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22

알라딘: 친일과 반일의 문화인류학 최길성

알라딘: 친일과 반일의 문화인류학
친일과 반일의 문화인류학 - 유사종교 반일 민족주의를 말한다 
최길성 (지은이)
타임라인2020-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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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8쪽

책소개

한국인의 반일감정의 기원과 그 성격에 대해 문화인류학적 관점에서 고찰, 분석한 에세이집. 실증적 연구와 식민지기를 겪은 또 다른 국가 또는 사회를 비교 분석한다.


목차

초판 머리말

2020년 개정판에 붙이는 글



들어가는말

포스트 콜로니얼post colonial

식민

식민지 민족 이동

귀환 이동(return migration)

친일과 반일의 대립



제1장 항일과 반일

일제 잔재 청산

전국민을 항일 운동가로 만들기

항일과 반일

반일과 혐일嫌日

식민지 잔재와 민족주의

독립기념관

잔학상의 전시

결코 비판받을 수 없는 한국



제2장 해방 전의 반일

지식인의 친일화

한국 지식인의 친일

가미카제 돌격대의 유서



제3장 ‘일본 놈 앞잡이’

일본 마을의 탄생

어업의 발전

비상시국



제4장 전후 처리

일본인의 퇴거

신사神社의 파괴

학교 봉안전奉安殿 파괴

사쿠라(벚꽃)도 싫다

적산가옥 차지하기

마을에서의 친일과 반일

일본인과 친한 사람들

긍정적 평가

부정적 이미지

일본인은 섹스 애니멀



제5장 대통령 박정희의 친일 정책

생가를 찾아서

대통령 박정희에 대한 재평가

일본을 모델로

새마을운동

새마을운동의 기원

‘국민교육헌장’과 ‘가정의례준칙’

볍씨 품종 개량과 보급 사업

지방개량운동

농촌진흥운동

농촌진흥운동의 평가

새마을운동과 농촌진흥운동

박정희의 정책 모델은 일본



제6장 일제 청산의 폭력

언어 폭력

식민지 건축

대통령 김영삼의 철거 계획

풍수로 날조된 반일감정

단맥斷脈 설화의 허상

파괴 과정

풍수적 풍설로서의 여론

미신 타파 정책



제7장 기독교의 반일

국가와 기독교

기독교의 수용

재일 한국 기독교

한일 교회의 상호협력

신흥 종교



제8장 민족주의와 반일

왜놈 설에서 우리 설로

북한에서도 음력설로

해방 전의 민속학을 식민지주의로 비판

부락제가 일제에 의해 단절되었다는 담론



제9장 식민지의 비교

싱가포르의 관광버스

식민지 역사

시내 정기 관광버스

식민지 유적지 관광

래플스(Sir Thomas Stanford Raffles, 1781〜1826)

싱가포르 함락

대만의 식민지

대만만요슈(臺灣萬葉集)

구 만주의 식민지

연변대학의 박창욱 교수

일본해日本海의 표기 문제

사할린의 식민지

북한의 반일감정

평양대회 참가기

국가별 보고

일본 수상의 신사참배



맺음말

참고문헌



접기

책속에서

P. 20 식민지를 의식하지 못한 채 조선 땅에 건너와 일상의 삶을 살던 보통 일본인들의 충격이야말로 말할 수 없이 컸다. 그들은 한국인이나 일본인이나 이렇게 갈라서야 하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한 일반 서민층의 일본인들은 식민지를 거의 의식하지 않고 한국인과 함께 살고, 또 헤어졌던 것이다. 비교적 온화한 관계를 유지하고 살다가 해방이 되자 일본인과 한국인은 서로 적대 관계가 되었다. 종래 일본인 지배자와 한국인 피지배자의 관계였음이 드러난 것이고, 그것이 일본의 패전으로 한국인 승자와 일본인 패자의 관계로 바뀐 것을 의미한다. 기뻐 만세를 부르는 한국인들을 본 일본인들은 지금까지 얼마나 원한 서린 관계였던가를 깨닫고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접기

P. 29 한국에는 식민지라는 말을 오해하는 사람이 많다. 식민지라는 말이 싫다며 ‘일제강제점령기’ 또는 줄여서 ‘일제강점기’라는 새로운 말을 쓰고 있다. 일제가 얼마나 악독한 것인가 하는 느낌을 주는 말로 대체하고자 한 것이리라. 그러나 ‘점령’이라는 말은 대개 전쟁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차지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점령이라는 말은 식민지보다 정치적 군사적으로 식민지보다 가벼운 개념이고 잘못된 말이다.  접기

P. 47 그리고 일본인들이 쓰던 재산의 처리, 즉 적산敵産 매각 등 일제 잔재 처리 등이 행해졌다. 그러나 사실은 적산이 아니다. 한국은 일본을 상대로 전쟁을 한 승전국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일본 쪽에 서서 징용 또는 지원병으로 미국과 싸운 나라이다. 적산(enemy property)이라는 것, 시설 등의 구조, 건물, 법, 제도 등은 일제시대의 것이 모두 승전국인 미국의 것이다. 그 재산을 미군정을 통해 ‘불하拂下’라는 형식을 통해 손에 넣은 것이다. 귀속 재산이라는 명칭을 붙인 것이다. 결코 적산이 아니다. 일본인들의 재산이 미국으로 그리고 한국인들에게 그냥 주인이 바뀌었을 뿐이다. 일제 잔재라는 많은 것이 이런 것들이다.  접기

P. 55 반일감정이 변하려면 애국의 본질이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사회 전반이 국가 이익을 우선하거나 국민의식이 코스모폴리타니즘의 시민의식으로 변해야 바뀔 것이다. 해방 후 이 책을 다시 내는 지금 시점인 75년여가 지나면 식민지의 직접 체험자는 소수만 남을 것이며, 기억도 엷어져 갈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민족주의와 세계화가 교차하면서 반일감정은 증폭하고 있고, 극심한 반일감정의 터부가 엄존하는 한국적 상황에서 일본 정치가의 망언(?)을 필요할 때마다 문제시한다.  접기

P. 64 식민지 지배 국가들은 피식민지에 박물관을 설치했다. 지배자로서의 만족을 위해 박물관을 설치했을 뿐만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피식민지 국가도 자기 민족을 과시하려는 의도에서 박물관을 설치했다. 대개 이런 박물관은 현실을 은폐하기 위해서 전시를 한다. 그 유형은 두 가지 대표적 형태로 나타나는데 식민지 정부는 피식민지를 실제보다 원시적인 부분을 강조하고, 피식민지 정부는 식민지 지배국을 적대시하는 전시를 한다는 것이다.  접기

P. 90 1940년대 거문도에는 조선소가 5개소나 있었다. 김씨는 다니구치 조선소에서 일하면서 일본인들에게서 기술을 배웠다. 해방 후 그것을 살려 조선소를 차렸고, 아들이 조선 기술을 이어받아 경영했다. 일본인 어부들은 한국인 어부들과 어업 조합을 조직했다. 조합장의 선거나 어업 자금의 출자 등에서 민족 차별은 거의 없었다. 어업 조합이 주최하는 수영 대회에서도 한국인들이 수상하는 일이 많았다. 상품은 대개 의류였다. 그리고 거문도에서는 8명밖에 없는 ‘어업허가증’을 한국인들도 가지고 있었다.  접기

P. 113 해방 후 혼란한 와중에 일본인들의 재산을 소유한 사람들이 많았다. 어떤 사람은 일본인들이 싸게 파는 재산을 사거나 가로채서 재산을 늘렸다. 그런 사람들이 나중에 반일을 외치는 것을 보면 웃음이 저절로 나온다고 한탄하는 사람도 있었다. 일제 청산이라는 것이 이런 식이다.

P. 163 일본에서 지역적 특성에 맞게 품종 개량에 성공한 벼 품종들을 도입, 수원 종묘시험장 등에서 한국의 지역, 기후 특성에 맞게 개량함으로써 식민지 민중의 식생활 개선과 증진에 이바지했다. 또한 1920년대 중반부터는 군산항 등을 통해 대일본 미곡 수출이 활성화되며 농민들이 자본 이득을 취하는 등의 유사 이래 처음의 경험을 하기에 이른다. 물론 이러한 벼 품종의 개발과 개량, 그에 힘입은 증산과 수출에 대해서도 ‘식민지 수탈을 위한 과정’일 뿐이라며 일본과 식민 당국의 복리 정책과 노력을 폄하하고 호도하는 것이 또한 ‘한국적’ 상황이다.  접기

P. 172 우가키(총독)는 조선이 잠재력이 충분한 사회이자 조선인 개개인들의 능력 또한 뛰어나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1932년 9월 ‘농촌진흥회’를 설치한 이래 근로 정신 고취, 생활 개선, 소비 절약, 국기게양, 단발 장려, 색상 의복 착용, 영농 방법 개선, 부인의 야외 노동 권장, 나쁜 풍습·?습관 타파, 춘궁기를 탈피하기 위한 자주 자립, 자력갱생, 협동 공영 등 농촌 진흥을 위한 교육과 사회 운동을 병행했다.  접기

P. 186 박정희는 새마을운동을 시작할 때, 식민지 시기 조선총독부가 시행한 농촌진흥운동을 모델로 삼았고, 비록 단기적으로 그치고 말았지만 농촌진흥운동이 1930년대 조선의 농촌과 농민, 청년들에게 미친 영향과 성과를 크게 참고했을 것이라는 점은 마땅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박정희 자신의 청년 시기에 직접 체험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식민지 시대의 경험과 유산을 긍정적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던 남 다른 혜안과 용기를 지닌 리더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새마을운동은, 그 자체에 대한 평가에 앞서서 식민지 시대의 유산도 얼마든지 계승 발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도 그 가치는 재평가되어야 한다. 피식민의 원한을 활력과 발전의 동력으로 삼았다는 점에서도 박정희는 확실히 범인凡人과 달랐다는 것을 인정해도 좋을 것이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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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최길성 (지은이)

신간알림 신청

1940년(1938년) 경기 양주 출생

1963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학과 졸업

1966~69년 육군사관학교 교관. 육군 대위

1969~72년 문화공보부 문화재전문위원

1972년 일본 유학

1985년 츠쿠바대학 문학박사

경남대학교 계명대학교에서 일본학 교수

1991년부터 일본 중부대학 교수

1995년부터 히로시마 대학 교수. 현재 명예교수

2005년부터 일본 동아대학교 교수 겸 동아시아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재직 중

주요 저서
『恨の人類學』, 『韓國民俗への招待』, 『帝國日本の植民地を步く』, 『米軍慰安婦の眞實』, 『これでは困まる韓國』, 『哭きの文化人類學』, 『일제시대 한 어촌의 문화 변용』, 『한국 무속의 연구』, 『한국의 무당』 등 다수. 『米軍慰安婦の眞實』(2017)은 일본 국가기본연구소에서 주는 ‘일본연구특별상’ 수상.


주요 역서
『일본의 사회구조』, 『일본의 사회와 종교』, 『일본의 종교』, 『한국의 유사종교』, 『조선의 풍수』, 『시베리아의 샤머니즘』 등 다수. 접기

최근작 : <식민지 역사 바로보기>,<참새님의 학문과 인생>,<한국인의 조상숭배와 효> … 총 30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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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일제의 유산과 친일의 반석 위에 한국인이 건설해 온 대한민국 75년

한국인의 반일감정의 기원과 그 성격에 대해 문화인류학적 관점에서 고찰, 분석한 에세이집. 실증적 연구와 식민지기를 겪은 또 다른 국가 또는 사회를 비교 분석함으로써 일제 식민지기에 대한 한국인들의 부정적이고 폭력적인 이해와 통설에 이의를 제기한다. 또한 현대 한국의 건국과 이후 산업화와 고도성장의 밑바탕에는 조선총독부가 시행한 국리민복의 통치 전략이 자리 잡고 있음을 볍씨 품종 개량과 우량 볍씨 보급 사업, 어업 증진, 각종 산업시설과 인프라 조성 등의 배경을 통해 밝히고 있다.

‘들어가는 말’을 포함 모두 10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을 통해서 우리는 식민지기와 근대에 대한 왜곡과 오해, 그리고 자기기만으로부터 비롯하는 반일 민족주의의 위선적 실체와 폭력성을 보게 될 것이다. 그 위선과 폭력성은 ‘친일’, ‘친일파’를 끊임없이 가공해 냄으로써 자기 존재감과 위상을 가공해 온 반일 민족주의자들의 야만적 아이덴티티를 강화해 준다는 점에서 더욱 위험하다. 대만과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만주 같은 식민지 경험 국가나 사회와 우리의 일제 식민지기와 비교해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말의 위선과 허구를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 책을 통해서 확인하게 될 것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가공된 거짓말!

일본에 대해 결코 변하지 않는 한국인의 이율배반적 감정,

객관과 주관적 해석 사이에 갇힌 식민지기의 진실과 왜곡을 재조명함으로써

반일 민족주의의 유사종교적 속성과 그 야만성을 파헤친 문화인류학 보고서!

2020년 현재 한일관계는 최악의 상태에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 늘 그랬듯이 한국인은 그 이유를 과거사를 반성하고 사죄하지 않는 일본, 일본인들의 문제 때문이라고 습관처럼 말한다. 물론 습관성 거짓말이다. 일본은 1965년 수교협상 과정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천황과 역대 총리, 각료들이 한 공식 사과만 해도 39회*에 이른다. 가장 최근인 2015년 8월 14일 아베 신조 총리는 ‘전후 70년 담화(아베 담화)’를 통해서 과거사를 공식 사죄했다. 물론 그럴 때마다 한국의 집권 세력을 비롯한 정치권과 언론, 시민단체들이 한목소리로 사과의 진정성을 따지고 말꼬투리를 잡고 늘어지는 식으로 일본의 사과를 폄하하고 조롱, 모독하는 식의 언어폭력도 서슴지 않는다. 이 또한 습관성이다.

(*다음은 대한민국 외교부가 정리한 일본의 과거사 반성 언급 사례이다.

01. 시나 에쓰사부로 외무: 1965.2.20. 이동원-시나 공동성명

02.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 1983.1.11. 공식방한 만찬사

03.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 1984.8.4. 한국언론인 방일 회견

04. 히로히토 천황: 1984.9.6. 전두환 대통령 국빈방일 만찬사

05.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 1984.9.7. 전 대통령 국빈방일 오찬사

06. 다케시타 노보루 총리: 1989.3.30. 중의원 답변

07. 우노 소스케 총리: 1989.6. 중의원 답변

08. 가이후 도시키 총리: 1989.10. 중의원 답변

09. 나카야마 다로 외무: 1990.4.26. 중의원 답변

10. 나카야마 다로 외무: 1990.4.30. 한·일 외무장관회담

11. 아키히토 천황: 1990.5.24. 노태우 대통령 국빈방일 만찬사

12. 가이후 도시키 총리: 1990.5.24. 노 대통령 국빈방일 정상회담

13. 미야자와 기이치 총리: 1992.1.16. 공식방한 만찬사

14. 미야자와 기이치 총리: 1992.1.17. 공식방한 국회 연설

15.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 1993.8.10. 기자회견

16.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 1993.8.15. 전몰자추도식

17.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 1993.8.23. 국회 시정연설

18.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 1993.11.6. 경주 실무방문 정상회담

19. 아키히토 천황: 1994.3.24. 김영삼 대통령 국빈방일 만찬사

20. 하타 쓰토무 총리: 1994.5.10. 소신표명 연설

21.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 1994.7.18. 소신표명 연설

22.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 1994.8.31. 총리 담화

23. 중의원: 1995.6.9. 중의원 부전(不戰) 결의

24.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 1995.8.15. 전후 50주년 특별담화

25.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 1996.1.22. 국회 개원시 시정연설

26.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 1996.6.23. 제주 방문시 정상회담

27. 아키히토 천황: 1998.10.7. 김대중 대통령 국빈방일 만찬사

28. 오부치 게이조 총리: 1998.10.8. 김 대통령 국빈방일 공동선언 등

29.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2001.10.15. 서대문독립공원 방문 연설

30. 마치무라 노부타카 외무: 2004.4.13. 독도특위위원단 방일 접견시

31.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2004.4.22. 아시아·아프리카 정상회의 연설

32. 아베 신조 총리: 2007.3.11. NHK ‘일요토론’ 위안부 관련 사죄 발언

33. 아베 신조 총리: 2007.3.26. 참의원 예산위, 위안부 관련 사죄 발언

34. 아베 신조 총리: 2007.4.23. 관저출입기자단 인터뷰, 위안부에 사과

35. 아베 신조 총리: 2007.4.27. 미·일정상 공동기자회견, 위안부에 사과

36.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 2009.10.9. 방한 한·일 정상 공동기자회견

37. 오카다 가쓰야 외무: 2010.2.10. 방한 한·일 외교장관 공동기자회견

38. 간 나오토 총리: 2010.8.10. 강제병합 100년 내각총리대신 담화

39. 아베 신조 총리: 2015.8.14. 전후 70년 담화(아베 담화), 과거사 사죄)

▒ 출처: 대한민국 외교부




그러나 시계바늘을 20년 전으로 돌려 보자. 1998년 국민의정부 등장과 함께 일본 문화가 전면 개방되고, ‘2002 한일월드컵’에 힘입어 한일 관계는 유례類例없을 정도로 개선됐다. 인적 물적 교류가 활발해졌고, 양국민은 상호 방문과 관광을 즐기며 자유주의 국가들 간의 친선과 우호의 이상적인 모델을 만들어 갔다.

문제는 언제나 그랬듯이 한국의 집권 세력과 여야를 망라한 정치권이었다. 한국의 대일 관계는 정권에 따라서 냉탕과 온탕을 오갔다. 한국의 집권 세력에게 일본은 언제나 정략의 유용한 소재거리다. 또한 일제 식민지 시대는 정치권과 언론, 지식인 집단에 의해 시간적 거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민족적 원한과 피해의식으로 증폭되어 왔다. 언론은 일제 식민지기에 친일 부역의 혐의가 짙을수록 반일감정을 부추겼다. 단적인 예로 언론이 독도 영유권 문제와 일본 정치인들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비난하면 정치권은 그에 즉각 응답하며 대중의 반일감정을 선동하는 식이다.

조선총독부 정책은 국리민복을 지향했다

이 책은 한국인의 반일감정의 기원과 그 위선과 허구, 모순과 기만적 속성을 문화인류학의 관점에서 분석, 비판하고 있다. 저자는 한국인의 반일감정과 식민지기 일제의 역할에 대한 사실 관계가 얼마나 왜곡되었고, 반일감정은 어떻게 한국인의 정체성을 오도誤導, 왜곡하고 지배해 왔는가를 이야기한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서 일관되게 말하고자 하는 바는 수탈과 학정의 일제시대가 아니란 사실이다. 조선을 합병한 일제는 총독부를 내세워 식민지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시행한다. 일제는 식민지 통치를 위해서 한국의 법, 제도, 관습, 종교, 문화에 대한 조사를 실시했다. 역사학, 사회학, 경제학, 고고학, 인류학, 민속학 등 많은 연구자들과 행정가들이 식민지 한국의 토지나 재산 등에 대한 법률과 풍속, 관습 등을 조사 연구했다. 식민지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일본의 식민지학은 서구 열강의 그것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그 정책들은 철저하게 일반 대중, 민중을 대상으로 한다. 토지 측량과 정비 사업이 그랬고, 도로와 하천 정비를 통한 생활환경의 개선, 개인과 부락의 위생환경을 개선해서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홍보와 지원 정책을 적극 펼쳤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이 저자가 2020년 증보 개정판에 수록한 한일합병을 전후한 시기부터의 볍씨 품종 개량과 보급 사업이다. 경술합병으로 한국을 실질 통치하게 된 조선총독부는 본국 정부로부터 막대한 예산과 인력, 기술을 끌어들여 다방면에 걸쳐 개혁과 혁신을 서두른다. 그 중에서도 중점 부문이 볍씨 품종 개량 사업이었다. 기존 조선의 벼 품종은 대가 가늘고 키가 커서 풍수해에 취약한데가 이삭당 달린 알곡 숫자마저 이후 개량, 도입 품종들에 비해 턱없이 적었다. 병충해와 한발, 냉해에도 약했다. 그렇게 생산된 쌀의 절대 몫마저도 양반 지주들의 소작료로 주고 나면, 농민들 몫은 사실상 전무하다시피 했다.

근대(近代, mordern)를 향해 열린 창으로서의 일제시대

조선총독부는 토지 측량과 경지 정리를 통해서 농지 소유관계를 명확히 했다. 그와 아울러 일본에서 한국의 기후 조건과 토양에 맞는 우량 벼 품종을 선별해서 들여와 시험재배에 성공했을 뿐 아니라 품종 개량에도 적극적이었다. 지주들뿐 아니라 소작인들까지 처음에는 우려하며 거부했으나 소작료 감면 등의 인센티브 등에 힘입어 재배한 결과 큰 성과를 거두게 된다. 이렇게 되자 전국 각지의 지주와 농민들이 우량 품종 보급에 앞장서며 1910년대 중반을 넘어설 때쯤에는 벼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늘어난다.

쌀 증산의 결과는 조선에서의 수요를 넘어 산지보다 비싼 값에 식민 본국인 일본에 수출길이 열리게 했다. 농업생산물로 자본을 획득, 축적하게 되고 투자를 통한 산업 기반을 조성하게 되는, 한반도 사람들로서는 역사상 유례없는 새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일제시대는 그렇게 한국인들에게 근대를 향해 열린 창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패전과 일본인의 귀환으로 근대를 향해 열린 창이 한순간 닫히게 되는 상황을 저자는 거문도의 사례를 통해서 보여 준다.

일제가 물러갔지만 한국인의 일상을 지배하는 것은 식민지의 잔재였고, 신생 독립국 대한민국의 사회 시스템과 인프라는 조선총독부의 유산이었다. 그 잔재와 유산은 전쟁으로 인한 파괴와 가난, 정치적 혼란의 시기를 지나 군사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에 의해 경제개발 5개년계획과 새마을운동, 국민교육헌장과 가정의례준칙 등으로 계승됐다. 다시 말해서 한국의 고도성장과 산업화의 토대는 일제시대, 즉 조선총독부 통치기에 태어나 성장하고 근대 교육과 문명의 세례를 받은 세대의 경험과 근대인으로서의 자질이 그 바탕이었음을 조명하고 있는 것도 이 책을 눈여겨봐야 할 이유이다.

코스모폴리타니즘의 시민의식으로 현재의 일본과 마주해야!

그렇다면 한국인의 반일감정의 실체는 무엇일까? 식민지 시기가 마무리 부정적이라고 해도 그런 중에도 사람은 살아가기 마련이다. 통치하러 온 조선총독부 관헌이나 식민으로 온 보통 일본인들이나 마찬가지로 식민지의 한국인들과 부대끼며 살았고, 조선의 구습을 타파해야 하는 이면에서는 한국인들의 관습에 자신들을 맞추어 살아가야 하는 생활인들이기도 했다. 이 말은 곧 일제시대라는 시공간 안에서의 한국인들에게 반일감정이 자리 잡을 특별한 이유가 없었고, 있더라도 어디까지나 한국인들끼리의 문제였을 가능성이 컸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반일감정이란 것이 있었다면 그 시기에 일본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익을 취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갈등, 경쟁에서 밀려난 자들의 미움과 원한의 감정이 그 단초라는 것이다.

저자는 또한 한국인의 반일감정이 식민지 시대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해방 후 시간이 흐르고 식민지의 경험으로부터 멀어져 갈수록 극심해지는 한국인의 반일 민족주의는 그 자체로 종교적 속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또 다른 일제 식민지였던 대만과 구 만주국, 싱가포르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영국의 식민지였던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 같은 나라들을 비교문화인류학적으로 분석함으로써 한국 사회의 반일감정이 여타의 식민지 경험 국가 또는 사회와는 완전히 다른 속성을 갖고 있음을 밝힌다.

그것은 반일 민족주의로 규정되며, 반일 민족주의는 하나의 신앙체계로써 한국인의 의식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유사종교 또는 사이비종교라는 뜻이다. 일제가 조선의 맥을 끊기 위해 풍수상 주요 암봉岩峰과 혈맥마다 철주(쇠말뚝)를 박았다는 주장이 단적이다. 이성적 논리 체계가 아니라 무속(샤머니즘)이자 우상 숭배와 금기의 토테미즘이다. 무속과 우상 숭배는 민족적 정체성을 형성해 냈고, 금기와 터부는 끝내 구 조선총독부 건물의 폭파, 해체라는 폭력적 결과로 이어졌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반세기를 훨씬 넘어 일제 식민지기를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 의해 더욱 극렬해지고 있는 반일감정의 파고이다. 저자는 일본에 대한 우리 안의 콤플렉스를 넘어 개방된 태도로써 현재와 미래의 일본과 마주할 것을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 권하고 있다.

이 책의 구성과 내용 소개

이 책은 ‘들어가는 말’을 포함해서 모두 10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들어가는 말을 통해서는 식민과 식민지 일반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그 경험이 삶과 의식을 지배하는 후기 식민주의, 즉 포스트 콜로니얼 현상에 대해 한국 사회의 ‘친일’과 ‘반일’의 대립, 그 중에서도 자기 존재감의 부각을 위한 기재로써의 반일감정과 반일 민족주의에 대해 다룬다.

1장 ‘항일과 반일’에서는 한국 사회에서의 일제 잔재 청산이 갖는 함의의 이중성과 기만적 속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일제 식민지기에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으면 모두가 민족 배신자라는 프레임으로 ‘친일파’를 가공하며, 그 친일파들이 왜 나쁜 존재들인지를 식민지기의 어두운 면과 잔학상을 전시하는 한편으로 그 시대의 상징물을 파괴, 청산하는 이미지 조작을 통해 부각시키고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4장 ‘전후 처리’의 폭력성, 야만성과 아울러 소위 적산가옥을 차지하기 위한 부도덕하고 비열한 처신의 인간 군상들이다. 일본인들이 조성하고 가꾼 좋은 것, 남기고 갈 수밖에 없는 귀한 것들을 차지하기 위한 아귀다툼 속에는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적개심의 강도가 생대적 평가 기준으로 작용했다. 일본인과 친했던 사람들은 당연히 친일파 낙인을 감수하며 입을 닫고 살아야 했음은 주지하는 바이다.

‘대통령 박정희의 친일 정책’에 대해 다루고 있는 5장에서는 박정희의 구미 생가 방문을 통해서 그가 지도자로 성장하는 데 있어서의 자연지리적, 풍수적 속설의 상관관계부터 살펴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식민지기 박정희의 아이덴티티는 한일합병 후 태어난 세대의 독립적 가치관과 미래지향적 세계관의 내면화라는 점에 저자는 초점을 맞춘다. 즉, 박정희를 비롯한 한일합병 후 태어난 세대는 원하든 원치 않든 일본이 자기 나라였고, 자신의 꿈과 이상을 펼치고 그것을 실현해 줄 나라 또한 일본이었다는 것이다.

일제 청산 과정의 폭력에 대해 다루고 있는 6장은 식민지기 경험이 바탕이 된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언어폭력의 속성,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 한국인의 의식과 정서를 지배하는 메커니즘에 대해 살펴보고 있다. 특히 풍수로 날조된 반일감정은 구 조선총독부(해방 후 중앙청에 이어 국립박물관으로 사용) 건물의 폭파, 해체를 통해서 그 폭력의 반달리즘 속성마저 여과 없이 드러냈음을 신랄하게 짚고 있다.

제7장 ‘기독교의 반일’에서 우리는 기독교의 수용과 일제 식민지기 기독교의 위상과 역할을 통해서 한국인들에게 ‘민족적’ 각성을 통한 해방을 주창함으로써 한국인에게 ‘민족주의’ 관념이 등장하게 되는 과정을 살펴보고 있다.

제8장 ‘민족주의와 반일’에서는 한국의 민속을 일제가 단절시켰다는 주장과 해방 전의 민속학을 식민지주의로 비판하는 한국학계의 무지와 반지성적 행태를 비판한다. 전통과 관습조차도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갈라 좋은 것은 민족적 우월함으로 포장하고, 나쁜 것은 일제 식민지 탓으로 떠넘기는 유아적 태도까지도 반일 민족주의자들의 존재 방식이다. ‘학문 연구에서 민족주의가 비판받아야 하는 이유는, 민족주의가 객관적 방법론이 아니라 한韓민족 문화를 다른 문화보다 우월하게 보거나 그것을 보유하고 있는 한민족을 사랑하는 애국주의를 명분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의 민족주의는 일제 식민지 시대를 준거로 삼고 반일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p. 237) 그 연장선상에서 반일은 내 편, 친일은 일본 편이라는 이분법적 흑백논리는 한국 사회의 미성숙 정도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식민지를 겪은 국가와 사회를 비교 분석하고 있는 9장에서는 대만과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구 만주국 같은 국가나 사회의 식민지기를 비교해 보는 것만으로도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말을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한국인의 나이브naive한 역사의식을 비판한다.

반일감정, 반일 민족주의야말로 매국 행위

‘죽 끓듯 하는 반일 여론을 선동해서 등에 업고 대일 외교를 펼치는 것만큼 어리석고 국제 관계에서 위험천만한 것도 없다. 반일감정을 앞세운 문재인 정부의 대일 외교는 그 자체로 동아시아에서 한국의 고립을 자초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자유세계와의 지속적 협력 관계마저 난관에 빠뜨리는 결과를 낳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pp.309~310)는 충고는 저자의 진심 어린 조국애의 메시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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