만 --- 두 번째 편지부터는 저의 이해력을 내내 탓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더군요. 은근 자존심이 상해, 작정하고 여러 번, 특정 부분을 계속 읽으며 이해하려 했었음에도 끝내는 두 손을 들고 말 수 밖에 없었습니다. --;;







……………………………………………………………………



​​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마라'라는 전통적 원칙11을 '남이 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 시키지 마라'로 바꾸고자 합니다.(p196)



어제는 종원군 학교에서 '학급의 날'로 보냈다 합니다. 종원군의 반은 공포 영화를 보기로 했다더군요. 헌데! --- 종원이는 절.대.로 공포영화를 안/못봅니다. <해리포터> 시리즈도 무섭다고 안읽었었을만큼 무지하게 싫어하죠. 그래 선생님께 말씀을 드리고 혼자 운동장에 나와 핸드폰으로 음악을 듣고 있었답니다. (물론! 게임도 했었겠죠.) 그런데, 이게 문제가 되었네요. 핸드폰 사용금지 조항에 걸렸고, 선생님께서는 5일간 핸드폰 압수의 조치를 취하셨답니다. 종원군은 억울한 마음에 울었다 하더군요.







선생님의 핸드폰 압수는 당연한 거라 생각합니다. 여하한 이유로 한 명의 예외를 허용하다보면, 전체의 통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으니까요. 선생님께서 조교수에게 전화를 하셔서, 이러저러한 상황을 설명하셨고 양해까지 구하셨었다더군요. 저나 조교수나 그런 선생님의 제재조치에 그 어떠한 반감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만!!! --- 공포영화를 못보는/보기 싫은 학생은 그럼 어찌해야할까?라는 의문이 위 문장을 읽다보니 떠올랐습니다.







공포영화 보는 것이 반의 결정이기에, 즉 그것이 민주주의가 말하는 다수결의 결과이기에 무조건 따라야 한다라 말해지는 건 엄연히 '폭력의 정당화'일 뿐입니다. 복숭아 알러지가 있는 사람에게, 이것은 다수결로 결정된 과일이므로 무조건 먹어야 한다!라는 건 말도 안되는 거죠. 복숭아 이외의 과일을 선택할 권리가 없(어졌)다면, 복숭아를 먹지 않을/복숭아 먹기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는 반드시 주어져야 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종원군의 선택이 그 시간에 핸드폰으로 음악을 듣는 것이 잘못된 행동인 것임에는 저 역시 이견이 없습니다만, 또한 그 곳이 학교라는 교육의 현장이었기에 반의 결정이 공포영화 보는 것을 거부한 종원군의 선택에 대해 차마 옳다!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만! --- 그 녀석이 제 자식이어서가 결코 아니라,







"억압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p231)







​마오쩌둥의 이 말이, 이 상황에 적용시켜낼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확신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참 많은 아쉬움을 가지게 해주는 담임 선생님의 결정이 아니었나,하는 생각을 해보게만 됩니다. 이로써 --- 대체 이런 어려운 책을 왜 읽어야 하나,에 대한 스스로의 답변 하나를 찾아내게 되었지요. 거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해도, 단 하나만의 생각해 볼 꺼리를 찾아낼 수 있었다라는 거. 이것 역시, 적잖이 유익한 소득이긴 하겠습니다만, 이런 류의 책에 대한 호기심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라는 건 아주아주 오랫동안 제게 큰 상처로 남아있게 될 듯 하네요. 아 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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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살가죽 2016-06-18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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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를 이어준 서신(書信), 서신에 새겨진 희망




이 책은 중국과 프랑스의 두 학자가 2011년 한 회의에서 만난 이후 각자의 근거지로 돌아가 주고받은 메일 서신을 엮은 책이다. 서신은 6번(12편) 둘 사이를 오간다. 서로에 대한 탐색으로 시작되는 첫 편지부터, 세 번째 서신부터 토론 상대에서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친구로 대화가 깊어지다 아쉬운 헤어짐으로 마무리된다. 헤어짐이 여운과 아쉬움을 남길 수 있는 건 축복일 터이다. 그들이 다루는 주제와 내용은 다양하지만, 대략 네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1. 상실의 시대, 무엇을?

우리가 상실한 것은 무엇일까. 자오팅양은 ‘혁명’이라고 운을 뗀다. “혁명적 파괴는 반드시 혁명적 건설로 이어지지 않”으며 혁명의 격정이 지나간 뒤 “비천한 인성이 다시 모든 것을 재빠르게 원래대로 되돌려놓으며(23)” 늘 혁명을 후퇴시켰다고 말한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어린 시절 구경하기만 한 자오팅양은 혁명에 대해 비관적이다. 이에 프랑스 68혁명 당시 다른 나라(쿠바)의 혁명에 참여한 전력을 가진 레지 드브레는 “혁명이 인성을 바꿀 수 없다는 지적에만 동의”하며, 오히려 “인성이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기쁘고 안심할 일(52)”이라고 말한다. 오늘날 혁명의 환상은 ‘꿈’도 아니고 ‘유물’이며 ‘무서운 착각’일 수도 있지만 “용기를 북돋는 유토피아와 의욕을 띤 신념이 없다면 우리 사회는 그 자리에서 썩고, 극도로 무료하게 바뀌”고 말 것이라고 말한다. 혁명의 ‘상상임신’은 끝났지만,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이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두 사람 모두 나름 현실주의자임을 자처하지만 혁명에 대해서는 비관과 희망으로 나뉘는 지점이 흥미롭다. 두 사람의 내력만큼이나 프랑스와 중국이라는 현실 정치의 차이도 있지 않을까. 혁명을 살아낸 사람과 혁명을 문자로 배운 사람의 차이일까. 학문적 지향의 차이일까. 아니면 인간에 대한 신뢰의 차이일까. 이런 것들을 생각하게 되는 지점들이 그들의 대화를 흥미롭게 해주었다.



2. 인간본성과 민주주의에 대한 이견

자오팅양이 혁명에 대해 비관적인 것은 그가 지나치게 현실적이거나 이상적이라는 양면성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너무나 원하지만 완전한 상태로는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냉정한 현실감각 같은. 혁명을 대체한 키워드가 민주주의라는 레지 드브레의 주장에는 동의하면서도 그는 이마저 회의적이다. “사람들은 민주주의에 너무 높은 기대를 걸고 있는 것 같아요. 어떤 사람은 민주주의가 공공 선택을 이루는 기술적 수단의 하나일 뿐이고 가치가 아니라는 것을 종종 잊습니다. 민주주의라는 기술을 사용하면 좋은 공공 선택을 낳을 수도, 나쁜 공공 선택을 낳을 수도 있죠. 민주주의는 어떤 이익이나 가치관의 인질도 될 수 있습니다(79).” 이에 대해 레지 드브레는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해서만 동의한다. 그는 다시 희망적이다. “민주주의는 누구나 실현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야만을 막을 수 있어요. 민주주의를 통해 사회의 안녕을 이루고, 정권을 위해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즉 민주주의는 문명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입니다(95).” 레지 드브레는 자오팅양에게 “통일의 결여가 유감”이고 자신에게는 “과분한 통일, 균일, 모호함이 유감”이라고 응수한다. 아울러 “한 사람 한 사람을 완벽한 인간으로 보는 인류 개념은 하늘에서 내려온 선물이 아니라 이상적 기준(87)”이라고 덧붙인다. 나 역시 자오팅양에게 그 자신의 말을 돌려주고 싶다, “이상은 실현하는데 쓰이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측정하는데 쓰(24)”일 뿐이라고. 생물학적으로 20여년 차이가 나는 두 사람의 대화(書簡)는 어떤 대목에선 노학자(중견학자)의 입장에서 읽게 되고, 어떤 때는 노학자(중견학자)를 반박하면서 음미하게 된다. 그 사이 그들의 대화는 우정(書信)으로 발전한다.



3. 파키오facio와 관계이성, 그리고 우정

자오팅양은 ‘파키오’에 근간한 ‘사실의 철학’을 말한다. “논증의 기본 원칙이 ‘나는 행동한다, 고로 존재한다(facio, ergo sum)’임을 말하려 했습니다. 분명히 파키오는 유물론도 관념론도 아닙니다. 동시에 유물론이면서 관념론이라고도 할 수 있죠. 저는 그것을 ‘사물의 철학’이 아닌 ‘사실의 철학’이라고 부릅니다(104).” 그는 유물론과 관념론을 뛰어넘어 인류가 만든 역사에 초점을 두고 근대 세계를 설명하려고 한다. 이에 대해 레지 드브레는 ‘보편애의 정치화’가 다양성을 해치고 자유를 억압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이 우려에 대해 자오팅양은 ‘관계이성’과 ‘복수의 진리’ 개념을 통해 보편에의 재정의가 가능함을 역설한다. “관계 보편주의는 대개 유효한 관계만을 요구하기에 문화의 다원화에는 간섭하지 않아요. 사실 믿을 만한 상호관계가 있어야 다원적 문화와 언어에 대한 보편적 존중이 보장될 수 있죠. 저 역시 선생님처럼 다원적 문화를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세계를 상상합니다(112).” 우리 시대가 당면한 문제는 반드시 실천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그렇다면 자오팅양의 말처럼 우리는 행동함으로 존재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만남과 대화만큼 실천적인 행동이 있을까. 자오팅양과 레지 드브레가 보여주는 만남과 대화는 그 자체로 실천적 행위이다. 둘 사이에는 관계이성과 복수의 진리가 교류한다. “정의를 찾는 시간에 우리는 동지를 만날 수 있습니다. 진리를 찾을 때 친구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단언컨대 선생님은 제 친구입니다(136).”



4. 상실의 시대에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두 사람은 지구화시대의 궁극적이자 강력한 권력으로 ‘금융자본’과 ‘대중매체’를 지목한다. 지식인의 ‘브랜드화’는 피할 수 없고, 시민은 ‘기꺼이’ 고객이 되었다고 진단한다. “억압은 있지만 저항은 없는, 또는 저항할 수 없도록 하는 불가사의한 일을 해내고 이전의 모든 권력을 크게 앞서 나가기 때문입니다. 이 무한시장은 유일하게 인간에 대한 지배, 억압, 통치를 사람들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 방식으로 바꾸고, 저항의 가능성을 모조리 없애버립니다(232).” 이 무소불위의 세력에게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 레지 드브레는 “전력을 다해서 공인된 인물이 되어 사람들에게 그들의 말을 듣도록” 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지식인의 역할론이다. 지식인의 외침은 다른 사람에게 들려야 하고 어떤 네트워크라도 밀고 들어가 ‘광장의 집시’에 도달해야 한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미디어크라시(mediocracy)’이다. 한편 자오팅양은 민주주의가 데모크라시에서 ‘퍼블리크라시(publicracy)’로 변형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새로운 권력에서 기인한 인민의지의 집합인 ‘지배적인 전체의지’가 사회를 이끌 것이라는 것이다. 사실, 미디어크라시와 퍼블리크라시 개념/주장은 좀 미끄러진다. ‘정치적 정확성’과 모든 것을 회의하고 비판하는 자오팅양과 사상적 정교함과 세밀함을 지워버리고 잡음을 만들어내는 ‘교차모방’을 주장하는 레지 드브레가 서로 미끄러지는 것처럼. 미끄러지고 만나고 미끄러지고 이어지는 것에 길이 있을까. “살아가려면 불합리할지라도 희망이 반드시 필요한 법(227)”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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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는 책의 페이지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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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osk 2016-06-06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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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블리크라시 혹은 미디어크라시 시대의 도래




세월호 사고 때 많은 이들이 국가부재를 절감했다. 작게 줄어든 정부는 아무런 문제해결능력도 없었고 그럴 의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청와대는 콘트롤 타워가 아니라는 변명만 늘어놓았다. 그럼 왜 수시로 구조현장에 온갖 정보요청을 하여 일손을 뺏었던 것일까? 상징적 콘트롤 타워마저 되지 못한다면 무소불위의 권위를 누려야할 이유도 없어진다. 그 권위는 그러한 일을 하라고 주어졌던게 아닌가? ​​현대사회에서 국가란 대체 무엇일까?



​그런가 하면 미국 대선에서 막말을 쏟아내면서도 인기를 누리는 트럼프는 민주주의 제도를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한국도 몇 해 전에 이미 경험했다. 많은 시민들은 그 식욕 왕성한 기업적 정치인이 윤리성 제로라는 것을 알면서도 모두의 지갑을 불려 줄 것이라는 헛된 기대를 품지 않았던가? 선거를 통해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탄생시킨 ‘민주주의 제도’는 과연 가치 있는 것일까? 이런 사회를 만들려고 근대 초기 숱한 혁명가들이 그렇게 피를 뿌렸었던가?




혁명, 민주주의, 국가체계 등에 대해 프랑스와 중국의 대표 지성이 생각을 교환했다. 레지 드보레 교수와 자오팅양 연구원이다. 드보레는 체 게바라의 동지(혹은 배신자였거나)였던 전설적 혁명가이고, 중국 사회과학연구소의 연구원 자오팅양은 천안문 사태를 정점으로 하는 중국사회의 변화를 관찰해 온(혹은 구경꾼이었거나) 자칭 탁상공론가이다. 그는 과거 새로운 세계체계로써 전세계를 하나의 정치존재로 엮는 ‘천하체계’를 제안했었다. 2011년 프랑스-중국문화 원탁회의에서 처음 만난 이들은 서로에 대한 관심으로 이후 총12번의 편지를 교환한다.



동양과 서양, 행동가와 이론가라는 대립적 조합이 흥미를 돋운다. 그러나 노회한 혁명가 드보레는 혁명의 종말을 선언한다. 오늘날엔 이미 민주주의가 혁명을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칫 혁명은 ‘각종 독재와 전제주의 정권의 위장에 이용될 수 있다는 진단이 뒤따른다. 역사적으로도 권력 남용을 반대한 아나키스트의 봉기가 오히려 더 권위주의적인 정권을 만들어왔다. 나폴레옹, 스탈린, 마오쩌둥, 카이사르 또한 그러했다.



“많은 경우 개인 이성이 모인다고 해서 그것이 집단 이성이 되기는커녕 곧잘 집단 비이성이 된다(26쪽).”는 자오팅양의 지적에 “집단 이성이 보장되었다면 과학이 가장 비약적으로 발전한 20세기 전체에서 그렇게 많은 집단적 망상과 피비린내 나는 변고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127쪽)”라고 드보레는 화답한다. 자오팅양의 말처럼 결국 중요한 것은 ’변화‘가 아니라 ’어떻게 변하는가‘일 것이다.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인들은 신민에서 시민이 되었고 오늘날 다시 고객이 되었다(218쪽, 드보레)’. 드보레의 진단은 .전통적인 노동운동은 이제 소비자운동으로 바뀌고 있다는 가라타니 고진의 주장과 맥을 같이 한다. 그만큼 오늘날의 자본은 무시무시한 또 하나의 절대권력이 되고 있다. 그렇지만 폭스바겐이 미국에선 즉시 보상하면서도 한국에서는 미적대는 차별화의 못된 습성을 가졌다는 점에서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정치권력과 본질적으로 비슷한 특성이 있다.



이렇게 현대에 와서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민주주의 사회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 자오팅양은 세계화가 가져올 ‘무한시장’의 영향을 우려한다. 무한시장이 모든 이의 삶을 시장의존형으로 만들고, 사람들은 필요를 넘어서는 서비스에 젖어 기꺼이 무의식적으로 통치를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자오팅양은 그러한 사회에서 데모크라시에서 퍼블리크라시(publicracy)로 변형될 것이라고 보았고, 드보레는 미디어크라시(Mediocracy)로의 변화를 예측했다. 크게 다르지 않은 진단이자 각자의 문화권적 특성이 그대로 느껴진다.



고객이 된 시민, 지식인의 브랜드화에 대한 해법은 무엇일까? 드보레는 “공적인 인물이 되려면 사상적 정교함과 세밀함을 지워버리고 잡음을 만들어야 한다. 그날그날의 주제를 단순화된 어휘로 표현하고 반역을 가장해 쇼를 해야 한다(251쪽)”고 마지막으로 주문한다. 신문의 논단이든 칼럼이든, 인터넷 블로그이든 미디어크라시의 사회에서 고정적이고 지속적인 정치적 발화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드보레의 이러한 제언은 상실의 시대를 극복하기 위한 지식인의 역할을 알려줌과 동시에 자신이 걸어온 삶의 역정을 보여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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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이 2016-06-13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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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 편지로 혁명과 진실을 논하다

등록 :2016-05-19




중국 철학자 자오팅양(왼쪽)과 프랑스의 작가이자 매체학자인 레지 드브레. 두 사람은 2011년 국제학술대회에서 처음 만난 뒤 전자우편으로 혁명과 진실 등에 대한 토론을 진행했다. 메디치 제공
자오팅양과 레지 드브레
중·프 지식인들 주고받은 서신
이병한의 ‘반전의 시대’도 눈길
상실의 시대,
동양과 서양이 편지를 쓰다
자오팅양·레지 드브레 지음, 송인재 옮김
메디치·1만4500원

1966년 5월16일 마오쩌둥은 중국공산당 정치국 회의에서 ‘5·16 통지’를 내놨다. 요즘은 ‘10년 대참사’로 기억되는 문화대혁명(문혁·1966~1976)의 시작이다. 올해 문혁 반세기, 50주년을 맞아 뭔가 움직임이 있을 듯하지만, 중국 정부는 어떤 공식행사도 열지 않았다.

문혁의 상흔(트라우마) 탓일까. 중국의 대표적 지식인 가운데 한 사람인 자오팅양은 편지에서 “혁명적 파괴는 반드시 혁명적 건설로 이어지지 않는다”며 “혁명의 격정이 지나간 뒤 비천한 인성이 재빠르게 원래대로 되돌려 놓는다”고 했다. 현실론이자 비관론이다.

<상실의 시대, 동양과 서양이 편지를 쓰다>는 제목대로 자오팅양(65·철학자)이 프랑스의 지식인(작가, 매체학자)인 레지 드브레(76)와 주고받은 편지글을 묶은 책이다. 두 사람은 2011년 제1차 프랑스-중국 문화 원탁회의에서 처음 만났고, 당시 드브레가 먼저 편지로 더 깊은 대화를 나누자고 제안했다.

드브레는 청년 시절 카스트로의 초청을 받아 쿠바로 넘어가 혁명에 가담했고, 이어 체 게바라와 함께 볼리비아 혁명 투쟁에 투신했다. 생포됐고, 4년의 옥고를 겪었다. 양쪽의 공약수가 ‘혁명’인 까닭일까. 두 사람의 첫 대화는 혁명에 초점이 맞춰졌다.


먼저 자오팅양이 문혁 사례를 들어 혁명에 대한 신중한 태도를 위와 같이 밝힌다. 중국 고전 <역경>이 변화의 사상임을 지적하는 등 ‘싸구려 우파 논리’와는 격이 완전히 다르다. 이에 드브레도 ‘혁명의 쇠락’을 지적하면서 “혁명이 인성을 바꿀 수 없다”고 답장을 쓴다. ‘혁명의 상상임신’은 끝났다고 선언한다. 그럼에도 드브레는 “혁명은 현대사회 공간에서 희열에 도취하는 최후의 원천 중 하나이자 꿈을 이끌어내는 최후의 보루이다. 꿈에는 속임수도 있지만, 꿈 때문에 사람은 고무되고 행동한다”고 덧붙인다. 칠순의 지식인은 이윽고 “인간에게는 이상과 환상도 필요하다. 유토피아의 우울한 최후를 겪고도 계속 살겠다는 용기가 남아 있다면 어떤 유감도 없을 것”이라며 글을 맺는다.

책은 모두 6차례에 걸친 편지 왕래의 결과다. 첫 ‘대화’인 혁명 문제에 이어 민주주의, ‘관계이성’, 진실과 거짓 등으로 쟁점이 이동한다. ‘혁명의 무덤’이라고 하는, 혁명의 자리를 대신한 민주주의 문제에 들어서면 드브레의 인식이 빛난다. “민주주의의 본래 의미인 인민의 권력은 귀신에 홀린 헛소리로 변했다”면서도 “그렇다고 해도 그것을 대체할 것을 찾을 수 없다”고 못박았다. 자오팅양도 “민주주의가 공공선택을 위한 기술적 수단의 하나일 뿐이고 가치가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은 종종 잊는다”면서 생각의 깊이를 보여준다.

두 사람의 지적 대화는 종횡무진 여러 문제를 가로질러 권력의 문제에 이른다. 자오팅양은 “권력이 영원한 핵심 문제”라며 “전 지구화 시대의 궁극적 권력은 ‘무대 뒤의 권력’, 즉 금융자본, 신기술, 대중매체 등”이라고 지적한다. 지금은 혁명(이상 추구 행위)이 효력을 상실했지만, 현실에는 새로운 응전이 필요하다는 얘기일 터이다. 이에 드브레는 거짓과 진실, 그리고 상상의 문제로 답한다. 네 번째 편지인데 이 책의 절정이라 할 만하다. 드브레는 말한다. “한 국가를 이끌려면 반드시 꿈을 꾸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거짓말을 해야 합니다.” 이어 “진리의 내재적 효능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불합리하고 고정된 내용도 없는 영역에 뛰어들어야 합니다”라고 한다.

고수의 대화이기 때문일 것이다. 책에는 우리가 흔히 보는 명확한 주장과 이어지는 반대토론이 아니라, 깊은 성찰이 낳은 ‘화두’로 채워져 있다. 철학적 영감을 얻을 문장이 곳곳에 박혀 있다. 책의 프랑스어판, 중국어판 제목은 각각 <하늘과 땅 사이>와 <두 얼굴의 개념>이다. 생산적이고 상대편을 존중하는 지적 대화는 과연 어떠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모범사례이기도 하다. 반대로, 이런 화법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면 시선이 글줄에서 미끄러져 벗어날지도 모른다. 어느 한 곳에 명쾌한 결론을 내린 것도 없다.

자오팅양은 이 책에서도 자신의 ‘천하’ 개념을 지구적 대안으로 제시한다. 전작 <천하체계>(길, 2010)에서 제시했던 것으로, 드브레의 이에 대한 논평이 나온다. 중국과 유럽식 사고의 차이가 부각되는 대목이다.


한편, 천하 개념에 대한 ‘실전 문제 풀이집’으로 이번에 나온 <반전의 시대>(이병한 지음, 서해문집)를 찾아볼 수도 있다. 2012~2014년 ‘동아시아를 묻다’라는 제목으로 <프레시안>에 연재했던 글을 다듬어 묶었는데, 책 1부의 제목이 자오팅양의 그 ‘천하’이다. 동아시아의 철학과 정치자원을 활용해 서양식 근대의 한계를 돌파하자는 주장이 동아시아 정치질서의 구체적인 모습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발랄하고 자신감 넘치는 필체가 큰 장점인데, ‘차등’ ‘정의’ ‘민주주의’ 같은 중요 개념어에 대한 섬세한 사용이 아쉽다.

안창현 기자 blue@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744654.html#csidx67d52500d1fa7949cdc20fc70b6233e





베이징과 파리에서 까맣게 주고받은 ‘혁명’이란 두 글자
임지영 기자 iimii@kyunghyang.com


입력 : 2016.05.20 21:14 수정 : 2016.05.22 19:00인쇄글자 작게글자 크게


상실의 시대, 동양과 서양이 편지를 쓰다
자오팅양·레지 드브레 지음·송인재 옮김
메디치 | 272쪽 | 1만4500원



자칭 ‘혁명의 구경꾼’인 중국의 철학자와 ‘체 게바라와 어깨 겯고 싸운’ 프랑스 혁명가가 있다. 그 두 사람이 만나 논쟁을 벌인다면? <상실의 시대, 동양과 서양이 편지를 쓰다>는 여기서 시작된다.


2011년 프랑스·중국 원탁회의에서 처음 만난 자오팅양과 드브레는 ‘혁명의 복잡성’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역사, 진보, 이성, 인성 등으로 범주가 넓어진 둘의 얘기는 끝날 줄 몰랐고 시간 제한이 없던 토론은 장장 일주일 동안이나 이어졌다. 결국 회의 마지막 날 드브레가 책을 쓰자고 제안했고, 그렇게 두 사람이 못 다한 토론은 파리에서, 베이징에서 e메일로 다시 시작됐다.


자오팅양은 현실주의자다. 이상의 미명 아래 현실을 억지로 바꾸려는 중국의 혁명 실천에 반대한다. 그는 ‘그래서 결국 살기 좋아졌나’에 주목한다. 그는 “혁명이라는 행위는 구세계를 붕괴시킬 수 있지만, 마오쩌둥의 말처럼 세계를 ‘가장 새롭고 아름다운 그림’으로 그리기는 어렵습니다. 혁명적 파괴가 반드시 혁명적 건설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라고 혁명의 한계를 지적한다.


반면 드브레는 ‘그럼에도’에 방점을 찍는다.


“‘이상은 도덕적 상상일 수밖에 없다’고 왜 걱정하나요? 왜 ‘비이성적 집단행위’에 유감을 느끼십니까? 이것이 바로 지성주의입니다!(…) 혁명은 현대사회 공간에서 희열에 도취하는 최후의 원천 중 하나이자 꿈을 이끌어내는 최후의 보루입니다.” 하지만 그도 “인터넷과 컨테이너가 마르크스, 레닌, 마오쩌둥보다 훨씬 실질적으로 세계의 모습을 바꿨다”며 거대담론의 피로감과 이상 추구의 한계에 대해 공감을 표했다.



두 사람의 편지를 읽다 보면 서로 다른 지점에 서 있는 듯 보이지만, ‘새로운 혁명’에 대한 잠재적 지향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는 뜻을 같이 한다. 옮긴이의 말처럼 지금은 ‘혁명이 지나가고 민주주의가 흔들리는 시기’이다. 책은 어쩌면 두 지성이 편지를 가장해 세상에 던지는 전략적 비판인지도 모르겠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5202114015&code=960205#csidx3689b67804ac7e282f6919aceeaf64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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