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08

100년 역사 속 ‘주체’로 우뚝 선 재일조선인

100년 역사 속 ‘주체’로 우뚝 선 재일조선인



문화책과 생각
100년 역사 속 ‘주체’로 우뚝 선 재일조선인
19세기 이후 재일조선인 역사
한국 근현대사 전문가 ‘재조명’

1945년까지 강제징용 67만명
해방 뒤엔 동화 아니면 배제

피해자보다 주체로서 ‘눈길’
“반동 상황 바로잡으려 집필”
기자최원형수정 2019-10-19 11:23펼침

이들을 맞이하러 간 사람 700여명이 대부분 조선인이었다. 재일한인역사자료관 제공



후추형무소에서 출옥해 환영을 받고 있는 김천해(맨 왼쪽). 당시 김천해와 함께 거물급 일본인 공산주의자들이 함께 석방됐는데

재일조선인-역사, 그 너머의 역사
미즈노 나오키·문경수 지음, 한승동 옮김/삼천리·1만5000원

일본 제국주의가 패전한 1945년 8월 시점에, 일본에는 200만~210만명가량의 조선인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부분 조선으로 돌아갈 생각을 했겠지만 상황은 여의치 못했다. 한반도는 이미 미-소 패권 다툼의 무대가 되어 좌우 분열 등 혼란상이 극에 달한 상태였다. 재일조선인에 대한 미국 점령군(GHQ)의 정책이라곤 ‘계획송환’, 곧 그저 “귀환을 장려하고 원조하는 게 전부”였다. 그나마 귀환자가 지니고 갈 수 있는 돈은 1000엔, 갖고 갈 수 있는 동산은 250파운드로 제한했다. 그 결과 ‘계획송환’을 통한 귀환자는 8만3000여명에 그쳤다. 식민지 시기를 거치며 일본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조선인 다수는 그대로 일본에 눌러앉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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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사 전문가인 미즈노 나오키 전 교토대 교수와 문경수 리쓰메이칸대 교수가 함께 쓴 <재일조선인>은 재일조선인의 역사를 총체적이면서도 간결하게 서술한 책이다. 재일조선인을 “메이지 시대 이래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와 일정 기간 거주하게 된 사람들”로 본다면, 그 역사는 이제 100년이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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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패전한 뒤인 1945년 10월

메이지 유신 이후 토목공사 등이 늘어나면서 조선인 노동자들이 일본으로 건너가기 시작했고, 1910년 한일 강제병합 뒤로는 그 규모가 크게 늘었다. 식민지 경제의 붕괴가 주된 배경이었다. 이들은 일본에서 주로 고되고(기쓰이), 더럽고(기타나이), 위험한(기켄) 노동을 도맡았고, 집단 거주로 조선인 정체성을 유지했다. 같은 ‘제국 신민’이지만, 일제 당국은 일본인의 호적과 조선인의 호적을 분리해 관리했다. ‘특고경찰’의 감시 대상에 “조선인으로서 배일사상을 가진 자”가 포함되는 등 조선인은 늘 감시와 경계의 대상이었다. 일제 당국은 ‘협화회’란 것을 만들어 조선인들의 일상생활을 통제했고 조선어를 쓰지 못하게 하는 등 일본화를 강제했다. 전쟁 시기 강제징용·강제노동으로 재일조선인의 규모는 훌쩍 뛰었다. 1945년까지 동원을 통해 일본으로 온 조선인은 67만명가량으로 추정된다. 사할린(1만6000명), 남양군도(6000명)에도 강제동원됐다. 이들은 탄광, 광산 등 위험한 노동 현장에 붙들려가, 직장을 옮길 수도, 가족에게 송금을 할 수도 없었다.

해방 직후는 재일조선인이 거쳐야 했던 중요한 역사적 변곡점 가운데 하나였다. ‘계획송환’이 끝나가던 1946년 12월, 점령군은 “일본에 계속 거주하는 재일조선인은 일본의 모든 국내법과 규칙에 따라야 한다”고 밝혔다. 재일조선인이 법 형식상 ‘일본 국민’으로서 일본의 사법적 통제 아래 있다고 규정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1945년 선거법을 개정하면서 일본 호적을 갖지 못한 옛 식민지 출신자들의 참정권을 정지시켰다. 1947년 5월 제정한 ‘외국인등록령’은 재일조선인을 강제 퇴거까지 할 수 있는 외국인 관리 대상에 포함시켰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4월에는 법무부 민사국 ‘통달’의 형식으로 옛 식민지 출신자들의 일본 국적을 일률적으로 박탈한다는 내용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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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1949년 9월 조련을 해체시켰다. 삼천리 제공

이에 대해 지은이들은 “참정권 정지와 외등령 제정은 전후 새로운 국민 형성 과정에서 ‘국민’의 의의를 축소하고, 재일조선인을 민주주의나 인권 같은 전후적 가치가 미치지 못하는 사각지대로 몰아냈다”고 지적한다. 일본 사회에서 살고 있지만, 일본 사회에 완전히 동화되지 않으면 외국인으로서 차별과 배제를 겪어야 하는 모순적인 체제가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이런 ‘동화주의’는, “재일 한국인은 일본인으로 동화될 운명”(1964~66년 외무부 장관 이동원)이라고 한 한국 정부의 ‘기민정책’(재일동포를 버려두는 정책)과 짝을 이뤘다.

그렇지만 100년 역사 속에서 재일조선인들이 늘 외부의 불가항력에 휩쓸려 다니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이들이 주체적으로 벌였던 활동들에 주목한 것은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다. 일제강점기 때에도 조선인들은 자신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한 싸움에 늘 적극적이었고, 해방 뒤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을 만들고 일본공산당과 연대하며 정치적 주체로 발돋움했다. 조련 최고고문이던 김천해는 일본공산당 중앙위원 7인에 포함되기도 했다. 다만 전지구적 냉전과 남북이 갈라진 조국의 현실 속에서 ‘국민’과 ‘민족’을 절대 기준으로 삼은 재일조선인 운동은 갈수록 분열과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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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9월 일본의 무장 경찰대가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 중앙총본부를 에워싸고 있다. 해방 뒤 미국 점령군과 일본 당국은 재일조선인들의 정치적 움직임을 극도로 경계했으며

지은이는 이에 따른 새로운 변화상에도 주목했다. 1970년 열아홉살 청년이 재일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채용을 취소한 히타치를 상대로 소송을 벌였다. 재일조선인에 대한 차별을 드러낸 이 싸움을 응원한 것은 국적이나 민족을 내세우는 기존 정치조직이 아닌 이른바 ‘시민운동’ 세력이었다. 조선인 집단 거주 지역이 많은 가와사키에서는 지방 공무원의 국적을 제한하는 조항을 철폐하는 등 재일조선인 관련 문제를 ‘주민’ 또는 ‘시민’의 관점으로 보려는 움직임이 태동했고, 이는 전국으로 확산됐다. 일본 사회가 다민족 사회로 변해가면서, 재일조선인 운동에서도 과거 남북 이데올로기나 일본 거주 이력 등에서 벗어나 “일본 사회에서 참여나 책임을 자각하고 지역 주민과 공생·공존하겠다는 원칙”이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다고 한다.

문제는 최악으로 치닫는 한일 관계다. 경쟁적으로 우경화하는 양국의 정권은 ‘국가를 넘어선 새로운 동아시아’에서 갈수록 멀어지고 있다. 인터넷에서는 민족 감정을 앞세운 혐오 발언이 만연하고, 급기야 거리에서조차 “죽여”를 외치는 소리가 나온다. 지은이는 “최근 ‘반동’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이런 상황은 일본 사회가 재일조선인을 이해하고 인식하는 수준이 얼마나 천박한지 말해준다”며, 이를 바로잡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밝혔다. 과연 한국 사회는 재일조선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자문해보게 된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최원형 기자
한겨레에서 책을 읽고 소개하는 기사를 주로 씁니다. 남의집이불속이란 밴드에선 기타를 칩니다. 먹는 걸 좋아하지만 안타깝게도 성인병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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