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호와 박유하 - 뉴스M
김동호와 박유하
말의 정당성은 삶의 정당성에서 나온다
김기대 2015.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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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작가 버지니아 울프는 어느 날 평화 운동가로 부터 3기니를 후원해달라는 편지를 받는다. 기니는 지금 1파운드에 해당하는 돈으로 1.3달러 정도 되니 큰 돈이 아니지만 당시 기준으로 지금보다는 더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울프는 고민끝에 1기니만을 보내면서 장문의 편지를 함께 보낸다. 그 편지에서 울프는 당신이 하는 일은 옳지만 나는 여자대학의 증축과 여성의 직업 마련에 각각 1기니를 기부하겠다고 말한다. 남성들이 전쟁으로 돌진하고 있는 시대에 여성들이 이 파괴적 참상을 막으려면, 경제적 자립과 정신적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므로 여성교육이 전쟁 방지에는 더 시급한 일이라는 이유에서다.
요즘말로 하면 울프는 까칠하다. 당시로도 3기니는 아주 거액은 아니었을 것이다. 게다가 후원편지를 받을 정도면 이미 작가로서 명망도 얻었을 시점이다. '그냥 주고 말지'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울프는 자기의 생각을 관철하고야 만다. 1938년 출간된 버지니아 울프의 <3>의 내용이다.3>
김동호 목사가 사고를 쳤다. 그의 세월호 소감이 SNS에 퍼지면서 비난이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그의 게시물을 보자.
노란 리본을 단 사람들이 눈에 많이 띈다.
특히 정치인들.정치인들이라고 다 진심이 아닌 것은 아니겠지만 별로 진실성은 없어 보인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길 거리에 서서 기도하던 바리새인 같은 느낌이 든다.
내게도 그런 마음이 있다는 걸 내가 안다. 그래서 나는 선뜻 노란 리본을 달지 못하고 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리본을 다는 건 비겁한거라는 생각이 들어 나는 쉽게 리본을 달지 못하고 있다.
막내 아들이 광화문에서 열리는 세월호 추도예배에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난 함께 가지 못했다. 추도예배 하나 가 놓고 나를 변명할까봐 그것이 싫었다.
혹시 우리 막내 아들 녀석 내가 추도예배 같이 안 갔다고 세월호 사건에 대하여 생각도, 의식도 없는 애비라고 오해하지는 않았을까 조금은 걱정된다. 그건 아닌데....
노란 리본을 달면 종북 좌파로 몰리기 십상이다. 높은 뜻 정의교회 오대식 목사의 페이스 북을 보았다. 큰 일 할 목사가 노란 리본 달고 다니면 안 된다고 누가 충고했다는... 개의치 않고 당당하게 노란 리본을 단 오대식 목사가 나는 좋다.
그래도 난 선뜻 노란 리본을 달지 못하고 있다. 큰 일 하고 싶어서도 아니고 종북좌파로 몰릴까봐도 아니다.
누군 노란 리본 달았다고 뭐라하고.
누군 노란 리본 안 달았다고 뭐라하고.
누가 뭐란다고 노란 리본 안 달 수도 없지만,
누가 뭐란다고 노란 리본 달 수도 없지 않은가?
노란 리본 달았다고 뭐라 그래도 안 되고,
노란 리본 안 달았다고 뭐라 그래도 안 된다.
노란 리본 달았다고 다 바리새인도 아니고,
노란 리본 안 달았다고 모두 다 보수 꼴통도 아니다.
우리 높은 뜻 교회에는 노란 리본 단 목사도 있고,
나처럼 노란 리본 안 단, 아니 못 단 목사도 있다.
노란 리본 단 사람도 세월호가 마음 아프고,
노란 리본 못 단 사람도 세월호가 마음 아프다.
너는 네 식대로 아파하고,
그냥 나는 내 식대로 좀 아파 하자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누구나 개성있게 슬픔을 표현할 수 있다. 슬퍼하지 않겠다는 마음도 아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비난 속에서 김목사는 이 시대의 완고함을 위해 기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슬픔의 표현 양식까지 획일화 되어야 하는 시대를 아파하고 쓰린 마음을 달랠지도 모른다. 한편에서는 ‘그의 발언이 어때서’ 라고 반문하며 세월호 추모 분위기 때문에 자신의 의사를 묻어 버려야하는 현실을 안타까워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도 '반전 평화'라는 의미있는 일에 대체적으로 동의하면서도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려운 자기만의 의견을 확실히 밝혔고, 이유를 밝힌 내용이 지금도 명문으로 남아 있는데 김동호목사의 개성은 왜 그리 비난받아야 하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면 울프와 김목사의 차이는 무엇인가?
김목사는 이 글을 통해 자신만의 슬픔 표현 방법을 이해해달라고, 우리 사회는 획일화된 사회가 아니지 않냐고 반문한다. 문제는 그가 노란 리본을 달지 않음으로 인해 보여주고자 한 것이 없다는 점이다. 울프는 명분있는 일에 겨우 1기니를 쓰며서 나머지 2기니는그가 생각하기에 전쟁 방지를 위한 더 명분있다고 보여지는 일에 썼다. 그런데 김동호 목사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노란 리본을 거부했다.
그는 광화문에 나가지도 않았으며 세월호 같은 사고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시민운동에도 함께 하지 않았고 진상규명을 위해 단식하지 않았다. 그가 동조 단식을 하면서 노란 리본을 달지 않았다면 누구도 그를 비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의 개성을 내세웠기 때문에 비난받아 마땅하다. 아무 대안없이 '나대로'를 드러내는 일은 의미가 없다.
이렇게 '자기만의 방법'을 내세우는 사람이 목회는 그렇게 해오지 않았다. 그는 늘 대세를 따랐으며 '교세'확장에 힘써 왔다. 한국의 목사들이 걸어온 그 길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와서 왜 갑자기 '나대로'를? 그것이 설명되지 않기에 그의 발언은 경솔했다. 노란 리본은 연대의 표현인데 거기서 개성만을 발견한 것은 뜬금없다.
▲ 김동호와 박유하
그를 보면서 <제국의 위안부> (뿌리와 이파리,2013년)의 저자 박유하 교수(세종대)가 생각났다. <제국의 위안부>를 통하여 박교수는 일제하 종군 위안부가 민간업자 소관이었으며 위안부와 군인들 사이에 '감정적 교류'까지 있었다는 말로 시민운동권의 분노를 샀다. 결국 비난하는 사람들과 맞소송까지 갔다.
이 책을 읽지 않아 정확히 모르겠지만 장정일이 <시사인>에 쓴 서평에 따르면 "일본군이 강제 연행을 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이 상황을 양산한 구조를 만든 것이 일본군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박유하는 썼다고 한다. 시중의 비난처럼 박교수가 일본 정부의 보상책임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으므로 그녀를 향한 감정적 비난에 지나친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장정일의 말처럼 "사태를 하나로 묶고 파악하는 이런 총체적 관점은, 군 위안부를 착취한 일본군의 다양한 사례를 제시하려는 지은이의 강박 때문에 휘발되고 말았다".
학술적으로 박교수의 주장은 사료에 근거한 객관성을 갖는다. 오래전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김성종 원작, 김종학 연출, 최재성 채시라 주연)에도 민간업자가 위안부 모집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당시 드라마를 보고 상당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렇다면 박유하 교수는 비난받을 일이 없나? 전쟁하에서 민간업자라는 것이 정부의 강압없는 순수한 기업일 수 없다. 박유하 교수도 물론 그리 썼다지만 객관적 사료 위에 주관적 견해를 담아야 했다.
포스트 모던 시대는 학문이 객관성과 자료만으로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는 시대다. 박유하는 모던적인 객관성을 주장하면서 위안부 할머니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다. 1970년대 유행하던 서울에 무작정 상경한 처녀들이 술집에 팔려가는 소재의 영화들도 그녀들을 산업화 과정의 희생양으로 묘사하는데 박유하의 논지는 '학문적 검증'이라는 '강박' 때문에 정말 말하고 싶은 것을 놓쳐버린 듯하다.
김동호 목사 역시 자신만의 개성이라는 포스트모던식 의사 표현을 하면서 아픈 자들과 함께 하는 목회를 보여주지 못했다.
옳다고 해서 정당성을 인정받는 것은 아니다. 말과 글의 정당성은 삶의 정당성과 함께 가야 할 뿐 아니라 시대의 정서와도 함께 가야 한다. 슬퍼하는 자들과 연대하는 글과 말이 필요한 시대다.
김기대 , 편집장 / <뉴스 M>
김동호와 박유하
말의 정당성은 삶의 정당성에서 나온다
김기대 2015.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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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작가 버지니아 울프는 어느 날 평화 운동가로 부터 3기니를 후원해달라는 편지를 받는다. 기니는 지금 1파운드에 해당하는 돈으로 1.3달러 정도 되니 큰 돈이 아니지만 당시 기준으로 지금보다는 더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울프는 고민끝에 1기니만을 보내면서 장문의 편지를 함께 보낸다. 그 편지에서 울프는 당신이 하는 일은 옳지만 나는 여자대학의 증축과 여성의 직업 마련에 각각 1기니를 기부하겠다고 말한다. 남성들이 전쟁으로 돌진하고 있는 시대에 여성들이 이 파괴적 참상을 막으려면, 경제적 자립과 정신적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므로 여성교육이 전쟁 방지에는 더 시급한 일이라는 이유에서다.
요즘말로 하면 울프는 까칠하다. 당시로도 3기니는 아주 거액은 아니었을 것이다. 게다가 후원편지를 받을 정도면 이미 작가로서 명망도 얻었을 시점이다. '그냥 주고 말지'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울프는 자기의 생각을 관철하고야 만다. 1938년 출간된 버지니아 울프의 <3>의 내용이다.3>
김동호 목사가 사고를 쳤다. 그의 세월호 소감이 SNS에 퍼지면서 비난이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그의 게시물을 보자.
노란 리본을 단 사람들이 눈에 많이 띈다.
특히 정치인들.정치인들이라고 다 진심이 아닌 것은 아니겠지만 별로 진실성은 없어 보인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길 거리에 서서 기도하던 바리새인 같은 느낌이 든다.
내게도 그런 마음이 있다는 걸 내가 안다. 그래서 나는 선뜻 노란 리본을 달지 못하고 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리본을 다는 건 비겁한거라는 생각이 들어 나는 쉽게 리본을 달지 못하고 있다.
막내 아들이 광화문에서 열리는 세월호 추도예배에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난 함께 가지 못했다. 추도예배 하나 가 놓고 나를 변명할까봐 그것이 싫었다.
혹시 우리 막내 아들 녀석 내가 추도예배 같이 안 갔다고 세월호 사건에 대하여 생각도, 의식도 없는 애비라고 오해하지는 않았을까 조금은 걱정된다. 그건 아닌데....
노란 리본을 달면 종북 좌파로 몰리기 십상이다. 높은 뜻 정의교회 오대식 목사의 페이스 북을 보았다. 큰 일 할 목사가 노란 리본 달고 다니면 안 된다고 누가 충고했다는... 개의치 않고 당당하게 노란 리본을 단 오대식 목사가 나는 좋다.
그래도 난 선뜻 노란 리본을 달지 못하고 있다. 큰 일 하고 싶어서도 아니고 종북좌파로 몰릴까봐도 아니다.
누군 노란 리본 달았다고 뭐라하고.
누군 노란 리본 안 달았다고 뭐라하고.
누가 뭐란다고 노란 리본 안 달 수도 없지만,
누가 뭐란다고 노란 리본 달 수도 없지 않은가?
노란 리본 달았다고 뭐라 그래도 안 되고,
노란 리본 안 달았다고 뭐라 그래도 안 된다.
노란 리본 달았다고 다 바리새인도 아니고,
노란 리본 안 달았다고 모두 다 보수 꼴통도 아니다.
우리 높은 뜻 교회에는 노란 리본 단 목사도 있고,
나처럼 노란 리본 안 단, 아니 못 단 목사도 있다.
노란 리본 단 사람도 세월호가 마음 아프고,
노란 리본 못 단 사람도 세월호가 마음 아프다.
너는 네 식대로 아파하고,
그냥 나는 내 식대로 좀 아파 하자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누구나 개성있게 슬픔을 표현할 수 있다. 슬퍼하지 않겠다는 마음도 아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비난 속에서 김목사는 이 시대의 완고함을 위해 기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슬픔의 표현 양식까지 획일화 되어야 하는 시대를 아파하고 쓰린 마음을 달랠지도 모른다. 한편에서는 ‘그의 발언이 어때서’ 라고 반문하며 세월호 추모 분위기 때문에 자신의 의사를 묻어 버려야하는 현실을 안타까워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도 '반전 평화'라는 의미있는 일에 대체적으로 동의하면서도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려운 자기만의 의견을 확실히 밝혔고, 이유를 밝힌 내용이 지금도 명문으로 남아 있는데 김동호목사의 개성은 왜 그리 비난받아야 하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면 울프와 김목사의 차이는 무엇인가?
김목사는 이 글을 통해 자신만의 슬픔 표현 방법을 이해해달라고, 우리 사회는 획일화된 사회가 아니지 않냐고 반문한다. 문제는 그가 노란 리본을 달지 않음으로 인해 보여주고자 한 것이 없다는 점이다. 울프는 명분있는 일에 겨우 1기니를 쓰며서 나머지 2기니는그가 생각하기에 전쟁 방지를 위한 더 명분있다고 보여지는 일에 썼다. 그런데 김동호 목사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노란 리본을 거부했다.
그는 광화문에 나가지도 않았으며 세월호 같은 사고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시민운동에도 함께 하지 않았고 진상규명을 위해 단식하지 않았다. 그가 동조 단식을 하면서 노란 리본을 달지 않았다면 누구도 그를 비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의 개성을 내세웠기 때문에 비난받아 마땅하다. 아무 대안없이 '나대로'를 드러내는 일은 의미가 없다.
이렇게 '자기만의 방법'을 내세우는 사람이 목회는 그렇게 해오지 않았다. 그는 늘 대세를 따랐으며 '교세'확장에 힘써 왔다. 한국의 목사들이 걸어온 그 길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와서 왜 갑자기 '나대로'를? 그것이 설명되지 않기에 그의 발언은 경솔했다. 노란 리본은 연대의 표현인데 거기서 개성만을 발견한 것은 뜬금없다.
▲ 김동호와 박유하
그를 보면서 <제국의 위안부> (뿌리와 이파리,2013년)의 저자 박유하 교수(세종대)가 생각났다. <제국의 위안부>를 통하여 박교수는 일제하 종군 위안부가 민간업자 소관이었으며 위안부와 군인들 사이에 '감정적 교류'까지 있었다는 말로 시민운동권의 분노를 샀다. 결국 비난하는 사람들과 맞소송까지 갔다.
이 책을 읽지 않아 정확히 모르겠지만 장정일이 <시사인>에 쓴 서평에 따르면 "일본군이 강제 연행을 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이 상황을 양산한 구조를 만든 것이 일본군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박유하는 썼다고 한다. 시중의 비난처럼 박교수가 일본 정부의 보상책임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으므로 그녀를 향한 감정적 비난에 지나친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장정일의 말처럼 "사태를 하나로 묶고 파악하는 이런 총체적 관점은, 군 위안부를 착취한 일본군의 다양한 사례를 제시하려는 지은이의 강박 때문에 휘발되고 말았다".
학술적으로 박교수의 주장은 사료에 근거한 객관성을 갖는다. 오래전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김성종 원작, 김종학 연출, 최재성 채시라 주연)에도 민간업자가 위안부 모집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당시 드라마를 보고 상당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렇다면 박유하 교수는 비난받을 일이 없나? 전쟁하에서 민간업자라는 것이 정부의 강압없는 순수한 기업일 수 없다. 박유하 교수도 물론 그리 썼다지만 객관적 사료 위에 주관적 견해를 담아야 했다.
포스트 모던 시대는 학문이 객관성과 자료만으로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는 시대다. 박유하는 모던적인 객관성을 주장하면서 위안부 할머니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다. 1970년대 유행하던 서울에 무작정 상경한 처녀들이 술집에 팔려가는 소재의 영화들도 그녀들을 산업화 과정의 희생양으로 묘사하는데 박유하의 논지는 '학문적 검증'이라는 '강박' 때문에 정말 말하고 싶은 것을 놓쳐버린 듯하다.
김동호 목사 역시 자신만의 개성이라는 포스트모던식 의사 표현을 하면서 아픈 자들과 함께 하는 목회를 보여주지 못했다.
옳다고 해서 정당성을 인정받는 것은 아니다. 말과 글의 정당성은 삶의 정당성과 함께 가야 할 뿐 아니라 시대의 정서와도 함께 가야 한다. 슬퍼하는 자들과 연대하는 글과 말이 필요한 시대다.
김기대 , 편집장 / <뉴스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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