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01

1912 박경철 중국농촌에 있어서의 혁명과 계몽의 변주곡 량수민



대산농촌재단 동아시아농업연수에 참여해 대만과 중국 남방을 다니고 있다. 마침 연수중에... - Kyong Cheol Park:





Kyong Cheol Park
Yesterday at 04:26 ·



대산농촌재단 동아시아농업연수에 참여해 대만과 중국 남방을 다니고 있다. 마침 연수중에 농정신문 칼럼을 써야해서 중국 농촌에 관한 글을 써봤다. 분량이 많아 좀 잘렸다고 하는데 원본을 올려본다. 중국의 3농문제는 여전히 현재 진행중이지만 여러 변화들이 있는 것 같다. 혁명과 계몽의 변주곡이 대륙에 울려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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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과 계몽의 변주곡

마오쩌둥은 오늘날의 중국을 세운 대단한 정치 지도자이지만 중국 사람들에게 그는 정치적 인물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중국 천안문 광장에도 그의 대형 초상화가 걸려 있듯이 오늘날 그의 위상은 한 사람의 정치 지도자 지위를 넘어 신의 영역으로 넘어간지 오래다. 중국 사람들은 마오쩌둥의 초상을 몸에 지니고 다니기도 하고 택시와 자가용에 걸고 다닌다. 가정집이나 사무실에도 그의 초상이 걸려있다.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을 겪으면서 몇 천만 명의 인민이 기아로 사망하고 1966-1976년 10년간 발생한 엄청난 국가적 혼란의 장본인이기도 하지만 중국 사람들은 그의 위대한 업적에 비한다면 그의 과오는 그럴 수 있는 실수쯤으로 받아들인다. 농민혁명을 통해 진시황 이후 중국 대륙을 하나로 통일한 그에게 인민들이 주어준 특별한 형태의 경배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마오쩌둥이 혁명을 하는 과정이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농민혁명과 신중국 건설 과정에서 그를 신랄하게 비판한 인물이 있었다. 다름 아닌 '향촌건설의 아버지' 량수밍(梁漱溟)이다. '최후의 유학자'라고도 불리는 그는 베이징대학 철학과 교수를 하다 거대 중국을 바꾸는 것은 단순 왕정체계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거대 중국 대륙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촌과 농민의 개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교수직을 박차고 나가 광둥성과 산둥성 농촌 현장으로 들어가 농민들과 함께 향촌건설운동에 몰두했다. 농민을 교육하고 농업생산, 신용, 판매 합작사(협동조합)를 만들어 농민의 자립과 자치를 도모했다.

마오쩌둥과 량수밍은 무력하고 부패한 청 왕조를 패퇴시키고 새로운 중국 건설을 갈구했다. 그리고 그 둘은 새로운 중국 건설의 목표를 농촌에서 찾았다. 하지만 둘 간의 중국사회 개조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a] 마오쩌둥은 중국 사회의 근본적인 모순은 오랜 봉건사회의 폐단으로 인한 계급모순, 즉 지주와 비지주 간 계급모순을 극복하는 것이 먼저 필요하다고 봤다. 그래서 농민 중심의 혁명을 위해 농지를 농민에게 균등하게 분배하는 정책을 단행했다. 그는 중국사회의 가장 큰 모순은 토지의 불평등한 소유로 봤던 것이다.

b] 반면 량수밍은 중국의 향촌사회의 계급문제는 중국 고유의 전통이기에 이러한 신분사회를 인정하고 이들에 대한 계몽을 통해 중국 개조하고자 노력했다. 향촌건설운동을 주도하면서 농민들의 자각과 자립을 촉구했다. 그래서 량수밍은 지주로부터 땅을 강제로 빼앗아 농민에게 분배하는 마오쩌둥의 혁명 방식에 대해 강력히 반대했다. 강제 토지분배 방식은 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의 희생을 부른다는 것이다. 실제 마오쩌둥의 토지분배 과정에는 토지가 많다는 이유로 수많은 무고한 지주들의 희생이 따랐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그러한 토지분배를 통해 혁명에 성공했다.

마오쩌둥은 드뎌 농민혁명을 통해 신중국을 건설했다. 하지만 신중국 건설하자마자 농민을 배제하는 정책으로 일관했다. 도시와 공업을 우선 발전시키기 위해 농민을 희생시켰다. 그래서 량수밍은 마오쩌둥을 만나 그의 실정을 성토하고 정책 수정을 요구했다. 둘 간에는 재털이가 던져질 정도로 격한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마오쩌둥은 자신의 방식을 바꾸지 않았다. 냉전이 시작되면서 서구의 재침략을 우려했고 그 자신이 서구를 쫓아가는 데 조급한 나머지 공업화를 위한 원시자본의 축적을 위해 농민의 희생을 강요했다. 오늘날 3농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여기에서 비롯됐다. 많은 혁명에서 보듯이 중국에서도 혁명의 자기 배반을 반복했다.

홍미로운 건 여기서 역사는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혁명의 시대가 가니 다시 량수밍의 사상이 소환됐다. 후진타오 시기부터 중국은 3농을 가장 중요한 정책 아젠더로 설정됐고 다시 신향촌건설을 시작했고 전국적으로 농민전업합작사가 만들어졌다. 량수밍이 실패한 향촌건설운동이 다시 부활됐다. 그 선봉에는 원톄쥔 전 중국인민대 교수가 나섰다. 지금은 그가 길러낸 수많은 향촌건설운동 제자들이 중국 전역해서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시진핑 정부에 들어와서는 신향촌건설운동, 향촌진흥을 넘어 생태문명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와 같은 농업과 산업 방식으로는 미래를 담보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의 발로였다. 지금 중국에서 생태문명건설은 시진핑 주석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비록 그것이 정치인의 수사라고 폄하할지도 모르겠지만 생태문명건설을 중국 헌법에도 명기하고 공산당과 정부에서 최우선 정책노선으로 설정한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처럼 생태문명건설이라는 문명사적 전환을 위한 아젠더는 내놓지 못하고 있지만 2010년 이후 새로운 협동조합법과 사회적경제 진흥을 위한 법이 제정되면서 우리나라 전역에 협동조합, 사회적기업, 마을기업 등이 만들어졌다. 마을주민 간 협동과 연대를 통해 자립과 자치를 도모했다. 따지고 보면, 중국이나 우리나라나 일제강점기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무너진 농민들의 자립과 자치가 다시 부활한 것이고 역사적으로 보면, 량수밍의 향촌건설이라는 100년의 숙제를 이제야 실행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로 인해 양극화와 불균형이 고도로 심화된 상태에서 협동조합운동, 사회적기업 등을 통해 과연 농촌이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드는 건 사실이다. 농업, 농촌, 농민의 문제를 농민의 자립과 자치라는 이름으로 그들에게 책임과 의무를 돌려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든다. 

기본적 생존권도 보장하지 않으면서 농민들을 빠져나올 수 없는 신자유주의의 구렁텅이에 빠트려놓고 그들 스스로 살아남으라고 방치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게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마오저뚱이 실행한 토지균등분배가 지금은 불가능하기도 하고 또 토지가 생존의 절대적인 요소는 아니기에 그의 혁명 방식을 오늘날 적용할 수는 없지만 마오쩌둥이 감행한 자산의 일정한 균등분배 방식이 오늘날 위기에 처한 농민에게 필요한 것은 아닐까 하는 하는 생각이 든다. 불평등을 연구하는 토마스 피케티은 기본소득을 넘어 기본자산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데 지금 생존 자체가 어려워 소멸의 위기에 있는 처한 농민에게 기본소득이든 기본자산이든 기본생존권이 보장되는 제도를 만들지 않으면 향촌건설이든 사회적경제든 새로운 운동과 제도는 실패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마오쩌둥과 량수밍, 100년 동안의 혁명과 계몽의 변주곡이 위기에 처한 동아시아 농촌에 더 크게 울러퍼지는 것 같다.




97Yuik Kim, Paik Yonjae and 95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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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ik Yonjae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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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ong Cheol Park Paik Yonjae 제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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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혜덕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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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혜덕 replied · 2 replies 5 hrs


柳東河 읽긴 읽었는데 너무 빽빽해서 어려웠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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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ong Cheol Park replied · 1 reply 7 hrs


송성일 잘읽었습니다. 토지 분배와 향촌건설, 사회적 경제와 생태문명, 기본 소득과 기본자산...다른 듯 같은 목적... 농민의 기본적인 삶을 사회적으로 보장하지 않고는 농촌 회생이 불가능하다는 말씀 깊이 새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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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ong Cheol Park replied · 1 reply 7 hrs


김재형 사회를 이해하는 양면성입니다.
혁명가와 지식인.
조화를 이루기 힘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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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ong Cheol Park 김재형 그러게요. 서로가 자존심이 강하다보니.. 그래도 조화를 추구해봐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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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곤 박교수님의 정문일침을 보면서 서울 아파트값 상승과 지방과의 괴리 신자본주의와 삶의 본질에 대하여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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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ong Cheol Park 김수곤 선생님 감사합니다. 농촌의 붕괴가 도시의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제 제자리를 찾을 때가 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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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g-a Chang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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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ong Cheol Park replied · 1 reply 7 hrs


김광직 두 방향의 병진이 필요할 것 같네요. 농민 계몽과 농촌 자립 그리고 그 토대를 제공할 농민기본 소득 제공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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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yu Moon Cheol 김광직 이론보다 발로 뛰어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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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h

Kyong Cheol Park 네 두 방향을 조화롭게 추구할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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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식 좋으신글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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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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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연구원 농촌농업연구부 책임연구원. 전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원 및 전문연구원(2003~07). 학부에서 농학, 석사에서는 지역사회개발을 공부하고 중국에서 사회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로 한국과 중국의 3농 문제를 연구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농민기본소득, 토종씨앗, 농민인권, 도농교류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농촌의 변화를 보다》(2006, 공저), 《2011 중국의 재발견》(2011, 공저), 《중국대륙에서 부르는 타이항산 아리랑》(2013, 공저) 등이 있고, 역서로 《이화림 회고록》(2015)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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