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기 (가수)
김민기 金敏基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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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출생 | 1951년 3월 31일(73세) 대한민국 전라북도 이리시 (現 대한민국 전라북도 익산시) |
성별 | 남성 |
직업 | 가수, 작사가, 작곡가, 뮤지컬 기획자, 뮤지컬 연출가, 뮤지컬 제작자 |
장르 | 포크 음악 |
활동 시기 | 1970년 ~ 현재 |
악기 | 기타 |
김민기(金敏基[1], 1951년 3월 31일 ~ )는 대한민국의 가수, 작사가, 작곡가, 편곡가이며 극작가, 연극연출가, 뮤지컬 기획자, 뮤지컬 연출가, 뮤지컬 제작자이다. 한 시대를 이끈 가수이자 예술가로 찬사받고 있는 인물이다. <아침 이슬>의 작곡가로 유명하며, 2002년 고별 음반 《김민기 전집》을 발표 후 가수 은퇴를 선언하고 뮤지컬 제작에만 전념한다[2]. 포크 팝 가수 한대수, 산업디자이너 김영세 등과 절친한 관계이며 포크 팝 가수 양희은, 연극배우 양희경 자매와도 친분이 두텁다. 가수 조용필은 그를 "진심으로 인정한다"면서 "자신의 길을 일관되게 간다는 것만으로도 존경한다"라고도 했다[3].
생애[편집]
전라북도 이리시에서 출생하여, 지난날 한때 전라북도 익산군 함열읍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초등학교 입학 직전에 서울로 이사하였으며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재학 중 ‘도비두’라는 그룹을 결성하여, 노래 활동을 시작했다. 그 무렵 재동초등학교 동창인 양희은을 만나게 되면서 〈아침이슬〉을 주게 됐고, 1970년에 발표됐다.[4]
1972년에는 서울대 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서 〈우리 승리하리라〉, 〈해방가〉, 〈꽃 피우는 아이〉 등을 부르다 경찰서에 연행됐으며, 그의 앨범 및 노래는 모두 방송금지 조치됐다. 이후 김민기는 시인 김지하와 조우하게 됐고 야학 활동을 벌여나가기도 했다. 1973년 김지하의 희곡 〈금관의 예수〉를 노동자들과 함께 공연했던 그는 국악인들과 교유하여 다음해 〈아구>를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4]
1977년 군 제대 이후 양희은의 〈거치른 들판의 푸르른 솔잎처럼〉을 발표했고, 동일방직 노조 문제를 다룬 노래굿 〈공장의 불빛〉을 발표했다.[4]
1980년에는 문화 체육관에서 7년의 긴 공백을 깨고 공연을 펼쳤고 1983년에는 국립극장에서 탈춤과 판소리 등 소리굿 공연을 가졌다. 1987년에는 탄광촌 이야기를 담은 〈아빠 얼굴 예쁘네요〉를 발표했고, 1991년 학전(學田) 소극장을 개관한 그는 1993년 22년 만에 독집 앨범을 발표했고 '겨레의 노래' 사업을 추진했다. 이후 뮤지컬 〈개똥이〉와 〈지하철 1호선〉 등 의욕적인 연출 활동을 했다.[4]
개관된 극장을 ‘학전블루소극장’으로 두고 1996년 ‘학전그린소극장’까지 열면서 전성기를 맞았다. 하지만 2010년 이후 공연시장의 중심이 대극장 뮤지컬로 바뀌면서 대학로 소극장 관객은 점점 줄어들었다. 2013년 그린소극장이 먼저 폐관됐다.
학전은 재정난 및 김민기 대표의 위암 투병으로 33년 만인 2024년 3월말 폐업됐다. [5] [6] [7]
학력[편집]
평가[편집]
그가 작곡하고 부른 노래는 힘들고 지친 빈민층을 사랑하고 그들을 대변하는 곡들이 많다. 그의 곡 〈아침이슬〉은 1970년대의 저항가요였지만 1990년대까지 오면서 20여 년 동안 그 민주정신을 이어갔다고 평가된다.[4]
작품[편집]
뮤지컬[편집]
- 록뮤지컬 <지하철 1호선> 번안, 연출 (94-08/18-19)
- 록오페라 <개똥이> 작사/곡, 연출 (95,97,06)
- 록뮤지컬 <모스키토> 번안, 연출 (99,00,04/17-18)
- 뮤지컬 <의형제> 번안, 연출 (98,00,01)
- 학전어린이무대 <우리는 친구다>, <고추장 떡볶이> <슈퍼맨처럼-!>, <무적의 삼총사> 번안, 연출(04-20)
- 학전어린이무대 <그림자 소동> 각색, 연출(08)
- 뮤지컬 <분홍병사> 번안, 연출(10,13)
- 뮤지컬 <도도> 극작, 연출(10-11/20)
연극 및 기타[편집]
- 소리굿 <아구> 극본 (74)
- 노래극 <공장의 불빛> 작사/곡 (78)
- 연극 <멈춰 선 저 상여는 상주도 없다더냐> 극본, 연출 (83)
- ‘겨레의 노래’ 총감독 (91)
- 학전어린이무대 <진구는 게임 중> 각색, 연출 (08-17)
- 학전청소년무대 <복서와 소년> 번안, 연출(12-14)
- 학전어린이청소년무대 <유령놀이> 극작, 연출(14)
- 영상노래극 <아빠 얼굴 예쁘네요> 극작, 연출 (16-20)
음반[편집]
- 《김민기》 [1971]
- 친구
- 아하 누가 그렇게
- 바람과 나
- 저 부는 바람
- 꽃 피우는 아이
- 길
- 아침이슬
- 그 날
- 종이연 (혼혈아)
- 눈길 (경음악)
- 《김민기 1》 [1992]
- 가을 편지
- 내 나라 내 겨레
- 두리번거리다.
- 꽃 피우는 아이
- 아침 이슬 - 연주곡
- 아침 이슬
- 잃어버린 말
- 아름다운 사람
- 그 날
- 친구
- 잘가오
- 《김민기 2》 [1992]
- 새벽 길
- 나비
- 길
- 혼혈아
- 그 사이
- 고향 가는 길
- 철망 앞에서
- 눈산
- 차돌 이내몸
- 아무도 아무데도
- 바다
- 《김민기 3》 [1992]
- 상록수
- 기지촌
- 가뭄
- 식구 생각
- 서울로 가는 길
- 늙은 군인의 노래
- 강변에서
- 주여, 이제는 여기에 (연극'금관의 예수'중에서)
- 소금땀 흘리흘리, 땀 흘려 거둔 음식 (노래극'개똥이'중에서)
- 《김민기 4》 [1992]
- 《아빠 얼굴 예쁘네요》 [1987]
- 《엄마, 우리 엄마》 [1988]
- 《Past Life Of 김민기 (6CD Box Set)》 [2004.10.21]
- 《공장의 불빛》 [2004]
수상 경력[편집]
- '20 호암문화재단 호암상 예술상 수상 (김민기 대표)
- ’18 한국대중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 (김민기 대표)
- ‘16 월간 한국연극 선정 ‘2016 공연 베스트 7 <우리는 친구다>’
- ’14 제8회 한독협회 이미륵상 수상(김민기 대표)
- ’14 제11회 아시테지 연극상 수상
- ’13 제10회 한국대중음악상 특별분야 공로상(김민기 대표)
- ’13 장애인먼저실천상 우수실천상 수상 <슈퍼맨처럼-!>
- ’10 월간 한국연극 선정 ‘2010년 공연베스트 7’ <분홍병사>
- ’09 월간 한국연극 선정 ‘2009년 공연베스트 7’ <무적의 삼총사>
- ’08 월간 한국연극 선정 ‘2008년 공연베스트 7’ <고추장 떡볶이>
- ’08 대한민국연극대상 아동청소년연극상 <고추장 떡볶이>
- ’08 서울어린이 연극상 우수상 <고추장 떡볶이>
- ’07 독일연방공화국 문화훈장 괴테메달 수상(김민기 대표)
- ’05 파라다이스 문화재단 파라다이스상 수상(김민기 대표)
- ’03 제1회 외신공로상 공연부문 <지하철 1호선>
- ’01 제37회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분 대상 및 연출상 <의형제>
- ’00 제6회 한국뮤지컬대상 특별상
- ’99 제35회 동아연극상 작품상 <의형제>
- ’98 한국연극협회 <98 우수공연5> 단체상, 번안상 <의형제>
- ’96 서울연극제 특별상 <지하철 1호선>
- ’95 한국평론가협회 연극상, 백상예술대상 음악상 <개똥이>
언론 보도[편집]
김민기는 가수 생활을 은퇴하고, 1991년 극단 학전을 개관한 이후, 언론 등 공식 석상에 얼굴을 잘 비추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2000년 이후로, 김민기의 인터뷰 내용을 담은 언론은 한겨레 신문 보도와 JTBC 뉴스룸 인터뷰가 유일하다.
특히 JTBC 뉴스룸은 최초(이자 마지막) 방송 출연 인터뷰이다,
2015년 한겨례 인터뷰[편집]
이진순의 열림 ‘아침이슬 그 사람’ 김민기[편집]
[1편][편집]
1970~80년대 청년 문화의 원형을 만든 인물이자 노래와 연극, 문학을 아우르며 한국 문화의 새 지평을 연 르네상스적 인간. 나이 만 스물에 지은 ‘아침이슬’이 평생 꼬리표가 된 사내. 김민기 극단 학전 대표를 수식하는 말은 그가 지나온 험한 세월만큼이나 많다. 1991년 개관한 소극장 학전은 황정민, 조승우, 설경구, 방은진 같은 이를 배출한 한국 문화계의 산실이자 가수 김광석이 숨지기 전 1000회 공연을 한 곳이다. 김 대표가 직접 연출한 <지하철1호선>은 2008년 종연 때까지 15년간 71만명의 관객을 불러모으며 4000회나 공연된 국내 최장수 뮤지컬이 됐다. 지난 10여년간 고집스레 청소년극과 아동극에 공을 들이고 있는 김 대표는 공연 홍보 등을 제외하곤 속내를 털어놓는 긴 인터뷰를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한겨레> 토요판 인터뷰 코너 ‘이진순의 열림’의 초대에 응한 그는 네 차례에 걸쳐 무려 15시간 동안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가 인터뷰 내내 가장 강조한 말은 ‘돈 안 되는 일’이었다. 사진은 지난달 24일 첫 인터뷰 때의 모습이며, 다음주에는 제2회가 실린다. (생략...)
원문: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685444.html
[2편][편집]
학전이 세 든 건물에 위치한 김민기의 사무실은 극단 대표의 집무실이라기보다는 은거하는 수도자의 토굴 같았다. 91년 학전 개관 때부터 지금까지 그가 기획하고 제작한 각종 공연물 자료와 참고서적이 사람 하나 겨우 지나다닐 만한 통로만 남겨두고 천장까지 가득 찼다. 높다란 책장이 창을 가려 볕도 제대로 들지 않는 안쪽 구석, 두어 평 남짓한 공간에 그의 책상과 컴퓨터, 간이침대가 놓여 있었다. 1985년 아동극 준비 과정에서 만난 이미영과 결혼한 뒤,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지만 그는 주말에도 사무실에 틀어박혀 지낼 때가 많다고 했다. 가정적인 아빠는 못 될 것 같은데 학전 안에서는 ‘아들 바보’로 소문이 나있다고, 곁에 있던 직원 하나가 귀띔을 해준다. 아버지의 미술적 재능을 물려받은 덕일까? 아들 둘 모두 건축과 디자인을 전공해서 대학 졸업 뒤 디자인회사를 차리더니 요즘 “발바닥에 땀나도록 뛰어다닌다”고 말하는 김민기의 말투에도 은근한 아들 자랑이 묻어난다. 비좁은 공간에 어지럽게 놓인 물건들을 대충 치우고 앉을 자리를 만들어 김민기와의 2차 인터뷰를 시작했다. (생략...)
원문: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86352.html
2018년 JTBC 뉴스룸 인터뷰[편집]
[인터뷰] 다시 달리는 '지하철 1호선'…김민기의 '요즘 생각'[편집]
7-80년대 저항문화를 상징하는 노래이지요. 아침이슬. 그 후로도 한국사회 주요 변혁기마다 불렸던 이 광장의 노래를 직접 만들고 또 부른 목소리의 주인공. 극단 '학전' 대표인 김민기 씨를 오늘(13일) 모셨습니다. 한국 뮤지컬을 대표하는 '지하철 1호선'의 연출가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방송에서 이렇게 좀 뵙기가 힘든 얼굴인데, 오늘 < 뉴스룸 문화초대석 >에 특별히 나와주셨습니다. 그동안 듣지 못했던 새로운 얘기들이 오늘 많이 나올 것 같습니다. (생략...)
원문: http://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aspx?news_id=NB11696123
가수로서의 행보[편집]
1960년대[편집]
- 1966년 고등학교 입학 선물로 기타를 선물받았고, 독학으로 기타를 익히며 음악에 재능을 보였다.
- 1969년 서울대학교 회화과 재학 시절 고교 동창이자 대학 동창인 김영세와 '도비두(도깨비두마리)'라는 포크 밴드를 결성하여 음악활동 겸 아르바이트를 시작하였다.
- 김민기가 대학을 입학하던 1969년은 박정희 전대통령의 삼선개헌안의 통과가 이루어지며, 대한민국 정치사의 큰 변혁이 이루어지고 있던 때이다. 정치사와 관련하여 당시 대중음악계 역시 사회 변혁에 영향을 받아 저항적 노래의 동태가 시작되고 있었다. 동시에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통기타 신드롬이 일었고, 김민기는 그러한 문화 변혁의 선두자격 인물로 손꼽히고 있다.
1970년대[편집]
- 1970년 김민기가 활동하던 YWCA의 포크동아리 '청개구리'에서 김민기의 음악적 동반자인 양희은을 처음 만났다.
- 1971년 대학교를 휴학하고 <아침 이슬>, <가을 편지>, <꽃 피우는 아이>를 작곡하였다. 《김민기 1집 - 아하 누가 그렇게/길 (김민기 노래모음)》을 시작으로 솔로 가수 겸 작곡가의 삶을 시작했다. 앨범 1집 발매부터 가수, 작곡가로서 빛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현재까지도 김민기의 앨범은 대중음악계의 기념비적인 앨범이라 찬사받고 있다. 김민기는 정치적 행보를 밝히지 않는 가수였지만, 그의 노래는 1970년 정치사에 맞물려 그의 음악 행보는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누렸다. 현실 인식을 담백하게 담아 낸 김민기의 노래는 당시 통기타세대, 저항세대로 불리었던 젊은 세대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고, 동시에 억압과 감시 대상이 되었다.
- 1972년 앨범 발표 이듬 해 서울대학교 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서 노래 부르기를 지도하다가 동대문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유신 정권 시절 김민기의 노래들이 유신 저항 운동에서 불리기 시작하면서 보안대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김민기의 앨범 1집 노래인 <꽃 피우는 아이>, <아침 이슬>이 금지되며 1집 앨범이 전량 압수되었다. 그러나 <아침 이슬>은 70-80년대에 저항문화를 상징하는 노래로 자리매김하였다. (지금까지도, 한국 정치사에 맞물려 변혁적인 사건 때마다 김민기의 노래가 불리고 있다.
- 1972년 양희은과 함께 <백구>, <새벽길>, <작은 연못> 등 한국 통기타 음악계의 걸작 앨범을 발매한다. 당시 젊은 세대의 혁명적 낭만주의의 표상으로 떠올랐다.
- 1973년 김지하가 희곡을 쓴 연극 《금관의 예수》의 전국 순회 공연에 참여했다.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노래 `금관의 예수`를 작곡했다.
- 1974년 소리굿 《아구》의 극본을 썼다.
- 1975년 당국에 의해 그의 노래 `아침이슬`이 금지곡이 됐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장석주는 “금지곡들은 분명한 금지사유가 명시됐지만 이 노래에는 아무런 금지사유가 명시되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의 상징이다”라고 말했다.[11]
- 1978년 노래굿 <공장의 불빛>을 작사, 작곡하여 테이프로 발매하였다. 정권의 제대와 감시의 대상이었던 김민기는 '언더그라운드'에서 불법 인디 카세트 테잎을 발매한다. (1970년대의 시대적 배경은 동일방직 노조 탄압 사건, 전태일 분신 사건 등 공장산업의 발달로 인한 '노동자'의 급증과 이에 따른 사회적 저항의 맥락이 전제하였다.)
- <상록수>: 가수 양희은이 1979년 1월 20일 <거치른 들판에 푸르른 솔잎처럼> 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발표하여 널리 알려졌다. (김민기 버전 <상록수>: youtu.be/KsaNs_hLpSk)
1980년대[편집]
- 1984년 <공장의 불빛> 이후 활동이 금지되어 소작농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문승현, 김창남, 김광석, 김보성 등 대학 노래패 출신의 사람들이 김민기를 중점으로 모여 음반을 제작한다. 진보적인 성향의 포함된 곡은 검열 하에 발매될 수 없었다. 세상에 나온 곡은 <갈 수 없는 고향>, <그루터기>, <내 눈길 닿는 곳>,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일요일이 다 가는 소리> 등이 있다. 이 음반은 당시 1970년 통기타 문화의 젊은 세대들이 1980년에 접어들며 더욱 활발해진 대학 운동권에게 큰 지지를 얻었다. 이 음반의 타이틀이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다. 시민항쟁의 사회적 분위기와 맞물려 이 앨범 이후 발매된 안치환의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는 약 70만 장을 판매라는 대중적인 열화를 맞이하였다.
- 군사정권 당시 음반 발매 및 음악 활동을 재제 받았지만, 노태우 정권 시절 남북 공연단 교류 행사의 공연단 구성을 부탁받아 엔딩곡으로 쓰일 <철망 앞에서>를 작곡하였다.
- <늙은 군인의 노래>는 군인의 넋두리로 이루어진 가사로, 김민기가 군 생활 시절 정년 퇴임을 앞둔 선임을 위하여 작곡한 곡이다. 군 내에서 급속히 노래가 퍼져나가 국방부에서 '군 사기 저하'로 노래를 금지시켰다. 이후 소위 운동권의 가요라고 불리며 저항세대들의 교과서적 노래가 되었다. JTBC 뉴스룸 인터뷰에서 김민기는 "1980년 광주 민주화 항쟁 당시 군에서 금지되어있던 이 곡을 진압군이 노래를 부르며 지나가는 모습이 뉴스에 슬쩍 지나갔다. 그런데 바로 다음 장면이 시위대가 저걸 투사의 노래로 불렀다. 두 장면이 오버랩되면서 노래라는 것이 참 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1990년대[편집]
- 1990년 한겨레 신문사와 공동으로 음반과 공연, 노래 모음집을 한 데 모은 <겨레의 노래> 사업을 지휘하였다. 김민기는 활동 금지 이후 음악 및 음반 발매 지휘만을 하였지만, <겨레의 노래>에서 부른 <아침 이슬>을 김민기가 직접 노래하였다.
- 1991년 학전에서 중국 조선족 창작 가곡, 동요를 모은 음반을 제작한다. 다양한 중국 교포들의 예술을 국민에게 선보여 민족적 정서의 고취를 위함으로 기획되었다.
- 1993년, 김민기가 직접 노래를 부른 <김민기 1.2.3.4> 음반을 발매하였다.
- LA올림픽에서 순위에 들지 못한 선수들의 비극과 경쟁사회의 그림자를 담은 MBC 다큐의 테마곡 <봉우리>를 작사, 작곡하였다. 올림픽의 빛과 그림자라는 다큐멘터리의 주제를 당시 작가였던 송지나 작가에게 조언하였고, 송지나 작가는 테마곡 작곡을 부탁하였다.
소속[편집]
- 극단 학전 대표
각주[편집]
- ↑ 《김민기 - < Past Life of 김민기> | YES24 채널예스》.
- ↑ 아침이슬, 그 사람. 한겨레. 기사등록 2015년 4월 3일. 기사수정 2015년 4월 4일.
- ↑ “데뷔 50주년 조용필, 인연을 통해 본 음악인생”. 2018년 4월 9일. 2018년 5월 7일에 확인함.
- ↑ 가나 다 라 마 한국음악/한국음악/한국의_서양음악가/대중음악가/김민기, 《글로벌 세계 대백과》
- ↑ l 대학로 소극장의 전설 ‘학전’, 내년 33살 생일에 문 닫는다. 경향신문. 입력 2023년 11월 9일.
- ↑ l 방은진 "'학전' 김민기 대표 적극 치료 중…김광석 벽체는 남기길" ㅡN현장. 뉴스1. 송고 2023년 12월 5일. 수정 2023년 12월 5일.
- ↑ l 뉴스1 PICK ㅡ33년 여정 마무리한 '학전'…현판 철거식. 뉴스1. 송고 2024년 4월 1일.
- ↑ 가나 다 1991년 유니세프 국제어린이음악제 한국예선대회, KBS 창작동요대회, 노래는 내친구 연말결선대회, 1992년 유니세프 국제어린이음악제 한국예선대회, 1993년 제11회 MBC 창작동요제에 출장하였다. 김민기 음반에 참여한 때에는 서울세륜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 ↑ 서울관악초등학교 재학 당시에 조선일보 소년소녀합창단에서 활동했고, 1989년 KBS 전국어린이동요대회 연말결선대회, 1990년 제8회 MBC 창작동요제, KBS 창작동요대회, 1991년 KBS 창작동요대회에 출장하였다. 김민기 음반에 참여한 때에는 중학교 2학년이었다.
- ↑ 1991년 유니세프 국제어린이음악제 한국예선대회, KBS 창작동요대회, 1992년 유니세프 국제어린이음악제 한국예선대회에 출장하였다. 김창완의 음악 활동에도 참여하였고, 김민기 음반에 참여한 때에는 서울강덕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 ↑ 붉은 잉크로 쓰인 신화, 김민기와 '아침이슬' - 《오마이뉴스》 2007년 3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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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편집]
- 《김민기》김창남 씀 (한울) (1986년)
김민기(가수)
최근 수정 시각: 2024-05-06 21:03:55
33편집토론역사
분류 김민기(가수)
김민기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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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기
金敏基 | Kim Min-ghi
출생
1951년 3월 31일 (73세)
전라북도 익산군 함열면
(現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함열읍)[2]
국적
대한민국
학력
서울재동국민학교 (졸업)
경기중학교 (졸업)
경기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 미술학사)
병역
제12보병사단 병장 만기 전역
데뷔
1971년 《김민기 1집》
가족
배우자 이미영, 슬하 2남
종교
무종교
직업
가수(은퇴), 작곡가, 뮤지컬 제작자, 극단 학전 대표
수상
백상예술대상 음악상 '개똥이'
한국평론가 협회 음악극 부문 연극상
서울연극제 극본상, 특별상 《지하철 1호선》
한국연극협회 '98 우수공연 5' 단체상, 번안상 《의형제》
제35회 동아 연극상 작품상 《의형제》
제6회 한국 뮤지컬 대상 특별상
제37회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분 대상 및 연출상 《의형제》
파라다이스상 문화예술부문
괴테 메달
제5회 더 뮤지컬 어워즈 공로상
제10회 한국대중음악상 공로상
2018년 대중문화예술상 문화훈장 은관
1. 개요2. 생애
2.1. 출생2.2. 가수가 되기까지2.3. 순탄치 못했던 생활2.4.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다3. 잠적 이후4. 작품 목록5. 이야깃거리
5.1. 인간관계
1. 개요[편집]
20대 시절
30대 시절
50대 시절
현재
대한민국의 싱어송라이터, 뮤지컬 연출가, 극단 학전 대표.
2. 생애[편집]
2.1. 출생[편집]
1951년 3월 31일 전라북도 익산군 함열면(現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함열읍)에서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의사였는데, 6.25 전쟁 중 북으로 퇴각하던 조선인민군에 의해 살해당해 산파였던 어머니 혼자 자식들을 키워야 했다고 한다. 휴전 후 가족들과 서울특별시로 이주했고, 서울재동국민학교와 경기중학교,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에 입학했다.
2.2. 가수가 되기까지[편집]
대학교 동문인 김영세와 함께 결성한 2인조 밴드 '도비두'
이미 중학교 시절에 미술에 뜻을 두고 동아리 활동을 하고 있었지만, 자신보다 일찍 서울대학교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있던 셋째 누나의 영향을 받아 우쿨렐레나 기타 등을 독학으로 익히면서 음악에서도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미술과 음악 모두 포기하기 싫었는지, 대학에 입학한 뒤 고교/대학 동창인 김영세[3]와 도깨비 두 마리의 약자인 '도비두'라는 포크 밴드를 결성해 본격적으로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음악을 시작하면서 미대 수업은 안중에 없게 되었고, 1학년 첫 학기부터 학사경고를 받았다. 그 때문에 2학기 때 휴학한 뒤 1970년에 초기 대표곡인 아침 이슬과 가을편지(고은 작사), 꽃 피우는 아이 등을 작곡했고, 양희은과도 YWCA의 포크 동아리 '청개구리'에서 만나 공동 작업을 시작했다. 이듬해에는 시인 김지하와도 만나 현실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 시작했고, 솔로 1집을 발표하면서 싱어송라이터로 두각을 나타냈다. 당시 한국 대학생 통기타 문화에서 중요한 인물이었고, 김민기가 발굴하고 프로듀싱한 포크 뮤지션도 있다. 양희은 외에는 현경과 영애가 유명하다.
하지만 이 초기 시절부터 음악 활동은 그리 순탄치 않았는데, 1972년에는 서울대학교 문리대의 신입생 환영회 때 자작곡을 포함한 민중가요를 가르치다가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 때 가르쳤던 꽃 피우는 아이가 금지곡으로 지정되면서, 음반 활동에도 타격을 받기 시작했다.
1973년 초에는 김지하의 희곡 '금관의 예수'의 극음악을 작곡해 무대 공연 경험을 쌓기 시작했고, 1974년 4월에는 소리굿 아구의 대본을 쓴 뒤 작곡가 이종구가 곡을 붙여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공연했다. 이 소리굿은 공연윤리위원회의 제재를 받고 상연 금지 처분을 당했지만,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체포 위협을 무릅쓰고 재공연하는 등 화제를 모았다.
1974년 10월에는 카투사로 입대해 군 복무를 시작했으나 1975년 초 유신 반대 운동에서 김민기의 노래들이 불렸다는 것이 문제가 되어 보안대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고, 아침 이슬이 금지곡으로 지정됨과 동시에 솔로 1집도 판매 금지 조치를 받았다. 이 결정은 1987년 6월 항쟁 이전까지 지속되었고, 이후 전두환 집권기까지 공식적으로 발매된 김민기의 앨범은 전무했다.
보안대 조사가 끝난 뒤에는 영창 살이를 한 뒤 최전방 부대로 재배치되었는데, 경기고등학교 선배였던 소속 연대 수색중대장의 부탁을 받고 중대가를 작곡하기도 했다. 1977년 5월에 전역한 뒤에도 공연이나 음반 발매 등 공적인 활동에 제재를 받게 되자 당시 서울대학교 미대 학장이었던 조각가 김세중의 도움으로 학사 학위와 중등교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졸업할 수 있었다.
2.3. 순탄치 못했던 생활[편집]
김민기는 음악의 꿈이 좌절된 후 고향으로 내려가 농업 운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졸업 이후에도 미술 활동이나 교편을 잡지 않은 채 막노동이나 공장 취업 등으로 생계를 꾸리면서 양희은의 음반 '거치른 들판의 푸르른 솔잎처럼'에 들어갈 노래들을 작곡해 주었다.[4] 하지만 음반 발매 때는 작곡자로서 가명을 사용했음에도 수록곡 중 '늙은 군인의 노래'가 군부와 장교들의 비위를 거슬렀다는 이유로 또 금지곡 판정과 음반 판금 조치를 받았다. 이 시기의 공장 노동자 생활이 뒤이어 나오는 '공장의 불빛' 프로젝트의 토대가 된다.[5]
이렇게 되자 다른 민중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제도권 음악계의 도움 없이 비밀리에 작곡과 연주 활동을 진행했는데, 1978년에는 개신교 계열 시민단체인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의 후원을 받아 노래극 공장의 불빛을 제작했다. 이 노래극은 당시 대학 노래패들의 노래와 연주로 송창식의 집에서 몰래 녹음되었고, 녹음 직후 카세트테이프로 천 세트 가량 복사되어 각 대학가로 은밀하게 보급되었다. 참고로 김민기와 송창식은 당시부터 각별한 사이였는데, 송창식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고문 당한 뒤 가수 생활이 끝날 각오를 하고 김민기에게 자신의 녹음 스튜디오를 빌려주었던 것.[6] 대담하게도 자신의 이름을 대놓고 내걸고 행한 작업이었는데, 당연히 경찰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지만 별 처벌 없이 풀려났다. 당시 김민기는 분명히 요주의 인물로 찍혀 있었지만, 높으신 분들은 그 동안 자신들이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공개적으로 탄압하다가 국내외에서 많은 비난을 받은 것 때문인지 김민기만은 일부러 건드리지 않고, 활동 금지만 시키되 조용히 방치하고 넘어가자는 암묵적 합의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공장의 불빛'을 만든 뒤에는 비공식 활동마저 힘들게 되었고, 결국 음악 활동을 일시적으로 중단한 뒤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하지만 김민기를 받아준 농가에서 정기적으로 김민기의 행적을 경찰서에 보고해야 했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민폐를 끼치게 되었고, 멀지 않은 김제로 옮겨가 계속 농사를 지었다. 이 무렵에 천리길을 썼다.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암살된 뒤인 1979년 12월에는 문화체육관에서 열린 유아원 기금 마련 자선 콘서트를 익명으로 기획하고 직접 출연도 하면서 일시적으로 음악 활동을 재개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두환을 비롯한 하나회 세력들이 12.12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잡게 되자 다시 농사를 지으며 대외 활동을 삼갔는데, 1981년 5월에는 국풍81 개최를 앞두고 정부에서 자신을 회유하려고 하자 농사일이 바쁘다면서 끝까지 참가를 거절했다.[7] 대신 틈틈이 찾아와 농사를 도와주던 전라북도 각지의 연극패와 노래패들과 동학농민운동을 다룬 마당극 '1876년에서 1894년까지'를 만들어 전주에서 근대사 세미나와 함께 공연하기도 했다.
같은 해에는 김제에서 경기도 연천군의 전곡으로 옮겨가 참깨 농사를 시작했는데, 이 때 비료 회사에서 사익을 챙기기 위해 규정량보다 많은 양의 비료를 권장량으로 속여 판 것을 알고는 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해 배상금을 받기도 했다. 이후에도 민통선 이북의 논에서 벼농사를 지으며 청년회를 조직해 농산물 직거래에 나서기도 하는 등, 구체적인 사회 운동에도 참가하기 시작했다.
1983년에는 2년 전 비공식 발표했던 마당극 '1876년에서 1894년까지'가 대한민국연극제 참가 작품으로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상연되었는데, 극단 연우무대 대표 오종우를 각본가로 기재하고 자신은 익명으로 연출을 맡았다. 이 때까지도 김민기는 주로 농사일에 전념하고 있었는데, 같은 해 12월에 전곡의 집이 화재로 전소되었다. 때마침 9년 전 소리굿 아구를 같이 공연했던 김석만이 김민기를 찾아와 공연 활동을 다시 재개하자고 설득했고, 결국 농부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돌아와 김석만, 오종우와 함께 어린이 뮤지컬을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공연윤리심의위원회에서 김민기가 참가한다는 것을 알아채면서 수포로 돌아갔고, 1984년에는 서울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를 비롯한 대학들에서 활동하던 노래패들의 노래를 모아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라는 음반을 제작했다.[8] 하지만 이 음반도 공윤위에서 김민기의 노래를 모두 삭제하라고 지시했고, 발매 뒤에도 어른의 사정으로 발매는 되었지만 판매가 거의 안되는 초라한 신세를 겪었다.
1985년에 뮤지컬 사무실 직원으로 일하던 이미영과 결혼했고, 1987년에는 6월 항쟁으로 본격적인 민주화 열풍이 불자 6년 전 충청남도 보령시의 탄광에서 잠시 광부 생활을 했을 때의 경험을 살려 탄광촌 아이들을 다룬 노래극 '아빠 얼굴 예쁘네요'를 만들었다. 하지만 아직 건재하던 공윤위의 꼬장 때문에 여러 대목의 가사를 고쳐서 출반해야 했다. 공윤위와의 마찰은 같은 해 12월에 노래일기 '엄마, 우리 엄마'와 훗날 록 오페라로 리메이크하게 되는 노래극 '개똥이'의 노래를 모은 음반을 낼 때도 똑같이 벌어졌다.
1989년에는 농촌 운동 경험을 살려 장일순, 박재일, 김지하, 최해성 등과 함께 생태운동 단체인 '한살림 모임'으로 시작한 한살림소비자생활협동조합에서 초대 사무국장을 역임했다.[9] 이듬해에는 한겨레에서 발족시킨 '겨레의 노래 사업단'에서 그 동안 군사정권의 탄압 등으로 가창이 금지되어 있던 대한민국과 해외 동포들의 노래를 엮은 음반 '겨레의 노래'를 제작했고, 음반 발매 기념으로 순회 공연을 하면서 오랜만에 아침 이슬을 공개적으로 불러 화제가 되었다.
2.4.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다[편집]
2007년, 뮤지컬 지하철 1호선으로 괴테 메달을 수상하는 김민기. 한국인으로는 3번째이다.
1991년에는 독일의 극작가 폴커 루트비히 각본/비르거 하이만 작곡의 록 뮤지컬인 '지하철 1호선'의 한국어 번안과 연출을 담당했는데, 이 뮤지컬은 같은 해 김민기 자신이 사비를 들여 대학로에 개관한 학전 극장에서 공연되기 시작해 2008년까지 무려 18년 동안이나 상설 공연되었다. 심지어 2001년에는 독일과 중국, 일본에서 해외 순회 공연도 진행했고, 이 공로로 2007년에 독일문화원에서 수여하는 괴테 메달을 받아 한국인으로서는 윤이상과 백남준 이래 세 번째 수상자가 되었다.
1994년에는 학전 극장을 상주 공연장으로 하는 극단 학전을 창단했고, 지하철 1호선 외에 록 오페라 '개똥이'의 작사/작곡/연출과 록 뮤지컬 '모스키토', 뮤지컬 '의형제'의 번안/연출을 담당했다. 다만 극단과 극장 운영에 따른 재정난으로 인해 한참을 고생해야 했고, 이것을 타개하기 위해 1993년에 오랜만에 솔로 2집을 발매해 음악 활동을 재개했다. 다만 솔로 4집까지 낸 뒤에는 [10] 뮤지컬 등 공연예술 분야의 활동에만 주력하는 것으로 보인다.
2001년에는 1970년부터 1984년까지 작곡된 김민기의 대표곡 아홉 곡을 김동성이 관현악으로 편곡한 앨범이 발매되었고, 발매와 동시에 '클래식 김민기'라는 타이틀로 임헌정 지휘의 부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공연해 화제가 되었다. 2004년에는 공장의 불빛이 정재일과 이적, 이소은, 전인권, 이지영, 이승열 등 후배 음악인들에 의해 리메이크되었고, 1978년의 오리지널 카세트 테이프 복각본과 합쳐 두 장의 CD로 재발매되었다. 이 음반들은 그와 초기에 듀엣 활동을 했던 이노디자인 대표 김영세가 앨범 디자인을 맡았다.
3. 잠적 이후[편집]
1991년 이후에는 공식 석상에 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극단 학전의 연출자로만 묵묵히 일할뿐, 언론사의 쏟아지는 인터뷰 요청이나 각종 공연 섭외도 모두 거절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사람들이 아침 이슬의 김민기로만 나를 기억하는걸 원하지 않는다고 이유를 밝혔다. 즉 자신은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세상은 여전히 과거의 한순간만을 기억하면서 화석화된 김민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라고.
그러던 그가 정말 오랜만에[11] 자신의 삶에 대한 인터뷰에 응했다. 다음은 한겨레와의 인터뷰 기사. 두번째
더불어 6월 항쟁의 마지막인 7월 7일 서울시청 광장에서의 이한열 열사 노제를 보러 갔다고 한다. 그 당시 백만 군중이 다함께 아침 이슬을 부르는 것을 듣고는 '아, 이 노래는 더 이상 나만의 노래가 아니구나'하고 느끼면서 이후 공식석상에서 '아침 이슬'을 부르지 않는다고 한다.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노래나 음악극 외에도 순수한 서정미가 돋보이는 노래들도 많이 작곡해 운동권이 아닌 일반 애호가들에게도 보편적으로 어필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사회적 소외자에 대한 시각을 유지하는 모습을 보이며, 사람에 대한 연민을 그린 곡인 아름다운 사람외에 친구와 마음 터놓고 이야기하듯 털털한 어조로 부르는 '봉우리', 순수한 동경과 열정을 담담하게 표현한 '날개만 있다면'등의 노래도 유명하다.
음악적 활동이 생각보다 빨리 끊긴지라 요즘은 김민기가 낯선 음악가 취급을 받기도 하는데, 그런 사람들은 1970~1980년대를 살아보지 못했거나 국내 가요의 역사를 수박 겉 핥기식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국내 대중음악계에서 형식적인 면(연주, 편곡)에서 혁명을 가져온게 록과 흑인음악을 도입한 신중현이라면, 내용적인 면(노랫말, 감성, 메시지)에서 혁명을 가져온 것이 김민기이다.[12]
대구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DJ 겸 음악평론가인 권오성은 김민기에 대하여 "대한민국 모던 포크가 한대수에서 시작됐다면, 대한민국적인 정서가 담긴 포크의 시작은 김민기다"는 평가를 했다. 덧붙여서 김민기는 음악이 무언지를 아는 뮤지션이며, 가사에서 보여 주는 인간에 대한 통찰이 압권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권오성은 김민기를 굉장히 좋아한다고 한다.
2018년 9월부터 지하철 1호선의 재공연을 시작한다고 한다. 워낙에 인기가 많던 뮤지컬이다보니 재공연 결정이 뜨자마자 관련 기사가 올라오는가하면, 배우의 면접을 위해 서류 심사를 시작한지 2주만에 1000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지원하기도 했다. 자세한 사정은 지하철 1호선 문서의 재공연 문단을 참조하자.
2018년 9월 13일자 JTBC 뉴스룸에 출연했다. 지하철 1호선과 김민기 자신의 근황, 아침 이슬의 탄생 비화와 세월호 참사 때의 비화를 짤막하게 전해주고 갔다. 그가 TV 방송 인터뷰를 승낙하여 출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023년 12월, 소극장 학전의 폐관 소식이 나왔다. 2024년 3월 15일자로 폐관이 결정되었으며, 사유는 만성적인 재정난과 더불어 김민기의 암 진단으로 인한 투병 때문이다.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고 하며, 학전의 폐관 2주 전에 학전 출신 인물들이 다시 뭉쳐 프로젝트 릴레이 공연을 할 예정이다.#
2024년 4월 21일부터 5월 5일까지 SBS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라는 다큐멘터리가 방송되었다. https://programs.sbs.co.kr/culture/hakjeon/main
4. 작품 목록[편집]
김민기의 작품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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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야깃거리[편집]
대한민국 진보진영 관련 문서
노래를 작곡할 때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즉석에서 작곡하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상록수, 친구, 기지촌, 주여, 이제는 여기에가 그렇게 작곡된 노래들이며, 이는 김민기의 지인에 의해 밝혀진 내용이므로 아직 밝혀지지 않는 즉석곡이 얼마나 더 있을지 모른다.
정치적 행보를 밝히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당시의 운동권 예술가들은 현재까지 그 성향을 이어가서 진보적 정치 성향을 드러내거나, 또는 전향하여 보수적 정치 성향을 드러내든지 해서 자신의 정치 성향을 보여주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하지만 정작 그 중심에 서있는 김민기 본인은 자신의 정치 성향에 대해 전혀 밝히지 않고 있다. 공식 석상에 나오기를 꺼리는 것과 더불어 김민기의 오랜 특징으로 꼽힌다. 한편으로는 극단화되는 정치 지형 속에서 점차 정치 성향을 드러냈던 유명인들이 내로남불 논란에 시달리는 일이 잦아지며, 김민기의 이러한 정치적 침묵은 긍정적인 재조명을 받고 있다.
2016년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한국의 노벨문학상 후보로 잠시 언론이 뜨거워지기도 했다. 같이 언급된 것은 일본의 하루키 작가이며, 어떤 기사는 한국의 밥 딜런으로 한대수를 언급하기도 했다. 관련기사
윤이상, 백남준과 더불어 국내의 3번째 괴테 메달 수상자이다. 수상 작품은 뮤지컬 지하철 1호선.
김민기가 창단한 극단인 학전으로부터 배출된 배우들이 꽤 유명하다. '학전 독수리 오형제'로 널리 알려진 김윤석, 황정민, 설경구, 조승우, 장현성 등 모두 대학로의 학전을 한 번씩 거쳐간 인물들이다. 그 외에도 이정은, 배성우, 배해선, 김희원, 안내상, 김원해, 방은진, 나윤선[13] 등 열거 할 수 없이 많은 이들이 학전을 거쳐갔다. 노래로 유명한 학전 출신 가수는 김광석, 유재하[14], 김민기 본인 등이 있다.[15][16]
김광석추모사업회의 회장이다. 김광석 다시부르기 프로젝트도 그의 소관이라고. 생전에 김광석은 김민기 덕에 대학로의 스타가 될 수 있었고, 김민기 또한 그의 등장으로 학전을 유지할 수 있었으니 서로가 은인인 셈. 김광석 관련 사업을 생전 그의 멘토였던 김민기가 맡는 것에 이의를 품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현재 김광석 다시부르기 프로젝트로 약 4억 3000만원이 모였고, 혹여 가능하다면 이를 통해 2018년이나 혹은 그 다음 해에 김광석의 이름을 딴 장학 재단을 만들겠다고 김민기가 직접 언급했다. 분명 김광석의 노래라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었을텐데, 왜 그러지 못했는지는 하단 '인간관계' 문단의 김광석 항목 참조.
휘파람을 잘 부른다. 1971년 김민기 첫 앨범에 수록된 연주곡 '눈길' 의 휘파람 반주도 본인이 직접 불렀고, 22년 뒤 녹음한 그사이와 천리길의 휘파람 반주도 본인이 직접 불렀다.
자신의 목소리가 낮은 것을 단점으로 여기는 듯하다. JTBC 뉴스룸의 인터뷰에 등장했을 때, 자신의 노래를 좋아한다는 손석희에게 자신은 목소리가 낮아 좋은 노래를 부를 수 없다고 대답했다. 김민기의 노래인 봉우리, 친구, 가을편지 등이 낮고 나긋한 목소리로 사람들의 호응을 얻었던 것을 생각하면 의외인 점이다.
김민기의 팬 사이트 격으로 김민기 마이너 갤러리가 개설되었다. 김민기 마이너 갤러리
아침이슬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운동사에 있어서 절대 빼놓을 수 없다. 그 중심에는 늘 그의 노래 아침이슬이 있었다. 그의 노래 아침이슬을 애국가로 선정해야한다는 이들이 많을 정도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서 부른 노래다. 그의 노래는 대한민국 떼창의 원조라 할 수 있다. 그의 노래는 대학생들과 청년들을 하나로 묶고 민주주의를 만드는 기폭제가 되었다.
5.1. 인간관계[편집]
양희은
양희은이 김민기의 재동초등학교 1년 후배. 아침 이슬을 양희은에게 건넴으로써 양희은의 히트적인 데뷔에 도움을 주었다. 이외에도 양희은의 많은 히트곡들[17]을 작곡하여 양희은이 70년대의 일약 스타로 도약하는 것에 크게 공헌했다. 사실상 지금의 양희은을 만든 것이 김민기라고 말하는 것도 과하지 않다. 양희은의 동생 연극배우 양희경과도 친분이 있다고 한다.
한대수
'행복의나라 2013' 뮤비에서 한대수가 자신과 전인권, 김민기를 '녹음불가 3형제'로 칭하고 있다.
세 사람 모두 이제는 나이가 들어, 현역에서 은퇴하여 더 이상 음반 녹음이 힘들다는 뜻.
김민기와는 절친한 관계. 한대수와 김민기 모두 대한민국 포크 음악을 발전시키는데에 큰 기여를 했으며, 음악이 메시지를 띠고 있는 것도 공통점이다. 실제로 1971년 김민기의 앨범에 한대수의 음악 '바람과 나' 가 실리기도 했고, 한대수도 2013년에 부른 '행복의 나라' 에서 '이제 나이 들어서 (음반을) 녹음할 수 없는 사람들' 로 김민기와 전인권을 뽑았다. 이를 통해 전인권과의 커넥션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김영세
김민기의 대학시절, 김민기가 만든 2인조 밴드 '도비두' 의 멤버였던 인물. 김민기와는 절친한 관계라고 한다. 현재는 산업 디자이너로 이노디자인의 사장을 역임하고 있다.
김지하
김민기의 인터뷰에서, 김민기 본인이 직잡 김지하를 '우리말의 생동성을 일깨워준 형'이라고 언급했다. 애초에 김민기는 그가 가수가 되는 과정에서 김지하의 '금관의 예수' 에 쓰일 음악을 만들었기 때문에, 김지하가 자신의 인생의 갈림길에 있어서 중요한 존재였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성향과는 명확하게 선을 긋고 있다. 김지하가 본인의 정치적 색을 뚜렷하게 보일 때 김민기는 더 이상 그를 다시 만나지도 연락하지도 않는다고 한다. 그의 정치적 행보에 실망과 과거의 정이 교차하는 듯 김민기는 김지하와의 관계를 이렇게 표현했다.
“예전에도 문화운동 쪽에서는 김지하 옆에 내 이름이 늘 따라붙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내가 꼭 하는 말이 있었다. 내가 김지하한테 무한한 고마움을 가지는 건, 내게 우리말의 생동성을 처음 깨우쳐준 선배라는 점. 문자에 갇혀 있지 않고 살아 있는 말의 생동성. 그게 판소리하고도 통하는 건데… 그래서 내가 학전 배우들한테도 유난히 강조했던 게, 배우는 ‘모국어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라는 점이었다. 그 점에 있어선 여전히 고맙게 생각해. 하지만 난 그 양반의 사상적인, 정치적인 입장에는 전혀… 그건 나와 무관한 일이고 영향을 준 바도 없어. 최근 몇 년 동안 그 양반이 취한 행동에 대해서도 난 뭐 코멘트 할 게 없지. 그건 그 양반 생각이고.”
한겨레 인터뷰#
김광석
김광석이 처음 데뷔를 하게 된 것이 김민기의 극단 '학전' 의 배우로서였다. 처음에 김광석이 김민기 앞에 왔을 때는 그를 받아주지 않았지만, 학전이 빚을 떠안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를 불렀는데, 의외로 큰 히트를 거두었다고 한다. 땡볕 아래 사람들이 모두 학전 앞에서 줄을 서고 있었다고 할 정도. 김민기는 그를 보고 '싱어송라이터들은 대개 자신들의 노래만 진창 부르려고 하는데, 그는 다른 이들의 좋은 노래도 부르려고 노력했다. 그것이 그의 좋은 점이었다' 라며 그를 칭찬했다. 김광석 사후, 김광석 추모사업의 회장을 맡았다. 김광석 추모사업 중 하나였던 '김광석 다시부르기' 콘서트로 인하여 학전에 사람들이 쏠리니, 밖의 대형 극장으로 콘서트를 옮겼다. 한 기자가 '오는 돈도 마다하는 것 아니냐' 라고 물어보니, "나는 물건을 만드는 사람이지, 돈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 라고 일언했다.
송창식
공장의 불빛을 만들 때도 송창식의 개인 녹음실에서 송창식이 직접 녹음해주었고, 김민기 앨범 1에 수록된 송창식 작곡의 '내나라내겨레', 송창식이 부른 김민기 작곡의 이 세상 어딘가에 등, 김민기와 굉장히 많은 인연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둘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뉴스, 기사는 없지만 굉장히 친했던 듯. 사실 자칫 발각되면 함께 연행될 수 있었던 공장의 불빛의 녹음을 도와주었다는 것 자체가 어지간히 믿는 사이가 아니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양희은이 무릎팍도사에 나와서 이야기한 바에 따르면 송창식은 김민기에 대해 이야기하길 "아마 김민기가 세상에 나왔다면 나는 없었을 거다"라고 말했다고... 반면에 김민기는 송창식을 형님으로 칭하면서 대인이시며 자신에 대한 송창식의 평가에 매우 쑥스러워하는 인터뷰가 있다.한수진의 선데이클릭
전인권
전인권은 김민기가 프로듀싱한 겨레의 노래 음반에 참여해 '이등병의 편지'를 불렀다. 당시 곡 해석을 둘러싸고 김민기와 의견이 달랐다고 한다. 전인권에게 김민기는 우상이자 컴플렉스고 대한민국에 둘도 없는 천재다. 관련 기사.
전인권이 필로폰 복용 혐의로 형사재판을 받을때 김민기가 증인으로 출석해 전인권에 관해 증언한 바 있다.관련글 관련기사 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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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국무총리인 정운찬에게 부인될 사람(서울대 미대 동문)을 소개해주었다고 한다 관련기사 관련기사
조용필
음악평론가 강헌의 주선으로 조용필과 방배동 근처에서 만나 술을 마신 적이 있는데, 조용필이 노래방 기기로 아침이슬을 불렀다고 한다. 당시 만남에 대해 강헌이 과장된 어법으로 흥미진진하게 얘기한바 있다. '김민기와 조용필의 만남' - 강헌 조용필이 아무래도 김민기보다 늦은 시기에 활동한데다가 주요 음반이 현대가요이기 때문에 김민기보다 젊을 것 같지만, 알고보면 김민기가 조용필보다 1년 후배이다.
설경구
설경구는 무명시절 지하철1호선에 출연하면서 연기경력을 쌓았고, 당시 연출자였던 김민기를 은인이라 생각한다고 한다. 설경구 말고도 황정민, 김윤석, 이종혁 등이 학전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했다고 한다. 관련기사 관련기사
조영남
조영남과는 젊었을 때부터 친한 사이로 술을 같이 자주 마셨다고 한다. 관련기사
조영남과 쎄시봉 멤버들이 김민기의 환갑잔치를 해주었다고 하며, 이와 관련해 조영남이 무릎팍도사에 출연했을때 TV 출연이 손에 꼽히는 김민기가 무려 공중파 방송에서 전화연결로 깜짝 출연한 적이 있다.관련기사 관련기사 관련기사
최성원
들국화의 최성원에게도 김민기는 우상이자 존경의 대상이다. 심지어 들국화 1집 이후 매니저 김진성씨와 함께 했던 이유가 바로 김민기의 음반을 제작했기 때문이라고... 더나아가 음악적 사상이나 철학에도 영향을 미친 듯 하다. 자신의 정치적 견해나 사회적 의식은 백기완 선생과 김민기 형으로 끝났다고 할 정도...관련 기사.
[1] 2020년 제56회부터 연극부문이 부활될 예정.[2] 1979년에 함열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95년에 이리시와 익산군이 통합하면서 익산시가 출범하였다.[3]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산업디자이너로 현 이노디자인 대표. 무한도전 디자이너 특집에도 나왔던 그분 맞다. MYK의 부친이기도 하다.[4] 다만 이 앨범의 수록곡의 사용은 김민기가 양희은에게 허락하지 않았지만, 양희은이 노래 가사와 제목을 임의로 바꿔서 내면서 그 이후로 두 사람의 사이가 멀어졌다는 증언이 있다.[5] 당시 김민기는 완구 공장에서 미국 수출용 OEM 제품을 생산하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영어 라벨을 붙이면서도 영어를 몰라서 고생하는 공장 여성 노동자들에게 퇴근 후에 알파벳을 가르치다가 '의식화 교육'한다고 찍혀서 계속 연이어 경찰과 중앙정보부의 감시에 시달리게 된다.[6] 송창식은 김민기와의 오랜 인연으로 나중에 김민기의 프로젝트 앨범에도 참여한다.[7] 이때 허문도가 김민기를 회유하기 위해 흰 종이를 한 장 내밀며, "원하는 액수를 쓰라" 라고 하기도 했다. 물론 김민기는 거절.[8] 이 음반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노래패 '노찾사'가 시작된다.[9] 한살림은 2023년 전국적으로 조합원만 84만명이 넘는 국내 최대 규모의 생활협동조합이다. 조합원들이 친환경-유기농산물를 생산해서 전국에 있는 직영매장에서 직거래로 판매하고 있다. 이렇게 거대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선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나, 해외 언론과 유기농업계에서는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세계적으로 협동조합 운동에선 최고의 성과로 주목받고 있다.[10] 사실상 검열로 난도질되었던 기존 곡들을 다시 녹음해 내놓은 쪽에 가깝다.[11] 그의 삶을 다룬 책 <김민기>(김창남 저/한울)에 음악평론가 강헌과의 인터뷰가 실려있지만 일간지와는 최초라 한다.[12] 그리고 이 두가지 흐름이 다시 만나는 지점이 바로 1985년 나온 들국화 1집이다. 대중음악평론가들이 괜히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같은 순위에서 들국화 1집을 최상위권에 꼽히는 게 아니다.[13] 재즈가수 데뷔 이전에 '지하철 1호선'으로 데뷔. 가수로서 성공적인 데뷔 이후 나윤선은 영어가사 위주의 앨범에도 한두곡씩 한국어 노래를 꼭 수록했는데, 3집 앨범에 김민기의 아름다운 사람, 5집 앨범에 '세노야'를 불러 수록했다[14] 김민기가 유재하로 하여금 '가요계의 블루칩 같은 존재' 라고 언급한 적도 있다.[15] 실제로 학전을 창단한 뒤로도 김민기는 자신의 음악 활동을 이어갔으며, 그 과정에서 나온 것이 1993년 김민기 전집 1~4이다.[16] 1993년 김민기 전집 1~4을 발매했을 때에는 주요 일간지가 발매 소식을 비중있게 소개하다 못 해 발매일에는 아예 1면 머리기사로 싣기까지 했다.[17] 아침 이슬, 상록수 등
사진=조선DB |
이 학전(學田)이 33년 만에, 그것도 생일날 문을 닫았다.
지난 3월 14일 오후 서울 종로구 학전블루 소극장. 객석 167석을 다 채운 관객들이 상기된 표정으로 폐관 기념공연을 지켜봤다.
폐관 전 오후 7시 무대는 약 2시간 반 동안 김민기의 곡만으로 채웠다. 박학기, 노찾사, 권병호, 권진원, 황정민, 알리, 정동하, 한영애 등이 ‘아침이슬’ ‘상록수’ ‘백구’ ‘가을편지’ 등을 불렀다. 학전의 주인장 김민기는 항암치료로 릴레이 공연에 자리하지 못했다. 대신 병원에서 콘서트 영상을 전달받았다고 한다.
김민기는 한때 학전 그린과 블루란 이름의 소극장 두 곳과 극단 학전의 대표를 맡기도 했다. 늘 “소극장은 어머니 자궁 같은 존재요, 농사로 치면 못자리 농사”라며 “소극장이 문화인을 키워낸다”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이 자부심이 만성 적자라는 긴 세월의 풍상(風霜)을 견디게 했다.
설경구, 황정민, 김윤석, 조승우, 이정은, 장현성 등이 학전이 낳은 배우다. 또 고(故) 김광석(학전에서 콘서트 횟수가 1000회에 이른다)을 비롯해 들국화, 안치환, 이소라, 장필순, 윤도현, 성시경, 유리상자, 장기하 등의 가수가 학전이란 모에서 싹을 틔워 알곡 가득한 벼로 자랐다.
그렇게 학전을 거쳐간 공연자들은 배우 329명, 연주자 91명, 제작진 359명, 더하면 780명에 이른다. 1994년 학전 초연(初演) 뮤지컬인 〈지하철 1호선〉의 누적 공연 수가 4257회에 이르고 누적 관객수는 73만 명에 달한다.
학전은 IMF로 당시 대학로 소극장이 대부분 개점 휴업의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도 “소극장이 보여줄 수 있는 소프트웨어의 질을 업그레이드시키겠다”고 목소리를 높였었다. 그럼에도 수입보다 지출이 많아 주머니는 늘 비었다. 그러나 폐관을 앞둔 ‘학전, 어게인 콘서트’로 빚은 해소된 것으로 전해진다. 공연은 지난 2월 28일부터 20회로 이어져, 총 3000명 관객이 함께했다. 출연진 전원이 출연료를 받지 않았다.
이날 마지막 공연에서 김민기의 곡 ‘공장의 불빛’과 ‘아름다운 사람’을 노래한 권진원은 “신기하게도 선생이 쓴 노래엔 사랑이란 가사가 없다. 노랫말엔 없지만 그 누구보다도 세상과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하신 분”이라고 고백했다.
‘작은 연못’을 부른 배우 황정민은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의 첫 회 관객이 20~30명, 쫄딱 망했다. 김광석 형이 공연하면 내가 나가서 티켓도 팔고 관객분들한테 자리도 안내하곤 했다. 나의 20대는 여기서 먹고 자고 웃고 울었다”고 했다.
마지막 콘서트를 기획한 박학기는 “학전은 저희가 첫발을 내디딘 꿈의 장소였다. 거기서 뿌리를 내리고 나무로 성장한 것 같다”며 “우리 모두는 학전에 마음의 빚이 있다”고 말했다.
아쉬움 속에 막을 내린 학전은 당분간 ‘동숭동 1-79번지’의 이름으로 돌아간다. 지난해 12월 문화체육관광부가 학전 공간을 인수·재정비해 정체성을 계승하겠다고 밝혔었다. 다만 김민기의 의사를 존중해 학전이란 이름은 쓰지 않기로 했다.⊙
암투병 김민기, 학전 마지막 공연 관람‥설경구 눈물(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 | |
2024-04-22 00:19:4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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